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시사인에 실린 칼럼(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56)을 옮겨온다(실명 칼럼이다). 시사인에도 가끔 북리뷰를 싣기로 했는데, 첫번째 책으로 내가 고른 건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이다. 당초 '중학생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청탁 받았지만 적어도 고등학생은 돼야 읽을 수 있을 듯하여 원고를 보낸 후에 찜찜했었는데(가령 '헤게모니의 봉사자'가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말끔하게 편집되어 있어서 그런 찜찜함을 씻을 수 있었다. 기사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편집담당자가 집어넣은 사르트르의 사진이다. '사팔뜨기 사르트르'의 모습이 지식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듯해서. 우리 주변에서 갈수록 '사팔뜨기들'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시사인 11호(07. 11. 26)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는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에 관한 ‘고전적’ 정의는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1966년 일본 강연에서 내린 것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자신과 무관한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분명 비난의 어조를 담고 있는 부정적 정의이지만 사르트르는 그것을 액면 그대로 수용한다.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어떤 명분을 내걸면서 사회와 기존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전문가로서 자신의 명성을 ‘남용’하는 부류들이다(예컨대, 번듯한 직함을 달고서 이런저런 지면에 칼럼을 ‘남발’하는 자들이다).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은 이런 부류의 역사적 운명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한 상념에 한 가지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도 유행하고 있는 ‘지식인의 종언’ 담론이다(그리고 최근 한 변호사의 양심 고백이다). 그것이 유행어가 되었다면 이제 지식인이란 부류가 역사의 무대에서 모두 퇴장했거나 퇴장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일까? 일견 그런 듯 보인다. 한데 이 종언의 사태를 부추기는 것이 자신의 명성을 남용할 수 없을 만큼 지식인들의 형편이 더 열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더 두둑해졌기 때문이라면? 오늘날 지식인의 입을 막는 국가의 손은 더욱 커지고 자본의 발은 더욱 넓어진 것처럼 보인다면? 



다시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본성적으로 약자’였다. 그 자신이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기에 경제 또는 사회 권력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지식인이란 ‘무능하고 불안정한 자’이다. 지식인은 일단 기식인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는 그러한 무기력한 상황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진단이다. 그가 말하는 ‘무기력한 상황’이란 무엇인가? 지배 계급에 대한 예속적 상황이다.

양심선언은 지식인 시대의 흔적

지식인은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이지만 이런 전문가가 모두 지식인이 되는 건 아니다. 즉 그러한 전문가가 되는 것은 지식인의 필요 조건이지만 충분 조건은 아니다. 지배 계급은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에게 두 가지 역할을 가르치고 강요한다. 하나는 지배적 헤게모니의 봉사자의 역할이고, 상부 구조의 관리자 역할이 다른 하나다. 즉, 이들에게는 지배 계급의 가치관을 전파하면서 그와 대립되는 가치관은 타파하는 기능이 부과되는 것이다. 지식인이란 이러한 예속적·기생적 상황에서 탈피하여 ‘숙주’로서의 지배계급에 반기를 들고 저항할 때 탄생한다. 알다시피, 이러한 반항의 신화적 형상이 프로메테우스이며, 지식인의 시대는 그러한 프로메테우스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오늘날 상황은 달라진 듯하다. 지식정보사회, 지식경영시대의 지식인은 더 이상 ‘불만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다. 적어도 ‘지식 자본을 가진 자’로서 새롭게 규정되는 지식인은 ‘단지 봉급으로만 생활하는 자’ 이상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그들의 허세는 언제부터인가 위세가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지식인의 종언’은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가 아니라, 배부른 처지를 이르는 말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실천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은 점점 더 발을 빼기가 어려워진 시대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무겁다.” 

사실 지식인의 사회적 위치는 모호했다. 지배 계급도 아니고 피지배 계급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무능력하면서도 불안정한 위치의 ‘모호함’이 지식인의 계급적 토대였다. 하지만 오늘날 ‘지식 계급’은 단일한 대오가 아니다.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할된 노동 계급이 단일한 대오를 구성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인의 위치는 더 이상 모호하지 않으며, 각각의 지식분자들은 지배 계급이나 피지배 계급으로 분류된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닌 지식인, 혹은 ‘약자’가 아니고자 하는 지식인이 득세할 때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사회는 이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만 ‘사이비 지식인’(혹은 ‘집 지키는 개’)들로 채워놓을 따름이다. ‘지식 계급’은 ‘지식층’으로 용해되고, ‘지식층’은 또 자연스레 사회 ‘지도층’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애도할 만한 일일까? 그나마 아직은 ‘양심 고백’과 ‘지지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식인 시대의 흔적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07. 11. 29.

P.S. 이번주 한겨레21에도 '한국 지식계의 위기'를 질타하는 기고문이 실렸다. 고세훈 고려대 교수의 '지식인은 아무도 없는가'(http://h21.hani.co.kr/section-021067000/2007/11/021067000200711290687029.html)이다. '지식계'란 용어가 눈길을 끈다...


댓글(2) 먼댓글(1)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사르트르를 발가벗기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01 23:45 
    '지식인의 지식인'을 다룬 기사를 옮겨놓고 나니 20세기 원조 지식인이라고 할 사르트르에 관한 평전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사르트르 세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인 베르나르 알리 레비가 쓴 <사르트르 평전>(을유문화사, 2009). 역자는 사르트르 전문가인 변광배 교수다. 968쪽에 달하니까 얼추 안니 코헨 솔랄의 세 권짜리 평전 <사르트르>(창, 1993)에 이어서 가장 두툼한 분량을 자랑하는
 
 
2007-11-2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2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인 김수영의 생일과 김춘수의 기일이 엇비슷한 즈음이란 걸 한국일보의 연재 '오늘의 책'을 읽으며 알았다. 어제(27일)가 그 생일이고 내일(29일)이 그 기일이다. 안 그래도 오늘 오전 강의때 김춘수의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민음사, 1997)에 실린 시 몇 편을 읽을 기회를 가지면서 3년전 모스크바에서 그의 부음을 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더랬다(이맘때쯤일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로 내일인 줄을 몰랐다). 두 시인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의 1,2권으로 나란히 출간됐던 두 시집 <거대한 뿌리>와 <처용>은 나에게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이유는 말미에 적었다.  

국일보(07. 11. 27) [오늘의 책<11월 27일>] 거대한 뿌리

시인 김수영이 1921년 11월 27일 태어났다. 그는 1968년 6월 15일 귀가 중 버스에 부딪쳐 이튿날 47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밖에 내지 않았던 그의 사후 6년이 지나 시선집 <거대한 뿌리>가 나왔고, 그의 시와 산문을 각각 묶은 <김수영 전집> 두 권이 나오고 김수영문학상이 제정된 것은 1981년이다.

<김수영 전집>에 실린, 러닝셔츠 차림으로 오른팔을 뺨에 괸 채 까칠하고 퀭해 보이는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과, ‘시(詩)는 나의 닻(錨)이다’라고 쓴 그의 필체를 몇번이나 되풀이 들여다봤던가.

 

그의 시는 시를 부정하고 있었다. ‘썩어빠진 대한민국’에 욕지거리와 상소리를 해대고, 독재자에 대고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고 시를 쓰고 있었다. 말마따나 그의 시는 ‘노래’가 아니라 ‘절규’였다. 산문도 마찬가지다. 그가 신문에 쓴 시 월평은 이런 식이다.

“이달같이 논평의 대상이 될 작품이 없는 달에는 ‘시단 월평’ 같은 것도 사보타주를 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중견시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20여년의 작업 끝에 어린아이의 작문보다도 싱거운 글을 시라고 내놓다니.” 김수영의 시와 산문은 그렇게 모든 금기나 속박을 넘어선 자유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망하던 해인 1968년 4월 발표한 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말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하종오기자)

 



한국일보(07. 11. 29) [오늘의 책<11월 29일>] 처용

 

오늘은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의 3주기다. “아름다운 서정시와 전위적인 실험시, 사회비판적인 참여시는 김춘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시를 통해 하나의 사유를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는 김춘수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문학평론가 문혜원) 김춘수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순수한 사유를 통해 파악하고자 했던 ‘인식의 시인’이었다. 그의 시론을 보면 “나의 인식을 지배한 두 사람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였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하지만 그의 인생행로는 전자에 훨씬 더 경도된 것이었다.

그의 시 ‘처용단장(處容斷章)’의 ‘제4부 뱀의 발'에 ‘역사는 나를 비켜가라,/ 아니/ 멧돌처럼 단숨에/ 나를 으깨고 간다’라는 구절이 있다. 역사가 비켜가기 바라는, 혹은 역사에 으깨인 시인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김춘수에게는 두 가지 경험의 자취가 뚜렷하다. 하나는 일제 말기 니혼대 유학중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일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7개월간 옥살이를 한 일, 하나는 1981년 5공 때 전국구 국회의원이 돼 정치에 발 담근 일이다.

그는 두 일을 두고 나중에 “모두 내 의지가 아니었던 100% 피동적인 사건”이라며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역사와 개인의 접점에서 아이러니를 겪은 시인은 ‘무의미의 시’로 나아가, 우리 시의 영토를 넓히고 그 ‘제일 아름다운’ 한 진경을 펼쳐보였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 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하종오기자)

 

07. 11. 28.

 

 

P.S. 서두에서 운을 뗀 '사연'이란 건 다음과 같다. 지난 96년에(아직 20대였다!) 적은 글에서 인용한다.

 

87년 봄. 나는 만 19세였고 대학 1학년생이었다. 꼬박꼬박 등교를 했지만, 아직 결핵약을 먹고 있던 터라 1주일에 평균 두 번은 공기가 사나와지던 학교에 대체적으로 잘 적응할 수 없었다. 3월은 연극을 하며 보내고(자원한 것이었지만 나는 하기 싫어 죽을 뻔했다), 4월은 문무대에 군사교육을 받으러 갔다 왔다 하며 보내고, 5월부터 나는 학생생활연구소에 생활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거부하게 됨에 따라 나는 일찌감치 6월초에 집에 내려갔다. 시를 쓰기 시작한 건 7월부터이다. 그리고 8월에 시집을 냈다. 모교의 누나가 타이핑을 하고 학교 아저씨가 등사를 해서 50부인가를 제본했다. 40여 편(이걸 한 달 새에 쓰다니!) 되는 시들 중에는 이런 것도 끼여 있다. 

왜놈들의 독립운동 주동자 이토오 히로부미가 
오늘 아침 드디어 총살당했다 
녀석은 지난주에 하얼빈 역에서 체포되었다 
바보 같은 녀석(빠가야로)! 
일본이란 나라 없어진 지가 벌써 언제야? 
조선 나라 황제의 은덕도 모르는 못된 놈이 있나 
그런 놈들은 
모조리 색출해서 총살시켜야 해!

'이토오 히로부미'라는 것인데, 이건 그중 나은 편이고 한 30여 편은 다시 보기 싫은 것들이다. 사실 등사를 할 때 처음에 파지가 많이 나는 것처럼 처음 시를 쓸 때도 망둥이나 빗자루 같은 게 많이 끼기 마련이다. 나는 이런 걸 갖다가 잘 아는 서점에 내놓았고 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며 홍보까지 했다(전봇대마다 전단을 붙였다!). 제 정신이었을까? 아직 만 이십 세가 안된 미성년이었다는 사실로 정상을 참작해 볼 따름이다.

시집이 팔렸냐고? 그럴 리가! 볼품도 없는 시집을 다른 시집들과 똑같은 값에 팔았는데, 두어 권이 팔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가 사가고 담임 선생님이 사가고 하신 것. 하지만 그런 거 생각할 겨를이 없이 나는 서점에서 3천원을 받아들고 마냥 즐거웠다. 그리고는 바로 다른 서점에 가서 시집 두 권을 샀다. 김수영의 <거대한 뿌리>와 김춘수의 <처용>이었다. M출판사에서 나온 ‘오늘의 시인총서’의 1,2권이었다. 나는 그제부터야 한국 현대시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한다... 

 

요는 내가 쓴 시집을 처음 팔아서 산 두 권의 시집이 <거대한 뿌리>와 <처용>이었던 것이다. 시 '거대한 뿌리'의 후반부를 옮겨놓는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인환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
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뭉실이 2007-11-29 0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어와서
책제목, 출판사 적으면서
"열심히 읽어야지!"다짐하다가
잠시 쉬어가는 중...^^;;
그림도 보고 시도 읽고 로쟈님도 읽고...*^^*

로쟈 2007-11-29 00:47   좋아요 0 | URL
서재가 쉼터이기도 하군요.^^

2007-11-29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29 0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에 전시되는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영어제목은 'They Did Not Expect Him')을 찾아보다가 문득 딸아이가 생각났다.  

그림에서처럼 (아마도 유형지에서) 오랜 세월만에 되돌아온 아버지를 맞는 자식들의 (반가움보다는) 낯설어하는 표정에서 한 가족사의 비애를 잠시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러고 보면 매일같이 귀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복에 겨워 마땅하다. 비록 딸아이가 아는 체하지 않는 날이 더 많지만(듣자하니 아이는 요즘 남자친구에게 폭 빠져 있다고 한다). 귀가하면 아이는 보통 아래 사진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가을 소풍때 찍은 거라고 한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보다는 그래도 사정이 나은 거라고 말해야 할까.   

혹은 딱 아래와 같은 표정이다. 배경은 물론 다르지만 반가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해 하는 표정은 똑같다.

집에 얼른 들어오라고 전화가 왔다(저녁을 집에서 먹으면 밥값을 아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면서). 오늘은 좀 밝은 표정으로 맞아줄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대하는 건 적어도 이런 정도의 표정이다. '아부'를 하기 위해서 자주 안 쓰던 메일편지까지도 미리 보내두었다. 그리고 머핀빵도 몇 개 들고 간다. 무얼 더 준비해야 할까...

아무튼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건 슬픈 일이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을 때 자진해서 집에 들어가야겠다(다들 제때 들어가시길!). 오늘밤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07. 11. 28.

P.S. 칸딘스키풍의 그림은 없고 대신에 고흐풍은 있다. 아이가 미술학원에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그린 그림이다. 가끔은 잠자고 있는 딸아이에게 속삭인다. "어디서 이런 녀석이 나왔을까?(We Did Not Expect You!)"라고...


댓글(2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눈보라 2007-11-2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하신 분 인가봐요. 저희 남편도 딸아이에겐 아주 극진하답니다.참고로 저희 딸은 11살인데 게를 좋아해요.찐 게를 먹고 싶다니까 야밤에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뒤지고 다녔답니다.점점 더해지지 덜해지지 않는 딸아이에 대한 극진한 사랑에 아이는 더한 무관심으로 답한답니다.각오하셔야 할걸요~

로쟈 2007-11-28 22:03   좋아요 0 | URL
극진한 것과는 거리가 멀구요(극진해도 사정은 비슷하다니까 웃어야 할지.^^;), 잠잘 때 가장 이뻐하는 편입니다. 가끔 신기해하면서...

웽스북스 2007-11-28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리지만, 색깔 쓰는 걸 보니 감각이 있어보여요 ^^
'아무도기다리지않았다'는 어쩐지 서글퍼지는 그림이네요 참

로쟈 2007-11-28 22:08   좋아요 0 | URL
보고 그리는 건 잘 그릴 때가 있습니다. 저는 아이의 정서에 문제가 있나 없나 정도가 관심거리지만...

nada 2007-11-2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빠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실 때 조금 더 시니컬한 척(?)하시는 듯한 로쟈님. 그래도 고슴도치신 게죠?^^ 이주헌 씨 책에서 레핀 그림 처음 봤는데 사실적인 러시아 그림들이 참 재미나더라구요.

로쟈 2007-11-28 22:29   좋아요 0 | URL
아이한테 보여주니 언제 자기가 그랬냐며 글을 지우라고 하는군요.^^;

마늘빵 2007-11-28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로쟈님과 많이 닮았어요. 양볼이랑 눈, 코 ^^

로쟈 2007-11-28 23:39   좋아요 0 | URL
발가락도 닮긴 했습니다.^^;

가시장미 2007-11-28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닮은 것 같아요. 그림도 너무 멋지네요. 저도 많이 좋아하는 그림인데~~~ 와우!
물감도 아니고, 크레파스로.. 저런 터치효과를 내려했다니.. 감각이 뛰어나네요! :)

특히, 집이 너무 귀여워요. 으크크 고흐의 그림에는 없는 집을.. 상상해서 그려냈네요.
집이 살아서.. 막 움직일 것 같은데요. 그림이 너무 생동감이 넘쳐서요~~
행복하시겠어요! 로쟈님~~ ^-^*

로쟈 2007-11-29 00:15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야 다 예쁜짓, 미운짓을 골고루 하지요. 부쩍 커가는 틈에 부모는 또 부쩍 늙어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네꼬 2007-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핀 그림, 김원일의 '그림 속 나의 인생'에서 첨 봤어요. 저 낯선 표정이 오히려 코끝 찡하게 하던걸요. 그나저나 자고 있을 때 누가(아빠가 아니라 누구라도!) 내 귀에 저런 말을 속삭인다면, 음,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멋져요.

로쟈 2007-11-29 12:33   좋아요 0 | URL
부모라면 누구나 속삭이는 대사가 아닐까요?^^

프레이야 2007-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보는 딸 사진이네요. 더 자랐고 더 예뻐요..

로쟈 2007-11-29 12:34   좋아요 0 | URL
'보고'드리는 것 같습니다.^^

다락방 2007-11-29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가 너무 예뻐요!!
사진으로만 알고있는 로쟈님의 모습과도 정말 닮았습니다. :)

로쟈 2007-11-29 12:34   좋아요 0 | URL
사실 엄마를 훨씬 더 많이 닮았습니다.^^;

가시장미 2007-11-30 10:10   좋아요 0 | URL
어머니께서.. 미인이시군효! :)

로쟈 2007-11-30 10:26   좋아요 0 | URL
아이엄마가 부듯해 하겠군요.^^

자꾸때리다 2007-11-29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키우셔서 저한테 보내주세요. (너무 위험한 발언인가....)

로쟈 2007-11-29 22:21   좋아요 0 | URL
벌써 짝이 있습니다.

가시장미 2007-11-30 10:09   좋아요 0 | URL
으흐으흐 인기폭발! 근데 벌써 짝을....;;; 너무 빠르시옵니다! ^-^

로쟈 2007-11-30 10:26   좋아요 0 | URL
'너를 지켜줄게'라는 짝꿍이 벌써 생겼다고 해서요. 아이가 요즘 '강아지들' 때문에 학교생활이 즐겁다는군요...

마노아 2007-12-01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따스합니다. 로쟈님은 순간순간 사람 놀래키는 힘이 있다니까요. 아이가 참 예뻐요^^

로쟈 2007-12-01 11:51   좋아요 0 | URL
가끔 엉뚱한 짓을 합니다.^^;
 

지난 주말 개막된 반 고흐전과 함께 늦가을(과 올겨울)을 화려하게 장식하게 될 대형 전시회가 하나 더 있다. 어제부터 시작된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 그것이다(홈피는 www.2007kandinsky.com). 이미 소식은 전해듣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을 만큼의 대규모 전시회로 러시아의 거장 54명의 그림 91점이 이번에 한국을 첮았다. 칸딘스키 전은 12년만이라고 하는데, 돌이켜보면 지난 95년쯤인가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시회가 열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3년전 러시아에서 본 그림들도 다수 포함돼 있어서 반가움을 감추기 어렵다.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해럴드생생뉴스(07. 11. 26) 칸딘스키가 다시 왔다..12년만의 러시아 거장전

칸딘스키와 말레비치가 다시 왔다. 12년 만이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거장들의 작품이 한국을 찾았다.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이 2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막됐다. 러시아는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차이콥스키를 낳은 문화대국. 그러나 이외에도 우리가 러시아에 대해 꼭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이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시조인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를 필두로 카지미르 말레비치(1875~1935), 일리야 레핀(1844~1930), 레비탄(1860~1900) 등 러시아 근현대미술의 백미를 한데 모은 특별전이 27일부터 2월 27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특별전에는 러시아 미술의 보고로 꼽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러시아미술관과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러시아 거장 54명의 유화 91점이 내걸렸다. 이번 미술전은 특정 유파에 집중하기보다는 러시아의 다양한 미술작품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세기 말 러시아 미술계 내부에서 시작된 혁신의 산물인 리얼리즘 회화에서부터 유럽 미술계에 큰 충격을 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구성은 러시아 미술사에 있어 가장 역동적이고, 가장 빛나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게 한다.

한국 땅을 밟은 작품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작품 63점, 20세기 아방가르드 작품 28점이다. ‘현대추상의 아버지’라 불리는 칸딘스키의 작품은 완숙기의 걸작 ‘블루 크레스트’(1917년)와 ‘구성#223’(1919년) 등 2점과 초기 작품 2점이 소개된다. 특히 ‘블루 크레스트’는 혁명기에 변혁을 열망하면서도 조국 러시아의 파국에 대한 불안한 예감, 세계대전이 낳은 인간에 대한 환멸에 휩싸여 있던 한 인텔리겐치아 화가의 고뇌가 역동적으로 승화된 작품이다. 크레스트는 ‘닭의 볏’이란 뜻으로, 불안한 시대를 상징한다. ‘블루 크레스트’의 화폭에는 칸딘스키의 고유한 모티프였던 ‘형태의 폭발’이 자리하고 있다. 산 위의 도시, 그 위로 솟은 태양의 형상은 다양한 의미층을 드러낸다.



한편 19세기 리얼리즘 회화 중에는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차이콥스키 등 위대한 작가와 음악가들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그렸던 러시아 화가들의 초상화들이 유난히 많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통찰해 표현한 레핀의 ‘타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 ‘작가 고골의 분신’을 비롯해 낭만적 분위기의 대작인 크람스코이의 ‘달밤’ 등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러시아 회화사를 통틀어서 대표적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 유형지에서 돌아온 여대생을 맞는 가족들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또 전쟁을 극사실적으로 그림으로써 전쟁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베레샤긴, 러시아 역사화의 대가 수리코프의 대작도 나왔다. 이 밖에 러시아 대륙의 장엄한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사브라소프, 바다를 격정적으로 그렸던 해양화가 아이바좁스키의 그림 등 풍경그림도 만날 수 있다.

20세기 아방가르드 작품 중에는 예술의 숭고한 경지를 담아내고자 ‘절대주의’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던 추상미술가 말레비치의 빼어난 추상화 ‘절대주의’와 광선주의의 선구자 라리오노프와 곤차로바, ‘러시아 구축주의’의 중심 화가 포포바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는 내년 2월 27일까지.(이영란기자)

07. 11. 28.

P.S. 러시아 미술에 관한 소개는 '러시아 미술 매뉴얼'(http://blog.aladin.co.kr/mramor/1024055)이란 페이퍼를 참조하시길.

P.S.2. 송연님의 지적으로 다시 보니 레핀의 그림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로 엉뚱한 그림이 제시돼 있다. 내가 아는 그림은 민음사판 <체호프 단편선>의 표지로도 들어가 있는 위의 그림이다. 레핀이 같은 제목으로 다른 버전의 그림도 그린 것인지, 아니면 패러디 그림이 잘못 게시된 것인지는 확인해봐야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수유 2007-11-28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전당을 가려면 무슨 여행하듯 가야된다는...차 없는 뚜벅이들은 말이지요.
여하튼 방학을 기다려야..오랜만에 레핀으로 눈요기나 하고 와야겠습니다

로쟈 2007-11-28 18:06   좋아요 0 | URL
레핀을 꽤 찾으셨지요?^^

송연 2007-11-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의 작품이 또 있나요? 제가 신문서 봤던 작품에는 여대생이 아닌 좀더 성숙해뵈는 남자였던것 같았고 문에도 어떤 중년여인이 서있는 그림이었던듯 했는데요...

로쟈 2007-11-28 18:0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다시 보니 그렇네요. 무슨 영문인지는 확인해봐야 알 거 같습니다...

소경 2007-11-28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럴때마다 자꾸 서울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알바 좀 해 놓았더라면 '짬'좀 낼 수 있었을 텐데, 단지 인터넷과 텍스트로써 만족해야하니. 이게 '진품'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도달하기가 이토록 머니... 도서관에서 막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온 터라 상실감이 크네요 ^^:

따님이 귀엽습니다. ㅋ 그림도 잘그리네요.

로쟈 2007-11-29 01:04   좋아요 0 | URL
아직 기한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기회를 내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네파벨 2007-11-29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좋은 소개 감사합니다.
꼭 가서 봐야쥐...
고흐는 안땡기는데 (고흐는 물론 훌륭한 화가지만 너...무...인기가 많아서 심술궂은 무관심으로 대응...) 이 러시아전은 꼭 보고싶네요.
책소개뿐만 아니라 늘 이런 좋은 정보도 알려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로쟈 2007-11-29 12:35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이런 기사를 옮겨오는 거야 손쉬운 일이죠...

아쿨리나 2007-11-29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전시회에 온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로쟈님이 위에 올리신 유명한 작품이 탄생하기 전에 그린 최초의 그림입니다. 시인이나 소설가로 치면 습작이라고나 할까요? 그것도 아주 훌륭한 습작. 그래서 조금 거칠고 둔하지만 이후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어(더 우울하긴 합니다만) 작가의 내밀한 기획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느껴집니다. 처음엔 유형을 갔던 여대생이었다가 위에처럼 나중에는 아버지로 바뀌지요. 이번에 온 그림의 여대생은 당시의 실존인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이 여대생의 얼굴에 레핀의 딸의 모습을 담았다고 해요.
12년만에 온 러시아미술전, 정말 멋진 전시회였답니다^^

로쟈 2007-11-29 22:1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여대생 그림은 왠지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져서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천천히 시간을 내보려고 합니다...

kwangdol 2007-11-30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 전시회 관계자입니다.
레핀은 그리 크지않은 규모의 '아무도기다리지않았다'를 완성하기 위하여
완성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여러차례 방안의 들어온 소녀의 모습이있는 부분을 수정했습니다.햇수로 15년에 세월이 흘러 1898년의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로쟈 2007-11-30 23:18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레핀의 노작을 서울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반갑고 고마운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주 시사인에 기고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리뷰기사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약자'가 아닌 지식인, 혹은 '약자'가 아니고자 하는 지식인이 득세할 때 '지식인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다. 사회는 이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다만 '사이비 지식인'(혹은 '집 지키는 개')들로 채워놓을 따름이다. '지식 계급'은 '지식층'으로 용해되고, '지식층'은 또 자연스레 사회 '지도층'으로 편입된다. 이것은 애도할 만한 일일까? 그나마 아직은 '양심고백'과 '지지 선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지식인 시대의 흔적을 다행스러워해야 할까?"

마지막 문장에서 '얌심고백'은 물론 삼성 비자금에 대해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을 가리킨다. 그리고 '지지 선언'은 그에 대한 지지를 표하면서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낸 삼성 특검법도입 촉구성명을 염두에 둔 것이다. PEN의 성명 발표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김상봉 교수와의 인터뷰가 기사가 있길래 옮겨놓는다(사실은 나도 얼마전에 PEN으로부터 성명에 동참해달라는 메일을 받았는데, '철학자'가 아니어서 따로 의사표시를 하지는 않았다. '문학자 네트워크'에서 보냈다면 사정은 달라졌겠지만)...  

경향신문(07. 11. 27) ‘철학자…’ 김상봉 교수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녀선 안돼”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 2007년이 저물어가는 한국사회에서 철학자들이 발언하기 시작했다. 참여연대 느티나무 카페에서 이용철 전 청와대 민정비서관의 삼성 뇌물 500만원 폭로가 있었던 그 날(11월19일).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앞에서는 전국의 철학자들이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의 이름으로 삼성 특검법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 참여한 철학자는 210명이다. 김남두 서울대 교수, 유초하 충북대 교수, 홍윤기 동국대 교수, 박상환 성균관대 교수, 강신익 인제대 교수, 신승환 가톨릭대 교수 등 참여자들의 면면은 한국 철학계를 이끄는 주축들이다. 이 전 비서관의 폭로와 맞물려 국회의 특검법 통과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는 이번 성명 뒤에는 신속하게 철학자들의 뜻을 모은 김상봉 교수(47)가 있었다. 김교수를 25일 오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났다.

김교수는 한사코 자신은 ‘잡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시작은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이 음해성 시비 등으로 본질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던 2주일 쯤 전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의 대화에서였다.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김교수의 말에 홍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홍교수가 ‘격문’을 쓰기로 하고 김교수는 ‘연락책’을 맡았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돼야 하는가”를 묻는 홍교수의 ‘명문’이 나왔다. 김교수는 전국 각지에 분포된 10여명의 철학 교수들에게 연락했다. 철학자들의 중지를 모아달라고. 이윽고 210여명의 교수의 이름이 모였다.

철학자들이 발언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민교협 같은 운동단체와는 좀 다른 느낌을 주죠. 같은 말이라도 ‘철학자들은 저렇게 말하는구나’ 하는 걸 보여줄 수 있어요. 똑같은 정치·사회 이슈를 철학의 눈으로 봤을 때 더 근본적으로 성찰 수 있는 지점이 있는 겁니다. 이번 경우 다들 비리가 어떻고 얘기들을 많이 하고, 그것도 일리가 있지만, 철학자 입장에서는 한 인간이 양심선언이라고 해서 발언할 때 우리는 그 양심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봤어요.”

철학자들이 모여 성명을 낸 것은 이번이 여섯번째다. 2004년 탄핵 후 4·15 총선을 앞두고 정동영 열린우리당 선대 위원장의 사퇴를 촉구한 것을 시작으로(실제로 정위원장은 사퇴했고, 여권은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이라크 파병 반대 성명, 송두율 교수 사건을 맡은 서울고법 항소심 재판부에 보낸 무죄 석방과 국보법 폐지 성명, 보수단체의 전시작통권 환수 반대 서명에 전·현직 한국철학회 회장들이 악의적으로 활용될 때 학회장의 사퇴를 촉구한 성명 등 고비고비마다 이들은 발언하고 개입했다.

“PEN은 사실 실체가 없는 조직입니다. 회장도, 대표도, 사무실도 없어요. 일종의 유목 네트워크죠. 하지만 몇 차례 이런 경험을 공유하며 한국사회에 중요한 사안이 터지면 신속하게 중지를 모아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내는 체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문구 하나도 치열하게 토론한다. 이번에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것은 ‘삼성제품 불매운동’ 문구이다. “불매운동 안하겠다는 얘기는 그냥 한 번 짖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네(삼성)들이 뭘 겁내겠느냐는 말이죠. ‘이 녀석들아, 또 떠들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어요? 국가경제 어쩌고 하는 여론몰이 때문에 불매운동 못하겠다는 것은 저쪽이 바라는 바이자, 노리는 바입니다. ‘공포의 동원’이죠.”

그는 삼성 불매운동 때문에 국가경제가 위험에 빠진다는 논리는 박정희 독재 때 독재를 비판하면 북이 남침해 올 지 모른다는 논리와 똑같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권력이든 삼성이든, 황우석이든 자신을 국가(또는 국민)의 이익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가 위험에 처하면 국가가 위험에 처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동일화의 논법으로 전국민을 협박합니다. 삼성 족벌체제가 무너진다고 해서 삼성이 망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 삼성이 망한다고 해서 국가경제가 무너지겠습니까. 평소엔 세계 12위 경제대국을 자랑하다가도 매번 비리 척결 얘기만 나오면 유아기로 퇴행해버립니다. 언제까지 삼성의 협박에 끌려다닐 건가요. 인간을 억압하고 노예화시키는 것은 국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도 할 수 있고 기업도 자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EN에 동참한 철학자들은 조만간 대학 내에서 ‘쟁점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다. 강의명은 ‘아직도 삼성 제품을 쓰십니까?’다. “부도덕한 기업의 제품을 쓰는 것은 부도덕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한 학기에 30분이라씩이라도 할 것입니다. 기왕의 삼성제품은 마크를 지우고 쓰고, 다 쓰면 다른 회사 제품을 사도록, 민교협과 함께 지속적으로 홍보할 것입니다. 언젠가 삼성 제품 들고 있으면 부도덕하고 교양없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김교수는 지난 4월 전남대가 정몽준 의원에게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려 했던 계획을 철회토록 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죽고 사는 것은 돈이나 건물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철학은 끝입니다. 정몽준씨가 대학에 어떤 건물을 지어주기로 되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돈을 주기로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학이 기업 찾아다니며 ‘앵벌이’ 한다는 것은 학문의 독립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자들이 양심의 가책 없이 인간을 위한 학문을 한다는 말을 한다는 게 너무 놀랍습니다. 400억~500억원 들여 삼성관, 엘지관을 지은 대학들은 언젠가 그 건물이 수치스러운 기념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들에게 분명히 물어야 합니다. 당신들 자랑스럽냐고. 그러고도 당신들이 국민 세금을 지원 받을 존재 이유가 있느냐고.”

정의원에 대한 명예철학박사 수여를 철회하라는 요구는 교수들이 먼저 내서, 대학원생, 학부생, 학생회까지 한 목소리를 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책임이 무거운 교수들이 청년학생들보다 먼저 알고, 먼저 얘기를 하는 게 마땅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사회적인 발언, 비판의 몫이 계속 학생들에게만 돌아가다보니 젊은 학생들이 그에 대한 비판까지 모두 떠안아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모든 걸 다 떠안게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그러면 학생들이 공부를 할 수 없게 됩니다. 이번 일은 일종의 교육적 효과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 선생들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된 거죠. 저 사람들은 가르치는 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구나. 교수회의에서도 그 점이 크게 작용했어요.”

자본의 공세에 거의 모든 대학들이 무릎을 꿇은 지금 전남대 철학과 혼자만으로는 너무 미약하지 않을까. “아직은 그런 걸 물리칠 줄 아는 대학은 전남대 그것도 철학과 뿐이죠. 그러나 처음이 어려워요. 이런 식의 사례가 생겨난다면 다른 데서도 이런 비슷한 일들에 직면할 때 생각 안할 것을 한 번 생각하고, 한 번 생각할 것을 두 번 생각하겠죠. 대학 사회가 자본의 매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만은 않는다는 사례를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전남대 철학과와 PEN에서 새로운 지식인 운동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진보적인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 내에서는 신뢰를 못 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자기가 선 자리를 진보적으로 견인하지 못하면서 밖에 나가서 세상을 진보적으로 견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철학계는 한창 공부하는 사람들이 일관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니까 학문후속세대도 그런 쪽으로 견인되고 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을 보고 누가 ‘김상봉이 공부하기 싫어서 저 짓 하고 다닌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어떤 새로운 공동체의 전망을 열어줍니다. 한국 학계 초유의 일입니다.”

그는 “1970~80년대 진보운동 진영을 문학계와 역사학계가 견인해 왔다면 앞으로는 철학계가 견인할 것”이라고도 했다. 사실 문학계 안팎에서는 이미 근대문학의 역할은 끝났다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지금까지 PEN의 활동은 새로운 지식인 운동을 위한 준비였고 어느 정도 검증도 됐다.

“정파를 만들지 않고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 오직 이성을 신뢰하고 약자의 편에 서서 한국사회를 진보적 방향으로 견인해 나가려 합니다. 사실 지난 100년간 한국 철학은 외래철학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 덕에 지식이라면 많이 축적했어요. 이제는 현실과 만나며 현실을 철학적으로 해석해내고 현실을 끊임없이 참된 방향으로 견인해나갈 것입니다. 한 사회 내에서 왜 철학이 필요한가를 보여줄 자신이 있습니다.”

그날 새벽차를 타고 상경해 인터뷰를 하고 월요일 아침 강의가 있어 광주로 내려가야 한다며 총총걸음으로 돌아서는 김교수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지식인이 사라진 시대에 철학자가 발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손제민기자)

07. 11. 27.

P.S. 아래는 PEN의 성명 소개기사이다.

경향신문(07. 11. 27) [성명] PEN “양심선언을 지지하고 엄정한 특검 수사를 촉구한다”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 (PEN, Philosophical Engagement Network)

특수부 출신 전직 검사이자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그리고 현재 변호사인 대한민국 시민 김용철 님의 양심고백을 근거로 지난 10월 29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삼성그룹 비자금 전모에 대한 수사를 촉구한지 한달이 되어가고 있다. 그 동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우리의 직업인 철학에서 가장 기본적 윤리 개념인 ‘양심’의 입장에서, 과연 우리 국가와 사회가 바로 이 양심을 알아보고 지원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를 비상한 관심으로 주시해 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한, 경제적 독재권력이 중심에 놓인 이 사건을 두고 국가 기관, 각종 사회권력들, 특히 청와대와 여야 정당, 그리고 언론의 반응을 보면서 크게 절망한 끝에 더 이상 사태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우선 첫째, 우리는 검찰이나 금융감독원이라는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자기 인생을 걸고 삼성제국의 거대한 비리를 짚어낸 한 인간의 양심을 알아볼 그 어떤 의지도 없다는 데 실망한다.
― 그리고 둘째, 우리는 언론을 비롯한 이 사회의 각종 권력들이 침묵의 카르텔을 고수하면서, 김용철이라는 한 시민의 양심이 묻히고 그가 파렴치범으로 각인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은 처신을 보이는 데에 절망한다.

10월 29일 기자회견에서 사제단은 김용철 전 삼성 구조본 법무팀장 명의로 우리은행 삼성센터지점에 개설된 차명계좌 세 개와 굿모닝신한증권 도곡동 지점의 증권 계좌 한 개의 번호, 그리고 그 계좌들에서 발생한 이자소득의 액수까지 제시했다. 과거 노태우 전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사건은 당시 박계동 신한국당 의원이 제시한 예금잔고 조회표 한 장으로 그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는 2006년 현대차 비자금 사건의 경우 A4 서너 장에 불과한 내부 실무자의 회계자료 제보 하나로 정몽구 회장의 구속까지 이르는 데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사건들 모두 대검 중수부가 바로 수사에 착수했었다. 

그리고 올해 들어서는 한 고위공직자의 사소한 권력형 비리와 남녀 스캔들이 뒤얽힌 학력 관계 사문서위조사건을 갖고 유력한 사립대학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로 털어내다 급기야 쌍용그룹 전 회장이 집안에 은닉한 막대한 비자금까지 찾아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만능의 수사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검찰과 경제계의 검찰격인 금융감독원은 김용철 변호사와 사제단이 생명과 인격을 걸고 제시한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신속한 수사 착수는커녕 마치 범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입 맞출 시간을 갖게 할 요량인 양 계속 시간을 끌었었다. 어떤 경우에도 검찰과 금감원의 수사 능력이 아니라 수사 의지가 문제다. 과연 시민과 성직자의 양심이 국가기관에 의해 이렇게 무시되고 경시되어야 하는가?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힐 시간이 지체되는 동안 삼성제국의 비리를 토설한 김용철 전 법무팀장을 파렴치범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파상적으로 행해져 그 사건을 보는 보통 시민들의 시각을 호도한다는 것이다. 한 학력 위조자에 대해서는 그 알몸 사진이나 사생활까지 샅샅이 캐던 족벌언론들은 이번 사건의 기사를 최대한 축소하고 김용철 변호사의 신상은 어두운 쪽으로 최대한 키워 드러냄으로써 ‘삼성 감싸기’에 급급했다. 호사법 제1조 1항에 따르면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는 변호사들의 모임인 대한변협은 명백히 공익을 저해하고 국가 전체를 오염시키는 은밀한 범법집단인 삼성제국의 행태를 토설한 김용철 변호사가 “의뢰인 비밀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징계를 검토하겠다고 나서 양심 모욕이라는 추태의 정점에 섰다.

국가권력과 사회권력의 이런 비호를 등에 업은 가운데 삼성제국 안에서 드디어 비장의 승부수가 연출되었다. 김용철 변호사와 마찬가지로 검찰의 고위 간부 출신으로 삼성의 현직 법무실장인 이종왕 변호사가 변호사직까지 내던지며 김 변호사의 언행을 “모두 거짓”으로 단정하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 실장의 사직으로 삼성은 김 변호사 개인을 ’파렴치범’으로 부각시키고 자신들의 ’결백’을 호소해 이번 ’진실 공방’에서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려는 의도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제 싸움은 ‘삼성제국의 비리 대(對) 한 내부고발자의 시민적 양심’이 아니라 ‘변호사 대(對) 변호사’의 격투기로 축소될 전망이다. 이렇게 우리 사회와 국가는 한 시민의 양심을 알아볼 능력도 없단 말인가?

양심이란 자기 신념이나 사고 또는 행위가 옳다고 믿는 주관적 확신이다 그래서 어떤 개인이 자기의 양심으로만 그 객관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양심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 어떤 사회나 국가의 정의도 ‘실천적 실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한 개인이 양심을 걸고 나설 때 그 ‘진정성(眞情性)’을 알아채는 것은 그 사회나 국가가 올바르게 발전하는 데 꼭 필요한 사회능력 또는 국가능력이다. 그럼 시민 김용철은 지금 양심적 언행을 하고 있는가?

자기 양심을 걸고 삼성제국의 비리를 고백한 김용철 변호사는 지금까지 착하고 올바른 인생만 산 인물이 아니다. 5공 살인정권의 수괴 전두환의 비자금을 기어이 찾아낸 특수부 검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실토했듯이, 삼성제국 안에서 제국의 범죄를 진두지휘한 그 범죄의 “공범자”이자 경우에 따라서는 “주범”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국 철학자 앙가주망 네트워크(PEN)’에 참여한 우리 철학자들은 지금 이 순간, 변호사이기 이전에 이 얼룩진 인생을 되돌아보는 시점에 서서 제국의 비리를 외부에 알린 이 ‘평범한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철학적 분별력에 따르면 바로 이 순간 시민 김용철이야말로 양심의 절실함을 갈구하는 ‘양심적 인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삼성정치자금 사건,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을 통한 불법 상속 및 증여 시도 사건, 삼성 X파일 사건 등으로 점철되는 삼성제국의 비리 행진 안에 그것을 추동하는 내부 부패 구조가 있다는 것을 여실히 열어 보임으로써 우리 사회와 국가에 만연한 권력불신과 권력불안의 또 하나 근원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알려주었다. 그의 양심선언의 내용은 우리 사회에 아주 유의미한 것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 우리 삶을 더 잘 알 수 있는 더 많은 진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양심 진정성의 유의미성 조건 충족)

이제 삼성을 빼놓고는, 우리 사회와 국가의 민주주의와 청렴함을 더 이상 논할 수 없다. 삼성은 더 이상 단순한 경제권력이 아니다. 국세청을 비롯한 관료, 검찰, 사법부 판사, 그리고 여야정치권 등의 국가권력, 금융, 재계, 언론 등의 사회권력, 나아가 학계는 물론이고 심지어 시민사회와 청와대까지도 장악하려는 전체주의적 독재권력이고자 하는 야망의 화신으로 분명히 부각되었다. 그들이 꿈꾸는 것은 국가 안에서 국가 위에 군림하는 제국(帝國)이다. 그런데 시민 김용철이 말했듯이 “삼성의 역기능은 임계점에 달했지만 자정능력이 없다.”

한 법무법인의 동료들부터도 배척을 받았다. 이런 그의 처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이익에 초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를 내몰았다. 그는 자기 행위가 이익에 초연함을 보임으로서 자기 양심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충족시켰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이익초연성 조건 충족)

그리고 그는 분명히 나약한 인간이다. 그는 생래적으로 의로운 인간이 아니고 그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이런 자신의 나약성에 저항하기 위해 수도원 안으로 자기를 가두었다 그는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곳에다 자신을 묶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는 돌아가면 자기파멸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곳에다 스스로를 결박했다. 언제든지 굽혀질 수 있는 자기 양심의 나약성에 대해 그는 스스로 저항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자기나약성에 대한 자기저항의 조건 충족)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양심의 진정성에 쏟아질 수 있는 모든 의혹과 비난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스스로 시험대 위에 올랐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에게 어떤 비난도 해도 되고 어떤 의혹을 제기해도 된다. 그는 비난과 비판 앞에 스스로를 드러내고 해명한다.(양심 진정성에 있어서 恒常的 自己試驗用意의 조건 충족)

이러고도 우리 철학하는 이들이 시민 김용철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인가?
이러고도 그를 믿을 능력과 용기가 우리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없다는 얘기인가?
양심은 오직 착하고 선량한 인간만이 가지는 선한 인성의 발동이 아니다. 아무리 악한 인간일지라도 그 어떤 계기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 올바르고 싶고 남들로부터 올바른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원천적 욕구를 갖기 때문에, 자신의 양심을 공표하고 그 진정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절실함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철학이 통찰한 이런 양심 진정성의 요건들에 비추어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거침없이 ‘시민 김용철’의 뒤에 서고자 한다. 한 나라가 ‘발전’하는 데 경제발전의 능력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한 나라가 ‘지속 적으로 발전’하려면 그 경제발전 속에서 양심을 발휘하고 그 양심을 알아보고 그 양심대로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만드는 더 고차적인 능력이 필수적이다. 삼성의 저력은 그 경제 능력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과 긍지에 있다. 그러나 족벌체제로 굳어진 삼성제국은 국민의 이런 사랑과 긍지를 끊임없이 배신해 왔다. 족벌제국 삼성은 이제 국민기업 삼성 발전의 족쇄이고 그 질곡이 되려고 한다. 양심을 알아보는 능력, 우리에겐 이제 그것이 절실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한민국의 국민에게 우리가 추구해 온 철학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三星帝國, 그 非理를 吐說하는 良心을 알아보자!’
삼성제국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잠식하는 국가 안의 제국이며, 이 나라 지배엘리트 전체를 오염시키려는 반국가 범법집단이다. 따라서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삼성제국의 해체와 삼성의 진정한 발전, 그 위에서 꽃필 대한민국의 정의로운 번영을 위해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1. 여야 정치권과 청와대는 이 삼성제국에 대한 조사와 수사를 주저하는 검찰과 금융감독원의 고위층을 직권정지하고 삼성제국 해체를 위한 특검제를 도입하라! 그리고 특검 수사가 종결될 때까지, 삼성 관리 대상자로 지목된 임채진 차기 검찰총장 내정자의 임용을 철회하라!

2. 청와대는 부패척결의 부담을 차기정부에 전가하지 말고 임기 중에 삼성사태 진상 규명에 전력을 질주하라. 청와대는 참여정부 5년간 삼성권력이 급속하게 비대해지는 것을 방치했을 뿐만 아니라 해괴한 논리를 동원하여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공언함으로써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삼성 감싸기에 나서고 있다. 청와대는 삼성 감싸기를 중단하고 특검법 통과에 적극 협조하라!

3.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은 변양균 사건과 현대/쌍용 비자금 수사에서 보여준 수사 강도를 능가하는 정도의 방식으로 삼성제국의 범죄기획처인 삼성 전략기획실의 운용과 그 비자금 전모를 낱낱이 밝혀내라!

4. 경제관련 정부 당국과 국회는 단 2%도 안 되는 주식으로 60개 대기업을 좌우하는 삼성가의 족벌경영체제를 이 기회에 종식시키고, 산업자본/금융자본 분리 원칙을 폐기하거나 약화시키려는 어떤 음험한 발상도 금지하며, 금융기관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정책 기조를 공고하게 확립하라!

5. 국민의 진정한 알 권리를 외면하는 족벌언론들은 침묵의 카르텔을 해체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며 삼성제국의 진면모를 분명히 알리는 데 앞장서라!

6. 대통령 자리에만 눈멀어 삼성제국의 작태에 눈감으려는 통합신당과 한나라당의 기회주의적 정치인들은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을 청취할 청문회를 조속히 개최하여 삼성제국의 반국가 음모를 전 국민 앞에 공개하고 공적 기록으로 남기도록 하라!

7. 이런 모든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우리 철학하는 이들은 그 어떤 명목으로 지급되는 삼성의 사회적 기여금이나 기부금도 사회적 뇌물이나 매수로 간주할 것이다. 모든 언론, 학술단체 그리고 시민단체는 삼성 사태가 종결될 때까지 그 어떤 삼성의 기부금도 거부하여 경제권력 독재 음모의 분쇄에 동참하라!

8. 그리고 이 기회에 삼성제국의 반국가적 망동을 응징하고 진정한 삼성의 경쟁력을 확립시킬 채찍을 가한다는 취지에서 삼성의 족벌체제가 종식될 때까지 일체의 삼성 제품에 대해 범국민적 불매운동을 벌일 것을 시민사회에 제안한다.

2007년 11월 19일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늘빵 2007-11-27 08:59   좋아요 0 | URL
역시 김상봉, 홍윤기 선생님이시군요!

로쟈 2007-11-27 13:43   좋아요 0 | URL
'잡일'하는 철학자들이 좀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잡일만 할 수는 없겠으나...

섬나무 2007-11-27 12:53   좋아요 0 | URL
전남대에 이런 교수님이 계셨군요. 얼마 전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삼성비자금 폭로한 김용철 변호사 얘기가 나오는데 얘기의 갈래가 김용철씨의 폭로 저의에 대한 궁금함이라든가 그의 학창시절의 일면에 대한 얘기들이었습니다. 옆에서 듣기에 열이 뻗치는 내용이었지요... 도대체 왜 우리나라는 이런 상황을 보고 모두들 조용한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삼성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단어에 안주하려는건지... 그나마 역할을 하려는 지식인과 언론의 기능을 하려는 언론이 그나마 있음에 위안을 삼아야겠습니다. 기사 전달 감사합니다.

로쟈 2007-11-27 13:44   좋아요 0 | URL
지식인 시대의 종언은 대세인 듯하지만 아직은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연 2007-11-28 09:47   좋아요 0 | URL
김상봉선생님에게는 겸손함이 홍윤기 선생님에게는 당당함이, 그분들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정말로 이제는 철학계도 그들만의 철학이 아니라 현실속으로 움직일 필요가 절실해진 시점입니다.

로쟈 2007-11-28 18:10   좋아요 0 | URL
학술활동도 열심인 분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