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 자연주의와 인상주의, 영화의 시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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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인상주의

19세기의 모든 특징들은 이미 1830년경에 드러난다. 부르즈와지는 완전히 권력을 소유하고 또한 그 사실을 잘 의식하고 있다. 귀족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각하여 순전히 개인적인 생존을 유지할 뿐이다. 시민계급의 승리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백해진다.(p15)... 공업화의 진전이나 자본주의의 전면적 승리와 보조를 같이하는 경제적 합리주의, 역사과학/정밀과학의 발전 및 이와 결부된 사유(思惟)의 일반적 과학주의, 계속된 혁명의 실패와 그 결과 생긴 정치적 현실주의, 이 모든 것들이 낭만주의와의 거대한 싸움을 준비하는 바, 낭만주의와의 이러한 싸움이 향후 100년간의 역사를 꽉 채우게 된다.(p16)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독자층은 서로 다른 두 진영으로 분리되고 예술은 서로 대립하는 두 경향으로 나누어진다. 이때부터 모든 예술가는 반대되는 두 질서인 보수적 귀족의 세계와 진보적 부르즈와의 세계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p17)

르네쌍스 이래 점차 드러나는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 경향은 이제 어떤 전통에 의해서도 완화되지 않는 그 뚜렷하고 비타협적인 명료성 속에 나타난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비인격화의 경향, 즉 경제기업의 전 메커니즘에서 개인의 환경에 대해서 고려하는 모든 직접적/인간적 영향을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업은 자체의 이해와 목적을 추구하고 자체의 논리법칙에 따라가는 하나의 자율적 유기체가 되며, 자기와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폭군이 된다.(p22)

모짜르트(W.A.Mozart)가 항상 객관적이며 필연적인 확고한 플랜을 좆는 것같이 보이는 데 반하여, 베토벤의 음악에서는 모든 주제, 모든 모티프, 모든 음조가 마치 "나는 이렇게 느끼니까" "나에겐 이렇게 들리니까" "나는 이렇게 하고 싶으니까" 하고 작곡자가 말하고 있는 듯이 울린다. 과거 대가들의 작품이 잘 균형 잡히고 잘 구성된 작곡과 깔끔하고 잘 마무리된 멜로디임에 비하여, 베토벤과 그후의 작곡가들의 창작은 괴로운 가슴의 심연에서 터져나오는 부르짖음이며 읊조림인 것이다.(p56)

자연주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이다. 진실감에 대한 자연주의의 가정이 새롭기는 하나, 이러한 가정이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언제나 자의적이게 마련이다.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후자의 과학주의, 즉 현실의 예술적 묘사에 정밀과학의 원칙을 적용한 데에 있다. 19세기 후반에 자연주의적 예술이 지배적 위치에 서게 된 것은 관념론과 전통주의의 정신에 대한 과학적 세계관 및 합리주의적/기술중심적 사고방식의 승리에 따른 한 징후일 따름이다.(p81)

혁명의 승리와 차티즘(Chartism, 1836 ~ 48, 6개 항목의 급진적인 인민헌장을 내세운 영국의 정치운동)의 좌절 이후에야 비로소 부르즈와지는 자기의 확고한 힘을 느꼈고, 그리하여 이제 양심의 갈등이니 양심의 가책 따위는 갖지 않게 되었으며, 이미 어떤 비판의 필요를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문화적 엘리뜨, 특히 문필가들은 사회에서 하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느낌을 잃어버렸다.(p163)

똘스또이와 도스또예프스끼의 관계에서 우리는 볼떼르와 루쏘 사이에 있었고 괴테와 쉴러(J.Ch.F. von Schiller)간의 관계에서도 그 비슷한 것이 있는, 의미심장하고 가장 깊은 뜻에서의 전형적이고 원형적인 정신적 관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모든 경우에 있어 합리주의와 비합리주의, 감각성과 사상성, 또는 쉴러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박한 것'과 '감상적인 것'이 대면한다.(p190)

기술의 진보와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현상은 문화의 중심이 현대적 의미의 대도시로 발전해가는 일로서, 이 대도시는 새로운 예술이 뿌리내리는 토양을 형성하게 된다. 인상주의는 유례없이 도시적인 예술인데, 그것은 다만 인상주의가 풍경으로서의 도시를 발견하고 그림을 시골에서 도시로 옮겨왔기 때문만이 아니라 세상을 도시인의 눈으로 보고 현대적 기술인의 극도로 긴장된 신경으로 외부 세계의 인상들에 반응하기 때문이다.(p201)

시기상으로도 문학의 인상주의와 회화의 인상주의 사이에는 얼마간의 간격을 볼 수 있다. 회화에서는 인상주의의 가장 왕성한 시기가 이미 지나간 때에야 비로소 그 양식적 특징이 문학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 차이는 문학에서의 인상주의는 비교적 일찌감치 자연주의, 실증주의, 유물론과의 연결고리를 잃고 거의 출발부터 익히 알려진 이상주의적 반동의 역할을 떠맡은 데에 비하여, 회화에서는 인상주의가 해체된 다음에야 그러한 반동이 나타난다는 점이다.(p215)

플로베르의 세계관과 베르그쏭의 세계관을 갈라놓는 중요한 차이는, 플로베르가 아직도 인생의 이상적 실체를 갉아먹는 하나의 파괴요인으로 시간을 파악했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간관의 변화, 아울러 체험적 현실 전체에 대한 평가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 것으로서 그것은 제일 먼저 인상파의 그림에서, 다음에는 베르그쏭의 철학에 와서, 끝으로는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일어났다. 프루스트에 이르면 시간은 이미 분해와 파괴의 원리가 아니요, 그 속에서 이념과 이상이 가치를 잃고 삶과 정신이 실체를 상실하는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는 시간이라는 형식을 통해 우리의 정신적 존재, 생명 없는 물체와 기계작용에 반대되는 우리 삶의 본질을 포착하고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p269)

영화의 시대

20세기 예술의 주류를 이루는 경향들은 모두 전 세기의 선구자들에게서 그 기원을 갖는다. 입체파는 쎄잔느와 신고전주의자들에게서, 표현주의는 고흐와 스트린드베리에게서, 초현실주의는 랭보와 로트레아몽에게서 각각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예술사상의 연속성은 당시의 경제사 및 사회사가 어느정도 일관된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p285)

연극은 여러가지 면에서 가장 영화와 닮은 장르이다. 특히 시간적 형식과 공간적 형식을 종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유일한 장르다. 그러나 연극에서는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이 나란히 병존할 뿐이지 영화에서처럼 양자가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지는 않다. 영화와 다른 예술 간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유동적이라는 점이다.(p302)... 영화에서 시간과 공간이 마치 그 기능의 호환성을 통해 결합되어 있기나 한 것처럼, 공간이 활성화되어 시간적 자질을 획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 역시 거의 공간적 성격을 띠게 된다. 즉 순간들의 배열순서에 일종의 자유가 생긴다.(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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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3-05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 사다 놓은 책인데 몇년째 keep 만 하고 있습니다. 리뷰 읽으니 더 궁금해지는 책입니다. ^^
근데 어쩜 이렇게 책을 빨리 읽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3-05 23:51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사실 저도 예전에 사다 놓고 틈틈이 들여다 보다가 이번에 맘먹고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몰아보다보니 전체적인 흐름이 더 잘들어오는 것 같네요. 다만, 그 깊은 내용이 모두 제것은 되지 않은 것 같네요 ㅜㅜ 아무래도 소화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 로꼬꼬, 고전주의, 낭만주의,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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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꼬꼬

18세기 사회발전의 고유한 특징은 여러 상이한 신분과 계급을 가르는 경계선들이 아무리 강조되더라도 결국 문화적 평준화 과정은 멈춰질 수 없었고 사람들이 외면적으로는 서로 상대방과 구별되려고 안달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점점 더 닯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단지 두 개의 커다란 집단, 즉 일반 민중과 그 민중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의 집단만 존재하게 된 사실이다. 귀족과 상층 부르즈와지는 단 하나의 문화계층으로 용해되었고, 그리하여 이전에 문화를 담당했던 사람들은 주는 자(창작자)이면서 동시에 받는 자(향수자)가 되었다.(p21)

로꼬꼬는 실로 르네쌍스와 함께 시작된 발전의 마직막 국면을 대변하면, 이 발전과정의 시초가 되었고 정적(靜的)/구속적/규점적 원리와 계속 싸워야만 했던 동적(動的)/해방적 원리에 승리를 안겨줌으로써 이 과정을 총결산한다. 로꼬꼬에 이르러 비로소 르네쌍스의 예술적 목표는 최종적으로 달성되며, 또한 로꼬꼬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정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부르즈와 예술과 더불어 민주주의 사상과 주관주의에 근거하는, 그리고 발전사적으로 보아 분명 르네쌍스/바로끄/로꼬꼬의 엘리뜨 문화와 직접 관련되면서도 그것들과 원리적으로 대립되는 오늘 우리 자신의 문화시대가 시작된다.(p51)

소설은 17세기에만 해도 그 대중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저급한, 어떤 점에서 아직 후진적인 문학형태를 대변했으나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도적인 장르가 된다.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이 장르에서 나타난 뿐만 아니라 진정한 진보라고 할 만한 의미있는 발전이 이 분야에서 일어난다.(p45)

계몽시대의 예술

로꼬꼬와의 결별은 이 세기의 후반에 일어나는바, 상류계층의 예술과 중간계층의 예술 사이에는 명백한 간격이 있는 것이다.(p56)

로꼬꼬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 등장 이후이다.대략 1780 ~ 1800년의 기간에 걸친 혁명 시대의 예술과 함께 고전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된다. 혁명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양식으로서 고전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이 선택에서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것은 취미나 형식의 문제라든가 혹은 중세 말기와 초기 르네쌍스의 시민적 예술이상에서 나온 내면성과 친밀성의 원칙이 아니라, 현존하는 여러 경향을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애국적/영웅적 이상과 로마적 시민덕목과 공화주의적 자유이념 등을 포함하는 혁명의 에토스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가하는 관점이었다.(p191)

시민계급은 음악의 주된 고객이 되었고, 또 음악은 다른 어느 장르에서보다 시민계급의 정서생활이 더 직접적으로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애호받는 예술이 되었다... 새로운 주관주의의 결과 생겨난 이러한 갈등의 가장 유명하고 극단적인 예는 모짜르트와 그의 패트런인 잘츠부르크(Salzburg) 대주교와의 불화이다. 고용된 음악가와 자유롭게 창작하는 예술가 사이에 나타난 대립의 특징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것은 연주가와 작곡가, 일반 악단원과 악단 지휘자의 분화이다.(p107)

당시의 문학은 전유럽적 문학이었고, 또 중세 이후 한번도 체험해보자 못했던 서구 정신공동체의 표현이었다. 중세의 문학은 그 보편성을 라띤어에 힘입고 있었다면, 바로끄나 로꼬꼬 문학은 그 보편성을 프랑스어에 힘입고 있었다. 그리고 중세의 문학이 교양있는 성직자 그룹에 제한되어 있었다면, 바로끄나 로꼬꼬 문학은 궁정적 귀족그룹에 한정되어 있었다.(p168)

고전비극은 인간을 고립적인 존재로 보고, 물질적 현실과는 단지 외면적으로만 접촉할 뿐 거기에서 아무런 내면적인 영향도 받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정신적 실체로 묘사한다. 이에 비하여 시민극은 인간을 사회적 환경의 일부이자 그 함수로 파악하고, 과거 비극에서처럼 객관적 현실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지배를 받고 거기에 흡수된 존재로 그린다.(p124)

두 경향 사이의 긴장이 완전히 종식되고 궁정적이라 지칭할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더이상 시민문학에 대항하지 못하는 상태에까지 이른다. 물론 그렇다고 일체의 긴장이 없어진 것은 아니며, 단 하나의 단일한 취미가 문학을 지배한 것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새로운 대립, 즉 교양있는 소수자의 문학과 일반 독자층의 문학 사이의 긴장이 서서히 발전되며, 후일 통속문학의 약점들을 이미 찾아볼 수 있는 취미의 타락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p67)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에 열광한 뒤에야 비로소 괴테는 독일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낭만주의자들이 이처럼 괴테를 지지했던 것은 그들 사이에 놓인 일체의 개인적/세계관적인 대립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질풍노도 이후의 전 독일 문화를 하나로 묶는 불가침의 깊은 이해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말해주는 가장 두드러진 징표이다... 쉴러에 의하면 미적 교육은 루쏘가 이미 인식한 바의 숙명적 악으로부터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괴테는 이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술은 "전체의 파괴적인 힘에 대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라고까지 주장하기에 이른다. 여기에 이르면 예술적 체험은 지금까지 오로지 종교만이 할 수 있었던 기능을 획득하게 된다.(p164)

낭만주의

낭만주의 운동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운동이 혁명적 세계관 아니면 반혁명적 세계관을 대변하느냐 혹은 진보적 세계관 아니면 반동적 세계관을 대변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경우든 비현실적/비합리적/비변증법적 길을 통하여 그런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p215)

낭만주의 이전의 예술가와 시인들이 무조건 이러한 감상자 그룹의 요구와 소망에 부응하려고 노력했었다면, 낭만주의 시대와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가들은 이제 더이상 어떠한 집단적 그룹의 취미와 요구에 종속되지 않으며 어느 한 그룹의 호응을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다른 그룹의 감상자층에 호소하려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p203)

낭만주의 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시적 언어의 혁신이다. 프랑스의 문학적 언어는 17세기와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허용될 수 있는 표현방식이나 정확하다고 인정되는 스타일에 대해 너무 엄격한 규제를 가했기 때문에 빈약하고 무미건조하게 되었다. .. 단순하고 자연스러우며 일상대화에 많이 쓰이는 표현들은 고상하고 세련된 '시적'어휘나 기교적인 풀어쓰기에 의해 대체되어야만 했다.(p255)

형식해체에 음악이 대처했던 음악 고유의 성향, 예컨대 내용의 비합리성과 표현수단의 독자적 과시 등을 보면 왜 음악이 근대 예술장르중에서도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전주의에서는 문학이 주도적인 예술이었다면 초기 낭만주의는 부분적으로 회화에 근거를 두었다. 그러나 후기 낭만주의는 완전히 음악에 의존하고 있다.(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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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 르네쌍스, 매너리즘, 바로끄,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2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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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쌍스

르네쌍스의 자본주의적 정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영리추구를 위한 노력과 이른바 '중산층의 미덕' 그리고 영리욕과 근면, 절약성과 정식성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새로운 미덕체계도 사실은 보편적인 합리화 과정의 또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꾸아뜨로첸또(Quattroccento,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쌍스) 후반기에 이르러서야 합리적인 생활태도의 원칙이 금리생활자 이상으로 바뀌어가는데, 이때부터 시민계급의 생활은 봉건귀족의 생활방식과 비슷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p38)... 시민계급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느끼게 되자 초기의 시민적 도덕질서는 해이해지고 드디어는 날이 갈수록 향락적인 여가와 아름다운 삶의 이상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시민계급이 점점 비합리적인 생활양식을 취하게 되는 바로 그 무렵에 봉건영주들은 점차 견실하고 신용있는 상인의 경영원칙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궁정사회와 시민사회가 길의 중간에서 서로 만나게 된 셈이다.(p39)

꾸아뜨로첸또 예술에 중세적인 전통이 아무리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예술에서 시민계급의 정신과 고딕의 이념이 끊임없이 서로 암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정확히 알아두어야 할 것은 이 세기의 중엽에 이르기까지는 반고딕적이고 반낭만적이요 사실적이며 비궁정적/자유주의적인 경향이 시민계급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정신주의, 인습주의, 보수주의의 경향 등은 로렌쪼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우위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p54)

르네쌍스는 소상인이나 수공엉업자의 문화도 아니었고 큰 교양이 없는 시민계급의 문화도 아니었다. 르네쌍스는 오히려 다른 계층을 완전히 배제하면서 문화를 독접하려고 했던 비민중적이고 라띤화된 교양 엘리뜨의 문화였다... 광범위한 대중들은 당시의 중요한 예술품을 전혀 알지도 못했고 아는 경우에도 이러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데 부적합한 비예술적인 의미로 이해했으며, 자신들의 심미적 감정은 질이 훨씬 떨어지는 작품들로써 충족시켰던 것이다. 이때부터 앞으로의 예술발전에서 근간을 이루게 될 교양있는 소수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대중 간에 메울 수 없는 깊은 간격이 생기게 되는데, 이러한 격차는 지금까지의 유럽 예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p73)

미껠란젤로에게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 속의 어떤 마력적인 힘에 쫓기는 고독한 근대적 예술가, 즉 자신의 상념에만 사로잡혀 있고 그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 위에 어떤 높은 힘이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예술가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고, 예술가는 르네쌍스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가 된다.(p93)

르네쌍스의 엄격한 형식주의는 근대예술의 가장 중요한 저류로 남았다. 왜냐하면 엄격하게 형식주의적이고 전형적/규범적인 것을 강조한 예술양식이 근대의 근본적 흐름인 자연주의에 대항해서 그 위치를 유지할 수는 없었지만, 르네쌍스 이후에는 또다시 비통일적이고 누가적(累加的, cumulative)/병렬적인 중세의 예술양식으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르네쌍스 이후 우리들은 하나의 회화나 조각품을 단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한 현실의 집약적 표현, 다시 말하면 광범위한 세계와 여기에 맞서 대항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형식구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과 세계 사이의 대극성(對極性)은 때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쌍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p127)

매너리즘

매너리즘과 바로끄, 두 예술양식의 대립은 실제로는 발전사적인 대립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학적인 대립이다. 매너리즘이 정신귀족적이고 전유럽적인 교양계층의 예술양식이었다면, 초기 바로끄는 좀더 민중적이고 감정을 좀더 중요시하며 나아가서는 좀더 민족적 색채가 짙은 정신경향의 표현이었다.(p145)

기사도의 문제성에 대한 세르반떼스의 태도는 완전히 매너리즘적 생활감정의 양면성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그는 한편으로는 현실세계에서 동떨어진 이상주의와 현실세계에 적응하는 분별심 사이에서 망설이고 있다. 주인공 돈 끼호떼에 대한 그의 분열적 태도, 문학의 새로운 시기를 여는 그 태도는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문학에서는 악한 자와 선한 자, 구제자와 배신자, 성자와 신성모독자가 구분되어 나타났으나 이제 한 사람의 주인공이 동시에 성자이자 바보가 되어 있는 것이다.(p196)

영국의 상층 시민계급 및 중류 지방귀족과 왕실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사실은, 수백년에 걸친 불화와 압력 끝에 왕권이 사회적/정치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 나서 이제 유산계급의 안전을 보장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통치자의 지배력 약화나 사회적인 위계질서의 동요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자산가들에게는 이제 질서의 원리와 권위 및 안전성의 사상이 부르즈와적 세계관의 근간이 되었다.(p201)

셰익스피어의 자연주의가 지닌 한계는 너무나 명백하다. 그의 작품은 어디서나 개인적인 것과 관습적인 것, 복잡한 것과 단순한 것, 가장 세련된 것과 미개하고 미숙한 것 등 정반대의 특징들로 뒤섞여 있다. 그는 기존의 예술수단 가운데서 많은 것을 의도적으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받아들였지만, 그중 대부분은 아무런 비판이나 깊은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p222)... 그러나 그가 저지른 이러한 부주의나 실수에도 불구하고 그의 현명하고 깊은 심리적 통찰력은 결코 손상받지 않는다. 그가 묘사한 여러 성격은 - 이러한 점에서도 그는 발자끄와 공통점을 지니는데 - 우리를 압도하는 내적 진실성과 파괴할 수 없는 실체감을 지니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억지로, 때로는 잘못 묘사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인물들은 의연히 살아 숨쉬는 생명력을 갖는다.(p223)

바로끄

하나의 미술양식으로서 매너리즘이 전유럽에 골고루 퍼져 있던 분열된 생활감정을 반영한 것이라면, 바로끄는 본질적으로 좀더 동질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유럽 각 문화권에서 제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난 세계관의 표현이다. 매너리즘은 고딕과 같은 범유럽적 현상이었는데, 바로끄는 이와는 달리 국가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예술경향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바로끄의 이차적 분화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궁정적/카톨릭적 바로끄가 다시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장식적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이해해온 바의 '바로끄적' 양식과 이보다 더 엄격하고 한층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뉘는 점이다.(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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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03-03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전에 읽었었는데.. 참 감탄스러운 책이었다는.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겨울호랑이 2020-03-03 12:36   좋아요 0 | URL
비연님 말씀처럼 깊이 있는 내용을 독자들을 배려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한 명저라 생각합니다. 곁에 두고 몇 번봐도 좋은 책이라 여겨집니다.^^:)

페넬로페 2020-03-03 1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읽어보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3-03 13:21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다만, 제가 읽은 책은 예전에 구입한 구판을 뒤늦게 발굴해서 읽은 것이라 개정판으로 읽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개정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
아르놀트 하우저 지음, 백낙청 외 옮김 / 창비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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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선사시대

신석기시대의 새로운 예술양식을 낳은 요인은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채집/수렵민들의 기생적이고 순전히 소비적이던 경제생활이 농경/목축민들의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경제로 이행했다는 사실이요, 다른 하나는 구석기시대 마술 중심의 일원론적 세계관이 애니미즘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인바, 이 세계관 자체도 새로운 경제형태의 산물이었다.(p27)

예술은 자체의 고유한 형식을 고수하면서 사물의 일상적인 모습에 맞선다. 예술은 이미 자연의 모방자가 아니라 그 반대자이며, 현실의 연장으로서 현실에 뭔가를 덧붙이기보다 현실에 맞서 어떤 당위적인 형상을 제시한다. 이것은 애니미즘 신앙과 더불어 발생하여 이후 수백 가지의 철학체계 속에 그때그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이원론으로서 관념과 현실, 정신과 육체, 영혼과 형식 등의 대립으로 표현되며 이제는 예술의 개념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p27)

고대 오리엔트의 도시문화

예술적인 의지란 그물처럼 촘촘히 얽힌 장애물을 뚫고 나감으로써 비로소 성취되는 것이다. 즉 모든 예술작품은 일련의 목표 설정과 이에 대립되는 일련의 장애들 사이의 긴장에서 탄생하는 것이다.(p48)

정면성의 원리에 따라 인체를 묘사할 경우 상체가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은 감상자와의 어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감상자라는 존재를 아예 예상조차 하지 않았던 구석기시대 예술의 경우에는 정면성의 원리라는 것은 없었다.(p61)

고대 그리스와 로마

선사시대나 역사시대 초기의 예술작품에 그 자율적/미학적인 요소가 많았든 적었든간에, 그리스 아케이즘 시대까지의 예술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실용예술이었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형식 그 자체를 음미하고 즐기는 능력, 수단 자체에서 목적을 찾고 예술을 현실지배나 현실개조를 위해서뿐 아니라 단지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가능성은 이 시기의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야 비로소 발견된 것이다.(p114)

헬레니즘에서 과장적인 바로끄나 우아한 로꼬꼬가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여 끝에 가서는 이미 낡아빠진 형식만을 되풀이하게 된 반면 제정하의 로마는 제국의 통일적 통치체제와 더불어 상당한 통일성을 지닌 '제국예술'을 만들어냈고, 이 '제국예술'은 그 근대적 성격 때문에 머지않아 도처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p151)

중세

그리스도교 예술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디나 비잔띤 예술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비잔띤 황제가 이미 누리고 있던 권력과 권위를 서방의 카톨릭교회도 목표도 삼았기 때문이다. 예술적인 목적은 동/서가 모두 같았다. 즉 절대적 권위, 초인간적 위대함, 신비적인 위엄 등을 표현하려는 것이었다.(p191)

수도사와 수녀 사이에 오간 우애의 서한을 보면 이미 11세기에 일종의 과열된 감상적 관계가 엿보이는데, 그것은 우정이라고도 연애라고도 할 수 없는 관계였고 그 속에는 기사적 연애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인 경향과 관능적인 경향의 혼합이라는 현상이 이미 나타나있다... 기사계급의 연애서정시와 중세 수도원 문학의 관계는 직접적인 영향이나 차용이라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평행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p296)

로마네스끄 교회는 그 자체로 완결된, 그 이상 아무것도 구할 바 없는 안정된 공간상(空間像)이다. 비교적 넓고 상징적이고 간소한 그 내부는 감상자의 눈을 끌어 그 내부에 머물게 하고 감상자에게 언제까지나 완전한 수동적 태도를 갖게 한다. 이에 반해 고딕 교회는 생성의 상태를 계속하고 있고, 말하자면 우리 앞에 솟아나고 있다.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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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문화사 1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 흑사병에서 30년 전쟁까지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43
에곤 프리델 지음, 변상출 옮김 / 한국문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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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프리델 (Egon Friedell, 1878 ~ 1938)은 <근대문화사 1>에서 흑사병을 근대의 산물로 해석한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큰 변화가 흑사병과 같은 질병의 출현을 불러왔다면, 거의 5년 주기로 발생하는 현대의 대규모 전염병은 어떤 의미가 있을런지. 비록 살상력에 있어서는 과거 흑사병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고립시키는 질병의 의미를 우리는 역사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근대의 인간이 맞이한 발전 단면을 '잠복기(Inkubationszeit)'라고 부른다면, 이때 세상에 나타난 새로운 것이 독소(毒素, toxin)였다는 인상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p117)... 나는 근대의 탄생기가 유럽 사람들이 걸려든 중병, 즉 흑사병을 통해 규정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는 물론 흑사병이 근대의 원인이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근대'가 먼저 있음으로써 흑사병이 생겨났다.(p118) <근대문화사 1> 中

질병은 예술, 전략, 종교, 물리학, 경제. 연애 및 여타의 생활표현이 그 시대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특수한 산물이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바로 정신이다... '새로운 정신'은 유럽의 인류에게 일종의 발전 질병, 즉 보편적 정신장애와 그 질환의 형태 중 하나를 낳았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이 흑사병이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정신이 어디에서 왔고, 그것도 하필이면 왜 그 당시 그곳에 출현했고, 어떻게 발생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세계정신(Weltgeist)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p119) <근대문화사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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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5 23: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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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26 0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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