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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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지중해 동쪽 연안에 딱 붙어 있는 십자군 국가는 북쪽, 동쪽, 남쪽 삼면이 이슬람 세계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2백년을 존속했다.... 첫 번째 이유는 '템플 기사단'과 '병원 기사단'의 존재다. 그들은 적은 병력이었지만 모두 정예병으로 구성되었고, 무엇보다 성지에 뼈를 묻기로 서약한 상설 전력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중근동의 십자군 국가가 존속할 수 있었던 두 번째 요소는 지금까지 말한 성채의 활용이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3


[그림] Risultati immagini per kingdom of jerusalem map(출처 : https://www.pinterest.es/pin/627126316835249902/)


 시오노 나나미 (鹽野七生, 1937 ~ )의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과 주변 공국(公國)들이 살라딘(Selahaddin Eyyubi, 1138 ~ 1193)에 의해 붕되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성지를 손에 넣은 이후 예루살렘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정이 사그라들면서, 이슬람과의 전쟁은 현지인의 몫이 된다. 이에 반해,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력은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셀주크 투르크 세력은 누르 앗딘(Nur al-Din, 1118 ~ 1174)과 뒤를 이은 살라딘에 의해 통합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군은 곧 소멸할 듯이 보였으나, 이들은 200백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전쟁을 이어간다. 적은 병력으로 고립된 십자군이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많은 연구자들과 저자는 전투집단인 '기사단'과 '성채'의 적절한 활용이 십자군의 전투력을 극대화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그렇지만, 저자는 한 걸음 더 나간다. 


 그래서 십자군이라고 하면 제1차에서 제8차까지의 원정 외에도 '종교 기사단'과 '성채'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와 같이 경제력과 해군력을 중요하게 본 연구자는 거의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3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전쟁을 종교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 더 많은 욕망이 전쟁의 언저리에 자리한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종교적 열정 이외 다른 욕망이 충족되자 전쟁에서 손을 뗀 '기사들'보다는 결과적으로 십자군의 방어에 기여한 제노바, 아말피,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해양력과 경제력을 더 중요하게 보고 이들을 십자군 원정의 주체로 생각한다. 

 

 나는 서구인이 저술한 십자군의 역사는 어떤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모순은 그리스도교 십자군 원정의 진정한 원인을 십자가에 서약한 신앙심에서만 찾고자 한 탓에 생긴 것이 아닐까 싶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십자가에 서약한 바를 이룬 것에 만족하며 귀국한 '십자군 전사'가 단연 많았다는 사실은, '신에 대한 서약이 이루어진 후의 성지'에 만성적인 병력 부족을 초래했다. 그 결과 에데사 백작령을 뺴앗기고 안티오키아 공작령의 방어를 비잔틴 제국 황제에게 맡기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예루살렘조차 빼앗기게 된 것이다. 역사라가라면 이 점을 지적해야 할 테지만, 이걸 지적하면 그들이 지녔던 세속적인 영토욕이나 부의 축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쨋든 신에 대한 서약보다 사욕이 더 지속성이 강했다는 이야기가 되니까, 아무리 그것이 인간성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전쟁을 '신의 전쟁'이 아닌 '인간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리고, 대의명분 대신 결과로 전쟁의 성격을 평가한다. 이렇게 본다면 압도적인 해운력(해군력)을 바탕으로 바다쪽에서의 포위가 이루어지지 않도록 지원한 이탈리아 상인들의 행동이 더 '십자군'에 맞는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그렇게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림] Siege and sack of Constantinople (1204) (출처 : http://viticodevagamundo.blogspot.com/2012/02/siege-and-sack-of-constantinople-1204.html)


  최근의 연구자들은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가 지중해 동쪽 해역의 제해권을 견지한 것이 십자군 국가의 존속에 크게 공헌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살라딘이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합한 후에도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바다에 이집트 해군이 한 척도 얼씬거리지 못했을 정도이니, 베네치아와 제노바, 피사의 해군이 제해권을 견지한 공헌은 숨기려야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역을 통한 경제활동으로 공헌한 점에 대해서는 여전히 언급하는 일이 거의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4


  저자의 말대로 분명 이탈리아 해양도시의 해군이 세운 공(功)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결과로 이들을 십자군의 일원 또는 주체로 봐야할까.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 움직인 결과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탈리아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 이전에도 이미 이슬람 세력과 교류하면서 공존(共存)해왔다. 그것은 이슬람 상인들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들이 정치적 선택을 했다면 그것은 경제적 이익에 맞아서였음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소아시아 지역에서 십자군 왕국을 포위하고 있는 이슬람 편에서는 굳이 보급로를 바다로 할 필요가 없다. 낙타를 타고 운반하더라도 보급은 가능하다.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의 도움이 필요없었겠지만, 포위된 십자군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의 보급이 절실하지 않았을까. 절실한 만큼 당연히 더 많은 운임과 수수료를 제시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탈리아 상인들이 십자군을 돕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니었을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누구보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잘 알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경제능력은 십자군 뿐 아니라 이슬람 세력 증강에도 큰 힘이 되었다면, 이탈이아 상인들의 역할이 결정적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사람들은 십자군의 지배하에 들어온 거의 모든 중근동 항구도시에 자신들의 거류지를 갖고 있었다.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 공동체는 제각각이었지만, 이 거류지는 십자군 국가의 '경제특구'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선으로 운반해온 무기와 무구(武具)는 항구에 부려진 뒤 근처에 있는 거류지로 옮겨져 창고에 수납된다. 거류지에는 그리스도 교도 기사들만이 아니라 아랍인이나 투르크인 상인들도 그 상품을 사기 위해 모여들었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128


  이미 시오노 나나미는 <십자군 이야기 1>에서 당대인들이 누가 지배층이 되든 별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상인들 역시 십자군 전쟁을 돈벌이 수단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또한 당연한 것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탈리아 상인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그의 관점을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이탈리아 상인들의 역할이 강조된다면, 거기에 상응해서 그들과 거래한 이슬람 상인들 역시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약하자면, 시오노 나나미가 제시한 십자군의 성공적인 방어 요인 중 하나인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역할은 중립적이거나 제한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저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동방이든 서방이든 당시 사람들의 바람은 몸의 안전을 보장하고 세금을 적게 걷는 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만 보장해준다면 지배자가 누가 되든 상관없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13


 그렇지만, 저자의 관점에 대해 비판을 이어가기는 어려운데,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태세전환 때문이다. 이는 시오노 나나미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공통되는데, 특유의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는 자신에게는 무한한 상상의 자유를, 자신을 제외한 전문가에 대해서는 날선 비판을 가능케 한다. 그같은 역사소설과 역사서의 경계를 적극 활용하는 저자의 모습은 무책임하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저자의 이러한 모습을 여러 책에서 확인하면서 초기 그의 작품에 빠져들었을 때와는 달리, 점차 저자를 멀리하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다른 이유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마저 소개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역사 전문가가 아니다. 또한 이슬람교도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다. 그래서 애초의 동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신이 바라시는' 것의 존속에 공헌한 이탈리아 경제인에게 페이지를 할애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함이 없다._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 p205


  그렇지만, <십자군 이야기 2>는 역사서가 아닌 역사 소설로 접근한다면 재밌게 잀을 수 있는 책이다. 이런 흥미로운 부분은 독자들 각자의 몫으로 넘기기로 하고, 싫은 소리 가득한 리뷰를 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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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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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제도 왕도 참전하지 않은 제1차 십자군의 주역들은 유럽 각지에 영지를 가진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때때로, 아니 자주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분열을 반복했지만, 최종 목표 앞에서는 언제나 단결했다. 이 점이 이기적이고 분열을 반복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던 이슬람측 영주들과의 차이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제1차 십자군이 성공한 주된 요인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345


  <십자군 이야기 1>에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빼앗아 예루살렘 왕국등을 건설한 제1차 십자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저자 시오노 나나미 (鹽野七生, 1937 ~ )는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그리스도교측의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단결'을, 반면 이슬람 측이 패배하는 원인을 '분열'에서 찾는다. 이어지는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단결한 이슬람 세력의 반격이 주된 내용이기에, <십자군 이야기>의 부제를 '단결과 분열'로 붙여도 좋을 듯하다. 


 바그다드에 있는 칼리프를 군사적으로 받쳐주고 있던 것이 셀주크 투르크계 투르크인이었다. 한편 카이로에 있는 칼리프를 받쳐주는 것은, 같은 이슬람교도이자 아랍인을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열상태가 중근동에 미치자, 시리아는 투르크인 세력 아래로, 그리고 팔레스티나는 아랍인의 세력 아래로 들어갔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56


  십자군 전쟁을 호소하는 교황의 호소에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는 군중의 화답으로 시작되었다는 십자군 전쟁. 그렇지만, 중세 유럽인들의 열렬한 신앙심 뒷편에는 서로 다른 욕망의 주체들이 저마다의 생각을 가지고 '신의 뜻'을 외쳤음을 <십자군 이야기 1>은 보여준다. 먼저 교황(敎皇).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 1077) 이후 오히려 신성로마제국황제의 압박에 시달리며, 유럽을 전전하던 교황은 황제가 할 수 없는 업적을 이루어 교회와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 한다. 여기에 동로마(비잔틴) 제국의 황제의 원조 요청은 '이교도에게 핍박받는 그리스도 형제를 살린다'는 훌륭한 대의명분을 제공했다.


 황제 하인리히는 아직 서른여덟 살. 카노사에서 당한 굴욕을 잊지 않은 황제는 군사력으로 교황을 몰아붙임과 동시에 교회 내부를 분열시킴으로써 대립교황을 선출하게 했다. 로마 교황이 지닌 권위를 뿌리째 무너뜨리는 책략을 부린 것이다.(p17)... 8백년 가까운 세월 동안 로마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궁전에조차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교황. 이것이 프랑스 땅에서 십자군을 제창하기 전 우르바누스 2세(Urbanus PP. II, 1088 ~ 1099가 처해 있던 실상이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18


 그렇지만, 동로마제국 황제 역시 그리스도 형제들에게 순수한 형제애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황제는 서유럽의 십자군을 활용해 이슬람을 격퇴하고, 아울러 과거 소아시아를 지배한 제국의 영광을 찾을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알렉시우스(Alexius I Comnenus, 1048 ~ 1118)는 제후들이 오리엔트 땅에서 하려는 군사 행동에 대해서는 찬동한다. 오리엔트에 자신들과 같은 강력한 그리스도교도의 나라가 생기는 것도 찬성했는데, 그것은 이슬람 세계와 비잔틴제국 사이의 완충지대가 되기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지원은 약속하지만, 그 대신 제후들을 비잔틴제국 황제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70


 그렇다면, 십자군 전사들은 어떠한가. 주로 제후(諸侯)들로 구성된 십자군 원정부대는 본국에서 땅을 상속받지 못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야하는 이들이었다. 성직자 또는 하급기사 신분을 면치못했을 무력이 출중한 이들에게 십자군 원정은   실리와 명분을 함께 제공하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실제로 고드프루아(Godefroy de Bouillon, 1060 ? ~ 1100)과 동생 보두앵 1세(Baudouin, 1058년? ~ 1118)는 이를 통해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될 수 있었다.


 노르망디 공작에 블루아 백작, 툴루즈 백작, 로렌 공작... 그 시대의 공작, 후작, 백작, 남작이란, 자기 힘으로 획득하고 자기 힘으로 유지하는 영지의 주인이고, 그것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군사력으로, 핏줄로 이어진 일족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50


 예전에는 성직자의 길에서 실패했고 영지도 상속받지 못한 신분에 지나지 않았던 보두앵은, 그리스도교도들이 동경하는 땅인 성도 예루살렘의 왕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는 데 불과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제1차 십자군의 주역인 제후들 중 몇 명은 오리엔트로 온 후 인간으로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는데, 보두앵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293


 비록 전쟁 초기 니케아에서 궤멸했지만, 군중십자군(People's Crusade)도 여기에 더해진다. 11세기 농업생산량이 증가되는 상황에서 농지(農地)에 정착하지 못한 빈민(貧民)들이 생계가 어려워 '요단강을 건너' 신국(神國)에 들어가기 위해 모인 군중 십자군(민중 십자군)은 중세인들의 또다른 욕망 분출 형태였다.


 성지에서 벌어지는 이슬람교도의 횡포를 한탄하며, 지금 당장 성지를 탈환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서 자라고 죽은 땅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아오자고 호소하는 피에르의 열변은, 남기고 갈 자산도 없고 갖가지 채비를 갖출 여유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중세의 하층민에게는 일상 생활 자체가 이미 가혹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십자군 참가는 그 혹독한 나날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민중 십자군'이 형태를 갖추어갔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33


 이처럼 십자군을 주도하고 구성한 세력들은 각자 저마다의 욕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신(神)'의 이름 아래 욕망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그 욕망의 지향점은 성도 예루살렘이으며, 잃을 것이 없던 이들은 여기에 그들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반면, 지향점을 갖고 있던 이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것을 함께 지켜야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갖지 못했고, 분열된 상태에서 각개격파당하고 만다.


 1097년 봄, 제후들이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의 소아시아는 셀주크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렇지만 한 지배자 아래 통일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셀주크투르크 내의 두 부족이 영토 확장을 놓고 서로 싸우고 있었다. 크게 나눠보면 소아시아 서쪽은 니케아에 본거지를 둔 킬리지 아스슬란이, 동쪽은 코니아에 본거지를 둔 다니슈멘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몇 년 전부터 전쟁 상태에 있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83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십자군 이야기 1>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는 이들의 서로 다른 욕망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서 거세게 분출되었을 때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의 잘못된 분출의 결과가 십자군들이 안티오키아와 예루살렘 함락 후 저지른 광기 어린 학살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한편, 예루살렘 성지 수복 이후 벌어진 학살에 대한 시오노 나나미의 평가는 다소 냉소적이다.


[그림] 제1차 십자군 전쟁과 예루살렘 정복 (출처 : https://www.aljazeera.com/programmes/the-crusades-an-arab-perspective/2016/12/shock-crusade-conquest-jerusalem-161205081421743.html)


 이교도만 보면 가리지 않고 죽이던 사람들이 이날은 제단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었다. '성도 예루살렘 해방'은 1099년 7월 15일에 드디어 성취되었다. 유럽을 뒤로한 지 3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_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1>, p239


 선(善)과 악(惡)이 별도의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 안에 공존한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그렇지만, 저자의 이후 주장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선'과 '악'이 섞인 상태가 우리 인간의 상태라면 처음부터 교정이 가능할까. 어떤 기준으로 교정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최선은 '중용 中庸'에 가까워지는 길이고, 끊임없는 수양이 필요한 것은 아닐런지. 


 저자는 무슨 기준을 가지고 교정을 말하는 것이며, 성과를 말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교정의 성과가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간을 현혹하고 조정해온 것이 오히려 우리의 문명(文明)이 아닐까. 역사 이래로 이런 현혹이 계속되어온 점을 생각해 본다면, 교정하려는 노력의 성과가 신통치 않은 것이 아니라, 이용하려는 노력의 성과가 꾸준한 것이 더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의 전후를 다룬 <십자군 이야기 1>는 예루살렘 왕국과 주변 제후국들의 수립을 마지막으로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십자군 이야기 2>에서는 단결된 이슬람 세계의 반격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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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 20세기 모든 이념들의 격전장
앤터니 비버 지음, 김원중 옮김 / 교양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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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게르니카 Guernica>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189080884326729862/)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 1973)의 그림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장시 게르니카 지역 일대에서 독일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스페인 지역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화 진영과 프랑코(Francisco Paulino Hermenegildo Teodulo Franco y Bahamonde, 1892 ~ 1975)의 국민정부간의 3년간 전쟁을 우리는 스페인 내전이라 부른다. 우리와 멀리 떨어진 스페인 내전은 얼핏 우리와 상관없어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 보면 전쟁의 성격면에서 우리에게 낯선 전쟁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데올로기적, 종교적 기원(祈願)은 폭력을 위도적으로 추상화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과 개인적 책임을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아우라를 지닌 대의명분 속에 감추도록 장려하는 그런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p730)... 스페인 내전은 나치 정부가 전쟁 발발 직후부터 인정했듯이, 새 무기와 새 전술의 완벽한 시험 무대가 되었다.(p731) <스페인 내전> 中


 스페인 내전은 여러 면에서 한국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외세 개입이라는 공통 분모 위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술, 무기의 시험대가 스페인 내전이었다면, 종전(終戰) 후 남은 재고 처리를 한 전쟁이 한국 전쟁이기에, 길게 본다면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끝은 각각 스페인 내전과 한국전쟁이 자리한다 할 것이다.


 가장 논란거리가 되었던 문제는 외세의 개입이 전쟁에서 결정적 요소였는가 하는 점이다.(p732)... 프랑코를 지지하는 역사가들이 주장하듯이, 소련의 개입이 1936년 11월 공화 진영의 마드리드 수호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독일과 이탈리아 군대가 국민군이 승리하는 쪾으로 전쟁 기간을 크게 단축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p733) <스페인 내전> 中


 반면, 스페인 내전 결과 프랑코의 반란군에 의해 스페인은 통일이 되었지만, 한국은 분단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전쟁의 직접적인 결과는 차이를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의 분단 결과가  저자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1946 ~ )가 예상한 미래의 스페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페인 내전의 의미는 우리에게 보다 각별하게 다가온다.


 어떤 정부가 집권했더라도 전후 몇 년 동안 스페인은 절망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나타난 모든 것은 그때 어떤 형태의 체제가 등장했는가에 따라 달라졌을 것이다. 완전하게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섰더라면 1948년 미국으로부터 마셜 플랜의 원조를 받았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비교적 자유로운 경제를 통해 분명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950년경에 경제 회복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권위주의적인 좌파, 즉 공산주의 정부가 들어섰더라며 스페인은 중부 유럽이나 발칸 반도의 인민공화국들과 비슷한 나라로 1989년 이후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p740) <스페인 내전> 中


 <스페인 내전 The Battle for Spain>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리뷰를 통해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로 글을 마무리한다...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 Masacre en Corea> (출처 : https://gr.pinterest.com/pin/686095942990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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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 빈 현대의 고전 5
칼 쇼르스케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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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자유주의 문화는 합리적 인간을 중심으로 한다. 합리적 인간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지배와 자기 자신에 대한 도덕적 통제를 통해 훌륭한 사회를 만들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모았다. 20세기에 접어들자 합리적 인간은 그보다 더 풍부한 내용을 지녔지만 더 위험하고 변덕스러운 존재인 심리적 인간에게 밀려났다. 이 신新 인간은 그저 합리적이기만 한 동물이 아니라 감정과 본능을 지닌 생물이다.... 19세기 빈 자유주의 문화는 서로 전혀 화합하지 못하는 도덕적 요소와 심미적 요소로 기묘하게 나뉘어 세기말 지식인들에게 그들 시대의 위기에 직면할 지적 도구를 제공했다.(p49) <세기말 빈> 中


 칼 쇼르스케(Carl E. Schorske, 1915 ~ )는 <세기말 빈 Fin-De-Siecle Vienna>에서  19세기 말 직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 빈을 배경으로 자유주의 사상의 등장과 퇴조라는 사상의 변화를 쫓는다. 정치, 건축, 정신분석학, 미술, 음악의 여러 분야를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라는 사상의 흐름을 통해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정치와 문화가 결코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 또한 우리에게 알려준다.


 저자는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bourgeois) 계급에서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다른 특징을 발견한다. 대혁명을 통해 귀족 계급을 몰아낸 프랑스나 산업자본을 통해 귀족의 권위를 대체한 영국 부르주아와는 달리 오스트리아에서는 부르주아들 스스로 귀족 계급에 동참하려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으며, 문화/예술에 있어서는 귀족계급의 지원을 받은 예술가과 그들의 작품들은 체제의 순종을 강요하면서 어용(御用)예술로 변질되어 갔다는 점에서 다른 유럽국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오스트리아의 부르주아가 프랑스나 영국의 부르주아와 구별되는 기본적인 사회적 사실 두 가지가 있다. 그들은 귀족정치를 없애버리지 못했고 귀족들에게 완전히 녹아들어가지도 못했다. 또 그러한 취약성 때문에 황제를 경원하면서도 아버지 - 보호자 같은 존재로 여기고 그에게 의존했으며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독점적인 권력을 쟁취하지 못한 탓에 부르주아는 항상 어딘가 국외자 같은 존재였고, 귀족계급과 통합하려고 애썼다. 수도 많고 부유한 빈 거주 유대인 세력은 동화되려는 성향이 강했으므로 이 같은 추세를 더 강화시킬 뿐이었다.(p53) <세기말 빈> 中


 귀족계급 문화에 들어가는 둘째 길은 전통적으로 번영해온 공영예술의 후원을 통해서였다. 1890년대가 되면 중산계급 상류층이 떠받드는 영웅은 이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배우, 화가, 평론가였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빈의 중산계급 사회에서 예술이 발휘하던 기능이 변했고, 이 변화에서는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p54)...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에 예술에 몰두하는 이들이 한 사회 계급에서 고립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빈에서만은 그런 예술이 사실상 한 계급 전체의 충성을 요구했다.(p55) <세기말 빈> 中


 이러한 오스트리아 사회의 특수성은 서유럽이 혁명의 분위기에 휩싸이던 시기에도 제국을 보호하는 힘이 되었다. 심지어, 1860년대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자유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에 이루어진 경제성장의 결과마저도 귀족문화의 확산으로 바꿀 정도였는데,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쇤베르크(Arnold Schonberg, 1874 ~ 1951)가 거부했던 오스트리아 전통의 힘 때문이었다.


 사회학적으로, 문화의 민주화란 중산계급의 귀족화를 의미한다. 예술이 그토록 중심적인 사회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예술 자체의 발전에 극히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의 경제가 성장한 결과, 더 많은 가정에 귀족적 생활 스타일을 추구할 기반이 마련되었다.(p437) <세기말 빈> 中


 쇤베르크는 예술이 진리를 부패시키는 데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 고발 속에서 오스트리아 전통을 성장시킨 주요한 힘들에 대한 전적이고도 포괄적인 거부의 음성이 울려나온다. 그 힘이란 말씀이 육화되고 육체로 가시화된 가톨릭의 은총의 문화, 부르주아들의 법 우선적 문화를 보충하고 승화시키기 위해 세속적으로 적용된 품위의 문화,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세기말의 자유주의의 위기에서 예술 그 자체를 가치의 근원으로, 종교의 대체물로 보려한 태도 등이다.(p522) <세기말 빈> 中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보수주의의 중심이었던 '비인 체제'와 이를 이끈 외상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Furst von Met´ternich, 1773-1859)후작의 나라답게 오스트리아 제국은 혁명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이는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었다. '게르만주의'와 '슬라브주의'의 충돌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자유주의 정부의 붕괴는 제국 내 발칸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로 만들었고, 반(反)자유주의 운동은 반(反)유대인 운동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사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암살 사건(출처 : https://www.history.com/news/did-franz-ferdinands-assassination-cause-world-war-i)


 오스트리아 사회는 질서와 진보라는 자유주의적 좌표를 따라가지 못했다. 19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자유주의자들이 상류계급에 대항하여 고안해낸 프로그램이 낳은 결과는 하층계급의 폭발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이 대중의 정치적 에너지를 해방시키는 데는 성공했겠지만, 그 저항 에너지는 그들의 숙적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을 향해 폭발했다. 귀족계급의 국제주의에 맞서기 위해 게르만 민족주의를 고안했지만, 그들에게는 슬라브 애국주의자들의 자치권 요구라는 응답이 돌아왔다.(p190)<세기말 빈> 中


  귀족계급 압제의 시녀라는 죄목으로 학교와 법정에서 발본색원되었던 가톨릭교는 농민과 장인들의 이데올로기라는 모습으로 복귀했는데, 이들이 볼 때 자유주의는 곧 자본주의였고 자본주의란 유대인을 의미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위쪽에 있는 옛 지배계급에 대항하여 대중을 다시 불러 모으기는커녕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의 깊은 내면으로부터 전반적인 해체의 힘을 불러낸 것이다.(p191)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에서는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자유주의 정부에서 이루어진 공공사업(건축)이 어떻게 빈을 변화시켰는지와 자유주의 정부의 붕괴가 시오니즘(Zionism )을 발생시켰는지, 유대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 1939)는 반유대주의라는 정치운동을 어떻게 정신분석을 통해 극복하려 했는지,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는 분리주의를 이끌면서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했으며, 쇤베르크가 불협화음을 통해 기존 질서를 부정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러 분야에서 이루어진 서로 다른 변화가 정치와 긴밀하게 관계맺고 있음을 독자들을 깨닫게 된다. 


 빈을 지배한 자유주의자들이 이룬 가장 성공적인 업적 가운데 일부는 극적인 효과와는 전혀 거리가 먼 기술적인 작업으로 얻어졌고, 그 작업은 이 도시가 급속히 늘어나는 인구를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안전하게 수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러 세기 동안 도시를 괴롭혀온 범람을 막기 위해 다뉴브 강에 운하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1860년대에는 도시 전문가들이 우수한 상수도 공급 시설을 개발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던 시 당국은 1873년에 최초의 시립 병원을 개원하면서 공공 보건 시스템이 정비되자 심각한 전염병들이 사라졌다.(p79) <세기말 빈> 中


 프로이트의 정치 이론의 중심 원리란 모든 정치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일차적 갈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이롭게도 '혁명적 꿈'의 시나리오에 바로 이 결론이 담겨 있다. 정치적 만남에서 학계로의 도피를 거쳐 툰 백작을 대체 한 아버지에 대한 정복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부친 살해가 권력 살해를 대체하고 정신분석이 역사를 극복한다. 정치는 반 反정치적 심리학에 의해 중립화된다.(p295)... 프로이트는 과학적 해방자가 되어 빚을 갚게 될 것이다. 그는 한니발의 서약을 자신의 반정치적 발견에 의해 해소했다. 즉 인간 행동을 결정하는 데서 유년기 경험이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의 발견이 그것이다.(p296) <세기말 빈> 中


[그림] Klimt, Pallas Athene(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48184614925603529/)


 클림트와 분리파는 두 방향으로 오토 바그너의 이상에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현대에 대한 몰입을 강화시켰고 링슈트라세의 역사적 스타일을 대체할 새로운 시각 언어를 그에게 제공했다... 현대 인간에 대한 클림트의 추구는 본질적으로 비교 秘敎적이고 내면적인, 1890년대 초반의 문학에 이미 나타나 있던 '심리적 인간 homo psychologicus'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거울에 비친 현대성의 얼굴은 이와 얼마나 다른가. 그것은 활동적이고 효율적이며 합리적이고 멋쟁이인 부르주아, 시간은 별로 없는 반면 돈은 많으며 기념비적인 것을 좋아하는 도시인의 얼굴이다.(p153) <세기말 빈> 中


 이 세기가 시작되기까지 서구의 전통적인 심미적 문화는 구조를 표면에 배치해 그 아래에 억눌려 있는 감정의 본성과 생명을 통제하도록 했다. 심리적 표현주의자인 쇤베르크는 표면이 깨지고 통제 불가능한 우주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취약한 인간적 감정의 전 생명력으로 충만한 예술을 청중에게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혼자 힘으로 그 혼란을 통합하게 될 잠재의식적이고 귀에 들리지 않는 합리적 질서의 세계를 그 아래쪽에 배치해두었다. 여기서 해방된 불협화음은 새로운 화음이 되고 심리적 혼란은 미적 감각을 뛰어넘는 질서가 된다.(p524)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에서는 이와 같이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오랜 중부 유럽의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변화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로 회귀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유주의-반(反)자유주의'의 투쟁이 드러난다. 비록 19세기 후반 자유주의는 세력을 잃게 되지만, 그들이 집권과정에서 보여준 성과는 결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자유주의가 주도권을 잡았던 짧은 시기에 교양과 부의 통합은 놀랄 만큼 구체적인 사회 현실이 되었다. 행동과 성찰, 정치와 경제, 과학과 예술, 이 모든 것이 현재 안정적인 생활을 누리며 자기들이 지지하는 인류의 미래를 확신하는 사회적 계층의 가치 체계 속에서 통합되었다. 새로운 도시계획에서, 살롱의 생활에서, 가족의 에토스에서, 모든 곳에서 희망에 찬 합리주의적 자유주의의 통합적 신조가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p438) <세기말 빈> 中


 개인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의 실패는 가진 민중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민중을 구원하는 수단으로서 제시한 '예술'과 경제의 번영은 중산층의 귀족계급에 대한 열망을 부추겼을 뿐으로 이들을 자유주의 지지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반면, 시오니즘의 창시자 헤르츨(Theodor Herzl, 1860 ~ 1904)의 대중에 대한 관점은 사뭇 다르다. 수동적인 민중과 능동적인 대중. 다중에 대한 지도층의 이러한 의견 차이가 오스트리아-헝가지 제국의 해체와 이스라엘의 건국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지테의 민중 개념은 리하르트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 1883)의 개념을 정확하게 뒤따르고 있다. 즉 '민중 Volk'은 보수적이고 속물주의에 빠지기 쉽지만 또한 천재의 호소에 부응할 수 있고 가장 심오한 가치를 깨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와 지테에게서 민중은 프랑스 혁명 이론가들이나 마르크스에게서처럼 정치에서의 능동적 요소가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이고 보수적이며, 현대적이고 파괴적인 하향식 전복자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구원자인 예술가는 파우스트처럼 보수적(산업 시대 이전의)민중을 무자비하게 파괴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과 연대함으로써 진보를 이뤄낼 것이다.(p135) <세기말 빈> 中


 헤르츨의 시오니즘의 원래 전략에서 대중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한편으로 그들은 엑소더스의 기동타격대가 되고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부유한 유럽 유대인들을 강요하여 시오니스트 해결책을 지원하도록 만들 몽둥이가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새로운 국가의 운반자인 게토의 유대인, 무기로서의 게토 유대인이다.(p257) <세기말 빈> 中


 <세기말 빈>은 이처럼 우리에게 생소한 중부 유럽 제국의 황혼(黃昏)을 배경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프로이트, 클림트, 쇤베르크가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의 실로 꿰는 이들의 사상과 작품 속에서 진(眞)과 미(美)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구현되는지를 확인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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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4-2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부터 인스타 이웃님의 리뷰를 보고
쟁여둔 요제프 로트의 <라데츠키 행진곡>
을 읽기 시작했는데, 겨호님이 읽으신
<세기말 빈>과 시대상이 비슷하게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이라는 정치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세기말 빈>은 좀 더 문화적
측면이 강조된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슬라브 삼중제국
까지 고려했다는 점은 미처 몰랐습니다.
티토의 유고 이전에 이미 합스부르크 제
국의 민족 통합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도
한 수 배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0-04-27 18:01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을 듣고 <라데츠키 행진곡>을 찾아보니 말씀하신대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작품이네요. 저 역시 좋은 작품을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문학작품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뼈대 위에 입힌 살갗과 같기에, 시대에 대한 이해가 작품을 깊이 감상하는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정치적, 경제적 이해 없이 단순히 이념만으로 민족과 나라를 통합하려는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레삭매냐님 글을 통해 생각해봅니다.^^:)
 
프리메이슨 -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비밀 결사체
폴 제퍼스 지음, 이상원 옮김 / 황소자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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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반 프레이거 ivan Frazer와 마크 비스턴Mark Petain이 쓴 「 형제애 단체와 사회조작 The Brotherhood and the Manipulation of Society」을 보면 프리메이슨을 둘러깐 의혹의 한 가지 사례가 나타나 있다. ‘엘리트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회원 모집은 프리메이슨의비밀 결사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진다. 성전 기사라고 알려진 그리스도 군대 조직은 십자군 전쟁 당시 막대한 부와 지식을 얻었다. 11~13세기에 이루어진 원정은 진정한 그리스도교도들을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살육 현장으로 내몰았다.

프리메이슨에 대한 또 다른 시각으로는 ‘일원론적 범신론을 진흥시키기 위해 새로운 New Agers와 협력해왔다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원죄를  스스로  깨닫고  변화하게 되는 인간의신성함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프리메이슨의 의식들은 고대 이집트의 수수께끼를 새로운 세계 질서에 되살린다는 목적을 가진다고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비밀 형제애 결사는 더이상 수수께끼하에 있지 않다. 이와 함께 프리메이슨이 무언가 음모를 획책하고있다는 걱정도 누그러들었다. 하지만 ‘드라마 의식에서 표현되는철학적 · 종교적 체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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