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사 1469-1716
존 H. 엘리엇 지음, 김원중 옮김 / 까치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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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6세기 스페인의 성취는 본질적으로 카스티야의 성취였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17세기 스페인의 재난 역시 카스티야의 재난이었다. 오르테카 이 가세트는 합스부르크가 스페인에 대한 비명(碑銘)으로 사용할 수 있을 다음과 같은 글을 씀으로써 이 역설을 가장 명백하게 표현했다.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고,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파괴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8


 존 H. 엘리엇(John Huxtable Elliott, 1930 ~ 2022)의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Imperial Spain>는 15세기 중반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는 공통된 목표를 가졌던 세 왕국 - 카스티야, 아라곤, 포르투갈 - 의 전성기를 배경으로 한다. 포르투갈은 16세기에 일시적으로 스페인(에스파냐)에 병합되고 다시 분리되지만. 위에서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e Ortega y Gasset, 1883~1955)가 언급했듯 스페인 제국 역사의 중심은 카스티야였으며, 시작 또한 여왕 이사벨 1세(Isabel I de Castilla y Aragon, 1451~1504)였다. 제국 스페인의 역사는 이사벨의 선택의 결과였다.


 이사벨이 왕위계승자로서 인정을 받자 그녀의 혼인은 국제적 관심사가 되었다. 그녀의 배우자감으로 세 명의 유력 후보자가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의 샤를 7세의 아들 발루아의 샤를과 결혼하여 전통적인 프랑스-카스티야 동맹을 강화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의 오빠가 원했던 것처럼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의 미래를 서쪽 이웃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그녀는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아들이자 왕위 계승자인 페르난도와 결혼함으로써 후안 2세가 강력하게 책동했던 카스티야-아라곤 간의 통합을 성사시킬 수도 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9


  상업 중심, 지중해 연안의 아라곤과 목축 중심, 대서양 연안의 카스티야는 분명 상이한 조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토양의 카스티야의 전사들을 뒷받침하는 아라곤의 관료제가 없었다면 제국은 유지될 수 없을 터였고 그런 면에서 이들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었다. 


 제국을 창조한 역동성은 거의 전적으로 카스티야에 의해서 제공되었다. 카스티야의 활력과 자신감은 카스티야인들에게 새로운 스페인 제국에서 자연스럽게 지배권을 쥐게 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뒤에는 행정 경험이 풍부하고 외교술과 통치술이 숙달되었던 아라곤 연합왕국이 있었다. 이 점에서 두 연합왕국간의 통합은 상호 보완적인 파트너간의 통합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43


 그렇지만, 오늘날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CF 간의 유명한 엘 클라시코(El Clasico)에서 보듯  과거로부터 치열한 라이벌이었던 두 지역을 하나로 묶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가능했지만, 문화적, 경제적으로는 매우 힘든 일이었고 그 결과 제국은 초기부터 매우 연약한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제국의 구조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철저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그 결과 순수 가톨릭 중심주의는 이전까지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력을 주던 무슬림과 유대인을 축출하는 정책으로 이어지면서 폐쇄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종교재판소의 설치가 무엇보다도 스페인 왕들의 지배영역에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 고안된 종교적 조치이기는 했지만 그것의 중요성이 결코 종교적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신생 스페인의 경우처럼 정치적 통일이 절대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나라에서 신앙의 통일은 카스티야인, 아라곤인, 카탈루냐인을 성(聖) 교회의 궁극적 승리를 보장하는 단일한 목적 속에 하나로 결속하게 하는 대체물로서 작용했다.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117 


 여기에 더해 결혼을 통해 제국을 정치적으로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페르난드의 지나친 반(反)프랑스 움직임과 만나 스페인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그 결과 카스티야와 신대륙은 신성로마제국의 보급창고로 전락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으나, 스페인은 카를 5세의 정복전쟁을 위해 다른 의미에서 식민지가 된 것이었다.


 카를 5세가 엄청난 돈이 드는 외교정책을 추진하고 그 비용을 대기 위해서 부채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카스티야에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국가의 수입원들은 황제의 비용을 대기 위해서 수년 후의 것까지 저당잡혔고, 그중 많은 부분은 국외에서 이루어졌다. 부채에의 의존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데에 한 몫을 했다. 무엇보다도 국왕의 재정정책에서 장기적 전망의 부재는 재원의 헛된 낭비를 의미했고, 그 재원을 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 방법들이 카스티야의 경제 성장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고안한 것으로 보일 정도였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228


 카를 5세( Karl V, 1500~1558)의 뒤를 이은 펠리페 2세(Felipe II de Habsburgo, 1527~1598) 시기 스페인은 오스트리아와 분리된 별도의 제국이 되어 포르투갈을 병합하는 등 전성기를 맞지만, 여전히 독립을 둘러싼 네덜란드와의 전쟁, 대서양에서의 사략(私掠)행위를 둘러싼 잉글랜드와의 대립은 결국 스페인을 외부에서 무너뜨렸고, 스페인 제국 내에서 식민지 경제가 독자적으로 운용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제국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메리카가 새로운 제국정책을 뒷받침하는 재원을 제공하는 동안 그 제국 정책은 11580년 포르투갈의 합병이라고 하는 펠리페의 대성공으로부터 지리적 방향성을 획득했다. 포르투갈의 스페인 제국에의 통합은 펠리페에게 새로운 대서양 해안과 그것을 보호하는 데에 도움을 줄 함대를 제공했고, 아프리카로부터 브리질 그리고 캘리컷으로부터 몰루카 제도에 이르는 제2의 제국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치세 후반기의 제국주의를 가능케 한 것은 새로운 귀금속 유입과 함께 이 포르투갈 영토의 합병이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03


  이처럼 <스페인 제국사 1469-1716>는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정치적 결합으로부터 시작된 스페인의 역사를 잘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척박한 토양과 상대적으로 열등한 산업, 통합되지 않은 지역간의 갈등 등 여러 문제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태어난 국가가 대항해시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극적으로 일어났으나, 결국 태생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 역사 형성에서 중요한 이 시기 역사는 오늘날의 스페인과 라틴 아메리카 이해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일독(一讀)을 권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1576-79년 동안 아메리카가 유럽에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줄어들었다. 광산 채굴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아졌기 때문에 은이 줄어들었고 이민자들을 위한 기회도 줄어들었다.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아메리카로 들어오는 물건도 점점 적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보다 훨씬 심각했던 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 스페인 경제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스페인이 아메리카에 수출해온 주요 품목들이 아메리카 정주자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었다. _ 존 H. 엘리엇, <스페인 제국사 1469-1716>, p332

안달루시아는 귀족이 지배하는 대규모 라티푼디움(Latifundium)이 되어갔고, 이 거대한 새로운 부에 의해서 부유해진 카스티야의 귀족들은 아직 부르주아지가 취약하고 그것도 북쪽 몇몇 도시들에 산재해 있었던 상황에서 거의 무제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되었다. 반면에 발렌시아에서는 국왕이 식민화와 재정주 과정을 보다 면밀하게 감독할 수 있었다. - P25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에는 부유하고 역동적인 도시 과두귀족들이 있었고, 때문에 해외의 상어적 이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곳에는 또한 왕과 신민 간의 관계에서 계약적 개념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은 여러 제도들 속에 효과적으로 실현되고 있었으며 제국을 운영하는 데에 좋은 경험이 되었다. - P30

동시대의 카스티야는 외부적이기보다는 내부적 지향성을 띠고 있었고 교역보다는 전쟁에 경도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카스티야는 목축적이고 유목적인 사회였고, 그런 습관과 태도는 끊임없는 전쟁에 의해서 형성되었다. 레콩키스타는 여러 가지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이교도에 대한 십자군 원정이기도 했지만 약탈을 위한 군사 원정이기도 했고, 또한 사람들의 이주이기도 했다. 레콩키스타의 이 세 가지 측면 모두가 카스티야인들의 생활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 P30

전통적으로 카스티야의 메세타(meseta)는 풍년이 들면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 비스카야 등 일부 지역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고 대개 카스티야로부터 배편으로 식량을 공급받아야 했으며, 아라곤 연합왕국도 안달루시아나 시칠리아로부터 곡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카스티야 역시 외국 곡물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 P128

카를 5세의 유럽 영토들 가운데 치세 초반에 제국을 운영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한 곳은 네덜란드와 이탈리아였다. 그러나 이들 두 영토의 재원이 차례로 고갈되자 카를은 새로운 수입원을 찾아 다른 영토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수 없었다. 1540년에 그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제 나의 스페인 왕국들에 의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 - P221

카탈루냐의 점진적 회복은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전쟁에도 불구하고 근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경제 변화의 전조였다. 이제 반도에서의 경제적 무게 중심이 중심부로부터 주변부로 이동해가고 있었다. 주변부는 과세부담이 중심부보다 덜했고, 경제적 피로도 덜했다.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는 카스티야가 스페인을 만들었다. 이제 17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스페인이 카스티야를 개조시킬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P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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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자립적 근대화를 일본은 부정했다. 그로부터 1세기 이상 지난 지금도 남북한과 일본 사이에 가로 놓인 역사 문제로서 이러한 경험은 여전히 살아있다.

도쿠가와 막번 체제는 그 후의 메이지明治 일본과 비교해도, 또한 동시대의 조선과 비교해도 현저하게 지방분권적인 체제였다. 사람들에게 ‘나라’란 ‘번’을 의미하는 것으로 에도江戶 말기에 이르기까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은 희박했다. 여러 다이묘大名를 통제하는 막부의 권력은 강대했지만, 각 번의 독립성이 높았다. 그에 비해, 조선은 훨씬 중앙집권적이었다.

역사적으로 중화 질서에 근거한 조공 시스템에 편입되어있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중국과는 거리를 두고 중화 질서 밖에 존재하고 있었다.

‘조선의 근대화는 아무래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이대로 놔두게 되면 조선은 청나라?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안전보장에 중대한 위기가 된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배타적 영향력 확보를 목표로 삼게 되었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일본의 안전보장 정책으로 귀결하였다.

한반도 상황에서 보면 다른 얘기가 된다. 조선의 근대화를 통한 자립의 가능성을 망쳐버린 장본인이 다름 아닌 일본이었다. 그런데도 일본은 마치 일본이 없으면 조선이 청나라나 러시아에 지배당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스스로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자국의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구실이 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은 조선의 자립, 근대화의 기회를 박탈했으며 그 자체만으로도 도의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침략행위이다. 게다가 애초에는 구미 열강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하자는 자세를 취해 놓고, 차츰 그 협력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침략이라는 ‘배신’ 행위를 했다.

통계에 따르면 식민지지배기(1912~1939년)의 국내총생산GDP 연평균 증가율은 광공업, 전기 가스 및 건설업에서 각각 9.4퍼센트, 9.2퍼센트였다. 특히, 1930년대에 들어서 증가율이 더 커지고 1939년에는 각각 13.5퍼센트, 14.5퍼센트를 기록했다. 이것은 1960년대의 성장률과 거의 필적할 만한 수치였다. 다만, 이러한 경제 발전에 따라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생활 수준도 그에 비례하여 상승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중국 국내 거점을 전전하다가 최종적으로 충칭重慶을 거점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에서 적지 않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결과적으로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한국의 초대와 평화조약에 서명국으로서의 가능성이 한때나마 논의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존재하고 ‘대일선전’을 포고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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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 어느 사상의 일생
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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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초 자유주의는 크게 네 가지 이념을 기조로 하여 추구되었다. 첫째, 사회의 도덕적/물질적 갈등은 결코 제거될 수 없고, 그저 억제되거나 어쩌면 유익한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 있을 뿐임을 받아들인다. 둘째, 정치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반대한다. 셋째, 사회적 병폐는 치유될 수 있고 인간의 삶은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넷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존재이건 간에, 그들의 삶과 계획을 국가와 사회가 법에 기초해 존중한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서문 中


 에드먼드 포셋 (Edmund Fawcett)의 <자유주의 Liberalism>는 갈등, 권력, 진보, 존중이라는 네 가지 기조를 바탕으로 추구된 사상의 연대기다. 독자들은 본문을 통해 '자유주의'의 역사가 결국은 네 이념 중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대한 해석의 문제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자유주의가 주도적인 사회사상이 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자유주의, 경제적-자본주의' 사상은 자본의 시대(The Age of Capital)을 지나 제국의 시대(The Age of Empire)에 이르러 한계에 이르렀고, 자유주의는 그대로라면 유럽을 떠도는 하나의 유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민주주의와 손을 잡게 된다. 이후 엑슨(Exxon)과 모빌(Mobil)의 합병과도 같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최선은 체제(system)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백가쟁명(百家爭鳴)처럼 펼쳐진다.


 자유주의(1880~1945)는 민주주의와 화해했다. 그 역사적인 타협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알려진 자유주의 관행이 출현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타협은 정치적 선택, 경제적 권력, 윤리적 권위를 수반했다(p43)... 네 가지 지도 이념 - 갈등, 권력에 대한 저항, 진보, 시민적 존중 - 은 자유주의의 익숙한 경쟁적 표어인 "자유", "개인", "권리", "평등"의 근간이자 그것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의 약속은 서구적이거나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좁게 한정되지 않았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45/487


 1880년에 이르러 자유주의자들은 정치, 윤리, 경제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굳건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민주주의와의 타협은 자유주의가 자본주의를 구하기 위해 맞닥뜨린 대가였다. 188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협상의 윤곽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만약 소수가 다수와 몫을 나누어야 한다면, 다수는 소수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51/487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보통선거권과 다수에 의한 지배를 받아들이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한 인련의 흐름 중 하나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가 강조하는 정의로운 사회,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가 주장하는 높은 고용율 유지를 통한 충분한 유효수요(Effective Demand)라면, 


 존 롤스(1921~2002)의 이력은 두 가지 질문을 천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배자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으로 의견이 맞지 않는데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이다. 이 질문들은 롤스의 <정의론>(1971)을 관통하는 두 개의 주제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답으로서 롤스는 "잘 짜인" 혹은 "정의로운" 어떤 사회를 묘사했다. 그것은 바로, 그 사회의 이점을 누림에 있어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시민의 평화를 조건으로 가치 있는 삶의 형태에 관한 심오한 의견 불일치를 수용하는 사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26/487


 케인즈주의자들은 정부가 경제를 부양하고 실업을 저지할 필요가 있을 때 돈을 쓰고 돈을 빌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프리드먼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정부는 통화 안정을 제공하고 내버려둬야 한다. 프리드먼이 인정했듯이, 일자리 부족은 1930년대에 치유되어야 할 질병이었다. 그 자신은 루스벨트 정부에서 일하면서 전시 동안의 원천 과세 도입에 일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시대도 경제 사상도 변했다. 인플레이션이 위협 요소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또 다른 하나의 큰 흐름은 최소정부를 강조한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과 밀턴 프리드먼( Milton Friedman, 1912~2006)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이론이라 하겠다.(본문에는 이보다 다양한 흐름들이 소개되지만, 거칠게나마 크게 두 줄기로 묶어본다) 지금까지도 격렬한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그렇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일련의 흐름이 주류가 된 현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하며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유토피아>(974)에서 정의에 대한 롤스의 원칙들이 화해할 수 없는 갈등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노직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부를 재분배하려는 시도는 사적인 권리를 침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정치 시장에서 우파 논객들은 공정한 절차에 대한 롤스의 표면적 관심이 평등한 결과에 대한 평등주의적 욕망을 감추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노직의 비판을 환기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35/487


 공적 논쟁의 초점을 높은 고용률 유지에서 낮은 인플레이션 유지로 이동시키는 데 있어 밀턴 프리드먼(1912~2006)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경제학자는 없었다. 일류 경제 이론가이자 통화 역사가이기도 한 프리드먼은 어빙 피셔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통화 관리가 1920년대 후반의 경기 침체를 10년에 걸친 장기 불황으로 바꾸어놓았다고 보았다. 프리드먼의 주장에 따르면, 올바른 통화정책을  취하는 것이 정부의 최우선적인 경제적 임무였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359/487


 개인적으로 자유에 대한 논의는 결국 자유를 '리버티 liberty'로 볼 것인가, 아니면 '프리덤 freedom'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 전에 먼저 freedom을 'free from~'으로 바꿔써보자.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통해 보장한 보통선거권에서처럼 자유 또한 모든 이들에게 이득(gain)을 최대로 추구할 것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손실(loss)를 회피할 수 있어야 하는가. 국가 또는 사회가 보장해야 하는 자유가, 이사야 벌린이 말했듯 자아실현을 위한 적극적 자유 아니면, 생존을 위한 최저한으로부터의 자유인지에 따라 우리는 전혀 다른 해법이 훌륭한 논법에 의해 제시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리버티와 프리덤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다른 리뷰와 페이퍼를 통해 정리하도록 하자. 일전에 노직의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를 정리했으니, 공정하게 롤스에게도 기회를 줘야겠다... 


 데이비드 해킷 피셔는 <리버티와 프리덤>(2005)에서, '리버티 libety'와 '프리덤 freedom'이라는 이란성 쌍둥이가 미국의 수사적/정치적 상징에서 맡고 있는 역할을 탁월하게 파헤쳤다. 피셔에 따르면, "리버티!"라는 슬로건을 파악하고 지배하지 못한다면, 그 어떤 진지한 운동도 미국에서 오랫동안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설령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도, 일단 경쟁 운동들이 그 운동에 리버티의 적이라는 오명을 씌워버리면 좀체 성공할 수 없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0/487


 미국인의 혼동은 언어나 개념의 혼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으로부터 자유로운"과 "-을 하는 데 자유로운"이 갖는 어휘상의 문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유로움(막힘 없는 강이 자유롭게 흘러갈 때처럼)과 놓여남(개인이 권위에 의해 멈춰지거나 저지되지 않을 때처럼)의 차이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리버티"와 "프리덤"으로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고자 한 만큼, "리버티"와 "프리덤"의 차이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_ 에드먼드 포셋, <자유주의>, p112/487


자유주의자들은 전략적으로 한참 후퇴해 보통선거권을 인정했고, 다수에 의한 통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다수의 지배가 갖는 한계들에 대한 탐구를 결코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전략적 후퇴의 첫 번째 요소는 인민 주권에 대한 자유주의의 암묵적 합의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는 특히 대의 代議 representation, 정확히 표현하기 articulation, 관료화 bureaucratization, 절연 insulation이라는 제약을 받아야 했다. - P156

자유주의 정당들을 위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19세기 말에 이르러 대중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자체에 대한 일정한 보상을 약속했다. 반대당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대중 정치에 더 능숙한 그 정당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흡수하고 수용했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에 약속했듯이 민주주의도 자유주의에 양보한 것이었다. 이러한 타협의 자유주의는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았다. - P164

벌린이 제시한 극적인 대조에 따르면, 적극적 자유는 우리의 소질을 육성하거나 발현하기 위한, 혹은 벌린의 애매한 문구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인간적 발전의 자유였다. 소극적 자유는 좀더 단순해 보였다. 그것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한 외적 제약으로부터의 자유였다. - P313

근대 국가는 문화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근대 국가는 일종의 윤리적-문화적 실체로 여겨질 수도 있고 정치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윤리적 이상과 문화적 애착을 공유하는 사람들, 즉 에토스 ethos로 간주될 수도 있고, 시민들의 조직체인 데모스 demos로 간주될 수도 있다. - P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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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디오니시우스 사상의 혁신적인 면은 첫 번째 가정과 두 번째 가정을 하나의 동일한 주체, 즉 신에 적용하면서 ‘보류’ 단계와 ‘발전’ 단계를 유일신의 두 측면으로 고려했다는 데 있다. 반대로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은 이 ‘보류’와 ‘발전’의 단계를 서로 구별된 근원실체, 다시 말해 존재를 초월하는 하나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재에 부여했다.

디오니시우스의 신은 사실상 보편적이고 유일무이한 원인인 동시에 이에 상응하는 모든 결과를 단순하고 불분명한 형태로나마 이미 품고 있는 신이다.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480년경~525년)는 로마의 뛰어난 정치인이자 정신적인 측면에서 후세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뛰어난 지성인이었다. 역사는 전기를 통해 그를 야만인들에게 박해당한 로마인으로 기억하지만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보에티우스는 틀림없이 중세 사상에 기초를 마련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들 중에 한 명이었다.

보에티우스의 가장 널리 알려진 저서 『철학의 위안』 에서 표명된 몇몇 입장을 고려했을 때 보편적인 개념은 현실을 설명하는 데 감각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일종의 사상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감각의 인식 영역은 훨씬 더 협소한 것으로 드러난다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게 될 일들을 예견한다는 차원에서 섭리가 영원하고 시간을 초월하며 모든 것을 파악하는 신의 관점과 일치한다면, 운명은 피조물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에 시간에 종속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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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그려낸 세계는 그가 일생을 바쳐 보고 듣고, 이야기를 수집하고, 자료를 모으고, 연구해 써낸 결과물이지, 한 인물의 증언만으로는 복원할 수 없는 세계였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요즘 4·3을 다루는 많은 작품에서 때로 아쉬움을 느끼는 까닭은 바로 그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4·3 이전 제주 사람들이 어떻게 울고 웃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았는지, 어떤 일로 생계를 이었고 무엇을 믿고 받들며 살아왔는지, 그런 일상의 깊이 말이다.

강만길 역사학이 지닌 특징을 정리할 때 ‘현재성’은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선생은 역사학이 현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민족과 사회가 한층 더 인간다운 삶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기여해야 한다고 보았다. 현재성을 강조한 강만길 역사학의 대표적인 예는 1970, 80년대 ‘분단시대 역사인식’을 제창하여 분단사학과 냉전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강만길 역사학’은 간단하지 않다. 무엇보다 선생 자신께서 평생 자신의 논지를 끊임없이 고치고 심화해간 학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역사학은 언뜻 보면 평이해 보이지만 들여다볼수록 넓고 깊은 바다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학문적 측면에서 보자면 선생이 ‘총체적인 역사’를 추구한 역사학자였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지만 견디는 방법은 있다. 오래 걷고 깊은 잠을 자는 것. 야외에서 동물을 찾아다니면서 오래 걷는 날은 하루 7만보를 걸었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눈길에 미끄러지며 걷다보면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피곤했고, 기지에 돌아오면 지쳐서 금세 잠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체력단련실에서 러닝머신을 뛰거나 자전거를 타며 땀을 흘렸고 어떤 사람들은 늦게까지 일기를 쓰거나 책을 읽고 영화를 봤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외로움을 견딘다.

노동력의 세계적 이동과 고령화 현상을 막을 수 없고 저출생 문제는 심각하잖아요? 그런데 이 상황에서 우리 고령자 인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이 노동시장의 규율을 어떻게 구성할지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실행하다가 정말 인력이 절대 부족하다는 판단과 사회적 합의가 생길 때 외국인노동자가 들어와야 한다고 봅니다.

죽음이 공동체의 경계와 문턱을 설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적·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비국민’이라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통치성이 죽음의 이름으로 신체화된 형상이라면,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쓰기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인간’됨을 재고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아메리(Jean Amery)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특권으로 죽음을 지목했다. 그 자신이 실행하기도 한 이른바 ‘자유죽음’은, 신이 내린 삶이라는 은총을 모독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규범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의 죽음론은 주어진 삶의 고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통찰하기 위해 그는 ‘삶’이라는 연속성을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므로 1인칭일 수 없다. 특히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객관적 인식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3인칭의 속성을 띠며, 이때 죽음은 지식이나 정보의 형태로 "공동의 관념, 공동의 환상"이 된다.4 죽음이 일종의 담론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삶에 작용한다는 점은 죽음이 강한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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