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 연재의 이번주 꼭지는 '가라타니 고진'이다. 문학평론가이자 가라타니 번역자로 잘 알려진 조영일씨의 소개를 옮겨놓는다.

대학신문(07. 10. 0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⑤ 가라타니 고진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비평가로서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또는 사상가)로서의 얼굴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를 비평가로 여기는 사람은 소수인 것 같다. 물론 얼마 전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를 제출해 한국문단을 한동안 긴장시킨 바 있지만, 그런 주장은 도리어 그가 문학을 완전히 떠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와 같은 판단에는 『트랜스크리틱』이나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사상서들이 그의 주저로 간주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사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흔히 아는 의미에서의 문학비평을 거의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철학이나 사회사상 쪽으로 관심대상을 넓혀왔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정작 가라타니 자신은 비평가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철학자이기보다 비평가이길 원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가 개념을 좇기보다 문제를 좇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극단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철학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는 완전히 이질적인 두 상황이 각각 존재했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전자의 시대였기에 후자의 시대가 가능했다는 의미다. 지난 세기 수많은 철학자들이 등장하고 또 사라졌다. 그런데 들뢰즈의 말처럼 철학사가 개념창조의 역사라고 한다면, 철학이란 서로 다른 개념들 간에 이뤄지는 힘겨룸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개념들은 어떻게 생성되고 또 어떻게 사라지는 것일까? 바로 개념들의 배치에 의해서다. 즉 ‘이항대립’을 통해 구축되기 마련인 개념들은 어느 쪽을 더 우위에 놓느냐에 따라 이전 개념군이 파괴되고 바로 그 자리에 새로운 개념군이 자리잡는 방식으로 배치된다. 이런 이유로 알튀세르는 철학에는 무의미한 형식적인 전복운동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철학과 달리 개념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주어진 문제들에 집착하면서 그에 대한 인식이 개념화되는 것을 끊임없이 회피한다. 그러므로 비평의 관심은 항상 개념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를 향한다. 다른 말로 비평을 한다는 것은 개념을 낳는 문제(조건)들과 씨름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오로지 이동을 통해 가능하다는 말이다. 가라타니가 비평을 ‘대립’이 아니라 ‘이동’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비평은 이를 통해 ‘개념의 노동’(헤겔)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금껏 수많은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우리에게 소개돼 왔다. 그러나 동시대 사상가 중에 가라타니만큼 널리 읽힌 사람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의 책을 그토록 탐독해온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라타니의 책은 여느 철학서보다 쉽기 때문이다. 단순히 비슷한 한자어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중심개념이라고 할 만한, 다시 말해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익혀야 할 개념(핵심용어)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대신에 기존 개념들의 의미를 조금씩 이동시키는 방법으로 논의를 펼쳐가기에, 딱히 철학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는 독자라도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그 흐름을 쫓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많은 이들이 철학의 대중화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그에 부응하는 성과를 내지 못했으며, 혹 대중적으로 성공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지적 임팩트가 제거된 요약본을 내놓는 데 그쳤다. 그러므로 가라타니는 진정한 의미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저서들이 마냥 쉽게 이해되는 것만은 아니다. 아니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지만,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들을 소화하기란 생각만큼 녹록치 않다.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는 생산양식에서 교환양식으로의 전환이나, 생산자 투쟁에서 소비자 투쟁으로의 이행, 진정한 민주주의의 원리로 이야기하는 ‘제비뽑기’, 점진적으로 주권을 양도함으로써 이룩해가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세계공화국’과 같은 것들은 개념들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같이 우리가 자명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조금씩 ‘이동’시킨 결과다.

따라서 우리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 ‘가라타니 철학’이라는 실체와 접하는 경험 따위는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엄밀히 말해 ‘가라타니의 철학’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라타니를 읽은 후 이제 더 이상 이전 같이 사고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비평의 철학이란 바로 이처럼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드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세기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상가들이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며 머리를 맞대고 있는 사상가는 가라타니 한 사람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까닭은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한국 비평과 한국 철학의 빈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조영일_문학평론가)

07. 10.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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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기 2008-01-04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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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리포베츠키의 <제3의 여성>(아고라, 2007)을 잠시 펼쳐들었는데(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0797 참조), 1장이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행복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남녀의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17쪽) 

물론 12세기 때 발명됐다는 사랑, 혹은 사랑의 모체는 '궁정식 사랑'이고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들이 나온 게 있다, 고 적으려고 이러저리 검색해보지만 뜨지 않는다.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기법>(현음사, 1992)만이 생각난다. 문화사를 다룬 책들 중에 더러 이 '사랑의 발명'이란 테마를 다룬 책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궁정식 사랑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지젝의 설명(<향락의 전이>)이 가장 자세하며 깊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둔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http://blog.aladin.co.kr/mramor/974481)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http://blog.aladin.co.kr/mramor/978175)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http://blog.aladin.co.kr/mramor/986399)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http://blog.aladin.co.kr/mramor/986869)

리포베츠키의 이어지는 설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궁정의 유희일 뿐이었다. 사랑은 왕과 귀족들만 하는 특별한 행위였다. 당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성적 충동은 경시되었다. 중세 교회 시대의 사랑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열정이 되었고, 사랑이라는 스스로의 근거만으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첫번째 미주가 붙어 있는데, 바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왜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는지 기이하게 생각되는 책 중의 하나(였지만 번역돼 나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의 한 장인 '사랑의 사회학: 민족주의와 에로티즘의 융합을 위하여'에서 처음 소개받은 듯하니까 어느새 십수 년 전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6)과 함께 필독서로 제시된 책이었다(기든스 책의 원제는 국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다).  

아무튼 이후에 "사랑은 중세의 '완전한 사랑'에서 고전주의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을 거쳐 20세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어져갔다."(18쪽)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이현의 소설 표제가 되기도 한 재크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민음사, 1985)이다,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떠올린 책이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쇠뿔은 단 김에 빼는 성격이어서(물론 책에 대해서만이다) 동네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대출해왔다. 사랑에 대해서 이만한 두께의 문화사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필리프 아리에스 등이 엮은 <성과 사랑의 역사>(황금가지, 1996)도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주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탈리 에니크의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 아니 골드만의 <잃어버린 사랑의 꿈>(한국문화사, 1996), 그리고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민음사, 1995)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크리스테바의 책은 <사랑 이야기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어에서 '이야기'는 '역사'란 뜻을 중의적으로 갖기에). 

다시 리포베츠키로 돌아가면, "그때부터[12세기부터] 이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꿈을 안겨주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이야기'나 '사랑의 문화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나 읽도록 하겠다(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07. 10. 07.

P.S. 작년 봄에 출간된 <사랑의 문화사>에 관한 리뷰를 하나 참고로 읽어둔다.  

매일경제(06. 05. 26) 사랑도 진화해왔다 '사랑의 문화사'

첫키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좀더 친밀한 사이로 나아가는 과감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키스를 할 때는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지만,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 키스 역사를 살피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학작품에 묘사된 장면들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피츠 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을 보면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키스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이편'의 연인 아모리와 로잘린드는 만난 지 단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 빅토리아시대에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남녀간 예의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히스클리프는 5분에 걸친 격렬한 키스 끝에 캐서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다시 입맞춤을 해주오. 그러나 그 눈은 보게 하지 말아 주오."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사랑의 문화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사랑과 연애 역사다. 빅토리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문학과 미술작품을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의미와 변천사를 분석한다. TV 드라마와 통속소설, 실용적 연애 지침서에 이르기까지 흔히 접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파묻힌 건조한 성찰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의 다양한 일차 자료를 곁들여서 생생한 실감을 전해주는 성찰이다.

책은 사랑의 성립과 소멸에 이르는 단계를 '기다림-만남-조우-육화(肉化)-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힘-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맞는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며 시대별 모습을 살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700여 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담스럽다.

미리 숙지해야 할 소설과 그림들도 많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씨' '레 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들과 연인' '전망 좋은 방' '위대한 개츠비' 등 저자가 분석한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미술에 대해 말하자면 마네 드가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대가들의 대표작 정도는 머리에 담아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박학과 깊이가, 재미있고 발랄하되 누구나 아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인 시중 연애지침서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내공'을 쌓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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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22 04:41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hemiola 2007-10-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사랑의 문화사) 굉장히 재밌어요. ㅎㅎ^^ - 얼마전에 이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와우, 대단합니다. 즐겨찾기 했습니다~

로쟈 2007-10-07 22:54   좋아요 0 | URL
<희생>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쓰시네요. 반갑습니다.^^

섬나무 2007-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의적절한 유익한 포스트입니다.^^ 하지만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에 입 닥치고 책이나 읽는 일이 어떻게 유익한 지 이해되는 처지에선 굳이 기대지 않아도 좋겠습니다.ㅎㅎ
 

중앙일보에 주말마다 연재되는 '글로벌 책읽기'는 몇 주전부터 찾아 읽는 코너이다('세계의 책' 범주에 딱 들어맞는 연재이기도 하다). 이번주에 다루어진 책은 우리에게도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을 필두로 하여 여러 권의 책이 소개된 바 있는 사카이 나오키이다('국민주의 비판'이 그의 주된 이론적 화두이다). 그의 신작이 <일본/영상/미국 - 공감의 공동체와 제국적 국민주의>인 모양인데, 얼른 소개되었으면 싶은,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다. 나는 소개기사나 챙겨두도록 한다.

중앙일보(07. 10. 06) 영화도 제국주의의 숨겨진 무기였다

20세기는 미국의 시대였다. 미국적 보편주의는 미국산 대중문화를 매개로 확산, 보급되었다. 특히 헐리웃 영화는 그 전형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영화의 정치적 작용을 도마 위에 올린다. 예컨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인 신문기자와 중국·유럽 혼혈의 홍콩 여성의사의 사랑을 그린 영화 ‘모정(慕情)’(1955)은 그 해 골든글로브 국제이해 공헌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중국여성 역으로 백인 여배우 제니퍼 존스를 등장시킨 것은 오로지 타인종과의 육체적 접촉을 금기시하는 ‘양식 있는’ 백인관객을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속에서 동양인 여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그 점에서 그녀는 미국인 해군장교에 버림받고 스스로 자결하는 오페라 ‘나비부인’의 일본인 여성 ‘초초상’의 후예이다. 여기에는 여성은 백인 남성의 ‘인지’를 통해서만 자기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남성(서양)우월주의가 작동한다. 반면, 비서양인 여성의 호의를 얻기 위해 백인 남성이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만드는 연애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저자에 의하면, 식민지 상황의 국제 연애를 그린 영화의 압도적 다수는 식민지지배 질서를 전복할 수 없는 여성의 종속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생산해왔다. 다시 말해서, 20세기에 만들어진 인종간 연애영화는 국제관계의 알레고리 그 자체이며, 이 경우 영화는 국제간 권력관계를 획정하고 추인하는 장치가 된다. 1940년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 및 동아시아 각지에 배급된 영화 ‘지나(支那)의 밤’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저자는 일본인 남성과 중국인 여성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가 남경학살(영어로는 ‘남경의 강간the Rape of Nanjing’으로 일컬어진다)의 3년 후에 만들어진 사실에 주목한다. 강간은 강제적인 종속을 의미하며 피지배자의 의지에 대한 폭력적인 침해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양국 남녀를 낭만적인 연애관계 속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일본의 중국 지배가 양자 간의 동의 하에 이루어진 정상적이고도 제도화된 정치현실이라는 점을 주장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관점을 적용하면, 종군위안부의 문제를 외면하거나 축소하고자 하는 일본 보수층의 태도 역시 ‘강간이 아닌 연애로서 식민지 역사를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또 ‘반전 영화’로 알려져 있는 ‘디어 헌터’가 실은 미국(서양)이 비서양세계에 행사한 폭력의 역사를 부인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집단 심성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미국인에게 ‘러시안 룰렛’과 같은 비인간적 고문을 강요하는 베트남인을 등장시킴으로써 ‘피해자 의식’을 부각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인에 대한 반감에 의한 공감을 구축함으로써 국민주의를 강화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국민적 ‘반전영화’라 할 수 있는 ‘버마의 하프’ (1956) 역시 사카이식 비판적 감수성의 여과지를 거치면 일본판 ‘디어 헌터’가 된다.



한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을 미국의 헤게모니 수용과정에서 나타난 내전의 상처라는 시각으로 접근한 제4장에서 내내 유지되어왔던 비판적 사유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것은 아쉽다. 그 역시 일본인 지식인으로서 숙명처럼 직면해야 하는 이른바 ‘제국의 원죄의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일지도 모른다.

전후 일본과 한국의 민족주의가 미국의 패권주의와 공범관계에 놓여있다는 저자의 관점은 자위대를 ‘타위대’로 표현하는 등 더러 극단적인 주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철저한 국외자적 감수성을 토대로 영역을 가로지르면서 현존하는 일본·미국의 국민주의 및 식민주의적 정치·문화현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하는 저자의 작업은 ‘밖으로부터의 사유’에 취약한 국내 인문학계에 의미있는 자극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윤상인_한양대 교수)

07. 10.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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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akim 2008-01-10 17:45   좋아요 0 | URL
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들이 제국주의적 징후를 드러낸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책이 있었군요^^ 참고되겠슴다^^
 

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출판기획자 이재원씨의 '인문학서평'을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445). 서평 대상은 조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나남, 2007)이다. 책의 출간소식은 지난 7월에 페이퍼로 올려놓은 바 있다(http://blog.aladin.co.kr/mramor/1398654). 아래는 아마도 그에 대한 가장 자세한 리뷰가 아닐까 싶다.

 

컬쳐뉴스(07. 10. 05) 폭력이란 무엇인가?

“여러분은 사회를 관리하는 데 있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그 관리권은 이제 박탈되어야 마땅합니다. 노동계급의 1백50만 명이, 나머지 노동계급 사람들을 포섭해서 합세시켜 가지고 여러분으로부터 관리권을 빼앗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고용주 여러분, 그것이 바로 혁명입니다.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보시죠.”

미국 소설가 잭 런던(1876~1916)의 『강철군화』에서 주인공 어니스트는 부르주아계급의 사교클럽인 필로머스 클럽에 초대를 받자마자, 자신의 연인 애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고용주들을 흔들어 놓는 데는 실패했었지요. 당신은 단지 그들의 도덕성에 의문을 제기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돈주머니를 위협할 거예요. 그건 그들의 원시적인 본능의 밑뿌리까지를 뒤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맨 앞에 인용한 것처럼 말했고, 결국 고용주들을 뒤흔들어 놓는 데 성공한다.



『폭력에 대한 성찰』의 지은이 조르주 소렐(1847~1922)은 사상계의 런던, 아니 어니스트라고 할 만하다(공교롭게도 『폭력에 대한 성찰』과 『강철군화』는 모두 1908년에 출간됐다). 소렐이 이 책을 쓴 목적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는” 의회사회주의자들, 더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부르주아계급, 궁극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담보할 뿐만 아니라 박애주의에 얼이 빠져 있는 유럽의 국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옛 활력을 되찾도록 해주는 유일한 수단”임을 노동계급 자신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1908년은 노동총연맹(CGT)이 아미앵 헌장을 발표해 기존 정당의 존재를 부정하고 직접행동에 의한 사회혁명 실현, 노동조합에 의한 생산과 분배의 조직을 선언한 지 2년이 되던 해이다. 요컨대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힘이 부쩍 성장하던 해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폭력에 대한 성찰』은 『강철군화』와 마찬가지로 꾸준히 성장해가던 사회주의운동의 자신감이 반영된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폭력에 대한 성찰』이 ‘지금’의 우리에게 흥미로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에서 말하는 ‘폭력’이 현대 사상들의 ‘폭력’ 개념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현대’란 대략 1968년 이후의 시기로서, 학문적으로는 구조주의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 1968년은 신좌파 운동이 전세계를 휩쓸던 해이자 온갖 도시 게릴라 단체들의 등장을 부추긴 해이기도 하다. 요컨대 민권운동이나 플라워무브먼트 등으로 대변되는 비폭력이든, 독일의 적군파나 이탈리아의 붉은여단으로 대변되는 폭력이든 폭력/비폭력을 둘러싼 담론과 실천이 전면에 부각된 해인 셈이다.

1968년경부터 구상을 시작해 1970년 그 결실을 책(국내에는 『폭력의 세기』로 소개되어 있다)으로 낸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폭력(violence)과 권력(power)을 확연히 구분한다. 권력은 곧 폭력이므로 그에 맞서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일부 신좌파 활동가들과 이론가들을 비판하기 위해, 아렌트는 권력을 인간의 행동 능력에 근거한 무엇이라고 해석한다. 즉, 아렌트에게 권력이란 언제든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제휴하고 행동할 때 생겨나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이미 정당성을 갖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이와 같은 인간의 능력에 조응하는 한 권력이란 영원히 파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렌트가 이와 같은 폭력과 권력의 구분을 무시한 채 폭력을 옹호하는 좌파 사상가들의 선조로 지목한 인물이 바로 소렐이다. 그러나 소렐이 말하는 폭력(더 정확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은 이와 다르다. 혹은 아렌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한 다면성을 갖고 있다.

이 점은 소렐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하고 있는 총파업을 일종의 ‘신화’로 해석한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소렐에게 신화로서의 총파업은 거대한 사회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이 마치 자신들의 대의가 어김없이 승리할 전투의 이미지로 마음속에 그려보는 임박한 행동, 혹은 불특정한 시점에서 그려보는 어떤 미래에 대한 구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로서의 총파업이 가져올 효과는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눈앞의 결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장기적 영향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즉, 소렐에게 폭력이란 아렌트가 비판하는 강제력/무력(force)과는 다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이란 프랑스의 맑스주의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가 말하는 ‘불가능의 가능’(L’impossible­ - ­possible)과도 유사한 기능을 한다. 현존하지는 않지만 현실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 또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지만 또 다른 형태로 가능해지는 그 무엇이 곧 ‘불가능의 가능’인데, 르페브르가 즐겨 예로 드는 것은 유토피아 사상이다.

예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장소’(‘없는’[ou-]+‘장소’[toppos])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토피아 사상은 분명 불가능한 것을 향한 열망이지만, 좀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개념은 1968년 프랑스 5월 운동 당시의 구호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불가능을 요구하자”를 통해 대중화됐다). 따라서 소렐은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대혁명의 진정한 결과가 혁명 초기에 가담자들을 열광시켰던 매혹적 청사진과는 전혀 딴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쉽사리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이 청사진이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신화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신화를 역사의 흐름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모든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전체로서의 신화 자체이다”라는 주장을 염두에 두면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독일의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말한 바 있는 ‘순수 수단’(reine Mittel)으로서의 폭력, 즉 ‘신적 폭력’과도 비슷하다.

앞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아렌트가 폭력을 권력과 구분한 이유 중의 하나는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이라는 수단을 써도 무방하다(그리고 이때의 폭력은 정당한 수단이 된다)는 당대 좌파들의 인식을 그릇된 것이라고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럴 때의 폭력이라도 그것이 수단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벤야민의 질문을 바꿔서 말해보자면, 억압적이라고 판명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그에 맞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이든 둘 다 수단적 폭력일 뿐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수단이긴 수단이되 ‘목적 없는 수단’이다. 즉, 신의 폭력이란 뭔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났을 때 나약한 인간이 그것을 허구적으로 이해하고자 그 사건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폭력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신의 의지나 목적 같은 건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소렐이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폭력이나 벤야민이 말하는 신적 폭력은 특이한 사건 자체, 혹은 그것의 출현이다. 그래서 소렐은 총파업, 벤야민은 혁명이라는 사건을 언급하는 것이다.

결국 소렐이 말하는 폭력은 그 라틴어 어원인 ‘활력’(vis)에 더 가까운 것이다. 무릇 생명력을 지닌 생물이라면 모두 지니고 있는 그 활력 말이다. 어니스트의 사자후가 필로머스 클럽의 고상한 양반들을 들쑤실 수 있었던 것, 또한 소렐의 주장에 당대의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의회사회주의자들까지 불편해했던 것은 어니스트와 소렐이 노동계급의 활력을 전면에 부각했기 때문이다. 필로머스 클럽의 회원들(혹은 당대의 지배계급)이나 의회사회주의자들이 보기에, 그것은 길들어져야할 것이었지 분출해야 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소렐의 폭력론이 무솔리니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러시아에서는 혁명적이었던 미래주의가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즘과 결합하게 된 것과 같은 역사의 아이러니였을까?(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0. 07.

P.S. '폭력'이란 주제와 관련해서는 짐작할 수 있다시피 방대한 참고문헌이 존재한다. '20세기의 정치적 폭력'으로 시야를 좁히더라도 견적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때문에 갈피를 잡기가 어려울 수 있는데, 이 경우 사카이 다카시의 <폭력의 철학>(산눈, 2007)이 그래도 요긴한 로드맵이 되어준다(http://blog.aladin.co.kr/mramor/1486267, http://blog.aladin.co.kr/mramor/1538039 등의 페이퍼 참조). 특이하게도 벤야민의 '폭력론'과 이에 대한 데리다의 읽기를 생략하고 있는 게 흠이지만(저자는 벤야민의 폭력론을 언급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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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베르 뒤랑의 주저 <상상력의 인류학적 구조들>이 출간된 김에 관련서들의 리스트를 꼽아본다. 품절된 책이 많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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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계의 인류학적 구조들
질베르 뒤랑 지음, 진형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38,000원 → 36,100원(5%할인) / 마일리지 1,140원(3%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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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상상력의 위대한 모험가들- 융, 바슐라르, 뒤랑 - 상징과 신화의 계보학
송태현 지음 / 살림 / 2005년 12월
10,000원 → 9,000원(10%할인) / 마일리지 50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절판
상상적인 것의 인간학:질베르 뒤랑의 신화방법론 연구
진형준 / 문학과지성사 / 1992년 4월
4,000원 → 3,600원(10%할인) / 마일리지 20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품절
뒤랑 전공자의 입문서. 기억에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이다. 지금은 다 절판됐지만 저자의 평론집들에서도 뒤랑의 상상력 이론에 대한 해제들을 읽을 수 있다.
상상력의 과학과 철학
질베르 뒤랑 지음 / 살림 / 1997년 12월
5,000원 → 4,500원(10%할인) / 마일리지 250원(5% 적립)
2007년 10월 07일에 저장
품절
소개된 뒤랑의 이론서들이 생각만큼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건 바슐라르도 마찬가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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