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1604913)으로 올려놓은 에드워드 윌슨의 신작 <생명의 편지>(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한 자세한 리뷰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구입하지 못했는데 여유가 생기는 대로 그의 생태학 관련서들을 모아놓을 작정이다.

문화일보(07. 10. 12) 생명의 위기… 老과학자는 왜 종교에 도움 청했나

“나에게 우리 사이의 차이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무엇보다 창조물(the creation)을 구원하고자 합니다. 살아 있는 대자연을 지키는 것은 보편적인 가치입니다. 그것은 어떤 종교적 또는 이념적 교의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교의를 조장하지도 않습니다.”

통섭(統攝·consilience)의 사상가이자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생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에드워드 윌슨(78·하버드대 생물학과 석좌교수)이 지난해 펴낸 책이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이 진화 과정의 결과로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회생물학을 만든 윌슨은 이어 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 지식의 대통합(통섭)을 주장하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젊은 학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는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을 만큼 현존 최고의 과학저술가로 꼽힌다.

하지만 이번 책은 그의 사상적 궤적에서 한 발 비켜나 있는 내용이다. 그는 돌연 생명의 위기를 소리높이 외치며 종교에 손을 내밀고 있다. 과학과 종교가 함께 나서야 할 급박한 위기라고 호소하고 있다. ‘과학의 힘’을 신봉하는 환원주의자인 윌슨이 마치 종말론의 기독교인처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종교에 호소하다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대과학자가 가진 생명 위기의 ‘절박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책은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교파인 남침례교 목사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의 형식을 취한다.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자에게 호소하는 셈이다. 저자가 책의 원제목을 ‘THE CREATION’이라고 한 것도 기독교적으로 ‘피조물’의 의미와 겹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왜 종교에 호소한 것일까. “그것은 종교와 과학이 오늘날 미국을 비롯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와 과학이 생명의 보전을 위해 연대한다면 그 문제는 곧 해결될 것입니다.”

하지만 종교에 손을 내민 것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어 보인다. 말 그대로 ‘현실적 힘’에 기대는 측면도 있고, 저자가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진 않지만, 바로 기독교가 ‘선택된’ 인간을 제외한 피조물과 그들의 터전을 정복하고 파헤치는 자본주의 이념의 배후라는 측면도 있다. 윌슨은, 현실적으로도 미국인의 60%가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을 믿으며, 단지 지구를 잠시 거주하는 곳 정도로 대한다고 근거를 들어 비판한다.

“이런 유형의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생물 1000만종의 운명은 일말의 가치도 없습니다.(…)그것들은 절망과 무자비의 복음입니다. 그것들은 기독교의 본령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내가 틀렸다고 말해주세요!”

윌슨은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완전히 갈라진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다시 손을 맞잡게 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옥스퍼드대 생물학 교수인 리처드 도킨스는 이 책을 과학이 종교에 보낸 ‘외교문서’라고 평가했다.

윌슨은 지구환경의 위기를 절박하게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지구의 산소공장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열대우림의 70%가 파괴됐고, 담수 생태계 역시 80% 이상 파괴되면서 담수생물들의 무수한 멸종은 물론, 인류가 사용할 물도 거의 사라졌다. 지구상 동식물 종의 절반이 금세기 말이면 멸종을 맞거나 그럴 운명에 처할 것이며 4분의 1은 기후 변화만으로도 50년 이내에 멸종할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멸종 속도는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이전 속도의 100배이며, 다음 수십 년 안에는 최소한 1000배는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윌슨은 “문명은 자연에 대한 반역을 통해 이룩됐다”며 이를 그만두고 ‘대자연을 향한 등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풀어야 할 3가지 난제로 제시하는 것은 환경에 대한 무지, 과학교육의 부실, 생물학의 급격한 발달이다. 환경에 대한 무지와 과학교육의 부실은 연관이 깊다. 그는 우리의 아이들은 자연주의자로 키워야 한다고 역설하며 그 구체적인 교육방식까지 설명한다. 과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져서 자연주의자가 많이 육성되면 세번째 쟁점인 ‘생물학의 급격한 발달’로 인한 문제는 해소된다. 모든 사람이 과학적 활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읽다보면 다소 ‘썰렁한’ 느낌이 든다. 역시 과학의 힘을 빌려 해결하겠다는 결론인데, 생명의 위기에 대한 책임을 상당부분 져야만 할 과학을 통해, 더 나아가 2세들의 과학교육을 통해 과연 생명의 위기가 해소될까. 여기서 과학적 환원주의자인 윌슨의 한계를 보는 듯도 하다.



실상 그의 ‘통섭 사상’도 동등하고 양방향적인 관점의, 말 그대로 ‘통섭’이 아니라, 일방향성의 환원적 통합이며, 여러 학문들 사이에는 위계 질서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 중심에는 항상 과학이, 물리가 놓여 있다. 결국 과학이 왕이고 다른 인문학은 모두 과학으로 ‘헤쳐모여’라는 식이다.

이번 책에서도 종교와 열어놓고 손을 내밀기보다는 결국 과학 우위라는 저의를 숨기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생명의 위기를 초래하는 데 과학과 종교가 모두 한몫을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다시 씁쓸해지기도 한다. “현재의 우리는 종교와, 과학에 기초한 계몽 운동에서 비롯된 문명의 산물입니다”라고 윌슨은 ‘실토’하고 있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윌슨의 희망어린 제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면 노학자의 꿈과 열정에 큰 감동을 받을 만한 책이다.(엄주엽기자)

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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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6 16:28   좋아요 0 | URL
캬캬캬 저는 구해놓았지요!!

로쟈 2007-10-16 16:36   좋아요 0 | URL
저보단 형편이 좋으시네요.^^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머리말을 읽다가 흥미로운 '오역'이 있어서 적어둔다. '오역'이라기보다는 '실수'라고 해야 할 텐데, 벤야민의 에세이 제목인 '번역자의 과제'가 갖는 중의성에 빗대자면 '번역가의 과제'에 충실하다 빚어진 '번역자의 실패'라고 할 만하다. 어제 잠시 들춰본 <폴 드 만과 탈구성적 텍스트>(앨피, 2007)에 나오는 한 대목은 이렇다.  

 

 

 

 

"드 만에 따르면 '번역자는 그 정의상 실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번역도 늘 원 텍스트에 부차적인 것이고, 번역이 원전과 마찬가지의 일을 수행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하고 있다. 벤야민의 독일어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과제Die Aufgabe des Ubersetzers'이다. 여기서 '과제Aufgabe'는 '과제'와 '포기하는 자'(프랑스 투어를 포기하는 사이클 선수는 '아우프가베aufgabe'라고 불린다)를 동시에 의미한다. 따라서 벤야민의 텍스트 제목은 '번역자의 실패'로 옮길 수 있다. 달리 말해서 번역자는 원전을 옮기는 일에서 늘 실패한다. 그리고 번역 자체는 늘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번역자는 원전을 제공하는 시인이나 예술가와는 다르다."(117쪽)

원론적으로 말해서 "번역자는 시작도 하기 전에 이미 실패"한다고 하니까 역자가 머리말에서 실패하는 일이 이상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이 거꾸로 말해주는 것은 '번역자의 과제'를 현재 수행중이라는 것일 테니까(모든 번역자가 갖는 느낌이겠지만 번역은 마치 장거리 사이클링처럼 고단하고도 지리한 자기와의 싸움인지라 언제라도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데리다의 머리말은 어떻게 시작하는가?

"여러분들이나 나 가운데 어떤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말한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시작이 이렇다. 데리다는 이 두번째 문장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je voudrais apprendre à vivre enfin)"에 대한 자세한 검토(내가 '뜯어읽기'라고 부르는 것)로부터 자신의 발언을 시작한다(이건 거의 그의 스타일이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9쪽)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진 불어의 '이상한 표어'는 'apprendre à vivre'를 옮긴 것인데, 특이하게도 불어에서 이 문구는 사는 법을 가르치다와 배우다,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할 수 있다(며칠 전에 '공부'에 대한 짤막한 원고를 썼는데, 불어의 이 표현이 아주 적절할 뻔했다. 가르치기와 배우기의 변증법!). 이것은 역자도 각주2)에서 설명해놓은 것이다(영역본에서는 첫번째 각주로 나온다) "프랑스어에서 'apprendre'는 '-을 배우다'는 뜻과 함께 '-을 가르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번역 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용문을 옮길 때 역자는 그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다른 번역서들에서도 중의적인 의미는 모두 병기해주던 역자가 왜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그러나 누구에게?"란 시작을 우리말로는 동어반복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찾아보니 실상 원문 자체가 '동어반복'이긴 하다.

"Apprendre à vivre. Etrange mot d'ordre. Qui apprendrait? de qui? Apprendre à vivre, mais à qui?.." 하는 식으로 'Apprendre à vivre'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맥상 둘은 의미가 같지 않다. 첫번째 'Apprendre à vivre'는 뒤에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Qui apprendrait? de qui?)'가 따르므로 '사는 법을 배우기'라고 옮겨야겠지만, 두번째 'Apprendre à vivre'에 뒤따르는 'à qui?'는 나를 가르칠 사람이 아니라(de qui?) 내가 가르쳐야 할 사람을 가리키는 '누구에게?'이다. 즉, 이렇게 돼야 한다.   

"사는 법을 배우기. 이상한 표어이다. 누가 배우는가? 누구에게서? 사는 법을 가르치기, 그러나 누구에게? 우리가 정말 알게 될까? 우리가 정말 사는 법을, 그 전에 먼저 '사는 법을 배우기/가르치기'가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될까? 그리고 왜 '마지막으로'인가?"

영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To learn to live: a strange watchword. Who would learn? From whom? To teach to live, but to whom?.."(역자는 왜 영역본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요점은 불어의 Apprendre à vivre란 관용어가 To learn to live와 To teach to live란 의미를 둘 다 가지며 우리말 번역에서도 불가불 그렇게 따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문맥에서 독립적인 Apprendre à vivre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데리다가 애용하는 '결정불가능성'의 또 다른 사례이겠다). 이 점은 데리다가 곧바로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맥락 바깥에서 그것 자체만 놓고 볼 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한 문구를 이룬다. 더욱이 그 관용어는 어느 정도까지나 번역될 수 있을까?"

'문장이 없는 이 표어'는 'ce mot d'ordre sans phrase'를 옮긴 것인데, 사전을 찾아보니 'sans phrase'는 '쓸데없는 말은 빼고' '간단 명료하게'란 뜻도 갖고 있다(영역본은 'sans phrase'를 따로 옮기지 않았다). '이 표어 자체로는' 정도의 뜻이면 충분할 듯하다('Apprendre à vivre'는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에 '문장이 없는 이 표어'란 번역은 어색하다. '앞뒤로 따라붙는 문장이 없는'이라고 풀어준다면 모를까). 즉, 문맥 바깥에서(out of context) 'Apprendre à vivre'란  이 문구(관용어)는 거의 이해불가능하다(의미를 확정지을 수 없다).

한 가지 더 역자의 실수라고 할 만한 것은 인용문 안의 ('문맥'이란 말을 보충하는) 삽입절을 누락한 것. 원문으로는 "mais un context, toujour, reste ouvert, donc faillible et insuffisant'이 번역에서 빠졌다. 영역으로는 "but a context , always remains open, thus fallible and insufficient"이고 우리말로는 "하지만 이 문맥이란 것은 언제나 열려있기 때문에 틀리기 쉽고 불충분하다" 쯤이다. 다시 말해서 문맥이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의미의 불확정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읽어나가야 한다. 서로에게 배움/가르침을 주고 받으며(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가?) 아무리 험한 길이더라도,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07. 10. 13.

P.S. 집에 돌아와 예전 번역본 <마르크스의 유령들>(한뜻, 1996)에서 같은 대목을 찾으니 이렇게 옮겨져 있다: "사는 법을 배움: 이상한 구호이다. 누가 그것을 배웠는가? 누구에게?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누구에게 배운다는 말인가? 누가 그것을 알고 있었던가? 우리가 사는 법을 알고 무엇보다도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가? 그리고 왜 '궁극적으로'인가?.."  사는 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대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나 하는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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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2007-10-13 18:3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을 따라' 데리다를 언제 한번 읽어보자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로쟈 2007-10-13 19:12   좋아요 0 | URL
기분이 좋아지셨다니까 저도 좋군요.^^

hemiola 2007-10-13 22:14   좋아요 0 | URL
아. 아프렁드흐 아 비브흐요.. ㅋ 예전에 뽀네뜨(Ponette) 란 영화를 보다가 apprendre a vivre 란 대사를 보고 한참을 되새겼던 기억이 있습니다.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그런데 막상 한국말로 옮기려니 그 맛이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불어로 중얼거리기만 했죠. apprendre a vivre.. apprendre a vivre... 외국어를 느끼는 맛이란 이런 거 같아요. 직역이나 의역이나 오역을 떠나서 입에 붙고 리듬이 되고 살이 되고 그것이 때로는 사상이 되기도 하고,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ㅋ

로쟈 2007-10-13 22:58   좋아요 0 | URL
네, 어쨌든 좋은 말입니다...

람혼 2007-10-14 02:24   좋아요 0 | URL
저도 apprendre의 번역 부분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했는데, 이런, 로쟈님께 선수를 빼앗겼군요.^^; "가르치기와 배우기"라는 제목을 보니,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도 갑자기 오랜만에 떠오릅니다.^^

로쟈 2007-10-14 08:11   좋아요 0 | URL
꼼꼼한 번역에서 의외로 실수와 누락을 발견하게 되어 겸사겸사 페이퍼를 썼습니다. 디음부터는 선수를 빼앗기지 마시길.^^

yoonta 2007-10-14 11:59   좋아요 0 | URL
"사는법을 배우기"와 "사는 법을 가르치기"와 같은 관용어가 프랑스어에서는 중의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네요. '산다는 것'이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기도 하고 배우면서도 동시에 가르치기도 한다는 일상적 삶의 지혜를 반영하는 것 같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하여튼 늘 느끼는 거지만 로쟈님의 "뜯어읽기"도 보통 단수는 아니신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0-14 12:44   좋아요 0 | URL
영역본과 대조해서 읽다보면 누구나 의아하게 생각했을 대목입니다. 다만, 굳이 지적들들 하지 않거나 다른 일들에 바쁠 따름이겠지요...

balmas 2007-10-14 17:52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오식과 어색한 표현들이 몇 군데 눈에 띄어서 공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로쟈님이 오역도 찾아주셨군요. 첫 대목부터 오역이 나와서 부끄럽긴 한데, 그래도 모르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다행입니다. 로쟈님께 감사드리고, 어서 공지를 해야겠군요.

로쟈 2007-10-14 18:0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예전판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진 번역 덕분에 데리다를 읽는 이들이 늘어난 건 고무적인 일이죠.^^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9, 10월의 사회적 독서의 주제 중 하나는 '제국'이다(http://blog.aladin.co.kr/mramor/1540493). 미처 다 읽지는 못하겠지만 견적이라도 내볼 요량으로 대출한 책이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 

옥스포드대출판부에서 내는 'A Very Short Introduction'의 한 권이다. 내가 '아주 간단한 입문'이라고 부르는 시리즈로서 분량 대비 만족도가 아주 높은 책들이다. 책의 말미에는 부록으로 '더 읽을 거리'가 제시돼 있는데 몇몇 권은 국내에 이미 소개된 책이어서 겸사겸사 참고해볼 만하다.

 

 

 

 

먼저, 중국사학자 페어뱅크의 <신중국사>(까치글방, 2005)는 '중국 제국에 관한 입문서'로 소개돼 있다. 알다시피 페어뱅크는 하버대학의 역사학부 교수로서 영어권에서는 중국사학의 대부 정도 될 듯하다. 최근에 10권과 11권이 번역돼 나온 <캠브리지 중국사>(새물결, 2007)의 책임편집을 맡고 있기도 하다. 

 

 

 

 

마셜 호지슨의 <이슬람의 모험>(1974) 전 3권도 무슬림 제국의 건설과 보편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연구서로 추천되고 있다. 호지슨의 책은 <마셜 호지슨의 세계사론>(사계절, 2006) 정도가 소개돼 있는 듯하다. 그리고 물론 역사적인 '세계체제'와 '세계 제국'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논의"로 꼽히는 월러스틴의 <근대세계체제>(까치글방, 1999)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지만 D. 아베메티의 <세계 지배의 동학(The Dynamics of Global Dominance)>(2000)은 "근대 제국에 관한 개론서 중 하나로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루고 있다"고 소개된다.

 

 

 

 

위르겐 오스터함멜의 <식민주의>(역사비평사, 2006)는 "식민주의에 관한 체계적이면서도 간결한 책"이라고 하며, 국역본 소개가 빠져 있지만 안토니 파그덴의 <민족과 제국>(을유문호사, 2003)은 "제국 건설과 대량 이주의 연관을 특히 강조하고 있는 책으로 아주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고 언급된다. 제국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주제가 오리엔탈리즘인바, 이에 대해서는 물론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교보문고)이 고전적인 저작이다. 저자가 거기에 덧붙이고 있는 건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이다. D. 카나딘의 책 <오리엔탈리즘: 영국은 자신의 제국을 어떻게 바라보았나>(2001)와 함께 "에드워드 사이드의 입장에 반대하는 대응들"로 제시되고 있다. 식민지와 탈식민지에 관한 연구서로는 단연 로버트 영의 <포스트식민주의 또는 포스트컨티넨털리즘>(박종철출판사, 2005)이 역시나 국역본 소개에 빠졌지만 "가장 넓은 범위를 다룬 좋은 책"이다.

  

'아주 간명한 시리즈'의 <포스트식민주의> 또한 영의 저작이다(앞의 책의 다이제스트판 정도 되겠다).

 

 

 

 

J.A. 홉슨의 <제국주의>(창비, 2003)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 2004)과 함께 "제국에 반대하는 오랜 전통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반향을 얻고 있는 텍스트들"로 거명된다(국내엔 파농의 책 두 권과 전기 두 권이 소개돼 있다). 국내 소개돼 있는 책들 가운데 맨마지막은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이학사, 2001). "제국주의적 현재와 미래에 관해 가장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책 중의 하나"인데, 그 논쟁에 관해서라면 <제국이라는 유령>(이매진, 2007)이 참조가 되겠다.

Empire: The Russian Empire and Its Rivals

끝으로 아직 소개되지 않은 책이지만 소장도서라서 저자의 언급이 반가운 책은 도미니크 리븐의 <제국: 러시아 제국과 그 경쟁자들>(2000).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러시아 제국의 팽창과 쇠퇴를 다루고 있다. 비교연구도 잘 되어 있다"라고 저자는 소개한다. 잘 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분량이 500쪽이 넘는 방대한 책이다. 대저 이 정도는 읽어줘야한다는 얘기겠다...

07.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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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6 16:46   좋아요 0 | URL
제국에 대한 책들을 읽어볼까... 하다가, 읽고 싶은 책들 중에 번역 안된 것들 혹은 절판된 것들이 많아 포기했었어요. 아부 루고드나 사미르 아민 책 같은 것들... 혹시 읽어보셨나요? 읽어보셨다면, 어떻게 읽으셨는지요? 영어로 사서 보려니.. 심적 부담이 넘 커서... 일단 로쟈님께 여쭤보는 거예요 ^^;;

로쟈 2007-10-16 17:12   좋아요 0 | URL
딸기님하고 제가 관심지역이 좀 다르죠.^^; 제국이라고 해도 저는 일반론과 러시아 제국 쪽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책들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덕분에 사미르 아민의 <유럽중심주의>가 번역됐다는 건 알게 됐습니다. 그의 <카오스의 제국>도 소개되면 좋겠네요(찾아보니 분량이 얇은 책이군요)...
 

제국과 제국주의에 관한 책들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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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스티븐 하우 지음, 강유원.한동희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7년 8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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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국주의- 신화와 현실
박지향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0년 3월
12,000원 → 12,000원(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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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신제국주의
데이비드 하비 지음, 최병두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5월
13,000원 → 13,000원(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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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화 제국주의
존 톰린슨 / 나남출판 / 1994년 11월
9,000원 → 9,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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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에서 연재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명저50'에서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문학기행>(따뜻한손, 2004; 한국문원 1997)에 대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자사에서 연재한 기획기사를 '우리 시대의 명저'로 꼽는 건 팔불출 같은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책이기에 그 정도의 부덕은 눈감아 주기로 한다. 사실 '문학기행'이란 타이틀을 달고 나온 책들 가운데 이만한 책이 또 있는지도 모르겠고(공동 작업으로는 김현-김윤식의 <한국문학사>에 비견할 만하다). 한국문원과 따뜻한손에서 판을 바꿔가며 출간됐지만 내가 갖고 있는 건 <문학기행: 명작의 무대>(한국일보사, 1987)이다(그래봐야 어느 박스 속에 들어가 있겠지만). 여유가 생기면 최신판도 소장용으로 사두고 싶다.  

한국일보(07. 10. 04) [우리 시대의 명저 50] <39>'김훈·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

문학작품을 창조하는 일이 시인ㆍ작가의 일에 속한다면, 문학을 탄생시킨 현장-그 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화의 향수자인 우리 모두의 기쁜 책임이기도 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소중한 명작의 본적지를 찾아 창조적 기쁨을 함께 나누면서, 그 문화의 원형을 복원ㆍ보존ㆍ재창조하는 길을 구상해 본다.”

한국일보 1986년 5월11일자 5면엔 이 같은 편집자 주(註)가 실려 ‘문학기행-명작의 무대’(이하 문학기행)란 기획 연재의 시작을 알렸다. 탁월한 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생존 작가와 함께 그들의 대표적 소설 및 시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지역을 찾아, 문학과 현장의 창조적 길항 관계를 탐색하겠다는 참신하고도 묵직한 포부였다.

입사 9년차의 출판 담당 박래부(56ㆍ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기자는 당시 탈고 막바지에 다다른 박경리씨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인 경남 하동 평사리를 답사하고 마수걸이 기사를 썼다. 한 주 뒤인 18일자엔 문학을 담당하던 13년차 김훈(59ㆍ소설가) 기자가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씨와 함께 가상 공간 ‘무진(霧津)’의 본적, 전남 순천만을 둘러보고 한 면 가득 기사를 부려놓았다. 86년 5월~87년 8월, 88년 10월~89년 5월에 걸쳐 무려 85회 연재된 문학기행은, 몇몇 후배 기자의 일시적 참여를 제외한다면, 온전히 김훈, 박래부 두 기자의 성실한 취재와 유려한 문장으로 쌓아올린 기념비적 성과였다.

연재가 시작된 86년은 언론사 정ㆍ폐간 결정권을 손에 쥔 문공부가 산하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전달하던 시기였다. 기관원들이 신문사를 무람없이 드나들며 편집권을 침해하던 억압의 시절, 명작의 모태를 찾아 삶과 아름다움을 논하던 문학기행은 암담한 세월을 겨우 살아가던 이들이 망명할 수 있는 ‘말의 공화국’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문학평론가 박철화씨는 “문학기행은 저 엄혹한 80년대를 말의 사랑으로 끌어안으며, 현실 앞에 절망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한 편의 서사시”이자 “그 기행을 쫓아감으로써 악몽과도 같은 청춘을 견디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마약”이었다고 추억했다.

문학기행의 전반기(86~87년) 연재분은 87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됐고, 97년엔 두 사람의 기사 71편을 묶은 <김훈ㆍ박래부 기자의 문학기행>(전 2권ㆍ한국문원 발행)이 나왔다가 절판됐다. 저자들의 신문사 후배 김창영씨가 운영하는 출판사 ‘따뜻한손’은 2004년 홍명희, 김지하, 박노해, 권정생, 전경린 등 다섯 꼭지의 글을 추가하고 전체 분량을 50편으로 추려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전 2권)이란 제목의 증보판을 펴냈다. 어느덧 머리가 허옇게 센 우리 시대의 문사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마주앉았다.(이훈성기자)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김훈=86년 봄에 장명수 문화부장(한국일보 고문)이 남도 여행을 다녀와서 문학기행 연재를 지시했다. 불과 열흘 만에 취재에 착수했으니 전체 계획이 미진한 채 시작된 셈이다. 준비는 안됐는데 마감은 숨막히게 돌아왔다. 우리가 속을 좀 썩이긴 했지만, 장 선배 말을 알아들었고 그 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장 선배가 이걸 좀 알아주시길 바란다.

박래부=장 부장에게 등을 떠밀려 원주에서 박경리 선생을 만나고 다시 평사리로 갔다. 밤을 세워 원고지 30여 장짜리 첫 회 원고를 넘겼다. 2회가 김형 차례였는데 순천에 다녀와 원고를 넘기곤 못하겠다고 했다. 김형이 마음을 고쳐먹기까지 한 달 간 혼자서 참혹하게 시리즈를 끌고 갔다. 세상일이 신통한 것이, 1년쯤 뒤 내가 일본 연수를 떠나는 바람에 김형이 예전의 나처럼 한 달 반가량 혼자서 기사를 써야 했다. 결국 힘에 부쳐 한동안 연재가 중단됐다가 내 귀국 후 재개됐다.

-작품 선정 기준은 뭐였나.
박래부=생존 작가 중심으로 꾸린다는 것이 큰 원칙이었다. 87년 대거 해금된 작가 중 정지용 등을 부분적으로 편입하기도 했다. 서사성이 중요한 기획이다보니 소설을 많이 다뤘다.

김훈=당시 문학을 비롯한 우리의 정신사는 양극화된 상태였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렇지만.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진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어떻게 조화롭게 안배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작품 선정에 신경을 쏟았다.

박래부=부끄러운 얘기지만 기자로서 어디까지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늘 있었다. 넘으면 신문사를 떠나야 하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는 상황에서 투사적 면모를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연재가 시작되고 네 달 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가 <말>지에 보도지침의 존재를 폭로하고 이듬해엔 6월항쟁이 일어나면서 민주적 분위기가 많이 확산됐다.

김훈=언론의 속성이자 한계이겠지만 문학기행이 한국 현대문학사를 관통하면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작품을 골라 다뤘다고 보긴 힘들다.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이광수부터 시작해야할 텐데 ‘흥행’을 고려해야 하는 대중 매체가 그렇게 하긴 힘들다.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 작품을 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은 어떤 의미가 있나.
김훈=현장은 문학과 무관하지 않고, 명백히 그 뿌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을 글로써 증명해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문학이 리얼리즘의 바탕에서 떠나있는 오늘날엔 거의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면에서 문학기행은 우리 세대가 읽고 자란 문학에 대한 헌사 같은 것이었다.

박래부=작품 속 시간과 공간 배경엔 작가 나름대로 상상력을 동원해서 파악한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문학기행은 그런 역사적 의미를 발췌해서 하나의 시리즈로 기록해두는 작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달리 공간적 원형이 어느 정도 보전돼 있었다. 원래 모습이 훼손되기 전에 현장을 포착하고 작가의 얘기를 적어둔 것은 이젠 불가능하기에 더욱 의미있는 기록 작업이었다.

-암울한 시대에 정신적 탈출구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김훈=‘한국문학 지도 그리기’가 원래 기획 취지였지만 그것은 너무 방대한 작업이었고 결국 지도를 다 그리지 못했다. 대신 회를 거듭하면서 문학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고, 이로써 야만의 시대에 인간과 시대에 대한 소통을 열어줄 수 있었다는 보람을 느낀다. 가령 조해일의 <아메리카>를 다루며 기지촌 여성의 쓰라린 삶은 ‘부도덕이 아닌 불행일 뿐’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됐다고 믿는다.

박래부=억압적 상황이 상존하던 당시, 문화부 내에서 억압의 최전선에 있던 기자는 문학 담당 기자였을 것이다. 80년대는 문학의 위상이 크고 독자에 대한 영향력도 강한 시기였다. 죽은 고정희 시인은 자기 시를 “의미를 숨길 수 있는데까지 숨기고, 표현을 우회할 수 있는데까지 우회해서 쓴 것”이라고 했는데, 그 작품 속 메시지를 수위조절을 해가며 독자에게 전하는 일이 문학 기자의 몫이었다.

김훈=문단을 비롯한 독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고 진지했다. 편지, 전화가 많이 오고, 찾아와서 격려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반발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자기 작품 안 다뤄준다고 항의하는 소설가들이었다(웃음).

박래부=당시 신문 발행면이 12, 16면 정도였는데 그 중 한 페이지를 할애해 장기 연재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이후 다른 신문사에서도 몇 번의 시도가 있었지만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다시 느끼기는 힘들었다.

-서로 경쟁심을 느끼진 않았나.
김훈=박형은 나와 한 번의 분란도 없었던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장 선배가 좋은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래부=각자 자기 일 하느라 바빴다. 한 주는 다녀와서 기사를 써야 했고, 다른 한 주는 다음 문학기행을 위해 읽어야만 했으니까.

07.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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