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신문에 실릴 러시아 관련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에서는 어제까지 '백만장자 박람회'가 열렸던 모양인데 그에 관한 것이다(러시아의 부자들에 관해서는 언젠가 따로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언젠가 루카치는 "최악의 공산주의도 최상의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호언한 바 있지만 그 '최악의 공산주의'를 벗어던진 러시아는 간혹 '최악의 자본주의'로 곧장 돌진해가는 듯한 인상을 던져준다. 과연 "최악의 자본주의도 최상의(지상낙원의) 공산주의보다는 낫다"는 걸 입증해주려는 것인지...    

한겨레(06. 11. 01) 갑부 돈냄새에 코막은 ‘레닌들’

4200만원짜리 향수, 17억원짜리 부가티 스포츠카, 19억원짜리 소형 헬리콥터, 235억원짜리 파나마 섬….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0일(현지 시각) 막을 내린 ‘백만장자 박람회’ 품목이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는 이 박람회에서 4만명의 러시아 갑부들이 7200억원 어치를 거래했다고 31일 보도했다. 이 화려한 백만장자 박람회 이면에는 러시아의 ‘두 얼굴’이 숨어 있다.

박람회의 주고객은 이른바 ‘올리가르히야’(과두재벌)와 ‘노비예 루스키예’(신흥부자). 지난 91년 옛소련 해체 당시 석유·광산·국유기업 등을 헐값에 사들여 떼돈을 챙긴 엘리트 계층이다. 지난해 3월 발간된 <포브스>를 보면, 러시아에서 약 10억원 이상 현금자산을 보유한 재력가가 8만8천명에 이른다. 한 공산당원은 28일치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기생충 같은 박람회 참가자들을 모두 총으로 쏴버려야 한다”며 “정직하게 돈을 번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첫번째 얼굴이다.

백만장자들의 돈 자랑을 뒷받침하는 것은 가파른 경제성장이다. 대외무역의 68%가 석유·가스 무역인 러시아는 고유가를 등에 업고 2000~2005년 연평균 6.8%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기록했다. 한 패션작가는 “박람회에서 다이아몬드를 걸친 사람들이 몇 년 전까지 화장지를 배급받으려고 줄을 섰던 것을 생각하면 우습다”고 말했다.

가파른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고통받는 빈곤층은 러시아의 또다른 얼굴이다. <로이터통신>은 30일 “러시아 인구의 약 20%가 빈곤선 이하에 산다”며 “박람회는 연간 소득으로 5천달러를 버는 대다수 러시아인들의 삶과는 극명하게 달랐다”고 전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이재영 부연구위원(모스크바대 경제학 박사)은 “이번 박람회는 초기 자본주의의 천박한 소비행태이자, 성장하고 있는 러시아 경제의 여유있는 자기과시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김순배 기자)

06.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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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01 0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01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다시 안 읽어보고 잠시 딴짓을 했더니 오타들이 있었군요(흔한 일이지만).^^ 대학원에 간다고 했던가요? 청출어람, 일취월장하기를!..

기인 2006-11-01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효. 언제 러시아/소련이 공산주의를 하기는 했나요 뭐;; 어쨌든 시급 300원인 저로서는 쩝.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에 대한 서평을 하나 옮겨온다. 필자는 박정수(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씨이며, 지젝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 2004)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 2005)의 역자이기도 하다. 그런 전후 사정을 고려하면 서평은 지젝에 대한 얼마간의 관심과 경탄을 담고 있을 듯하지만, 정반대이다. 서평자는 정말로(!)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며 그의 책들을 쓰레기 정도로 폄하하고 있다(서평 대상에 대한 혐오에 있어서 아마도 강유원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 대한 서평 이후에 최고 수준을 자랑하지 않나 싶다).

 

 

 

 

안 그래도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쓸 일이 있어서 더디게 읽고 있던 참이라 본격적인 서평이 씌어진 것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읽어보니 책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는 서평이라(나는 서평자가 책을 읽어본 건지 그냥 불만스레 뒤적거려본 건지 의심이 간다) 그 반가움은 곧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취향은 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걸 논리로 포장하는 일은 보기에 흉하다. 어차피 책의 내용과는 무관한 서평이기에 길게 다룰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참고자료로서만 보존해둔다. <혁명이 다가온다>에 대해서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자세한 읽기를 올려놓도록 하겠다.

컬쳐뉴스(06. 10. 26) 레닌은 어디서 반복되어야 하는가? 

1995년 『삐딱하게 보기』가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젝의 이름은 자크 라캉이라는 이름 뒤에 붙어 있었다. 여전히 ‘근간 예정’인 라캉의 『에크리』와 『세미나』들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알고는 싶은데 도대체 알 수 없는 개념 투성이의 낯선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그때 할리우드 영화와 일상문화를 통해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을 간명하게 설명해낸 『삐딱하게 보기』는 목마른 논을 적시는 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철학, 정치학, 사회학, 문학, 영화 비평 전공자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름이 되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라캉이라는 이름과 분리되어 슬로베니아학파라는 독자적인 학파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갔고 매년 한두 권씩 출판되는 번역서마다 성실하게 오역 교정까지 해주는 매니아들을 거쳐 대학담론으로까지 진입해 들어갔다(*아마도 나는 '번역서마다 성실하게 오역 교정까지 해주는 매니아들'의 주요 멤버인 듯하다. 다른 멤버들과 단합대회라고 가져야겠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꽂이에 읽다가 만 번역서들이 한 두 권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서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지젝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자꾸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그러니까 서평자가 가장 문제삼고 있는 건 지젝의 자기-표절이다. 이 책의 내용이 저 책에 또 실리고 한다는 것).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단적인 예로 13장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2판 서문 중 ‘공제의 정치는 존재하는가’와 거의 같다. 『혁명이…』와 『그들이…』의 2판 서문이 같은 해(2002년)에 쓰여진 걸 보면 똑같은 원고를 가지고 두 번 써먹었다는 얘기가 된다(*같은 단락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혁명이>가 <그들이>보다 2배 이상 길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선임자의 논문 표절 및 이중 등록 사건에 적용된 학자의 윤리를 지젝의 자기-표절에도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다들 모른 척 하는 건지 별 문제 없다는 건지 이 점을 꾸짖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지젝에 관한 연구서들이 다 하고 있는 지적이다). ‘독창성’이라는 케케묵은 근대적 기준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의 ‘혼성모방’ 작업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나마 잘 팔리고 있는 철학 상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느 쪽이든 이 침묵의 카르텔은 옳지 않다(*그러니까 한 책에 인용한 사례나 주장은 다른 책에서는 절대로 이용하면 안된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그의 사유를 틀 짓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크스의 『자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라캉의 『에크리』와 그의 책은 분명 ‘급’이 다르다. 이들의 책은 백년이 더 지나도 팔리겠지만(*왜 '읽히겠지만'이 아니라 '팔리겠지만'인가? 그리고 라캉의 <에크리>는 어디에서 팔린다는 것인가?) 지젝의 책은 그렇지 않다. 지젝과 사유 노선이 다른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나 들뢰즈․가따리의 『안티 외디푸스』가 백년은 몰라도 반세기 후에도 소장될지언정 지젝의 책도 그럴까?(*거의 관심법 수준인데, 다 맞다고 치자. 한데, <정신현상학>과 <자본> 정도가 아니면 다 쓰레기이고 소장가치가 없는 책들인가? 서평자의 단촐한 서가가 부럽다.)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그의 이름은 아무런 인식론적 사건도, 사유방식도 지시하지 못한다. 헤겔, 마르크스, 라캉, 데리다, 들뢰즈․가따리는 그 이름만으로 그들의 책에 담긴 지식의 효과를 지시하지만 ‘지젝’이란 이름은 그렇지 않다.(*물론 지젝의 독창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도 라캉을 선불교적 스승의 자리에서 현실 정치의 장으로 옮겨놓은 지젝에게 박수를 아낄 필요는 없다"는 서평자의 태도는 어디로 증발한 것인가? 재작년과 올해는 또 사정이 다른 건가? 하긴 대추리 사태가 재작년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물론, 오늘날 쇼호스트는 이미 생산된 가치를 이전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며, 지젝도 그렇다. 유명한 쇼호스트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듯이,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 라캉의 구조분석을 조합하여 후기 자본주의 대중문화와 정치지형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는 자기만의 분석틀을 개발했다(*나는 더 나간다고 보지만, 이것만으로도 의의는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지젝의 책은 철학서라기보다는 평론집에 가깝다. 자신의 분석틀을 개발한 이후 그가 하는 일은 분석 대상을 수집하는 일이다(*서평자는 지젝의 사생활까지 꿰뚫고 있다). 매순간 촉각을 곤두세우며 각국의 변기구조나 음담패설 및 농담을 수집하고, 시간 날 때마다 할리우드 TV 프로, 영화나 고급 오페라, 소설, 종교, 철학, 정치적 이슈를 자신의 분석 테이블에 올려놓고 해부해 놓았다가 특정한 기획 하에 묶어 낸다. 『혁명이 다가온다』의 기획은 ‘레닌’이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레닌과 소비에트 혁명에 집중된 새로운 연구성과는 없다(*이 대목에선 서평자의 학식이 부러우면서 러시아문학 전공자라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나는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 대해 이 책에서 다시 배워야 했다). 대신 이전의 분석들 중에서 레닌과 혁명, 정치학에 관련된 내용을 골라 약간의 수정과 편집 작업을 가하여 묶어 놓은 것이다.

이런 평론집의 가치는 그 기획의 적절함에 있다. 만약 ‘레닌의 반복’이라는 이 책의 기획이 적절하다면 그 결과는 레닌 전집의 재출간이나 판매 부수 증가로 나타날 것이고, 나아가 레닌이 일으킨 사건, 즉 혁명의 반복을 위한 실천 행위로 이어질 것이다(*아무튼 기이하다. 철학서는 안 팔려도 그만이지만, 평론집은 그 실제적 효과에 의해서 입증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책의 효과가 이 책 자체로 그친다면, 라캉과 지젝의 분석적 성과로 그친다면, 지젝은 자신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포스트-맑시스트들의 ‘혁명 없는 혁명’, 후기 자본주의 문화 시장에 흡수되어 버린 ‘혁명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비난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심지어 레닌까지 정신분석가의 음울한 분석 소파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죽음을 치렀다는 비판과 함께(*레닌을 들먹이려면 레닌 전집의 재출간까지도 책임져야 하는가? 러시아에서도 나오지 않는?).

그렇다면 ‘레닌’이라는 기획은 적절한가? 여기서 지젝은 자신의 내기를 걸고 있다.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그들과의 단호한 단절, 진화론적 역사주의와 다원론적 민주주의에 물든 사이비 혁명가들, 그 옛날의 사민주의자들과 오늘날의 좌파 자유주의자들과의 중단 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지젝의 이 내기를 그저 또 하나의 (정신)분석적 사례로 간주한다면, 그건 오독이거나 자기기만이다(*이제 책에 대한 염려에서 독자에 대한 염려로 관심이 확장된다. 그래서 서평자는 '지젝의 내기'를 접수했다는 것인가, 오독했다는 것인가?).

물론 이런 무의식적 오독에도 분석되어야 할 욕망은 있다. ‘나는 지젝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걸 잘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혁명의 내기가 실재 현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건 믿지 않아.)’라는 물신주의적 부인 속에서 지젝의 평론을 ‘철학’으로 승화시키거나 독창적인 ‘정신분석가’로 재성화(再性化) 시키는 지젝 매니아들이 있다면, 그들의 욕망은 후기 자본주의의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뿐이다(*문제는 '지젝 매니아들'인가? 지젝의 '철학'과 '독창적인 정신분석' 운운하는?).

이 책이 지젝의 정치적 내기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의 정치적 내기 속에서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문제는 무엇인가? 지젝의 '정치적 내기'인가? 아니면 그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물신주의적 부인'인가? 이하는 지젝과 무관한 서평자의 한국사회론이다. 서평자의 단골 레퍼토리인지?). 한국 사회는 지금 전체주의적 주변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주의적 중심부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의 두 광고가 이를 대변한다. 모 카드회사의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라는 CM송과 국가홍보처의 “아버지, 이것이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한민국입니다”의 멘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이다. 항상 때리는 아버지이거나 부재하는 아버지만 있었지 아들에게 향락의 교훈을 전해주고 자랑스런 국민국가의 상징적 대표로 호명된 아버지는 없었다.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외설적 명령을 노래하고 ‘자랑스러워라’ 라는 국민적 아버지의 자아-이상을 내면화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국민국가를 완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는 해소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드러내고 있다. 양극화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직은 불명확한 이 성공은 한미 FTA 체결 이후에는 훨씬 더 가시화될 것이다. 현 정부가 끊임없이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은 우리가 빼앗긴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식민주의 종속성의 망령을 떨쳐버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인데, 그 ‘우리의 욕망’ 속에는 미국의 자본가와 함께 한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자 하는 한국 자본가 계급의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계급적 분열을 은폐하는 주체 호명이다. 이 민족주의적 주체의 분열성은 평택 주한 미군기지 조성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을 향해 기지이전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수도에서 미군기지를 없애기)를 위해서라고 호소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대추리 주민의 삶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돌려주겠다는 전시작통권을 한사코 돌려받지 않으려는 식민주의적 욕망이 숨어 있다(*대추리를 짓밟은 것도 전시작통권을 돌려받겠다는 것도 현정부이다. '식민주의적 욕망'은 누구의 것인가?).

한미 FTA에 반대하는 조직된 노동자 계급, 신자유주의 경영 효율성을 위해 항시적인 해고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선진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면서 만성적인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 세계화된 노동 시장에서 좀더 고가의 임금을 위해 들어온 이주노동자들과 혼혈가족들, 자본주의적 개발 욕망에 의해 파괴된 새만금의 갯생명들과 어민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서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논리를 한꺼번에 정지시키며 ‘정신병’적 선택을 감행하고 있는 대추리의 주민들, 이들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혁명이 다가온다』가 기획한 ‘레닌의 반복’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이 반문은 지젝을 향한 것인가? 아니면 출판기획자를 향한 것인가? 혹은 독자들? 이러한 태도에서 소위 좌파연하는 냉소주의를 읽어내는 건 나의 오독인가?) 

06.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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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phqa 2006-10-31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서재를 보러 온 지는 꽤 됐지만 글은 처음 남기네요. 대학에서 강의하신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개인적 프로필은 비공개인가요? 문학을 전공하신 분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문학도거든요.^^ 그건 그렇고 이곳에 페이퍼에 쓰시는 글들만 모아도 책한권이 될 것 같은데, 혹시 '책'을 낼 계획은 없으신가요? 아님 혹시 벌써 내신 책이 있으신지?,,^^

로쟈 2006-10-31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밍아웃하셨군요.^^ 알라딘 서재는 개인 프로필 항목이 따로 없기도 하고 그냥 이곳은 '로쟈의 서재'입니다(간혹 면밀히 관찰하시는 분들은 제 신상을 알아내기도 하더군요^^). '책'이야 아직 내주겠다는 곳도 없지만, 낼 만한 형편의 글들도 많지는 않습니다. 온라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들이 많아서요...

Ritournelle 2006-10-31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수유+너머에서 세미나를 같이 해서 정수형을 조금 아는데 형이 지젝에 대한 조금은 가혹한 서평을 쓸 줄은 몰랐네요. 형은 지젝에 관한 개론서도 번역한 이력이 있어서 그런지 약간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로쟈님의 지젝에 대한 방어는 염두해 두겠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한 번 지젝을 거쳐가야 하겠다는 생각은 있지만 시간이 나지 않았거든요. 찬찬히 지젝의 저서들을 탐독해 보아야 겠습니다. 그럼 날씨가 추워지는데 건강하시고요.

자꾸때리다 2006-10-31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냉소적이군요... 어떤 분들도 지젝의 책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만 읽으면 된다고들 하던데... 이렇게까지 냉소적인 글이 나오다니... 그래도 현재 한국 지식계층에서 가장 인기있는 학자에 대해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는 용기는 참...

로쟈 2006-10-31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적인(?) '인기'가 정당한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겠지만 부당한 폄하의 논거가 될 수도 없겠지요. 지젝을 좋아하거나 미워할 수는 있습니다(마치 연예인처럼). 하지만, 그가 '철학자'도 아니며 그의 책 전체가 '소장할 가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지젝에 대해서보다는 발언자 자신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의미에서 무의미한) 발언입니다. 서평자가 50년은 갈 거라고 한 데리다에 대해서도 평가절하하는 이들이 많고, 일례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고자 했지만 교수진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불명예'는 데리다의 것이 아닙니다...

sommer 2006-11-0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을 향한 비판의 공통점은 그를 향해 쏘는 화살(형식주의)이 곧바로 그네들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겁니다. 지젝의 헤겔 해석을 '칸트적 형식주의'라고 비판하는 포스트 모더니스트로 분류되는 버틀러에게 지젝이 '역사주의자'로 명명하는 것처럼, 지젝이 취하는 끝없는 '재명명'의 전략-한 번은 기호와 연관되는 명명으로 두 번째는 청자 혹은 독자들의 반응과 관련한 명명으로서-에 그의 의도대로 꼭 그렇게 반응하는 형국인 것이지요. 지젝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언급에 대해 호들갑 떨던 그들에게 오히려 자신을 '스탈린주의자'라고 선언했다던 일화처럼 말이지요.
'지젝이라는 유령이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깽돌이 2006-11-02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옮긴이의 글 보면,오늘날 정신분석학의 치료는 쇠퇴하고 무속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는데,좀 의아해했습니다.한국에서 임상 정신분석은 활황인적이 없는걸로 알고 있어서요.인문학적인 정신분석 이론활용이야 만발했겠지만.국제정신분석학회 한국인회원 이제 달랑 3명인데말이죠 .제가 개인적으로 분석적 치료를 받고 있어서 이런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로쟈님도 건필하시고 유익한 글 많이 올려주세요.

로쟈 2006-11-02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uture님/ 마지막 문구는 저로 리뷰에서 써먹은 겁니다.^^
깽돌이님/ 그렇죠, '쇠퇴'할 건덕지도 없었죠. 임상으로서의 정신분석에 대해서는 이전에 라캉 관련 페이퍼에 댓글들이 많이 달린 적도 있습니다...

로쟈 2006-11-02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감은 코앞인데, 다른 원고도 밀려 있어서 죽을 맛입니다...

사량 2006-11-04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이른바 '다산성'의 저자들은 자기표절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주장의 되풀이를 피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김윤식 교수의 글들을 보면 지젝은 명함도 못 내밀지 않을까요. ;;; 지젝에게 잘 팔리는 지적 상품이라는 레테르가 붙는다면, 아마도 그가 글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로쟈 2006-11-04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어령 선생만 해도 200여권의 저서 중에서 중복되지 않는 것만 추리면 50여권쯤 된다더군요. 1년에 한권꼴. 이런 걸 고의적인 자기표절로 간주하는 태도는 너무 강파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젝의 어떤 대목을 다른 맥락에서 다시 반복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에도 계속해서 덧붙이면서 확장해나가곤 합니다. <혁명의 다가온다>도 그래서 독어본과 영어본에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개정판 서문은 100페이지씩 다시 쓰기도 하구요. 제가 높이 평가하는 건 그 열정입니다(그걸 서평자는 '기획'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마누스 2007-01-06 0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책을 번역한 적도 있는 서평자가 왜 이런 '쓰레기'를 썼는지 의구심이 드는군요.
 

떡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인터넷신문들을 뒤적거려보다가 배창호 감독의 17번째 영화(라는) <길>에 대한 인터뷰와 소개 기사를 읽었다. 이번주 개봉 예정작이다. 80년대 최고 흥행감독의 한 사람이 지금은 '독립영화' 감독이 돼버린 현실 자체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준다. 그 <길>은 주연까지 맡은 감독 자신의 '길'이기도 한 것처럼 보인다.  

 

 

 

 

기억에 내가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본 배감독의 영화는 <러브 스토리>(1996)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러브 스토리>일 뻔했다. 오래전 일인데, 종로에 혼자 나갔다가(영화를 보러 혼자 다니곤 했다. 1주일에 서너 편씩 보던 때이다) 무슨 맘에서인지 당시 '조용히' 개봉중이던 <러브 스토리>를 한번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걸음을 지금은 사라진 명보아트홀로 옮겼다(명보아트홀에서 나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와 <동사서독>을 보았다). 극장 주변이 아주 한가했는데, 상영시간이 다 되어갈 즈음에 지배인인 듯한 아저씨 다가와서는 사정 얘기를 늘어놓았다. 관객이 나 혼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사기를 돌려봐야 수지도 맞지 않고 하니 환불해주겠다고 했다(영화를 정 보시겠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이란 토를 붙이면서). 아저씨의 푸념, "뭐, 이런 영화를 만들어가지고..."

잠시, 고집을 부려서 영화를 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배감독 부부가 주연한 '러브 스토리'를 기필코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또 '내가 김정일이냐'란 생각도 들어서 여러 사람의 수고를 무릅쓰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에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뜸하게 극장에 걸렸다(이정재 주연의 <흑수선> 정도가 약간 '요란하게' 개봉했던 걸 제외하면). <젊은 남자>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던 배감독이 너무 '자기 생각'만 했던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필모그래피를 다시 확인해보니까 내가 본 그의 영화는 12편 가량이고 그 중 절반 이상은 극장에서 보았다(<황진이> 같은 건 고등학교 때 단체관람으로 보았다. 최근의 '황진이' 열풍이 감독으로선 의아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고 뒤늦게라도 흥행할 영화는 물론 아니었다. 그냥 배창호의 '장미희 숭배'가 만들어낸 판타지 영화였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꼽자면, <꼬방동네 사람들>, <기쁜 우리 젊은 날>, <꿈> 등이다.  스틸사진으로 봐서는 어쩌면 <길>도 그 리스트에 올릴 수 있을 듯하다(특히 눈길이 마음에 든다). 한겨레의 기사와 감독 정보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0. 31) 20년 동안 곰삭여온 ‘길’로 나섭니다

배창호(53) 감독이 <흑수선> 뒤 5년 만에 17번째 영화 <길>을 관객에게 선보이는 데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2003년 1월부터 여덟달 동안 촬영은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의 영화 <정> 제작 때 프로듀서를 맡았던 강충구 이산프로덕션 대표가 고생길에 뛰어들어 제작비 5억원을 끌어모았다. 지난 16일 서울 세종로에서 만난 배 감독은 당시 속내를 이렇게 기억했다. “갑갑했죠. 제작진에게 미안해서 난 중간에 그만 둬도 상관 없다는 말도 했어요.” 교통비 정도 받고도 방방곡곡을 함께 누빈 제작진 25명에게 마음 빚을 졌다. 하지만 기다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4년 완성했지만 배급사를 찾지 못했다. “인연이 없어서였겠죠….” 결국 상업적이지 않더라도 작품성을 갖춘 영화를 알려온 배급사 스폰지와 연이 닿았다.

그렇다고 배 감독이 주인공 태석역을 맡은 까닭이 팍팍한 제작 여건 때문만은 아니다. “<개그맨> <러브스토리>에 이어 8~9년에 한번꼴로 주인공을 맡은 셈이내요. 태석을 가장 잘 이해할 만한 사람이 저였어요.” 그만큼 <길>은 그 안에서 오래 곰삭은 영화다. “20년 동안 길에 대한 영화를 생각했죠. 인간의 방랑성,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아낼 수 있는 길은 감독들에겐 보편적인 주제죠.” 그는 <고래사냥> 1·2편과 <안녕하세요, 하나님>등 로드무비로 여러 편 찍어 여정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이번 길에 대한 구상에 구체적인 살을 입힌 건 우리나라 장인들에 대한 책이었다. “특히 대장장이가 모루를 고통처럼 짊어지고 가는 모습이 좋았어요. 영화 속에서 쌀로만 엿을 만들거라는 할머니의 대사 등은 실제 책 속 모델에서 따온 거예요.” 영화 속 사람들은 고집스럽우면서도 유순하다. 전형적인 데가 있다. “저는 태석을 보며 아버지가 떠올랐어요. 어떤 분은 어머니가 생각났다고 해요.” 누구 하나 제대로 모질지 못하다. “악한 사람도 깊숙히 보면 방황하게 된 원인을 안고 있어요. 상처는 대물림 되고 그걸 끊을 수 있는 게 용서인 것 같아요.”

영화 속 길도 사람처럼 푸근하고 유장하다. 그 길을 발품 팔고 <한국의 오지 마을>이란 책의 도움도 받아 찾아냈다. 경북 왜관 낙산에는 1970년대 풍경에 어울릴 법한 이발소가 있었다. 강원도 삼척 환선굴에 있는 너와집엔 아직도 사람이 살고 있다. “제작비 때문에 장날 모습을 충분히 복원하지 못한 것이 아쉬워요.”

길에서건 사람에서건 끌어올린 친근하고 질박한 감수성을 그는 “원형질” 또는 “한국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꼬방동네 사람들>(1982년)로 데뷔해 <고래사냥> <깊고 푸른밤> <기쁜 우리 젊은 날> 등 1980년대 흥행작들을 줄줄이 내놓은 그가 <꿈>(1990년) <정>(1999년) 이후 붙들고 있는 화두이기도 하다. 여기엔 옛 것에 대한 향수가 배어 있다. “깊은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요. 디지털 문화는 차가워서 그런 느낌이 얇죠.” 그래서 1970년대와 50년대로 거슬로 올라가 <모정> 등 영화 포스터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와요>까지 담았다. “황톳길도 언제 없어질지 모르니 기록해 둬야죠.”

그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아내려 그는 태석만큼이나 고집스런 길을 가고 있다. “독립영화가 곧 돈 적게 들이고 재미 없는 영화는 아니죠. 자본으로부터 창작의 정신을 지키는 영화를 말하는 거에요. 자본이 주인공이 되면 영화의 개성이 없어져요. 1천만명이 좋아하는 영화뿐만 아니라 1만명을 위한 영화도 나와야죠.”(김소민 기자)

떠돌이 대장장이 발길따라 외로움과 사랑이 ‘터벅터벅’

<길>(감독 배창호)의 줄거리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김동인의 소설 <배따라기> 등을 떠올리게 한다. 태석(배창호)은 20년 넘게 장터를 떠도는 대장장이다. 그에겐 그가 짊어진 모루처럼 무거운 상처가 있다. 둘도 없는 친구인 득수(권범택) 탓에 집을 잃고 옥고를 치렀다. 깊이 사랑했던 아내 곁도 떠나야 했다. 오해와 분노에 떠밀려 장터를 떠돌던 태석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간다는 득수의 딸 신영(강기화)을 우연히 만나 함께 득수가 숨을 거둔 마을로 떠난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의 힘이 묵직하다. 봄꽃 흐드러진 지리산 기슭 구례 산동 산수유 마을, 광활한 만경평야, 삼척 환선굴에 우뚝 솟은 산, 강원도 임계의 외딴 여인숙…. 슬프도록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영평 바다 그물처럼 얽힌 내 사랑아~” 따위 구성진 노랫가락이 얹힌다. 이 리듬을 타고 이야기는 아련한 자장가, 때론 처연한 곡소리가 돼 감정의 밑자락을 울린다.

무엇보다 고집스럽도록 선량한 보통 사람들을 향한 눅진한 애정이 묻어난다. 꼼꼼하게 복원한 1950년대와 70년대 풍경 속에 냉차 파는 할머니와 그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수박장수가 있다. 엿 장수는 곧 죽어도 쌀로 만들겠다며 고집을 피우고, 태석이는 “대장장이를 돈 벌자고 하간디”라며 풀무질에만 매달린다. 친구에게 집문서도 아낌없이 내주는 태석은 말할 것도 없이 딸 버리고 친구도 배신한 악인 득수에게도 이해할 만한 그만의 이유가 있다. <길>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 밴 한과 용서를, 외로운 방랑성과 끈질긴 사랑을 노래한다. 허탈한 절망과 허황된 희망 사이, 절묘한 균형을 맞춘 결말은 여운이 길다.(김소민 기자)

배창호

대표작 <깊고 푸른 밤> <황진이> <고래사냥2>

1953년 대구에서 태어났으나 일찌감치 서울로 이사,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어머니 덕에 어려서부터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다. 서울 교대 부속국민학교와 서울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영화를 좋아했고, 71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하면서 연극반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오태석(연극인), 신완수(방송인) 등이 같이 활동하던 동료이며, 대학 3학년 때부터 자작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다니던 시절인 77년 이장호 감독을 알게 되면서 영화의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78년에는 아프리카 케냐로 발령받아 출국했으나 이장호 감독의 현장 복귀 소식을 듣고 귀국해 충무로에 발을 디뎠으나 80년이 되어서야 <바람불어 좋은 날>(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현장일을 시작했고, 81년 <어둠의 자식들>(이장호 감독) 조감독을 거쳤다. 82년 배창호 감독이 만든 데뷔작은 그의 ‘사부’인 이장호 감독과 암울했던 시대상황의 영향인지 소외받는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회성 드라마 <꼬방동네 사람들>이었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꼬방동네 사람들>에서 시작해 <철인들>(1982), <적도의 꽃>(1983), <고래사냥>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깊고 푸른 밤>(1984), <고래사냥2>(1985)와 <황진이>(1986), <기쁜 우리 젊은 날> <안녕하세요 하나님>(1987), <꿈>(1990), <천국의 계단> (1992)까지, 그후 <젊은 남자>(1995), <러브스토리>(1996)로 나누어진다. 앞 시기의 작품들은 감독으로서의 성취욕과 적당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이 타협이란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불신, 즉 재미없다는 인식을 깨고자 하는 생각”(이효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과 사회 비판적인 분위기에 대한 당시 영화검열을 주관하던 문공부의 폭력적인 외압에 대한 비타협과 비합법·반합법 사이를 오갈 수밖에 없었던 외부적 상황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일관성보다는 작품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인다. 최인호의 신문 연재소설이 원작으로 현대사회의 황폐하고 왜곡된 애정 행각을 그린 <적도의 꽃>, 억압받는 사회현실을 방황하는 청춘에 빗대 이들의 해방감과 인간성 회복에 애정어린 시선을 담은 <고래사냥>, 박완서의 원작소설로 6·25 때 헤어진 자매가 겪는 질곡의 삶을 그린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불법 이민한 한 남자의 아메리칸 드림과 계약 결혼한 교포 이혼녀의 사랑을 감각적이면서도 세련된 영상으로 그린 <깊고 푸른 밤>, <고래사냥>의 흥행성공에 고무받아 만든 속편 <고래사냥2> 등이 전기작에 속한다(두번째 작품 <철인들>은 그가 다니던 현대그룹의 홍보용 영화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작품들은 비록 편차는 있지만 공통적으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에 기초하고 있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황진이>를 분기점으로 형식과 내용의 변화가 나타난다. 먼저 형식면에서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이동화면이 극단적으로 줄어들고 테이크가 길어졌으며, 미장센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영화미학은 <삼국유사>의 조신실화를 배경으로 한 이광수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꿈>에서 극에 달한다. 이렇듯 <황진이> 이후 작품에서 스타일의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것은 “그가 한국 영화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현대영화의 미학을 천착하고 있었고, 또 훨씬 이전부터도 이의 예술적 작용과 성취에 매우 깊은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이효인의 같은 책)”된다.

영화의 주제 역시 이전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사랑이라는 큰 줄기에는 변화가 없지만 “통속적인 애정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만남을 희구하는 긍정의 미학”(이효인의 같은 책)으로 넓어졌다는 점은 달라진 점이다. 또 배창호 감독은 그의 영화에서 비와 어둠, 십자가와 기차소리, 그리고 묵음을 통해 실낙원의 이미지를 구현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작품성과 별 관계없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등장하는 비와 어둠의 이미지는 곧 만남의 미학이라는 배창호의 인생관의 상징이다”(이효인의 같은 책). 빈번하게 등장하는 십자가와 교회 종소리, 기차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 <적도의 꽃>에도 후반부에 기차소리는 끼어들고, <황진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소리를 배제한 장면은 놀라운 효과를 거둔다.

<천국의 계단> 이후 제법 긴 공백 끝에 배창호 감독은 세편을 더 만들었다. 94년에 만들어 95년에야 개봉할 수 있었던 <젊은 남자>와 아내와 감독 자신이 직접 주연으로 열연한 자전영화 <러브스토리>, 독립영화 시스템으로 만든 98년 작 <정>이다. <젊은 남자>는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의 젊은이들을 담겠다는 야심은 강했지만 ‘80년대의 배창호가 90년대의 젊은이들’을 그리는 거리감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고, <러브스토리>는 배창호 감독 특유의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자의식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함께 받았다. 그래도 감각적인 카메라와 배창호 영화 미학은 건재하다는 평가가 많았다.(영화감독사전, 1999)

[필모그라피]

1. 길(2004)
2. 흑수선(2001)

3. 정(1999)

4. 러브 스토리(1996)

5. 젊은 남자(1994)

6. 천국의 계단(1991
)
7. 꿈(1990)

8.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
9. 안녕하셔요 하나님(1987)

10. 황진이(1986)

11. 깊고 푸른 밤(1985)

12. 고래사냥2(1985)

13. 고래사냥(1984)

14.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

15. 적도의 꽃(1982)

16.
철인들(1982)
17. 꼬방동네 사람들(1982)

[수상경력]

1983년 대종상 감독상 <꼬방동네사람들>
1983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 <꼬방동네사람들>
1984년 영평상 감독상 <고래사냥>
1984년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감독상 <적도의 꽃>
1985년 한국연극영화예술상 감독상 <깊고 푸른 밤>
1986년 대종상 감독상 <깊고 푸는 밤>
2000년 이탈리아 우디네이 아시아영화제 최우수 관객상 <정>
2000년 프랑스 베노데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최우수 관객상 <정>

06.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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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31 2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31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배창호 감독이 김기덕식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아이러니컬합니다. 외적 여건을 제쳐놓으면, 김기덕과는 달리 그는 대중적 감각과 지분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걸 놓쳐버리고 배창호식 '실험영화'로 접어든 것 같아요. 좀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있었던 듯한데...
 

얼마전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에 대한 연구 붐이 국내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소위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를 짚어보고 있는 학술동향 기사를 교수신문에서 옮겨온다. 개인적으로 아렌트는 지젝과 함께 지난 2002년인가부터 읽고서 가장 강한 인상을 받은 철학자이다. 그간에 리뷰와 페이퍼들을 꽤 쓰기도 했는데, 한동안은 적요했다. '르네상스'라니까 관심을 되살려볼까도 생각중이다(어차피 갖고 있는 자료만 해도 차고 넘치는 탓에. 한데,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가지 반가운 소식은 올해 안으로 새롭게 나오거나 개정판이 나올 번역서들이 꽤 된다는 사실이다. 지출을 고려하면 반가운 소식도 아니지만 아무려나 아렌트 연구자들이 가장 바지런하다는 인상은 받게 된다.

교수신문(06. 10. 30)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주요 내용들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이한 올해에 아렌트의 삶과 사상을 성찰하는 학술행사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혁명과 폭력의 세기 한 가운데 살다가 타계한지 30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 아렌트는 왜 학계의 ‘우상’이 되고 있는가. 과거의 사상을 현재에 재현시키는 요인은 아렌트의 학문세계에 내재돼 있는가, 아니면 외재하는가. 아렌트 연구자든 애호자든 이런 질문을 스스로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최근 아렌트 연구는 정치학과 철학 영역에 머물지 않고 문학, 역사, 사회학, 심리학, 교육학, 신학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아렌트의 저작들은 출판 당시에도 엄청난 논쟁을 야기했듯이, 최근의 아렌트 연구 역시 복잡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이런 외형적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삶을 ‘타락(왜곡)’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전제하고 논의하고 있다. 이는 전체주의의 타락한 정치를 극복하고 순수한(또는 진정한) 정치를 모색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의도가 연구에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에 따라 최근 연구의 특징적 양상을 중점적으로 고찰한다.

아렌트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분야는 단연 (정치)철학이다. 전체주의의 악을 규명하고자 했던 아렌트의 집착은 이 분야 연구자들에게도 그대로 반영된다. 9·11테러 이후 이데올로기 정치와 테러를 연결시키려는 논문들이 다수 출간되고 있는 것. 아렌트 전기작가인 영 브륄은 ‘전체주의의 기원’을 현재의 세계 상황과 직접적으로 연계시키는 요소로서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으며, 나치의 ‘자연’이데올로기와 스탈린주의의 ‘역사’이데올로기에 이어 오늘날 도덕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도덕’이데올로기의 충돌을 강조하고 있다(*영-브뢸의 책은 아렌트에 관한 가장 자세한 전기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정치적 악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정치행위와 세계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 사랑을 정치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순수한 정치의 근거로 삼고자 한 아렌트의 열망은 신 치바의 논문 ‘사랑과 정치적인 것: 사랑, 우정, 시민권’에 의해 명료하게 해석되고 있다. 아울러, 시작능력을 말살한 전체주의 악에 의한 인간성 상실에 주목해 아렌트의 인권사상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아렌트 정치철학의 국제정치적 확장에 기여하고 있다. 코소보 사태 등을 계기로 아렌트의 인권사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도 다수 있다(*일반적인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캠브리지 컴패니언>(2000)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편자인 다나 빌라는 <아렌트와 하이데거>(교보문고, 2000)의 저자이다).

문학예술 분야에서 아렌트 붐이 일어나고 있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 분야에선 특히 이분법적 구도가 뚜렷하다. 아렌트와 오든의 사상을 조명한 수잔나 영 고트리브의 ‘고통의 영역’은 두 사람의 사상에 나타난 메시아니즘을 부각시켰다. 두 사람은 대재앙을 공동으로 경험했으며 새로운 현상, 즉 전례없는 뿌리상실감을 경험했다. 고트리브는 ‘아렌트의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과 고든의 ‘고뇌의 시대’가 메시아적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 아렌트는 새로운 시작으로서 행위를 역설한 ‘인간의 조건’에서, 오든은 그의 시 ‘깐조네’에서 의지에 내재된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메시아니즘은 정치적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인간적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렌트 연구에 있어서 정치(철학)과 문학을 연계시킨 탁월한 연구다.

아렌트는 정치적 삶의 우연성과 특이성을 강조하기에 구조적 인과론에 집착하는 학문인  사회학과 심리학의 특정 연구경향에 불편함을 드러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전체주의를 연구한 피터 베어는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지적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즉 전례없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즉, 전체주의 연구에 있어서 방법론 문제가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심리학 분야에서 아렌트 연구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빌스키의 연구는 괄목할만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의 행태를 심리학적으로 탁월하게 분석해냈다. 빌스키는 ‘아이히만 재판의 다른 목소리’라는 논문에서 정치적 악에 대한 재판과 관련된 논쟁을 심리학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하고 있다.

교육학에서도 아렌트를 응용해 적절히 수용하고 있는데, 특히 아렌트 사상에서 ‘탄생’의 근본성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적절한 수용이라 할 수 있다(*'탄생'은 'natality'의 역어인 듯하다). 전체주의의 악이 시작능력의 말살이란 점에서 새로운 시작, 탄생은 죽음에 대한 안티테제다. 따라서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는 기초로서 교육은 정치적 악과 투쟁하기 위한 중요한 기초다. 레빈슨은 ‘아렌트 교육사상에서 탄생의 역설’을 제시한다. 교육의 보존기능과 재생기능은 상반되면서도 상호 연계돼있다는 점을 중점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신학분야 역서 선악문제와 관련해 아렌트를 통해 관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버밍햄은 ‘망각의 소용돌이: 근본적 악의 평범성’이란 주제아래 전체주의의 ‘근본적 악’에 내재된 악의 평범성을 지적하고 있다. 매튜 역시 ‘두 가지 판단에 관한 이야기’라는 논문에서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신화를 벗겨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아렌트의 선악이론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역사학 분야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아렌트는 역사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렌트의 저작들은 역사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의존하고 있으며 ‘이야기하기’로서 역사와 ‘시대의 비판적 중재자’로서 역사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케르의 논문 ‘아렌트 우상: 정치평론가로서 한나 아렌트’에서는 정치평론가나 정치철학자보다 시대의 탁월한 비평가로서 아렌트의 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각 학문분야의 특징적 양상을 고려하면, 선과 악, 타락과 순수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대한 전제가 기저에 깔려 있다. 그 어느 측면만을 분석할 때 장점을 고려할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에서 내적 긴장구조를 상정하고 있는 아렌트의 의도는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아렌트의 경우, 타락과 순수, 선과 악을 구분짓는 기준은 시작 능력의 유지와 상실이다. 최근 아렌트 연구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보면, 학문 영역에 관계없이 ‘새로운 시작’ 또는 ‘탄생’이란 범주를 소개함으로써 아렌트의 ‘출생의 철학’을 부각시키고 있다.

아렌트 연구가 현대인의 삶에 주는 의미는 크다고 하겠지만, 아렌트 르네상스의 한 요인으로 정서적 또는 낭만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여성 정치철학자’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아렌트 정치철학을 서예의 필치로 특징화하자면, 섬세한 선과 굵은 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가운데 한 측면만을 집중할 때, 우리는 아렌트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해와 곡해의 양면성이 존재하지만, 최근 경향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의무로 남게 된다.(홍원표 / 한국외대·정치철학)

국내 아렌트 연구 붐 - 번역서 속속 출간 … 불교학으로까지 확대

아렌트 탄생 1백주년을 맞기 전부터 아렌트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상당했다. 연구자들의 숫자는 몇 안되지만 아렌트 주요 저작들은 속속 번역돼 나왔다. 김선욱 숭실대, 홍원표 한국외대, 서유경 경희사이버대 교수 등 정치철학자들을 주요 멤버로 해서 얼마 전에는 ‘한나아렌트연구회’가 본격 출범되기도 했다. 이들이 주축이 되고 정치사상학회와 사회와철학연구회가 뜻을 모아 지난 14일 ‘한나 아렌트와 세계사랑’이라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다.

탄생일인 10월 14일에 맞춰 김선욱 교수가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한길사)을 번역·출간했으며, ‘전체주의의 기원’(이진우 옮김), ‘정신의 삶 2’(김석수 옮김), ‘정신의 삶 3: 칸트정치철학강의’ 등도 곧 번역돼 나온다. 또 ‘공화국의 의지’(김선욱 옮김)는 재번역판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권영빈 옮김)은 개정판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하지만 아렌트 사상은 이들만의 관심사는 아니며 이미 여러 곳으로 뻗쳐나가고 있다. 정치학에선 아렌트의 정치적 입헌주의 뿐만 아니라, 그의 윤리학 및 막스 베버와 비교해 고찰하는 등 연구가 활발하다. 페미니즘, 교육학, 나아가 불교연구자의 응용연구도 주목할만하다. 이은선 세종대 교수(세종대)는 아렌트의 ‘탄생성’과 왕양명의 ‘치량지’의 교육관을 비교해 연구물을 내놓았으며, 김인순 동국대 강사(정치철학)는 논쟁이 많은 아렌트 사상의 페미니즘적 측면을 고찰했다. 특기할만한 건 가산불교문화연구원의 고옥 스님이 발표한 ‘탈속과 귀환의 중도에서 만난 아렌트’로서 아렌트 사상의 확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이은혜 기자)

06. 10. 31.

 

 

 

 

P.S.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폭력의 세기>까지 포함하여 현재까지 번역/소개된 아렌트의 저작은 8권 가량이며 이 중 5권이 2002년 이후에 나온 것들이다. 거기에 조만간 네댓 권이 보태진다고 하니까 '아렌트 르네상스'란 말이 빈말은 아닌 셈이다...

P.S.2. 국내 아렌트 학자 중 한 사람인 서유경 교수의 '아렌트 이야기'를 보충자료로 옮겨놓는다. 아렌트 입문에 값할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며 우리 현실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짚어주고 있는 글이다. 서교수는 아렌트의 <과거와 미래 사이>와 함께 다나 빌라의 <아렌트와 하이데거>를 우리말로 옮긴 바 있다.

프레시안(06. 10. 23) 2006년 가을, 한나 아렌트를 생각한다

1996년 가을이었다. 당시 박사과정에 있던 나는 '현대정치철학'이라는 강의을 듣고 있었다. 푸코, 하버마스, 가다머, 롤즈, 료타르, 데리다, 아렌트의 저서들을 두루 읽게 된 것도 그때였다. 맨 처음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란 책 제목을 보았을 때 내 머릿속을 스쳐간 것은 서머셋 모옴의 소설 <인간의 굴레>였다. 지금 되돌아보면 나는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직감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다수성(plurality)', 즉 '세계 속에서 타인들과 더불어 삶을 영위해야 한다는 조건'을 인간의 실존적 조건(굴레)으로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으로 <인간의 조건>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채 한 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바다 한 가운데 턱 버티고 있는 홉스의 웅장한 리바이어던의 흉상, 바로 그것이 내 눈 앞에 어른거리고 있다고 느꼈다. 호메로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헤겔, 맑스, 후설, 하이데거, 야스퍼스, 비트겐슈타인에 이르는 서구 철학 2500년 역사의 광활한 대지 위를 종횡무진하는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내게 놀라움 바로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런 지적 충격 속에서 나는 아렌트 사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후, 민선 2기 김영삼 문민정부 시절에 접어들었다. 문민정부는 과거 정권과 달리 시민단체 인사들을 정부의 각종 위원회에 참여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런 급격한 변화상에 부응하기 위해 정치학자들은 그때까지 별 의미를 두지 않았던 '시민'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주목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발견한 아렌트는 소수의 대표자가 국정을 주도하는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고대 폴리스에서 행해졌던 방식의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복원하자고 제안하는 정치이론가였다. 아렌트가 주창하는 시민 주도의 참여민주주의 패러다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90년대 중반, 당시까지만 해도 하버마스는 잘 알아도 아렌트는 모른다는 것이 학계와 일반의 반응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이미 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의사소통 패러다임의 원출처가 아렌트의 정치행위 모델이었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아무튼 그 때 나는 아렌트를 통해 우리 사회 내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정치지형의 이론적 타당성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었고, 3년 뒤 그것을 아렌트의 정치적 실존주의 맥락에서 '정치행위와 인간실존의 역학'으로 설명하는 학위논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지난 10년을 거치며 우리 학계에 나처럼 전문적으로 아렌트를 연구하는 '아렌티안(Arendtian)'들의 수가 제법 늘어났다. 그 덕분에 아렌트의 주요 저작들 대부분이 번역 출간되었고 관련 논문들도 꾸준히 발표돼 왔다. 이런 연구 성과의 축적에 힘입어서인지, 요즘 아렌트에 대한 관심이 하루가 다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근래 크고 작은 신문과 잡지의 칼럼이나 기사에서 그의 이름이 거명되는 경우가 부쩍 잦아진 것이 이 점을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예로 지난 14일 경희대에서 "한나 아렌트와 Amor Mundi(세계사랑)"라는 제하에 열린 아렌트 탄생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도 예상 밖으로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이런 광경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됐던 '인문학의 위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오늘 왜 우리 한국인들이 아렌트 사상에 그처럼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한나 아렌트의 본명은 Johannah Arendt로 1906년 10월 14일 프러시아 영토인 하노버의 유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성장했는데 그곳은 칸트가 태어나서 평생을 보낸 것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아렌트는 16세에 이미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을 정도로 철학적 소양이 뛰어난 매우 명석하고 지적인 소녀였다.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을 졸업한 후 마르부르크 대학의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된 것은 당시 철학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하이데거에게 배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잘 알려진 대로 그곳에서 아렌트는 스승인 하이데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듬해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동의 하에 프라이부르크로 떠난다. 그곳에서 후설에게 반년에 걸쳐 현상학을 배운 다음, 다시 하이데거의 친구인 실존철학자 야스퍼스가 있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 그의 지도 하에 1929년 <사랑 개념과 성 어거스틴>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이어 아렌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만난 동급생이자 유태인 저널리스트인 귄터 슈테른과 결혼하여 베를린의 한 신문사에서 서평 담당기자로 일한다.
  
그러던 중 1933년 히틀러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려는 청년들을 교육시키는 한 유태계 기관에서 일하는 한편, 발터 벤야민, 레이몽 아롱 등과 친교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던 슈테른과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역시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독일인 하인리히 블뤼허와 재혼한다. 그들은 1970년 블뤼허가 사망하기까지 30년 가까이 서로에게 지적 동반자이자 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이어 비시정부가 더 이상 자국 내 유태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자 미국행을 결심한다. 1941년 미국에 도착한 아렌트는 뉴욕에 정착한 뒤 1975년 사망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그는 유태계 잡지사 편집장을 거쳐, 시카고, 버클리, 프린스턴, 뉴스쿨 등의 대학의 정치학과와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생전에 그는 활발한 저술활동을 펼쳤고, 특히 기성의 틀을 깨는 급진적인 주장과 거침없는 언변으로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아렌트는 인류에 대한 지적 공헌을 인정받아 1959년 레싱상, 1967년 프로이트상, 1975년 소니그상을 수상했다. 또한 1972년에서 197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앙리 베르그송, 가브리엘 마르셀, 레이몽 아롱과 같은 세기의 지성들이 초빙되었던 철학계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아버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연의 최초의 여성 연사로, 그것도 두 번 연속해서 초빙되는 영예를 안기도 하였다. 이처럼 확고한 사회적 지위와 학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아렌트는 늘 '국외자'였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학계에 불어 닥친 아렌트 재해석 열풍과 더불어 화려한 부활을 하기까지는 그랬다.
  
이른바 '아렌트 르네상스'로 일컬어지는 이런 아렌트 사상의 부활 현상에 기폭제가 된 것은 동유럽 시민사회의 태동이었다. 이들 나라들은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사이 구소련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한 후 각기 새로운 민주주의 정치공동체 운영 실험에 돌입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통제 체제가 하루아침에 시민들이 세운 민선체제로 바뀌게 됨에 따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요구됐고, 그런 그들에게 정치이론가로서 한나 아렌트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로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이것으로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아렌트 사상이 부활하게 된 이유까지 설명할 수는 없다.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것은 1990년대 유행한 탈근대적 사회이론들이 지니고 있는 한계 때문이었다. 정치적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예컨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는 주장으로 유명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해체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만일 해체가 기존 체제의 비판을 넘어서는 게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단지 무정란(無精卵)에 불과한 이론이 될 것이다.
  
반면 아렌트의 정치행위 이론과 판단행위 이론은 시민들 각자의 행위와 정치적 결과의 상관관계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무책임하게 보이는 탈근대 사회이론과 차별화되었다. 이 점이 바로 서구 사회가 아렌트를 다시 주목하게 된 이유이다. 

1972년 한 학회에서 "당신의 정체가 뭐요?"라고 현실주의 정치학자 한스 모겐소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을 때, 아렌트는 "좌익은 나를 보수주의자라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때때로 나를 좌익이라고 하거나 이단자라고 하기도 하는 것 같던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르겠군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요즘 학자들은 아렌트를 '반정초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서구 철학전통 속에 나타난 어느 학파로도 분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굳이 아렌트의 학문적 정체성을 규명해야 한다면 그는 첫번째 '아렌트주의자'로 불려야 마땅할 것이다.
  
아렌트 사상의 대가 다나 빌라는 "아렌트의 사유 방주(方舟)는 정치악의 문제를 규명하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로 시작하여 우리가 이런 현상들을 다룰 때 의존하는 정신기능들의 탐색으로 끝나고 있다"고 논평한다. 사실 철학도였던 아렌트는 1930년대 유럽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현실정치에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한 정치이론을 통해 진정한 정치의 복원과 공적 행복을 주창하였고, 70년 중반 사유(思惟)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정치철학자로서 삶을 마치게 된다.
  
무명의 독일-유태계 망명 지식인 아렌트가 미국 학계에서 처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51년, 그의 첫 번째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의 출간 이후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와 스탈린 군국주의라는 전체주의 체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때 미국은 매카시즘의 광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점이었다. 따라서 이 책이 스탈린 공산주의 체제에 대해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아렌트는 냉전의 반공 이데올로기 기류 속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전체주의 분석을 단순한 전체주의 체제 비판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의 무고한 생명 대학살을 서구 역사 속에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반유태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로 간단히 치부할 수만은 없으며, 그러한 체제들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형태"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전체주의 체제는 체제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들은 개별 시민들 사이의 모든 대화 장치들을 분쇄함으로써 정권의 공식 대화채널만이 작동하도록 하며,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테러로 응징하는 이중의 통치방식으로 체제를 운영한다. 결국 시민들은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체제 순응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연장선 상에서 아렌트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대사회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우선 대중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사적인 영역에서 상품의 소비와 향락산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다. 또한 국가의 근대화된 행정체계는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규율하는, 미셸 푸코의 표현인 '파놉티콘'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 국가의 시민은 전체주의 사회 내에서 못지않게 원자화되고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인 것이다.

이런 근대 사회에 대한 비판은 그의 두 번째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정치행위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아렌트는 여기서 인간은 정치행위를 통해서만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본래 '정치적 존재(zoon politikon)', 즉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정치적 존재로서 인간의 삶의 원형을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찾아낸다. 폴리스에서 자유인, 즉 시민들은 정치의 장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의 대소사를 함께 심의하고 결정했다. 요컨대 그들은 이러한 '정치행위'를 통해 자신의 사적인 삶과 별개로 시민으로서의 공적인 행복을 향유했던 것이다.
  
이에 아렌트는 고대 폴리스라는 직접 민주주의의 정치무대를 배경에 깔고 자신의 독특한 정치행위 개념을 제시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정치행위는 유일하게 사물 또는 물질의 직접적인 개입 없이, 언어를 매개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이다. 이 정의에서 방점은 '언어'와 '자유로운 인간의 활동'에 주어져 있다. 바꿔 말해서 아렌트의 정치행위는 사적인 삶의 관심에서 해방되어 공적인 장에서 진행되는 의사소통 행위를 뜻한다. 나중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아렌트의 정치행위 개념에 기초하여 자신의 "이상적 담론상황"과 의사소통적 행위론, 그리고 심의 민주주의 이론을 구축하는 개가를 올리게 된다.
  
<인간의 조건> 이후 정치이론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아렌트에게 또 한 번의 학문적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는 1961년 <뉴요커>의 특파원 신분으로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게 되며, 1963년 자신이 재판정에서 본 것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출간한다.
  
자신이 만난 아이히만이 평범한 소시민이었을 뿐 악마의 화신이 아니었다는, 이른바 '악의 평범성'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책은 당시 유태인 사회 내에서 하나의 필화사건으로 전화한다. 결국 아렌트는 유태인 사회로부터 "유태민족에 대한 애정을 결핍한 자"로서 파문을 당한다. 하지만 그는 아이히만의 경우를 통해 사유의 결여가 곧 악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고한 확신을 얻게 된다.
  
아렌트의 유작 <정신의 삶>은 바로 이 때 얻은 확신을 논증하는 정치철학적 저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사유행위와 정치행위의 연계성을 밝힐 목적에서 우리의 정신 기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현상학적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정신이 사유작용(thinking), 의지작용(willing), 판단작용(judging)의 세 가지 기능을 분리하여 수행하는 동시에 상호간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예컨대 사유작용은 의지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사양을 제공해주고, 판단작용은 의지작용의 과정에서 선택된 것의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개별 행위자가 주관성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렌트의 논점은 개인의 사유행위는 보편타당한 정치행위로 이어진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결국 그는 이런 설명 방식을 통해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적시하는 한편, 서구 지성사에서 소크라테스 이래로 분리되었던 정치와 철학이 결합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렌트의 사상은 시기별로 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다. 이는 아렌트의 학문여정이 철학, 정치학, 정치철학으로 세 번의 전환을 하면서, 주장의 강조점이 달라졌다는 점에 기인한다. 1996년 당시 내가 처음 아렌트를 만났을 때 나는 그의 정치학적 주장들에 주목했었다. 그 때 우리 사회는 그의 정치행위 개념에 담긴 시민정치 사상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87년 6월 혁명 이후 지난 20년간 우리 시민사회는 매우 강력한 정치력을 획득했다. 우리 시민들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무력한 대중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시민 정치는 때로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그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번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가 하면 시민들 사이에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만 내세우는 이기주의적 행태도 빠르게 번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이제 아렌트의 '정치학' 이론보다는 '정치철학'적 지혜에 주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이히만의 무책임한 범죄행위는 그의 사유행위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아렌트의 정치철학적 평결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오늘 아렌트는 우리에게 행동하기에 앞서 사유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이는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서유경/경희사이버대 NGO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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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6-10-31 10:14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열린 생각과 마음을 그냥 늘 지나기가 미안해서 메모 남깁니다. 그런데 이 많은 책을 언제 어떻게 다 읽는지 비결이라도 있으면 알려주실랍니까. 책을 이렇게 읽다보면 머릿속엔 활자들만 살진 않나요.^^

로쟈 2006-10-31 10:18   좋아요 0 | URL
다 읽지 않고 읽을 수도 없습니다(소설책들도 아니구요).^^ 다만, 저는 마치 '지도제작자'처럼 그 책이 어디에 있는지 정도를 가늠해놓을 따름입니다. 급하게 읽는 편도 아니어서 주로 우선적으로 손에 잡히는 책들만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편입니다...

로쟈 2006-10-31 15:30   좋아요 0 | URL
빗발은 아니고, 바람만 좀 부는 거 같습니다.^^ 소설들 만큼은 재미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수습이 된 건가)...
 

TV에서 상상플러스가 나오는 걸 잠시 보다가 채널을 돌리니까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띈다. '세계적 석학'이란 말이 미리 나오는 자크 아탈리다(그에게서 내가 받는 인상은 딱 이어령 선생의 그것이다). 아마도 'TV, 책을 말하다'에서 아탈리와의 인터뷰를 특집으로 꾸민 모양인데, 손석춘 한겨레 기획위원이 패널로 나와서 거들고 있다. TV를 끄고 책상으로 와서 무슨 일로 온 건지 '아탈리'를 검색해본다. 얼마전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차 내한했다가 방송분을 녹화한 모양이다.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한다는 게 이번 포럼에서의 그의 메시지였던 모양이다(그럼, 지금까지는 이기주의자들이 지배해왔구만).

 

 

  

 

따져보니까 아탈리의 책을 내가 완독한 건 한권도 없는 듯하다. 한데, <합리적인 미치광이>, <21세기 사전>, <호모 노마드>를 구입했었고 부분적으로 읽었다(<인간적인 길>과 <마르크스 평전>은 읽어볼 요량으로 있다). '형제애'나 '노마드'에 대한 방점 같은 게 키워드로 떠오르지만 그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대해서는 아직 가늠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비슷한 처지라면 아래 기사가 요긴한 도움이 되겠다.

 

뷰스앤뉴스(06. 10. 20) 자크 아탈리 "21세기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총재를 지낸 세계적 석학인 자크 아탈리(63) 플래닛파이낸스 회장이 앞으로 세계경제는 '이타주의자'들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울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세계지식포럼에 참석한 자크 아탈리(63)는 19일 OECD 사무총장 출신인 도널드 존스턴 국제리스크관리위원회(IRGC) 이사회 의장 사회로 수파차이 운크타드 총장과 함께 '창조 경제의 시대'를 주제로 가진 대담에서 선진국의 과도한 지적재산권 보호 정책을 질타했다.

그는 "지적재산권(IPR) 보호가 오히려 사람들의 창의력을 억제하고 전 세계적인 지식의 확산을 막고 있다"며 "앞으로 세계 경제에서 지적재산권은 보호받는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아이디어나 지식은 희소성이 있는 게 아닌데 지적재산권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로 이를 희소한 것으로 만들었다"며 "지식은 전 세계적인 확산을 통해 성장을 촉진해야 하는데 지적재산권이 이를 막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인터넷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음악의 수는 2백억개로 이 가운데 절반 정도는 무료로 들을 수 있다"며 "음반산업이 CD 판매를 통해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더 이상 음악이 무료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도 번역소개된 저서 <호모 노마드> <마르크스 평전> 등을 통해 강조해온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그는 "현재 세계경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타주의"라며 "앞으로 이타주의적 새로운 엘리트집단이 출현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과거에는 희소성에 가치가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네트워크경제 시대에는 오케스트라에서 다른 연주자가 잘 해야 나의 연주도 빛을 발하는 것과 같이 정보는 많이 공유할수록 이익이며 이를 위해 지식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한다"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 타인의 성공이 나에게도 이익이 되는 이타주의의 시대에 살고 있다"며 "좋은 자동차는 나 혼자 갖고 있는 게 좋지만 좋은 휴대전화는 나 혼자 갖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구체적 예를 들기도 했다. 그는 또 시야를 세계문제로 넓혀 "테러나 지구온난화 등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빈곤과 어려움이 나에게 이득이 아니라 해를 끼칠 것"이라고 이타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향후 50년 간 장기적으로 세계화와 전쟁, 권력 이동과 같은 일련의 현상들을 겪고난 후 새로운 엘리트 집단이 생길 것이며 이 '새로운 엘리트 집단'은 기본적으로 '이타주의자'들로 구성될 것"이라며 "나아가 반세기 전 자본주의가 미친 영향만큼 비정부기구(NGO) 인사들, 예술가들, 과학자들 특히 뇌 연구 과학자들이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며 그들은 이미 세계 총생산의 10%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85년 처음 사용한 '유목주의'(노마디즘)에 대해 "당시와 달리 기술의 발전으로 오늘날은 유목성이 보편적 규범이 됐으며, 계속 이동하고 변화하는 유목성이 낳는 창의성은 오늘날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며 " 한국의 젊은이들은 사회가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자신의 꿈을 좇아야하며, 예술가, 과학자, 요리사, 광대 등 어떤 꿈이더라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프랑스 최고 지도자 양성소인 국립행정학교(ENA)를 졸업하고 경제학ㆍ정치학 2개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한 아탈리는 <21세기의 승자>(1995) <21세기 사전>(1997년) <호모노마드-유목하는 인간>(2003) <인간적인 길>(2005) 등의 많은 저서를 펴냈고 그의 모든 책은 국내에서도 번역됐다. 오랜 기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경제고문과 유럽부흥개발은행(EBRD) 초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올해 노벨평화사 수상자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빈곤층을 위해 설립한 마이크로크레딧 금융기관인 그라민은행에서 힌트를 얻어 1998년 ‘플래닛 파이낸스’를 설립해 현재 회장을 맡고 있다.(김홍국 기자)

06. 10. 31.

 

 

 

 

P.S. 오늘부터 이타주의자가 되는 연습을 해야겠다(이기주의자들, 너넨 이제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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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듣기만 해도 기분좋은 글이군요...^^

정말 저 분의 예측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딸기 2006-10-31 09:49   좋아요 0 | URL
아 큰일이다... 나의 시대는 갔구만... (혼잣말입니다)

로쟈 2006-10-31 13:22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이타주의자들은 향후 50년간 참호 속에서 숨어지내야 될 거 같습니다. 그 담에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