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시 100년을 맞아 '10대 시인'을 선정했다고 한다(선정과정은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10/h2007101420053984290.htm 참조). 그 리스트를 보니 선자들이 고심했다고는 하나 별로 '이변'이라 할 만한 것은 없어 보인다. 이미 교과서에 다들 수록돼 있는 시인들이고 그들의 시이기 때문에(윤동주의 <서시> 대신에 <또다른 고향>이 대표시로 선정된 것 정도가 일반 독자들의 취향과 차이나는 것이겠다. 물론 서정주의 경우에도 <동천>보다 더 친숙한 건 <국화 옆에서>일 테고). 자료삼아 기사를 옮겨놓으면서 드는 생각은 차라리 11-20위까지의 시인들 명단이 궁금하다는 것. 생존 시인들까지도 포함해서. 오히려 그게 '진짜' 리스트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든다.   

한국일보(07. 10. 15) 한국 현대시 10대시인 뽑았다

1908년 최남선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기점으로 올해 100년을 맞은 한국 현대시사(詩史)의 대표 시인 10명은 누구일까. 한국시인협회(회장 오세영ㆍ이하 시협)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국문과 교수 10명에게 작고 시인을 대상으로 10대 시인 및 대표작 선정을 의뢰한 결과 김소월 <진달래꽃>, 한용운 <님의 침묵>, 서정주 <동천>, 정지용 <유리창>,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김수영 <풀>,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이상 <오감도>, 윤동주 <또다른 고향>, 박목월 <나그네>가 뽑혔다.

선정 작업은 평론가들이 각자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성과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작고 시인 10명과 시인별 대표작을 추천하고, 이들 후보군에서 추천을 많이 받은 순서대로 10대 시인 및 대표작을 정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문화 외적인 요소가 개입할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존 작가는 논의 대상에서 제외했다.

선정 위원엔 최동호(고려대), 이숭원(서울여대), 정과리(연세대), 이광호(서울예대), 유성호(교원대), 오형엽(수원대), 방민호(서울대), 문혜원(아주대), 홍용희(경희사이버대), 이재복(한양대) 교수가 참여했다. 오세영 시협 회장은 "오늘날 시대정신이 선호하는 시인들이 누군지 알아보고, 아울러 시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했다"며 선정 취지를 밝혔다.

10대 시인의 대표시는 11월2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릴 예정인 시예술 행사 '시인만세'에서 시 낭송, 음악, 무용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공연된다. 기획 및 총연출은 연극인 이윤택씨가 맡는다. 시협 창립 50주년 및 '시의 날' 제정 20주년 기념을 겸한 이번 행사는 한국일보, 시협, JEI재능교육이 공동 주최한다.(이훈성기자)

한국일보(07. 10. 15) [한국 현대사 10대 시인] <1>김소월

오늘부터 주 5회(월~금)씩 2주에 걸쳐 한국 현대시 100년을 빛낸 10대 시인의 대표시를 소개합니다. 선정에 참여한 문학평론가 10명이 해설을 맡았습니다. 시 전문은 해당 시인의 정본(正本) 혹은 그에 준하는 작품집에 수록된 내용을 따르고 그 출처를 밝힙니다. <편집자 주>

진달래꽃
- 김소월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출처 : 권영빈 엮음, <김소월시전집>, 문학사상사, 2007 (*출처의 편자는 '권영빈'이 아니라 '권영민'이다.)

△1902년 평북 구성 출생. 본명 정식(廷湜) △1915년 오산학교 입학. 이곳에서 시 스승인 김억(金億)을 만남 △배재고보 졸업, 도쿄상대 중퇴 △1920년 <창조>에 ‘낭인의 봄’ 등 발표하며 데뷔 △1922년 <학생계>에 ‘진달래꽃’ 발표 △1924년 <영대>에 ‘산유화’ 발표 △1925년 유일한 시집 <진달래꽃> 발간 △1934년 12월 음독 자살할 때까지 154편의 시를 남김

◆'진달래 꽃' 작품해설
1922년 <개벽>에 발표된 김소월의 <진달래꽃>은 남녀 간의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낡은 시가 아니다. 이 시는 1920년대라는 시대적 단위를 넘어서서 사랑의 보편성을 노래한 20세기 한국의 명시라 평가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우선 형식과 언어이다. 알려진 것처럼 7ㆍ5조 또는 3ㆍ4ㆍ·5음절의 3음보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매연 3행 모두 12연의 기ㆍ승ㆍ전ㆍ결의 구조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미적 형식으로서 견고한 완결성이 이 시에 풍요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일상적 어휘들 또한 시적인 완결성을 위해 긴밀하게 변주되어 하나의 명편이 탄생된 것이다.

다음으로 논할 수 있는 것은 여성적인 화자의 목소리가 전해 주는 절절한 호소력이다. 여성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고 해서 이 시의 화자가 여성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 연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곡진한 종결 어미들은 모두 이별의 정서를 절실하게 전하는데 있어서 유감이 없다. 남성도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는 순간에는 이처럼 여성적인 어조로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지금 이 순간의 이별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일단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실 때’라고 분명히 화자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역겨워서 ‘가실 때’는 님이 가시는 미래의 그 어느 때이다. 언젠가 닥쳐올지 모를 이별의 슬픔을 예견하면서 사랑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이 시의 묘미이다. 사랑의 기쁨을 직접적인 언사로 말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들이 우회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시의 화자가 이별의 그 순간 눈물을 흘리느냐 흘리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이 시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로 끝나고 있다. 이별을 부정하는 ‘아니 눈물’을 흘린다고 했으니 그것은 이별의 눈물은 흘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부정의 눈물이 통곡의 눈물보다 더 깊은 호소력을 갖는다는 것을 김소월은 깨달았던 것이다. 김소월을 한국의 대표적인 서정 시인으로 만든 작시법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최동호 문학평론가ㆍ고려대 교수)

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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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0-16 0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투표 분위기일까요? ^^; 저는 제 성향(?)상 이상, 김수영, 김춘수에 한 표씩을 '행사'하고 싶습니다.^^

로쟈 2007-10-16 08:30   좋아요 0 | URL
분위기까지야... 10위까지의 랭킹은 다들 비슷할 거 같고, 각자의 취향이 드러나는 건 11-20위권에서가 아닐까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20명 정도 꼽으려면 한국시의 애독자이기도 해야겠고...

릴케 현상 2007-10-16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시인 선정과정에서 이렇게 나왔군요^^ --->김종삼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화 김영랑 이육사 김현승 이용악 조지훈 신동엽 박재삼 기형도 등 이날 입에 오르내린 시인들은 이 중 누구를 최종 명단에 올리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시적 성취를 보여줬다는 평이다.

로쟈 2007-10-16 16:51   좋아요 0 | URL
새로운 이름들이 아니어서 좀 식상합니다.^^;

기인 2007-10-1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등단연도는 아닌 것 같고, 1위부터 10위 순위인가 보죠? 헐;; 투표라.. 어렵네요;; 1위를 뽑는 것은 어렵고 20명 꼽는 것이 더 쉬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아마; 백석? ^^;

로쟈 2007-10-16 16:52   좋아요 0 | URL
사실 1-7명까지는 쉽게 견적이 나오는데, 그 이후 20위까지가 유동적인 듯하고 그래서 각자의 취행을 더 잘 반영해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다시피 지난주에 발표된 올 노벨문학상은 영국의 여성작가 도리스 레싱에게 돌아갔다. 이미 10년쯤 전에 수상했더라도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단골 후보였는데(미국 작가 필립 로스나 조이스 캐롤 오츠도 그런 식이다. 다들 오래 살아야겠다), 좀 미뤄진 탓에 올해 88세가 되는 최고령 수상작가가 됐다(2004년 옐리네크의 수상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던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작가로는 지난 1987년, 그러니까 딱 20년 전에 망명시인 이오시프 브로드스키가 수상한 이래로 수상작가가 없어서 은근히 거명되기를 기대했지만 '이변'은 없었다. 레싱의 수상소감대로 "그들은 '언젠가 그 여자에게 상을 줘야 할텐데'라며 걱정했을" 테고, 이번에 그 걱정을 덜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 레싱의 작품을 읽은 바 없다. <풀잎은 노래한다>(지학사, 1986) 등이 서점에 꽂혀 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한번도 손길이 간 적은 없다. 이유는 이 작가가 무얼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흔한 말로 주파수를 맞출 수 없었던 것. 수상직후 작품세계를 소개하는 기사들을 몇 개 읽어보아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아예 저렴한 소설 두 권을 주문했다(<황금 노트북>은 이달중에 다시 나온다고 한다). 내달에나 읽어볼 계획으로(노작가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책은 모레나 받을 것 같고 미리 소개기사나 모아놓는다.

한겨레(07. 10. 13) 페미니즘 문학 선구자…사회성 짙은 소설 즐겨

다음주면 만으로 88살이 되는 도리스 레싱은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중 최고령자에 해당한다. 1950년 장편 <풀잎은 노래한다>를 발표하면서 시작된 그의 문학 경력은 어느새 반세기를 훌쩍 넘어섰지만, 그는 최근까지도 신작을 발표하는 등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19년 지금의 이란에서 태어난 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성장한 레싱은 열네 살 이후 스스로 학교를 그만두고 이후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하면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했다. 두 번 이혼한 뒤 1949년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지금 런던 교외 햄스테드에서 살고 있다.

백인 농부의 아내와 흑인 하인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인종 간 갈등을 비판한 <풀잎은 노래한다>에서 보듯 초기의 레싱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백인들의 아프리카 식민 통치와 흑인에 대한 억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때문에 그는 1956년부터 남아공 입국이 거부되었다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이 무너지고 흑인 정부가 들어선 1995년에야 입국이 허용되었다. 또한 그는 1952년에 영국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56년 헝가리 봉기를 계기로 탈당한 바 있는데, 이 무렵 그의 소설들은 진한 사회주의적 경향과 강렬한 반핵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레싱 문학의 트레이드마크는 역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금 노트북>(1962)이 “초창기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 업적이며 남녀 관계에 관한 20세기적 관점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책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정작 레싱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규정하는 데에 부정적이다. 페미니즘이 “지나치게 이념적이고 남녀 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해명이다. <황금 노트북>은 자서전적 (논)픽션과 노트, 수기, 일기 등이 다양하게 오가는가 하면 메타소설적 구성을 짜는 등 현란한 형식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국내에서도 평민사에서 한때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으며, 도서출판 ‘뿔’에서 이달 중에 다시 나올 예정이다.

레싱의 숱한 작품 중에서도 한 젊은 여성이 테러 조직에 가담하는 이야기를 다룬 <선량한 테러리스트>(1985)는 테러와 반테러가 격돌하는 21세기 초 지금의 상황에서도 의미 있는 울림을 준다.
레싱은 근년 들어 본격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과학소설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문학계의 논쟁을 낳고 있다. 스웨덴 한림원은 <마라와 단>(1999)과 2005년작인 그 속편 등의 과학소설에 대해서도 “인류를 원시적 상태로 되돌려놓을 수 있는 전지구적 재앙의 가능성이 도리스 레싱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던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조선일보(07. 10. 13) 리얼리즘에서 SF까지… 펜을 마술봉처럼 휘둘러

노벨 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Doris Lessing·88)은 이란에서 태어나 아프리카에서 자랐다. 대영제국의 몰락을 목도하고 반항적 에너지로 충만한 60년대를 온몸으로 견뎠다.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했다. 당대의 평론가들이 그녀를 존 오스번·아이리스 머독 같은 또래 작가들과 함께 ‘성난 청년들’(Angry Young Men)이라고 불렀다.

레싱은 1919년 10월 이란 바흐타란에서 은행원 아버지와 간호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레싱이 여섯 살 때 일확천금을 꿈꾸며 짐바브웨로 이주했지만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다. 14세에 학교를 중퇴한 그녀는 보모·전화교환수·속기사·기자 등을 전전했다. 1949년 레싱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런던에 이주했다.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The Grass is Singing·1950)에 이어, 1952년부터 69년까지 ‘마사 퀘스트’라는 여주인공을 등장시킨 ‘폭력의 아이들’(Children of Violence) 연작 다섯 편을 발표해 문명을 얻었다. 특히 연작 마지막 작품인 ‘네 개의 문이 있는 도시’(The Four- Gated City·1969)가 걸작으로 꼽힌다.

60년대에는 여류작가인 주인공 ‘아나 울프’가 인생을 성찰해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 ‘황금 노트북’(The Golden Notebook·1962)으로 페미니스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 소설은 정교한 구성을 보여준다. 자서전적 논픽션, 신문 기사, 수기, 일기 등 다채로운 형식을 소설에 도입했고, ‘소설 속에서 소설 쓰기’ 기법을 취했다.

1979년부터 84년까지 차례로 발표한 ‘아르고 선의 카노푸스: 기록(Canopus in Argo: Archives)’ 연작에서 레싱은 핵전쟁 이후 인류를 소재 삼아 SF까지 영역을 넓혔다. 80년대 이후에는 사실주의적인 소설로 돌아왔다. 당대의 좌파와 여성 운동가들을 풍자한 소설 ‘좋은 테러리스트’(The Good Terrorist·1985), 자서전 ‘내 살갗 아래서’(Under My Skin· 1994), 대영제국의 마지막 시기를 다룬 소설 ‘가장 달콤한 꿈’(The Sweetest Dream· 2001) 등이 근작이다.

레싱은 1952~56년 영국 공산당원이었고, 열렬한 반핵 운동가였다. 인종주의와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해 90년대까지 남아공·짐바브웨 정부의 ‘입국 금지 대상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격렬한 청춘을 보낸 이 노대가는 그러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뒤 독일 DP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유명해진 다음엔 너무 많이 주목을 받는다”며 “눈길을 받지 못하는 좋은 작가들이 많다”고 겸손해했다. 노벨상에 앞서 레싱은 서머싯 몸상, 메디치상 등을 받았다.(김수혜 기자)

07. 10. 15.

P.S. 당연한 것이긴 하지만 하도 최근(노년)의 사진들만 뜨기에 작가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좀 찾아봤다(일련의 초상은 http://www.dorislessing.org/portraits.html 참조). 그 중 하나로 1962년 사진이니까 43살 때이다. 오르손에 담배를 꼬나들고 있는 모습이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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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15 0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10-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갑니다.

로쟈 2007-10-15 18:34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오셨네요.^^

필라멘트 2007-10-15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상자 발표된지 몇일 지났는데 관련 포스트가 없길래, 혹시 로쟈님이 내심 기대했던 러시아 작가가 선정안됐다고 서운해서 그냥 패스하셨나 혼자 오해를 했었답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 작가 수상소식을 접한지도 꽤 오래됐네요. 이제 받을 때도 된 것도 같은데 몇년안에 받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2000년대 들어 영국작가들은 벌써 3명이나 수상했네요.

로쟈 2007-10-15 22:27   좋아요 0 | URL
레싱의 작품을 읽어본 게 없어서 좀 늦어진 것이죠.^^; 탈 만한 작가들이 수상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아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책장이 펼쳐진 책들만 열 권이 넘게 책상과 그 주변에 널려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만큼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 때문이긴 한데, 현실적/물리적으로 다 마무리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어서 마음만 무겁다. 일단 하나라도 처리하고자 무릎에 올려놓은 책이 존 맥킨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

책은 작년 가을에 나왔지만 벌써 품절되어서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국역본은 '예술과 역사'란 부제를 달고 있지만 역시 지난주에 구한 원서 <오리엔탈리즘>(1995)의 부제는 'History, theory and the arts(역사, 이론, 예술)'. 목차를 보면 부제가 그리 붙은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 논의'와 '동양, 문화, 제국주의'를 다룬 1, 2장에 이어지는 장들은 각각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연극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도 겸하고 있기에 여러 모로 유익한 책이다.

뒷표지에 실린 그 비판의 요점은 이렇다: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한다. 하나는, 사이드는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사이드는 문학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서구 예술의 오리엔탈리즘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의 윤곽을 다룬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두고 몇 가지 코멘트를 적어두기로 한다.     

경향신문(06. 09. 23) '서양’의 잃어버린 이상향 

단숨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내고도 눈하나 깜짝 않는 잔인함(르뇨의 ‘판결없는 처형’), 수많은 부인을 거느린 호색한(레폴의 ‘파샤와 그의 부인의 방’), 백인여성의 목욕시중을 들고 있는 노예(제롬의 ‘무어욕실’)….(*아래가 제롬의 <무어욕실>이다. 원서에는 직접 들어가 있지 않으며 국역본의 서두에 삽입된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은 이런 형태로 요약된다. 18~19세기 서양화가들이 묘사한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동양인의 모습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리엔탈리즘의 고전이 된 사이드의 이분법적 시각에 이견을 제기한다. 오리엔탈리즘 비평가들은 코란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슬람 아이들의 느슨한 이미지를 놓고 동양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묘사한 것이라 비판하지만, 저자는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찬 학습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또 동양을 표현한 ‘야만적’이란 단어도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도 불구,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면서 악인과 선인의 대립구도를 지니는 서양의 오페라에 동양인의 등장이 잦아졌지만, 도덕적 구분선이 민족적 구분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 중 하나로 든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부패하고 뒤떨어진 문명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이상형을 동양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상시합에서 단독결투를 하는 아랍인들의 모습에는 서양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재창조돼 있고, 유럽의 승마열기는 고귀한 아랍족장이 기품있는 아랍말 위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상화됐다. 그들에게 중동 사람들은 성경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들이었고, 이집트의 사막은 산업화된 문명의 썩은 악취에서 자유로운 거대한 정화의 힘을 지닌 곳이었다. 그래서 구달과 루이스, 칸딘스키와 클레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화가들은 틈 날 때마다 이집트와 사막으로 달려갔다.

저자는 서두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는 현재의 국제적 정세에서 자신의 책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세계주의와 이질적 존재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의 충돌을 거쳐, 동서양의 상호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더욱 창조적인 예술로 진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는 바람으로 읽힌다.(정유진기자)

먼저 이 책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자 해설'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대표 역자로서 박홍규 교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판된 이래 그것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왔으나, 학문적으로 경청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이 책은 제국주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의 실제 역사에 입각해 사이드와 그의 학파를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사이드의 주장이 역사학적으로 검증될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검토한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407쪽)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그동안 내가 읽은 사이드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도 사이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취지에 뜨겁게 호응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애정에서 나온 비판이기에 그것은 다른 어떤 비판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역자도 느꼈던 사이드에 대한 여러 의문을 풀어주면서도, 그의 사상에 누구보다도 더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최적의 비판서라 할 만하다.

역자가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저자인 무어-길버트는 이 책에 대해서 "다른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 (적어도 분량 면에서는) 가장 비중 있는" 책으로 평가했다고. 거기에 역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분량면에서가 아니라, 그 책이 검토하는 방대한 영역 면에서 가장 포괄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이론뿐만 아니라,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대중예술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리즘 현상을 분석한 책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409쪽)

곁들여 챙겨둘 만한 사실은 사이드에 대한 비판서로서 이 책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드의 <이론 속에서: 계급, 민족, 문화>(1992)라는 것. 역자가 귀뜀해주는 바에 따르면 아마드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사이드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에 대한 저자 맥켄지의 사려 깊은 비판은 한국어판 서문과 원저 서문에서 읽어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는 부분은 음악(클래식)과 관련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다양한 예술분야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두루 살펴보는 의도와 의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예술 분야를 다루는 의도는 다음 두 가지이다. 즉 문학에만 얽매이는 데에서 탈피함으로써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스트 명제를 얼마나 더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지 살피고, 서로 다른 문화 형태의 관련성을, 특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양면에서 고찰하기 위함이다(사이드는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대중문화를 잘 알지 못했다)."(32-3쪽)  

비판의 주된 논점은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저자는 사이드의 제국주의관이 그가 교육받은 미국식 제국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며 그것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양상이 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국주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저자의 식견인지라 음미해볼 만하다(맥켄지는 <제국주의와 대중문화>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사이드와 그 추종자들은 제국주의라는 모체 안에 있는 특정 예술 분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에 정통한 역사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제국주의'는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즉 그들의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하나의 일반화된 개념으로서 역사적 동태성이 부족하다. 또한 제국주의에 관한 이론,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갖는 복잡성과 경제적, 정치적 관계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역사학자들의 시대 구분을 통해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스트 개념들을 살펴보면 맞지 않는 구석들이 많다. 다음의 여러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35-6쪽)

마지막 문장은 "Orientalism and imperialism, as the subsequent chapters will demonstrate, did not march in parallel."을 옮긴 것이다. '동양에 대한 제국주의적 사고와 문화=오리엔탈리즘'이란 등식은 곤란하다는 이야기겠다. 맥켄지는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음악을 든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전성기에도 서양의 작곡가들은 동양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확장하기 위해 동양 음악의 여러 가능성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음악에 나타나는 동양적 요소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는 지적이겠다.



"사이드는 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이론을 서구 클래식 음악에 접목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가 서구 음악의 미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6쪽)

사이드가 음악 애호가였다는 점은 잘 알려진 것인데(바렘보임과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을 내기도 했다. 국역본은 조야하다는 평이 주류여서 유감이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문장은 이해되지 않아서 원문을 찾아봤다. 이렇게 돼 있다. "Curiously, despite his great interest in music, Said has made little attempt to apply his model to western classical forms, perhaps because he seems to be highly ambivalent about 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

역자는 음악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사이드의 'highly ambivalent'한 태도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간주했는데, 나로선 '양가적'이거나 '유동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경우 여러 양식들(western classical forms)이 있는데, 그들의 미적 자율성 수준(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이 제각각이라고 본 거 아닐까?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는다는 말은 그것이 외부의 물적/이념적 조건과 상대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그 수준이 낮다는 말은 외부적 조건에 좌지우지되며 그것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문맥으로 보아 사이드는 순수음악의 경우엔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고 있고 오페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본 듯하다(이것이 음악에 대한 그의 양가적 태도이다). 그럴 경우 순수 클래식은 제국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연관시킬 건덕지가 별로 없고 다만 오페라의 경우는 그와 연관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이어지는 건 그와 관련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그의 최근 저서인 <문화와 제국주의>(1993) 중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그 글은 이른바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분석하고 있다. 원래 이 논문은 1988년 브라이턴에서 개최된 영국 예술사학자협회 회의의 기조 연설문이었다. 당시 그 내용에 의문을 가졌던 나는 몇 가지 유보를 제기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사이드의 분석 결과가 책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더욱 확고해졌다."(37쪽)

이어지는, <아이다>에 대한 사이드와 맥켄지의 의견 차이다. 맥켄지가 보기에 사이드는 "오페라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결론을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럽 내 갈등, 특히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베르디의 시각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사실 베르디의 <아이다>는 국적의 상이를 초월하는 사랑의 힘만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베르디가 각색한 이집트 장군과 에티오피아 공주의 개인적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복에 의한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역자가 각주에서 보태는 지적: "사이드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19세기 오페라 전체를 대표하고, 나아가 오페라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페라를 이렇게 단정짓거나, 베르디의 오페라를 제국주의라고 보기는 힘들다. 베르디가 제국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해석은 이미 음악계에서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자신 외세의 지배에 저항한 중요한 독립투사였음은 <비바 오페라>(박홍규 지음, 가산문화사, 2002, 132-175쪽)에서 이미 설명되었다."(37쪽)

 

 

 

 

결론은 무엇인가? "만약 '오리엔탈리스트'의 해석에서 서구의 동양 관련 작품과 동양적 형식의 각색에서 나타나는 복잡성과 이중성이 간과된다면 이는 역사적 관점을 무시한 처사다."(39쪽) "사이드의 방법론과 결론에 대한 나의 의구심, 특히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접근법과 기존의 역사적인 연구가 일치하지 않는 점 때문에 나는 사이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지만, 한편으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다.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 학자로서의 바른 자세, 그리고 때로는 순진한 세계주의에 가깝기는 하지만 세계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전세계 학자들은 문학 및 역사 교육과 관련해 심각하게 왜곡된 접근방식을 밝혀내고 바꾸려는 사이드의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41-2쪽) 

내가 동참하는 길은 현재로선 이런 페이퍼로 거드는 일 정도이다...

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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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이 2007-10-1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걸로도 거들수 있겠죠?*^^*

로쟈 2007-10-15 08:22   좋아요 0 | URL
읽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추천도 하셔야죠!^^

Jade 2007-10-1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 막 읽고싶어지는데요~? ㅎㅎ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로쟈 2007-10-15 11:39   좋아요 0 | URL
책은 품절이라니까 구하시는 데 약간 애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yoonta 2007-10-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이 책 온라인에서 파는 곳 아는데..알려드리면 품절될것같으니 몰래 어서 구입해야겠네요..로쟈님한테만 혹시 궁금하시면 알려드릴께요.

로쟈 2007-10-15 12:47   좋아요 0 | URL
이게 나름 '고가'인 책이라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소장할 만한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읽는 건 도서관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서도...

2007-10-15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13:52   좋아요 0 | URL
감사.^^

무소속 2008-03-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는 알라딘 중고샵에서 새책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로쟈 2008-03-22 22:41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쓰고 곧 구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책을 진득하게 읽어본 적은 없다. 그의 몇 가지 기본 개념은 중요하지만 그가 다루는 디테일들은 관심권 밖이기 때문인데, 그래도 가장 흥미로운 책은 존 맥켄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 같다. 관련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18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오리엔탈리즘- 개정증보판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25,000원 → 25,000원(0%할인) / 마일리지 75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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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제국주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문예출판사 / 2005년 5월
32,000원 → 28,800원(10%할인) / 마일리지 1,6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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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다시 에드워드 사이드를 위하여
빌 애쉬크로프트.팔 알루와리아 지음, 윤영실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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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 오리엔탈리즘을 넘어 화해와 공존으로
김상률.오길영 외 지음 / 책세상 / 2006년 6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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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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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사유들'의 여섯번째 손님은 재작년에 방한한 바 있는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이다(이름은 나오는 책마다 다르게 표기된 바 있다). "'새로운 인간’ 향해 계몽을 계몽하자"란 게 기사의 타이틀이다. 시리즈를 옮겨놓기로 했으니 하던 일은 계속하는 수밖에.

대학신문(07. 10. 15)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⑥ 페터 슬로터다이크

현대 인문학의 가장 큰 고민거리 중 하나는 산 생명을 복제하는 유전공학이 출현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하면서 새롭게 구축되는 이 제국의 시대에 과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다. 이런 현실의 도래는 이미 전통적 인문학이 표방해온 휴머니즘에 위기를 안겨다 줬으며,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돌파구를 찾도록 다그치고 있다. 바로 이런 시대적 흐름의 중심부에, 기존의 휴머니즘의 종언을 고하고, 견유주의(犬儒主義)와 유전공학의 결합으로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도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창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1999년 7월 16일 바이에른 엘마우 성에서 개최된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유럽 지성계에 충격을 안겨줬다. 그는 그 동안 인간을 ‘이성적 동물’로 정의해 온 기존의 휴머니즘적 인간관이 인간의 야생성을 길들이면서 은폐하고 있음을, 게다가 자기행복에 매몰되거나 냉소주의에 몰입하는 현대 사회의 폭력의 공범자가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성과 문자에 기초해 인간성을 동물성과 구분해왔던 기존의 시도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공산주의, 민족주의, 아메리카니즘도 모두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은 ‘사유하는 동물’이 ‘사유하는 인간’으로 전환됨으로써 인간 그 스스로가 문화라는 우리에 갇혀 가축화되고, 그래서 식물처럼 생각하지만 육식동물처럼 살고, 착한 목자처럼 되기를 원하지만 나쁜 가축 떼처럼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런 문화에 저항하지 못하는 ‘낡은 인간’에 얽매여 ‘작은 사육자’로 살아가는 차원을 넘어, 이것을 깨뜨리고 위대한 정치, 위대한 예술, 위대한 사상을 감행해 ‘새로운 인간(위버멘쉬)’을 향해 나아가는 ‘큰 사육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의 이 ‘큰 사육자’의 길은, 하버마스를 비롯한 독일 좌파 지식인들이 비판했듯이, 단순히 인간개종을 위해 ‘차라투스트라 기획’을 감행하는 신종 나치스트의 길이 아니다. 그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동물의 근접성을 주장한 저 고대의 견유주의와 오늘날 유전공학의 조화를 통해 인간의 권리와 동물의 권리가 서로 보호되는 길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가 이와 같은 길을 택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인간을, 자연이라는 실험장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거쳐 온 진화의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관념적으로만 접근하는 기존의 휴머니즘적 접근에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위장된 휴머니스트들처럼 유전공학의 도래로 새롭게 시작된 삶의 놀이를 냉소적으로 거부만 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의 해방이 어떻게 하면 가능할 것인가라는 대원칙 아래서, 그에 대해 진정성 있는 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괴물이 되고 잡종의 형태가 될 위험은 유전공학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적인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유아적인 사유방식에 있다.



사실 90년대 후반에 온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의 이 주장은 당시에 싹튼 것이 아니라, 그의 핵심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냉소적 이성 비판』(1983)에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현대사회에 만연해 있는 냉소주의를 분석하면서, 이 냉소주의 역시 계몽에 지친 무력한 인간의 모습임을 지적하고 있다. 마치 우리가 현대의 기술문명이 우리의 환경을 망가뜨린다고 주장하면서도 여전히 이 문명에 계속 동참하고 있듯이, 계몽 속에서 더불어 자라난 냉소주의는 우리를 끝없이 더 많은 압박과 고통에 더 잘 순응하도록 이끈다. 계몽은 이 허위의식을 제거하기보다는 이를 대중적 현상으로 일반화시키며, 마침내 스스로를 배반하고 비합리성으로 추락한다.

그는 이런 추락 현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육체와 영혼,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주관이성과 객관이성을 가르는 기존의 이원론을 거부하고, 이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공존하는 ‘혼성적 실재’를 추구하며, 인간-동물-식물-기계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존재론적 구성’을 통해 포스트휴머니즘을 추구한다. 그의 포스트휴머니즘은 『유럽의 도가주의』(1989)에서도 주장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입장은 여러 다양한 글들에서, 후쿠야마가 언급한 역사시대의 거대한 세계체제로서의 자본주의와 아메리카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있다. 그는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몸의 지혜’로 거대한 지배체제와 수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시대’를 종식하고, ‘지역’들이 존중받으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진정한 다원주의를 꿈꾸고 있으며, 자본주의의 ‘마지막 인간’을 넘어, 역사 이후의 ‘새로운 인간(post-human)’을 유전공학과 견유주의의 연대를 통해 재창조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시도에는 여전히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양자의 연대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지식인들도 이제 그가 제시한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전망을 고뇌하지 않고 더 이상 미래의 인문학을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김석수교수_경북대 철학과)

07. 10. 14.

P.S. 지난 2005년 방한시에 강연한 내용들이 최근에 책으로 묶여 나왔다. <세계의 밀착>(철학과현실사, 2007). 개인적으로 슬로터다이크의 책들에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엔 사정이 다를지 모르겠다. 궁금한 건 번역본 <냉소적 이성 비판>의 제2권이 언제 마저 출간되느냐는 것. 반쪽짜리 책이라 구입도, 독서도 미뤄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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