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의 '18.0'을 훑어보다가 주목하게 된 키워드는 '개중'과 '대중 지성'이다(이 두 단어가 한때 유행했던 '다중'을 밀어젖히는 것인가?). 각각 두 가지 기사에서 키워드로 쓰이고 있는데,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최근의 출판 트렌드를 읽기 위한 키워드로 '개중'을 들고 나오고, 고명섭 기자는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엘리트 지성'의 상대어로 '대중지성'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문한 탓인지 '개중'이란 말은 생경한데, 한기호 소장의 칼럼에서 처음 보았다(번역어인가?). 여하튼 어감상(아마 이 어감도 고려됐을 터인데) 약간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중'과 다른 한편으로 모순형용처럼 느껴지는 '대중지성'이 최근의 출판계와 인문학 동네를 특징지어줄 수 있는 키워드들이라는 건, 키워드들일 수 있다는 건 알아볼 수 있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1. 26) [한기호의출판전망대] 실리 추구 나서는 ‘개중’들

지난해 3월 나는 이 칼럼에서 문화시장의 변화로 ‘87’이 지고 ‘97’이 뜬다고 한 적이 있다.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6월 항쟁을 말하고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외환 위기를 말한다. 그렇다면 올해 2007년 출판시장은 우리에게 어떤 체험을 안겨다줄까? 나는 감히 ‘개중화’의 원초적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중’이란 개인과 대중을 합한 말이다. 대중은 세중(細衆)의 단계를 거쳐 이제 개중이 되었다. 작년에 <타임>에서 ‘개중’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을 정도다. 개중, 그들은 혼자이고 원룸에 살면서 휴대전화나 메신저로 타인과 대화를 나누며 블로그를 통해 자신을 발신하는 등 철저하게 ‘1인용’으로 생활하지만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지혜가 필요할 때는 대중에게 손을 내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군중(crowd)과 아웃소싱을 합한 ‘크라우드소싱’이라는 신조어는 그래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미 기업이나 개인이 어려운 과제에 직면할 경우 그 해답을 인터넷을 통해 대중에게 묻는 일이 잦다. 물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디지털 기술과 웹 2.0이라는 기구이다. 출판에서의 시민저널리즘은 크라우드소싱의 개념을 바탕으로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에 ‘나만의 행복’을 갈구했던 개중은 올해 ‘현명한 삶’을 추구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현명이란 철학자들이 갖는 지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영악스럽다고 할 정도로 일과 개인생활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삶을 말한다. 2006년, 한때 책과 ‘거리’를 두던 20대 여성이 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손에 쥐어진 책은 문학작품이나 인문사회과학서적이 아니라 자기계발서였다. 이 분야에서 가장 많이 팔린 <마시멜로 이야기>나 <배려> 같은 책은 어린이용으로도 따로 출간되고 있으니, 20대가 대학의 교문을 나서기도 전에 ‘처세’의 기술부터 배우는 것을 탓할 수도 없다.

그들은 올해 나만의 ‘스타일’에서 한 단계 진전한 ‘뷰티블 에이징’(beautiful aging)을 더욱 열렬하게 추구할 것으로 예상되며, 실행의 방향을 세밀하게 제시하는 미용, 패션, 여행, 건강, 문화 등의 책을 많이 찾을 것으로 보인다. 젊은 여성들이 즐겨 읽는 문학을 우리는 ‘칙릿’이라 부른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헬렌 필딩 지음, 문학사상사 펴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문학동네 펴냄), <달콤한 나의 도시>(정이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등은 이 땅에서도 통한 대표적인 칙릿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편집자다. 특히 <악마를 프라다를 입는다>에 등장하는 패션지의 편집장은 자본주의의 신기루로 묘사되기도 한다. 하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잘 나가는’ 편집자가 등장하는 예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우연일까? 결코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중심에 서는 인물이 ‘잘 나가는’ 학자나 저널리스트에서 편집자로 바뀌는 이유는 분명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미덕으로 편집자적 안목을 꼽기 시작했다는 것에서 찾고 싶다. 과거에는 정보의 원천 생산자나 전달자가 세상을 주도했지만 정보의 소유권마저 개중에게 넘어간 지금은 그 위력이 크게 떨어졌다. 편집자는, 거미집처럼 얽혀있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정보를 자기만의 이야기로 꿰어서 다시 대중용으로 포장해내는 기술에서만큼은 거의 최고의 수준이다. 그래서 편집 능력을 갖춘 자여야만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수 있게 됐다. 그 능력이 바로 개중의 속성이라는 것도 여러분은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한겨레(07. 01. 26) 죽은 지식인의 사회 ‘대중 지성’ 깨어나다

“요즘 아카데미에서는 엉뚱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다. 앎에 대한 의지 속에서 삶의 형태가 바뀌는 게 아니라 돈에 대한 의지 속에서 앎의 형태가 바뀌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대표 고병권)의 공부 모임 ‘2007 대중지성 프로젝트’는 이런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열정의 불길에 휩싸인 대학은 이들의 선언을 빌리면, 지식의 죽음, 지식인의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사실 지식/지식인의 종언은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한 지류이기도 하다. 새삼 문제되는 건 아니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 <신들의 황혼>에서 주인공 지크프리트가 화염에 휩싸여 세계와 함께 무너지듯이, 돈에 대한 열정의 불길 속에서 지식인은 대학과 함께 소멸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몽의 주체, 진보의 전위였던 지식인이 붕괴한 자리는 그러나, 단순한 폐허가 아니다. 그 황량한 땅에서 새로운 주체, 새로운 지성이 태어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다. 다름 아닌 ‘대중 지성’이다.

대중 지성이란 지식을 독점하던 특권적인 소수의 지성에 대한 대항 개념이다. 선생이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전통적 아카데미즘 바깥에서 대중이 스스로 지식을 생산하고 유통하고 공유하는 것을 가리킨다. 대중이 지식인화하고 지식인이 대중으로서 나서는 것, 그리하여 대중의 집합적 지혜 속에서 창조적 지성이 솟구치는 것, 대중 지성은 그 새로운 현상을 지시하는 말이다.

대중 지성이 가장 날렵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곳은 인터넷 공간이다. 인터넷은 익명의 개인들이 특정한 주제 아래 모여 지식을 만들어내고 퍼뜨리고 재생산하는 대중 지성의 현장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사태를 보자. 자유무역협정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협상하는 주체인 정부 관료들은 지난 몇 년 동안 협상의 주요 내용 공개를 거부했다. 기밀이 알려지면 국익이 침해당한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방어 논리였다. 한 나라의 명운이 걸린 중대한 국가적 의제가 소수 관료들의 밀실에 맡겨진 채,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국외자로 밀려난 꼴이었다.

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인터넷이었다. 서로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문제를 제기했다. 협상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정보를 찾아내고 그것을 분석하고 거기에 새로운 전문 지식이 더해져 믿을 만한 자료가 탄생했다. 그리고 그 자료들이 팸플릿으로, 자료집으로, 선언문으로 가공돼 시민들에게 전달됐다. 비밀에 싸여 있던 자유무역협상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정부 관료들은 미국과 협상하기 전에 시민과 협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이런 사태 전개야말로 대중 지성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대중 지성은 대중의 집합적 지성이지만 지식인으로 대표되는 전통적 지성보다 더 전문적이고 더 풍부하며 더 심층적인 지식을 산출한다”고 그는 말한다.

대중 지성은 분명히 새로운 현상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아무런 지적 계보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말은 아니다. 대중 지성의 연원은 카를 마르크스에게로까지 올라간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대공장의 기계화 현상을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기계가 발전할수록 생산은 점점 더 사회적 협업 형식이 되고, 점점 더 생산자의 집합적 지성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가 일반 지성이라는 말로 이야기하려는 것의 요지였다.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철학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르크스의 일반 지성에서 힌트를 얻어 ‘대중 지성’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네그리는 그의 지적 협업자인 마이클 하트와 2004년에 함께 쓴 <다중>이라는 저서에서 이 대중 지성을 ‘스웜 인텔리전스(swarm intelligence)라는 말로 더욱 구체화했다. 메뚜기떼나 개미떼에게서 볼 수 있듯이 개별적으로는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 무리를 지어 활동하면 무시무시한 힘을 드러내듯이, 인간도 정보혁명이라는 새로운 국면에서 집합적 지혜를 통해 놀라운 창조성을 보여준다고 진단한 것이다. 대중 지성이란 이렇게, 흩어져서는 특별한 지적 성과를 낼 수 없지만 모이면 거대한 창조적 활력을 일으켜 세우는 현상에 어울리는 이름이다. 다만 이때의 ‘모임’은 한 공간에 꽉 들어찬 집회의 형식이라기보다는 개별적 존재들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형태라고 보아야 한다. 인간의 지성 자체가 두뇌 속 수많은 신경들의 연결(링크)을 통해 작동한다. 신경 하나하나는 아무런 지성도 없지만 그것이 일시에 연결될 때 지성의 공간이 형성되는 것이다. 두뇌야말로 집합적 지성 혹은 대중 지성의 표본이다.

조정환 갈무리 출판사 주간은 네트워크로 작동하는 대중 지성의 한 모습으로 ‘플래시 몹’을 거론한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인터넷상에서 의기투합해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모여 반전·평화 구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벌이는 것, 이것이 대중 지성의 발현이다. 인터넷에 기반한 운동의 대부분은 이 대중 지성의 작품이다.” 특정한 지도부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운동의 꼭대기, 전위를 따로 두지 않는다는 것도 대중 지성의 한 양상인데, 플래시 몹에서 그런 지성의 작동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대중 지성 프로젝트’는 대중 지성의 가능성을 의식적으로 실험하고 실천하는 공부 모임이다. 1년을 4학기로 나눠 44주 동안 계속되는 이 프로젝트는 현재 30명 정도가 공부에 참여하고 있다. 철학, 동양고전강독, 문화·예술 세 강좌로 이루어진 이 커리큘럼은 이름만 보면 여는 대학 강의와 달라 보이지 않지만, 참여하는 사람이나 공부하는 방식에서 기존의 대학 강의와 뚜렷이 구분된다. 여기서는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대학생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제대병도 있다. 강의의 방식도 대학 아카데미즘과 차이가 있다. 선생에게서 학생에게로 지식이 일방통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학생이 같이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동양고전 강의에서는 <논어> 암송을 하고 있는데, 암송이라는 옛 방식을 따온 것도 이유가 있다. “지식이라는 게 단순이 머리로 들어가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외움으로써 신체에 각인하고 삶에 녹아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지식이 생체의 리듬을 타는 것 생체가 지식의 리듬을 타는 것이 진정한 지식 습득이라는 생각이다. 공부에 참가한 사람들은 매달 마지막 주에 한달 동안 공부한 것을 글로 쓴다. “글로 표현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면 아는 것이 아니다. 표현과 내용이 하나로 합쳐질 때 비로소 지식이 된다.”

이런 독특한 방식의 공부를 통해 이들이 실현하고 실천하려는 것이 말하자면 대중 지성이다. 신체에 녹아들고 글로든 말로든 표현되고 그리고 그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돼 집합적 지성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목표인 셈이다. ‘대중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라는 전통적 지식인의 정체성 대신에 ‘대중인 채로 지식인이고 지식인인 채로 대중인’ 새로운 대중 지식인의 정체성을 이들은 모색하고 있다. 대중 지성은 지식의 새로운 존재 형식이자 지식인의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고명섭 기자)

07. 01. 26.

 

P.S. 네그리의 비유를 빌면, 메뚜기떼 혹은 개미떼의 '지성'이 대중지성이겠다. 나의 관심은 대중이 지성을 체득할 때 그는 무엇으로 여전히 대중인가, 이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고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대중은 개념상 사회를 통치할 수 없음은 물론 자신의 실존도 조율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대중의 반역>). 물론 '고전적인' 정의에 따를 때 그렇다는 얘기이다(고로, 우리에겐 '대중'에 대한 다른 정의가 필요하다). 개인이면서 대중인 개중처럼 '양서류'로 우리는 점점 진화해가고 있는 것인지. 한편, 출판에서도 이 '양서류'적 양태는 이미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블룩'을 다루고 있는 지난 가을의 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9. 27) 'Blook’ 블로그를 뛰쳐나와 세상의 책이 된다

회사원 박성빈(27) 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블로그를 만든 뒤 취미로 배운 사진을 틈틈이 올리기 시작했다. 실연의 아픔을 달래려 떠났던 2001년 유럽여행 등을 기록한 그의 사진은 로맨틱한 분위기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포털사이트 초기화면에 6번이나 올랐다. 방문자가 하루 수천 명 단위로 늘어난 그의 블로그의 내용은 이번 주 ‘그리우면 떠나라'란 책으로 나왔다. 박 씨의 책을 펴낸 랜덤하우스코리아 도정원 씨는 “프로 작가 못지않은 콘텐츠를 생산해 내는 ‘천연 블로거'가 요즘 떠오르는 새로운 작가군”이라며 “주제가 뚜렷한 ‘천연 블로거'를 찾다가 박 씨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1인 매체인 블로그(blog)를 책(book)으로 만든 ‘블룩(Blook)'이 쏟아지고 있다. 블룩은 거의 매주 1권 이상 서점에 나오고 실용서 시장의 베스트셀러 상위 순위에서도 비중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특히 요리책 분야는 블룩이 휩쓰는 추세다. 현재 요리책 분야 부동의 베스트셀러 1위인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를 비롯해 ‘베비로즈의 요리 비책' ‘꼬마마녀의 별난 빵집' ‘야옹 양의 두근두근 연애요리' 등은 모두 블룩형 요리책. 블룩의 원조 격인 ‘2000원으로 밥상차리기'는 ‘독신남이 직접 해 본 쉬운 요리'를 표방하고 2003년 출간돼 지금까지 56만 부가량 팔렸다.

그간 블룩은 요리책, 인테리어 등 매뉴얼형 실용서가 대세였지만 최근엔 미술 경제 에세이 영어교육 쪽으로도 외연이 확대되고 있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유명한 박경철 씨의 경제에세이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 미술 에세이인 ‘그림 읽어주는 손가락' ‘꿈을 꾸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나다', 장사 체험담을 간추린 ‘머리핀 장사에 돈 있다', 괴담집 ‘잠들 수 없는 밤의 기묘한 이야기', 20대 여성의 고단한 삶을 기록한 ‘라오넬라 새벽 두시에 중독되다' 등이 그런 책들이다. 산여고 영어교사 하명옥 씨의 홈페이지를 토대로 태어난 책 ‘영어일기 표현사전'과 ‘영어일기 영작패턴'처럼 양질의 콘텐츠는 블룩 시리즈로 선보이고 있다.

블룩은 개인이 매체이자 브랜드가 되는 1인 전문가 시대의 한 상징이다. ‘일하면서 책쓰기'의 저자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인 전미옥 CMI연구소 대표는 “책의 생산과 소비도 블로그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시대가 왔다”며 “직장인에게도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공격적 글쓰기로서 블로그와 이를 통한 책쓰기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 있고 프로를 능가하는 아마추어들이 활동하는 곳이 인터넷 공간이다. 따라서 블로그 글쓰기의 장점은 진입 장벽이 없다는 것이 꼽힌다. 또 출판사에는 독자의 반응이 확인된 콘텐츠를 확보하고 참신한 저자를 ‘싼값'에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블룩이 뜨자 미국에서는 한 출판사가 픽션, 논픽션, 코믹 분야에서 우수 블룩을 시상하는 ‘루루블루커 상'을 만들기도 했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일본 출판계에서도 인터넷 콘텐츠를 책으로 만든 ‘넷셀러'란 말이 쓰인다”면서 “블룩은 대중적이지만 유동성 정보라는 한계 때문에 일관된 세계관과 깊이를 바탕으로 한 교양서를 배출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김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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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7-01-26 17:51   좋아요 0 | URL
네그리의 '귀환'에서처럼, 대중을 괴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의 실체는 오락 프로그램에서 티비의 하단에 시청자의 감정을 대변하듯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글귀'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개중과 대중지성에 실제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보다도 '누군가' 대신 그러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요. 개중에는, 걔중에는, 말이야...누군가...

로쟈 2007-01-26 17:55   좋아요 0 | URL
suture님도 한 유머 하시는군요.^^
 

이번주 한겨레의 '한국의 글쟁이들'은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을 다루고 있다. 출판칼럼니스트 최성일씨가 글을 썼는데,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나름대로 많이 읽고 잘 안다고 생각한 이 '글쟁이'의 특이한 면모도 읽을 수 있다. 가령 남의 소설을 안 읽는 기벽 같은 거. '방주'에 넣어두려다가 아끼는 마음에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하고 그에 걸맞게 후미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책 <감염된 언어>의 서문에서 일부를 옮겨놓도록 하겠다.

한겨레(07. 01. 26) 한국의 글쟁이들/(17) ‘저널리스트 작가’ 고종석

고종석(48)에게는 열성독자들이 만든 인터넷 카페가 있다. 2004년 문을 열어 270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고종석 팬 카페(cafe.daum.net/kjsfreedom)’는 인문서 저자로서 그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인문서 저자의 팬 카페는 손으로 꼽을 수 있다. 16권에 이르는 그의 책의 평균 판매부수는 5천부 안팎, 신간을 무조건 구입하는 고정 독자는 3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요즘 같아선 인문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 진입이 무난한 ‘엄청난’ 숫자다.

인문서 저자=지금까진 <코드 훔치기>(마음산책·2000)가 제일 많이 팔렸다. 고종석은 책을 곱게 만들어준 편집자와 이 책을 논술교재로 활용한 논술학원 강사에게 그 공을 돌린다(*나 또한 학원에서 학생들에게 논술을 가르치던 시절 가장 많이 복사해서 나눠준 자료이기도 하다. 하니 '그 공'은 내게도 있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것이 단지 ‘연줄’ 덕분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겸손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글과 책에 대한 독자의 호응을 ‘시장성’의 잣대로만 판단하고 싶진 않다. 그에겐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고종석은 출판계에서 “아주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통한다. 아름다움보다 정확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고도의 정확성은 아름다움을 낳는다. 한 학생 독자는 “고종석의 책을 읽으면 똑똑해지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는 느낌”을 전한다. 고종석의 절친한 벗인 강금실 전법무장관은 그의 시집비평집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2006)에 대해 “고종석의 평론은 매우 균형잡힌 시각에서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논평한다. 고종석의 글은 어느 대학 논술시험의 지문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자=고종석은 기자다. <코리아타임스> 기자로 언론계에 들어와 초창기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일했다. <한겨레> 재직시절, 기사문답지 않은 기사가 논란을 빚기도 하였으나, 기자의 문체가 살아있는 기사문의 이정표를 세운다. 1990년대 중반 프랑스 주재기자 때는 철학자 질 들뢰즈의 죽음을 색다르게 해석해 전달한다. “고갈된 일흔 살 삶을 스스로 끝장냄으로써, 그 자신이 곧잘 ‘철학적 일화’로써 거론하던 엠페도클레스의 전설적 자살이 있은 뒤 2천5백년 뒤에, 서양 철학사에 또 하나의 일화를 보탰다.” 그 후 ‘친정’인 한국일보사에 복귀하였고,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지금은 객원 논설위원으로 있다.

“모르겠어요. 기자가 되겠다는 특별한 생각이 있어 된 것도 아니고, 우연히 모집공고 보고 시험 봐서 잡은 직장이거든요. 글쎄요.” 기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답변의 부족한 부분은 그의 장편소설 <기자들>(민음사·1993)에 나오는 ‘기자숙명론’으로 채운다. “기자는 기록하는 자이지만 그 기록은 자신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남에 대한 기록이다. 남의 삶을 엿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자기가 엿본 것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광고충동, 그런 것들이 기자의 운명이 아닐까.”

소설가 장편 <기자들> 말고도 고종석은 단편소설집 <제망매>(문학동네·1997)와 <엘리아의 제야>(문학과지성사·2003)를 펴낸 바 있다. 소설은 왜 쓰게 됐나요? “기사가 사람 이야기를 그리긴 하지만 기사문의 언어는 그물코가 성긴 거죠. 빠져 나가는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이 아닌 부분이 많이 있어요. 기사에서 새나가는 부분, 사회가 옳다 그르다 결정해주는 그런 선악·미추에 잡히지 않는 어떤 개인적인 선악과 미추, 개인적인 가치와 진실들은 기사가 잡아낼 수 없어요. 소설의 언어는 좀 달라요. 기사의 언어보다는 소설의 언어가 촘촘하지 않겠나, 덜 빠져나가지 않겠나 싶어 시작했어요.” ‘내 소설의 근간은 현실’이라는 고종석의 지론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기벽이라고 하긴 어려워도 고종석은 남의 소설을 잘 안 읽는다. 어느 출판사 사장의 목격담이다. 어떤 소설가의 출판기념 모임에서 소설가가 자신이 펴낸 책을 고종석에게 주자, 그는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더란다. “고맙지만 나는 소설을 안 읽는다. 귀한 책 아끼기 위해서라도 다른 분께 주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말이다. 장편소설보다는 단편소설집 두 권에 수록된 작품들이 더 낫다는 나의 독후감을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계속 몸담을 생각이면 장편을 써야겠죠.”

언어학자=이글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하면서 해묵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다. 고종석이 말한 “영어공용화의 반대가 지닌 계급적 함의”를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계층간 영어능력의 격차를 줄이고, 언어가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점에 주목한 것이었다. 한동안 나를 헛갈리게 한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라는 글의 한 구절이다. 이글은 <감염된 언어>(개마고원·1999)에서 볼 수 있다.

“영어가 공용어가 되든 안 되든, 우리 사회의 지배계층은 자기 자식들에게 영어를 열심히 가르칠 것이다. 그리고 영어에 익숙해진 그들의 자식들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해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일반대중의 자식들 위에 다시 군림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특정집단에 의한 그런 식의 지식의 독점을 당연시하지 않는다.”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 아무튼 영어공용화의 긍정적 측면을 헤아리는 사람이 누구보다 분명하고 정확한 한국어 사용자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료한 개념 정의와 개념의 결을 세심하게 구분한 사례는 근간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2006)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종석은 반미 친북 좌파가 고스란히 겹치는 것인지, 그 하나하나가 비난받을 일인지, 무엇보다 이런 딱지가 붙여진 이들이 정말로 반미 친북 좌파인지 되묻는다. “좌파는 친북보다도 훨씬 더 여러 겹의 뜻을 지니고 있지만, 그 핵심은 흔히 ‘복지’라는 말로 표현되는 사회연대를 조직하는 데 정부가 일정한 구실을 해야 한다고 믿는 세계관과 관련돼 있다.”

몇 해 전, 그가 엿본 출판사 편집자의 우직한 원칙주의가 빚어낸 엽기적 풍경에 그저 웃을 수만은 없다. 그가 읽던 고려시대 번역문집 문장 한가운데서 ‘미얀마제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사마귀란 뜻의 당랑(螳螂)을 옮긴 ‘버마재비’를, ‘버마제비’의 오자로 예단한 교열자는 버마의 바뀐 나라이름에 맞춰 ‘미얀마제비’로 바로잡았던 것. 편집자가 ‘버마재비’의 어원이 ‘범(호랑이)의 아재비(아저씨)’라는 걸 알았더라도 수난을 겪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는 그의 판단에도 공감하지만, 이글의 결론은 더 공감한다. “무릇 글쟁이는, 제 글이 고스란히 활자화될 땐, 그 글이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번역자=고종석이 우리말로 옮긴 책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문학동네·1996)가 전부다(*내가 읽은 고종석의 책들 가운데 유일하게 돈 아까운 책이었다). “번역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문장 하나를 우리말로 만족스럽게 옮기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번역이야말로 제대로 한다면 뼈를 깎는 작업일 것 같습니다. 영어나 스페인말이나 프랑스말이나 어설프게 읽을 줄은 아니까 주변에서 ‘너, 왜 번역 안 하느냐?’ 하는데, 저는 책 한 권 번역하려면 평생 해야 할 것 같아요. 또 번역은 일종의 평론인데 그렇게 하긴 정말 어렵죠.”

정치평론인=고종석은 정치현상을 보는 눈이 밝다. 시평집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 머리말의 한마디는 그런 눈이 흐려지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들게 한다. 그마저 “은근히 기대를 걸었”다니. 2003년 1월 중순 발행된 <인물과사상 25>(개마고원)에 실린 글을 통해 내가 서둘러 은근한 기대조차 접는데 일조한 그가 아니던가. “우선 그의 지지자들부터, 대통령이 된 것 이상의 업적을 그가 자신의 임기 중에 세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순순히 인정해야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의 집권이 우리 사회의 멘탈리티에 줄 긍정적 충격을 생각하면, 그 집권 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업적, 그의 지지자들이 그와 더불어 자랑스러워할 만한 업적이다.” 다시 돌아온 정치의 계절에 정치를 바라보는 그의 혜안과 안목을 접할 수 있을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많이 줄긴 줄었죠.”

대표작 네 권을 꼽는다면= “<기자들>은 첫 책이라서, <제망매>는 내가 소설가가 됐구나, <자유의 무늬>(개마고원, 2002)는 내가 저널리스트구나, <감염된 언어>는 내가 약간은 언어학도구나 하는 느낌이 들게 했지요. 이 세 개가 제 정체성인데, 셋 다 얼치기이긴 하지만 이 책들에 기자로서, 소설가로서, 언어학도로서 정체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럼, 이 셋을 합치면 뭐가 될까요? 문화전달자가 어떨까요? “모르겠어요, 제가 뭔지는.”(최성일/ 출판칼럼니스트)

07. 01. 26. 

 

 

 

 

P.S. 그의 첫소설 <기자들>은 절판이라서 알라딘에는 아예 뜨지도 않는다(나는 책을 갖고 있지만 그의 책들 가운데 드물게도 읽지 않았다). 대신에 가장 많이 팔렸다는 <코드 훔치기>(마음산책, 2000)를 '네 권' 안에 채워넣도록 한다. 나머지는 나도 모두 읽은 책들이다. 그 중 <감염된 언어>(개마고원, 1999)에서 그가 (서문을 대신하여) 길게 쓴  서문 '서툰 사랑의 고백' 중 한 대목. 

사전 편찬자의 꿈을 접은 뒤, 나는 한때 외국어로 글을 쓰는 직업적인 글쟁이가 돼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도 몽상으로 그치고 말았다. 간단한 편지글 말고 내가 앞으로 외국어로 글을 쓸 것 같지는 않다. 또 내가 외국어로 기다란 글을 쓴다고 해도 이미륵이나 김은국만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지적 작업을 프랑스어로 수행한 뤼시앵 골드만이나 줄리아 크리스테바 같은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야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그 사람들은 동유럽의 조국에서 보낸 어린시절부터 프랑스어에 익숙했던 사람들이다. 반면에 내 유년기를 둘러싹 있던 언어는 오직 한국어뿐이었다. 나는 그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건 내 운명이다.(...)

이런 모든 꿈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버린 지금, 나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다. 정확성과 아름다움으로 한국어의 가능성을 넓혔다고 평가받을 만한 글 말이다. 아직은 그것이 몽상에 불과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한국어로 글을 쓸 작정이므로, 이 꿈은 언젠가는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읽을 만한 한국어로 글을 써보겠다는 것은 10대 이래 내가 지녔던 몽상들 가운데 실현 가능성이 남아 있는 유일한 목표다.

실상,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얼른 떠오르는 이름만 해도 최인훈, 조세희, 김원우, 복거일, 이인성, 최윤 등 여럿이다. 그들이 대체로 번역 문투를 사용한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20세기 말에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를 19세기 말의 한국어와 견주어보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어가 얼마나 변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그 변화의 과정은 곧 감염의 과정이었다. 외국어와 외국 문화의 감염 말이다.

문화사는 곧 감염의 역사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다. 인공 언어가 아닌 한 감염되지 않은 언어는 없다. 최인훈에서 최윤에 이르기까지 외국어에 된통 감염된 한국문학은 세련과 풍요를 향한 한국어의 행진을 선도하고 있다. 내가 언젠가 그들만큼 볼품있게 한국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나는 애써볼 작정이다.(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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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26 0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1-26 08:15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고종석 씨의 정치적 입장이나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의 소설론은 흥미롭네요.

마늘빵 2007-01-26 08:17   좋아요 0 | URL
아 이거 가져갑니다. 저도 그 카페 회원입니다. ^^ 안간지 오래됐지만.

로쟈 2007-01-26 08:43   좋아요 0 | URL
**님/ 축하드립니다. 저까지 만족(?)스럽네요.^^ 알려주신 '보물창고'는 종종 들러보겠습니다.^^
기인님/ 짐작에 고종석보다는 더 왼쪽이시죠?^^
아프님/ 님이 안 가신다면, 누가?..

나비80 2007-01-26 09:46   좋아요 0 | URL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란 기준은 늘 모호하고 아슬아슬할 수 밖에 없는데, 고종석은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서 있는 모양입니다. 슬쩍 보면 언어의 역사성을 고려하는 입장이란 건 알겠지만 말이죠. 저는 몇 권 안되지만 제 주변에만해도 고종석의 3000명 안에 드는 녀석이 있답니다. ^^
그리고 저는 기인님과 고종석 가운데 끼겠어요!

도서관여행자 2007-01-26 10:45   좋아요 0 | URL
저도 퍼갈게요^^

로쟈 2007-01-26 15:18   좋아요 0 | URL
소이부답님/ 제가 보기에 고종석은 그가 거명하고 있는 어느 저자들 못지 않게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를 구사합니다. 더불어, 저는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의 포지션이 등장할 때까지는...
NOname님/ 이름을 안 갖고 계시군요.^^
 

그제 점심을 먹으며 몇 페이지 읽어본 책은 자신을 '미디어 키드'라고 지칭하는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 '대중문화'를 표나게 내세우고 있어서 그 흔한 문화비평서의 한 종류쯤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실상은 진지한 미디어 리뷰들로 채워져 있다. 한데, 그 미디어에는 '글'도 포함되고 저자가 말하는 '내 유일한 미디어'가 '글쓰기'인 걸 보면 제목의 '대중문화'는 두루뭉술이라 할 만하다.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안녕! 프란체스카>, <프렌즈> 같은 드라마들도 리뷰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제외하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고전적인' 의미에서 북리뷰나, 영화리뷰들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서 이 책의 용도는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는 데 있다기보다는 다루어지고 있는 미디어-텍스트들에 대한 가이드북 정도로 이해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그렇게 성격을 한정하면 책의 미덕이 도드라진다. 내가 읽은 책이나 본 영화들을, 리와인드 시켜서 다시 읽고 보는 효과가 있을 뿐더러 아직 읽지 않은 책이나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한 개성있는 소개, 마치 진득하게 사귀어온 친구들을 한번 만나보라고 권해주는 듯한 정감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친구들'과 단번에 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 책 덕분에 한 '거물급'을 다시금 상기하게끔 됐으니, 곧 <분서>의 저자 이탁오가 그이다.

'태워버려야 할 책, 그러나 영원히 태우지 못할 책'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분서>의 리뷰는 책의 맨마지막 꼭지인데, 이 배치 자체는 물론 우연이 아니겠다.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 사람을 한꺼번에 쓰러뜨리고 한꺼번에 일어서게 만드는 글이었다. 가득 찬 절망을 선물하지만 가득 찬 희망을 동시에 선물하는 그런 글,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헷갈리지만 결국 울음과 웃음은 같은 것임을 깨닫고 그저 웃어버릴 수 있는 글. 한마디로 병주고 약주는 글이었다. 아직 그런 글을 써본 적은 없지만, 지금은 그런 꿈을 아직 내버리지 않고 견디는 하루하루가 행복하다"(11-2쪽)고 적었는바, 바로 그 '병주고 약주는 글'이 말미에서 다루고 있는 <분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좋은 글에 대한 탐심에서 벗어나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무렵 "매서운 죽비처럼 쾌감 어린 고통으로 내 뒷목을 후려친 두 스승이 바로 루쉰과 이탁오였다." 먼저, 루신: "루신의 글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고독한 전투를 위한 '투창과 비수' 자체였다. 나는 루쉰의 글을 통해 글이란 자고로 무조건 아름답고 봐야 한다는 미학적 허영과 결별할 수 있었다. 좋은 글이란 좋은 삶을 위한 하찮은 핑계이거나 배설물에 불과하며, 삶이라는 토대가 받쳐주지 않는 한, 한낱 글이란 삶에 맹독이 될 수도 있음을 배웠다."

그리고 이탁오의 <분서>: "루쉰이 글에 대한 내 오랜 낭만적 허영을 한칼에 베어냈다면, <분서>(한길사, 2004)는 건조한 철학책이 한 사람을 종일토록 울게 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글이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장르에 속할 필요가 없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어떤 장르도 아닌 채로 글 자체의 에너지로 진검 승부하는 글쓰기. 그의 글은 일상과 현실에 대한 하루하루의 고뇌 자체가 철학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이탁오의 <분서>는 철학이고자 하지 않는데도 철학이 되었고 차라리 '태워버려야 할 책'(焚書)이 되고자 몸부림쳤음에도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걸작이 되었다."(343-4쪽)

이전에 <이탁오 평전>(돌베개, 2005)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은 <분서>의 완역본이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되었던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그 이전에는 <평전>의 역자가 옮긴 단권짜리 <분서>(홍익출판사 1998)가 나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듯 '온몸으로 보여주는', 리뷰 자체가 명령으로 여울질 수 있다는 걸 증명해주는 글을 접하게 되어 일단 <이탁오 평전>만이라도 먼저 사두었다(<분서>를 소장하려면 목돈이 필요하다). 이런 '폐해'를 보건데, 서두에 적은 이 책의 '미덕'은 달리 '맹독'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이거 '대중문화의 숲'이 아니잖아!).

그걸로도 모자라는지 저자가 뿜어내는 '강추'의 추임새: "아무것도 가지려 하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품에 안을 수 있었던 사람. <분서>는 앎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닌, 교양이나 권력을 뽐내기 위해서가 아닌, 알고 죽지 않으면 인생이 너무 서러울 것 같아, 차마 멈출 수 없는 그리움으로 뿜어낸 사유의 기록이다."(345쪽) 이 정도면 가관 아닌가? 거의 투창과 비수를 들고서 '이래도 안 읽겠는가?' 심문하는 듯하다. 몇 문장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읽고서도 이탁오와 그의 <분서>에 대해서 모른 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아마도 모든 책과 무관한 사람이 예외일 수 있겠다). 나는 두손 다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싱어송 라이터, 한대수'씨의 추천사를 빌어서 말하자면, "정여울씨, 땅콩 베리 머치!"

07. 01. 25.  

P.S. '태워버려야 할 책'까지 집에 꽂아두면 식구들한테 더 혼날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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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5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저도 얼마전에 정여울 선배 글을 읽고 평을 쓴 적이 있었는데, 미디어에서 희망을 찾은 선배가 너무 부럽더라고요. ㅎㅎ

로쟈 2007-01-25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망 대신에 제가 본 건 '분서'입니다.^^

나비80 2007-01-26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망이든 희망이든 한꺼번에 일어나게 하고 한꺼번에 쓰러뜨린다. 히야~! 그 참 기막힌데요. 로쟈님, 땅콩 베리 머치! ^^

새들처럼 2007-01-26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 소개 받았네요. 고맙습니다.^^

앨런 2007-01-2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마운 정보 가져갑니다. 감사합니다.

로쟈 2007-01-26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맹독성' 리뷰를 저만 취하기엔 좀 억울했을 뿐입니다.^^;

로쟈 2007-01-2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눈팅이 피곤하실 때 가끔 댓글도 남겨주시길.^^
 

아침신문을 읽다가 깜짝 놀란 기사가 있다. 몇 차례 페이퍼에서 다룬 바 있는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타 밤>이 국내에서 공연된다는 기사였다(이 작품은 <작가세계> 겨울호에 번역돼 있다. 장면번호와 지문들이 대거 생략된 판본을 옮긴 것인지라 좀 아쉽지만). 러시아의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를 초빈하여 경기도립극단에서 내달초에 공연한다는 것인데, 러시아에서도 (내가 알기론) 거의 공연되지 않는 작품이라 더더욱 놀랍고 흥미롭다. 연출자의 구상대로 '러시아 부조리극의 진수'를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경향신문(07. 01. 24) 바실례프 “하름스 부조리극 진수 보여줄것”

‘부조리극’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를 떠올린다. 기승전결의 드라마 구조가 확실한 서사극에 익숙해진 국내 관객들에게 앞뒤의 인과관계가 전혀 없는 부조리극은 마냥 어렵기만 하다. 부조리극의 개념조차 생소한데 하물며 이름마저 낯선 러시아 작가 다닐 하름스의 부조리극을 무대에 올린다니, 참으로 모험이다.

오는 2월1일 경기도문화의전당에서 다닐 하름스의 ‘엘리자베따 밤’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러시아 연출가 유리 바실례프는 “러시아에서도 하름스의 이름이 알려진 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한국에서 그를 생소하게 여기는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어둡고 철학적 내용을 다룬 베케트, 이오네스코와 달리 일상적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분명 매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립극단의 초청으로 지난 7일 한국에 도착한 바실례프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연극대학 교수로 연극 연출가이자 이름 난 신체·발성 훈련의 전문가다. 이번 방한에서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을 상대로 발성과 언어, 신체 훈련을 위한 세미나를 진행하는 한편 하름스의 작품 ‘엘리자베따 밤’을 무대에 올리는 프로젝트를 지휘하고 있다.



1905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하름스는 스탈린 시대를 살다간 불우한 작가다. 어린이 글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며 소설·드라마·희곡 등을 썼다. 그러나 37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어린이 글을 제외한 그의 작품은 전혀 빛을 보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야 서방과 러시아에서 그의 작품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학계를 중심으로 하름스에 대한 연구가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2004년 처음으로 ‘집에서 한 남자가 나왔다’가 출판됐다.



“하름스는 베케트나 이오네스코보다 20년이나 앞서 부조리극을 썼습니다. KGB가 한 여자를 체포하는 과정을 그린 ‘엘리자베따 밤’은 상관없을 듯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소극을 이루지만 결국 퍼즐처럼 연관성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사실주의, 코미디, 음악극, 오페라 등 현존하는 모든 연극 장르를 보여주는 게 흥미롭죠. 때문에 한국 관객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독재정권을 경험한 나이든 세대는 작품에 깔린 공산주의 분위기를 잘 이해할 것입니다.”

바실례프는 부조리극에 대한 관객들의 거리감에 대해 “며칠 전 동대문운동장 벼룩시장을 방문했는데 왜 상인들이 거기서 장사를 하고 있는지, 사람들은 왜 그곳을 찾는지도 생각해보면 다 웃기고 이해가 안가는 부조리”라고 설명한 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부조리가 곧 우리의 인생이며 유머로 부조리를 이해해야 우리는 남을 덜 미워하고 마음을 가볍게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름스와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스탈린 정권의 독재를 직접 경험했다. 이로 인해 이번 ‘엘리자베따 밤’에는 그의 경험이 녹아있다. 원작과 달리 무대의 배경을 한 집에 다수의 가족들이 사는 공산주의식 아파트로 설정한 것 등이 한 예이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그는 “도립극단 배우들은 살아있는 배우들로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크고 흡수도 빠르다”며 “그러나 전반적으로 한국 배우들은 내면세계에 대한 학습이 부족한 듯해 아쉽다”고 지적했다.

바실례프는 2년6개월 전에도 경기도립극단을 방문해 배우 훈련을 맡은 적이 있다. 이번에는 지난해 8월 극단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배우 전무송씨가 그를 다시 초빙했다. 서양고전무대, 현대극 위주의 실험무대, 한국창작무대 등을 매년 한편씩 시도하겠다는 전감독은 “첫 실험무대로써 바실례프가 추천하는 하름스의 작품이 눈에 띄었다”며(*'실험무대로서'의 오타가 눈에 띄는군) “배우들을 창의적으로 이끄는 바실례프의 훈련과 하름스의 작품을 통한 새로운 연극적 도전은 배우들뿐 아니라 한국 연극 발전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연극 ‘엘리자베따 밤’은 다음달 1일 공연된 후 2월부터 넉달간 한 달에 한 번 상설무대로 관객들에게 선보일 예정이다.(문주영 기자)

07. 01. 24.

P.S. 드물게 보는 공연 사진이 있어서 옮겨놓는다(짐작엔 '연습' 장면 같다).

Елизавета_Бам_Шпица&Юсупов.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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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1-2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체코가서는 인형극과 오페라를 보고 오려고요. ㅋㅋ 애인 뜯어먹기 --;; 그나저나 이 연극 보고 싶은데, 애인 없어서.. ㅋ 대학원 사람들 이끌고(?) 가야겠네요. 러시아 연극이라 하면 '혹'해서 갈 것 같은데용 ㅎㅎ

로쟈 2007-01-24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인'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건가요? '애인 없어서'라 하심은?..

기인 2007-01-2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애인은 체코에 4개월 동안 남아서 공부할 꺼라서 ^^; 체코 다녀오면 애인이 한국에 없어서라는 뜻입니다. ㅎ
 

내일 아침신문의 기사들을 미리 둘러보다가 눈에 띄는 기사가 있어서 옮겨놓는다. 대략 '러시아'란 단어만 들어가면 기사를 클릭해보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 '갈매기'"란 타이틀이 걸려 있으니까 눈이 커질 수밖에. 러시아 극단의 내한 공연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고 이전에 내한한 바 있는 저명한 러시아 연출가 카마 긴카스 초빙 공연이다(러시아에서 긴카스 극단의 공연을 두어 차례 관람한 적이 있다). 그가 연출을 맡고 국내 배우들이 연기를 맡은 분업 공연이다. 작품은 체홉의 <갈매기>. 안 그래도 <갈매기>에 관한 논문도 준비중이던 차에 공연소식을 접하니 반갑다. 공연은 3월에 예정돼 있으니 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하긴 요즘 날씨가 이미 봄날씨와 구별이 가지 않지만). 성공적인 공연이 되기를 바란다.  

한국일보(07.01. 24)  이것이 러시아 '갈매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연출가 카마 긴카스(66)를 위해 LG아트센터가 또 몸을 잔뜩 웅크렸다. 1,100석 규모의 극장이 절반인 660석 극장으로 기꺼이 거듭난다. 특히 이번에 긴카스의 연출로 거듭날 작품은 국내에서도 자주 상연되는 <갈매기>여서, 우리 무대와 세계적인 무대는 어떻게 다른가를 실증할 기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세기말 모스크바 근교의 영지에 모인 한무리의 귀족ㆍ예술가 등이 어떻게 서서히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최근에도 2006 서울공연예술제, 애플씨어터, 극단 김금지, 체홉 서거 100주년 기념, 안톤 체홉 서거 100주년 기념 등의 자리를 통해 공연됐을 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 온 무대.

지난해 10월 하루 10시간씩 모두 6차례에 걸쳐 이뤄진 공개 오디션의 열기부터 관심을 모았다. 러시아 세프킨 연극 학교 등을 졸업한 배우 이항나(아르카지나 역)는 “절대 울지 않는 강한 여인은 불행과 어떻게 맞서는가를 보여야 한다”며 “유학 기간(1993~96년) 동안, 러시아 연극의 역사라는 긴카스의 작품을 숱하게 봐 온 사람으로서 대단한 영광”이라고 300대 1의 경쟁률을 넘어선 소감을 밝혔다.

긴카스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극 이론을 현대적으로 구현한 것은 물론, 혁명적 무대 메커니즘의 선두 주자로서도 이름 높다. 이번에 선보일 무대는 지난 2002년에 비하면 약과다. 2002년 LG아트센터 기획 공연으로 올려졌던 긴카스의 첫 한국 무대 <검은 수사>에서는 5분의 1 남짓한 200석이었다. 진중한 삶의 의미가 간결하게 함축된 수작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올해는 거의 극장 개조 수준.

20톤에 달하는 물이 무대에 넘나든다. 40~100㎝로 채워질 물은 극의 진행에 맞춰 드나들며 계절의 변화를 관객에게 체감시킨다. 배우들이 수영복 입고 물놀이하거나 낚시도 하는 등 진짜 물로 자아내는 무대의 실존감은 새로운 관극 체험을 제공한다. 물의 출입은 LG 극장이 보유한 물탱크와 펌프로 제어된다. 물이 소도구가 아니라, 무대를 구성하는 환경으로 구사된 것은 우리 공연 사상 최초의 일.

이번 무대는 뮤지컬 제작사로만 인식돼 온 오디뮤지컬컴퍼니가 펼치는 변신의 현장이기도 하다. 대표 신춘수 씨는 “상업적 뮤지컬을 하지만 모든 공연 예술의 근간은 연극”이라며 “드라마적 여백을 메워 창작 뮤지컬로 연계시켜 나가는 작업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작업을 ‘체홉의 가을 프로젝트’로 명명, 매년 오디션을 거쳐 <세 자매> <벚꽃 동산> 등 체홉의 대표작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긴카스는 모스크바 연극예술학교, 헬싱키의 스웨덴 연극 아카데미의 교수로 후학을 키우고 있다. 기존 경계를 초탈한 그의 연출법은 세계 각지의 연극 현장을 두루 섭렵한 탈경계적 방식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무대를 위해 지난 10월 1차 입국한 뒤, 무대 구성과 연출 등의 이유로 두 차례 더 왕래하는 등 두 번째 한국 무대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오승명 조민기 김태훈 등 출연. 3월 15~25일 화~금 오후 7시 30분, 수ㆍ토 3시 7시 30분, 일 2시 6시 30분. (02)2005-0114 (장병욱 기자)

07. 01. 23.

P.S. LG아트센터 홈피에 올라와 있는 작품소개는 이렇다: "오디뮤지컬컴퍼니, 체홉의 가을 프로젝트로 본격적인 연극 진출 선언. 그 첫번째 무대 갈매기!!! 뮤지컬 <지킬앤하이드>, <그리스>, <돈키호테> 등 작품성과 흥행성을 겸비한 작품들을 제작하며 국내 뮤지컬계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해온 오디뮤지컬컴퍼니가 ‘체홉의 가을’ 프로젝트로 본격적인 연극계 진출을 선언한다. ‘체홉의 가을’은 중장기적인 연극 프로젝트명으로, 매년 최고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체홉의 대표작을 선보일 예정이며 그 첫 작품으로 갈매기가 선정되었다.

세계적인 러시아 연출가 까마 긴까스와 러시아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선보이는 혁신적인 무대연출, 1,100석 규모의 공연장을 660석 규모로, 객석까지 무대로 활용하는 상상 그 이상의 공간. 지난 2002년, LG아트센터 기획공연이었던 <검은수사>를 통해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바 있는 러시아의 국보급 연출가 까마 긴까스와 현재 러시아가 가장 주목하는 차세대 연출가 막심 깔신 (협력연출), 그리고 몽환적이며 판타스틱한 무대와 의상을 창조해내는 알렉세이 보챠코프가 의상 및 무대디자인을 맡아 환상적인 의상과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300여명이 넘게 지원한 공개 오디션, 매일 10시간씩 6차가 넘는 접전 끝에 최고의 배우들 선정 하루에 10시간씩 총 6차가 넘는 오디션을 통해 오승명, 조민기, 김태훈, 이항나 등 이미 연기력을 인정 받은 실력파 배우들과 이원재, 한송이 등 새로운 신예배우까지 골고루 갈매기에 함께 하게 되었다."

 

 

 

 

 

 

 

 

 

P.S.2. 긴카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몇몇 작품들도 레퍼토리로 갖고 있는데, 그가 공연한 체홉 목록에 <갈매기>도 포함돼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봤던 공연은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각색한 작품이었다(모스크바통신에 감상평을 몇 작 적어놓은 기억이 있다). 스틸사진 몇 장을 옮겨놓는다.

Режиссер Кама Гинкас задумал поставить в Московском ТЮЗе трилогию по Чехову под названием "Жизнь прекрасна". "Дама с собачкой" - вторая часть трилогии

Это одна из самых необычных постановок нынешнего сезона. Актеры играют прямо в зрительном зале и периодически падают с балконов вниз головой

이번 <갈매기> 공연에서도 무대를 특이하게 활용하는 것으로 소개돼 있지만 독특한 무대 구성과 활용은 긴카스의 전매특허라 할 만하다(그런데, 좌석이 660석으로 줄면 관람료는 그만큼 반비례하는 것인가?). 한국에서의 새로운 '실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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