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동안 사상사가(思想史家)는 은주(殷周) 두 시대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서주는 은상과 비교해 볼 때 근본적인 변화를 낳은 시대였다. 이러한 인상은 고대의 산발적인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가령 은인(殷人)은 귀신을 숭배하지만 주나라 사람은 하늘을 공경하고 인간을 중시하였다. 근대 왕국유(王國維)의 <은주제도론 殷周制度論> 또한 이러한 인상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p236)... 그래서 나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데, 그것은 은상이 중국의 지식, 사상과 신앙의 주류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나라 왕조는 본래 서쪽 모퉁이의 작은 나라였는데, 이후 크게 발전한 것은 단지 은상의 문화를 계승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_ 거자오광, <중국사상사 1 >, p238


 일반적으로 우리는 중국 고대사(古代史)에서 은殷(상商)나라는 갑골문(甲骨文)을 바탕으로 신의 뜻에 따라 지배한 제정사회로, 반면 주(周)나라는 봉건제(封建制), 종법제(宗法制), 관료제, 정전제(井田制) 등의 제도를 확립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거자오광(葛兆光, 1950 ~ )의 <중국사상사>는 두 시대의 문화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계승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상나라와 마찬가지로 주나라 역시 조상의 음덕(陰德) 등 하늘의 뜻(天命)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 있어 예(禮)로 대표되는 인문(人文)의 중요성이 나타난 점이 구별되는 특질이다. 


 또한 은상과 마찬가지로 주나라 시대 사람들도 조상 신령의 음덕을 매우 중시했다. 다만 그들은 '하늘'의 의지를 가치의 궁극적 귀의처로 생각하는 것 외에 '인간'의 감정도 가치의 합리적 근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마음과 그것의 외향적 확대는 인간들 간의 조화로움의 기초이고, 혈연을 비롯해 그에 상응하는 원근(遠近)의 분별은 사회 질서의 근원이다. '예(禮)'는 사회가 인정하는 상징성의 규칙이 되었고, 이러한 규칙에 의해 세계는 질서를 확립했다. _ 거자오광, <중국사상사 1 >, p241


 이러한 거자오광의 주장은 공자(孔子, BC 551~BC 479)의 <논어 論語>를 풀이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의 <논어고금주 論語古今註>의 해설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다. 공자가 따르겠다고 한 주나라의 문(文)은 상나라의 질(質)을 포함하고 조화를 이룬 것으로 봐야한다는 다산의 해설 역시 상나라-주나라의 관계를 단절이 아닌 계승 발전의 관계로 파악한다는 생각이 든다. 


子曰(자왈) : "周監於二代(주감어이대) 郁郁乎文哉(욱욱호문재) 吾從周(오종주)." 공자는 말하기를 "주나라는 이대 二代를 비추어 살펴보았으므로 문물이 찬란하도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_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 14장(章)


 무릇 물(物)에는 질(質)이 있은 뒤에 문(文)이 있는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문채가 어우러져야 불문(黻文)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순전히 검은색만으로는 어떻게 문채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할 때, 주나라의 문(文)은 이럿이 바로 문과 질을 모두 구비하여 찬란하게 아름다운 것이다(p339)... 살펴보건대, 공자는 여러 번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대개 그가 주공 周公이 만든 예(禮)에 대해서는 이를 받들어 가슴속에 새겨놓았던 것이라고 보인다. _ 정약용, <논어고금주 1>, p341


 이제 불과 50여일을 앞둔 차기 대선을 앞두고 때아닌 무속(巫俗)문제가 이슈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영(靈)적인 면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종교 교단들의 영향력과 사회의 어두운 면에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종교의 폐단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 한국은 너무 질(質)적인 것에 편중된 것은 아닐런지... 우리 사회에 '문'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또 하나의 '질'이 추가되는 것을 경계하고, 보다 나은 내일이 되기 위해 공자의 "吾從周(오종주)"의 의미를 되기며 오늘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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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2-01-22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 중국정치사상사 1권 공부가 얼추 마무리되면 이 책을 읽어야 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1-22 12:21   좋아요 0 | URL
김민우님께서 읽으신다면 흥미롭게 읽으실 책이라 생각됩니다. 즐거운 독서되세요!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군자(君子)는 다른 사람들보다 들뜨게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데, 상곤(常袞)이 봉록을 사양한 것은 염치가 있는 것이니, 무릇 자리를 굳게 지키며 봉록을 탐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낫지 아니합니까!"

신 사마광이 말씀드립니다. "신이 듣기에 사람을 쓰는 것은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 그리고 신진 인사와 옛날 사람 사이에 다름이 없어야 하고, 오로지 어진 사람이냐 불초한 사람이냐를 헤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아직은 반드시 어질지 아니한 데도 친하고 오래 사귀었다 하여 그를 채택한다면 진실로 공평한 것이 아니고, 참으로 어진데도 가까이 있고 오래 사귀었다 하여 그를 버리는 것도 역시 공평한 것이 아닙니다."


평로(平盧, 치소는 청주, 산동성 청주시)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먼저 치(淄)·청(靑)·제(齊)·해(海)·등(登)·내(萊)·기(沂)·밀(密)·덕(德)·체(?)의 열 주(州)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이령요(李靈曜)가 난을 일으키자 여러 도(道)가 군사를 합쳐서 공격하여 얻은 땅은 각각 갖게 되어 이정기는 또 조(曹)·복(?)·서(徐)·연(?)·운(?)의 다섯 주(州)를 얻었고, 이어서 청주(靑州)에서 운주(?州)로 치소를 옮기면서, 그의 아들인 예전의 치주(淄州) 자사였던 이납(李納)으로 하여금 청주를 지키도록 하였다.

이정기는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매우 엄하여 있는 곳에서는 감히 짝하여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법령이 가지런하게 하나로 되었고, 부세는 고르면서도 가벼웠으며, 병사 10만 명을 갖고 있으면서 크게 동방(東方)을 점거하였으므로 이웃의 번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은 경계 안에서 보루를 쌓고 무기를 수선하느라고 허비하는 날이 없게 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중국에서 명목상 번신(藩臣)으로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은 만맥(蠻貊)처럼 다른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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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황상의 뜻이라고 하면서 백관들에게 일깨워 주었다. "요즈음 여러 관사(官司)에서 주문을 올리는 일이 번거롭고 많아졌으며 말하는 바가 대부분 참소하며 헐뜯는 것이니, 그러므로 장관과 재상에게 맡겨서 그것의 가부(可否)를 먼저 정하도록 하라."
형부상서 안진경(顔眞卿)이 상소하였다.
"낭관(郎官)과 어사(御史)는 폐하의 귀와 눈입니다. 지금 일을 논의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먼저 재상에게 말하도록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 그 귀와 눈을 덮어 가리는 것입니다. 폐하께서 여러 신하들이 하는 참소를 걱정하신다면 어찌 그 말의 허실(虛實)을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까!

황상의 뜻이 아래로 미치지 않고 아래의 정황이 위로 통하지 못하여 어둡게 가려지고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여 마침내 촉(蜀)으로 행차하시는 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능이(陵夷, 점점 쇠퇴함)함이 오늘에 이르러서 그것이 따라서 온 것은 조금씩 물 든 것입니다. 대개 임금께서 꺼림이 없이 말하는 길을 크게 열어 놓아도 여러 신하들이 오히려 감히 모든 말을 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재상과 대신으로 하여금 이를 자르고 누르게 하면 폐하께서 보고 듣는 것이 단지 서너 명에 지나지 않을 뿐일 것입니다.

신라왕(新羅王) 김헌영(金憲英)이 사망하였는데, 아들 김건운(金乾運)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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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듣건대 좋은 의원(醫員)이 병을 치료하는 데는 병을 마주하면서 약을 먹인다고 하는데 약이 병에 맞지 않으면 오히려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오늘날의 병통을 보시고도 어찌 이에 이르도록 따랐습니까?

죽음과 혼란이 일어난 이후로 변수(?水)는 묻혀 못쓰게 되어 조운(漕運)을 하는 사람은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에서 양주(梁州, 섬서성 남정현)와 양주(洋州, 섬서성 양현)에 이르고 나서 험한 길을 멀리 돌게 되니 수고롭고 비용이 많아졌다.

곽자의는 안·사가 옛날에 낙양을 점거하였었으니 그러므로 여러 도(道)에 절도사를 두고 그 요충지를 통제하였다. 지금에는 큰 도적이 이미 평정되었지만 있는 곳에서 군사를 모아서 백성들을 좀먹고 해치게 되자, 표문을 올려서 이를 철폐하게 하였는데, 이어서 하중(河中)에서부터 시작하게 하였다.

관중에 황충(蝗蟲)이 나타나고, 장맛비가 내리니, 쌀은 한 말에 1천여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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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봉이 말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유대부(劉大夫, 유전)를 좇았고 조서를 받들어서 군진(軍鎭)으로 오자 어떤 사람이 내가 반란하였다고 말하였지만 이공(李公, 이장용)이 군사를 일으켜서 유대부를 없앴는데 지금 또 이공이 반란하였다고 하오. 이와 같다면 누가 반란한 사람이 안 되겠으며 끝까지 남을 사람이 있겠소? 나는 차라리 죽게 되더라도 다른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한 것을 가지고 무고할 수는 없소." 드디어 그를 참수하였다.

무진일(13일)에 신라왕 김억(金?)이 들어와서 조현하면서 이어서 숙위(宿衛)하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가지는 논의를 하였다. "지금 경학을 시험 치는 사람은 첩자(帖子)에 정통하고, 문장을 시험 치는 사람은 성조(聲調)의 병통으로 시비를 가리니, 풍류는 퇴폐하여지므로 진실로 마땅히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동진시대 이후로 사람들은 대부분 교우(僑寓)하여 선비로 향토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백 가운데 한둘도 없으니, 청컨대 겸하여 학교를 넓히시고 상재(桑梓)를 지키는 사람은 향리에서 천거하게 하고, 유우(流寓)하는 사람은 상서(庠序, 학교)에서 천거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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