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분량'에 대해 몇 자 적으려다가 제목을 '글쓰기 분량과 글쓰기 장애'로 바꾼다. '글쓰기 장애' 때문이다. 책에 관해서라면 남못지 않게 수다스러운 내가 '글쓰기 장애'를 갖고 있다면 의외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좀 특이한 '장애'를 갖고 있다. '특이'하다는 것은 내가 가진 장애가 '첫문장 쓰기' 장애이기 때문이다. 이런 류의 페이퍼라면 별 문제가 아니지만 '공식적인' 종류의 글쓰기에 있어서 내가 가장 애를 먹는 것은 마땅한 제목을 붙이고 첫문장을 쓰는 것이다. 두 가지만 해결되면 글의 절반 이상은 씌어진 셈이 되지만, 반대로 그게 잘 안되면 소위 '먹통'이 된다. '글쓰기 블록'과 '하이퍼그라피아'가 특이하게 결합돼 있는 경우가 아닌가 싶다. 아직 치료를 요할 정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여하튼 최근에 이 장애 때문에 계속 애를 먹고 있다. '만만한' 페이퍼들만 애꿎게도 계속 만들어지는 한 가지 이유이다.

교수신문(06. 11. 14) 지식인들의 글쓰기 분량 적당한가

한 교수에게 원고청탁 때문에 전화를 돌렸다가 바로 내렸다. “이번 달에 고정칼럼 합쳐서 20편 썼다”란 말에 “건강 잘 챙기시고요” 하고 끊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공장장급’ 칼럼니스트들이 우리 사회에 늘어나고 있다.

생태론자이자 경제학 박사인 우석훈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요즘 거의 3일에 한편 꼴로 글을 생산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FTA, 부동산·재개발 같은 ‘사건’을 자꾸 터뜨리기 때문인데, 어떻게 저런 노동이 가능할까 싶을 만큼 글을 통해 복잡한 사안들을 분석, 처방하고 있다. 사회과학 분야의 홍성태·이해영·서동만, 문화계열의 고병권, 과학의 정재승·이덕환 같은 이름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메이커’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글을 잘 써도 독자와 얼굴 맞추는 빈도가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나중엔 풍경이 돼버린다.

물론 물량공세가 질적 전화를 이루기도 한다. 요즘 고명철 광운대 교수의 글이 “좋아졌다”는 평들이 오간다. 한 때 막노동 하듯이 평론을 쓴 결과라는 게 나름의 원인분석. 평론처럼 호흡이 긴 글을 한 달에 2~3편씩 쓰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글 속에 유야무야한 부분들이 생겨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어떤 감각과 성찰성이 개발되는 것일까. 잠깐 쉬었다가 다시 발표한 고 교수의 글은 좋은 평을 받는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문 편.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한 달에 학술대회 발제문만 2편을 쓰고, 신문칼럼을 매주 4회 쓴다. 홍 교수 같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글쓰기는 운동적 성격을 띤다. 그것은 구호와도 같아 반복적으로, 그리고 충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효과를 거두지만 글은 퍼석거릴 수밖에 없다. 학자나 전문가의 내공이 실리기보다 특유의 관점과 스타일 속에 담궜다가 꺼내는 정도의 글이다. 과연 이런 글이 반복됨으로써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까.

사실 요즘 지면이 대폭 늘어난 문학평론이나 소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의 형식, 어떻게 말을 할까에 대한 고민은 없이 점조직처럼 부지런히 거점만 이동한다. 마치 간첩처럼 정체성도 불투명하고, 그저 말을 만들기 위해 이런저런 장식들이 뒤죽박죽 돼 있는 평론들은 글쓰기를 힘겨운 노동으로, 프로필과 원고료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가치로 제도화시킨다.

평자들이 지친 기색이 가득하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계간지 마감이 있는 달은 6~7편까지 편수가 올라간다. 이 중 절반은 인간관계 때문에 쓰고 원고료는 80매에 8만원. 고 씨는 “노동이라 하면 슬퍼지죠. 노동은 팔려고 하는 건데요, 판다고 생각하진 않구요. 저는 그냥 일(業)이 많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노동이든 일이든 글쓰기란 행위 자체에서 힘겹다는 이미지를 벗겨낼 순 없을까. 롤랑 바르트는 일본에 다녀와서 ‘기호의 제국’을 펴냈다. 그는 일본에 매우 고마워했는데, 그에게 글쓰는 재미를 줬기 때문이다. 1960년대 구조주의를 통해 당시 범람하던 역사주의를 패퇴시킨 바르트는 후기로 갈수록 글쓰기의 목적을 어떻게 그것의 즐거움을 확대시키고 고양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선회시켰다. 그가 실험한 독특한 자서전, 글쓰기를 즐기고 있다는 감이 선명한 에세이들을 보면 오늘날 문필가들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만족의 정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관련 한 문학평론가는 “늘 머리 속에는 그럴듯한 책 한권을 꿈꾸고 설계하지만 공부하다가 볼 일 다보고 정작 쓰지는 못한다”라고 털어놓는다. 꿈꾸는 동시에 쓸 수 있는 환경이란 아마 ‘연재’의 형식일 것인데, 잡지 편집위원 급이 아니면 좀처럼 이런 기회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정말 ‘연재스러운’ 낡은 에세이식 주제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정말 연재가 필요한 글은 통상적인 연재 포맷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전문연구나 장편 주제론·작가론 같은 것이 아닐까. 가까운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그것이 마치 존재의 끈처럼 기능을 하는 그런 연재글 말이다.(강성민 기자)

06. 11. 15-16.

 

 

 

 

P.S. 청탁받은 원고들을 계속 펑크내면서 '글쓰기의 분량'에 대해서도 회의를 갖게 됐다. 교수신문의 기사에 눈길이 간 것은 그 때문이다. '개인차'라는 게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하면 더 많이 쓰거나 더 많이 써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능력을 배가시켜야 하는가 아니면 분량을 축소시켜야 하는가. 욕심은 많지만 인생만큼 욕심대로 잘 안되는 것이 글쓰기가 아닌가 한다(글쓰기의 즐거움은 글쓰기의 고통과 나란하다). 문득 두어 달 전에 읽고 스크랩해놓은 칼럼이 생각난다.

문화일보(06. 09. 12) 글쓰기 장애

연세대에서 11, 12일 열리고 있는 노벨포럼 참석차 한국에 온 196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머리 겔만(77). 15세에 예일대에 입 학하고 21세에 박사가 된 천재다. 유명한 ‘쿼크’이론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본업인 물리학뿐 아니라 언어학·역사학·고고학·생태학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9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는 분명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知性)이다.

한때 언어학자를 지망했을 만큼 언어감각이 탁월한 겔만에게 ‘글쓰기 장애’가 있다는 건 역설에 가깝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 들이 ‘영예의 의무’로 여기는 수상논문집에 글을 올리지 못한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쓰더라도 자신의 지식창고에서 최적의 표현을 찾아내는 데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의도와 달리 글이 써지지 않는 것을 ‘블록현상(writer’s block)’이라고 한다. 마감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글은 한 줄의 진척 도 없는 그런 상황이다. 밥을 먹을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심지어 잠을 자면서도 온통 그 생각뿐이지만 다가가면 글은 천리 밖으로 달아나고 만다. 머리를 쥐어뜯고, 방을 들락거리고, 그나마 몇 자 쓴 종이를 찢어버리고…. 글쓰기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찰스 디킨스도 “가족에게는 괴물이요, 나 자신에게는 공포”라고 토로했을 정도다.
 


글을 못쓰는 고통만이 글쓰기 장애는 아니다. 블록현상과는 거꾸로 식음을 거르면서까지 닥치는 대로 써대는 유형도 있다.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는 이런 글쓰기 중독증을 표현하는 의학용어다. “컴퓨터 자판이나 빈 종이를 보면 마약을 본 마약 중독자 같은 쾌감을 느꼈다”고 할 정도면 하이퍼그라피아다. 평생 9만 8721통의 편지를 썼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작가 루이스 캐럴, 수많은 글을 언론에 발표했던 ‘유나바머’(시어도어 카진스키)가 이런 부류에 속한다.

개인 홈피·블로그가 확산되면서 우리 주변에서도 글쓰기 마니아들이 넘쳐나고 있다. 요즘 청와대 홈페이지에 들어가봐도 그걸 느낀다. 비서진이 “일은 언제 하느냐”는 걱정까지 들어가며 열정적인 글을 쏟아내고 있다. 표현도 거침이 없다. 정책을 널리 알리겠다는 충정을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국정은 블록상태인데 참모진은 하이퍼그라피아에 빠진 듯한 부조화가 마음에 걸린다.(김회평 논설위원)

 
 
 
 
 
 
 
 
P.S.2. 하이퍼그라피아, 곧 '글쓰기 중독증' 환자로 분류된 루이스 캐롤과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책들이 최근에 또 출간됐다. <신기한 나라의 앨리스>와 <산업사회외 그 미래>로 제목이 바뀐 게 특이하다고나 할까. 아무려나 너무 안 써져도 너무 잘 써져도 문제가 되는 '글쓰기 나라' 또한 '신기한 나라'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6-11-17 07: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동병상련'이란 말을 이런 때 쓰는 것이죠? 서로의 위로와 치유도 각각 따로 노는 것인지 걱정됩니다.^^;

2006-11-17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7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이런! 이거 무슨 헤어진 가족상봉 장면 같군요.^^
 

'세계의 책'이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었는데, 예기치 않게도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식을 제일 처음 다루게 됐다. 아침신문에 관련기사가 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가 아니라 '밀란 쿤델라'여서 잠시 놀랐다. 이게 어찌된 표기인지 모르겠는데, 'Milan Kundera'가 어떤 원칙에 의해서 '밀란 쿤델라'로 표기되는 것일까? 부랴부랴 검색해보니 송두율 교수의 한 칼럼에도 '밀란 쿤델라'의 <느림>이 언급되고 있다. 'Milan Kundela'라고까지 병기하면서. 이건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의 관계 같은 것도 아니고 (무지의 소치로 보이지만) 여하튼 재미있는 일이다. 기사는 원문 그대로 옮겨온다.  

경향신문(06. 11. 15) 쿤델라 ‘참을 수 없는…’ 22년만에 解禁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델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출간 22년 만에 고국에서 금서(禁書)의 꼬리표를 떼었다. 영국 더타임스는 1984년 출간된 쿤델라의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가 체코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됐다고 14일 보도했다. 이 소설은 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했으며, 다니엘 데이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시가 주연한 영화로도 제작됐다. 체코에서는 공산주의 정부에 의해 금서로 지정됐다.

쿤델라는 29년 체코 브르노 출생으로 ‘프라하의 봄’ 이전에 소설 ‘농담’ 등을 발표해 이미 유럽 문단에서 주목받는 작가였다. ‘프라하의 봄’ 당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했다가 옛 소련 군대에 의해 체코 민족의 자주 욕구가 짓밟힌 이후 공산당에서 출당당하고 출판도 금지당했다. 75년 파리로 망명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체코 공산정부는 79년 쿤델라의 국적을 박탈했고, 쿤델라는 81년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불어로 출판됐다. 체코 독자들은 따라서 모국어로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최근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모국어판 출간이 지연된 것은 작가가 일부 내용을 새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체코어로 된 원본이 부분 멸실됐기 때문에 쿤델라는 프랑스어판을 보고 체코어로 재번역하는 과정을 거쳤다. 프랑스어판을 보고 체코어 원본을 새로 만드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작가적인 욕심 또한 개입돼 일부 내용을 수정·보완했다.

쿤델라의 출판 대리인은 “번역하고, 고치고, 가필하는 일을 작가가 끊임없이 반복한 끝에 마침내 체코어판을 완성할 수 있었다”며 “체코어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분명 기존 책과 같지만, 한편으로는 아주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쿤델라는 체코어판 후기에서 “나는 어떠한 미비점이나 실수도 남기지 않기를 원했다”며 “즉 다른 말로 하면 완벽한 최종판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내가 다시 이 일에 매달려 마무리할 시간이 앞으로는 없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체코어판은 지난달 출간 이후 하루에 100권가량 팔리고 있다. 이 책은 인간실존을 철학적으로 성찰한 것 외에 정치적 의도도 담겼다는 해석에 쿤델라는 “결코 정치적 메시지는 없다”고 강조했다. “그저 하나의 소설, 아무것도 아닌 소설로 읽어달라”는 게 쿤델라의 주문이다.(안치용기자)

06. 11. 15.

P.S. 체코어판의 이미지를 찾지 못했다. 나는 러시아어판을 갖고 있는데, 문득 새롭게 읽고 싶다는 충동이 생긴다. 우리 존재의 가벼움은 아직 참을 만한 수준인가?..

 

 

 

 

P.S.2. 내가 알기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최소한 세 가지 버전의 국역본이 있다. 먼저 가장 먼저 나온 송동준 교수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1988)은 계간 <세계의 문학>에 전재된 장편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이다(내가 작품을 처음 접한 것도 이 잡지를 통해서였다). 이 송동준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들은 바로는 역자가 '학력고사'  출제위원으로 감금생활을 하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해본 것이라고 한다(본래 브레히트 전공자인 역자의 최고 '히트작'이 아이러니컬하게도 쿤데라이다).

그리고 두번째 번역은 중앙일보사의 소련동구문학전집의 한권으로 나온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중앙일보사, 1990)이다. 보흐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와 한권으로 같이 묶여 나왔는데, 체코문학 전공자인 김규진 교수의 번역이다(책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한국외대출판부, 1995)로 재출간됐다). 체코어본으로부터의 번역으로 알고 있는데, 기사를 읽고 나서 문득 그 '체코어본'은 어떻게 된 것인지 궁금해졌다(알고보니, 파리에서 출간된 체코어본이다). 한때 알고 지냈던 체코 여성과 자주 만난 적이 있고, 만날 때마다 주된 화제는 카프카와 쿤데라였다(그녀가 체코어본을 읽은 건지 영어본을 읽은 건지 헷갈린다).

그리고 세번째 번역이 이재룡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나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 2001)이다. 이건 불어본의 번역이다. 프랑스에 체류중인 쿤데라가 불어로 작품을 발표하면서 어느새 불어본이 '원본'을 대신하게 됐다. 이번에 다시 출간된 체코어본이 국내에 새롭게 소개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쿤데라의 이 대표작에 대해서만큼은 '한국어 쿤데라'는 풍요롭다.

그리고 끝으로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 러시아어로 대부분 번역돼 있는 그의 책들을 다 구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억에는 네댓 권 정도를 사둔 듯하다. 이번 겨울에 국역본과 함께 같이 읽어볼까 궁리중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네파벨 2006-11-15 09:33   좋아요 0 | URL
쿤데라...

제가 가장 사랑하는...과거에 가장 사랑했고.....앞으로도 그 사랑을 뛰어넘을만한 작가를 만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는.......작가입니다.
아니...지금 그의 책을 읽어도...20대 초반 가슴 설레며 온통 몰두했던 그 열정으로 쿤데라의 책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듯 해요...

그의 소설들....plot...주인공...배경...메시지....대사들...은유와 비유...사소한 배경 묘사...그가 끌어들이고 소개한 역사적, 철학적, 예술적 지식의 조각들...하다못해 음악이나 그림에 대한 그의 취향까지도...

마치 갓난 아기가 엄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듯,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통째로..완전히...제게 흡수되고 동화되었죠...
I've got him under my skin............그런 느낌......

심지어..많은 논란이 되었던..중역과 오역으로 얼룩진 그의 작품들의 번역문조차...제게는 친근하고 정답고 소중하게 느껴집니다....오역으로 이해가 안되는 부분조차...먼가...이국적이고 아련하고 신비스럽게 다가왔다는 코믹한 상황...ㅡ,.ㅡ
쿤데라 작품에서 주인공이...히틀러의 바랜 흑백사진을 보며 향수와 정다움을 느꼈던 도덕적 도치상태와 비교할 수 있을까요...^0^

쿤데라가...세상을 떠나기 전에...잊지못할 선물을 하나 남겨주었으면(새로운 소설..젊은 시절의 필력에 못지 않은 작품..)하는 소망이 있었는데...음...마지막 불꽃을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체코어 복간(?)에 쏟으셨군요...

사실 후기작들은 기대에 조금 못미친것도 사실입니다. 전 참을수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농담, 생은 다른 곳에(제 서재 이름..)...다 좋구요...개인적으로 "웃음과 망각의 책"에도 아주 많은 애정을 느낍니다.....

로쟈 2006-11-15 11:19   좋아요 0 | URL
페이퍼의 내용을 보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사이에 '장문'의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저도 최근에 그의 책들을 읽을 수가 없어서 아쉬워하던 차였습니다. 얼마전에 페이퍼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신작 에세이집만큼은 빨리 출간되었으면 좋겠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 겨울에 한번 다시 읽어볼까 궁리중입니다...

수유 2006-11-15 16:51   좋아요 0 | URL
그 참.. 쿤델라라...^^ 얼른 보충하셔요..

sommer 2006-11-16 00:52   좋아요 0 | URL
저도 경향신문 기사를 읽다가 '쿤델라'가 '만델라'처럼 읽혀지는 걸 경험했답니다. ^^ 지젝의 'parallax view'에 '아무 것도 되지 않는 것의 가벼움'이라는 제목의 장이 포함되어 있더군요...아마도 연관이 있는 건 아닌지

로쟈 2006-11-16 14:26   좋아요 0 | URL
지젝의 절제목은 '신성한 똥의 참을 수 없는 무거움'이군요.^^

기인 2006-12-16 00:21   좋아요 0 | URL
ㅋ 땡스투하고 갑니다. 체코 1월말에 일주일정도 다녀올 예정인데 그 김에 다시 읽어보려고요. ㅎ 예전 로쟈님이 다른 페이퍼에도 썼지만, 체코인들은 쿤데라 안 좋아하지만서두 ^^; 우리(?)야 체코하면 카프카와 쿤데라 아니겠어요. 'ㅋㅋ'네요. ㅎ

로쟈 2006-12-16 00:47   좋아요 0 | URL
아니 무슨 공익이 해외출장을 다 가나요?!..

기인 2006-12-20 22:11   좋아요 0 | URL
공익을 위해서입니다. ㅋ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가 번역돼 나왔다.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가 그것이다. 개인적으론 원서를 이미 작년에 구해서 몇 페이지을 읽어보았다. 물론 그 정도로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 책이 포함된 시리즈 자체의 성격이 그렇다. 그 시리즈란 루틀리지에서 나오는 'Critical Thinkers'를 말하는데, 인문서 출간 동향에 까막눈이 아닌 독자라면 도서출판 앨피에서 나오는 이 시리즈의 책들을 기억할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시작한 시리즈 말이다. 한데, <라캉 읽기>는 뭐냐고? 그게 아마도 앨피에서 시리즈의 판권을 다 확보하지는 못한 탓으로 보이는데, 클레어 콜브룩의 <질 들뢰즈>(태학사)가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된 것과 같은 사정이 아닐까 싶다.

저자인 숀 호머는 이미 <프레드릭 제임슨>(문화과학사, 2002)이l란 입문서가 소개된 바 있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다('지젝의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이전에 페이퍼로 올린 적이 있다), 현재는 자리를 옮긴 것으로 돼 있지만 영국 셰필드 대학의 정신치료연구센터의 교수로 재직한 바 있고, 내가 알기에 역자인 김서영씨는 호머 교수의 지도하에 라캉에 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그러니까 역자로서는 최적임자라고 할 수 있겠다. '가장 쉬운 라캉 입문서'에 대한 기대를 가져봄 직하지 않을까?

소개에 따르면, 책은 "우리 시대에 영향력을 미치는 한 사상가의 핵심적 이론과 논리를 대중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쓴 이상적 개론서. 지난 30년간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라캉의 중심개념들을 그 개념의 배경과 맥락을 따라 쉽게 기술했다. 지은이는 임상분석가가 아닌 문화이론가의 시각에서 그동안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형태인 정체성의 정치학에 의해 수없이 비판받아온 라캉의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또한 라캉의 업적과 사상이 현재의 주체성에 관한 논쟁에 일조할 수 있는지 독자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책 전반에 걸쳐 자크 알랭 밀레와 브루스 핑크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라캉주의자들의 다른 문헌들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러니, 그토록 어렵다는 '라캉 읽기', 이제라도 다시 시작해보자. 읽다 보면 <라캉으로 쇠라 읽기>(애플트리태일즈, 2006) 같은 책도 더이상은 두렵지 않을 것이다. 누가 자크 라캉을 미워하는가?..

06. 11. 15.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6-11-15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퍼갑니다. 읽고 읽고 또 읽어도, 한번 놓으면 왠지 다시 다가서기 애매한 그 이름. ^^;

로쟈 2006-11-1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이 공익의 교양은 다 책임지시는군요.^^

조선인 2006-11-15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아무리 쉬운 책이라고 해도 너무 어려워요. =3=3=3

로쟈 2006-11-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 '라캉 입문서'들과 비교하셔야 합니다.^^

자꾸때리다 2006-11-15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하신 분 약력을 보니 생물교육 전공하신 후에 영국에서 정신분석 공부하셨네요.
저렇게 비 인문학 계열 전공하고서 바로 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을 수가 있나요?
저도 의대 나온 후에 정신 분석을 공부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해외에서 박사과정은 수료하고 싶거든요. (그 다음에 한국에서 공중보건의 하면서 공부한 후에 다시 외국에서 1년 정도 가서 학위 받고 국내 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로쟈 2006-11-15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답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정신분석이 라캉 정신분석이신지요? 영미식 정신의학과는 계보가 다른지라...

수유 2006-11-15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라캉으로 쇠라읽기>가 있네요^^
앗 그러고보니 책방에서 본 책이네요..^^

깽돌이 2006-11-16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이트가 만든) 국제정신분석학회에는 자아심리학,자기심리학,대상관계이론파 이렇게 세 파벌(?)이 동거하는 것 같습니다(미국은 자아심리학,영국은 대상관계학파,남미는 클라인 학파가 발달했다고 합니다).이 계보에서 융과 라캉이 벗어나는데 라캉 임상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습니다.영미분석철학, 대륙철학 식으로 분류되는것 같지는 않은 듯 해서.한국 라캉학회사이트 구경했었는데 거기 의사샘들이 라캉식으로 임상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모 분은 오역의 쓰나미로 유명하고...그냥 연구스터디모임인 것 같네요.

2006-11-16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1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라캉 입문서에 따르면, 주류 정신분석학이 1만명, 라캉식 정신분석학(프랑스, 스페인, 남미 등)이 1만명 정도의 추종자들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더군요...
 

지난주에 소개된 신간 소설들 가운데 눈길을 끈 건 폴란드 출신의 유태계 미국작가 저지 코진스키(1933-1991)의 문제작(이라는) <페인트로 얼룩진 새>(문예출판사, 2006)이다. 이미 번역된 <편력>(웅진출판, 1995) 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미국문학 개론서나 일부 소설들에서 이름을 본 기억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가령, 구효서의 <카프카를 읽는 밤>).

 

 

 

 

소개에 따르면,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자전적 소설.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 고통스럽고 잔인한 이야기이다. 1965년 처음 출간되어,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뛰어난 문학 작품'으로 꼽혀왔다."고 한다. 보다 자세한 건 아래의 리뷰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참고로 번역자는 안정효 선생이다.   

한국일보(06. 11. 11) '페인트로 얼룩진 새' 동족에게 온정을 기대하지 마!

동유럽의 어느 시골에는 마을 사람들이 새를 잡아다 깃털에 색칠을 한 다음 같은 새의 무리로 되돌려보내는 풍습이 있다. 알록달록하게 색칠된 새는 인간의 마수에서 벗어나 동료들의 애정과 보호를 기대하며 무리로 돌아가지만, 무리는 그 새를 낯선 적으로 착각해 집단공격을 가한다. 동족을 마구 공격해 찢어죽이는 새들. 이 잔혹한 장면을 즐기는 인간들의 놀이가 폴란드 출신 유태인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1965년 소설 <페인트로 얼룩진 새(The Painted Bird)>의 모티프다.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은 유태인 학살로 고아가 된 여섯 살 소년을 동물로 키운다. 소설은 이 소년이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의 어느 시골마을에서 인간과 동물 사이를 오가며 겪은 고통스런 성장의 기록이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이어가는 소년은 가학적인 농민들에게 온갖 괴로움을 당하며 쫓기고, 갖은 노동에 착취당하며, 성적으로도 학대받는다.

살아남기 위해 기지와 재치, 거짓말과 술수를 익힐 수밖에 없다. “당하고만 살던 때는 지났다. 선의 신봉과, 기도와, 제단과, 성직자들과, 하느님의 힘은 나에게서 언어를 박탈했다.…이제 나는 악령의 도움을 받는 자들과 어울리기로 했다.”(236쪽) 동족으로부터 아무런 온정도 기대할 수 없는 이 가련한 ‘페인트 새’는 그렇게 삶의 본질을 터득해간다. 고작 열두 살 나이에.

이 소설을 제대로 읽으려면 작가에 대해 미리 알아두는 것이 요긴하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여섯 살에 고아가 된 그는 아홉 살 때 가혹한 농민 패거리에게 심한 벌을 받다가 충격으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다가, 종전 후 폴란드 고아원에서 병든 부모와 재회한 후에야 목소리를 되찾았다. 1957년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망명해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이후 철강 재벌의 미망인과 결혼해 자가용 비행기와 승무원만 17명인 개인 배를 소유하게 되는 등 <위대한 개츠비>의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가 꿈꾸다 끝내 누리지 못한 삶을 현실에서 살았다.

그러나 허풍과 과장, 거짓말과 포즈로 점철된 그의 생은 자살로 끝나고 만다. 인간관계의 유효기간은 2년을 넘지 못했고, 자전소설로 알려진 <페인트로 칠한 새>가 가져다 준 세계적 명성은 1982년 “코진스키의 작품 대부분이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폴란드 원전의 표절”이라는 문화예술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의 폭로로 무너져 내렸다. 작가는 “한 번도 자전적 소설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지만, <알록달록 때 묻은 언어(The Painted Words)>라는 제목의 이 기사는 코진스키의 삶 전체를 거짓말로 만들며 그에게 문학적 금치산 선고를 내렸다.

이제 이 소설은 불우했던 작가의 일대기가 아닌, 동유럽 민속설화를 차용해 사악하고 가혹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존재조건을 상징한 비유로 읽힌다. 궁지에 몰려서야 더 넓은 독해의 자장을 갖게 된 작가는 불행한 걸까, 행복한 걸까.

1980년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는 이 책은 내용이 잔인한 데다 레닌을 찬양한 대목이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삭제 및 배포 금지됐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됐다.(박선영 기자)

06. 11. 15.

P.S. 아래는 러시아어본의 표지이다. '페인트로 얼룩진 새'를 의역하자면 '동정 없는 세상'쯤이 될 거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1-15 20:12   좋아요 0 | URL
맙소사 이거 초등학교때 읽어었는데 그때는 무지개 빛 까마귀라고 나왔었지요 ^^

로쟈 2006-11-16 10:43   좋아요 0 | URL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좀 '냉혹한' 이야기였을 거 같은데요.^^
 

한국일보의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코너에서 '헨리 조지'편을 읽었다. 미국의 저명한 이 사회사상가가 인터뷰에 등장하게 된 건 최근 국가적 이슈가 되고 있는 부동산 정책(실패) 때문이겠다. 필자의 순발력을 높이 살 수밖에 없는데, 비록 대담이라기보다는 '독백'에 가깝지만(헨리 조지가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누구인지?) 일독할 만하다. 더불어,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라는 '제3의 길'(?)에 대해서 한번 검토해봄 직하다(개헌까지 고려해야 한다면 상당한 '견적'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일보(06. 11. 14)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 도입이 해결책"

이재현(이하 현) 노무현 정권의 부동산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이 부동산 투기는 꼭 잡겠다고 여러 번 단언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돼버렸습니다. 저는, 낙향하면 고향 시골집에 가서 살겠노라는 대통령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편이라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의 실패를 참으로 안타깝게 보고 있습니다.

헨리 조지(이하 조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왕좌왕해서 그런 거야. 8.31 대책 수립시 보유세 실효세율을 선진국형 구조로 만들겠다고 했는데 목표를 도중에 스스로 포기했지, 또 보유세 강화와 함께 패키지로 추진해야 할 거래세 부담 인하를 적절한 시기에 시행하지 못했지, 그래서 종합부동산세, 양도소득세, 취득세 및 등록세에 관한 애초의 정책 목표를 찔끔찔끔 수정玖?상황 악화 때마다 땜질 식으로 처방하다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버렸으니까 말이야. 대통령의 호언장담만 믿고 있던 실수요자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해.

결국 노무현 정권의 책임인 거죠?

조지 그야 그렇지만, 노무현 정권의 책임을 신나게 질타하고 있는 보수언론도 책임이 상당해. 보수언론은 종합부동산세에 대해 ‘세금 폭탄’ 운운하며 참주선동했지. 열린우리당도 여기에 부화뇌동해서 정책을 거꾸로 후퇴시켰고 말야. 10억원짜리 아파트가 14억원으로 올랐다면 양도차익이 4억원이니까 연 1,000만원 종부세를 40년이나 납부할 수 있는 거야. 게다가 6억원 이하 주택에 거주하는 서민이 98.8%야. ‘세금 폭탄’이라는 말은 완전히 ‘생까는’ 얘기지.

노무현 정권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조지 투기적 가수요 세력을 우습게 본 것과, 투기의 광풍이 불어대면 결국 돈이 없는 무주택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간과한 거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투기로 인한 당장의 상황 말고도, 일부 경제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아파트 가격의 3분의 1이 거품이고, 이 거품 요인의 70% 가량이 저금리 때문이고 나머지는 부통산 투기 등 기대심리 때문이라는 데요. 잘못하면 거품이 꺼지면서 한국 경제가 다시 크게 망가질 수도 있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결국 다시 그 피해는 서민들에게만 닥치는 것 아닙니까? 일부에서는 정부는 공급확대만 하고 나머지는 시장원리에 맡기라는 주장이 있고, 또 다른 쪽에서는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마는….

조지 여기서 주의할 것은 땜질식 처방으로는 안 된다는 거야. 노무현 대통령이 당황해서는 안돼. 정책 실패에 분명한 책임이 있는 관료들을 데리고 회의를 해서 조잡한 대책을 내놓아 봐야 별 수가 없어. 현재까지의 실패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봐야지. 내 대안은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자는 거야. 토지보유세는 강화하고 다른 세금은 감면하는 패키지형 세제개혁을 하자는 거지.

130여년 전에 주장하신 바로 그 내용이로군요. 그런데 그것을 하려면….

조지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규정해야지. 부동산 문제는 당리당략이나 정략을 벗어난 문제이고 또 단기적으로 쉽게 해결할 수 없으니까 토지보유세 강화는 10년에서 20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해. 집권 정당이 바뀌더라도 토지공개념에서는 전혀 후퇴가 있을 수 없도록 말이야. 정책의 장기적 목표와 소위 로드맵을 미리 밝히고 국민들의 동의와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지.

당장 현재의 투기 광풍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과제인데요.

조지 그건 어렵지 않아. 버블 세븐 지역 등을 포함해서 투기 수요나 초과 수요가 있는 곳에서는 소유 제한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현재의 청약제도를 확 바꿔서 무주택 실수요자가 집을 갖게 하고, 후분양제 및 원가 공개 등을 통해 분양가격을 낮추되 당첨자의 경우 매각을 할 때 국가나 주택공사에게 반드시 팔게 하면 되는 거야. 보유세는 현재의 계획대로 틀림없이 과세를 해야지. 그리고 임대소득은 과세를 강화하고 임대소득의 세원은 국세청이 철저히 추적, 관리해야지. 그러면서 임대주택 중심으로 주택 공급을 서서히 확대해나가면 투기 광풍은 잡히게 돼 있어. 이미 싱가포르 등에서 하고 있는 건데 왜 우리라고 못하겠나? 부동산 문제는 전 국민적 의지가 있으니까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장기적으로 ‘시장친화적인 토지공개념’을 헌법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합의해나가면 되는 거야.

저야 선생님 주장에 찬성이지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프로젝트를 현재의 정치 국면에서 어떻게 실현시키는가가 문제겠군요.

조지 바로 그걸 하라고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정무직 공무원에게 각종 특권과 월급을 국민이 주고 있는 거야. 정책으로 승부하려 하지 않고 정계개편 따위의 조잡한 정치공학적 수작으로 집권 연장을 꾀하고 있는 정당이 있다면 국민들이 선거에서 혼내면 돼.

네, 그렇군요. 그런데, 선생님 혹시 환생하셔서, 토지공개념을 중심으로 한 개헌을 공약으로 걸고 내년 대선에 출마하실 수는 없나요?

조지 허허…, 그건 정치인들이 할 일이지. 난 미국 사람이니까 북미간 직접 대화에만 신경 쓸 거라네. 그럼 또 보세.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

미국의 경제학자, 사회사상가, 사회운동가. 1879년에 출간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은 처음에는 출판사의 거부로 자비 출판했으나 그 후 폭발적인 주목을 받으며 수백만 권이 팔려 19세기 말까지는 영어로 쓰인 논픽션 분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보급됐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영세 출판업자인 아버지와 전직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열두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13세 때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세가 기울어 중퇴하고 갖가지 직업에 종사하다 16세 때 선원이 되기도 했고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사금을 캐기도 했다. 인쇄공으로 일하다 성년이 되자 즉시 인쇄노동조합에 가입했고 일간지 인쇄부서에서 일하며 간간히 글을 쓰기도 했다. 1865년 링컨 대통령 피살 소식에 격분해 기고한 글이 신문 편집인의 주목을 받아 보수를 받는 기자가 됐으며 그 뒤로 신문사 특파원, 편집인 등을 지냈다. <진보와 빈곤>의 성공 후에 그는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여러 나라를 다니며 강연을 했고, 1886년에는 뉴욕시장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897년에 재출마했으나 투표일을 4일 남기고 사망했다. <진보와 빈곤>의 한국어 완역본은 1997년에 출간됐다(김윤상 역, 비봉출판사).



헨리 조지의 사상 중 오늘날 받아들여지는 합리적 핵심은 “노동 생산물의 경우 개인에게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만 토지는 사유화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번영하는 뉴욕에서 극도의 사치와 지독한 빈곤이 공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진보 속에서 빈곤이 존재하는 원인을 경제학적으로 찾아내려 애썼다. 그래서 그는, 지대의 폭등이 노동자 빈곤을 낳으므로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지대 전체를 사회화하는 토지가치세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헨리 조지는 토지를 소수의 사람들이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동시에 그는 소득세, 소비세, 각종 기업 관련 조세 등 경제적 노력에 의해 얻는 소득에 대한 과세야말로 사유재산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다른 세금들을 없애고 단일한 토지가치세를 징수하는 것만이 불의를 타파하고 ‘개인의 것은 개인에게, 사회의 것은 사회로’ 돌리는 정의의 도덕법칙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 문제를 분배적 정의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효율성의 차원에서도 깊이 있게 논의했던 것이다. 정부의 간섭과 과세를 혐오하면서 시장 만능주의를 설파하는 우파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조차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에 대해서는 ‘가장 덜 나쁜 세금’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더 나아가 헨리 조지는 토지 가치에 대한 기대가 소득 분배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바로 그 기대를 불황의 원인으로 설명했는데 이는 케인즈 경제학이 나오기 한참 전에 이뤄진 아주 획기적인 이론적 설명이었다. 형평과 효율을 함께 충족시키려는 헨리 조지의 토지가치세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고 있는 사람들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정통파 조지주의자(Georgist)들인데 이들은 헨리 조지의 이론이 주류 신고전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대체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적 패러다임이라고 보고 있으며, 자신들의 경제학을 Geonomics로 부른다. 여기서 'Geo'란 바로 지구란 말에서의 ‘지(地)’를 뜻하는 것이기도 해서 헨리 조지의 이론이 갖는 생태학적 함의를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온건파 조지주의자들은 단일한 토지가치세만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보고 토지가치세를 우선적으로 징수하되 다른 조세도 복수적으로 징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제학자들 중에서 헨리 조지의 이론을 선구적으로 받아들여 연구한 그룹은 김윤상, 이재율, 전강수, 이정우 교수 등과 같은 대구 지역 경제학자들이다. 이정우 교수는 참여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내면서 개혁적 경제정책을 수립ㆍ추진하다가 안팎의 압력으로 인해 중도하차한 것으로 보도됐다.

06. 11. 14.

 

 

 

 

P.S. 헨리 조지의 주저인 <진보와 빈곤>(비봉출판사, 1998)은 뒤늦게/진작에 번역돼 있다(알라딘에 이미지는 뜨지 않지만). 개인적으론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건 '토지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기 위해서였다. 흔히 쳥년시절 카츄사의 정절을 유린한 귀족 네흘류도프가 중년의 배심원으로 나선 법정에서 살인혐의까지 뒤집쓴 창녀 카추샤를 다시 만나면서 참회와 부활의 길을 걷게 된다는 줄거리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작품의 상당 부분은 토지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애쓰는 '지주' 네흘류도프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비록 지주계급에 대한 의심 때문에 농민들은 그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이때 톨스토이가 크게 감화를 받아서 참조한 것이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었던 것. 그러니, (비단 현재의 부동산 정책에 대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이 아니라) <부활>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진보와 빈곤>은 참조해둘 만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iosculp 2006-11-14 23:33   좋아요 0 | URL
이 대담글에도 두가지 빠졌군요. 교유문제와 토지보상비로 인한 지가상승.
친척어른이 건축하시는 분인데 2년전부터 경기도 어디를 다녀도 길가는 다 평당 천이 넘는다고 사서 건축할만한 땅이 없다는 애기를 하셨는데 이런게 집값과 분양가 상승의 기본적인 요인인데가 신도시가 평준화없어지면서 강남으로 모이는것이 수요의 촉발이라고 아줌마들 사이에서는 애기하죠.
제가 사는곳이 안양인데 여기 중학교중 이름난 중학교가 있습니다. 며칠전 들은 애기로는 옆 의왕시 학군에서 초딩 6학년이 30명이 조금 넘는데 지금 남았는 애들은 10명조금넘게. 나머지는 전학가거나 아니면 주소 다 옮겨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중학교에서는 이번에 특목고로 180명인가 써서 거의 다 가고요. 안양은 고등학교가 근거리 배정이 아니라 무작위추첨이라 집옆에 학교가 있어도 못갈가능성이 있어 돈있으면 근거리 배정인 강남으로 가고 아니면 중학교때 특목고로 가거든요.
제 친구나 아는 사람들 대치동으로 지금 12억대의 30평 아파트로 이사가는 이유도 교육인데. 물론 돈 더많은 사람들은 투자용을 사놓겠지만.
그리고 지금 돈이 있는 사람도 투자해서 돈버는것보다 서류작성해서 집 사고팔면 투자이익보다 더 나오는 상황인데 여전히 부동산 자체에서 공개념이니 뭐니 하면서 해결하려는것 보면 이건 아닌것 같은데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6-11-14 23:51   좋아요 0 | URL
교육문제가 부동산과 밀접하게 연루돼 있는 건 한국적인 특수성이 아닐까요. 헨리 조지의 일반론으로 카바되지 않는. 그 둘 간의 접점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사실 토지에 상한선을 두자는 주장은 연암 박지원의 글에도 나온다고 하니까 '남의 얘기'만은 아니고,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