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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
카이 버드.마틴 셔윈 지음, 최형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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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인상의 표지가 마음에 듬.. 담배 문 것도 마음에 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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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전대호 옮김 / 까치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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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이 필요한 사람은 사실 '스티븐 호킹'인지 모르겠다. 루게릭 병이라 부르는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고 있는 호킹은 어느 누구보다도 신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런데 반대로 뒤집어보면 이미 신의 손길이 호킹의 어깨위로 드리웠기에 굳은 상태의 몸과는 다르게 그의 뇌는 여전히 활발한 지적 활동을 벌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호킹은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자신의 육체적 제약을 뛰어 넘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몸 밖에서 울리기는 하지만 기계의 도움을 받아 강연도 하곤 한다. 이번 신간을 통해 신이 필요없다고 주장한 그는 좀 더 냉정하게 자신과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이 스친다.

  호킹은 책 첫머리에서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 고 못박는다. 엥? 철학이 죽었다고? 앞으론 생각할 필요 따위는 없는 건가? 글쎄. 얼핏 보면 호킹이 무리수를 두는 발언으로 오해할 수 있다. 과학과 인문학 사이에 선을 그어버리는 것 이상으로 벽돌을 올리고 그 사이를 시멘트로 발라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게 여길 수 있다. 오해의 여지가 있음에도 왜 호킹은 철학은 죽었다고 언급했을까? 그것도 '이제'라는 부사를 집어넣은 이유는 뭘까?

모형 의존적 실제론

  철학은 사람들 머릿속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생각, 사고, 느낌들을 거두어 언어라는 도구로 질서를 부여하는 학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비슷한 생각들끼리 묶어두고 못을 박는다. 못이 박힌 생각의 틀은 다른 생각의 틀과 대치하기도 하고 반대로 흡수하기도 한다. 결국, 이런 틀은 사고의 정형화 내지는 구체화이며 생각의 흐름에 대한 모델링 작업이다. 그런데 이 책「위대한 설계」전반을 관통하는 핵심은 바로 우주에 대한 모델링, 실재에 대한 모델링, 존재에 대한 모델링이다. 철학이든 과학이든 똑같은 모델링(구체화, 모형화)을 위한 학문인데 왜 유독 철학만 지워져야 할까?


  호킹은 '실재란 무엇인가'라는 장(
)에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을 견지(堅持)한다. 그렇다면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란 도대체 뭘까? 책을 읽어나가며 생각했던 것을 차근차근 풀어보고자 한다. 

  호킹은 우리 세계(우주)를 실재의 세계로 보고 있다. '호킹이 이 세계를 실재라고 생각한다고?' 당연한 것을 호킹은 왜 언급했을까? 당신도 나도 당연히 실재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이 실재인 것을 또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뜬금없다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확실히 대답할 만한 성질의 질문도 아니다. 보통 우리가 관습적으로 하는 행동 중에 꿈 같은 일(사건)이 벌어지면 자기 볼을 꼬집는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현실이라고 강한 확신이 든다면 남의 볼을 꼬집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픔을 느끼는 순간 꿈 같은 일은 꿈속에서 벌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바로 그거다. 통증을 느끼는 것. 그것이 현실이라는 가장 큰 이유이다. 통증은 하나의 논리 과정이다. 볼을 꼬집음으로써 생리학적 도미노를 넘어뜨리며 우리는 통증을 느낀다. 또 옆 사람도 자신의 볼을 꼬집으면 똑같이 통증을 느껴야 한다. 호킹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거다. 실재라는 현실을 알기 위해서는 볼을 꼬집어봐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다. 

  볼을 꼬집는 것. 이것은 앞서 말한 논리와 일관성을 의미한다. 볼을 꼬집었는데 볼이 아픈 것이 아니라 배가 아프다거나 어떠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로 꿈이거나 아니면 현실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다. 현실의 문제는 질병에 걸렸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논리가 앞뒤 모순을 해결한다. 또 옆 사람의 볼을 꼬집으면 당연하게도 옆 사람도 볼이 아파야 한다. 즉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논리와 일관성은 '모형'을 존재케 하는 두 가지 축이다. 우리는 그렇게 모형을 세우고 그런 모형에 의지하며 세상을 살고 있다.

  고대인들은 과연 논리와 일관성이 없었을까? 그들도 논리와 일관성이 있었다. 하늘이 움직이니 천동설을 생각했고 어느 곳에서 하늘을 살펴보아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므로 천동설을 유지하려는 일관성도 갖추었다. 결국 그들은 '천동설'이라는 모형을 완성 지었다. 물론 지금 관점으로는 천동설이라는 모형은 논리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것이 바로 논리였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책에는 주전원을 가지고 예를 들었지만 나는 다른 예를 든다.  고대인들은 지구의 대륙 대부분이 북반구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분명 남반구에도 지구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거대한 대륙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라틴어로 Terra Australis(혹은 Terra Australis incognita)라 불렀는데  "the unknown land of the South", 즉 "알려지지 않은 남쪽의 땅"을 의미한다. 결국 시간이 흘러 남반구에서 대륙을 발견한 후에 "남쪽의 땅"이라는 의미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부르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프톨레마이오스는 Terra Australis에 걸맞는 대륙에 대한 조건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의미했던 것보다 더 확장했고, 나중에 해양을 통한 상업과 탐험이 활기를 띠면서 사람들은 Terra Australis에 대한 생각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호주 대륙을 발견하고 이름을 버리기 아까워 단순히 남쪽 땅이라는 의미의 오스트레일리아로 부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나중에 남극 대륙을 발견하고 붙일 이름이 없자 '북쪽 반대 땅'이라는 의미의 'antarctica'로 부르기 시작한다.) 자, 가보지는 않았지만 왠지 지구 남반구에도 대륙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보니 거대한 땅이 있었다. 그들은 정말 예측을 잘 하고 건실한 모형을 세운 것일까?

  고대인들이 나름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었다 해도 뭔가가 모자란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신념 혹은 믿음은 갖추었을지망정 여러 근거를 가리키는 데이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즉 그들은 한 두가지 측면만 보고 모형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데이터 없는 모형, 이것이 고대인들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어쩔수 없이 채택해야만 했던 모형이다. 그래서 호킹은 어느 정도 과학과 기술이 꽃피우는 지금부터라도 데이터에 대한 믿음을 갖자는 의미로 '철학은 이제 죽었다'라는 말을 남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이라는 입장을 채택할 것이다. 이 입장에 서면, 물리학적 이론 혹은 세계상 (대개 수학의 성격을 띤) 모형과 그 모형의 요소들을 관찰 자료와 연결하는 규칙들이다. 이 입장은 현대 과학의 해석에서 기본 골격의 구실을 한다.
p. 54 <실재란 무엇인가?> 중에서...

즉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모형은 추론이나 관찰을 통해서 그려낼 수는 있지만, 세세한 데이터 없이는 엄밀한 모형을 구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 모형도 데이터 부족으로 말미암아 잘못 그려낸 모형일 뿐이다. 주전원 모형은 관찰과 들어맞지 못했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만일 틀렸을 경우에 모형을 반증할(모형이 틀렸음을 증명할) 수 있는, 미래 관찰에 관한 상세한 예측들을 내놓을 것>이라는 항목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현대 과학 또한 관찰할 수 없는 것까지도 이론(모형)으로 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관찰과 부합해야 한다는 항목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호킹은 그래서 한가지 더 언급을 한다. '모형 의존적 실재론'은 부족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모형을 예측하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고 말이다. 즉, 모형에 오류가 발견되면 모형을 버리기 이전에 수정을 가해야 하며 이는 '우아한 틀 안에서 보장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아한 틀 안에서의 예측은 이론이나 물질이 존재할 확률이 커진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주전원은 복잡성으로 인하여 우아함이 상쇄되었다. 모형의 우아함을 따지지 않는다면 지금도 우리의 궤도에 계속 원들을 추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본원리

 
자연에 대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뭐, 환경 오염에 대한 걱정부터 천연자원의 부족에 대한 논의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다. 철학에서 파생된 다양한 학문을 통해 '자연'에 대해 인문학적 견해를 부여할 수도 있고, 과학을 통해 이룩한 기술로 '자연'과는 좀 다른 '인공 자연'이라는 것도 구현할 수 있다. 여기서 '깨끗한'이라는 형용사를 넣어 자연의 속성을 제한해보자. '깨끗한 자연'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자연이다. 즉, 이 단어는 의식하고 있는 인간을 함축한다. 이런 단어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일부러 의도(선동)한 정치적인 단어이다. 물론 '깨끗한 자연'이 정치적이라 볼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중립적 위치의 단어(자연이라는 단어)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왔다. 이런 식으로 의미 부여(load)를 하는 단어들을 일컫는 말은 우리에게는 없는 것 같다. 영어로는 'loaded word' 혹은 'loaded language','loaded term'이라 부른다. 어떤 존재(물질 혹은 물체, 더 나아가 시스템까지 확장해서...)를 구현할 때 인간성(혹은 본성)을 지워버리면 철학은 더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성을 지우게 되면 철학의 언어가 사라져 버리게 된다.

  만물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요지이고 인문학 바닥에 깔린 초석이다. 인본원리로 돌아가 보자. 인본이라 해서 인간을 위한 그런 개념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개념은 인과적 관계로 연결된다. 인과적이라는 개념은 인본원리가 아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졌고, 그래서 인간에게 적합한 세상에 인간이 나온 것 뿐이다. 그것을 인간 스스로가 해석 할 뿐이다. 호킹이 말하는 인본원리, 특히 강한 인본원리는 상관관계로 맺어진 자발적으로 창조된 세계이다. 태양이 있고, 지구가 있고, 달이 있고, 목성이 있는 이 태양계는 각 행성들이 여전히 중력이라는 상관관계로 맺어져 있다. 너무 멀리 떨어진 행성은 상관관계의 끈이 너무 약해 제외 시킬 수 있다. 중력은 우주의 근본 법칙이다. 어쨌든 호킹은 책에서 이러한 상관관계를 단순히 '행운'이라고도 했지만, 중립적 위치에서 보면 '행운'이라기 보다는 그냥 그런 것이다. '행운' 또한 앞서 언급했던 'loaded language와 다를 바 없다. 과학은 오로지 데이터, 통계 그리고 근본 법칙만 보고 그 속에서 예측 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가 멀쩡히 존재하고 있기에 유리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다. 호킹은 이것을 '행운'이라는 단어로 에둘러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이 우주 모든 것들을 자발적 선택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우리가 오해할 수 있는 인본원리(Anthropic principle) 보다는 선택원리(Selection Principle)가 더 나을 수 있다고도 언급한다. 법칙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절대자의 설계가 아니라 법칙과 공간과 시간에 속박당하는 인간 스스로가 단지 의미 부여한 것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선택원리가 더 낫다는 입장이다. 

  버스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데 그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인과적 관계에 있는 사람일까? 아니다. 단순히 상관 관계에 있는 사람일 뿐이다. 어느 시각 어단가에 볼 일이 있어 일정한 궤도를 따라 가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에 나왔는데 마침 그 버스가 온다. 버스안 승객은 다 그렇게 탄 사람일 뿐이다. 인본원리에 따르면 버스 승객들 사이의 인연, 심지어 전생이나 후생의 관계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냥 공기중에 떠다니는 먼지마냥 (확률 분포의) 덩어리로 봐야 한다. 이 덩어리는 내일 버스를 타도 겪게 되어 있다. 

M이론

  호킹은 M이론을 꺼내들기 위해 앞서 언급했던 모형 의존적 실재론과 인본원리를 소개했다. M이론은 실상 관찰된 것도 아니고 더욱이 확정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지적 영역안에서 만들어낸 가장 큰 돋보기이다. 호킹이 M이론에 대한 지지를 아낌없이 주고 있지만 책에서는 M이론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다. 그래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는 M이론을 자세히 설명해봤자 이해하는 사람도 몇 없을 뿐더러 다른 책에서 다룬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M이론 이전에 끈이론, 초끈이론에 대한 설명도 해야 하며, 우리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M이론은 궁극의 이론이며 만물의 이론, 모든 것의 이론,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뭔가 발견하고 싶어했던 통일장 이론이다.

  하지만 언제든 M이론은 수정 될 수 있으며, 아직은 부족한 데이터를 모으기 위해 초국가적인 프로젝트도 이루어지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CERN(유럽 입자 물리 연구소)이 그것이다. 호킹이 말했던 죽은 철학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면 오해할 수도 있다. 철학과 과학은 현대에 와서 그 사이의 각도가 너무나도 벌어져 있기는 하다. 호킹은 오히려 그렇게 벌어진 과학과 철학이 분명함에도 철학이나 인류문화사의 지식을 가지고 과학을 반증하려 하고 부정하려 하는지에 대해 정말 저 멀리 돌아가며 이 책을 썼다고 본다.

  공간이 11차원이라는 것을 철학에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모든 과학적 발견이 이뤄진 뒤에야(또는 과학적 방법론에 의한 추론의 과정에 있더라도) 철학이든 사상이든 인간의 해석으로 우주를 꿰어볼 수 있다. 앞에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데이터를 해석하는 것, 그것은 상관관계의 영역이다. 데이터가 쌓아있다 해도 거기에서 우리에게 정보를 줄 만한 데이터를 가려내는 작업도 쉽지많은 않다. 그런데 때로는 이런 시멘틱 데이터와 정크 데이터를 분리해 내는 그 과정에서도 과학은 공격을 받는다. 미리 결정을 해 놓고 말이다. 이러한 공격은 우리의 지적 능력을 상당 부분 봉쇄시킨다.

  M이론이 우리에게 주는 철학적 교훈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는 것이 실은 우리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행성사이의 관계에서나 쓰일 법한 중력이 핵들을 상호 연결시켜 주는 힘과 원초적으로 같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사과가 땅에 떨어진 것이 바람에 의해서도 아니고  새나 다른 동물이 먹으려다 잘못해서 떨어졌다는 인과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통계적 수치에 따른 상관관계라면 머리 아플 것이다. 청바지의 주머니처럼 숨어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끝으로 호킹은 지적설계에 대한 반론의 입장에서 이 책을 썼다기 보다는 과학이 추구하는 "왜"라는 질문에 대해 인간이 관념적으로 어떻게 대해 왔는지, 또 현대에는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대해 짧지만 비중있게 그럼에도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있도록 책을 썼다는 생각이 든다.

PS.
1. 호킹의 이 책은 예전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같이 냈던 책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2. <내 마음의 풍경> 이라는 블로그에서 '풍경'님이 "
바로 철학은 과학의 방법론을 배워야 하거나 그것과 연속성을 갖는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는데 어쩌면 호킹이 「위대한 설계」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의미가 같다는 생각에서 링크를 해 봅니다. 예전부터 구독하고는 있지만 좋은 블로그. 추천 블로그...
링크 : <내 마음의 풍경> 중... wandering 46 포스트..

3.
「위대한 설계」와 관련된 나의 페이퍼 읽기....[튜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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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들의 생각과 힘 - 과학과 왕립학회 이야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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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의 걸죽한 향연. 이 책을 한마디로 얘기해본다면 그렇다. 너무나 걸죽하다. 이야기라는 수프를 한 수저 뜨자 걸죽한 묘한 덩어리들이 바닥까지 죽 느려뜨려진다. 너무나도 걸죽해서 (나에게는) 먹기도 전에 질리고, 느끼했다. 어렵다는 감상을 떠나서 매우 압축적인 각각의 글 꼭지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생각을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이 책은 20명의 과학 저술가 혹은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영역안에서(어쩌면 영역밖을 넘어서) 펼쳐졌던 하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과학사에 종종 등장하는 거인들은 뉴턴 이전 시대의 거장들이다. 거인이 어디에서부터 등장했는지 잠시 다른 책을 살펴본다.

   
  "내가 더 멀리 보아왔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오(If I have seen fa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아이작 뉴턴은 1676년에 로버트 훅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실 그것은 광학에서의 발견에 대한 언급이었을 뿐, 좀더 중요한 중력 이론이나 운동 법칙에 관한 것이 아니었지만, 과학을 비롯한 문명 전체가 그 이전에 이루어진 성과 위에 새롭게 구축되는 일련의 누적적인 진보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적절한 언급이었다...(중략)...

스티븐 호킹 편저,『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중 서문에서 발췌, 까치, 2006.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스티븐 호킹이 편저한 책의 발췌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우리 세계를 이룬 누적적인 과학의 진보의 과정을 여러 에세이들로 묶은 책이다. (인용문의 굵은 글씨나 밑줄은 내가 임으로 한 것임..) 그러니까 도대체 누적적인 진보가 뭘까? 그에 대한 답은 '경험철학'이라고 볼 수 있다. 사고실험을 통한 결과를 대화로 풀어가며 내 생각, 니 생각 어떻게 꿰어보고, 또 반론해보고 나름대로 결과를 유추해내는 것이 아닌, 한마디로 보고 듣고 수행한 일에 대하여 보고서로 작성하고 그 보고서를 돌려 다른 사람에게 읽히고 그와 유사한 일에 대해 또 같이 사유해보고 기록하는 요즘말로 일련의 과학을 수행하는 초기 버전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까 과학적 지식을 모으는 것이 아닌 과학적 지식을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이 책은 기록에 대한 증언이다.

서론은 '빌 브라이슨'이 썼는데 왕립학회란 어떤 곳인지 개략적으로 설명을 한다. 빌 브라이슨이 말하는 왕립학회는 먼저
'비국수적이고 중립적인 국제적인 단체로 회원 자격으로는 과학적 성실성과 창의성을 우선적으로 꼽으며, 3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권위를 자랑하는 단체'쯤으로 요약된다. 빌 브라이슨의 서문을 읽어보면 과학적 통찰과 영감 혹은 사실의 발견보다는 그런 것들을 이룬 사람들에게 더 애정을 보인다. 왕립학회에서 발굴한 과학적 사실보다는 발굴의 과정에 다양한 의견을 내었던(물론 발굴자를 포함한) 그 사람들의 삶의 투쟁(학문적 투쟁)이 곧 왕립학회의 역사라는 의미이다. 그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낸 결과물은 단지 하나의 보답물쯤으로 본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보답물인 실험기자재들을 포함한 자료들은 아주 중요한 역사적 보물로 왕립학회에서 보관하고 있다.

앞서 중립적 단체라 함은 왕립학회(Royal Socity)라는 단체명에 왕이라는 정치적 지칭어가 들어갔음에도 런던을 붙여 놓음으로써 중립적 위치로 돌린다는 의미로 풀이한다. 즉, 영국 왕립학회가 아닌 런던 왕립학회가 정식명칭이다. 이 학회 멤버들은 요즘 말로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의 VJ들이다. 이상하거나 희귀한 사건이 벌어지면 일단 회원들을 보내 조사하게끔 하고 보고서를 받는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왠지 코믹쪽 요소가 보인다. 그 고전적 VJ들의 과정의 이야기가 곧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며, 또 현대의 VJ들 그러니까 현재 왕립학회 멤버인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실려있다. 이러한 허무맹랑을 좇는 상황을 '마거릿 애트우드'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와 비교하여 들려준다. 미친짓같이 보이지만, 결국엔 미친짓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왕의 시대에는 신의 이름으로 민중위에 군림한다. 신이 만들어낸 모든 현상들은 왕이 알고 있어야 하며, 왕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다. 물론 그 이전에 일련의 이런 과학적 발견이나 물질의 발견은 왕의 이름으로 헌상되어지는 것이 관례이다. 그렇다고 왕 스스로가 이름짓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왕과 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럴듯한 이름 붙여지며, 우주의 기초가 되는 사상에 맞추어 이름 지으려 노력한다. 합리주의적 철학이나 경험주의적 철학과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그들은 우주를 규정하고 세상을 규정하고 왕의 권위를 세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레베카 뉴버거 골드스타인'의 <이름에 담긴 뜻은?> 이라는 꼭지에 실려있다.

'사이먼 샤퍼'의 <전기를 가진 대기> 이야기는 당시 최첨단 기술인 피뢰침에 관련한 이야기이다. 벼락을 맞아 불에 탄 건물을 조사하던 중 그 건물이 최첨단 기술이었던 피뢰침이 설치된 건물이었음을 알게된다. 사람들은 지적 미로에 빠져버렸다. 피뢰침 자체가 번개의 피해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생각이 틀린 생각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부터 너무나 뾰족하면 의외로 부작용이 생겨 번개를 불러온다는 의구심까지 불러 일으키는 골치아픈 문제로까지 번졌다. 사실 왕립학회는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의 이론을 수용했다. 더구나 그의 논리적 이론과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실험은 왕립학회 멤버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프랭클린에게 메달과 왕립학회 회원 자격까지 수여하였다. 이제 하나의 반증이 나타남으로써 피뢰침에 대한 의구심이 곧 미국인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제 미국과의 전쟁에 군수품을 공급하던 군수원에도 이러한 보고가 들어갔고, 전면적인 재조사에 들어간다.

재밌는 것은 번개를 피하기 위해서는 번개를 불러들이는 회로를 설치해야한다는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것을 '프로메테우스적 자유'라고 불렀는데, 이 자유를 얻기위해서는 또 그만큼의 내포된 위험성에 노출되는 이중적 상황에 처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은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런 원칙에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실험을 고안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부 지역과 사람들만 신뢰할 수 있었다...(중략)...대법원장은 '과학의 문제에서 과학자의 주장에는 과학자만이 답변을 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문제는 누가 '과학자'인가를 결정하고, 위험스러운 프로메테우스적 과학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였다. 타이탄이 불을 훔치고, 그에 대해서 지독한 벌을 받은 것은 자유 탐구와 그에 대한 벌칙을 뜻한다. 여성운동가 메리 울스턴크래프는 1794년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훌륭한 논평에서 '성직자들이 엄청난 강요의 구조를 세워놓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녀는 오히려 '우리는 인간이 더욱 지혜로워지면 아무 생각도 없이 서로에게 더 큰 행복을 제공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딸인 메리 셸리가 과학적 야망과 그것의 두려운 결과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등장한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의 부제가 바로 「현대의 프로메테우스(The Modern Prometheus)」였다.

『거인들의 생각과 힘』중에서, p.161~162.
 
   

사실 간단하게나마 다른 이야기의 꼭지들을 소개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너무나 방대해져서 '리뷰'라는 목적에도 맞지 않게 되어버린다. 물론 내가 완벽히 소화한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이 책은 읽는다고 해서 그러니까 독자의 눈이 흰 바탕의 검은 글자들을 따라간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머리속에 이미지화 되는 그런 책이 아니다. 문자를 이미지화 시키기에도 독자의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거인들의 생각과 힘』은 한 권의 책이지만, 과학 이슈를 담은 과학잡지를 보는 듯 하다.  그만큼 읽을거리, 생각할거리를 던져준다. 특별한 최신 이론을 소개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과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흔히들 지나치기 쉬운 과학사의 틈새를 메꿔준다. 사실 이 책은 당장 우리에게 어떤 지적 욕구를 채워준다기 보다는 다른 과학서적의 독서에 도움을 주는 배경 지식을 깔아준다. 20여편의 에세이에 등장하는 소재는 다양하다. 천문학, 우주론, 광학, 생물학, 진화론, 비행역학, 지질학, 화석학, 양자역학 등등으로 말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DNA를 발견한 과학자를 우리는 안다. 또 X선을 발견한 사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DNA를 X선으로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뭐, 이렇게 직관적인 물음으로 시작하는 책은 전혀 아니지만, 읽다보면 알아서 스스로 정보를 조합할 수 있다. 참, 답은 '빌 아스트버리(FRS 1940년)' 이다. 여기에서 'FRS 1940년'이란 Fellow of the Royal Socity의 약자로 1940년에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얼마전에 『막스플랑크 평전』을 읽었다. 그 책은 독일의 근대 과학사를 이야기하는데, 이 책은 영국의 과학사 특히 왕립학회를 통해 펼쳐지는 과학사를 들려준다. 두 권의 책에서 서로의 대척점은 없을지라도 그만큼 개인적, 단체적, 국가적으로 얼마나 과학에, 학문에, 지식에 힘을 쏟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지 느끼게 한다.

음, 우리는 어떨까. 우리도 과학의 증언에 힘을 쏟고 있겠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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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플랑크 평전 - 근대인의 세상을 종식시키고 양자도약의 시대를 연 천재 물리학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 지음, 이미선 옮김 / 김영사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막스 플랑크 평전>을 보았다.

 
다른 책들은 젖혀두고 이 책만 보았는데 쉽진 않았다. 이 책은 과학자라는 신분을 지닌 한 인간의 삶이 세상에 어떻게 귀속당하여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당시 격변의 시대상을 막스 플랑크라는 지식인의 눈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개인이 대중으로 또 국가라는 하나의 거대한 몸통('몸체'라고 쓰고 싶기도 하다)으로 점점 흡수당하여 획일화되는 부자연스러운 세상이었다. 마치 파란색 잉크병에서 잉크 입자만 뽑아내려 하듯, 생각과 사상의 엔트로피가 제거되어가는 세상. 개인의 자유도가 하나씩 떨어져나가는 세상. 모든 정보의 통로가 막혀있는 세상. '히틀러'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화 되어가는 그런 세상. 히틀러라는 단수 명사가 복수 명사가 되어가는 세상이었다. 곳곳에서 히틀러들이 작용하는 세상이었다.

 당시대의 작용자는 전쟁이었다. 어디든 전쟁이 있었고, 누구든 전쟁을 피해다닐 순 없었다. 막스 플랑크도 예외일 순 없었다. 책을 읽어보면 그는 참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이 그의 삶을 야금야금 집어 삼키는 와중에도 연구와 학회일 그리고 독일의 물리학 성과를 위해 열심히도 뛰어다녔다. 삶의 곳곳에 물리학의 장막을 쳐두고 그안에서는 최대한의 자유와 긍지를 누리려고 하였다. 물리라는 장막을 걷기 싫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소 동료, 그리고 가족들이 장막을 걷어치우고 저 포연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결국엔 막스 플랑크도 장막을 걷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틈에 나치를 위한 어용 물리를 해야했고, '하일 히틀러'를 외쳐야만 했다.

 세상은 참 쉽게 바뀌어갔다. 어렵게 표현하면 격변이었고, 쉽게 말하면 생기는 족족 망해버리는 시기였다. 막스 플랑크는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통치하고 있을 무렵 태어났다. 얼마후에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이 황제로 등극을 했고, 그 후 손자인 빌헬름 2세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았다.
동시에 독일은 세계 강대국과 발맞추어 제국주의로 돌아섰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제국주의는 몰락(황제가 네덜란드로 도망갔다)하였다. 사회민주당에 의해 '바이마르공화국'이라는 별칭을 가진 민주공화정이 탄생하였지만, 우익이 한 쪽으로 표를 몰아주는 바람에 히틀러가 총리가 되어 정권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얼마 뒤에 대통령이 죽고, 총리만 남은 독일은 시간을 멈추었고, 나치당이 제1여당이 되어 더 이상 정치적 변모는 하지 않게 된다. 대통령과 총리를 조합한 '총통'에 오른 히틀러는 본격적인 독재정치로 들어선다. 이 히틀러를 총통으로 모신 나치는 글로벌화를 위해 제 3제국 건설 착수에 들어간다. 그리고 누구나 다 알다시피 제 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프로이센의 유산, 공화국의 유산, 나치의 유산 이 모든 것이 싹 쓸려버린다. 패전국이라는 도장을 찍은 곳도 베르사유 궁전이었다(일명 베르사유 조약).

 19세기부터 과학계 전반은 뉴턴이 곳곳에서 본격적으로 분해되는 시기였다. 분해되는 만큼 과거의 거인들에게 이어받았던 뉴턴의 철학적 유산은 곳곳에 뿌려졌다. 행성간의 힘의 법칙은 전기와 자기의 힘과 장의 법칙으로 나타났으며, 광학은  뉴턴이 프리즘으로 빛을 나눴던 것 그 이상의 영역(가시광선 영역을 더 벗어난)으로 확장되어 분광확이라는 학문으로 진화되어갔다. 스펙트럼을 통해 드러난 새로운 원자들의 존재는 화학을 분자나 원자의 시각 수준에서 들여다보게끔 하였다. 뉴턴이 곳곳에 작용하는 과학계였지만 결국엔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적 관점으로 이동하였다.

 힘을 넘어선 에너지라는 개념의 완성이었다.   
  

 

   
 


에너지의 특성을 이해하려면, 먼저 세계의 사건들 및 과정들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두 가지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공간을 가로지르는 물체의 운동이 지닌 특성이며, 다른 하나는 열의 특성이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운동을 기술하려는 노력은 17세기 말이 되어서야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 뒤 놀라울 정도로 오랫동안 씨름한 끝에 과학자들은 마침내 열의 특성을 밝혀내는 데도 성공했다.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였다.  


<'갈릴레오의 손가락' 중에서... P. 142~143>

 
   

막스 플랑크의 양자가설은 현재의 양자역학의 토대가 되었다. 그 해가 딱 떨어지는 1900년 이다. 기존 물리학에 고전이라는 단어가 붙어버림으로써 또 같은 의미로 현대물리가 태동함으로써 과학사라는 타임라인에 시간적 분할이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은 공간적 분할이었다. 우주가 미시 세계와 거시 세계로 나뉘고 당시 우주를 지배하는 언어는 새로이 나뉜 틀을 설명할 수 없는 지경에 이러렀다.

  당시까지 설명할 수 없었던 현상중의 하나는 흑체복사를 어떻게 설명하느냐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뜨거운 물체(모든 전자기파를 흡수한 이상적인 물체를 흑체라 한다)에서 방출되는 (그러니까 관측된) 빛의 스펙트럼을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보이긴 하는데 말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론적인 내용이야 다른 책들을 보면 될터이다.
아무튼 드디어 실마리를 얻었다. 막스 플랑크가 해낸 것이다. 빛을 믹서기로 갈아버린 것이다. (물론 믹서기라는 단어에 혼동을 할 터이지만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끄집어 내었다.) 그러니까 믹서기로 진짜 갈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종의 상징적 행위로 보면 된다. 가령 사과가 100개 있다고 하자. 사과를 하나, 둘, 셋,... 이렇게 셀 수 뿐이 없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면 다른 식으로도 셀 수 있다. 사과를 몽땅 믹서기에 넣고, 갈갈이 갈은 뒤 1리터 짜리 그릇들에 담으면 하나, 둘 이렇게 개체로 세던 방식(그러니까 한마디로 무게 또는 질량인 kg이나 g으로 세던 방식)을 단위가 리터인 부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총 질량이 얼마인가가 될 사과 100개가 몇 리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부피로 측정가능하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가 내놓은 플랑크 상수가 한마디로 이런 믹서기 역할을 한다. 빛을 작용양자 플랑크 상수에 비례시켰더니 에너지(흑체에서 방출되는 관측된 빛의 스펙트럼)로써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의 진동수(Hz)를 에너지(J, 줄)로 재해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갈려서 액체가 된 사과즙은 연속적 값이 아닌 불연속적인 값을 보인다는데에 문제가 있었다. 마치 1리터, 2리터 이렇게 말이다. 1.5리터는 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냥 그런것이 그때 알아낸 자연의 진리였다. 이런 불연속적인 값으로 인해 고전물리에서 현대물리로 도약하였다.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산물은 어떤 우연한 배열이 아니다. 이러한 물리학적 기본량의 조합을 '작용'이라고 한다. 따라서 h는 가끔 '작용의 플랑크 양자' 혹은 '작용양자'라고도 불린다. 이를 통해 자연 안에 존재하는 근원적이며 본래적인 틈(Lucke)이 자세히 설명된다. 그것은 에너지가 아니라 작용 즉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다.

<'막스 플랑크 평전' 중에서... P. 136>
 
   

 

플랑크는 그때 필요한 상수 h를 작용양자라 불렀는데, 후세에 플랑크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용'이라는 물리적 의미는 앞의 사과의 예를 들어 '그램(g)을 리터(L)로 조합 시킨다'는 의미이다. 진 동수 Hz는 사실 시간단위이며 에너지는 그 자체로 에너지 단위이기에 에너지와 시간이 만들어낸 생산물로 표현한 것이다. 플랑크는 이런 불연속적인 에너지, 즉 에너지 알갱이들을 '양자(Quantum)'로 부르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쉬운 의미로 '한 스푼'쯤 된다.

  결정론적 인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존의 철학관에 의하면 태양이 있음으로 해서 지구는 미래로 달려가지만 결국엔 이 모든 것이 신의 의도와 맞물려 결정되었다. 태양, 지구, 다른 별들의 궤도는 결국 일상이라는 루틴을 만들어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 겨울을 겪다보면 다시 봄이 온다는 우주의 결정론적 인식은 농업 생산이라는 삶의 과제이자 인류의 큰 숙명이었다. 또 이런 원인과 결과에 따른 명제를 착실히 수행한 결과 농업 생산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키고 다른 수단으로도 삶이 영위될 수 있다는 기계론적 관점 또한 더불어 확장되었다. 그것은 바로 힘의 사용이었다. 빛을 전기로 받아들이고, 말의 힘을 엔진으로 대체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관념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플랑크는 새로운 이론으로 학계를 놀래켰지만 권위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실험결과에 맞추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적 합리성이란 권위였지, 대중을 위한 쉬한 이해와 같은 것과는 멀었다. 그러니까 권위를 인정받는다는 뜻은 권위자들이 인정한다는 의미이고 그것이 바로 시대의 대중성이었다. 아무튼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또다른 권위자들에게 이해가능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런 양자도약을 기존의 고전물리의 틀에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지만, 이미 나침반의 바늘은 새로운 곳만 가리켰다.

 당시에는 전쟁이 시대적 작용자였다. 전쟁은 권위자의 명령에 따라 진행되고 멈추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대중성이었다. 민중들의 동의없이 공화정에서 전쟁을 치루기란 쉽지 않다. 대중성은 과학계에도 몰아닥쳤다. 한마디로 대중을 위한 과학, 그리고 (독일이 과학의 중심에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국가를 위한 과학이 필요한 때였다. 대중의 이해를 위한 간결화(simple)가 필요한 때였다. 플랑크는 이를 위해 또 다른 발견을 하기에 이른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다. 그의 두번째 발견은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함으로써 플랑크의 물리적 기반(양자이론)을 확고히 해주었으며, 더불어 '대중의 관심'도 집중되었다. 그리고 후에 등장한 '슈뢰딩거'까지. 이 두 명의 과학자는 '대중성'과 '간결성(파동방정식이라는)'이라는 시대적 명제에 답을 하였다.

 문제는 시대가 시대였다는 것이다. 시대적 합리성 혹은 합법성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물리적 이론이야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철학적 순수성은 보장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나 슈뢰딩거부터 외국인이지 않던가. 순수성은 혈통으로 번져갔고, 막스 플랑크는 정치적인 것과 정치적이지 않은 것들이 내뿜는 중력을 혼자서 감당하려 하였다. 정치적이지 않은 것에는 물리학이라는 학문이 걸려 있고, 정치적인 것에는 가족이 걸려 있다. 그는 버텨가며 물리학의 장막속에 있으려 하였지만 결국엔 장막이 들춰져 버렸다. 물리학계는 나치계가 점거해버렸다. 그렇다면 가족은? 큰 아들은 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터에서 죽었고, 작은 아들은 히틀러 암살 사건으로 유명한 '발키리 작전'에 연루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같은 날 사형 당한다. 비극적인 개인사이다.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막스 플랑크 평전>은 흥미롭다. 또 어렵다. 흥미로운 부분은 플랑크의 개인사이며, 어려운 부분은 역시나 물리학과 관련된 부분이다. 역사와 물리라는 두 거점을 왕복하는 이 책은 사실 아쉽기도 하다. 물리에 관한 부분에서는 좀 더 쉬운 참고서적이 필요할 듯 싶다. 짧은 책 안에 그것도 전체가 아닌 일부에만 물리학을 펼쳐 놓으려 하니 들락날락 거리는 수많은 물리학자들과의 연계도 쉽게 이어지지도 않고, 또 개념들마저 압축시켜 놓으니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물론 읽는 독자의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겠지만 말이다. 플랑크의 개인사 관련 부분은 흥미로운 부분도 많지만, 이 역시 역사라는 실로 묶여 있기에 시간적, 공간적 이해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것도 역시 개인차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리한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시 물리학계를 받쳤던 막스 플랑크. 아틀라스는 제우스와의 전쟁에서 져 그로인해 천계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천공을 들고 있어야만 하는 벌을 받지만, 막스 플랑크는 다른 이유로 평생 동안 물리학을 떠받쳤다. 그 이유는 오직 자기가 원해서이다. 물론 세계적 물리학의 완성에 다가서기 보다는 독일 중심의 물리학을 원하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이유로 인종이 다르다고, 성별이 다르다고 사람들을 배척하진 않았다. 순수한 목적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물리학에 도전했던 그 정신만은 순수함에서 나왔다고 본다.

어쨌든 한 개인이 어떻게 물리학과 역사를 쉼없이 왕복하고 있는지 과감없이 보여주는 책이라 생각한다.

PS.

1. 이 책에 쓰여져 있는 물리학적 개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양자역학의 개념보다는 그것 보다 더 근원적인 것들, 그러니까 에너지와 열에 대해서 좀 더 확실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이 평전을 읽으면서 '피터 앳킨스'의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참고했다. '과학의 10가지 위대한 착상들'이라는 부제에서 보여지듯이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열, 에너지, 엔트로피, 양자와 관련 기본적 개념들을 그나마 쉽게 다룬다. 이 책 역시 추천하는 책이다.


2. '<막스 플랑크 평전>을 쓴 저자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또 다른 책 <슈뢰딩거의 고양이>도 추천하는 책인데 이 책은 사고실험과 관련한 책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실험을 할 수 없는 것들을 머릿속에서 돌리는 사고실험 관련 책이다. 하지만 분량은 많지 않아 오히려 <갈릴레오의 손가락>을 더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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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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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 곳은 아마존 사이트였다. 새로 출간된 과학관련 책들은 뭐가 있는지 궁금하면 가끔 들러서 이리저리 눈팅을 하곤 한다. 2008년 1월이던가..2월이던가... 암튼 그때 책 제목을 처음 접하고 정말 읽고 싶어졌다. 알라딘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원서로 구매할 수가 있었다. 그때 당시 2000원짜리 쿠폰까지 하면 2만원에 살 수 있었는데, 어차피 바로 읽을 수도 없고 해서 미루게 된 것이 몇 달 지나니까 환율의 변동땜시 수직상승을 하더니 얼마전까지만 해도 4만원 근처까지 올라갔던적이 있었다(아마도...). 미친척하고 살까 말까를 고민하던 중 이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그때 그 기분이란...무슨 앓던 이 빠진 기분이랄까? (구매를 2009년 6월에 했으니 꽤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럴수가... 한껏 고조된 구매의욕이 순식간에 꺾여버리게 되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책 표지 때문이었다. 나름 표지에 신경쓰는 타입도 아니고, 오타나 탈자나 뭐 그런것에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 자신 조차도 모르는 트리거 영역(내내 명랑하니 있다가 어느 영역 혹은 어느 수준을 건들면 금세 분노로 바뀌는)이 설정되어 있지 않나 싶다.

먼저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일러스트레이션이 떡 하니 아니 어지러히 인쇄되어 있었다. 미취학 아동이 까까 사 먹고 모아놓은 별 이상한 동물 스티커들을 아빠의 양장본 표지에 무차별로 붙인거 마냥 테러해 놓은 표지였다.(비약이 심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첫인상이 그랬으니까...) 





 

 

 

 

 

 

 

  

암튼 그랬다.

내용 자체는 책 제목에 너무도 잘 압축되어 있다. 다만 이 책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본 것은 '닐 슈빈'의 환원주의적 접근에 대한 방식이었다. 나도 이러한 과학적 접근 방식을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 설명하기 그렇지만, 이 책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드러난 것 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가령 파충류의 턱뼈들은 인간에게 와서는 퇴화되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기능을 하는 뼈로 대체되었으며, 이는 인간의 귓속의 뼈들로 대체되었다. 흥미로운 대목이다. 필요한 부속을 무로부터 창조하지 않고, 기존 불필요한 것을 끄집어 올려(이 경우에 있어서 턱뼈에서 귀쪽으로...) 새로운 부품으로 대용하게 했으니, 의외로 에너지 낭비없는 실용적인 설계인 것이다.

이런 것들야 말로 정말 '내 안의 물고기'를 드러내게 하는 것이다. 나를 보기 전에 물고기 부터 보라는 이 환원주의적 내용은 꼬리에 꼬리를 잇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 과연 인간은 지구 생물 진화의 종착역인가 하는 물음으로 자연스레 이끈다.

진화 중심에서 봤을때, 당연히 아닐것이다. 지금까지 지구의 역사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진화의 가지는 제일 최상층에 위치하지만 이는 언제든지 또 다른 가지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마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음 물음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그렇다면 진화는 연속적인가? 아님 불연속적인가? '라는 물음이다.  이에 대해 나로선 지식이 없어서 뭐라 할 수는 없다. 누구는 진화를 연속적으로 보고 있을 것이고 이는 지금도 아주 느리지만 진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구는 진화는 불연속적이고, 이는 지금의 진화는 멈추워있거나, 거의 멈춰진 상태에 있다는 말이된다. 거대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 '내안의 물고기'에서는 진화를 어떤식으로 표현을 했을까?

저자인 '닐 슈빈'이 연구하고 있는 영역을 보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데, 저자는 고생물학자이면서 현재는 의대에서 해부학 강의를 맡고 있는 교수라는 점이다. 그러니 이 책은 좀 더 거시적이다. 해부학적인 요소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어찌보면 '발생 그 이후'라는 의미에 더 가까울 듯 싶다. 여기서 주로 다루는 것들은 발생이라기보다는 발생 이후의 '변형'이다. '변이'라 할 수 있겠지만, '변이'는 곧 학문적 용어로서 쓰이므로 나로선 이미지만 얻을 뿐 자세한 것들은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전반적 이미지는 발생은 고생물에서 찾고, 변형(혹은 변이)은 현 의학안에서 그러니까 해부학이라는 영역에서 얻으려한다는 이미지이다. 그러다보니 진화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상당히 제한적이다. 인간 이후의 진화에 대한 이야기는 담겨있지 않다. 미래에 인간이라는 종이 어떻게 진화될 것이라는 의견이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화에 대한 그의 상세한 의견이 들어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냥 보이는 것과 발견한 것의 조합쯤으로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에 대한 무수히 많은 사족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오직 발견한 것과 그에 대한 저자의 연구내지 학계의 연구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다보니 분명 환원적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인간의 팔과 다리, 두개골, 척추, 몸의 구조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설명가능하다는 이야기), '잃어버린 고리'라는 상당히 거대한 카테고리를 건들지 않고(진화론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찾아낸 고리'라는 단순한 몇 개의 샘플만을 취한듯 보이는 제한적인 카테고리만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꽤 직관적이다. 가령 지느러미가 이러이러한 과정을 겪어 인간의 손과 발이 되었다라는 식으로 굉장히 압축하여 설명해 놓았다. 진화론이 가지는 철학적인 부분은 과감히 삭제했고, 오직 현상과 관련한 이야기뿐이다.

이 책은 그러니까 감질나게 하는 면이 있다. 책도 얇다.

이 책만을 놓고 진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엔 역부족이다. 분명 진화에 대한 예들로 가득 채워져있지만, (이 책에서 소개한) 몇가지 진화 패턴이 정말 우리 몸 전체에서 이루어져왔던 모든 패턴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아직 연구중이라 하면 할 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진화에 대해 확고한 입장, 혹은 전제로 이야기하지만 전체적으로 진화의 모습을 그리기가 쉽지는 않다.

예전에 읽은 책 하나가 언뜻 떠오른다.

과학자들이 외계인과 조우를 한다. 그 과학자들은 외계인이 지구에 떨어뜨린 거울('거울'이라고는 하지만 한마디로 디스플레이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음성도 주고 받을 수 있다)속 실시간 영상을 통해 외계인들과 대면한다. 자, 과학자들은 그 거울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을까? 사실, 처음엔 기껏 들여다보는 정도 일 것이다. 그러니까 '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보다는 '뭘 알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거울을 들여다본 후 맨 처음 알 수 있는 것은 유리면을 통해 보이는 외계인의 형체가 될 것이다. 이렇게 생겼군.
그들(외계인)이 살고 있는 환경이 어떻하길래 이런 모양을 가지게 되었을까. 당연히 이런 생각도 들 것이다. 또 그들은 어떤 소리를 낼까.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어떤식으로 대화를 할까. 대화를 하긴 할까? 뭐 이런 호기심도 꼬리에 꼬리를 잇듯이 연달아 고개를 들 것이다. 소통을 생각했다면 음성 통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정보 전송에도 궁금증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의 문자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하지만 이런 궁금증은 어떠한 기준이 있어야한다. 그 기준은 바로 '우리'가 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데, 거울 속에 비친 외계인의 모습은 이렇더라와 같은 기준말이다. 그러니까 외계인에 대한 모든 호기심은 바로 우리에 대한 연구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선 비교할 수도 대조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의 해답으로 놓고 상대(여기에선 외계인)를 이리저리 굴려보면서 또 다른 해답을 얻는 것이다. 
   

이런것을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것은 나도 모른다. 하지만,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답을 가지고 그 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추측하거나 혹은 답이 변화하는 과정을 예측하는 것이라고 해두자. 또 그 답이 나오기 까지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찾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무튼 이런 '변분법'은 양자역학의 기본이 되며, 또 창발성(혹은 복잡계)과도 연관되어진다고 한다. 양자역학의 경우엔 'NP 완전문제(NP-complete problem)'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즉, 패턴의 검색인데 'NP-완전문제'에 서 대표적인 예는 수십개의 섬과 다리가 있다고 가정했을때, 한 섬을 한번씩만 거치는 경로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섬과 다리 숫자를 알고는 있지만, 조건(한번씩만 거친다는)에 따른 그 경로는 알 수 없다. 뭐.. 이런 것이 양자역학의 난관이 되는 문제이다. 한마디로 모든 경우의 수를 다 확인해보려면 성능 좋은 컴퓨터로 빡시게 돌려야하는데, 기존 알고리즘을 사용하는 보통의 컴퓨팅으로는 불가능하다. 즉, 양자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의미.

암튼, 글이 길어졌다. 위에 설명한 외계인과 우리(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 책은 여러 단편 SF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중 앞서 얘기한 외계인과 인간의 조우에 관한 단편이 바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이다. 책 뒤에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단편 소설인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바로 '변분법'과 '창발성'을 바탕으로한 이야기라 한다.

'닐 슈빈'의 책 <내안의 물고기>와 왠지 제목이 유사하지 않은가? 다만 '닐 슈빈'은 오직 현상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PS.

1. 언제나 그렇지만,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머릿속에 몇가지 든 것들만 잇다보니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거나 아예 틀린 리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렇게라도 언급함.

2. <내안의 물고기>를 몇가지 변분법적 원리를 적용하고(이미 인간의 모습을 최대로 유지하고), 몇가지 변수를 조정하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종이 등장할 수도 있음...(그림속 생명체는 영화 '헬보이'에 등장하는 '에이브 사피엔'). 원래는 '에이브 사피엔'과 '자자 빙크스'를 가지고 리뷰쓰려고 했는데 좀 엉뚱하니 흘러 따로 쓰지는 않음...사실 별로 쓸 말도 없음...

  








    

 

  

 

3. 진화와 관련된 책은 읽기가 상당히 어렵다. 물론 어떤 책도 마찬가지겠지만 말이다. 다양한 분야를 알아야하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필요한 분야는 의외로 철학분야가 될 듯.

4. 이 책('내안의 물고기')을 이야기하면서 '틱타알릭(Tiktaalik)'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는데, 이 책의 중심이 되는 고대 생물의 화석이다. 그냥 유튜브 클립이 있기에 링크.....  

http://www.youtube.com/watch?v=B9h1tR42QYA&feature=player_embedded  

5. 예전에 포스팅 해봤던 인간 2.0과 관련된 잡설 (별것 아님...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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