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내달리면 좋은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짧은 주(柱)는 화음의 소리를 모자라게 하며, 지난 시기의 묘책도 마침내 오늘날을 맞아서는 추구(芻狗)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진·한(秦·漢)의 잘잘못을 살펴보고, 시사(時事, 시기에 어울리는 일)로써 적합하고 마땅한 것을 고려하며, 조박(糟粕, 찌끼)은 버릴 것인지를 심사하시고, 거려(?廬)가 모름지기 부숴버려야 할 것을 깨닫고, 처비(?菲, 紋彩)가 있는 아각(牙角, 피리)을 제거하며, 간악하고 음험한 봉망(鋒芒, 무기의 끝날)을 둔하게 하고, 벌려 놓은 법망의 근원을 막아서 붕당의 흔적을 쓸어버려 천하의 창생들로 하여금 마음 편하면서 크게 기뻐하여 따르게 한다면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태후는 비록 녹위(祿位)를 남용하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수렴하였지만, 그러나 직책에 맞지 않는 자는 얼마 안 가서 역시 이를 쫓아냈는데, 혹 주살의 형을 덧붙였다. 형벌과 은상(恩賞)의 칼자루를 잡고서 천하를 다스리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자신을 통해서 나오므로 밝게 통찰하고 잘 결단을 내렸으니, 그러므로 당시에 뛰어난 재능이 있거나 현명한 사람들 역시 다투어 기용되려 하였다.

2월 병자일(16일)에 신라(新羅)의 왕인 김정명(金政明, 신문왕)이 죽어서 사신을 파견하여 그 아들인 김리홍(金理洪, 효소왕)을 세워서 왕으로 삼았다.

오기(吳起)가 장차 전투를 하려고 하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검(劍)을 올리자, 오기가 말하였습니다. ‘장수라는 사람은 북을 들고 북채를 휘두르며, 적과 마주쳐서는 의심되는 곳이 있더라도 결단을 내리는 일이고, 한 자루의 칼로 맡을 일은 장군의 일이 아니다.’ 그러니 헛된 글이 어찌 한 시대를 충분히 도울 수 있으며, 활쏘기를 잘하는 것이 어찌 적을 이기기에 충분하게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생명은 지극히 소중하여, 죽으면 두 번 다시 살 수 없으며, 만일 억울함을 품고서 할 말을 삼키고 적족(赤族) 당한다면, 어찌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간사하고 반역한 자들을 숙정(肅正)하여 형률(刑律)을 명확하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고, 다만 위복(威福)을 신장시키고, 의구심(疑懼心)만 낳게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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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 호랑이님!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 ∧♛∧ .+° °*.
(ヾ( *・ω・) °・ 🎁
`し( つ つ━✩* .+°
(/しーJ

겨울호랑이 2021-12-24 15:19   좋아요 0 | URL
scott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성탄 보내세요! ^^:)
 

무릇 감옥에 갇힌 죄수는 대부분 극단적인 판결을 받고 있지만 도로에서 논하는 것은 혹 올바르다고 하고, 혹 잘못되었다고 하니, 폐하께서는 왜 그들을 모두 불러서 만나보지 않고 스스로 그들의 죄만 꾸짖습니까?

죄가 실제로 있는 것이면, 분명한 형벌을 드러내어 알리시고, 남발된 것이라면, 옥리(獄吏)를 엄하게 혼내시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복종하게 하여 사람들은 정치와 형벌을 알게 하는 것이 어찌하여 지극한 덕(德)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다조의 집안은 대대로 말갈족(靺鞨族)의 추장이었는데, 전쟁의 공로로 들어와서 숙위(宿衛)할 수 있었다. 흑치상지는 상으로 하사품을 받을 때마다 모두 장교와 사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는 좋은 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군사가 상해를 입히자 관속(官屬)이 그에게 볼기를 치는 형벌을 주라고 요청하니, 흑치상지가 말하였다. "어찌 개인의 말 때문에 관병(官兵)에게 볼기를 치겠는가?" 끝내 묻지 않았다.

권력은 신하들에게서 말미암아서 살피고 신중한 방법이 되지 아니하여, 만약 원통함이 넘쳐도 폐하께서 어디로부터 알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구품(九品) 관리가 명령을 오로지하여 심문하고 조사하며 죽이거나 살리는 칼자루를 조정하며 군주의 위세를 훔치게 되어, 규찰하고 심문하는 일은 이미 추관(秋官)에게 있지 않게 되었으며, 살펴서 심사하는 일은 다시는 문하성(門下省)을 거치지 않아도 되어, 나라의 이로운 기구를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빌려줌으로써 아마도 사직의 화가 될까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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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본래 모습은 마땅히 업무를 위임하고 성공할 것을 책임지우는 것이며, 위임한 자가 마땅하다면 쓰인 자도 자연히 면밀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무릇 천하가 크고 사대부도 많지만, 이를 몇 사람의 손에 맡기고 도필(刀筆)을 채용하여 재주를 헤아리고 부서(簿書, 장부)를 조사하여 덕행을 살피므로, 설사 공평하기가 저울과 같고 밝기가 물과 거울과 같다고 해도 오히려 능력에는 끝이 있고 비추어 보는 것에도 한계가 있는데, 하물며 위임된 사람이 그에 적합하지 않다면 어리석고 어둡고 아부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재상은 폐하의 배와 심장이고, 자사와 현령은 폐하의 손과 발입니다. 배·심장·손·발을 가지지 못하고서 자기 홀로 잘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천하에는 위험한 기틀이 있는데, 화(禍)와 복덕은 그것으로 인하여 생깁니다. 기틀이 조용하면 복덕이 생기고, 기틀이 움직이면 화(禍)가 발생하는데, 백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릇 큰 옥사(獄事)가 한 번 일어나면 남발되지 못하게 할 수 없고, 억울한 사람들이 탄식하면 화합의 기운을 상하게 하여 곳곳에 유행병을 발생시키고 홍수와 가뭄이 그것을 뒤따라와서 사람들이 생업을 잃게 되니, 화란(禍亂)을 일으키려는 마음은 두려워하는 가운데서도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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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에 신라왕 김법민(金法敏, 30대 문무왕)은 이미 고려의 배반한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고 사람을 시켜서 이를 지키게 하였다. 황상은 크게 화가 나서 조서를 내려서 김법민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그의 동생인 우교위원외(右驍衛員外)대장군·임해군공(臨海郡公)인 김인문(金仁問)이 경사에 있었는데, 세워서 신라왕으로 삼고, 귀국하게 하였다.

무릇 사람이 명성을 사모하는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고, 윗사람이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 심하게 됩니다. 폐하께서 만약에 인재를 뽑는데 덕행을 먼저로 삼고, 문예를 끝으로 삼으신다면 많은 인재들이 우렛소리처럼 달려들어서 사방에 바람이 일 것입니다.

애초에, 유인궤(劉仁軌)가 군사를 이끌고 웅진(熊津)에서 돌아오자 부여융(扶餘隆)은 신라의 압박을 두려워하여 감히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얼마 후에 역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2월 정사일(24일)에 공부상서 고장(高藏,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遼東州)도독으로 삼고, 조선왕(朝鮮王)으로 책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게 하여 고려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安撫)하게 하였다. 고려의 먼저 여러 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보내어서 고장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또 사농경 부여융을 웅진(熊津)도독으로 삼고, 대방왕(帶方王)에 책봉하여 또한 돌아가서 백제(百濟)의 남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며 이어서 안동(安東)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서 그들을 통괄하게 하였다.

이때에 백제는 황폐화 되고 부서져서 부여융에게 명령하여 고려의 경계에 우거(寓居)하도록 하였다. 고장이 요동에 이르자 반란을 하기로 모의하고 몰래 말갈(靺鞨) 사람들과 내통하였는데, 불러서 돌아오게 하여 공주(?州, 사천성 공래현)로 옮겼더니 죽었으며,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 황하 이남)과 농우(?右, 농산의 서쪽)에 있는 여러 주에 흩어서 옮기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안동성의 옆에 머물게 하였다.

고려의 옛날 성은 신라에 병합되고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서 말갈과 돌굴(突厥)로 들어갔고, 부여융 역시 끝내 감히 옛날 땅으로 돌아가지 못하니 고씨(高氏)와 부여씨는 드디어 망하였다.

옛사람의 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지니는 습속이 없지만, 정치에는 잘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한 것이 있고, 군사에는 강약의 구분이 없지만 장수는 교묘한 사람과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장수를 고르는 것은 지략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며 용기와 힘을 맨 끝으로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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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무오일(8일)에 웅진도(熊津道)행군총관·우위위(右衛威)장군인 손인사(孫仁師) 등이 백제의 남은 무리와 왜병(倭兵)을 백강(白江)에서 깨뜨리고 그들의 주류성(周留城, 백제의 임시 도읍지)을 뽑았다.

흑치상지는 두려워서 주위에 있던 10여 명과 더불어 숨어서 본부로 돌아가서 도망하여 흩어진 사람들을 거두어 모아서 임존성(任存城)을 지키면서 목책을 묶어서 스스로 견고하게 하였는데, 열흘에서 한 달 사이에 귀부한 사람이 3만여 명이 되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공격하였고 흑치상지는 막으며 싸웠는데 당의 군사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흑치상지가 다시 200여 개의 성을 빼앗자 소정방은 이길 수가 없어서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해외에 남겨두어 고려와 백제를 없애려고 하지만 고려의 옛날 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 돕고 왜인(倭人)은 비록 멀리 있지만 역시 함께 영향을 주고 있는데, 만약에 진수하는 병사를 없애면 다시 한 개의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고려의 천개소문(泉蓋蘇文)이 죽었고 맏아들인 연남생(淵男生)이 대신 막리지(莫離支)가 되었다. 처음 국정을 처리하게 되자 나가서 여러 성을 순시하면서 그의 동생인 연남건(淵男建)과 연남산(淵男産)으로 하여금 남아서 후사(後事)를 처리하게 하였다.

"수 양제가 동쪽 정벌을 떠나서 이기지 못하였던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고 원망하였던 연고입니다. 먼저 돌아가신 황제께서 동쪽 정벌을 가셨다가 이기지 못한 것은 고려에 아직은 틈새가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지금 고장(高藏)은 미약(微弱)하고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명령을 멋대로 부리며 연개소문이 죽자 연남건의 형제들이 안에서 서로 공격하고 빼앗으며, 연남생이 마음을 기울여서 속으로 귀부하여 우리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니, 저들의 사정과 속임수는 이를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고려의 백성들 가운데 이반(離叛)하는 사람이 많아서 칙령을 내려서 고려의 호구 3만8천200을 장강과 회수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에 있는 여러 주(州)의 텅 빈 땅으로 옮기도록 하고 그들 가운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남겨서 안동(安東)을 지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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