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 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식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사회체계들>에 가 있다. 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탐서주의자의 책>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

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

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

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

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

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공개 2007-02-09 10:52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 읽다가 생각한 건데요, 혹시 로쟈님은 저서가 있으신지요? 아니면 곧 쓰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제가 잘 몰라서.. 죄송 ^^

로쟈 2007-02-09 11:02   좋아요 0 | URL
아직 저서랄 게 없구요, 번역서들을 포함해서 올해나 내년부터는 많이(?) 내려고 합니다.^^;

외로운 발바닥 2007-02-09 11:18   좋아요 0 | URL
정말 '달인'의 경지에 이르신 분이네요. 머지 않아 로쟈님도 이런 기사가 나지 않을까요? ^^ 책 내시면 꼭 알려주세요. 페이퍼 통해서라도...^^;; 그리고 살짝~ 퍼갑니다.

yoonta 2007-02-09 12:04   좋아요 0 | URL
근데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가 아닌 "인터넷서평꾼"은 언제쯤 인터넷서평만으로 먹고살수있을까요? 로쟈님같은 알라딘대표 "인터넷서평꾼"도 땡스투같은것만으로는 책한권사기도 벅찬 정도의 수입이 가능한 구조에서는 당분간 자력 갱생하기 힘들것 같은데..이 기회에 님도 아예 공인"도서평론가"로 나서시는것이 어떠신지..

짱꿀라 2007-02-09 12:23   좋아요 0 | URL
yoonta님, 로쟈님, 열심히 밀어드리자구요. 언능 로쟈님 책한권 나오시게 만들어야죠. 로쟈님, 이제는 출판계쪽으로 나서시는 것이.......
저희가 적극 밀어 드리겠습니다. 실력도 좋으신데 말이죠.

로쟈 2007-02-09 12:35   좋아요 0 | URL
성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데 그렇게 자꾸 등떠미시면 곤란합니다. 출판계도 먹고 살기 어렵구요, 발밑이 절벽입니다!..

나비80 2007-02-09 13:46   좋아요 0 | URL
저는 표정훈 씨 작업실의 봉투 그대로 뜯어보지도 않은 책들에 눈이 가는걸요^^

로쟈 2007-02-09 14:26   좋아요 0 | URL
저도 봉투나 박스는 많이 받는데 대부분 제가 값을 치러서 온다는 점이 차이죠.--;

기인 2007-02-09 15:01   좋아요 0 | URL
퍼갑니다. 에효. 저도 제 미모를 이용해서 뭔가 해보고 싶어요! ㅋㅋ -_-;
정지영 아나운서 누군지 모르고 있었는데, 이 사태 터진 후에 볼수록 미모가 뛰어나서 팬이 될 지경입니다 -_-;;;; ㅎㅎ
국문학의 경우는 전공에 대한 참고문헌을 확보하는 것이 비교적 쉬운 일이라서 적어도 자신의 '전공'관련은 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전공'이라는 것이 '현대시'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현대시, 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국민문학파, 라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 주요한 -_-; 이라는 것이 문제겠지요 ^^; 그런데 또 파다보면 다 연결되어 있으니, 주요한에 대한 모든 연구들의 '목록'은 적어도 알고 있다고 하기도 어렵네요;;

비로그인 2007-02-09 15:04   좋아요 0 | URL
이 분 TV 책을 말하다에서도 '책 벌레' 대표(?)로 출현하신적 있는 거 같은데..그 분 맞나? ㅎ

이네파벨 2007-02-09 18:5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번역한 책이 궁금하네요.....................
열성팬인데 좀 알려주심 안되남요? ^________^

로쟈 2007-02-09 20:27   좋아요 0 | URL
기인님/ '미모'요? 중요한 게 미모긴 하죠.^^
테츠님/ 벌레라서 '출연'이 아니라 '출현'인가 보군요.^^
이네파벨님/ 나오면 다 '광고'합니다요.^^

그린브라운 2007-02-10 10:49   좋아요 0 | URL
잘읽었습니다 퍼갑니다 ^^
 

낮에 구내서점에 갔다가 뜻밖에 손에 든 책은 '주어캄프의 세계인물총서 01'로 나온 <발터 벤야민>(인물과사상사, 2007)이다. 저자는 '몸메 브로더젠'. 물론 이름도 생소한 저자의 지명도 때문에 책은 집어든 건 아니고 순전히 '주어캄프'라는 지명도(프랑스로 치면 '갈리마르'쯤 되나?)에다 문고본 판형에 끌린 것이다.

 

벤야민의 전기가 처음 소개되는 것도 아니고 또 대략적인 전기라면 생소하지도 않은 형편이어서 책에 대해서 특별한 기대를 갖고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요즘 우리도 이만한 포켓북 형태의 책들이 많이 기획되고 있는 듯해서 어떻게 씌어지고 편집되는가를 살펴볼 필요성은 있겠다. 체게바라가 2권으로 같이 출간됐지만 일단은 내가 더 잘 아는 벤야민을 읽어볼 계획이다. 그런 생각으로 '벤야민'을 검색했다가 예기치 않게 읽은 기사는 작년말에 게재된 이재현의 가상인터뷰 최종회이다. 2004년 겨울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비평가/작가 수전 손택을 다루고 있는데, 우연찮게도 어제오늘 '문제'로 불거진 시사저널 사태에 대한 코멘트가 포함돼 있다. 적절한 '타이밍'이다 싶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6. 12. 26) [가상 인터뷰] <42·끝> 수전 손택

미국의 에세이스트, 소설가, 액티비스트, 문화비평가. 에세이집으로는 <해석에 반대한다>(1966) <사진에 관하여>(1977) 등이 있고, 소설로는 <미국에서>(1999) 등이 있다. 친아버지는 중국에서 모피상을 했었는데 손택이 다섯 살 때 죽었다. 손택의 원래 성은 로젠블라트(Rosenblatt)였고, 손택이란 이름은 법적으로 자신을 입양하지는 않은 의붓아버지의 성을 딴 것이다. 대학 생활의 출발은 버클리대학이었고, 시카고대학으로 옮겨 가서 문학비평가 케네스 버크와 보수주의 정치학자 레오 쉬트라우스 등에게서 배우며 석사를 마친 뒤, 하바드대학, 옥스퍼드대학, 소르본느대학 등에서 문학과 철학 등을 공부했다.

17살 때, 열 살 연상의 대학 선생과 만난 지 열 며칠 만에 결혼을 해서 아들을 하나 두었으며, 8년 뒤에는 ‘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남편과 이혼하고 그 때부터 아들을 홀로 키웠다. 1963년부터 서평 등을 쓰기 시작한 손택이 최초로 이름을 날리게 된 것은, 게이 감수성에 관한 에세이인 <캠프(camp)에 관하여>(1964)였다. 나중에 이 글은 정치적 관점을 강조하는 동성애 진영, 즉 ‘퀴어(queer) 정치학’쪽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지만, 당시에는 대중문화와 관련해서 대안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모색하고 제시하는 선구적이고 충격적인 글이었다.



손택은 발터 벤야민, 롤랑 바르트 등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지식인들과 이오네스크, 아르토, 브레송, 고다르 등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1960년대의 뉴욕 지식인 사회 및 문화예술계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미국에 열정적으로 소개했다. 1967년 <파르티잔 리뷰>에 쓴 글에서 “백인종은 인류 역사의 암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켰고 나중에 가서 자신의 발언이 암 환자들의 고통을 무시한 것이라는 점을 들어 사과를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베트남전 반대 행동을 위해 하노이를 방문하기도 했고 1993년에는 내전 중에 포위된 사라예보에 대한 전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사라예보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바 있다. 2001년 9ㆍ11 사태가 터진 직후 발표한 글에서 손택은 당시 미국 주류의 정치적 견해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그렇지만, 미국은 강하다” “모든 게 잘 되어 가고 있다”고 허풍을 떨던 부시를 ‘로봇과 같은 대통령’이라고 지칭하며 대놓고 반박함으로써 또 다시 충격을 준 바 있다.



손택의 사인은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이었는데 이 백혈병은 30대 중반에 생긴 유방암과 60대에 생긴 자궁암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다. 에세이 <은유로서의 질병>(1978)과 <타인의 고통에 관하여>(2003)는 바로 자신의 병 체험에 바탕을 두고 저술된 것들이다. 죽기 몇 년 전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손택은 자신이 양성애자임을 밝혔는데, 평생 “실제로 아홉 번, 다섯 명의 여자와 네 명의 남자”와 사랑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손택의 좌우명은 “늙은이처럼 행동하지 마라, 바로 그 순간부터 늙기 시작한다” “우정이란 다른 사람들 안에서 기뻐하기 위한 욕망이다”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신을 당신 안에 가두지 마라” “변화는 나의 장기이다” 등이다.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무덤 안은 어떠세요? 죽으면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변신할 수 있나요?

수전 손택(이하 수전) 그냥, 수전이라고 불러, 동업자끼린데 뭘. 죽어서 좋은 점은 다른 사람들이 내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거야.

선생님은 평소에 “난 시골에서 살지 못한다, 도시가 좋다”고 말씀하신 전형적인 뉴요커인데다 워낙 명망가이셨으니까 다른 뉴요커들이 커피숍이나 술집에서 선생님의 사생활을 가십 거리로 삼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가장 궁금한 건데요, 성을 왜 스스로 바꾸셨지요?

수전 ‘장미꽃잎(Rosenblatt)’이란 말이 간지러워서 그랬어. 손택이란 이름이 더 단순한 게 맘에 들었지. 내 의붓아버지는 장교 출신의 참전 영웅이었지만 사춘기의 내가 보기에 지적으로는 정말 바보 같았거든.

독일어의 일요일(Sonntag)은 n이 두 개인데요. 손택이란 이름과는 어떤 관계인가요?

수전 그런 데 관심 없어. 이번 기회에 분명히 말하건대, 한국 페미니스트들 중에는 아버지 성과 어머니 성을 둘 다 붙여쓰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어. 하지만 그건 머저리같은 짓이야. 정확히 따지자면, 어머니 성이 아니라 외할아버지 성이잖아. 페미니스트가 그렇게 의식이 없어서 뭐가 되겠니? 차라리 성, 그러니까 ‘아버지의 이름’을 없애자고 해야지.

역시, 선생님은 거침이 없으시군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답니다. 한국의 지적, 문화적 분위기는 미국으로 치자면, 소설가 잭 케루액이라든가 시인 윌리엄 버로우즈 등과 같은 비트 제너레이션이 활약하던 때인 1950년대 수준도 될까말까지요. 아직, 정치적, 문화적 검열에 관한 문제라든가 드럭(drugㆍ마약) 문제에 관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인식이 아직 형편없어요. 다들 앵무새처럼 말할 뿐이지요.

수전 미국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건 아니야. 다만 나에 대해서는 미국의 주류 사회가 속으로 ‘저 년은 원래 저런 년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약간 봐준 정도일 뿐이지. 또 내가 뉴욕 토박이가 아니었더라면, 9ㆍ11 이후 미국의 파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대외 군사정책에 대한 나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실제 내가 당했던 것보다도 아주 더 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았을 거야.

선생님에 대한 평가 중에 일찍부터 ‘아마도 미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수전 나는 그게 일종의 욕이라고 생각해. ‘아마도’란 말도 그렇고 ‘여성’이란 말도 그렇고 말이야. 그 말에는 여성이란 본디 지적이지 못하다는 전제가 들어 있는 것이고, ‘아마도’란 여성이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들어 있잖아?

으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선생님은 1960년대부터 사회적,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 쭈욱 계속해서 나름대로 직접 행동을 취해 오셨습니다. 1980년대의 한국에는 일본어 한자말에서 빌어온 ‘활동가’란 말이 쓰이곤 했습니다. 지금 그 활동가들 중 일부는 죽고, 일부는 먹고살면서 애 키우느라 바쁘고,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고, 또 일부는 아직도 사회운동 및 시민운동을 하고 있습니다만. 미국의 양심을 대표하는 ‘액티비스트’로서 선생님께서는 한국의 엑스(ex)-활동가들의 현재 모습은 어떻게 평가하고 계시는지요?

수전 야, 그런 걸 왜 내게 묻냐? 너희 일은 너희가 가장 잘 아는 거지. 세상이 바뀌면 바뀌는 만큼 변화를 해나가되, 최초의 그 곧고 아름다운 마음가짐과 ‘합리적 핵심’에 해당하는 관점을 지켜나가면 되는 거잖아.

물론이지요. 하지만, 자기 일에 파묻혀 살다보면 자신이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가를 놓치는 경우가 왕왕 있거든요. 또 한 해가 저무는데 세상이 더 나아진 것 같지도 않고요. 그래서 그런 거지요.

수전 그렇다면 한 수 가르쳐 주지. 가령 언론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는 <시사저널> 사태 해결에 나서는거야.

앗. 선생님, 어떻게 그 문제를 알고 계신가요?

수전 바로 위에서 네가 날 소개하면서 “작가라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 않았니? 사장이 사전에 편집국 구성원들과 아무런 얘기나 논의 없이 기자가 쓴 글을 윤전기에서 인쇄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멋대로 빼버린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잡지를 만들어 온 기자들이 참 대견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참 안쓰럽다.

네. 문제는 다른 일간지들이 이 중대한 사태에 관해 제대로 보도를 하고 있지 않아서 국민 대다수가 사정을 모른다는 겁니다(*이번에야 보도가 되었다. 그리고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일종의 굳건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게지요. 사태는 정말 심각합니다. 소위 ‘편집권 독립’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겠습니다만, 경영주가 제멋대로 기자의 글을 삭제하는 것은 일제 시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수전 말로 안 되는 경우에 쓰라고 화염병이 있는 거야.

켁. 선생님,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수전 그러니까, 내 말은 연말에 망년회 대신 ‘몰로토프 칵테일’파티를 하라는 얘기야. 너희 한국에 활동가가 그렇게 많았다면서.



네에~(푸훗). 아무튼 선생님, 한국과 한국의 언론 상황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찌 보면 매우 창피한 일입니다만, 사람들 만날 때마다 이런 사실을 널리 알려주세요. 그리고, 대충 50년쯤 뒤에 선생님 계시는 나라로 저도 살러 가겠습니다. 그럼, 다시 뵐 그때까지….(문화비평가 이재현)

07. 02. 08.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2-08 21:13   좋아요 0 | URL
수잔 손택이 레오스트라우스의 제자라니... 좀 의외네요 ^^

로쟈 2007-02-08 22:59   좋아요 0 | URL
같은 과 교수들이라도 정치적 스펙트럼은 다양한 것 아닐까요? 손택은 학생이었을 따름이고. 혹 레오 스트라우스에 대해서 한 멘트가 있는지는 찾아봐야겠네요...

sommer 2007-02-09 00:14   좋아요 0 | URL
스트라우스와의 재해석이 곧 손택일 수도 있겠네요. 마치 슈미트와 여러 급진적 사상가들의 연결처럼 말이지요.
 

새해 들어 '사회적 독서'란 카테고리를 만들면서 내가 하는 일은 매달 네 권의 책을 선정하고 그걸 '광고'하는 일이다. 구매를 권유하고 여차하면 독서를 권장하는 일. 2월의 목록에 올려놓은 책 중에 문화평론가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강, 2006)가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정여울의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강, 2006)에 빗대어 말하자면, '아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개인을 보다'쯤에 해당하는 책이다.

 

 

 

 

실제로 책의 8할은 대중문화, 특히 영화에 대한 비평으로 채워져 있다. 나머지는 인터뷰이다(저자의 인터뷰집으론 <나는 편애할 때 가장 자유롭다>(강, 2004)가 있다). 저자는 현재 '씨네21'에 3주에 한번꼴로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데, 지난달에 그가 올린 칼럼 두 편을 옮겨놓는다. 나의 취지야 물론 한번 읽어보시라는 것이다. '자칭 진보이자 B급 좌파' 김규항이 글을 쓰던 자리에 '합리적 진보'를 고민하는 남재일의 글이 겹쳐놓이는 것도 담론의 공간에서 읽을 수 있는 한 가지 변화이다. 이 변화는 트렌드일까? 

아래 두 칼럼에서 필자는 얼핏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합리성'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겹쳐놓으면 한 가지이다. "다만 현재의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 무엇"을 그가 '합리적 진보'라고 말할 때, 그 합리성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서의 합리성이 아니라 고학력자도 점집을 찾게 만드는 '위안의 해석학'으로서의 합리성(일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기자 지망생들이 "조선, 동아는 ‘정파성이 부담스러워서’ 기피하고, 한겨레는 주로 ‘월급이 낮아서’ 기피"하는 합리성이 거기에 해당한다.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의 '모호함'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에 남재일의 개인주의가 존중하는 가치가 바로 그 모호성이며, 나대로 이름붙이자면 '좀스런 이성의 간계'이다. "도그마에 대한 거부는 이념의 내용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는 방법론에 대한 거부이다."라고 그가 말할 때, 도그마란 '대문자 이념'에 다른 말이 아닐 것이다. 이념에 대한 열광은 가슴 한 구석에 보존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지!'란 속좁은 '확신'이 '좀스런 이성의 간계'의 바탕이며 개인주의의 물주이다. '칼같지 않은' 그의 뜨뜻미지근한 칼럼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해보는 것은 그런 개인들의 총합으로서의 사회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이다...  

씨네21(07. 01. 05)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합리적 진보

기자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입사 희망 언론사를 적어내라고 했다(*필자의 전공은 언론학이며 현재 한국언론재단에 몸담고 있다). 매체 구분 없이 3순위까지 적힌 희망 언론사 유형을 5년 정도 모아보니 일정한 패턴이 있다. 다수의 학생은 일단 지상파 방송을 1지망으로 생각한다. 이 경우 2, 3지망으로 신문을 선택할 경우 조중동과 한겨레신문이 많다. 신문을 1지망으로 할 경우는 중앙일보가 많다. 그 다음은 한겨레신문이다. 조선, 동아는 2, 3지망에 많다. 종종 자신이 지망하는 언론사가 아니라 기피하는 언론사를 적어내는 경우도 있는데, ‘조선, 동아 제외’, ‘조선 제외’, ‘조선, 동아 및 한겨레 제외’, ‘한겨레 제외’ 등이 많다. 이들을 면접해보니 조선, 동아는 ‘정파성이 부담스러워서’ 기피하고, 한겨레는 주로 ‘월급이 낮아서’ 기피한단다. 중앙일보만 기피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중앙일보는 기자 지망생들에게 ‘합리적 진보 내지 중도’로 자리매김해 있다. 실제 논조는 그보다 보수적이다. 그런데 실제보다 더 진보적으로 비친 것은 왜일까? 여러 이유로 ‘조선, 동아 및 한겨레’를 제외하고 싶은 욕구가 투사됐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사정은 학생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최근 내가 본 한 신문사의 독자조사 결과에 보면, 한국의 화이트칼라들이 생각하는 ‘합리적 진보’에 가장 가까운 신문은 중앙일보라는 응답이 많다(*필자는 중앙일보 기자로 10년간 근무한 적이 있다). 여기서 ‘합리적 진보’는 뭘 지시하는가? 지시하는 구체적 내용이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합리적 진보’는 다만 현재의 보수도 진보도 아닌 그 무엇을 말할 뿐이다. 지향점없이 추진력만 있는 상태! 현재에 대한 부정은 있되 미래에 대한 긍정이 없는 상태!

이명박 대세론의 진원지도 바로 여기가 아닐까 싶다. <한겨레21>이 최근 40대 500명을 전화 설문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40대는 왜 이명박 대세론에 빠졌나’에 따르면, 이명박의 지지율은 55%로 초강세다. 이명박의 지지자 중 62.6%는 ‘앞으로 계속 지지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지지층이 상당히 탄탄하다는 거다. 대선 결과야 내년 가봐야 아는 것이지만 현재 이명박이 누리는 인기는 ‘합리적 진보’라는 지향없는 추진력을 흡수한 결과가 아닐까? 이명박의 정치적 위치는 ‘합리적 진보’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보다 훨씬 보수적이다. 그럼에도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당선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현재의 40대가 이명박 지지층을 형성하는 사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자는 말한다. 강고한 보수적 정서를 갖고 있는 한국사회가 진보 정권의 미진함을 계기로 용수철처럼 회귀하는 것이라고. 이 시각은 한국의 이념 지형을 진보와 보수로 이원화하고, 이명박=한나라당=보수로 등식화한다. 이 진보의 도그마는 이명박이 중도에서 시작해 보수로 지지기반을 확대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열린우리당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지지층이 이명박으로 넘어온다는 것은 진보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화되는 것이기보다는 진보든 보수든 강고한 정치 도그마에 대한 거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도그마에 대한 거부는 이념의 내용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는 방법론에 대한 거부이다. 만약 그렇다면, ‘합리적 진보’로 표상되는 대중의 정치적 욕구를 수렴하려면 진보와 보수 그 어디쯤에 점을 찍을까 고민하는 시간에 이념과 현실 사이 그 어디쯤에 나를 위치시킬까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보수를 뉴라이트로 개명하는 시간에 ‘도덕적 보수’를 생각하고, 진보의 도덕성을 홍보하는 시간에 ‘합리적 진보’의 방법론을 생각하는 것 말이다.

보수든 진보든 정치 도그마를 확신하는 사람은 쉬이 ‘지금’과 ‘내가’의 함정에 빠진다. 지금 당장 변해야 하고, 내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게 세상에 대한 헌신 때문이 아니라, 역사의식의 부재로 인한 조급증 때문인 것 같다. 격렬한 정파성의 본질은 대의와 역사의 탈을 뒤집어쓴 집단적 욕망이다. 한국사회의 정파성은 보수일변도의 불구에서 균형을 향해 회복되는 과정의 산고이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과도하게 특권화된 정치 도그마는 공론장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합리적 진보’와 ‘이명박 대세론’이라는 기표는 이제 도그마를 거부하는 또 다른 사회적 기운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씨네21(07. 01. 26)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음악카페)-(사주카페)=0

압구정동에 사주카페가 성업 중이라고 한다. 고객의 대부분이 대학교육을 받은 20~30대라고 한다. 점치는 성향은 대략 학력과 반비례하는 걸로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아는 한 역술인에게 들은 얘기로는 한국에서 가장 점을 안 치는 부류는 농부들이다(어부나 광부도 마찬가지일 게다). 가장 점을 자주 보는 사람은 사업하는 사람들이다(정치가나 연예인도 여기 속하지 않을까?). 그에 따르면 점치는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결정적 변수는 학력이 아니라 직업의 성격이다. 나는 이 경험적 통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농부가 점을 안 치는 건 점을 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농사는 절기에 따라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노동의 성패는 자신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 변수가 있다면 돌발적인 기상 상황이다. 이 사태는 농부 개인의 힘으로 예방이 어렵다. 그래서 농부는 미래를 알고자 하는 대신 좋은 미래를 무작정 기원한다.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우제는 일종의 기도이다.

하지만 사업가나 정치가는 노동의 성패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더 많이 좌우된다. 그리고 부침이 심하다. 당연히 불안감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연에 의지하는 농사와 달리 사회관계에 의지하는 생업의 속성상 자신의 처신이 미래의 사태를 결정한다는 확신을 갖기 쉽다. 역설적이지만 나의 처신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확신이 강할수록 최적의 처신에 대한 강박이 깊어지고 실패에 대한 불안도 깊어진다. 그러니 안개 자욱한 교차로에서 효율적 처신의 길을 묻는 사업가가 점괘를 갈구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사업가에게 점은 수정 가능한 미래를 내 손으로 기획하고자 하는 계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점집을 찾는 모든 사람이 사업가처럼 현실적 지침을 찾는 건 아니다. 박사학위 소지자인 아줌마 Y양은 건강검진받는 빈도보다 좀더 자주 점집을 찾는다. 그녀는 점집을 옮겨다니며 과거에 대한 해석과 미래의 전망을 탐문해왔다. 그녀가 자주 점집을 옮기는 것은 사주풀이의 진실성에 대한 비교확인의 동기도 있지만, 자신이 들은 스토리의 수준이 양에 차지 않아서이다. 그녀가 듣고 싶은 ‘풀 스토리’는 그간의 불운을 팔자로 환원하고 미래의 희망을 설득력있게 제시해주는 상투적인 해피엔딩의 드라마이다.

나는 그녀의 비합리성에 대해 힐난조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녀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사주풀이를 하는 것이 내 미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현재의 나에겐 도움이 된다. 듣고 싶은 얘기를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대가로 나는 돈을 지불한다. 사주풀이는 나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남자들이 폭탄주 돌리는 것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무해하다.” 그녀에게 점은 위안의 해석학일 뿐이다.

사주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젊은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언제나 하나의 역할과 기능으로만 자신을 호명하는 세상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는 것. 그건 마치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 속 세트에서 사진 촬영을 하며 영화 속 판타지를 잠시 체험하는 즐거움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종종 사주카페를 비합리성의 온상처럼 보는 글을 접할 때가 있다. 거기에 드나드는 젊은이들을 한심한 삶의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보는 이도 있다. 나는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것보다 그걸 비과학적 태도의 상징으로 보는 편협한 사고가 더 한심해 보인다. 합리성은 효율적 생산을 위한 도구적 가치이지 삶을 위한 가치가 아니다. 그럼에도 합리성을 인간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본원적 가치로 전제하는 것은 아마도 고용자의 시선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고용자의 눈에 사주카페를 드나드는 청춘들은 효율적 생산을 위해 합리성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할 시간을 탕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게다. 고용자의 눈은 애초에 제도 속의 인간이 아니라 제도의 효율적 작동에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고용자도 아니면서 고용자의 눈을 가진 사람들, 어찌 보면 그들이야말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다 놓쳐버리는 가장 가련한 외눈박이일지도 모른다. 새해에는 사주카페를 차디찬 합리성의 세계에서 얼어붙은 마음을 잠시 녹이는 화로로 봐주는 사소하고 따뜻한 눈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07. 02. 08.

P.S. 참고로,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에서 임상수 감독과의 인터뷰('정신적인 귀족'의 불안과 고독의 출전은 '씨네21'이다(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1001&article_id=28645). 지난 2005년 2월에 <그때 그 사람들>을 놓고 벌인 두 사람의 좌담인데, 나로선 80년대 초반학번들이 (40대 중반이 된) 현재 무슨 생각들을 하며 살아가는지 엿볼 수 있어서 흥미롭다. 그건 <오래된 정원>을 놓고 역시나 같은 지면에서 얼마전 영화평론가 변성찬과 임상수 감독이 나눈 좌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팀전 2007-02-08 11:33   좋아요 0 | URL
첫번째 기사만 읽었습니다.중앙일보에서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코드 진행이 재미있군요.현재 기자지망생들은 '지사적 저널리즘'을 선호하진 않습니다.(제가 신방과 출신어거든요)상대적으로 사회적 공분과 정의론이 조금 높을 수 는 있겠으나 ..언론고시라고 불리우는 입사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 덕목은 그다지 중요치 않지요.
남재일의 주문은 도그마를 극복하고 모호성의 트랜드를 읽어라라고 주장하고 있는 듯합니다.그의 트랜드 읽기는 역시 진보정권의 몰락에 토대를 두고 있는것이기도 하구요.진보와 보수가 함께 변해야 한다는 이 말은 식상한 담론이기도 합니다.(이것도 결국 '8월에 물에 물조심 하라' 는 것 처럼) '합리적 진보'라는 이념지향을 이명박이 수렴했다는 것은 ...남재일이 상정하고 있는 '합리적 진보'가 어느 층인지 궁금하게 합니다.또한 그 '합리적'이란 말이 -늘 쉽게 쓰이는데- 그 의미도 궁금하군요. 남재일이 말하는 '합리적 진보'는 누구일까요?갈 곳잃은 지난 대선에서 기호 2번 찍은 사람들이 '합리적 진보'였나? (저는 신영복 선생처럼 당파성을 주장하는 편입니다.우리의 이념 지향이 진보와 보수가 양분되어 있다면 그럴 필요도 없겠지요) 요즘 신문업계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지지후보를 공개지지 하라는 여론이 높습니다.대선후보들도 절반 정도는 동의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고.... 결국 이런건 '당파성'인데...저는 모호한 '합리적 진보' 대신에 차라리'합리적 당파성'이란 말을 쓰고 싶어지네요.
남재일의 개인성 강조는 저 역시 존중하고 저 역시 누구보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지만 그 '개인성'의 강조가 우리 시스템의 이념적 왜곡구조 속에서 자신을 숨기는 공간으로 자리잡진 않을까 자못 우려됩니다.대개 많이 배우고 현실의 절박함이 떨어지는-저같이,그러나 미래에는 곧 절박해질-사람들에게 특히 그렇습니다.남재일의 말을 왜곡해서 정리하니까 역시 '책보다 삽이네요' ^^ 삽 저도 좋아합니다.군대에서 삽질병이었고 지금도 돈벌려고 삽질하고 있으니 ^^

로쟈 2007-02-08 14:02   좋아요 0 | URL
두번째 기사도 읽어볼 만한데요.^^ 그리고 '합리적'이란 말에 대해서는 서두에 제가 '주석'을 붙였구요. 저대로의 주석이지만. '합리적 당파성'이라... '중용'에 대한 장정일의 비판과 같은 맥락으로 접수하겠습니다...

sommer 2007-02-08 14:03   좋아요 0 | URL
남재일의 '도그마,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개인주의, 위안의 해석학'이 '아버지의 이름'에서 '아버지의 이름들'로의 이행, '결정론에서 해석학으로의 이행'으로 읽힙니다. 더 나아가 '정치에서 경제로의 이행'으로 틀지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삶에 대한 해석학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에서 그의 개인주의는 정당하겠지만, 그의 '적'이 정치적 이데올로그나 고용주에 그치고 있다는 게 한계인 것 같네요. 이미 그가 지적하는 현상은 충분히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다양한 방향에서의 개인주의가 결국엔 일정한 '공통기반'(이것을 초월론적 토대라고 부를 수 있을 테지요)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일종의 임시적 '실내 환기'의 차원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로쟈 2007-02-08 14:08   좋아요 0 | URL
개인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저는 남재일 칼럼에서도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같은 걸 읽습니다. 실내 환기를 통해서 잠시라도 쾌적하고 안락한 공간이 마련된다면 '개인'으로선 더 바랄 게 없겠죠. 중요한 건 그런 '개인'이 요즘 절대 다수가 아닌가, 입니다...

기인 2007-02-08 17:30   좋아요 0 | URL
합리적 진보라니! 진보적 합리는 어떨까요. 어쨌든 왜 이게 '진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중앙일보=삼성이라는 등식은 요즘 깨졌는가요? 위로5학번까지 조선, 동아 기자는 없고, 경향과 한겨레 기자만 있지만.(모르는 사이에 기자가 된 선배-동기들은 제하고 ^^;) '중앙'이 합리적 진보라면 그 합리적 진보라는 것이 정말 '위안의 해석학'도 과중하고 자기기만으로서의 합리성이 아닐까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TV에서도 며칠전부터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PD수첩에선가(*'뉴스 후'였다) 한 꼭지로 다루는 걸 보면서 자료화면에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역임했던 소설가 김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침 오마이뉴스에 인터뷰기사가 떴다(한겨레21의 관련기사는 http://www.hani.co.kr/section-021025000/2007/02/021025000200702020646009.html 참조). 일독해보는 김에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편집자 주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듯하다.

오마이뉴스(07. 02. 07) 김훈 <시사저널> 전 편집국장 "편집권, 우동-자장면 선택 문제 아니다"

<시사저널> 기자들은 두 차례(1995~1997년, 2000~2002년)에 걸쳐 <시사저널>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훈을 지금까지도 '김국'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소설가이자 당대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김훈은 지금도 기자들에게 영원한 선배이자 편집국장일 따름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새 장편소설 집필에 몰두하느라 일산 작업장에 붙박여 두문불출하던 김훈이 홀연 <시사저널>사를 찾은 것은 지난 1월 25일. <시사저널> 기자들은 그 하루 전부터 회사의 일방적인 직장 폐쇄에 맞서 사옥 앞에 거리 편집국을 차리고 천막 농성을 벌이던 중이었다.

이날 종일 농성장에서 기자들과 함께했던 김훈은 다음날 저녁 다시 천막에 찾아와 <시사저널> 사태 이후 지켜왔던 침묵을 깨고 편집권 및 재벌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 의미심장한 언설들을 남겼다. <시사저널> 사태를 취재 중이던 MBC < PD수첩 > 강지웅 PD가 묻고 김훈이 답한 이날의 인터뷰 전문을 게재한다. 이 인터뷰는 최근 <시사저널> 전·현직 기자들이 펴낸 책 <기자로 산다는 것>에도 실렸다.
 <편집자 주>

- <시사저널> 노조가 직장 폐쇄에 항의하는 천막 농성을 벌이는 중입니다. 오늘(25일) 천막 농성장을 찾으셨던데, 후배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오늘 <시사저널> 사태는 저 개인의 생애와 관련된 것입니다. 30년 전 내가 젊은 기자였던 시절에 우리나라 언론들이 바로 이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 시절이었고, 대부분의 언론이 이 자리에서 무너졌습니다. 저도 그때 무너진 기자중 하나입니다. 오늘 이 사태에 대해 아무런 할 말이 없어야 마땅한 사람이죠. 그러나 30년 후에 내 후배들이 다시 같은 자리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30년의 세월을 무효화하는 것이고 인간의 진화와 발전을 부정하는 사태이기 때문에 나는 내 후배들이 여기서 무너지지 않고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끝없이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 <시사저널> 노조가 지금 상당히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젊은 기자 시절에 나와 내 선배들은 인간의 사회가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가치에 의해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언론 전체는 패배하고 좌절됐습니다. 그러나 30년 전에는 사실 덜 외로웠죠. 그때는 비록 우리가 패배했지만 억압적인 공포 정치에 대항하기 위한 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민주화가 되고 나니까 압박에 대항하는 연대의 대오가 많이 무너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더 외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사람들의, 시민들의 올바른 양식과 생각이 더 강하게 시대를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저는 이번 사태에 대해 대단히 희망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30년 전으로 퇴보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 '짝퉁' <시사저널>이 발행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은 결호가 생기게 해서는 안 되니까 그분들의 결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결호를 내느냐 안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지금 발행되는 <시사저널>의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 하는 문제도 아니고, 기본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본의 문제. 이것은 30년 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편집권의 문제이죠. 현재 경영진 쪽에서는 편집권을 자신의 인격권이나 재산권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중국집에 가서 우동을 먹느냐, 자장면을 먹느냐를 내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정도의 권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데 편집권이란 것은 우동이냐 자장면이냐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권이나 재산권이 아니라 언론이 사회적으로, 공적으로 작동될 수 있느냐 아니냐에 대한 의무의 문제입니다. 곧 편집권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로서의 권리로, 기본적으로 자유권에 속하는 사항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 출판의 자유에 속하는 사항이지 개인의 인격이나 재산에 귀속하는 사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인식이 기본적으로 부족했고, 인식의 진화가 없었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개인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편집권이란 이 세상에 없습니다. 편집권이 기자에 속한 것이냐, 편집인에 속한 것이냐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논의의 수준 자체가 저급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논의할 게 아니라 그 작동 방향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문제 삼아야죠. 편집인에게는 편집권이 지향하는 가치와 방향성, 이것을 수호할 의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회사 측은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이를 인격권이나 재산권처럼 오해한 데서 결국 이 모든 사태가 빚어진 것이죠. 30년 전의 착각이 아직까지도 작동되고 있다는 것은 참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 '짝퉁' <시사저널>을 보기는 하셨습니까?
"짝퉁이라기보다는 결호 방지용이라 해야겠죠."

- 서명숙 전 편집장이 쓴 글("김훈 선배의 눈물을 보았습니다")을 보니 '짝퉁' <시사저널>이 나온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그런 적 없어요. 난 이미 오래 전에 눈물이 다 말라버려서 이제는 먼지밖에 안 나옵니다."(이때 배석한 문정우 전 편집장이 부연 설명했다. "'짝퉁'을 보고 그런 게 아니라 (서 전 편집장과 만나던) 그날, 후배들 얘기를 듣다 그러신 거예요. '후배들이 집에도 안 가고 회사에서 산다, 너무들 열심히 일한다' 이런 얘기를 들려드렸더니 '햐, 고놈들 참 예쁘다, 언제 가서 술이나 한 잔 사줘야겠다' 하시다가 '그런 애들이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떡하느냐'면서 울컥하셨던 거예요.")

- 만약 발행·편집인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터졌다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말없이 한동안 담배를 피우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하더라도 결호 방어용을 냈을 겁니다. 결호는 일단 막아야 했을 테니까요(*김훈다운 멘트이다). 언론사 기자들이 실제로 파업해서 제작을 사실상 좌절시킨 것은 한국 언론사에서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죠. 참 고통스러운 일이고, 말할 수 없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죠."

-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시절에도 재벌 관련 기사 때문에 경영진과 편집권을 둘러싼 갈등을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며칠간 지방 출장을 간 사이에 경영진 지시로 재벌 관련 기사가 (편집 과정에서)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내가 상황을 몰랐죠. 출장에서 돌아와 상황을 파악한 뒤 곧바로 기사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고 인쇄했습니다.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고민할 게 없었어요. 그것이 정당한 방향이었으니까요. 다만 그 뒤에 회사와 일이 좀 있었던 것은 사실이죠."

- 편집국장 재직시 사표를 몇 번 제출하셨다는데, 그 뒤 어떻게 되셨나요?
"편집권을 둘러싼 분란으로 사표를 낸 일은 있는데 회사가 사표를 수리하지는 않았습니다. 왜 수리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어요. 아직 더 써먹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저 자를 쫓아냈다가는 더 큰 문제가 벌어질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겠죠. 어쨌거나 그 뒤에도 나는 회사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 그때는 문제가 이렇게 사회적으로 돌출되지 않았지요.
"정당한 방향을 찾아가는 것에 대해 회사 경영자들이 일정하게 이해했기 때문이겠죠. 그 점은 감사하게 생각해요. 지금처럼 끝까지 용납하지 않았으면 결국 문제가 터졌겠지요."

- 편집국장으로 계실 때 삼성 기사와 관련해 미묘한 일들이 많았나요?
(배석했던 장영희 기자가 먼저 대답했다. "삼성은 늘, 기사를 쓰면 집요하게 태클을 걸어왔어요. 삼성의 힘이란 당시에나 지금이나 대단해서 편집장 흔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지요. 그런데도 우리의 선배들, 편집장이나 간부들은 늘 일선 기자를 지지해줬고, 경영진 또한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를 크게 문제 삼지 않았죠. 그런데 금창태 사장이 오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그러다 이번 사태가 벌어진 거죠.")

"삼성은 세계 최고의 기업이죠. 일본 소니와 맞먹는 기업이잖아요. 우리 민족이 이만한 기업을 만들었다는 것은 분명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삼성은 정말 나라의 보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삼성이 그러한 거대한 힘을 가진 만큼 언론의 문제, 사회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 인문적인 생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문적인 생각, 교양 있는 태도,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언론을 대하고 시민사회를 대하는 부분에서 삼성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서 위신과 품격과 교양을 갖춰야 된다고 난 생각해요.

이건 삼성을 위해서 하는 얘기예요. 우리를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고. 난 삼성 미워하지 않아요. 근데 내 후배들은 미워하는 것 같아(웃음). 삼성은 유능하고 소중한 기업이죠. 달러를 벌어오고 우리를 먹여 살리고 있죠. 이런 훌륭한 기업이 어째서 사회적 관계나 언론과의 관계에서 실패하고 있는지…. 이러면 그 기업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기업이 되기 어렵잖아요. 이번 일이 삼성이 좀 발전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현재 상황을 타개할 만한 나름의 해법이 있으신가요? 회사를 위하고 후배들을 위할 수 있는 어떤 길이.
"거야 있지요. 경영진이 스스로 거취를 정한다면 모든 문제가 봇물 터지듯 일시에 풀려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시사저널> 경영진이 우선 편집권에 대한 이해를 바꿔야 합니다. 이것을 바꿀 수 없다면 그분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에요. 사회적으로 경영자가 고립되면 결국 그 타격은 매체에 돌아가는 거 아니겠어요? 그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죠. <시사저널>이란 매체는 비록 약소하지만 굉장히 건강한 매체였어요. 작지만 나름대로 강력했다고. 이것의 숨통을 죽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근본은 편집권에 관한 문제였으니까,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바뀌어야 된다고 봐요. 기자들도 유연하게 상황에 대응해야 할 테고요."

07. 02. 08.

P.S. 내친 김에 아직 출간되지는 않았지만 <기자로 산다는 것>에 대한 고종석의 독후감을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론 시사저널을 몇 번 사보았고(김훈국장 시절) 한 친구 문제로 한 기자와 인터뷰를 해본 적이 있다는 게 유일한 시사저널과의 유일한 인연이다. <기자로 산다는 것>에서 그 기자의 이름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일보(07. 02. 01) [고종석 칼럼] 기자로 산다는 것

지난해 6월 발행인의 독단적 기사 삭제에서 비롯된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사태가 기자들의 무더기 징계와 노조의 파업, 회사측의 직장폐쇄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이 잡지의 전현직 기자들이 자신들의 직업 정체성을 더듬어보는 책을 만들고 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표제로 다음주 출간될 이 책의 텍스트를 미리 들여다보노라니, 언론계 한 귀퉁이에 인연을 걸쳐놓은 자로서 알량한 책임감이 새삼 느껍다.



● 시사저널 사태로 느끼는 책임감
일간신문과 방송과 인터넷 포털사이트가 지배하는 미디어 시장에서 인력이 넉넉지 않은 한 시사주간지가 시사저널만 한(곧이곧대로 말하자면 한 달 전까지의 시사저널만 한) '신뢰의 힘'을 키우자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는 기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문가 못지않은 안목을 키우는 것이다. 그러지 못할 때, 시사주간지는 주류 저널리즘의 '뒤늦은 요약'이 될 수밖에 없다. '뒤늦은 요약'이 되지 않으려면 시사주간지 기사는 주류 저널리즘이 다다르지 못한 심층성을 움켜쥐어야 하고, 기사의 심층성을 떠받치는 것은 기자의 전문성이다. 시사저널은 그간 적잖은 기자들의 전문성에 힘입어 심층기사의 전형을 도톰히 보여주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의 글 몇 개에는 초년기자가 세월과 나란히 전문기자로 자라나는 과정이 담겼다.

신뢰의 두번째 조건은 공정성이다. 기사의 공정성은 기자가 특정 정파로부터는 물론이고 자본이나 노동을 우람하게 대표하는 주류 사회세력들로부터, 더 나아가 사사로운 인연으로부터도 독립될 때만 확보된다. 그런 독립적 시각들이 획일적일 수는 없다. 그것들은 때로 맞버티기 십상이다. 그렇게 맞버티는 독립적 시각들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권한이 편집권이다. 그러니 편집권은, 바람직하기론, 기자공동체 전체가 공유할 수밖에 없다.

시사저널은 그간 그런 독립적 시각의 견지와 그 시각들의 합리적 조율에 충실해 왔다. <기자로 산다는 것>에선 시사저널 기자들이 정파와 사회세력과 사적 인연으로부터 독립적이 되기 위해 쏟아온 노력의 자취가 엿보인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 않는 장영희 기자의 글에서도 이 점이 또렷하다. 그는 경제전문기자로서 자신이 문제삼아 왔던 것은 기업이 아니라 기업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삭제기사의 핵심이기도 했다.

시사주간지가 주류 언론과 경쟁할 수 있는 또 다른 힘은 소위 '근성'에서 나올 것이다. 시사주간지의 장처(長處)라 할 탐사기사는 심층성만이 아니라 지속성으로도 뒷받침돼야 한다. 시사저널은 이 점에서도 나무랄 데 없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사건이나 군대 의문사 사건 그리고 최근의 제이유그룹 사기사건을 비롯해, 시사저널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0년도 훨씬 넘게 한 사안을 추적하며 이 문제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을 촉구해 왔다. 그리고 시사저널의 장기 탐사기사들은, 드물지 않게, 주류언론에서도 메아리를 얻었다. <기자로 산다는 것>은 시사저널 기자들의 그 '근성'에 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 매체 신뢰는 기자에게서 나온다
<기자로 산다는 것>의 텍스트에는 드문드문 격정과 집단적 자기애가 배어있다. 격정과 자기애는 결코 저널리스트의 미덕이 아니지만, 시사저널 기자들로 하여금 이 힘겨운 싸움을 버텨내게 하는 미량원소일 것이다. 고제규 기자는 수습시절을 되돌아보며 선배 기자가 툭 내던진, '기자가 곧 매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 고 기자는 그 말을 '기자 개개인이 시사저널 안의 또 다른 매체'라는 뜻으로 해석하며, 기자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는 기사는 결코 쓰지 않는 '시사저널 문화'가 그 말에 담겨있다고 덧붙인다.

그것이 옳은 해석이겠으나 나는, 바깥사람으로서, 그 말을 '기자의 됨됨이와 태도가 매체의 성격을 규정한다'라는 뜻으로 평범하게 해석하고 싶다. 한 달째 나오고 있는 '대체 시사저널'은 내 식으로 이해한 '기자가 곧 매체다'라는 말의 엄중함을 새삼 일깨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드팀전 2007-02-08 09:52   좋아요 0 | URL
김훈아저씨의 대장근성은...^^ 전 카리스마 휘두르고 다니시는 분들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기자 조직의 자율성과 내적 위계가 '김국장'님과 전설적인 '선배' 사이에서 언뜻 언뜻 보이네요...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앞에서 막아주는 사람이 하나 있으면 좋긴하겠지요.그렇다고 막아주는 사람이 언제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만은 아닐테지만...

나비80 2007-02-08 10:14   좋아요 0 | URL
시사저널 쪽 사람들 기자 정신과 자존심으로 꼬장꼬장하신 분들 많던데...
사태가 조속하고 분명하게 해결되었으면 합니다.


로쟈 2007-02-08 16:21   좋아요 0 | URL
PD수첩의 보도로 사건이 공론화되었으므로(포털에도 크게 뜨고) '결말'도 곧 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팀전 2007-02-08 17:07   좋아요 0 | URL
금창태사장이 PD수첩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했군요.손석희가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같이....
 

지난달인가 한국일보에서 새로 연재하는 '우리시대의 고전50' 관련기사와 목록을 옮겨온 일이 있다. 선택과 배제의 문제가 개입하긴 하지만 어떻든 이런 캠페인을 통해서라도 동시대의 삶과 인식의 지평을 밝혀주고 넓혀준 책들을 다시금 상기해보는 일은 뜻깊다고 생각한다. 내일자 신문에는 그 여섯번째 연재가 게재되는 듯한데, 도정일 교수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을 다루고 있다. 모처럼 내가 완독한 책이기도 해서 거리낌 없이 스크랩해놓는다. 그게 벌써 12년도 더 전의 일이군.

기사에서 문학평론가로 호명되고 있지만, 이 책은 저자의 유일한 문학평론집이면서 유일한 단행본 (단독)저작이기도 하다. 기사의 말미에도 비치고 있지만 12년 전에도 저자는 원고 더미를 정리해서 당장이라도 서너 권 정도의 책은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월무상이다. 아직 한권도 안 나왔다.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일에 너무 헌신하신 탓인 듯한데, 책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급의 저자 한 사람이 책을 낼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독자로서 안타깝다. 가령,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같은 제목의 책이라면 서가에 꽂아둠 직하지 않은가? 그 안타까움을 나눠드리고 싶다.

한국일보(07. 02. 08) 풀밭에 앉아 詩를 쓰다 여우비에 젖는 꿈을 꾸다

"친구여, 닭을 잡아 먹지 마라 / 그 닭은 그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므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에서의 메타포는 미상불 기괴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시인의 말을 빌면 할머니를 소스에 찍어 먹는 형국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오늘날 그 같은 행위는 광범히 유포돼 천연덕스런 일상이 되고 말았다.

문학평론가 도정일(66)씨는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끄집어 내고,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시인들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인내력마저 소진시켰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그 같은 확신의 밑바닥에는 이런 명제 하나가 불길하게 흐물대고 있을 거라고 그는 예시한다. ‘자동 판매기가 / 고무 호스로, 밑을 대주는 종이컵들을 윤간하고 있다. / 창녀들은 포주의 뱃속에서 / 밥을 빌어 먹는다.’(최승호의 <무인칭 시대> 중)

운문의 형식을 빌어 그려진 저 지옥도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말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기 것과도 다른 욕망 생성의 사회적 환경, 정확히 말하면 ‘천민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씌어져 왔다. 21세기, 저 환경은 더욱 정교해져 ‘탐욕’이라는 형태의 지배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책 이미지

그가 여기 저기 실린 평론들을 묶어 처음으로 낸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읽어 낸 생명들의 표정이다. 시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지만, 곳곳에서 문명 비평의 체취를 짙게 풍긴다. 전례를 찾기 힘든 글쓰기에, 사람들은 ‘경쾌한 듯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배제당한 자연은 역으로 인간을 배제한다. 시인은 눈 내리는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비를 겁내고, 농사꾼은 땅을 믿지 못한다. 비슷한 이유로, 풀잎은 시인을 배제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비 맞으면 안 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깊이 박혀 있다’ 또는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함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는 진술을 보라.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시인들마냥, 그 역시 강으로부터 배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 분열의, 평론가적 능력이 필요하다. 책의 말마 따나 산성 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그 같은 현실 앞에 낭패감을 느끼고, 처리 곤란한 딸꾹질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르쿠제가 강조했던 것처럼 자연이 노예화할 경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도 노예화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죠.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곧바로 문학의 재난이며, 자연의 수난은 곧장 문학 자체의 수난이에요.”.

문명 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 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를 예시한다. 창작과비평 등 잡지ㆍ강연 등에 산발적으로 소개된 글들을 어느 눈밝은 편집자가 모아 두었다, <녹색평론>에 썼던 제목을 내세워 단행본으로 묶은 이 책은 1994년 1쇄를 찍은 이래 현재 10쇄까지 찍었다는 기록에 빛난다. 그 와중에 1만부 팔리고 절판된 기록도 갖고 있는, 별난 문학평론집이다. “게으른 나로서는 수정ㆍ보완까지 했죠. 10년이 지났는데도 갖고 와,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에, 저도 놀랄 정도예요.” 아예 재판을 내자는 제의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책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광풍을 체감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동유럽 붕괴, 마르크시즘 퇴조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주의와 해체론 쪽으로 갔어요. 책 속에 일관된 반포스트모더니즘론은 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의 결과였죠.”

비판의 칼날은 보건 사회ㆍ청결 사회에 대한 집착, 웰빙에 대한 광적 증후에 예리하게 번득인다. 원로 인문학자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삶의 부조리,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니까요. 행복 이데올로기에 미친 시대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릅니다.”

책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 인문학이 택할 수 있는 방편도 제시했다. 문학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만이 아닌, 문학과 대중의 괴리를 좁히고 문학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 서문이 밝힌 대로다. “문학과 삶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자는 나의 비평적 모토가 발현된 거죠. 대학에서의 난삽한 비평 논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니까요.” 그는 한국 문학 평론이 그 부분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문학 평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힘 준다.

평론의 형식과 문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에세이나 문학 저널리즘 같은 문체로, 대중의 삶에 접착된 형식말예요. 친근한 용어를 구사, 이론성ㆍ난삽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인문학적 글쓰기.” 이런 종류의 평론은 처음 접했다며 일반인들은 반겼다. 대학 비평, 문학 이론 가르치며 한국 문학 현장 비평은 삼가왔던 그가 <문예중앙> 주간 정준수의 ‘꼬드김’에 몇 번 연재했던 계간평이 거둔 결과를 보면 자신도 좀 놀랍다. “이미 당시 문학 평론과 대중 간의 괴리는 심화돼 가고 있었죠. 지금은 서로 백리 밖이지만.”

이 반자연적 시대, 그의 책이 노둣돌 삼는 ‘숲’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태 환경이에요. 좁게는 자연,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죠. 지금 한국은 볼거리 문화로 사람들을 마취시키려는 서커스 정책으로 통합돼 있잖아요?” 364쪽에 달하는 책은 눈ㆍ비 오면 오히려 두려워 하는 이 시대, 즉 자연이 망가진 때 문학이 당해야 하는 곤경을 증거한다. 삶의 모태인 자연을 착취ㆍ파괴하는 현상을 왜 추방해야 하는지, 문학은 철저히, 뼈저리게 느껴야 함이 동시대 우리 문인들의 육필로 증거돼 있다. 사회 혁명, 생산 양식, 소비 양식에 왜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지도. “생태란 게 어떻게 문학 속으로 용해될 수 있나를 보여주자는 거 였죠.”

그러나 어느 누가 냉장고를, 자동차를 포기할 것인가? “예술 작품이나 교육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갈 수 있어야죠.” 그는 일상, 즉 현실에 아직도 문학이 할 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대중 문화에 쫓겨, 문학 자체가 변두리에 내몰린 때예요.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부터 확산돼야 하는 시기죠.” 그는 이 책이 예술ㆍ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를, 나아가 평론가들이 문학과 소비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재정립해 주기를 소망한다.

책 속에 드러난 바, 그의 현실 인식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화급하다 ‘지금의 문학은 오락의 한 형태다. 대중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물의 형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문학과 오락의 화간(和姦) 시대다.’ 그는 “문학이 이제 아예 말초적ㆍ외피적ㆍ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 온 문학의 속성 혹은 운명론이 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반(反)행복론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엔터테인먼트 수준을 높이게 하고, 다양하면서도 근원적인 딜레마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기려 하죠. 삶이 말초적 오락의 수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예술이 문학이니까요.”

생태 파괴와 간통한 온난화가 성큼성큼 한반도를 잡아 먹으려 오는 때, 그의 말은 이 책의 속편을 암시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눈앞의 삶에 매여 있다. 그들에게는 개발 정책만큼 매력적인 것이란 없다. 한국에서, 환경청이란 영원히 찬밥 신세 아닌가?”

‘책 읽는 사회…’ 5년 활동, 농어촌 57개 도서관 재건

명함이 말하듯, 또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는 글보다 행동으로 더 이름 높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그의 명함이 알려주는 바, 그는 <책 읽는 사회 문화 재단>의 이사장이다. 시인이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시대, 그의 책은 숲속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가 책의 숲에서 사람의 숲으로 온 것은 1999년 문화연대 출범에 맞춰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고 발로 썼다. 잡지사, 언론사, 대학 교수(작년 2월 퇴임) 등을 두루 거쳐 지금은 민간 사회 운동의 축이 된 그가 한갓지게 자연을 완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평론이라도 그가 쓴 글은 여느 책상물림의 글과 달랐다. 신문의 칼럼을 써도, 그의 논조는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죽통에 쉬파리 엉기듯 달려들어 세상의 소음을 늘리는 데 공헌하는 3류 학자’(<시인은…> 389쪽)의 글이 아니었다. YS 정권 때는 정부의 문화 정책 자문에, DJ 때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에 적극 응했던 그의 관심은 현실 속의 문화 운동 또는 정책이었다.

지난해 2월 경희대 퇴임 직후, 지인들은 “책 없는 퇴임 없다”며 “책 내고 강연회도 갖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든 <책읽는…> 사업에 열중하느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년 받은 암 수술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책 읽는 사회…’ 사업에 송두리째 바쳤지만, 그 동안 잃어 버린 시간들을 앞으로 복구해 낼 것”이라 다짐한다. 대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난해 9월 이후 농어촌 낙도 지역의 도서관 57개를 도시 도서관 뺨치는 수준으로 리모델링한 ‘작은 도서관 사업’은 한국 땅에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공공 지식’의 중요성을 새삼 알려낸 쾌거로 기억된다.

그의 컴퓨터에 간직돼 있는 20여권 분량의 원고는 더러 제목만으로도 족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이성복 시인의 어투를 흉내낸다면, 일에 밀려 하드 디스크에서 뒹구는 원고들은 언제 잠을 깰까?(장병욱 기자)

07. 02. 07.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이드 2007-02-07 23:38   좋아요 0 | URL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 이군요

 크리스티나 페리로시의 이 책이 생각났어요. 스페인좌파작가의 쓸모없(어 보이)는 노력과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좀 비슷한 색인가요? ^^


로쟈 2007-02-07 23:58   좋아요 0 | URL
거기에 '쓸모없는 독서의 노력'도 덧붙여야 되겠네요.^^

기인 2007-02-08 00:03   좋아요 0 | URL
아; 도정일 선생님의 유일한 단행본이라는 말씀은, 평론집으로서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래도 유일하다니 놀랍네요. 퍼갑니다. 읽어봐야 겠네요. 한국일보 즐찾해야겠어요 ㅋ

로쟈 2007-02-08 00:15   좋아요 0 | URL
단독저작으론 제가 알기로 유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