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의 '독립언론 10년'을 맞아 이루어진 특별대담을 옮겨놓는다. '김우창 교수에게 듣는다'란 부제대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이며 진행은 이대근 국제/정치 에디터가 맡았다. 김교수는 경향신문의 정기칼럼 필자이기도 하므로 아주 '내외간'의 대담은 아니다. 사실 이렇게 옮겨놓는 기사들 대부분은 내가 읽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조를 위한 색칠 등을 하면서 꼼꼼하게 읽어볼 기회를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도 형편과 무관하게 꽤 많은 시간을 신문읽기에 투자하는 듯하다...

경향신문(08. 03. 28) “위기의 한국 언론,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한국 사회와 언론이 주제였지만 대화는 부동산에서 시작되었다. 역시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땅은 빠질 수 없는 화제였다. 김 교수는 땅값이 오르면 내야 할 세금이 오르는데 왜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내내 이런 상식 아닌 상식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었다.

한국이 낳은 탁월한 사상가라는 상찬을 받는 그였지만, 한국 사회와 언론에 관한 그의 견해는 매우 담백했다. 사실과 의견이 서로 왜곡되지 않고 균형을 갖추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만큼 특별한 한국 사회, 한국 언론에 상식과 원칙의 처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경향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새 출발한 지 10년째를 맞아 자화자찬보다 이번 기회에 한국 언론 전체의 문제를 부각시키고 그 속에서 경향신문의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는 취지를 소개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말을 받으며 “신문이 자기가 한 일을 무조건 중요하다고 과장하는 것은 격을 떨어뜨리고 눈에 거슬리는 일”이라며 “신문에 나는 것은 언제나 공정하고 공공이익에 입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제가 벌써 나온 것이다. 인터뷰는 지난 20일 오후 경향신문사 인터뷰실에서 2시간가량 진행되었다.

- 정년 퇴임하신 뒤 주로 댁에서 지내십니까.

“ 주로 집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집이 시내와 가깝고, 자연이 좋고, 특히 땅값이 안 올라서 좋아요. 한국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땅값이 오르면 좋아한다는 거예요. 팔려고 내놓으면 좋겠지만, 살려고 한다면 세금이 오르는데 왜 좋아하죠.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창동·명륜동·혜화동 같이 서울에서 살기 좋은 데는 땅값이 안 오르고, 혼란스러운 동네는 올라가요.”

- 휴대전화를 사용하시지 않더군요.

“농담으로 하자면, 급한 전화가 있다는 것은 거는 사람이 급한 거지 받는 사람이 급한 것은 아니잖아요. 너무 정보가 많은 게 문제입니다.”

- 매체가 많아졌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매체가 다양해져서 민주주의가 향상됐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뉴욕타임스의 어떤 칼럼니스트가 썼습니다. 아무리 이상한 의견이 있어도 반드시 지지자가 있게 마련인데 매체가 많으면 이런 의견을 담느라 정말 좋은 의견이 모아지기 힘들다는 겁니다. 물론 의견 표명이라는 면에서 보면 다양한 게 좋죠. 그러나 현실적인 해결책은 1~2개뿐입니다. 여러 의견과 방안을 종합해야 합니다. 전문가에게 종합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절차가 중요한 것이지, 모두가 말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문은 인터넷 매체에 비해 접근이 선택적입니다. 그것을 부당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그런 기능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매체의 다양화는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에요.”

- 신문을 언제부터 보기 시작했습니까. 처음 신문을 대할 때 신문은 어떤 것이라는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신문을 언제 읽었느냐는 물음은 참 답하기 어려워요.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아요. 아버지 때부터 읽었던 신문을 어렸을 때부터 계속 보았으니 계속 읽었다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신문은 네개를 봅니다. 저는 사실을 중시하기 때문에 사실이 가장 풍부한 신문을 가장 먼저 보고 그 다음 경향신문을 봅니다. 경향신문은 사실과 의견이 적절하게 있어서 좋아합니다. 의견이 매우 강한 신문은 네번째로 봅니다.”

- 즐겨 읽는 면이 있습니까.

“신문 편집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1면 기사를 먼저 보게 돼요. 보통 정치기사를 많이 봅니다. 자잘한 세상사에도 관심이 많아요. 그런 기사들을 보면 세상 사는 느낌을 받게 돼요.”

- 혹시 신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습니까. 아니면, 기자가 되면 이런 것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신 것이라도.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기자가 됐더라면 내게 도움이 됐을 것이란 생각은 했죠. 게을러서 잘 안되는 것을 기자란 직업 때문에 의무감으로 사람 사는 현실에 대해 자세히 봤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기자란 직업에 대해) 그게 부러운 점입니다.”

-한 마디로 정의해서 신문은 무엇입니까.

아침에 신문을 가지러 나갈 때 ‘아직도 세상이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어떤 모양으로 있는지 확인시켜 주는 것이 신문입니다. 헤겔이 신문은 현대인의 기도서와 같다고 했어요. 기도서는 아니지만 신문은 세상의 모습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죠. 물론 잘못된 모양도 있고요.”

- 건강한 시민이라면 신문을 읽어야 한다고 봅니다. 신문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이 신문을 잘 안 읽는다고 합니다. 요즘 누가 신문 보느냐 이런 말이 자연스러워졌다고 합니다.

“신문을 안 읽는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신문 외에 정보매체가 많다는 것이 첫째이고, 그 다음 글을 읽는다는 것은 시각이나 청각 매체에 비해 정신집중이 더 필요한 일인데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집중보다 몸 움직이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점이지요. 또 정보 과다로 정보가 필요없다는 인식도 있어요.”

- 그런 흐름을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십니까. 그런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이므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보십니까. 그리고 활자매체의 쇠락은 불가피한 것인가요.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확히 사고하고 검증하는 습관이 학교나 사회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지요. 말하는 것과 글쓰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있어요. 말은 문장이 완전하지 않아도 되고, 논리가 안 맞아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글은 논리와 사고에 입각해야 하고 문법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글마저 사고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표현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 한국 언론은 신뢰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인터넷 미디어의 발달, 이미지 시대의 도래 등 언론 환경의 변화는 전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유독 한국 신문의 타격이 큽니다. 게다가 신뢰도도 매우 낮습니다. 왜 그렇다고 보십니까.

언론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사회의 지적인 힘이 약화됐어요. 그 책임은 언론에만 있다고 보기 힘들지만 언론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민주화 과정을 통해서 투쟁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이 위기 상황에서는 적절하지만 그런 입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합니다. 위기가 완화되고 나면, 사람 사는 방향이 여러 방향으로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걸 하나로만 묶으려고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현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객관성입니다. 옳은 것이라고 해서 주관적인 입장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것으로 옮겨가야 해요. 사실이 무엇이냐고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에 관해서는 의견에 관계 없이 사람들이 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외국신문은 어떤 것을 보십니까, 한국신문과 비교했을 때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까.

“외국신문을 보는 게 몇 개 있는데 사실 검증이 중요한 기준으로 되어 있어요. 한국의 경우 정의의 이름일 수도 있고 국익을 위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위해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지요. 사실이란 일어난 일, 틀림없이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선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요. 사실 보도 여부는 주관적 판단에 따라 하는 거지요. 이는 사실에 대한 존중이 약하다는 것도 되고, 주관적 판단이 중요하다는 뜻도 됩니다.

제가 오래 본 신문 중의 하나가 영국의 가디언입니다. 가디언이 사실을 선정하는 기준은 아주 객관적이에요. 예를 들어 영국 여왕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없어요. 왜냐하면 그게 중요한 기사도 아니고, 모두의 관심사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경향신문의 오늘 이 기사(3월20일자 1면 ‘반운하=반여당 최대 이슈 부상’)는 매우 좋은 기사입니다. 사실 선정의 기준이 공익적입니다. 그러나 제목 ‘최대 이슈 부상’은 사실이 아닙니다. 최대 이슈라면 유권자들이 이것을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것인데,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입니다. 공익적인 판단 기준에서는 아주 중요한 대목을 드러냈지만 ‘부상’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성이 약한 것이지요.”

- 정의와 국익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는 신문을 만드는 데 있어 항상 갈등하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는 국익이 있고, 야당이 생각하는 국익이 있고, 신문도 저마다 다르게 국익을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문은 국익을 어떻게 다뤄야 한다고 보십니까.

“공익이나 국익, 정의가 중요한 가치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비판적 입장은 늘 유지해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행동도 국익이나 정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은 없어요. 그것이 참으로 정의, 국익이 되려면 실현하는 수단은 정의로운지 봐야 합니다. 정의나 국익이란 것이 책임을 기피하는 수단이 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에요. 구체적인 예를 말씀 드리자면, 며칠 전 여러 신문에서 대학 강사가 미국 오스틴에서 자살한 사건을 다뤘어요. 비정규직 강사들의 부당한 대접에 공감하기 때문에 유심히 기사를 봤어요. 전적으로 강사들의 처우가 부당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이 16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 가서 호텔에서 자살한 것을 보면 책임 있는 어머니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을 볼 때 사회정의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볼 수 있어요. 한국이 아닌, 미국까지 가서 자살했으면, 다른 이유도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다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될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보도해야 해요. 사회정의의 관점에서만 처리하지 말고 좀더 사실적인 보도를 했으면 합니다. 너무 쉽게 강사 처우 문제로 가버려 충분히 해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사회정의 국익, 이런 것이 우리의 사고를 단축하는 역할을 하면 안됩니다. 사실을 먼저 탐색하고, 생각해보는 일이 필요해요.”

- 신문 역할이 사회 현상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아니면 사회를 선도하고 계몽하는 것이라고 보십니까. 신문의 역기능으로 사회 갈등을 확대, 증폭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신문이 사회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말고 조화로운 결과가 나오도록 유도를 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신문과 사회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이 돼야 합니까.

“계몽, 선도와 사실 보도, 이것들이 모두 어울려야 해요. 그러나 사실 보도가 1차라고 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공익의 관점에서, 사회의 건전성에 대한 관심으로 선정돼야 합니다. 여기에 계몽과 선도가 이미 들어가 있다고 봅니다. 이런 입장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요. 왜냐하면 계몽을 앞세우면 주관적으로 되기 쉬워져요. 사실을 통해 주관적인 입장을 나타내면 어느 정도 검증이 되지만, 계몽을 앞세우면 주관적인 입장이 앞서서 공정성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 현재 한국 언론은 분열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은 신문에서 공익을 찾아 보기 어렵다고 하시지만, 신문 각자 나름의 공익에 대한 준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문마다 다른 여러 가지 공익이 존재할 수 있는 건가요.

공익이란 것이 자기가 서 있는 입장에서 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티베트 문제가 좋은 예입니다. 중국 입장에서는 진압이 공익이고, 티베트 입장에서는 아니겠지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탄압이 옳지 않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신문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공익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제가 고려대학교에 있다고 해서 그 대학에 모든 것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제 충성심은 진리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이 신문사 공동체로서 충성심도 있어야겠지만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충성심이 필요합니다.”

- 티베트 얘기가 나왔는데, 선생님께서 신문 책임자라면 어떤 관점에서 보도하겠습니까.

“티베트, 중국, 세계시민의 세가지 관점을 모두 보도해야 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은 티베트가 자유를 원한다면 자유와 자치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내 개인적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티베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지요. 중국의 52개 소수민족이 모두 자치를 원할 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일 넓은 관점, 즉 인간의 공적인 정의와 국가 현실 안에서의 정의, 이것이 어떻게 타협될 수 있는가도 보도해야 합니다.”

- 그러면, 한국 언론과 외국 언론이 티베트 사태를 올바로 보도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대체적으로 티베트 입장에서 보는 것이 좋은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 보면 현실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는 의견이 나올 수도 있지요. 현재 세계적으로 공정한 보도라면 티베트 사람들의 소망을 그대로 보도해줘야 합니다. 지금 국내 사정도 그렇습니다. 기업에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해서 경제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입장과 복지 등을 더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 이 두개를 모두 고려해서 어떻게 수렴해야 하는지도 보도해야 합니다.”

- 여론의 다양성이 중요한데 일부 보수 언론이 여론을 과점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행한 일이지만 제도적으로 시장을 관리하려는 것은 잘못입니다. 불매운동도 하고 그랬는데, 전 신문에 쓴 적은 없지만 사석에서는 비판했어요. 정치권력을 통해 다른 신문이 확장을 시도하는 것은 안됩니다. 전 시장을 지지해요. 이런 얘기해도 좋을는지 모르겠지만, 정부 지원을 통해 한국문학 번역해서 외국에 보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요. 그런데 검증 없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번역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아무 책이나 번역돼요. 그러면 그런 지원이 오히려 외국 보급을 어렵게 합니다. 번역하면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문학이 있으면 왜 외국출판사가 자기 돈으로 번역하려고 하지 않겠어요. 제도적 지원도 있어야 하지만, 시장경쟁도 중요합니다. 지금 열세에 있는 신문들도 제도나 정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체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 경향신문이 좋은 신문이라고 봅니다. 노무현 정부 때 경향신문만큼 비판하고 사실보도한 신문은 없었어요. 결국은 좋은 것이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기 바랍니다.”

- 여론형성에 있어 신문이 얼마나 제대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다른 미디어가 그런 기능을 해야 하는지요.

“신문만큼 여론형성에 중요한 기구는 없어요. 인쇄매체의 선택적 기능이 중요해요. 더 깊이 있는 보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뒷받침하는 것이 있어야 해요. 사회 전체가 깊이 생각하고 지적 규율을 존중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신문도 그런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특히 시청각 매체를 보면, 너무 여론을 쉽게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한국방송들을 일본 NHK와 비교할 때 한국 기자들이 너무 급하고 긴박한 느낌으로 보도를 하더군요.”

- 신문의 당파성을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당파성, 인민성, 이념성은 레닌주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레닌주의의 당파성도 그렇고,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강조한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계급의식을 강조하고 노동자계급을 중요시한 것은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고통 받는 계층, 보편계급이기 때문이죠. 보편계급이란 이들만 해방되면 사회의 고통이 사라진다고 붙여진 것입니다. 현재 이런 고통을 없애기 위한 해결 방식이나 주장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 방식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신문은 모든 사람이 고통 받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 선생님이 경향신문에 쓰시는 장문의 칼럼에 대해 일부에서는 어렵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신문과 문학의 글쓰기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십니까.

신문이 사실보도를 훨씬 잘해요. 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제가 말하고 쓰는 것을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아서 콤플렉스를 느낄 때가 많아요. 그런데 경향신문에서 칼럼을 실어주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문에는)장기적인 관점에서, 추상적인 관점에서 얘기하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그때그때 일어나는 사건도 중요하지만, 거기에 끌려가다보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장기적이고 추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 있어야지요. 물론 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08. 03. 30.

 

P.S. 대담에서 인상적인 건 "매체의 다양화는 민주주의 확대를 위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김우창에 대한 이해에도 요긴한 포인트로 여겨진다. 한편 계간 <비평>(2008년 봄호)에는 '한국 인문사회과학의 한 패러다임'을 화제로 김우창 교수와의 심층대담이 실려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는데, 요즘 이런 대담은 김우창 교수가 '전담'하는 듯한 모양새다. 한국 사회에 '공적 지식인'이 정말로 몇 안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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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비스사를 바꾸는 바람에 오전에 잠시 새 연결망 설치작업이 있었고 또 그 바람에 약간의 책정리를 하다가 리처드 레인의 <보드리야르, 소비하기>(앨피, 2008)의 원서를 발견했다. 잠시 읽어보게 됐는데, 독일 극작가 페터 바이스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어 몇 자 적어놓는다. 보드리야르는 바이스의 주요 작품들을 불어로 옮긴 번역자이기도 하다.  

 

 

 

 

책의 '왜 보드리야르인가?'란 서론은 "장 보드리야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주제로 글을 쓴 작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일 뿐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사람이다."(15쪽)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실천한'은 'embody'를 옮긴 것인데, 말 그대로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현한,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인 이론가가 보드리야르라는 것.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은 같은 시리즈로 나온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포스트모더니즘을 구하라>(앨피, 2008), <트랜스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앨피, 2007)과 함께 나란히 읽어봄 직하다.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의 도래와 함께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삼총사'이기 때문이다(제임슨의 명성은 물론 상당 부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반대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의 주저 중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문화논리>가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것은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에 있어서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그런 보드리야르(1929-2007)의 경력은 장 폴 사르트르가 주관한 잡지 <현대>에 주로 글을 발표함으로써 시작된다. "사르트르는 대체로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 때문에 모든 세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는데,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관심사를 공유하면서 그에 더하여 개인적으로 독일의 사회학과 문학에 흥미를 느꼈다."(19쪽) 여기서 '모든 세대'는 'a whole generation'을 옮긴 것이다. 그냥 '한 세대 전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독창적인 마르크스주의 해석'은 짐작에 <변증법적 이성비판> 같은 책을 염두에 둔 멘트로 보인다. 국내엔 이 책의 서론만이 <방법의 탐구>(현대미학사, 1995)로 번역돼 있다. 보드리야르는 그러한 독일 철학에 보태서 독일 사회학과 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다는 것.

"그는 더 전문적인 분야를 일컫는 '문학'이나 '철학' 같은 용어보다 '문화'라는 말을 선호했는데, 왜냐하면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에 서 있는 이론가로 자신을 자리 매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드리야르는 (그의 주요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처럼) 전통적이고 체계적이며 철학적인 훈련을 받기보다는 좀더 우회적인 길을 걸었다.(19-20쪽)

'프랑스의 주류를 이루는 지적 사고의 한계 지점'은 'margins of mainstream French intellectual thought'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다 똑같이 유명한 프랑스 이론가/사상가로 알고 있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아서 푸코처럼 주류(메인스트림) 정통파도 있고 보드리야르 같은 비주류 주변부파도 있는 것이다. '지적 라이벌인 미셸 푸코'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건 보드리야르의 <푸코 잊기>(1977; 영역본은1987)이다. 푸코의 생전에 나온 책이다! 책이라곤 하지만 분량은 팜플릿 수준인데, '푸코를 잊어버리기'란 제목으로 <세계의 문학>(1989년 가을호)에 번역됐었다(무슨 소리를 적어놓았는지 다 잊어먹었지만).

여하튼 "제도의 경계에 서 있는 이러한 보드리야르의 위치는 주류적 사고의 경계 지점에서 유희하는 그의 후기 출판물들과 유사한 맥락에 서 있다." 그런 비주류성 혹은 가장자리성과 잘 호응하는 것이 독일 극작가들에 대한 관심이다. 특히 페터 바이스와 베르톨트 브레히트.

"1960년대에 보드리야르는 특히 극작가 피테르 바이스(1916-1982)와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을 번역하는 데 힘을 쏟았다. 보드리야르는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 바이스의 주요작품 네 편을 번역햇다. <소실점>(1964), <마라/사드>(1965), <토론>(1966),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1968). 불안정한 시점의 형식을 취하여 날카로운 정치적 진술들을 담고 있는 이 텍스트들은 보드리야르가 글쓰기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전조로 간주될 수 있다."(20쪽)

Photo: Peter Weiss, 1960er Jahre

'페테르 바이스'는 '페터 바이스(Peter Weiss)'라고 읽어주는 게 낫겠다(물론 '피터 웨이스'라고 영어식으로 읽은 책들도 있긴 하다). 독문학자들이 그렇게 읽고 또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됐다. "그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 온"이라고 했는데, 내가 보기엔 바이스가 보드리야르에게 끼친 영향을 말한다(The influence of Weiss is usually played down). 그것이 보통 간과됐다는 것. 하지만 주요작을 네 편이나 번역한 이상 모종의 영향관계나 친연성을 고려해볼 수 있겠다.



 

 

  

<마라/사드>는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다른 세 작품은 좀 생소한데, 찾아보니 <토론>이라고 옮겨진 작품은 <수사(Die Ermittlung)>, 영어본으로는 <조사(The Investigations)>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니 우리말로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한국문화사, 2003)로 번역돼 있다. 제목대로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다룬 '기록극'이라 한다. 11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장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1 승강장의 노래
2 수용소의 노래
3 그네의 노래
4 생존가능성의 노래
5 릴리 토플러의 종말에 관한 노래
6 하급친위대원 슈타르크의 노래
7 검은 벽의 노래
8 페놀의 노래
9 방공호 구역의 노래
10 치클론 B가스의 노래
11 화장로의 노래

페터 바이스는 유대계였던 탓에 나치 독일을 떠나 오랜 망명생활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전기적 내력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그렇다면 대표작 <마라/사드>는 어떤 내용인가? "<마라/사드>는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장 폴 마라(1743-1793)의 암살사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구성된 희곡이다. 그러나 바이스는 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비튼다. 그의 희곡은 한때 샤랑통 시설(Asylum of Charenton)'에 수용된 마르키 드 사드(1740-1814)가 그곳에서 상연한, 마라의 암살 사건을 다룬 연극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20-21쪽)

'샤랑통 시설'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샤랑통 정신병원'으로 사드가 감금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마라/사드>는 <사드 후작의 연출로 샤랑통 정신병원의 재소자들이 공연한 장 폴 마라에 대한 박해와 암살사건(The Persecution and Assassination of Marat as Performed by the Inmates of the Asylum of Charenton Under the Direction of the Marquis de Sade)>이라는 긴 원제를 가진 작품으로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사드가 연출가로 분하여 환자들과 함께 마라의 암살 사건을 극중극으로 재현한다" 때문에 "<마라/사드>는 역사적 현실에 기반한 희곡이면서 동시에 역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Marat/Sade becomes a play located in the historical real, but also one that dislocates history.). 

그리고 바로 그런 점이 보드리야르의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와 상통한다는 것.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연극 작품이 생산되고 상연된 시대를 바이스가 어떻게 바라보는지 깨닫는 동시에,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방식과는 상이한 방식으로 정치를 사고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 역시 흔히 수행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분석과는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이처럼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을 보여주는 희곡을 번역한 보드리야르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21쪽)

이 대목은 원문과의 대조를 필요로 한다. "With Weiss' Marat/Sade, we have a new and interesting form for the explorarion of political ideas, one which strays far from the typical Marxism that informed Weiss' thinking at the time of the play's development and production. Similarly, Baudrillard was exploring different ways of performing Marxist anaylses, and we can tie in his work translating this play of 'grotesque violence and sexual excess' with his interest in the French thinker Georges Bataille(1897-1962)."(4쪽)

내가 읽은 바를 나대로 옮기면 "페터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통해서 우리는 정치 사상을 탐구하는 새롭고도 흥미로운 형식과 접하게 된다. 이 형식은 이 희곡이 씌어지고 공연되던 시기 바이스의 사고를 틀 지웠던 전형적인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한참 벗어난다. 마찬가지로 보드리야르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을 수행/상연하는 다른 방식들을 탐구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그로테스크한 폭력과 성적 과잉'의 희곡을 번역한 그의 작업을 프랑스 사상가 조르주 바타이유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연관지어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보드리야르는 바타이유(바타유)와 접속된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사이에 조르주 바타유는 스스로 '이종적 문제(heterogenous matter)'라고 부른 '과잉', 요컨대 쓰레기, 배설물, 폭음과 폭식 등 불법적이고 불합리한 것에 기반한 글쓰기 이론을 구축했다. 그는 철학의 거장들이 흔히 자신들의 철학은 그러한 세속적 문제를 초월하려는 시도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시하는 영역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21쪽)

바타이유의 이러한 '이질적인' 철학은 당대의 주류 사상가들로부터 거부되었으나 1960년대 이후로 '재발견'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바타유와 그의 저서에 담긴 새로운 관심사를 이해하는 것은 현대의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라는 제약에 맞서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바타유를 참조함으로써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사상가들 전체를 반反 헤겔 혹은 반反 마르크스라는 서사 내에 한 묶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22쪽)

참고로 원문은 이렇게 돼 있다: "To understand Bataille, and the new interest in his work, is to understand the way in which modern French thinkers reacted to the constraints of Hegel and Marx; in other words, we can situate a whole host of thinkers that include Baudrillard in one stretch of narrative."(4쪽)   

역시나 나대로 다시 옮기면, "바타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작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이 헤겔과 마르크스의 구속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보드리야르를 포함한 다수의 사상가들을 하나의 내러티브 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다."

지난번에도 언급한 것이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1965343) 리처드 레인은 줄리언 페파니스의 책 <이질성과 포스트모던(Heterology and the Postmodern: Bataille, Baudrillard, and Lyotard)>을 높이 평가하는데(<이질성의 철학 그리고 바타이유, 보드리야르, 리오타르>(시각과언어, 2000)로 소개돼 있다), 인용한 대목은 이 점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아니, 서론에 나오는 것이니까 미리 암시해준다고 해야겠다. 그리하여 다시 읽게 되는 보드리야르는 페터 바이스와 바타이유 사이의 보드리야르이다...

08.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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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30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30 0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3-30 0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이유 이야기가 나와서 개인적으로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군요.^^
반가운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언제나처럼.

로쟈 2008-03-30 10:13   좋아요 0 | URL
람혼님에게는 기별도 안 갈 내용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바이스의 희곡 중 베트남 토론회라는 작품이 있는데 보들리야르가 번역했다는 토론이 혹시 이 작품은 아닌지요...심문이라는 희곡은 따로 있는데요...(중앙일보사 오늘의 세계문학
13번 페터 바이스 관련 흑백화보 설명에서)

로쟈 2008-04-07 00:30   좋아요 0 | URL
<베트남 해방전쟁의 발생과 전쟁에 대한 담론>라고 따로 거명돼 있어서요. 한데 번역된 건가요? 저는 중앙일보 책이 박스에 들어가 있어서.--;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중앙일보 것은 부모와의 이별 번역본이고요.화보에는 바이스의 희곡이 연극무대에 올려진 것을 소개하고 있어요.한번 확인해보세요.박스에 너무 깊이 넣으셨나요...

로쟈 2008-04-07 01:15   좋아요 0 | URL
게다가 창고에 가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07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수록 태산이네요..
 

이번주 신간 중에 '사회적 독서'에 가장 적합한 책은 아마도 <평등해야 건강하다>(후마니타스, 2008)일 것이다. 영국의 '사회역학자' 리처드 윌킨슨의 저작이고 제목과 '불평등은 어떻게 사회를 병들게 하는가'란 부제에 내용이 이미 요약돼 있다(특별히 상식에 반하지 않는다). 나머지 400쪽 가까운 분량은 이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겠다. 당장에 읽을 시간을 없기에(시간의 배분 또한 불평등하다!) 리뷰들이라도 챙겨둔다.

경향신문(08. 03. 29) '사회적 열등감’이 病 부른다

한 사회에서 건강 수준은 일반적으로 사회 계층이 높을수록 좋아진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가난할수록 건강이 나빠진다고 하겠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부유한 지역의 백인과 가난한 지역의 흑인 사이에는 기대 수명이 16년이나 차이가 났다. 그렇다면 다음의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다는 미국의 평균 기대수명은 세계 25위에 불과하며, 국내총생산(GDP)이 그 절반인 그리스보다 낮다. 미국 흑인 남성은 코스타리카 남성보다 실질소득이 4배나 높지만 수명은 9년이나 짧다. 뉴욕의 할렘처럼 미국의 극빈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에 사는 사람들보다 높다. 문제는 절대적 소득수준이 아니라 상대적 소득격차, 즉 ‘불평등’인 셈이다.

원제가 ‘(불평등의 효과)인 책이 파고들고 있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이다. ‘건강’이 물질적 환경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우리가 이를 경험하게 되는 과정,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들”에 밀접하게 반응하는 지표라는 것이다. 건강불평등과 건강 상태를 결정하는 사회적 요인들을 연구하는 사회역학 분야의 선구자인 저자(영국 노팅엄대 교수)는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건강은 물론 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좀먹는지를 지난 30여년간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해 보여준다.



건강불평등은 단순히 빈곤층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가 불평등하다면 그 속에 사는 누구나 건강한 삶을 온전히 누릴 수 없다. 책은 사회적 불평등이 개인에게 스트레스를 일으키고, 이 스트레스가 다시 건강을 악화시키는 과정을 다양한 연구 성과를 통해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을까 전전긍긍하게 되고, 타인과 비교하거나 경쟁하는 과정에서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만성적인 스트레스는 심혈관계나 면역 체계를 포함한 우리 몸의 생리적 체계에 악영향을 주고 수많은 질병에 취약하게 만든다. 또 담배, 술 등 기분전환용 약물이나 전문의약품에 의존하게 하고 우울증, 불안, 불행, 혐오감, 소외감, 불안정, 통제력의 상실과 같은 증상을 일으킨다.

책에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심리사회적 요인 세 가지가 제시된다. 우선 낮은 사회적 지위. 이는 물질적 생활수준만이 아니라 멸시당한다는 느낌, 열등한 위치에 놓여있다는 느낌, 자신의 일에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느낌처럼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생기는 모든 사회적 감정을 포함한다. 두 번째 요인은 친구나 신뢰하는 사람이 없고, 참여하는 공동체가 없는 등 빈약한 사회적 관계다. 사회적 연결망이 좁은 사람은 넓은 사람보다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4배 이상 높다는 결과도 있다. 마지막 요인은 어린 시절 애착관계의 결핍이나 불안정이다. 저자는 이 세 가지 요인들이 모두 ‘사회적 불안’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 근저에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는 태도가 깔려 있다고 본다. “사회적 불안, 수치심, 우울, 폭력이라는 감정들은 모두 사회적 비교에서 생긴다”라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라고 지적한다.

불평등이 미치는 영향이 건강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강력 범죄 발생률과 10대 임신 비율이 높고,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공동체 생활에 참여하지 않는다. 여성이나 인종적·종교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도 심하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서 수치심을 느끼고 자기 존중감이 심하게 손상된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적 약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존감을 되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책은 사회적 관계를 맺을 때 인간이 구사하는 방식을 ‘지배의 전략’과 ‘친화의 전략’으로 나누고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전자를 강화시킨다는 데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인류가 희소자원을 둘러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홉스적 투쟁의 ‘가능성’ 속에 살아왔지만 ‘협력적 전략’도 개발해왔음을 진화론적 탐구를 통해 보여준다. 인간의 뇌가 커진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며, 영장류들의 ‘털 고르기’처럼 인간은 사회적 유대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으로 ‘말하기’ 전략을 사용해왔다. 또 영장류 가운데 인간만이 눈동자에 흰자위가 있다는 사실은 서로에게 시선을 노출해 서로 이해받고 협력하는 전략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예다.

저자는 건강 불평등을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적극적인 방식은 전체 사회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정치적 의지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고 덧붙인다. 종업원 지주제나 협동조합처럼 좀더 민주적이고 평등한 방식을 우리가 일하는 조직에 이뤄내는 것이다.

책은 소비 수준이 전체적으로 높아진다고 해서 상대적 박탈감과 관련된 문제들이 줄어드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전체 인구의 상당수가 여전히 사회경제적으로 ‘열등하게 취급’된다면 건강 불평등, 약물 남용, 폭력과 같은 사회 문제들은 계속된다는 얘기다. 때문에 사회적 분열, 편견, 배제와 대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경제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대한 근거 없는 허상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엄청난 환경비용까지 지불해야 할 것.”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을 던져주는 대목이다.(김진우기자)

한국일보(08. 03.29) 불평등의 毒에 사회가 병든다

최근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평등주의에 대한 공세가 강화되고 있다. 이들은 경쟁력 격차에 따라 발생하는 불평등은 합리적인 것이라면서 평등주의야 말로 선진화의 걸림돌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

영국 노팅엄대의 사회역학 교수인 리처드 윌킨스는 평등과 건강에 대한 심도깊은 고찰을 통해 이 같은 주장의 허점을 파헤친다. 여기서 말하는 건강은 구성원 개개인의 수명이 길다는 생물학적 건강은 물론이고 구성원간 신뢰가 있는지,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 참여는 활발한지, 살인 등 강력범죄의 비율은 높은지, 인종이나 지역차별 같은 적대감은 심한지 등 사회적 건강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자는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와 불평등한 사회를 정밀하게 관찰하면서 건강을 정의하는 이러한 요소들이 한 묶음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선 물질적으로 부유할수록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통념은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고 갈파한다. 책에 따르면 일정수준의 부를 축적한 사회는 경제적 수준이 향상되더라도 더 이상 기대수명이 높아지지 않는다. 가령 1998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과 평균기대수명을 조사한 결과 부유하지만 비교적 사회적으로 불평등이 심한 나라인 미국은 스웨덴, 일본 같은 부국들은 물론 GDP수준이 절반에 해당하는 그리스보다도 기대수명이 낮았다.

사회적 건강성도 마찬가지. 미국 50개주들의 주민에게 “기회가 된다면 타인들은 당신을 이용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을 던지자, 경제적으로 가장 평등한 주의 주민들은 10~15%만이 ‘그렇다’고 대답한 반면, 불평등한 주에서는 35~40%를 육박했다. 살인율의 경우 주 사이의 불평등 정도에 따라 10배 가량 차이가 났다.

책은 여러 가지 사례를 통해 물질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발생할 갖가지 사회적 실패를 우려한다. 불평등한 사회는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경쟁을 부추켜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지위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과도한 소비에 집착하도록 압박할 것이며 이는 ‘경제성장-자원고갈-환경오염’이라는 악순환을 낳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난한 이들의 경우 소득격차가 커질수록 직장, 집, 자가용 등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재화를 획득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을 열등하게 취급하다고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폭력적 성향을 강화할 것이라고 예견한다.

저자는 “만약 우리가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진심으로 해결하기를 원한다면 이제 더는 불평등이 우리 사회를 좀먹고 있다고 말로만 떠들고 어물쩍 넘어가서는 안될 것”이라며 “불평등이 인간에게 미치는 파장을 더욱 철두철미하게 분석하려는 태도가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말했다.(이왕구기자)

08. 03. 29.

 

 

 

 

P.S. 저자의 다른 책으론 <건강 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당대, 2004)가 출간돼 있다(저자가 왜 '윌킨스'라고 표기돼 있는지 모르겠다). 원제는 '불건강한 사회(Unhealthy Societies)'이다. 관련서로는 사회역학 분야에서 윌킬슨과 쌍벽을 이룬다는 마이클 마멋의 <사회적 지위가 건강과 수명을 결정한다>(에코리브르, 2006), 그리고 한국사회의 건강불평등에 대한 보고서로 이창곤의 <추척, 한국 건강불평등>(밈, 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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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3-29 11:45   좋아요 0 | URL
멕시코에서는 비만을 개인의 식생활 습관의 문제로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물 대신 값싼 탄산음료를 마실 수 밖에 없는 열악한 수도사정 그리고 치안의 불안으로 인한 극도의 제한적 생활로 인한 운동부족 등 이른바 "사회적" 요인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멕시코의 비만인구 비율이 장난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적인 뚱땡이 국가 미국도 찜쪄먹는다고 하더군요. 근데 로쟈님은 이 토요일날 최소 아침 8시 전에 기상해서 작업모드로 들어가시나요??? 이 페이퍼 작성시간이 불과 am 8:45 ???

로쟈 2008-03-29 12:09   좋아요 0 | URL
네, '사회적 비만'이라고 해야겠죠(사회적 영양실조가 있듯이). 오늘은 아이가 학교에 가는 토요일이라 일없이(?) 저도 일찍 일어나야 했고, 일어난 김에 리뷰기사들을 좀 읽다가 옮겨놓은 것뿐입니다.^^;

2008-03-29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3-29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스위스 2008-03-29 20:59   좋아요 0 | URL
답변 감사합니다.

2008-03-29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Jade 2008-03-29 20:39   좋아요 0 | URL
이 책 보관함에 담아두었었는데, 건강불평등 저자였군요. '구조적 책임'이 좀 더 두드러졌음 좋겠는데, '건강불평등'은 애매한 대안을 제시해서 좀 그랬어요.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안들이 좀 더 잘 제시된 책은 없을까요? ^^;;

로쟈 2008-03-29 21:46   좋아요 0 | URL
대안 제시에 앞어서 문제의식의 공유가 우선되어야 할 듯싶습니다. 특히 정책입안자들이 필독해야겠다 싶고요...

에링 2008-03-30 22:26   좋아요 0 | URL
그리스 GDP가 미국 GDP의 절반이나 될리가요...

로쟈 2008-03-30 22:32   좋아요 0 | URL
1인당 GDP입니다. 최근 수치로는 2/3쯤 되는 거 같은데요...
 

오늘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생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이 <어머니>를 다루고 있다. 못본 체할 수도 없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8. 03. 28) [오늘의 책 <3월28일>] 어머니

1868년 3월 28일 러시아의 작가 막심 고리키가 태어났다. 1936년 68세로 몰. “그는 러시아 고전 문학과 소비에트 문학을 잇는 ‘살아 있는 다리’다.” 선배 작가인 톨스토이의 말이다. “과거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무의식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해 왔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은 <어머니>를 읽고 있다.”

고리키의 친구이자 동지였던 레닌이 그와의 대화 중에 한 말이다. 그들의 말대로 고리키는 위대한 19세기 러시아 문학 최후의 작가이자 20세기 소비에트 문학 최초의 작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불린다.

 

 

 

 

<어머니>(1907)는 그 전환점을 만든 작품이다. “…진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천벌을 받을 어리석은 놈들, 진리가 네놈들 머리 위에 떨어질 날이 있을 게다.” 노동운동을 하다 법정에 선 아들이 당당하게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한 말을 유인물로 만들어 길거리에 뿌리다 붙잡힌, <어머니>의 주인공 파벨의 어머니가 소설 마지막에서 절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어머니>는 세계문학사상 최초로 자신을 역사 발전의 주체로 인식한 노동자계급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들은 더 이상 무기력한 연민의 대상, 수동적 인간형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들을 곁에서 지켜보며 스스로도 변혁을 꿈꾸는 존재로 거듭나는 어머니의 의식 변화, 모성애가 인류애로 발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림으로써 <어머니>는 살아있는 문학이 됐다. 이 소설이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지식인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쳐온 이유다. 세상이 변해 문학으로 읽히고 있지만, 한국에서 이 소설은 한때 ‘이적 표현물’이었다.

고리키는 정규 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글을 쓴, 온갖 밑바닥 삶을 전전하며 자살을 기도했던 자신의 운명을 혁명이라는 이상과 결합시켜 문학으로 빚어낸 작가다. 그의 본명은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페쉬코프. 고리키라는 필명은 ‘견디기 어려운’ 혹은 ‘비참한’이라는 뜻의 형용사, 막심 고리키는 ‘최대로 고통받는 인간’이라는 뜻이 된다.(하종오기자)

08. 03. 28.

 

 

 

 

P.S. 고리키의 전기로는 니나 구르핀켈의 <고리키>(한길사, 1998), 앙리 트루아야의 <소설 고리키>(공동체, 1994) 등이 소개됐었지만 현재는 모두 절판된 상태이다. <어린시절>, <세상속으로>, <나의 대학> 같은 자전 3부작도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고리키 연구서로는 이강은 교수의 <혁명의 문학 문학의 혁명 막심 고리끼>(경북대학교출판부, 2004)가 거의 유일하다. 관련서들이 더 소개되면 좋겠다(한편, 푸도프킨의 영화 <어머니>(1926)의 마지막 장면은 http://youtube.com/watch?v=KI3jZtruxvA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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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을뭐라하지 2008-03-28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네이버 메인에 뜬 게 이 때문이군요.

로쟈 2008-03-28 23:0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담비에서 중앙대대학원신문의 새연재 '구양봉의 橫書竪說(횡서수설)'을 옮겨온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9324). 자주 언급한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도서출판b, 2008)에 대한 리뷰이다. 이전에 옮겨놓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맞서라'(http://blog.aladin.co.kr/mramor/1972805) 등과 겹쳐 읽으면 유익하겠다.

중앙대대학원신문(247호) 미학은 어떻게 정치와 조우하는가?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2000)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2005)에 이어 두 번째로 국내에 소개되는 자크 랑시에르의 책이다. 비록 원문이 74쪽 밖에 안 되는 소품이지만 <감성의 분할>은 <불화: 정치와 철학>(1995)과 더불어 독창적인 사상가로서의 랑시에르가 지닌 진면목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 다행히도 국역본 <감성의 분할>은 국역본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증오스러운 번역에 비한다면 훨씬 읽을 만하다. 물론 과도한 직역 탓에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그건 문체에 대한 ‘감성’의 차이일 수도 있으니 일단 넘어가자.

그러나 이 책의 제목이자 주요 개념인 ‘Le partage du sensible’를 ‘감성의 분할’이라고 옮긴 건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옮긴이의 해명(미주 1번)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때문에, ‘(le) sensible’은 ‘감성’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으로 옮겨지는 게 좋을 듯하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le) sensible'은 그리스어 'to aisthêton', 즉 감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의 대상을 지칭한다. 이에 반해 감성은 흔히 “자극이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는 성질”을 뜻하기 때문에(가령 “저 사람은 감성이 예민해”라는 표현을 떠올려 보라) 원래의 뉘앙스가 거의 살아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런 뉘앙스를 살려야 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랑시에르의 정치(la politique) 대 치안(la police) 개념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랑시에르에게 우리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에 가깝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이란 곤봉을 든 경찰력으로 상징되는 어떤 구체적인 억압의 구조이기 이전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즉, 감각적인 것)을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는 상징적 구성원리이다.

그래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정치’는 치안이 특정한 분할선에 의거해 감각적인 것을 배분하고 나눠놓은 질서를 다시 나누고 할당하고 분배하려는 행위이다. 이와 관련해 ‘(le) partage’의 역어로 ‘분할’을 선택한 것은 틀린 건 아니더라도 불충분하다. 나라면 ‘나눔’이라는 역어를 선택할 텐데, 왜냐하면 그래야만 랑시에르의 원래 개념이 함축하고 있는 ‘몫’과 ‘공유’의 의미를 느슨하게라도 포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998)에서 ‘(le) partage’를 법(nomos)의 어원인 그리스어 ‘nemein’과 관련지어 설명한 바 있다. ‘nemein’은 무엇보다 ‘토지’의 분할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갈 토지의 구획을 확정해 주는 행위이기 때문에 “모든 공동체, 모든 제국의 역사의 시초”(칼 슈미트, <대지의 노모스>)이며, 그렇기 때문에 법의 어원이 된 것이다.

이런 토지의 분할은 무작위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것은 신화적 사유(혹은 지배 이데올로기) 속에서 응당 그 토지를 소유할 자격이 있는 민족, 계급, 사람들의 등급에 따라 차별적으로 할당된다. 특정 토지를 어떤 누군가가 소유하게 되는 것은 그의 자격에 따라 그에게 주어진 ‘몫’인 셈이다. 가령 야훼가 유대민족에게 선사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다른 민족에게는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동일한 자격과 몫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에 대항해 서로의 자격과 몫을 ‘공유’한다. 적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기 때문에 분할은 ‘배제’의 근거인 동시에 ‘참여’의 근거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토지 분할의 논리가 정치적 장으로 옮겨가면 그것은 특정 지위를 할당하는 논리가 된다. 가령 어떤 누군가가 지배자의 지위를 자신의 몫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이다. 플라톤은 일찍이 이런 자격(연장자, 강자, 현자 등이 타인을 지배할 자격이 있다)을 세분화한 바 있는데, 랑시에르는 이를 정치의 ‘아르케’(근본원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랑시에르의 정치는 이런 아르케를 뒤흔들고, 더 나아가서는 아르케 자체의 해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미학과 정치는 이렇게 조우한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뒤흔들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정치의 미학화”나 “미학의 정치화” 같은 말은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정치·치안이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둘러싸고 형성되는 것인 이상, 그것 자체가 이미 미학이기 때문이다.

단, 이때의 미학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미학이 아니라 그 어원에 충실한 미학이다. 즉, ‘감각적인 것’ 혹은 ‘감각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to aisthêton'에 바탕을 둔 그 미학(‘감각학’으로서의 미학) 말이다. 이렇듯 랑시에르가 포착한 상동성으로 인해 가능해진 미학과 정치의 조우를 음미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08. 0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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