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동향에 조금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최근 몇 년간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 2008)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알라딘에서만 그런가?). 그밖에도 '독서법'과 관련된 책들을 여럿 더 떠올려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챙겨둔다. 교수신문의 기획서평이며 필자는 출판평론가 표정훈씨이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26).

교수신문(08. 04. 14) '방법으로서의 독서’가 유행하는 시대

책에 관해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이런 규칙을 누구나 지켜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읽지 않은 책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말하지 말아야 하고, 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침묵을 지켜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고교 시절 『죄와 벌』을 읽다가, 쏟아져 나오는 러시아 사람들 이름에 기가 질려 책을 덮은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죄와 벌』을 읽지 않은 필자 같은 사람은 『죄와 벌』에 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리 8대학교 문학 교수이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여름언덕)에서, 반드시 어떤 책을 읽어야만 그 책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거나 얘기조차 들어보지 못한 책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을 할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책의 개별성을 넘어 그 책이 다른 책들과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요컨대 특정의 책 한 권 한 권이 아니라 책들 사이의 소통과 연결선이 중요하다는 것.

사실 책과 독서에서 ‘소통과 연결선’이란 한 권의 책을 읽는 가운데에서도 매우 중요하며, 이미 모든 독서인이 어느 정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책 속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그 문장은 무수히 다른 책들 및 문장들과 差延하며 交織돼 있는 게 아니던가. 이러한 책과 독서의 진실은 이른바 하이퍼링크에서 더욱 분명하게 구현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은 이른바 정보 리터러시(information literacy)와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셈이다. 예컨대 노우웨어(know-where), 즉 유의미한 지식과 정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아는 것이 곧 ‘아는 것’이기도 하다는 정보사회의 새로운 지식론과 바야르의 독서론은 일맥상통한다.



한편 독일 작가 마틴 발저는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미래의 창)에서 “글이 남긴 인상을 기억하는 것이 그 글의 의미를 해석하고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욱 값지다”고 말한다. 예컨대 발저는 젊은 시절 바이런을 읽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런데 그가 떠올리는 것은 당시 읽었던 바이런의 詩句가 아니다. 오히려 시를 읽을 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마당의 나무, 머리 위의 하늘, 마음에 차 있던 생각, 요컨대 시를 읽는 한 순간을 둘러 싼 모든 것들이다.

그러한 발저가 자신의 작품을 읽고 그 의미를 묻거나 나름의 해석이 맞는지 물어오는 학생들의 편지에 이렇게 답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나는 특별한 뜻을 두지 않았다. 독자 개개인이 스스로 느끼고 독서를 경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발저는 선생님들에게도 이렇게 부탁했다. “선생님이 두고 있는 의미에 얼마나 근접했는가에 따라 점수를 주지 말고, 학생 자신의 독서 경험을 전달하는 능력을 점수에 포함시켜 주십시오.”

발저는 계속해서 독서의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강조한다. “책읽기는 음악을 듣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과 같다. 거기에서 악기는 우리 자신이다. 우린 연주한다.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횔덜린의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이다.” “책이 우리의 내면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조금도 수동적이지 않다. 책에서 아픔과 불안이 나타날 경우, 그것이 우리가 경험했던 아픔과 불안과 더불어 인생에 자극을 주지 못하면 책은 단지 종이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피에르 바야르의 독서론을 ‘사이와 연결의 독서론’, 마틴 발저의 독서론을 ‘주체성의 독서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두 입장은 서로 배척하기보다는 오히려 깊이 상통한다. 역시 단순화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독서에서 사이를 연결하는 주체는 독서인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바야르와 발저의 독서론이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지적 풍토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점이다. 요컨대 두 입장이 깊은 지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상통하면서도, 바야르의 입장이 이른바 상호텍스트성에 보다 주안점을 두는 데 비해, 발저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주체성을 보다 강조한다.



다음으로 일본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문학동네)이다. 이 책은 앞의 두 책에 비해 훨씬 더 실용적이다. 작가 자신의 독서 경험을 바탕으로 이른바 슬로 리딩, 즉 단 한 권을 읽더라도 책 속에 숨겨진 수수께끼와 비밀을 속속들이 발견하고 즐기기 위한 방법을 안내한다. 히라노의 슬로 리딩이 추구하는 바는 저자의 의도 그 이상의 흥미 깊은 내용을 독자 스스로 자유롭게 발견해내는 誤讀力을 기르는 것이다. 독자 나름의 이른바 창조적 오독이야말로 독자의 내면을 진정으로 성장시킨다는 것.

그렇다면 히라노가 말하는 슬로 리딩이란 단순히 책을 천천히 읽는 시간적인 개념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그것은 책을 읽는 속도, 즉 시간 요소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라고 하는 편이 낫다. 구체적인 방법을 보면, 책을 잘 이해하지 못했을 때 주저 없이 이미 읽은 앞부분으로 되돌아가는 것, 밑줄을 긋고 표시를 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슬로 리딩은 작자의 의도를 완전히 무시하고 언제나 오독력에만 의지하는 것과도 다르다.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도 늘 독선적인 결론만 이끌어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독선적인 책읽기는 창조적 오독과 거리가 멀며,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스스로 편협하게 만들 뿐이다.



한편 책 읽기와 책 쓰기에서 공히 달인이라 할 만한 사람, 바꿔 말하면 지식정보의 입력과 산출에서 공히 달인의 경지에 오른 사람으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있다. 그는 이른바 논픽션 분야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머리와 발로 함께 쓰는 책, 다시 말해서 현실 문제에 착안해 직접 발로 뛰며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관련 도서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해 쓰는 책에서 뛰어난 저자다. 그런 다치바나가 논픽션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된 계기를 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청어람미디어)에서 엿볼 수 있다.

“문춘(문예춘추)에 입사하자 한 선배로부터 ‘자네는 어떤 책을 읽나’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이것저것 답변을 하고 보니 그게 온통 소설뿐이지 뭡니까. 그러자 그 선배가 ‘그런 것만 읽어선 안 되지. 논픽션도 읽게’라고 했어요. 엄청난 양의 문학서를 읽음으로써 남 못지않은 문화인입네 하고 있었지만, 실상 나 같은 문학 편식자는 이 세상에 무수히 존재하는 가치 있는 책의 태반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적 필요성과 광범위한 지식에 대한 호기심 및 지식욕이 결합된 결과가 바로 다치바나의 지금까지의 지적 행로였다. 그런 다치바나의 독서 편력이 기록된 이 책을 읽어보면, 문필가적 상상력이나 창조성이라는 게 결코 골방에서 홀로 피워 문 담배 개피 수효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 수 있다. 다치바나의 말을 빌리면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환영 같은 창작물의 세계는 시시하고 밑바닥이 너무 얕다.’ 물론 다치바나의 이러한 입장을 문학적 상상력 일반에 대한 질타라고 보기는 힘들며, 오히려 진정한 상상력이란 딱딱한 현실과 광범위한 지식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바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저자인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은 매우 실용적이어서 ‘방법으로서의 독서’에 보다 충실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의 위험을 감수하고 말하면, 유달리 다양한 실용서가 발달한 일본의 출판 및 독서 풍토를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히라노와 다치바나의 독서론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독서인간학 같은 걸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다치바나의 경우, 독서하는 인간은 결국 좀 더 많이 좀 더 정확하게 인간과 세계를 알고 싶다는 지적 호기심을 지닌 인간이다. 책의 우주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호기심을 동력으로 삼는 우주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정확하게 독서론으로 보기는 힘들 것 같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우 진지한 독서론의 범주에 드는 책이 있다. 미국 문학비평계의 거장 헤럴드 블룸의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루비박스)다. 2003년 9월 스티븐 킹이 전미도서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블룸은 이렇게 말했다. “싸구려 모험 소설이나 쓰는 작가가 이 상을 받게 된 것은 우리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말에서 블룸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 그는 서양 ‘주류 정통’ 문학 및 사상 전통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책을 읽고 가르치는 이유에 관해 단지 세 가지 기준만을 설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미학적 훌륭함, 지적 능력, 그리고 지혜다. 사회적 압박이나 저널리스트 사이의 유행 때문에 한동안 이런 기준이 별로 주목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단순한 시대물들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진리와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블룸의 책 차림표가 플라톤과 호메로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 몽테뉴와 프랜시스 베이컨, 새뮤얼 존슨과 괴테, 에머슨과 니체, 프로이드와 프루스트, 토마스 복음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인 것은 당연해 보인다. 성경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고전과 철학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지혜를 천착하는 것이 블룸의 독서 목표인 것이다. 浮薄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이러한 전통적인 正典의 가치와 의미를 재확인하고자 하는 불룸의 태도는 고리타분한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독서라는 행위가 지녔던 진정성과 어떤 숭고함 같은 것을 회복시킨다는 측면에서 보면, 블룸의 진지함은 시대착오적이기보다는 고전 르네상스라는 차원에서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들어와 독서에 관한 책들이 전에 없이 자주 출간되는 현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은 독서의 목적과 방법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해지고, 책이라는 오래된 매체의 의미와 위상이 흔들리는 현실과 상관있는 게 아닐까. 요컨대,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셈이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8.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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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7 23:49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가 고전문학을 폄하하는 건 수용하기 힘듭니다.더군다나 로망 롤랑이 19세기 작가라니..아무리 중학교 이후 문학서적 소홀히 했다해도 무슨 그런 실수를...히라노의 독서론은 새겨들을 만합니다.특히 외국 소설 읽다가 지명이나 인명이 생각 안나서 다시 앞에 돌아가 확인한다는 경험담은 저도 겪어봐서 친근감이 가더군요.
저는 한국인이 쓴 이런 류의 책으로는 장정일 <공부>를 추천합니다.특히 독일사 논쟁에 관한 책들의 해설은 발군입니다.안인희가 우익사관으로 히틀러를 해석한 시각을 맹공한 대목은 최고입니다.

로쟈 2008-04-18 00:11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의 문학에 대한 폄하는 오에 겐자부로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이란 설도 있더군요.^^ <공부>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직접 대담을 나눌 기회도 있었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22   좋아요 0 | URL
아하...히라노는 오에를 지지하던데...으흠...그런 사연이...히라노의 독서법은 다치바나를 의식한 곳이 있더군요.
다치바나도 일종의 전향자...<일본공산당 연구>로 우익에 눈도장 찍었죠 뭐...일본 혁신계에서 나온 책을 보니까 다치바나의 일본공산당 연구를 엄청나게 비난했더라구요.다치바나가 박학다식한 건 이해하겠지만요.
저도 50세가 되면 그동안 쓴 독서일기를 다듬어 <공부>같은 책을 내볼까요...

로쟈 2008-04-18 00:26   좋아요 0 | URL
지금 내셔도 될 거 같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18 00:40   좋아요 0 | URL
너무 바람 넣으신다...하하하...

로쟈 2008-04-18 22:36   좋아요 0 | URL
내년까지 기한을 드리겠습니다.^^

marine 2008-04-18 15:23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학을 폄하한다기 보다는,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낮게 평가되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쓴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문학, 특히 고전을 폄하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논픽션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너무 무시하기 때문에, 그의 그런 강조가 의미있게 다가오더군요. 일종의 충격 요법이라고 할까요?

로쟈 2008-04-18 22:38   좋아요 0 | URL
다치바나 자신이 문학에 경도됐던 시기도 분명 있었죠. 하지만 '과거형'으로만 말하지 않는지요. 제가 읽은 대목들에선 과학서적이 오늘날의 '고전'으로 읽혀야 한다고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0 00:11   좋아요 0 | URL
미국이나 일본은 논픽션 작가에게 주는 상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의 독자층이 상당히 두꺼워요.부럽더라구요.재미도 있고...
저도 논픽션물이 재밌더라구요.그렇지만 명작 소설도 괜찮던데...다치바나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부터 이번의 <피가 되고...>까지 고전으로 알려진 문학에 대해서 읽을 필요가 없다고 계속 강조하더라구요.상당히 직설적으로...
 

오늘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기일이라 한다. 1980년 4월 15일 몰. 언젠가 적어놓은 적이 있는데, 어린시절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죽음은 한 권력자와 한 철학자의 죽음이었다. 권력자는 1979년 10월 26일에 암살당했고 철학자는 그 이듬해 봄에 죽었다(곧이어 벌어진 5월의 학살은 언론 통제 탓에 당시로선 실상을 알 수 없었다). 기억에 모두 신문의 한면을 크게 장식한 죽음이었다. 아래 기사를 접하니 문득 그때 생각이 잠시 난다. 사진과 함께 부고 기사를 싣고 있던 신문지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연초에 새 번역본이 나왔다. 책에 대해서는 여러 장소에서 '강의'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지난주에도 강의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었다!).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 봄밤인 탓이겠다...

한국일보(08. 04. 15) [오늘의 책<4월 15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가 75세로 사망했다. 문학비평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가 곧잘 인용하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있다. “비평가는 묘지기”라는 것이다. “… 묘지가 평화로운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서재보다 더 기분 좋은 곳은 없다. 서재 속에는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 죽은 사람들은 밤낮 쓰기만 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납골당의 항아리 같이 벽을 따라 판자 위에 늘어놓은 조그만 관밖에는 없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평가는 묘지(서재)에서 죽은 사람(저자)들의 관(책)을 더듬으며(독서),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는(비평) 시체지기에 다름아니라는 비유다. 얼마 전 김 교수를 만났을 때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20세기는 사르트르의 세기’가 아니라, ‘사르트르가 곧 20세기’였다는 거야.”

그 말대로 사르트르는 ‘그 자신 안에 20세기가 다 들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묘지기이자, 거리에서 앙가주망을 실천한 행동가였으며,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 가장 떠들썩한 화제를 만든 지적인 스캔들 메이커였고, 노벨문학상을 부르주아의 상이라며 거절한 악동이기도 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지옥, 그것은 곧 타인”이라는 그의 명제들을 빼고 20세기 후반 인류의 정신사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1950년대 이후 문학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논증한 그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1980년대까지 대학가의 필독서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한 강연을 담은 책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강연문이라는 특성상 이 자그마한 책은 그의 여느 글보다 더 명료하게 실존주의를 집약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폭포수 같이 내뿜는 언어의 성찬이다.(하종오기자)

08. 04. 15.

P.S. 사르트르에 관해 예전에 쓴 페이퍼로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http://blog.aladin.co.kr/mramor/7763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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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1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은 로쟈님의 서재를 열면서 새로운 페이퍼가 없다면 정체도 흔적도 없는 것같은 이 무기력을 추스릴 데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오늘 로쟈님의 페이퍼는 문자적인 정보와 앎을 넘어서 정말 실존적인 힘이 됩니다. 누군가의 봄밤 탓이 누군가에겐 힘이 되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깃털처럼 가볍기 일쑤지만 묵묵한 한 걸음들의 가치들이 절감됩니다.

로쟈 2008-04-16 23:29   좋아요 0 | URL
봄에는 꽃들이 더 힘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요.^^;

수유 2008-04-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묘지가 아름다워서... 저 군중들이 부러워서 가져갑니다.
봄밤엔 베토벤을 들으세요...책 읽으면서 ..
올 봄은 지 혼자서 피네요.ㅠㅠ

로쟈 2008-04-16 23:30   좋아요 0 | URL
단지 앞 목련은 벌써 다 졌습니다.^^;
 

엊저녁 읽은 아침신문 기사에서 눈길을 끈 것은 루시안 프로이드의 작품 경매 소식이다.  생존작가의 그림들 중 최고가를 경신할 거라는데, 내가 놀란 건 그림값이 아니라 프로이드가 아직 생존작가라는 사실. '루시안 프로이트의 리얼리즘'이란 페이퍼를 예전에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이미 "오랜만에 프로이트의 그림들을 찾아보면서 두번 놀랐다. 우선 1922년생인 그가 아직 '생존화가'라는 점. 그리고 국내에 그의 화집이 아직 한권도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라고 적어놓고 이번에 다시 놀란 것이니 그가 '생존화가'란 사실이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의 그림들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4. 14) 프로이드의 누드화, 생존화가 작품 최고가 낙찰 '눈앞'

독일 태생의 영국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85)가 그린 누드화가 생존작가 작품 가운데 사상 최고 경매가로 팔릴 것으로 예상돼 전세계 미술계를 벌써부터 흥분시키고 있다. 화제의 그림은 내달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부쳐지는 프로이드의 실물크기 나부상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 Benefits Supervisor Sleeping>으로 지난 1995년 완성됐다.

AFP통신은 13일 미술 전문가를 인용해 프로이드의 이번 작품이 2,500만달러에서 최대 3,500만달러(약 350억원)에 낙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지난해 제프 쿤의 조각 <행잉 하트: Hanging Heart>가 기록한 역대 경매 최고가 2,360만달러를 능가하는 액수이다. 현존하는 작가의 미술작품 중 경매와 개인거래를 포함해 역대 최고가는 재스퍼 존스의 그림이 기록한 8,000만달러이다.

나부상의 모델을 섰던 수 틸리라는 여성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프로이드의 그림을 위해 옷을 벗은 채 포즈를 취하고 하루 20파운드(약 4만원)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밝혔다. 틸리는 모델료는 적었으나 프로이드 같은 대가에게 '창조의 원천'이 됐다는 데 자부심과 희열을 느낀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빅 수(Big Su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넉넉한 몸매를 가진 틸리를 화폭에 담은 누드화는 12일자 권위 있는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틸리는 이에 대해 자신이 파이낸셜 타임스의 머릿면을 장식한 최초의 '핀업 걸'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감격해 했다. 그는 신문에 게재되기 이틀 전에 통보를 받았다며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내 자신도 놀라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이드는 지금은 런던 직업소개소 책임자인 틸리를 호주 출신 화가 리 바우러의 소개로 알게 됐으며 지난 90년대 초 4년 동안 서로 수시로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한 뒤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작품은 완성된 뒤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갔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과의사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친손자인 프로이드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스가 대두한 33년 11살 때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6년 후 국적까지 취득했다. 그는 센트럴 미술학교 등에서 그림 수업을 하고 44년 처음 개인전을 열고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 색채를 띠었으나 50년부터는 가벼운 터치의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누드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등장 모델은 주변의 가족과 친구, 동료화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2005년 세계적인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누드 초상화가 390만파운드(약 75억원)에 팔렸고 작년 6월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친구 브루스 버나드를 그린 92년작 초상화가 786만파운드에 낙찰돼 주목을 샀다.(한성숙 기자)

08. 04. 15.

P.S. 예전에 'Lucian Freud'를 '루시안 프로이트'라고 적었는데, 우리말 표기는 '루시안 프로이드'인 모양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고 독일계이긴 하지만 영국인이기 때문에 'Freud'를 그냥 '프로이드'라고 읽는 것. 하여간에 외국어 표기 규칙이란 게 복잡하고도 오묘하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규칙도 허다하고. 그런데 이 '가장 비싼 화가'의 화집은 왜 한권도 나오지 않는 걸까? 이마저 너무 비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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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4-1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사람들이 필요 이상 '무난한' 그림들, 즉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그림들을 편애하는 것도 이유가 될 듯합니다. 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당대' 거장들의 화집도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화집조차 전시회 도록 말고는 없네요.

로쟈 2008-04-15 21:41   좋아요 0 | URL
전문 출판사들이 있는데 화집이 나오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소경 2008-04-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중하네요. 예전에 본 한 여인의 사진이 연상되네요.그 여인도 한껏 흘러내리셨는데..

로쟈 2008-04-16 23:31   좋아요 0 | URL
네, 볼륨이 상당하죠? 그림도 꽤 무거울 거 같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2003)이 근간될 예정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의 교정 일 때문에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가령 '올리가 몰리소브나'를 '올가 모리소브나'로 고치는 일이 그 '교정'이다),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미리 옮겨놓는다.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대담자인 이케자와 나츠키는 <이라크의 작은 다리를 건너서>(달궁, 2003)의 저자다.   

■ 사회주의는 인간을 상품화하지 않는다

이케자와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제 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역시 저는 젊었을 때 사회주의를 믿었고 이상주의의 깃발로서 사회주의는 분명이 있었어요.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단점도 포함해서 자세히 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알제리에서 온 아이가 자신의 나라가 해방되어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어 돌아가잖아요. 식민지로부터의 탈피라든가, ‘자유’와 ‘해방’이라는 말이 이렇게 빛을 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네하라 최근 이라크의 전쟁 상황이 좋지 않고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진 미국의 백악관에서 그 옛날, 프랑스에서 상영금지가 되었던 <알제리 전투>가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알제리 전투> 영화를 보면 언제나 알제리의 알렉스를 떠올립니다. 영화 마지막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획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때 프라하의 학교에서 기뻐했던 일이 떠올라요. 베네수엘라의 게릴라의 아들은 부모님과 귀국한 뒤 바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소리 내어 울었어요. 소련이라는 나라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국의 일원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 운동체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 이상한 짓을 하면 소련이 뭐라고 하고, 소련이 이상한 짓을 하면 미국이 뭐라고 하는 냉전시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좋은 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이케자와 적어도 자본주의적인,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는 것을 체크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구조라는 것은 기능하고 있던 거죠. 점점 무너졌지만요.

요네하라 그리고 예를 들면, 발레같은 예술이 서방으로 가면 상품이 되어버리죠. 상품이 되어 교태를 부리며 망가져 가요. 소련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리고 재능에 대한 오해와 질투가 거의 없었어요. 세계 최고의 첼로 연주가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통역을 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그가 망명한지 16년이 되었을 때, 죽어도 좋으니까 러시아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는 콘서트가 끝난 뒤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우는 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은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좋아하고 지지해줬는데, 서방으로 온 순간, 엄청난 방해와 질투가 있고, 자신은 이러한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것이죠.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들어가서 자신은 별로 연습하지 않는데도 아주 잘 켜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거라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지만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인 거죠.

이케자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요네하라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프라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는데, 노래나 그림이 뛰어난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들이 당신들 일인 양 호들갑스럽게 기뻐하고 학생들도 그 아이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 아주 행복해지거든요.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아주 기뻐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느낌이 일본으로 돌아온 순간 없어졌어요. 종이에 써진 시험지로 모두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잖아요. 객관식이나 ○×로, 누가 대답을 해도 똑같은 답이 되요. 자신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지 않도록, 절대 갖지 않도록 일본의 교육은 만들어져 있어요.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니까 그것을 발견해주는 것은 선생님과 반 학생들의 역할이죠.

이케자와 하긴 그것이 이 나라의 답답한 점이죠. 경쟁사회가 지닌, 사람이 자로 측정된다는 전제의 답답함. 모두 숫자로 바뀌어 버리죠….

요네하라 사람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 사회주의의 좋은 점 같습니다.

갑자기 왜 이 대목이 생각이 났나 짚어보니 아침에 읽은 서경식 교수의 칼럼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눈'에 연재된 '인간의 ‘기계화’에 저항하기 위하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1276.html)에서 필자는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의 서문을 한번 더 떠올리고 있는데, 아래의 대목이다.

“… ‘기계화’ ‘야만화’의 추진력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원리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학력이 살아남기와 사회적 상승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에 작금의 신자유주의적인 조류가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든 업적을 수치화하고 단기간에 평가하며, 그것으로 불합격 낙인이 찍힌 사람은 무자비하게 낙오당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원칙이다. 이것은 일본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읽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기계화’하고 ‘야만화’하는 추세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것이므로. … 한국 국민은 어떨까?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시민혁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고 나의 한국 지인들은 말한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과연 안심해도 괜찮을까?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인간의 ‘기계화’ ‘야만화’로 발밑의 대지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요네하라 여사의 발언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알다시피 지난달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국단위 일제고사가 치러졌는데, 그 또한 기계로 채점하는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미 OMR 카드 등을 이용한 시험에 익숙해져 있어서 나부터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다! 편의상으로나 여러 가지 사정상 그게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가. 아이의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무엇이 진짜 교육인가에 대해서...

08. 04. 13.

P.S. 책은 <올가의 반어법>(마음산책, 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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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20   좋아요 0 | URL
서경식 씨가 얼마 전 한국은 이제 민주화 경력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며 개탄하던데...참..착잡하더군요.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대단한 책'은 정말 대단하던데요.역시 동유럽이나 구 소련 권에 대한 책들에 대한 좋은 정보가 많아서 좋더라구요.로스트로포비치의 회고는 경청할 만하네요.대체로 망명한 공산권 예술가나 지식인... 하면 뭔가 공산권을 비난할 건수가 없나 하고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로자 님이 요네하라 여사의 책의 교정을 보게 되었군요.그런데 이 분은 좀 일찍 저 세상에 가셨더군요.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데...

로쟈 2008-04-13 22:27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좀 애석한 일입니다...

사량 2008-04-15 12:59   좋아요 0 | URL
'집값'과 '자녀의 학벌'에 미쳐 있는 이 나라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지 의심스럽습니다. -_-;

로쟈 2008-04-15 21:42   좋아요 0 | URL
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죠...
 

'오래된 새책'이란 카테고리는 재출간된 책들을 위한 것인데, 요즘 부쩍 이에 해당하는 책이 많아졌다. 묻혀 있던 양서들이 다시 빛을 보거나 부실한 모양새로 출간되었던 책이 새롭게 개정되어 나오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다. 다만 재출간이 무슨 '원죄'라도 되는 듯이 '몰래' 출간된다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독자에게 당연히 제시되어야 할 '정보'가 누락되는 것이기에 그렇다(보통 제목은 바뀐다. 그리고 별로 오래전 책이 아니어도 값은 뛴다). 그걸 꼬집는 기사를 옮겨놓는다(물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은 '재발견'의 긍정적인 사례들이다).

경향신문(08. 04. 12) [책동네 산책]재출간 떳떳이 밝히고 재평가 당당히 받아라

전화상의 그이는 자신있게 설명했다. 한 분야만을 파고든 저자의 열정을 얘기했고, 책이 다루는 주제의 참신함을 말했다.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의 흥미로움도 강조했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기자,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책 예전에 나왔던 거 아닌가요?” “아, 예,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신간이 오면 책의 맨 앞장이나 뒷장, 심지어 책날개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보도자료를 훑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한다. ‘재출간’되는 책들이 많아졌지만 그같은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의도’가 느껴질 만큼 ‘교묘한 곳’에 슬며시 밝히거나 아예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재출간은 출판계의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일반적인 풍토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옛날 책을 잘 찾아라”는 말은 출판계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돼온 기획 원칙이다. 지난 달 경향신문을 통해서도 소개된 ‘승자독식사회’(웅진지식하우스)도 1997년 ‘이기는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책이다.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프랭크가 ‘이코노믹 씽킹’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데다, 책의 내용이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 더 맞는다는 생각에 재출간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1만부 가까이 팔리면서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절판된 책도 잘만 고르면 웬만한 신간보다 나은 경우가 심심찮다. 해서 소규모 출판사들이 ‘틈새 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구간은 저작권료가 싸다. 눈만 밝으면 좋은 책을 싼 값에 낼 수 있다는 소리다. 지난해 황소자리에서 출간한 ‘욕망하는 식물’은 2002년 ‘욕망의 식물학’으로 소개됐던 것을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이 출판사의 첫 책인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도 다시 낸 책이다.

재출간은 여러 이유로 아깝게 묻혔던 책을 ‘재발견’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리메이크’니 ‘리바이벌’이니 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겉만 화려하게 바꿔 내놓고 그같은 말을 쓰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재출간이 콘텐츠에 공을 들이는 대신 이미 검증된 책을 시기에 맞게 적당히 포장하는 식으로만 가고 있다”는 한 출판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책만 좋으면 됐지 그게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기자의 ‘버릇’으로 돌아가보자. 그것이 ‘재출간된 책은 소개하지 않는다’라는 대단한 원칙 때문에 생긴 건 아니다. 출판사에 ‘낚였다’는 느낌도 부차적인 문제다. 적어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는 독자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중으로 책을 살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런 노파심까지 필요없다. 출판사가 재출간 사실을 밝히는 건 독자에 대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출판사가 어떤 부분에 공을 들여 ‘재출간’했는지를 당당히 밝히고 ‘품질’로 승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재출간된 책도 제대로 평가받는 풍토가 정착될 것이기에.(김진우기자)

08. 04. 12.

P.S. 독자가 '이중'으로 책을 살 우려는 '중복출판'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루소의 <에밀> 같은 고전이야 같은 출판사에서 <에밀>(한길사, 2003), <에밀 또는 교육론>(한길사, 2007)이라고 중복 출판되어도 역자가 다르고 또 '고전'이기 때문에 독자가 취향에 따라 읽을 수도 읽고 아예 비교해가면서 두 권을 같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같은 책도 그러할까? "20세기 초엽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투자분석가이자 저술가"인 조지 셀든의 이 책은 나름 '고전'이라고 하지만 '투자'를 위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가면 읽을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역본은 <주식투자의 심리학>(휴먼&북스, 2006), <주식시장의 심리학>(서울출판미디어, 2007)이라고 각기 다른 제목으로 출간된 데다가, (인터넷서점들에서) 저자가 '조지 C 셀든'과 'G. C. 셀든'이라고 돼 있어서(두 명의 저자로 처리된다!) 주의하지 않으면 두 명의 저자가 쓴 두 권의 책으로 착각하기 쉽다. 출판사들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전략을 쓰더라도 서점에서는 해당 도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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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4-14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비셰프>는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재출간인지는 잘 몰랐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기자의 마지막 결론에 동감을 표합니다. 그나저나 제 주요 관심 분야는 아니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번역과 <주식시장의 심리학> 번역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궁금해지는군요.

로쟈 2008-04-14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비교/검토해볼까란 생각을 잠시 가졌었지만, '2차'를 당할까봐(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만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