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코너에서 '헨리 조지'편을 읽었다. 미국의 저명한 이 사회사상가가 인터뷰에 등장하게 된 건 최근 국가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정책(실패) 때문이겠다. 필자의 순발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는데, 비록 대담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지만(헨리 조지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인지?) 일독할 만하다. 더불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라는 '제3의 길'(?)에 대해서 한번 검토해봄 직하다(개헌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상당한 '견적'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일보(06. 11. 14)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 해결책"

이재현(이하 현)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는 꼭 잡겠다고 여러 번 단언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돼버렸습니다. 저는, 낙향하면 고향 시골집에 가서 살겠노라는 대통령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편이라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참으로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이하 조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왕좌왕해서 그런 거야. 8.31 대책 수립시 보유세 실효세율을 선진국형 구조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목표를 도중에 스스로 포기했지, 또 보유세 강화와 함께 패키지로 추진해야 할 거래세 부담 인하를 적절한 시기에 시행하지 못했지, 그래서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 및 등록세에 관한 애초의 정책 목표를 찔끔찔끔 수정玖?상황 악화 때마다 땜질 식으로 처방하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버렸으니까 말이야. 대통령의 호언장담만 믿고 있던 실수요자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해.

결국 노무현 정권의 책임인 거죠?

조지 그야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신나게 질타하고 있는 보수언론도 책임이 상당해. 보수언론은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세금 폭탄’ 운운하며 참주선동했지.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정책을 거꾸로 후퇴시켰고 말야. 10억원짜리 아파트가 14억원으로 올랐다면 양도차익이 4억원이니까 연 1,000만원 종부세를 40년이나 납부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6억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서민이 98.8%야. ‘세금 폭탄’이라는 말은 완전히 ‘생까는’ 얘기지.

노무현 정권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조지 투기적 가수요 세력을 우습게 본 것과, 투기의 광풍이 불어대면 결국 돈이 없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투기로 인한 당장의 상황 말고도, 일부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아파트 가격의 3분의 1이 거품이고, 이 거품 요인의 70% 가량이 저금리 때문이고 나머지는 부통산 투기 등 기대심리 때문이라는 데요. 잘못하면 거품이 꺼지면서 한국 경제가 다시 크게 망가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결국 다시 그 피해는 서민들에게만 닥치는 것 아닙니까? 일부에서는 정부는 공급확대만 하고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이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마는….

조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노무현 대통령이 당황해서는 안돼. 정책 실패에 분명한 책임이 있는 관료들을 데리고 회의를 해서 조잡한 대책을 내놓아 봐야 별 수가 없어. 현재까지의 실패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봐야지. 내 대안은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는 거야.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다른 세금은 감면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을 하자는 거지.

130여년 전에 주장하신 바로 그 내용이로군요.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조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규정해야지. 부동산 문제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벗어난 문제이고 또 단기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까 토지보유세 강화는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해.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토지공개념에서는 전혀 후퇴가 있을 수 없도록 말이야. 정책의 장기적 목표와 소위 로드맵을 미리 밝히고 국민들의 동의와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지.

당장 현재의 투기 광풍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과제인데요.

조지 그건 어렵지 않아. 버블 세븐 지역 등을 포함해서 투기 수요나 초과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소유 제한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현재의 청약제도를 확 바꿔서 무주택 실수요자가 집을 갖게 하고, 후분양제 및 원가 공개 등을 통해 분양가격을 낮추되 당첨자의 경우 매각을 할 때 국가나 주택공사에게 반드시 팔게 하면 되는 거야. 보유세는 현재의 계획대로 틀림없이 과세를 해야지. 그리고 임대소득은 과세를 강화하고 임대소득의 세원은 국세청이 철저히 추적, 관리해야지. 그러면서 임대주택 중심으로 주택 공급을 서서히 확대해나가면 투기 광풍은 잡히게 돼 있어. 이미 싱가포르 등에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우리라고 못하겠나? 부동산 문제는 전 국민적 의지가 있으니까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합의해나가면 되는 거야.

저야 선생님 주장에 찬성이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현재의 정치 국면에서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문제겠군요.

조지 바로 그걸 하라고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정무직 공무원에게 각종 특권과 월급을 국민이 주고 있는 거야. 정책으로 승부하려 하지 않고 정계개편 따위의 조잡한 정치공학적 수작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고 있는 정당이 있다면 국민들이 선거에서 혼내면 돼.

네,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환생하셔서, 토지공개념을 중심으로 한 개헌을 공약으로 걸고 내년 대선에 출마하실 수는 없나요?

조지 허허…, 그건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난 미국 사람이니까 북미간 직접 대화에만 신경 쓸 거라네. 그럼 또 보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사상가, 사회운동가. 1879년에 출간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처음에는 출판사의 거부로 자비 출판했으나 그 후 폭발적인 주목을 받으며 수백만 권이 팔려 19세기 말까지는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됐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영세 출판업자인 아버지와 전직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3세 때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다 16세 때 선원이 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을 캐기도 했다. 인쇄공으로 일하다 성년이 되자 즉시 인쇄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일간지 인쇄부서에서 일하며 간간히 글을 쓰기도 했다. 1865년 링컨 대통령 피살 소식에 격분해 기고한 글이 신문 편집인의 주목을 받아 보수를 받는 기자가 됐으며 그 뒤로 신문사 특파원, 편집인 등을 지냈다. <진보와 빈곤>의 성공 후에 그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강연을 했고, 1886년에는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897년에 재출마했으나 투표일을 4일 남기고 사망했다. <진보와 빈곤>의 한국어 완역본은 1997년에 출간됐다(김윤상 역,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의 사상 중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합리적 핵심은 “노동 생산물의 경우 개인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만 토지는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지독한 빈곤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진보 속에서 빈곤이 존재하는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찾아내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지대의 폭등이 노동자 빈곤을 낳으므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지대 전체를 사회화하는 토지가치세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소수의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소득세, 소비세, 각종 기업 관련 조세 등 경제적 노력에 의해 얻는 소득에 대한 과세야말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세금들을 없애고 단일한 토지가치세를 징수하는 것만이 불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사회의 것은 사회로’ 돌리는 정의의 도덕법칙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 문제를 분배적 정의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의 차원에서도 깊이 있게 논의했던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과세를 혐오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를 설파하는 우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조차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에 대해서는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헨리 조지는 토지 가치에 대한 기대가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바로 그 기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이 나오기 한참 전에 이뤄진 아주 획기적인 이론적 설명이었다. 형평과 효율을 함께 충족시키려는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통파 조지주의자(Georgist)들인데 이들은 헨리 조지의 이론이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고 있으며, 자신들의 경제학을 Geonomics로 부른다. 여기서 'Geo'란 바로 지구란 말에서의 ‘지(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헨리 조지의 이론이 갖는 생태학적 함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온건파 조지주의자들은 단일한 토지가치세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토지가치세를 우선적으로 징수하되 다른 조세도 복수적으로 징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헨리 조지의 이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여 연구한 그룹은 김윤상, 이재율, 전강수, 이정우 교수 등과 같은 대구 지역 경제학자들이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내면서 개혁적 경제정책을 수립ㆍ추진하다가 안팎의 압력으로 인해 중도하차한 것으로 보도됐다.

06. 11. 14.

 

 

 

 

P.S. 헨리 조지의 주저인 <진보와 빈곤>(비봉출판사, 1998)은 뒤늦게/진작에 번역돼 있다(알라딘에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개인적으론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토지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기 위해서였다. 흔히 쳥년시절 카츄사의 정절을 유린한 귀족 네흘류도프가 중년의 배심원으로 나선 법정에서 살인혐의까지 뒤집쓴 창녀 카추샤를 다시 만나면서 참회와 부활의 길을 걷게 된다는 줄거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의 상당 부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는 '지주' 네흘류도프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비록 지주계급에 대한 의심 때문에 농민들은 그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때 톨스토이가 크게 감화를 받아서 참조한 것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던 것. 그러니, (비단 현재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와 빈곤>은 참조해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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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osculp 2006-11-14 23:33   좋아요 0 | URL
이 대담글에도 두가지 빠졌군요. 교유문제와 토지보상비로 인한 지가상승.
친척어른이 건축하시는 분인데 2년전부터 경기도 어디를 다녀도 길가는 다 평당 천이 넘는다고 사서 건축할만한 땅이 없다는 애기를 하셨는데 이런게 집값과 분양가 상승의 기본적인 요인인데가 신도시가 평준화없어지면서 강남으로 모이는것이 수요의 촉발이라고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애기하죠.
제가 사는곳이 안양인데 여기 중학교중 이름난 중학교가 있습니다. 며칠전 들은 애기로는 옆 의왕시 학군에서 초딩 6학년이 30명이 조금 넘는데 지금 남았는 애들은 10명조금넘게. 나머지는 전학가거나 아니면 주소 다 옮겨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중학교에서는 이번에 특목고로 180명인가 써서 거의 다 가고요. 안양은 고등학교가 근거리 배정이 아니라 무작위추첨이라 집옆에 학교가 있어도 못갈가능성이 있어 돈있으면 근거리 배정인 강남으로 가고 아니면 중학교때 특목고로 가거든요.
제 친구나 아는 사람들 대치동으로 지금 12억대의 30평 아파트로 이사가는 이유도 교육인데. 물론 돈 더많은 사람들은 투자용을 사놓겠지만.
그리고 지금 돈이 있는 사람도 투자해서 돈버는것보다 서류작성해서 집 사고팔면 투자이익보다 더 나오는 상황인데 여전히 부동산 자체에서 공개념이니 뭐니 하면서 해결하려는것 보면 이건 아닌것 같은데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6-11-14 23:51   좋아요 0 | URL
교육문제가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루돼 있는 건 한국적인 특수성이 아닐까요. 헨리 조지의 일반론으로 카바되지 않는. 그 둘 간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사실 토지에 상한선을 두자는 주장은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나온다고 하니까 '남의 얘기'만은 아니고,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대목을 옮겨놓고 주석을 달도록 한다. 5장 '레닌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했는가'에 들어있는 대목인데, 오늘날 공과 사의 경계가 소멸돼 가고 기이하게 전도되는 현상을 문제삼고 있다. 사실 지젝의 모든 구절들이 이러한 '뜯어읽기'의 대상이 됨 직하하다. 그럴 만한 여유를 독자로서 갖고 있지 못할 따름이다. 뜯어읽기의 대상은 국역본 104-6쪽, 영어본 207-8쪽이다. 이전에 지적한 대로 독어본을 옮긴 국역본과 영어본은 같은 제하의 장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아래에 인용하는 대목도 국역본에는 없는 문단이 영어본에 더 들어가 있다(반면에 영어본에 없는 내용이 국역본에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인용문의 문단은 국역본과 일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을 가장 가까운 사람보다 완전한 이방인에게 더 쉽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이버공간의 채팅방과 정신분석 치료 같은 현상이 명맥히 이러한 패러독스에 속한다. 우리가 완전히 지인의 범위 바깥에 있는 이방인과 이야기하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이 우리가 말려든 열정의 '뒤얽힘'을 더 이상 휘저어놓지 않으리라 보장한다. 즉 이방인은 우리와 이웃한 타인이 아니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거대한 타자 그 자체'이며, 우리의 비밀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자신의 가장 내밀한 꿈과 두려움 따위를 주변 사람들보다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역설적이지만 더 잘 털어놓는다. 사이버공간의 상의 채팅방이나 정신분석 치료가 기대는 것도 이러한 패러독스이다. 즉, 우리는 전혀 모르는 상대방에게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것. 사적인 고백들로 채워진 개인 블로그들도 마찬가지이다. 가족에게는 이야기하지 못할 내용들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공간에서는 마음껏 늘어놓는다. 왜? 그렇게 하면 일이 괜히 복잡하게 꼬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야말로 우리의 비밀들을 담는 중립적인 그릇(수용체)으로서의 '대타자 자체(the big Other)'이다. 

"그러나 오늘날 '공유된 유아론'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구성하는 사랑과 증오에 관한 비밀을 고백하기 위해 이방인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마치 우리가 보장된 거리를 배경으로 할 때만 관계 자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은 예외적인 지위에 머물고 있는(완전한 이방인과, 다음날 각자의 길을 갈 것이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 그대로 열정적인 섹스로 밤을 보내는 것 같은) 이러한 것들이 점차 새로운 기준으로 되어 가고 있다."

'공유된 유아론'은 영어로 'shared solipsism'이다. 자기만의 내밀성을 낯선이들과 나눠갖는 경향성 정도를 뜻하겠다.  그게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해가고 있다는 것. 즉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증오를 고백하기 위해서 모르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걸 넘어서서 아예 그러한 거리가 전제되어야 친밀한 관계(열정적인 섹스)를 맺는 것이 가능한 경지가 도래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원나잇스탠드'가 성관계의 '모델'이 되어간다? 국역본에는 빠져 있지만, 영어본에서 지젝이 덧붙인 내용은 파트리스 셰로의 영화 <정사(Intimacy)>(2001)이다. 무려 35분간의 정사 장면이 들어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영화이다(내용은 서로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일주일에 단 하루, 수요일마다 만나 섹스를 나누는 남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같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밀한 인생의 세밀한 부분이, 사람들이 사적으로 속삭이는 외설적인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책이나 웹사이트에서 접근 가능한 공적인 등장인물의 한 부분이 되어가는 점이다. 이를 약간 향수어린 보수적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스캔들이 더이상 없다는 사실에 바로 스캔들이 있다."

우리의 경우 최근에 컴백설이 나돌고 있는 O양 비디오 사건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등장인물'의 영어 표현은 'persona'이다). 그리하여, 우리 시대의 스캔들은 더이상 아무런 스캔들도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 흔히 '섹스 비디오 파문'으로 통칭되는 이러한 유사 사건들은 가히 전세계적으로 분포돼 있다. 얼마전 관련기사를 참조하면 이렇다.

스포츠서울(06. 10. 23) 섹스비디오, 국내외 피해 사례는?

섹스 비디오 피해 사례는 국내·외를 통틀어 수 십여건에 달한다. 유명 스타 외의 연예인까지 포함한다면 그 사례는 더욱 많을 것이라는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국내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O양', 'B양', 'L양' 사건. 1999년에 유포된 'O양' 비디오는 유명 여자 탤런트와 한 일반인의 성관계 장면이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유명 연예인의 첫 섹스 비디오라는 희귀성 때문에 당시 이 비디오 테이프는 서울 종로3가 세운상가 일대에서 개당 100만 원에 밀매되기도 했다. 섹스 비디오가 무더기로 뿌려진 이후 피해 연예인은 연예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불과 1년 뒤. 가수 B양의 섹스 비디오가 대량 유통됐다. '제2의 O양 비디오'로 불린 B양 섹스 비디오는 가수 B양과 전 매니저 김모씨의 성관계 모습이 담겨있다. 특히 B양 동영상의 풀버전이 개인사이트에 게재되면서 섹스비디오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인기 절정의 가수였던 B양은 이 사건으로 방송일을 접어야했고 비디오 파문 이후 6년만에 가까스로 재기에 성공했다. O양, B양 섹스비디오와 달리 탤런트 L양 비디오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이 비디오는 L양과 닮은 일본 여성의 목욕탕 몰래카메라 컷을 마치 L양인 것 처럼 조작, 유포됐다. 따라서 O양, B양 비디오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며 L양은 실체도 없는 비디오 때문에 심각한 명예 훼손을 당했다.

해외의 피해 사례도 부지기수. 그 가운데 패리스 힐튼과 콜린 파렐의 섹스비디오가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힐튼은 옛 연인 닉 카터, 모델 제이슨 쇼와 찍은 섹스 테이프가 유출돼 곤욕을 치렀다. 이 비디오에는 힐튼의 적극적인 애정행각이 모두 포함돼 있다. 특히 힐튼의 첫 섹스 비디오 '파리에서의 하룻밤(One Night in Paris)'은 DVD판으로 출시되고 있다. 수 많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힐튼은 급기야 섹스 비디오를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되는 수모까지 겪었다.    

파렐은 옛 연인 니콜 나래인과의 섹스 비디오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파렐의 전 애인 나래인이 지난해 7월 파렐과 함께 찍은 섹스테이프를 유포하려고 한 것. 파렐의 고소로 이 계획은 무산됐지만 나래인은 법원의 '공개 및 판매금지' 요청을 무시한 채 비디오를 유포했다. 결국 파렐의 섹스비디오는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파렐은 섹스 비디오로 마음 고생이 심하다고 밝혔다.

섹스비디오는 피해자에게 정신적인 고통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 오점(汚點)을 남긴다. 특히 얼굴이 알려진 연예인이라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손가락질 한다는 망상에 빠지거나, 사람을 피해다니는 대인 기피증으로 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 때문이라도 톱스타 K군의 섹스 비디오가 유출되는 피해는 없어야 하겠다.(*지젝이 아래에서 들고 있는 사례도 이러한 것들이다.)

"이는 처음에는 모델과 유명 영화인에게서 시작됐다. 클라우디아 시퍼가 두 남자의 성기를 동시에 열렬히 입으로 애무하는 (조작된) 비디오 클립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만약 인터넷상에서 미미 맥퍼슨(더 유명한 호주 모델 엘 맥퍼슨의 여동생. 사진)에 관한 자료를 본다면,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친환경적 활동(고래 관찰 회사 운영), 비즈니스 우먼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인터뷰 사이트에 이르고, 그녀의 '점잖은' 사진들이 있는 사이트에 덧붙여, 자위하거나 연인과 성교하는 도둑맞은 비디오를 얻게 된다."

"그리고 카트린 미유의 최근 책은 어떠한가? 여기에서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 비평가는 차갑고 비감정적인 스타일로 창피함이나 죄책감도 없이, 그리고 결론적으로 격정적 일탈의 감정도 없이 자신의 화려한 성생활의 세밀한 부분을, 그녀가 큰 난교파티에 주기적으로 참가하고 거기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익명의 페니스들과 한번에 통하고 즐긴 것까지를 묘사한다."

 

 

 

 

국역본에서 '카트린 미유(Catherine Millet)'라고 표기된 이는 '카트린 밀레'를 가리킨다. 지젝이 언급하고 있는 책은 국내에도 번역/출간된 <카트린 M의 성생활>(열린책들, 2001)이다(그녀의 미술관련서들도 국내에 번역돼 있다). 알라딘의 소개를 잠시 옮기면, "자신이 경험한 무수한 성경험을 거리낌없이 풀어놓은 논픽션이다. 놀라운 점은, 성에 대한 서술이 너무나 덤덤하다는 것이다. 섹스 상대의 숫자나, 섹스를 행한 장소, 가지각색의 섹스 스타일,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섹스와 오르가슴에 대해서 탈탈 털어 이야기하는데도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 그저 '나의 섹스'를 치밀하게 그려낼 뿐이다. 그러기에는 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허풍이라곤 조금도 없는 비쩍 마른 서술, '주정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은 거의 쓰지 않는 성행위 묘사, 자기의 몸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분석하는 눈. 공개적으로 섹스 경험을 털어놓았다는 점은 그 다음에 놀랄 일이다. 일단,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과 '관점'에서 성애 장면을 그려낸 솜씨에 경탄하게 된다..." 

아무튼 성에 개방적인 프랑스에서도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유명인사의 성생활 고백서이다. 카트린 밀레 이후에 그렇다면 어떤 스캔들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지젝이 예감하는 미래는 이런 모습이다.

"여기에 더이상 선험적인 경계는 없다. 사람들은 가까운 미래에 몇몇 정치가들이 (처음에는 제한적으로) 그 혹은 그녀의 성적 교제에 대한 하드코어 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 혹은 (상적)능력을 확신시키기 위해 유통할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거의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는 1912년경에 인간의 본성이 변했다고 썼다. 아마 이 모토는 오늘날 공과 사의 구분이 사라진 것을 신호로 '빅브러더' 현실 드라마 같은 현상에서 파악되는, 주관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을 지적하는 게 훨씬 더 적절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이상은 안되겠지, 라고 가정해볼 수 있는 '선험적인 경계'는 더이상 없다.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인들이 (처음에는 신중하게)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섹스비디오를 유권자들에게 유포시킬 가능성까지도 점쳐볼 수 있다. 이미 1912년에 버지니아 울프는 인간의 본성이 변화했다고 적었지만,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기술이 보다 더 적합해보이는 것은 공과 사의 구별이 사라져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이다...

06. 11. 14-17.

P.S. 서둘러 끝내느라고 마지막 인용문단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먼저 '빅 브러더'는 물론 조지 오웰의 <1984>에 등장하는 인물(독재자)인데, 같은 이름의 리얼 TV시리즈가 있다고. 올해 '시즌 7'까지 나왔고 내년에는 '시즌 8'로 들어간다는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를 참조할 수 있다(참가신청자들 가운데 시청자와 제작자들이 뽑은 배역들이 합숙생활을 하면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 같은 걸 하는 모양이다. 그런 게임의 과정이 TV채널을 통해서 전부 공개되는 방식). 그리고 '주체성을 가진 지위의 급격한 이동'은 영어로는 'the radical shift in the status of subjectivity'인데, 직역하면 '주체성의 지위에 있어서의 급격한 이동'쯤이고 의역하면 '주체성이 갖는 지위의 급격한 전도' 정도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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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 저물어가려니까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음 학기부터는 가급적 월요일 강의를 맡지 않든지 해야겠다(그게 뜻대로 될 리 없지만). 더구나 내주엔 입시 한파도 몰아친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한주의 시작이 갑자기 끔찍해진다. 게다가 해야 할일들을 생각하니 나도 벤야민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뉴스나 훑어보다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 완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번역분량이 전3권이니까 어린시절에 내가 읽은 건 반쪽짜리 정도였겠다(지금 딸아이가 읽는 그림책은 줄거리 정도일 테고). 반가운 마음에(이런 날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고 싶기도 하므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6. 11. 11) 노벨문학상 수상 여성작가가 쓴 동화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혹은, '여성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알려져 있는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의 빼어난 동화 <닐스의 신기한 여행>(배인섭 역·오즈북스 전3권)이 출간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 완역됐다.

기자 역시 어린 시절 그림 가득한 축약본으로 번역된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장난꾸러기 한 소년(닐스 홀게르손)이 손가락만큼 작아져 거위의 등을 타고 온갖 곳을 떠돌다가 결국은 착한 소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땐 소년이 모험을 겪으며 머물고 떠나는 도시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또한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교육자와 작가로서 전국민적 존경을 받았던 여성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사실 본격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동화작가'라면 한수 아래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동화 속에선 소설이나 시 이상의 감동과 만날 수 있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이 <닐스의 신기한 여행>이 그렇다.

1858년 스웨덴 모르바카에서 태어난 셀마 라게를뢰프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또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작가가 되는 것. 그녀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짬짬이 써낸 첫 소설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비장미와 서정적인 문체로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후 1885년부터는 교직을 떠나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쓴 <반그리스도의 기적>이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녀에게 '스웨덴이 자랑할만한 작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작품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쓴 1902년작 <예루살렘>.

이처럼 탄탄한 문장과 빼어난 감수성으로 사랑받던 라겔를뢰프에게 스웨덴 교육계가 한 가지 제의를 건넨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국의 아름다움과 자연, 풍속을 쉽게 알려줄 수 있도록 동화를 써보는 게 어떻겠는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태어났다. 그 부탁에 기꺼이 응한 그녀는 1906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흥미진진하면서도 교훈 가득한 이야기를 완성시켰고, 그 공로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작가 최초의 수상이었다.

스웨덴의 남부 스코네에서 시작해 북쪽 끝자락 라플란드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닐스와 기러기들의 여행에 동행하며 스산하지만 아름다운 북유럽의 풍광과 만난다는 것, 호수와 숲 속에서 숨쉬고 있는 동·식물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 또한 신비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난다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렇다. 거위 모르텐, 우두머리 기러기 아카, 여우 스미레, 거위치기 소녀 오사와 그녀의 아우 마츠, 까마귀 비타키, 독수리 고르고 등 유년시절 기억 속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내는 이 동화와 만나는 겨울이라면 춥지만은 않을 듯하다.(홍성식 기자)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좀 엉뚱하게도 <삐삐 롱스타킹>이다. <말광량이 삐삐>(1969)란 영화로 우리에겐 더 잘 알려진 작품인데, 나도 작품을 읽은 게 아니라 어릴 때 TV시리즈로 본 게 전부이다. 이 <삐삐 롱스타킹>을 다시 기억하게 된 건 요하힘 숄이 쓴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현대소설>(해냄, 2002)에서 <삐삐 롱스타킹>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베스트 50'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이런 리스트를 만들 때 누가 <삐삐>까지 고려할 수 있었을까?).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가 또한 스웨덴의 여성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다. "북유럽 현대작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작가"라고 하니까 여성작가로서 라게를뢰프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닌가 싶다(알라딘의 소개는 한술 더 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 독자를 가진 작가"!). 흔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이야기하지만, 20세기에 오면 이 '닐스'와 '삐삐'의 산파 두 사람이 다 해먹는 게 아닌가 싶다.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요아힘 숄의 평가는 이렇다: "<삐삐 롱스타킹>은 20세기 후반에 어린이 교육을 개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 큰 아이들도 삐삐처럼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지고 싶어한다."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진다? 어른이라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사항들은 아닌 듯하다!

 

 

 

 

린드그렌 여사의 책들은 <삐삐> 시리즈 외에도 다수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데, 그 중에서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건 '라스무스' 시리즈이다. 원래는 <라스무스와 방랑자>, <라스무스와 폰투스> 두 권인 듯한데, 내가 읽었던 건 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 들어있던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라스무스>의 저자가 린드그렌이라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라스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자유로운 방랑자가 맨발로 진흙탕을 지날 때 발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쾌감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진흙'이 이후로 내겐 자유의 한 가지 표상이다. 한데 이젠 닐스처럼 거위의 등을 타고 날아가지도 라스무스처럼 맨발로 세상을 방랑하지도 못하는 처지로구나. 동화의 바깥 세상은 쌀쌀하다. 곧 겨울이 되리라. 다시 <성냥팔이소녀>나 읽어야겠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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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마이페이퍼의 뒷정리를 하는데(이미지들이 다운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리중'이라고 해놓고 방치해놓은 페이퍼들이 눈에 띄곤 한다. 널려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은 숫자도 아니다. 그 중에서 작년 12월말에 진행하다가 만 '토성의 영향 아래(3)'을 마저 끝내기로 한다. 12월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러다간 1년을 다 채우겠다 싶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했는데 반납기한도 있으므로 '쇠뿔도 단 김에' 빼야겠다. 처음 두 문단이 작년에 적은 것인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보태 쓰겠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한다. 힘 닿는 한에서.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시울, 2005) 중 표제가 된 벤야민 장에 관한 세번 째 정리이다. 67쪽, 아니 68쪽부터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두 권의 짧은 책, 1930년대에 씌어져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은 이 책에는 벤야민의 자화상이 가장 뚜렷하게 담겨 있다."(국역본은 '이 책'이라고 단수로 돼 있다.)  그 두 권의 책이란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과 <베를린 연대기>를 말한다. 참고로, 네권짜리 영역본 선집과는 별도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하버드대학출판부, 2006)은 단행본으로도 새로 출간됐다.

초기 우울증 질환자였던 벤야민은 "고독이 인간의 유일한 적합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때의 고독은 방안에서만의 고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거대 도시 내에서의 고독,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68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이다.

그러한 벤야민의 모델은 보들레르의 산책자(flaneur)였으며,  그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는 걸 좋아했다. "<베를린 연대기>의 다른 부분에서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삶을 지도로 그린다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도시의 미로는 그에게서 삶의 은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는 지도와 도식, 기억과 꿈, 미로와 아케이드, 원경과 전경 등의 은유을 이용해 "방향찾기의 일반적인 문제를 말하며 어려움과 복잡성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벤야민이 참조한 것은 브르통의 <나자>나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같은 초현실주의 소설들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벤야민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주의'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은 우울질의 사람들은 또한 '둔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는 것도 특징이다. 어머니와의 산책에서의 그의 이러한 고집불통의 구제불능성은 강화되는데(그는 커피 한 잔 끓일 줄 모른다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보다 더 느리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버릇은 이때의 산책에 그 근원이 있다. 이 버릇에는 또 내가 나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빠르고, 더 능수능란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위험이 있다."(71쪽) 그리고 이러한 '완고함(stubbornness)'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의 1/3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이 나온다. 나는 '완고함'에 '구제불능'이란 뜻을 포개서 읽고 싶다. 문맥상 이 산책에서 문제된 것은 항상 그가 엄마보다 뒤쳐져서 따라가곤 했다는 것. "얘, 발터야,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를 헌정하기도 한 아샤 라시스 얘기가 나오는데('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페이퍼를 참조) '아샤 라키스'라고 잘못 표기돼 있다. 그리고 음미해볼 만한 기술. "벤야민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했을 때, 즉 어린아이일 때에 대해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쓸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린시절을 보았을 때 벤야민은 자기 삶을 지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에 드러난 솔직함과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은 벤야민이 과거를 완전히 소화하여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친구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안에 괴물이 떠돌아다닌다는 환상에 빠진 이야기는 벤야민이 후에 자기 학급을 증오한 일을 예시(豫示)한다."(72쪽)는 문장에서 '자기 학급(his class)'은 아무래도 '자기 계급'의 오역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이어서 학교가기 싫어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라고 내가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실컷 자도록 내버려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의 교수자격취득청구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이 통과되지 않게 되자 "어떤 지위와 안정된 직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헛된 것임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충족될 것이었다("벤야민은 과거에서 떠올린 것 전부를 미래에 대한 전조로 간주한다.").

해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방식, '학자티를 내며' 언제나 어머니보다 한발 뒤에서 걷는 모습은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를 예시하는 것이다."라는 게 손택의 통찰력 있는 예리한 지적이다.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 of real social existence)'는 '실제적인 사회적 존재에 대한 거부' 정도의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는 제몫의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절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암묵적인 소망이 성취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열정.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 시간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은 시간, 순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구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공간, 순간,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던 벤야민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라고 불려도 좋을 파편적인 작품을 썼다... 벤야민은 과거를 되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과거를 공간적 형태로, 예언적 구조로 압축한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세상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73쪽)

공간에 대한 이러한 선호를 손택은 토성적 기질과 연관시킨다.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거리의)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로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쪽)

그렇다면 토성적 기질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토성적 기질의 특징은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가차없는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건'이 뜻하는 건 자아(self)이다. 곧 자기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토성적 기질이다. "따라서 이 기질은 지성인에게 적합한 기질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를 빌자면 "나는 내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것이 토성적 기질이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아는 어떤 과제이며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따라서, 이 기질은 예술가나 순교자에게 적합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말하듯,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의 기질이다)." 그리고 자아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늘 너무나 느리다. 이들은 항상 스로에 대해 뒤쳐져 있다(And the process of building a self and its works is always too slow. One is always in arrears to oneself)."  김현승의 시구를 비틀자면, "나는 내게 느리다"가 토성적 기질이다. 그들은 K처럼 마을에는 도착하지만 끝내 성(자아라는 성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페이퍼 또한 아직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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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이따가 집에서 퍼갈랍니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으니..안된다고 하면 안가지고 가고. 흠흠.

로쟈 2006-11-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될 리가 있나요? 기술적인 거라면 몰라도...

수유 2006-11-1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주 수월하게 옮겼네요..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나저나 서재는 리플을 달기위해 꼭 로긴해야 한다는게 넘 불편하군요.. 일부러 서재까지 만들어야 하고..

로쟈 2006-11-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덕분에 '악플'로부터 좀 자유로운 장점도 있습니다(^^;)...
 

결혼식에 갔다가 문학평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책을 한권 선물받았다. 리차드 세네트의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일월서각, 1982)가 그것인데, 거의 25년전에 나온 책이니 절판된 건 당연하고 헌책방에서나 가끔 눈에 띄는 책이겠다(그런데 내 기억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걸로 보아 80년대 후반에도 드물었던 책이지 않나 싶다). '헌책다운' 이 책에는 초판을 찍은 날짜만이 박혀 있다.

원서는 1976년에 초판이 나온 듯하고 지난 1992년에 장정을 달리 해서 재출간되었다. 국역본은 그 사이에 나온 것인데, 다소 두툼한 책이지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싶다. '현대의 침몰'이라고 옮겨졌지만 원제는 '공정 인간의 몰락' 정도가 될 듯하고 원래의 부제는 '현대자본주의의 해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회심리학에 대하여'이다. 1장인 '공적 영역'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지 않나 싶다(1950년대에 나온 리즈먼의 책이 훨씬 먼저 출간됐지만).  

 

 

 

 

 

국내에는 리차드 세네트의 책이 더 출간돼 있는데, '세넷'이라고 검색해야 한다. <현대의 침몰> 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불평등사회의 인간존중>(문예출판사, 2004),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문예출판사, 2002), 그리고 <살과 돌: 서구문명에서 육체와 도시>(문화과학사, 1999)가 있는데, 모두 눈에 익은 책들이고 <살과 돌>은 특히 (제목 때문에) 벼르다가 끝내 구입하지는 못했던 책이다(품절됐군!). 겸사겸사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공적 영역/공간과 관련하여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다. 거기에서 암시받을 수 있지만, '공적 인간'이란 '정치적 인간'이며 '호모 폴리티쿠스'를 뜻한다. 최인훈의 통찰을 빌면, (남한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밀실'만 있고 '광장'은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세네트의 문제의식이 아닐까 넘겨짚어본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것 정도로 '공적 인간'의 소임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건 그저 알리바이일 뿐이다. 영어표현을 빌면, 우리의 관심은 '정치(politics)'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로 확장돼 나가야 하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바야흐로 대선과 맞물린 '정치의 계절'을 불과 1년 남겨놓고 있다. 우리가 마저 '침몰'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빨리 챙겨두어야겠다...

06.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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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하는 손과 장인 예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4 14:04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 출간 소식의 반가움은 이미 지난주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언론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가장 빨리 올라온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는 번역본보다 원서를 미리 구했는데, 내주쯤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기사를 보니 저자의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기대된다.   연합뉴스(10. 08. 04)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