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주간논평으로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http://weekly.changbi.com/blog_post_192.aspx). 내가 주문받은 것은 '인문서 번역의 실태와 문제점'을 짚어보는 일이었고 마침 최근 출간된 <번역비평>을 읽고 있었기에 그걸 실마리 삼아 몇 자 적은 글이다. 새삼스럽지 않은 얘기를 '진지하게' 늘어놓아 멋쩍긴 하다. 그리고 최종원고를 보낸 지 한 시간만에 글이 올라와 놀랍기도 하고(!). 

창비주간논평(07. 12. 04) 한국의 인문서 번역현실과 그 적들

최근에 나온 《번역비평》(고려대학교출판부) 창간호를 흥미롭게 읽었다. 작년에 발족한 한국번역비평학회의 연간 학술지이다. 지난 10월 영미문학연구회의 정기학술대회에서도 '번역과 영미문학의 미래'라는 주제가 다뤄진 걸 보면, 번역에 대한 한국 지식사회의 문제의식은 어느 때보다도 널리 공유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는 인터넷을 통해 활성화된 번역비평과 작년에 불거진 대리번역 파문 등도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번역비평》과 학술대회 발표문들을 읽으며 새삼스레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 우리의 우려할 만한 번역현실이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박상익 교수가 《번역은 반역인가》(푸른역사 2006)를 통해서 신랄하게 고발하고 비판한 바 있다. 그대로 옮겨보면,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이나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들은 독자들에게 좌절과 환멸을 수시로 안겨주고 있으며, 동서양의 주요 고전들 중 상당수는 아예 번역·소개조차 안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번역에 적대적인 한국현실

이러한 현실이 끌어안고 있는 여러 고질적인 문제들은 번역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팎의 문제들이다. 일부에서는 오역 집어내기에만 열중하는 번역비평의 비생산성을 꼬집기도 하지만, 사실 "오역과 비문으로 가득한 번역서"라고 할 때 '오역'이란 말이 가리키는 것은 대부분 무지와 무성의에서 비롯된 단순오역들이다. 가령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를 서로 바꿔 옮긴다거나 라깡의 '대학담론'(discourse of University)을 '우주에 대한 강좌'로 옮기는 식이라면 독자의 '좌절과 환멸'은 불가피하다. '직역이냐 의역이냐' 혹은 '충실성이냐 가독성이냐'란 '고상한' 번역학적 논란이 우리의 현실에 잘 부합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이 번역 텍스트의 문제라면, 보다 근본적인 것은 그러한 번역을 양산해내는 번역의 컨텍스트 문제이다. 그래서 《번역비평》에서도 특히 공감하며 읽은 글들은 '번역출판과 현장'의 목소리들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번역이 중요하다 말하지 말라"라고 일갈한 출판평론가 표정훈의 말을 빌리면,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며, 서평의 제도와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며,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 및 이용의 현실이 번역에 적대적이고, 번역의 지형도가 번역에 적대적이고, 학문 제도와 구조가 번역에 적대적"인 현실이 문제다. 이것이 현재 한국에서 번역과 번역자가 처한 상황이다. 이만하면 총체적으로 적대적인 상황 아닌가? 



인색한 번역료, 척박한 서평문화

번역료가 번역에 적대적이란 사실은 인문서 번역의 경우 더욱 실제적이다. 표정훈은 매절번역료 원고지 1매당 4,000원 혹은 인세율 5%를 기준으로 번역료 수입을 계산했지만, 요즘 인문서 번역의 대세인 인세계약을 기준으로 하면 저작권이 있는 도서의 경우 보통 역자가 받을 수 있는 최대치는 6~8%이다. 정가 20,000원인 책 2,000부를 초판으로 찍는다고 할 때, 역자의 손에 떨어질 수 있는 최대 수입은 240~320만원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인문학 석․박사 학위를 가진 '고급인력'이 최소한 두세 달을 꼬박 투자하여 얻을 수 있는 수익으로서는 결코 내세울 만한 수준이 못된다. 게다가 고급 인문서의 독자층이 갈수록 엷어지고 있는 현실은 사정을 더욱 나쁘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생계를 박차고 '불만의 번역자'를 자처하고 나설 인문학도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물론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에서 동서양명저 번역사업을 지원하고는 있지만, 박상익 교수의 지적대로 이 사업에 배정되는 1년 예산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채 값에 불과하다. '언 발에 오줌 누기'란 표현이 과하지 않다.

번역서 서평문화도 척박하긴 마찬가지다. 표정훈의 비교에 따르면, 북리뷰의 프론트면의 서평 양에서 《뉴욕타임즈》가 국내 신문보다 3배 많다. 이런 서평란이 《뉴욕타임즈》에서는 30~40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반해서, 국내 주요 신문은 5~8면이다. 게다가 씨스템상으로 책을 꼼꼼히 읽고 평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양산되는 국내의 서평들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만족스러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한국출판인회의나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같은 유관기관에서 문제가 많은 오역서를 '이달의 책'으로 선정하는 코미디가 간혹 벌어지는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문과 달리 서평은 학술업적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중요한 학술·교양서적이 번역되어도 이에 대한 본격적인 서평이 관련 학술지에서조차 잘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설사 다루어진다고 해도 '한국적인' 인간관계가 고려되는 탓에 실질적인 '번역비평'이 이루어지는 일은 매우 드물다. 돈독한 인간관계 속에서 번역문화만 낙후돼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번역문화'라면 과연 어떻게 개선해가야 할 것인가?



한권의 번역서를 책임진다는 자세로

'가난한' 번역자들이 자주 겪는 것이지만 번역을 위한 자료 접근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대학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 이용의 편익을 최대한 확대하는 방안을 고려해봄직하다. 하지만 고전 번역서들의 번역이 아직 미흡하여 '지식의 지형도'를 제대로 그려볼 수 없다는 불만은 인과응보이기에, 현재로선 감수하는 수밖에 없겠다. 단, 지금 세대가 여전히 필요한 번역에 손을 놓는다면 그러한 불만을 다음 세대에까지 또 물려주는 도리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건 분명하지만 인문학자나 인문학도 들이 저마다 한권의 번역서는 책임진다는 각오로 발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발바닥에 땀을 좀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에 새로 발족한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우리의 고전과 각종 관찬사료 들의 번역을 체계적으로 추진한다고 하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고전문헌 가운데 우선적으로 6,400여 책을 번역자를 양성해가며 다 번역하려면 4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한다. 2003년에 창립된 한국키케로학회에서 30권으로 기획하고 있는 키케로전집 번역에는 50년이 소요될 예정이라고 한다. 각 학회나 전공분야에서 그 정도의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향후 반세기 정도 혼신의 열정을 쏟아붓는다면 일찍이 '번역대국'의 길에 들어선 일본과의 격차를 좀 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번역의 컨텍스트를 바꿔나가야

물론 열정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한 계획이 실현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합의다. "번역이 힘든 건데, 그럼 일본어·영어로 읽으면 쉽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라는 인식과 판단이 한국어 번역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 태도가 된다면, 인문고전 번역의 미래는 없다. 이미 자연과학에서 한국어가 학문어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것처럼 인문학에서도 한국어는 변방의 언어, 기지촌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과연 인문학도 자연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어의 국적을 갖지 않는 것일까?).

대학강단에서도 영어가 공용어로 '강요'되고 있는 징후적인 현실은 분명 번역에 그리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미래상이 아니라면, 번역을 구조적으로 배제하며 번역업적의 평가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학계의 제도와 관행을 이제부터라도 바꾸어야 한다. 대학원생들에게 과제로 제출받은 원고를 짜깁기하여 교수 이름으로 내던 관행부터 타파되어야 하는 것이다(이런 관행에 익숙한 이들이 번역을 학술업적으로 인정할 리는 없지 않은가?). 번역 텍스트를 교정하고 번역을 둘러싼 현실적 조건, 곧 번역의 컨텍스트를 탈바꿈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에도 독자들의 좌절과 환멸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너희가 한국어를 믿느냐?"는 시험에 계속 들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무엇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할까.

07. 12.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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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7-05 21:27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에 실었던 서평을 옮겨놓는다. 지난봄에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는 이희재의 <번역의 탄생>(교양인, 2009)에 대한 서평을 청탁받고 쓴 것이다.      황해문화(09년 여름호) 한국어다운 번역에 대한 고민 번역현실에 대한 고민  “우리가 읽는 책의 태반은 번역서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우리의 번역문화는 척박하기 그지없다. 예나 지금
 
 
소경 2007-12-04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원에 읽다 흥미가 달아 올랐는데, 막상 댓글 적으려 하니 사그라져 버리는 군요 ^^:;

로쟈 2007-12-04 21:40   좋아요 0 | URL
그냥 '상식'을 확인하면서 행동을 촉구하는 글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사량 2007-12-04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비평>이 알라딘 책 소개에는 계간지라고 나오는데, 로쟈님은 연간지라고 말씀하시네요. 어느 쪽이 정확한가요?

로쟈 2007-12-04 21:39   좋아요 0 | URL
책에 연간지라고 돼 있습니다. 학술지가 계간지로 나오긴 힘들 것 같고, 그래도 영향력이 있으려면 반년간지도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7-12-04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lapphappy 2007-12-05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이 번역하신 인문서를 알려주세요.

로쟈 2007-12-05 08:36   좋아요 0 | URL
저도 몇 권을 하고는 있습니다.^^;

누에 2007-12-28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괜찮은 번역어 사전은 없으려나요.

로쟈 2007-12-28 21:58   좋아요 0 | URL
'번역어사전'이란 건 어떤 걸 말씀하시나요? 번역학 용어사전 같은 건가요? 그런 건 안 나와 있는 거 같습니다(통역사전 같은 건 있고요)...

누에 2007-12-29 17:54   좋아요 0 | URL
철학이나 정신분석 등의 번역서에서 역자들이 택한 번역어들에 대해서 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해서 말이죠...

로쟈 2007-12-29 18:23   좋아요 0 | URL
그건 책마다, 철학자마다 다를 거 같은데요. 요즘은 그런 책들이 나오기도 하는데, 말미에 번역용어 해제와 대조표들이 덧붙여진다면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가명 2019-12-04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상황이 변화했나요 문외한이 여쭙습니다

로쟈 2019-12-0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황파악이 정확히 안되지만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쓴 시 한 편을 또 옮겨놓는다. 아마 20대 중반이나 끄트머리쯤에 쓰지 않았을까 싶은데, 사실 시라는 건 핑계이고 순전히 마지막 구절 때문에 쓴 것이다. 한때 '탱자 가라사대' 같은 개그 코너도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곁다리로 떠올려본다. 

  

탱자나무 옆에서

탱자나무는 말이죠, 운향과에 딸린 갈잎 넓은 잎의 작은큰키나무라는군요. 작은큰키라는 것이 탱자나무가 작은 것도 있고 큰 것도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탱자나무가 작지도 않고 크지도 않다는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요, 탱자나무의 줄기는 높이 2m쯤이고 녹색이며 모가 지고 5cm가량 푸른 가시가 나있다는군요. 그러고도 사전에는 몇 줄이 더 씌어 있는데요, 탱자나무는 5월에 잎보다 먼저 흰 다섯잎꽃이 잎사귀에서 하나씩 피고요, 가을에 직경 3-5cm의 둥근 장과가 노랗게 익는데, 향기가 난다는군요(아마 탱자향일 테지요). 그리고 또 탱자나무는 말이죠, 울타리 대용으로 흔히 심고요, 탱자나무의 열매는 약재로도 쓰고요, 또 탱자나무는 우리나라의 중부 이남에서 가꾼다고 하는군요(그리고 옆에 탱자나무가 그려져 있어요). 이것이 말하자면 탱자나무 일반에 관한 사전적인 지식인데요, 사실 이런 거야 아실 만한 분은 두루 아실 얘기가 아닐까요. 또 어지간한 국어사전이나 식물사전에서 ‘탱자-나무’를 찾으면 무척이나 자세하게도 설명되어 있을 텐데요, 그래, 왜 이런 자리에서 탱탱거리느냐고 불만이 많으시다면, 그저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다만 왜 하필, “탱자나무 옆에서 울었단다”는 말이, 그렇게도, 제 마음을, 울리는 것인지요?

07. 12. 04.

P.S. 옮겨놓고 보니 초겨울에 어인 탱자 타령인가 싶다. '탱자'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또다른 시제(詩題)는 '탱자탱자'이다. 그게 어원적으로 '탱자'와는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차라리 이 계절과는 맞는 듯도 싶다. 더불어 탱자나무 옆에서 우는 팔자와 탱자탱자하는 팔자가 사뭇 대조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말하건대, '맨손'과 '맨션'이 있는 것처럼 세상엔 '탱자'와 '탱자탱자'가 있다.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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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4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4 08:26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수유 2007-12-04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서 탱자탱자 해야 할텐데...언제나 오려나..요.

로쟈 2007-12-04 13:33   좋아요 0 | URL
금방일 텐데요.^^

2007-12-04 16: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4 16: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학기 대학신문에 연재되었던 '21세기의 사유' 정리 인터뷰에 며칠전 응했다. 이메일과 전화 질문들에 답하는 것이었는데, 시간상 충분하게 답변을 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아래 기사(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02)를 보니 내가 제일 많이 떠든 것으로 돼 있다(내가 제일 순진했었나 보다). 흥미로운 건 인터뷰 내용 일부는 내가 실제로 한 말이 아니라는 점. 나의 '배역'에 맞춰 더 추가된 대목도 있다. 그냥 '대본' 정도라고 보면 되겠다.  

대학신문(07. 12. 03)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21세기의 사유’

그동안 『대학신문』은 ‘21세기의 사유들’이라는 제목으로 현존하는 사상가들이 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살펴봤다. 연재기획의 마지막회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를 통해 연재에서 다루어진 주요 사상가들이 만나고 갈라지는 지점을 짚어보고 나아가 철학이 사회와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를 모색했다.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에 대해 평가해 달라

진태원: 독자들에게 현대사상의 진로를 개척하고 있는 사상가들을 소개하는 유익한 자리였다. 사상가 선별작업은 무난했지만 에티엔 발리바르나 지그문트 바우만 등에 대한 소개가 빠져 조금 아쉬웠다.

이현우: 연재된 10명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인물이다. 다만 유럽대륙 인물이 8명에 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선정된 인문(*인물)이 지나치게 서구에 편중돼 있다. 남성과 여성의 비율이 9:1이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현준: 내년에 서울에서 세계철학대회가 열린다.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기획은 최근 실용주의 및 물질주의적 합리성이 확산되면서 발생한 인문학 위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지금의 대학생은 공교육의 위기와 값비싼 사교육이라는 이중 부담 속에 대학에 진학한 만큼 자아성취욕구와 현실적 실용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하지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젊은 세대의 미래가 밝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때일수록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앞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모두 철학의 힘이며 인문학이 지니는 장기적인 가치다. 이번 기획을 통해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인문학적 관심이 깊어졌기를 소망한다.

◆10명 사상가들의 지적 지형도를 그려본다면

이현우: 슬라보예 지젝을 중심으로 몇 가지 부분을 짚어볼 수 있다. 지젝은 주디스 버틀러나 조르지오 아감벤,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교분을 갖고 있었고, 또한 서로 협력하는 만큼 충돌했기 때문이다.

조현준: 젠더에 관해 지젝과 버틀러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 『권력의 심리양태』에서 지젝의 지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비판한 반면 지젝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거꾸로 버틀러를 비판한다. 버틀러는 사람들이 두 개의 성별만을 ‘연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성별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젝은 구조적으로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별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버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지젝이 현실의 여성이나 동성애자가 겪는 억압을 해결하려는 성의 정치학에는 관심이 없고 현실의 억압상태를 설명하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현우: 버틀러는 젠더에 대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개념일 뿐 젠더의 ‘근원적’ 진리는 없다는 식이지만 지젝은 그 역사성 자체가 진리라고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비유하자면 버틀러의 퀴어(queer) 이론은 다신교, 지젝의 정신분석학은 유일신교다. 유일신교가 ‘신과 자신’과의 차이를 보여주듯 지젝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말하기 때문이다.

조현준: 지젝은 인간의 보편심리를 도출하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기반으로 하고 버틀러는 보편 문법이 역사적인 ‘권력 역학’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메커니즘을 밝히고자 하는 푸코의 계보학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차이가 생긴다. 결국 그들의 사상이 상충되는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서로 입지와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현우: 지젝과 네그리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지젝은 네그리의 저서 『제국』의 서평을 썼다. 지젝은 서평에서 네그리의 현실 진단의 충실성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지역공동체에 대한 강조 등의 처방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실천가능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윤수종: 학자에게 처방까지 요구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그리는 다양한 사회운동에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가 나아갈 긍정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비록 어려울지라도, 다양한 자율운동이 국가의 지배구도를 깰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현우: 한편 지젝은 바디우와는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바디우는 『성(聖) 바울』에서 유물론적 시각으로 새로운 ‘바울 읽기’를 시도했고 지젝은 『죽은 신을 위하여』에서 이를 지지한다. 지젝은 바울을 레닌에 비유하면서 기독교의 ‘사랑’은 지배이데올로기에 종속돼있는 개념이 아니라 혁명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홍기숙: 바디우에게 바울은 마르크스보다는 레닌,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에 가까운 이미지다. 그런 맥락에서는 바디우와 지젝이 확실히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바디우의 논의가 여러 각도에서 전개되는 반면 지젝은 바디우의 생각을 특히 정치학의 맥락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각 사상가의 시각에서 한국의 정치현실을 바라본다면

진태원: 랑시에르라면 한국사회를 ‘기득권자들의 노골적인 금권적-엘리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볼 것 같다. 그는 아직도 정당한 자기 몫을 배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계 각지에 존재하고 있다고 지적된다. 여기에는 우리나라의 미등록이주노동자, 혼혈인 등도 해당된다. 이들과 함께한다는 연대의식을 국민 모두가 갖출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지금의 한국사회에 가장 필요한 말이 아닐까.

이현우: 지젝도 비슷한 지적을 할 것 같다. 그는 『이라크』 등의 저서를 통해 국민이 자신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다른 계층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국민이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유지하려면 영토와 자본, 문화 등 많은 비용이 지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비용은 민주주의에서 특정 계층을  배제함으로써 마련된다. 따라서 지젝은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특정한 배제’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나종석: 회슬레는 국가단위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 보편주의자인 그는 전세계 60억 인구가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가치 아래 모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세계공화국’이 그 대안이 되지 않을까 추측한다. 좀 더 넓은 단위의 민주주의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조영일: 한국정치의 다른 문제에 눈을 돌려보자. 우리사회에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정책을 앞세우기보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기 일쑤다. 정치무대 배후에서는 소위 줄서기가 횡행하고 있고 박스 가득 정치자금이 오고간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선거로 인해 나타나는 사회적 낭비에 해당한다. 이를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본 가라타니 고진은 고대 그리스처럼 선거에 추첨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시대에 철학은 무엇이어야 할까

홍기숙: 철학은 그 시대를 담지 않으면 존립할 수 없다. 적어도 철학자라면 항상 이 시대의 정치, 문화를 비롯한 사회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지금’과 ‘여기’를 중요시하는 바디우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나의 생각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나종석: 그런 맥락에서 철학과 환경의 관계를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유효한 환경철학은 생태계 속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심층생태주의다. 인간의 가치도 단지 한 종(種)으로서의 가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 다르면 인간이 멸종하더라도 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게 된다. 회슬레는 이 부분에 이의를 제기하며 인간중심주의와 심층생태주의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에는 자연과의 공존을 추구하면서도 갈등상황에서만큼은 위계질서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조영일: 한편 세계적으로 지식생산구조가 변화하는 조짐이 감지된다. 대학을 벗어난 공간에서 철학적 논의가 이뤄지고 수준 높은 강의가 인터넷 상에 공개되는 현상들이 모두 이러한 움직임들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학문을 하는 새로운 방식이 출현할지도 모르겠다.

이현우: 대학은 특수한 정치공간, 소수 엘리트계층 배출공간으로서의 성격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그간 지녔던 독자적인 지식생산구조조차 허물어지는 판국이다. 대신 기업체 등의 의뢰를 받아 그들의 구미에 맞는 지식결과물을 생산하는, 이른바 ‘대학이 자본주의의 물결에 잠식당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더 이상 한국에서 유효한 철학적 담론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조영일: 이제는 철학이 소수의 전문적 지식인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문학평론가면서  철학적 사유들을 내놓는 가라타니 고진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 외국철학자의 용어를 어떻게 번역할까 하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일 수 있다. 이제는 모두가 자신의 학문의 틀을 벗어나 다른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어야 할 때다.

이현우: 학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는 사유를 하는 사람의 범주를 구획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 다니엘 데넷, 스티븐 핀커 등 대중적인 과학자는 물론, 시인과 작가 등 모든 사람이 사유주체가 될 수 있다.

※이 기사는 개별적으로 이뤄진 인터뷰를 좌담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인터뷰 및 정리: 문승기 기자, 이진환 기자)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
나종석(연세대ㆍ철학과 강사), 윤수종(전남대ㆍ철학과 교수), 이현우(서울대ㆍ노어노문학과 강사), 조영일(문학평론가), 조현준(한국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진태원(서울대ㆍ철학과 강사) (가나다 순)

07. 12.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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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책읽고 싶어지게 만드네요.^^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제가 주로 하는 일이죠.^^;

마늘빵 2007-12-03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그분은 이제 한국에 돌아오셔서 강의 나가시나보군요! 알라딘에 계시는 로쟈님 말고 다른 분. 인터뷰 재밌게 읽었습니다.

로쟈 2007-12-03 13:13   좋아요 0 | URL
네, 활발하게 활동하시더군요.^^

2007-12-03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3 23:22   좋아요 0 | URL
제 경우엔 철학책을 문학책처럼 읽는 편인데요. 문학적인 철학자들을 좋아하고요(사르트르나 데리다 같은).^^
 

오늘처럼 흐린날에(원고 때문에 하루종일 집에 있어서 바깥 날씨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어울리겠다 싶어서 유튜브에서 찾아 들은 노래는 러시아의 전설적인 그룹 키노(리더가 '빅토르 최'이다)의 '슬픔'(Pechal)이다. 여가수 젬피라가 키노에 대한 오마주로 부른 '슬픔'과 번갈아가면서 듣는다. 키노의 노래는 마지막 콘서트(1990) 실황이다.

-키노의 '슬픔' http://www.youtube.com/watch?v=Qi042YL9ZOI, 아니메 버전은 http://www.youtube.com/watch?v=-aO3EdHtrXM, 그리고 윤도현 밴드가 리바이벌해 부르기도 한 키노의 대표곡 '혈액형' http://www.youtube.com/watch?v=1HKXMBfDxR0. 빅토르 최가 주연을 맡기도 했던 영화 <바늘>에 삽입된 '혈액형'은 http://www.youtube.com/watch?v=dFUUTE58nDQ.

-젬피라의 '슬픔'은 http://www.youtube.com/watch?v=ukyvI_T9zpA, 내가 좋아하는 젬피라의 노래는 '안녕' http://www.youtube.com/watch?v=ba14p-hic3I.

07. 12. 02.

P.S. '슬픔'이란 주제로 얼른 생각나는 시들은 정현종의 시편들인데, 그 중 가장 코믹한 것은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란 시이다(사진은 모스크바의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알았다고 깔깔거릴 것도 없고
낄낄거릴 것도 없고
너무 배부를 것도 없고
안다고 알았다고
우주를 제목소리로 채울 것도 없고
누구 죽일 궁리를 할 것도 없고
엉엉 울 것도 없다
뭐든지간에 하여간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망막에 어른거리는 그림자거나
풀처럼 흔들리고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사람으로 붐비는 앎은
슬픔이니...

나는 '슬픔'이 사람으로 붐비는, 지랄 맞은 인문학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활자의 모습으로 있거나 그 어떤 모습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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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12-02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 너무 좋네요. 삼 년 전에 여의도역 공중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린 슬픔이 다시 환생한 것 같은 기분이에요.. 러시아어가 이렇게 매력적이군요. :)

로쟈 2007-12-02 23:46   좋아요 0 | URL
'러시아제' 슬픔입니다. 노래들이 요란하지 않아서 제 취향에도 맞습니다.^^

2007-12-03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3 23:23   좋아요 0 | URL
내가 사랑했던 도시여 안녕, 이런 식입니다. 맘에 드신다니 저도 좋군요.^^

소경 2007-12-0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사 찾으려 검색하다 보니, 진짜 '전설'로써(빅토르 최 중심이지만) 그룹에 대해 읽을 것이 많네요.

로쟈 2007-12-03 23:24   좋아요 0 | URL
'전설'이자 '신화'죠. 아직도 추모하는 팬들이 많은. 저도 그의 전기를 갖고 있습니다...
 

인문학 번역 문제에 관해 몇 마디 적을 일이 있어서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몇 년전 교수신문에 게재되었던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6707). 얼마전에 재발견한 이 기사는 '전담번역의 세계'를 다룬 것으로 예전에 발마스님이 알라딘 공간에 옮겨놓은 적이 있다(모스크바에 있던 때인지라 나는 참견할 수 없었다). 나는 나대로의 코멘트를 이미지들과 함께 몇 개 붙여두고자 한다. 버전-업인 셈이다.

교수신문(04. 11. 08) 전담번역의 세계

전담번역자는 한 저자의 책을 도맡다시피 해서 번역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알베르 까뮈 하면 김화영 교수, 베르나르 베르베르 하면 이세욱 씨 등이 떠오르듯, 전담번역이라는 키워드로 번역서의 세계를 엿볼 경우 우리는 번역문화에 깃든 어떤 새로운 풍경과 열정을 만나게 된다. 학술서의 경우 전공자가 전담번역자가 돼야 마땅하지만, 우리의 경우 비전공자가 순수하게 저자에 매혹돼 전담번역자로 깃발을 꽂을 경우도 많다. 학술서와 대중교양서로 나눠 전담번역자들의 면면과 특징, 해외사례 등을 살펴봤다.(편집자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프랑스인들이 접할 수 있었던 건 시인 보들레르 때문이었다. 파리에 가 온갖 정보를 수집해 번역할 정도로 그는 포에게 심취해 있었다. 앙드레 지드 역시 번역에 정력을 쏟았다. 세익스피어, 괴테, 타고르를 프랑스에 소개했던 게 그였다. 한국에선 ‘알베르 카뮈’ 하면 김화영 고려대 교수를 떠올릴 것이다. 카뮈 전집을 번역했는데, 정확한 미문으로 사랑받아왔다. 미셸 투르니에의 아름다운 지중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것도 그의 덕이다. 이처럼 한 저자의 저서들을 꾸준히 번역하는 이른바 ‘전담번역’이 국내에도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전담번역가가 된 사연들
서양철학전공자들 중 ‘전담번역가’의 길을 걷는 이들이 꽤 된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철학)는 하이데거 담당번역자로 꼽힌다. 1987년 ‘실존철학’을 첫 역서로 내놓은 후,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에 이르기까지 10여권을 우리말로 옮겼다. “기존 번역들이 일본어판을 옮겨 왜곡이 심하다”라는 게 번역착수의 이유였다. 하이데거는 독일 일상용어로 ‘개념놀이’를 잘하는데, 이것을 일본식 한자로 맞바꾸면 하이데거는 반토막이 돼버린다. 이 교수는 하이데거의 핵심용어인 ‘Dasein’을 ‘현존재’가 아닌 ‘거기-있음’으로 옮겼다. 또 ‘본질-존재’는 ‘무엇-임’ 혹은 ‘무엇으로-있음’으로 바꿨다. 학부 때부터 독일에서 공부했기에 그는 독일어 뉘앙스를 살리는 데 좀더 정확할 수 있었다. 

 

 

 



에드문트 후설의 책 역시 까다롭긴 마찬가지다. 후설 전담번역자는 이종훈 춘천교대 교수(철학). 이 교수는 순수 국내파이어서 그런지 더욱 원전에 충실한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해외유학파들이 국내에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을 겉핥기식이나 2차 문헌에 의지해 소개하는 걸 보고, 번역을 결심하게 됐다. ‘현상학의 이념,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에서 시작해 ‘시간의식’, ‘경험과 판단’, ‘데카르트적 성찰’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형식논리와 선험논리’ 등 두 권을 번역중이다. 하지만 그의 독주가 두드러지는 후설번역의 뒤를 누가 이어갈진 미지수다.

 

 

 



현대성의 명석한 해석자 장 보드리야르를 알린 건 배영달 경성대 교수(불문학)다. 1994년 ‘생산의 거울’을 내놓은 이래, ‘세계의 폭력’, ‘지옥의 힘’, ‘건축과 철학’, ‘테러리즘의 정신’ 등 보드리야르 후기 저서를 여러 권 소개했다. 보드리야르와 첫 인연을 맺은 건 출판사 의뢰를 통해서였다. 하지만 이후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배 교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라며 앞으로도 ‘Cool memories’ 시리즈 등을 번역할 것이라 한다(*보드리야르로선 불운한 일이다). 


 

 

 


한편, 한나 아렌트의 전담번역자는 둘이다. 홍원표 한국외대 교수(정치철학), 김선욱 숭실대 교수(윤리학)가 아렌트 연구자면서 번역자다. 홍원표 교수가 ‘정신의 삶 1’과 ‘혁명론’을, 김선욱 박사가 ‘칸트정치철학강의’를 각각 옮겼다. 두 사람은 현재 아렌트 전기와 저서를 번역중에 있다. 두 사람의 번역은 차이가 좀 있다. 예컨대 ‘공공영역’, ‘공론장’ 등 핵심단어가 달리 번역된다. “중요한 건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홍원표 교수는 말한다. 어쨌든 역설과 반어법들이 많고, 또 서양철학 전반을 다루는 난해한 아렌트 사상의 전담번역자로 훗날 누가 꼽힐지는 두고 볼 일이다(*김선욱 교수의 번역이 가독성 면에서 훨씬 뛰어나다).

 

 

 



최근 빛보는 동양사상과 과학서
동양사상 쪽 번역도 활발하다. 가라타니 고진, 마루야마 마사오 등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사상가들. 김석근 연세대 교수(정치사상)는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충성과 반역’, ‘일본의 사상’ 등 마루야마의 책만 다섯 권 소개했다. 첫 번역을 시작한 1995년 당시는 국내 동양사상 연구기반이 매우 약했다. 그렇지만 김 교수가 마사오 책을 보니 연구방법론이나 시각 등 배울 것들이 꽤 있어 시작했다. “일본어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고, 또 문헌들이 많이 나와 번역이 만만찮았다”라고 털어놓는데, 영역본을 참조하면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했다고 한다. 곧 마사오의 ‘문명론의 개략을 읽다’도 내놓을 예정이다.


 

 

 


물리학 쪽에선 리처드 파인만의 책을 박병철 대진대 교수(물리학)가 열심히 번역중이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1’, ‘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이야기’ 등이 그것으로 대우재단번역지원을 받은 게 계속 인연이 됐다. 그가 번역하면서 중점을 둔 건 두 가지다. 첫째, 파이만 책들은 강의를 옮겨놓은 것이라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구어체로 전달했다. 둘째, 파인만은 별다른 설명 없이 다른 논의들로 점프하곤 하는데, 이런 부분엔 박 교수가 ‘슬쩍슬쩍’ 보충설명을 끼워 넣었다.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공자도 아닌데 전담번역?
전공자가 아닌데도, ‘어쩔 수 없는’ 사연으로 전담번역자가 된 경우도 있다.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는 번역이 나왔다”라는 홍윤기 동국대 교수의 평을 받은 에른스트 블로흐 전집의 번역자 박설호 한신대 교수(독문학)가 그런 케이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과 메시아적 희망을 연결시킨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5권을 10여년에 걸쳐 번역해 내놓은 건 ‘대단한’ 일이었다.

번역을 시작했던 건 ‘유토피아 문제’로 학위논문을 쓰던 중 유토피아사상의 ‘권위자’인 블로흐에 매력을 느껴서다. 1990년대 초에 착수해 올해에야 빛을 보게 됐는데 “하나하나 공부하면서 번역했다. 하루 9시간 투자해 고작 1페이지밖에 못 옮긴다”라고 비전공자로서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하지만 국내에 블로흐 전공자가 없고, 번역에 선뜻 나서지 않는다. 아직도 블로흐의 주저인 ‘주체와 객체’는 번역이 안됐는데, 박 교수는 “전공자가 좀 해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이런 사례는 우리 번역문화의 우울한 현주소다. 예컨대 자끄 라깡의 책도 영문학자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던 게 우리 현실이다. 배영달 교수는 “어문학자들이 철학서를 번역하는 게 특히 안타깝다”라고 지적한다.(이은혜 기자)

대중교양서 전담번역의 풍경 

학술서에 비해서 대중서들은 번역자가 누구인지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렇지만 문학이나 인문학적 에세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해외 저자의 문체와 삶을 잘 이해하는 전담번역가가 그 사람을 화젯거리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훌륭한 작가의 매력에 빠져서 그 사람을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어하는 전담번역가들이 국내에도 꽤 여럿 있다.

 

 

 

 

소설 ‘개미’를 비롯해 ‘나무’, ‘뇌’ 등으로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던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은 모두 이세욱 씨가 번역했다. 우연히 베르베르의 책을 접하게 됐던 그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문학이며 문학시장과 문학에 대한 사유를 넓히는 데 많이 기여할 것”이란 생각에 출판사를 의뢰해서 번역을 시작했다. 첫 번역 때부터 그는 베르베르를 만나러 갈 정도로 열성적이었고, 책에 나오는 거리, 무대, 인물 등 작가가 느끼는 것은 모두 느끼기 위해 여행도 많이 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마치 내가 쓴다는 기분으로” 그는 베르베르가 되어 번역하는 데 몰두해 한 권도 빠지지 않고 모조리 소개했다. 지금은 올 10월 출간된 ‘우리는 신’이란 3부작 번역에 착수했으며, 앞으로 3년간 이 작업을 할 예정이다. ‘하와이의 자식들’ 등 베르베르의 만화도 소설로 개작되고 있는데, 물론 이것도 이세욱 씨 몫이다.


시오노 나나미 만큼 관심을 모은 여류문필가도 없다. ‘로마인 이야기’를 위시해 수십권이 번역돼 나왔는데, 시오노 나나미의 전담번역가는 세 명이다. 한길사에서 먼저 시오노 나나미를 발굴했고, 이를 故 정도영 씨, 김석희 씨, 오정환 씨 세 번역가에게 맡긴 것. 정 씨는 ‘바다도시 이야기’를, 김 씨는 ‘로마인 이야기’를, 오 씨는 ‘나의 친구마키아벨리’ 등을 각각 맡게 됐다. 세 번역가 모두 시오노 나나미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김 씨와 오 씨는 모두 “너무나 탁월한 작가다”라고 입을 모으면서,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해서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번역할 것이라 말한다. 김씨는 여태껏 ‘로마인 이야기’ 12권을 번역했는데, 향후 3년간은 나머지 3권 번역에 몰두할 것이라고 한다.

 

 

 

 

독일문학의 거장 슈테판 츠바이크도 많은 번역가들을 거느리지만 특히 안인희 씨를 첫손에 꼽을 만하다. 안 씨는 1995년 독일유학에서 우연히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집어 들었는데 지식인들의 광기어린 내면을 너무나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 탁월한 복음술사에게 반해버렸다. “이미 여러권의 책을 번역해봤지만, 이 책을 옮기면서 처음으로 번역의 독특한 즐거움을 느꼈다”라는 게 그의 말이다. “베토벤의 전기를 쓴 로맹 롤랑의 전기를 쓴 츠바이크”는 매력덩어리였다. 그에게 숨가쁘게 말려들어간 안 씨는 그 외에도 ‘스코틀랜드의 여왕’,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등을 번역했다.



이것 말고도 모리스 르블랑 등 프랑스 추리 소설 분야에서 성귀수 씨가 전담번역가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요시모토 바나나는 일본문학의 전문번역가로 명성을 굳힌 김난주 씨가 10여권을 독점하다시피 번역하고 있다. 무라카미 류는 양억관 씨가 주로 번역했는데, 김난주와 양억관은 일본문학을 맛깔스럽게 옮기는 양대 번역자로 명성을 누린다. 스페인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대가 마르케스를 비롯해 주요 작가들을 번역해온 송병선 울산대 교수는 작가들을 현지에서 작가들을 만나서 교유하고 수시로 메일을 주고받는 ‘마술적 리얼리즘’의 전담번역가로 충분한 조명이 필요한 번역자다. 최근 돌풍을 일으킨 파울로 코엘료의 책은 불어 전문 번역가인 이상해 씨가 주목을 끈다(*이상해씨는 중국계 작가 산 샤의 소설들도 전담하고 있다).(이은혜 기자)

 

 

 

 

해외사례

국내와 달리, 해외학계에선 한 학자에 대한 ‘전담번역자’가 넘쳐날 정도로 많다. 하이데거의 주저 ‘존재와 시간’이 일본에는 무려 14종이 나와 있다. 미국에서는 2종에 그치고 있는데 이는 독일철학에 대한 양국의 ‘대접차이’ 때문이다. 미국에서 주로 활동해 명성을 얻은 프랑스 철학자인 데리다의 저서가 영미권에서 무려 70~80권이나 넘게 번역돼 있다는 점을 보면 그렇다. 데리다에 달려들어서 꾸준히 번역업적을 내놓는 학자들도 10여명이 넘어간다. 번역은 반역이고, 역자들 사이에서는 해석학적인 경쟁이다. 이런 문화 위에서 학문적 개념에 대한 토론이 일어날 수 있고 방향성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우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지 않다. 프랑스철학이든, 독일실존주의 철학이든 국내에 그 분야 권위자들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공자들 대부분이 근대 이전에 꽁꽁 묶여 있어서,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번역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독특한 문화’도 한 몫 한다. 구연상 한국외대 강사(현상학)는 “선배교수가 번역한 것에 대해 후배교수들은 재번역하는 것을 꺼린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좀 오역이 있다 해도 그걸 굳이 지적하지 않는다는 게 한국의 관행이라는 것이다(*때문에 번역비평이 내부적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기 어려운 게 '한국적 현실'이다). 

저작권 문제도 있다. 국내의 몇몇 특정 출판사들이 외국 유명출판사에서 나온 유명저자의 책을 수십권씩 독점계약을 해버리기 때문에 번역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동문선’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는데, 동문선 출판사의 출판예정도서목록을 한번 살펴본 사람이라면 로열티 선점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중소출판사 사장들은 민음사, 한길사 등 대형출판사들이 로열티 선점을 해놓고 몇 년이 지나도록 책을 안낸다면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인다. 학자들은 기껏 혼자서 번역했다가 인쇄불가의 판정을 받으니, 안 그래도 번역에 돈 한푼 못받는 마당에 의욕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번역의 질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독점계약 자체가 심각한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번역지원 시스템이 동종번역 문화를 가로막는다는 지적들이 많다. 진태원 서울대 강사(철학)는 “일본과 미국은 연구소나 국가기관을 통한 번역지원활동이 활발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학술진흥재단과 대우학술재단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이 전부”라며, 지원제도의 대폭 확충이 절실함을 지적한다.(이은혜기자)

07. 12.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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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1 17: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1 2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01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01 22:41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jouissance 2007-12-02 00:29   좋아요 0 | URL
'동문선'을 특별히 언급했군요. 동문선을 어떻게 봐야할지 정말 고해입니다. 아마 동문선에서 출간된 번역서가 좋은 평가를 받는다면, 그 공은 모두 (편집자가 아니라)번역자에게 돌아가야 하겠지요. 그 출판사는 '교열'을 번역자가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그래요 로쟈님! '보드리야르'로선 확실히 불운한 일임에 틀림없어요...ㅠㅠ

로쟈 2007-12-02 10:29   좋아요 0 | URL
동문선도 책이 뜸한 걸 보면 동력이 떨어져가나 봅니다. 동문선의 김웅권씨도 롤랑 바르트의 전담 번역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