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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열린책들 세계문학 229
알베르 카뮈 지음, 최윤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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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양을 째야 했고,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열십자 모양으로 매스를 두 번 그으면 피가 섞인 멀건 죽 같은 고름이 흘러나왔다. 환자들은 능지처참을 당하듯이 사지를 벌린 채 피를 흘렸다. 하지만 곧이어 배와 다리에 반점들이 나타났고, 멍울들은 더 이상 곪지 않는가 싶더니 곧이어 다시 커졌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는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죽었다.(p51) <페스트> 中


[그림] La Peste(출처 : https://www.wikiart.org/fr/arnold-bocklin/la-peste-1898)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1913 ~ 1960) 의 <페스트 La peste>는 흑사병이 덮친 알제리의 소도시 오랑(Oran)를 배경으로 한다. 처음에 쥐들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죽음은 서서히 소도시의 사람들을 덮쳐오면서 퍼지는 불안감과 공포. 그리고, 페스트의 창궐(猖獗)이 사람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이 소설은 매우 실감나게 묘사한다.


 불과 사흘 만에 열병 발병율은 네 배나 뛰어올랐다. 사망자가 열여섯에서 스물넷으로, 스물여덟로, 서른둘로 증가했다. 나흘때 되던 날, 당국은 어떤 유아원에 임시 병동을 마련한다고 발표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시한 농담으로 자신들의 불안을 감춰 오던 우리 시민들은 예전보다 더 풀이 죽어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p83)... 8월 한복판에 이르자 사실상 페스트가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자 개인의 운명이란 더 이상 없었고, 페스트라는 집단의 역사와 모두가 똑같이 느끼는 감정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 가장 극심한 것은 이별과 유배의 감정이었으며, 거기에는 공포와 분노가 담겨 있었다.(p215) <페스트> 中


 갑작스레 자신의 삶을 침범당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정한다. 페스트를 위협요소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었다. 자신이 안전한 존재라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이기적인 유전자의 개체(個體)로 행동한다.

 재앙이란 사실 공동의 문제이지만, 일단 닥치면 사람들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렇지만 전쟁이든 페스트든 사람들은 늘 속수무책이다.(p53)... 우리 시민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이별이라든가 두려움이라든가 하는 공통의 감정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개인적 관심사를 우선순위에 놓고 있었다.(p102) <페스트> 中


 그렇지만, 물러설 곳을 잃었을 때 사람들은 변하게 된다. 성문들이 닫히며, 도시가 개방계(開放系)에서 폐쇄계(閉鎖系)로 바뀌면서 이기적 유전자들이 생존을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선택하는 순간이 된다. 사랑하는 이/존재와 이별을 해야하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외부에서 온 침입자를 적(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추상적인 존재인 '페스트'는 구체적인 불행으로 내부에서 실재화(實在化)된다. 사람들은 페스트와의 싸움을 통해 점차 고통을 겪으면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도시로 통하는 성문들이 폐쇄되는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전까지 시민들은 자신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런 상태는 의심의 여지 없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성문이 닫히고 나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서술자는 물론이거니와 그들 모두는 마치 한 배에 탄 꼴이 되었고 어떻게든 맞춰 나가야 했다... 성문들이 폐쇄되자 벌어진 일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p89) <페스트> 中


 불행 속에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하지만 추상적인 것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할 때, 바로 그 추상과 제대로 붙어야 한다.(p115)... 리유는, 또한 무엇보다도 새로운 각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과 페스트라는 추상적 관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를 테면 우울한 투쟁과도 같은 것, 오랜 기간 동안 우리 도시의 삶 전체를 지배한 그 투쟁을 계속 추적할 수 있었다.(p119) <페스트> 中


 외부로부터 다가와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이 불행이 우리에게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부당한 고통만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괴롭히도록 했고,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고통과 한편이 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는 질병이 갖는 수법의 하나이다.(p99) <페스트> 中


 이제 군중들은 페스트를 적으로 인식하고 힘든 사투(死鬪)를 시작한다. 사람들은 아폴로에 의지하여 싸움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절망적인 싸움의 끝을 알 수 없는 시점에 이르러 사람들은 아폴로 대신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을 의탁한다. 중세 페스트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을 때 유럽을 감싸던 광기(狂氣)가 작은 시 오랑에 넘쳐나게 된다. 낮에는 불안, 밤에는 위안이 이어지면서 공포에 담금질 되던 사람들은 서서히 바뀌어간다.


 수많은 군중이 기도 주간에 참여했다. 평소 오랑 시민들의 신앙심이 두터워서가 아니었다. 이렇듯 갑작스러운 종교로의 귀의가 그들을 빛으로 인도한 것도 아니었다...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을 매우 특별한 심리 상태에 처해 있었는데,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믿기 어려운 사건들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 변화가 있음은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페스트란, 오긴 왔지만 결국엔 떠나가 버릴 불쾌한 손님일 뿐이었다.(p121) <페스트> 中


 무더위에 침묵까지 가세하자 겁에 질린 우리 시민들의 마음속에서는 모든 것이 훨씬 더 심각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하늘의 빛깔과 대지의 내음이 모든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영향을 주었다... 기력을 소진해 버린 봄이 지천으로 활짝 핀 수천의 꽃들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하다가 페스트와 무더위라는 두 배의 무게에 눌려 서서히 뭉개지려 한다는 걸 누가 봐도 확연히 알 수 있었다.(p146) <페스트> 中


 오랑 시민들이 이 전염병을 다른 병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던 초기에는 종교가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안 이상, 그들은 쾌락의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낮이 되면 사람들 얼굴에서 생생히 드러나는 불안이, 붉게 타오르는 먼지투성이 황혼 녘에는 일종의 격렬한 흥분과도 같은 것, 모든 사람들을 열의에 들뜨게 만드는 어설픈 자유로 용해된다.(p157) <페스트> 中


 그리고 거짓말처럼 힘든 싸움의 끝이 다가왔을 때, 사람들은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 왔음에도 이를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이는 페스트와의 싸움이 그들 자신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전염병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후퇴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민들은 선뜻 기뻐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의 시간이 자유에 대한 욕망을 키우면서도 그들에게 신중함을 가르쳐 주었고, 그럼으로써 전염병이 불원간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점점 버리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소식이 모두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커다란 희망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p343) <페스트> 中


 통계 수치가 가장 희망적이던 바로 그 시기, 우리 시민들은 모순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들은 흥분과 의기소침이 번갈아 연이어 나타나는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실 그 시기에 탈출했던 사람들은 본능적인 감정에 굴복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페스트는 깊은 회의주의를 심어 두었고, 그들은 그것을 제거하지 못했다. 희망이 그들에게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페스트의 시대가 다 끝나 가던 바로 그 시기에도 그들은 여전히 페스트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p347) <페스트> 中


 페스트는 외부에서 왔고 다시 외부로 돌아갔지만, 페스트와 싸운 사람들 마음에 페스트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그 씨앗은 언제라도 다른 형태의 '페스트'가 닥쳤을 때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그들은 페스트를 물리쳤지만, 동시에 페스트를 받아들인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저버렸음을 리유를 제외한 군중은 결코 알 수 없었다.


 리유는 기뻐하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책에서 알 수 있듯이 페스트균은 결코 죽지도 않고 사라져 버리지도 않으며, 가구들이며 이불이며 오래된 행주 같은 것들 속에서 수십 년동안 잠든 채 지내거나 침실, 지하 창고, 트렁크, 손수건 심지어 쓸데없는 서류들 나부랭이 속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다가, 인간들에게 불행도 주고 교훈도 주려고 저 쥐들을 잠에서 께워 어느 행복한 도시 안에다 내몰고 죽게 하는 날이 언젠가 다시 오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p396) <페스트> 中


 그는 단지 페스트를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우정을 경험했고 추억한다는 사실을, 인간의 정을 알게 되었고 언젠가는 추억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인간이 페스트와 인생이라는 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과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뿐이다.(p372) <페스트> 中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에 깊은 불안을 던져 주고 있는 지금 시점에, 카뮈의 <페스트>는 질병이 어떻게 인간을 무력화시키는 것인지 잘 보여준다. 페스트를 비롯한 전염성 질환이 무서운 이유는 그 자체의 위험보다 서로가 자신을 주위로부터 격리시키고 스스로 고립되는 유배의 감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카뮈의 통찰은 지금 우리에게도 분명 의미있게 다가옴을 느끼며 리뷰를 갈무리한다.


 그는 오랑 시민들이 보여 주는 모순을 가감 없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를 가깝게 하는 따뜻한 인간애를 절실히 원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경계심 때문에 선뜻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자기 이웃을 믿을 수 없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이 페스트균을 옮겨서 자신을 감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p253) <페스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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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02-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으로 저도 이 책이 읽고 싶어 도서관에서 대여해 놓았어요~~
곧 읽어 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2-04 23:02   좋아요 1 | URL
때가 때인지라 몰입이 잘 되네요. 페넬로페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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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거의 칠 주가 지났다. 나는 장례식 때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겠다는 너무도 강렬한 욕망이, 그녀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고 얼빠진 듯 말문이 막혔던 그때 상태로 되돌아가기 전에 작업에 착수했다.(p9) <소망 없는 불행> 中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1942 ~ )는 <소망 없는 불행 Wunschloses Unglu''ck>에서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어머니 이야기를 한다. 작품에서 어머니의 일생을 그리면서 어머니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가 제시되는데, 그 시작은 배움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한다. 배움의 욕망은 어머니에게 새롭게 세계를 보는 법을 알려주었고, 이로부터 어머니는 달라지게 되었다. 


 소망 없이 사는 게 어떤 식으로든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으며, 소망 없이 사는 걸 모두가 불행하게 생각했다. 다른 삶의 형태와 비교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더 이상 욕망도 없었을까? 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했다.(p19) <소망 없는 불행> 中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어머니에게 문학을, 정치를 알려주었고 이를 통해 어머니는 '여러 명 중 한 명'이 아닌 '개인'으로 자리잡아갔지만, 이러한 어머니의 깨우침은 일반적힌 사람들의 지향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머니의 불행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나의 어머니는 이런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그 끝없는 강요도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p53)... 나의 어머니는 영원히 위축되고 존재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되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기 주장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p56)... 그녀는 점차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니라 <그 여자>가 되어갔다.(p61) <소망 없는 불행> 中


 대다수 사람들은 '개인'으로 서기 보다 '무리(유형)' 안에 속하면서 안락함을 느꼈고, 무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기꺼이 자신의 개성(個性)을 포기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이런저런 유형(類型)에 따라 살면서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는 객관적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의 출신이라든지, 비듬이 떨어져 괴롭다든지, 발에 땀이 난다든지 하는 개인적 특성이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등 매일매일 반복되는 문제들 따위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하나의 유형에 들어감으로써 개인은 부끄럽게 여겨졌던 외로움과 고독감으로부터 벗어났고 스스로를 망각했으며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때로는 당당하고 떳떳한 존재가 되었다.(p36) <소망 없는 불행> 中


 이미 언급된 의식(儀式)에는 위안의 기능이 있다. 이 위안은 어떤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속으로 소멸되는 것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개인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에, 어쨌든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다.(p45) <소망 없는 불행> 中


 그 결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과 섞이기를 거부했고, 고독감을 느끼며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집단으로 소속되기를 거부하고 외로운 길을 선택한 어머니. 작가는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의 죽음과 개별 사안과 이로부터 도출된 추상적 개념의 관계를 연결짓는다. 추상적인 개념은 현실을 낭만적으로 그려내기 때문에, 현실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여주지 않는다.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이 과거를 추억으로 미화하듯이. 때문에,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에게도 의식화, 추상화는 거부해야할 대상이었다. 동시에, 어머니의 생애를 쓰려는 한트케에게도.


 각자 다른 구석을 볼 테니 외로움은 그만큼 더 커질 거다.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조금 뒤어다녀야겠다... 타인들이란 그녀를 방해하고, 기껏 잘해 봐야 약간 감동을 주는 어린애들에 불과했다.(p75) <소망 없는 불행> 中


 비참한 상황에서 그들은 역겹지만 바로 그 때문에 구체적으로 체럼 가능한 모습으로 사회 통념들을 교란시켰다면 이제는 개선되고 깨끗해진 <가난한 계층>으로서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이어서 예전에 비참했던 모습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궁핍에서 오는 비참함은 구체적인 말로 묘사될 수 있지만 가난은 그저 상징일 뿐이었다.(p51) <소망 없는 불행> 中


 때문에, 저자 한트케가 어머니의 모습을 그릴 때 객관적으로 쓰려 노력했던 것은 단순한 기자정신이 아니라 유형화를 거부했던 어머니의 유지(遺志)를 받드는 길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망 없는 불행> 안에서 집단 유형화를 거부한 어머니와 의식화/추상화를 피하려는 작가의 노력이 어울어져 우리에게 어머니의 죽음을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글을 쓸 때는 난 반드시 옛날에 대해, 적어도 쓰고 있는 시간 동안은 지나가버린 일에 대해 쓴다. 늘 그렇듯이 난 문학적으로 대상에 몰두하며 나 자신을 회상하고, 문장을 만드는 기계로 피상화시키고 객관화시킨다. 나는 내 어머니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p12) <소망 없는 불행> 中


 한 인물을 추상화하고 형식화하는 데 위험한 점은 물론 그 추상화 및 형식화 작업이 독립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이야기되고 있는 그 인물이 잊혀지고 꿈속의 이미지들처럼 구절들과 문장들이 연쇄 작용을 일으켜 한 개인의 삶이 동기 이상의 어떤 것도 되지 못하는 문학적 의식(儀式)이 된다.(p39)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렇지만, 역사가가 아무리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서술한다고 했을 때, 조감도(鳥瞰圖)처럼 완전히 시대와 떨어져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망 없는 불행> 속의 작가가 객관적으로 서술한다고 수없이 강조하지만, 분노와 격정에서 나온 욕구로 쓰여진 글이 완전하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그러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이라 생각된다. 


  때로 그녀를 한참 들여다보고 난 후에는 무슨 생각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순간이면 나의 지리함이 극에 달해 심란해져서 시체 곁에서 일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p80)... 나는 쓰러지고 말 것 같은 분노 속에서 나의 어머니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p81) <소망 없는 불행> 中


 그런 면에서 <소망 없는 불행>은 개인으로 서려고 했지만, 좌절한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의 삶을 비통한 마음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써내려간 아들의 사모곡(思母曲)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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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4: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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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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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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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5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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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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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4 13: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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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2-04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객관적 서술은 불가능할 거로 생각합니다. 주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할 수 있지만요.
작가처럼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없지요.

겨울호랑이 2019-12-04 13:45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처럼 작가처럼 주관적인 주체는 없는 듯합니다. 객관적이라면 보고서가 되겠지요...
 
주석 달린 허클베리 핀 -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1
마크 트웨인 지음, 마이클 패트릭 히언 엮음,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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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읽은 「허클베리 핀」에서는 모험담으로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흘러 다시 읽은 작품 안에서 문명과 반문명의 대립, 인종 문제, 아동 학대 문제, 총기 문제 등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미국 문명과 현대 문명의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더글러스 과부댁은 나를 자기 아들로 삼았고, 나를 문미영인[문명인]으로 만들기로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항상 그 집에서 살자니 무척 힘들었던 게, 과부댁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더럽게도 재미없게 규칙과 예법을 따졌기 때문이다. 그걸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나는 도망쳐버렸다. 다시 누더기를 걸치고, 설탕 나무통으로 기어들어갔더니 정말 자유롭고도 만족스러웠다.(p240)

두 사람은 마치 열두 사도를 모조리 잃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무두장이의 죽음을 슬퍼했다. 정말이지 내가 이전에라도 그런 걸 본 적이 있었더라면, 나는 흰둥이가 아니라 깜둥이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누구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 만들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p626)

가끔 한번씩 아빠는 나를 집 안에 가둬두고, 거기서 3마일(약 5킬로미터)쯤 떨어진 선착장에 있는 잡화점에 가서는 생선이랑 사냥감을 위스키와 맞바꾼 다음 그걸 집으로 가져와서 신나게 퍼미시고는, 취해서 기분이 좋으면 날 두들겨패곤 했다.(p312)... 나중에 나는 낡아빠진 갈라진 바닥 의자를 가져와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 위로 올라서서 총을 꺼냈다. 나는 꽂을대를 집어넣고 장전이 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았고, 그런 뒤에 총을 순무가 든 나무통 옆에다가 걸쳐놓아서 아빠를 겨냥하게 하고, 그 뒤에서 아빠가 혹시 꼼짝이라도 하지 않는지 기다리고 있었다.(p323)

이 나라에 깜둥이한테도 투표를 하게 하는 놈의 주가 있다구? 그야말로 기절초풍하겠네. 내가 그랬지. 내가 보니까 이놈의 나라가 아주 망하려고 작정을 했다구.(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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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만 메모수첩 2019-11-05 0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작년에서야 처음 읽었는데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하는 장면은 그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었지요. 주석이 달렸다니 저도 구해 읽고 싶네요.

겨울호랑이 2019-11-05 06:04   좋아요 1 | URL
책에 주석이 달려 매우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반면, 주석의 양이 상당해 모든 주석을 읽기는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허클베리 핀을 인상깊게 읽으신 조그만 메모 수첩님께 유용할 책이라 여겨집니다^^:)

2019-11-05 10: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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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5 1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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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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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5 14: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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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 - 소돔과 고모라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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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불길을 면한 소돔 주민의 후예. 남자-여자의 첫 출현. ˝여인은 고모라를 가지고 남자는 소돔을 가지리니˝ - 알프레드 드 비니 (p15)

「창세기」가 말하듯,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하느님에게까지 닿았으므로 소돔 주민이 정말로 온갖 잘못된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기 위해 두 명의 천사를 성문에 보낸 것은 매우 잘못된 선택이었으며, 하느님은 그 임무를 차라리 소도미스트에게 맡겼어야 했기 때문이다. 소도미스트라면, 변명에도 그 번쩍이는 불 칼을 관대하게 거두지 않고 형벌도 감해 주지 않았으리라.(p67)

알베르틴이 내게 불어넣을 그 지속적이고 고통스러운 의혹, 게다가 그 의혹이 띠게 될 특별한 성격, 특히 고모라적인 성격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면, 내가 거짓을 말하는 것일까.(p331)

또다른 사건이 고모라쪽으로 나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나는 해변에서 날씬하고 창백한 아름다운 젊은 여자를 한 사람 보았다... 내 눈에는 그 아가씨가 알베르틴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고, 그래서 알베르틴을 단념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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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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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 게르망트 쪽 2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Le cote de Guermantes> 역시 다른 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이야기가 펼쳐진다. 할머니의 죽음, 알베르틴의 방문, 생루와 친구들과의 만남, 게르망트 댁의 만찬으로 이어지는 장면 안에서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이야기,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 ~ 1885), 에밀 졸라(Emile Francois Zola, 1840 ~ 1902) 등의 작가 이야기,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의 오페라,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1894 ~ 1906) 등 당대 사회상과 문화 등을 넘치게 맛볼 수 있다. 문제는 너무 맛봐서 무엇을 맛봤는지 모를 정도라는 것이다.


  리뷰를 쓰면서 느끼는 부분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생각했던 부분 모두를 여러가지 제약으로 다 쓰지 못하는 점은 언제나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런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진] Best types of fish in the sea(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CMb5u1ArtkQ)


 마치 푸른 바다에 커다란 수많은 물고기가 있지만, 그 물고기 하나하나가 너무 커서 그 중 한 마리밖에 잡을 수 없는 어린이와 같은 느낌이 이와 같을까. 그나마 리뷰를 쓰고나면 물고기는 없고, 내 손에는 물고기 비린내만 남아있는 것 같아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안의 다음 문장에서 우리는 사회문제를 지적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요컨대 평등 사회에서의 예절은 철도의 발달과 비행기의 군사적 이용보다 더 큰 기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설령 예절이 사라진다 해도 그것이 불행이라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 끝으로 사회란 사실상 민주화되어 감에 따라 점점 더 은밀한 방식으로 서열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p23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자본주의 사회, 민주주의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 위의 문장으로만 쫓아가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혀 다른 색깔의 리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스완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계급과 게르망트로 표현되는 귀족 계급간의 미묘한 대립과 공존의 문제와 프랑스 대혁명을 묶어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드레퓌스 사건을 중심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전에 유럽에 팽배했던 반(反)유대주의를 중심으로 오늘날의 시오니즘(Zionism) 문제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안에서 이런 주제는 정말 넘쳐나기에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할 지 고민을 하게 된다, 이번 리뷰에서는 다른 부분은 과감하게 버리고, 소박하게 '할머니 죽음'과 '알베르틴의 방문' 에만 초점을 맞추려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의 시작은 처음부터 강렬하게 할머니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한다. 할머니가 자신이 죽어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서서히 죽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은 비장(悲壯)함을 불러일으키며 독자들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산소의 쉬익거리는 소리가 그쳤고, 의사는 침대에서 멀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희끗희끗 세긴 했지만 그 머리칼은 지금까지 할머니 연세에 비해 젋어 보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머리칼에만 유일하게 늙음의 관이 씌워졌을 뿐,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으로 새겨진 주름살이나, 오그라지고 부풀어 오른 살, 팽팽하거나 늘어진 살로부터 해방된 얼굴은 이제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 있었다... 할머니의 이목구비는 순수함과 순종으로 섬세하게 새겨져, 뺨에는 세월이 점차 파괴해 버린 순결한 희망과 행복에의 꿈, 결백한 즐거움마저 빛나고 있었다.(p6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죽음 이후 할머니의 모습 속에서 독자들은 죽음과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靈)과 육(肉)이 결합되어 생명(生命)이 만들어지고, 그 생명이 시간 속에서 겪는 경험이 삶이라 했을 때, 그 삶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는 것이 죽음이라면, 영과 육의 분리, 혼(魂)과 백(魄)의 분리가 우리에겐 진정한 해방인 것일까. 죽음 후에 다시 젊음을 찾은 할머니의 모습 안에서 할머니는 이미 '되찾은 시간'이나 행복함으로 돌아간 것은 아닐까. 삶이란 어쩌면 영과 육의 불완전한 결합에서 오는 고통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할머니를 잃은 '나'는 다시 알베르틴과 재회를 한다. 이미 알베르틴과 원치 않은 이별은 한 후 '나'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마도 다타고 남은 재와 같기에 알베르틴이 자리할 곳은 더이상 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알베르틴은 나의 마음안에서 꺼져버린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녀의 '언어'였다.


 이제 나는 그녀(알베르틴)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우정을 깨뜨릴까 봐 발베크에서처럼 두려워할 필요도 없었다.(p79)... 하지만 내가 결심을 굳힌 것은, 그녀가 최근에 사용하는 언어를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무스메(mousme)만큼 소름이 돋는 말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알베르틴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발음하자 무스메란 단어도 그렇게 불쾌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은 외적인 깨우침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녀의 어떤 내적인 발전을 보여 주는 듯했다.(p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사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통해 문학가를 지망하는 '나'에게 있어 언어는 중요한 문제다. 부르주아 또는 귀족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나에게 있어 문학적 재능은 다른 이들과 연결할 수 있는 '끈'이었으며, 자신 역시 문학적 재능(언어)를 활용하여 다른 이들과 교류한다. 나에게 '언어'는 세계를 살아가는 도구이자 이유다. 


 훗날 나는 게르망트네 사람들이 사실 나를 다른 인종으로 생각했으며, 나 자신은 몰랐지만 그들에게서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말해 왔던 재능이란 걸 가졌다고 여겨 그들의 부러움을 자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1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나는 충격으로 얼이 빠져 꼼짝할 수 없었다. 발밑에는 받은 명함과 봉투가 마치 총포가 발사된 후의 탄피처럼 떨어져 있었다. 나는 편지를 주워 문장을 분석했다. "그녀는 불로뉴 숲의 섬에서 나와 함께 식사할 수 없다고 했어.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라면 함께 식사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거야. 그녀(스테르마리아 부인)를 찾으러 가는 것 같은 무례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어."(p135)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제가 부인(게르망트 공작부인)께 이 구절을 말씀드리는 것도 스무 번이나 '언어학자들'에게 물어본 후에야 겨우 짜 맞출 수 있었던 덕분이죠.(p33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이런 화자가 이미 죽어버린 자신의 감정(알베르틴에 대한 사랑)을 언어를 통해 부활시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흑백사진과 같은 과거에서 언제나 '소리'나 '맛'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으로 표현되었다. 언어를 시각적인 '글'과 청각적인 '말(소리글)'로 나눈다고 했을 때, 알베르틴의 소리로 다시 사랑이 살아난다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 육화된 Logos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에 대해 지적이라고 평하며 '인텔리전트(intelligent)'란 단어에서 두 l자의 발음을 강조하는 걸 보고 놀라 드디어 여인이 됐구나하며 주목한다. 하지만 이는 그들이 변했다는 표시로, 내게는 알베르틴이 사용하는 새로운 어휘와 내가 알았던 어휘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p78)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알베르틴의 발음이 너무나 관능적이고 감미로워서 말소리만 들어도 키스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은총이었으며, 그녀와의 대화는 상대방을 온통 입맞춤으로 뒤덮였다. 그렇지만 나에게 이 초대는 무척 상쾌했다.(p86)... 내 눈은 보기를 멈추었고, 그러자 이번에는 납작해진 코가 어떤 냄새도 맡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욕망하던 장미꽃의 맛을 더 많이 느끼지도 못했는데, 나는 이 가증스러운 기호들 앞에서 내가 알베르틴의 뺨에 키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p9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잃어버린 시간을 찾어서 6> 안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영'과 '육'의 분리를 가져온다. 반면, 알베르틴의 목소리는 화자의 '영'이 변화시키고, 이는 알베르틴과의 키스를 통해 '육'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죽음을 통한 '영 - 육'의 분리와 언어를 통한 '영- 육'의 결합이라는 대칭 구조.할머니의 죽음이 되찾은 시간을 가져온 것처럼, 알베르틴과의 재회가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는 작가의 복선이 여기에 깔린 것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구조를 통해서 로고스(Logos)를 통해 '말씀'이 '사람'이 된다는 요한 복음의 내용을 연상하게 된다. 프루스트가 유대인임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이겠지만, 그럼에도 작품 속에 있는 다음의 구절을 통해 허튼 생각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삼아본다. 


 그들은 개별적인 데서 보편적인 데로 이르지 못하고, 늘 과거에 전례가 없는 경험하고만 마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교훈도 꺼내지 못한다.(p180)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6> 中


 비록, 작품에 담긴 보편적인 프루스트의 의도에는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지만, 적어도 작품이 내게 가져다 준 개별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이번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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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8-26 0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의 소설을 여러 번 읽었어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기 힘들 것 같아요. 어쩌면 아예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프루스트의 소설은 읽을 때마다 내용의 의미가 달라지고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풍부한 텍스트예요. 하지만 텍스트의 다채로움을 느끼기에 분량이 너무 많아요. 프루스트의 소설 완독을 두 번 이상 성공한 독자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프루스트 준전문가예요.. ^^

겨울호랑이 2019-08-26 07:25   좋아요 0 | URL
^^;) cyrus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깊숙하게 느껴집니다. 그만큼 양과 질 면에서 풍부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이 작품을 프랑스어로 읽는다면 감동의 크기가 몇 배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페크(pek0501) 2019-08-26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작가의 의도보다 자신이 느낀 의미가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작가가 주려는 메시지보다 제가 느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초점을 두고 글을 쓸 때가 있어요.
잘 읽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8-26 12:48   좋아요 1 | URL
페크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프루스트가 표현한 것이 너무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한 술에 배부르기보다 꾸준히 여러 차례 읽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페크님,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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