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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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6 15:31   좋아요 0 | URL
ㅎㅎ 전 얼마 전에 헌책방에 들렀다가
[옛사람 59인의 공부 산책]이란 책을 구입했서 보았죠.
물론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뭐랄까, 공부하는 것에 대한 마음가짐을 다잡아준다고나 할까.

로쟈 2006-11-16 15:38   좋아요 0 | URL

이 책이군요. 사실, 공부가 '속'은 제일 편합니다. 공부만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가 어려울 따름이지요...


기인 2006-11-16 18:29   좋아요 0 | URL
아, 제가 부러워하는 인물 장정일. 그는 역시 또 변신 중이었군요. ㅎ
하일지라는 반가운 이름도 보이네요. 요즘은 뭐 하시는지.. 장정일과 하일지. :)

파란여우 2006-11-16 21:22   좋아요 0 | URL
장정일 독서일기중 1권의 표지가 가장 재밌죠. 오리가 뒤뚱뒤뚱 꽥꽥!
그러고 보니 칸트와 오리 너구리가 생각납니다만.
장정일의 열혈팬으로써 공부 당연히 사야죠!

로쟈 2006-11-16 21:30   좋아요 0 | URL

이 책이죠. 휴학하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시절에 처음 나온 듯합니다. 절반 이상은 제가 안 읽을 책들을 대신 읽어줘서 고맙기도 했죠.^^

 

'글쓰기 분량'에 대해 몇 자 적으려다가 제목을 '글쓰기 분량과 글쓰기 장애'로 바꾼다. '글쓰기 장애' 때문이다. 책에 관해서라면 남못지 않게 수다스러운 내가 '글쓰기 장애'를 갖고 있다면 의외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특이한 '장애'를 갖고 있다. '특이'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장애가 '첫문장 쓰기' 장애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페이퍼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공식적인' 종류의 글쓰기에 있어서 내가 가장 애를 먹는 것은 마땅한 제목을 붙이고 첫문장을 쓰는 것이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글의 절반 이상은 씌어진 셈이 되지만, 반대로 그게 잘 안되면 소위 '먹통'이 된다. '글쓰기 블록'과 '하이퍼그라피아'가 특이하게 결합돼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아직 치료를 요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여하튼 최근에 이 장애 때문에 계속 애를 먹고 있다. '만만한' 페이퍼들만 애꿎게도 계속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교수신문(06. 11. 14)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한 교수에게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돌렸다가 바로 내렸다. “이번 달에 고정칼럼 합쳐서 20편 썼다”란 말에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장장급’ 칼럼니스트들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생태론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요즘 거의 3일에 한편 꼴로 글을 생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FTA, 부동산·재개발 같은 ‘사건’을 자꾸 터뜨리기 때문인데, 어떻게 저런 노동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글을 통해 복잡한 사안들을 분석, 처방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홍성태·이해영·서동만, 문화계열의 고병권, 과학의 정재승·이덕환 같은 이름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메이커’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독자와 얼굴 맞추는 빈도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나중엔 풍경이 돼버린다.

물론 물량공세가 질적 전화를 이루기도 한다. 요즘 고명철 광운대 교수의 글이 “좋아졌다”는 평들이 오간다. 한 때 막노동 하듯이 평론을 쓴 결과라는 게 나름의 원인분석. 평론처럼 호흡이 긴 글을 한 달에 2~3편씩 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글 속에 유야무야한 부분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각과 성찰성이 개발되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발표한 고 교수의 글은 좋은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 달에 학술대회 발제문만 2편을 쓰고, 신문칼럼을 매주 4회 쓴다. 홍 교수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글쓰기는 운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구호와도 같아 반복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만 글은 퍼석거릴 수밖에 없다. 학자나 전문가의 내공이 실리기보다 특유의 관점과 스타일 속에 담궜다가 꺼내는 정도의 글이다. 과연 이런 글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 요즘 지면이 대폭 늘어난 문학평론이나 소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형식, 어떻게 말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없이 점조직처럼 부지런히 거점만 이동한다. 마치 간첩처럼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그저 말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장식들이 뒤죽박죽 돼 있는 평론들은 글쓰기를 힘겨운 노동으로, 프로필과 원고료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제도화시킨다.

평자들이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계간지 마감이 있는 달은 6~7편까지 편수가 올라간다. 이 중 절반은 인간관계 때문에 쓰고 원고료는 80매에 8만원. 고 씨는 “노동이라 하면 슬퍼지죠. 노동은 팔려고 하는 건데요, 판다고 생각하진 않구요. 저는 그냥 일(業)이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노동이든 일이든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서 힘겹다는 이미지를 벗겨낼 순 없을까. 롤랑 바르트는 일본에 다녀와서 ‘기호의 제국’을 펴냈다. 그는 일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에게 글쓰는 재미를 줬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구조주의를 통해 당시 범람하던 역사주의를 패퇴시킨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글쓰기의 목적을 어떻게 그것의 즐거움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선회시켰다. 그가 실험한 독특한 자서전,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는 감이 선명한 에세이들을 보면 오늘날 문필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만족의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한 문학평론가는 “늘 머리 속에는 그럴듯한 책 한권을 꿈꾸고 설계하지만 공부하다가 볼 일 다보고 정작 쓰지는 못한다”라고 털어놓는다. 꿈꾸는 동시에 쓸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 ‘연재’의 형식일 것인데, 잡지 편집위원 급이 아니면 좀처럼 이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정말 ‘연재스러운’ 낡은 에세이식 주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연재가 필요한 글은 통상적인 연재 포맷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문연구나 장편 주제론·작가론 같은 것이 아닐까. 가까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마치 존재의 끈처럼 기능을 하는 그런 연재글 말이다.(강성민 기자)

06. 11. 15-16.

 

 

 

 

P.S. 청탁받은 원고들을 계속 펑크내면서 '글쓰기의 분량'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교수신문의 기사에 눈길이 간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차'라는 게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더 많이 쓰거나 더 많이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능력을 배가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분량을 축소시켜야 하는가. 욕심은 많지만 인생만큼 욕심대로 잘 안되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글쓰기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고통과 나란하다). 문득 두어 달 전에 읽고 스크랩해놓은 칼럼이 생각난다.

문화일보(06. 09. 12) 글쓰기 장애

연세대에서 11, 12일 열리고 있는 노벨포럼 참석차 한국에 온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머리 겔만(77). 15세에 예일대에 입 학하고 21세에 박사가 된 천재다. 유명한 ‘쿼크’이론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본업인 물리학뿐 아니라 언어학·역사학·고고학·생태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9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분명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知性)이다.

한때 언어학자를 지망했을 만큼 언어감각이 탁월한 겔만에게 ‘글쓰기 장애’가 있다는 건 역설에 가깝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 들이 ‘영예의 의무’로 여기는 수상논문집에 글을 올리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더라도 자신의 지식창고에서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는 데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의도와 달리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을 ‘블록현상(writer’s block)’이라고 한다. 마감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글은 한 줄의 진척 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밥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지만 다가가면 글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만다. 머리를 쥐어뜯고, 방을 들락거리고, 그나마 몇 자 쓴 종이를 찢어버리고…. 글쓰기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찰스 디킨스도 “가족에게는 괴물이요, 나 자신에게는 공포”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글을 못쓰는 고통만이 글쓰기 장애는 아니다. 블록현상과는 거꾸로 식음을 거르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써대는 유형도 있다.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이런 글쓰기 중독증을 표현하는 의학용어다. “컴퓨터 자판이나 빈 종이를 보면 마약을 본 마약 중독자 같은 쾌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면 하이퍼그라피아다. 평생 9만 8721통의 편지를 썼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루이스 캐럴, 수많은 글을 언론에 발표했던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개인 홈피·블로그가 확산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글쓰기 마니아들이 넘쳐나고 있다. 요즘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봐도 그걸 느낀다. 비서진이 “일은 언제 하느냐”는 걱정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인 글을 쏟아내고 있다. 표현도 거침이 없다. 정책을 널리 알리겠다는 충정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은 블록상태인데 참모진은 하이퍼그라피아에 빠진 듯한 부조화가 마음에 걸린다.(김회평 논설위원)

 
 
 
 
 
 
 
 
P.S.2. 하이퍼그라피아, 곧 '글쓰기 중독증' 환자로 분류된 루이스 캐롤과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책들이 최근에 또 출간됐다.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와 <산업사회외 그 미래>로 제목이 바뀐 게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무려나 너무 안 써져도 너무 잘 써져도 문제가 되는 '글쓰기 나라' 또한 '신기한 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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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17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동병상련'이란 말을 이런 때 쓰는 것이죠? 서로의 위로와 치유도 각각 따로 노는 것인지 걱정됩니다.^^;

2006-11-1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런! 이거 무슨 헤어진 가족상봉 장면 같군요.^^
 

'세계의 책'이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식을 제일 처음 다루게 됐다. 아침신문에 관련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가 아니라 '밀란 쿤델라'여서 잠시 놀랐다. 이게 어찌된 표기인지 모르겠는데, 'Milan Kundera'가 어떤 원칙에 의해서 '밀란 쿤델라'로 표기되는 것일까?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송두율 교수의 한 칼럼에도 '밀란 쿤델라'의 <느림>이 언급되고 있다. 'Milan Kundela'라고까지 병기하면서. 이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관계 같은 것도 아니고 (무지의 소치로 보이지만) 여하튼 재미있는 일이다. 기사는 원문 그대로 옮겨온다.  

경향신문(06. 11. 15) 쿤델라 ‘참을 수 없는…’ 22년만에 解禁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델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출간 22년 만에 고국에서 금서(禁書)의 꼬리표를 떼었다. 영국 더타임스는 1984년 출간된 쿤델라의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가 체코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14일 보도했다. 이 소설은 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했으며,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시가 주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체코에서는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다.

쿤델라는 29년 체코 브르노 출생으로 ‘프라하의 봄’ 이전에 소설 ‘농담’ 등을 발표해 이미 유럽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가 옛 소련 군대에 의해 체코 민족의 자주 욕구가 짓밟힌 이후 공산당에서 출당당하고 출판도 금지당했다. 75년 파리로 망명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체코 공산정부는 79년 쿤델라의 국적을 박탈했고, 쿤델라는 81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불어로 출판됐다. 체코 독자들은 따라서 모국어로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최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모국어판 출간이 지연된 것은 작가가 일부 내용을 새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체코어로 된 원본이 부분 멸실됐기 때문에 쿤델라는 프랑스어판을 보고 체코어로 재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어판을 보고 체코어 원본을 새로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작가적인 욕심 또한 개입돼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했다.

쿤델라의 출판 대리인은 “번역하고, 고치고, 가필하는 일을 작가가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마침내 체코어판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체코어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분명 기존 책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쿤델라는 체코어판 후기에서 “나는 어떠한 미비점이나 실수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며 “즉 다른 말로 하면 완벽한 최종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 이 일에 매달려 마무리할 시간이 앞으로는 없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체코어판은 지난달 출간 이후 하루에 100권가량 팔리고 있다. 이 책은 인간실존을 철학적으로 성찰한 것 외에 정치적 의도도 담겼다는 해석에 쿤델라는 “결코 정치적 메시지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저 하나의 소설, 아무것도 아닌 소설로 읽어달라”는 게 쿤델라의 주문이다.(안치용기자)

06. 11. 15.

P.S. 체코어판의 이미지를 찾지 못했다. 나는 러시아어판을 갖고 있는데, 문득 새롭게 읽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우리 존재의 가벼움은 아직 참을 만한 수준인가?..

 

 

 

 

P.S.2. 내가 알기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최소한 세 가지 버전의 국역본이 있다. 먼저 가장 먼저 나온 송동준 교수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988)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전재된 장편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다(내가 작품을 처음 접한 것도 이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 송동준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들은 바로는 역자가 '학력고사'  출제위원으로 감금생활을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해본 것이라고 한다(본래 브레히트 전공자인 역자의 최고 '히트작'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쿤데라이다).

그리고 두번째 번역은 중앙일보사의 소련동구문학전집의 한권으로 나온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중앙일보사, 1990)이다. 보흐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와 한권으로 같이 묶여 나왔는데, 체코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번역이다(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한국외대출판부, 1995)로 재출간됐다). 체코어본으로부터의 번역으로 알고 있는데, 기사를 읽고 나서 문득 그 '체코어본'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알고보니, 파리에서 출간된 체코어본이다). 한때 알고 지냈던 체코 여성과 자주 만난 적이 있고, 만날 때마다 주된 화제는 카프카와 쿤데라였다(그녀가 체코어본을 읽은 건지 영어본을 읽은 건지 헷갈린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이 이재룡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2001)이다. 이건 불어본의 번역이다. 프랑스에 체류중인 쿤데라가 불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어느새 불어본이 '원본'을 대신하게 됐다. 이번에 다시 출간된 체코어본이 국내에 새롭게 소개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쿤데라의 이 대표작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어 쿤데라'는 풍요롭다.

그리고 끝으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러시아어로 대부분 번역돼 있는 그의 책들을 다 구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억에는 네댓 권 정도를 사둔 듯하다. 이번 겨울에 국역본과 함께 같이 읽어볼까 궁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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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1-15 09:33   좋아요 0 | URL
쿤데라...

제가 가장 사랑하는...과거에 가장 사랑했고.....앞으로도 그 사랑을 뛰어넘을만한 작가를 만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작가입니다.
아니...지금 그의 책을 읽어도...20대 초반 가슴 설레며 온통 몰두했던 그 열정으로 쿤데라의 책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듯 해요...

그의 소설들....plot...주인공...배경...메시지....대사들...은유와 비유...사소한 배경 묘사...그가 끌어들이고 소개한 역사적, 철학적, 예술적 지식의 조각들...하다못해 음악이나 그림에 대한 그의 취향까지도...

마치 갓난 아기가 엄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듯,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통째로..완전히...제게 흡수되고 동화되었죠...
I've got him under my skin............그런 느낌......

심지어..많은 논란이 되었던..중역과 오역으로 얼룩진 그의 작품들의 번역문조차...제게는 친근하고 정답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오역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조차...먼가...이국적이고 아련하고 신비스럽게 다가왔다는 코믹한 상황...ㅡ,.ㅡ
쿤데라 작품에서 주인공이...히틀러의 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향수와 정다움을 느꼈던 도덕적 도치상태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0^

쿤데라가...세상을 떠나기 전에...잊지못할 선물을 하나 남겨주었으면(새로운 소설..젊은 시절의 필력에 못지 않은 작품..)하는 소망이 있었는데...음...마지막 불꽃을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체코어 복간(?)에 쏟으셨군요...

사실 후기작들은 기대에 조금 못미친것도 사실입니다. 전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농담, 생은 다른 곳에(제 서재 이름..)...다 좋구요...개인적으로 "웃음과 망각의 책"에도 아주 많은 애정을 느낍니다.....

로쟈 2006-11-15 11:19   좋아요 0 | URL
페이퍼의 내용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사이에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저도 최근에 그의 책들을 읽을 수가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였습니다. 얼마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신작 에세이집만큼은 빨리 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겨울에 한번 다시 읽어볼까 궁리중입니다...

수유 2006-11-15 16:51   좋아요 0 | URL
그 참.. 쿤델라라...^^ 얼른 보충하셔요..

sommer 2006-11-16 00:52   좋아요 0 | URL
저도 경향신문 기사를 읽다가 '쿤델라'가 '만델라'처럼 읽혀지는 걸 경험했답니다. ^^ 지젝의 'parallax view'에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의 장이 포함되어 있더군요...아마도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로쟈 2006-11-16 14:26   좋아요 0 | URL
지젝의 절제목은 '신성한 똥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군요.^^

기인 2006-12-16 00:21   좋아요 0 | URL
ㅋ 땡스투하고 갑니다. 체코 1월말에 일주일정도 다녀올 예정인데 그 김에 다시 읽어보려고요. ㅎ 예전 로쟈님이 다른 페이퍼에도 썼지만, 체코인들은 쿤데라 안 좋아하지만서두 ^^; 우리(?)야 체코하면 카프카와 쿤데라 아니겠어요. 'ㅋㅋ'네요. ㅎ

로쟈 2006-12-16 00:47   좋아요 0 | URL
아니 무슨 공익이 해외출장을 다 가나요?!..

기인 2006-12-20 22:11   좋아요 0 | URL
공익을 위해서입니다. ㅋ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가 번역돼 나왔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론 원서를 이미 작년에 구해서 몇 페이지을 읽어보았다. 물론 그 정도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포함된 시리즈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그 시리즈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Critical Thinkers'를 말하는데, 인문서 출간 동향에 까막눈이 아닌 독자라면 도서출판 앨피에서 나오는 이 시리즈의 책들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시작한 시리즈 말이다. 한데, <라캉 읽기>는 뭐냐고? 그게 아마도 앨피에서 시리즈의 판권을 다 확보하지는 못한 탓으로 보이는데,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과 같은 사정이 아닐까 싶다.

저자인 숀 호머는 이미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이l란 입문서가 소개된 바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이전에 페이퍼로 올린 적이 있다), 현재는 자리를 옮긴 것으로 돼 있지만 영국 셰필드 대학의 정신치료연구센터의 교수로 재직한 바 있고, 내가 알기에 역자인 김서영씨는 호머 교수의 지도하에 라캉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러니까 역자로서는 최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에 대한 기대를 가져봄 직하지 않을까?

소개에 따르면, 책은 "우리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한 사상가의 핵심적 이론과 논리를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이상적 개론서. 지난 30년간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라캉의 중심개념들을 그 개념의 배경과 맥락을 따라 쉽게 기술했다. 지은이는 임상분석가가 아닌 문화이론가의 시각에서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인 정체성의 정치학에 의해 수없이 비판받아온 라캉의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라캉의 업적과 사상이 현재의 주체성에 관한 논쟁에 일조할 수 있는지 독자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책 전반에 걸쳐 자크 알랭 밀레와 브루스 핑크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라캉주의자들의 다른 문헌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 그토록 어렵다는 '라캉 읽기',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보자. 읽다 보면 <라캉으로 쇠라 읽기>(애플트리태일즈, 2006) 같은 책도 더이상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자크 라캉을 미워하는가?..

06.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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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5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갑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한번 놓으면 왠지 다시 다가서기 애매한 그 이름. ^^;

로쟈 2006-11-1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이 공익의 교양은 다 책임지시는군요.^^

조선인 2006-11-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아무리 쉬운 책이라고 해도 너무 어려워요. =3=3=3

로쟈 2006-11-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라캉 입문서'들과 비교하셔야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6-11-1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분 약력을 보니 생물교육 전공하신 후에 영국에서 정신분석 공부하셨네요.
저렇게 비 인문학 계열 전공하고서 바로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을 수가 있나요?
저도 의대 나온 후에 정신 분석을 공부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해외에서 박사과정은 수료하고 싶거든요. (그 다음에 한국에서 공중보건의 하면서 공부한 후에 다시 외국에서 1년 정도 가서 학위 받고 국내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로쟈 2006-11-1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정신분석이 라캉 정신분석이신지요? 영미식 정신의학과는 계보가 다른지라...

수유 2006-11-1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라캉으로 쇠라읽기>가 있네요^^
앗 그러고보니 책방에서 본 책이네요..^^

깽돌이 2006-11-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가 만든) 국제정신분석학회에는 자아심리학,자기심리학,대상관계이론파 이렇게 세 파벌(?)이 동거하는 것 같습니다(미국은 자아심리학,영국은 대상관계학파,남미는 클라인 학파가 발달했다고 합니다).이 계보에서 융과 라캉이 벗어나는데 라캉 임상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영미분석철학, 대륙철학 식으로 분류되는것 같지는 않은 듯 해서.한국 라캉학회사이트 구경했었는데 거기 의사샘들이 라캉식으로 임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 분은 오역의 쓰나미로 유명하고...그냥 연구스터디모임인 것 같네요.

2006-11-16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라캉 입문서에 따르면, 주류 정신분석학이 1만명, 라캉식 정신분석학(프랑스, 스페인, 남미 등)이 1만명 정도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더군요...
 

지난주에 소개된 신간 소설들 가운데 눈길을 끈 건 폴란드 출신의 유태계 미국작가 저지 코진스키(1933-1991)의 문제작(이라는) <페인트로 얼룩진 새>(문예출판사, 2006)이다. 이미 번역된 <편력>(웅진출판, 1995)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미국문학 개론서나 일부 소설들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가령,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

 

 

 

 

소개에 따르면,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자전적 소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 고통스럽고 잔인한 이야기이다. 1965년 처음 출간되어,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 꼽혀왔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건 아래의 리뷰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참고로 번역자는 안정효 선생이다.   

한국일보(06. 11. 11) '페인트로 얼룩진 새' 동족에게 온정을 기대하지 마!

동유럽의 어느 시골에는 마을 사람들이 새를 잡아다 깃털에 색칠을 한 다음 같은 새의 무리로 되돌려보내는 풍습이 있다.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새는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애정과 보호를 기대하며 무리로 돌아가지만, 무리는 그 새를 낯선 적으로 착각해 집단공격을 가한다. 동족을 마구 공격해 찢어죽이는 새들. 이 잔혹한 장면을 즐기는 인간들의 놀이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1965년 소설 <페인트로 얼룩진 새(The Painted Bird)>의 모티프다.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은 유태인 학살로 고아가 된 여섯 살 소년을 동물로 키운다. 소설은 이 소년이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겪은 고통스런 성장의 기록이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이어가는 소년은 가학적인 농민들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하며 쫓기고, 갖은 노동에 착취당하며, 성적으로도 학대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기지와 재치, 거짓말과 술수를 익힐 수밖에 없다. “당하고만 살던 때는 지났다. 선의 신봉과, 기도와, 제단과, 성직자들과, 하느님의 힘은 나에게서 언어를 박탈했다.…이제 나는 악령의 도움을 받는 자들과 어울리기로 했다.”(236쪽) 동족으로부터 아무런 온정도 기대할 수 없는 이 가련한 ‘페인트 새’는 그렇게 삶의 본질을 터득해간다. 고작 열두 살 나이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작가에 대해 미리 알아두는 것이 요긴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섯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아홉 살 때 가혹한 농민 패거리에게 심한 벌을 받다가 충격으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가, 종전 후 폴란드 고아원에서 병든 부모와 재회한 후에야 목소리를 되찾았다. 1957년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해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철강 재벌의 미망인과 결혼해 자가용 비행기와 승무원만 17명인 개인 배를 소유하게 되는 등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꿈꾸다 끝내 누리지 못한 삶을 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허풍과 과장, 거짓말과 포즈로 점철된 그의 생은 자살로 끝나고 만다. 인간관계의 유효기간은 2년을 넘지 못했고, 자전소설로 알려진 <페인트로 칠한 새>가 가져다 준 세계적 명성은 1982년 “코진스키의 작품 대부분이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원전의 표절”이라는 문화예술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의 폭로로 무너져 내렸다. 작가는 “한 번도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알록달록 때 묻은 언어(The Painted Words)>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코진스키의 삶 전체를 거짓말로 만들며 그에게 문학적 금치산 선고를 내렸다.

이제 이 소설은 불우했던 작가의 일대기가 아닌, 동유럽 민속설화를 차용해 사악하고 가혹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조건을 상징한 비유로 읽힌다. 궁지에 몰려서야 더 넓은 독해의 자장을 갖게 된 작가는 불행한 걸까, 행복한 걸까.

1980년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책은 내용이 잔인한 데다 레닌을 찬양한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삭제 및 배포 금지됐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됐다.(박선영 기자)

06. 11. 15.

P.S. 아래는 러시아어본의 표지이다. '페인트로 얼룩진 새'를 의역하자면 '동정 없는 세상'쯤이 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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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5 20:12   좋아요 0 | URL
맙소사 이거 초등학교때 읽어었는데 그때는 무지개 빛 까마귀라고 나왔었지요 ^^

로쟈 2006-11-16 10:43   좋아요 0 | URL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좀 '냉혹한' 이야기였을 거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