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185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가는 1821년 11월 11일 빈민구제병원의 의사였던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리야 도스토예프스카야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그는 1881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해마다 '빼빼로 데이'가 그의 생일이니만큼 기억하기도 편하다. 기념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작가의 초상화로는 가장 유명한 바실리 페로프의 초상화(1872)를 아래에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별달리 준비한 것도 없어서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몇 권 나열해본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가장 쉽고 짧은 입문서가 되겠다(하지만 얄팍한 정보나 나열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문제거리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되겠다. 그리고 얀코 라브린과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전이다(앙드레 지드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도 시중에는 나와 있다. E. H 카의 전기는 절판됐다). 후자는 세밀한 작품해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교양서를 겸한다. 그리고 두번째 아내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삶을 같이했던 이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위대한 건 작가로서이다.

 

 

 

 

어쨌거나 잠시 도스토에프스키 문학에 대해서 명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11월의 하루이다.

06. 11. 11.

P.S. 보다 자세한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란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산손 2006-11-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출스키 책에 10월 30일이라고 되어있는 걸 저는 종이에 적어놓아서 로쟈님이 잘못 쓰셨나 잠깐 어리둥절했습니다만 하하 러시아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H.카의 전기를 몇 달 전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했다죠.
아, 오늘은 또 키에르케고르가 고인이 된 날이기도 하더군요.
(우연히 YTN 뉴스에서 본 사실)

로쟈 2006-11-1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융아님/ 어디선가 본 사진인데요.^^ 구력 10월 30일인지라 지금의 달력으론 11월 11일입니다. 10월혁명 기념일이 11월 7일인 것도 그 때문이구요...
연랑님/ 카의 전기는 제 기억에 홍성사판도 있고 기린원판도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불안의 개념>을 읽을 만만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데, 시간은 잘 안 나네요(--;)...
 

오마이뉴스의 해외리포트란에 흥미로운 기사가 떠서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곧 공쿠르상의 시상식에 작가가 불참했다는 것. 그것이 '수상거부'를 뜻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주최측에 낭패감을 떠안긴 것만은 분명하다. 전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문학상을 주고받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될 만큼 '문학상'이 넘쳐나는 우리의 처지에서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식이다(믈론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은 예외적이며 아주 드문 일이지만). 작성자는 박영신 기자이다.

오마이뉴스(06. 11. 10) "최고 문학상?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은 수상자

공쿠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그 해 출판된 산문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오로지 소설 부문에만 수여해 왔다. 수상과 함께 작가에게 명성과 대중적 성공을 보장하는 공쿠르 문학상의 상금은 달랑 10유로.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상작이 발표되면 프랑스인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 해의 작품을 보기 위해. 때문에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은 통상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반면 공쿠르 문학상은 한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수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공쿠르를 거머쥔 작가 로맹 가리는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두 번째 공쿠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때 이름은 에밀 아자르였다. 결국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동일인물'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하기 직전까지 세상은 철저히 속았던 것.

지난 6일 올해의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미국인 작가 조너선 리텔(39)의 소설 <호의적인 사람들>(Les bienveillantes)이 그 주인공. 나치 친위대(SS)의 회고 형식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호의적인 사람들>은 지난 8월 불어로 출간된 이후 2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다. 지난달 리텔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리텔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가족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있다. 그러나 올해의 공쿠르가 발표된 지난 6일 주인공 리텔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리텔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리텔의 대리인은 <프랑스 2 텔레비전> 저녁뉴스를 통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으나 이것은 분명 '대수로운' 일이었다. 심사위원단은 애써 태연하려 했어도 시상식 현장은 '당혹' 그 자체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때도 불참한 경력이 있는 리텔은.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 TV를 병적으로 혐오하는 리텔은 이때 라디오 <유럽 1>과 인터뷰를 가진 일이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의 수상자 후보 명단이 발표된 시점이었다. 여기서 리텔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작품만큼 뛰어난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문학상이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해 프랑스의 여성정보 웹사이트인 <마드모아젤 닷 컴>은 문학상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일 현재 총 332명의 누리꾼이 참가한 가운데 절반이 넘는 52.1%가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상은) 작가들이 자기 친구에게 표를 던지는 바보들의 잔치."


'문학의 질을 평가하는 바른 지침'이라거나 '떠도는 작가들을 위한 귀중한 원조'라는 대답은 각각 30.1%, 17.8%에 불과했다. 시인 조르주 페로스의 냉소와 만나는 지점이다.

"문학상은 심사위원에 우월감을, 수상자에 열등감을 준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 리텔의 '반항'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의 '사건'을 환기시킨다. 리텔과 페로스의 '불평'을 넘어 혁명에 가까운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기념비적인 인물 장-폴 사르트르. 사후 26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살아숨쉬는 사르트르는 전세계에서 노벨상을 거부한 유일한 작가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노벨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장-폴 사르트르

기실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영예를 꾸준히 거절해왔다. 이를테면 전후인 1945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정부에 내 친구들이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거부한 바 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교육기관인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수차례 강의할 것을 요청 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같은 이유였다, '인맥'을 등에 업지 않겠다는. 그러나 굳이 '인맥'이 아니었어도 사르트르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964년이거나 그 후거나 나는 (노벨상 수상의) 영광에 응할 수 없고 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노벨상을 심사하는 왕립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국장에게 위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열어볼 틈도 없이 1964년 10월 22일 투표는 진행됐으며 아카데미 심사위원단은 공식적으로 사르트르의 수상을 발표하고 만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수상 거부를 알리는 편지를 쓰게 된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

"(…) 내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화전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동서양의 문화가 평화적으로 공존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록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내 호감은 두 말할 필요없이 사회주의와 동구권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나는 '최고'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입니다. 최고 기관에서 수여하는 어떤 영예에도 내가 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나 누군가 내게 레닌상을 제안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레닌상을 제안받은 일은 없습니다.

(…) 알제리 전쟁 중 ‘121인의 선언’에 우리가 서명했을 당시 상이 주어졌다면 나는 기꺼이 수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 싸운 '자유'도 함께 평가되는 의미가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은 없었습니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그러나 투사가 아닌 작가로서 사르트르의 소망은 이뤄졌다. 세상과의 '투쟁'을 끝내고 사르트르가 땅에 묻힌 1980년 4월 19일 5만여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일생을 통틀어 프랑스 국민이 선사한 감사의 인사인 동시에 그가 허락했을 유일한 상이었다. 프랑스인의 가슴에 새겨진 이날의 기억은 '귀여운' 일화로 남아 상징이 됐다. 어린 소년 하나가 후다닥 집으로 들어서며 외쳤던 것이다.

"아빠, 사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하는 시위에 갔다 왔어요!"


06. 11. 10.

P.S. 마지막 소녀의 멘트가 귀엽고 천진하다.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다룬 바 있지만, 내가 알기에 사르트르는 상금마저 거부하지는 않았다(그 점을 나는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번 수상작인 <호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이미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에 작가로선 거들먹거리는(?)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문학상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신인문학상' 정도로 족한 게 아닌가 싶다. 대신에 상금은 '10유로' 정도.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학상의 권위와 함께 대중과의 교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제들이 빠질 경우에 모든 걸 '상금'으로 카바할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에 거액이 상금이 걸려있는 게 예외이긴 하지만...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얼른 검색되는 몇 권의 책들이다(물론 더 많은 수상작들이 번역/소개돼 있다. 알라딘에는 21권이 등록돼 있다). 이 중 파스칼 로즈의 <제로전투기>(열린책들, 1999)는 바로 책상맡에 있는 책이고 150여쪽밖에 안되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다(나도 어지간하다). 시간을 좀 내야겠다. 그나저나 <호의적인 사람들>도 아마 국내에 발빠르게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900쪽이 넘는 분량이라고 하니 역자(들)의 진을 뺄 만하다. 내년 하반기쯤에나 구경해볼 수 있을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6-11-10 20:46   좋아요 0 | URL
오웃. 퍼갑니다. ㅋ 문학상이라.. 가까이서 지켜보면 이것만큼 어리둥절한 것도 없지요 쩝;;

마노아 2006-11-10 22:49   좋아요 0 | URL
와, 기사도 좋았지만 코멘트도 역시 좋습니다^^

마태우스 2006-11-11 12:3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쿠르상을 거부한 미국 작가라, 으음. 전 그게프랑스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 줄 알았습니다. 글구 샤르트르의 거부 이유, 늘 궁금했는데 답이 여기 있군요!

마태우스 2006-11-11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다음주 '이주의 리뷰'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리뷰랑 적립금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게 거부 이유입니다. (다음주만 그렇다는 거구요, 그 다다음주는 괜찮습니다^^)

로쟈 2006-11-11 19:11   좋아요 0 | URL
'프랑스어'로 씌어진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은 거부하시더라도 상금은 다 챙기시길 바랍니다!(제가 보관해 드릴 수도 있구요)...

마태우스 2006-11-12 01:4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로쟈님 친절한 설명에 감사. 글구 바람구두님, 열심히 해서 다담주부턴 적립금 한번 타보겠습니다^^

테렌티우스 2007-07-30 23:26   좋아요 0 | URL
스트라스부르서 한국영화제할 때 오마이 뉴스 박영신 기자님이 너무도 좋게 글을 써주셔서 감동먹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제가 논문 제출하고 발표 기다리는 동안 바로 이 책을 불어 독해, 발표 준비한답시고 심심풀이 삼아(!) - 거의 900인가 1000페이지 되는 불어책을 겁도 없이! - 읽었는데, 나치 전쟁 범죄의 탁월한 소설판 백과사전이예요, 한 해의 공쿠르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둘 다 같이 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는 분명 타야만 했던 그런 책이지요(하나도 못 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만큼은).

문학적으로는 걸작은 아니더라도 수작임에 분명하고, 정치적으로 2차 대전 시기에 대하여는 올바르고, 오늘날엔 약간 애매할 수도 있는, 그런 글이지만, 알자스 출신의 주인공(아버지가 독일인, 어머니가 프랑스인) 법학 박사, 즉 지식인 장교를 주인공으로 출연시켜, 독자여 당신이 그때 태어났으면, 과연 어떤 '논리로'(감성이 아니라, '논리', 이게 이 소설의 미덕이자 핵심입니다, 중간에 환상 부분도 나름 탁월하고요) 세상을 살았겠는가 하는가... 라는 상투적 질문을 철저한 논리와 힙리성으로 무장시켜 - 가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적으로' -, 역설적으로 논증하는 뉴욕에 사는 이 젊은 미국인 유태인 소설가가 불어로 쓴 (어릴때 살았답니다...^^) 소설 데뷔작은 우리나라 출판시에도 상당한 논쟁과 흥미꺼리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합니다...

뱀발. 주인공이 일종의 행정, 정훈 장교로 각 파리, 베를린에서 러시아, 수용소, 장교 요양소(여기 나오는 언어학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예요, 조르주 뒤메질이 왔다가 울고갈(?) 박학을 보여줍니다)까지 각 전장을 돌아다니며, 아이히만, 괴벨스, 괴링(히틀러도 만나던가?)을 다 만나고, 전후 프랑스 국적을 위장 취득해 성공한 사업가로서 나름 행복한 오늘을 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이거 책 맨 첫 10쪽 안에 다 나오니 스포일러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 상식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주인공에 대해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여기 이런 표현을 써도 될라나?^^), "개자식!"

2007-07-30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밀린 원고 때문에 대학원 MT도 따라나서지 못하고 집안에 죽치고 있다. 이런 날은 적당한 긴장상태에 있게 되는데, 그러한 긴장에 맞멎는 '배짱' 때문에 한편으론 여유롭기까지 하다(그 배짱의 유일한 근거는 원고를 쓰지 못한다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며 여기저기 둘러보다가 '뒷북성' 기사를 읽게 됐는데,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란 학술쟁점 기사가 그것이고, 작년말 교수신문 기사이다(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교수신문에 자주 들락거리진 않았나 보다). '자료'의 가치가 있어서 보관해놓도록 한다.

교수신문(05. 12. 20) "대한제국의 모델은 러시아였다?"

대한제국의 개혁 모델이 '러시아'라는 특이한 주장이 제기되었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한국근대사)는 최근 출판된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선인 刊)란 책에 실린 한 논문에서 "대한제국의 국제는 그 전제성으로 볼 때 러시아 차르 체제를 모델로 삼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라는 논문에서 "대한제국이 추진한 황제권 강화는 민국이념을 계승한 것이라거나 중국의 천자나 일본의 천황제를 본떴다기보다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했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통계승설과 일본모방설에 강한 의구심을 표출했다.허 교수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할 위기에서 러시아에 기대어 등장한 황제국 대한제국의 모델이 제정 러시아였음은 자명하지 않을까?"라는 질문도 던진다.

그런데 이 정도의 문장으로라면 황제권이 강하다는 형태적 유사성, 정치활동을 억압했다는 식의 전권적 지배, 급할 때 도와준 강국의 국가지배체제를 당연히 본받지 않았겠느냐는 식의 추론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허 교수가 동원하는 것은 주한 러시아 공사 스파에르의 보고서가 전부다. 스파에르가 "고종의 충신인 척하면서 실제로는 여지없이 미국화 되어버린 서재필의 산물인 독립협회는 반러 활동을 전개하는 일본과 영국 공사관의 괴뢰"라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고종의 독립협회 해산에는 러시아 측의 암묵적 지지도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펼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이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 세력을 견제하고 대한제국으로 무사히 돌입할 수 있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방패막이 이상의 존재였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사료나 논리가 있어야 하는데 허 교수의 논문에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렇다면 이런 빈약한 근거로 왜 허 교수는 이런 무리한 주장을 펼치는 것일까. 그것은 교수신문에서 지난해 벌어졌던 '고종시대 논쟁'에서 '광무개혁'이 성공적이었다고 평하고, '대한제국'을 이끈 고종은 영정조의 민국이념을 계승한 개명군주라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이다. 고종이 밀려오는 외세에 대응해 동도서기론을 취했던 이유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고종은 서양의 입헌군주제나 입헌공화제에 대해 소상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섣불리 이를 모방하기보다 선왕들이 추구한 민국정치 이념을 계승해 실현하는 것이 훨씬 더 내실있는 왕정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허 교수는 "과연 군주 중심의 동도서기론적 대응이 민국이념이라는 자기역사의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었을까"라는 회의를 표한다. 그는 "민국이념을 계승하였다는 사진속의 고종황제는 어째서 차르의 복장을 입고 있는 것일까"라고 계속 따진다.

이 질문은 그럴싸한 측면이 없지 않다. 공식복장이 그랬다면 그것은 은연중 고종의 지향을 드러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교적 차원의 겉치레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또한 그간 대한제국의 성립에 영향을 준 국가모델을 명치유신을 거친 일본에 국한해서 논의해온 측면을 지적한 부분은 새로운 역사적 변수를 도입해 좀더 꼼꼼하고 종합적인 시야를 확보하자는 차원에서 받아들이면 의미가 있다.

하지만 허 교수는 대한제국의 러시아 모방설을 대한제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삼고 있어 아쉽다. 즉, 러시아는 모델로 삼을 만한 게 못된다는 것. 그는 이승만의 저서인 '독립졍신'에 러시아가 아주 저급한 국가로 취급되고 있는 걸 예로 들며 "당시 서구중심주의자들이 러시아를 반면교사"로 삼고 있었음에 비해, 고종은 그걸 몰랐다는 것이다. 그는 나아가 고종의 대한제국이 "비밀경찰이 사회 구석구석을 감시하는 보수적 반동 전제정치가 강화된 알렉산드리(*알렉산드르) 3세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식의 부조적 방식에 대해서는 '고종시대 논쟁' 중에 많은 비판이 있어왔다. 러시아의 도움을 받았고, 전제군주 등 유사성을 부각시켜서 무언가를 주장하는 방식은 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허 교수의 논문은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상황이나 내적 동기 등을 밝혀내지 못한채 단지 '왜 러시아는 논하지 않나'라는 착상에 의존하면서 유사성을 지나치게 발견하려고 노력한 듯한 흔적을 많이 보여준다.

결국 허 교수가 골인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근대국민국가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고종과 그 측근세력이 차르체제를 '잠재모델'로 만든 대한제국은 국민을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아니라, 백성을 신민으로 잠자게 하려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라고 지적한다.

이런 주장들에 대해 20년 가까이 대한제국 정치구조를 연구해온 서영희 한국산업대 교수(한국사)는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상당히 독특한 주장인데 나는 대한제국이 러시아를 모델로 삼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한국사) 또한 "읽지 않고 판단할 수 없다"는 전제를 달면서도 "만약 사료나 논리적 근거가 없다면 고려해볼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이 국민국가인가 아닌가에 대한 허 교수의 논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허 교수는 대한제국이 서구 근대국가의 일반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문명화의 정도, 통합기제의 유무, 국가간의 대등관계 등에서 볼 때 '택'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 대해서도 기본적으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한다. 명치 이래 일본의 문명개화는 "서구 근대와 일본 고대의 유착"이며 "서구근대가 오역, 날조된 것"이라는 시각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헌법과 의회, 삼권분립 등의 정체를 갖추고 있었기게 일본적 국민국가 정도는 된다는 주장을 한다.

비서구권의 역사진행을 서구와의 관련 속에서 파악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전근대와 근대의 틀 속에서 살펴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이제 '선택'과 '관점'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허 교수뿐 아니라 이 결여태를 상정하는 학자들은 비서구권 국가들이 '번역'이라는 방식을 통해 부족한 것을 보충하는 '캐치 업' 근대화를 걸어갔다고 보고 있다.

이 때 '번역'이라는 어휘는 역사적으로 볼 때 문명권에서 비문명권으로 지식이 흘러들어간 방식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번역'이라는 수사는 매우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번역=이식'이고, 더 세분화시켜봤자 번역->번안->통언어적 실천(토착화)인 셈이다. 하지만 서구와 비서구의 관계를 '미메시스'의 차원에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미메시스는 상호적인 것, 즉 상호모방이다. 번역에서는 원전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최고이지만, 미메시스는 그와 달리 원래의 대상에는 없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과정이 최종적인 과정으로 포함된다. 

물론 예술에서 주로 쓰이는 이 미메시스의 개념을 역사과정에 확장시켜 대입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겠으나, 서구의 결여태로서 비서구사를 규명하려는 논의구조가 왜 아포리아인지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기자의 아이디어는 책 한 권을 쓸 만한 주장이다. '무리'가 아닌 걸 보여준다면 주목할 만한 업적이 되지 않을까?).

대한제국이 '진정한' 근대국민국가가 아니었다고 결론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건 대한제국이 진정한 국민국가라는 주장이 대세를 이룰 때 그 반박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서구와 역사과정이 다르고, 국가 구성원들의 사회화과정, 교육정도 등에서 큰 차이가 있는 조선이라는 특수한 왕조가 어찌어찌 당시의 대세를 따라 국체를 바꿔보려 했었던들 어찌 '진정한' 서구를 이루었을 것인가가 진정한 의문이다.

차라리 "외세가 없었다면 대한제국은 어떤 제3의 길을 걸어갔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게 그나마 과거사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으로서 훨씬 인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따라서 대한제국이 일본, 러시아와 청국, 미국 등 어느 한 나라를 모델로 삼았다는 주장을 하기 전에, 조선이라는 그릇에 이들을 해체재구성하는 혼성모방을 선택했다고 보는 게 손쉬우면서도 역사적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강성민 기자)

06. 11. 10.

 

 

 

 

P.S. 허동현 교수는 박노자 교수와의 역사 대담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역사학자이다. 그 대담에서는 '건강한 보수주의자'의 역할을 맡았었다. 이 '쟁점'에서도 시사받을 수 있지만,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있어서 러시아는 빼놓을 수 없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비중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 러시아쪽 사료들을 검토/분석할 수 있는 연구자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으로 안다. 국문학도/국사학도들이 일본과 중국쪽 사료 못지 않게 러시아쪽 사료들도 참조할 수 있도록 하는 지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히나 해방공간에 관한 사료들이 그러한데) 우리가 몰랐던 우리 자신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건 아닌가...

P.S.2. 동향기사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반론도 게재되었던 걸 뒤늦게 발견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 마저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6. 01. 06) ‘강한 주장 약한 사료’(교수신문 제384호)에 답한다

제정 러시아의 차르체제가 대한제국 광무황제가 꿈꾼 개혁모델이었다는 필자의 견해(「대한제국의 모델로서의 러시아」, 『러일전쟁과 동북아의 변화』, 선인, 2005)에 대해 “강한 주장을 뒷받침하기에는 사료적 근거가 취약하다“는 강성민 기자의 논평은 정당하다. 허나 대한제국의 역사적 성격에 대한 기존 연구 모두가 이러한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가설의 등장은 역사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증진시켜준다는 점에서 환영할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기존의 연구는 개화파, 농민(민중), 국왕, 그리고 일본 중 누구를 근대 개혁의 주체로 보느냐에 따라 대한제국에 대한 평가를 달리한다. “광무개혁”의 실재를 부정하는 신용하 교수는 개화파를, “광무개혁”은 호평하면서도 대한제국은 “의사절대왕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김용섭 교수는 농민을, 대한제국이 주체적 근대 국민국가였다고 본 이태진 교수는 국왕을,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에서 “광무개혁”의 근대성을 부정한 이영훈 교수는 일본을 근대화의 주체로 본다. 강 기자의 논평에 힘을 실어 준 서영희 ․ 주진오 교수는 어떤 입장일까? 서 교수는 국왕을, 주 교수는 농민을 개혁의 주체로 보는 쪽에 서있는 것 같다.

시민사회와 산업화를 이룬 오늘 그 “발전”의 뿌리를 놓고 한국사학계의 내재적 발전론과 경제사학계의 식민지근대화론이 평행선을 달린다. 외세를 배격한 민족의 자주를 강조하는 대한제국 높이기는 과거사에 대한 성찰일까? 망국의 책임을 일본에 떠넘기는 과오 감추기라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그렇다고 개화기의 근대화 노력을 외면하며 오늘 우리가 이룬 경제성장의 뿌리를 식민지 시대에서 찾는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대한제국 때리기도 정당하지는 않은 것 같다.  

종래 연구 동향을 일별할 때, 필자가 품은 의문은 다음과 같다. “급진” 개화파는 일본을, “온건” 개화파는 중국을, 친미 개화파는 미국을 근대화의 모델로 삼았을 뿐 아니라 그 힘을 빌리려 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반면 고종과 주변세력은 갑신정변 실패이후 청국을, 그리고 아관파천 이후 러일전쟁 전까지 일본을 막기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 왜 그들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만 하고 러시아를 개혁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일본이 자국의 제도를 모델로 한 갑오경장을 유도했듯이, 러시아도 삼국간섭 이후 자국을 모델로 한 조선의 개혁을 이끌어 내려하지는 않았을까? 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민족”과 “자주”를 오용하는 국수적 성격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 띠우기에 보이는 맹점을 지적하려는 데 그 주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잠정적 결론 하나는 대한제국은 그 개혁모델로 러시아의 차르체제를 참용하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엄밀히 말하자면 일본과 러시아 사이의 힘의 균형 위에서 연명하던 허울만 남은 제국인 대한제국은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은 추후 실증적 작업이 뒷받침될 때 좀 더 설득력을 얻는다. 최근 필자는 웨베르 주한 러시아공사가 아관파천 때 의정부를 다시 설치한 것에 대해 "고종이 러시아의 국무회의(Gosudarstvennyi Sovet) 절목을 참고하여 부활시켰다"고 보고한 러시아 문서를 찾았다. “강한 주장”을 입증하는 충실한 사료가 앞으로 속속 발견될 전망이다.

허나 필자는 비서구권의 역사를 “근대의 결여태”로 보았다는 비판에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졸고가 개화기 한국이 근대화에 실패한 원인을 찾다보니 결과적으로 이미 시효가 끝난 "근대화 예정론"에 불과하다고 평한다면 수긍이 간다. 물론 근대화란 역사적 필수가 아닌 하나의 가능성 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근대 기획의 문제는 근대 자체를 비판하여 넘어서려는 탈근대의 문제와 구별되어야 할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근대 기획―식민지 근대 극복과 하나 되는 국민국가 수립―은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傳言만으로 一針을 주신 주진오, 서영희 교수께 감히 졸고 일독 후 가편을 청한다.(허동현 / 경희대·한국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6-11-10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어요.(>_<)

로쟈 2006-11-10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추신을 덧붙였습니다.
 

이 '사이버과시족'에 관한 기사가 어제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였는데(요즘 가장 다이내믹한 신문이다), 생각을 더 보태서 옮겨놓을까 하다가 일단은 자료로서 스크랩해놓는다. 그냥은 멋쩍으니까 나대로의 '과시'를 덧붙이자면 '인정'과 '인정투쟁'에 관한 책들을 이 참에 읽어보시라는 것. 그게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까지 이어지면 과시란 것도 전혀 만만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경향신문(06. 11. 09)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백승찬 기자)

06. 11. 10.

P.S. 마지막에 '외로우니까'란 멘트는 감상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틱한 것이지만 문제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정'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면서 존립/존재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한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애니멀'이다...

P.S.2. '인터넷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화학자의 진단을 덧붙인다. 같은 기획기사의 하나이다.

경향신문(06. 11. 09)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t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하지만 이 '행복'은 쾌락원칙의 경제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 경제를 넘어선, 주이상스 곧 향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때로 인생을 망치고 거덜낸다. '자기도취'의 이면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itournelle 2007-02-01 02:28   좋아요 0 | URL
로자님은 사회학적 통찰력도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로쟈 2006-11-10 15:11   좋아요 0 | URL
그 '통찰'은 제게 아닌데요. 저는 퍼오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로쟈'입니다.^^

비로그인 2006-11-10 15:27   좋아요 0 | URL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읽히시던가요? 대단하군요...저는 책을 집어 던지려다가 사뿐히 내려놓았습니다^^

로쟈 2006-11-10 15:44   좋아요 0 | URL
'전혀 만만하지 않다'고 했습니다!(사실 새로 나온 번역은 아직 구입하지도 못했습니다.^^;)

기인 2006-11-10 18:53   좋아요 0 | URL
호옴 퍼갑니다 :)
 

며칠전 새로나온 책들을 검색하다가 괴테(1749-1832)의 <서동시집>(문학과지성사, 2006) 완역본이 출간된 걸 알게 됐다. 지난 2002년에도 <서동시집>(시와진실)이라고 출간된 적이 있지만, 분량으로 보아 완역은 아니었던 듯싶다. 마땅한 리뷰가 올라오길 기다렸는데, 마침 서울신문의 리뷰 기사가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페이퍼의 제목을 '괴테와 하이젠베르크'라고 단 것은 <서동시집>이 연상시켜주는 이름이 단연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학부시절에 읽은 이 책에서 유일하게, 그리고 가장 인상 깊게 기억에 남아있는 대목은 젊은 시절에 그가 독일의 휴양지에서 양자역학에 몰두하고 있었을 즈음에 대한 회상이었다. "잠은 조금도 자지 않았다. 하루의 삼분의 일은 양자역학 계산을 했고 삼분의 일은 바위에 기어올라갔으며, 삼분의 일은 괴테의 <서동시집>을 외웠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잠은 조금도 자지 않았다!), 여하튼 이 물리학자의 고백이 그러하며 <서동시집>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 대목에서 결정되었다. 해서 올해 출간된 새 <괴테 자서전>과 새 번역 <파우스트>들과 함께 <서동시집>의 출간은 '한국어 괴테'의 귀중한 성과이면서 개인적인 반가움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이젠베르크식으로 이 책을 읽는 건 곤란하겠지만(어느 바위산을 기어올라야 하나?).

소개에 따르면, <서동시집>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주창한 '세계 문학'의 이념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간 시집"으로서 "헤겔이 '괴테의 저작 가운데 가장 완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으로 꼽은 바 있다. 괴테의 '세계 문학' 이념은 각 민족이 지니고 있는 개별성을 존중함과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 의의를 둔다. <서동 시집>은 괴테가 아랍 세계와 서구에 큰 영향을 끼친 페르시아의 대시인 하피스에게 보내는 시적 응답이라 할 수 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극심한 분열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괴테는 당시 독일어로 번역, 출간된 하피스의 시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고, 거기에 창조적으로 대응하고 싶은 강한 창작 의욕을 느꼈던 것."

"괴테는 시의 주제와 형식면에서 하피스를 모방하면서도 새로운 형식 실험을 시도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새로운 것과 낯선 것을 받아들여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내적 조화를 만들어냄으로써 민족 간의 이해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이 살아 숨 쉰다. 모두 239편의 시를 12개의 시편(Buch)에 나누어 묶은 연작시 형식이다. 번역은 한국괴테학회 산하 단체인 괴테 독회 회원 17명이 공동으로 작업했다. 6년에 걸친 토론을 통해 번역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최종적으로 대표 번역자인 한국괴테학회 회장 안문영 교수가 통일된 문체로 조율하였다." 하여, 노작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아래는 리뷰 기사이다. 이번에 알게 된 건 '서동시집 오케스트라'의 존재인데, 사실 '서동시집'을 영어로 검색해보면 대부분의 이미지는 이 오케스트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바렌보임과 사이드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생각의나무, 2003)에 관련내용이 나와있을지 모르겠다.

 

서울신문(06. 11. 10) 괴테, 순수한 동방을 노래했다

“북쪽, 서쪽, 남쪽이 산산조각 나고/왕좌들은 부서져 왕국마다 떨고 있으니/달아나라 그대여, 순수한 동방에서/옛 족장들의 숨결을 맛보아라/사랑과 술과 노래 더불어/키저의 샘물이 그대를 젊게 하리니.” 독일의 문호괴테가 쓴 ‘헤지르’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헤지르는 마호메트가 기원 622년 고향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이주해 이슬람의 기원을 세운 사건을 가리키는 아랍어 ‘헤지라’를 프랑스어로 옮긴 것. 괴테는 아랍 문화가 프랑스를 통해 유입됐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프랑스어 번역을 택했다.

괴테는 일찍이 ‘세계문학’을 주창했다. 문학이란 모름지기 각 민족이 지닌 개별성을 존중하는 한편 인류의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세계를 체험하고 이해하는 데 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괴테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글을 썼다.‘서동(西東) 시집’(안문영 등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은 괴테의 그런 문학관이 그대로 녹아 있는 세계문학의 모델이 될 만한 작품이다.

괴테는 근대 유럽이 마지막으로 낳은 ‘보편적 천재’, 근대 최고의 교양인으로 불린다. 시·소설·희곡 등 문학 장르에서 뿐만 아니라 해부학·광학·식물학·광물학 등 자연과학 부문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게르만적이고 현학적인 자만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으로서의 시각을 얻기 위해 괴테는 이슬람 세계와 중국은 물론, 한국에 대해서도 적잖은 관심을 기울였다.

‘서동 시집’은 괴테가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스의 시들을 읽고 감흥받아 지은 연작시 형태의 시집이다. 239편의 시가 12개의 시편으로 나뉘어 묶였다.‘서동’은 유럽과 동양의 세계를 아우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 괴테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국수적인 민족주의로 인해 유럽이 극심한 분열에 빠진 데 대해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 때 읽은 하피스의 순결한 시들은 괴테로 하여금 내면의 원기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할 만큼 충분히 감동적인 것이었다. 노시인의 눈에 비친 동방 세계는 신과 족장의 권위를 경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자유분방한 시인의 노래를 사랑할 줄 아는 순수의 땅 그 자체였다.‘서동 시집’은 그처럼 젊고 순수한 동방에 대한 찬가다.

“존경하는 마음으로/그대의 질문에 답하노라/내가 복 받은 기억력 덕분에/‘코란’이 명한 유언을/고스란히 간직하고/경건한 자세를 지녀/평범한 일상의 해악이/나뿐만 아니라/선지자들의 말씀과 그 씨앗을/소중히 여기는 자들을 건드리지 못하므로/내게 그런 이름을 주었노라.”(‘하피스’중에서) 아랍어로 하피스는 ‘코란’을 완전히 외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새롭고 낯선 문화를 받아들여 내적인 조화를 이룩하고 민족간의 이해를 도모하려는 드넓은 포용의 정신이 전편에 넘쳐 흐른다.

괴테는 동방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매우 개방적이고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마르코폴로를 비롯해 하피스의 시를 번역한 폰 하머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왜곡된’ 동방수용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괴테의 이 같은 깨어 있는 의식은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1998년 유대 출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석학 에드워드 사이드가 유대·아랍 민족간의 화합을 위해 만든 오케스트라의 이름을 ‘서동 시집 오케스트라’라고 지은 것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책에는 괴테가 ‘서동 시집’에 실린 시들의 내용과 문체가 당시 독자들에게 낯설게 비칠 것을 염려해 지은 ‘서동 시집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메모와 논고’도 함께 실려 있어 관심을 모은다.(김종면 기자)

06. 11. 1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MOKE 2006-11-13 22:51   좋아요 0 | URL
이번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책과 달리 요전에 나왔던 시와 진실판은 괴테가 직접 쓴 '[서동시집]의 더 나은 이해를 위한 메모와 논고'가 빠진 채 시만 번역되어있습니다. 번역은 의역과 직역의 차이인지, 개인번역과 공동번역의 차이인지, 잘 모르겠지만 시와 진실판이 부드럽고 훨씬 시다운 번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쟈 2006-11-13 23:37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라면, 좀 유감스러운 일인데요. 더 나중에 출간된 책에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한국괴테학회의 역량이 반영된 책이라고 해서 기대를 갖고 있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