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독자들은 이미 알만한 소식이겠지만, 얼마전 황순원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기린아'임을, 게다가 '상복 많은 작가'임을 다시금 입증한 김연수의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이 출간됐다. 관련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얼마전엔 하진의 소설 <기다림>(시공사, 2007)까지 번역해내면서 '투 잡'에 나선 이 작가의 행로가 어디로 귀결될지 주목된다(데뷔작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세계사, 1994)을 내던 '새내기 작가'도 어느새 '중견급'이 되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세월은 그냥 무심히 흘러가는구나)...  

한국일보(07. 10. 01) "과거의 재구성, 억측 아닌 구원일 수도"

“이전엔 주로 주제를 명확히 드러내는데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이야기에 중점을 뒀습니다. 이야기가 자유롭게 흘러 나오도록 방치를 했다고 할까요. 그게 장편의 속성에도 맞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소설가 김연수(38)씨가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발행)을 펴냈다. 문학 계간지 <문학동네>에 6회에 걸쳐 연재했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을 제목을 바꿔 출간한 것으로, 경장편 <사랑이라니, 선영아>(2003) 이후 4년 만에 낸 네 번째 장편이다. 최근 장편 집필에 집중하고 있는 김씨는 2004년 연재 탈고한 <밤은 노래한다>도 내년 초 출간할 예정이다.

대학 총학생회 간부인 ‘나’는 1991년 상부 조직 지시로 대학생 방북단의 밀입북을 도우려 베를린에 파견된다. 그곳에서 우연히 80년대 한국에서의 삶에 관한 충격적 고백이 교차 편집된 비디오를 보고 그 다큐 속 화자이자 감독으로 알려진 영화운동가 강시우와 접촉한다.

그러나 강시우는 명문대 출신의 천재 영화감독으로 신분을 세탁해 독일에 잠입한 안기부의 프락치이며, 다큐는 그를 세뇌하기 위해 안기부 직원이 촬영한 것임이 밝혀진다. 엄청난 분량의 문헌 조사를 통해 이야기의 세부까지 정교하게 구성하는 것으로 유명한 김씨의 장인적 면모는 이번 작품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하지만 여전히 작가는 매끄럽게 되살린 ‘공식적 역사’가 아닌, 개인 및 개인의 ‘주관적 역사’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운동권 동지이자 연인인 정민과, 안기부의 세뇌로 두 번의 다른 삶을 살아온 강시우와 끊임없이 과거사를 되짚으며 우리가 누구이고 왜 지금 여기서 만나게 됐는지를 납득하고자 애쓴다.

‘나’의 조부와 강시우의 부친은 둘 다 입체로 볼 수 있는 옛날식 누드사진을 지녔었고, 자살한 정민의 삼촌이 마약 소지로 체포될 당시 강시우의 집안은 2대에 걸쳐 히로뽕을 밀무역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들이 자신들의 조우를 비범한 인연으로 여기면서 발견하는 이런 ‘사실’들은 좋게 말해 ‘합리적 추론’이고 나쁘게 말하면 ‘억측’이다. 무엇 하나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 없다.

그들도 알고 있다. “우리는 인생을 두 번 사니까. 처음에는 실제로, 그 다음에는 회고담으로.”(384쪽). 하지만 덧붙인다. “어쩌면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도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들은 더없이 중요했다.”(391쪽) 김씨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이들은 과거를 재구성하게 마련”이라며 “그런 재구성은 억측이 될 수도 있지만 삶이란 우연의 연속 속에서 우리를 구원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삶은 짐작과 다르기 십상인 ‘뿌넝숴(不能設ㆍ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의 세계라 말하면서도 작가는 그 도저한 허무에 굴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에 대한 탐색과 이해를 멈추지 않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그의 정신은 ‘프로 소설가’를 자처하는 그의 직업 윤리만큼이나 독자에게 깊은 신뢰를 준다.

이번 작품을 비롯, 최근 들어 연애담이 부쩍 늘었다는 질문에 김씨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 윤리가 사라진 90년대 이후,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하는 유일한 통로가 연애”라며 “연애를 통해서라도 자신만이 아닌 타인을 위해 살아보는 것은 도덕적이고 인간다운 태도”라고 말했다.(이훈성 기자)

07. 10. 01.

P.S. 겸사겸사 황순원문학상 수상자 인터뷰기사도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09. 19) 김연수 “소설은 전문기술로 쓰는 공산품”

김연수는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작가다. 묵직한 작품세계를 선보인다고 해서 교양소설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잘라 말하면, 어딘지 한참 부족한 느낌이 인다. 당장 김연수가 섭섭하다고 할 게 분명하다.

올해 황순원문학상 수상작 ‘달로 간 코미디언’은, 말하자면 김연수를 빼닮았다. 소설은 김득구에 관한 얘기지만 결코 82년을 재현하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훨씬 더 많은 걸 작가는 소설 속에 꾹꾹 쟁여놓았다. 작가와 인터뷰를 빙자해 많은 시간 얘기를 나눴다. 그 대화의 주요 대목을 그대로 옮긴다. 워낙 얘깃거리가 많다 보면 이럴 수밖에 없는 거다.

-김연수는 어렵다.
“작가로서 내 소설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독자가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소통을 염두에 둔 문학 아닌가.
“물론 그렇다. 나는 내 소설이 왜 어렵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어렵다면 증거를 대라.”

-물론 댈 수 있다. 소설이 복잡하다. 여러 서사가 꼬여 있고 엉켜 있다. 소설 한 편에 너무 많은 걸 담으려고 한 듯한 인상이다. ‘달로 간 코미디언’도 마찬가지다. 김득구 얘기를 하려면 김득구 얘기만 할 것이지 왜 자꾸 다른 얘기를 하느냐. 연애 얘기로 시작하는 건 뜬금없어 보인다.

김득구는 실존인물이다. 그 사건을 직접 말하는 건 소설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 김득구란 이름을 끝내 쓰지 않았다. 김득구 사건에서 소설이 비롯됐지만 막상 이름은 쓸 수 없었기에 여러 장치가 필요했다. 여자가 있어야 했고, 그 여자의 실종된 아버지가 있어야 했고, 그 아버지의 실종을 추적하는 단서가 있어야 했다.”(※소설가 ‘나’가 한 여자로부터 실연을 당하면서 소설은 시작한다. 그 여자의 아버지는 80년대 유명했던 코미디언이다. 그 코미디언이 김득구 일행이 돼 미국에 원정응원을 갔다가 실종된다. 소설은 21세기인 오늘과 80년대를 수시로 오간다)

-그러다 보니 너무 복잡해진 거 아니냐. 그럼 작가가 한 문장으로 ‘달로 간 코미디언’의 주제를 말해보시라.
“소통의 문제다. 그게 안 보이다니…, 실망이다.”

-왜 하필 80년대로 건너갔나. 김연수는 90년대 작가 아니었나.
“시대가 구분된다고 해서 삶 역시 구분된다고 믿지 않기를 바란다. 80년대가 있어 90년대가 있었고 오늘이 있는 거다.”(※김연수는 1970년생, 89학번이다. 다시 말해 386세대의 끝물이다. 이념의 시대가 무너질 즈음 그의 청춘은 시작됐다. 그래서 김연수에겐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이던 90년대 초반이 배경인 작품이 여럿 된다. 문단에서 김연수는 90년대란 세대 의식 속에서 해석돼 왔다)



-왜 이 소설을 썼나.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간 적이 있다. 거기 카지노 안에는 TV 모니터 수십 개가 설치돼 있었다. 도박에 지친 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었다. 20여 년 전 한국에서 건너온 권투 선수의 죽음이 저 모니터 중 하나에서 중계됐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일종의 ‘개죽음’이었다. 카지노 손님에게 잠깐의 여흥을 주려고 마련했던 이벤트에 한국인 청년은 목숨을 걸었다. 소설은 그 비극에서 시작됐다.”

-소설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건 아닌가. 그러면 돈을 벌 수 없다.
“돈은 번역을 하거나 다른 글을 써 벌 수 있다. 나에게 소설은 신성한 것이다. 나는 소설가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을 쓴다면 그건 소설가가 아니다. 소설가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을 쓰기 위해 나는 무진 애를 쓴다. 나에게 소설은 일종의 공산품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작품이란 뜻이다.”

-얘기를 듣고 나니 더 모르겠다.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 프로 소설가다.”

김연수는 말 그대로 전업작가다. 오로지 글을 써 밥을 번다. 그러면 시장에서 잘 팔릴 궁리를 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런 쪽엔 영 젬병이다. 김연수는 다만 소설의 격을 갖춘 소설을 쓰고 싶을 따름이다. 독자의 호응은 그 다음이다. 문득 한 늙은 도공의 고집이 떠오른다. 제 목숨 바쳐 도자기를 빚는 도공 말이다. 이런 얘길 슬쩍 비쳤더니 버럭 성을 낸다. “내 소설, 재밌다니까!”(글=손민호 기자)


 
◆소설가 김연수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소설집 『스무 살』(2000년)『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2년)『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년) 장편『굳빠이, 이상』(2001년) 등 다수
▶동서문학상(2001년) 동인문학상(2003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5년) 대산문학상(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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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작가인데 배고프기 싫어요
    from 내 안에 아직 2007-11-17 15:00 
    _지난달에 휴가 나갔을 때 집에서 <창작과 비평>계간지를 읽었습니다.전에 형이 정기구독하던 거였는데요,마악 수능치고 놀기 바쁜 저한테는도무지 읽기 힘든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문학도도 아니면서 뭐 이런 책을 보는가 싶었더랬습니다.요즘엔 좀 이야기가 달라져서 저도 된장삘을 즐기게 되었기 때문에'어디 한번'이란 마음으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정기구독하던 옛날건 아니고 2007년 여름호였으니까 최근거였죠.'한국의 장편소설을 말하다'였나, 특집 주...
 
 
퍼그 2007-10-01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이 인터뷰 읽을 때도 느낀 거였지만, 인터뷰 하시는 분이 어째 꼬투리만 잡고 있는 것 같네요. 그저 "어렵고 돈이 안 된다"는 얘기밖에 없고요. "많은 시간 얘기를 나눴"다는데, 정말 이게 "주요 대목"인지, 다른 얘기들은 어떤 것들이었는지 궁금한데 말입니다.

로쟈 2007-10-02 00:25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김연수는 재미없다는 평도 듣지만 매니아들도 있는데 말이지요...

허리우스 2007-10-01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도 오타가 나네요. 오타인지 모르는 것인지. 뿌넝수어(不能說)이 아닐까요. 항시 고맙게 로쟈님의 글 읽고 있습니다. 한겨레 연재와 담비의 연재도 재밌게 읽고 있고요. 건승하시길.....

로쟈 2007-10-02 00:26   좋아요 0 | URL
'연제' 오타는 고치셨군요.^^ '숴'나 '수어'는 비슷한 것 같은데요.^^

parksang 2007-10-0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갔다가 딱히 맘에드는 게 없을 때, 문지시선 아니면 이승우소설을 사오던 기억이 있어요. 안타는 친다는 믿음을 주던 작가.. 요새 제가 김연수에게 품은 생각입니다. 동시대 기린아들과는 달리, '실패할지 모르지만, 좌절할지도 모르지만(실패할거 같지만, 좌절할거 같지만) 끝까지 한번 가본다' 라는 심사가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그 과정이 겉핥기도 아니고 상투적이지도 않죠. 진짜로 가본거니까. 다른 기린아들은, 출발은 안하고 자학의 제스추어 혹은 재기발랄한 관전평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두번은 재미있지만요, 자꾸 반복되면 어리광 내지는 게으름 같아보여요.

로쟈 2007-10-03 13:17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감합니다.^^

끼사스 2007-10-03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기법을 따지면 잘 모르겠지만 '뿌넝숴'는 김연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속 단편 제목이기도 합니다.

wnsgml 2007-11-17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씨 책보고 혹시 여기도 김연수씨 글 있을까 싶어서 왔는데 역시 안보시는 책 없는 것 같애요

로쟈 2007-11-18 15:21   좋아요 0 | URL
보는 건 읽는 것과는 다릅니다. 많은 책을 보지만 그보다 훨씬 적은 책을 읽습니다...
 

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은 알랭 바디우를 네번째로 다루고 있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5705). '해체주의 시대에 보편적 ‘진리’ 가능성 제시해'가 타이틀이다. 국내에는 그의 책들이 몇 권 소개돼 있지만(<조건들>을 포함해 네 권이 번역돼 있다) 아직 <존재와 사건>(1988) 같은 주저는 번역돼 있지 않다(영역본도 2005년에야 나왔다). 하여 아직은 '미-래의 철학자'가 아닌가 싶다. 참고로 지젝은 아감벤과 바디우 등을 동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꼽는다. 

대학신문(07. 09. 22) 21세기의 사유들 ④ 알랭 바디우

현대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이며, 극작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1937년 모로코 태생으로, 파리 8대학과 파리사범고등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현대 프랑스 철학의 커다란 흐름을 ‘진리’와 ‘체계’의 붕괴로, 혹은 니체의 영향 이후 반(反)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지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알랭 바디우의 사유는 그 반대진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진리’와 ‘보편성’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적 전통, 혹은 이성적 합리주의를 표방하는 데카르트주의적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는 자신의 주요 저서인 『존재와 사건(L'Etre et l'e′ve′nement)』(1988)에서 수학의 집합론에 근거를 둔 ‘순수다수(le multiple pur)’로서의 ‘존재(l'e^tre)’를 말한다. 사실상 ‘수학’을 통해 ‘존재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이 서양철학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수학의 역사’를 ‘존재 물음의 역사’와 동일시하면서 존재론을 펼치고 있는 바디우의 사유는 철학 내에서도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그의 철학이 ‘존재’에 대한 물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바디우는 ‘존재’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연장되거나 구별되는 지점으로서 ‘진리’의 영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그가 프랑스 68년 혁명을 경험한 세대이며, 특히 마오주의자였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존재와 사건』 후반부에서 바디우는 ‘순수다수’인 ‘자연적 존재’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성을 특징으로 갖는 ‘일자를 넘어서는 것(l'ultra-Un)’으로서의 ‘사건적 진리’에 대해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는 ‘진리’를 주장하기를 꺼려하는 이 시대에 비록 지엽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것으로서 ‘진리’를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인식되고 있던 ‘진리’, 즉 유한함에 대립되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영원성으로서의 ‘진리’가 이제는 바디우에 의해 국지적이며 복수적인 이름으로서의 ‘진리’로 다르게 그려진다. 이러한 바디우의 ‘진리’에 대한 일종의 당위적 책임감은, 이어서 ‘윤리’의 문제나 ‘주체’의 문제에서도 새로운 접근을 통해 이전의 전통적 개념과는 단절된 모습으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에게 이미 드러나 있었지만 비로소 개념화된 새로운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진리’나 ‘윤리’에 맞서서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건적 진리’,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사건에 대한 ‘충실성(fide′lite′)’으로서의 ‘윤리’, ‘주체’란 무엇인가? 옳음에 대한 당위성을 말하기 어려운 이 시대에, 그래도 지엽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보편성을 갖는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은 어떤 철학적, 실천적 의미를 지니는가?



모든 철학이 그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자신의 철학적 물음의 기본 출발로 삼았다는 점은 ‘지금(maintenant)’과 ‘여기(ici)’를 중시하는 실천적 철학자 바디우에게 너무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모든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고 ‘다양’과 ‘차이’만이 강조되는 현 상황에서, 바디우는 ‘진리’와 진리과정에 수반되는 것으로서의 ‘사건적 주체’를 주장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있음(존재일반)의 이름인 다름(차이)’이 아니라, 무엇인가 특별한 사건적 진리에 충실해 우리의 삶을 예기치 못하는 특별함으로 바뀌게 하는 ‘같음’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이 ‘같음’은 다름과 구별되며, 유일하게 ‘다름’에 무관심하며, 무엇인가에 충실하게 하는 ‘주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게 하는 ‘진리의 이름’인 것이다. 우리에게 ‘다름’이나 ‘차이’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의 모습이지, ‘같음’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추구해야 하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바디우의 ‘사건적 진리’에 대한 사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유가 팽배해 있는 현 시대에, 다시 말하자면 ‘진리’나 ‘주체’를 더 이상 주장하려하지 않는 현시대에, 그럼에도 소위 변화된 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위에 자신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출하며 개입하고 있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서 ‘진리’와의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서의 ‘주체’란 무엇인가? 우리가 ‘우연’의 이름 하에 맞이하게 되는 하나의 ‘사건’에 충실할 때, 그 우연적 사건은 주체를 진리과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하자면 바디우의 ‘주체(sujet)’란 ‘주체화의 과정(subjectivation)’과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 주체는 진리를 수반하는 ‘사건’ 이전에 미리 존재할 수 없으며, 진리가 복수인 것처럼 주체 또한 ‘복수’의 형태로 생성된다. 말하자면, 어떠한 ‘진리’나 ‘윤리’, ‘주체’도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존의 백과사전적 지식에 ‘구멍을 뚫는 것’으로서, 새로운 것의 완전한 출현으로 나타난다.

그간 강한 정치적 저항의식을 가져왔던 우리의 역사적인 특수함을 고려해 볼 때, 또 그 반대급부로서 항시적인 안정추구를 위해 여러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 작용돼 왔던 지난 시절 지배질서의 담론과 그 역학관계를 확인해볼 때, 알랭 바디우의 철학적 사유는 우리사회의 도덕담론이나 지배담론이 갖고 있는 문제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줄 뿐 아니라, 해체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형태의 대안이 아닌 변화와 미래의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 줄 것이다. ‘있음’의 이름이 ‘차이’와 ‘다양’이라는 그의 사유는 서양 고전적 철학의 맥을 잇는데, 이는 우리에게 ‘평등’에 대한 당위성의 근거를 마련해준다. 동시에, 비록 한시적이고 지엽적일지라도 보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추동의 힘을 사유할 수 있게 한다.(홍기숙 강사/숭실대 철학과)

07. 10. 01.

P.S. 마지막 문단 같은 건 좀더 간결하게 씌어지는 게 어땠을까 싶다(바디우의 문장들이 그러한가?). 바디우 입문서로 가장 유명한 책은(그 사이에 더 좋은 책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피터 홀워드의 <바디우: 진리를 향한 주체>(2003)이다. 지젝이 서문을 쓰고 있는데, 460쪽이 넘는 묵직한 책이다. 아래는 뭔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지젝과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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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멘트 2007-10-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거장의 밀담 사진이 자못 진지하네요.^^ 두 사람이 서로 친하다죠. 스피노자와 니체주의자들이 휘저어놓은 세상을 헤겔주의자인 지젝과 플라톤주의자인 바디우가 대응책을 논의하며, 서로 연대를 모의하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잡담하는 걸까요. ㅎㅎ 지젝이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철학계에서의 바디우의 무게감에 비해, 국내에는 그의 저서나 이차문헌의 번역이 부진한 듯합니다. 칸토르의 집합이론과 연관된 그의 '다수'철학의 난해함 때문도 있겠지만, '대중성' 내지는 '시장성'이 다소 떨어져서가 아닌가도 생각해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순수철학에의 고집은 언젠가 국내에서도 빛을 발하리라 기대해봅니다. 그의 주저인 <존재와 사건>이 빨리 번역되어 나왔으면 좋겠네요. 내년에 서울에서 개최될 <세계철학자 대회>에 바디우도 참석할 예정이라는데, 벌써부터 그의 강의가 기다려집니다.^^

로쟈 2007-10-03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공부하신 분들도 있다니까 조만간 주저들이 소개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통가능한 것이 될지는 기다려봐야 할 것 같고요...

자꾸때리다 2007-10-03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디우 밑에서 박사학위 딴 분들이 서용순, 박정태, 홍기숙... 이렇게 되지 않나요?

로쟈 2007-10-03 11:23   좋아요 0 | URL
저보다 잘 아시네요.^^ 여하튼 몇 분 된다고 하네요...
 
정열의 수난 - 장정일 문학의 변주
문광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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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지 칼럼 등에서 자주 접하던 문광훈 교수의 책을 처음 읽었다. 하지만 보론까지 포함하여 본문 365쪽의 책을 한 시간만에 읽었으니까 그냥 넘겨본 수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읽으려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지만 읽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또 잘 읽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저자와는 코드가 전혀 맞지 않는 듯한데, 서점에서 거의 살 뻔했으나(재고도서에는 있었지만 매장에는 없었다) 구하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은 게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일단 '장정일 문학의 변주'란 부제를 달고 있어서 나는 의당 '작가론' 정도의 책인 줄 알았지만 <정열의 수난>은 내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책이다(물론 '역사-서사-권력-문화의 관계'도 속표지에는 부제로 돼 있다). 장정일을 다루고는 있으나 주로 <중국에서 온 편지>란 중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에(이 작품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온전한 작가론은 아니며, 그렇다고 작품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제시하고 있는 '작품론'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그러한 것은 책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글은 작품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해석을 의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소설 언어를, 그 언어의 권력 성찰적 본성을 우리 사회의 이념적-문화적 갈등의 문제 지평에 놓고, 그것이 가치의 개방과 삶의 해방이라는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이때 감각과 사고의 갱신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23쪽)는 게 의도이기에(하지만 나는 저자의 문제의식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왜 장정일인가? 저자가 묻고 답하는 바에 따르면, 일단은 "기질적으로 유사하게 느껴져서"라고 한다. 그리고 그걸 보충해서 "내가 그를 읽는 가장 중대한 이유는 그의 글이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내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하는 데에 가장 유쾌한 성찰 재료가 되기 때문이지 싶다."(13-4쪽)라고 적는다. 거기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책은 '문광훈이 말하고 싶은 바'를 늘어놓을 따름이지 장정일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해주는 바가 없다(그냥 저자의 '지리한' 예술론만 나열된다). 나로선 '중국'에서 온 편지만큼이나 해독하기 난해하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책장을 넘겼지만 정작 <중국에서 온 편지>가 다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은 전체 8장 중 5장(148쪽)에 가서이다(책의 절반이 서론이다!) 아무리 '에세이'라고 쳐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게 저자의 스타일인 것인지? 그냥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독서일기7>(랜덤하우스, 2007)에서 장정일 자신이 말해놓은 게 훨씬 짧고 유익하다(그는 이 소설을 <일월>이란 희곡으로도 각색했는데 그에 대한 소개글이다).  

그렇게 좀 허무하게 본론이 다 끝나면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 읽기'라는 보론이 나오는데, 이 또한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나는 '장정일이 어떻게 읽혔는가, 내지는 어떻게 읽히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춘 글을 기대했지만 저자는 '한국 사회에서 장정일을 읽는다는 것'에 주안점을 둔 듯하다.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민주적 사회질서는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위로부터가 아니라 내부로부터, 엘리트 중심의 협소한 정치 행위가 아니라 시민 중심의 광범한 참여로부터, 불신과 배제의 원리가 아니라 인정과 포용의 원리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347쪽) 너무 지당하신 말씀이라 종이가 아깝게 여겨진다.

저자의 예술론: "예술은 논리와 개념으로 삶이 비틀어지기 전의 정치 이전적 세계 - 원형적이고 근원적 진리가 비유적으로 현현하는 장소이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작품에 대한 감상, 곧 심미적 경험이 '민주주의를 내실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한다. 왜인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지지하는 평등,자유, 박애, 인권, 생명, 평화와 같은 보편 가치들이 나날의 생활 안으로, 개개인의 습관과 사고, 행동과 양식 안으로 육화되어야 한다. 작가는 바로 이런 일에 자신의 표현을 통해 참여하는 대표적 존재이다."(353쪽) 요컨대, 사회주의 예술론의 민주주의 버전 같다. "문학예술은 민주적 가치를 생활에서 육화하기 위한 상상력의 의미화이다."란 단정적인 규정은, 하지만 민주적인 규정인 것인지?



아무튼 내가 요약할 수 있는 저자의 입장은 이런 정도이다: "세상을 좀 더 낫게 만들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예술의 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글을 쓸 것이고, 이렇게 쓰인 글을 어떤 믿음으로 읽을 것이며, 또 이렇게 읽은것이 어떻게 나날의 자양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술-아름다움-반성과 자유-평등의 세계공화국, 이 둘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어 보이지 않는다.(...) 장정일의 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가 보여주는 문제의식도, 그 문화적-문화적 의미도 이 점에 닿아 있지 않나 여겨진다."(356쪽)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350쪽이 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수난'이지 않나 여겨진다.

저자로서의 변명 내지는 자긍심: "글을 쓰는 것이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글을 쓰지 않을 때보다 쓸 때 더한 행복을 느낀다."(103쪽) 그의 '행복'을 탓하거나 말리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게 쓸 경우에라도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지 않을까? 2장의 제목을 ''욕됨을 견디다': 나, 문광훈의 경우'라고 달아놓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두세 해 전부터 '나이 마흔이 무엇인가'란 문제에 골몰해왔다는 것 말고는 그 자신의 실존에 대해서, 그리고 '욕됨'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종암결찰서의 전경들' 정도가 유일하게 구체적인 '지표'이다). 근래 드물게 읽은 기이한 책이고 저자이다.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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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2009-07-21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마흔이 문제였던 듯하다....
개인적으로 매력을 느낀 책이 번역되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서
오역을 강행하는 결례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포스트 386세대를 위한 문화 교양지'를 표방하는 무크잡지 <소문>(민음사) 창간호가 나왔다('소문'은 '소통과 문화'를 뜻한다고).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원고를 넘긴 것이 지난 1월 중순이었으니까 꽤 오래 '뜸'을 들이다가 나온 셈인데, 아직 책은 받아보지 못하고 보도(소문!)를 통해서만 출간 소식을 접했다. 기획위원들이 적은 '창간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내가 무슨 일에 동참했던 것인지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소문> 창간사 - 새로운 시간과 문화의 의미 찾기

2007년은 오 년 만에 돌아오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며, IMF 경제 위기를 겪은 지 십 년, 그리고 6월 항쟁이 있은 지 이십 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에 대한 회고와 변화된 의미 찾기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에 대한 생각들로, 대중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다시 한 번 빨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역사에 어떤 ‘주기’가 있는 것이라면, 올해 이 땅에서는 또 한 번 거대한 변동이 일어날 조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직장과 대학, 책과 영화, 신문과 인터넷, 그리고 여자와 남자들은 돌이킬 수 없이 바뀌었습니다. 돌아보면 마음보다 몸이 변하는 속도가 더 빨랐고, 그보다 세상 변하는 속도는 좀 더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변동을 향해 ‘모순’이 착착 누적되고 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려고 한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새로 태어날 것이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수반합니다. 한때는 가장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었던 ‘새로움’이라는 가치는 속도와 손잡기 시작하면서 우리를 끝없는 현기증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기존의 것들에 대한 부정과 혁신적 태도에 대한 요구는, 한꺼번에 몰아닥친 수많은 ‘조정’과 ‘개혁’ 속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우리의 삶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좀 더 경제적이고, 좀 더 효율적이고, 좀 더 대중적인 어떤 것이 선한 것이라는 막연한 동의하에, 각자 자기 방식의 경제와 효율과 취미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며 다른 이들에게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립니다.

간헐적으로 이 새로운 시간을 사는 이들의 의식과 그들이 영위하는 ‘문화’의 의미에 대해 점검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발언하고 네트워킹하는 장은 별로 없었습니다. 또한 수많은 블로그와 미니홈피들 그리고 댓글과 UCC를 통해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이 왔지만, 그 안의 많은 이야기들은 누군가가 이미 뱉어놓은 것들을 복제하거나 추인하거나 엉뚱한 말놀음만 벌이다가 으스러지기도 합니다.

많은 고민과 곡절을 겪은 후에, 기대했던 것보다 반년이 넘어 지나서 무크 <소문>이 나왔습니다. 기다리시던 독자들과 필자들께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만, 이렇게 늦어진 이유는 다음과 같은 좀 근본적인 의문에 관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무엇보다, “아직도 종이잡지를 매개로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가능한가?” 사실 종이 잡지는 낡은 것이 되어 문화의 주변으로 밀려 나고 있습니다. 앎과 일과 향유는 모두 종잇장보다 더 가벼워져서 ‘디지털’의 공간에 떠돌아다닙니다. <창작과 비평> 세대의 의식과 문화를 지양해야 하는 힘은 단지 내용에만 있지는 않은 것이지요. 거대한 소통 체계의 변화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는 아직 명징하지 않습니다. 다만 계속 더듬어 나아가며 실험해야 한다는 신념은 가지고 있지만요. <소문>은 그러한 실험의 하나로서 기획됐습니다.

<소문>의 작은 실험은 우리가 품은 다음과 같은 의문들과 연관돼 있습니다. “지난 스무 해 동안 달라진 삶의 양식과 정치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읽고 묘사할 것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새로운 세대는 ‘386’세대들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근본적이고도 비약적인, 동시에 아래로부터 추동되는 저항과 변화는 아직도 가능한가?”

이러한 의문들은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386’세대의 함의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이 외치고 지키려 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지난 십여 년 사이에 현실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괴물로 변화해 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시장’은 삶을 갈가리 찢어놓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참을 수 없게 떼어놓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세대 안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유지하는 이들과 그 이후의 세대는 어떤 방식의 운동성을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아직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본적인 가치여야 할 자치와 연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점점 달성 불가능한 미션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수많은 회의 속에서도 여전히 3할의 희망과 7할의 낙담이 뒤섞인 심정으로, 우리의 오늘과 미래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소문>의 첫 발자국은 우리의 평범한 생각과 몸에 육박해오는 음험한 힘들 앞에 새기려 합니다. 그리하여 고심 끝에 첫 번째 기획 테마를 ‘중독’으로 정했습니다. 중독은 원치 않는 어떤 행위를 자신도 모르게 반복적으로 강제하는 자기 자신 속의, 또한 우리 몸 바깥으로부터의 위력적인 메커니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독은 주관과 객관이 극단적으로 만나는 한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와 생각해볼 거리들을 담아 보았습니다. 마약ㆍ술과 같은 물질중독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의 삶에 깊이 침투해 있는 보편으로서의 과정중독들, 그리고 이를 강제하는 배후의 힘과 그에 연관된 역사적·정치적·문화적 ‘증상’들까지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이런 기획과 더불어 천명관ㆍ정희진ㆍ로쟈ㆍ신윤동욱과 같은 ‘탈근대’ 한국사회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과 위치를 가진 필자들의 다양한 시각과, 공원국ㆍ김국현ㆍ신호철 씨처럼 90년대에 성장하여 21세기의 ‘현장’을 지키고 있는 젊은 목소리도 담았습니다.

<소문>의 첫걸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시련의 시간들은 앞으로의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의 과정이었으리라 믿습니다. 많은 격려와 질책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9월

<소문> 기획위원 천정환·박경신·김현철·이영아·김지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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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9-30 15:17   좋아요 0 | URL
로쟈님 활발히 활동하시는군요. 신윤동욱 기자가 본격적으로 책도 내고, 대외활동(?)도 하는군요 이제. :)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계절에 한두 편 쓰는 걸로 '활발'하달 수는 없지요. 서재활동은 '활발한' 편이지만.^^

수유 2007-09-30 18:32   좋아요 0 | URL
이젠 본명을 쓰시는 것이 어떨까요?
잡지 나오면 한번쯤은 꺼내서 읽어보겠습니다. 내 맘에 들면 구독하고^^

로쟈 2007-09-30 19:10   좋아요 0 | URL
이게 무크라서 언제 또 나올지는 기약할 수 없답니다.^^;
 

'건강은 타고난 복'이라고 옛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의 상식은 좀 다르다. 특별한 '통뼈'가 아니라면 건강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된다, 는 게 요즘의 통념이 아닐까? 그런 통념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사회의제화를 위한 국민보고서'를 부제로 달고 있는, '건강불평등에 관한 대국민 보고서이자 한국판 건강불평등 르포르타주' 이창곤의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밈, 2007)에 대한 소개기사를 옮겨놓으면서 몇 자 보탠다.  

 

한국일보(07. 09. 29) 경제력 따라 건강이 달라진다… 그 불편한 진실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건강 정도가 다르다.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느껴왔고, 1990년대 말 IMF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체감하고 있는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든다.

건강에 해로운 흡연을 예로 들어보자. 흡연이 원인의 75%를 차지하는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은 낮은 계층이 높은 계층의 2.3~8.1배에 이른다. 학력과 소득, 직업 등에 따라 흡연의 정도나 금연에 참여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막노동꾼 떠돌이 등 저소득층의 삶에는 흡연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들에게는 몇 천원의 담배 외에는 삶의 팍팍함과 고단함을 손쉽게 풀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보건소의 금연클리닉은 들어본 적도 없다. 반면 교사 건축설계사 사업가 등 안정적인 직업과 고소득 계층은 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고 금연도 쉽게 한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는 아이의 건강에 결정적이다. 아이를 낳기 직전까지 어머니의 영양상태와 물질적 환경이 아이의 건강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저체중아는 건강불평등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강원대 손민아 교수의 조사에 따르면 아버지의 학력은 저체중아 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학력은 보통 경제력의 잣대로 간주된다. 아버지가 초등학교 졸업 이하인 경우 대졸 이상보다 저체중아를 얻을 확률이 1.69배 높다. 고졸 아버지는 1.1배, 중졸은 1.44배 높다.

서울 강북구에 사는 사람이 질병, 사고 등으로 숨질 가능성은 서울 서초ㆍ강남구에 사는 사람보다 30%가 더 높다. 성과 나이가 똑같을 경우 전국에서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곳은 서울 서초구이며 가장 높은 곳은 경남 합천군으로, 두 지역의 격차는 갑절이나 됐다. 2000년부터 2004년까지 5년간 전국 234개 시군구의 사망등록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다. 강남에 사는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고, 좋은 직업,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많다. 또 다른 지역보다 인구 당 운동시설이 더 많을 수 있다.

건강이 좋지 못한 저소득층이 당연히 의료이용 수준이 높을 것 같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특히 큰 돈이 들어가는 암 치료에서는 고소득층의 이용이 더 많다. 저소득층은 병에 더 잘 걸리고 치료는 덜 받으니 건강이 더 불량할 수 밖에 없다. 지난해 초 <한겨레>에 연재된 기획기사를 뼈대로 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 사회나 정부가 건강불평등 문제에 관심을 좀더 갖고 해결책을 마련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남경욱기자)

07. 09. 30.

P.S.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리처드 월킨스의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당대, 2004)와 마이클 마멋의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2006), 그리고 최근에 나온 사라 네틀턴의 <건강과 질병의 사회학>(한울, 2007) 등이 있다. 평균수명이 길어지는 만큼(그만큼 병치레 기간이 길어질 거란 얘기도 된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오래 버티게 될 것이다) '건강불평등'과 '사회적 건강'(과연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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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질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3-15 11:09 
    지난주에 서평도서로 내가 고려했던 책은 그 전주에 나온 <권력의 병리학>(후마니타스, 2009)과 <거꾸로 가는 나라들>(난장이, 2009)이었다. 지면 사정상 후자에 대해서 쓰게 됐고 <권력의 병리학>은 읽어보지 못했는데, 의외로 리뷰기사가 별로 올라오지 않았다. 다행히 메인으로 다룬 기사가 하나 있어서 옮겨놓는다.      서울신문(09. 03. 06) 질병은 왜 가난한
 
 
수유 2007-09-30 18:33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꼭 그런것만은 아닌것도 같고요..

로쟈 2007-09-30 19:11   좋아요 0 | URL
정신건강은 '평등'한 건가요?^^

瑚璉 2007-09-30 20:59   좋아요 0 | URL
유감스럽지만 정신건강도 재벌 급의 재화집중이 아니라면 경제력과 정비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건강불평등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항상 궁금한 건데 과연 건강평등이라는 것 자체가 이룰 수 있는 목표인 건지, 아니 그 전에 바람직한 것이기나 한 건지 모르겠네요.

로쟈 2007-09-30 23:38   좋아요 0 | URL
'건강평등'이란 말이 좀 낯설지만 건강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망에 관한 것이죠.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죽는 사회가 바람직한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바라 2007-10-01 00:41   좋아요 0 | URL
그냥 제 경우에 보면 소방서에서도 이른바 잘 사는 곳과 못 사는 곳의 구급출동 건수의 단적인 격차에서 느껴지는게 많더군요. 소개해주신 책과 더불어 "보건의료 : 사회 생태적 분석을 위하여"라는 책도 읽어볼만한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01 00:52   좋아요 0 | URL
추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천연구실에서 낸 책이군요...

비공개 2007-10-01 17:46   좋아요 0 | URL
지난해쯤 한겨레에서 건강불평등을 기획기사로 연재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 기사 읽고서 충격으로 받아들였었는데 여러권의 책이 나온 걸 보니 논의가 많이 진전된 것 같네요.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7-10-02 00:30   좋아요 0 | URL
그 연재를 책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얼만큼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