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 3.1운동 100주년 기념 연구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박경순 지음 / 굿플러스북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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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조선의 정세는 매우 복잡하고 긴장되게 돌아갔다. 일제는 사회주의 소련의 위력이 강화되고 피압박 민중들의 혁명투쟁이 확대 발전되고 있는데 놀라, 그것을 말살하려고 갖은 악행을 다 벌였다. 특히 세계적 공황으로 인한 심각한 내부 정치/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를 식민지 조선에 대한 착취와 수탈의 강화, 대륙 침략의 길에서 찾았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6


 박경순은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민족주의자 중심의 1920년대 항일투쟁의 한계를 지적한다. 저자의 관점에 의하면 이들 민족주의자들은 비록 1920년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등의 성과를 낼 수 있었지만, 지속적인 투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소련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경신참변(庚申慘變) 등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대적인 탄압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노선을 내걸고 항일무장투쟁에 떨쳐나섰던 민족주의운동세력들 역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조선 민중의 혁명적 힘을 믿지 못하고, 민중 위에 군림하는 자산가계급의 군대에 불과했다. 민족해방운동을 승리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올바른 지도사상도 없었으며, 주동적 투쟁방략도 갖추지 못했다. 적극적인 투쟁을 회피하였고, 특히 조선 민중들과 깊숙이 결합하여 있지 못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5


 지속적으로 항쟁을 이끌어갈 지도자의 부재, 구체적인 전술과 전략의 부재, 현지인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유지 실패가 저자가 바라보는 1920년대 항일투쟁의 실패 이유다. 대부분의 항일 세력들이 소멸한 이후,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을 저자는 김일성(金日成, 1912~1994)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어떤 점에서 달랐는가? 저자에 의하면 이는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한계점 극복으로 요약된다.


 참다운 민족해방의 길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대중투쟁은 그 자체만으로 혁명의 길로 나가지 않는다.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를 이룩하고 민족적 독립과 민중해방의 새 세상을 달성할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올바른 지도이념과 지도노선이 있어야 하고, 혁명 투쟁을 올바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정치적 참모부가 있어야 한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1


 저자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이 단순한 일제에 대한 증오나 미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개혁의 움직임으로 파악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이다. 아비지 김형직(金亨稷, 1894~1926)의 사상이 항일 투쟁의 방향을 설정했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현실적 적용에 대한 고민은 식민지에서의 반(反)제국주의 투쟁방식을 결정짓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상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를 독자적인 신념과 판단에 기초해서 결정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과 실정에 맞게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사대와 교조를 반대하고 어디까지나 자주적 관점, 창조적 태도에 기초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길을 걸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78


 '지원의 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김형직 선생의 혁명사상을 가리킨다. 김형직 선생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획득한 자신의 이상과 염원, 사상과 정신을 지원(志遠) 이라는 두 글자에 담았다... '지원의 사상'은 민중중시사상, 무장투쟁에 관한 사상, 숭고한 혁명정신을 정수로 하고 있다(p39)... '지원의 사상'은 결국 총칼을 들고 민중의 힘, 민족자체의 힘으로 나라의 독립을 달성할 데에 대한 원대한 사상이었으며,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는 이 사상을 계승 발전시켜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사상, 새로운 길을 열어나갔다. 그리고 그 첫 출발점이 바로 타도제국주의 동맹의 결성이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0


 노동계급의 계급적 해방을 민족적 해방에 앞세우고 종주국 노동계급의 투쟁을 식민지 나라의 민족해방보다 중시하는 것은 당시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공인된 노선이었다. 이러한 기존 노선이 갖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를 김성주 학생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또한 러시아와는 달리 낙후한 반봉건국가인 조선과 같은 식민지 나라들에서 무산혁명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역시 중요한 연구주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45


 이러한 사상적 투쟁과 함께 김일성은 농촌혁명화 사업을 통해 대중과의 결합을 보다 공공히한다. 농촌의 여러 마을을 하나로 묶고 결집된 세력을 바탕으로 춘황투쟁(春荒鬪爭), 추수투쟁(秋收鬪爭)을 통해 농민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가면서 만주 지역에서의 지지기반을 다져나갔다.


 무기획득 투쟁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사업도 역시 매우 중시되었다. 이 사업의 핵심 고리는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이었다. 농촌마을들을 혁명화하는 것은 항일무장투쟁의 군중적 토대를 구축하는데서 관건이 되는 핵심 사업이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이 항일무장투쟁은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에 기초해서만 발선해 나갈 수 있다. 민중들의 적극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농촌혁명화사업은 그만큼 중요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34


  박경순의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에서는 만주지역에서의 1930년대 항일투쟁이 급격히 소멸한 시점에 김일성의 독립운동의 의의에 대해 조망한다. 지속적인 투쟁을 위한 사상적 기반 마련과 농촌 지역에 대한 거점 확보를 통한 유격대 활동. 본문에 언급된 내용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투쟁을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다. 김일성이라는 인물에 대한 한국사회의 시선을 생각하면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분명 나름의 의의가 있지만, 동시에 여러 한계점도 생각하게 된다.


 본문에서 저자는 김일성의 투쟁에 여러 의미를 부여하지만, 객관적으로 이전 1920년대의 무장투쟁과는 여러 면에서 소규모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에 큰 장애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과 수십 명에 불과한 병력이 1932년 만주국(滿洲國)을 설립케 한 일본 관동군(關東軍)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까. 이런 점에서 본다면 본문에 언급된 여러 전과는 1937년 보천보 전투(普天堡 戰鬪)에서 드러나듯 영향력면에서 다소 과장되어 보인다.


 김일성부대는 왕덕림과의 교섭을 단념하고 노정을 바꿔 최종 목적지인 왕청지구로 향했다. 왕청지구로 향할 당시 김일성부대에는 18명밖에 남지 않았다. 40명으로 출발했던 김일성부대가 왜 18명밖에 남지 않았을까?(p151)... 김일성은 대오 16명을 이끌고 1933년 2월 요영구를 거쳐 마촌으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소왕청 마촌에 혁명사령부를 정하고 무장투쟁을 중심으로 한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152


 다른 한 편으로,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 연구의 초점이 김일성에 맞춰져 있다는 것또한 한계로 생각된다. 아무리 항일무장세력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1930년대 만주지역에서 항일투쟁은 김일성 등 사회주의 세력밖에는 없었을까? 대략적으로 언급하더라도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의 대한독립군, 양세봉(梁世奉, 1896~1934)의 조선혁명군 또한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활동한 무장투쟁세력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에만 초점을 맞춘 점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보다는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 김일성을 중심으로>가 보다 정확한 내용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 2권을 읽기 전 잠시 연구의 한계점에 정리해 본다.


 김일성 부대는 광대한 지역에서 적에 대한 습격전투를 벌여 적을 소탕하고, 적의 공격을 성과적으로 격퇴했다. 일제가 축소 발표한 자료에 의하더라도 1935년 한 해에만 무려 1,196회의 대소 전투를 벌여 일제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조선인민혁명군 북만원정대는 단순히 전투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전투 못지않게 북만에 살고 있는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가 그들을 의식화 조직화함으로서 민족해방혁명의 대중적 지반을 확대하는 것 역시 중심적인 목표였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66 


 만주지역에서 독립투쟁은 1932년부터 1936년까지 민생단 사건(民生團事件)이라는 대대적인 학살 사건으로 고비를 맞이한다. 이 시기 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밀정으로 몰려 처형되면서 조중 연합은 약화되었다. 이렇게 갈라진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어떻게 다시 극적으로 항일연합전선을 수립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2>에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가 퍼뜨린 민생단침투설은 당과 대중단체, 군대의 모든 책임적 자리를 자파일색으로 갈아치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패권주의와 출세욕에 불을 붙여 주는 인화물질 같은 것이었으며, 그들이 민생단의 이름을 걸고 올리는 천정부지의 숙반실적은 유격구의 혁명역량을 모조리 교살해 치우려는 모략가들에게 끝없는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_ 박경순, <1930년대 이후 항일무장투쟁 연구 1>, p238

3.1운동의 교훈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상층은 더 이상 항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세력으로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계급적 제한성은 일본의 식민지지배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본의 통치 질서를 인정하고 그 틀 안에서 자신들의 협소한 계급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약간의 양보만을 꿈꾸었다. 이러한 계급적 제한성으로 인해 그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개량주의자로 굴러 떨어지거나 일제와 타협하면서 ‘민족적 자치‘를 부르짖는 민족배신자로 전락했다. - P25

길회선 철도부설 반대투쟁은 새세대청년지도자 김성주의 지도하에서 조선민중이 중국 민중들과 함께 빛나는 승리를 이룩한 첫 대규모 반일대중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중국 동북침략의 야망을 실현해보려고 갖은 흉계를 꾸며오던 일제침략자들과 그와 야합한 중국반동군벌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그들을 놀랍게 한 것은 조중 민중의 단결이었다. - P60

조선의 혁명가들은 카륜회의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조직 전개하기 휘한 준비사업을 꾸준히 벌여왔다. 그 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충분하게 갖추어 놓았다. 오랫동안 준비 끝에 항일무장투쟁의 믿음직한 핵심공간들이 튼튼히 꾸려지고, 정치 군사적 경험이 축적되었으며, 대중적 지반이 구축되고, 활동의 중심지대도 마련됐다. 특히 9.18 직후 있었던 대중적인 추수투쟁의 승리로 대중들의 투쟁적 기세도 매우 높아졌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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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하늘·땅·자연·몸에 관한 2천 년의 합리적 지혜
신동원 지음 / 책과함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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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과학문명이 실제로 세계에 기여한 현상은 의학 분야에서만 보이는데,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삼 재배 기술입니다. 인삼은 중국 기록에서 기원 전후 시기부터 약호가 알려진 이래 20세기 이전까지 최고의 건강 상품으로 인정된 약재입니다. 역사시대 이래 인삼은 중국 황제에게 바치던 한국의 가장 중요한 수출품이었습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493/514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과학사를 알기 쉽게 정리한 교양 과학사다. 수천 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한국 과학사를 살펴보면서 저자는 한국 과학사가 외부 특히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반면, 여기에 대응할 정도의 영향을 주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우리의 옛 과학기술 대부분은 다른 나라로부터 받아서 이룩했고, 다른 나라에게 준 건 거의 없었습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끈 <동의보감> 정도가 예외가 될까요? 최근 반도체를 비롯한 정보통신 기술의 성취는 세계 문명 발전에 적잖은 기여를 하고 있죠. 만약 정말로 우리의 옛 과학 기술이 서양에까지 영향을 끼쳤다면, 그것도 지적 혁명을 일으킨 금속활자 인쇄술이었다면 더욱 값진 기여라 할 수 있습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390/514


 그렇지만, 저자가 한국과학사를 일방적인 의존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과학 문명의 영향을 받았지만, 무조건적인 수용 대신 우리의 현실에 맞게 개선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왔다는 점에서 한국과학문명은 독자적인 문명의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중국과 다르다는 인식 속에서 만들어진 한글에서 드러나듯, 한국 과학은 비록 원리를 탐구하고 만들어내는 부문에서는 중국과 서양에 의존했지만, 경험적 사실로부터 개선점을 찾아내어 반영하는 기술 부문에서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기도 한 역사를 발견한다.


 고대국가의 등장 이후 한국의 과학문명은 문자 전통이 이미 확립된 중국의 문자와 그 문자로 기록된 제반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의 문화를 표현해내고, 더 나아가 학술, 문학, 예술,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기존 한국문명의 틀을 넘어 중국을 위주로 한 동아시아문명의 일원으로 자리하면서 비약하게 됩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13/514


 혼천의는 우리 민족이 천 년 이상 만들어 써온 과학기술입니다. 혼천의가 중국에서 유래한 건 맞지만 우리 선조들이 거기에 혼신의 공을 들여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누가 시작했느냐가 아니라, 그것으로 달성한 과학 수준이 중요합니다. 동서양 과학을 접목한 혼천시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97/514


 그런 점에서 한국과학문명은 분명 독자적이었고, 경험적인 요소가 강한 문명이었다. 또한, 자연을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간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관점 은 현대과학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전통과학문명은 오늘날에도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실제적이면서도 경험적인 요소가 강한 과학문명이 유교적 세계관에 종속되었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진다. 정치권력에 의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사회 전반에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고, 정권의 성격에 따라 성쇠가 좌우된 반면, 서양에서는 종교 대신 새로운 계몽 시대의 사상으로 과학이 자리매김했기에 이후 과학혁명, 정치혁명, 산업혁명 등으로 이어져 근대화 시기 이후 동서양의 격차가 크게 확대된 역사는 이러한 아쉬움을 뒷받침한다.


 우주, 자연과 인간세상의 조화라는 생각은 한국 과학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핵심 개념입니다. 한국 문명에는 천문학 외에도 천명사상에 입각해 과학기술이 정치와 깊이 관계 맺은 부분이 있습니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파악해 인간세계 질서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현대 과학문명과 크게 다른 점이지요.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88/514


 이처럼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는 한국과학사 전반을 살펴보고 과학문명사의 의의를 알기쉽게 정리하는 좋은 교양과학서적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토대 위에 이후 <한국의 과학과 문명> 시리즈를 통해 우리의 과학사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한국과학문명의 가치는 세계에 끼친 영향보다는 세계 문명의 수용과 활용, 변형이라는 측면에서 크게 빛을 발합니다. 중국은 오늘날의 서양문명이 그러하듯 엄청나게 커다란 문명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런 문명과 맞닿아 있으면서도 선진 문명에 주눅 들지 않고 한국문명이라는 몸체로 그 문명에 맞서 수천 년 역사를 엮어왔습니다. 천문학, 수학, 의학, 농학, 지리학, 군사기술, 그리고 인쇄술이나 도자기 제작 기술과 같은 수공업 기술, 의식주 관련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는데, 선진 과학기술의 변용와 독창적 발휘가 특징입니다. 중국과학문명을 모방하면서도 독자적으로 건설하고 유지해온 문명이므로 동아시아과학문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과학문명은 더 나아가 세계과학문명의 일원이 되었지요. _ 신동원, <신동원 교수의 한국과학문명사 강의> , p494/514



세종은 중국 달력을 사용하면서도 조선의 하늘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독자적인 역법을 만들어 같이 사용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사실 중국에 대한 정신적인 독립 선언이었습니다(p80)... 조선은 외교용으로는 중국 명나라에서 받아 온 대통력을 계속 썼지만, 실제 예측에는 이렇게 칠정산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날짜와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공식과 풀이가 기록되어 있지 않고, 결과만 밝혀져 있습니다. 서양 수학과는 다른 방법으로 푼 것이 분명한데 계산한 값은 일치합니다 - P82

서양에서는 개념과 원리를 중시하는 기하학을 중심으로 수학이 발달한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문제 풀이식 대수학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수학이 매우 뛰어난 부분이 많으면서도 서양 수학과 같은 정밀한 체계는 갖추지 못한 겁니다. - P105

물론 한의학이 중국에서 유래하고 크게 발전한 건 인정해야겠죠. 하지만 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은 모두 의학이 발전했고, 저마다 자국의 특성에 맞는 의학의 형태로 진화시켰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의학은 동아시아 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국이 나름대로 발전시킨 점에 주목한다면 중국 전통 의학, 한국 전통 의학, 일본 전통 의학, 베트남 전통 의학이라 할 수 있겠죠. 그 가운데 한국 전통 의학을 한의학 韓醫學이라 하는 겁니다. - P286

비숍은 결론적으로 한국인의 잠재성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했습니다.

이러한 많은 작업과 함께 자극적이고 혐오스럽던 서울의 향기는 사라졌다. 위생에 관한 법령이 시행되었고, 집 앞에 쌓인 눈을 모든 식구들이 치우는 것이 의무적일 정도로 한국의 문화 수준은 매우 높아졌다. 그 변화들은 너무 커서, 나는 1894년이었다면 서울의 한 예로서 이 장을 위해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를, 그 특징적인 빈민촌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어떤 행정적인 계기만 주어지면 무서운 자발성을 발휘하는 국민이다. 서울은 한국적인 외양으로 제건되고 있지 절대로 유럽적으로 재건되고 있지는 않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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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9-0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3-09-09 10:21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가을 날 보내세요~ ^^:)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생각대로 실행에 옮긴 철학적 방법론(지식인들, 정치인들, 시인들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선입견을 논박하고 적절한 이론적 해결점을 모색하는 방법)이 몇 십 년 뒤에 하나의 진정한 장르로, 이른바 ‘로고스 소크라티코스logos sokratikos’라는 철학적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철학적 대화라는 장르의 이론적이고 문학적인 수준을 전례 없는 단계로 끌어올리면서 누구도 초월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적인 담론의 본질적인 특징들, 즉 비판적이고 변증적이면서도 실천에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중요시한다는 특징을 고수할 줄 알았다. ‘대화’를 통해 플라톤은 거대한 철학의 무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글의 상호호환성을 강조하는 전략은, 바흐친Mikhail Bakhtin의 문학이론적인 관점에서,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언어들을 철학의 무대 위로 가져옴으로써 하나의 패러디를 구축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 이 언어들의 대체를 목표로 하는 철학적 담론 속에서 이 언어들을 비판하고 전복시키거나 때에 따라서는 다시 채택하고 변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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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9-08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봤습니다. 이 책을 살까말까 하다가 그냥 내려놨네요. 이런 류의 책은 이제 더이상 읽지 않으려구요. 음, 뭐...서양철학사 개설강의 부탁이 들어오면 또 모르겠습니다..ㅎㅎ

겨울호랑이 2023-09-08 10:41   좋아요 0 | URL
yamoo님 말씀처럼 서양철학사 책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고, 또 종류도 많기에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수준이 되면 보다 깊이있는 저서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신의 두께가 어느 정도 되는 그럴듯한 제목의 벽돌책이 출간되면 자연스럽게 손이 가게 되네요. 그러면서 또 새롭게 깨닫고 배우는 면도 있어 저는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
 

이처럼 16~17세기에 사가기록화를 만들어낸 집안은 다른 지역보다 영남에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특히 안동 지역은 기록화 외에도 각종 문헌 자료가 많이 남아 있기로 유명하다. 조상의 손때가 묻은 각종 전적, 편지와 문서 등을 소중히 간직했을 뿐 아니라 사환, 모임, 행사, 여행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록을 남기는 버릇이 강했다.

이상으로 사가기록화의 제작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을 영남 지역의 사족과 이유간 및 홍이상 집안에 한정하여 살펴본 것은 사가기록화 각각의 제작 배경에 이들이 비교적 자주 등장하여 결과적으로 다른 집안보다 비중있게 다룰 만했기 때문이다. 높은 관직에 이르면 관료 사회의 관행에 따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궁중기록화나 관청기록화를 집안에 쉽게 소장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사가기록화를 집안에 남기기 위해서는 기록화의 효용성과 역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일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래서 집안의 전통이나 개인의 교유망 안에서 공유되는 경험이 중요했으며 이를 짚어나가다 보니 특정한 집안과 지역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지방에 비하면, 안동 사족들은 단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지주 계층으로서 안정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였으며 이황을 매개로 학문과 정치적으로 결속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안동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학맥이 생활화된 공동체적 특징을 가진 영남의 사족들은 16세기 이래 사가기록화의 제작 배경에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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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저서를 토대로 그의 철학을 정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그의 철학이 안고 있는 수많은 내부적인 모순과 변화무쌍한 전개를 집필 시기에 따라 다양한 각도에서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을 상당히 경계했던 철학자다. 그가 탐구했던 것은 오히려 아름다움이나 선, 정의, 단일성이나 다양성과 같은 수학적인 개념과 보편적인 언어였다.

플라톤의 철학은 인간의 행위나 사유, 존재의 영역을 높거나 낮은 두 단계로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탄생한 것이 ‘존재와 변화’, ‘하나와 다중’, ‘영원과 시간’, ‘참과 거짓’, ‘학문과 견해’, ‘선과 악’ 같은 대조적인 개념들이다.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이상적이면서 일반적인 삼각형뿐이다. 이상적인 삼각형은 항상 삼각형 자체와 일치하며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변화를 모른다. 아울러 이를 토대로 하는 공식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주관적 의지에 좌우되지 않는다.

묘사와 평가를 내용으로 하는 문장 속에 사용된 표현들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이상적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플라톤이 상대주의와 거리가 먼 의미 체제를 안정적으로 확립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여기서 플라톤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중에 하나가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즉 담론과 지식의 안정성은 이들이 다루는 대상의 안정성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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