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주간 북매거진 SKOOB 11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받아보지 못해서 어떻게 편집/교정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원고와 큰 차이는 없을 거 같고, 다만 목차를 보니 타이틀은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로 붙여졌다(보통 원고의 제목은 편집자들이 붙인다). 지난달에 출간된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두 권에 대한 간략한 리뷰가 나의 몫이었는데, 후자는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었기에 덥석 청탁에 응했다. 더불어 아주 짧은 분량이기도 했고. "주요 온라인 서점의 상위 5% VIP 고객 중 선착순 5만 명에게 격주로 배포되는 프레스티지 도서문화잡지"이기에 접하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이므로 공개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책이 와서 찾아보니 제목은 '세상은 아무 죄가 없나니'이고, '왜냐고 물으신다면...'이 부제이다).   

스쿱(11호)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

리처드 로빈슨의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는 부피는 서로 달라도 유사한 제목으로 흥미를 끄는 책 두 권이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두 저자는 각각 ‘머피의 법칙’과 ‘사이비 과학’에 과학적 설명이라는 합리성의 잣대를 갖다 댄다. 그리고 ‘세상’은 실상 아무 죄가 없으며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인간은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우연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의미와 패턴을 찾으러 다니는 동물이다. 그러한 속성이 진화과정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제로서 유전되었다. ‘얄미운 짓’을 하는 사물들에 대한 짜증과 이상한 것들에 대한 믿음은 그런 기제에 의해 양산된다. 하지만 이 기제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수유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명분보다는 진화론적 타산을 따른다. 물론 젖꼭지는 수유를 하는 여자들에게만 필요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유전적 구조가 다르게 재구성하기보다는 남자가 불필요한 젖꼭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덜 든다.

자몽 즙이 튀면 왜 꼭 눈 속으로 들어가는가? 실제로 즙이 눈 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한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갖는다면 우리의 뇌는 언제나 그 기억을 환기시킨다. 불운이 언제나 세 가지씩 짝을 지어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운은 조금씩 꾸준히 찾아오지만 기억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기억들과 연계되면서 ‘세 가지’ 불운을 부지런히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대씩 몰려다니는 버스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례다. 이 경우는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버스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두 번째 버스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식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세대씩 몰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세 대의 버스’와 ‘세 가지 불운’에 대한 사고는 각각 인과적 사고와 마술적 사고로 대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적 사고가 남자의 젖꼭지처럼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패턴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와 미신을 가진다.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말한다. 우리 뇌의 ‘믿음 엔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세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의 96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90퍼센트가 천국의 존재를, 그리고 79퍼센트가 기적을, 72퍼센트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목록을 좀 달리하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비록 중세 유럽에서보다는 훨씬 덜 미신적이지만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미신적인 것. 그런 미신의 폐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줄여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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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2007-12-0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10호네요. 이번에 책을 사면 11호가 배달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칼 세이건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과학 저술가들은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믿음이 강력하다는 반증일까요?

로쟈 2007-12-09 07:30   좋아요 0 | URL
저도 10호를 갖고 있는데요.^^; 미국이 종교성이 강한 국가이긴 하지만 회의주의가 발달이 그와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고 왼갖 것들을 많이 믿지만(성장신화를 비롯하여) 과학적 회의주의는 미진하지 않나 싶어서요...
 

한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폭력에 대한 사상들'을 청탁받고 예전에 몇 번 다룬 테마라고 덥석 응했지만 막상 쓰려고 하니까 너무나 광범위한 주제여서(차라리 '죽음'은 얼마나 단순한 주제인가!) 고전을 면치 못했다(실상 내게 주어진 시간이 이틀밖에 없기도 했지만). 이 주제에 관한 '로드맵'으로 아주 유용하다고 적은 바 있는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에 대해 예전에 쓴 짧은 리뷰에서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이 참에 다뤄보려고 했으나 그 역시 절반 정도만 실현됐다. 그밖에 로제 다둔의 <폭력>(동문선, 2006)과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 등이 내가 길잡이로 삼은 책들이다(이글턴의 책은 다시 읽어볼 시간이 없었다). 마감이 지나서 송고한 글이라 퇴고할 시간조차 없었는데 결과적으론 그게 이 글의 운명이 되었다. 향후에 더 전진해야 할 '베이스캠프' 정도라고 해둔다(*이 글은 '폭력,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사랑의 변주곡’)고 시인 김수영은 적었다. 어디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랑뿐이겠는가. 사랑을 발견하기 위해 욕망의 입을 뒤지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 폭력이라면, 사랑의 밑자리에는 언제나 폭력이 가로놓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이건 보편적 폭력이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은 시 ‘예언자’에서 예언자로 재탄생하는 장면을 마치 세라핌(천사)이 ‘외과적 수술’을 시행하는 것처럼 묘사한 바 있다(실상 ‘세라핌’이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높은 존재’ 혹은 ‘수호천사’를 의미하는 ‘셀’과 ‘치유하는 자’, 혹은 ‘외과의’를 의미하는 ‘라파’의 합성어이다).

시에서 세라핌은 ‘나’의 죄 많은 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지혜로운 뱀의 혀를 다시 심는다. 그리고 또 가슴을 칼로 가르고 심장을 뽑아낸 다음에 불타오르는 숯 덩어리를 집어넣는다. 그리하여 ‘내’가 황야에서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일어나라, 예언자여, 보라, 들으라,/ 나의 의지로 가득 차서,/ 바다와 육지를 돌아다니며/ 말로써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우라.” 세라핌에 의해 ‘나’는 강제적으로 시체가 되고 그런 이후에야 ‘예언자’로서 부름을 받으며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의 ‘성스러운’ 폭력은 모든 (재)탄생이 수반하거나 요구하는 폭력이기에 보편적이다. 자살폭탄 ‘테러리스트’의 탄생 또한 동일한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닌가. 다만 그는 ‘말’이 아닌 ‘폭탄’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불태울 것이다.  

 

 

 

 


태초에 폭력이 있었다.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창조되기 때문이다. 로제 다둔이 <폭력>(동문선)에서 지적한 대로 ‘창세기’에서 “신은 명령하고 명명하고 구분하고 분리하고 분류하는데, 이 모든 행위가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폭력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들이다.” 폭력이 사라지는 유일한 순간은 다만 일곱째 날인 ‘안식일’뿐이다(비폭력의 윤리는 이러한 신의 모습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낙원에서 추방된 아담과 이브가 낳은 형제 중에 인류의 조상이 된 자는 동생 아벨을 죽인 살인자 카인이다(인류는 모두 ‘카인의 후예’이다!). 카인은 자신의 행위로 인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봐 두려워하지만 신(여호와)은 그를 보호한다. 카인에게 표를 주며 그를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복수를 당하리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서에 따를 때, 인류의 역사는 살인자(카인)와 보호자(신)가 공모한 역사이고, 곧 ‘폭력의 역사’이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 <폭력의 역사>(2005)는 이러한 인류사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미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톰 스톨은 평범한 중년 가장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식당에 그냥 살인을 일삼고 다니는 두 남자가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그는 여종업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두 악당을 순식간에 해치운다. 이 사건으로 매스컴의 ‘영웅’이 된 톰에게 마피아 일당이 찾아와 그가 20년 전 조직의 일원이자 유명한 킬러 조이였음을 상기시키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한다. 톰은 자신이 조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만 결국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일당과 맞선다.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가서 그를 제거하려는 형 리치 일당을 또한 모두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폭력은 두 가지다. 먼저 톰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서 철저하게 숨겨야만 했던 조이의 폭력,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가정과 아버지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저지르게 되는 폭력. 그 폭력은 톰의 것인가 조이의 것인가. 과거의 조이는 현재의 톰이 부인하지만 제거할 수 없는 그의 또 다른 자아이자 그림자이다. 역설적인 것은 조이의 킬러 본능이 위험의 순간에는 자신과 가족을 구하는 영웅적인 능력이 된다는 점. 때문에 이 가장의 폭력은 가정을 위협하면서도 동시에 보호하는 양면적인 것이다. 

 

 

 

 

문학비평가이자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가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이름붙인 것이 말하자면 이러한 초석적 폭력, 정초적 폭력이다(톰/조이의 경우에는 ‘가정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져 온 것’이라고 말해야겠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폭력이 제어․제한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폭력을 속이는 수밖에 없다(톰은 학교에서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휘두른 아들을 크게 야단치고 훈계한다). 그렇게 ‘폭력을 속이는 폭력’이 제의적 희생에서의 폭력이며, 이때 요구되는 믿음이 ‘좋은 폭력’(정당한 폭력)과 ‘나쁜 폭력’(부당한 폭력), ‘순수한 폭력’과 ‘불순한 폭력’을 구분하는 이분법적 믿음이다.

 

 

 



가령, 한나 아렌트는 <폭력의 세기>(이후)에서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동할 때, 곧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이미 그 자체로서 정당성을 갖는다. 때문에 ‘정당화’가 따로 필요한 폭력과는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제시하고 있는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그가 ‘정초적 폭력’이라고 부른 것은 자기 이전에 어떠한 토대도 갖지 않으며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물론 벤야민의 ‘폭력비판’에서 ‘폭력’이란 말의 원어는 ‘게발트(Gewalt)’이고 이것은 ‘지배/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강제’란 뜻을 갖기 때문에 권력과 모순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의회/대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 폭력의 두 계기를 분리하고 신적 폭력으로서의 정초적 폭력을 옹호한다.  

데리다가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서 벤야민의 폭력비판론을 검토하며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면서 ‘법의 구조’이다. 그에 따르면 모든 법의 정초 혹은 정립은 정초적 폭력에 근거한다. 요컨대, 법의 힘은 폭력에 대립적이지만, 법의 기원에 놓여 있는 것은 폭력이다. 기원적 폭력: “권위의 기원이나 법의 기초, 토대 또는 정립은 정의상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들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토대를 지니고 있지 않은 폭력들이다.” 때문에 법은 그 정초의 순간에 불법적이지도 비합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표상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이러한 정초적 폭력이 보존적 폭력에 의해 언제나 표상/대리되고 필연적으로 반복되어야 하다는 사실에 있다. 때문에 데리다가 보기에 법의 구조는 언제나 해체가능하며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은 서로 의존적이다.  

 

아렌트나 벤야민의 경우에서 알 수 있지만 폭력에 대한 사유나 성찰은 폭력을 무엇과 대비시키느냐, 혹은 그것을 어떻게 구분하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 규정된다. 아렌트에 의해 폭력을 정당화하는 좌파 사회주의자로 비판을 받기도 했던 조르주 소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단, 아렌트와 달리 그가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에서 제시하고 있는 이분법은 무력(force)과 폭력(violence)이다. 전자가 지배체제가 동원하는 제도적 강압이나 물리적 강제 등의 억압적 폭력을 가리킨다면, 후자는 그에 대한 탈법적 항거나 저항 같은 해방적 폭력을 뜻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무력이 소수 지배자의 통치 질서를 강제하는 힘이라면, 폭력은 기존 질서의 파괴를 지향하는 힘이다.” 소렐은 그런 의미에서의 폭력, 보다 구체적으론 프롤레타리아의 혁명무기로서의 총파업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비스(vis)’에 충실한 것이기도 하다. 

 

 
로제 다둔에 따르면, ‘비스’는 ‘힘의 발휘’ ‘폭력행위’ 그리고 ‘군대의 힘’을 가리키며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즉 폭력은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이기도 한 것이다. 호모 비오랑스, 곧 ‘폭력적 인간’이란 규정이 이로부터 생성된다. 그리고 이 ‘폭력적 인간’은 니체적인 명명에 따르자면 ‘디오니소스적 인간’이 될 것이다. 이때의 디오니소스는 테리 이글턴이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에서 다시 읽고 있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바쿠스>에서 등장하는 디오니소스이다. 즉 “포도주와 가무, 환희와 연극, 풍요와 과잉, 영감의 신”이면서 동시에 “탐욕적이고 폭력적이며 차이를 적대하는 획일성의 지지자”로서의 디오니소스. 디오니스소의 이러한 양면성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폭력성은 인간의 부정적이거나 부수적인 자질이 아니라 그 본성이다.

 

 

 

<바쿠스>에 등장하는 테바이의 지도자 펜테우스는 디오니소스 숭배에 적개심을 품고서 그의 성소를 부숴버리고 아예 신을 감옥에 가두어버린다. 물론 화가 난 디오니소스는 지진을 일으켜 감옥을 나온 뒤에 무자비한 복수를 감행한다. 디오니소스성이 우리가 제거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그에 대한 억압이 아니라 존중이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펜테우스의 타자가 아니라 펜테우스 안에 잠복한,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는 걸 인정하는 태도이다. <폭력의 역사>에서 비록 타의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치 톰이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조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폭력’과 ‘비폭력’이란 개념쌍의 상투적인 이해도 이러한 맥락에서 교정될 필요가 있다. 사카이 다카시가 <폭력의 철학>(산눈)에서 정리해주는 바에 따르면, ‘비폭력’은 단지 ‘평화’를 희원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에 힘을!’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 직접 행동의 목적은 대화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사회에 어떻게든 우리가 제시한 쟁점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위기감과 긴장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폭력적 긴장에는 진실로 반대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건설적인 비폭력적 긴장은 사태의 진전에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1960년대 정치운동으로서의 비폭력 직접행동은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사회의 적대성을 폭로하거나 구축하는 수단이었다. 때문에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무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이 점에 있어서는 킹과 다른 노선을 걸었던 맬컴 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은폐되고 억압된 적대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게서도 일차적인 목표였기 때문이다. 맬컴이 주장한 것은 흑인들이 자기 혹은 타자에게 갖고 있는 증오를 분노로 전화시키는 것이었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 근본 원인이 아닌 결과를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에 투사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얻고자 하는 데 반해서 분노는 보다 광범위한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함축한다.     

 

맬컴 엑스의 동시대인이었던 알제리의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 역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그린비)을 통해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대항적 폭력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 따르면 식민주의는 그 자체 속에 이미 폭력이 편재해 있으며, 이러한 폭력은 굴절적인 형태(정신병)로 피식민 주체들에게 들러붙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은 이러한 내향성을 중단시키고 식민주의 자체로 방향을 돌리게끔 하는 긍정적인 계기가 된다: “폭력은 취기를 깨우는 해독작용이다. 원주민의 열등 콤플렉스나 방관 내지 절망적인 태도를 없애준다. 폭력은 그들을 대담하게 만들며 자기 자신에 대한 존엄성을 회복시킨다.”

사카이 다카시는 이렇듯 폭력의 다양한 양상과 양태, 그리고 의의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폭력/비폭력이란 이분법은 부적절하다고 판단하며 거기에 ‘반폭력(anti-violence)’이란 범주를 추가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반폭력은 테러에도 반대하고 전쟁에도 반대한다는 ‘막연히 올바른 도덕’에 대한 반대를 뜻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도덕이 아니라 정치이고 정치적인 것의 복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자크 랑시에르는 광의의 행정을 포함시킨 폴리스(police)의 논리와 정치를 일컫는 폴리틱스(politics)의 논리를 구분한다. 폴리스란 이미 존재하는 지위나 역할에 사람들을 배분하고 고정시키는 것이고, 폴리틱스란 배제된 사람들(이민자, 비국민, 이등시민, 정신이상자 등)을 보편적인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자들로 간주하는 것이다. 폴리스의 논리가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폴리틱스의 논리는 평등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질서를 뒤흔든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폴리스의 논리와 평등주의의 논리가 만나는 지점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된다.” 랑시에르가 들고 있는 사례로는 “너의 직업은?”이라는 폴리스적 논리의 질문에 “프롤레타리아”라고 폴리틱스적 논리로 대답하는 대목이 정치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치적 주체로서의 해방적 주체, 혁명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슬라보예 지젝이 <혁명이 다가온다>(길)에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클럽>(1999)을 예로 들면서 말해주는바 자기 구타(폭력)를 통해서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일을 하지 않아도 월급을 내놓아야 한다면 상사를 협박하기 위해 스스로를 피가 나도록 때린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이러한 급진적인 자기 비하를 통해서만 ‘순수한 주체’는 나타나게 된다. 자신을 직접 구타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더 이상 주인이 불필요하다는 자기주장이며 “이러한 구타의 진정한 목표는 주인에게 집착하는 내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내는 일이다.” 들뢰즈는 <매저키즘>(인간사랑)에서 가학주의가 지배의 관계를 포괄하는 반면에 피학주의는 해방을 위해 필요한 첫 과정이라고 적었다.  

 

 

요컨대 “폭력은 일차적으로 자기 폭력으로 또 주체적인 존재의 본질에 대한 폭력적인 재형성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파이트클럽>의 교훈이다.” 여기서 ‘순수한 폭력’은 곧 ‘순수한 사랑’과도 만난다. 사랑은 모든 맥락에서 사랑의 대상을 떼어내어 대문자 사물(Thing), 곧 ‘숭고한 대상’(이건 '괴물'이기도 하다)으로 고양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시 김수영의 시구를 빌자면,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이렇듯 미쳐 날뛰는 것이 사랑의 광기이고 폭력의 광기일 테다. 모든 현상을 ‘좋은’ 면과 ‘나쁜’ 면으로 구별하고 좋은 것만 취하고 나쁜 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웰빙적 태도!)는 마르크스가 지적한바 전형적인 쁘띠부르주아적 태도이다. 이것은 사랑과 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07. 12. 08.

 

 

 

 

 

 

 

 

 

P.S. 이 글을 쓰면서 고전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조금 다른 방향의 글을 원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안은 <폭력의 역사>, <배틀 로얄>, <파이트 클럽> 세 영화에 대한 읽기를 폭력에 대한 사유와 같이 엮는 것이었는데 그건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두번째 안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을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폭력과 테러(테러리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었는데 그건 전적으로 무산되었다(자료들을 모았지만 막판에 읽을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논쟁에 관한 생각은 다른 기회에 정리하는 수밖에 없겠다(언젠가 두 사람의 서신교환 일부가 국내 잡지에 번역돼 소개된 바 있다). 참고로 이 주제에 관해서는 정명환 편,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민음사, 2004), 김홍우,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 정화열,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아카넷, 2005) 등의 국내서도 참조할 수 있다.

 

 

거기에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은 스탈린시대 공개재판을 다룬 아서 쾨슬러(케슬러)의 소설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지만 현재는 절판되었다(다시 나왔으면 싶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에 논쟁에 대해서는 영어권의 경우 존 스튜어트의 자세한 연구서가 출간돼 있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의 논쟁>(노스웨스턴대출판부, 1998). 두 사람이 한국전쟁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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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12-09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딱 두 세배정도만 더 길었으면 하는 내용의 글이네요. 로쟈님의 예전 모스크바통신처럼 그런 분량의 글들처럼 말이지요. 그래야 마저 쓰고 싶으셨다는 부분을 충분히 쓰실 여유가 있으셨을텐데..적은 지면제약때문에 많은 내용을 말씀하시려다보니 너무 압축적으로 서술하신 느낌이 듭니다.기회가 되신다면 이 내용을 "베이스캠프'로 한 후속편을 부탁드립니다.

로쟈 2007-12-09 07:27   좋아요 0 | URL
35매면 거의 신문에 실릴 수 있는 최대 분량입니다.^^; 그 두 배면 보통 계간지 분량이고요. 100매면 소논문 분량이 됩니다. 폭력에 관해서 더 좁게 주제를 잡으면 더 길게 쓸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이런 종류의 개관은 사실 너무도 다양한 폭력의 종류만큼이나 네버엔딩이지요.--;

yoonta 2007-12-09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로쟈님에게 기대하는게 이젠 아마도 아티클수준이 아니라 논문이나 책인가 봅니다..^^;;

로쟈 2007-12-09 15:45   좋아요 0 | URL
읽을 책들이 차고 넘치는 데 저까지 보태서야.^^;

소음공명 2008-02-04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가지 사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류는 카인의 후예'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려 글을 적습니다. 로쟈님이 상징적인 의미에서 쓰신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되는데, 성서의 계보에 따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창세기4:25)이고, 셋은 에녹을 낳고, 노아가족이 에녹의 후손입니다. 홍수로 이 가족 이외에 다 멸망했으니 굳이 성서의 표현대로 하자면 인류는 셋의 후손입니다.

로쟈 2008-02-04 22:27   좋아요 0 | URL
지적 감사합니다. 제 기억에 '카인의 후손'이란 표현은 로제 다둔의 것 같습니다. 성경의 구절을 축어적으로 읽으면 셋의 후손들이 되지만 여러 이설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카인이 에덴 동편에 살며 자손을 퍼뜨렸다고 하니까 허용될 수 있는 표현이 아닌가 싶네요. 인간이 가진 폭력성의 기원을 성서적으로는 달리 거슬러올라갈 수도 없는 게 아닌가 싶고요...

소음공명 2008-02-05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로쟈님 말씀처럼 '카인의 후예'는 일반적으로 충분히 받아드릴만한 표현이구요,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폭력성의 기원은 카인보다 더 이전 타락 기사에서 아담과 이브가 "벌거벗은 생명"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에덴에서)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있었다고 봅니다.

2008-12-11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경향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기사에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인 한정숙 교수이다.

경향신문(07. 12. 08)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1)멀고도 가까운 러시아

글쓴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지난 11월 하순에 주한 러시아 부대사인 티모닌 박사의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이자,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러시아 대표단 부단장으로도 활약하는 외교관이다. 강연에서 그는 주로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다루었고, 역사인식에서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그는 일반적 한국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은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6자 회담의 성공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티모닌 박사는 러시아는 남북한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확립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며, 따라서 6자회담도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그 사례로 마카오의 BDA은행에 동결되어 있던 북한 자금을 러시아가 자국 중앙은행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할 수 있게 한 것을 거론했다.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은 박사의 열띤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강연이 끝난 후까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반적 한국인들은 과연 그 질문자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는 한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적대 세력이라고만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단지 질문을 좀 미숙하게 한 것일 뿐일까.

해방 후 소련이 북한 정권을 지원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소련에 대한 남쪽 사람들의 두려움은 컸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러시아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후에도 그 여파는 남아 있다.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책과 러·일전쟁의 기억까지 덧붙여져 러시아에 더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보인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혼란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러시아를 중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부 인사들은 아예 한반도 평화 논의에서도 러시아를 배제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동아시아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라인 데다,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대국 중에서 우리와 과거사 문제, 고대사분쟁, 영토분쟁, 군대주둔 등의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지 않은 나라다. 동아시아 자체에서 다른 요인들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펼쳐지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이를 조장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냉전시대적 편견과 불안감을 벗고 이 나라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좋은 동반자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만남-
동아시아와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만났다. 동아시아도 러시아도 비슷한 시기에 몽골제국의 지배와 간섭을 겪었으며, 사람과 물자의 교류 속에서 살았다. 원제국의 수도에는 러시아인 수공업자, 병사들이 끌려왔기 때문에 이미 13~14세기에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은 얼굴을 맞대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들 가운데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접촉의 첫 단계에서 동아시아가 러시아로 갔던 데 비해, 다음 단계에서는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왔다. 1480년에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러시아는 차츰 몽골제국의 옛 영토를 차지했고, 몽골제국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몽골제국의 수중에 들어온 적이 없는 광대한 시베리아 지역까지 모두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러시아와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이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그리하여 이른바 나선정벌을 통해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러시아 군대와 맞붙기도 했다.

러시아에 동아시아는 주된 관심지역은 아니었다. 유럽 지역에 사는 러시아 지배층에 동아시아는 너무 멀었고 시베리아는 경제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쟁탈전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면서 러시아는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동아시아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을 겪게 되었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면 이 지역에서도 입지를 굳혀야 했다. 19세기 중반, 서아시아 및 서남 아시아에서 서유럽 열강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특히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아시아를 거의 장악한 이후에는 세력의 공백지대처럼 되어 있던 만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시베리아를 통해 중국에 러시아의 물품을 판매하고 태평양 함대를 지원하며, 태평양을 통해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를 통해 동아시아와 북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부설하였다. 이 철도의 부설은 1891년에 시작되어 1916년에 완공되었는데, 페테르부르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게 된 철도의 노선 일부는 부설 당시 러시아 영토에서 만주로 들어와 중국 동북부지역을 길게 휘감은 후 다시 연해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러한 노선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쪽 관계자들은 청의 실력자였던 리훙장에게 300만 루블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뇌물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는 동부 시베리아와 동아시아로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러·일전쟁이 한반도 지배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간의 싸움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제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려 계획한 증거는 별로 없다. 러시아 지배층의 주된 관심은 만주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만주로 넘어오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여겼으며, 여기에서 일본과의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일본의 경우처럼 러시아인들과 직접 전쟁을 하거나 나라 전체가 서로 적대관계에 놓인 적은 없다. 러시아와 일본의 접촉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림전쟁에서 대결 중이던 영국·프랑스와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항구를 군함의 정박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3개 일본 항구의 이용권을 보장받는 대신 쿠릴 열도 영토 일부를 넘겨주고 사할린을 양국통치 아래 두기로 약속하는 시모다 조약을 맺었다. 영토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러·일전쟁의 패배 결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때문일까. 레닌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서문에서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나라의 예로 코리아를 특별히 언급했고 러시아 혁명 후에는 한인 혁명가들이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러시아 속의 아시아, 아시아 속의 러시아-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이래, 유럽인들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러시아를 “아시아적 사회”라고 불러 왔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은 이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의 한 핵심적 요소로서의 아시아성을 자부심과 함께 확인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스키타이인이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다”라고 썼다. 러시아 자체 안의 아시아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군의 논자들은 유럽에 대비되는 유라시아 사회로서의 러시아 사회의 성격을 강조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속에도 러시아가 깊이 들어와 있다. 몽골은 러시아 혁명 후 두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유지했고,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받아들여 공식문자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어느 때보다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에서 ‘러시아의 해’가 선포되었고 러시아는 2007년을 ‘중국의 해’로 선포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영토갈등을 겪고 있지만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의 채굴권 때문에라도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다. 그리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남북한 어느 쪽과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야말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정착을 위해 소중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유럽-러시아-아시아를 잇는 매개체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철도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보다 더 긴 철도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와 평양을 잇는 철도이며, 다른 하나는 키예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이다. 서울과 평양 사이에 철도가 연결된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를 거쳐 서유럽까지 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꿈을 꾼다. 이는 경제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정신적 풍요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반도 남쪽은 북쪽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반도가 아니라 섬의 상태에 있다. 대륙과 육로로 연결되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공간적 협착성은 시야의 제한, 사고와 상상력의 한계를 낳는다. 대륙으로부터 강제로 배제당하지 않고, 대륙 어디든지 육로를 통해 다닐 수 있다면 굳이 국가의 영토로서 이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한국인들의 삶의 스케일도 얼마든지 더 넓어질 수 있다.(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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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그의 독자들에겐 연말 선물이 될 만한(하지만 돈주고 사야 하는 선물이다) 책이 출간됐다.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집약하고 있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시대의창, 2007)이 그것인데,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여지껏 나온 그의 책들 가운데는 최대 부피와 최고가를 자랑하지 않나 싶다. 물론 원서는 496쪽으로 그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책값도 더 저렴하고. 어느 걸 구입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다(번역본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기에). '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이란 원제가 <촘스키, 사상의 향연>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같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즐겨라, 란 뉘앙스도 되기에. 일단은 리뷰나 챙겨둔다.

문화일보(07. 12. 07) “현대 교육은 자본주의의 노예” 촘스키가 본 민주주의와 교육

“대중심리의 통제와 벌이는 싸움이란 하루에 5시간을 보는 텔레비전과 영화산업과 책과 학교와 그밖의 모든 것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다.”(촘스키)

‘생존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노엄 촘스키(79)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글과 대담, 강연, 인터뷰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의 편집자인 오테로(UCLA대) 교수는 촘스키의 제자로, 그동안 스승의 책을 주제별로 묶는 작업을 해왔다. 번역서의 제목이 원제목(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을 어느 정도 살리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900쪽이 넘는 이 책만으로 촘스키의 사상체계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향연’도 어울린다. 더구나 촘스키의 다른 책에 비해 아주 수월하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민주주의와 교육은 따로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촘스키가 계승하는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정치란 대기업이 사회에 던지는 그림자”란 말이 함축적으로 촘스키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촘스키는 언어학자로 발판을 다진 사상가다. 그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선천적이며, 다른 행동 형태와 마찬가지로 반복과 훈련, 보상과 징계 등의 조건형성을 통해 개발되는 습관의 시스템이라고 본다. 이같은 언어관은 그의 심성이론과 사회를 보는 시각으로 확장된다. 즉, 인간의 심성(영혼)에 언어기관이 선천적으로 들어있듯이, 도덕적 계율을 지키려는 소질 역시 선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방해하고, 앞서 얘기한 인간의 선천적인 창조성을 왜곡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즉 현대의 교육 자체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인간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벌어 소비를 잘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게 촘스키의 기본적 교육관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현재 교육이 일 자체를 즐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가져올 보상을 강조하는 조건 형성의 교육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동의 본질적 가치는 모른 채 교환가치만 알도록 만든다고 본다. 그러면서 촘스키는 정부, 기업, 언론,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소위 ‘가짜 지식인’들은 이같은 사회구조에 맹목적으로 편승하고 있으며 그들은 결국 권력을 잡아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겠다는 것이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12. 07.

P.S. 보다 자세한 한겨레의 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13.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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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욕심을 부릴 만한 책은 벤야민 선집으로 나온 세 권의 책이다(사실 가을에 나올 예정이었으니까 약간 늦어진 셈). 계획대로 10권의 선집이 완간된다면 '벤야민 수용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 이번 선집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론 그의 문학론들을 얼른 구경해보고 싶다. 관련 리뷰를 옮겨놓는다(역자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27.html 참조). 아래는 영역본 선집의 표지.

 

경향신문(07. 12. 08) 감성은 섬세, 사유는 견고한 산문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의 사유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뛰어난 사상가가 흔히 그러하듯,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첨예하게 현실분석적이면서도 비의적이며, 이런 형이상학적·신학적 요소는 다시 ‘현재적 인식 가능성’ 속에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쓰인 글의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적 문예이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유물론적 문예론의 재구성이나 매체미학, 지각이론이나 비평론 등으로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인식의 방법이나 현대성의 이해, 자본주의 체제 분석과 상품사회론, 문화정치론과 도시학 나아가 글쓰기의 실천성도 이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적어도 역사를 조화로운 동질적 시간이 아닌 ‘억압과 야만의 연속사’로 보는 한, 그래서 이 재앙의 보편사가 비판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거나, 또 현대적 삶의 근본특징이 경험의 파편화에 있다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새로움이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의 영원한 반복’일 뿐이라거나, 이런 반복성은 상품물신주의에서 온다든가, 혹은 사진이나 영화, 연극과 같은 현대예술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고 이때의 영향미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또 좀더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글과 기억과 행복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한, 우리는 벤야민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벤야민의 글은 무척 까다롭다. 그것은 직설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문장과 문장의 논리는 자주 비약하며, 그 때문에 의미는 마치 비늘처럼, 부채살처럼 응축되어 있다. 사상의 지형은 체계적이기보다는 비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다. 이것은 그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초현실주의자와의 교류를 통해 폐허나 꿈의 가치, 몽타주 기법 등을 배웠고(영향관계), 유대인 지식인이자 재야비평가로서, 또 국적상실자로서(1933년 이후) 나날을 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실존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전기적 사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이 반듯하게 발표될 수 있었겠는가. 또 체계란 파시즘적 일사불란함이기도 했다.(이른바 ‘체계강제(Systemzwang)’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여기에서 배운 것이다.) 이 땅에서 그의 번역이 지체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온 이유는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의 벤야민 번역서는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최성만 교수 등 세 명의 벤야민 전공자가 해낸 것이고, 특히 오랫동안의 준비와 기획 아래 전체 10권 선집(원전은 총 14권이다) 중 첫 성과물로 나온 까닭에 더욱 기대된다. 각 권은 그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주요 글 또는 주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고, 각각의 해제 아래 관련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없이 퇴고를 거쳐야만 정갈하게 되는 벤야민의 우리말 육성을 좀더 온전한 전도(全圖) 아래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권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는 정치적·성찰적 비평에세이고,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매체미학과 관련된 글 모음이다. 3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는 문학적·자전적 에세이다.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번역자가 첫 권으로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를 택했다는 점이다. 기술복제나 역사철학에 관한 문제적인 글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보들레르나 프루스트 등에 대한 글이고, 이런 문학론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사유 이미지’와 같은 글이다. 거기엔 개인의 내밀한 사연 이외에 엄혹한 시대적 상황 또한 스며 있다. 벤야민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자주 숨을 멈추어야 한다. 한 문장 문장씩 음미하듯 읽어야 하고, 읽는 도중 자주 책장을 덮어야 한다. 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벤야민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사유적으로 견고했던 사람인가를,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산문가임을 생각하게 된다. 강령이나 테제 없이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작가는 희귀하다.



벤야민 수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갈 미래의 길은 여러 단계다. 우선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고, 이런 번역서를 바탕으로 믿을 만한 안내서가 여러 권 나와야 한다. 그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이 있어야 하고, 좋은 단행본도 쌓여야 한다. 학위논문이 아닌, 더 보편적인 이론지평에서 재해석한 우리말 단행본 저서는 아직 없다. 그와 같은 문예이론가는 이 후에 나올까? 한국에서의 벤야민 완성은 그때가 될지도 모른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07. 12. 07.

P.S. 재작년에 작성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는 로드맵'(http://blog.aladin.co.kr/mramor/1177541)은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새로운 도로가 개통됐으니 말이다.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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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8737 2007-12-07 19:3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벤야민 선집이 나왔군요. 오래전부터 나온다는 소문만 들었던터라 더 반갑네요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도서관에서 대충 봤었는데, 간만에 구매욕구가 올라오네요 ^^

로쟈 2007-12-07 21:02   좋아요 0 | URL
네, 완결판이라면 투자해볼 만합니다...

람혼 2007-12-07 20:26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때아닌'ㅡ니체적 의미에서의 'unzeitgemäß'ㅡ벤야민 르네상스가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반갑고도 설렙니다. 이러한 흐름들이 잘 모아져서 좋은 성과들이 있어야 할 텐데요, 이 역시 고대하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선집 출간 소식을 접하고 로쟈님께서 한 말씀 남겨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7-12-07 21:03   좋아요 0 | URL
'때아닌' 건 아니고 몇년 전부터 예고되긴 했었죠. 감사야 제가 받을 일은 아니고요.^^;

람혼 2007-12-08 03:31   좋아요 0 | URL
아, 물론 그래서 '때아닌'이라고 썼던 것임은, 물론 아시겠지만...^^;

딸기 2007-12-07 21:48   좋아요 0 | URL
너무 어렵다... 이름만 들어도 지겨워... 나랑 인연없어... 라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왜 이런 소식을 자꾸 전해주시는 겁니까! 왜! 왜! 왜!

결국 또 질러야만 하는 것인가요... ㅠ.ㅠ

암튼 지르게 되면, 로쟈님께 당근 땡스투를 날려드려야겠지요. ^^

로쟈 2007-12-07 22:39   좋아요 0 | URL
제가 링크된 페이퍼나 리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땡스투가 불가능할 텐데요.^^

seoharoo 2007-12-08 11:47   좋아요 0 | URL
<...비애극> 역시, 최성만-김유동(아도르노 김유동이 아닙니다.^^;) 선생이 공역중이고,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선집 기획에서는 빠졌으나 한길사에서 따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더불어 벤야민의 박사학위 논문인 <독일낭만주의의 예술비평개념> 도 번역중이라고 하네요. ^^

책사랑 2007-12-12 07:29   좋아요 0 | URL
이번 "발터 벤야민 선집"(제1차분, 전3권)을 낸 도서출판 길입니다. 9월이나 10월중에 출간하려고 했으나, 편집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려 늦었습니다. 아울러 "독일 비극의 원천"의 경우에는 이미 제가 한길사에 있을 때 최성만 선생님과 번역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이번 선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좋은 역자에 의해 출간예정이니 기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제2차분 "보들레르와 현대"(제4권), "역사철학테제 외"(제5권), "번역~"(제6권)은 이번 달 말까지 전체 원고가 들어올 예정이며, 2008년 4~5월경에 한꺼번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제3차분(전4권)도 2008년 중하반기에는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발터 벤야민 전공자인 김영옥, 최성만 교수의 본격적인 연구서 2권도 준비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올해초에 출간한 게오르그 짐멜 선집(제1차분, 전3권), 그리고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와 함께 발터 벤야민은 모더니티와 관련 20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짐멜 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프리스비에 의하면) 모더니티의 3대 거장을 "발터 벤야민, 게오르그 짐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꼽더군요.
도움이 되실런지요...

로쟈 2007-12-12 22:43   좋아요 0 | URL
짐멜과 벤야민에 대해서는 꽉 잡고 계시군요.^^ 크라카우어도 소개가 되는 건가요?..

책사랑 2007-12-13 08:26   좋아요 0 | URL
크라카우어 건이 좀 걱정입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어서...

로쟈 2007-12-13 08:37   좋아요 0 | URL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