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자 신문들의 문화면은 대부분 고(故) 김광석 추모공연 관련소식을 싣고 있다. 내달 6일이 그의 12주기가 되는 날이라고 한다. 그날 추모공연도 열리고 대학로에는 추모비도 세워진다고. 90년대 초반 어디서건 들을 수 있었던 게 그의 노래들이었으므로 지나간 시절을 잠시 돌이켜보게 하지만 특별한 감상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그의 절창들이 주로 '실연'을 노래하는데 젊은 시절, 나는 연애나 실연은 좀 하찮게 여겼다). 내가 기억하는 건 '동물원'이고(그는 '노찾사'로 데뷔했다), '김광석'이란 이름은 대학 동기가 노래부르는 자리에서마다 불러제끼는 바람에 각인되었다(지금도 '김광석' 하면 그 친구가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젠 '텔미'를 따라부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어서(그 안무를 따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다시금 그 시절의 노래들을 가끔씩 듣는다. 기사가 계기가 되어 김광석의 노래들도 연이어 들으며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역시나 절창은 시인들이 가장 즐겨부른다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다. 젊은 날 나는 왜 이런 노래들이 낯간지럽다고 생각했을까? 흠... 

 

 

 

 

 

 

 

 

 

 

한국일보(07. 12. 14) 김광석 추모비 '마음의 고향' 대학로에

1996년 세상을 떠난 ‘가객(歌客)’ 김광석을 추모하는 노래비가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앞마당에 세워진다. 노래비 제막식은 고 김광석의 12주기인 내년 1월 6일에 거행되며 같은 날 오후4시 그의 동료 및 후배들이 주도하는 추모공연이 학전블루에서 열린다.

김민기 학전 대표(김광석 추모사업회 회장)는 13일 추모공연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김광석은 자기가 하고 싶은 노래에 집착하지 않고 숨겨져 있는 명곡들을 발굴해 이를 대중에게 전달해주는 진정한 가객이었다”며 “그 동안 모인 추모공연 수익금 등을 가지고 김광석의 흔적을 남기는 방법이 무언가 찾다가 생전에 1,000회 이상의 라이브 공연을 했던 학전 앞에 노래비를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노래비는 청동 조각으로 제작되며 조각가 안규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만드는 중이다.

김 대표는 “1984년 뮤지컬 <개똥이>를 준비하면서 꾸려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을 통해 그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며 “노찾사 1집 앨범을 한 꾸러미씩 들고 광석이와 함께 전국 방송사를 순회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그는 “광석이의 노래 중 가장 인기 있던 <이등병의 편지>는 원래 전인권이 부르기로 했는데 그의 밴드가 나오지 못해 당시 코러스였던 광석이에게 넘어갔다”고 추억했다.

김광석의 친구인 가수 박학기는 “김광석은 그의 노래 중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에 가장 애착을 보였고, 후반으로 갈수록 <일어나>와 같이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아주는 노래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추모공연에는 박학기를 비롯해 <서른 즈음에>를 만든 강승원, 작곡가 김형석, 가수 노영심 이소라 성시경 윤도현 이적 동물원 한동준 등이 참여해 김광석의 곡들을 들려준다. 학전블루의 좌석 수가 120개에 불과해 주최 측은 공연관람 신청을 20일 전화(02-763-8233)로 받은 후 이들 중 60명(1인 2매)을 추첨, 입장권을 판매할 예정이다.

박학기는 “1만 명이 모이는 큰 공연장에서 한 번 노래하는 것보다 100명이 들어가는 작은 곳에서 여러 번 공연하기를 좋아했던 김광석의 뜻을 살려 소규모로 추모콘서트를 하게 됐고, 평소 그가 마음의 고향이라 부르던 학전을 장소로 택했다”고 말했다.(양홍주 기자)

-이등병의 편지(http://www.youtube.com/watch?v=2CqZIvjdLUo)

-그녀가 처음 울던 날(http://www.youtube.com/watch?v=2kmbk_NzAvA)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http://www.youtube.com/watch?v=lxBEOisWBhw)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http://www.youtube.com/watch?v=_C3JFm911hE)

-일어나(http://www.youtube.com/watch?v=ekTNFs83ZQE)

경향신문(07. 11. 22) [대중음악 100대 명반]25위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음악사적으로 보면, 1968년 한대수 이래의 모던포크는 장르로서의 중요성보다 ‘음악창작에 대한 인식’과 ‘메시지 표현 양식’에서 일대 혁신을 일으킨 것에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 즉, 대중음악에서 아티스트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인텔리들이 대중음악 영역에 정식으로 들어옴으로써 대중음악을 단순한 ‘딴따라판’ 이상으로 자리매김시켰으며, 70년대 초반 청년문화의 중심으로 대중음악을 편입시켰다.

60년대 영미권의 록과 포크를 들었던 당시 대학생들에게 모던포크는 낯설지 않은 음악 형태였을 뿐만 아니라 자의식 강한 그들이 한국사회를 향해 메시지를 날릴 수 있는 매개체로서도 적당했다. 왜냐하면 선동적인 록과 달리 포크는 기본적으로 ‘메시지’의 음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박정희 정권의 ‘청년문화 탄압’에 따라 모던포크는 기운을 잃어갔고, 한대수·김민기를 비롯한 중요한 창작자들이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히면서 더 이상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 그 마지막은 한대수가 2집 ‘고무신’을 발표했던 75년 무렵이다.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오히려 대중음악이 아니라 70년대 말의 ‘메아리’와 같은 대학 노래동아리로 이어진다. 메아리는 단순히 실연 중심의 노래패가 아니라 ‘창작자 집단’이란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메아리 이후로는 그런 정체성을 가진 곳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모던포크가 대학 내로 광범위하게 전파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고무신’ 이후 모던포크의 계보는 민중음악 진영 내의 메아리-노래를 찾는 사람들-새벽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갔고, 예외적으로 활동한 인물이 정태춘, 조동진, 김두수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90년대에 들어 ‘모던포크’의 적자임을 자부한 이가 김광석이고, 그 핵심적인 작품이 바로 김광석 4집(94)과 ‘다시 부르기 2’였다.

김광석은 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88년 동물원 1집을 정식 데뷔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후 동물원 2집까지 참여를 하고, 89년 솔로 데뷔작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뮤지션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찾은 것은 ‘나의 노래’가 담긴 92년 3집부터다. 베스트앨범 형식으로 발표한 ‘다시 부르기 1’(93)부터는 작품성과 상업성 둘 다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부르기 1’이 동물원과 자신의 앨범에서 뽑아낸 노래들과 한때 활동하던 민중음악 진영에서 김현성, 한동헌, 문대현의 노래로 구성된 자전적 베스트 앨범이었던 반면, ‘다시 부르기 2’는 자신이 스스로 선정한 ‘한국 모던포크의 대표곡’ 모음집이다. 그리고 모던포크를 떠나서 그가 선정한 중요한 음악창작자들에 대한 트리뷰트앨범이었다.

그래서 이 음반에는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와 같은 초기 모던포크 뮤지션들의 노래가 담겼고, 백창우의 ‘내 사람이여’, 한동헌의 ‘나의 노래’와 같은 민중음악 선배들의 노래들이 있다. 또 김창기의 ‘잊혀지는 것’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와 같은 당대 주목할 만한 창작자들의 노래들이 수록되었다. 그리고 앨범의 대미는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로 끝맺는다.

대부분의 세션은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동익 밴드가 맡아서 90년대 국내 세션의 정수를 보여주었고, 편곡자 조동익은 원곡의 맛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노래를 참신한 김광석 버전으로 재탄생시킨 일등공신이다. 리메이크 앨범으로서는 드물게 대다수 수록곡이 원곡을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했고, 이는 자신의 노래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노래와 삶, 기쁨과 슬픔 그리고 자유와 외로움이 진득하게 녹아든 이 음반은 그의 유작이라서 더욱 애틋하다.(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김광석 프로필
·출생 : 1964년
·사망 : 96년
·데뷔 : 84년(김민기 ‘개똥이’ 음반 참여 및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주요활동
-88년 동물원 1집 ‘동물원’
동물원 2집 ‘동물원 두번째 노래모음’
-89년 김광석 1집 ‘김광석 1’
-91년 김광석 2집 ‘김광석 2nd’
-92년 김광석 3집 ‘김광석 3번째 노래모음’
-93년 ‘김광석 다시부르기 1’
-94년 김광석 4집 ‘김광석 네번째’
-95년 ‘김광석 다시부르기 2’

07.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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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12-14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 김광석씨의 노래 중에 "그날들"이라는 노래는 저에게 많이 특별한 노래 중에 하나랍니다.^^

로쟈 2007-12-14 10:28   좋아요 0 | URL
네, 좋은 노래죠(워낙 베스트 넘버들이 많기도 하고). '먼지가 되어' 같은 노래도 좋은데 제가 유튜브에서 못 찾았습니다.^^;

드팀전 2007-12-1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로에서 하는 공연 자주 갔었는데...전 <기대어 앉은 오후>라는 곡을 좋아했어요.그리고 가곡풍의 곡들 예를 들면 <꽃>,<나무> 뭐 이런..

로쟈 2007-12-14 10:37   좋아요 0 | URL
'김광석 세대'들인가 봅니다.^^

hnine 2007-12-1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덕분에 하루 종일 김광석 목소리와 함께 할 것 같습니다.
추천드리고 가요. 저도 김광석 세대랍니다.

로쟈 2007-12-14 14:43   좋아요 0 | URL
이젠 늙어가는 세대죠...

잉크냄새 2007-12-14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2년이군요. 저도 역시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가장 좋아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도 절창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로쟈 2007-12-14 14:42   좋아요 0 | URL
네, 본인이 버스에서 들으며 울었다고 하더군요...

수유 2007-12-14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처량맞아서 싫다오~~~

로쟈 2007-12-14 14:42   좋아요 0 | URL
차마 적지 못한 단어인데 '처량' 만땅이죠.^^;

자꾸때리다 2007-12-1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서른 즈음에>,<혼자 남은 밤>,<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기대어 앉은 오후에는>,<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광야에서>,<외사랑>,<이등병의 편지>.... 광팬입니다. 모두 다 50번 이상은 들었을...

로쟈 2007-12-14 14:41   좋아요 0 | URL
그래서야 솔로를 벗어나시겠습니까?^^

파란여우 2007-12-1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석 세대는 저 잖아요. 동갑내기인데...
그가 죽었을 때 제 세대의 음표가 일제히 떨어져 부서져내리는 것 같았어요.

로쟈 2007-12-14 15:44   좋아요 0 | URL
저는 조용필의 '단발머리' 세대이기도 한 걸요.^^ 저도 예의 생각나는 건 김광석을 좋아하던 친구의 허탈해 하던 모습입니다...

likesky 2007-12-1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이겠지만, 저 지금 김광석의 다시부르기 듣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했지만..이진행중이구요. 너무 좋아요. 그 모습으로 영원히 기억하게 만든 건 제겐 잔인한 일이었어요. 살면서 나이들어가는 정다운 모습 볼 수 있도록 해주지....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나봐요.

로쟈 2007-12-14 22:14   좋아요 0 | URL
팬이셨군요.^^

춤추는인생. 2007-12-14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제나이 스물에 김광규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배경음악으로 사용해서 읽곤했어요. 김광규의 시가 더 해묵어보이면서도 그 둘이 곧잘 어울리더군요.
한번도 뵌적도 티비를 통해 본적도 없지만, 마음으로 늘 살아있는 분이 이분이 아닐까 합니다..

로쟈 2007-12-14 22:16   좋아요 0 | URL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쓴 시인도 벌써 노년입니다. 김광석씨도 40대 중반이었겠군요...

송연 2007-12-15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듣고 있는데 너무 좋네요, 갑자기 정동길이 걷고 싶어집니다..

로쟈 2007-12-15 10:48   좋아요 0 | URL
^^
 

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정학적 미학>(현대미학사, 2007)에 대한 한 서평을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01). 지난 9월말에 읽을 만한 책 목록(http://blog.aladin.co.kr/mramor/1595932)으로 골라놓고서 아직 부분적으로밖에 참조하지 못했는데, 개인적으론 러시아의 영화감독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를 다룬 '소련의 마술적 리얼리즘' 같은 장을 필독할 필요가 있어서 책상맡에 오랫동안 놓아두고 있는 책이다. 출간된 지 몇달이 지났지만 본격적인 서평은 눈에 띄지 않던 차여서 반가운 마음에 챙겨둔다(이런 '이론서'의 독자는 몇 명이나 되는지 문득 궁금하다). 한편, 그의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이, 드디어, 근간예정이라는 소식도 들리므로 내년엔 '제임슨 읽기'도 따로 계획해둠 직하다(비록 '고난의 읽기'일 것 같은 예감을 떨치기 어렵지만)...

교수신문(07. 12. 10) '陰謀의 플롯’ 분석해 정치적 무의식 탐색

현대사회에서 영화는 모든 대중문화를 삼켜버릴 만큼 그 몸집이 비대해졌다. 뤼미에르 형제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기차의 도착’을 상영한 이래 영화는 현대 대중문화의 절대강자로 군림한 것이다. 영화로부터 파생되는 다양한 산업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그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만 하더라도 적은 인구에 비해 천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은 영화들이 속속 등장했으며, 영화산업이 문화산업의 우두머리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문화가 곧 산업이 되고 화폐가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영화는 예술이 아니라 자본축적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전방위적 사상가이자 문화평론가인 프레드릭 제임슨이 이제 영화를 말한다. ‘이제’라고 했지만, 『지정학적 미학』이 출간된 것은 1992년이니 ‘이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다. 프레드릭 제임슨이 주장했던 정치적 무의식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인식적 지도그리기(cognitive mapping)는 인문학 분야에서 이미 일반적으로 통용된 지 오래다. 또한 그의 문장 자체가 매우 난해해서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의 전범(?)으로 악명을 떨친 지도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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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자본주의의 질료, 영화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로 불리며 세계 체제와 사회적 총체성에 대해 심도 깊은 논의를 펼쳐왔던 그가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분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야말로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며, 영화야말로 권력과 집단의 이데올로기가 오롯하게 재현되고 있는 장르다. 지정학적 미학』의 추천사를 쓴 콜린 맥케이브의 말처럼, 영화는 “자본주의 초기단계의 완전한 발전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해가 불가능한 가장 적절한 포스트모던 예술”이자 “가장 세련된 산업생산의 산물”인 “최후의 기계”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를 정치적 판타지로 해석하는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영화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을 분석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후기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그 시간과 공간의 분기점들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컴퓨터 미디어 테크놀러지가 요동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의 총체성을 집약적으로 담고 있는 텍스트가 영화인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영화는 단순히 오락거리가 아니다. 그에게 영화는 “집단적 판타지의 심층적인 수준”을 파헤칠 수 있는 질료이다. 또한 영화는 전 지구적 세계 체제에서 벌어지는 “음모의 플롯”을 내장하고 있는 문화상품이기도 하다.

『지정학적 미학』은 영화를 매개로 정치적 무의식을 탐험하려는 저자의 야심찬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각화 된 인식적 지도그리기’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제1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의 영화를 비롯해 소련의 SF영화, 프랑스, 대만, 필리핀 등 무수히 많은 영화를 대상으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재현의 문제를 거론한다.

이러한 영화를 읽어내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독법은 잠재적 징후들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그것을 현실의 장으로 끄집어내고, 그것을 세계 체제의 차원에서 재해석하는 일이다. 그가 영화의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지정학적 무의식”이다. 지정학적 무의식이란 “우리의 새로운 세계-내-존재를 파악하기 위해 민족적 알레고리를 하나의 개념적 도구로 재편하려는” 시도이다. 또한 그것은 민족적 알레고리의 차원을 넘어 전 지구적인 차원의 알레고리를 규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음모이론’이다. 이는 그가 발 빠른 문화평론가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990년대는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온라인상에서 다양한 음모이론들이 유통되고 있었다. 1993년에는 ‘엑스파일’이 20세기 폭스사에서 제작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마니아층이 형성됐다. 『지정학적 미학』에서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대통령의 음모’, ‘비디오드롬’,  ‘콘돌’, ‘암살단’ 등에는 모두 우리의 일상 곳곳에 촉수를 뻗고 있는 음모를 폭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더욱이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장면은 미디어를 통해 재현됨으로써 무수하게 많은 사람들을 “독특한 역사 속에서 서로 묶어 며칠 동안을 하나의 거대한 집단성으로 이끌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유토피아적 공공영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프레드릭 제임슨에게 음모라는 서사는 후기자본주의 시대에 사는 인간들, 즉 분열되고 파편화된 주체들을 전 지구적으로 묶어주는 매개체인 것이다.



민족적 알레고리와 지정학적 무의식
이 순간에도 음모이론은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인류에게 매혹적인 내러티브를 제공해 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의 일등공신이었던 ‘CSI’는 공중파를 타고 한국인들의 안방을 공습했다. 특히 미국이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이 테러를 당하자 곧바로 ‘CSI:뉴욕’이 제작돼 공중파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송출됐다. 더군다나 ‘CSI:뉴욕’의 주인공인 맥 테일러 반장은 해병대 출신이자 9·11테러로 아내를 잃었다. 뉴욕의 안전을 지키는 맥 테일러가 지칠 때 마다 찾는 곳은 ‘그라운드 제로’이고, 바로 그 ‘장소’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 10월 5일 방송에서는 또 하나의 신화가 탄생했다. 발칸반도 출신의 미국 유학생들이 플라스틱 폭탄으로 세계 평화의 상징인 UN본부를 테러하려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CSI:뉴욕’뿐만 아니라 ‘24’, ‘앨리어스’ 등은 한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 드라마다. 그런데 이 드라마들의 공통적인 점은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과 ‘음모’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도깨비 방망이라는 것이다. ‘CSI’의 과학수사대 요원, ‘24’의 대테러 요원(CTU), ‘앨리어스’의 CIA 요원 등이 한국의 ‘미드 폐인들’을 숨 가쁘게 음모의 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이를 프레드릭 제임슨은 “세계의 경찰이라는 사명감으로 거듭 태어난 미국의 재탈환”이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말할 것이다. 드라마라는 미디어는 영화와 함께 우리의 인식을 점령하는 새로운 무기가 됐다. 할리우드 시스템과 미드 열풍이 ‘합작’해낸 ‘세계 문화산업의 미국화’라는 뻔히 보이는 ‘음모’에 맞설 수 있는 문화적 창조성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이승원 / 한양대 연구교수·국문학)

07. 12. 13.

P.S. 제임슨 읽기의 곤혹스러움은 이미 널리 알려진 것이지만 그걸 좀 덜어주는 국역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난삽한 문장들도 문제지만 이런저런 부주의도 거기엔 한몫한다. 가령 <지정학적 미학>의 경우에도 저자 서문의 첫번째 각주에 제임슨이 '다국적 자본주의 내에서의 제3세계 문학'이란 에세이에서 "아프리카 영화 <우스만 셈벤>에 대해서도 아주 간단히 다루었다."라고 해놓았는데, '우스만 셈벤'(1923-2007)은 영화명이 아니라 감독명이다. 그러니까 우스만 셈벤의 영화들에 대해서 몇 마디 적어놓았다는 얘기다. 나도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이 세네갈의 영화감독은 '아프리카 영화의 아버지'로까지 불리는 인물이다. 영화명으로 처리해놓고 넘어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이런 부주의가 번역서에 대한 신뢰를 침식해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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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7-12-14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이 페이퍼를 읽고 불현듯 드는 생각은, 태안 원유 유출 사고와 총기 탈취 사건이 괜한 게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명예훼손이라고 할까봐 말은 못하겠지만, 여론의 관심을 다른 곳에 돌리고 구렁이 담넘어 가듯 넘어가려고 그런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요...ㅎㅎ

로쟈 2007-12-14 08:34   좋아요 0 | URL
그게 사건마다 다 해명되지 않는 의문점들이 계속 남으니 음모론의 신세를 지더라도 도리가 없겠습니다. 그리고 음모론의 3%는 진짜라고도 하고...
 

한겨레21에서 연재되고 있는 정재승의 '사랑학 실험실'에서 지난주 분을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0000/2007/12/021160000200712060688018.html). 한 포털사이트에 게시되기도 했던 것인데 혼외정사의 생리학을 다루고 있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한 강의를 하다가 '연애의 기술'이란 말이 나와서 참고삼아 인용하기도 했다(그래서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칼럼의 요점은 '일부일처 본능'과 '불륜 본능'이 따로 있는 것인가인데, 적어도 들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그렇다고 한다(호르몬이 결정한단다). 그럼 인간은? 적당히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겠지... 

한겨레21(07. 12. 06) 일부일처 본능, 불륜 본능

만프레트 타이젠의 저서 <러브 사이언스>에 따르면, 포유류의 97%는 정조관념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5천 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평생 같은 짝과 함께 지내는 동물은 비버와 수달 등 약 3%에 불과하다. 이미지와는 달리 늑대와 여우도 일부일처를 하는 동물에 속한다. 하지만 포유류의 대부분은 섹스를 위해서, 혹은 자식 양육을 위해서 한동안 함께 지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된 뒤에는 각자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떠난다.



인간은 ‘사회적 일부일처제’

게다가 짝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도 사실은 몰래 바람을 피우거나 상대를 떠나기도 한다. 사람처럼 이혼을 한다고나 할까? 진화생태학적 가설이 맞다면, 동물 세계에서 대부분의 수컷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목표이고 암컷은 건강한 새끼를 낳기 위해 최상의 상대를 고르는 데 전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부일처제는 한 상대에게 생식에 관해 전폭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부담이 따르는 제도다.

진화생태학자들은 동물 세계의 ‘일부일처 습관’을 일정 시간대에 한 짝과만 짝짓기하는 ‘성적’ 일부일처제와 암수가 짝짓기를 한 뒤 새끼를 함께 키우지만 바람도 피우는 ‘사회적’ 일부일처제, 그리고 한 암컷이 평생 한 수컷의 알만 낳는 ‘유전적’ 일부일처제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새들의 90%는 암수가 새끼를 함께 키우지만 다른 상대와도 성적 관계를 갖는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많은 국가에서 인간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지만, 혼외정사 빈도와 혼전 성관계를 고려하면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60% 이상이 결혼 뒤에 이따금 파트너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행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애정 행각’을 나눈다. 이른바 ‘감정적 부정’이란 걸 한다. 또 남녀의 35%가 결혼 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남편의 50%, 미국 아내의 26%가 혼외정사를 경험한 적이 있다.

킨제이 보고서 이후 조사된 몇몇 연구들에서는 그 수치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전체적인 경향은 별반 차이가 없다. 8천명의 기혼 남녀를 조사한 한 연구는 남편의 40%와 아내의 36%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혼외정사를 했다고 보고했으며, 어떤 보고서는 최대 70%에 이른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외도 상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최근 결과일수록 남녀 간의 혼외정사 수치 차이가 조금씩 줄어들긴 하지만, 모든 연구에서 일관적으로 혼외정사의 발생률과 빈도에서 남성이 여성을 앞서고 있음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아내보다 남편이 더 자주 더 많은 상대와 혼외정사를 한다. 킨제이는 자신의 보고서에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사회적 규제만 없다면, 남성들은 평생 아무 여자나 섹스 상대로 삼으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것이라는 명제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반면 여성들은 다양한 상대를 접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인간이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식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길면서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했고, 사유재산을 내 유전자를 가진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일부일처제는 제 꼴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일부일처제라는 특징이 우리의 두뇌 작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순애보와 불륜은 호르몬 차이?
북아메리카 중서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 ‘불스’와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애정생활에 관한 한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보인다.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냄새를 통해 적합한 파트너를 찾으며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한 파트너하고만 짝짓기를 하며, 나중에 직접 만든 둥지에서 새끼를 함께 돌본다. 반면 산에 사는 그들의 동족은 정반대의 애정생활을 보인다. 수컷은 새끼를 낳아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곧장 다른 암컷의 치마 속을 호시탐탐 노린다.

유전자 측면에서만 보면, 두 들쥐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니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를 그토록 불성실한 수컷으로 만드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15년간 들쥐들을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학 래리 영 박사팀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성실한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암컷에게는 옥시토신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자식과 배우자에 대한 애착을 유발하는 호르몬인데, 이들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순식간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고, 암컷 또한 파트너에 대한 흥미를 곧바로 잃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음 연구 결과였다. 이번에는 산에 서식하는 들쥐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와 옥시토신 수용체의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들쥐들이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예전의 불성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초원에 서식하는 들쥐처럼 그들도 이제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전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들쥐를 통한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이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왜 사람들이 결혼생활이 깨질 수 있음에도 혼외정사를 꿈꾸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애보적인 사랑’이나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불륜적인 사랑’ 안에는 생물학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포함돼 있음을 시사한다. 뇌 속에 어떤 호르몬이 좀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랑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성전략이 그렇듯, ‘원나이트 스탠드’도 그에 다른 손실이 있기 마련이다. 도덕적인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남성들은 성매매를 통해 매독이나 에이즈 같은 성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바람둥이’라는 나쁜 평판을 얻을 수도 있으며, 여성들은 더욱 가혹한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또 혼외정사나 하룻밤의 정사를 추구하는 미혼 여성은 때론 자신과 자식에게 장기적으로 투자해줄 남성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해 자식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안정된 결혼생활이 한순간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질투심으로 가득 찬 ‘여성의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 여러 문화권에 걸쳐 살인 사건의 상당수가 (특히나 배우자 살인의 대부분이)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한, 그래서 질투심에 휩싸인 남편이 저지른 사건이었다.



‘원나이트 스탠드’에 따르는 손실
그럼에도 원나이트 스탠드가 오래도록 유지되는 데에는 생물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요소들이 많이 관여된다. 예를 들어 일시적인 성관계가 주는 손실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달라진 생활환경 덕분에 겪지 않아도 된다. 효과적인 피임법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원나이트 스탠드나 결혼과 상관없는 섹스를 늘리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도시생활의 상대적인 익명성은 찰나적인 성관계로 인한 평판의 하락을 어느 정도 줄여준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남성에게서 장기적 투자를 기대하지 않고 섹스를 할 수 있도록 해주며, 부모로부터 독립,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공간의 증대 역시 혼외정사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이처럼 찰나적인 성관계로 인한 손실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복잡한 성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형태로 현대생활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07. 12. 13.

P.S. 결틀여, '유혹의 기술' 혹은 '작업의 정석'에 대해서는 '작업의 정석과 자기계발'(http://blog.aladin.co.kr/mramor/998402)이란 페이퍼를 참조. 닐 스트라우스의 <더 게임>(디엔씨미디어, 2006)에 대한 소개이다. 하긴 그냥 노골적으로 <유혹의 기술>(이마고)이란 책도 있긴 하다. 다이제스트판까지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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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13 20:10   좋아요 0 | URL
저 같은 외로운 솔로부대원에게는 일부일처니 일부다처니 다 배부른 소리입져...그저 다정하고 예쁜 여친 한 분만 굽신굽신...

로쟈 2007-12-13 20:41   좋아요 0 | URL
곁들여 적어놓은 책들을 한번 통독해보셔야겠네요. 물론 실습도 하면서...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가 다시 번역돼 나온 김에 카프카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워낙에 많은 책들이 나와 있기에 탐나는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위주로 꾸린다. 대선이 끝나면 가장 읽고 싶어질 작가가 카프카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로테스크한, 혹은 카프카레스크한 세상에 대해서 상담을 좀 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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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지음, 편영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2007년 12월 13일에 저장
품절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이진경 옮김 / 동문선 / 200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2007년 12월 13일에 저장
절판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마르트 로베르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3년 2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5월 1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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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읽다 1
빌헬름 엠리히 지음, 편영수 옮김 / 유로서적 / 2005년 1월
17,000원 → 15,300원(10%할인) / 마일리지 8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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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13 18:30   좋아요 0 | URL
음, 저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카프카 좋아하는데. 그로테스크한 세상에 대해 상담을 하고싶다는 로쟈님 의견에 大공감이에요.

로쟈 2007-12-13 20:41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일은 아니지요.^^;

뭉실이 2007-12-31 22:50   좋아요 0 | URL
카프카의 책이라고는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밖에는 없는데요...
이책을 읽고 언젠가는 카프카의 책을 읽을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압축된 카프카의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

로쟈 2007-12-31 23:33   좋아요 0 | URL
대표작들이야 다 아시는 건데요, <변신>, <소송>, <성>이 필독서이고, 개인적으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추천합니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은 '올해의 이론서' 후보작 중의 하나일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는 책이다(관련 페이퍼는 '루만이냐 하버마스냐' http://blog.aladin.co.kr/mramor/1342097 '체계이론과 주체철학' http://blog.aladin.co.kr/mramor/1377766 등 참조). 여름에는 서론부만 좀 훑어보다가 다른 일들에 치여 미뤄두고 말았는데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장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싶다(나는 영역본까지 구해두었었다). 다행히 관련 입문서들도 나온다고 하니 사정도 더 좋아질 듯하고. 연세대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654). 국역본의 문제점도 짚고 있어서 유익하다. 

담비(07. 12. 11)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라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역시나 국역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Eine Einführung.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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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만을 전공하는 분께 이야기 들은 바가 있기도 해서, 아직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더욱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글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3 08:4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은 덜컥 구입했었는데요, 역시나 문제가 터지는군요.--;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미비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로쟈 2007-12-13 08:39   좋아요 0 | URL
출판계 자체의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건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