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대학신문에서 옮겨오던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마지막 편은 자크 랑시에르이다(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45). 알튀세르 사단에 속한 철학자로 국내엔 처음 알려진 듯하지만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에 그가 전개한 독자적인 철학이 국내에 소개된 적은 없는 듯하다(여러 권의 저작이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론 짧은 책들을 쓴다는 것, 문학과 영화를 아우른다는 것 등등에 매력을 느껴서 대부분의 영역본을 긁어모은 철학자이기도 하다(주로 지젝의 언급을 통해서 만나보던 참이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아래 기사가 짤막한 길잡이가 되어줄 듯하다(필자는 알라디너들에게 '발마스'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진태원씨이다).   

대학신문(07.11. 26)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⑩ 자크 랑시에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21세기 벽두 프랑스 철학계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알튀세르의 후예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불화』(1995),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1998),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 같은 혁신적인 정치철학 저서들뿐 아니라, 지적 평등을 교육의 기초로 제시하는 『알지 못하는 선생』(1987)에서부터 아날학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담은 『역사의 이름들』(1992)을 비롯해 문학, 영화 및 미학에 관한 독창적인 작업으로 세계 학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이처럼 그가 광범위한 주제에 관해 많은 책들을 출간하고 있지만, 그의 저술 전체는 단일한 주제, 곧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변주로 이해될 수 있다.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문구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는 것이 사실이다. 평등을 반대하든 찬성하든 간에, 철학자 또는 사상가치고 평등에 관해 한두 마디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랑시에르가 옹호하는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나 조건의 평등, 심지어 결과의 평등도 아니다. 그것은 원리로서, 공리(axiom)로서의 평등이다. 곧 평등은 달성해야 할 (또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나 과제가 아니라, 항상 이미 모든 인간의 행위 속에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이해하는 정치 역시 이러한 평등 원리의 옹호와 다르지 않으며, 이는 또한 올바른 의미의 민주주의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사람들은 실제로 평등할까? 가령 지적 능력의 차이는 어떨까? 우리가 알다시피 천재와 바보, 수재와 둔재, 세계적인 석학과 범인(凡人) 사이에는 부인할 수 없는 능력의 차이, 괴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아닐까?

The Ignorant Schoolmaster: Five Lessons in Intellectual Emancipation 

놀랍게도 랑시에르는 이러한 차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알지 못하는 선생』은 19세기 네덜란드로 이주한 장 조제프 자코토(Jean-Joseph Jacotot)라는 프랑스 교사의 경험을 들려준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 불어 선생은 불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네덜란드 학생들이 불어-네덜란드어 대역본 책 한 권을 교사의 가르침 없이 그들 스스로 읽으면서 불어로 말하고 글을 써나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경험한다.

이러한 경험의 교훈은 무엇일까? 랑시에르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교육이란 지식을 소유한 스승이 무지한 제자들에게 지식을 전수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육은 학생들(또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는 사람들 일반)이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발휘하고 연마해가는 과정이지, 지적으로 우월한 누군가가 지적으로 열등한 이들을 가르치고 이끌어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이는 곧 지식의 위계, 지적 능력의 격차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육의 행위 자체는 항상 이미 지적 능력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누군가가 이미 알지 못한다면, 이미 알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교육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지적 평등의 원리는 정치에 관해, 민주주의에 관해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 랑시에르는 서양 정치사상의 역사 전체는 민주주의의 불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논증의 역사라고 간주한다. 왜 민주주의란 불가능한 정치일까? 또는 적어도 최악의 정치일까? 그것은 민주주의가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두지 않는, 다시 말해 어떤 특별한 통치의 능력도 인정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또 누구나 피통치자가 될 수 있는 정치,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 자체이며, 여기에는 모든 사람의 평등에 대한 공리가 깔려 있다. 통치에 특별한 자격을 가정하는 것은 사회적 분업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는 또한 능력의 차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추첨이야말로 민주주의에 걸맞은 제도이며 선거는 본질상 귀족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곧바로 다음과 같은 비판들이 제기된다. 과연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와 같이 복잡한 사회를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까? 더욱이 현대 사회의 대중은 공적인 문제에는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평등한 소비 주체들일 뿐이라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등만을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우파와 좌파의 구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랑시에르의 주장은 황당한 유토피아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기존 제도권 정치 안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들이 통치하거나 사회적인 몫의 분배 질서를 뒤흔드는 일이 계속 되풀이돼 왔다. 고대 그리스의 빈민들의 반란이나 파리 코뮌, 68 운동 등은 그에 대한 증거들이다. 따라서 이는 적어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하나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사건의 분출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번득임이었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랑시에르는 거부할지도 모르지만, 그가 좀 더 대결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는 늘 예외적인 사건, 봉기로만 존재하는가? 지속적인 제도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은 불가능한가? 평등의 원리를 지속적인 과정 속에서 구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아니, 그 이전에 대중이 스스로 행위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진태원_서울대 철학과 강사)

07. 11. 26.

P.S. 랑시에르의 많은 저작 중에 가장 먼저 읽으려고 하는 책은(사실 미뤄둔 지가 꽤 된다) 슬라보예 지젝이 서문을 쓰기도 한 <미학의 정치학>이다. 얇은 책이므로 이번 겨울방학때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전에 번역서가 나온다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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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1-26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랑시에르는 개인적으로도 지속적으로 읽고 있는 철학자인데, 여러모로 반가운 글이군요. 이 코너의 특성상 일단 전체적인 윤곽만을 보여준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아마도 이 코너의 '장점'이 바로 이러한 '단점'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ㅡ혹은 뒤로ㅡ부가될 로쟈님의 코멘트가 기대됩니다.^^

로쟈 2007-11-26 18:41   좋아요 0 | URL
제 코멘트는 기대에 못 미칩니다. 랑시에르는 저에게 아직 미래의 철학자라서요.^^;

자꾸때리다 2007-11-26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박사님 한국 컴백하셨더군요 발박사님 강연도 들어봤습니다 물론 약속 땜시 다 못 듣고 나왔지만요

로쟈 2007-11-26 21:54   좋아요 0 | URL
네, 무사귀환하셨나 봅니다. '귀국보고회'는 아직 없지만요...

자꾸때리다 2007-11-27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당황스러운 내용이기는 하네요 특히 수재 둔재 차이를 부인한다는 건... 저희 학과만 봐도 저는 쩔쩔매는 유기화학을 어떤 사람은 술술술 외우던데

로쟈 2007-11-29 01:06   좋아요 0 | URL
그런 차이의 존재와 그에 대한 차등적 대우는 무관하다는 발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사인에서 러시아 관련 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6). 최근 들어 부쩍 밀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관계에 관한 기사이다.  

시사인 10호(07. 11. 20) 북극곰과 판다 사랑에 빠지다

‘북극곰과 판다가 밀월을 보내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이 최근 여러 경로로 친분을 돈독히 하는 모습을 보고 하는 말이다. 작년 중국이 베푼 ‘러시아의 해’ 행사에 대한 화답으로 올해 러시아가 주최한 ‘중국의 해’ 행사에서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임을 재차 확인했다. 요즘 러시아와 미국이 대립하는 터라 러시아와 중국의 밀착은 더욱 대비된다.

올해 중국의 해 행사는 여러모로 다채로웠다. 500여 개 중국 회사와 연인원 수십만명이 참가한 가운데 장장 8개월에 걸쳐 200여 회 행사가 펼쳐졌다. 지난 3월 개막식에는 후진타오 중국 총서기가 수뇌부들을 대거 대동하고 참석한 데 이어, 11월6일 폐막식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참석해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양국은 경제 외교 군사 과학(우주) 문화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을 약속했고 각종 협약과 계약을 체결했다. 행사 기간 중 체결한 계약 액수는 자그마치 77억 달러(7조400억 원)에 달한다.



11월5일 원자바오 총리의 예방을 받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양국 관계가 상호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양국은 결과에 만족한다. 러시아는 중국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이에 원 총리는 “외교 정책에서 러시아와의 관계를 최우선으로 고려하겠다. 양국의 안정적 성장은 양국 발전은 물론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양국 협력에서 일차적 걸쇠는 경제다. 지난 8년간 양국간 교역량은 매년 30%씩 증가했다. 최근 통계자료에 의하면, 중국은 러시아의 3위 교역국이고, 러시아는 중국의 8위 교역 상대다. 올해 9월까지 양국 간 교역량은 349억 달러를 기록해 전년에 비해 40% 증가하리라 예상된다. 폐막식 전 경제 포럼에서 알렉산드르 주코프 러시아 부총리는 “2010년에는 양국 간 교역량이 600억-8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최대 관심사는 러시아 에너지다. 이른바 원유 가스 전기 등에서의 협력이다. 빠른 성장세인 경제 버팀목인 에너지를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중국은 에너지 수입 노선의 다변화 전략을 세우고 세계 각지의 산유국들과 발 빠르게 접촉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조건을 고려할 때, 러시아 원유가 가장 매력적이다. 풍부한 매장량에 지리적으로 가까워 송유관 건설이 가능할 뿐 아니라, 나아가 동반자 관계를 내세워 유리한 조건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국이 러시아에 밀착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양국 관계가 긴밀해지자 중국 석유회사 ‘시노펙’은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티’와 원유 수입 계약을 맺었고, 현재 원유가 몽고를 경유해 기차로 운송되고 있다. 국영 러시아철도회사(RZHD)로부터는 운송비 할인 혜택을 받았다. 작년 중국이 러시아에서 수입한 원유는 전체 수입량의 10%(1500만t)에도 채 못 미친다. 하지만 내년에 착공될 동시베리아(이르쿠츠크∼다칭) 송유관이 완공되면 3000만t의 원유를 추가로 공급받게 된다.

양국은 핵 분야에서도 협력한다. 러시아 국영 원자력회사인 테넥스(TNS)는 중국에 50만톤급 핵농축용 원심분리기 시설을 건립하기로 했고, 중국의 장쑤(江蘇)성 톈완(田灣) 발전소의 1/2호기 원자로를 건설한 러시아 원전공사 아톰 스트로이 엑스포트(ASE)는 3?4호기 수주 계약을 마쳤다. 러시아 관계자는 “톈완 발전소는 러시아와 중국 간 핵 협력에서 가장 혁혁한 성과물이다”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러시아 가스에도 눈독을 들였다. 11월11일 러시아 제1부총리이자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 회장인 드미트리 메드베제예프는 국제외교대학(MGIMO) 강연에서, “현재 가스프롬은 680억 큐빅(㎥)의 가스공급 문제를 놓고 중국과 협상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중국의 투자가 주 관심사다. 중국은 2020년까지 120억 달러를 러시아에 투자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에너지 금융 통신 수송 등 30개 분야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여기에 우주 과학 분야에서 협력이 진행 중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화성 포보스(공포란 뜻으로, 화성 주위를 떠도는 형체가 불분명한 위성) 탐사에 관해서 논의했다. 일명 ‘포보스 프로그램’은 러시아 우주 기지에서 화성으로 우주선을 띄워보내 포보스 토양 표본을 채취한 뒤 지구로 운송하는 한편, 우주선 내에 화성 궤도를 순항할 중국 미니 위성을 탑재한다는 계획이다.



경제 협력 다음은 양국 간 군사 외교 협력이다. 이념 논쟁과 국경 분쟁은 잊은 지 오래다. 양국은 상하이 협력기구의 결성과 무기/기술 협력은 물론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할 정도로 군사 협력이 긴밀해졌고, 국제 외교 무대에서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군사 협력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상하이 협력기구(SCO)다. 이 기구는 러시아와 중국이 주축이 되어 중앙아시아 4개국과 함께 만든 일종의 집단 안보기구다. 브레진스키의 ‘거대한 체스판’을 원용한다면, 냉전 종식 이후 유일한 초강국으로 군림하는 미국의 유라시아 공략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집단체제라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중앙아시아 방어전략인 셈. 처음 느슨한 체제로 출발한 이 기구는 유가의 고공비행 덕분에 부국(富國)이 된 러시아와 높은 경제성장세를 탄 중국의 주도하에 점차 영향력을 불리면서 인근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등을 옵저버로 참가시키는 등 도미노 확장을 도모하고 있다.

중국의 해 폐막식 참석에 앞서, 원 총리는 타슈켄트(우즈베키스탄 수도)에서 열린 상하이 협력기구 총리 회담에 참석했다. 러시아는 MD(미사일 방어체제) 문제로 미국과 불협화음이 커지자, 카자흐스탄과 러시아 경계 지역인 사마라 주(州)에서 상하이 협력기구 합동 군사작전 시위를 벌였다. 한편 지난 8월 러시아와 중국은 우랄산맥에 위치한 첼랴빈스크에서 대규모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첼랴빈스크 인근에는 대륙간 탄도미사일 지하 저장고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는 군사 강국이다. 군 현대화를 추진하는 중국은 군수 분야에서 러시아와의 협력이 절실하다. 중국은 전투기/탱크/지대공미사일/잠수함 등을 수입함은 물론 수호이-27 전투기를 합작/생산하고 있고, 최근에는 수송용 헬기(Mi-171) 부품을 전량 납품받아 청두(成都) 헬기 수리공장에서 조립/생산한다.

경제/군사 협력은 외교 공조로 통한다. 얼마 전 중국은 이란 핵 프로그램 문제에서 러시아 방침을 옹호하며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각을 세웠다. 양국 간 밀월에서 동병상련도 한몫한다. 푸틴의 최대 약점은 체첸 분리주의다. 중국도 타이완과 티베트 독립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를 의식한 듯, 원 총리는 ‘지역 평화와 안전보장을 위해 테러 분리주의 극단주의라는 3대 악(惡)의 세력과 싸우는 데 양국이 공동전선을 펼칠 것’이라 언급했다.

최근 푸틴은 이란 핵 문제 등과 관련해 부시와 다른 행보를 보였고, 러시아·미국 외교 관계는 악화했다(<시사IN> 제6호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09 참조). 미국과 맞서고 중국과 협력하는 러시아의 행보에 워싱턴이 긴장하고 있다.(모스크바= 정다원 통신원)

07. 11. 26.

P.S. 기사의 말미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는데, 모스크바에서 절친하게 지내며 신세도 많이 진 터줏대감 '동기'이다(나이가 한참 많아서 내가 '형'이라고 부른다). 언젠가 한 대학의 기숙사로 찾아갔을 때 형은 당시 '시사저널'에 보낼 원고를 교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시사인의 모스크바 통신원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기사에서 근황을 알 수 있어 개인적으로 반갑다. 둘이 몇 차례 '장시간' 산책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볼쇼이극장의 분수대 앞에서 나눈 긴 대화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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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읽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한 대목을 다시 뜯어 읽는다(지난번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1715228 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계기는 아렌트에 관한 서평기사를 찾아 읽다가 문득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의 상당부분은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읽었기에 상기된 면도 있을 것이다.

책의 2장은 지식인과 철학자의 (가상)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과학은 재정이 튼튼한 국가가 공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수가 다수를 더욱 교묘하고 덜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입니다."라는 '지식인'의 비판에 "정말로 그러했다고 믿는다면, 왜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지요?"라고 '철학자'가 반문하자 '지식인'은 다시 이렇게 답한다(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글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전문 지식인인 저는 기존의 모든 연구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월급을 받는 철학자의 사치를 누릴 처지가 못됩니다. 학생들은 순수한 형태의 회의주의를 알기 위해 철학강좌를 들을 수도 있지만, 지식인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좀더 화해로운 입장에서 나온 해답을 통해 회의주의를 희석시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는 일부러 연출한 상황일 수 있는데, 사회과학자들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주인이란 그들에게 보수를 지불하는 특정한 고객과 그들의 작업을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입니다."(114쪽)

간단히 말하면 용역을 받은 것보다 많은 지식이 생산되며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고, 이러한 과잉/잉여를 통해서 사회과학자들은 '특정고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 지식인은 물론 이러한 '떡고물 지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관심대상으로 한다. '지식인'은 이렇게 부연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20년 전에 시카고 대학교의 도서관학 학자 돈 스완슨이 발견한 현상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현상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undiscovered public knowledge)'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완슨은 단지 연구문헌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의학 연구의 고질적인 문제를 의미있게 제시할 수 있었고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114-5쪽)

무슨 얘기냐면 새로 연구비를 투자하지 않고 기존의 연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르도 어떤 과제들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과학연구가 지나치게 전문화된 나머지 '진짜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분리되고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구결과들간의 소통과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연구를 더 많이 의뢰하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답의 대부분이, 어쩌면 해답의 전부가 다양한 과학 저널에 이미 나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문헌들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지요."란 결론은 그래서 나온다(덧붙이자면, 지난번 페이퍼에서 역자가 오역했다고 한 'across'의 용법은 여기서도 나온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across specialities').  

돈 스완슨의 경우엔 "젊은 여성의 손가락을 마비시키는 병인 레이노드 증후군의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고,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의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많은 연구비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통찰을 얻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스완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스완슨은 소위 '정보학자'이지 '생명과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가 되겠지만 최근 BBK 이면계약서의 '진실'을 들춰낸 네티즌들의 경우에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한 일은 단지 몇 년전 신문기사들을 찾아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재 보수언론들이나 유권자들이 모른 체하고 있는 'e-bank 사업자 이명박'의 진실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스티브 풀러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역할이 지식인의 역할이다(혹은 대중지성으로서의 네티즌의 역할이겠고). 그렇다면, 이러한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은 지식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지식인들에게 학자들이 가끔 신문이나 서평에서 내세우는 극단적인 주장에 더욱 대담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참신한 발견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훌륭한 선구자를 잊었던 것에 불과한지를 묻게 합니다.(...) 두번째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좀더 긍정적입니다. 즉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식인의 잡식성 독서 습관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독창적인 연구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지식인들이 너무 많이 양보하는 셈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연구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16쪽)

이러한 주장이 '대중지성'(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81&code=210000)의 일원으로서 내게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잡식성 독서 습관은 정당하다, (2)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해도 좋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이제껏 해온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걸 격려삼아 '인터넷 서평꾼'으로서, 그리고 '대중지성'으로서 (내게 보수를 주는 '특정한 고객'은 아직 따로 없지만)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과 대면하는 일을 앞으로도(적어도 당분간은) 계속해나갈 것이다(짝짝짝!).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한다면 혹 우리가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이 약간 나아질지 모른다는 '실현되지 않은 기대'를 걸고서...

0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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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짝짝짝.

로쟈 2007-11-26 09:28   좋아요 0 | URL
혼자 멋쩍어하던 차였습니다.^^;

GoNgo 2007-11-26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들르던 저도, 로쟈님의 일이 계속 되길 바라면서) 짝짝짝!

로쟈 2007-11-26 13:02   좋아요 0 | URL
감사. 좀 시끄럽게 들르셔도 됩니다.^^

qualia 2007-11-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같은 사기꾼/거짓말쟁이/위선자/졸장부/범죄자/무식꾼(으로 명백히 판명나기 직전에 있는 사람) 같은 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국민의 40~50 퍼센트에 이르는 지지를 받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저 사람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도 지지자의 60 퍼센트 이상이 계속 지지하겠다는 것인지, 썩어빠진 대한민국 국민의 양심과 정의에 대해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다수 국민들이 정의와 양심과 진리와 윤리도덕 따위가 마비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나라 지식인들은 지금, 거짓말과 비양심이 역병처럼 국민들 사이에 횡행하고, 나라의 운명이 불의의 도당의 손아귀로 떨어지려는 찰라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양심과 정의와 진리의 외침이 가장 절실한 지금 2007년 막판의 한국에서, 우리의 지식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로쟈 2007-11-26 21:56   좋아요 0 | URL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이 기준이라는군요. 이탈리아의 선례를 미리 공부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7-11-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군요. 그 능력이란 도덕불감증의 능력이겠지요?^^ 우리 국민들의 경제제일주의선호 능력에 맞는...그놈의 돈만 걸리면 사람들의 판단능력과 일처리는 왜 그리 단순해지는지 놀랍습니다. 게다가 평소 독서를 하지 않는 국민을 상대하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정확히 제 위치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로쟈 2007-11-29 01:07   좋아요 0 | URL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론 정말 사람이 없구나, 란 생각도 듭니다...
 

, 스캔들몇 달전(이라고 적다가 다시 확인해보니 지난봄이다)에 지라르의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 2007)이 출간됐다(소개기사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04858). 책은 바로 구입해서 꽂아두었는데(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중앙일보의 '테마읽기'를 보고 다시 떠올리게 됐다. 게다가 최근에 <희생양>(민음사, 2007)이 재출간되기도 해서 잠시 지라르 읽기 목록도 다시 챙겨두었다. 바로 이전에 소개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문학과지성사, 2004)와 <문화의 기원>(기파랑, 2006)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한 바가 있기에(http://blog.aladin.co.kr/mramor/909949, http://blog.aladin.co.kr/mramor/920680 참조) 이번엔 <스캔들>과 <희생양>을 읽어볼까 한다(<희생양> 혹은 <속죄양>은 문학평론가 김현이 <르레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에서 지라르의 가장 좋은 책이라고 평한 바 있다). 지라르가 생소한 독자라면 아래 기사를 참고해서 '인문학의 다윈' 혹은 '인류학의 도스토예프스키'(나는 그렇게 부른다)와 한번쯤 만나보시길...

중앙일보(07. 11. 24) [테마읽기] 르네 지라르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흔히 다윈에 비교된다. 한 주제를 두고 평생에 걸쳐 끈질기게 탐구하고 있어서다. 그의 지적 화두는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다룬 그의 대표적인 책은 여럿 나와 있으나, 대담집은 의외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그를 통해 스캔들이 왔다』(문학과지성사)의 2부는 정치학자와 나눈 대담이다. 『문화의 기원』(기파랑)은 두 명의 문학 전공자와 벌인 논쟁적인 토론을 기록한 본격적인 대담집이다.

두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대담집 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된다. 이론서에는 결코 나오지 않는 자전적 기록을 볼 수 있어서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건만, 지라르는 인디애나대학에 재직할 적에 논문을 발표하지 않아 교수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고 한다. 대담집에는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질문도 제법 들어 있다. 학계의 오해를 받기도 했는데, 그 유명한 레비스트로스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에 대해 지라르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충실히 설명한다.



그의 모방 메커니즘을 거칠게나마 요약하면 “모방적 욕망에서 시작하여 모방적 경쟁을 거쳐 모방위기 또는 희생위기로 격화되었다가 마침내 희생양의 해결로 끝나는 모든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지라르의 이론이 놀라운 것은, 욕망이 모방적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델 되는 사람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이 관계는 끝내 두 사람을 경쟁으로 몰아가게 된다. 욕망의 대상은 사라지고, 상대를 이기는 것이 목적이 되는 셈이다. 이 상황은 전염된다. 두 사람이 경쟁하며 욕망하는 것은 제3자도 탐낼 만한 법이다. 마침내 경쟁자들의 난투극이 벌어지고 만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 위기를 어떻게 중지시킬 수 있을까. 공동체 구성원이 만장일치로 지목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것이 그 해결책이었다고 지라르는 분석한다. “집단적 폭력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게 집중적으로 향하는 것”이다. 신화나 고대종교는 희생양을 보는 관점이 동일했다. 위기의 원인을 희생양에게 두고 있었고, 공동체의 평화를 되찾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을 신적인 존재로 추켜세웠다. 그런데 기독교는 다르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리스도가 공동체의 미움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에도 공동체의 만장일치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바로 희생양이 무고하다는, 오랫동안 감추어졌던 비밀을 폭로한다. “성서의 희생양은 무고한 존재여서, 비난 받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죽어줌으로써 희생양 메커니즘의 종식을 불러왔다. 지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진정으로 개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개종이란, 자신이 박해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우리 욕망의 모델로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그리스도가 욕망한 것을 욕망하라!).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세대로는 청년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으며, 민족으로는 제3세계 출신을 차별하고 있고, 노동현장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억압하고 있다. 이들은 무고하며 외려 우리들이 박해자라 고백할 때 더 이상의 희생양이 생겨나지 않을 터다.(이권우_도서평론가)

07. 11. 25.

P.S. 지라르의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에프스키론이 정식으로 번역/소개되기를 기대한다는 얘기는 예전에 적은 바 있는데, 최근에 나의 관심을 자극하는 책은 그의 셰익스피어론이다. <질투의 극장>(1991/2004)이 그것인데 영역본으로 366쪽 분량이니까 오이디푸스론과 도스토예프스키론을 합한 것보다도 더 분량이 많다. 그럼에도 이 책 또한 번역/소개되면 좋겠다. 최근에 500쪽이 넘는 인문 번역서들도 드물지 않게 출간되고 있으므로 무망한 기대는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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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6 01: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26 08:25   좋아요 0 | URL
반가운 소식이군요.^^

람혼 2007-11-26 15:07   좋아요 0 | URL
<희생양>은 예전에 이데아 총서를 통해 출간되었던 판본을 갖고 있는데, '쌔끈한' 새 표지를 보니 '견물생심'이라는 사자성어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설마' 개역판은 아니겠죠? ^^

로쟈 2007-11-26 18:42   좋아요 0 | URL
개역판일 리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경 2007-11-26 18:39   좋아요 0 | URL
얼른 관심 가지고 읽을 돈을 마련해야겠네요. 전 여태 청동기시대 토기를 가지고 단지 형식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것 같으니. 주위엔 형식과 문양을 가지고 문화권이나 시기만 다루는 지루한 고고학만 어울리는 것 같으니깐요. 그쪽도 부족한 것 많지만 우선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

로쟈 2007-11-26 18:43   좋아요 0 | URL
고고학은 왠지 땅 파는 것만 연상이 돼서요.^^;
 

문학기사 하나를 옮겨놓는다. 신예작가 김태용의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 2007)에 대한 소개기사이다. “문학의 핵심은 언어인데, 정작 소설에서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다” 정도가 작가의 출사표라면 좀 '식상한' 편이지만 “독자가 내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도중에 내팽개친다면 작가로서 실패라고 생각한다”는 패기 정도는 기대를 걸 만하다.

한국일보(07. 11. 26) 기괴한 서사가 빚는 '낯선 풍경' … 언어 통념 뒤엎는 '날선 실험'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는 도시에서 ‘나’는 만삭인 친구 아내의 배를 터뜨리고픈 욕구에 우산 촉을 뾰족히 갈고(‘검은 태양 아래’), 노부부는 서로의 발 옆에 머리를 두고 풀밭에 누워 ‘???’ 돼지의 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풀밭 위의 돼지’). 떼지어 행동하고 섹스하는 ‘우리’는 각자 경멸하는 물건을 실은 쇼핑카트를 끌고 고층 건물에서 투신한다(‘차라리, 사랑’).

소설가 김태용(33)씨가 등단 2년만에 낸 첫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문학과지성사 발행)는 이런 기괴한 서사들로 그득하다. 일상적 어휘로 이뤄진 수식 없는 단문들은 읽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그 문장들이 빚어내는 풍경은 낯설고 때론 불편하다. 익숙한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이상한 곳에 당도한 듯한, 기묘한 인식의 부조화가 김씨를 동세대 작가들과 구별짓는다.

김태용 소설의 낯섦은 그가 지닌 사전(辭典)에서 연유한다. 그 사전의 단어 옆엔 우리가 알던 의미가 지워져 있다. 등단작 ‘오른쪽에서 세번째 집’에 나오는 애완 고양이 이름은 ‘돼지’다. 고양이 출입을 금지하는 동물원 직원에게 가족들은 “이건 고양이가 아니라 돼지”라고 항의하고, ‘돼지’는 개 사료를 게걸스레 먹으며 이름에 값한다. 돼지 아닌 존재를 ‘돼지’라 부르자 돼지가 되는, 존재(의미)는 이름(언어)에 선행한다고 믿었던 통념이 무화되는 상황이다. 표제작의 인물들은 아예 인간의 언어를 버리고, 돼지의 말로 의사소통한다.

김씨는 “문학의 핵심은 언어인데, 정작 소설에서 언어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경우는 많지 않았다”고 말한다. 윤대녕씨의 단편 ‘편백나무숲 쪽으로’를 전복적으로 패러디했다는 ‘의심’을 받는 ‘편백나무 숲 밖으로’는 의미를 품은 언어로 구축된 세계의 표상인 편백나무 숲에서 도망쳐 나온 ‘나’의 독백을 담은 작품으로, 언어의 통념과 대결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오롯하다. 표제작이나 ‘잠’의 화자들은 같은 단어를 거듭 반복하며 긴 혼잣말을 하는데, 이는 끊임없이 중얼거려서라도 존재를 확인하려는, 언어에 대한 강박적 의존을 드러낸다.

김씨는 “언어를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뿐 아니라, 단어들이 만날 때 발생하는 충격과 아우라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면서 “언어 실험으로 포착한 이미지들을,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효과적으로 결합시키려 한다”고 말했다. 그 주제란 소통 불가능성, 세계와의 불협화음에 관한 것으로, 문학적 주제로서 그리 낯설지 않다. 작중 인물들은 대부분 타인과의 소통에 곤란을 겪거나, 세상에 대해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일에 실패한다.

지레 벙어리를 자처하거나(‘벙어리’) 좌절감을 감추고 위악적 태도로 일관(‘검은 태양 아래’)하기도 한다. 익숙한 테마를 첨단의 언어 실험으로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김씨는 ‘낯설게하기’란 문학의 고전적 본령에 충실한 작가다. 김씨는 “글쓰기나 독서는 본래 오독의 과정”이라며 “독자가 내 소설을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지루하다고 도중에 내팽개친다면 작가로서 실패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작품에 대한 은근한 자신감을 드러냈다.(이훈성기자)

07. 11. 25.

P.S. 작가의 문제의식은 정확하게 20세기초 아방가르드 시인/작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이다. 때문에 <풀발 위의 돼지>는 '전위적인' 소설이라기보다는 '후위적인' 소설이라고 해야겠다(사실 12간지에서도 돼지가 맨끄트머리에 오지 않는가). "21세기가 조금만 더 간절히 나를 원했으면 좋겠다."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그러한 '때늦음'은 누설되고 있는 것 아닌가. 맛보기를 원하는 독자라면 그의 '차라리, 사랑'(http://webzine.munjang.or.kr/article/content.asp?pCate=27&pVol=27&pID=416)을 미리 읽어볼 수도 있겠다. 작년 11월 문장웹진에 실렸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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