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와 자판을 두드려본다. 사실은 가끔 들어와 두들겨보기도 하는데 곧 그러다 만다. 블로그의 맛을 잃었다고나 할까. 완결지을 수 없다는 생각속으로 나 자신이 함몰되어간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완결 지을 필요말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지금 자판을 두드리는 이유는 나귀님의 번역과 번역론에 대한 글 때문이다.

RSS 구독을 통해 글들을 즐겨보고 있는 알라딘 블로거들 중 콸리어(qualier)님과 나귀님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을 놓고 의견 대립(아닌 대립)이 생겼다. 콸리어님의 글과 나귀님의 글을 따로 따로 읽으면 두 분의 각자 생각에 상당 부분 공감이 가는데, 같이 엮어서 읽으면 뭔가 걸리적거린다. 두 분의 생각이 직접 부딪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살짝 어긋나있다고나 할까.

나귀님의 첫 글 : 부실한 미녀와 부정한 미녀
콸리어님의 답글 : 부실한 "미녀"는 커녕 부실한 "추녀"만도 못한 - 나귀 님 비판에 답한다
나귀님의 두번째 글 : "번역"과 "번역론" 사이...


사실, 두 분이 놓고 이야기하는 대상은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이 아니라, 이 책의 저자인 '전문 번역가' 이희재씨다. 나귀님은 이희재씨에 대한 기대감이 서서히 줄어들고 있다고 했고, 콸리어님은 책도 읽어보질 않고 무슨 소리인가 라고 반응을 보인 상태다. 그런데 사실상 콸리어님이 말씀하신 나귀님의 어처구니 없는 리뷰는 리뷰가 아닌 그냥 단상쯤으로 보이는데, 콸리어님은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나귀님이 보인 이런 단상 조차도 용납할 수 없으신 모양이다. (실제로 이 글들은 리뷰 항목이 아닌, 마이 페이퍼 항목에 들어가 있다. )

그러니까 어제 나귀님이 새로 올리신 응답 비스무리한 글과 그 전의 콸리어님의 글, 그리고 그 이전, 두 분의 거리감이 느껴지는(그러니까 어긋나서 완정탄성충돌이 아닌 각도가 삐끗하니 틀어져 버린) 논쟁의 시초가 된 나귀님의 글, 이 세 개의 글을 읽고 종합해보면 (물론 내 생각이다), 사실 각 글들이 관련지어져 있는 글은 아니다. 나귀님의 처음 글은 <번역의 탄생>이라는 신간을 보고 떠오른 번역가 이희재씨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가있고, 콸리어님의 글에는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이 나와 기대감에 차 있는 상황에서 나귀님의 글을 읽고 왠지 찬물로 끼얹짐을 당한 모양새가 느껴진다. 이 상황에 나귀님은 어제 새로이 장문의 글을 올리셨는데, 번역과 번역론에 대한 나귀님의 생각을 다시 짚어본 글로 보인다. 이 글속에는 번역가 이희재씨에 대한 이야기도, 그의 새책 <번역의 탄생>의 직접적 언급도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두 분의 글에 추천을 눌렀다. 콸리어님은 "벌써 이런 엉터리 글을 여덟(8) 명씩이나 추천하지 않았는가! "라 고 본인의 글 속에서 나귀님의 글을 8명의 사람들이 추천한 것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셨는데, 예전 진짠지 가짠지 모를 하나의 설화가 떠오른다. 황희 정승이 싸우고 있는 머슴들의 말을 듣고, "듣고보니 니 말도 옳고 또 너의 말도 옳구나." 라고 대답했다던 그 설화말이다.

사실, 나귀님의 글은 번역론 이전에 번역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또 하나 이야기가 떠오른다. 바로 '이지 맨(easy man)'일화다. 이것도 많은 사람들도 알고 있겠지만, 예전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만났을 때, 부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냈던 단어들이다.

얼마나 쉬운 단어인가. 그럼에도 정계와 미디어에서는 좀 시끌시끌했었다. 이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상황이 전혀 다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편안한 사람'과 '만만한 사람'의 차이는 실로 높은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의 차이만큼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번역론에 대한 규칙이 세세히 정해져있다 하더라도 사람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완벽한 번역을 지향할 수는 없다. 다만, 이때에는 번역가는 두 가지 상황, 정치적 상황과 개인적인 친근함 정도의 차이에 대한 상황 설명을 독자에게 해 줘야 할 것이다. 심지어, 한국의 그 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을 가리키며 부시가 말한 'this man'이라는 단어까지도 곁들여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상대하고 있는 부시 대통령의 개인적, 국가적 감상까지도 번역가는 설명하는 것이 최선일 듯 싶다. 'easy man'이라는 두 단어에 얼마나 많은 주석을 달아야 하는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이런 것을 번역론이라는 단순히 단어 고유의 의미론과 통사론적인 면만을 놓고 번역에 대해 이야기해놓고 있는 책의 목차를 본다면,  책을 읽지 않고서도 성실성으로 어느정도 뭉그러뜨려 불만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나귀님의 글에 추천마크를 누른 것이었고.

(물론 이 일화를 번역이라는 창조적 활동과 연계한다는 것은 약간은 무리가 있다. 이 일화를 이끌어 가는 것은 당사자(대통령)들의 말이고, 번역은 작가의 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말과 글, 그 바탕에는 문맥이라든지 그 순간의 정황이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소개한 것이다. 나귀님은 문맥의 이해라든지 정황에 대한 소개가 곧 번역가의 성실성으로 표현한 것이겠고...작가의 성실성에 따라 결국은 문맥 혹은 정황을 선택하는 독자의 몫은 작아질듯 하다.) 

하지만 콸리어님의 글에 또 동조를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들 또한 번역의 또 하나의 자세일 것이고, 또 무슨 무슨 론에 들어갈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자세 혹은 성실성이 <번역의 탄생>이라는 책 속에 언급이 되어있다면, 나귀님의 글 속에서 이희재씨를 언급한 것이 잘못임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앞 뒤가 안 맞을 수 밖에. (<번역의 탄생> 미리보기를 보니 저자인 이희재씨는 직역과 의역에 대한 고민도 보이고, 직역을 선호한다라는 글도 있었다.) 더 군다나 나귀님의 글을 리뷰로 보았다면 더욱 콸리어님도 불만을 가질 수 있다. 번역가라면 누구나 가지려 하고, 또 갖는다고 성에 차지도 않는 애매모호한 '성실성'에 대한 설명 부족을 이희재씨의 실력 부족으로 뒤집어 놓은 것으로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귀님의 글속에 숨겨져 있는 가시에 대한 불편함으로 콸리어님께 추천표를 눌렀다.

그리고 나귀님의 글을 기다렸다. 읽지도 않은 <번역의 탄생>이나 이희재씨에 대한 감상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나귀님이 좀 더 보충설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 번역과 성실성에 대한 글을 말이다. 그리고 새로이 올라왔고, 읽고나서 또 추천을 눌렀다.

번역은 기술이기 이전에 번역가 스스로의 이해를 수반해야한다는 간단하면서도 또 쉽지 않을 그 말에 동조하면서 말이다. 물론 콸리어님과 나귀님의 실력에 비해 나의 영어실력은 아마 초등생 수준이겠지만, 영어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은 전문가든, 비전문가든 크게 차이나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블로거들도 종종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한글 위주로 할 것인가, 영어 위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말이다. 한글 위주로 한다면, 독자들이 글에 대한 이해를 쉬이 접할 수는 있어도, 작가의 고유 언어의 참맛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고, 영어 위주로 한다면 독자들이 애매모호한 읽기 상황에서 스스로 문맥 선택의 폭만을 넓히는 꼴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선은 이해이고, 그 다음이 작가가 선택한 단어의 이유를 스스로 알아보는 것이 그나마 이상적이지 않을까 한다. 시간이야 많다면...

PS.

1. 두 분 글속의 가시는 아마 '일본식 한자를 대하는
번역가의 자세'쯤이지 않을까 한다. 여기에서 좀 삐끗한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책으로 나왔지만, 예전에 한겨레 칼럼에서 읽은 '공지영'작가의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의 한 토막을 보면, 음식점에서 단무지가 아닌 다쿠앙(다꽝)을 더 줄 수 있냐는 요구에 음식점 아주머니께서 질색하시며, 다쿠앙이 아니라 단무지라고 언급하신 에피소드를 읽고 뭐랄까 스스로 우리 언어의 한글 고유성을 위해 개인의 자유로운 언어 선택권에 제한이 가해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물론 깊게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이에 대한 답은 모른다. 그냥 그렇다는 것. 다른 외래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쓰면서 말이다.

(물론 모른다라고 언급은 했지만, 언어 순화는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또한 그렇게 쓰려고 노력도 하지만 잘 되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고유어(특히, 의성어와 의태어쪽...)를 굉장히 아름답게 보는 듯 하다...뭉클뭉클, 초롱초롱, 방방, 암튼, 유성음과 결합된 단어들이 귀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2.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한국식 한자와 일본어식 한자를 구분하는 능력을 우리는 정규 교육과정속에서 배우고 있냐는거다. 나의 경우엔 배워본적이 없다. 이공계라 그런지, 아니면 배움이 짧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배우질 못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일본어식 어투의 사용에 대해 불만을 보인다. 그러니까 완벽히 일본어식이든 중국식이든 국어식이든, 한자 사용 용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질 않다는 생각이다. 더불어 문장투도 그렇다. 요즘은 영어로 된 글들을 많이 보니까, 미국식 문장투(수동태라든지, 뭐 그런거..)도 많이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니까 이 대목에서 모두 피고인일뿐.

2. 두 분의 블로그에 대해 잠깐 얘기해보자면, 콸리어님은 기대를 하며 기다리고, 나귀님은 기대를 하지 않으며 기다리는 정도이다. 무슨 의미냐면, 콸리어님은 과학쪽으로 여러 책들을 소개하고 있기에 기대된다는 의미이고, 나귀님은 그냥 읽는다는 뜻이다. 얘기치않은 글을 기다리며...

3. 이 글은 두 분께 트랙백을 보내진 않을 것이다. 이 글은 단지 서로를 향해 너무 가시를 들어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또, 그냥 생각난 것들을 지나치자니 아쉬운 점도 있고 해서 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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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어떻게 세계의 절반을 가난으로부터 구할 것인가
피터 싱어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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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살어리랏다 - 아름답게 되살린 한옥 이야기
새로운 한옥을 위한 건축인 모임 지음 / 돌베개 / 2007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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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살어리랏다를 읽었다. 제목한번 그윽하다. '한옥에 살아 보겠다' 정도로 들리는데, '지금은 그러하질 못하니 애달프다'라는 안타까운 떨림이 전해온다. 사실 '살어리랏다'만 보면 모호하다. 앞서 말한 반대의 의미로도 통한다. '어쩔수 없이 살아야한다. 이왕 이런거 살아야지 별수있나'라는 현실에 순응은 하겠지만 그래도 원망 어린 소리도 묻혀있다.

어쨌든, 지금이라는 시제에서 보면 둘 모두 상심에 어린 말임은 분명하다. 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던지, 살기 싫은데 살수밖에 없다던지 말이다. '청산별곡'을 불렀던 누군가도 그러했으리라. 그러니까 '살어리랏다'에는 살아가는 와중에 배인 절절한 희망과 향수가 뒤섞여있다. 이 책은 희망가를 부른다. 한옥의 보급이라는 희망가가 글과 사진으로 버무러져있다. 그것도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이 단장해 놓은 집주인들의 희망가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을 향해 한옥에 한번 살아보지 않으련가 하고 꼬셔대는 한옥 건축가들이 흙과 돌과 기와로 켜는 희망가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옥'이라는 낱말보다는 '살이'라는 낱말에 무게가 더 실린다. 당연하다. 같은 말이라도, 한옥을 소유하고 싶다고 말하기보다는 한옥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럼에도 책 소재가 한옥이기 때문에 살이에 대한 선망은 결국 한옥으로 인함이다. 사실 살이는 상상속에 그려진다.


이 책에 소개된 다양한 한옥 건축물들은 빛과 소리와 공기를 담아두고자 하는 집주인들과 한옥 건축가들의 애정어린 작품이다. 사실 책에는 집주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드러나 있진 않는다. 좀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은 된다. 그럼에도 오래되고, 답답하고, 퇴색한 한옥이 시원하니 열린 공간으로, 있는 듯 없는 듯한 여백의 공간으로 변모함은 곧 한옥의 본 모습을 찾기 위한 전통 회복이며,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 꿈틀대기 시작하는 한옥의 진화이다.



p.64 ~ p.65에 실려있는 '쌍희재' 모습...


필자들의 목소리로
담담히 소개하는 글들을 읽노라면 마치 책 속에 실려있는 각각의 한옥에 들어서 있는 듯 생생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찍은 이쁜 사진들은 부족한 상상을 채워준다. 글과 사진 모두 살아있는 이 책 자체로도 멋지다. 사진에 담을 수 없는 프레임 밖 풍경은 글들이 아쉬움을 채워준다. 한 옥이라는 소재와 어울려 글에도 기품이 서려있다. 글들을 읽노라면 마냥 머리속에서 지어진 한옥의 조각 조각을 상상만을 통해 꿰어 맞추기가 쉽진 않은데, 사진과 설계 도면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글로도 충분하고 사진으로도 만족한다.

한옥도 한옥이지만, 이 책... 그러니까 멋진 사진도 있고, 깔끔한 글로 채워진 책들을 읽길 원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책에 대한 만족감이 책 소재의 만족감만큼이나 크다.


한동안 전통과 단절되었던 한옥이 기지개를 켜대는 새로운 진화를 책속에서 느껴보시라.

PS.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라면 구매하셔도 좋을 듯한 책입니다. 책값은 비싼편인데, 40% 세일해서 팔더군요. 잡지처럼 읽으셔도 괜찮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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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외서를 거의 보진 않지만(꽤 오랫동안 읽고 있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무슨 책들이 있는지 호기심에 이끌려 아마존이나 국내 온라인 서점 외서코너를 훑어보곤 한다. 주로 과학과 경제분야를 탐방(?)하고 있지만 소설도 가끔 리스트에 올려놓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어로 번역되어 새로 출간되었다 해서 옳거니 하고 읽지도 않는다. 암튼 나만의 그런저런 리스트가 있어서 새로이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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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lass Castle: A Memoir (Paperback)- 『더 글라스 캐슬』원서
Jeannette Walls 지음 / Scribner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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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rfect Swarm: The Science of Complexity in Everyday Life (Paperback)- The Science of Complexity in Everyday Life
Fisher, Len / Basic Books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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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rchill, Hitler, and the Unnecessary War: How Britain Lost Its Empire and the West Lost the World (Paperback)
Buchanan, Patrick J. / Three Rivers Pr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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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arly History of Rome (Paperback)
Penguin Classics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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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1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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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해프닝』을 안보신 분은 이 글을 피해주세요. 이 글속엔 영화 전반적인 이야기들이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해석한 저의 생각이 들어있어서 향후 영화를 보실 때 재미를 깎을 수도 있습니다.

'엠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영화인 『해프닝』에 대한 포스팅이다.

심각하게 보다가 심심하게 끝나버린 영화.

영 화를 보며 무슨 의미를 찾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만, 기대한 영화를 재미없게 본 사람 중 일부는 분명 '기대심리'의 반발로 여전한 '기대심리'를 가질 것이다. 가령, '(재미는 없었을지 몰라도) 매우 어려운 영화였어. 의외로 어딘가에 중요한 메세지가 있을거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 나름대로 해프닝에 대한 풀이를 해봤다. 순전 내맘이다.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떤 학생이 복도를 뛰어간다. 한 교수가 뛰어가는 학생을 붙들고 이야기를 건낸다.

교수 : "자네 뭐가 바쁘다고 뛰어가는가?"
학생 : "수업에 늦을 것 같아 뛰어갑니다."
교수 : "수업이 끝나면 뭐하려 하는가?"
학생 : "밥 먹어야죠.?"
교수 : "그리고는."
학생 : "나머지 수업 듣고 집에 가야죠."
교수 : "내일은?"
학생 : "똑같이 수업듣기위해 학교에 나와야죠."
교수 : "수업은 왜 듣나?"
학생 : "취직해서 좋은 직장에 가려구요?"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결혼해서 애 낳고 돈 벌면서 잘 살아야죠."
교수 : "그 후에는?"
학생 : "뭐..그렇게 살다가 죽겠죠."
교수 : "음...그러니까 자네는 죽으러 가기 위해 뛰어가고 있는 중이었구만."

이 영화에서 내가 살펴본 감독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했다. 말 그대로 '해프닝'이다. 그냥 벌어지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벌어진 일들간에 어떠한 순차성을 부여하고 영화적 소재로 써먹기 위해 일종의 (그리 중요하지 않는) 논리를 집어넣은 것이다.

예를들어 작년에 사고로 안타깝게 죽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 많은 죽음들은 1년이라는 시간동안 불규칙한 시간 간격에 놓여져 있을 것이다. 이젠 죽음이 차지하는 시간과 공간을 압축시켜보자. 그러니까 지난 1년동안에 있었던 죽음을 하루로 몰아서 발생시킨다고 생각해보자. (불경스럽지만...) 정말 대단하지 않겠는가.

영화속에선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모두 동일한 메시지를 받은 듯이 그 자리에서 죽을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하며 죽는다. 이게 포인트다. 냉정한 관찰자 입장에서 본다면 죽는 사람은 어이는 없지만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 높은 곳에 있으면 떨어져 죽고, 가까이에 총과 같은 무기나 무기 될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여 죽고, 자동차를 타고 있다면 장애물과 충돌하여 죽고 등등...

이 죽음들은 영화속에서 보여준 죽음이다. 사람들은 의외로 단순하게 죽는다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나고 다음은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은 해프닝의 결과이다.

:: 일상의 죽음

영화속에서 공사장이 등장한다. 그 공사장은 신축 빌딩인데, 건물 위에서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무슨 메시지를 들은 것 처럼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한다. 의미없는 다수의 죽음이다. 하지만 관객에겐 무의미한 다수의 죽음은 공포로 보여진다. 어이없이 그리고 의미없이 죽는 것. 그것은 정말 공포인 것이다.

이때 시간간격을 벌려보자. 영화속에서처럼 하룻동안 일어나는 순간적인 동시 다발적인 죽음을 1년으로 늘인다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공사장 건물 위에서 떨어져 죽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그리고 똑같은 방식의 죽음이 1년 내내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미디어에서 주변에서 발견할 것이다. 매년 산업재해로 얼마의 사람이 죽는다든지 하며 떠들지 않는가. 1년 중 어떤 사람은 재수없게도 주위 물건에 의해 죽고, 또 어떤 사람은 동물원에서 사자에게 물려 죽는다.

일상의 죽음. 이것이야 말로 내 나름대로 해석한 샤말란 감독의 메시지다. 영화에서는 불규칙한 시간대의 수많은 죽음을 특정 시간대로 몰아버린다. 한마디로 죽음의 빅뱅(폭발)이다.

그렇다면 일상의 죽음을 짧은 시간안에 보여주려면 어떤 원인 혹은 자연법칙을 등장시켜야 하는가. 수많은 영화들은 재난을 등장시키기도 하며, 전쟁, 전염병과 같은 질병, 혹은 외계로부터의 공격등으로 수많은 죽음을 그린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그런거 없다. 다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그러니까 일상에서 보는 흔한 죽음). 사고나서 죽는것,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것, 빌딩에서 떨어져 죽는 것,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 이 모든 죽음들은 그냥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영화의 장치는 시간을 빨리 돌린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에 그런 죽음이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게끔 영화적 논리만 보여줄 뿐이다.

위에 교수와 학생간의 대화는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것과 유사하게 기억나는 대로 적은 것이다. 이 대화에서 교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싱겁다. 누군가는 언젠가 죽는다. 언젠가도 블로그 다른 포스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엔트로피의 작용의 결과다. 생물체에게 엔트로피가 높아지면 죽음이 찾아온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은 우리에게 죽음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대화에서 학생은 순진하게도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맞는 얘기다. 어이없는 해프닝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밝히지만, 나의 해석은 이렇다. 식물의 알수 없는 공격들. 그것은 자연이 가지고 있는 우주가 내포하고 있는 엔트로피가 증가한 결과물이다. 영화 해프닝은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다룬다. 그만큼 그 시간대의 엔트로피는 상당히 높아져야한다. 엔트로피는 한마디로 무질서도를 나타낸다. 많이 모일수록 무질서해지며 이는 엔트로피가 상당히 높다는 의미이다. 이 엔트로피는 에너지의 효율(efficiency)과도 관계깊다. 엔트로피는 물리적으로 열량을 온도로 나눈 값이다. 이는 열역학 2법칙에 해당된다. 한마디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나는 이 영화를 환경이나 가족을 테마로 한 영화로 볼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이 영화에는 이것들이 포함되어진다. 다만 이것들은 주제가 아니라 소재이다.

영화에 너무 과학 이야기를 하는듯 싶겠지만, 이 영화가 과학자체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는 바로 과학 선생님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이야기해보겠다.

사건이 일어나는 미국 북동부 일부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바로 고립계를 의미한다. 열린계였다면 엔트로피의 증가의 의미가 희석이 된다. 이 고립계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여 계의 무질서도가 증가하며, 에너지의 과도한 사용(영화에서는 핵발전소와 같은 이야기가 있다)으 로 엔트로피는 더욱 크게 증가한다. 에너지가 변화될때 엔트로피는 발생하며 계속 증가해간다는 의미이다. 환경 오염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한 예이다. 물론 환경 오염이 되지 않더라도 전체적으로 엔트로피는 증가해간다. 하지만 자연적인 증가는 자연의 균형을 이룬다. 이 역시 초반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수업중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코는 계속 자라지만 얼굴의 평형을 이루며 자란다고. 왜 벌이 사라졌을까? 여기에서 질문은 원인을 물어보는 듯 하지만 결과를 물어보는 것이다. 답은 자연의 평형(밸런스)가 깨져서이다. 한마디로 이 질문으로 대처할 수 있다. 왜 지구는 혹은 자연은 밸런스가 깨져가고 있는가?

따라서 영화와 굳이 끼어맞춘자면, 소그룹일수록 살 확률이 크다. 이는 역시 엔트로피가 비교적 낮다는 의미이며, 아직 죽을때가 안되었다는 의미이다. 영화속에서 엔트로피의 흐름은 바람으로 표현된다. 바람이 지나가면 사람들은 마치 건전지가 빠진 로봇처럼 멈추어선다. 무질서한 에너지 그룹은 지나가는 엔트로피 대열에 합류된다.

:: 초점은 죽은자

감독은 어이없는 죽음을 감정을 제거한 자살로 묘사하고 있다. 초점은 죽은자이다. 이 영화에서 쓰인 논리가 바로 이것이다. 예를들어 어떤이가 누구에게 살해되었다면 오직 피살된 피해자에게로만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인 살인자는 살아있다면 이야기에서 지워진다. 감독은 오직 죽은자만 말한다(그리고 죽은자는 말이 없다. 그 이유를 따질수도 없고 캐묻지도 못한다).

한 학생이 아침에 학교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고 가정하자.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거의 수렴점은 사고 당일 이 아침에 모여진다. 이 학생은 인생을 오직 이날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이날 그 시간 '해프닝'이 일어난다.

요즘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났다. 금강산 관광객이 북한 병사에게 피격되어 사망하였다. 가해자를 지우고 오직 피해자만 생각해보자. 이 관광객은 이 날 말 그대로 '해프닝'이 발생하였다.

얼마나 무서운 관점인가. 인생의 덧없음을 무채색으로 표현한 관점이.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의 초점을 어디에 두는가이다. 주인공인 '마크 윌버그'를 위시한 부인과 친구 딸은 오히려 소품이다. 이 영화의 본질적인 주인공은 무수히 자살한 이름없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어야 말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것이다. 영화속의 자살은 사실 자살보다는 가해자가 지워진 죽은자들이다. 현실에 대입한다면 실제로 자살자도 있을 것이고, 살해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고로 죽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감독은 매우 안타깝지만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가해자를 지운 죽음들, 이들은 결국 자살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속에서 나에겐 주인공의 행복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주인공은 곧 조연들이고, 수많은 죽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사연없는 무의미한 죽음이 현실에서도 사연이 없지는 않다. 영화를 보며 죽음속에 숨겨진 수많은 사연들 때문에 의외로 숙연해졌다. 어떻게 해서 떨어져 죽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자동차 사고로 죽게 되었는가. 뭐..이런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는 죽음이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몇몇 자극적인 죽음만 보여주고, 다수는 죽기전에 해프닝만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처럼 좀비처럼 멍하니 서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 죽기 위해 행동하기 전의 그 고요함이 주는 적막이 인상에 깊었다.

<덧붙임>

1.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라 진짜 샤말란 감독이 의중한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나의 시각을 통해 본 죽음은 사실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엄청난 슬픔과 안타까움을 동반한 죽음이다.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는 이러한 잣대를 논리와 과학으로 풀어낼 수는 없다. 다만 어떠한 해프닝은 정말 말도 안되게 일어나고 죽음은 상당히 무거워진다. 사실 죽음은 무겁지만, 전쟁영화나 재난영화와 같은 곳에서 보여주는 죽음들은 얼마나 가벼운 것들인가. 이 영화는 가벼운 죽음을 다룬 영화와는 달리 수많은 죽음들을 짧은 시간안에 압축시켜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엄청난 죽음의 무게에 공포감을 들게 한다는데 그 의미가 있지 않는가 싶다.

2. 사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을 듯 하다. 수많은 죽음을 이야기 하기 위해 엔트로피 개념을 활용하였는지 아니면 과도한 엔트로피 증가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많은 죽음을 소재로 썼는지 이게 좀 헷갈린다.

3. 영화 끝부분은 의외로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아니면 반대로 해석이 너무 쉽든지. 장소만을 옮겨 영화 초반부의 상황과 똑같은 시작을 반복함으로써 자연의 원리가 변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간은 죽음의 운명에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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