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학상 후보작가 인터뷰의 마지막편을 옮겨온다. 김영하와 박민규 편이다. 지난번에 두 여성작가 편혜영/정미경 편을 옮겨다놓은 것과 대구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나머지 여섯 작가들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해주는 건 내가 이들의 작품들을 읽었거나 적어도 소장하고 있다는 점. 김영하의 <빛의 제국>과 박민규의 <핑퐁>은 각각 지난 계절에 문학동네와 창비사가 '간판'격으로 내세운 장편소설이고 독자들로부터 그만큼의 호응은 이끌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공은 문학상 심사위원들께로 넘어갔다.

한국일보(06. 11. 10) [한국일보 문학상 후보자 인터뷰] <5·끝> 김영하·박민규

김영하 '빛의 제국'

“이 소설은 너무 일찍 도착한 개인주의의 파탄을 다루고 있어요. 마일스 데이비스 식으로 말하면, ‘The end of the cool’이죠. ‘쿨’의 끝장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영하(38)씨의 장편 <빛의 제국>은 프티부르주아가 된 남파 간첩과 그 가족들을 통해 쿨하게 살고자 했던 10년 동안의 노력이 결국 파탄에 도달하는 이 시대의 초상을 그린다. “IMF 체제 이후 우리 사회는 쿨의 패러다임을 지향하게 됐지만, 실제 우리는 개인주의를 지탱할 수 있는 육체가 아니었습니다. 이른바 우리 사회의 사상적 인프라가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때가 되지 않았는데, 마치 박래품처럼 들어온 거죠.”

아니, ‘쿨의 전도사’인 양 쿨한 인물들과 쿨한 문장으로 독자를 매료시켰던 작가가 이제 와서 쿨의 종언을 선언하다니. “흐흐. 제가 변했다기보다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할까요. 쿨의 패러다임에 맞춰 살고자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라는 분단돼 있고, 핵 문제 터지면 어수선하고…. 이곳은 개인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사회예요. 실은 다들 불안하고 초조한데 어떻게 쿨할 수 있겠어요. 생존전략으로서의 쿨, 포즈로서의 쿨이었기 때문에 위기상황에선 금방 폭로되는 거죠.” 작품 속에서 누구보다 쿨한 삶의 방식을 영위하던 주인공들이 파국의 위기에 직면하자마자 ‘애는 누가 키우냐’ ‘혼자 북한으로 가라’ 는 등 생존문제를 놓고 구질구질하게 싸우는 장면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1996년 등단 이래 국내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문단의 젊은 거목으로 자리잡은 그는 “요즘 들어 드디어 본격적으로 쓰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작가로서 기쁨을 느끼는 단계라고 할까요. 예전엔 한참 놀다가 좋은 생각이 나거나 마감에 몰리면 글을 썼는데, <검은 꽃> 때부터 몸이 변해서 매일매일 꾸준히 작품을 쓰고 있어요. 이젠 저도 나이가 들었는지 글 쓰는 것 말고 재미있는 게 없어서 최근 6개월 동안은 술자리도 한 번 안 나갔네요.”

그는 소설가라는 직업이 정신의 키가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몇 안 되는 직업이라 좋다고 했다. “예전에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찮아지면서 계속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해가는 것, 그렇게 점점 괜찮은 인간이 돼가는 것이 참 좋아요. 옛날엔 진짜 천둥벌거숭이였는데 요즘은 제가 생각해도 사람 된 것 같다니까요.”

◆ 심사평
<빛의 제국>의 주인공은 평양이 고향인 남파간첩 김기영이다. 그는 1980년대 서울로 와서 대학을 다닌 뒤 결혼을 하고 영화사를 운영하며 전형적인 서울시민으로 살아간다. 이런 그에게 갑자기 소환 명령이 떨어진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 하루 안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결단을 내려야 한다. 머물 것이냐, 떠날 것이냐.

<빛의 제국>은 이 하루를 기본축으로 화자의 회상을 통해 1960~70년대의 평양과 80~90년대의 서울의 역사를 되살리며 궁극적으로 21세기 서울에서 중산층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성찰한다. 그것은 당연히 그다지 유쾌한 회고가 되지 못한다. 오늘의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토대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잉여와 거품에 기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김영하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재는 거대한 책략과 암투, 어이없는 허위와 편견으로 부글거린다. 간첩이라는 타자의 시선이 아니었다면 이 부패 직전의 부글거림을 포착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스파이소설의 하위문화적 상상력을 ‘반시대적 고찰’로 끌어올리는 작가정신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김영하의 장르적 변주력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박민규, '핑퐁' 

"저는 글 쓰는 일이 너무 좋습니다. 미치겠습니다. 많이 많이 많이 쓰고 싶습니다."

<핑퐁>은 흉내내기 힘든 개성적 글쓰기로 젊은 독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아온 박민규(38)씨의 세 번째 장편이다. 2003년 <지구영웅전설>과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동시에 문예지와 일간지의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그는 소설집 <카스텔라>와 <핑퐁>을 연년생으로 세상에 내놓으며 짧은 기간에 괄목할 만한 생산력을 보여줬다.

가족여행 중인 작가의 요청으로 이메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특유의 단답형으로 소설쓰기의 행복을 얘기했다. 비블리오그래피에 장편의 비중이 높은데 어렵지 않았냐고 물어도 "힘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쓰고 쓰고 또 쓰면 됩니다"는 식의 답변이었다. 아마 '쓰고 싶은 대로 소설을 쓰고, 그 소설은 읽는 사람 마음'이라는 그의 철칙이 낳은 낙천주의 덕분일 것이다.

<핑퐁>은 지구의 사활을 걸고 외계인과 탁구게임을 펼치는 내용이다.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을 마치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풀어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일품이다. 소설이 꼭 개연성으로 충만한 시공간과 사건만을 다루란 법은 없지만, 반대의 경우 독자를 설득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 "개연성은 물론 소설의 중요한 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한 요소, 말 그대로 전부는 아니란 뜻입니다. 연(然)이라는 단어 앞에도 여러 가지 단어가 붙을 수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붙냐에 따라 연의 성격도 달라지겠지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이 있다면 그 단어를 찾는 것입니다. 그 어떤 단어, 하지만 결국 연을 이어지게 하는 방식을 뜻하겠죠."

진짜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농담을 던지자 "그럼 없다고 생각하냐"는 반문이 돌아왔다. 초강력 유머가 가득한 당신의 소설에서 유머의 효과가 뭐냐고 물으면 "유머입니다"라고 대답한다. <카스텔라>에 묶인 그의 단편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와 <몰라몰라, 개복치라니>의 제목 작법을 빌려 말하자면 이렇다. "그렇습니까? 박민규입니다", "몰라 몰라, 박민규라니".

◆ 심사평

박민규는 아이러니한 작가다. 그의 글쓰기는 다양한 하위문화 장르들에 대해 지극히 너그럽다. 만화와 영화와 인터넷은 그의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자양분들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만큼 개연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웃음보다도 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가 항상 '현실'의 남루를 모른 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 그의 '유머'는 우스운 만큼 비극적이고 숭고한 데가 있다. 어쩌면 그는 가장 21세기적인 작가이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80년대 문학의 마지막 적자인지도 모른다.

<핑퐁>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박민규적인 작품이다. 전혀 개연성이라곤 찾아보기 힘든 이야기를 장편 분량으로 밀고 나가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이 놀랍다. 독자를 웃게 만들고, 웃다가는 금세 묘한 비애와 자조에 빠지게 만드는 그의 문장들의 마력도 놀랍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현재 존재하는 우리의 일상적 현실을 묘파하는 능력 또한 놀랍다. 우리는 박민규에게서 21세기의 첨단 문물들과 80년대의 진지한 현실 탐구가 행복하게 화해하는 희귀한 예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06. 11. 09.

 

 

 

 

P.S. 다행스러운 건 두 작가 모두 글쓰기의 재미를 만끽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두 사람의 전성기가 가까운 장래에 놓여있다는 뜻도 된다. 이번 문학상 수상여부와 무관하게(둘다 상복이 많은 작가들이긴 하지만) 내년의 작품들에 더 기대가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저나 올해 나온 책들은 올해 읽어줘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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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신문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기사는 홍콩의 영화감독 관금붕(관진펑)의 <연지구>(1987)를 다룬 경향신문의 '일시정지' 코너였다. <인지구>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 영화의 주연이 매염방(메이엔팡)과 장국영(장궈룽)이다. 관금붕의 데뷔작으로 기억되는데, 아주 오래전에 본 이 영화가 장만옥 주연의 <완령옥>과 함께 내게는 관금붕의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물론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 이후의 영화들은 거의 본 기억이 없지만).

예전에 '매염방의 죽음을 애도함'이란 글을 올린 적도 있는데, 어제 예술의전당에서 감상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과 매염방은 내게서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다. 쇼스타코비치와 매염방? 둘을 묶어주는 건 한 친구에 대한 기억이다. 그 친구가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했고 매염방을 좋아했다. 기억에는 지난 93년쯤인가 러시아에서 구입한 EMI음반으로 쇼스타코비치의 5번 '혁명'을 자기방에서 들려주며 의기양양해 하던 모습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영웅본색3>에 처음 본색을 드러낸 매염방의 도톰한 입술이 이후에 주의를 끈 건 순전히 그의 '주목' 덕분이다. 이후에 내가 더 좋아하게 된 건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노래였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매염방의 노래는 <영웅본색3>의 주제가인 '석양지가'이다. 들을 때마다 '장쾌한'이란 형용사를 떠올려주는 이 노래를 나는 지금도 듣고 있다. 이제 어느덧 세월에 묻히고 있지만, 지난 2003년 봄, 만우절에 장국영이 자살했다. 그리고 그해 12월말에 매염방에 자궁암으로 투병중이던 요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이번에 다시 찾아보니 자살했다는 설도 있는 모양이다. 그해 9월 마지막 '연창회'에서 그녀가 부른 노래가 또한 '석양지가'였다고. http://www.youtube.com/watch?v=b3dP-8Ti6x8). 그리고 친구의 죽음은 그 두 죽음 사이에 끼어 있다.   

인생의 '화양연화'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유금세월'도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나도 이제 그 정도는 알 만한 나이가 되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웃음도 되찾을 길 만무하다. 내가 반복해서 듣는 건 그저 '석양지가'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그저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의연한 자세뿐이다. 담담한 마음으로 <연지구>(http://www.youtube.com/watch?v=DoXufaoclrw)와 관금붕에 관한 자료 몇 가지를 모아놓는다.

경향신문(06. 11. 09) 관진펑의 ‘연지구’

서양에 오랫동안 전해오는 얘기가 있다. 신혼부부가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갔는데 남편이 조난 사고를 당했다. 살아남은 아내는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슬픔을 안고 돌아왔다. 수십년이 흘러 아내는 할머니가 됐고, 어느날 얼음 속에 굳어있던 남편의 시신이 하천에 떠내려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한달음에 달려간 아내는 수십년 전 청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사연이 오랫동안 회자되는 이유는 가장 사랑했던 순간 이별해야 했던 연인에 대한 안타까움뿐만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잔인함을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진펑(關錦鵬)의 ‘연지구’(1987)는 장궈룽(張國榮), 메이옌팡(梅艶芳) 주연의 영화다. 1930년대 기녀 여화와 부잣집 진도령은 깊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진도령 집안의 반대로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좌절한 연인들은 함께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다. 시대는 흘러 80년대 홍콩, 한 신문사에 구식 치파오(원피스 형태의 여성용 중국 전통의상)를 입은 여화가 나타나 진도령을 찾는다는 광고를 내고자 한다. 함께 저승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진도령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도령과 여화에겐 꽃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다(장면1). 둘은 기생집에 마련된 고급스러운 방에서 아편을 나눠피우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여배우보다 더 아름다운 장궈룽의 전성기 얼굴과 전통적 미인은 아니지만 묘한 매력을 내뿜는 만능 엔터테이너 메이옌팡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귀신이 돼 돌아온 여화는 저승에서 진도령을 만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함께 독극물을 마셨지만 진도령은 깨어난 뒤 치료를 받고 부모님이 추천한 여성과 결혼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불행했다. 가산을 탕진한 진도령은 영화판 엑스트라를 전전한다. 혼령으로 돌아온 여화는 영화 세트장 한 구석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진도령을 발견한다(장면2). 거기엔 기억 속의 아름다운 청년은 간 데 없고, 추한 늙은이만 남아 있다.

여화는 진도령이 선물했던 화장 도구를 돌려준 뒤 미련없이 돌아서고, 여화를 부르던 진도령은 울먹인다. 망쳐버린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 연인을 따라 죽지 못한 부끄러움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음을 고스란히 간직한 여화가 세월의 무상함을 깨우쳐 줬기 때문일 것이다. 진도령의 고운 얼굴선은 세월과 함께 무너졌고, 팽팽하던 피부엔 고랑이 패었다. 시간은 피도 눈물도 없이 공평하다. 절세의 미남, 미녀에게도 똑같은 무게의 짐을 지운다.



공교롭게도 장궈룽, 메이옌팡은 같은 해 사망했다. 2003년 만우절 장궈룽은 거짓말같이 고층 빌딩에서 몸을 던졌고, 12월30일 메이옌팡은 자궁암에 따른 투병생활 끝에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구천을 떠도는 두 배우의 혼령이 나타난다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모습 그대로일 거다.(백승찬 기자)

씨네21(05. 08. 24) <연지구> vs <완령옥>: 홍콩 포스트 뉴웨이브, 관금붕

홍콩영화의 포스트 뉴웨이브 세대로 등장한 관금붕은 유례없는 예술영화 몇 편을 내놓는다. 관금붕 자신이 말한 바 홍콩 영화산업이 활황을 구가하던 시기였기에 <연지구> 같은 영화의 제작이 가능했듯이, 당시 홍콩 대중영화의 인기에 편승해 국내에 소개됐던 그의 영화들은 낯선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인지구>로 잘못 소개된 <연지구>는 요괴영화와 모던 멜로드라마를 혼용한 작품이다. 영화는 과거의 연인을 찾아 현대로 찾아온 귀신을 통해 지키지 못한 사랑의 약속, 사라지는 홍콩에 대한 애틋한 기억들, 변화에 대한 낭만적 거부를 이야기하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촘촘한 화면구도 속에 죽어가는 듯 대사를 읊는 배우의 모습이 탐미적 시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1920, 1930년대 중국의 대표적 배우인 완령옥을 그린 <완령옥>은 관금붕과 배우들의 토론, 완령옥의 기록영상, 그리고 영화 속 영화가 컬러와 흑백영상으로 교차되어 나오는 작품이다. 연기자는 미쳐야 한다고 말했으며, 연기에 빠져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던 완령옥은 사회의 편견에 맞선 여자이자 25살 꽃다운 나이에 자살한 여배우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관금붕은 왜 완령옥이 자살한 1935년 3월8일보다 꼭 1년 전에 <연지구>의 기생 여화가 자살하는 것으로 설정해놓았을까. 1935년이라면 중국영화가 상하이를 중심으로 자국영화의 기치를 드높일 때다. 활기찬 1980년대와 이후 힘을 잃어간 1990년대에 홍콩영화의 현장을 지킨 관금붕은 비문을 반복해서 써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빌려 중국영화의 화려한 시기를 애써 기리는 홍콩 영화감독을 구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관금붕이 완령옥을 불러와 과거를 더듬었던 것처럼 우리는 <연지구>에서 우리의 곁을 떠난 두 배우의 기억을 접하게 된다. 인생과 사랑이 헛되기에 <연지구>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자는 이젠 장국영과 매염방 때문에 터져 나오는 울음을 멈추기 힘들지 모른다. 관금붕의 영화가 영화 안팎으로 누군가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게 만드는 작업이라면, 그중 <연지구>와 <완령옥>은 <레드 로즈, 화이트 로즈>로 이어지는, 아름다움에 취한 세계의 정점일 것이다(그러나 관금붕은 이후 <쾌락과 타락>과 <란유>를 만들면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탐구하며 좀더 현실적인 주제로 넘어간다).

새로 출시된 <완령옥> DVD는 기존 출시본보다 30여분 긴 판본을 수록했다는 점을 먼저 주목할 만하다. 두 DVD엔 예고편 모음과 포토 갤러리 외에 관금붕과 영화평론가 폴 포노로프와의 인터뷰를 수록하고 있다. 길지 않은 인터뷰지만 제작 배경과 배우, 스탭, 영화의 주제 등에 대한 설명이 알차다.

06. 11. 09.

P.S. 많이 미뤄진 것이지만, 친구가 유고로 남겨놓은 번역서가 내년쯤에 나올 예정이다. 오늘 그 결정사항을 통보받았다. 주변 사람들이 원고의 교정/교열을 맡기로 했는데, 물론 나도 그 일원이다. 내년에는 친구에게 면목이 설지도 모르겠다...  

P.S.2. 본문에서 깜빡 빼놓은 자료는 신작 <장한가>를 들고서 작년에 부산영화제를 찾았던 관금붕의 인터뷰이다. 오마이뉴스(05. 10. 12)에 게재되었던 내용을 옮겨놓는다. 그의 차기작이 매염방에 관한 영화가 될 거라는 얘기가 눈길을 끈다.

"정기요는 사랑을 갈구하는 캐릭터"

11일 오후 4시 20분경 메가박스에서 열린 <장한가>의 공식 상영이 끝난 다음, 관금붕 감독과 주연배우 정수문이 함께 한 관객과의 대화가 열렸다. 홍콩을 대표하는 가수 겸 영화배우이자 뛰어난 패션리더이기도 한 정수문은 영화 속에서 보여준 강렬한 캐릭터와는 대조적으로, 아담하고 작은 체구에 3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귀여운 미소가 돋보이는 스타였다.

진지하고 성실한 이미지의 관금붕 감독은 한국 관객들과의 대화에서 시종일관 적극적이고 겸손한 대답으로 눈길을 끌었다. 중화권의 거장들인 허우 샤오시엔과 왕가위와의 비교에서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에서부터, 예정된 시간을 넘기면서도 '질문을 더 받겠다'며 관객들을 먼저 배려하는 성실한 자세로 호평을 받았다.

- <장한가>는 엄청나게 1940년대에서 80년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긴 시대를 아우르는 이야기이다

관금붕(이하 관): "전작인 <완령옥>이 1920~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면, 이번 작품은 시대가 좀더 넓어졌다. 당시 상하이는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인하여 상류사회의 문화가 발달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굉장히 혼란한 시대였다. 영화의 디테일한 측면은 100퍼센트 실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속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 영화 속에서 역사는 배경으로 작용하지만 이야기의 전면에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방대한 시대를 제한된 시간 안에 영화 속에 녹여낸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다. 그래서 보다 개인의 삶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여 역사적인 배경이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의 큰 흐름은 허우샤오시엔의 <비정성시>를, 영화의 복고적 스타일은 왕가위의 <화영연화>를 연상시킨다.

: "두 분 모두 개인적으로 내가 굉장히 존경하는 감독들이다. 개인적으로 인물이 시대의 격동 속에 놓여 있음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허우샤오시엔은 대만의 역사를 주로 다루는 감독이고, 왕가위는 <화양연화>가 60년대 홍콩을 무대로 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형식이나 미학적인 측면에서 다소 유사하게 느낄 수는 있어도 본질은 각자 상이한 이야기로 생각한다."



- 정수문 씨는 주로 상업적인 색깔이 짙은 영화에 자주 출연해왔는데, 이 작품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정수문(이하 정): "개인적으로 그동안 제가 코미디 영화같은 상업 영화가 자주 출연해왔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하지만 배우는 어떤 배역이든 역할에 따라 변신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정기요는 대단히 복합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로 10대에서 50대까지 방대한 시절을 넘나드는지라 그때그때 몰입하는 데 어려움이 다소 있었다. 하지만 정기요의 성향 중에서 나와 비슷한 부분도 있었고, 감독님의 조언도 있어서 전반적인 어려움은 크지 않았다."

- 주인공의 애정관이 다소 모호한 것 같다. 극중에서 만난 4명의 남자를 과연 진정 사랑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자들을 속이고 이용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 "정기요는 영화에 나온 모든 남자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것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적어도 각 남자들과 만나는 그 순간만큼은 그 남자들을 사랑한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본다."

: "정기요는 여러 가지 다층적인 면을 갖춘 캐릭터다. 당시에 그녀가 처한 입장은 현실적인 고민을 배제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물론 남자를 만날 때에도 과연 이 남자가 나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려를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남자들을 이용만 하거나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 감독이 주연배우에게 어떤 식의 연기주문을 했는지

: "매번 영화마다 감독님의 기대치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많은 시대를 넘나드는 만큼 감정의 세밀한 부분을 표현해달라고 주문하셨다. 다행히 감독님은 감정이 풍부한 분이라서 저에게 많은 조언을 주셨고, 이 작품을 통해서 연기와 몰입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은

: "최근 사망한 배우 매염방과 관련된 전기 영화가 될 것같다. 현재 시나리오 완성 단계에 있는데 일정이 확실히 결정된 것은 아직 없다. <장한가>도 굉장히 스케일이 큰 작품이라서 힘든 부분이 많았는데 이 작품을 끝내자마자 또 더 규모가 큰 영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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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11-09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염방과 장국영 주연의 "우연"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나요. 왕조연도 나왔던 것 같은데... 내용은 영 별로였지만 엔딩의 콘서트 장면이 참 근사했던... 정말 오래전 일이네요.

로쟈 2009-02-2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본 영화인데, '영화'라고 할 만한 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두 사람이 주제가는 같이 불렀네요.^^


수유 2006-11-10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눈엔 그리 이뻐보이지 않는데 매염방 좋아하는 남자들이 꽤 되더군요..
노래나 함 올려볼까요?

로쟈 2006-11-10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는 제가 (실황으로) 올려놓았습니다(투병중의 마지막 공연 장면이라 음색이 약간 다르더군요). 미모가 아닌 건 다들 인정하는 건데, '독특한' 외모라고 해야겠지요...

2006-11-12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터넷 칼럼들을 둘러보다가 레디앙에서 눈에 띄는 글이 있기에 옮겨온다. 필자는 우석훈 교수인데, 한겨레의 북리뷰 섹션에도 칼럼을 연재하는 것으로 안다.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눈에 들어오는 필자이다. 알라딘의 저자 프로필을 보면 파리10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현재는 초록정치연대의 정책실장으로 활동중이라고 한다. 작년부터 출간된 저서들이 눈에 띄며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론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가 있다(이미 이런 소개가 필요없을 만큼 널리 알려진 분이긴 하다). 레디앙에는 그의 칼럼이 연재되고 있는데, 프로이트(프로이드)의 (비관적) 문명론을 다룬 이번 칼럼에서는 필자의 유학생활도 슬쩍 엿볼 수 있다(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레디앙(06. 11. 07) "프로이드의 우울한 유언을 생각하면서"

1.
사람들이 가끔 왜 나에게 프랑스로 유학을 갔느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얘기들로 말을 돌리지만 ‘운동권 학점’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기는 어려웠다는 것이 진실일 것 같다. 그렇지만 프랑스에 가서 좋았던 점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면, 사실 별로 없다. 하지 않았어도 좋을 고생을 더 많이 했고, 원래도 비주류인데 평생 비주류로 살 구실을 찾았다고 하면 오히려 솔직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어두운 기억 한 구석에서 좋았던 점이 있다면, 수학을 많이 공부할 수 있었고, 인류학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프로이드를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을 꼽을 것 같다. 내가 프로이드를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은 스물 세 살 때의 일이다. 후기 프로이드의 저서는 동구가 무너지던 시절에 그나마 마음을 붙일 수 있던 거의 유일한 위안거리였던 셈이다.



동구가 무너지면서 서울에도 충격이 심했다고 하지만 파리는 심리적 거리가 더 가까웠기 때문에 사회와 대학가에 던져진 충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때 나는 수학 문제 푸는 것과 독서로 허무한 마음을 달래면서 살아갔고, 보통의 20대가 그렇듯이 내 눈으로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에 알뛰세나 푸코가 서울에서는 한참 유행했지만, 당시 파리에서는 별로 그렇지는 않았다. 데리다 열풍이 지금도 서울에서는 만만치 않지만 실제로 내가 지냈던 90년대 초반의 프랑스 학계 특히 좌파 학계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듯이 후기구조주의의 단일한 흐름과 대오를 형성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EU 통합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놓고 통합파인 사회당과 비통합파인 공산당이 논쟁 중이었고, 60% 이상의 핵발전 국가인 프랑스의 에너지 체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사회당과 녹색당이 논쟁 중이었다. 그 와중에 “개인의 복귀”를 외치는, 나름대로 신자유주의 철학이 화려하게 등장하던 그런 시기였다. 그 와중에 프로이드를 읽던 나는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었고, 주류와는 상관없는 외톨이의 길에 혼자 서 있던 셈이다.

장장 2년에 걸친 프로이드 독서가 끝났지만, 나는 결국 프로이드로 박사 논문을 쓰지는 못했다. ‘맑스와 프로이드’, 이런 주제는 지나치게 우파들이나 좌파들을 모두 자극하게 되는데, 1년을 다시 헤매다가 조안 로빈슨, 로자 룩셈부르크, 그리고 힐퍼딩 같은 고전들을 끄집어내서 겨우 박사논문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프로이디안'인가라는 질문을 가끔 나에게 한다. 나는 프로이드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프로이드주의자는 아닌 것 같다. <토템과 타부>에서 <동일화>를 거쳐 <문명의 병>까지 이어지는 후기 프로이드 저작은 아직도 풍성한 고민거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후기 프로이드는 너무 염세적이다. 열심히 읽다보면 자살에 아주 적합한 핑계거리를 찾아내기 딱 좋은 책들이다.

‘평화’에 관한 단어가 요즘은 유행인가 보다. 그런 말을 많이 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평화라는 말은 간디에서 유래한 생각이 강하다. 물론 모든 평화파가 간디주의자로 환원되지는 않지만, 하여간 최근의 유행은 간디식으로 해석한 “용감한 자들의 선택”이라는 것이 평화 혹은 내 표현대로 하면 ‘극렬 평화주의자’들의 기본 뿌리를 형성한다. 지금 탁발순례 중인 도법스님의 경우가 그렇고 녹색평론의 많은 저자들도 간디의 생각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뿌리대로 올라가면 서양 근대 사상에서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전면에 꺼낸 사람은 베트란드 러셀과 지그문트 프로이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람 다 평화의 사상가들은 아니지만, ‘반전’이라는 흐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다. 러셀과 반전시위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냉전 시기에 핵위기로 달려가던 미국의 그 심장부에서 반전 시위를 하면서, 스퀘어 가든을 매웠던 사람들이다. 그 당시의 반핵이라는 흐름의 후반부로 가면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따로 있지는 않았던 것 같고, 종교와 세속적인 힘들이 모두 “핵폭탄을 없애라!”라는 구호로 녹아들어가 있었다. 일종의 ‘공멸’에 대한 두려움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헐리우드 영화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논쟁을 이끌어내고 사회적 변화까지 만들어낸 영화를 꼽으라면 난 <크림슨 타이드>를 꼽는다. 존 웨인으로부터 시작된 미국 극우파의 마초들 중에 으뜸 마초라면 역시 잠수함 함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는 핵잠의 함장이 미사일 발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잠수함이 작전을 나간 동안에 교신이 두절되었고, 통신교란된 상태에서 접수된 전문은 해독이 불가능하다. 미사일을 발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함장과 부함장 사이의 이 작은 함상 쿠테타에는 미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운명이 사실상 달려 있는 셈이다.

해군으로부터 항공모함까지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던 <탑건>과는 달리 <크림슨 타이드>는 해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해군에서는 정 안되면 시나리오의 변경이라도 요구를 했다고 하는데, 하여간 해병대를 가지고 있는 미해군의 최고 엘리트들이 근무하게 되는 핵잠에서 벌어지는 선상 소요사태는 간단하지만 매우 어려운 질문을 던진 셈이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해 핵잠 함장에게 주어지던 핵미사일 발사권이 사라졌다. 냉전의 마지막 시대는 한 사나이가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을 정도로 세계는 공멸의 직전에 서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좀 나아졌을까?

2.
이 공멸에 대한 얘기를 가장 드라마틱하게 했던 사람이 바로 프로이드이다. 거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문명의 병>의 결론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결국 인류는 서로 전쟁으로 죽이면서 종말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생태주의자들은 보통은 지구온난화 혹은 기타 자원과 환경의 문제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런 걸 조금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희망론이 있기도 하지만,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종말론이 강하게 자리 잡는다. 이런 점에서 맑스나 레닌과 같은 “언젠가는 모든 것이 해결된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과 프로이드나 생태주의자들은 생각이 좀 다르다.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재림’에 의한 ‘구원’의 철학과 종말적 염세론의 기본 시각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망할 것이라는 생각이 어려운 생각은 아니지만, 프로이드의 얘기가 좀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에서 그 근거를 끌어오기 때문에 생각보다 골치 아프다. 가만히 보니까 사람들이 ‘생산’이라고 하는 일이라는 것이 다 뭔가를 찢고 쪼개고 부수는 일이기 때문에 일을 오래 하다보면, 결국 ‘파괴적 본능’이 강해질 것이라는게 프로이드 의 기본적인 생각인 셈이다.(생산에 대해서 시비를 붙은 사람은 루마니아 출신의 경영학자인 조르죠스큐-뢰겐이라는 사람이 있기는 했었다. 70년대 초반의 일이다. 그는 맑스나 스미스가 이야기한 ‘생산’이 엔트로피라는 눈으로 보면 결국 에너지의 순수한 소비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일하는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라는 경구 위에 세운 노동의 사회에서 프로이드의 지적한 얘기가 좀 생뚱맞기는 하다. 신성한 노동이 결국은 ‘파괴의 본성’을 일깨우고, 이렇게 사람들이 점점 더 파괴와 살육에 익숙해져서 인류가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라니... 그러나 하여간 프로이드는 세상을 그렇게 보았고, 그게 그의 마지막 결론이니까 학자로서의 프로이드의 마지막 결론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섹스나 사랑 혹은 최면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전쟁과 살육에 대한 예언인 셈이다.

3.
프로이드는 연애는 정말 못하는 사람인데, 말년에 루 살로메에 대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기도 했다. 유럽의 지성 중에는 살로메가 대단하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도저히 와닿는 바가 없는 말이기는 한데, 프로이드의 결론을 살로메와의 짝사랑과 연결시키면 좀 재밌는 얘기가 나오기는 한다.

프로이드가 공식적으로 맑스에 대해서 지적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대체적으로 똑똑한 사람이라고 본 것 같다. (이건 케인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프로이드는 혁명은 당연한 것이고, 언젠가는 노동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서 더 이상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사람들이 소외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도 열렬한 혁명의 지지자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프로이드가 맑스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불만은 혁명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라지고 나더라도 노동 과정에 대한 변화가 특별하게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폭력을 재생산하는 노동은 변함없을 것이라는 점이 프로이드의 걱정인 셈이다 (할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별 걸 다 걱정한 셈이다.) 프로이드의 제안은 ‘사랑의 노동’인데, 별 특별한 건 아니고 부부가 같은 작업장에서 일할 수 있게 해주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아마 프로이드의 경우에는 같이 일할 수 있는 이 사람이 루 살로메였기를 열렬히 희망하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김빠지는 얘기 덕분에 인류와 사회의 기원에서 종말에 이르는 프로이드의 거대한 생각은 “사실 별 볼 일 없다”는 걸로 완전히 폄하되었다. 후기 프로이드는 철학사에서나 인식론에서나 완전히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고, 그저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심리학자 정도로 이해되게 되었다.

4.
“죽어라고 일하면 행복해진다”는 사회적 테제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종종 나온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맑스의 사위였던 폴 라파그(Paul Lafargue)라는 사람인데, 감옥에서 '노동권'이라는 말이 사회적으로 등장할 때 여기에 불만을 품고 '게으름의 권리'에 대한 책을 썼다. 우연한 일이지만 베트란드 러셀도 비슷한 책을 쓴 적이 있다(*'라파르그'와 러셀의 책은 모두 번역돼 있다).

 

 

 

 

<게으름의 권리>라는 책은 오랫동안 잠 자고 있다가 68혁명 이후에 높아진 임금에도 불구하고 실업률이 높아지던 70년대 초반 다시 복권되었고, 이 때 서문을 달았던 사람이 바로 알랭 리피에츠이다. 프로이드는 부인 혹은 애인과 같이 일을 하면 그래도 노동이 좀 행복해지고, 사람들의 폭력에의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 잠시 정지될 것이라고 생각한 셈인데, 이건 좀 "글쎄올시다" 되겠다. 아마 부인과 직장에서도 붙어있다가 일과 가정 모두 파탄날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고, 부인 몰래 직장에서 바람 피는 사람들의 인생도 내가 짧게 지켜본 것으로는 행복하게 된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 보인다.

어쨌든 프로이드도 엄청난 낭만파는 낭만파다. 혁명에 관한 얘기가 별 볼 일 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부인과 같이 일할 수 있게 해주라고 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프로이드가 없어지기를 바랬던 전쟁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후 200년이 흐른 뒤 사람들은 더 위험한 일이라도 시켜주기만을 바라는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프로이드에서 반지의 제왕의 작가 톨킨스에 이르기까지 1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철학이나 문학을 나름대로 시도했다는 점이다(여담이지만 블랙 사바스의 모티브도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다). 묘하게도 2차 세계대전을 마치고 나서는 전쟁에 대한 반성보다는 “부국강병”의 이데올로기가 더 강해지는 경향이 있다.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뭐가 있기는 있는 것 같다.

5.
프로이드가 다시 복권되는 일이 있을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게다가 줄기세포도 모르던 시절의 어느 촌놈 의사가 사회학과 인류학 그리고 철학 같은 걸 너무 하고 싶어서 의사생활 때려치고 호주의 캥거루에 얽힌 신화부터 다시 공부하면서 혼자 생각해낸 얘기들이라서 화려한 철학사에 대한 얘기도, 화려한 인문학에 관한 얘기도 프로이드에게는 없다(*그런 이유라면 소위 '고전들'이 굳이 읽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미건조한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전설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찬 프로이드가, 게다가 ‘남근주의자’로 몰려 마초들의 두목처럼 비쳐지는 지금, 프로이드가 다시 복권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필자가 라캉 이후의 정신분석학에 관해서는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듯하다. 전집이 출간된 지 얼마되지 않은 한국에서만 하더라도 프로이트는 이제야 읽히기 시작하는 것 아닌가?).

프로이드가 촌놈이라면 이보다 한 술 더 뜨는 촌놈이 바로 파레토였다. 근대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하여간 그런 경제학의 기본은 왈라스로부터 나온다. 사람들은 안 믿겠지만 왈라스도 사회주의자였고, 그래서 하에이크가 왈라스의 일반균형 이론이 바로 사회주의 이론이라고 입만 열면 “그건 아니야”라고 외쳤었다. 그 왈라스가 스위스의 로잔느 대학에 경제학과 학과장으로 자기 후임으로 이탈리아까지 가서 데리고 온 사람이 바로 파레토인데, ‘파레토 최적’의 그 파레토가 또 당시의 유명한 사회주의자였다.

파레토가 스위스 기슭에서 20년 이상 혼자서 연구하다가 드디어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의 비밀을 풀었다고 의기양양하게 산에서 내려와서 파리에 왔는데, 프로이드의 책들을 보고는 한탄을 했다고 한다. 자기가 쓰려고 했던 말들이 이미 다 책으로 나와있는 걸 보고 파레토가 낙담을 했었다고 한다.



6.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질 때 혼자 틀어박혀서 읽기 좋은 책 중의 하나가 바로 프로이드의 <문명의 병>이다. 가만히 보니까 인류는 죽어라고 일 해서 결국은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면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한 어느 한 노학자의 마지막 모습을 생각해보면 가슴 한 구석에 그야말로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오게 된다. 몰락한 집에 줄줄이 달린 형제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생물학과에서 의사로 전업하고 개업했던 그 집안의 아들이 전쟁을 겪고, 독일 사회와 유럽 전역의 전쟁의 광기로 달려가고 있던 시절을 살아내면서 유언 대신에 세상에 남긴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은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마약이 있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라고 대답하면서 출발한다.

한국은 마약에 홀린 것처럼 ‘화페물신론’에 흠뻑 빠져있고, 노동의 의미와 삶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보다는, 그야말로 월급과 승진 혹은 ‘안정성’이라는 그게 그 말인 얘기에 흠뻑 빠져있다. 노무현 정부가 “2만불 경제”를 외치던 그 시절에 그게 문제 있다고 얘기하던 인문학자가 아무도 없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했다. 돈이 인류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나?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06. 11. 09.

P.S.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문명의 병>은 아무래도 <문명 속의 불만>(열린책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원제는 'Das Unbehagen in der Kultur'(1930)이어서 <문화의 불안>(박영사, 1974)으로 번역되기도 했었고, 영역본의 제목은 <문명과 그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이다. 불역본의 제목이 아마도 '문명의 병' 정도인 모양이다(찾아보니 'Le Malaise dans la Culture'이다). 짐작에 필자는 프로이트의 한국어판 전집에는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참조하지도 않은 듯하다. 그의 프로이트는 여전히 스물 세 살때 파리에서 읽은 프로이트이겠다. "요즘처럼 날씨가 추워질 때 혼자 틀어박혀서 읽기 좋은 책"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바로 그 책은 <문명 속의 불만>이 아니라 'Le Malaise dans la Culture'인 것이다. "그 와중에 프로이드를 읽던 나는 서울에서나 파리에서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었고, 주류와는 상관없는 외톨이의 길에 혼자 서 있던 셈이다."란 고백에서 알 수 있지만, '문명의 병'을 다루고 있는 이 칼럼은 (흥미롭지만) 한 지식인의 '나르시시즘적 고백'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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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 <니코마코스 윤리학>(이제이북스, 2006)의 새 번역본이 출간됐다. 서양 고전철학 전공자들이 전력투구해서 낸 역저인데, 지난 월요일에 교보에 들렀다가 책이 나온 걸 보고서 바로 손에 들었다(물론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다. 최명관 교수 번역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갖고 있기 때문에). 번역에 대해서 신뢰감을 갖게 되는 건 역자들 못지 않게 교열자들의 손도 많이 간 번역서이기 때문인데, 그건 지난 여름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이제이북스, 2006)을 펴낸 이 출판사 전응주 사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어려운 개념이 많다보니 철학서 번역은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대여섯번 교열을 보는 건 기본. <헤겔>은 교열과 편집 작업에만 반 년 가까이 걸렸다. 전대표가 직접 교열을 보는 경우도 많다. 그는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 번역물을 영어와 독일어 번역을 옆에 두고 비교하면서 보고 있다'면서 '그냥 대충 하면 손해보지 않고 갈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대표는 희랍어·라틴어 원본을 번역할 수 있는 세대가 활동하고 있는 지금 관련 철학서를 번역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만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낼 예정이고, 플라톤 전집도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바로 그 책이 출간된 것이다. 

 

 

 

 

아마도 주말의 서평란들에서 이 신간에 대한 리뷰들을 읽어볼 수 있을 텐데, 여기서는 그냥 이태수 교수(역자들의 스승이기도 하다)의 해제 정도를 읽어보는 걸로 오리엔테이션을 대신하도록 한다(이 페이퍼 또한 '최근에 나온 책들' '작업실'에 올라와 있었는데 따로 분가시킨다).

동아일보(05. 07. 27)[서울대권장도서 100권](98)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간이 영위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어떤 것일까? 행복을 누리는 삶이라고 한다면 일단은 수긍할 수 있겠다. 그러나 행복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해두지 않는 한 아직 알맹이 있는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삶을 보장해주는 행복의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질문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가 제시한 답은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을 최대한 계발하여 발휘할 수 있게끔 삶을 꾸민다면 그것이 곧 진정 행복한, 즉 최선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답 역시 인간에게 주어진 역량에 관한 설명이 따라주어야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다. 바로 그에 관한 설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핵심부분을 이루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관건이 되는 역량을 크게 지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 두 종류로 나누어 상론한다. 그는 삶의 방식으로서는 지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진리탐구에 몰두하는 관조적인 삶을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 때문에 그의 윤리관은 너무 주지(主知)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 비판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실천적 역량을 지적인 것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취급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실천적 역량이란 주어진 상황에 대하여 특정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으로서 흔히 말하는 덕(德)과 같은 것이다. 가령 의로움, 너그러움, 우애, 용기, 절제 등이 그 예다. 이런 덕목이 결핍된 인간은 지적인 역량을 갖추더라도 심각하게 잘못된 인생을 살 가능성이 크다. 이 점을 잘알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실상 실천적인 덕에 관한 논의에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아주 세심한 정성을 쏟는다.

각 덕목에 관한 그의 논의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논변의 정교함과 깊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철학적 분석의 뛰어난 모범으로 통용되고 있다. 각론뿐 아니라 덕 일반에 관한 총론적 논의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많다. 가령 정서적인 반응과 관련된 측면에서는 덕이 중용(中庸)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동양사상사에도 비슷한 이론이 있기에 비교연구의 관점에서 보면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로울 것이다.

또한 덕은 정서적 반응을 넘어 결국은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덕의 논의는 행위이론을 포함하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기여는 기념비적인 것이다. 행위 일반의 구조와 그중에서도 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행위의 특성에 관하여 그가 시도한 분석은 최초의 본격적인 행위이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어떤 기발한 윤리교설을 창안해내서 열렬한 신봉자를 끌어 모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윤리문제에 관한 학문적인 논의의 기반이 되는 개념 틀을 차분하게 정리해서 마련해놓은 것이 그의 가장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 개념 틀은 적어도 이 책이 쓰인 기원전 4세기부터 계속 서양 윤리학의 사상적 골격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서양 윤리사상사의 큰 흐름을 그 저류에까지 깊이 탐사하고자 하는 지적인 호기심을 가진 독자는 이 책을 재독, 삼독하면서 저자와 토론하기에 결코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번역으로는 최명관 역(서광사)을 추천한다.(이태수 서울대 교수 철학과)

이 해제의 마지막 멘트만을 교정하면 되겠다. 이제 번역으로는 '이제이북스판'을 추천한다.

06. 11. 08.

P.S.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판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악트출판사, 2004). 모스크바에서 6,000원을 주고 산 책이다.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대윤리학>이 합본돼 있고 100쪽 정도의 주석이 붙어 있다. 한국어판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긴 하지만 최소한 가격에 있어서는 러시아어판과 비교할 수 없겠다. 러시아의 서점들의 문득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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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E 2006-11-08 22:26   좋아요 0 | URL
플라톤 전집도 곧 나오겠군요. 기대중입니다.

로쟈 2006-11-09 00:48   좋아요 0 | URL
분량상 '전집'은 아마도 시간이 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저도 기대를 갖습니다...

깜짝이야 2006-11-11 00:15   좋아요 0 | URL
5년으로 계획을 잡았으나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지치지 않는다면, 더디 가도 바로 갈 수 있겠지요.

로쟈 2006-11-11 00:23   좋아요 0 | URL
그래도 키케로보다는 양반이군요. 키케로 전집 발간은 50년을 잡고 있던데요...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철학자 드니 디드로(1713-1784)의 <달랑베르의 꿈>(한길사, 2006)이 출간됐다. 지난주의 일이고, 최근에 나온 책들 '작업실'에 올라와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는 바람에 그냥 따로 자리를 만든다. 책의 '명성'만을 알고 있는 탓에 일단은 전문가 서평을 읽어보는 걸로 대신하면서.

 

 

 

 

아직 <달랑베르의 꿈>은 구입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번역/소개된 디드로의 책들은 <회화론>(영남대출판부, 2004)를 제외하면 다 갖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라모의 조카>(고려대출판부, 2006)가 재출간됐는데, 물론 그것도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래봐야 몇 권 되지 않는다. <운명론자 자크>(현대소설사, 1992)로 시작해서(밀란 쿤데라가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수녀>(장원, 1993)와 <라모의 조카>(세계사, 1998)를 거쳐서 <배우에 관한 역설>(문학과지성사, 2001)을 지나 <부갱빌 여행기 보유>(도서출판 숲, 2003)에 이르는 여정이니까 보유(부록)를 포함한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중 어떤 책은 불어본과 영역본도 갖고 있고, 재작년에 구입한 러시아어본 선집 한권도 소장도서이다. 그 선집은 짝이 맞지 않는 책이지만 디드로의 대표작들은 거의 다 들어가 있다. <달랑베르의 꿈>을 포함해서. 분량이 얼마 되지 않아 좀 의아했는데, 서평을 읽어보니까 원래는 3부작으로 구성된 책이고 국역본은 그걸 옮긴 것이다.

교수신문(06. 11. 05)  感性에 대한 철학...꿈같은 서술 매력

중세 신의 품안에서 아직 미지각의 상태로 잠들어 있는 인간들에게 이성의 빛을 던져주고, 구질서의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계몽주의의 완결판인 ‘백과사전’의 편찬을 주도적으로 총괄했던 디드로. 기존의 사고체계를 혁신하고 새로운 질서를 기획했던 이 백과사전파 학자는 또 개인적으로 생물과 화학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특히 유물론자로서 현상의 총체적 이해, 현상들의 내적 연관성,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새로운 우주관을 완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면서 저작물을 생산했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결실이 바로 ‘달랑베르의 꿈’(1769)이다.

이 책은 선적인 명확한 구성을 갖춘 3부작(1부 달랑베르와 디드로의 대담, 2부 달랑베르의 꿈, 3부 대담후기)으로 이뤄진, 생명의 기원과 우주 생성론을 다룬 철학 텍스트다. 디드로는 이 텍스트에서 물질의 보편적 속성을 감성으로 보고, 동양학의 氣論이 그런 것처럼, 그 감성의 聚散을 통해 우주만물이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독자들은 텍스트를 읽으면 마치 최한기의 ‘神氣通’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육체와 영혼의 분리나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길 거부함으로써 디드로는 관념론적 철학의 논제를 극복하고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배제하며, 우주에 대주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그런데 ‘달랑베르의 꿈’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 당대의 다른 철학 텍스트와 비교해보면, 아주 특이한 형식으로 서술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특이함은 대화, 꿈, 은유와 같은 문학적 형식에서 찾을 수 있다. 대화라는 문학적 형식은, 디드로가 생산한 작품들의 전매특허이듯이, 이 텍스트 속에서도 철저히 라이트모티프(leitmotif) 역할을 하고 있다. 텍스트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대화는, 모든 대화자들이 하나의 주장을 이뤄가는 과정에 참여하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소크라테스적 대화다. 이처럼 대화는, 자칫 단조롭고 따분하며 현학적이 쉬운 철학적 담론에 일상 언어가 갖는 생동감과 현실감과 자연스러움을 불어넣어, 力說이 逆說이 되지 않도록 하는 문학적 형식이 된다. 그리고 텍스트 속에 꿈의 형식을 도입함으로써 디드로는 일상적인 담론에서는 받아들이지 못할 사실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된다. 꿈이라는 것 자체가 단순한 인식과 이성적 분석을 넘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랑베르의 꿈’에서 은유는, 다소 역설적이긴 하나, 철학적 개념을 전달하는 가장 문학적인 형식이 된다. 한 단어나 이미지, 개념의 형태가 원래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로 이동할 때마다 유사성에 근거한 은유가 등장한다. 무수히 많은 작은 개체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벌 송이나 인간의 사고 작용과 현의 공명 현상을 비유하는 클라브생, 감각과 의식의 문제를 다루는 거미의 이미지는 추상적인 것을 물질화하고,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며, 불투명한 것을 자명한 것으로 만드는 효과를 자아낸다. ‘달랑베르의 꿈’은 이처럼 철학적 내용과 문학적 형식이 어우러지는 행복한 만남의 공간이다.

'달랑베르의 꿈’은 이번에 처음 번역됐다. 이 책의 번역작업은 생명의 기원이나 감각작용, 사고작용 등에 대한 과학적 증명이 이뤄지지 않았던 18세기의 사고방식과 표현을 현대적으로 옮겨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텍스트에서 장황하게 우회적으로 설명된 사실들을 21세기의 독자들은 이미 알고, 그래서 그들은 일종의 선입견을 갖고 소위 ‘옛날’의 표현들을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事象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문학적 우회를 통해 표현한 작품의 번역은 특히 용어의 정확성과 표현의 매끄러움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또한 생물학적 유물론을 대화의 틀 속에 담아낸 이 작품의 경우, 개별적인 대화의 분위기와 개념적 이해가 어우러진 특징을 살려내야 하고, 당시 학계와 문단을 풍미하던 이론들과 사교계의 에피소드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한다는 이중의 어려움이 있다. 더불어 디드로 특유의 문체, 즉 확장 지향적이고 즉흥적인, 수다스런 분위기를 살려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된다. 이런 컨텍스트의 특징들을 옮긴이가 충분히 살려 내려 노력했지만 아주 만족스럽진 않다. 하지만 현재 출판계의 번역상황을 감안한다면 18세기 작품이 출판됐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 더욱이 소위 장르혼합이 이뤄진 ‘생경하고 어려운’ 작품의 경우에는 그 의미가 배가될 것이다.(문재은/  한국외대·불문학) 

06.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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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6-11-08 15:59   좋아요 0 | URL
수년전에 New School 철학과에서 발행하고 Charles T. Wolfe가 편집한 저널 하나 구입한적이 있었습니다. <유물론의 부활>이란 거창한 제목이었지요?? 펼쳐보니 디드로를 중심으로 논문들이 구성되었더군요.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의 한부분도 마지막에 실려있었죠...네그리가 그의 <혁명의 시간> 서두에서 언급한 친구가 바로 디드로 전문가인 Charles T. Wolfe죠. 물론 저는 디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냥 ^^ 사실 Charles T. Wolfe는 들뢰즈,가따리가 만든 저널 Chimeres에 90년대 초반부터 글을 쓴 유일한 영어권 학자일 겁니다. 그의 책 Monsters And Philosophy 도 흥미롭고요.. 며칠전 <달랑베르의 꿈>을 구입하고 그 저널을 다시 뒤적이다보니, 맨 앞 논문에 프랑수와 다고네(당신의 아내는 왜 자살할 수밖에 없을까?)의 글이 있더군요

로쟈 2006-11-09 00:45   좋아요 0 | URL
흥미로운 정보 감사합니다. Monsters And Philosophy란 책은 관심을 끄네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