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대형서점에 둘러본 신간들 중에 유일하게 '예기치 않았던' 책 한권은 일본인 편집자의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 2007)이다. 얼마전에 나온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마음산책, 2007)이 '대단한 독자'를, 계속 소개되고 있는 다치바다 다카시가 '대단한 저자'의 대표적인 상이라면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의 저자 오쓰카 노부카즈는 '대단한 편집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인 저자들과 저서명들이 너무 많이 나와서 책은 손에 들었다가 놓았는데, 저자인 오스카는 그 이름도 유명한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암파서점)의 사장이었다고 한다(그러니까 어제는 책갈피도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 셈이다). 일반독자들에겐 별로 흥미를 끌 책은 아니지만 편집자나 출판기획자들에겐 아주 유익한 교과서 같은 책이겠다(나는 어느쪽인가?) 리뷰기사와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12. 01) 사표 넣고 다닌 편집자, 일본 지성을 이끌다

“돌아보니 30년 동안 ‘안티-이와나미’짓을 했더군요.” 오쓰카 노부카즈(68) 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사장은 삶의 절반 이상인 40년을 일본을 대표하는 진보적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에 몸담았다. 그 중 임원과 사장을 지낸 마지막 10년 정도를 빼면 편집자로 오롯이 30년을 살았다. 그 30년 동안 ‘안티-이와나미’짓을 했다고? “적어도 내가 입안한 기획의 절반은 기성 권위를 무너뜨리는 쪽에 선 것들 이었습니다.”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2만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애송이’ 편집자가 굴지의 출판사 사장이 되기까지의 40년 역정을 담은 회고록이다. 회고록은 1963년 일본의 고도성장기가 시작돼 한껏 기름진 토양 위에 번성하던 출판계가 경제 불황과 ‘활자이탈현상(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 현상)’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시기와도 포개진다. 나아가 그 출판사가 ‘이와나미쇼텐’이기에, 그의 편집을 거친 책의 목록 자체가 1960년 이후 일본의 지성사를 투영하기도 한다.

창립 50돌 무렵 이제 막 입사한 신참 편집자는 편집부에 충만한 기운이 일종의 ‘일류의식’이었다고 회상한다. ‘50년 내내 이와나미쇼텐은 일본문화를 짊어져왔다’, ‘대중문화는 고단샤(講談社)가, 고급문화는 이와나미가’, 라는 말을 들어왔던 까닭이다. 저자에게는 최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제공하고, 보내고 맞이할 때는 전세 승용차를 사용하는 식이었다. 이렇듯 의전은 일류급을 달리는데, 그의 눈에 비친 편집부는 지식과 식견이 모자라 수준 낮은 편집회의를 열고, 외부에서 불러온 ‘대가’의 의견만 수동적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사직서를 주머니에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그는 새로운 기획을 내놓기 시작했다. ‘강좌·철학’ 시리즈의 기획회의에서는 구조주의의 기운을 감지하고 애초에 빠져 있던 <언어> 편을 끼워넣었다. 각각 10만 권 가량 팔려 ‘대박’을 터뜨린 시리즈 가운데서도 <언어>는 가장 많이 팔렸다. 일반 독자를 위한 계몽서인 ‘이와나미신서’ 60권을 내면서 당시 무명이었던 문화인류학자 야마구치 마사오를 발굴해 전후(戰後) 마르크스주의 흐름에서 벗어나려 했고, <콤플렉스>라는 책을 통해 카를 구스타프 융의 사상을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등 활약은 이어졌다. ‘총서·문화의 현재’ 시리즈를 통해 철학과 예술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던 시도는 1983년 계간 문화잡지 <헤르메스>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그는 7년 동안 편집장을 지냈다.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 번역본을 펴낸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이 책이 “편집자에게는 교과서 같은 책”이라고 평했다. 김 대표와 오쓰카 전 사장은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 등 아시아 다섯 개 나라의 인문 출판사 모임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서 만나 친분을 다져왔다고 한다. 오쓰카 전 사장이 책을 썼다고 하자, 김 대표가 단박에 번역판을 내자고 제안했다.

김 대표의 평가가 무색하지 않게, 책에는 그가 40년 동안 담금질해오며 터득한 편집과 출판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다. 실무적인 면에서 편집자 본래의 일은 “집필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시간을 들여 논의하고 박력 있는 책을 내놓는 것”이고, 그 결과물은 “새로운 사고방법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인류가 지금까지 축적해온 것의 총체를 알아야 합니다. 24시간을 공부해도 모자랄 일이지만,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의 젊은 학자들을 모아 토론을 하게 하면, 지금의 현상을 파악하면서 나의 자유시간도 확보할 수 있지요. 그런 자리를 마련해 젊은 학자들 의견 교환의 장을 마련해 주는 게 편집자의 일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그는 학회 성격을 띠는 각종 모임을 만들고, 책으로 그 결실을 보기도 했다.

그가 저자와 맺은 인간관계는 각별하다. 사장으로 있던 2001년 겨울, 이와나미쇼텐과 오랫동안 거래해온 전문서적 중개회사가 도산해 신문에 “이와나미쇼텐은 위기다”라는 기사가 나왔다. 30년 넘게 교제해온 저자가 오전에 다급하게 전화해 자신의 수중에 있는 모든 돈을 기부하겠다고 했다.
일본은 ‘활자이탈시대’를 맞아 출판업이 그 어느때보다도 위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확신한다. “출판사는 회사의 이익을 올리거나 그 나라의 이익을 올리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출판은 문화의 상호 이해를 돕고, 인류 복지를 통해 좀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는 사업이라고 생각합니다.”(김일주 기자)

‘이와나미쇼텐’은 진보성향잡지 <세계(세카이·世界)>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져 있다.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총 176회에 걸쳐 잡지에 연재됐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韓國からの通信)> 덕분이다. 잡지에는 민주화 인사들이 몰래 빼돌린 원고가 실렸고, 그 원고들 덕에 박정희 유신 체제부터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한국의 인권·민주화운동 탄압 실태가 낱낱이 알려졌다.

오쓰카 전 사장은 “창립자 이와나미 시게오는 늘 아시아의 이웃나라에 많은 관심이 있었고, 중국·한국에 대한 일본의 일방적인 침략을 어떻게는 출판업으로 막아보자고 생각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창립자의 정신을 이어받아 이웃 아시아 나라에 대한 동류의식을 확고히 다지는 흐름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1913년 이와나미 시게오가 지인들과 출판사를 세운 이래 이와나미쇼텐은 2만 종 이상의 책을 냈다. 1914년 이와나미와 친분이 있던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이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출판사의 기틀이 잡혔다. 1927년 고금동서의 고전을 보급하기 위한 ‘이와나미문고’를, 1938년 학술적 기반에서 대중을 지향한 계몽서인 ‘이와나미신서’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패전 직후 1946년에는 잡지 <세계>를 창간했고, <사상> <문학> <과학>도 잇달아 창간하는 등 종합·학술출판사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1955년에는 ‘국민 사전’ <고지엔>을 펴냈고, 처음으로 일본의 고전을 집대성한 ‘일본고전문학대계’ 등도 출간했다. 우리나라 책으로는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등을 번역 출간했고, 리영희의 <대화>도 번역 출간할 예정이다. 사장과 혈연관계에 있지 않은 편집자 출신이 사장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정해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다.(김일주 기자)

 

 

 

 

 

 

 

 

 

 

 

 

동아일보(07. 11. 29) “일본도 ‘활자 이탈’ 심각 국민적 책읽기운동 나서”

“최근 일본은 ‘활자 이탈’이란 문화 붕괴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출판계는 물론 범국민적 독서보급운동이 필요합니다. 출판 편집인은 그래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스물네 살 초짜 편집부원으로 시작해 일본의 지성을 대표하는 출판사 사장이 되기까지 40년. 평생 한길을 걸어온 출판인이 한국을 찾았다. 오쓰카 노부카즈(大塚信一·68·사진) 전 이와나미쇼텐(巖波書店) 대표. 이와나미쇼텐은 1913년 고서점으로 출발해 ‘이와나미문고’ ‘이와나미신서’ 등으로 ‘이와나미 문화’라는 말을 낳은 일본 지식문화의 산실로 불리는 출판사다.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한길사)의 한국어판 출간을 맞아 방한한 오쓰카 전 대표는 “일제강점기로 많은 빚을 진 한국에서 책을 내게 돼 더욱 특별하다”며 “젊은 출판 편집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부제가 ‘한 출판 편집자의 회상’이다.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편집인으로 살아온 커리어를 정리했다. 부족한 점도 많지만 그것을 통해 배울점이 있지 않을까. 최근 한국에서는 출판계 이직률이 높다고 들었다. 노동조건 등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출판사는 조직의 이익을 따지는 곳이 아니다. 한 나라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다. 세계 전체의 공영을 돌봐야 한다. 그런 노력의 과정이 담겼다고 봐 줬으면 좋겠다.”

―출판사도 결국 영리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닌가.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의 몇몇 대형 출판사는 출판의 기본 이념에서 벗어나 이익 추구에 집중한다. 본질을 벗어난 셈이다. 출판에는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그러나 기본 전제는 인류의 지적 유산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 기본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

―일본은 그런 가치를 지킬 만한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돼 있나.

“젊은이들의 ‘활자 이탈’ 문제가 심각하다. 대학생이 신문도 읽지 않는다. 일본 출판 규모는 만화를 포함해 2000억 엔 정도지만 슬롯머신 사업은 30조 엔에 이른다. 문화의 균형이 무너졌다. 대책 마련을 위해 ‘활자문화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한국은 인터넷 보급률이 매우 높다고 들었다.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활자문화추진위원회라는 걸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출판사와 신문사, 서점문화위원회 등이 모인 단체다. 토론회나 세미나 등을 통해 독서 보급에 힘쓴다. 가시적인 운동으로는 ‘북스타트 운동’이 있다. 젊은 엄마들과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책에 친근해지도록 만드는 캠페인이다. ‘아침독서 운동’도 있는데 중학생들이 등교해 수업시간 전에 30분간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는 운동이다.”

―한국의 젊은 출판 편집인들에게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말은….

“출판사를 운영하며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편집인은 24시간 근무한다.’ 다양한 분야에서 지식과 판단력을 갖추려면 항상 공부해야 한다. 특히 젊은 학자들과 모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그들을 한데 엮을 수 있는 지성적 틀을 마련하는 것도 편집인이 할 일이다.”(정양환 기자)

07. 12. 01.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네파벨 2007-12-01 16:25   좋아요 0 | URL
하핫, 저는 교정교열에 관한 책인줄 알고 눈이 번쩍~ 했어요.
그런 부분이 너무 취약해서 제대로 공부를 해야지..늘 마음먹고 있던 터라...

사실은 관련도서를 사놓고도 늘 미루고 미루고 안보고 있기는 하지만...

학교다닐때 국어 공부좀 열심히 할걸...후회가 마이 됩니다.

로쟈 2007-12-01 16:42   좋아요 0 | URL
교정교열도 편집자의 역할이긴 하지만 그것만 담당한다는 것은 너무 기능적이지요.^^

Koni 2007-12-01 21:38   좋아요 0 | URL
일본 출판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책으로 찾아가는 유토피아>에 대해서 관심이 가네요. 이렇게 서재들을 돌다가 우연히 좋은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뻐요.

로쟈 2007-12-01 22:43   좋아요 0 | URL
^^
 

드디어 올해도 마지막달에 접어들었다. 한해의 마지막 스케줄을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꼽아두기로 했다. 먼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선정한 '12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이다(선정위원들의 추천사는 http://www.newswire.co.kr/read_sub.php?id=300470&ca1=문화연예- 참조). 대여섯 권 정도는 눈에 익은 책들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위원회(위원장 민병욱)는 '12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분야별 도서 10종을 선정, 발표했다. ‘퀴즈쇼’(김영하·문학동네), ‘중세의 사람들’(아일린 파워 김우영·이산), ‘몽테뉴와 파스칼’(이환·민음사), ‘넬슨 만델라 평전’(자크 랑 윤은주·실천문학사), ‘커넥티드’(대니얼 앨트먼 노혜숙· 해냄), ‘이천동, 도시의 옛 고향’(최엄윤· 이매진), ‘미술관에 간 화학자’(전창림· 랜덤하우스코리아), ‘김승호: 아버지의 얼굴 한국영화의 초상’(한국영상자료원), ‘일방통행 하는 의사 쌍방통행을 원하는 환자’(토르스텐 하퍼라흐 백미숙·굿인포메이션), ‘최열 아저씨의 지구온난화 이야기’(최열 글 경아 외 그림·환경재단도요새)이다.

 

 

 

 

이 목록과 무관하게 내가 고른 '12월의 읽을 만한 책'은 먼저 정치분야이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2007)이 최근에 나온 책이고(간단한 리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731787 참조), 보다 쉬운 입문서로는 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책세상, 2001)를 참조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영-브륄의 대작 <한나 아렌트 전기>(인간사랑, 2007)는 아렌트의 독자들을 위한 연말선물 정도가 되겠다('부담스런' 선물인가?).

 

 

 

 

두번째 분야는 종교이다. 좁혀 말하면 '세계 최대의 선교 강국'인 한국의 기독교 혹은 교회에 대한 비판. 나는 '이명박 현상'과 관련하여 반드시 짚고넘어가야 할 부분이 한국 교회가 아닌가 싶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 문제적인 책이 여러 권 출간됐다. 김지방의 <정치교회>(교양인, 2007), 김경재 등의 <무례한 복음>(산책자, 2007), 이삼성의 <추락하는 한국교회>(인물과사상사, 2007) 등이 그 책들이다. 아프간 피랍사태의 교훈을 어떻게 되새겨야 할는지도 이 책들과 함께 생각해볼 문제이다.  

 

 

 

 

세번째는 한국인에겐 '올해의 지역'으로 꼽을 만한 아프가니스탄과 관련된 책들이다. 세 권 모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는데 호세이니의 소설 <찬란한 천 개의 태양>(현대문학, 2007), <연을 쫓는 아이>(열림원, 2005)와 데보라 로드리게즈의 논픽션 <카불 미용학교>(길산, 2007)이 그 책들이다(각각 http://blog.aladin.co.kr/mramor/1718531, http://blog.aladin.co.kr/mramor/1607006 참조). 개인적으로 호세이니의 소설들은 며칠전에 구입했고 미용학교에 가보는 일만 남았다.  

 

 

 

 

네번째는 혁명가들에 대한 책들이다.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역으로>(이매진, 2007)와 이상엽의 사진집 <레닌이 있는 풍경>(산책자, 2007),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에서 아옌데까지, 다시 보는 세계의 혁명가들'이란 부제의 <꿈은 소멸하지 않는다>(한겨레출판, 2007)까지. 필히 실망스런 결과를 낳을 것으로 보이는 이번 대선 이후에도 삶은 계속될 것이고, 여전히 꿈도 이어질 것이다. 훨씬 더 어려웠던 시간들을 살았던 인물들의 시간을 훔쳐보는 것은 위안이 될 수 있겠다. 혹은 새로운 희망의 진지를 만드는 데 영감을 줄 수도 있겠고.

 

 

 

 

끝으로, 정치적으론 87체제 20년, 경제적으론 97체제(IMF이후) 10년을 맞았던 한해를 보내면서 관심을 갖게 된 주제 '사회변동'과 관련한 책들이다. 연말이면 명상이 필요한 '시즌'이긴 하나 '사회변동'이라고 해서 명상거리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다. 라우어의 교과서 <사회변동의 이론과 전망>(한울, 2007)과 송호근 등의 <한국사회의 변동과 연결망>(서울대출판부, 2006), 그리고 김광억 등의 <한국사회의 정체성과 글로벌 표준의 수용>(서울대출판부, 2006)이 일단 내가 꼽은 책들이다. 분류상 학술서에 속하므로 부담스런 독자라면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한국근대사 산책> 시리즈를 통독해보아도 좋겠다. 우리의 인식은 언제나 역사적 인식이니까...

07. 12. 01.

P.S. 이제 연말에 '올해의 책' 정도만 꼽으면 되겠군...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늘빵 2007-12-01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째, 둘째 주제는 저도 관심이 많은거군요. 아렌트는 한번 몰아서 쭉 읽어야하는데, 아직 미뤄두고 있답니다. <정치와 진리>는 두 차례 읽었는데, 아렌트 입문서라기보다는 아렌트의 이론을 차용한 김선욱 교수의 고민에 관한 책이라고 보는게 맞는거 같아요. 아렌트 입문서로 기대하고 보기엔 적절하지 않을듯. 아렌트 전기는 말씀하신대로 가격이 어마어마하더군요. 흠...

로쟈 2007-12-01 11:45   좋아요 0 | URL
물론 아렌트에 대한 '한가지' 해석일 테지만 특별한 해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분량과 난이도 면에서 '입문서'의 역할을 해줄 거라고 보는 것이죠...

송연 2007-12-0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 입문서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 싶네요.
출판사에서도 그걸 의도해서(일반인들에게도 이해되기 쉽게!) 교수님께 제의를 한거라고 들었어요..

로쟈 2007-12-01 11:47   좋아요 0 | URL
<한나 아렌트가 들려주는 전체주의 이야기> 등도 그런 컨셉이죠. 중고등학생에게도 이해하기 쉽게!..

비로그인 2007-12-05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쿠 오랜만에 둘러보니 한층 더 유명세를 타셨군요ㅋ (시사인 말이죠...)
종교와 (특히 한국)정치 관련해서 글 쓸게 있어 알라딘 좀 검색했더니 '정치교회'에서 익숙한 로쟈님 이름이 뜨는군요.
올해 6월달에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이란 책도 나왔던데 알고 계셨는지요? 로쟈님 레이더를 피해가지는 않았을 것 같으면서도 혹시나ㅎ

로쟈 2007-12-06 00:16   좋아요 0 | URL
출간 소식은 알고 있습니다. 신간들 가운데 3권만 고르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리고 조금 자주 들르셔야겠습니다.^^
 

오후에 오랫만에 대형서점에 들러봤지만 뜻밖에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책들 외에 새로 나온 책이 없었다. 지갑을 열지 않아도 돼 다행이었지만 좀 아쉬운 감도 없지 않았다. 발견의 즐거움을 놓친 한주가 됐기 때문이다. 언론의 북리뷰들을 훑어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어디에 숨어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해서 신간 리뷰를 따로 옮겨오는 수고를 이번주에는 덜게 되었다. 대신에 지난주에 나온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의 신작이 지난주에 소개됐었고 <영장류의 평화만들기>(새물결, 2007)가 그 제목이었다. 드 발의 책은 2003-2005년에 몇 권 소개되다가 작년을 건너뛰고 다시 올해 한권이 출간되었다. 나는 신간을 <침팬지 폴리틱스>(바다출판사, 2004)와 함께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침팬지 폴리틱스>는 예전에 <정치하는 원숭이>(동풍, 1995)로 소개됐었고, 이것이 내가 알기엔 제일 처음 소개된 드 발의 책이다). 이 두 권의 북리뷰다.

한국일보(07. 11. 24) 영장류는 살기 위해 공격하고 살아남기 위해 화해한다

사소한 다툼에서부터 국가 간 전쟁의 원인까지를 설명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은 본능적으로 공격적’이라는 표현이다. 공격성ㆍ폭력성은 인간의 내적 본능으로 저열하고 동물적이며 정글의 법칙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된다. 화해는 단지 선한 의미로서 폭력에 대한 상대적 표현에 국한된다.

하지만 공격적 기질 뿐만 아니라 화해적 본능도 영장류의 본능임을 알리는 책이 번역 출간됐다.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의 ‘영장류의 평화 만들기’는 침팬지, 붉은원숭이, 붉은얼굴원숭이, 보노보 그리고 인간 이렇게 다섯 영장류의 화해 제스처를 관찰한 책이다. 이들의 평화 만들기 전략은 저자가 ‘주제’와 ‘변주’라고 부르듯 사회관계의 회복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 있으면서도 고유하게 나타난다.

네덜란드 아른헴 동물원의 침팬지 우두머리인 ‘니키’는 다른 침팬지 ‘헤니’의 등을 쳤다. 그러자 ‘헤니’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니키에게 인사하고 팔을 뻗어 손등에 키스하도록 했다. 니키는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니키는 헤니의 손을 입에 집어넣는 것으로 응하고 둘은 서로 입을 맞춘다. 영장류 중 가장 권위적이고 위계 서열이 확고한 붉은원숭이는 심한 공격 성향을 보이다 이후 입맛을 살짝 다시는 것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한다.

또 붉은얼굴원숭이는 상대방의 엉덩이를 붙드는 것으로 화해의 행동을 보이며 보노보는 심각한 갈등 이후 성행위로 화해한다. 화해의 동작은 이렇게 다양하고 고유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이 모든 화해의 행동이 일종의 생존의 전략임을 지적하고 “우리가 언젠가는 공격적 성향을 떨쳐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가져서도 안 되지만 우리가 가진 화해 능력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이대혁기자)

한겨레(04. 04. 03) 탄핵할줄 아는 침팬지들

‘최소승리연합’이란 용어가 있다. 한 국가가 강대해지면 나머지 국가들이 두려움 때문에 강국에 대항하는 연합을 모색하고, 그 결과 모든 국가들이 영향력있는 지위를 갖는 권력의 평형상태가 이뤄지게 된다는 원리다. 인간이 구성한 사회단위 가운데 가장 상부에 있는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행위다. 그런데, 바로 이같은 고도의 정치 행위가 동물 사회에도 이뤄지고 있다면 책은 지난 1982년 침팬지가 정치를 한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펼쳐 파장을 일으켰던 문제작이다. 지난 95년 국내에도 <정치하는 원숭이>란 이름으로 소개됐는데 최근 수정판본으로 다시 출간됐다.

네덜란드 출신의 동물행동학자인 지은이는 1976년부터 네덜란드 아넴에 있는 부르거스 동물원의 대규모 야외 침팬지 사육장에서 몇년 동안 침팬지 무리들을 관찰한 뒤 이 책을 썼다. 그리고 침팬지 무리의 최고 자리를 놓고 벌어졌던 처절한 권력투쟁을 마치 영화처럼 세밀하게 보여주면서 침팬지도 ‘정치’란 단어의 주어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만약 책을 읽기 전에 침팬지의 정치, 즉 권력투쟁이 우두머리 자리를 노리는 수컷들끼리 벌어지는 몸싸움으로, 그리고 그 한판 승부의 결과에 따라 위계 질서가 정해질 것으로 예측했다면 이런 추측은 책을 통해 여지없이 박살나고 만다. 지은이가 관찰한 침팬지들의 최고권력자 쟁탈전은 결코 ‘동물적’ 힘겨루기가 아니라 치밀한 전략과 전술이 펼쳐지는 장기전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침팬지들은 특정한 목적에 따라 은폐, 연기, 중재 등 수많은 정치 행위들을 끊임없이 수행한다.

아넴 동물원의 권력 투쟁은 1인자였던 침팬지 이에론에게 2인자 루이트가 도전하면서 시작됐다. 루이트는 이에론과 그 우군인 암컷들 사이의 유대관계를 하나하나 끊는 전술을 펴는 한편 젊은 침팬지 니키와 연합을 형성해 힘을 키웠다. 니키는 이에론과 루이트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자기 가치를 높이다가 결국 루이트의 편에 붙었다. 루이트는 먹을 것을 따다주는 ‘산타클로스’ 전략으로
동료들의 환심을 사면서 이에론을 고립시켰고, 마침내 첫 싸움이 벌어진 지 72일만에 이에론을 굴복시키고 1인자에 등극했다.

그러나 이는 새로운 싸움의 시작이었다. 이에론은 그 뒤 루이트와 니키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실리를 챙기며 서열 3위 자리를 보장받았고, 이후 세 마리가 마치 ‘3두정치’하듯 서로 이간하고 연합하는 밀고당기기가 이어졌다. 권력 교체 1년 뒤 루이트는 니키와 이에론 연합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났고, 이번에는 니키가 1인자로 올라섰다. 그 뒤 3년 동안 이어지던 니키와 이에론의 연합도 영원하지는 못했다. 세침팬지가 벌이는 정치투쟁은 마치 <삼국지>나 <열국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드라마틱하게 긴장감을 조여가다가 1980년 또다른 반전과 함께 충격적인 결말로 끝맺는다.

지은이는 침팬지들의 삶과 사회에는 권력투쟁 못지않게 매력적인 다른 현상들, 곧 사회적 유대감 형성이나 화해, 사랑 등이 들어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하는 것을 잊지는 않는다. 그러나 침팬지란 ‘타자’ 속에 투영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마음 편치 않게 된다. 책에 묘사되는 침팬지의 비정하고 기회주의적인 속성은 바로 인간사회의 모습 그대로처럼 보이고, 결국 사회적 행동의 동기를 볼 때 인간과 침팬지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탓이다. 과연 ‘정치’의 기원은 인류의 역사보다 오래된 것일까.(구본준 기자)

07. 11.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http://h21.hani.co.kr/section-021162000/2007/11/021162000200711290687031.html)를 옮겨놓는다.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 출간을 빌미로 그의 정치사상에 대해서 몇 자 적은 것이고 한 문단은 예전에 쓴 글에서 따왔다. '한나 아렌트'가 '해나 아렌트'로 표기된 건 한겨례의 표기원칙에 따른 것이다(나로선 동의하기 어렵지만). 파르테논 신전의 사진은 마음에 든다... 

한겨레21호(07. 11. 29) 人間을 들여다보라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라 할 만한 해나 아렌트의 <정치의 약속>(푸른숲 펴냄)은 지난 1975년 세상을 떠난 그의 유고 중 하나다. 책은 국내에 먼저 소개된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인간의 조건>(1958) 사이의 유고들을 주로 모은 것이다. 대부분이 반세기 전에 쓰인 글들인 셈이지만 여전히 정치의 의미와 정치적 사유에 관해 많은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럼 아렌트의 문제의식은 무엇이었나? 그는 <인간의 조건>에서 ‘관조적 삶’과 대비되는 인간의 ‘활동적 삶’을 ‘노동’과 ‘작업’, 그리고 ‘행위’로 나누었는데, 거기서 핵심이 되는 것은 행위인데, 이는 ‘정치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했을 때, 그가 말한 ‘준 폴리티콘’(zoon politikon)은 실상 ‘정치적 동물’로 번역되어야 하며(‘사회적 동물’로 번역한 이는 로마의 세네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이 ‘정치적인 것’의 발견(혹은 발명)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유산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함께-함의 형식을 탐구하고 보존하기 위해서 함께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함께 하기 위해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인정이다. 정치에서 다루는 인간은 유적 존재로서의 ‘인류’나 단수로서의 인간(man)이 아니라 복수로서의 인간(men)이다. 즉, ‘인간’이 아니라 ‘인간들’을 다룬다. 아렌트가 보기에 철학과 신학은 항상 단수의 인간과 관계하기 때문에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하지 못한다(따라서 ‘정치철학’은 모순형용이다).

정치란 인간들 ‘사이에서’, 혹은 단수의 인간 ‘외부에서’ 생겨난다(사실 한자어 ‘人間’은 이미 이러한 관념을 잘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의 근본은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에 대한 인정과 긍정이다. 그래서 정치는 진리와 무관하다. 가령 우리는 2×2=4인가, 아니면 2×2=5인가의 문제를 다수결로 결정하지 않는다. 지구가 도는지 마는지를 배심원들의 판결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후보를 다음 대통령으로 뽑을 것인가 같은 문제는 정답, 즉 진리를 갖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영역, 의견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행위란 이 정치라는 공적 영역에서 복수의 행위자들이 하는 공동행위, 즉 함께-행동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의 장이 그리스의 ‘폴리스’였다. 아렌트의 지적에 따르면, 그리스인들에게 자유롭다는 것은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며, 거꾸로 폴리스에서 살기 위해 인간은 이미 자유로워야 했다. 즉, 본래적 의미에서 ‘정치적 인간’은 권모술수의 인간이 아니라 ‘자유의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렌트는 자유가 정치의 의미라고 말한다.

따라서 정치란 무엇보다도 자유에 대한 권리 주장이며 그 행사이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라고 흔히 오해되는 그리스어 ‘이소노미아’(isonomia)가 뜻하는 바 또한 모든 사람이 법적 활동을 동등하게 주장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평등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에서는 폴리스, 곧 정치의 공간에서만 가능했다. 폴리스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남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그런 자유의 공간으로서 ‘폴리스’가 있는가? 우리는 노예가 아닌,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정당하게 향유하고 있으며 또 적합하게 행사하고 있는가? ‘정치적 인간’ 대신에 ‘경제적 인간’이, ‘정치’ 대신에 ‘정치공학’이 득세하고, 후보들의 정책공약이 아니라 ‘BBK’ 같은 금융사기 사건이 국민적 (무)관심사가 되고 있는 즈음인지라 ‘정치의 약속’에 대한 아렌트의 사유와 ‘정치로의 초대’는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적 구호들은 난무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정치가 부족하다.

07. 11. 30.


댓글(8)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람혼 2007-11-30 13:1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기고문들만 읽는 것으로도 숨이 가쁩니다. 각각 따로 챙겨서 읽지 않아도 여기 오면 거의 모두 읽을 수 있으니, 좋은 글들에 항상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형용모순으로서의 '정치철학'이라는 단어,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너무도 부족한 정치'에 대해서 숙고해봐야겠습니다. 물론 숙고만으로 풀릴 일은 아니겠지만요! ^^

로쟈 2007-11-30 13:42   좋아요 0 | URL
'숨가쁠' 정도는 아닙니다.^^; 말씀대로 숙고로 풀릴 일은 아니고 '정치적 행위'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냥 찍는 행위로는 부족한...

李潤映 2007-11-30 22:09   좋아요 0 | URL
폴리스에 산다는 것과 자유를 동일 시 하는 아렌트의 생각의 관점에서 자유란 무엇인가가 궁금해지는군요. 인간자체를 본질적으로 자유로 보는 견해와는 사뭇 다르게도 느껴지는 데, 아렌트의 생각이 너무 정치일변도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인간이 무엇이냐를 생각한다면 아렌트의 말이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수긍이 가지 않는 면도 업지 않지만, 과연 복수로서의 인간만을 생각한다면 궁극적으로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들기도 하구요. 여하튼 재미있는 글이었읍니다.

로쟈 2007-11-30 23:21   좋아요 0 | URL
제 어줍잖은 중개보다는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쉬운 입문서론 김선욱 교수의 <정치와 진리>(책세상)이 있고, 이번에 두툼한 전기도 나왔기 때문에 아렌트 읽기는 매우 용이한 편입니다...

송연 2007-12-01 10:27   좋아요 0 | URL
폴리스에서 산다는 것은 평등한 발언의 기회, 즉 행위가 이뤄지는 장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래서 행위한다는 것은 결국 자유를 경험하는 또다른 표현일수 있겠네요. 인간 자체를 본질적으로 자유로 보는 견해도 맞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자유개념과 다른 '정치적'자유를 아렌트는 의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정치적이라는 표현도 현실정치를 넘어서서, 좀 더 확장된 존재론적인 의미로서 이해하시면 좋을것 같구요. 복수로서의 인간만을 아렌트가 생각한다는 표현은 조금은 이상한것 같기도 한데요... 단수로서의 인간은 개인 각자의 '고유성', '다름'등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이에 대한 비판으로 그녀가 복수성 개념을 꺼낸것이구요... 제가 대충 아는데 까지만 어설프게 답변을 드리긴 했는데 로쟈님 말씀처럼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더 정리가 잘 되실듯 하네요..;;

로쟈 2007-12-01 11:50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단수로서의 인간은 신학적 인간이고 철학적 인간인데, 그런 면에서 정치적 인간과 대조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행위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체험되고 확보될 수 있다고 보는 점이 아렌트의 의미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밀실에서의 자유' 같은 건 아렌트가 보기에 유사-자유일 따름이죠)...

swk516 2008-02-02 00: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십니까, 김선욱입니다. 오랜만에 클릭클릭하다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지젝을 얼굴로 쓰시는군요. 제게도반가운 얼굴입니다. 번역은 했지만 깊이 읽고 써 주시는 글을 읽으면서 많이 배웁니다. <정치와 진리> 추천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로쟈 2008-02-03 11: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지젝과는 대담도 하셨으니까 반가우실 만하겠습니다.^^ 저야 좋은 책을 내주시는 역자/연구자분들께 감사를 드려야죠. 아렌트에 대한 제 이해는 많은 부분 김선생님께 빚지고 있는 것이고요.^^
 

에누리 없는 중견 시인 김정환이 등단 30년만에 처음으로 문학상을 수상한다는 소식은 얼마전 고종석의 칼럼 '김정환 생각'(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11/h2007110718345739780.htm)을 읽고서 알았다. 지난주에 그 시상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관려기사를 읽고서 아침부터 웃음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재담에도 상이 주어진다면 시인은 분명 훨씬 먼저 수상했을 터이다...

컬처뉴스(07. 11. 26) "드디어 내 시가 흉물기를 벗었구나"

“이 도저한 시적 활력과 음악은 어디로부터 기원하며 도대체 앞행이 뒷행을 물고 달리는, 혹은 말들이 미끄러지면서 다른 차원의 말들을 낳는 이 눈부신 광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이 기묘한 도시의 번잡 속에서 최고의 음악을 연주할 줄 아는 그는 분명히 이 시대의 흔치않은, 독보적인 ‘예술가=시인’이다.” -제9회 백석문학상 심사위원 심사평

이 훌륭한 수사는 김정환(53) 시인에게 붙은 것이다. ‘전방위 저술가’로 통하는 김 시인이 가진 시적, 개인적 특징을 잘 응축해 놓은 이 심사평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에게 처음 붙은 심사평이기 때문이다. 김 시인은 올해 발표한 시집 『드러남과 드러냄』(강)으로 백석문학상을 수상, 등단 27년 만에 첫 상을 안았다.



지난 11월 23일(금) 열린 창비 문학상 시상식은 등단 이래 ‘첫 상’을 수상하는 김정환 시인 덕(?)에 시상식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화기애애’의 시작은 정희성 시인으로부터 시작됐다. 축사를 위해 무대에 오른 정 시인이 김정환 시인의 ‘첫 상’을 두고 “고소하다”고 했던 것이다.

평생가야 상 하나 못 받을 줄 알았는데, 오십이 넘어 이렇게 상을 받으면서 시인이 겸언쩍어 하는 모습을 보니 고소하다는 것이었다. 묵직한 축사를 기대했던 청중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김정환 시인도 정 시인의 말을 시인하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 시인은 김 시인을 “창 한 자루를 들고 외롭게 세상과 맞서왔던 시인, 단일한 무엇으로 규정하기 힘든 시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젠가 김정환 시인이 교도소에서 기상나팔소리를 클래식으로 바꾼 일화를 듣고 무릎을 쳤다”면서 “그의 도저한 시적 활력과 저력이 우리 문단안에서 기상나팔처럼 오래도록 울려퍼지길 바란다”고 축사를 가름했다. 

수상자들의 수상소감이 이어지고 맨 마지막 김정환 시인이 무대에 올랐다. 수상소감은 시상순서와 반대로 진행됐던 것이다. 정 시인의 말대로 무대에 오른 김 시인에게서 평소 호탕하고 단단하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겸언쩍음’에서 나아가 ‘부끄러운’ 기색마저 감돌았다. 시인은 “집사람하고 나오는데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탁 치는 것을 보고 모처럼 상을 받아보겠다는데 하늘까지 난리구나하고 생각했다”면서 말문을 열었다. 시인은 사전을 뒤진 이야기를 꺼냈는데, 자기 같은 사례가 있을까 해서 고유명사 사전을 뒤져봤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나이에 데뷔한 사람은 많아도 20대에 데뷔해서 30년을 개개다 50대에 첫 상을 받는 사례는 없다는 것이다. 정 시인의 축사에 이어 청중들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김 시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시인은 자신의 사례가 고유명사에 없어서 찾는 김에 일반단어를 찾아봤다고 했다. 이어 시인은 “ ㄱㄴㄷㄹ…에는 없고 ‘ㅎ’ 항목에서 찾았어요. 그게 바로 ‘험한 꼴 당한다’입니다”고 말해 시상식장을 웃음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김 시인은 “상을 준다고 했을 때 처음 들었던 생각이 ‘내 시가 흉물기는 벗는구나”였다면서 “남은 둘째 치고 내가 봐도 모르겠는 흉물”을 책으로 만들어준 강 출판사를 비롯해 “내가 시를 쓴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해설을 쓴” 황광수 문학평론가 그리고 “본문보다 더 아름다운 표사”를 써준 고형렬 시인과 “아직 도착하지 않은” 표사의 주인 김사인 시인에게 감사를 전했다.

시상식장에서 만난 김사인 시인은 ‘표사’ 이야기에 억울해 했다. 분명히 우편으로 보냈는데 아직 도착을 안했다는 것이다. 김사인 시인은 김정환 시인이 그동안 상을 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너무 많은 시를 쏟아내서 심사위원들도 다 못 읽은 것”이라면서 “아마 시인 자신도 자기가 몇 권의 시집을 냈는지 모를 것”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상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때문에 빛나는 것이인데 ‘백석문학상’은 시인에게 ‘첫 상’으로서 의미도 있지만 김 시인이 받아준 상이기에 더욱 빛나는 상”이라고 덧붙였다.

김정환 시인은 1980년 『창작과비평』에 「마포, 강편동네에서」 등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1992) 이래 20여 권의 시집과 10여 권의 저서를 출간하며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위지혜기자) 

07. 11. 30.

P.S. 기사에서 첫시집 <지울 수 업는 노래>(창비)가 1992년에 나왔다고 기재된 건 오기이다. 1982년에 나온 시집이다. 이후에도 거의 매년 시집 혹은 시론집을 내던 시절이 시인의 80년대였고(나는 그의 초기시들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늘상 같은 연배의 황지우 시인과 나란히 거명되곤 했는데 그토록 상복이 없었던가는 이번에 알게 됐다(황지우 시인만 하더라도 허다한 문학상들을 수상한 전력이 있다). 아무려나 기사를 읽다 보니 전방위 저술가에다 리뷰어이기도 한 시인의 최근간 <김정환의 만남, 변화, 아름다움>(문학동네, 2007)에도 눈길이 간다.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강좌 '금요일의 문학이야기' 내용을 다시 정리해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연재했던 것이 주요 내용이며 지난 세기말을 전후해 몇몇 매체를 통해 이루어졌던 대담들을 덧붙"인 책이다.

그리고 생각나는 또 한권의 책은 고종석의 <모국어의 속살>(마음산책, 2006).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시인공화국 풍경들'을 묶은 것인데, 그 연재에서 고종석은 김정환의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를 두번째로 다루었었다. 시인의 이번 수상이 왜 뒤늦은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인용은 연재기사가 아니라 책을 따른다).

한국일보(05. 03. 09) [시인공화국 풍경들] <2> 희망의 원리를 향하여

시인 김정환(51)의 산문은 넌지시 시적이다. 이것이 그의 산문에 대한 찬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산문가 김정환의 시는 슬그머니 산문적이다. 이것 역시 그의 시에 대한 찬사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김정환은 가장 반듯한 산문을 쓰는 시인이자, 가장 산뜻한 시를 쓰는 산문가다. 이것은 찬사다. 김정환의 시가 산문적이라는 것은 그것들이 산문시라는 뜻이 아니다. 김정환은 좀처럼 산문시를 쓰지 않는다. 불혹을 넘기고 낸 시집 ‘노래는 푸른 나무 붉은 잎’(1994년)이나 ‘텅 빈 극장’(1995년)에서는, 섬세하게 연산된 율격으로 시의 음악화를 꾀한 전과(前過)까지 있다.

그러나 입에 척 들러붙었던 소월의 ‘진달래꽃’에 바로 이어 김정환의 첫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1982년)를 읽을 때, 시적인 것에서 산문적인 것으로의 이행을 체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진달래꽃’에서 바깥으로 툭 불거져있던 리듬은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선 속으로 푹 가라앉아 있다. 무엇보다도, ‘지울 수 없는 노래’의 노래들은 산문의 견고한 통사 기율을 준수한다. 김정환의 글쓰기에서, 시의 문법과 산문의 문법은 동일한 교본에 터잡고 있다. 그의 산문정신은, 곧 그의 지성은 시적 허용의 남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재능에도 그 갈래별로 위계가 있다면, 문학적 재능은 음악적 재능에 견주어 하찮은 것임에 틀림없다. 글재주는 어느 정도 다듬어지고 벼려지는 것이지만, 가락을 만드는 재주는 태어난다고 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1970년대 대중문학은 그 시대에 신중현이나 이장희가 대중음악에서 보여준 경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1970~80년대 민중문학도 김민기나 문승현이 민중가요에서 보여준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음악과 문학의 이 거친 대비를 문학 내부로 가져와, 시와 산문의 대비에 포갤 수도 있을 것이다. 산문가는 훈련되는 것이지만, 시인은 태어나는 것이다. 천재 음악가가 가능하듯 천재 시인은 가능하지만, 천재 산문가는 불가능하다. 시인이 태어나는 순간 결정된다는 것은 시가 귀족의 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산문가는 태어난다기보다 벼려진다. 벼림은 귀족의 일이 아니라 평민의 일이다. 그래서 산문은, 바로 그 이름이 가리키듯, 흩어진 글, 볼품 없는 글이고 평민의 글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주의 소월은 천재였고 귀족이었다. 그러면 김정환은?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적어도 그는 소월을 귀족이나 천재라고 부를 때의 그런 천재나 귀족은 아니다. 고전음악에 대한 조예가 김정환만 한 이를 한국 문단에서 찾기 어렵다는 사실이 그를 귀족이나 천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음악은 재능이라기보다 교양인 듯하기 때문이다. 그의 눈부시게 아름답고 열정적인 문장도,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는 벼림의 소산이다. 그런데 천재란 벼림 없이 드러나는 재능이고, 귀족이란 오직 출생으로 얻게 되는 신분이다.

무엇보다도, 시든 산문이든 김정환의 글을 읽노라면, 그가 예술가인 것 못지않게 지식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식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정환의 글은 유물론의 바다를 헤엄치며 육체의 구체성을 구가하는 것 못지않게 관념과 놀아나는 지적 체조에 탐닉한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도 더러 관념이 날아다닌다. 소월이라면, 그가 50년쯤 뒤에 태어났더라도, ‘처절한 근본적 참여’(‘빈대 걸음마’)라거나 ‘눈부신 단순성’(‘동계훈련’)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관념적 표현들은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에서 대체로 성공적이다. 그 관념들은 일종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시 읽기의 자동화를 막는다.

‘진달래꽃’의 세계가 밀실이라면,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세계는 광장이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는, 유신체제 출범과 함께 성년에 도달하고 광주학살의 충격에 휘둘리며 사회에 나온 젊은 지식인 예술가의 미적-윤리적 결단이 도사리고 있다. 이 시집은 김정환 문학의 출발점이면서 테두리다. ‘지울 수 없는 노래’에도 ‘진달래꽃’ 만큼이나 설움과 그리움이 넘쳐 난다. 그러나 ‘진달래꽃’의 설움과 그리움이 사사로운 것이었다면,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설움과 그리움은 도드라지게 공동체적인 것이다. 그래서 “설움이 모여서 사랑이 될”(‘타는 봄날에’) 때 그 사랑도 공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울 수 없는 노래’도, ‘진달래꽃’처럼, 한국 민족과 민중에 굳게 결합돼 있다. 그러나 ‘진달래꽃’이 그 결합을 언어 형식의 수준에서 이뤄냈다면, ‘지울 수 없는 노래’는 그 결합을 언어 내용의 수준, 곧 이념의 수준에서 실천하고 있다. 김정환은 “더러워서 아름다운 조국의 땅더미”(‘이태원에서’)에 발을 디딘 채 억새 같은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했다. 그 해석을 두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김수영의 ‘풀’과 달리, 김정환의 억새는 질긴 생명력의 민중에 대한 은유로 튼튼하다.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난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 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 같이 빨려 들어가고만 싶은 진흙창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마포, 강변 동네에서’).

김정환은 시대의 무당이었다. 개죽음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 살아남은 이 젊은 무당은 “그대가 나의 미망(未亡)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유채꽃밭’)을 바라보며 “이렇게 이렇게 살아남은 것”을 “못내 부끄러워”(‘길잃기’)하지만, “남아서 못난 사람들끼리/ 살아서 장한 사람들끼리/ 사랑하고, 꾀죄죄한 살 비비”(‘초복’)기를 기원한다. 싸우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성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집 ‘지울 수 없는 노래’를 이끄는 감수성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육교를 건너며’의 화자는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고 털어놓은 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한다. ‘희망의 원리’라는 표현을 유명하게 만든 에른스트 블로흐는 유토피아는 인간의식의 본질에 속한다고, 인간은 자신을 미래에 투사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지울 수 없는 노래’의 시들은 희망의 원리를 떠받치는 이 유토피아적 이성의 정서적 등가물들이다. 김정환의 희망의 원리는 혹독한 80년대를 거치며 민중민주주의 변혁론과 버무려져 ‘기차에 대하여’(1990년)나 ‘사랑, 피티’(1991년) 같은 시집을 낳았다.

이 시집들의 가쁜 숨결이 설령 현실을 비껴갔다고 하더라도, 80년대의 맥락 속에서 그것이, 그것만이 윤리적이었다는 사실은 오롯이 남는다. “소스라쳐 내가 놀라는 것은/ 아직도 내게 돌려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동산 부동산”(‘바퀴벌레’)이라거나 “나의 전신을 수도 없이 강타하는 것은/ 실상은 부드러운 그의 말씨이다/ 그가 하는 말 중에 민주라거나 투쟁이라거나/ 민중이라거나 자유라거나/ 이런 문자 그대로 황홀한 말들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내 몸은 수없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더욱 욱신욱신 쑤시는 것일까”(‘이씨’)라고 반성할 줄 아는 염결한 정신이 혁명행 열차에 탑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울 수 없는 노래’는 뛰어난 시집이다. ‘성탄’이나 ‘봄길’을 비롯해, 적어도 이 시집의 전반부에 실린 작품들은 당대 한국 시문학이 목격한 미적 긴장과 생동의 정점에 자리잡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이 시집을 떠받치는 것이 생명력이나 부끄러움만이 아니라 일종의 탐미 취향이라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김정환을 탐미주의자랄 수는 없겠지만, 그의 화려하고 힘찬 말투는 드물지 않게, 의뭉스럽게, 탐미를 수행한다. 탐미가 데카당스나 요사스러움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지울 수 없는 노래’의 탐미가 바로 그런 드문 예라는 것도 지적해야겠다.

‘지울 수 없는 노래’를 상재했을 때, 시인은 이미 옥살이와 강제징집으로 시대의 소명에 응답한 상태였다. 이 시집을 낸 뒤 80년대를 거치면서도 그는 자주 신체의 자유를 군사정권에 압수당했다. 그가 시대의 어둠에 정면으로 맞선 윤리적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예술에 덤의 값어치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울 수 없는 노래’ 앞뒤의 시인 개인사를 염두에 두고 이 시집을 읽을 때, 활자들이 독자의 가슴에 더 깊이 박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 지울 수 없는 노래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로 2007-11-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험한 꼴 당하게 한 책 사서 보고, 읽고, 느껴봐야겠어요~.

로쟈 2007-11-30 13:46   좋아요 0 | URL
'험한 꼴' 당하게 하는 책들이 더 많이 나오면 좋겠어요.^^

네꼬 2007-11-30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의 수상소감은 늘 코끝이 찡해요. 오랫동안 외로웠던 사람과 그 사람을 지켜보아온 사람들이 애썼다 고맙다 손을 맞잡는 것 같아서요. 상을 받은 시인들은 집에 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저는 그런 게 궁금하답니다. : )

로쟈 2007-11-30 13:46   좋아요 0 | URL
코끝이 찡하기 전에 일단 코믹합니다. 유머를 아는 분들이어서...

stella.K 2007-11-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김정환 선생님이 상을 받으셨군요. 축하드려야 하는데, 십 몇년 전의 제자를 기억하실라나? 멋 모르고 그분이 하시는 학교에서 창작을 잠시 배운 적이 있었죠. 알고봤더니 꽤 유명하신 분이시더라구요. 그분의 명성에 비해 그동안 상복이 참 없으셨네요.^^

로쟈 2007-11-30 13:45   좋아요 0 | URL
그런 기억도 있으시군요. 저는 멀찍한 술자리에서나 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