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준비 때문에 읽게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작년 경향신문에 연재됐던 '헤르메스의 빛으로'의 한 꼭지로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관한 것이다. 일견 졸렬해 보이는 아이네아스의 형상에서 새로운 영웅상을 읽어내고 있는데, 필자의 예시대로 <일리아스>의 영웅들과 대조해봄 직하다. 그리고 '비르투스(virtus)'와 '피에타스(pietas)'도.  

↑ 로마의 가부장 전통(pater familias)을 표현한 조각상. 가운데 중심 인물이 아이네아스이고, 어깨 위에는 아이네아스 가문의 신주(神主)를 든 아버지 앙키세스, 뒤에는 아들 아스카니우스다. 로렌초 베르니니가 1618년부터 2년에 걸쳐 완성했다(로마 보르게세 미술관 소장).

경향신문(07. 02. 09) [헤르메스의 빛으로](6) 새로운 영웅 아이네아스의 탄생

"기억하라! 로마인이여, (굳건한 기강 위에 세워진) 국권의 힘으로 인민들을 다스리는 것, (이것은 너희들만의 기술일진저!), 평화의 법도를 수립하는 것, 곧 순종하는 자에겐 관용을, 오만한 자에겐 징벌을 내리는 것을('아이네이스' 제6권 851~53장)." 이는 제우스가 아버지 앙키세스의 입을 통해서 로마의 건국 원조인 아이네아스에게 내린 천명이다. 로마식 '평천하(平天下)'선언이다. 이 '평천하'를 수행할 인물에 대해서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19년)는 작품 '아이네이스'에서 그의 첫 등장 장면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중략)온 바다가 심연의 밑바닥으로부터 뒤집히면서 일으킨 거대한 파도를 바람들이 해안으로 거세게 몰기 시작하자, 선원들은 비명을 내지르고, (돛을 지키는) 밧줄들이 아우성치기 시작한다. 일순간에 먹구름이 덮쳐 트로이인들의 눈에서 하늘과 낮을 강탈해 가고, 암흑이 바다를 뒤덮는다.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과 창공을 불태울 듯한 번개가 번쩍이면서 눈앞에서 일렁이는 죽음을 선원들에게 몰아대는데, 순간 아이네아스는 공포에 질려 사지가 풀려버리고, 절망의 통성(痛聲)과 함께 하늘의 별들을 향해 두 팔을 뻗어 올린다('아이네이스' 1권 84~94장)."

데뷔 무대치곤 너무 초라하다. 울고 있는 아이네아스의 모습은 영웅으로 보기에는 너무 졸렬하다. 유사한 상황에서 하늘에 대고 포효를 내지르는 그리스의 영웅 아이아스를 보라! 죽는 것은 무섭지 않으니 암흑이 아니라 광명천지에서 장렬하게 전사토록 해달라고 제우스에게 대드는 아이아스를! ('일리아스' 17권 645~47행). 이에 반해 아이네아스는 여느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울면서 징징거리고 있다. 용기와 평정심을 가지고 상황을 진두지휘해야 할 사람이 말이다. 이런 그를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영웅답지 못한 그의 모습은 이것만이 아니다. 사랑하는 아내 크레우사도 지키지 못했고,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내였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pietas erga parentem)' 때문이라 하지만, 어쩐지 궁색해 보인다. 어쨌든 파파보이(papa-boy)였다.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와 비교해보라! 소위 자신의 '왕의 남자'인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하자, 복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전투에 나선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영웅이다. 이렇게 영웅이란 지켜주어야 할 것을 지켜주고 소중한 것을 위해선 모든 것을 걸 줄 알아야 한다. 이 기준에서 볼 때 로마의 아이네아스는 자격이 한참 모자라 보인다.

↑ 가슴에 꽂은 비수를 아래로 떨구고 있는 여왕 디도와 이를 애절하게 지켜보고 있는 카르타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과 글로 실은 필사본. 바티칸 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어쩌면 그리스식, 더 정확히 호메로스식 영웅의 기준에서 보면, '아이네이스'에서 진정한 영웅은 아이네아스가 아니라 오히려 여왕 디도일 것이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으며 자신의 생명도 내던졌던 여인이었기에. 그러나 묻지 않을 수 없다. 여왕 디도의 사랑이 과연 영웅적인지를. 그녀는 한 나라의 책임자다. 그녀 안에는 그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카르타고 인민과 카르타고가 그녀의 일부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존재가 아니고, 만인의 존재이다. 자신의 운명이 곧 국가의 운명인 인물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여왕으로서 그녀의 사랑이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광기(furor)는 아닐까? 이 광기는 사랑의 감정만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속였고, 자기 안의 다른 존재들도 자신의 일부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했다. 결국 그녀를 사로잡은 광기는 절제와 품위로 넘쳤던 한 여왕을 죽음으로, 조국을 파멸로 이끌게 된다.

반면, 아이네아스의 태도는 딱 파파보이의 그것이다. 그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령을 따른다. 아이네아스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깊은 사람이기 때문이라 한다. 나름대로 인간적인 번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종국엔 사랑을 배신한다. 아무래도 쏟아지는 비난을 모면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를 염두에 두었는지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의 효심은 파파보이의 그것이 아니라 한다. 이 마음은 단지 생부 앙키세스만을 향하는 혈연적 사랑이 아니기에. 오히려 이 효심 안에는 멸망한 조국의 재건이라는 역사적 사명과 세계에 평화의 법도를 수립해야 하는 천명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이네아스 안에는 아이네아스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마 인민과 로마도 함께 있다. 이런 운명(fatum)의 인물이기에, 아이네아스는 자신에겐 황홀하지만 다른 만인에겐 참혹한 사랑의 달콤함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그들도 결코 남이 아니므로. 자식, 아버지, 아내, 형제, 친척, 친구, 로마의 인민으로서 자신들의 몫을 아이네아스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쉽지 않은 저울질이었으리라. 아이네아스의 선택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의 달콤함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몫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존중을 로마인들은 피에타스(pietas)라 부른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에 대해서 자식이 부모에게 가져야 하는 마음, 효(孝)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나라가 인민에게, 인민이 나라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음, 곧 충(忠)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로마식 충효지심(忠孝之心)인 피에타스가 연인에 대한 사랑을 희생시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사회의 기본 원리인 남녀의 사랑을 희생시킬 만한 가치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르길리우스가 피에타스의 확립을 위해 사랑을 희생시킨 데에는 다른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러 답변이 가능하겠으나, 이런 해명도 가능하리라. "이곳은 사는 동안 형제를 증오하는 놈, 아버지를 두들겨 팬 패륜아, (의지할 곳 하나 없는) 피호민을 속인 귀족 떨거지들, 평생 돈만 알고 (행여 새지나 않나 두려워) 혼자서만 꿰차고 친척들에게 베풀지 않은 수전노(이런 족속이 제일 많은데)들, 간통 중에 걸려 맞아 죽은 (연)놈들, 칼과 창을 들고서 들어와선 안 되는 땅을 군홧발로 짓밟은 놈들, 주인을 속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놈들이 갇혀서 처벌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오('아이네이스' 6권 608~613행)."

이 대목은 지옥의 한 장면이지만, 실은 지상 로마의 현실이기도 하다. 온갖 잡범들과 법을 어기고서 군대를 로마로 끌어 들이고 있는 악한들로 가득한 지상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으로, 오늘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을 어떤 사람이 바로 잡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품성을 가져야 할까? 온갖 범죄로 가득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하는 책무를 지닌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이는 분명하다. 그것은 청춘남녀간 사랑의 정념이 아니라, 타인의 몫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할 줄 아는 법과 사람 사이의 관계(人間)를 정립해주고, 사람이 사람답게 처신하도록 해주며, 곧 예의를 회복시켜주는 복례(復禮)의 덕인 피에타스이다. 그것은 전쟁과 내전으로 사람이 짐승으로 떨어지고, 가족도 무너지고, 법의 강제력으로도 나라가 통제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곳을 다시 사람 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할 때 요청되는 내심(內心)의 명령이다.

칼을 외부의 적으로 향하게 할 때에 필요한 것은 용기(virtus)이다. 그러나 그 칼이 내부의 세계로 향하게 될 때, 그것은 광기(furor)로 변한다. 아무리 내부 세계가 지옥이라 할지라도 저 칼을 내부로 돌려선 안 된다. 복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정신의 무기이기에. 베르길리우스는 그 무기로 인내와 관용이 결합된 피에타스를 제시한다. 보기에 지저분하고, 하는 일이 일사천리로 시원스럽게 진행되지 않는다 해서 한 판에 싹쓸이해야 한다는, 한 번에 다 씻어내야 한다는 조급증은 이럴 때에 가장 위험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조급증의 소유자는 이런 상황에서 칼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그 사회는 내전(bellum civile)이 시작된다. 기원전 80년 술라 독재의 로마를 봐라! 정신의 무기는 그 효과가 당장 드러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정신의 무기, 곧 인문 교양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든 사회는 따라서 더딤과 답답함을 견딜 줄 아는 법을 요구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속전속결을 요구하는 전쟁터의 영웅에게는 더욱 그러하리라.

이런 이유에서 베르길리우스는 아이네아스를 호메로스식 전쟁 영웅에서 인내와 관용의 인물로 탈바꿈시킨다. 더디고 답답해 보이는 지도자로 말이다. "'오 동료들이여, (중략)자네들은 이보다 더 험한 것도 겪지 않았소. (중략)자! 그러니 탄식과 두려움일랑 떨쳐 버리고 용기를 냅시다! 이 고생도 언젠가는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오. 비록 다양한 고난에 부딪히면서 숱한 험로를 지나고 있지만 우리는 라틴 땅으로 향하고 있소. 운명이 우리에게 보장한 안녕(安寧)의 땅으로 말이오. 그곳에 트로이를 재건하는 것이 우리의 천명이오. 견디시오. 장성하게 뻗어 나갈 나라를 위해서 당신 스스로를 지키시오.'

아이네아스는 이렇게 말했다. 산더미 같은 걱정에 짓눌려 견디기 힘들었지만 얼굴로는 거짓 희망을 지어 보이면서, 가슴 저 깊은 곳으로는 고통을 억누르면서 말이다('아이네이스' 1권 198~206장)." 자기도 견디기 힘든 것을 남에게 견디라고 한다. 이런 면에서 그는 영웅이 아니다. 뭐 하나 해결해 주지도 못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수많은 고초를 통해서 형성된,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법이 그의 내면에 굳건하게 자리 잡게 된다. 이 법은 인고의 세월을 통해 언젠가는 얻게 될 결실(로마의 '평천하')을 위한 기본 원리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그는 새로운 영웅(heros novus)이다. 그는 자기를 견딜 줄 아는 극기(克己)의 영웅이다. 극기의 힘은, 그것이 힘이라는 점에서 외면의 용기와 다르지 않다. 같은 힘이다. 외부로 향한 용기가 내면으로 승화된 힘이 극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화는 쉽지 않다. 여기엔 저 숱한 견딤의 세월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견딤을 통해서 마침내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법, 곧 예의를 회복하는 길이 열리게 된다. 이 길을 열어 준 사람이 아이네아스이다. 즉, 그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영웅이고, 이를 통해서 로마의 '평천하(平天下)'를 가능케 했다. 물론 로마의 '평천하'가 군대의 힘과 외면적 용기에 의지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근본에 자리 잡고 있는 힘은 로마인의 내심에서 작동하고 있는 '극기복례'의 원리인 피에타스일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도 않았고,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다.(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08. 03. 24.

 

 

 

 

P.S. 어제 도서관에서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를 대출했다. 지금은 절판된 소프프카바인고, 작년에 하드카바로 새로운 판이 나왔다. <일리아스>만큼은 아니지만 <아이네이스>의 경우에도 몇 개의 번역본이 있는데, 라틴어 원전 번역은 천병희 선생의 <아이네이스>(도서출판숲, 2004/2007)가 유일하다(이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115514 참조). 김명복 교수가 영어본을 중역한 <아이네이드>(문학과의식사, 1998)가 10년전에 나왔었고, 오스트리아 작가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각색본을 옮긴 것이 <아에네이스>(문학과지성사, 2006)이다. 영역본이나 러시아어본 등은 인터넷에서 쉽게 읽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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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5 0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3-25 08:26   좋아요 0 | URL
네, 고쳤습니다.^^;
 

매주는 아니고 가끔 눈에 띄는 기획기사들이 있을 때 '씨네21'을 사서 본다. 보통은 전철에서 읽는다. 지난주에는 '미국영화는 지금 다시 태어났다'는 특집좌담 때문에 사보게 됐는데(세 주 연속특집이었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이 좌담 외에 특별히 재미있게 읽은 건 김소희 기자의 '오마이이슈'. 매주의 시사 이슈를 정리해주는 꼭지인데(원고지 6매짜리다), 나는 가끔씩 읽어보지만 그 입담에 경탄하곤 한다(한겨레21의 '오마이섹스'보다도 더 섹시하다!). 급기야는 이번주의 '진짜 유별난 DNA'를 며칠 전에 읽고서 몇 편을 모아놓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달치의 '이슈' 총정리이다.    

씨네21(08. 03. 17) [오마이이슈] 진짜 유별난 DNA

아침 8시에 일어나기도 힘든 나에겐 아침 8시 전 회의는 경이로울 뿐이다. 세상에 월화수목금금금이라니, 월화수목일일일도 아니고. 남편이 공무원인 우리 옆집 언니 얼굴이 반쪽이 됐던데, 머슴처럼 봉사하겠다며 새벽 별보기, 노 홀리데이를 하면 진짜 머슴처럼 뒷수발 드는 이들의 노동환경은 더 가혹해진다. 운전기사, 경비아저씨, 수행비서, 기타 등등. 설마 한푼이라도 더 시간외수당을 챙기려는 심보는 아니겠지? 워낙 실용적인 분들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사실 공무원들이 바삐 일한다면 고소한 면은 있다. 문제는 그게 진짜 일을 하는 건지 하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루 종일 졸리고 멍하다는 ‘얼리 버드 증후군’을 호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통령이 닦달하니 청와대, 정부부처, 공공기관, 지자체까지 일사불란하게 회의시간을 당기고 휴일에도 나와 일한다. 그동안 다 널널하게 놀았다는 말씀인가. 기업지원과를 기업사랑과로 바꾼 지자체, 직원들에게 영어학원 등록을 의무화한 기관도 있다. 프렌들리가 지나치면 스캔들-리가 된다.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공기업·공공기관의 임원들을 “알아서 떠나라”고 한 데 이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멀쩡한 절차를 거쳐 뽑힌, 임기도 한참 남은 이들을 겨냥해 “이전 정치색을 가진 문화예술계 단체장들”이라며 역시 물러나라고 하고, 한나라당 대변인은 “좌파이념에 매몰된, 유별난 DNA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딱지를 붙였다. 이렇게 색칠을 하는 이유는 당 공천에서 탈락했거나 자기 사람에게 한 자리 주려는 것이라는 걸 아침잠 많은 국민들도 다 안다.

정작 ‘유별난 DNA’가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교육계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회장으로 있는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이제 막 중학생이 된 애들에게 일제고사를 치르게 하더니, 지역 등수, 전교 등수를 매겨 공개할 작정이다. 다른 지역, 다른 학교보다 높은 점수를 받게 하려고 예상문제집을 나눠줘 달달 외우게 하거나(서울시교육청), 운동부 학생 및 장애 학생을 시험에서 제외하는(경기지역 한 학교) 작당을 하기도 했다. 학생 수준을 진단해 그에 맞게 가르치고 학력을 높이는 게 목적이라더니, 알고 보니 애들을 ‘대리인’으로 교육감들과 학교장들이 경쟁하는 꼴이 아닌가. 내 일찍이 당부한 바 있듯이, 그렇게 겨뤄보고 싶으면 깔끔하게 자기들끼리 국어·사회·수학·과학·영어 시험 보란 말이다. 영어 시험에 말하기랑 듣기는 꼭 넣고.(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3. 10) [오마이이슈] 식량 주권

식당들이 메뉴판을 다 바꿨다. 500원, 심하면 1천원씩 올렸다. 아니, 밀과 옥수수값이 폭등했는데, 비빔밥 값은 왜? 밥집 아줌마의 싸늘한 일갈. “국제 곡물값 상승이랑 유가 급등 몰라? 미국이 콱 쥐고 비싸게 파니깐… 뭐든 덩달아 올랐어.” 그럼 왜 200원이나 700원도 아니고. 덧붙인 일갈. “잔돈 거슬러주기 귀찮아서.” 더 오를지 모르니까 미리 올려놓고 보자는 ‘확보주의’ 심리도 작동한 것일 게다.

십수년 전 우르과이 라운드 때부터 익히 들어온 ‘식량 주권’이 이러다 진짜 위협받는 건 아닐까 싶다. 내 주변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우리 사무실 조계완 선배에 따르면 위협받는단다. 허걱. 그럼 앞으로 밥 많이 못 먹나? 다행히 우리가 쌀은 거의 자급자족한다. 그러나 다른 곡물 자급률은 5%. 그리하여 전세계 5위의 곡물 수입국이다.

국제 곡물값은 지난해 이미 전년도에 견줘 두배로 폭등했다. 기상이변으로 곡물 작황이 부진한 터에, 중국·인도 등 급격히 소비수준이 높아진 큰 나라 사람들이 육류 소비를 많이 하면서 사료곡물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이들 나라에서 도시화가 가속되면서 경작면적이 줄어든 것도 한 원인이다. 그래 결국 고기 많이 먹는 게 문제야(이다혜 우리 이 참에 끊을까?). 바이오연료도 ‘곡물 먹는 하마’로 급부상했다. 기름값이 치솟으면서 대체에너지인 바이오연료 산업은 더욱 커졌다. 이런 얽히고설킨 상황에 따라 곡물 재고량은 바닥을 내보이고 있다. 조만간 소비량이 생산량을 넘어서리라는 전망도 나온다. 가격 급등에 확보문제까지 겹치니, 바야흐로 식량이 무기가 된 시대라고 조계완 선배는 설명했다.

대규모 곡물 생산국은 미국·중국·러시아·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 등 큰 나라들이다. 그중 미국의 생산집중도가 제일 높다. 세계 곡물 수출시장을 쥐고 흔드는 주요 메이저 기업들도 대체로 미국 회사다. 이들이 결정적일 때 가격에 영향을 끼친다. 개방 압력을 넣어 작은 나라들이 농업을 포기하게 만든 것도 이들이다. 그럼 유가 급등은 무슨 상관일까? 우리의 곡물 수입 의존도는 2000년 중국(50.2%), 미국(29.1%) 순이었으나, 2006년 미국(55%), 중국(19.6%)로 뒤바뀌었다. 운임 비용이 그만큼 늘었다는 얘기이다.

결국 우리 밥상을 지배하는 ‘보이는 손’은 미국인 거네. 아줌마 말이 맞네. 무섭다. 내 삶의 유일한 밑천, 밥이나 먹어야겠다. 쌀만은 지키겠다며 아스팔트 농사 짓던 농민들의 은덕을 이렇게 입는구나. 모두들 라면, 빵 대신 밥 드세요. 밥힘으로 견딥시다.(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3. 03) [오마이이슈] 왜 언니들은 하나같이 문제지?

장관 후보자 세명이 사퇴했지만, 남은 사람들도 가히 의혹 종합선물세트다. 집·땅·아파트·오피스텔에 이어 국경까지 넘나드는 버라이어티한 투기, 탈세, 표절, 군사정권 부역, 허위 경력, 공금횡령, 외국적 자녀의 건강보험 무임승차, 부동산 실명제 위반…. 위법 내용도 어찌나 다양한지, 운전 중 속도위반을 일삼은 이도 있다. 이러다 정부 구성 못하겠다, 대사면시키자는 얘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들이 청문회를 통과한다고 해도 제대로 일을 할까 의심스럽다. 노동·복지장관 후보자는 자기 분야의 현안에도 구체적인 답을 못하거나 의원들의 다그침에 말을 바꿨다. 한나라당 의원으로부터 “공부 더 해야겠다”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였다. 개인의 ‘굴욕’을 넘어 부처의 ‘굴욕’, 나아가 그들에게 행정적인 권한을 위임한 국민의 ‘굴욕’이다. 날이 바뀔 때마다 ‘더 큰 의혹’이 터져나와 정신이 없다만, 간추려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사퇴한 세 후보 중 두명은 여성이었고, 논문 표절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 청와대 수석도 여성이다. 하나같이 다 이상하다. 왜? 여자들이 공직을 맡을 준비가 안 돼 있어서? 아니다. 구색 맞추기로 여성을 등용하다 보니 공들여 찾지 않고 가까운 데서 아무나 데려다 앉힌 결과다.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술, 용인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녀국적·부인투기·정신세계 삼박자로 욕을 먹다 사퇴한 다른 한 남성후보는 통일부, 걸어다니는 ‘의혹 백화점’인 후보와 허위경력 기재 같은 바보 같은 짓을 한 또 다른 후보는 각각 보건복지가족부와 노동부 장관 내정자이다. 모두 대통령이 없애려 했거나 노골적으로 홀대하는 부처다. 참,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도 복지 담당이지.

돈 되는 부서만 챙기고 나머지 부서는 잘나가는 부서의 지원부서로 여기는 ‘사장님 마인드’가 정부 구성에도 적용된 것이다. 거기에 부처 수장을 자기 수족 정도로 여기고, 여성은 말 잘 듣는 만만한 이로 고르면 된다는 생각이 더해진 게 아니라면 이런 식의 인사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투기 의혹에 “남편 선물”이라느니 “땅을 사랑한다”느니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는, 최소한의 공적 훈련도 안 된 여성들이 여론에 밀려 사퇴하자 “여성 인재 풀이 워낙 적어서 그렇다”고 둘러댔다. 하루아침에 여성의 지위와 권익을 퇴행시켜버렸다. 한나라당의 여성의원과 당직자, 전문위원들은 그럼 뭔가. 여성 등용에 대한 이해가 이렇게 일천하고 위험한 이가 그려나갈 ‘실용’이 대체 어떤 것인지, 심히 우려된다.(김소희_한겨레21 기자)

씨네21(08. 02. 25) [오마이이슈] 단병호와 부자 정부

회사 동료 길사마가 최근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한 한 인사를 놓고 기염을 토했다. 일찍이 조기 유학을 떠나 미국 주류사회에 진입하려다, 잘 안 됐는지 한국에 돌아와 한국의 캐네디가 되려고 하는데, 혼자 잘나 잘벌고 잘먹고 잘사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우리 사회에 아무런 책임도 애정도 없어 보이는 성장 배경을 갖고 공공의 영역인 정치에까지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이 모욕적이라는 주장이었다(헉헉 옮기기도 숨차다).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서워진다. 우리 사회의 ‘주류’는 언제부턴가 조기 유학을 떠나 내내 나라 밖에서 살아온(살고 있는) 이들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 선한 이들도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책임과 애정이 많을 수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경험이다. 고급 세단 타고 비싼 사립학교 다니다 미국의 고급 주택가에서 역시 비싸게 공부해 고급 일자리 얻은 다음 비슷한 배경의 배우자를 만나 자기 자식도 비슷한 코스로 키우는 사람이 볼 수 있는 세상은 제한돼 있다. 그들의 선의가 경험의 폭에 갇혀, “어머,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 하지만 저 사람들 길바닥에서 저러고 있으니 정말 불쌍해” 식으로 발휘된다면? 아무리 선의가 있어도 ‘대한민국 1%’의 1%에 의한, 1%를 위한 사고와 판단을 먼저 하기 쉽다. 자기를 버리는 수준의,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막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와 내각 인선을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이라고 한다. 뚜껑을 열어보니 하나같이 땅땅땅 억억억 부자들이다. 집이 서너채에 전국 산지사방에 땅을 보유한 이들이 아니라면 우리 사회의 부동산 투기는 대체 누가 한 것일까.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 요청 사유서’에 실린 재산내역을 분석한 기사를 보면, 이들은 대체로 ‘우연히도’ 부동산 개발 바람을 타고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배불린 10년이다. 그런 이들이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둘까.

단병호 민주노동당 의원이 탈당과 불출마를 선언한 다음날, 부동산 부자 내각의 면면을 접했다. 단 의원의 부인 이선애씨는 경기 성남의 집 근처 상가에서 채소가게를 하고 있다. 남편이 노동운동을 할 때나 감옥에 있을 때나 국회의원을 할 때나 변함없다. 살고 있는 아파트도 이씨가 일찍이 분양받아 새벽일 해가며 대금을 부어 마련한 것이다. 단 의원 같은 이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고, 평균 재산 40억원의 불로소득을 누려온 이들은 하루아침에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뭔가 아주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게 아닐까.(김소희_한겨레21 기자)

08.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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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3-22 22:30   좋아요 0 | URL
저도 김소희 기자의 글 너무 좋아요.^^

로쟈 2008-03-23 11:37   좋아요 0 | URL
챙겨두시나 보군요.^^

섬나무 2008-03-23 12:21   좋아요 0 | URL
우리 사회의 1%들은 이런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일 겁니다.

로쟈 2008-03-23 13:01   좋아요 0 | URL
이런 글이 '비지니스'에 도움이 안되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13   좋아요 0 | URL
마지막 사진은 하지원 누나? 이쁜 여자는 무조건 누나라고 하는 버릇이 있어서요.

로쟈 2008-04-07 21:34   좋아요 0 | URL
^^
 

지난주에 출간된 이안 파커의 <지젝>(도서출판b, 2008)에 대한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77316.html). 접해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영국의 라캉주의 분석가의 이 '비판적 입문'에서 방점은 '비판'에 더 많이 가 있다. '지젝을 읽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들'이라고 소개된 책이지만 동시에 '지젝을 안 읽기 위하여 알아야 할 것들'도 된다. 가령 아래 기사의 주장대로 "지젝에 홀린" '지젝 애호증자'들이 한편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있을 '지젝 혐오증자'들의 '복음서' 같은 책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의 저자 야니스 스타브라카키스는 "지젝에 대한 유일한 비판적 소개서"라고 환영했는데, 파커와 스타브라카키스의 공통점은 모두 라캉에 대한 지젝의 해석(전유)을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이다(어디서나 다툼은 '상속자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아직 완독하지 않은 상태라 파커의 시시비비가 얼마만큼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에 대한 '비판'으로서뿐만 아니라 '입문'으로서도 유익하기를 기대한다.  

한겨레(08. 03. 22) 지젝은 배우다, 혁명을 연기하는

철학을 농담처럼 하는 사람, 농담으로 철학을 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그 농담 같은 철학 또는 철학적 농담으로 세계 지식계를 들쑤시고 어지럽히고 열광시키고 노하게 하는 사람은 슬라보예 지젝(1949~)밖에 없을 것이다. 지젝은 세계 철학계의 최전선에 서 있다. 그는 난데없이 출몰하고 도발하고 불지른다. 말하자면 그는 철학적 게릴라, 철학적 빨치산이다. 그의 글들은 건드리면 터지는 이론적 지뢰밭이다.

국내에서도 사정은 그리 다르지 않다. 지젝에게 홀린 사람들의 노력으로 그의 책들은 1년이면 두세 권씩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까다로운 주체’다. 논리의 그물에 잘 걸리지 않는다. 미꾸라지처럼 하염없이 이리저리 빠져나간다. 지젝의 책을 읽고 이해했다 싶으면 다음 책에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한다. 지젝이라는 이 모순적인 인간의 전모를 살필 방법은 없을까?

영국의 정신분석학 연구자 이안 파커가 쓴 〈지젝〉은 이 잡히지 않는 인물을 포획해 보려는 책이다. 지젝이 딛고 있는 핵심 거점을 중심으로 하여 그가 무엇을 노리는지 해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젝이라는 미로로 들어가는 데 도움을 주는 안내서다. 동시에 이 책은 지젝의 모순적 지점을 대놓고 지적하는 비판서이기도 하다. 요컨대 지젝에 관한 비판적 안내서가 이 책이다.

지젝이라는 철학적 난제를 이해하려면 이 문제적 인간의 출신 배경에 관한 지도를 그려보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이 책은 말한다. 알려진 대로 지젝은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했던 슬로베니아 출신이다. 옛 유고연방은 자본주의 서구와 공산주의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소련의 완전한 종속국도, 서구에 가까운 나라도 아니었다. 아니, 실상은 이 두 지역의 혼합체였다. 요시프 티토가 지배하던 시기에 이 나라는 경제적으로는 ‘자주관리’라는 이름의 자본주의 체제였고,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관료지배 체제였다. 티토는 스탈린과 싸우면서 반스탈린적 영웅이라는 이미지를 얻었지만, 그를 둘러싼 개인숭배는 스탈린 개인숭배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티토가 사망하고 소련이 무력화한 뒤 유고연방은 여러 민족단위로 해체됐고, 1990년대에 유고내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지젝이 철학을 공부한 곳은 슬로베니아 수도의 류블랴나대학이다. 정치적·지리적 중간지대였던 이곳은 소련의 공식철학보다는 서유럽의 철학에 더 친숙한 곳이었다. 지젝은 이곳에서 독일의 비판철학과 프랑스 현대철학을 연구했다. 80년대에 지젝은 프랑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85년 파리8대학에서 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여기서 익힌 라캉 정신분석학은 이후 그의 이론의 초석 가운데 하나가 됐다. 90년 지젝은 독립 슬로베니아의 첫 자유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네 명의 대통령으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에 자유당 후보로 나갔던 것인데, 5등으로 낙선했다. 자유당 후보라는 이력은 그의 모순적 삶의 한 측면을 보여준다. 급진좌익에 가까운 인물이 자본주의화를 지지하는 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것이다. 지젝은 자신의 이런 선택이 전술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전술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 그의 저술 작업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는 사실이다. 그의 주장이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또는 주제의 성격에 따라 논리 구성이 바뀌기 때문이다. 반스탈린주의자인 듯 보였다가 어느 순간에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듯이 비치기도 하는 것이 한 가지 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이론에는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이론적 벼리가 있다고 〈지젝〉의 지은이는 말한다. 그 벼리가 바로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다. 지젝은 이 세 지적 거인의 주장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그 묵직한 이론 안에 화장실 낙서 수준의 저급한 농담에서부터 싸구려 탐정소설과 할리우드 상업영화까지 온갖 사례를 끌어들인다. 그런 뒤섞기를 통해 매력적이면서 거북살스럽고, 도발적이면서 유희적인 철학적 진술이 흘러나온다.

이 책은 지젝의 지적 토대인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헤겔을 지목한다. 그러나 그때의 헤겔은 우리의 상식으로 굳어진 헤겔, 다시 말해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거쳐 하나의 닫힌 체계를 완성한 국가주의 철학자 헤겔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헤겔이다. 지은이는 지젝의 헤겔이 30년대 프랑스에서 부활한 헤겔이라고 알려준다. 소련에서 망명한 철학자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그려 보여줬던 헤겔은 부정과 거부와 분열의 헤겔이었다. 지젝이 자기 것으로 삼은 헤겔이 바로 이 헤겔, ‘끝없는 부정의 헤겔’이다. 이 부정의 정신으로 지젝이 행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그 어떤 이론이든 체계든 그것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면,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깨부수는 비판 작업의 도구로 헤겔을 이용하는 것이다.

지젝이 기대고 있는 라캉도 이 코제브적 헤겔로 주조된 라캉이다. 라캉은 젊은 시절에 코제브의 헤겔 강의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는데, 여기서 자신의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을 익혔다. 헤겔의 부정 개념은 주체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영원한 자기동일성으로서의 주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란 언제나 ‘분열된 주체’, 분열된 채로 자기정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주체다. 그 주체가 바로 라캉이 말하는 주체다. 이와 함께 지젝은 마르크스를 자신의 사유의 토대로 삼고 있는데, 그때의 마르크스도 헤겔과 라캉의 색깔이 배어든 마르크스다. 특히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분석’은 지젝이 자주 참조하는 지점이다.

특이한 것은 이렇게 거부와 부정과 반대로 일관하는 듯 보이는 지젝이 해체주의 철학에 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지젝이 목표로 삼는 것은 해체주의의 대책 없는 해체가 아니라 ‘긍정을 모색하는 부정’이라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지젝은 보편적 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레닌으로 돌아가 레닌의 혁명전략을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의 지은이가 보기에 지젝의 그런 모습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할 뿐 세계를 바꾼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실천적 무기력 증상을 내장한 자의 자기방어일 뿐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지젝에게 주체의 근원적 위치는 히스테리적이다.” 이때의 히스테리는 모든 곳에서 문제를 적발하고 그 문제를 불평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지젝 자신이 그런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런 히스테리 주체로서 지젝은 일종의 ‘연기’를 한다. 비난하고 거부하는 지젝의 모습은 정작 혁명은 하지 못하고 혁명적 연기만 하는 자의 모습일 뿐이라는 지적이다. 그렇게 대신 연기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지젝을 좋아한다”고 지은이는 덧붙인다. 이런 비판에 대해 지젝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안 파커의 원고를 읽고서 나는 근저에서의 연대감을 경험했다. 명백한 차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동일한 정치적 관심사와 전망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판적 언급들은 언제나 적실하다.” 이 발언도 ‘연기’일까.(고명섭 기자)


08. 03. 21.

P.S. 국내 출간 도서 목록에서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 2005)는 지난 2003년 내한강연의 원고들을 묶은 것이다. 해서 현재까지 최신간은 <HOW TO READ 라캉>(웅진지식하우스, 2006)이며 그 이후의 책들도 여러 권이 조만간 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한편 '왜 지젝과 싸울 가치가 있는가?'란 타이틀은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영어본 54쪽)이란 절제목에서 따왔다. 국역본에서는 '왜 기독교적 유산과 싸울 가치가 있는가?'로 옮겨졌다. "기독교에 관한 지젝의 저술(<무너지기 쉬운 절대성>과 <믿음에 대하여>)의 상당 부분이 독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복음의 소책자 같기도 하지만, 지젝은 또한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뒤섞인 축복임을 힘들여 강조한다."(111쪽)이 절의 서두는 시작되는데,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의 부제가 원래 'Why is the Christian legacy worth fighting for?'이다(국역본은 '왜 그리스도적 유산은 싸울 가치가 있는가?'로 옮겼다).

전치사 'for'가 빠지면 의미가 달라지는 건지, 혹은 중의성을 갖게 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30쪽에서 'THE PERFECTION OF THE STATE'이란 절제목을 '국가에 대한 지각'이라고 잘못 옮긴 걸로 보아 다른 사례들 역시 역자의 착오일 가능성이 높다), 원래 의미는 기독교적 유산과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기독교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젝은 어느 쪽인가?..

참고로 스타브라카키스의 지젝론은 <라캉주의 좌파>(2007)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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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22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지첵과 함께 하는 기묘한 영화여행" 이라는 영화라고 해야하나 다큐라고 해야하나 조금은 햇갈리는 영상물을 보셨는지요?

로쟈 2008-03-22 14:10   좋아요 0 | URL
다 보진 않았습니다.^^;

소경 2008-03-24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변기에 앉아 있는 지젝의 사진이 상당히 전략적으로 보입니다. ^^;

로쟈 2008-03-24 12:51   좋아요 0 | URL
제 계산이기도 하구요.^^;
 

어제 일부러 대형서점에 가서 구입한 책은 김철의 <복화술사들>(문학과지성사, 2008). 문지스펙트럼으로 나온 책인데(이 시리즈는 정말 뜸하게 나온다!) 어지간한 서점엔 들어오지도 않기에 제발로 찾아갔던 것. 사실 출간 소식을 처음 접한 건 지난주 한겨레21 기사를 통해서였다. 생각난 김에 그 기사와 저자 인터뷰를 옮겨놓는다. 


 

 

 

 

 

 

 

 

 

한겨레21(08. 03. 14) 일본어로 쓰인 조선문학의 정체

“(전선으로 물건을 왕복한다는 이야기를 죽을 때까지 믿은 어머니는) 내가 경성에 가 있던 5년 동안 수도 없이 전선을 바라보며… 아들 물건이 전선에 매달려 있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1942년 한설야의 <피>라는 소설은 전선을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나를 잘 보여준다. 염상섭의 소설 <전화>에서는 ‘덕률풍’(telephone)이 갈등을 조장하고 해결하는 중요한 물품으로 등장한다. “네모반듯한 나무 갑 위에 나란히 얹힌 백통 빛 쇠종 두 개”는 웬 건지 삼백원이나 하더니 기생이 전화해 남편을 불러내는 “난장 맞을” 것이다가 나중에 뜻밖의 횡재의 물건이 된다. 소설에서 식민지 시대의 풍경을 찾아 읽은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문학과지성사 펴냄, 문지스펙트럼 5-019)이 건져올린 이야기들이다.

책에는 국문학자이면서 ‘국어의 순수성과 단일성’을 공격해온 저자의 주장이 알기 쉽게 녹아 있다. 골치 아픈 역사 해석 문제는 거둬두고(저자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편집진이다), 저자가 국문학에서 던지는 질문들은 솔깃하다. 일제시대에 식민지 작가에 의해 일본어로 쓰인 소설은 한국 문학인가 일본 문학인가. 그 어떤 문학도 아닌가. 지금도 ‘성역’으로 지켜지고 있는, 한국문학이 한국인에 의해 한글로 쓰인 문학이라는 상식은 1936년에도 있었다. 잡지 <삼천리>는 ‘조선 문학의 정의’라는 특집 기사에서 ‘조선 문학은 조선글로 조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하여 쓴 것’이라는 일반적인 정의를 대표 문인 12명에게 묻는다. 아무도 이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는다.

(암흑기에 꿋꿋이 지켜진 신념이 아니라 통념과 달리 이 시기 ‘제국’의 필요에 의한 ‘위계화’ 덕에 조선어 착취가 심하지 않았다는 논의와 함께) 그는 위의 이 질문에 뭐라고 정확히 답할 수는 없지만, 이런 정의에 따르면 “일본어로 쓴 수많은 작품들은 암흑 속으로 잠기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연구하는 자의 ‘순박함’에서 연유하는 듯하다. 그는 더불어 이 시기가 ‘암흑기’ ‘공백기’가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학의 다른 가능성들이 모색되는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것들은 민족과 모국어에 대한 비겁한 배신 행위로밖에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 기록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뜻밖에도 전혀 다른 모습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글의 맨 앞에 인용한 한설야의 <피> 역시 일본어로 쓰인 작품이다.

장혁주가 있다. 그는 식민지 시기 최초로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일본 문단에 데뷔한 작가다. 데뷔작은 좌익 문예지 <가이조> 현상 공모에 당선된 <아귀도>. 그의 등장은 일본 프롤레타리아트 문단에서 ‘지주 계급과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에 시달리는 조선 농민의 비참한 삶을 고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이후의 문제작은 양쪽 문단에서 외면당하고 지금은 ‘친일문학론’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게 되었다.

저자는 “제국의 지배 아래서 제국의 언어로 발언하는 피식민지인은 일종의 복화술사(複話術師)”라고 말한다. (장혁주에 뒤이어 일본 문단에 데뷔한) 김사량이 쓴 <향수>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이 소설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현’은 (망명한) 누이의 안내로 북경의 북해공원을 관광하던 중이었는데 누이는 저쪽 일본 군인이 나타나자 공포에 사로잡힌다. 가까이 가보니 일본 군인은 현의 학교 동창이었다. 그는 군인과 일본어로 이야기하다가 놀라 도망가는 누이를 발견하고는 ‘기다려’라고 말한다. 일본어였고 누이는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어로 창작한 동기를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널리 세계에 알리고 싶어서”(장혁주)라고 한 작가들의 비극적인 운명인 셈이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니 문제 안 되지만, 쓰기를 조선글로” 하려니 조선말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고 한 김동인, 최초의 한글소설 <혈의 누>를 연재하기 전 한자에 조선말 음을 단 기이한 소설을 쓴 이인직. 이런 고뇌를 거쳐 근대 한국어가 만들어졌다. 한국어는 낯설고 ‘외래적’인 것이었다. 한국말이 수용한 근대화가 아니라 한국말이 근대화의 산물이었다.(구둘래기자)

부산일보(08. 03. 15) '복화술사들' 김철 연세대 국문과 교수

나는 '국어의 순수성' '국어의 단일성' 따위의 말을 결코 믿지 않으며, 더구나 '국어의 우수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보기를 '돌같이' 합니다."

'복화술사들-소설로 읽는 식민지 조선'(문학과 지성사/6천원)을 쓴 연세대 국문과 김철 교수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의 책을 읽어내려가면 초창기 근대소설에서 한글이 차지한 위상이 너무도 초라했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한글이 세종대왕 이래로 쭈욱~ 지금과 같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해왔음을 믿는 사람들이나, '모든 사람이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한다는 세종대왕의 말씀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왔던 백성들에겐 상실감마저 안겨준다. 그의 언변은 상대방이 입게 될 마음의 상처는 고려하지 않은 듯 매몰차다.

"한국어가 뭔데요?" 전화선을 타고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되레 머쓱했다. '구상은 일본말로 하되 쓰기는 조선글로 썼다'는 김동인의 고백과 순한문에서 순한글을 거쳐 영어로 일기를 쓴 윤치호의 고백이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는 기자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었다(여기서 설명이 조금 필요하겠다. 윤치호는 4년 남짓 순한글 문체로 일기를 쓰다 1889년 12월 돌연 영어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한글이 어휘가 풍부하지 않아 말하고 싶은 것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더랬다).

이어지는 그의 말. "한문이 제1 언어였던 윤치호 같은 조선 사대부에게 한글은 되레 어려웠을 겁니다. 윤치호는 한문으로 표기하는 게 더 쉬웠을 거고, 일본어를 통해서 소설을 접했을 김동인도 일본어로 구상하는 게 더 쉬웠겠죠. 근대 한국어와 한글은, 근대와 처음 대면했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근대가 그러했듯이 낯설고 외래적인 것이었죠. 근대문학초창기 작가들의 한국어 글쓰기는 실상 외국어로 글쓰기와 다를바 없었지요."

그래도 한글이 어려운 외국어처럼 다가왔다는 게 납득하기 어려웠다. "모든 언어는 배우기 어렵습니다. 쉽다 어렵다의 문제를 떠나서 구한말에서 식민지 시기를 거치면서 한문의 언어적 지배력이 붕괴됐고, 그 틈에 새로운 언어들이 그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기 위해 경합했다는 게 중요하죠. 어떤 표기체계들이 우위권을 잡느냐의 문젭니다."

한글도 영어 일본어 등과 함께 한자의 독점적 지위가 붕괴된 틈에 경쟁하는 '새로운' 여러 언어 중의 하나였다는 말로 들렸다. 허망하긴 하지만 결국 권력과 언어의 문제였다. "언어가 권력입니다. 언어 자체의 내적인 원리가 아니라 권력 자체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거죠. 서울말이 표준어인 것은 서울이 가진 권력 때문이고, 영어가 세계공용어인 것도 권력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소설 '재생'에서 여주인공 순영이 백만장자인 백윤희의 초대를 받고 별장에 간 날 거기 모인 남자들을 보고 혼자 속으로 하는 품평이 그랬다. '윤은 못난 듯하고 음흉해 보이고, 최는 남자다우나 더퍼리다. 그런데 백은 라운드(둥글고) 스무우스(미끈하다). 진실로 애리스토크래틱(귀족적)이다.' 부정적인 부분은 한국어 단어로, 긍정적인 부분은 영어 단어로 사용한 이광수의 작품에서 영어의 우월적 지위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가.

도대체 그는 뭘 말하려고 한 걸까? "'한국어는 순수하지 않은데, 다른 언어는 순수하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나만의 순수함과 단일함에 대한 집착이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낳고 남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과도한 자기동일성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진보적인 바탕입니다."

책 제목이 '복화술사(複話術師)'다. 일본어로 글을 쓴 조선 작가들에게 그가 붙여준 이름이다. 조선어와 일본어, 두 개의 혀를 가진 자들이다. 국어와 국문학의 정체가 실로 의심스럽다는 그의 일관된 주장과 국어국문학과 교수라는 그의 위치도 아마 복화술사의 비애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건지 모른다. '아슬아슬한 게임에서는 그들 스스로도 분열되고 파멸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모어의 자연성, 국어의 정체성, 국민 문학의 경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수가 된다.' 그런 칼날이 되고 싶었던 걸까? (이상헌기자)

08. 0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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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3-22 01:03   좋아요 0 | URL
그런데 요즘 "'국어의 순수성' '국어의 단일성' ... '국어의 우수성' 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며, 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질까요? "국어와 국문학의 정체가 실로 의심스럽다"는 문제의식이야 한국문학 전공자가 아니라도 많이들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고요. 오히려 낯설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운 발견이라도 되는 양 목소리 톤만 높여서 되풀이하는 모양새가 수상해 보입니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필자 가운데 한 명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자들도 조금 유난을 떤다는 느낌.-_-;

로쟈 2008-03-22 01:08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건 책에 묶인 글들이 국립국어원이 발행하는 <새국어생활>에 연재됐었다는 사실인데요, 저자도 좀 의외였던 것 같습니다. 책은 주장보다는 '팩트'들이 나열돼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저자는 언젠가 고종석의 책에 발문을 쓰기도 했는데, <감염된 언어>와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사량 2008-03-22 01:18   좋아요 0 | URL
고종석의 [제망매]에 발문을 썼을 겁니다. 지금의 김철 교수와는 어울리지 않게 말랑말랑하고 센치한 글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로쟈 2008-03-22 21:4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서재'를 옮겨놓는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2007)를 읽은 소감을 간략하게 적은 것이다.

한겨레21(08. 03. 20) 이 사회에도 이분법만 존재하는가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은 ‘나’는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러자 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한때 유행처럼 읽히기도 했던 브레히트의 짤막한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얘기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자’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돌베개 펴냄)를 읽다가 자연스레 떠올린 시. 하지만 레비는 자기가 미워졌다는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운 좋게도’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가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지고.

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 대한 레비식 명명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그것이 애초에 그가 책 제목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이면서 실제로 그가 쓴 마지막 책 제목이기도 하다. 이른바 ‘절멸수용소’에서 누가 익사하고 누가 구조되는가. 레비가 보기에 수용소의 철조망 안에 감금되는 순간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되며,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뚜렷한 범주가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이다. 물론 대다수는 수용소에 적응하기도 전에 학살당했던 ‘무슬림’들이다. 무슬림이란 죽음을 이해하기에도 너무 지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리고 곧 ‘선발’되어 가스실로 향하게 될 수감자들을 부르는 수용소의 은어다. 대개 뼈만 앙상하게 남은 그들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한 채 곧 쓰러질 듯한 상태다. 죽음에서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들이 대부분 ‘익사한 자’들이다.

그럼 ‘구조된 자’들은 어떠한가? 레비는 여러 사례를 들고 있는데, 그중에서 앙리는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용소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까지 갖추고 있는 경우. 그에 따르면, 조직을 꾸리는 것과 동정을 얻는 것, 그리고 도둑질, 이 세 가지가 학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엘리아스는 아예 수용소 체질인 경우. 나이가 스무 살에서 마흔 살 사이일 것 같은 그는 죽을 6리터, 8리터, 10리터나 먹고도 토하거나 설사하지 않고 소화시킨다. 심지어 그러고 나서 즉시 다시 일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런 엘리아스의 모습에서 레비가 끌어내는 결론은 이런 것이다. “엘리아스는 육체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공격에서 살아남는다. 미치광이이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절멸에 저항한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존자가 된다. 그는 이런 식의 생존 방식에 가장 적합하고 표본적인 인간이다.”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을 법하지만 수용소에는 범죄자도 정신병자도 없기에 엘리아스는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 된다. “수용소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가 그렇게 변할지도 모르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인 것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수용소야말로 근대적 정치 공간의 숨겨진 모형(母型)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통찰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란 이분법적 존재 방식만이 허락되는 사회라면 ‘수용소’와의 구별이 불가능하다. 곧 수용소다. 우리 또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여 있으며 우리 사회를 가르는 이분법이 ‘낙오된 자’와 ‘성공한 자’밖에 없다면 이 또한 ‘절멸수용소’와 다를 바 없다. 우리 시대의 ‘앙리’와 ‘엘리아스’가 득세하는 수용소 말이다. 과연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가? 아주 운 좋게 살아남은 레비가 아우슈비츠에서 떠올린 <신곡>의 한 구절이다. “그대는 자신의 타고난 본성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덕과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태어났도다”

08. 03. 20.



P.S. 얼마전에 적은 관련 페이퍼로는 '윤동주-프리모 레비-빅터 프랭클'(http://blog.aladin.co.kr/mramor/1949436)을 참조. 관련서들 가운데서 레비의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 츠베탕 토도로프의 <극한에 직면하기>, 레비와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이면서 레비보다 10년 먼저 자살한) 장 아메리의 <자살에 대하여>, 그리고 레비의 전기(가령 이안 톰슨의 <프리모 레비>) 등이 번역/소개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소개될 예정이라고 하니까 제외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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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3-2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필 오늘 읽은 부분인데. 이 대목은 제목부터 눈에 끌더군요. 그리고는 '진지','흥미'하게 읽었다는. 간혹 나오는 익살에 섬뜩 놀래면서요.

로쟈 2008-03-21 13:10   좋아요 0 | URL
책의 정중앙이기도 하지요. 서경식 선생도 지적한 거지만 <이것이 인간인가>는 상당히 치밀한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