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전집
신동엽 지음, 강형철.김윤태 엮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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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과서까지는 말당(ㅋ) 서정주 선생, 박두진의 시 같은 걸 시라고 배우다가,

대학 입학하고 들은 신동엽과 김수영의 시는 청천벽력이었다.

 

신동엽의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를 통해 세상의 어두움을,

'껍데기는 가라'를 통해 순수의 열정을 보았다면,

그의 장시 '금강'을 읽으면서 민족의 역사가 피를 더워지게 함을 배웠다.

 

이제 그의 시들을 다시 찬찬히 읽노라니,

한국 시에도 이런 기둥들이 있었구나 싶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

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

대륙의 섬나라의

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

 

이조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

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383, 종로 5가, 부분)

 

1967년 쓴 작품인데, 이렇게 날카롭다.

이조 오백년... 그래,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국의 정부가 힘이 있어야 함을 절절히 깨닫는다.

공화국의 이념을 철저하게 염두에 둔 정부가...

대륙의 정부, 섬나라의 정부, 은행국의 정부는, 이조 시대와 똑같다.

일제 강점기라면 북간도라도 가지만,

이 빈익빈부익부 시대는 일제 강점기만도 못하단다.

아~ 참혹하다.

 

무엇을 보았는가,

이조 오백년, 억울하게만

살아온 농민들이

처음으로 자기 주먹을 보았는가, 이제야

자기의 얼굴

자기의 가슴을 보았는가.(193, 금강 중)

 

익산면에선

영수증 없는 삼천 팔백 석의 세미 거둬

저희끼리 나눠먹고

다시 고지서를 내돌렸다.

곤장질, 단근질, 주리 틀기로

난리 피우며.(200, 금강 중)

 

이런 조선을 되찾자는 '광복'의 후예들은 아직도 한국사를 '조선사'로 연계하고자 애쓴다.

<한국사 교과서 시정 명령>은 박정희 시절의 유물이 아니고, 오늘 자로 발표된 거란다.

'독재 이승만'은 안 되고, '광주 민주화'도 안되나?

 

하늘 덮은 쇠 항아리,

이걸 깨뜨리지 못하니, 계속 망령들이 살아 돌아온다.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산문시, 부분, 399)

 

4.19로 쫓겨나고, 총맞아 죽고, 이런 놈들만 보다가,

기어코 저런 대통령 하나 가져보나 했더니,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서럽다.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

길을 도와주는 머슴이 되자.

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

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

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

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 버리자.

그리하여 싶으로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

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

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

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

그의 사는 세상에까지 미치면 그땐

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께며.(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전문)

 

이런 예쁜 연애시도 쓸 줄 아는 사람인데,

신동엽을 역사에 빼앗기고 말았구나. 슬프다.

 

바람이 설스렁

귓전을 스치면

언젠가 울다 말은

애상의 버릇처럼

못내 마음 고허(孤虛)해 오다가

밤털이 데리고 가려픈

너 빨래 갔음이사

생각고

진정 오늘 가을만은

나 쓸쓸치 않아라.(가을, 전문)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 아름다운 청춘의 심장에

분노의 화염이 불길처럼 일게 한 이 역사는 참으로 통한의 역사다.

 

신동엽을 읽는 일은, 통곡 소리를 가슴 깊이 받으며 듣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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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간다 창비시선 366
이영광 지음 / 창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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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위 곳에 왜 날

낳아놓은 거야

딸이 어미에게 대든다

채널을 돌린다

사람 말고는 누구도

이따위 곳이라고 하지 않는다

누의 살점을 찢고 있는 사자 무리 곁에서

누들이, 제 동족의 피가 튄

풀을 뜯고 있다

울지도 웃지도 않고

먹는다

식사가 끝나자 누도 사자도

발아래 이뚜위 곳 따위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피 좀 본 거로는 꿈쩍도 않는

노란 지평선을 본다

어쩌다 사람만이 찾아낸

분노의 거주지

혼돈의 부동산

이따위 곳 (이따위 곳, 전문)

 

인간이 세상을 '이따위 곳'으로 만든 행위를 '정치'라고 부른다.

정치가 문제다.

땅을 부동산으로 만든 그 행위가 인간과 인간 사이를 '계약이론'으로 설명한다.

로크인지 루소인지

사회계약론이란 말을 만든 그 시대는

이미 인간을 '자연이라는 생태계' 속에서 똑 떼어 낸 것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서글픈 시는 단연 '천안'이었다.

아직도 수중 고혼이 되어,

그 수중 고혼은 차가운 그 3월 바다에서 영웅으로 일컬어짐으로써,

전쟁과 하등의 관계도 없던 영혼들이

군인이란 이유로 편안한 죽음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

그 이름을 둘러싸고 다시 '부동산'처럼 이름을 붙이는 자들에게 벼락 떨어지라~

 

 

어뢰였으면, 차라리

수중 폭발로 인한 버블제트였으면

전광석화의 두 동강이었으면

 

보복이 보복을 부르는 전쟁이 나건 말건

69시간이 아니라 6.9분이었으면

6.9초였으면

 

중계방송 따위가 없었더라면

구조 없는 구조 속보가 안 들렸더라면

사고든 사격이든 사기든,

깊은 사색이든

 

뭘 밝히는 중이냐

뭘 덮는 중이냐, 상관없이, 나라?

서해가 마르고 닳건 한반도가 가라앉건 그 나라가 망하건 말건

숨 없는

한 순간이었으면

 

아비규환이 될 겨를도 없었을 0.69초였다면

유령이 될 수도 없었을

0.069초였다면

섬광이었으면 그냥,

끝이었으면

 

육백구십일 같은

육십구년 같은

69시간만 아니었다면

69시간이라고, 알려주지만 않았더라면

 

하늘 아래 가장 안전한 곳,

天安에 내려야 하는데

天安을 지나쳐야 하는데

초청 강연도 시와 트라우마도,

빗줄기도 참이슬 후레쉬도 아우성도 다 함께

 

天安에 내려야 하는데

天安을 벗어나야 하는데

天安에 닿아야 하는데 (천안, 유령 5, 전문)

 

 

국가?

웃기고 자빠졌다.

국가가 목숨을 지켜줄 때 이야기지,

이렇게 목숨으로 장난칠 땐, 차마 말도 못 꺼내게,

'천안함 프로젝트 영화'를 메가박스에서 하루만에 내릴 때,

하늘도 편안히 쉴 수 없었다.

 

하늘 아래 가장 편안해야 할 곳, 천안...이라는 이름을 달고...

죽어서도 정치 사이에서 오물에 뒤덮인 이름이 된 그 배,

PCC-772

국가가 죽음을 덮는 암흑 속...

유령만 떠돌 뿐...

 

경제는 신기루 같아도 경기는 뼈에 사무치니(오일장, 부분)

 

사람 사는 일은

환한 대낮 같은 어둠 속을

여럿 손잡은 듯한 홀로

저기 보일 듯한 사막 속을 걷는 일

 

온갖 아홉 시 뉴스는 백성의 눈을 가리지만,

그 폐해는 뼈에 사무치니,

참으로 뼈가 시린 날들이니...

 

이렇게 말의 절간에서, 言 寺

시라도 어루만져 주지 않으면 안 되는데, 詩

그 마음 어루만져 주는 종교인들을 '종북'이라네.

그래, 마음을 어루만져 그것이 종북이 된다면,

성스러운 종북에 몸을 바칠 일이다.

 

따를 종, 북녘 북, 從 北

북녘의 비인도적 소비에트 괴뢰 도당 빨갱이 사탄의 무리를 따르는 자들이라고 욕을 퍼붓건만,

어찌 내 귀에는 그것이 쇠북 종, 鍾 울림이거나,

둥둥거리며 혼백의 넋두리 갈앉히는 푸닥거리의 북소리마냥 들리는 것이냐...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사랑의 발명, 전문)

 

사랑이 뭣하는 놈인지,

배부른 자들의 8시 연속극 놀음인지,

한숨만 나올 때,

그래. 사랑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사람이 닳고 닳아

심장이 닳고 닳아

애달아할 때,

그 뾰족한 미음(ㅁ) 모서리에 내 마음 모서리를 닳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아무리 빨리 갈아 대도 느리게'

그렇게 갈아서 만드는 이응(ㅇ)이 사랑이다.

 

 

사람은 정말 질 수 있는 걸까?(시인의 말 중)

 

시인이 쓰고 싶었던 한 마디는 이것일 게다.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선거의 정황이 포착되었다.

개표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국정원이 개입한 정황도 많다.

그러나 국가 기관인 '선관위'와 '국정원'은 청와대 치마폭 뒤에서 젖병을 물고 있다.

박근혜란 개인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한나라당 ㅋ~ 얘들이 꾸밀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이건, 국가라는 '기관'이 저지르는 일이다.

국가가 '사람'에게 이기려고 드는 일이다.

헌법도, 윤리 도덕도 다 짓밟고

형체도 없는 유령같은 나라가 '사람'에게 이기려고 든다.

 

사람은 정말 질 수 있는 걸까?

 

깊은 물음이다.

한석봉이 어머니의 떡써는 소리에 떡실신 되었듯,

시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한 마디에 입을 다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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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거짓말
나태주 지음 / 푸른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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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이 시를 참 좋아했다.

이 시인의 시들은, 교장 샘으로써 아이들을 바라본 시들이 많다.

 

그런데, 이 시집은 좀 다르다.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그

어떤 대상들을 다사로운 맘으로 바라본 시라기보다,

그 거리를 확 뛰쳐나와,

내 마음에 닿아버린 흰구름에 대한 시집이다.

그런데 그 흰구름은 손에 잡히지 않아 짠하다.

 

방법이 없어, 이렇게 시를 쓸 수밖에 없었나보다.

그런데,

방법이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랬다.

 

사는 일 어느 하나, 매뉴얼대로 살아지는 일 있더냐.

방법이 없는 사랑도 사랑으로 보듬어 안는 시인이 사랑스럽다.

그 마음이 고대로 읽히는 시집이다.

 

나 혼자만 생각하다가 잠이 들고

나 혼자만 생각하다가 잠이 깨고픈

사람을 갖는다는 건

행복하도록 외로운 일이다.(남몰래 혼자 부르고 싶은 이름을, 부분)

 

행복하도록 외로운...

이런 역설은...

이미 '깃발'에서 유치환이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형상화한 일도 있지 않던가.

 

이렇게 함께 서서 걸어도

그냥 섭섭한 우리는 흰구름인 걸.

그냥 멀기만 한 그대는

안쓰러운 내 처녀, 겨울 흰구름인걸......(겨울 흰구름, 부분)

 

사랑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아지고,

누추해지지만,

턱없이 높아지고 그윽해지고 깊어지고 향기로워지기도 한다.

사랑이여.

생명의 매직이여.

살아있는 자의 특권이여.

마음 속에 피어서 지지 않는 불꽃이여.(작가의 말 중)

 

그래. 이렇게 뜨겁다면,

방법이 없어도,

사랑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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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1-30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의 매직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네요. 사랑은 노래 가사처럼 연필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살면서 깨닫게 됩니다. 지워도 지워도 흔적은 남더라구요.
 
보시니 참 좋았다
박완서 지음, 김점선 그림 / 이가서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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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범한 그림을 예술로 만든 건

오랜 세월과 사람들의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명품으로 치는 골동품도 태어날 때부터 명품이었던 게 아니라,

세월의 풍상과 사람들의 애정이 꾸준히 더께가 되어 앉아야 비로소 명품이 되듯이...(47)

 

박완서는 늦깎이 작가다.

마흔이 넘어서랬나.

나목을 써서 등단을 한다.

가난하고 혼란스럽던 시절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능이 무엇인지 한번 내어보이지도 못하고 어른이 되기 쉽던 시절.

신경숙의 외딴 방 이야기처럼... 성장의 아픔이 많던 시절...

 

그렇게 힘든 시기를 거친 사람들은 지긋하게 세상을 오래 바라보는 눈을 익힐 수 있었나보다.

박완서의 소설들이 노년의 심사를 잘도 그려내고 있는 것은 그 힘이 응축된 것일 게다.

 

이 책은 동화집이다.

아이들이 읽어도 재미있게 읽을 법하지만,

이 책은 삶의 너울에 쫓겨서 날마다 허우적대는 어른들이 읽어도 좋을 법한 이야기다.

 

시집가서 폭폭했던 시절의 삶의 이야기를 담은 '찌랍디다' 같은 이야기는,

똥과 꼬마신랑에 얽힌 거라서 애들도 재밌어 할 이야기지만,

시집살이를 호되게 했던 여성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박완서나 박경리 같은 작가들의 책을 읽노라면,

나이드는 것이 어둡지만은 않다.

비록 몸은 조금 더 삐걱거리고, 머리도 예전같지 않지만...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잠깐이나마 노을이 있다는 것은

참 놀랍고 아름다운 일입니다.(167,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중)

 

그 노을을 마음에 담으려면,

마음의 화폭에 노을의 순간을 담으려면,

화가의 소망은 피눈물에 젖은 물감을 써야하는데...

 

깜깜한 밤이 오기 전에,

그 깜깜한 밤이 올 것을 두려워하기만 하며 손놓고 사는 일은 더 놀라운 일 아닐까?

 

숨을 거둔 아내의 모습을 보고서야

이 미련하디미련한 환쟁이는

비로소 아내가 그의 그림을 위해

스스로의 선혈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61)

 

깜깜한 밤...

누구에게나 올 것이다.

그 밤이 오기 전에,

깨달아야 한다.

노을의 아름다움을...

그 노을 속에는 아내의 선혈이 가득 들어차 있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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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1-28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된, 그래서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작품들을 써주시는 분들이죠. 이젠 그분들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잉어 시인동네 시인선 1
김신용 지음 / 시인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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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물의 만년필,

오늘, 무슨 글을 쓴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 없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쓴 것 같은데 읽을 수가 없다

지느러미를 흔들면 물에 푸른 글씨가 쓰이는, 만년필

지금은, 잉어가 되어보지 않고는 읽을 수 없는 것이겠지만

잉어처럼 물속에 살지 않고서는 해독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오늘도 무슨 글자를 쓴다

캘리그래피 같은, 오늘도 무슨 글자를 쓴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을 닮은, 잉어의 얼굴

눈꺼풀은 없지만 그윽한 눈망울을 가진, 잉어의 눈

 

분명 저 얼굴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편지에 엽서에 무엇인가를 적어 내게 띄워 보내는 것 같은데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오늘

나는 무엇의 만년필이 되어주고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몸속의 푸른 피로, 무슨 글자를 썼을

만년필,

수취인이 없어도, 하다못해 엽서라도 띄웠을

만년필

 

그래 잉어가 되어 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겠지만

내가 네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편지를 받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잉어는, 깊은 잠의 핏줄 속을 고요히 헤엄쳐 온다

 

잉어가 되어보기 전에는

결코 읽을 수 없는, 편지가 아니라고

가슴에 가만히 손만 얹으면, 해독할 수 있는

글자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몸에, 자동기술(記述)의 푸른 지느러미가 달린

저 물의, 만년필-     (잉어, 전문)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이 있다.

삶의 이치는 '사물을 궁리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이다.

인간이란 존재를 높게 떼어 생각하면 도달할 수 없다.

특히 '나'라는 존재를 귀하게 여기면 거기 갈 수 없다.

눈을 낮게 떠야 한다.

인간의 눈이 바라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본다.

복안을 가지고, 복안으로 본다.

 

김신용의 이 시집은 '격물치지'로 가득하다.

사물을 바라보고, 인간의 언어를 살펴본다.

'자라'라는 사물을 발음하면, '자라고 있는' 과정도 느껴지고, '고만 자라'라는 말도 떠오른다.

자라라는 동물은 그렇게 느릿느릿,

굼뜬 눈으로 잠든 듯 자라는 듯 세상을 보게 한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버려야만 관조의 눈을 얻게 된다.

동물 속으로, 식물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언어를 얻어야 한다.

그러면, 잉어의 꼬리 흔듦새까지도 캘리그래피의 만년필 풀림으로 느껴진다.

 

다람쥐가 나무에서 호두를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꺼진 상상력에 반짝 필라멘트를 켜는, 그 발걸음(호두까기, 부분)

 

을 보아내는 시선은 여간 몰입해서는 얻기 힘든 것이다.

 

11월의 쓸쓸함을 나무가 외로이 서있는 것과 융합하고,

양파더러 '외투 위에 외투를 껴입은 듯, 질문을 껴입고 뚱뚱해진' 녀석이라고 부른다.

 

그래, 풍자는 정글의 무늬

해학이라는 보호색 속에 발톱을 감춘, 눈빛의 무늬(얼룩, 표범 무늬, 부분)

 

이런 구절은 언어를 읽는 행위 자체를 숨막히게 한다.

관조가 언어 속에 무르녹은 경지를 눈 앞에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탁월한 경지다.

 

나뭇가지를 '전지'하는 일에서도 무언가 본다.

 

그 그늘에, 바람과 햇빛을 불러들이는 것이, 전지

얽힌 가지 사이사이마다 흔들의자를 놓아주는 것이, 전지(전지, 부분)

 

가지치기를 부정적으로 보긴 쉽지만,

그 의미를 이렇게 살려놓으니,

마치 혀를 궁글려 입 안의 공간을 넓혀 바람을 불어 피리를 부는

그래서 피릿소리가 맑고 투명하게 울려났을 때 느껴지는 청명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말맛이 있다.

 

그러니까 젖은 낙엽 같은 잎에서 엷게 스며 나오는 물빛이, 저물녘의 들길을 걸어오는 흙 묻은 놀빛 같기도 해

마음 흐뭇해지는, 이 저녁(등잎차 한 잔, 부분)

 

차 한 잔으로

시각적 미각적 풍요로움을 선사하는 힘은 관조에서 우러난다.

 

콩나물은 물만 주면 자란다. 뿌리에 흙 한 점 없어도

모두에 햇볕 한 점 없어도, 마치 음표처럼 자란다

 

지난날, 우리들의 희망과 너무도 닮은꼴이었던 콩나물은

아침 지하철에 실린, 졸린 눈의, 그 무뇌의 표정과도 일란성이었던 콩나물은(콩나물처럼, 콩나물 뿌리처럼, 부분)

 

관조가 추억을 불러 온다.

격하게 공감할 만한 추억이

어떤 심상으로 가득 가슴 속을 채운다.

 

마음 든든한 시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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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3-11-20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주신 시도 좋고, 글샘 님의 글도 참 좋습니다. 따뜻한 햇살을 마시는 듯해요^^

글샘 2013-11-21 16:05   좋아요 0 | URL
와 댓글이 시적이네요.
따뜻한 햇살을 마시는 듯하다니...

프레이야 2013-11-2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처음 보는 시인에요. 사물을 궁리하는 일! 담아갑니다^^

글샘 2013-11-21 16:05   좋아요 0 | URL
저도 흔히 보던 시인은 아닌데,
관조적 시선이 멋지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