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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저호우(리쩌허우)에 관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발견한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작년 봄 기사인데,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완역한 김원중 교수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정사'란 타이틀에 비하면 판매실적은 매우 저조한 듯하다(나로서도 개인 도서관이나 마련되어야 꽂아둘 수 있을 듯하다).

한겨레(07. 03. 16) “조조는 영웅, 유비는 배신자”

“‘위지 동이전’만 보고 우리 고대사를 얘기할 수 없어요. <삼국지> 전체를 봐야 위지 동이전이 제대로 보입니다.” 공자님 말씀이지만 <삼국지> 완역자의 말이라 제대로 힘을 받는다. 네 권으로 나온 한글판 <정사 삼국지>(민음사)를 번역한 김원중(45) 건양대 교수(중국언어문화학과). 그는 중국의 24사를 번역해 우리식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중국의 동북공정에 패배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국가사업으로 번역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최근 중국에서는 학자 200여명을 동원해 <24사 전역> 88권을 낸 것을 생각하면 우리쪽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셈이다.

“나관중의 <삼국연의>가 조조의 위가 아닌 유비와 제갈량의 촉을 정통으로 삼음으로써 역사흐름을 왜곡했다는 점에서 최근에 말썽이 되고 있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합니다.” 우리는 이제야 비로소 비틀리기 이전의 ‘원본 삼국지’를 갖게 된 셈이다. 중국의 한 평자는 <삼국연의>가 ‘칠실삼허’라지만 김 교수는 ‘삼실칠허’라고 말했다.

우리가 아는 명장면들,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관우가 술이 식기 전 화웅의 목을 베는 장면과 천리를 단기로 달리며 다섯 관문의 다섯 장군을 베는 장면,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유비를 구하는 장면,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화살을 빌려오는 장면과 남만의 맹획을 칠종칠금하는 장면 등은 허구라는 것. 정통성을 촉에 두면서 빚어진 현상들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을 사실처럼 여긴다는 것.  

서진(西晉)의 진수(233~297)가 마흔여덟에 완성한 <삼국지>는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은 기전체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와 함께 3대 중국 고대사로 꼽는다. 김 교수가 저본을 삼은 것은 1959년 중화서국의 표점본. 마오쩌둥이 중국 통일 뒤 사학전공자를 소집해 작업한 것이다.

 

 

 

 

이번 한글본은 1994년 초역본을 낸 이래 10여년에 걸쳐 재번역한 것이다. 김 교수는 <사기열전>, <사기본기>, <정관정요> 등을 번역하면서 안목을 높인데다 새로운 학문성과를 반영해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번역하면서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수십번도 더 들었다는 그는 교정 보는데만 1년반이 걸렸다고 넌더리를 냈다. 들인 품에 비해 빛이 나지 않는 일이 번역일. “논문이 100이면 번역은 50밖에 연구실적으로 인정을 안해 줘요. 힘은 거의 네 배가 드는데 말입니다.” 관점이 통일돼야 하기에 공동작업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지론이어서 번역작업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고전 전공자가 적어 제자들 도움도 기대하기 힘든 형편.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을 잘 자라 함께 일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배송지의 주석을 왜 번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걸 왜 해야 하느냐고 힐문했다. “그것이 소략한 원본을 풍부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번잡하고 초점이 없어요. 게다가 엄밀성이 떨어지고 흥밋거리를 많이 삽입해 원전의 의미를 흐렸다고 봅니다.” 한글판은 배송지가 아닌 김원중의 연구결과와 관점이 들어간 것이라는 그의 말에는 자부심이 배었다.

“우리도 번역에서 정본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1800년대에 이뤄진 제임스 레게의 유교경전 번역본을 정본으로 널리 인용하고 있어요.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어느 것을 정본으로 삼아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는 거죠. 논어만 해도 서로 인정하지 않아 번역본이 50여종이나 돼요. 그러니 엉뚱하게 양백준이나 리저허우 같은 이의 것이 판을 치는 거죠.”

다른 사서를 일일이 찾아서 만든 ‘삼국지 관직사전’은 독자들한테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인덱스를 못 넣은 게 못내 찜찜하다면서 다음판에라도 넣고 싶다고 말했다. “조조? 참 대단한 인물입니다. 전략이면 전략, 행정이면 행정, 냉철한 현실감각에다 시인이기도 하지요. 유비요?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고 배신자에다 부화뇌동자에 불과하죠. 그런데 영웅이라니요.” (임종업 선임기자)

08. 01. 21.

P.S. 참고로, 김원중 교수의 최근 번역은 <삼국유사>(민음사, 2008)의 개역판이다. 을유문화사판 <삼국유사>(2002)를 개정한 것인데, 이젠 <삼국유사>의 경우에도 '정본'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개인적으론 <사진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까치글방, 1999)을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저렴한' 판본으로 읽어볼까 싶다.

한편, 기사에서 언급된 양백준과 리쩌허우는 각각 <논어역주>(중문출판사, 2002)와 <논어금독>(2006)을 가리키는 듯하다. 저자는 이들 중국학자들의 역주가 번역된 사실을 개탄스럽게 이야기하지만 굳이 불쾌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논어역주>의 경우는 모르겠지만, <논어금독>의 경우 인상적인 건 같은 중국어임에도 시대를 격하고 있기 때문에 '번역'이 필요하다고 보는 저자의 태도였다. 가령, 리쩌허우는 '인(仁)'의 경우만 하더라도 '인덕(仁德)', '인애(仁愛)', '어진 마음(仁心)' 등으로 옮겨주며 '예(禮)'는 '예법(禮法)'으로 옮긴다. 과연 50여 종이 넘는 <논어>의 국역본 가운데 그렇게 '타자화'해서 옮긴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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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나온 주요한 학술서의 하나인 임철규 교수의 <그리스 비극>(한길사, 2007)에 대한 서평 두 편을 옮겨놓는다(차일피일 미루던 일이었다). 출처는 각각 교수신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397)과 담비(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8112)이며 서평자들이 서양고전학 전공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내달쯤에는 소포클레스에 관한 장이라도 읽어볼 참이다(최초의 소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17149 참조).

교수신문(07. 12. 24) "기여는 엄청나고,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는 사소하다”

이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느낀 감정은 솔직히 질투심이었다. ‘내가 쓰려던 책을 누가 먼저 냈구나!’ 하지만 책을 몇 쪽 읽자 곧 생각이 바뀌었다. 이 책은 내가 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런 책은 15년에서 20년 뒤에나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무엇보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방대한 인용문헌, 그리고 그것들을 넘나들며 글을 짜나가는 솜씨였다. 각 작품을 보는 여러 시각들을 소개하고, 여러 해석의 계보를 밝히는 등, 한 책에서 이렇게 많은 것을 배우기도 근래엔 없던 일이다.

물론 자잘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우선, 이 책이 개개 작품의 형식적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 작품의 구조는 어떠한지, 작품 중앙 부근에는 어떤 장면이 배치돼 있는지, 각 인물에게 배당된 대사의 분량은 어떠한지, 어떤 대사를 어떤 인물에게 배당하는 것이 타당한지 따위의 문제들 말이다. 너무 좀스러운 요구 같지만, 때때로 이런 점들이 작품 해석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에서 등장인물 네 사람의 대사 분량이 거의 같다는 점에 주목하면, 우리가 ‘여주인공’ 파이드라나 ‘남자 주인공’ 힙폴뤼토스에게 초점을 맞춰 작품을 해석하는 게 옳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또 아이스퀼로스 『자비로운 여신들』의 투표 장면에서는, 오레스테스를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두 줄씩 말하기’로 진행하다가 마지막에 갑자기 세 줄짜리 대사가 나와서, 투표에 참가한 전체 배심원 숫자가 몇인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보통 한 줄마다 한 명씩 나가서 투표하고, 다음 줄에 들어오는 것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방대한 인용, 명쾌한 해석의 계보
이 책에 보이는 사소한 실수 중에, 『아이아스』에서 “아이아스는 이복동생 테우크로스를 불러 자신의 아들을 부탁”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런 것은, 소포클레스의 초기 작품들이 양분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도 같은 배우가 전반부에서는 아이아스 역할을 하고, 후반부에서는 다른 가면을 쓰고 나와서 테우크로스 역할을 한다는 데 주목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이런 문제는 이 책에 인용된 방대한 문헌목록이 보여주는 한 가지 특이한 점과 관련돼 있다. 20편 이상의 비극작품을 다루는 이 책에 인용된, 개별 작품의 주석서가 단지 4개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주석서가 인용돼야 하는 대목에서, 넓은 분야를 아우르는 2차적인 연구서가 인용되는 일이 종종 있고 그것이 논의의 엄밀성에 흠이 되기도 한다. 이런 흠들은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신화를 인용하는 대목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소포클레스의 『트라키스의 여인들』에 “황소의 모습을 한 강의 신 켄타우로스”가 등장한다는 주장 따위가 그런 것이다. 켄타우로스라면 반인반마인데 황소 모습이라니? 이 작품에는 황소 모습을 한 강의 신 아켈로오스가 언급되는데, 아마도 그게 잘못 섞여 들어간 모양이다. 같은 글에서 켄타우로스인 네소스가 자기 아내를 업고 달아나자 헤라클레스가 화살을 날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 화살은 “휘드라에게 쏘았던 흔적이 남은”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이 화살은 원래 헤라클레스가 물뱀 휘드라의 담즙에 담갔었고, 그래서 독화살이 된 것이었다.

한데 배경 신화라는 것이 대체로 이전 시대 작품들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니, 신화 인용상의 실수는 곧장 이전 작품 인용상의 실수로 연결된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인용하면서 “우라노스를 죽인 크로노스 역시 자식의 손에 죽는다”고 한 것이나, “에로스는 우라노스의 절단된 성기의 정액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 따위가 그렇다. 우라노스(하늘)는 죽지 않고 그저 땅과 분리됐을 뿐이다. 또 크로노스도 권좌에서 쫓겨날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뒷 문장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프로디테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다. 다른 예로,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영웅』에 나오는 에테오클레스의 독백을 아킬레우스와 맞서려 나서는 헥토르의 독백과 비교하면서, 이때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 벌일 운명적인 대결을 위해 궁전을 떠나”갔다면서 『일리아스』 22권을 인용했는데, 사실 그 장면에서 헥토르는 이미 자기 궁전을 떠나온 지 사흘째였다. 그는 단지 성문 앞에 서 있다가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가는 참이었다.



주석서를 참고하지 않을 때 생기는 더 큰 문제는, 원문 이해가 잘못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아이스퀼로스의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는 오레스테스가 이웃나라에 팔려갔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저자께서는 이것을 진담으로 해석하신 듯하다. “그녀의 잔인함은 … 어린 오레스테스를 다른 나라의 ‘노예’로 팔았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어린 오레스테스를 노예로 팔고”.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메타포이다(A.F. Garvie의 132~3행 주석 참고). 제 자식은 팽개치고 情夫를 끌어들였단 말이다.

지리적 지식·번역 인용 불철저
주석 참조 문제 이외에 작은 아쉬움을 하나 더 밝히자면, 이 책이 보통 고전학자들의 글에 비해 수평적으로 엄청나게 범위를 확장하는 반면에 수직적인 연결은 조금 약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가령, 서사시에 쓰이던 어구를 끌어 쓴 경우, 그 문맥에서 필요한 뜻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단어의 역사 때문에 함께 딸려오는 다른 함의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 책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가멤논』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도시의 약탈자(ptoliporthos)’라는 수식어다.

이 말은 원래 거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에게만 붙는 수식어로 칭찬의 뜻이 들어 있다. 한데 이 책에서는 이 말이 아가멤논에게 쓰였다고 해서, 이것을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해석한다. “아이스퀼로스는 … 전쟁의 참혹함을 전해주고 있다. 가령 코로스는 … 아가멤논을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다.”(118쪽) “도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 그를 ‘트로이아의 약탈자’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가멤논』에 이어지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아가멤논이 “‘신과 같은 이미지’로, 트로이아를 함락시킨 위대한 왕으로 그려”지고 “아무도 그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는 것이 이전과는 모순된 태도인 듯 보인다. 애당초 ‘도시의 약탈자’라는 말에 칭찬의 뜻도 들어있다는 것을 지적해 두었다면 그런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지리적 지식의 문제도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소포클레스의 작품 『트라키스의 여인들』이 이 책에서 계속 ‘『트라키아의 여인들』’로 나온다는 점이다. 트라키스는 희랍본토 테르모퓔라이 바로 북쪽이고, 트라키아는 고전기 희랍인들은 거의 자기네 땅으로 여기지 않았던 저 북쪽 땅이다. 이 책에는 편집자들의 잘못인 듯한 실수들이 꽤 보이는데, “헤라클레스의 가족들이 … 아마도 본토 그리스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구절로 보아, 이것만큼은 저자의 실수로 보인다. 육지에서 벌어졌던 플라타이아 전투를 “해전”이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번역 인용의 문제도 있다. 이 책은 따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천병희 교수의 번역을 끌어다 쓰고 있는데, 그 번역에서 잘못된 것이 그대로 딸려 들어온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힙폴뤼토스』에서 주인공 청년이 죽게 되자, 코로스는 “전에는 뤼라의 기러기발 밑에서도 결코 잠든 적 없는 음악이 … 침묵하게 될 것”이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기러기발’로 옮겨진 것은 희랍어 antyx로서 천 교수께서 너무 심하게 옮긴 것이다. 기러기발[雁足]이란 가야금이나 아쟁 따위에서 줄 하나하나를 받쳐주는 받침인데, 뤼라에는 이런 것이 없었다. 보통은 ‘브리지(bridge)’로 옮기는데, 그냥 ‘줄받침’ 정도면 될 것이다.

‘사소한 불만’을 너무 많이 열거해서 이 책이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공정하게 말하자면, 기여는 엄청나고, 남은 아쉬움은 자잘하고, 실수들은 사소하다. 여러 사람에게 큰 도움을 줄, 정말 대단한 책이다. 이런 좋은 책을 써주신 저자께 감사와 존경을 보낸다.(강대진/ 서울예술대 강사·고전그리스문학)

연세대 대학원신문(제158호) 타자의 비극성으로 재조명한 그리스 비극

『그리스 비극 - 인간과 역사에 바치는 애도의 노래』(이하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비극 연구가 일천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될 본격적인 연구서이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 원전 텍스트는 물론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비롯한 그리스 고전 텍스트를 참조하는 한편 저명한 고전학자들의 중요한 최신 연구 성과를 소개하고 여러 사상가들의 중요 저작을 인용하여 자신의 테제를 전개한다. 이 저작은 저자의 학문적인 깊이와 넓이를 짐작케 해줄 뿐만 아니라, 학제 간 연구의 모범사례가 되는 책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비극이라 부르는가
역사의 상처를 기억하고 역사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것이 위대한 문학이라면,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이의 전범이라고 볼 수 있다(16-7쪽). 그리스 비극은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노래하는 애도의 문학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리스 비극을 정의하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그리스 비극 연구가 간과해왔던, 역사의 희생자인 타자의 비극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리스 비극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기원전 5세기 아테나이 대 디오뉘시아 제전에서 단 한번 공연되었던 수많은 작품들이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소실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의 삼대 비극 시인, 즉 아이스퀼로스(80편), 소포클레스(123편), 에우리피데스(90편)는 대략 모두 293편 가량의 작품을 제작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비극은 고작 그들의 작품 33편 정도이다. 이 작품들도 자세하게 관찰하면 주제, 소재, 극작술, 사상의 관점에서 매우 다양한 특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리스 비극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확인케 해준다.   

그리스 비극의 로고스적 측면
애도를 표현하는 전범으로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기본방향은 저자가 그리스 비극 작품을 파토스pathos 관점에서 해석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인간존재의 비극적 조건을 로고스logos 관점에서 성찰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실은 노래(파토스)와 대사(로고스)가 번갈아 가며 전개되는 그리스 비극의 재현방식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제 두 눈을 멀게 한 후 무대에 등장한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코러스와 함께 파토스적으로 제 운명을 한탄하지만, 노래가 끝난 후 연설 속에서 자신의 실명이 이성적인 숙고에 의한 것임을 로고스적으로 해명하면서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파토스를 극복한 로고스의 승리라고 파악할 수 있고, 이는 진정 그리스 합리주의 정신의 구현이다. 또한, 그리스 비극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을 완성하기 위한 기본적인 토대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저자가 그리스 비극의 로고스 측면을 무겁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리스 비극이 화해를 전제하지 않는다고 하는 전제에서도 엿볼 수 있다(이를테면 173쪽). 하지만 그리스 비극의 많은 작품들이 화해와 해결로 마무리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아이스퀼로스의 삼부작 형식은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갈등과 투쟁을 승화의 형식 속에서 화해와 해결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오이디푸스 왕> 이후 소포클레스의 후기 작품에서도 분명한 화해와 해결이 마지막 장면에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에우리피데스의 후기 작품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화해와 해결을 제시할 뿐 만 아니라 다소 비현실적이라고 하더라도 해피엔드로 작품을 마무리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 비극을 엄밀한 의미의 비극 관점에서 해석한다면, 많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은 비극 장르에 속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화해불가능성 관점에서 강조하는 비극 작품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 비극은 세속화Sakularisierung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비극적 조건에 대해 절규하기 보다는 이를 비극이란 예술형식 속에서 해명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기 힘들다.

비극의 화해불가능성 재고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세계에 대한 일반 중론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나서 저자는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아이스퀼로스가 전쟁의 희생양인 여성과 같은 타자의 비극을 인식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비극은 화해의 비전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173쪽). 이를테면 역사의 희생자인 카산드라와 이피게네이아의 고통에 찬 울부짖음이 오레스테이아의 삼부작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마지막 장면에는 오레스테스가 무죄 방면되자 분노했던 복수의 여신들이 아테나 여신의 설득의 로고스logos로 인해 자비로운 여신들로 변모되는 승화의 과정이 극화되어 있다. 삼부작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스퀼로스는 이처럼 낙관적인 역사관을 구현해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역사의 희생자의 절규가 울려 퍼진다는 저자의 말은 그 엄연한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의문스럽지 않을 수 없다.

비극은 화해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아이스퀼로스 비극 보다는 소포클레스 비극에 더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포클레스야말로 아이스퀼로스 삼부작 형식을 포기하고 전통신화를 단일한 작품 속에 압축해 긴장의 드라마로 변형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에서 자살과 죽음으로 끝난 아이아스의 비극적인 운명을 해석하면서, “소포클레스의 세계에는 화해도, 화해의 중재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아이아스가 ‘검은 피’를 쏟아내는 한 신과 인간은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소포클레스가 신과 인간 사이의 화해불가능성을 그렇게 급진적으로 주제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아이아스의 자살은 그가 철저하게 이성적으로 숙고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이 분명하고(<아이아스>430-80) 자신과 세계, 그리고 신과 인간의 화해가능성을 노린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아이아스는 자살하기 직전에 제우스신에게 간청하는 기도를 올리지 않는가(823-30)? 그러한 간청에 신이 화답하듯 아이아스의 시신은 결국 그의 친구에 의해서 수습되어 매장된다(1370-1).

이로써 고립된 영웅이었던 아이아스는 인간 공동체에 다시 편입되고 그를 위한 제의가 설립될 것(1166-7)도 암시된다. 물론 소포클레스의 비극 세계에서 신의 계획은 불가해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인간이 착오 상태에서 범해 엄청난 결과를 낳은 잘못을 인간 스스로가 다시 교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신의 계획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은 이러한 신의 계획에 자신의 행동을 맞추면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과 인간 사이에 불화가 존재한다는 해석은 에우리피데스 비극에 잘 부합되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는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19작품 중에서 7 작품만을 선별하여 해석하는데, 이 작품들의 해석에서 타자의 비극 관점을 본격적으로 강조한다. <메데이아>에서는 메데이아는 자기 자신에게 낯선 ‘타자’가 되고 마는 “인간존재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480쪽). <히폴뤼토스>에선 신에 대한 인간의 위대함이 바로 죽어가는 히폴뤼토스가 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하는 장면에서 돋보인다(502-5쪽). 전쟁의 광포함에 의해 희생된 여성과 같은 타자의 비극적 운명이 <트로이아의 여인들> <헤카베> <안드로마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헬레네>의 해석에서도 엿볼 수 있다. 헬레네는 전쟁이란 광풍의 희생자로서 부각되고 있다. 에우리피데스는 “전쟁과 같은 모든 악행을 자행한 인간의 ‘역사’를 통탄하면서 이에 이용당하고 희생된 숱한 ‘헬레네’를 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이 로맨스-계략(romance-intrigue) 드라마인 희비극 <헬레네>에 적용될 수 있을 지는 의문스럽다. 이 작품은 현실세계를 반영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비현실적인 공상에 가깝고 희극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자는 이 역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에우리피데스의 <바코스의 여신도들>을 선택해 그것을 일종의 수난극으로 해석한다. 자신의 중심테제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그리스 비극』의 코다(coda)를 다음과 같이 장식한다. “인간이 신이 되지 않는 한, 인간에게 고통과 절망은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608쪽).”

마지막으로, 옥의 티를 몇 가지 지적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247쪽에서 <트라키아의 여인들>은 <트라키스의 여인들>로, 271쪽에서 희랍어 인용 mounon hiat?ra는 mounon iat?ra로, 376쪽에서 eidon은 현재어 동사가 아니라 아오리스트Aorist 과거형이라고 바로 잡아야 한다. 또한 이 책에서 인용된 작품들의 참고문헌이 부록에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정리하자면, 1. 『그리스 비극』은 원전 텍스트의 독해를 바탕으로 테제를 이끌어낸 연구라기보다는 저자가 세운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 원전 텍스트를 독해한 연구이다. 2. 『그리스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적 세계관을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의 작품 해석에까지 확장해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3. 『그리스 비극』은 신과 인간의 화해가 그리스 비극 세계에선 불가능하다고 가정하는데, 이는 저자의 기독교 세계관이 작품 해석에 투사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 로마 고전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연구방법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문학 연구 전반에 있어서도 그 학문적 깊이와 넓이를 증명한 연구 성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김기영│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 강사)

08. 0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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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1-21 16:47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안그래도 이 책을 서점에서 보고... 다음을 기약했습니다.그리스 비극을 먼저 스스로 다 읽어보고 싶어서요.

로쟈 2008-01-21 18:48   좋아요 0 | URL
대장정이겠는데요.^^
 

오후에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 중국고대사상을 다룬 책 몇 권에서 법가에 관한 대목들을 읽으며 같이 들춰본 책은 고명섭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이다. 전작인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을 완독했었지만 <담론의 발견>에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건 한겨레의 출판면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의 기사 대부분을 이미 지면에서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책으로 통독하는 건 별개의 독서이긴 하지만).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란 부제대로 책은 150종에 묵직한 책들에 대한 독후감으로 빼곡하다. 여유만 있다면 일종의 '독서 매뉴얼'로 서가에 꽂아둠 직하다(적어도 150종의 책들에 대해서 아는 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론 '노이라트의 배'를 화두로 한 머리말이 인상적이어서 복사까지 했다(그래야 이렇게 옮겨적을 게 아닌가!).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노이라트는 20세기 역사의 풍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이런 명제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5쪽)

한데 어디서 많이 읽어본 듯한 문장 아닌가? 내 기억은 아주 오래전 <성문종합영어> 같은 참고서의 독해 지문에서 읽은 듯하다고 말해주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검색해보니 영어로는 이런 말이다.

"We are like sailors who on the open sea must reconstruct their ship but are never able to start afresh from the bottom. Where a beam is taken away a new one must at once be put there, and for this the rest of the ship is used as support. In this way, by using the old beams and driftwood the ship can be shaped entirely anew, but only by gradual reconstruction."

위키피디아에 인용돼 있는데, 노이라트의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의 책 <말과 대상>에서 이 비유를 인용한 미국 분석철학의 거두 콰인이라고 한다(찾아보니 <논리적 관점에서>를 비롯해 국내에 소개된 콰인 관련서들을 다 소장했던 듯하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말과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고명섭에 따르면 "정치적 진보주의자였던 만큼이나 철학적 실증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줄곧 세계를 투명하고 확실하게 해석하게 해줄 인식적 토대를 찾았지만, 끝내 그 단단한 지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노이라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토대 없는 인식론'이 자연스러우며 또한 정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노이라트의 배'에 상응하는 것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아니겠는가. 리처드 로티의 표현을 빌면, '잘 잃어버린 세계'이겠고. 때문에 '노이라트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독서의 여정에 대해서 크게 유감스러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새로운 비유로 '플로어 없는 댄스'도 덧붙여두자!).

'노이라트'와 함께 이 페이퍼의 또 다른 빌미가 된 건 '들뢰즈'이다. <담론의 발견>에는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만 하더라도 꽤 여러 종이 포함돼 있다(다수 포함돼 있는 철학서들 가운데서도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가 들뢰즈의 생일이었다고도 해서 무슨 페이퍼라도 하나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책에서 사소한 '수다'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책에 실린 많은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찾아서 넣었을 법한데, 가령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에는 저자인 하트의 사진과 함께 특이하게도 (영어본이 아니라) 이탈리아어본의 표지가 실렸다(두 남녀의 댄스 사진은 그 표지로 사용된 것이다). 영어본 표지는 아래와 같으니까 단연 보기에 더 좋은 건 이탈리아어본이긴 하다.  

한데, 프랑스 현대 지성사를 다룬 카트린 클레망의 <악마의 창녀>(새물결, 2000)를 다룬 장에는 다소 엉뚱한 표지 사진이 실려 있어 흥미롭다(클레망의 책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여성과 성스러움>외 몇 권이 더 소개돼 있다). "<앙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적 이론서였다."란 클레망의 발언을 보충해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는 19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 이론서다. 이 책의 영문판 표지."란 설명과 함께 들어간 사진은 영어판 <앙티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유진 홀랜드의 '입문서'인 것. 홀랜드의 이 책은 엉뚱하게도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었다('들루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정신분열분석입문'란 부제가 붙어 있는 '가장 조야한 번역서'의 하나였다).

 

 

 

 

사실 '들뢰즈 읽기'를 위해 어제 잠시 뒤적인 책은 얼마전에 나온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8)이다. 작년말에 나온 책의 출간년도를 '2008'로 표기하는 건 지난주에 1쇄의 몇몇 사항에 교정이 가해진 2쇄가 나왔기 때문이다(이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라면 몇 쇄인가를 확인하시길). 하지만 2쇄에도 '옥에 티'는 남았는데, 그건 뒷표지의 추천사이다.

"들뢰즈와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작업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이 책을 추천한 이가 '엘리자베스 그로스(<불안한 신체> 저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짐작엔 '엘리자베스 그로츠'이고 그녀의 책 'Volatile Bodi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Grosz'을 '그로스'로 읽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로츠' 대신에 '그로스'라고 표기됨으로써 어쨌든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그로츠의 책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 2001)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정보'가 돼 버렸다('뫼비우스 띠로서 몸'이라고 해놓으니 제목이 좀 엉뚱하긴 하지만).

'가장 명료하고 독창적인 들뢰즈 입문서!'라고 적힌 콜브룩의 책을 추천하고 있는 또 다른 전문가는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저자 폴 패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브룩은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들(차이, 재현, 욕망, 감응)에서 다양한 영역의 구체적인 문제들로 힘들이지 않고 옮겨간다. 우리를 비판적 사유의 핵심으로 이끄는 책." 해서 말하건대, (가장 독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명료한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을 추천할 만하다. 먼저 나온 그녀의 책 <질 들뢰즈>(태학사, 2004)와 함께(벌써 읽은 지가 꽤 됐군!).

흥미로운 건 <들뢰즈와 정치>와 <질 들뢰즈>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동양철학 전공자라는 것. 활발하게 전공 관련 연구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백민정씨가 그인데, 오늘 도서관에서 조금 훑어본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태학사, 2005)의 저자이기도 하다. 공부는 그렇게 '가로지르며' 하는 것이다...

08. 01.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콰인의 책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의 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이다. 복수형으로 하면 딱 푸코의 <말과 사물>과 제목이 똑같다. 푸코의 책이 올해 새로 번역돼 나온다고 하는데 콰인의 책도 같이 소개되면 좋겠다(그리고 공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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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1-21 19:28   좋아요 0 | URL
박사학위논문을 묶은 <정약용의 철학>도 낸 백민정씨의 부군이 강신주씨라고 하더군요^^. 부부가 한동안 들뢰즈를 통해 동양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로지르'게 되는것도 다 속사연이 있나봅니다.

로쟈 2008-01-21 19:25   좋아요 0 | URL
최강의 커플이로군요.^^
 

오래전 한 미술 전시회장에서 본 작품을 소재로 한 시를 옮겨놓는다. 작품의 제목이 '유리컵 안의 생'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여하튼 여러 유리컵 안에 붉은 액체들이 들어 있었고 그 중 하나에는 깨진 유리들이 들어 있었던 듯하다. 그에 대한 감상을 적은 것이다.

유리컵 안의 생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여자는 유리컵마다에 붉은 포도주를 담아 진열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스물넷이나 서른셋의 유리컵일는지도 모른다. 유리컵들은 저마다의 앙칼진 꿈으로 무장하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제 몸의 변두리로 밀쳐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간혹 속살을 파고드는 미물들을 껴안고 오래 고민할는지도 모른다. 생의 바깥과 안을 구별하느라 오래 주저할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널브러져

주정할는지도 모른다.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남자는 유리컵 속에 담긴 붉은 포도주가(아니면 또 어떤가) 내내 남의 일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고만고만하게 생을 담은 유리컵들이 거리의 구석구석을 배회하기도 하고 차가 막히게도 하고 취해 쓰러지기도 한다는 사실에 미련이 남을는지도 모른다. 하여 유리컵들은 저마다의 오해로 제 몸을 지탱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 사태는 너무도 투명하여 믿어지지 않는다.

 

안국동 어딘가에서 한 여자는 유독 한 유리컵에 깨진 유리 조각들을 담아 놓을는지도 모른다. 유독 맨 정신의 유리컵은 온통 제 살점을 물어뜯고 있는 것처럼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유독 한 유리컵의 생만이 유난한 것일까. 나는 내내 골몰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결국 언제부턴가 나 또한 인육(人肉)을 먹고 있었던 거라 단정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 너무도 분명한 사태가 믿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08. 01. 19.

 

 

P.S. 유리컵 이미지들은 시에서 묘사하고 있는 작품과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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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2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20 01:35   좋아요 0 | URL
재미있다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필라멘트 2008-01-2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네요. 유리컵이란 은유에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듯 합니다.^^

로쟈 2008-01-20 10:27   좋아요 0 | URL
많은 의미는 그 작품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깐따삐야 2008-01-20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보니 저의 스물넷도 붉은 포도주 같았네요. 서른셋에도 설마 또 그럴까요?
이젠 매사 시큰둥해져서 말이지요. 벌써 이러시면 안 되는데. -_-;

로쟈 2008-01-21 14:35   좋아요 0 | URL
아직 '청춘'이시군요.^^
 

영국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책들이 출간된 김에 '도킨스와 히친스 읽기' 목록을 어제 만들었는데(히친스의 책은 예전에 나온 <키신저 재판>까지 세 권밖에 되지 않는다) 내친 김에 리뷰들도 옮겨놓는다. 나는 <자비를 팔다>(모멘토, 2008)를 어제부터 가방에 넣어다니고 있다(<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재정 형편상 약간 미뤄두었다)...

한겨레(08. 01. 19) ‘성녀’ 마더 테레사는 없다

“그녀의 성공은 겸손과 소박의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미신적인 유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그리고 교활한 자와 한 가지 목적에 전념하는 자들이 소박하고 겸손한 자들을 착취하는 것에 기댄, 천년왕국 이야기의 또 다른 장이다.”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자비를 팔다〉(The Missionary Position: Mother Teresa in Theory and Practice)(모멘토)에서 내린 평가다. ‘그녀’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1979년)요, 20세기의 성녀로 추앙받은 테레사(1910~1997) 수녀. 〈자비를 팔다〉는 자기희생의 화신인 ‘그녀’가 실은 다국적 선교사업체의 수장, 근본주의 종교사업가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니냐고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히친스의 전복적 사고는 다음과 같은 글에도 집약돼 있다. “니카라과 정부에 대한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살해된 사람의 수는 콜카타의 모든 선교자들이 우연으로라도 목숨을 구한 사람 수보다 훨씬 많다.”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에 대한 우익 콘트라 반정부군의 공격 배후에는 돈과 무기를 대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로마 교황청과 현지 추기경은 그들을 지원했고 산디니스타에 훈계를 늘어놓았던 마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수사회’는 교황 직속 조직이었다.

1994년 의학전문지 〈랜싯〉의 편집장 로빈 폭스 박사는 테레사 수녀가 45년간 봉사한 인도 콜카타의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을 방문했다. 선행과 영웅적 덕행의 표본 마더 테레사를 ‘콜카타의 성녀’로 우러르게 만든 그곳에서 폭스는 삭발한 채 한 방에 오륙십 명씩 수용돼 죽어가고 있는 말기 환자들을 목격했다. 아스피린 이상의 진통제를 받지 못한 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에겐 어쩌다 운 좋으면 항염증제인 브루펜 같은 약이 주어졌다. “(링거와 같은)점적장비들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주삿바늘을 쓰고 또 쓰고 너무도 여러 차례 사용했고, 종종 바늘을 수도꼭지 밑에서 찬물로 헹구는 수녀들이 눈에 띄고는 했을 정도였어요. 그중 한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깨끗이 해야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요. ‘그래요. 한데 왜 소독을 안 하는 거죠? 물을 끓여서 바늘을 소독해야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자 말이 이래요. ‘그럴 필요가 있나요. 시간도 없고요.’”

돈과 일손이 부족해서? 그게 아니다. “마구잡이식 날림시설”을 그런 식으로 운영한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다. 목적은 “고통을 덜어주는 게 아니라 죽음과 고통, 그리고 굴종에 기반한 일종의 신흥종파를 선전하는 것”이었다.

105개 이상의 나라에서 500개가 넘는 수도원을 운영했다는 테레사의 사랑의 선교회 소속 수녀는 4천여명에 이르고 평신도 일꾼도 4만명이 넘었다. 기부금은 전세계에서 홍수처럼 밀어닥쳐 뉴욕 브롱크스 선교회의 한 당좌계좌에만 무려 5천만달러가 들어 있었다. 수녀들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돈 쓰는 일을 좀처럼 허용받지 못했고, 대신 “가난을 호소할 것, 그리하여 손이 크고 어수룩한 사람과 기업들이 더 많은 재화와 봉사와 현금을 내도록 조종할 것을 강요받았다”고 히친스는 지적한다. “의지할 데 없는 아기들, 버려진 낙오자들, 나환자와 말기 환자들은 동정의 과시를 위한 원자재들”이었다. 하지만 테레사 수녀 자신은 심장질환 및 노환과 싸울 때 서구에서 가장 우수하고 값비싼 병원들에서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라!

테레사 수녀가 타계하기 2년 전인 1995년에 발간된 〈자비를 팔다〉는, 2001년 마더 테레사를 성인으로 추대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교황청의 직접적인 요청에 따라 히친스가 반대쪽 증거와 주장들을 제출할 때 모본으로 삼은 책이다. 그런데도 교황청은 2003년 테레사 수녀를 준성인인 ‘복자’ 반열에 올렸다. 히친스가 테레사 수녀의 시성(諡聖)에 반대하는 증거로 제시한 사례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1981년 아이티에 간 테레사 수녀는 나중에 결국 돈가방을 들고 외국으로 도망친 폭군 장 클로드 뒤발리에를 두고 “가난한 사람들이 국가의 우두머리와 이토록 친근한 경우는 처음 보았다”고 칭송했다. 또 “현대세계의 가장 냉소적이고 천박하며 못된 여성 중 하나”요 “위선자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라고 히친스가 쏘아붙인 그의 부인 미셸의 두 손을 정답게 감싸쥐고는 “영부인은 느끼시고, 아시며, 자신의 사랑을 말뿐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행동으로도 보여주고자 하시는 분”이라 예찬했다. 사진에 담긴 그 장면을 독재자 뒤발리에는 잘도 이용해먹었다. 이런 게 마더 테레사의 ‘본질’이라고 히친스는 말한다.

사이비 종파 지도자 존 로저한테서 1만달러를 기부받고 함께 사진을 찍어 그의 사기모금 행각을 도왔다. 미국 역사상 최대 사기사건 가운데 하나인 저축대부조합 스캔들로 10년형을 살고 있는 가톨릭 근본주의자 찰스 키팅한테서 125만달러를 기부받고는 자신의 권위를 써먹도록 허락했다. 1992년 테레사 수녀는 키팅한테 관용을 베풀어 달라며 법원에 편지를 보냈는데, 그때 답장을 보낸 로스앤젤레스 지방검사보 폴 털리는 2억5천만달러를 낭비와 사치를 위해 가로챈 키팅의 범죄행각을 설명한 뒤 기부받은 125만달러를 원래 소유자들에게 돌려주라고 정중하게 권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다. 그 돈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답지한 거액의 다른 성금들의 행방도 묘연했다.

테레사 수녀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그리고 스페인 우익 프랑코주의자들과 만나 낙태 및 산아제한 반대 캠페인에 힘을 실어주었다. 1985년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훈장을 받았는데, 그때 수상식장 지하실에선 올리버 노스 대령이 이란-콘트라 사건을 꾸미고 있었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고 1984년 미국 다국적기업 유니언 카바이드의 인도 보팔 공장에서 수천명이 즉사한 유독가스 참사가 일어났을 때 분노한 유족들에게 말했다. “용서하세요. 용서하세요.”

히친스는 결국 세계의 구조적 모순에 눈감고 지배자들 위주의 질서를 긍정하며 현상유지를 꾀하는 종교세력을 문제 삼고 있으며, ‘자비를 파는’ 마더 테레사야말로 그 첨병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08. 01. 19) 히친스의 또다른 도발 “신은 인간의 발명품”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 폴리시>와 영국 정치평론지 <프로스펙트>가 2005년 실시한 ‘100대 공적 지식인’ 순위투표에서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5위에 올랐다는데, 무얼 기준으로 삼았는지, 그게 순위투표로 가려질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1위가 노엄 촘스키고 2위가 움베르토 에코, 3위 리처드 도킨스, 4위 바츨라프 하벨이라는 걸로 봐서 히친스란 이름이 허명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비를 팔다>도 그렇지만 2001년에 낸 <키신저 재판>(아침이슬 펴냄)이란 책도 상식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히친스가 천착해온 지적 작업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히친스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베트남전쟁 전범으로, 칠레 아옌데 정권을 뒤집고 방글라데시와 동티모르, 키프로스 등의 정변에 개입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 모략가로 규정하며 단죄하라고 촉구한다.

그의 이런 전복적인 사고가 종교를 대상으로 종횡으로 구사된 게, <자비를 팔다>와 동시에 번역·출간된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다. “하느님께서 모든 나무와 풀을 초록색으로 만드셨어요. 우리 눈에 가장 편안한 색깔 말이에요. 만약에 식물들이 전부 자주색이나 오렌지색이었다면 얼마나 끔찍했겠어요?” 세속적 인본주의자, 그리고 무신론자에 불가지론자요 반종교주의자인 히친스에게 어릴 적 학교 선생의 이런 얘기는 터무니없다. 그것은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그렇게 만들어 놨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런 자연에 적응한 결과다. 녹색식물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인간은 애초에 등장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우리 인체 구조가 이렇게 기막히게 치밀하고 적절한 구조를 갖고 있는 게 신의 뜻이라는 얘기도 완전히 거꾸로 서 있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고 창조된 게 아니라 자연의 변화에 적응하며 장구한 세월 동안 진화해온 결과가 그것이다. 뉴턴이 태양계의 불안정성을 발견하고 행성의 궤도가 다시 안정을 되찾게 하기 위해 하느님이 가끔 개입할 것이라고 하자, 라이프니츠는 그럴 바에야 왜 하느님이 처음부터 궤도를 제대로 만들어놓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요컨대 히친스에게 신은 잘못된 전제 위에 서 있는, 세속의 욕망과 공포를 반영한 인간의 발명품이고 그런 신을 앞세운 종교는 오히려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는 의문이 배제된 철학, “화석화한 철학”일 뿐이며, 신 없는 삶이 가능할 뿐 아니라 없는 게 훨씬 더 낫다는 얘기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계몽주의 운동이다. 인류의 견본은 바로 인간 그 자체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계몽주의 운동 말이다.”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 ‘지적 설계론’ ‘종교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가?’ ‘종교의 형이상학적 주장은 거짓’ 등 모두 19가지 흥미로운 항목을 설정하고 아주 친근한 사례들을 무수히 동원해 종교에 관한 ‘상식’들을 현란한 화법으로 하나하나 논파해나간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1. 18.

P.S. 히친스의 비판에 대한 반대 시각도 옮겨놓는다. <마더 테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등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한 이해인 수녀의 옹호이다.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 수녀가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뜻밖이기도 하고)...

중앙일보(07. 08. 29) 이해인 수녀 “테레사 편지도 신을 부정 안 해”

맑고 고운 언어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해온 이해인(62·사진) 수녀가 자신도 신의 존재를 회의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28일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한 이 수녀는 “수도공동체 안에서 40여 년간 수도 생활을 해왔는데 내 한계를 느끼거나 하느님 혹은 동료와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낄 때 문득 ‘정말 그분이 계실까’라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이 수녀는 “모태신앙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걸림돌이 될 때도 있었다”며 “성인들의 고백록을 읽으면서 극복해왔고 지금은 너무 행복하게 모든 것을 섭리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밝혔다. 또 “비바람을 견뎌 한 그루의 나무가 더 성숙하게 자라듯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라며 시련의 극복을 강조했다.



이날 방송은 최근 공개된 테레사 수녀의 비밀 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됐다. 테레사 수녀의 10주기인 9월 5일 발간될 『마더테레사:내게 와서 빛이 되라(Mother Teresa:Come Be My Light)』에서 테레사 수녀는 고해 신부에게 보낸 40여 통의 편지에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다”며 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수녀는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혼의 어둠을 경험한다”며 “(편지는)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테레사 수녀 본인의 존재론적 고백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석했다. 또 “수십 년간 빈자들에게 헌신적 봉사를 하면서 스스로 신처럼 추앙을 받은 마더 테레사는 신의 영광을 가로채는 것 같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수녀는 또 테레사 수녀의 신앙을 비판했던 미국의 진보적 지식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재비판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쓴 무신론자 히친스는 책에서 “테레사 수녀도 종교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계속된 그의 신앙고백은 자신이 빠진 함정을 더 깊이 파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꼬집었다. 이 수녀는 “(히친스의 비판은)자기 좋을 대로의 아전인수격 고백”이라고 일축했다.

이 수녀는 “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했다면 테레사 수녀가 평생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이라며 “1994년 일주일 정도 (데레사 수녀가 만든) ‘사랑의 선교회’에 머물며 그에게 ‘신앙과 수도생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봉사에서 회의나 불안을 느낀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테레사 수녀는 ‘하느님이 계신데 내가 왜 걱정하는가. 모든 것은 그분이 해결해준다’고 단호하게 답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항간에서 40여 통의 편지를 가지고 테레사 수녀의 신앙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사랑과 기도의 시인인 이 수녀는 1964년 수녀원에 입회해, 76년 종신 서원했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200만 부 넘게 팔렸으며, 많은 시와 수필을 통해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표현해왔다. 현재 부산가톨릭대 겸임교수도 맡고 있다.(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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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하트마 간디의 불편한 진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16 23:40 
    '비폭력 성자' 마흐트마 간디의 불편한 진실을 들추는 책이 출간됐다.남부디리파드의 <마하트마간디 불편한 진실>(한스컨텐츠, 2011). 1958년에 쓰인 책이라고 하니 '오래된 진실'이기도 하다. 간디 자서전, 혹은 간디에 관한 책을 읽을 때같이 읽어보는 게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되겠다.연합뉴스(11. 08. 16) '위대한 영혼' 간디를 보는 또다른 시선'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가 이름처럼 따라다닐 정
 
 
라주미힌 2008-01-18 23:02   좋아요 0 | URL
테레사 수녀도 그런 '스캔들'이 있었군요...
저 밑에 문장 웃기네요.. '히친스는 이 책으로 지옥에 갈 것이다.' ㅎㅎㅎ

로쟈 2008-01-18 23:07   좋아요 0 | URL
껍데기는 책을 사면서 바로 버렸는데, 그런 문구가 있었군요.^^

2008-01-18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18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혜덕화 2008-01-19 10:15   좋아요 0 | URL
"히친스는 히친스의 진실 대로, 테레사는 테레사의 진실 대로"
언제나 내 안경으로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조사하고 관찰하면서
나는 말하죠.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무엇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어요.
히친스조차도 자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을지 의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 한 수 배우고 갑니다.

필라멘트 2008-01-19 12:50   좋아요 0 | URL
히친스 식으로 하자면 간디의 <비폭력주의를 팔다>, 슈바이처 박사의 <인술을 팔다>, 백범 김구 선생의 <민족주의를 팔다> 등과 같은 유사서적들도 한번 내봄직 합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위인들일지라도 들춰보면 인간적인 결점이나 모순들은 다 있게 마련이니까요. 한마디로 히친스의 전복적 의도에는 세인들의 흥미를 자극해서 상업적 수익을 노리려는 또다른 의도를 의심케 합니다. 아니면 평소 그런 걸 즐기는 새디스트적인 체질이거나.

우리는 마더 테레사라는 한 개인에 대한 집중적인 존경에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마더 데레사라는 존재가, 점점 개인주의화로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해져가는 현대인들에게 잠들어 있는, 봉사정신을 일깨워주는 하나의 이펙트(effect)의 상징적 존재로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정치인들에 대한 이펙트도 마찬가지구요. 즉 혼돈의 자장 속에서 하나의 좌표역할을 해주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작은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인들에 대한 환상을 유지하는 게 결코 나쁘지는 않다고 봅니다. 히친스의 '뒤집어 보기", '까보기', '삐딱하게 보기'의 진의가 무언지, 또한 그렇게 해서 뭘 얻겠다는 건지.. 하기야 본인에겐 세인들의 관심과 책 판매 수익이라는 현실적인 열매가 들어오겠지만요. 히친스식의 전복시도는 세인들의 관심을 끌어보자는 과잉적인 제스처라 봐지는군요.

그리고 데레사 수녀의 '신에 대한 회의'가 언론에서 회자되었을 때, 역시 언론의 속성인 한건주의를 떠올렸습니다. 즉 색다른 소재를 전면적으로 이슈화해서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 판매부수나 시청률을 올리는 그런 작전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어둠에의 체험'은 가톨릭의 성인, 성녀전을 읽다보면 다 알수 있듯이 누구나 다 겪는 과정입니다. 평신도들이야 말할 것도 없구요. 즉 긴 믿음의 여정에서 일시적인 신존재에 대한 회의와 불신에의 체험은 신자들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과정이거든요. 즉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일시적인 필요악인 거죠. 근데 언론들은 무슨 대단한 발견이나 한 것처럼 야단법썩을 떨던데. 뭐.. 언론의 속성이 원래 그러니 어쩔 수는 없습니다만.

어찌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로 하여금, 데레사 수녀도 별거 없구나 하며 자신의 봉사정신의 결핍을 은폐하고, 편리주의나 개인주의를 더 공고히 해나갈 수 있는 안도의 체험으로도 삼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들어 잠시 주제넘는 글을 남기고 갑니다. 로쟈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P.S. 이해인 수녀님의 반론적 기사도 함께 실어주셨네요. 균형을 맞춰주시려는 로쟈님의 깊은 배려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로쟈 2008-01-19 23:15   좋아요 0 | URL
균형은 맞추려고 했지만 제 입장은 히친스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그래야 '균형'이 맞을 거라고 봅니다). 리뷰기사의 마지막 문단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필라멘트님도 히친스의 책을 직접 읽어보시고 판단하시면 좋겠습니다. 히친스가 보는 마더 테레사는 가령 얼마전 이천의 냉동창고 폭발 참사가 일어났을 때 분노와 비탄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찾아가 위로하면서 '용서하세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큰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virtuepeak 2008-01-19 14:00   좋아요 0 | URL
간디의 비폭력주의는 자기를 대신해 총칼을 받았던 무수한 불가촉천민 덕에 관철될 수 있었고, 김구의 민족주의는 이미 해방 정국에서 중요한 정치 지도자들이 암살되는 와중에 좌우 합작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시점에서 생뚱맞게 발휘되었죠. 자선을 팔아서 장사를 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막연한 상징으로서 테레사를 흠모하며 봉사 정신을 다잡아 보는 것은 '안도의 체험'과 본질적으로 상이하지 않아 보이네요. 이러한 사실들이 '위인'들의 '작은' 결점인지는 잘 판단해야 할 일입니다.

필라멘트 2008-01-19 19:57   좋아요 0 | URL
따지고 보면 히친스의 전복적 제스쳐에 문제를 제기하는 저나, 히친스나 사실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저나 히친스나 과연 단 하루라도 캘커타에 가서 버려진 아이를 안고 울어본 적이 있는가. 버려지고 고통에 신음하는 아이들과 함께 밤을 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데레사 수녀님의 빈자들에 대한 사랑 앞에 그저 침묵하고 겸손해지고 싶을 뿐입니다. 히친스가 제기한 데레사 수녀님의 결점이 큰 결점이든 작은 결점이든..

virtuepeak 2008-01-20 01:11   좋아요 0 | URL
죄송합니다만 히친스의 문제 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적시한 것이고, 필라멘트님의 지적은 그냥 반문일 뿐입니다..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는 만사가 경이로와 보이는 법이지요. 권위를 유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정보 통제이듯이요.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수록 세상에 별 거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리뷰에서 언급된 사례 중에 콜카타의 죽어가는 이들을 위한 집의 실상을 보십시오.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들과 함께 밤을 새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이 관리하는 영역에 들어온 환자에게 제대로 된 치료는 해주지 않고 방치했다면 이건 엄연히 유기죄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사망에 임박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군요.

qualia 2008-01-20 09:42   좋아요 0 | URL
이런 유형의 논란거리에서 문제의 핵심은 “증거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우리 한국인 (대부분)은 바다 건너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이나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주장을 직접적으로 목도한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얻어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즉 우리는 테레사 수녀님과 함께 직접 빈민촌 현장에서 함께 봉사한 적도 없으며, 히친스의 신랄한 고발을 증거해줄 만한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자료를 직접 제공받은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나 히친스를 우리는 언론 매체나 2차 자료, 혹은 간접적인(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주장 따위들을 통해서만 접했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명백하고도 객관적인 3인칭적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재 永革 님께서나 필라멘트 님께서 내세우시는 판단이나 주장은 사태의 진실/진리와는 분명한 거리가 있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불확실한 추정/추측/기대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기반한 논쟁은 소모적인 순환논쟁(도돌이 논쟁)이 될 뿐입니다.

둘째, 우리는 언론 매체의 보도나 2차 자료, 한 개인인 주장/견해(저서나 논문 따위를 통한)를 “자연스런 태도”로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여기서 하나의 사태를 “자연스런 태도”로 대한다는 것은, 그것을 처음부터 무조건 진리나 허위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사태 그 자체”로서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언론 매체의 보도, 2차 자료, 어떤 개인의 주장을 처음부터 무턱대고 완전한 진리로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꾸며낸 거짓말로 일축할 수도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테레사 수녀님에 대한 히친스의 파괴적인 비판도 일단은 진리 여부, 찬반 여부를 떠나 “사태 그 자체”로서만 참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확하고도 적법한 증거가 없다면 우리는 일단 (전략적으로) 판단을 중지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명백한 직접적 증거가 없는 사태에 대해 우리가 판단을 중지하는 자연스런 태도는 모든 탐구와 → 사실 규명과 → 주장/견해 제시의 단계에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사전적 필수 요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건/사태의 진상을 파헤쳐 나가는 단계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식을 거의 언제나 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머릿속에 사적 이해관계, 정치적 입장, 이데올로기적 편향, 계층/계급 의식 따위의 노골적인 전제들을 미리 깔아놓고 사건/사태의 진상을 입맛대로 왜곡하는 경우,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과 억측을 마치 객관적인 사실인 양 강변하는 경우가 요즈음 횡행하고 있습니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인사들일수록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합니다. 그들의 왜곡과 강변은 매우 교묘하고 영악스런 논리/논증적 형태를 띤다는 점에서 더욱 치명적으로 보입니다.

요컨대, 우리는 보도된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이나 히친스의 폭로 따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참조 사항일 뿐입니다. 이런 난세에서는 모든 보도/소문/주장/견해 따위를 일단은 “사태 그 자체”로서만 받아들이는 자연스런 태도가 우리한테 강력하게 요청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이러한 자연스런 태도에 기반하여 증거 확보, 진리와 진실 탐구의 엄밀한 작업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자꾸때리다 2008-01-19 20:01   좋아요 0 | URL
평소에 성인이라는 범주는 거짓 범주라 생각했었는데 정말 흥미있는 내용이네요. 저 정도면 테레사 수녀는 긍정적이라기 보다는 부정적인 인물이네요. 부패 정치인 뺨치는 수준. 우왕ㅋ굳ㅋ

로쟈 2008-01-19 22:24   좋아요 0 | URL
'인물'이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요. 구조적 모순과 적대를 가리기 위해서 성자/성녀를 요구하고 또 필요로 하는 구조...

qualia 2008-01-20 10:04   좋아요 0 | URL
Grimaud 님, 안녕하세요. 제 생각에 히친스의 비판을 보고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정체를 히친스식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옳을 수도 있고, 히친스가 그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테레사 수녀님의 진실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일단은 테레사 수녀님의 기존 이미지를 그것 자체로서 받아들입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테레사 수녀님의 모습이란 바다 건너에서 날아온 간접적인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히친스의 주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로선 그의 주장과 비판은 명백한 사실도, 타당성 있는 진리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의 자료일 뿐입니다. 한낱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지고 위와 같이 Grimaud 님께서 섣부른 판단을 하신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로쟈 2008-01-20 10:25   좋아요 0 | URL
님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에게 확증적인 진실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네요. 홀로코스트까지도 포함해서 말이죠.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란 '한낱 참고자료'에 불과할 테니까요...

소경 2008-01-19 22:22   좋아요 0 | URL
요지에는 어긋나지만 결국 돈 문제가 깊숙히 연관 되어 있군요...방금 전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과거 없는 남자>의 웃음 넘치는 돈문제로 기분 좋게 보았는데 이 사실은 씁쓸하기 그지 없는 내용이군요. 현실로 빨리 복귀한 기분이...

로쟈 2008-01-19 22:26   좋아요 0 | URL
원래 면죄부도 돈 주고 팔던 거였으니까요...

에링 2008-01-19 22:18   좋아요 0 | URL
결과의 부정적 측면만으로 의도의 순수성을 단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보이는데요. 무슨 대가를 바라고 45년간을 봉사하는게 쉬운 일은 아니죠.

로쟈 2008-01-19 22:23   좋아요 0 | URL
이해인 수녀의 해석에 따르면 (일시적인 회의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그러한 봉사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죠. 신앙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지요...

Octopus 2008-01-21 08:03   좋아요 0 | URL
물타기 같지만, 크리스토퍼 히친스라는 인물이 전향한 트로츠키주의자이며, 대선에서 부시를 지지했고, 이라크전과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찬성했으며,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 측을 옹호하는 글을 썼고, 네오콘들의 사이좋은 친구라는 점도 곁들여 고려해보는 게 어떨지요. 대충 신자유주의 세상에 잘 적응한 리버럴한 뉴라이트(?)지식인 같은데, 그래도 참 복잡하긴 복잡한 인간이군요. http://en.wikipedia.org/wiki/Christopher_Hitchens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기사에 수록된 내용만 가지고 보면 테레사 수녀의 개인적인 문제점이 어리버리한 성격인지 교조적이고 독단적인 신념인지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물론 가톨릭 교단 또는 종교집단 전체의 문제는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히친스의 책이 어느 정도까지 그런 문제를 심도 있게 파고들었는지, 종교혐오적 사고로 인한 편견 때문에 대상의 맥락을 곡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미 히친스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버린 저로서는 의심스럽네요, 쩝.

로쟈 2008-01-21 14:31   좋아요 0 | URL
저도 마저 읽어봐야 할 거 같은데, 히친스가 제시하고 있는 건 '종교혐오적 사고'가 아니라 이미 알려진 '사실'들의 모듬 정도입니다. 그의 비판 이전에 '대상의 맥락'은 이미 곡해돼 있는 거 아닌가 싶네요. 히친스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요컨대 그는 스탈린이나 김정일 체제에 지극히 비판적이죠), 그건 어떤 '입장'이건 간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국내에서도 민노당 내 '종북주의'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것처럼요...

네모선장 2008-01-28 12:50   좋아요 0 | URL
이곳에 자주 오는 현직 수학교사 입니다.^^
저는 이번 책 소개를 보고는 참 놀라웠던게 아주 오래전 한겨레21이란 주간지에서 (아마 제가 군대에 있을 때(95~96년) 읽었던 맨 마지막 기사였는데 스크랩도 어딘가에 해놓긴 했습니다. 함 찾아볼께요~)어느 교수님의 A4한면 칼럼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히친스와 유사한 글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던 마더 테레사의 또다른 면이었죠. 그 글을 보고 아~ 이런 면도 있구나 했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위인도 모든 영역(공적인 영역+사적인 영역)에서 일관되게 자기 철학을 실천하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있다면 있다면 그를 우린 성인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잘 몰랐던 인물의 또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책이라면 기꺼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읽어보고 새로운 토론의 장을 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리고 한가지 더요. 캘커타의 버려진 빈자를 안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면 우리는 아무런 말도 섣불리 할 수 없는건가요? 빈자를 안으며 테레사 수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찌 아나요? 제 말은 쉽게 판단할 수 없다해서 반론이 되는 생각 의견제기 자체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이야 말로 모럴테러의 한 유형이라 봅니다.

로쟈 2008-01-28 12: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질문은 저에게 주신 건가요? 다른 분에게 던지신 것 같아서 따로 답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자주 좋은 의견을 남겨주시길...

네모선장 2008-01-28 20:27   좋아요 0 | URL
^^네~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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