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를 부르는 숲』을 보건데 '빌 브라이슨'은 에둘러 말하길 좋아한다. 그게 그러니까 심각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낙관적인 자태(?)를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독자인 나에게 선하다. 확실히 그에게 성급함은 손해를 불러온다. 그의 행동은 미래의 어느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가 유머와 위트를 지닌 채 어떤 위급함을 넘겼다면, 후에 나올 그의 책에선 좋은 소재거리가 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익살맞은 행동은 경제적 가치를 불러온다. 마치 DNA에 새겨진 것 같다. 유머가 있어라. 너에게 지폐 몇 장을 내려보내줄 테이니.

언젠가 읽어야지 하는 책들중에 『나를 부르는 숲』은  리스트 제일 위쪽에서 나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젠 내가 읽은 책 리스트의 제일 아래에 위치한다. 이번 여름은 나에게 '빌 브라이슨'을 느낄 때이다. 재미도 없는 세상, 어디서 키득거리며 한가로움을 느낄 수 있겠는가. 항상 읽어야지 하는 책이었지만 그 내용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냥 숲에 들어가서 야영하고, 등산하면서 새삼 자연의 위대함과 변덕사이를 왕복하는 그런 책인줄 알았다. 방금 적은 이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지 이 책을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냥 숲'이라니. 도시 한쪽에 밀려나 있는 작은 '그냥 숲'도  보이지 않는 역사가 있을 것이다. 가령 나의 먼 먼 조상들이 재난을 피해 몸을 숨겼다든지, 아니면 보릿고개를 이겨낼 수 있는 작은 풀뿌리라도 대접을 해주었던지 말이다.

'숲'의 정체를 알고나서 사실 소름이 돋았다. "이봐. 어느 누가 3,400Km가 넘는 산맥을 숲이라 불러~~." 책 몇 장 펴들고 든 생각이다. 이 산맥이름은 '애팔래치아 산맥'이다. 중학교땐가 고등학교때 어느 수업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다. 사실 이건 무슨 '오호츠크 해 기단'만큼이나 나에게 거리(존재하고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않았다면 그 거리감도 느끼지 못할때지만...)가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나의 뇌세포 몇개를 할당해가며 저장해놓은 걸 보니 단순한 세포의 낭비는 아닌 듯 싶다. 마치 목말라 죽어가는 뇌세포에 물 몇방울  떨어뜨린 기분이다. 책을 읽고 재밌어서 친구에게 책 이야길 해 주었는데, 이 친구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모르더라. 뭐 모를 수도 있지.

책속에 등장하는 재밌는 사람이 또 있다. 이 책의 저자 '빌 브라이슨'과 애팔레치아 트레일을 같이 종주한 친구이자 잠시동안 동반자였던 '카츠'라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이 책에서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냐면 이 책의 '장르'를 바꾸게하는 거룩한 힘을 지닌 존재라 봐도 무방하다. '빌 브라이슨'도 유머스러운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은 '카츠'가 옆에서 '빌'에게 자신을 관찰당하게 하고, 때로는 빈정거리게도 해주고, 때로는 '빌'을 성자로도 만들어주고, 떄로는 '빌'을 공황상태로도 빠지게 해주고, 때로는 '빌'에게 친구이자 동반자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 것임을 일깨워주는데 있어서 한 몫 톡톡히 하는 친구라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종주 도중 둘이 잠시 헤어지고 저자인 '빌' 혼자 등산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때 책의 장르가 잠시 바뀐다. 무척 교훈을 준다. 물론 잠시 교양서적을 보고 있는 착각도 들며. 그렇다고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부분은 이것대로 흥미있다.

암튼, 책 머리에 저자가 '당연히 카츠에게 바친다'라는 땡스투 문구는 이 책을 읽어가며 절감한다. '카츠'는 숲을 돌아다니며 혹 만날지도 모를 '곰'만큼이나 긴장감을 준다. 곰이 할일을 이 친구가 대신 해준다.

이 책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당장 배낭을 싸서 떠나!!'라는 강력한 환청을 들려준다. 또 환청만큼이나 강력한 추억을 꺼내준다.

' 아.. 그때 그 겨울 지리산의 햇살은 정말 달콤했지. 날씨는 추워서 모든 것을 얼려버렸지만, 그 때 그 햇살만큼 감미로운 것도 없었지. 또 어느 해 겨울 한라산은 어땠어. 눈속에 푹푹 파묻히며 걷는 그 길. 조금 걷고서야 알았지. 발 아래에 채이는 것이 눈 속에 묻혀버린 길 안내하는 봉이라는 사실을. 또 어느 해 여름 지독한 가뭄이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피고 꿈쩍도 하지 않을 그 무렵, 곳곳의 샘이 말라버려 분명 지도에 있을 샘이 증발했을때 그 당혹감이란 정말. 또 예기치 않게 도중에 만난 한방울씩 떨어지는 샘을 만난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대충 이런 추억속 기쁨과 고난을 증폭시켜 되살려준다. 더불어 등산 당시 스쳐지나간 모든 동,식물 예를들어 잠자리, 까마귀, 개나리(맞나?) 등등 이 모든것들에게 존재의 이유를 부여해주는 관대했던 당시의 나로 돌아보게도 만든다. 저자인 '빌'의 경우 만나지 못했던, 하지만 종주 당시 꽤나 오랫동안 머리속에서 들러붙어 공포감을 선사해준 곰에게 오히려 살아서 숲을 나가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부여받긴 하였지만.

이렇듯 이 책은 저자의 추억+ 나의 추억을 섞어준다. 산에서 만나서 눈인사하고 몇마디 건냈던 같은 시간대 산 속에 있던 얼굴 모르고 이름 모르는 사람들한테 마저도 야릇한 그리움과 궁금증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저자의 경우엔 예의없는 산사람들도 있었고, 시끄러운 사람들도 있었지만.

올 여름에는 '빌 브라이슨'의 또 다른 책들도 들어야겠다. 다른 책속엔 무슨 이야기가 있을지 궁금하다.

한마디 더, 삶의 기운이 메말라가거나 세상의 혼란속에서 길을 잃어 배회하고 있을 영혼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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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다윈주의가 우리의 생활을 강타하고 있다. 이것은 정보의 진화이다. 정보의 진화는 생활 패턴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또한 시간이 흐르고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할수록 정보의 의존도가 갈수록 커져만 간다. 정보는 분명 많은 욕구(니즈)들의 원천이며, 바램이며, 표현이다.

'정보'를 이야기 하기 위해 책 하나를 끄집어 낸다. 책 이름은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2007, 승산)이다.

제목에도 직접적으로 표현이 되어 있지만, 책에 서술된 정보는 과학이라는 틀안에 놓여져 있다. 정보 자체는 장르가 없지만, 이 책에서의 정보는 (과학이라는) 장르를 갖는다. 과학안에서의 정보는 우리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싶은 일상적(통념적, 관념적) 정보가 아닌, 실제적 정보이다.

일상적 정보는 일종의 처리된 정보이다. '정보처리기'라는 블랙박스안에 내장되어 있는 필터를 통과한 정제된 정보이다. 즉, 일기예보라든지, 주식시세, 컴퓨터의 OS 설치하는 법, 빨래의 때를 더욱 잘 빼는 법등등 이런 일상정보는 날것의 형태를 가진 것이 아니라, 이미 누군가의 손을 거쳐 처리된 것들이다. 이런것들은 정보와 관련되었다기 보다는 정보처리와 관련이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일상에서는 정보처리와 정보 자체의 구분이 거의 없다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장르안에서 보여지는, 처리되기 이전의 그 무엇(정보)은 도대체 뭘까? 이 역시 제목에 나와있다. 정보는 곧 '언어'라고 말이다. '언어'는 표현을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보는 무엇을 표현하려하는가? 바로 이것이 이 책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과학이라는 장르를 지닌 정보는 우리와 우리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실재성)의 표현이며, 또 그 물질이 놓여져 있는 공간(차원)의 표현이다.

저자(한스 크리스천 폰 베이어)는 책에서 정보(information)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 (중략) 그러므로 정보(information)는 형상이 없는 존재에 형상을 주입(infusion)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de-, con-, trans-, re- formation은 각각 형상을 해소하기, 한데 모으기, 변화시키기, 새롭게 하기를 의미한다. (중략)...- p. 42


이렇게 무엇인가를 구체화시키고, 형상을 만들어 실체(혹은 실재)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정보라고 간단히 책에서는 설명해 놓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상이고, 실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후 책에서는 과학적 체계안에서의 원천이 되는 실체를 풀어놓는다. 곧 원자론부터 시작하는 개괄적인 물질사와 과학사의 설명이다. 

왜 원자가 중요할까? 이것도 책 제목에 나와있다. 제목에서는 '새로운 언어'라는 표현이 있는데, 여기서 '새로운'은 고전물리 이후의 현대물리뿐만 아니라, 현대물리에서 더 나아간(진보한) '양자물리'의 영역까지를 지칭한다. 결국은 앞서 말한 '정보는 무엇을 표현하려하는가'의 답이다. 바로 '양자물리'를 말하고자 함이며, 현대물리와 양자물리를 잇는 고리의 역할을 원자 그리고 그보다 작은 미시세계의 입자들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마디로 우리와 우리 세상(우주까지 영역으로 확대하여)의 비트들을 설명하기 위한 포석이다. 그러니 제목만 이해한다면(물론 책을 봐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의 핵심을 들여다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반적인 책의 내용은 뭐라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개괄적인 물질사와 과학사(특히 아인슈타인 이후의 역사)를 여기에 옮겨 적을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고대에도 연금술사가 있었고, 중세에도 연금술사가 있었다. 이들은 '연금술'이라는 계량화(혹은 정량화)되지 않고, 과학화 되지 않은 오로지 호기심과 가정만으로 금을 쉽게 얻을 수 있을거라는 생각을 한 선구자(?)들이다. 그들이 벌린 수많은 시도들은 결론을 보지 못한채 '연금술'이라는 명칭을 부여 받긴 하였지만, 어쨌든 부자가 되진 못했다.

수많은 연금술사가 욕망의 노란 덩어리를 원했음에도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했음에도 왜 실패를 하였을까? 사실 엄밀히 말해서는 그들은 금을 만들기 위한 비교적 과학적이고 정확한 공정을 거쳤다. 그들이 썼던 도구들이 구닥다리라 결과를 보지 못했을 뿐이다. 물론 이 공정은 현대에 와서도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여전히 우리가 쓰는 도구들도 구닥다리이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공정이 있을 수는 있다.그 예로 방사선으로 원자의 핵을 변형시켜 다른 원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한다.)

지금 인터넷에선 KSTAR라는 핵융합이라는 공정을 거치는 인공 태양이 웹상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에서 오르내리고 있긴 하지만,인공태양을 연금술에 대입해보면 쉽게 그 결과가 나온다. 우리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태양에도 훨씬 못 미치는 인공태양이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태양계를 이끌고 있는 실제 태양도 금을 만들 수 있는 용기가 아니다. 자격을 부여할 수도 부여받을 수도 없다. 태양은 대부분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기율표를 보면 수소(원소기호 H)는 1번이고 헬륨(원소기호 He)은 2번이다. 이는 우리가 발견한 우주의 원소중 첫번째와 두번째로 가볍다는 의미이다. 그 엄청난 핵융합반응은 기껐해야 헬륨뿐이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어느 누가 도가니 속에서 금을 만들겠는가. 참고로 백금(원소기호 Pt)은 78번이고, 금(원소기호 Au)은 79번이다. 백금이나 금을 자연상태에서 만들어내려면 엄청난 에너지원과 그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하다. 산소원소까지는 별의 일생중에 만들어지지만, 그 이후의 원소는 별의 종말 이후(적색거성 이후)에 만들어진다. 별이 폭발하면서 더욱 많은 에너지를 내놓게 되고 그 여파로 기존의 원소들이 융합되면서 더 무거운 원소를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50억도까지 오르면 철(Fe)이 생겨나고, 그 이후에 더욱 높은 온도에서 더 무거운 원소가 생성된다. 이렇게 생성된 원소는 우주의 먼지와 가스가 되어 우주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이 예에서만 보더라도 원자라는 정보는 더욱 진보된 패러다임을 불러온다. 여기에서의 진보란 계단을 통해 밟아올라가는 등정이 아니라, 조금더 깊숙히 들여다보고자 하는 탐구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원초적 힘을 갖는 실체에 대한 이해이다.실제성에서 정보는 바로 원자를 위시로 한 여러 입자(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소립자들...)를 가리키며,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속성조차 새로운 컴퓨팅의 역사를 쓰기 위한 재료이다. 이 속성은 바로 '스핀'이라는 것인데 한마디로 입자의 회전성이라 보면된다. 이 회전에서 동시성과 병렬성을 함축하고 있는 양자계산이라는 우주적 컴퓨팅(거대한 확률기계)을 이끌어내려하고 있다. 

얼마 안있으면, CERN의 LHC(대형 강입자 충돌기 Large Hardron Collider)가 가동될 것이다. 모든 물질이 원자들로 이루어졌다지만, 이 원자들만으로는 상호간에 영향을 주는 힘(Force or field)을 기술하진 못한다. 원자는 하나의 핵과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들로 이루어져있다. 하지만 핵의 크기와 비교하여 전자들은 꽤 넓은 공간을 점유한다. 원자의 핵이 축구공만한 크기라면 핵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돌고있는 전자는 무려 800m정도 떨어져있는 것과 같다. 핵과 전자 사이의 거리는 텅비어있다. 이런 원자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실체는 텅빈 공간과도 같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할까?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기적으로 대전된 척력이 바로 그것인데, 이런 힘들을 이해하려면 원자의 내부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원자는 '쿼크 Quark'와 '렙톤 Lepton'이라는 물질 구성 입자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것들은 또  힘에 대응되는 매개 입자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이런 '힘 매개 입자'들 중 '힉스 Higgs'라는 입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위에서 예를 든것과 마찬가지로 금원소를 만들려면 탄소나 산소를 만들 수 있는 에너지를 훨씬 뛰어넘는 더욱 큰 에너지를 가져야 하는 이유와 유사하다. 우리는 더 큰 현미경이 필요한 것이다. 이 거대한 충돌기는 테라스케일의 에너지 영역(Tev, 테라 일렉트론볼트)을 다룬다. 물론 힉스 입자가 발견될지 아닐지는 알 수 없다.                                


     

  - what really goes on at the Large Hardron collider -


우리도 핵융합로를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는 '초전도핵융합실험로'이다. 물론 시뮬레이션용이다. 발전용은 아니다. 앞서 말한 태양을 모방한 작은 그릇이다. 이 그릇은 차후에 우리가 엄청난 에너지(그것도 청정한)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갖게 한다. 최소한 기술력은 쌓고 있다. 갈수록 고갈되어가는 화석 에너지를 대체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친환경적인 것은 태양 에너지다. 미국은 엄청난 땅 덩어리위에 태양 에너지 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그만한 땅 덩어리가 없다. 그래서 KSTAR는 우리를 고무시킨다. 이 그릇은 '토카막(Tokamak)'이라 부르는데 내부가 자석으로 이루어져있다. 자석도 그냥 자석이 아니다. 초전도체이다. 이 원리는 가장 원초적 정보를 이용한 것이다. 원자를 이루는 전자는 궤도를 돌다가 원자의 핵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원리이다. 초전도체를 쓰는 이유는 고온의 플라즈마가 용기의 벽에 닿지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태양을 어떤 그릇에 담을 수 있을까. 이 플라즈마는 2억도나 나간다. 2억도는 앞서 말한 태양의 중심부에서 수소원자 4개가 핵융합하여 헬륨을 내놓는 온도이다. 그래서 공중에 띄어놓는다.

** 링크 : 한국산 인공태양이 조만간 뜬다<주간한국에서..> 바로 위의 그림 출처가 있는 사이트
** 링크 : 미국이 준비하고 있는 태양 에너지 네트워크 계획 <A Solar Grand Plan>

공간에 띄어놓는 물질이 또 하나 있다. 그런데 물질이 아니다. 이 이유 때문에 진공상태에 띄어놓는데, 그것은 '반물질 anti-matter'이라서 그렇다. 반물질은 물질과 만나면 에너지를 쏟아내며 붕괴한다. 그래서 이것도 초전도체로 둘러쌓인 용기에 들어있다. '반물질'은 '스타트렉'의 추진원료이기도 하다.


:: 끝마치며 ::

양자역학이라는 영역은 존재라는 철학적 명제를 지닌 물리학의 최전선(edge)이다. 볼츠만은 보이지 않는 존재(원자)를 주장하다 당시 종교계와 학계에서 신학적 태도를 버렸다는 신랄한 비판을 받고 상실감에 빠져 좌절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책에서 내내 주장하는 것은 사실 명확한 실재가 아니라 모호한 실재이다. 이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실성의 원리'를 지칭한다. 분명 존재는 하는데 명확히 집어낼 수 없는 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법칙이다. 전자는 가장 좋은 예이다. 전자는 그 하나하나를 집어낼 순 없다. 그냥 구름으로 표시한다. 왜냐하면 확률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호한 실재에 대해 정량화 시키는 방법으로 각각의 실재에 대한 정의를 하지 않고, 그 '정보의 양'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정보용량을 결정하는 '섀논'의 <정보이론>이 있다. 이 이론의 뼈대는 '엔트로피'와 '확률'이다. 엔트로피는 자연의 경향을 설명한다. 시간의 비가역성과 열에너지의 흐름으로 이해하면 된다. 확률은 무작위성을 의미한다. Higgs도 좋은 예이다. Higgs를 꺼내려면 추론이긴 하지만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런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해 사람들은 테크놀러지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테크놀러지는 의외로 판타지적 상상을 수반하고 있다.

'세헤라자데'라는 한 여인은 자신의 남편이자 나라의 국왕인 '야르왕'에게 날이세면 죽임을 당할 것 같아  매일밤 한편씩 이야기를 왕에게 들려준다. 그중에 <알라딘과 요술램프>라는 이야기가 있다. 요술램프속 '지니'는 '알라딘'이 가지고 싶어하는 것들을 줌으로써 소원을 들어준다. 작은 공간의 램프속에서 '지니'는 별의별것을 꺼내준다. 비록 설화이고 판타지 문학이긴 하지만 이 속에서 양자역학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이 램프는 양자역학으로 만들어진 자판기이다. 원하는 것을 몇가지 원자들의 조합으로 뚝딱 만들어낸다. '뚝딱'이라하니 도깨비 방망이도 생각이 난다. 또 '스타트렉'의 '엔터프라이즈호'안에서도 요리사 대신, 이런 양자 자판기가 승무원들에게 음식을 내놓는다.

'지니'는 도대체 어디서 그런것들을 가져올까. 만들어 내는 것일까? 이는 '양자역학'영역의 정보통신이라 할 수 있는 '공간이동 Teleportation'과 관계가 있다. 공간이동이라는 키워드는 사실 '전송'에 무게가 쏠려있기보다는 '복제'에 중점을 둔다. 내가 양자적 공간이동을 수행했다면, 목적지에는 또 다른 내가 있는 것이다. 물론 전송지에도 내가 있다. 전송지에서는 원본인 '나'를 지워야한다. SF적 상상이지만, 판타지적 상상과도 맞물리고, 이를 현실화시킬 테크놀러지도 연구중에 있다.

이러니 '정보'를 단순히 '정보'로만 볼 일도 아니다.

<덧붙임>

1. 이 책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의 리뷰는 본문보다는 포스팅 말미의 '끝마치며'라는 부분이 오히려 리뷰의 관점과 맞겠다. 이 책은 작년에 읽은 것을 이제서야 두서없이 리뷰한다.

2. 위에 언급한 '반물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을 소재로 한 책이 '댄 브라운'이 쓴 『천사와 악마』라는 책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로버트 랭던'박사가 반물질로 테러를 하려는 조직을 잡는다는 얘기이다.

3. 또 위에 언급한 '토카막'이라는 핵융합로가 있는데, 이것을 소재로 한 책이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가 쓴『돌의 집회』이다. 여기서의 '돌'이 토카막이다. 읽을만하다. 개인에 따라 갈수록 안습의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4. 양자역학과 관련한 책을 몇 번 더 읽었다. 기회되면 리뷰나 포스팅을 하겠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어느정도나 이해했느냐일 것이다.

5. 좋은 다큐들이 많이 있다. 오히려 다큐가 이해하기엔 좀 더 쉽고, 명확하다. 다큐를 보고 책을 읽으면 금상첨화이다.

6. 이 책 이외에 또 다른 양자역학에 관련된 책 몇 권을 소개한다. 

              

 

 

 

 

『양자 컴퓨터』와 『불가능한 도약, 공간이동』,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는 모두 읽은 책이다. 『아인슈타인의 베일』은 읽다 좀 지친감이 있어서 기회되면 다시 볼 책이고, 『양자 세계 여행자를 위한 안내서』는 최근 나온 서적인데 기회되면 읽어봐야겠다. 혹시 양자와 관련되어 무슨 책을 읽을까 고민하시는 분은 『과학의 새로운 언어, 정보』나 『아인슈타인의 베일』먼저 읽고 다른 책들을 보는게 제일 나을 듯 싶다. 물론 개인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프로그래밍 유니버스』는 나중에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양자 관련 책들을 읽어보면 '세스 로이드(프로그래밍 유니버스의 저자)'는 많이 나오긴 하는데, 다른 책들과 비교하여 쉽게 읽히는 글은 아니다. 『양자 컴퓨터』와 『불가능한 도약, 공간이동』은 의외로 쉽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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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선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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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일러를 피해가려 노력은 했지만 사소한 몇가지는 드러난 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런것들은 책의 표지에 설명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은 분들도 크게 신경쓰지 않아도 될 듯 싶기도 한데, 물론 결말의 대한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신경쓰인다면 무조건 넘어가길 권고합니다.

얼마전에 일본 도쿄의 아키하바라에서 무차별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인터넷에서 접한 이 뉴스에서 슬프지만 흥미롭기도 한 부분이 살인자의 성장과 관련한 보도였다. 그는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차츰차츰 네트워크의 링크를 끊어버리며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 이번 범죄의 다른 속성으론 예고 살인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일본 미디어는 가정문제에서부터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까지 그의 하나하나를 분석하였다. 이런 행위는 잘못된 사회적 메커니즘으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오작동 감지에 대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일어난 것은 또 일어나기 마련이다.

네트워크에서 하나의 노드 혹은 객체는 다른 것들과 실타래같이 연결되어있다. 문제는 오작동을 일으킨 부분의 네트워크를 고쳐야는데 완벽히 고칠 수 없다는데 모든 이가 동의할 것이다. 오직 링크를 끊어버리는 역할뿐이 할 수 없다. 리셋이란 사실 우리의 군집에서 일어날 수 없는 행위이다(하지만 비슷한 의미로 갱생 혹은 개화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격리뿐이라는 소리인데.. 이는 또 다른 메커니즘의 시작일 수 있다.


주말에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두권으로 되어있는 『검은 선』이라는 작품이다.

내가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고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작가가 말하고 싶어하는 소설속 주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스토리로 전개되느냐가 아니라 스토리가 보여주는 재미이다. 재미가 없다면 사실 책읽기는 곤혹스럽다. 물론 이러한 스토리가 주는 재미위주의 독서 또한 또 다시 작가의 의미부여라는 소설속 주제로 회귀되는 경향이 있는것은 사실이지만 작가의 재능이 바탕이 깔려있지 않고서야 꺼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르물을 애독하는 독자에게 좋은 작가는 우리에게 교훈이 아니라 재미를 주는 작가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하겠다.

그러니까  "이 책은 재밌냐?"라는 질문이 장르물에 있어서 매우 의미심장하고 중요하고 무서운 질문이다.
"볼만해" 나는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정말 볼만하다.
"그러니까 재밌냐고?" 이렇게 다시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장르물에서 재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듯 싶지만 어떤 양념이 첨가되었느냐에 상당한 무게감을 가진다. 따라서 쉽게 답할 성질은 아니다. 암튼 "볼만했다."

이 속에 쓰인 양념을 한번 살펴보자. 물론 무의미한 나의 해석이기도 하다.

작가가 바라보는 이 한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전에 '악'에도 역사가 있을까? 물론 여기에서의 역사는 태고적부터 내려오는 계승적인 '악'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역사는 원인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악의 원인이다. 원인이 있는 '악'은 '순정의 악'이 아니다. 어떤 '악'의 원인을 알았다면 '악'은 고칠 수 있는가?

가령, 정상적인 동작을 하는 기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떤 부품이 빠지거나 고장난 것이라면 그 기계는 '순기능'을 잃고 만다. 물론 '기능' 자체를 잃어버리는 상태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지만(이는 마비라 부를 수 있겠다), 어떤 기계는 오동작을 할 것이고 이 기계는 속해있는 전체적인 메커니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한 네트워크를 구동시키는 시스템적 능력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이 능력은 네트워크의 효율을 의미한다.

부품과 기계와 연관되어 있는 네트워크는 효율이 떨어지면서 점차적으로 이상 감지를 느낄것이다. 어떤식으로 처리를 할까. 소프트웨어적이라면 버그를 잡아야하고, 하드웨어적이라면 장비를 고치든, 교체하든 이런 기계적 수단을 써야 할 것이다.

네트워크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면. 잘못된 부품이 범죄자라면. 이 '악'에 대한 처방을 우리 사회는 어떤 식으로 내려야 할 것인가? 당연히 리셋은 할 수도 없고, 부품 교체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부품 수리도 없다. 범죄자의 개화는 수리가 아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악의 본능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억제는 수리라 할 수 없겠다. 사회는 교육을 통해 억제를 가르친다. 사람들은 억제를 학습할 뿐, 본능을 버리지는 못한다.

『검은 선』에서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물론 원인을 찾기위한 그의 탐구는 이 책 뿐만 아니라 세번째 시리즈까지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만 본다면 단편적이고 부분적일 수 있겠다. 하지만 작가는 한가지를 말하는 듯 싶다.

악의 이력(hysteresis).


이력(hysteresis)은 간단히 말해서 외부적인 힘에 의한 어떤 물질의 성질 변화가 변화의 원인이 제거되었는데도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이는 주로 물리학에서 쓰는 용어이다. 전자기학에서 나온다. 물론 공학이라든지 경제학 등의 여러 분야에서 쓰이기도 한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한가지는 나왔다. 앞서 말한 이력(hysteresis)이 그것이다. 이 소설에 대입해보자. 범죄자(이 소설의 주인공중의 한명이라 할 수 있겠다)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 악의 성질을 띄게 되었다. 그리고 원인이 고쳐졌든 어쨌든 이 성질은 그가 죽을때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의 상태는 항상 악한 상태로 머물러있다.

두번째, 작가의 삼부작 중 그 첫번째는 이력이었다. 그렇다면 이 이력에 쓰이는 소재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책의 제목인 '검은 선'이다. 그 중에서 '검다(black)'라는 것.

일반적으로 '검다(black)'라는 의미는 모든 색이 혼합되어져 있는 색을 말한다. 서로 다른 색이 섞이면 섞일 수록 더욱 짙어진다. 물론 이 색들중에는 흰색은 제외다. 흰색은 명도를 높인다. 그러니까 검은색은 한마디로 잡스런 모든 색들이 섞인 상태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는 통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혼잡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킨다. 생물에게 엔트로피가 증가되면 공통적인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인간에게 피는 생명이다. 붉은피는 어느 한가지를 잃으면 색깔이 짙어진다. 그러니까 검게 변한다. 붉은 피를 유지하게 하는 한가지 것은 산소이다. 피가 산소를 가짐으로써 이 피는 신선한 피이고 피는 산소의 운반을 통해 여러 기관과 세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검은 피는 통제되지 않은 죽은 피이다. 소설 속 범죄자는 피해자의 피를 빼앗음으로써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정황을 통제하려 한다.

이러한 통제 방식의 습득은 그의 어린시절의 정신적 학대에서 기원하며, 이 정신적 학대에서 피하는 방법을 그는 일시적으로 숨을 쉬지 않음으로 해서 깨우친다.

결국, 그는 후에 어른이 되어 몸속으로 산소의 공급을 일시적이긴 하지만 꽤 길게 차단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시켜 무호흡 잠수 챔피언으로까지 성장한다. 그의 모든것은 산소의 통제이다.

세번째, '선(line)'은 무엇인가? 사실 선(line) 자체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에서의 선은 역시 검은 이라는 형용사와 어울려야 하는데, 검은 선은 두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이 책에서 살인마로 나오는 '르베르디'의 직업과 관련되어 있다. 숨참는 것을 통제할 수 없는 선. 그것은 무호흡 잠수부가 최고로 내려갈 수 있는 한계이다.(사실 이 한계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계산된 추정값이다. 바다속의 이 한계선까지 잠수하였다가 다시 물 위로 올라와야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산소가 없는 피의 걸쭉한 향연. 즉, 뿜어져 나오는 죽은 피의 줄기를 말한다. 참고로, 이 소설속에서 범죄를 추적하는 기자인 주인공 '마르크'가  사건들을 종합하여 낸 책이 <검은 피>라는 제목이다.

책에선 숨어있지만, 의미있는 것들이 있다. 하나는 통제이다. 통제는 드러나지 않는 키워드이다. 이야기속에서 통제는 곧 산소와 관련되어 있다. 숨을 참는다는 것. 이것이 곧 통제이다. 소설속에서 '사스(SARS)'라는 질병이 나온다. 이 질병의 정식 명칭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이다. 산소가 개인간의(혹은 개인의) 통제의 의미로 쓰였다면, 사스는 거대 집단의 통제의 의미로 쓰인다. 바로 국가와 사회라는 집단이다.

'르베르디'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는 말레이시아에 있는데, 소설 속 배경은 한창 중국과 홍콩, 대만을 위주로 하여 동남아시아에 '사스'가 한창 맹위를 떨던 때이다. 그때의 '사스'는 이 소설에서 말하는 악과는 또 다른 성질의 소재이다. 이 질병이 교도소에도 위세를 떨쳤는데 수감되어있는 범죄자들도 질병의 무서움을 톡톡히 인식하고 있었다. '악인'들도 공포에 떨게한 것이 바로 '사스'이다. 사스는 거대하며 근원적인 악이다. 원인도 없는 악이다. 물론 악당 주인공인 '르베르디'는 이 사스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몇가지 할말은 있는데, 이는 스포일러와 직접 연관되어 있어서 이 포스팅에는 쓸 수 없을 듯 싶다.

스포일러와 관계없는 한가지만 더 말해보자면, 과연 산소가 통제니 뭐니 그랬는데 과연 산소는 무슨 의미일까. 산소는 바로 '독(毒)'을 의미한다. 산 소가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숨을 쉬며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무서운 산화제이다. 생명체는 양초와 같다. 양초는 자신의 몸을 태워서 불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산소를 호흡해서 피를 통해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지만 그 찌꺼기는 우리에게 독이된다. 이와같은 산소의 이중성을소설에서는 진실과 거짓이라고 내포하였다. 산소를 마시면 살 수 있다는 것은 또다른 거짓이다. 바로 영원성에 대한 거짓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산소가 가지는 이중성과 통제의 의미. 그리고 검은 선을 추구하려는 범죄자 '르베르디', 그리고 악에서 구원받은 또 다른 여자 주인공. 그리고 이들을 맺어주는 기자인 '마르크'. 이 모두가 하나씩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악'과 관련하여...

<덧붙임>

1. 작가에 관하여....

작가인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르포를 썼던 저널리스트였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을 쓰기 위해 불러들이는 그만의 소재는 다양하다.  범주를 크게 잡으면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사회과학으로 나눌수 있으며 특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는 '과학'분야이다.

그가 인기를 얻어 이름을 떨치게 한 소설 『크림슨 리버』' 우생학'과 관련된 생명공학을 소재를 불러들였다. 『크림슨 리버』도 재미있는 의미를 가진다. 리버는 강을 뜻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강은 바로 유전적 형질을 의미하며, '크림슨'이라는 뜻과 합쳐져 '피'를 뜻하게 된다. '크림슨 crimson' 은 다름아닌 붉은 계통의 색을 뜻한다. 진홍색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유명한 잠수함 영화『크림슨 타이드』의 '크림슨'이라는 단어도 이 단어이다. 붉은 색이라는 뜻. 연관되어 하나 덧붙이자면 이 영화보다 더욱 갈채를 받는 유명한 잠수함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붉은 10월』이라는 영화로 '존 맥티어난'이 연출하였으며 , '숀 코너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물론 이때의 '붉은'은 원제에서는 'red'이다.

『크림슨 리버』는 영화로 봐서 소설로 읽진 않았지만 영화보다 소설이 더욱 강렬할 듯 싶다.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의 또 다른 소설은 『돌 의 집회』와 『늑대들의 제국』이 있다. 『돌의 집회』는 핵융합과 관련된 소재가 쓰였다. 그리고 『늑대들의 제국』은 뇌과학, 특히 기억의 조작이라는 과학기술이 사용되었다. 아무튼 그만큼 이 작가는 여러 분야, 특히 과학과 관련된 소재를 끊임없이 사용하고 있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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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볼 효과 - 우연적 사건의 연쇄가 세상을 움직인다
제임스 버크 지음, 장석봉 옮김 / 바다출판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아인슈타인이 말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들은 확률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인과율이라는 섭리에 의해서만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인과율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고있는 가장 합리적인 말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다라는 이 말은 또한 우주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단어이다.

그런데 의미론적인 면에서 인과율은 한가지 모순이 있으니 모든 사건들의 처음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어떤 시초로 여겨질 법한 사건은 또한 그 사건 이전의 어떤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게 되었으니 파도 파도 바닥이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합리적이라는 말은 또한 편리한 단어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 사물의 시초엔 신이 있으므로 해서 골치아픈 문제를 회피할 수 있다. 신 이전의 그 무엇은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말 그대로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 말대로 한다면 신은 초기값만 던져줬을 뿐이게 된다.

아인슈타인을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자론을 만들어낸 '보어'를 필두로 한 '코펜하겐 학파'이다. 이들은 아인슈타인의 인과율을 부정한다. 우주를 포함한 이 세상을 오로지 확률론적으로 보는데 이는 양자역학의 초기부분에 해당한다.(확률은 정보를 수량화하는 방식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사고실험은 확률론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납으로 만들어진 상자안에 고양이가 있다고 했을때 이 고양이가 죽었는가 살았는가 하는 문제인데 몇가지 조건이 주어진다. 가령 방사성 핵과 그것의 반감기라든지, 계수기, 독가스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이에 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 아무튼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양이가 박스안에 있다고 했을때 박스안 고양이는 살아있는 상태인가, 죽어있는 상태인가를 알아보는 사고실험이라는 것만 상기하자. 인과율로 따진다면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아있다'이다. 독가스가 방출되었다면 죽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살아있을 거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OR' 개념이다. A이거나 B이거나 말이다.(이 OR 논리 게이트는 지금 현재의 비트를 말한다. 이를 과학에선 고전적 비트라한다.)

확률론적으로 본다면 고양이는 살아있고 죽어있다(혹은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라는 좀 애매모한 말이 된다. 다시말하면 살아있는 상태 반, 죽어있는 상태 반을 총칭한다. 여기의 논리 게이트는 'AND'이다. A이고 B라는 개념인데, 한마디로 두 상태가 같이 공존하는 '중첩'상태에 있게된다는 것이다.(이 AND 논리 게이트는 연구중에 있는 미래의 비트를 의미한다. 이를 과학에선 큐비트(qubit)라 한다.)

물론 이 사고실험의 답을 내리기는 뭐하다.

철수가 영화보러 극장에 갔다고 하자. 극장에 가면서 철수 곁을 스쳐지나간 이름모를 수많은 사람들. 철수랑 같은 시간대의 영화를 보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수많은 익명들. 이들은 철수의 행동을 통해 이 세상에 존재하게된 사람들이다. 철수가 극장엘 가지 않았다면 철수는 얼핏 스쳐지나가며 얼굴을 본 많은 이들은 존재할 수 조차도 없게되는 것이다. 말이 이상하지만 그런대로 받아들이자. (더 쉬운 예는 관광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된다. 관광지에 사람이 바글바글하여 어쩔수없이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이 찍힌 사진을 봄으로써, 그 이름모를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관찰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결국 철수도 또 다른 누군가의 눈으로 관찰되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자, 그렇다면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서로 관찰한다 했을때 이 세상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돌아갈 수 있게 되는데, 이름모를 식물이며 알수 없는 동물, 곤충 혹은 미생물들은 어떠할까. 우리가 관찰한 순간 존재하게 된다고?

마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이미 결과를 내포하게 된다. 이 세상에 없는 것은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말장난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들 위에는 모든것을 꿰뚫어보는 눈이 하나 있다고 하는데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한다. 왠지 정리가 된다는 느낌이다. 이 신이라는 존재는 과학적 행위를 하는데, 하나의 결과값만 놔두고 중첩 상태에 있는 모든 확률값들을 붕괴시켜버린다.(이에 대한 소설은 <쿼런틴>이라는 SF 소설이 있다. 신 대신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가 나온다. 또 하나의 값만 남겨두고 가능성있는 모든 값들을 붕괴시키는 예는 '빛의 직진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암튼 설렁설렁한 면도 있지만 확률이라는 우연과 인과율의 차이를 말하기 위함이었다.

서론이 길었다.

얼마전에 책 한권을 읽었는데 <핀볼 효과>라는 책이다. 우연이라는 것과 인과율이라는 것이 적절히 섞여 있는 세상을 핀볼 기계로 보고 핀볼 게임 자체가 우리의 세상이 지금껏 진보하게된 원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내용은 철학적이지도 않고 물리적이지도 않다. 그러니까 깊은 뜻이 숨어있지도 않으며, 완벽한 논리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핀볼게임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며, 핀볼 기계를 물리적으로 분해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핀볼 게임이 갖는 성향만 머릿속에 기억하고 책속에 나열되어 있는 수많은 사건들을 그냥 읽어내려가면 된다. (핀볼은 이 책 본문에는 등장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을 소위 '카오스'라 한다. 여러 사건들이 난립해있고 또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결국 하나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 질서는 각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로서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굉장히 무질서하게 보인다. 결국 이 무질서는 예측의 가능성을 낮춘다. '나비효과'는 카오스의 또 다른 하위 범주에 속한다. 물론 이런 복잡스런 인과 관계를 양자역학이라는 확률론으로 접근하려는 시도를 현재 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시도가 곧 가동될 CERN의 LHC이다. 이 CERN에서 인터넷이 처음 탄생하였다. 인터넷의 아버지는 '팀 버너스 리'이다. CERN을 무대로 한 소설은 곧 개봉될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이다. 겉보기에는 종교와 과학과의 싸움을 테마로 하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을 저술하려고 자료를 왕창 모은 댄 브라운은 남은(?) 자료가지고 책 하나를 또 하나 내놓는데 그게 <다빈치 코드>이다.)

재미난 예가 있다. 증기기관을 만들어낸 '제임스 와트'는 세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까?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써 증기기관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유츄할 수 있는 것들은 (직관적인 의미의) 인과율로 표현할 수 있으며, 증기기관가지고도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것들은  단순히 우연이라고만 설명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이것도 엄연히 따진다면 인과율의 범주안에 포함되겠지만, 우연이라는 맥락이 더 잘 들어맞는다. 가령, 철수가 극장엘 가면서 아는 친구를 만났는데, 이 친구 만난것을 우연이었다고 하지, 자연의 섭리요, 인과율에 따른 인연이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름모를 이쁜 아가씨를 보고 맘에 들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지만.)

인과율로써 증기기관을 통해 나타나는 여러 결과는 우리가 많이 들었던바와 같이, 좀 더 효율적인 시대로의 진입이다. 본격적인 에너지를 소비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세상의 산업은 기계에 많은 부분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상품의 대량화와 자동 공정시대를 불러오게 만들었다. 이를 산업혁명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바다로는 더 많은 화물을 싣고 나갈 수 있으며 이는 식민지를 끼고 사는 제국시대를 여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육지로는 철도의 발전과 더불어 통신의 발전까지도 이루어내게 되었다. 이것이 큰 힘 들이지 않고 교과서적으로 유추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우연이 불러온 증기기관에 의해 유발되는 결과는 뭐가 있을까. 책에 소개되어 있는 것 중의 하나(책에는 없어도 또 다른 뭔가를 불러 왔을 수도 있다)는 비즈니스 세계의 또 다른 기반이다. 그 기반이란 것은 바로 서류이다.

정황은 이렇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잘나가는 상품이 되면서 무수히 많은 주문을 받게 되었다. 주문을 말(대화)로 받는 것도 아니고 주문장이라는 서류를 통해 받게 되는데, 그 당시엔 주문장이라는 명세서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손으로 일일이 모든것을 적어서 만드는 주문장은 하나 만들기에도 너무 힘든 작업이었다. 그 결과 일정한 형식을 갖춘 주문장 사본을 만들게 되었고, 이는 주문처리를 한결 쉽게 만들었다. 똑같은 서류를 여러장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카본지의 발명으로 연결되었다.  더욱 효율적인 비즈니스 세계의 문을 연것이다. 이것이 우연이 유발한 또 다른 결과이다. (사실 이 책에서 언급한 두번째 결과는 카본지가 아닌 생물학의 발전이었다. 그런데 생물학 발전의 단계까지 설명하려면 지금까지 쓴 글의 5배이상은 언급을 해야한다. 책 자체 내용이 그정도 분량이 된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되는 카본지의 발견까지만 예시로 들었다.)

 이 책에서 선보인 여러 사건들은 그 연결 고리가 불투명한 것들도 있다. 저자가 나름대로 연결고리를 이었지만 약간은 억지성도 보인다. 그렇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이 거짓은 아니다. 실제로 그런것들이 있어왔으며 어떤것은 필연적으로 어떤것은 우연적으로 만들어졌다.

책의 결론은 사실 허무하기도 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를 불러온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수백권의 책속에서 뿌리 역할을 하는 어떤 사건들을 재미있게 그리고 이해하기 쉽도록 연결성을 부여하여 이 세계는 여러가지의 거대한 조합으로 이루어져왔으며, 또 그렇게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책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책 말미에 있는 <찾아보기> 즉, 'index'항목이 매우 중요하다. ㄱ,ㄴ, ㄷ, ㄹ... 순으로 나아가는 인덱스는 이 세상의 중요한 여러 지표를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하이퍼링크와 같은 편집도 있는데 이는 중복된 인덱스 혹은 키워드를 통해 새로운 사건들을 잇는 또하나의 고리 역할을 한다. 책의 단점인 링크걸기를 간단한 표현으로 완성한다. 뭐 그렇다고 편리할 것도 없다. 귀찮아서 링크된 곳을 펼치지 않는다. 기다리다보면 나오니까. 링크가 걸려있다는 것을 잊어도 상관없다. 나중에 <찾아보기>코너로 또 다른 탐색을 하면된다.

나에게는 괜찮은 책이었다. 특히 여러 챕터별로 따로 따로 기술하고 그것으로 그만인 역사서나 과학서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데(요즘은 경제학 관련책들도 이런식으로 많이 나온다..아래 -덧붙임 4번 참조 -), 내용이 매우 단편적이고 그 하나의 사건이 이 세상을 이루는데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했는지는 가늠하기조차도 어렵기 때문이다.

연결성은 쉽게 기억해낼 수 있으며, 역사의 이런 연결성을 의외의 조합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좋은 공부도 될 듯 싶다.

비록 단편적인 지식들의 모음이지만, 이런 지식들조차 찾아보기 힘들며(이 책은 수백권의 책을 뒤진 효과를 준다), 키워드를 알지 못한다면 영영 알 수 없는 것들도 있다. 이런것은 심한 의외성이다. 누가 IBM의 천공기를 여인들이 어깨에 두르는 숄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참, IBM은 원래 회사이름이 아니다. 기계이름이다. 그 이름하여 '국제 사업 기계(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다. 그 기계 앞자를 따 그냥 회사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요점은 이렇다.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은 하나의 네트워크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다만 방향은 비가역적이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숄에서 천공기가 탄생했지만, 천공기에서 숄로 역행할 수는 없다. 세상이라는 네트워크는 비가역적인 동시에 병렬적이다. 1대 다의 관계도 성립한다. 또 다대1의 관계도 성립된다. 그래서 그림을 그려보면 계층이 없는 네트워크가 아니라 매우 계층적인 네트워크이다. 상위 루트에서 계속 아래로 트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책이 허무한것은 상위 루트와 맨 마지막 트리의 종단이 없다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뭔지 아직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흙을 보고 생각한 관념을 흙이라는 물질로 끝맺음을 한다. 사실 글로 적기가 어려운 말인데, 흙을 보고 뭔가를 떠올리고 그 뭔가를 계속 이어내려가다보면 흙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로 결론을 낸다는 의미이다.(물론 실제로 흙을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흙을 만든다는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겠다.) 챕터들이 이런식이다. 그래서 약간은 허무하다.

<덧붙임>

1. 글은 길지만 결론은 이거다. 세상은 뒤죽박죽 섞여있는 듯 하지만, 그럴듯한 순서에 의해 진행되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라는 것. 이 뒤죽박죽을 네트워크(망)로 표현하였고, 그럴듯한 순서는 우연적 사건의 연쇄반응을 말한다. 하지만 우연적인것보다는 필연적인 혹은 인과적인 것들도 많아서 이런 조합들이 그리 부드럽지 못한 것들도 많다는 사실. 이는 하나의 흐름으로 표현하려는 욕심에 약간의 무리수를 둔 것이라는 생각.

2. 기회되면 포스팅하겠지만, 이 모든 사건이나 사물의 본질은 '정보'에 있다는 것. 이 정보는 우리세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산업사회에서 정보화사회로의 이동) 새 로운 인터넷이라는 관념적 네트워크안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다는 것. 여기서 관념적이라는 것은 전기적 작용에 의한 정보의 흐름은 비록 물질적이지만 결국 이런 물질의 흐름은 종단에서 멈추어지고 이는 레지스터에 '자화'의 상태로 저장되어지는데 이를 컴퓨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표현할때에는 전혀 다른 형태(하지만 실제는 아님...예로 워드프로세서로 된 문서...)로 발현한다. 물론 직접적인 정보의 상태가 모니터에 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오실로스코프'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3. 우리가 휴대전화에 쓰이는 방식인 CDMA가 나오기까지의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무었일까? 이는 얼마전에 읽다가 우선은 한쪽에 밀어둔 <열정이 있는 지식기업 퀄컴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데, 그것은 '액스터시+피아노+어뢰'의 조합이다. 이것이 CDMA의 원류이다. 기회가 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예정...

4. 이 책이 말하는 바대로 풀이해놓는다면,  우연적 사건의 연쇄는 소수의 사람들의 뜻하지 않는 발명이나 창조적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소수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을 또 어떤식으로 빚어가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서 주목할 단어는 '이용'이라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소비를 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규모의 경제학으로 표현할 수 있을 듯 싶다. 요즘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은 <경제학 콘서트>의 저자 '팀 하포드'의 그 두번째 책 <경제학 콘서트2>이다. 물론 모든것에 대한 답을 들려주진 않지만 읽다보면 뭔가 걸리는 것도 있을 듯 싶다. 이 책의 키워드는 원제이기도 한 'The Logic of Life'이다. 

약간 곁들인다면, 삶의 논리는 무엇일까? 이는 인간위주의 논리이며, 지구적 시스템을 인간중심으로 본 다는 말일 수도 있다. 가령 환경을 예로 들 수 있다.. 환경보호를 하는 이유는 하지 않으면 앞으로 천문학적인 돈이 그쪽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게 삶의 논리이다. 물론 책에서는 이런말은 나오지 않는다. 하나더, 우리는 왜 휘발유 자동차를 타고 다닐까? 즉, 전기 자동차는 누가 죽였는가?(이것은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이것도 또 하나의 삶의 논리이다. 답은 그때 당시엔 기름이 가격도 쌌으며 소수가 소비하기엔 충분히 많아서이다. 물론 여러 답들중에 하나이긴하다.

참고로 <경제학 콘서트>와 같은 독립적 챕터로 이루어진 책들을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라고 본문에서 언급하였다. 그럼에도 가볍게 읽기에 좋을 듯 싶어 골랐다. 기회되면 이 책도 리뷰를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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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SF 소설속, 그리고 이와 같은 장르의 영화속에는  보통 인간과는 다른 어느 특정화된 능력을 지닌 인간이 등장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이러한 능력은 일상에서 지배받고 있는 거시적인 물리 법칙과 동떨어져 있을수록 우리의 말초를 거세게 흔든다. 이런 SF속 단골 인간들을 '메타휴먼(meta-human)'이라 부른다. 이와는 반대로 판타지 소설인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재밌는 단어가 있는데, 어떠한 마법도 부릴지 모르는 보통의 인간들을 '머글(muggle)'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머글'들에게 있어서 '메타휴먼'은(머글과 메타휴먼이 부드럽게 조화되지는 않겠지만...) 말그대로 신에 가까운 초인간인것이다. (예전에 이런 초인간과는 조금 다른, 새로운 진화적 형태로 발현한 인간들을 내 블로그를 통해 인간2.0 이라는 버전으로 붙여본 적이 있었다. 알맹이 있는 글은 아니다.)

:: 상상과 현실. 그 경계를 가르는 메타포어 ::

얼마전에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스티븐 굴드>의『점퍼 1』(까멜레옹, 2008) 을 손에 들었었다. 좀 작은 크기였지만, 분량은 상당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도 앞서 언급한 '메타휴먼'이 등장한다. 그리고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데이비드 라이스'라는 소년인데 이 소년이 가진 능력은 '순간이동'이다. 우리들에게 '순간이동'이라는 단어는 보통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은?'이라는 질문과 매우 잘 어울린다. '순간이동'은 이런 앞 질문에 내재된 인간의 욕구를 표현한 용어이다.  특히 '순간이동'은 별다른 시간 낭비 없이, 그리고 돈 낭비없이 공간을 넘어선다는 원초적 욕망을 넘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같은 메타포어(은유)적인 상황을 물리적 실재성으로 바꿈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분출하는 SF에서 자주 등장하는 초현실적 창조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을 듯 싶다.

이 책에서 '순간이동'은 초이론적인 것을 바탕으로 한 물리적,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물리적 과정의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원인과 결과를 동반하지 않는다. 그냥 단순히 작가가 부여한 능력일 뿐이다. 주인공 '데이비드 라이스'의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조금 색다르게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장르가 SF보다는 단순한 문학소설로 읽혔다는 의미이다. 문학소설에서도 '성장소설'에 가깝다. 작가가 '순간이동'에 어떠한 의미를 두고 싶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책에서는 어느 순간 이 능력을 알게 되었고, 그리고 사용하는 것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불안한 정서를 지닌 주인공 소년과 '순간이동'은 공통적인 개념을 가지는데, 그것은 '일탈'이다. 평범한 일상(routine)을 벗어나는 행위. 시간에 속박당하고 있는 공간을 벗어나는 행위. 이 둘을 하나는 인물에게 그리고 하나는 그 인물의 능력에게 부여한 것이다.

:: 메타휴먼에 대한 적대성과 머글의 순수성 ::

내 개인적으로는 극한의 SF 소설을 읽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지만, 기대에 부응하는 책읽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책을 읽고 싶어했던 이유는 얼마전에 상영했던 영화속 이야기를 책으로 먼저 접해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속 이야기와 다른 듯 싶다. 영화소개 페이지에서 설명한 내용 전개가 책과는 사뭇 다르다. 좀 찾아보니 영화는『점퍼 1』과 『점퍼 2』의  이야기를 섞어놓은 듯 하다. 이 두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서로 다르다. 다른 이야기가 진행된다.  

메타휴먼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하겠다.

만화책(미국에서는 코믹스)에서 등장하는 이러한 메타휴먼은 인류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 특이한 능력을 좀 더 크게 사용하는 것이다. 인류는 메타휴먼의 보은을 받지만, 사실 만화적 혹은 영화적 스토리와는 별개로 메타휴먼이 보통의 인간들과 섞이고 싶은 하나의 표현으로 생각되어진다. 그래서 비록 어설프나마 짧은 철학도 보인다. 하지만 메타휴먼에 적대성을 보이는 인간들도 등장한다. 그들과 메타휴먼들과의 충돌이 영화속 갈등으로 표현되는데, 사실 두개의 욕망이 오버랩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 싶다. 한쪽은 비록 특이한 능력을 지녔지만, 평범하게 살고 싶어하는 욕망과, 다른 하나는 반대로 특이한 신체적 능력은 가지고 있진 않지만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특이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슈퍼맨>이 그렇다. 비록 인간은 아니지만.

다양한 이야기는 다양한 전개를 수반으로 한다. 이제는 메타휴먼들이 대량으로 나오는 추세이며, 메타휴먼들속에서도 서로에게 적대감을 품는다. 하지만 순수성을 보장 받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미국 드라마 <뮤턴트 X>가 그렇고, 영화인 <X맨>이 그렇다. 또 다른 드라마 <히어로즈>가 그렇다.

머글들의 세상은 또다른 세상이다. 그들은 영화속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지만, 그 일상은 깨져서는 안되는 순수함을 갖는다. 그래서 물리 법칙을 무시하면서 살아가는 메타휴먼들이지만 머글들의 평온함과 순수함을 위해  세상 법도는 무시하지 않는다. 범죄는 저질러서는 안될 그들의 물리 법칙이다. 물론 다양한 머글에 적대적인 메타휴먼들은 가끔 이러한 것들을 깨부수려 하기도 한다. 머글은 순수성은 보장 받되 그들의 세상을 유지시키는 물리 법칙을 이기는 것들에게는 자연히 눈을 감는다. 보려 하지도 않고, 봐서도 안된다. 한마디로 무지하고, 단순하고, 순박한 엑스트라들이다. (물론, 국가정보기관이라든지, 세계 정복을 꿈꾸는 은둔형외톨이 박사나 갑부들은 제외...)

:: 공간을 넘어서다 ::

앞서 순간이동은 『점퍼 1』의 중요한 소재이다. 책에서는 어떠한 물리적 설명이 언급되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한번 생각해보자.

순간이동은 오로지 공간만을 점유한다. 한마디로 공간이동이다. 시간이동은 포함되어있지 않다. 공간이동을 소재로 한 대표적인 영화로는 SF인 <스타트랙>이 있다. 스타트랙에서의 공간이동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엔터프라이즈호의 공간이동이고, 다른 하나는 구성원들의 공간이동이다. 엔터프라이즈호의 공간이동은 시간의 영역과도 중첩된다. 이는 '워프'이다. 자세한 것은 모르겠지만, 우주의 여러 시간축들 사이의 여행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의미없다. 물론 구성원들은 계속 시간이 흐르지만, 우주선이 도달하는 그 공간의 상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그냥 현재인 것이다. '워프'의 공간이동은 양자 에너지의 활용으로 이루어진다.

승무원의 공간이동은 좀 더 현실적이다.  물리적 과정이 있다는 말인데, 인간의 몸 자체의 전송보다는 그것들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전송으로 보면 된다. 그러니까 적절한 분해와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도 입자의 전송은 실험실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바로 실현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런 원자적 전송에는 두가지의 전송이 뒤따른다. 실재적인것과 그렇지 않은것 즉, 비실재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적인 것은 원자 혹은 입자 그 자체이며, 실재적이지 않은 것은 정보를 가리킨다. 정보는 전송 전과 전송 후의 원자들의 위치와 조합 형태를 품고 있다. 빔을 쏴서 전송하는 그 자체는 정보를 위한 스캐닝과 같으며, 그와 동시에 물체가 먼지와 같이 분해되어 입자의 전송이 이루어진다. 

현대에서 전송은 입자가 아니다. 우리가 통신하는 것도 빛에 실리어 날라지는 비트이다. 그러니까 결국 원자가 전송되어지는가 비트가 전송되어지는 가는 현재의 통신과 미래의 통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닐 것이다. 현재의 통신은 실재적인 전송이 아니라, 비트라는 관념화된 덩어리들의 전송이다. 이것을 우리들의 터미널(집에 있는 PC와 같이...)에서 나름의 프로토콜로 해석되어 모니터에 보여지는 것이다. 양자 컴퓨터에서는 비트와는 다른 '큐비트(qubit, Quntum bit)'를 전송한다. 큐비트는 기존의 비트보다 좀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데, 이것의 장점은 전자의 스핀의 상태에 대한 정보를 품는다. 이는 언제가 될 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좀 더 공부해서 포스팅을 할 것이다.

별 다른 것은 없지만, 이것만 알아두면 좋을 듯 하다. 스타트랙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전송은 비실재적인 정보의 전송도 포함되어진다는 것. 원자들의 전송은 빛으로 전송되어질 것인데 지금 우리는 이 빛에 원자가 아닌 비트를 보낸다는 것. 이것은 앞서 말한 정보의 전송이라는 것. 빛은 입자성과 파동성 두가지 성질이 있는데, 지금은 입자성 보다는 파동성이 강하다는 것. 이는 주파수를 이용하는 우리의 통신이라는 것. 그리고 빛의 나머지 하나인 입자성을 연구하면 원자의 전송도 이루어지지 않을까라는 것. 대충 이렇게 될 듯 싶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슈퍼맨이 '크립토나이트'라는 녹색 운석에 약점을 보인다면, '순간이동'을 하는『점퍼 1』의 주인공은 무엇이 약점일까. 이것은 좀 더 물리적인 내용이다. 우리가 편지를 보내면 주소가 있고, 컴퓨터로 통신을 하면 IP(Internet Protocol)가 있듯이 순간이동에도 주소가 있어야한다. 이 주소는 곧 공간의 좌표이다. 공간의 좌표 없이는 전송할 수도 없다. 정착하지 못하고, 공간에서 떠돈다면 귀신으로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주인공 소년은 항상 가본것이거나 눈에 보여야 하는 곳으로만 이동할 수 있다. 사실 약점이라기 보다는 정말 귀찮은 부분이다. 그래도 나름 판타지성을 조금은 피하려면 이 논리를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X맨 2>에서 공간이동을 할 줄 아는 돌연변이도 그 나름의 좌표를 알아야 했을 것이다. <스타트랙>에서는 직접적으로 좌표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전에 미리 목적지를 스캐닝을 통해 알아놓는다. 이 목적지를 스캐닝 하는 작업의 목적은 목적지 주변 입자들에 대한 정보의 저장이다. 바람이 불고 평평하지만, 모래와 돌들로 뒤덮인 거친 땅과 같은 묘사적 정보를 모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거시적인 환경에 대한 정보로는 원자 혹은 압자를 전송할 수 없다. 전송되는 것이 입자라면, 전송되어지는 목적지 장소 또한 입자적 환경으로 봐야한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전송은 전자기적 통신과 같은 전송이 아니라, 양자적 전송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약간 다르다. 실제몸은 현실에 있고, 정신은 가상에 있다. 전송되어지는 곳은 비트로 이루어진 세상이다. 그러니까 매트릭스 세상은 곧 전자기적 정보(정확히는 코딩된 세계)로 이루어져있는 세상이다. 말 그대로 누군가의 프로그램속이다. 이는 지금 우리의 패러다임(전자기적 정보로 통신하는 현재) 그 자체가 양자적으로 바뀌지 않고 유지된 환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네오의 정신은 가상의 몸에 전송된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다. 비트로 이루어져있지만, 정신을 전송하여 비트에 생명을 불어넣는 세상인 것이다. 비트는 살아있지만, 사실 살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매트릭스>는 좀 더 철학적이다. 가상의 세계에서 정신이 죽으면, 현실의 육신이 죽는다. 가상 세계에서의 정신과 현실 세계의 육신의 링크가 깨져버리는 것이다. '유체이탈'의 좀 더 색다른 버전이다. 그래서 <매트릭스>속 공중전화가 울리고 이를 받으면, 정신은 현실의 육신과의 재접속을 하기 위한 자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매트릭스에서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 환상속의 그대::

문학이든, 영화든, 그 무엇이든 비슷비슷한 정보를 다양한 해석으로 보여주는 것이 흥미롭다. 요즘 웹 2.0에서 말하는 플랫폼의 클래식 버전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위에 말한 것은 사실 환상을 품은 메타포어(은유)이다. 물리 법칙이 어떻고, 전송이 어떻고 하는 것들은 사실 어떤식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러 작품들 속에서 이런 원초적인 욕망들을 메타포어로써 표현하고 이를 실재적으로 포장함으로써 좀 더 그럴듯한 세계를 이끄는 것 같다.

예전부터 이런 말들 하지 않는가. 상상이 곧 현실이 된다는.

:: 이 글 제목과 관련하여 ::

이 글의 제목인 <Beam me up.. NO!!! Gone with the wind..>는 과학과  기술로써 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은유적인 상상으로써 이 책을 읽었다는 나의 이야기와 어울릴 듯 하여 그렇게 지어보았다.

"Beam me up, Scotty (스카티 나 좀 (우주선으로) 전송해줘..)" 는 영화 <터미네이터>의 "I'll be back"과 같이 <스타트랙>속 유명한 대사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와 비슷한 여러 표현으로 쓰였을 뿐이라 한다.

"Gone with the wind"는 그 유명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 원제목이다. 이 제목이 『점퍼 1』을 잘 표현한 듯 해 포함시켰다. 순간이동이라는 SF 소재를 다룬 책 보다는 좀 더 문학적인 책과 닮아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책은 SF보다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원래 앞에서 언급했던 것들, 정보니, 원자니, 빛이니 하는 것들은 '정보'와 관련된 포스팅에서 쓰려 했는데, 『점퍼 1』을 이야기하다보니, 이렇게 까지 주절주절 하게 됐다. 다음에는 좀 더 다듬어 '정보'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


<덧붙임>

1. SF보다는 문학소설(이것도 성장소설)과 비슷한 소설

<로버트 A. 하인라인>의『프라이데이』(시공사, 2005)  : 나의 리뷰 바로가기...







2. 앞서 '순간이동'에 대해 조금 언급했는데... 좀 더 물리적으로 본 책이 있다. 이 책은 예전에 봤었는데, 기회되면 다시 한번 읽고 싶다. 

<로렌스 M. 크라우스>의『스타트랙의 물리학』(영림카디널, 1996)
이외에... 같은 저자의 책... 『스타트랙을 넘어서』(영림카디널, 1998)라는 책은 여러 SF영화속에 쓰인 물리법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두 책이 다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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