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하던 대로 경향신문에서 '작가와 문학 사이' 연재를 옮겨놓는다. 오늘의 한국문학을 이끌고 나가는 젊은 시인, 작가들의 면면을 매주 한 사람씩 확인해보는 일은 즐겁고도 자극적이다. 이번주에 소개되는 작가는 작년에 첫 장편소설 <리나>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여성작가 강영숙씨이다. 문학평론가 심진경의 작가리뷰와 함께 작년 한국일보에 실린 작가의 수상소감을 같이 옮겨놓는다. 어제 세상을 떠난 스승 오규원 선생에 대한 언급도 소감에는 들어 있다(시에서 소설로 장르를 바꾼 건 스승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작가로서건 여성작가로선 앞으로 '큰 작가'로 성장해가는 것이 독자의 바람이면서 돌아가신 스승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

경향신문(07. 02. 03) [작가와 문학사이](5)강영숙-여성을 배반하는 여성작가
강영숙은 여성작가다.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작가에게 미안한 일이기도 하다. 1990년대 여성문학이 ‘붐’을 이루었을 때 여성작가라는 레테르는 비평적으로 옹호되었을 뿐만 아니라 작가들에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지금 작가들에게 ‘여성’이라는 말은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협소하게 만들지도 모르는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다. 법률상 여성인 작가들조차 이제는 그냥 작가로 불리기를 원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여성? 웬 여성문학?” 그러니 강영숙을 여성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영숙은 여성작가다. 그런데 여성작가이되 관습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을 배반하는 여성작가다.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일반명사 여성과는 많이 다르다. 일단 그녀들은 덩치가 크지만 힘이 세지 않고 무신경하면서도 섬세하다. 강하면서 나약하고 대범하면서 소심하다. 그들은 어떤 특정한 인물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다면체적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쉽게 포착되기 어렵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종의 중간자가 되고 싶었다”(‘자이언트의 시대’)는 작가의 고백은 관습적인 성별 범주에서 벗어나고 싶은 작가의 바람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이즈음 강영숙만큼 여성의 성과 육체를 문학적 사유의 매개체로 적극 활용하는 작가가 있을까. 소설 ‘봄밤’(소설집 ‘날마다 축제’ 수록)의 마지막 구절인 “임신이었다”는 오정희의 ‘중국인 거리’의 마지막 구절인 “초조였다”를 떠올리게 한다. 임신은 초조로 상징되는 사춘기 여자아이의 첫 번째 성장통에 이어지는 제2의 성장통을 암시한다. 오정희 소설에서 초조를 겪는 여자아이의 육체적 변화가 그대로 중국인 거리로 상징되는 낡은 세계의 몰락과 미군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재연하는 것처럼, 강영숙 소설에서 임신한 여자의 육체는 이 세계의 비극적 기미를 포착해냄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비극성이 빚어낸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제 여성의 육체는 강영숙에 이르러 세계의 고통을 통각하고 재현하는 허구적 장소가 된 것이다.

장편소설 ‘리나’의 ‘국경’은 그러한 여성의 육체적 감각법을 통해 구현한 허구적 장소를 상징한다. 일차적으로 ‘리나’는 고통스럽지만 이미 익숙해진 탈북자의 현실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리나’가 성취한 득의의 영역은 매춘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탈북여성의 현실을 고발하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는 주인공 리나의 국적을 지우고 기원을 삭제함으로써 탈북자 리나를 국경을 넘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국경 탈출자 일반에 관한 이야기로 만든다.
그리하여 ‘리나’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사연이거나 자본의 유통 경로를 따라 남하하는 매춘여성에 관한 기록으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과장되게 얘기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도 언제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경계를 넘어가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런 과정에서 이전의 ‘나’ 위에 다른 존재들이 겹치고 쌓이는 경험을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복수적 존재가 된다. 리나의 ‘국경 넘기’는 바로 그런, 이쪽과 저쪽에도 포섭되지 않는 복수적 존재로서의 삶 자체를 의미한다.
결국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리나는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그러한 ‘국경적 삶’은 고집스럽게 ‘나’를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국경 넘기를 통해 리나는 다른 무수한 국경적 존재들과 만나 그들의 비극적 상황을 자신의 육체 위에 허구적으로 구축한다. 우리는 그들을 타자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타자는 주체의 바깥에 거주하는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나’의 단단한 외피를 말랑말랑하게 만들면서 ‘나’ 안으로 들어와 종국에는 ‘나’와 구별되지 않는, 이미 ‘너’가 아닌 존재들이다. 강영숙에게 여성은 그렇게 ‘너’를 ‘나’ 안으로 들여와 섬길 수 있게 하는 문학적 출발점인 것이다. 그러니 강영숙은 어쩔 수 없이 여성작가다.(심진경|문학평론가)

한국일보(06. 11. 20)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 강 영 숙
"우린 모두 리나처럼 슬픔의 자루 하나씩 달고 사는 건 아닐까"
"소설 쓰는 건 벼랑끝서 행하는 피나는 소통 따뜻하고 시원한 공기 한뼘 선물 받은 기분"
올해도 한국일보문학상 후보자 중 한 사람으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할아버지들이 꽉 들어찬 인사동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전화를 몇 통 했다. 후보에 오를 때마다, 올해도 괜찮은 단편소설 하나는 쓴 거라며 연례행사를 치르듯 그냥 흘려보냈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저녁,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는 촌스럽게도 덜컥 몸살이 나버렸다. 데뷔 후 8년 동안 몸 속에서 함께 살았던 그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가면서 이 몸살이 기분 좋아졌고 누군가 지나가면서 머리를 한 대 가볍게 툭 친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혹시라도 작가적 기절이 있었다면 그게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볼 때가 있다. 나는 키가 크다는 이유로 초등학생 시절 내내 기초 종목인 장단거리 달리기와 넓이뛰기 선수는 물론 스케이트 선수와 배구 선수로 지냈다(*이 작가에게서 '자이언트' 모티브의 기원이겠다). 일기를 자주 쓰기는 했지만 그저 그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지금까지 직업을 가지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할 수도 있겠다.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게 지겹기도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세 잊고 똑같은 삶의 패턴으로 다시 돌아간다. 작가라고는 하지만 작가다운 일상이란 것도 거의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이들을 깨워 학교와 유치원에 보낸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는 직장일과 관계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약속이 없는 날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간다. 3년째 재택근무자인 나에게 천장이 높은 도서관은 공부방이자 사무실이고, 도서관에서 보는 노을은 아주 쿨한 주홍색이다. 그러다 이것도 저것도 다 지겨워지면 시내로 나가 영화클럽 멤버들과 함께 영화를 본다.
80년대 후반의 문예창작과는 시인 지망생들로 넘쳐 났고 나도 아주 섹시한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은 학생들 중 하나였다. 오규원 선생님의 충고로 장르를 소설로 바꿨고, 데뷔하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발광도 했지만, 그 긴 시간이 역설적으로 어떤 순발력 같은 것을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춘천에서 살다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로 이주한 열 다섯 살 이후부터 아주 긴 일기를 썼다(*춘천은 인천에 이어서 작가 오정희의 도시이기도 하다). 서울은 슬픔에 떠밀려 다니는,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한 척의 거대한 배 같았다고 할까. 습작 때도 그런 막연한 도시 이미지를 묘사했다. 그러나 쓰면서도 내가 무엇을 쓰는지, 내가 왜 쓰는지 알고 시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어릴 적, 부엌 석유곤로 위의 냄비에서 솟아나는 흰 김을 가만히 바라보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이 있었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 항상 밝은 성격에 친구들이 많았지만 그렇게 무엇인가를 응시할 때, 아주 가끔씩 마음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이상한 슬픔을 느끼곤 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도 크고 작은 슬픔의 자루 하나씩을 허리 끝에 달고 다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수많은 ‘리나들’ 또한 국경을 넘은 후부터 일정 기간 동안의 시간을 자루 속에 넣어둔 건 아닐까. 누구에게나 그런 사라진 시간은 있는 것 같다.
리나는 어쩌면 밖으로 나가려는 삼라만상, 모든 존재의 여정을 대변하는 인물일 수도 있다. 리나와 나를 동일시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피차 사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불만이 많은 사람들은 문제를 드러내고 싸워야 한다. 그것은 불편한 일인 동시에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가는 일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피나는 소통의 과정인 동시에 뒤로 돌아서면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환각의 공간을 헤매는 것처럼 모호한 일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리나>는 우울증의 소산이다. 나는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제안하는 일에 참여하고 소설을 쓴다(*이 작품이 내게 떠올려주는 소설은 카프카의 <성>이다. 나는 작가가 '국경'이란 테마로 또다른 카프카적 세계를 더 발견해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멜랑콜리에 유머를 칵테일한). 일의 양이 많지 않아 잠시라도 짬이 나면 슬픔들이 마음을 치고 머리로 올라온다.
긴 노동이 끝난 후에, 따뜻하고 시원한 공기 한 뼘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내 눈과 뱃속이 열을 받아 다시 따뜻해지길 기다린다. 그리고 내가 한번도 도달할 수 없는, 새로운 텍스트 한 편을 구상하기 위한 시간을 죄책감 없이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순한 양처럼 착해져서 아침에 좀더 일찍 일어나야겠다, 엄마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 온갖 다짐으로 마음이 몹시 분주하다.
07. 02. 03.
P.S. 보너스 트랙으로 <리나>의 출간을 다룬 한겨레 최재봉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아직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지나쳐도 좋겠다(작가와 독자와의 만남을 다룬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374739 참조). 읽을 생각이 없으신 분들은 이 탈출소녀의 이야기를 사서 그냥 서가에 꽂아두시길. 그러다 좀 우울할 때 읽어보시면 되겠다. 아니면 어디로 탈출할 때 여권과 함께 가방에 넣으셔도 좋겠고...

한겨레(06. 09. 16) '국경 탈출’을 사랑한 소녀
소설가 강영숙(40)씨가 첫 장편 <리나>(램덤하우스코리아)를 펴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 소녀 ‘리나.’ 그는 부모님과 남동생과 함께 국경을 넘어 탈출길에 오른다. 그의 조국은 대륙의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는 작은 나라이고, 그가 향하려는 곳은 “내가 태어난 나라와 같은 말을 쓰지만 때깔이 전혀 다르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알려진 P국”(344쪽)이다. 그가 남쪽으로 오기 위해 북한을 탈출한 ‘탈북자’임은 분명해 보이는데, 작가는 구체적인 나라 이름과 지명을 괄호침으로써 현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러 흐릿하게 만든다. 그 결과, 국경을 건너는 리나의 탈출 이야기는 영토와 경계를 넘는 탈주와 모험에 관한 일반적인 서사로 옮겨 가게 된다. 독자는 물론 이 소설을 리나라는 이름의 한 탈북자가 겪는 시련과 고난의 이야기로 읽을 자유가 있겠지만, 적어도 작가의 의도는 ‘탈북 수기의 소설화’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리나는 결국 ‘P국’으로 가지 못한다. 소설의 중후반부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리나는 대륙의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로질러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국경을 넘어 제3국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제3국에서 다시 대륙으로 들어와 동북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대륙을 한 바퀴 돌아 떠나온 지점에 다시 와 있다는 황당한 사실을 안 리나는 울지도 않았다.”(191쪽)
물론 애초에 리나는 ‘P국’으로 가고자 했다. 그곳은 무엇보다 풍요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최초의 국경을 넘어 대륙에서 마주친 풍요의 일단을 엿본 리나의 생각이다: ‘내가 가서 살게 될 P국은 이 나라보다 더 잘산다고 했어. 나도 저 여자들처럼 청바지와 구두를 신겠지. 정말 대학에도 갈 수 있을까. 배가 터지게 먹기는 할 거야.’(26쪽)
감시와 단속을 뚫고 몇 개의 국경을 넘는 탈출이 손쉬울 리 만무하다. “국경은 그저 퇴로가 없이 사방이 막힌, 비탈지고 조용한 산길의 일부일 뿐”(13쪽)이라고는 하지만, 그 국경을 넘어 다른 영토로 스며들기까지는 숱한 고난을 거쳐야 한다. 장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산길을 걸어야 하는 탈출자들이 취하는 행동을 보라.
“오후가 되자 노인들은 머리카락을 뒤져 이를 잡아먹었고 남자들은 땅속을 파거나 바위를 들쳐 누에처럼 생긴 벌레를 잡아 구워 먹었다.(…)리나도 잠자리 두 마리와 전갈처럼 생긴 벌레 한 마리를 먹었다.(…)사람들은 불 앞에 모여 앉아서 자기 팔을 입으로 물고 있거나, 겨드랑이를 긁어서 나온 것들을 입 속에 넣거나 발 새에 낀 때를 빼먹었다. 머리가 긴 신혼의 여자는 자기 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었다.”(48쪽)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은 대로, 탈출자들이 겪는 참상이 효과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시련과 시험을 거쳐 리나는 드디어 ‘P국’으로 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뜻밖에도 식구들을 버리고, 아울러 ‘P국’을 향한 꿈도 과감히 접은 채 또 다른 모험 길에 나선다. 그것이 반드시 “너네 나라는 미쳤고 P국은 썩었어”(109쪽)라는 선교사의 말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탈출의 초기 단계에서 식구들과 헤어져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 시달렸으며, 자본주의적 풍요의 더러운 이면을 엿본데다, 특유의 삐딱한 기질과 모험 충동이 결부되어 내려진 이런 결정은 소설 <리나>를 탈북자들의 수기와 뚜렷하게 구분짓는다. “탈출이란 것이 이제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투석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혈액이 든 비닐 주머니처럼 느껴졌다.”(117쪽) 이제부터 리나의 탈출은 목표를 향한 다가감이 아니라 목적 달성을 끝없이 유예시키는, 탈출 자체를 위한 탈출로 성격을 바꾼다.
이후 리나의 삶의 유전은 현란하다 싶을 정도로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어렵게 넘어간 제3국에서 대륙으로 되돌아온 그는 우연한 계기에 천막 극장의 가수가 되었다가는 집창촌의 창녀로 팔려 가고, 집창촌이 헐린 뒤에는 또 다시 대륙 북동쪽 경제자유구역의 공장 노동자로 전신한다. 소설의 중후반부 이야기는 톈진 정도로 짐작되는 이곳 공단지대에서 펼쳐지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리나는 나중에는 공단 외곽 술집 주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다.
최초의 노예노동과 성적 착취에서 벗어나고자 남자를 죽였던 리나는 이 과정에서 또 한 번의 살인을 저지른다. 사람을 죽이는 순간 리나가 “어쩌나, 난 다시는 살인은 안 하려고 했는데…”(261쪽)라며, 흡사 실수로 예쁜 꽃병을 깨뜨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하는 대목은 이 소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끔찍한 사건이 이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소설의 어조는 결코 어둡거나 심각하지 않다. 리나의 낙천적이며 강인한 성격 탓이겠지만, 극도의 고통과 수난조차 한 바탕 유쾌한 모험담쯤으로 그려진다는 데에 소설 <리나>의 개성이 있다.
모험과 탈출을 사랑하는 리나로서도 공단지대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무엇보다 술집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쑬쑬했다. 그러나 가스 탱크가 폭발하는 바람에 공단은 쑥대밭이 되고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한 가운데, 살아남은 리나 역시 화학 가스에 노출되어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정부는 공단을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리나는 또 다시 국경을 넘는 탈출 길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이번에는 남쪽이 아니라 북쪽, “코뿔소처럼 생긴 유목민의 나라”(340쪽)가 목적지다. 리나의 수중에는 그를 ‘P국’으로 데려갈 만한 달러가 모여 있었다. 그러나 리나는 그 돈을 선교사에게 건네며, 이미 ‘P국’에 정착한 식구들에게 전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탈출이 지닌 근본주의적 속성을 또 다시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시 국경. 소설의 앞과 뒤에는 리나가 넘으려는 두 개의 국경을 묘사한 비슷한 문장들이 배치되어 있다.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은 어느 순간 활짝 열릴 거라고 믿었다.”(11쪽)
“리나는 또다시 저만치 앞 허공에 푸른 둑처럼 펼쳐져 있는 국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348쪽)
리나의 삶은 하나의 국경에 이어 또 다른 국경을 거듭해서 넘는 월경의 연속이다. 소설에는 “세기가 바뀌고 난 후 전 세계의 국경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했다”(310~311쪽)는 문장도 있거니와, 몸살은 중병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회복과 신생의 가능성 쪽으로도 열려 있지 않겠는가.(최재봉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