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기사를 옮겨온다. '외국문학 리뷰' 코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문학동네, 2007)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을 나는 '10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놓은 바 있다(책은 오늘 손에 넣었다). 리뷰를 워밍업 삼아 읽어둔다. 리뷰의 필자는 <럭키의 죽음>(랜덤하우스, 2007)의 소설가 이재웅씨이며, 이미지는 내가 덧붙인 것이다. 한편, 책에 대한 소개는 '부코우스키와 치나스키'(http://blog.aladin.co.kr/mramor/1596181)를 참조할 수 있다.

컬처뉴스(07. 10. 19) "뭐, 그래서 뭐?" 

하나의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서울행 전철에서였다. 나는 그 때 『팩토텀』(찰스 부코우스키, 문학동네)의 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었다. 그 때 내 옆에는 마흔이 갓 넘었을 법한 아저씨가 앉아있었는데, 그는 읽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어떤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내가 쥐고 있던 『팩토텀』을 따라 읽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그것을 알아차렸고, 묘한 창피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책을 덮었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인가 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전철에서 책을 덮었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쩐지 그것이 예의일 것만 같았다.

『팩토텀』은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책이다. 그것은 그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고 또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면서도 주인공 치나스키가 무례하고 뻔뻔하기 때문이다. 치나스키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뭐, 그래서 뭐?”

한 때, 어떤 이들은 현대인을 신(新)유목민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성향, 자유로움, 통신과 교통의 발달, 점조직의 네트워크와 국경의 붕괴 등이 이러한 양상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라고도 했다. 혹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신(新)유목민이 기존의 농경민들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또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낸다고도 했다. 이제는 그런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누구보다도 신(新)유목민다운 그는 과연 신유목민의 출현이 좀 더 역동적이고 창조적이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까? 치나스키는 어쩌면 이러한 담론들이 삶의 불안정성을 포장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만 못지않게 불안도 충분히 운동적이기 때문이다. 충만에게 넘쳐흐름이 있다면 불안에게도 균열과 붕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치나스키는 자신도 뻔뻔하지만, 세상의 균열을 다른 형식으로 포장이나 해대는 너희들 역시도 나 못지않게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치나스키라면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어떻게 섹스를 빠구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의 뻔뻔함, 그의 무례함, 그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언어들은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이자, 또한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전투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야말로 그의 끝없을 듯한 직업 편력이, 그의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그의 『팩토텀』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는 치나스키를 위악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저 밑바닥 인생의 직업편력기 정도로 읽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말할지 모른다(하지만 세상에 과장이 아닌 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주 주관적인 서술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누군가들에게는, 더 정확히 말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 역시 밑바닥은 아니지만, 밑바닥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치나스키처럼 곤욕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치나스키처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또 그 환멸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본능적이고 습관적으로 과감함과 냉소를 익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발만 삐끗해봐라, 그럼 바로 밑바닥이다!’ 이 불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로울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이지 우리는 이보다 덜 노골적이고 덜 적나라하단 말인가? 치나스키에 대한 공감은 아마 이 지점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소설은 『팩토텀』(그 뜻이 잡역부, 막일꾼이라고 책 표지에 친절하게 나와 있다) 그 자체의 삶이다. 말 그대로 밑바닥의 삶이다. 밑바닥의 방황이고, 밑바닥의 고독이고, 밑바닥의 슬픔이다. 나는 ‘팩토텀’의 삶을 앞에 두고 굳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개념을 빌려오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제 너무 진부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찰스 부코우스키가 그려낸 치나스키는 세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뭐, 그래서 뭐 어쨌다구?”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전면적 부정과 냉소적 무관심의 차이는 분명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찰스 부코우스키는 후자 쪽에 더 비중을 둔 듯하다.

그런 면에서 『팩토텀』을 사실적인 팝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치나스키에게 인터내셔널가는 어울리지 않지만 비틀즈의 노래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단조롭기만 한 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보이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치나스키의 망나니같은 자유분방함을 누가 흉내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떤 면에서 팝적인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기 시작한 한국문학에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될 지도 모른다. 『팩토텀』은 봐, 이것이 오리지널 팝이야!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위선적인 담론에 속하지도 않지만, 혁명성도 없는 것. 하지만 불편한 것. 리얼리즘적이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것.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표현주의적인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나는 내 그것을 세울 수 없었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적이고 절망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치나스키는 살아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숨결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뭐, 그래서 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찰스 부코우스키라는 다소 생소한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너무도 거칠고, 또한 극렬하기에 나는 전철 안에서, 또 여자 앞에서 이 책을 슬그머니 덮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정말 괜찮은 책이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치나스키가 너무도 매력적인 친구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이재웅_소설가)

07. 10. 23.

P.S. <팩토텀>의 한 부분, 그러니까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 어떤 것이길래, 라는 호기심에 찾아보니까 이런 식의 묘사로 돼 있다.

"땀 때문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펄쩍 뛰어올라 날르 덮쳤고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녀의 벌어진 입이 내 입을 찍어눌렀다. 그녀의 입에서는 침 냄새, 양파 냄새, 곰팡내를 풍기는 포도주 냄새, 거기에 (상상해보면 아마도) 남자 한 사백 명분은 될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혀를 내 입속으로 쑤셔넣었다. 그녀의 혀는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웩웩거리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자 그녀는 무릎을 꿇더니 내 바지의 지퍼를 확 내리고는...(하략)"

 

 

 

 

뭐, 이 정도 묘사야 그 흔한 '야설'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다. 이보다 더 선정적인 건 사실 뒷표지에 실린 카피문구들이다. "조지 오웰 이래, 이처럼 실감나게 존재의 궁핍을 기록한 예가 없다."(뉴욕타임즈)고 해서, <동물농장>의 작가를 검색해보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삼우반, 2003)이 번역돼 있다. 나로선 거기에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창, 1994; 범우사, 2006)을 보탤 수 있겠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와 함순의 <굶주림>을 다룬 에세이를 표제작으로 한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도 이 방면으로 읽어볼 만하다(이 책의 열린책들 버전이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다). 하지만 부코우스키가 '굶기의 예술' 계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뭐, 그래서 뭐?'란 대사가 치나스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뉴올리언스 시절을 기억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胃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반 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로선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그러한 판단은 내가 요즘 (강의 때문에)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1869)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 모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적 삶에 있어서 가장 안정된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이기에 더욱 굳어진다. 아내와의 불화가 극에 달했을 때 톨스토이가 쓴 작품은 <크로이체르 소나타>이며, 폐병환자였던 아내의 고통과 죽음을 배경으로 씌어진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이다. 두 중편 모두 문제적인 작품들이긴 하나 <전쟁과 평화>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궁핍한 예술가'도 물론 가능하지만 그는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일 따름이다(이걸로 요즘 나의 궁핍한 글쓰기에 대한 변명을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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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10-24 23:08   좋아요 0 | URL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라는 말씀이 팍 와닿네요^^ 예술가의 불운이 주어온 후광 같은 건 그래도 무시할 수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요

로쟈 2007-10-24 23:16   좋아요 0 | URL
궁핍 속에서도 좋은 시는 씌어질 수 있지만 소설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니까요...

2007-10-25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7 00:50   좋아요 0 | URL
저만큼이 아니라 저처럼 하시면 안되지요.^^;
 

오늘따라 방문자 수가 많다. 요즘 뜸하게 페이퍼를 올리는데도 '눈팅' 내방객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책은 거기에 없었다' 같은 제목이 선정적이어서일까?(고로 대개는 '헛걸음'을 한 게 아닐까?) '저널리스트 마르크스'란 타이틀도 자칫 선정적인 것으로 읽힐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무얼 꾸며대는 건 결코 아니며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쓴 기사모음집이 최근에 펭귄복으로 출간됐고 그 편집자인 레드베터가 한 잡지에 그에 관한 글을 기고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옮겨올 따름이다. 개인적으론 마감을 제때 지키지 못했다는 마르크스의 에피소드에서 매번 마감이 지나서야 가슴을 졸여가며 가까스로 원고를 마무리짓고 있는 나의 처지가 오버랩되어서이다. 그게 말하자면 나와 마르크스의 드문 공통점이겠다. 차이점?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는 마르크스와 달리 나는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한다... 

한겨레(07. 10. 23) "기자 카를 마르크스는 마감 안 지켜’

그는 열정적인 언론인이었다. 굶어죽는 사람들의 고통을 황색지 기자 못지않게 선정적으로 묘사했고, 급진주의적 성향으로 편집자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하지만 마감 독촉에 시달린 뒤에야 좋은 글을 썼다는 점에서, 그는 천생 언론인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름아닌 칼 마르크스의 이야기다.

마르크스의 언론인 생활에 대한 책을 집필한 미국 언론인 제임스 레드베터는 미국의 진보적 주간지 <더네이션>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1852~1862년 <뉴욕트리뷴> 런던 통신원 생활이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며,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철학자나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기자로서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PENGUIN CLASSICS DISPATCHES FOR THE NEW YORK TRIBUNE

당시 진보지 <뉴욕트리뷴>은 발행부수 20여만부의 세계 최대 신문이었다. 신문에는 10여년간 마르크스가 쓴 글 500여개(4분의1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대필)가 실렸다. 이는 오늘날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의 7분의1을 차지할 정도의 분량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신문사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편집자는 그의 글 앞에 “마르크스는 매우 강한 입장을 갖고 있고, 그중 일부는 우리와 매우 다름”이라는 ‘편집자 주’를 붙이기도 했다. 마르크스 역시 엥겔스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이 신문사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당하고 있다며, “이따위 신문사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구역질이 난다”고 불평한 적도 있다.

당시 여행 제한으로 영국에 발이 묶여있던 마르크스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할 수 없었다. 대신 그는 대영도서관에서 유럽 각국의 신문을 섭렵하며 미국 독자들이 접할 수 없었던 유럽의 최신 소식을 전달했다. 여기에 그의 역사에 대한 조예와 엥겔스의 특기인 군사적 지식이 버무려져, 마르크스의 칼럼은 ‘유럽 정치의 주요 사안을 가장 정확하게 짚어주는 글’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다. 1857년 마르크스는 영국 중앙은행이 활동을 중단할 것이라는 ‘특종’ 기사를 썼다. 아편무역과 노예제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렬한 비판은 그의 글 중에서도 가장 ‘마르크스적’인 것으로 꼽힌다.

레드베터는 마르크스가 언론인 생활을 하며 얻은 사실(팩트)이 그의 사상 발전의 거름이 됐다고 지적했다. 레드베터는 또 “마르크스는 누군가 마감 독촉을 할 때 가장 좋은 글을 썼다”며 “공산주의자동맹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1848년 2월1일까지 <공산당선언>을 쓰라는 강력한 독촉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영원히 그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서수민 기자)

07. 10. 23.

P.S. 기사의 타이틀에선 '카를 마르크스'라고 해놓고 본문에선 '칼 마르크스'라고 쓴다('카를'은 물론 'Karl'을 독어식으로 읽어준 것이다). 아마도 기자와 데스크간에 의견 조율이 되지 않은 듯한데, '카를'이라고 티낼 것 없이 그냥 통용되고 있는 '칼'로 충분하지 않은가, 라는 게 내 생각이다(찾아보니 프란시스 윈의 평전이 품절됐다. 마르크스에 관한 전기로는 가장 평이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한나 아렌트'를 굳이 '해나 아렌트'라고 적어놓아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건 '원칙의 실천'이 아니라 '고집의 과시'로 여겨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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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0-23 19:34   좋아요 0 | URL
그냥 하나로 통일했음 좋겠어요. 카를(칼), 휴움(흄), 해나(한나), 롤스(롤즈) 등등

로쟈 2007-10-23 20:11   좋아요 0 | URL
'휴움'도 있나요? 흠...

마늘빵 2007-10-23 23:50   좋아요 0 | URL
오늘 읽은 어떤 책에는 그렇게 되어있더라고요. -_- 좀 옛날 분이 쓰신거긴 합니다.

로쟈 2007-10-24 07:05   좋아요 0 | URL
'휴움'의 경우엔 사정이 다른 것 같습니다.^^ 현재 혼용되는 표기는 아니니까요.

푸하 2007-10-23 21:24   좋아요 0 | URL
"매번 '가장 좋은 글을 쓸 뻔 했는데!'라며 한탄"-- 매번 가장 좋은 글 근처까지 가보신다는 말씀이신거죠? 마감의 압박은 좋은 글을 낳게하는 원천으로 볼 수도 있겠어요.^^;

로쟈 2007-10-23 22:24   좋아요 0 | URL
피가 마른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적어도 침은 마릅니다.--;

릴케 현상 2007-10-23 22:04   좋아요 0 | URL
벤담은 벤섬이라고 하던데요~

로쟈 2007-10-23 22:27   좋아요 0 | URL
그런 사례는 많지요. 짐멜->지멜, 임마누엘->이마누엘, 베르그송->베르그손, 로랜스->로런스 등등. 대체로 저는 관행을 존중하면서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쪽인데, '원칙'을 강조하는 표기들이 너무 '소모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virtuepeak 2007-10-24 00:57   좋아요 0 | URL
월러스틴 같은 경우에는 이매뉴얼이라고 적더군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니 이게 자연스러울까요?

로쟈 2007-10-24 06:53   좋아요 0 | URL
처음부터 그렇게 소개된 경우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고유명사 표기란 게 '차이'를 드러내주는 걸로 족하니까요. 프랑스 작가 '발자크'를 '발작'으로 표기하는 게 비효율적인 것은 그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임마누엘 칸트'를 '이마누엘 칸트'라고 표기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인지 저는 의문입니다...

자꾸때리다 2007-10-25 20:36   좋아요 0 | URL
하이덱거 같은 경우는 어떨까요? 나이 드신 분들은 하이덱거라고 쓰시던데.

로쟈 2007-10-26 20:58   좋아요 0 | URL
현재 '하이데거'로 통용되므로 별 문제는 아닌 거 같습니다.^^

lastmarx 2007-11-04 09:36   좋아요 0 | URL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은 재밌는 전기인데, 에드먼드 윌슨의 [To the Finland Station] 가운데 맑스 부분에서 가져온 게 많습니다.
예전에 정치부 기자일 때 <맑스는 다른 정치부 기자들과 달리>라는 메모를 한 적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lastmarx/60018927087

로쟈 2007-11-04 09:52   좋아요 0 | URL
베꼈더라도 '표절'은 아니겠지요. 유명한 저작을 베낀다는 건 '자살'행위일 테니까요. 절판된 윌슨의 책은 다시 나온다는 얘기도 있던데, 가급적이면 원제대로 재출간되면 좋겠습니다...

lastmarx 2007-11-04 11:39   좋아요 0 | URL
표절이 아니라 윌슨이 맑스에 대해 논한 것들을 윈이 가져다가 논하거나 살을 붙이거나 했다는 것이지요. 평전은 각주가 없는 책이고 '생각'의 출처를 다 명시하진 않으니까요. 평전을 먼저 읽고 참 똑똑하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윌슨의 혜안이었던 것이지요. 클린턴 부부도 청년기에 읽었다던 To the Finland Station 원제로 고쳐 놓고 번역문장과 편집도 잘해서 고급스런 책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일들에 치어서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한 날들을 지나고 있다. 별로 내세울 만한 일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하튼 '일들'은 항상 생색을 낸다. 해서 서재일은 잠시 자중하고 있는데(마구 올릴 때보다 글을 뜸하게 올릴 때 즐찾이 더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요즘 '오늘의 마이리스트'로 띄워놓은 '도리스 레싱 읽기'와 무관하지 않은 기사가 눈에 띄어, 그건 옮겨놓는다. 그녀의 책이 없었다는 '거기'는 아메리카이고, 그 동네에 사는 '예의없는 것들'은 노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아무런 감회도 동조도 없는 듯하다는 소식이다(알라딘 서재에서는 그녀의 소설이 오늘 드디어 '서재가 사랑한 책' 종합 1위에 등극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우리와는 '문화'가 다른 것이다. 물론 필자의 지적대로, 그보다 더 심각하고 뼈아픈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씁쓸한 현실이지만 말이다(몇 년전 모스크바통신에서도 적었듯이 러시아의 대형서점에서도 매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한국소설은 단 한권도 없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싶다). 하니 없는 건 그녀의 책만이 아니다...

한겨레(07. 10. 22) 미국 서점에는 그녀의 책이 없었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고 일주일 후에 아이오와에서 문학도서가 가장 많다는 서점에 갔다. 이맘때 한국의 경우를 떠올리며 으레 도리스 레싱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코너가 없을 뿐 아니라 그녀의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는 대답에 놀랐다. 서점 직원은 보유하고 있던 다섯 권 정도의 책은 이미 팔리고 새로 주문을 넣긴 했지만 책이 언제 도착할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서점 컴퓨터를 통해서 보니 미국 전체에서 <황금 노트북>을 주문한 총 부수는 2000부 정도였다. 본격문학 시장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미국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적은 수요는 아니지만 해마다 노벨상 특수를 누리는 한국 출판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처음엔 미국이 노벨문학상 결과에 냉담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영국 문학에 대한 묘한 열등감의 표현이거나 유력 후보였던 필립 로스가 수상하지 못한 서운함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다. 그런데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스태프나 세계 각국의 작가들도 대체로 노벨문학상에 별 관심이 없거나 비판적이었다. 스웨덴 한림원의 선택 기준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람이 많았고,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 아랍계 작가들은 가오싱젠, 존 쿳시, 오르한 파묵 등 기존 수상자들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서구 중심적인 시각을 지닌 그들보다 뛰어난 작가들이 자국에는 적지 않으며, 그런 점에서 노벨문학상이 절대적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게 중론이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노벨문학상 열풍은 다소 기이하기까지 하다. 물론 노벨상을 빌미로라도 문학이 얼마간 사회적 흥분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문학의 위기다 어쩌다 해도 실제로 한국만큼 국내 문학시장이 남아 있는 나라도 드물다. 소설이 아닌 시집이 소수이긴 하지만 일이만 부, 때로는 수십만 부씩 팔리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작가의 문제의식이나 생산력, 작품의 다양성에 있어서도 정체기에 들어선 서구 작가들보다 오히려 현재적 활력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작가들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부의 관심과 활력을 어떻게 국제화하느냐에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는 요행을 바라기보다 한국문학을 국제화하기 위한 기반을 지금이라도 차분하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선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리기 위해 뛰어난 번역자를 양성하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외국문학을 국내에 소개할 때에도 베스트셀러 위주의 번역에서 벗어나 한국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 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양방향적인 교류가 없이는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몇 명의 국제적 스타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국문학의 전체적인 흐름과 독자성이 무엇인가를 국제사회에 이해시키는 일이 더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아이오와 창작프로그램이 40주년을 맞는 해라서 세계문학을 조명하는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아프리카 문학, 아랍 문학, 중국 문학, 일본 문학, 러시아 문학 등의 섹션이 마련되었지만, 한국 문학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세계화로 나아가려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국적이 다른 시인들이 모여 일본의 중세 시가양식인 ‘렌가’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응용해 영어로 공동창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문학에서 과연 세계와 공유할 만한 보편적인 양식이 무엇일까 반문해 보았다. 이제는 노벨문학상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런 질문과 성찰을 해나가야 할 때다. 미국 서점에 노벨상 수상자의 책이 없었던 것보다 내가 이곳에 와서 더 뼈아프게 확인한 것은 세계문학 속에 한국 문학의 독자적인 자리가 거의 없다는 현실이었다.(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0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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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0-22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이렇게라도 읽으면 좋은건가 싶다가도, 외려 사람들을 책에서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오르한 파묵의 책 번역된건 다 있지만, 지난번 노벨상 발표후 나온 <새로운 인생>은 근 여섯달째 읽고 있어요. 도리스 레싱은 <황금노트북>과 같은 장편은 못 읽어 보고, 단편들만 접해봤지만, 역시 녹녹하고 기분좋게 읽히는 책은 아니죠. 찬물 한바가지 뒤집어쓴 것 같은 글들이었는데, 근데, 이렇게 마구 나오는건 팔리니깐 그런거겠죠???

로쟈 2007-10-22 19:45   좋아요 0 | URL
'더 멀어지게 하는건 아닌가'란 문제는 생각해볼 만하네요.^^ 역시 '명작'이란 건 나랑 안 맞아, 이렇게 나가떨어질 독자들도 있을 법하지만, 저는 '노벨상효과'라는 게 문학의 권위(아우라)를 유지시켜주는 데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나랑 안 맞아!'는 그래도 '이런 게 무슨 명작이야?'라는 태도보다는 나을 테니까요...

stella.K 2007-10-2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우리나라는 상에 너무 목숨거는 경향이 있어 마뜩칞아요. 이번에도 고은님 탈 줄 알고 기자들이 떼로 그의 집에 몰려갔다가 해산했다는 얘기 읽었습니다. 해프닝이라고 해야할지, 열망이라고 해야할지...>.<;;

로쟈 2007-10-23 13:17   좋아요 0 | URL
아마도 누군가 수상할 때까지 계속될 '해프닝' 같습니다...
 

자료 파일을 찾다가 문득 10년전 메모를 들추게 됐다. 딱 10년전 가을에 메모해둔 것인데, 얼마 안되지만 이런 메모는 보통 필요할 때 써먹기 위한 용도였다(두엇은 이미 써먹은 듯하다). '젊은날'의 기억이 잠시 떠오른다(따져보면 '국민의 정부'도 들어서기 전이고 IMF사태 직전이었다!). 여하튼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런 메모에 주석을 붙이는 것이 나의 즐거움이(었)지만 지금은 기력이 없다. 그냥 창고에 넣어둔다...

1. 인간의 모든 사유에 규범적 기능을 담당하는 이성 없는 삶, 다소간이나마 이성적이 아닌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동물의 삶이며, 이성적 활동, 즉 진/위, 선/악, 미/추를 가려내는 충동이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즉 인간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이며, 이성이란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이나 서로 갈등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려는 다원주의는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박이문, <이성은 죽지 않았다>, 당대, 1996, 29쪽)

2. 지구는 가장 핵심적인 인간조건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지구는 우주에서 유일한 인간의 거주지이다.(50쪽) 나는 한편으로, 인간조건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영속적이며 인간조건 자체가 변하지 않는 한 상실될 수 없는 일반적 인간능력을 분석하는 데 나의 논의를 제한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역사적 분석을 하고자 한다. 이 분석의 목적은 근대의 세계소외, 즉 지구로부터 우주에로의 탈출과 세계로부터 자아 속으로의 도피라는 이중적 의미의 세계소외를 추적함으로써, 아직은 알 수 없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으로 인해 거의 압도될 시점에 도달한 사회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54쪽)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태정호 옮김, 한길사, 1996)



3. 여기서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라고 할 때 그 어떤 것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가령 '이탈리아에서 금년에 난 포도알의 수'는 실지로 어느 누구에 의해서 헤아려지고 말고와 관계 없이 일정한 것으로서 있는 것이요 이 수를 그대로 표현하는 명제가 진리이다... 후설의 심리학주의 비판은 이런 이념적 세계의 객관적 존립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86쪽)

4. 미학의 역사야말로 세계가 주관화되는 영역,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가 뒤로 물러나는 가장 탁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물러남이 바로 긴 진행과 정의 끝에서 볼 때 현대문화를 특징짓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뤽 페리, <미학적 인간>, 방미경 옮김, 고려원, 1994, 29쪽)



5. 토드 솔론즈(<인형의 집으로 오세오>): “이 영화는 코미디로 만들어졌다. 코미디는 격렬한 고통을 다루는 내가 아는 유일한 방법이다. 모욕을 견디려는 안간힘 속에서 나는 우습고도 통렬한 무엇을 발견한다.”(<씨네21>, 97. 10. 7,  57쪽)



6. 미셀 세르: “철학이 세상을 폐기 처리해 버린 지 몇십 년 되었습니다. 모리스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을 예로 들어봅시다... '지각'이라는 개념은 우선 '지각'이라는 '단어'를 생각나게 한다는 지적으로 이 책은 시작됩니다. 단지 단어들이 문제되고 있을 뿐입니다. 나의 접근방식은 다릅니다. 나는 우선 내가 느끼는 보르도 포도주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보르도 포도주를 마실 때, 나는 단어들을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1900년 혹은 1920년 이래로 철학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철학자들의 책임은] 사람들에게 세상이 있고, 그것이 쓰레기통이 아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대담: 지식의 항해’, <세계사상>, 97년 가을호,  324-6쪽)

翻身11

7. 유중하: “개망나니 도박꾼에서 혁혁한 홍군의 전사로의 변화를 가리키는 중국어 단어가 있으니 그것을 ‘번신’(翻身)이라 한다. 번신이라는 말을 한자 그대로 풀면 몸(身)을 뒤집는다(飜)는 뜻. 왜 뒤집는가. 갓난아이가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누워 있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배로 방바닥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배밀이이다. 배로 방바닥을 밀자면 그보다 앞서 몸을 한바퀴 뒤집어야 하는 법. 갓난아이가 그 이름도 거룩한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려면 번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다.”(<씨네21>, 제155호, 98. 6. 9, 60쪽) 변신(變身)과의 비교.

 

07.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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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책일까? 싶은 책들에 대한 리뷰만큼 요긴한 게 없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의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들녘, 2007)가 궁금한 책이고(긴가민가한 책이고) 아래의 리뷰가 요긴한 리뷰이다. 소개에는 "독일의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저명한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특히 신경학자들을 방문하여 ‘나’라는 작은 우주에 대해 탐구하고 있는 책"이라고 돼 있다. 워낙 심상한/식상한 주제이기에 별로 기대를 하지 않게 되지만 이 책의 강점은 작년에 나온 책이라는 것. 그러니까 나름 '최신의' 연구성과들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경향신문(07. 10. 20) 진정한 ‘나’란 없다

마흔살의 여성 로슬린 Z는 자신이 남자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자기 아버지라고 믿었으나 이따금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불러야 대답하고, 서류 서명도 아버지 이름으로 한다. 삶의 이력에 대한 질문에 아버지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로슬린은 카프그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그것도 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극히 특수한 내적 변신 사례다.

쉰한살의 건축 노동자 토미 맥휴는 가벼운 뇌출혈을 겪고 나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을 한다. 응급수술을 받은 지 2주일 만에 갑자기 그럴 듯한 시를 쓴다. 뿐만 아니다. 솜씨를 인정받아 여러 화랑에서 작품 전시회까지 여는 미술가가 됐다. 과학적으로도 소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의 여자 주인공 트리니티가 ‘경험된 가상’을 남자 주인공 네오에게 설명하면서 던지는 이런 물음과 흡사한 광경이다. “완벽하게 현실인 듯한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어? 네가 이 꿈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게 실제이고 어느 게 꿈인지 어떻게 알지?” 로슬린 Z와 토미 맥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극단적인 두 사례에서 엿보이듯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달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독일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함께 지은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원제 ICH, Wie wir uns selbst erfinden)는 철학이나 종교적으로만 들리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과학적으로 궁구한다. 종반부를 보면 자연과학과 철학·종교의 접목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멀쩡한 ‘나’를 잃어버릴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다. 실제로 여러 명의 ‘나’로 인식되거나 ‘나’가 아닌 것으로 자각되는 생생한 실례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래선지 지은이들은 들머리에 먼저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써 붙였다. 혹시 책을 읽고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해서일까? 아무튼 경고문의 제목이 더 겁을 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은 위대한 쇼다.’ 성자(聖者)들은 흔히 ‘진정한 나는 내 안에 있다’며, 깨달음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나’란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인류가 여태껏 생각하던 ‘나’는 ‘조작된 나’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는 불교와 라마교에서 ‘나’가 없다는 명제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순전히 ‘기억’ 덕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이 기억은 거의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지은이들은 최근 연구결과를 토대로 입증한다. 결국 기억이라는 게 ‘나’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매듭짓는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인류가 수백만년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숙제인 ‘참 나’에 관한 탐구를 오싹한 연역법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것도 시종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은 틀렸다. 마음은 백지장 같고 경험에 의해 모든 지식이 쌓인다는 경험론도 허구다. 나 안에는 고정된 성격이란 없다. 통일된 사령부가 없는 것은 물론 ‘왕이 없는 제국’이다.

새로운 견해와 학설도 적잖게 소개된다. 인간은 자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기존의 견해는 일종의 ‘망상’이다. 어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격이 혼재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은 쉰살이 넘어도 변한다. 성역처럼 여겨지던 프로이트식 무의식이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이론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물론 저자들이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한 내용은 아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축적한 지식의 집합체다.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든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민족학자, 문화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신경학자들의 노력이 망라됐다. 그 가운데서도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사례가 풍성하게 인용된다. 책에는 전문가들만이 쉽게 알 수 있는 생경한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보통 독자들의 눈높이를 감안한 언론인들의 글솜씨인지라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해’ 하고 자아찾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그런데 ‘나’가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충고한다. “여러분의 ‘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그리고 나서 저자들은 자연과학도답지 않게 사회과학적인 마무리 말을 던진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라고만 말하는 것은 타락이며, 스스로를 해체하는 행위다. ‘나’는 ‘우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인 셈이다. ‘소우주’인 ‘나’에 대한 긴 탐험의 맺음말로는 좀 엉뚱한가?(김학순 선임기자)

07. 10. 19. 

P.S. 리뷰를 읽고 떠올린 책은 두 권이다. "사회과학에서 개념화, 이론화해 온 ‘자아’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책"이라고 소개된 <자아란 무엇인가>(삼인, 2007). 원제 자체가 'Concepts of The Self'(2001)인데, 자연과학쪽 얘기가 많이 들어간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와 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게 약점. 260쪽 정도의 분량이면 이 주제에 관하여 그냥 '맛보기' 정도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또 한권은 다니엘 데닛(데넷)과 더글라스 호프스태터가 같이 엮은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저는 'The Mind's I: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1)이고 짐작에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보다 더 술술 읽히는 책이다. 다만 1981년에 나온 것이라 자연과학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는 책으로선 좀 오래된 감이 있다. 어떤 경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원서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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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20 0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심술 2007-10-20 16:27   좋아요 0 | URL
흥미 땅기는 책이네요.

로쟈 2007-10-21 00:30   좋아요 0 | URL
의외로 관심들을 가지시는군요.^^

이리스 2007-10-20 16:42   좋아요 0 | URL
아, 정말 굉장히... 에잇, 구입하겠어요!

로쟈 2007-10-21 00:29   좋아요 0 | UR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