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미치 도모노부 교수의 <단테 '신곡' 강의>(안티쿠스, 2008)는 요즘 매주 두어 장씩 가장 주의해서 읽고 있는 책이다. 필요 때문이기도 하지만, 강의의 품위와 격조가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주어서다. 교수신문에서 관련서평이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26). 필자는 <신곡> 번역서와 해설서를 낸 바 있는 김운찬 교수다.

교수신문(08. 03. 31) 50년 고전 읽기의 모범

아마 『신곡』만큼 다양한 해석으로 열린 작품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이 소위 고전 작품들의 특징이라면, 『신곡』은 그런 정의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더 나아가 때로는 깊이 읽을수록 오히려 헷갈리게 보이거나 더 많은 수수께끼를 던져주기도 한다. 언제나 새롭고 신비로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일부 열성적인 독자들에게 『신곡』은 지속적인 탐색과 산책의 무대가 된다. 읽을 때마다 여러 가지 사색의 실마리들을 끊임없이 제공하면서 진정한 ‘텍스트의 즐거움’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도쿄대 문학부 교수를 역임한 이마미치 도모노부(今道友信)의 『단테 ‘신곡’ 강의』는 50년에 걸친 『신곡』 사랑의 결과를 보여준다. 그 사랑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매주 토요일 밤 3시간씩의 만남을 통해 지속됐다고 한다. 아마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강렬한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1997년 3월부터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이뤄진 15차례의 ‘강의’를 통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게 됐으니, 그 정도와 깊이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마미치는 단순히 『신곡』을 읽고 이해하는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의 전공 분야인 철학이나 미학의 관점으로만 읽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신곡』을 매개로 해 자신의 삶과 학문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단테뿐만 아니라 다른 위대한 인물들과 어울려 마음속의 대화를 나눈다. 그것은 일종의 창조적인 읽기가 된다. 텍스트의 전통적인 해석에만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로운 연상 작용과 함께 새로운 연결 고리들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들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 책은 고전 읽기의 가장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신곡』을 읽기는 쉽지 않다. 『신곡』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정보와 지식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테의 개인적인 삶과 사상을 비롯해 당시 유럽의 시대적인 상황, 정치적 싸움과 종교적 갈등,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주요 관념 등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으면 단테의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어렵다. 거기에다 텍스트의 의미 구조가 복잡하다. 하나의 표현 속에 여러 가지 의미들이 중첩되고 겹쳐진 구조로 돼 있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외에 알레고리, 즉 友誼(우의)적 의미와 신비적 의미, 도덕적 의미 등이 동시에 함축돼 있다. 따라서 어떤 구절에서는 서너 가지의 상이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중세의 전통에 따른 것으로, 특히 성경 텍스트의 해석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으며, 또한 단테 자신이 그렇게 읽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곡』에는 무슨 뜻인지 모호하고 수수께끼 같은 구절들이 종종 발견된다. 일부는 지금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학자들마다 서로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심지어 어떤 감추어진 비밀이나 은밀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도 바로 그런 해석을 토대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마미치가 『신곡』의 첫 3행을 해석한 것처럼, 악센트 하나가 있는가 또는 없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우리말 번역본에서는 그 차이를 감지하기 어렵다). 서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은 독자들에게 탐색의 재미를 찾게 해준다. ‘철학자 시인’ 또는 ‘시인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단테는 자기 텍스트의 여러 곳에다 마치 보물찾기 놀이를 하듯이 흥미로운 해석의 장치들을 마련해두고 있다. 게다가 『신곡』은 중세를 총체적으로 집약하고 있는 작품,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만큼 풍부한 상징적 의미들의 보고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고려해볼 때 『신곡』 읽기는 일종의 지적 도전이 된다. 제대로 음미하면서 읽으려면 상당히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이마미치의 책은 전체 15번의 강의로 구성돼 있는데, 처음 세 번의 강의는 그런 준비 작업에 할애돼 있다. 단테와 『신곡』을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교양’을 탐색하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작업이다. 먼저 호메로스에서 베르길리우스를 거쳐 단테에 이르는 고전 서사시의 전통과 특징을 더듬어본다. 또한 단테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로서 유럽 문화의 양대 뿌리에 해당하는 그리스 로마 문화와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그 과정에서 ‘고전’, ‘문학’, ‘성경’, ‘역사’ 등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교양 용어들의 어원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특히 클래식, 즉 ‘고전’이라는 말의 원래 의미와 역할을 다시금 되새겨 봄으로써 보다 풍부하고 알찬 읽기를 준비하도록 배려한다.
 
본격적인 『신곡』 읽기에 들어가서 이마미치는 오랜 세월 동안 관심과 사랑을 기울인 노련한 학자답게 수많은 해설서와 번역본, 관련 자료들을 상호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거기에다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석과 번역까지 곁들여 제공한다. 인상적인 것은 놀라운 외국어 능력이다. 단테의 이탈리아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어와 라틴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을 넘나들면서 『신곡』의 세계를 파헤치고 숨겨진 의미들을 찾아낸다. 인문학 연구는 무엇보다 외국어 공부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실증적으로 보여주듯이, 작품의 연구로서 해석이란 원래 작가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미까지 발견해내는 작업이다. 때로는 누구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독특한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는데, 그런 읽기에는 다른 분야의 관점들이 신선한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마미치는 『신곡』을 일본 문학의 고전 작품이나 구비 문학, 또는 다른 전통적 요소들과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읽기를 시도한다. 일부 구절에 대해서는 다른 예술 분야나 종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그렇게 다양한 관점들은 특히 강의가 끝난 후 청중들과의 자유로운 질의응답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청중들 각자의 관심 분야에 따라 단테의 목소리는 색다른 어조를 띠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스콜라 철학의 본질을 노래하는 『신곡』이 불교나 동양 사상과 비교되거나 접목될 수도 있다.

그렇게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 이 책은 분명 『신곡』에 대한 단순한 해설이나 입문서가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을 충분히 이해하려면 먼저 최소한 한 번 이상 『신곡』을 주의 깊게 통독해야 할 것이다. 또 가능하다면 단테의 목소리를 직접 느낄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이탈리아어 지식도 필요하다. 이마미치의 강의를 듣고 질문이나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런 역량을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마미치가 관심을 기울이는 또 한 가지 문제는 번역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신곡』을 읽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단테의 언어로 읽는 것이리라(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테가 직접 쓴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고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필사본들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탈리아 단테 학회에서 정한 판본이 일종의 표준 판본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번역본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번역은 출발 언어와 도착 언어 사이의 차이 때문에 불완전한 ‘옮기기’가 될 수밖에 없다. 운문의 경우 특히 그렇다. 단테는 『신곡』을 집필하기 직전에 쓴 미완성 작품 『향연』에서 시의 번역 불가능성에 대해 언급한다.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편」을 예로 들면서 단테가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형식적 조화를 특징으로 하는 운문 작품은 다른 언어로 번역할 경우 필연적으로 고유의 감미로움과 조화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언어로 번역하든 음절의 숫자와 각운, 리듬 등 단테의 시가 간직하고 있는 고유의 형식적 아름다움은 훼손되거나 변화될 수밖에 없다. 이마미치는 권위 있는 『신곡』 주석본들과 여러 개의 일본어 번역본을 서로 비교하면서 설명하는데, 그것은 주로 단테의 이탈리아어가 갖는 시적 풍부함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일본어로 옮길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돼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커다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개 일본어 번역문의 표현 방식, 또는 시적 느낌이나 뉘앙스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석이나 오역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또 다시 우리말로 옮기다 보니(이것은 일종의 重譯이다) 그 구체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일본어의 시적 표현과 관련된 문제인 만큼 어떤 번역이 뛰어나거나 훌륭한지 분명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곡』의 경우 번역과 관련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지적됐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20여 종류가 넘는 『신곡』 번역본이 출판됐다. 그 중에는 정체불명의 번역이나 번안 작품도 포함돼 있으며, 최소한 절반 이상이 중역이다. 물론 중역본이 더 훌륭한 경우들도 있지만 원본, 즉 출발 텍스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또 대부분이 내용 위주의 번역에 치우쳐 형식적 조화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시적 전통을 고려하는 참신한 번역을 시도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런 독자 지향적 번역은 『신곡』의 난해함이나 지루함을 어느 정도 보완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번역의 문제와 관련된 책을 번역할 때에는 특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텍스트를 비교적 무난하게 소화하고 있으나, 일부 일본어식 한자 용어들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또한 베르길리우스의 이탈리아어 이름을 ‘베르질리오’로 표기했는데 국적 불명의 이름이 돼버렸다. 굳이 우리말로 표기하자면 ‘비르질리오’ 정도가 될 것이다. 물론 원문에서 라틴어 이름과 이탈리아어 이름을 뒤섞어서 쓰고 있지만, 하나로 통일하고 역주로 처리해도 좋을 듯하다. 단테의 저술 『제정론』을 『제왕론』으로 바꾸어 번역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신곡』의 경우처럼 모든 번역은 언제나 수많은 가능성 앞에 노출됨으로써 비판의 대상이 되기 쉽다.(김운찬/ 대구가톨릭대·이탈리아어과) 

08.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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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8-04-04 09:26   좋아요 0 | URL
저도 토요일 3시간을 할애해서 열심히 읽으리라 다짐을 하지만...토요일만큼은 놀고싶다요~~
요 챕터 가져갑니다.

로쟈 2008-04-04 09:36   좋아요 0 | URL
공부의 즐거움도 노는 즐거움 이상인데요.^^
 

최근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나무, 2008)을 출간한 원로 영문학자이자 연극평론가 여석기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그의 <강의>는 지난 월요일에 손에 들었고 마침 모니터 바로 앞에 놓여 있기도 하다.

경향신문(08. 04. 02) 여석기 교수 “연극은 바보 짓, 그래서 의미있다”

21년 전 대학 강의실을 떠난 원로 학자가 못다 한 강의를 책으로 옮겼다. 영문학자로 셰익스피어 전문가이자 한국연극평론 1세대인 여석기 고려대 명예교수(86)가 최근 ‘나의 햄릿 강의’(생각의 나무)를 펴냈다. ‘해방 학문 1세대’로 평생을 영문학에 매진해오며 날카로운 비평으로 연극계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노학자는 학생들에게 건네듯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국제교류진흥회 이사장으로도 활동하는 그는 매주 월·수·금 서울 종로2가 사무실에 나가 오후 5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를 계속한다. 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자택에서 만난 여 교수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정정한 모습이었다. 일찌감치 겉옷을 갖춰 입고 기자를 맞아주었다. 그의 서재는 가난했다. 평생 학문연구를 위해 모아온 방대한 자료들은 진작에 기증했다.

해마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에서 수여하는 ‘여석기 연극평론가상’ 얘기가 나오자 쑥스러워했다. 60여년 넘게 품어온 햄릿에 대한 생각, 연극평론가로서 바라본 연극계의 현실 등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침침한 눈과 뻣뻣해진 몸 탓에 연극을 못본 지 10년이 넘었지만 연극에 대한 애정은 변함없다. 흥미를 끌만한 가벼운 질문에는 학자다운 진지함과 냉철함으로 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책은 어떻게 내셨나요.

“내가 책 낼 나이가 아닌데 작년에 엉뚱한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내가 학생들에게 강의를 한다면 뭐가 달라질까? 딱딱하고 힘든 책은 못쓰겠고, 햄릿이 텍스트 연구보다는 공연 쪽으로 비중이 커지고 있으니 무대 위의 ‘햄릿’은 어떻게 그려지는지도 함께 담아 편히 읽도록 했죠. ‘맷집’ 좋은 햄릿이니 시종 편안한 건 아니고…. 읽다가 딱딱한 얘기는 그냥 건너뛰면 돼요. 1년 넘게 작업했죠.”

-연극과는 언제 인연을 맺으셨나요.

1962년 드라마센터 개관작이 ‘햄릿’이었어요. 당시 유치진 선생이 번역을 부탁했죠. 그 전에도 햄릿이 자주 공연됐으니 번역대본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 개관 3~4개월 앞두고 급하게 공연대본으로 번역했어요. 51년 이해랑 선생이 이끈 극단 신협이 대구에서 ‘햄릿’을 공연할 때도 그 자리에 있었지요. 전쟁의 와중에도 구경꾼들이 많아 난리가 났어요. 예전 배우들이 여관에 발 묶여있을 때 쉽게 올렸던 작품이 ‘춘향전’ 아니면 ‘햄릿’이었어요. 그만큼 인기가 좋았던 작품입니다.”

-‘햄릿’이 왜 인기일까요, 햄릿과 60여년 살아오셨는데요.

매력적이에요. 그러나 한마디로 말할 순 없어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드문 인물이죠. 햄릿 1막부터 5막까지의 시간 경과를 따지면 채 1년이 되지 않아요. 그러나 1막의 햄릿과 5막의 햄릿은 달라요. ‘내면적 성숙’, 인간적으로 바라본 햄릿의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42년 도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햄릿을 만났으니 오랜 세월 함께했죠. 청년 때 만난 햄릿과 점점 늙어가며 느끼는 내 마음속의 햄릿은 분명 다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야단스러운 얘기일 테고 난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게 햄릿에 대한 나의 결론입니다.”

-요즘 자기 확신에 차서 밀어붙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햄릿과 같은 사람이 필요한 것 아닌가요.

흔히 ‘햄릿형’이라고 해서 ‘귀공자인데 사색적이고 우유부단하고 행동이 부족하다’ 그런 말을 하죠. 19세기부터 내려온 이미지입니다. 시대마다 햄릿에 대한 풀이가 달랐던 것 같아요. 햄릿이 너무 일찍 죽었어요. 햄릿에게 ‘본심이 뭐냐’고 물으면 씩 웃고 치우겠죠. 대답도 하지 않을 겁니다. 이 질문에는 뭐라고 답변할 수가 없군요. 햄릿의 본심을 모르니까요.”

-요즘 연극,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이 참 묘합니다. ‘연극 위기론’은 사람들이 연극을 즐겨보던 60~70년대에도 끊임없이 나왔어요. TV·영화에 이어 요즘은 뮤지컬이 자리를 빼앗는다고 하죠. 연극도, 연극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굶주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이 줄어들지는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관객 수가 아니라 좋은 극작가, 좋은 배우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많은 관객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연극의 역할은 뭘까요.

연극은 산 사람(무대)과 산 사람(객석)이 교류하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디지털시대에 연극처럼 비효율적인, 바보같은 짓이 어딨습니까. 한 번 공연하고 사라지는 일회성, 참 골치아픈 겁니다. 얼마나 낭비입니까. 하지만 그 비경제성이 의미있어요. 산사람끼리의 소통을 이끄는 그 매체(연극)의 깊이를 어떤 것도 못따라갑니다. 능률만 갖고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연극은 그것을 일깨워주죠.”(김희연기자)

08. 04. 03.

P.S. 한겨레의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80076.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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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관심에다 필요까지 겹쳐서 앤 애플바움의 <굴락>(드림박스, 2004)을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오늘은 아예 원서까지.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굴락)에 대한 이 방대한 저작은 지난 2003년에 출간됐고 이듬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된다. 국역본이 나온 게 2004년 12월이니까 분량을 고려하면 초스피드로 나온 셈이다. 역자가 'GAGA 통번역센터'라는 건 그래서 이해할 만하다. 이른바 '집단번역'인 것. 하지만 동시에 '강제번역'이었는지 번역의 수준이 '수용소'만큼이나 열악하다(이미 절판된 책이니 이런 흠을 잡는다고 해서 매출에 지장을 초래하진 않겠군. 혹은 이런 평도 명예훼손감일까?).

 

 

 

 

'당신에 없는 사이에' 나온 책이어서 기억에 내가 국역본의 존재를 안 건 마냐님의 리뷰를 읽고서이다(http://blog.aladin.co.kr/goodmom/601472). 너무도 허술하게 번역됐다는 지적을 읽었기 때문에 따로 구입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출간된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조해보니 원서와 같이 읽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누가 그렇게 읽을까?). 멀리 갈 것도 없이 책의 헌사에서부터 번역은 '번역'이 필요하다.

저자인 애플바움은 "이 책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신 분들께 바칩니다."라고 헌사에 적었다. "This Book is Dedicated to Those Who Described What Happened." '알려주신'이라고 옮긴 단어는 'Described'이다. 이 경우엔 '기록한' 혹은 '기록으로 남긴'이란 뜻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저자가 이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수용소 체험자들의 기록과 증언 덕분이었을 테고 그에 대해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노벨문학상 수장작가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도 <수용소군도, 1918-1956>라는 방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애플바움은 영역판의 서문을 썼다). 그런데 이 헌사는, 특히 'Described'란 단어는 러시아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1889-1966)의 한 서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 사실이 국역본에는 드러나 있지 않은데 옮겨보면 이렇다.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 이후 끔찍했던 몇 년 후 나는 레닌그라드의 수용소 밖에서 줄을 서며 17개월을 보냈다. 어느 날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알아보았다. 내 뒤에 서 있던 여자는, 추위로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으며, 물론 이전에 누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은 적은 없었다. 이제 그녀는 우리 모두에게 닥친 마비상태에서 벗어나서 나에게 속삭이며 물었다(그곳에서는 모두가 속삭이며 말했다). "이걸 설명할 수 있나요?" 나는 말했다. "할 수 있어요." 그러자 미소 비슷한 것이 그녀의 얼굴 위를 스쳐갔다."

인용문의 출처는 아흐마토바의 연작시 '레퀴엠 1935-1940'의 서문이다. 국역본에는 "서두 해설 대신 진혼곡 1935-1940"이라고 돼 있는데, "Instead of a Preface: Requiem 1935-1940"을 옮긴 것이고, '서문을 대신하여'는 이 연작시의 서문격으로 1957년에 붙인 에피소드다(시의 전문은 http://www.wikilivres.info/wiki/index.php/Requiem_%28Akhmatova%29 참조, 영역으로는 http://www.poemhunter.com/poem/requiem/).

그런데, 이 인용문 번역의 첫문장, 첫단어부터 국역본은 잘못 옮겨놓았다.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 이후 끔찍했던 몇 년 후 나는 레닌그라드의 수용소 밖에서 줄을 서며 17개월을 보냈다."의 원문은 이렇다. "In the terrible years of the Yezhov terror I spent seventeen months waiting in the outside the prison in Leningrad." 

여기서 'Yezhov terror'를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라고 옮겼는데, '예조프'는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다(설사 인명인 줄 모른다고 쳐도 단 몇 초만 검색해보면 알 수 있건만!). 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로 KGB의 전신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총수였고 악명 높았던 1937-8년의 대숙청 작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물론 이후에 그 자신도 숙청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쓰는 스탈린 시대'란 페이퍼 참조(http://blog.aladin.co.kr/mramor/1745168). 그러니 'Yezhov terror'는 '예조프에서 일어난 테러'가 아니라 '예조프의 테러'를 가리킨다. 거기에 '몇 년 후'란 번역은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건지 알기 어렵다. 첫문장을 다시 옮기면, "예조프의 테러가 판을 치던 끔찍한 시절 나는 17개월을 레닌그라드 감옥 바깥에 줄을 서서 기다리며 보냈다." 

 

누굴 기다리며? 짐작엔 아들 레프 구밀료프를 기다리며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레프는 남편인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아들이다. 그는 나중에 부모 이상으로 유명한 역사학자가 된다). 스탈린은 유명시인이었던 어머니를 직접 핍박하는 대신에 아들을 체포하여 '볼모'로 삼았고 때문에 아흐마토바는 스탈린을 찬양하는 시까지 써서 바치기도 했다.

여하튼 그런 곡절 때문에 수용소 밖에서 기다리던 아흐마토바를 어느 날은 한 사람이 알아봤다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 아흐마토바의 이름을 부른 것이겠다. 그리고 그걸 들은 뒤의 여자가 굳었던 입을 열고 이 '시인'에게 속삭였을 터이다. "이걸 기록하실 수 있겠어요?(Can you describe this?)" 물론 '이것'이 가리키는 건 이 '말도 안되는 사태'이겠다. 그에 대해서 아흐마토바는 이렇게 답한다. "할 수 있어요.(I can.)" 그때 스쳐간 희미한 미소라는 건 이 터무니없는 역사적 수난이 그래도 기록(의미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작은 위안의 표시겠다. 아흐마토바의 '레퀴엠(진혼곡)'은 바로 그 '기록'인 것이고.

해서 나는 애플바움의 헌사 "This Book is Dedicated to Those Who Described What Happened."를 "이 책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록해준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앤이 쓴 건 '히스토리'이고 안나가 쓴 건 '레퀴엠'이지만 두 여자는 현대사의 한 비극을 사이에 두고 그렇게 서로 교신하고 있다...

08.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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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02 2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4-03 22:37   좋아요 0 | URL
아흐마토바의 책들이 좀 소개되면 좋을 텐데요...

수유 2008-04-04 09:26   좋아요 0 | URL
예. 저도 그녀의 저 우아한 프로필과 더불어 그녀의 시를 올려놓고 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4-06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제니친이 사실상 지금은 러시아 민족주의자가 되어버린 지금 자신의 저작인 수용소 군도를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해요.그 책이 서방진영에서 소련을 씹을 때 많이 이용되었잖아요.서방진영에서 나온 30년대 소련의 대숙청을 다룬 로버트 콘케스트의 책은 이제 오래되어 아펠바움의 책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아펠바움이나 콘케스트나 강경한 보수주의자들인데...솔제니친은 이 책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소련 수용소를 직접 체험한 이들의 회고록 풍 글은 우리나라에도 꽤 많이 번역되었더라구요.

로쟈 2008-04-07 00:47   좋아요 0 | URL
'서재 투어'를 하시는군요.^^ 솔제니친은 요즘도 책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민족주의자이면서 (러시아식) 공산주의자의 포지션은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펠바움의 책은 시각보다는 자료 집성에 의의가 있는 것 같고요...

Sati 2011-08-08 0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에 조예가 없다보니, 저는 다른 것보다 prison을 수용소라고 번역한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
 

교수신문의 기획연재에서 다시 서평이 특집으로 다루어졌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0). 취지에 따르면, "이번 특집기획은 ‘다시, 서평을 말하다’이다. 지난 <비평> 특집기획 ‘한국 서평의 현 주소’의 문제의식을 더 밀어보자는 주문이 많았다. 이번에는 △좋은 서평의 조건(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1) △문학서평의 갈 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2) △사회과학서평의 위상학(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3) △과학서평의 위치와 갈 길(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814) 등으로 나눴다. 지난 특집기획이 일반적인 서평을 놓고 그 지나온 길을 짚었다면, 이번 특집기획은 분야별로 차이를 갈라 ‘그럼 어떻게 쓸 것이냐’를 제안한다." 그 중 문학서평에 관한 꼭지를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8. 03. 31) 비평으로서의 서평과 비평적 판단

문자 그대로 책에 대한 評을 뜻하는 한 서평이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고 해야 할 듯하다. 물론 서평과 비평을 가르는 형식적 기준이라는 것이 없지는 않다. 지면의 할애 면에서도 구분이 되지만 특히 우리 학계에는 비평을 서평보다 한 급 높은 지적 활동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더라 하더라도 서평이 비평과 절대적으로 차별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비평안이 없는 독자가 좋은 서평을 쓸 수 있다고 믿기 어렵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비평적 안목이 뒷받침하지 않는 서평 행위가 玉石을 제대로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더러는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데 일조하는 현상을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 현상이 만연해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우리 인문학계 전체를 부당하게 폄훼할 위험도 있지만 2008년 1월 28일자 <교수신문>만 보더라도 대체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서평문화’가 튼실하게 정착됐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지 않은가 싶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3).

다른 한편 <교수신문>이 제시한 여러 통계적 수치나 여론조사 자체도 비판적인 해석을 요구하는 하나의 텍스트적 성격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객관성을 담보한다고 여겨지는 객관적인 데이터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객관적 데이터’와는 약간 성격이 다른, 좋은 서평에 걸림돌이 되는 몇 가지 장애물을 환기해보는 것도 훌륭한 서평의 덕목을 다시 성찰해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중 필자가 특히 주목한 장애물은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와 ‘비판을 꺼려하는 전통문화’다.

분과의 경계가 해체되고 비판이 장려되는 학문세계에서 이 두 문제는 자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따져보면 양면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적 행태야 타개해야 마땅하지만 그 나름의 전문성을 살리는 협동작업은 분과학문에서도 필수적이다. 논쟁을 꺼리는 전통문화도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침묵의 카르텔을 만들어 패거리화되는 것은 경계해야 하겠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내는 방편으로 선학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무분별한 비판도 관행이 되다시피 한 면이 있다. 전문성을 키우되 전공 결속주의에 빠지지 않고 논쟁을 지향하되 격을 갖추려는 노력은 건강한 서평 문화를 키우는 데 없어서는 안될 점이다. 인문학 가운데서도 문학 분야는 그러한 비평으로서의 서평 문화의 토대가 특히 허약한 듯한데, 여기서는 그 점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서평의 공정성과 객관성  
문학 서평도 비평의 범주에 속한다면 평단에서 가장 큰 폐해로 지적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물론 예전에 ‘죽비소리’라 해 신간이 나오면 익명으로 사정없이 질타한 적도 있었지만 일방적인 찬사와 덕담을 늘어놓는 주례사나 작품의 미덕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흠잡기에 열중하는 죽비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에 해당한다. 물론 이 상반된 서평 태도와 거리를 두면서 비판과 찬사를 적당히 섞어 작품을 얼버무리는가 하면, 아예 서평대상과는 무관한 자기의―십중팔구는 수입돼 유통되는― ‘이론’에 몰두하는 논자도 적지 않다. 그러나 얼버무리는 경우도 그 간이 절묘하지 맞지 않을 경우 비판의 유효성을 중화시키기 십상일 뿐더러 찬사의 온당한 근거를 댈 수 없기 십상이라서 절충적인 서평의 위험도 주례사나 죽비소리에 못지않다고 봐야 한다.

비평문화에서 주례와 죽비, 절충 등으로 분류되는 서평에도 오랜 관행이 있다. 출판시장의 판도를 좌우하는 ‘자본’이 활개 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평 장르는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는바, 근대가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 자신 프랑스라는 ‘문필 공화국’의 자부심 강한 시민으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다간 발자끄가 『저널리스트』(1843)에서―때로는 자신의 발등을 찍어가면서―풍자한 그대로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 평단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문화정치적 세계와 긴밀하게 연동된 언론사와 출판사가 조장하는―발자끄가 그야말로 꼼짝하기 힘든 독설을 퍼부은―파당의식과 이해관계는 과거만의 일이 아님이 절절히 실감된다.  

상황이 그렇다고 해서 서평으로서의 비평에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자 덕목인 공정한 평가와 비평적 객관성이라는 난제를 포기할 수는 없다. 필자 자신도 서평이나 촌평을 여러 차례 하면서 그같은 난제를 충분히 감당했다고 자신하기 힘든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근래 우리 문단의 화제인 김훈의 역사소설을 두고 벌어지는 논란도 그런 난제를 서평으로서의 비평이라는 맥락에서 짚어볼 기회를 제공한다. 

김훈 역사소설에 대한 서평에서도 눈에 띄는 점은 상반된 평가다. 하나의 문학작품을 두고 독자의 견해가 다른 것은 물론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김훈에 관한 대조적인 평가에서 흥미로운 것은, 문학비평을 업으로 삼는 논자치고 그의 역사소설을 이런저런 눈치를 보지 않고 엄정하게 읽었다는 느낌을 주는 비평가는―허무주의니 파시스트니 하는 ‘재’를 과장되게 뿌린 비평에 비하면―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부연하자면 <교수신문>에 기고한 오창은의 평문은 이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15). 그런 서평은 오히려 비문학도들이 시도했다.

가령 심사위원들이 “한국문학에 내려진 벼락과 같은 축복”이라며 동인문학상을 수여한 『칼의 노래』(2001)도 그러하다. 국어학자인 이익섭은 도저히 앞뒤가 맞지 않는 대목들을 세세하게 골라내면서 “너무 기초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작품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나는 심사 기준에 뭔가가 더 추가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푸념한 바 있다(<문학과 사회> 2002년 여름호). 또한 역사학자인 정옥자는 이 작품을 두고  “식민사관에서 우리를 집중적으로 세뇌시킨 당쟁론이 여과없이, 아니 더욱 심하게 묘사돼 있”음을 지적하면서 선조와 당대 현실정치에 대한 작가의 편향된 시각을 꼬집은 바 있다(<문학동네> 2006년 가을호).

비록 문학서평을 전문으로 하는 독자는 아니지만 이들은 쉽게 넘겨버리기 어려운 논점을 제시하고 있다. 두 논자의 문제제기는 사실 재현의 정확성과―‘역사의식’과 완전히 동의어라고 말하기는 힘든―역사인식으로 모아진다. 역사소설을 다루는 데서도 이 쟁점은 전혀 간단하지 않다. 가령 『칼의 노래』에서 왜 거북선이 나오지 않느냐, 고고학계도 아직 정확히 밝히지 못한 殉葬의 구체적인 거행과정을 『현의 노래』처럼 그런 식으로 묘사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드는 것도 역사소설의 평가에서 초점을 흐릴 공산이 다분하다. 史觀의 결여를 비판하는 일은 더 까다로운데, 그것은 문학의 역사화라는―‘역사주의’라는 잣대로 문학을 재단한다는―반론을 불러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성과 역사인식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역사소설을 제대로 논하기 힘든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런 문제가 소설 비평에서의 일반적인 쟁점과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이익섭은 『칼의 노래』에서 시간이나 사건의 전개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을 적시했지만, 그건 차라리 창작 일반에 해당하는 기본을 환기했달 수 있다. 즉 작품 “뒤에 연보며 海戰圖까지 붙여 역사적 사실과 연관 지으려는 의도가 뚜렷하”고 “史實에 맞추어 소설을 전개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한 『칼의 노래』의 무수한 사실왜곡과 부주의함을 적시한 것이다.   

김훈은 ‘일러두기’에서 15세기의 임진왜란과 5세기의 가야 멸망, 17세기의 병자호란이 배경이 되는 각각의 작품을 다른 무엇이 아닌 오직 소설(=허구)로만 읽혀야 한다고 되풀이해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소설의 이름으로 그같은 왜곡과 부주의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역사소설의 경우는 특히 그러하다. ‘팩션’으로 가공된 역사적 소재나 사건이기 때문에 ‘소설’로 읽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도 사실과 허구의 관계, 더 나아가 ‘역사적 진실’의 문제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정옥자는 이보다 더 차원이 높다면 높을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 셈이다. 역사소설에서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 여부만 가지고는 제대로 해명할 수 없는 것, 즉 작가의 세계관 또는 역사를 보는 관점의 문제점까지를 들추어낸 것이다. 이 관점도 따지고 들어가면 사실이냐 진실이냐, 역사냐 허구냐를 가르는 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난점에 부딪히게 된다.  
   
전문적으로 읽고 즐기는 독자의 의미
우리 문단에서 비평가라는 이름의 독자들이 이 난점과 어떻게 씨름하고 있는가를 소개할 지면은 없다. 다만 원래 이 글의 주제로 돌아와 짤막한 서평도 비평의 차원을 겸해야만 이 난제를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음을 강조할 만하다. 다른 한편 김훈의 역사소설 평가를 둘러싼 이런 종류의 어려움을 어떤 한 탁월한 독자가 홀연히 나타나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낭만적 공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책을 전문적으로 읽고 즐기는 독자들이 하나의 실체적 집단으로 존재하면서 비평에 값하는 수준의 서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과 통찰을 문화적으로 축적할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듯하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문단에서 촌평이나 서평의 형식으로 각종 문예지에 실리는 많은 글이 책의 단순한 선전이나 소개의 차원에 그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자족할 수는 없다. 우리 문화현장에서 인터넷 서평을 선도하는 블로거의 활약도 옥석을 분별하는 본격 비평의 지평을 지향해야만 ‘시장’의 들러리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유희석/ 전남대·영문학, 문학평론가)

08. 04. 01.

P.S. 필자의 주장은 서평도 '평'인 이상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아무리 분량이 짤막하더라도 비평의 차원을 겸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예전에 적은 대로 약간 다른데(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5506), 아무래도 '분량'과 '지면(자리)'의 성격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10-20짜리 서평(혹은 리뷰)과 50-70매 규모의 비평은 체급이 다른 것 아닐까. 한편으로 서평문화의 걸림돌로 ‘분과학문별 결속주의’와 ‘비판을 꺼려하는 전통문화’에 대해 지적한 대목은 공감하게 된다. 필자가 '침묵의 카르텔'과 '자기의 이름을 내는 방편으로 선학들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무분별한 비판 관행', 어느쪽이 더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인지는 모호하지만. 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지적은 이것이다.

"비평문화에서 주례와 죽비, 절충 등으로 분류되는 서평에도 오랜 관행이 있다. 출판시장의 판도를 좌우하는 ‘자본’이 활개 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평 장르는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던 것이다.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는바, 근대가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은 필연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서평이 비평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비평도 "사실상 책의 광고를 좀더 고급하게 내주는 포장지"에서 예외가 아니다(비평 또한 출판시장 바깥에 있지 않다). 거기다 문제는 "주례는 주례대로, 죽비는 죽비대로, 절충은 절충대로 얼마든지 포장의 修辭로 동원될 수 있"다는 통찰이다. 이건 아주 래디컬하다. 주례이건 죽비건 '포장의 바깥은 없다!'고 말하는 것이기에. 그에 비하면 "비평에 값하는 수준의 서평을 할 수 있는 건강한 상식과 통찰을 문화적으로 축적할" 수 있는 여건에 대한 필자의 요구는 좀 뭉툭하다. "賣文으로서의 무수한 비평문과 거간꾼으로서의 서평가들을 양산해왔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비평의 지평'(공정성과 객관성) 이상의 뭔가 더 뾰족한 수가 필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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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평에 대해서...
    from Hemingway's I love text 2008-04-02 21:24 
    난 독서토론모임인 책과 세상의 회원이다. 토론은 사실 익숙치 않다. 가입이유는 책이 좋아서, 다른 사람의 시각과 나의 시각을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관심분야는 인문사회관련, 역사관련 책이다. 어째튼, 난 책을 고를 때 미리 생각해 둔 책 1권과 인문사회 관련(역사포함) 1권과 다른 사람이 추천한 1권을 고른다. 이렇게 3권 정도 구입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추천한 1권을 고를 때 신중히 고른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글(서평 혹은 소개)이나 말들은..
 
 
드팀전 2008-04-01 18:08   좋아요 0 | URL
로쟈님 서재가 사진으로 ㅋㅋ

로쟈 2008-04-01 19:31   좋아요 0 | URL
네, 들러리로 들어가 있네요.^^;
 

단테의 <신곡>에 관한 자료를 읽다가 이탈리아의 철학자 '비코'에 관한 얘기가 나오길래 참고할 만한 자료를 검색해봤다. 몇 년 전에 박홍규 교수가 신동아에 연재한 글이 눈에 띄기에 옮겨온다(일독해보기 위해서). 연재물의 타이틀은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로 돼 있지만 곧이어 출간된 <박홍교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우물이있는집, 2003)에는 '사이드와 비코'란 제목으로 실린 글이다. 사이드 입문으로나 비코 입문으로서 유익해 보인다.   

 

신동아 531호(03. 12. 01) 에드워드 사이드에 바치는 弔詞

9 월24일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세상을 떠났다. 필자는 ‘오리엔탈리즘’의 번역자이자 오랫동안 사숙한 제자로서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후 그의 이름이 한국에도 본격 소개되었기에 더욱 그렇다. 이 글은 사이드의 죽음에 바치는 조사(弔詞)다. 사이드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으며, 누군가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당장 ‘오리엔탈리즘’이라 할 만큼 내 인생에 충격을 준 사람이었다.

그런 사이드에게 위대한 스승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18세기의 이탈리아 철학자 비코다. 사이드는 1975년 ‘시작-의도와 방법’이라는 책에서 비코를 언급했고, 1993년 ‘지식인의 표상’에서는 비코를 자신의 영웅이라 불렀다. 이는 사이드가 죽기 직전에 쓴 ‘오리엔탈리즘’ 2003년판 서문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한국에는 사이드와 비코의 관계는 물론, 비코라는 인물이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다.
비코를 이해하려면 벌린(Isaiah Berlin, 1909~97)이 1976년에 쓴 책 ‘비코와 헤르더’(번역 출간)를 참고해야 한다. 벌린에게도 비코는 정신적 스승이었음에 틀림없고, 사이드가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선구자로 비코를 선택한 것처럼, 벌린은 비코를 다원주의의 선구자로 재발견했다. 물론 두 사람의 비코 해석은 약간 다르나 그런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큼 비코는 매력적인 연구대상이다.

물론 비코가 벌린이나 사이드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다. 생전 무명의 학자였고 심지어 많은 오해를 받으며 질병과 빈곤 속에 죽었지만 비코의 사상은 법학, 정치학, 문학, 미학, 민속학, 언어학, 신화학, 역사학, 철학, 수학, 논리학 등 서양의 거의 모든 학문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다만 한국에서 비코의 이름이 생략되었을 뿐이다.

여하튼 벌린이나 사이드만이 아니라 19세기 미슐레나 크로체를 비롯해 후대의 수많은 학자들이 그의 영향을 받았고 비코를 자기식으로 해석했다. 예컨대 미슐레는 그를 낭만주의자로, 크로체는 그를 헤겔주의자로 보았다. 또 자연주의나 역사주의, 심지어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해석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코를 하나의 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적어도 비코는 누구나 사숙하고자 한 거대한 사상의 원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비코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이었다.

잊혀진 그 이름, 비코
잠바티스타 비코(Giambattista Vico)는 1668년 나폴리의 한 서점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1744년 나폴리에서 죽었다. 학교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의 독학을 했다. 그리고 이웃마을에서 가정교사를 한 것 외에는 나폴리를 떠난 적도 없다. 비코의 평생 꿈은 나폴리대 법학교수가 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월급이 그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사학 교수로 42년간 일했다. 명색이 교수였으나 끝내 가난을 면치 못했다. 비코는 어릴 때 낙상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았고 맏아들은 범죄자, 외동딸은 배냇병신일 만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생전에 그를 학자로 인정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당시 사회에서 서민출신인 비코가 교수가 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비코의 시대는 명석한 관념을 중심으로 한 데카르트가 풍미했으나, 비코는 그런 진리가 수학과 자연과학 이외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는 역사를 비롯한 인문과학이란 여행처럼 여흥거리에 불과하며 키케로의 하녀가 갖고 있는 수준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라고 빈정거렸다. 반면 비코는 수학이나 자연과학에서도 진리란 그 발생을 이해해야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기하학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진정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만든다.”

비코는 당대의 주류였던 자연법이론가, 사회계약론자, 공리주의자, 개인주의자, 유물론자, 이성주의자를 모두 부정했다. 즉 그들이 오류에 빠진 것은 체계적으로 변화하며 발전하는 인간적 전망과 동기의 영속성, 그리고 그 전망과 동기가 다시 인간 본성의 변화하는 요구에 의해 지배됨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불변적이고 선험적인 인간 본성의 존재를 인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서구정신을 통째로 부정했다. 이러한 서구정신이 20세기까지 이어져온 것을 생각하면 비코는 여전히 현대 서양문화에 대한 비판가로 생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벌린이 말한 대로 비코는 인류가 이제껏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갈 일련의 발전단계에서 각 단계 나름의 개성과 필연성, 특히 정당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즉 스스로의 내적 성장법칙에 따라 발전하되 외적 요인의 영향을 받아 변하며, 결코 기계적 인과관계에 귀속되지 않는 비물질적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은 자신과 자신이 행하는 일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간격
비코의 사상을 이어받은 벌린은 라트비아 출신으로 영국에 이주한 철학자이자 사상사가였다. 벌린 역시 국내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쓴 마르크스 전기와 비코 및 헤르더에 대한 연구서가 번역돼 있을 뿐이다(*이후에 몇 권의 더 소개되었다). 벌린은 일관된 다원주의 옹호자로 유명하다. 다원주의란 복수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조화될 수 없으며, 서로 대립하는 가치를 취사선택하거나 우선 순위를 매기는 것에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주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제도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 선택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즉 다양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조직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합리주의, 특히 진리일원론-영원불변하는 단 하나의 형이상학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반대한다. 벌린은 여러 가치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며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라 인류 공통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 확인된다는 의미에서 다원주의를 주장했다. 나아가 벌린은 진리일원론에서 비롯된 ‘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도 거부했다. 진리의 발견이 인류가 처한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가치가 조화되는 세계를 만든다고 하는 이상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한 이상은 가치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며 이에 따라 가치의 선택이라는 도덕적 책임을 면제하여 개인의 다양한 삶을 배제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를 반대한다. 상대주의도 합리주의를 반대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가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주의는 판단의 진위를 결정하는 객관을 부정하고, 자신의 전통과 문화에 완전히 구속되어 타인이나 타문화에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다원주의는 상상력에 의해 자신과 자문화의 틀을 넘어 타인과 타문화에 공감하여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이러한 다원주의를 주장한 벌린은 사상의 원류를 비코에서 찾았다. 벌린은 비코의 사상을 다음 7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전통적 사고는 인간 본성을 정태적으로 보지만 사실은 동태적이며 동일성을 유지하는 본질을 갖지 않는다.

둘째, 인간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기에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역사와 같은 인문학은 자기 이해를 추구하나 자연과학은 외부세계에 대한 관찰에 머문다.

넷째, 특정 사회의 행동이나 문화는 포괄적인 패턴에 의한 특징을 갖는다.

다섯째, 법·제도·종교·제식·예술·언어·행동 등 인간의 모든 창조물은 작위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를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형식이며, 그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들의 삶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전통적인 사고에 의하면 신화나 우화, 제식과 유물은 어리석은 원시인의 환상이나 교활한 군주의 기만술로 여겨졌으나 비코는 이를 부정하고 원시인들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이러한 탐구의 열쇠를 제공한다.

여섯째,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원리와 기준이 아니라, 그 탄생의 시공간과 사회발전단계에서 특유하게 사용된 상징들의 목적 및 특수한 용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인식만이 다른 문화의 신비를 풀 수 있다. 여기서 비코는 비교문화사·비교인류학·비교사회학·비교법학·언어학·민족학·종교·문학·예술사·사상사·제도사·문명사 등의 출발점을 제공한다. 사실 오늘의 사회과학은 모두 역사학적 또는 발생론적 관점에서 잉태됐다.

일곱째, 이로써 전통적인 지식에 새로운 범주인 감각지각이 제공하는 ‘경험적 지식’, 그리고 계시에 의해 보증되는 선험적이고 연역적인 지식 외에 ‘재구성적 상상력’이라는 지식범주가 새롭게 등장했다. ‘재구성적 상상력’이란 상상력을 통해 다른 문화의 정신과 전망, 생활방식에 침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지식을 의미한다. 그 상상력이란 사회의 변화와 성장과정을 이와 병행하는 상징의 변화나 발전에 연결함으로써 파악하는 능력이자, 인간의 표현수단인 상징 안에 사회의 자취가 담겨 있다는 견지에서 사회의 발전을 추적하는 능력이다.

비주류의 길 선택한 참된 지식인
벌린은 위 7가지가 모두 사상사의 거대한 진전이고 그 하나로도 철학자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비코가 여러 갈래로 해석됐듯이 벌린은 자신의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비코를 해석했다. 적어도 일곱 번째의 ‘재구성적 상상력’이라고 하는 벌린의 지적이 과연 비코에게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지적은 이미 통설로 자리잡았다. 비코에 대한 벌린의 평가는 사이드가 다문화주의의 입장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쓰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됐다. 사이드는 벌린을 인용하는 데 인색한 편이지만 벌린의 저작을 읽은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잠시 사이드에 대해 살펴보자. 사이드는 1935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났으나 1947년 그 땅에 이스라엘이 건국하자 이집트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 지식인 문제를 다룬 ‘지식인의 표상’에서 사이드는 “망명 지식인은 과거의 환경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하는 중간 상태에 놓여 있으며 한편으로는 향수와 감상에 젖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묘한 모방자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부랑자로 살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여 성공한 ‘교묘한 모방자’는 사이드가 말하는 참된 지식인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인은 부랑자이며 주류에서 벗어나 저항자로 살아가는 지식인이다.

이처럼 비주류 부랑적 지식인은 망명 지식인만이 아니라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사이드가 비코를 스승으로 모신 이유는 비코가 바로 그런 지식인의 전형이었기 때문이다. 망명은커녕 평생을 나폴리에서 산 비코는 자신이 살았던 18세기 이탈리아 사회에서 고독한 한계인이었다. 한계인이었기에 비코는 당대 주류의 믿음이었던 신의 창조와 절대를 믿지 않았으며, 인간의 행위와 선택은 때와 곳에 따라 변경 가능한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식인의 위대한 원형은 18세기 이탈리아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다. 그는 나의 오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비코의 위대한 발견은 나폴리의 무명교수, 생활의 빈곤, 교회와 주위의 알력으로 인한 고독으로부터 생겨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위대한 발견에 의하면 사회현실의 올바른 이해방식은 기원의 지점에서 생긴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 기원을 탐색해 보면 지극히 초라한 상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위대한 저서 ‘새로운 학문’에서 비코는 이를 마치 성인 인간이 말도 못하는 아기로부터 진화했다고 보듯이, 사물을 특정한 시점에서 진화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뜻한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세속적인 세계에 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관점이라고 비코는 역설한다. 이 세계는 그 자체의 법칙과 과정을 갖는 역사적 세계이지 신에 의해 정해진 세계가 아니라는 점을 비코는 되풀이한다. 이렇게 보는 것은 인간사회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념(留念)한다는 것이다. 가장 막강한 권력을 그 시작으로 되돌려놓고, 나아가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대단한 인물이나 거창한 제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권력자나 제도가 자주 침묵과 복종을 강제할 수 있는 대상은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대한 권력을 언제나 숭고하게 바라보며(그래서 숭배한다) 초라한 ‘인간적’ 시작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망명 지식인은 필연적으로 해학적이고 회의적이며 유희적이다. 비록 냉소적이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실 사이드의 해석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사이드가 그런 해석을 한 상황은 새롭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부딪히는 두 가지 권력의 유혹을 경계했다. 하나는 그 자신의 출생, 국적, 직업 등에 의해 구속되는 문화다. 또 하나는 사회적·정치적 확신, 경제적·역사적 환경, 자발적인 노력과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결단으로 획득하는 체계다. 사이드는 비코 역시 문화와 체계의 양면에서 그 시대가 강요하는 바를 알았고, 따라서 평생 그런 압력에 저항하며 살았다. 비코는 사이드가 말하는 참된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새로운 학문의 시작
1744년에 쓰여진 비코의 ‘새로운 학문’은 1997년에야 우리말로 번역됐다. 무려 253년이 지난 후였다. 그나마 이탈리아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를 중역한 것이니 앞으로 책임 있는 원어번역이 요망된다. 여하튼 현재의 번역본도 582쪽에 이르는 대작인 만큼 읽기가 만만치 않다. 그 책의 논증을 구성하는 요소인 공리가 114개나 된다. 이는 제1권 ‘원리의 확립’ 중 제2부 ‘원칙’에서 열거된다.

여기서 그 모두를 검토할 수 없으니 일단 사이드의 독해를 따라가 보자. 사이드는 114개 중 가장 중심적인 공리로 106번을 든다. “학설은 그것이 취급하는 소재가 시작되는 곳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내용이다. 우리말 번역본은 ‘시작되는 곳으로부터’를 ‘시작되었을 때’라고 번역했으나 의문이다. 위 공리는 사이드가 1975년에 낸 ‘시작-의도와 방법’ 서두에 인용되었다. 사이드는 비코를 ‘시작(beginning)에 관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했다. 시작이란 그만큼 비코나 사이드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이드가 비코를 ‘시작에 관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한 것은 비코가 시작이라고 하는 문제를 최초로 성찰한 철학자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인간-야만인이거나 성찰적인 철학자거나 간에-실제로 최초의 사람일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각자 시작을 만들고 나아가 각자 언제나 최초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했다는 의미에서다. 이러한 시작을 비코는 이교성(異敎性)이라고 부른다. 비코는 이 공리를 “여러 국민의 공통된 자연본성에 대한 새로운 학문의 공리로 삼기 위해 서술한다”고 밝혔다.

한편 공리 24에서 비코는 고대세계가 히브리인과 이교도로 양분된 점에 대해 진실한 신에 의해 창건된 히브리 종교에서는 신점(神占)이 금지된 반면, 이교도의 경우에는 신점이 문명화와 국가생활의 길에 들어서는 토대를 형성했다며 그 차이를 지적했다. 이 두 가지 비코의 공리를 두고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먼저 공리 106에서 비코는 인간의 지성이 감각 및 상상력 그리고 오성적 판단력 사이에서 상반된 관계를 형성하면서 단계적으로 발전했다는 이해의 패러독스를 깨달았고, 동시에 그 패러독스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현대인이 인류의 ‘시작’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어 인류의 ‘시작’이란 단지 현대 문명시대에 사는 철학자의 경우만이 아니라 원시 미개인-비코는 그들을 ‘최초의 인간’이라고 불렀다-에게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최초의 인간’에게는 바로 ‘이교도라는 것’의 가능성, 즉 히브리의 신적 ‘시원(origin)’으로부터 단절된 곳에서 스스로 ‘시작’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통찰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여기서 사이드는 멈췄으나 우리는 비코의 본령이 법학이었음을, 특히 그가 당대까지의 주류 법학이었던 자연법론을 비판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연법론이 인간 본성의 불변성과 보편성을 가정했다고 비판하고 “본성은 발생이다”라고 주장한다. 비코에 의하면 본성의 참된 법칙은 철학자들이 말하는 자연법도, 일련의 보편적 규칙도 아니다. 참된 법이란 특정한 사회환경에서 새로운 생활방식의 표현으로 발생하는 것일 뿐이고 ‘여러 민족의 자연법’뿐이라고 보았다.

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인간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비코가 민족과 학자의 자만심에 대해 언급한 것을 지적하고 그것이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비코는 “인간은 멀고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어떤 관념도 가질 수 없는 사물에 관해서 눈앞에 있는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판단을 내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정신이 갖는 하나의 특질”이라고 하는 2번 공리로부터 민족과 학자의 자만심을 도출했다. 곧 민족과 학자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최고 최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비코는 고대세계를 히브리인 세계와 이교도 세계로 구분하고, 히브리 세계에서는 신점(神占)이 금지되었으나 이교도 세계에서는 신점이 문명화와 국가생활의 기초였다고 공리 24에서 밝혔고, 따라서 원시인이 그 이교도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기독교의 ‘기원(origin)’과 다른 ‘시작(beginning)’을 역사 발생적으로 끝없이 새롭게 만들어낼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식했다. 이러한 ‘시작’의 이교도성은 기독교라고 하는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해준다는 점에 사이드는 주목한다.

여기서 잠시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학문’ 결론 부분을 보자. 비코는 인간이 여러 국민의 세계를 만들어왔으나, 그것은 인간이 설정한 의도와 다르거나 모순된 ‘뛰어난 지성’에 의해 생겨났고, 그 지성은 인간이 설정한 한정된 목적을 더욱 넓히고 지상에서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고 했다. 이어 비코는 야만적인 욕정을 채우는 것밖에 몰랐던 원시인이 정숙한 결혼생활을 하고 가족제도가 생긴 것을 위시해 도시의 발생, 민주적 자유의 발생 등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지성의 덕분이지 운명은 아니며, 인간의 선택이지 우연은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비코의 주장은 종래 ‘신의 섭리’를 찬양한 것으로 이해되어왔으나 사이드는 이를 부정하고, 도리어 비코는 인간의 ‘시작’을 신의 질서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보았다고 독해했다.

추상어와 구체어의 공존

비코는 제2권 ‘시적 지혜’ 중 제2부 ‘시적 논리학’에서 로마법의 노멘(nomen)이란 ‘법’을 말하고 그것과 발음이 유사한 그리스어의 노모스(nomos)도 법을 말하는데, 그 말에서 ‘화폐’를 뜻하는 노미스마(nomisma)가 나오고, 라틴어의 화폐를 뜻하는 눔무스(nummus)가 나온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불어에서는 법을 뜻하는 단어가 루아(loi)이고 화폐를 나타내는 것이 아루아(aloi)다. 그리고 중세의 교회법을 뜻하는 카논(canon)은 동시에 지대(地代)를 뜻했다.

이러한 비코의 설명은 지금까지 언어의 계보성을 밝힌 것으로 이해됐으나, 사이드는 비코가 법을 뜻하는 여러 말이 동시에 화폐라는 뜻이기도 하다는 ‘인접한 복수의 관계’를 통해 하나의 체계를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언어에서 추상어와 구체어의 직접적인 공존은 계보적인 계기성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 상호간의 체계적인 인접성에 근거해 실현된다고 본 것은 비코에 대한 사이드의 새롭고도 대담한 해석이라 하겠다.

나아가 사이드는 비코가 1709년에 쓴 최초의 저서 ‘우리 시대의 학문 방법에 대하여’를 비롯해 여러 저작에서 그러한 인접성, 상보성, 병행성, 상관성을 밝혔다고 말한다. 원래 비코는 ‘여러 국민의 공통된 자연본성에 대한 새로운 학문’, 즉 여러 국민에 공통된 법을 추구하면서 나아가 하나의 공통된 시작을 발견하고자 계보학적인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상관성, 상보성, 인접성의 증거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표상’ 머리말에서도 사이드는 비코의 ‘상관성’을 언급했다.



“내 책에서 싸우고자 한 상대는 ‘동양’이니 ‘서양’이니 하는 허구의 구조다. 종속 인종, 동양인, 아리아인, 니그로 등의 인종차별주의적 본질은 말할 것도 없이 그렇다. 나는 과거 식민주의의 폭정을 거듭 당한 나라들에서는 원초의 순수 상태가 서양인에 의해 침해되었다는 의식을 조장하기는커녕, 다음 사실을 반복하여 강조했다. 즉 그런 신화적 추상개념은 허위이고, 그것과 같이 과거의 식민지국이 서구를 비난하는 다양한 수사도 허위라는 것이다. 문화는 너무나도 혼합적이고 그 내용도 역사도 서로 의존하며 잡종적인 것이므로 외과수술을 하듯이 크게 잘라 동양이나 서양이라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으로 나눌 수 없다.”

이러한 사이드의 해석에 대해 논리의 비약이라든가 너무 대담하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비코에 대한 가장 뛰어난 연구로 평가되는 크로체의 ‘잠바티스타 비코’(1911) 이래 60여 년 동안 나온 비코 해석 중 가장 새로운 것만은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러한 비코의 새로운 해석에 의해 사이드가 텍스트와 현실세계 사이에 서로 통할 수 없는 벽이 있다고 본 문학비평에 반대하여 “텍스트는 그 자체가 이미 세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관점에서 텍스트와 현실세계를 연결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즉 사이드가 말하는 현실세계가 바로 비코가 말한 ‘여러 국민의 세계’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적 기원으로부터 단절되고 성스러운 질서에서 벗어난 ‘이교도적인’ ‘여러 국민의 세계’였다.

아이덴티티, 부정, 폭력
사이드는 비코를 비중 있는 사회철학자로 보았다. 그는 ‘아이덴티티, 부정, 폭력’(뉴레프트 리뷰 1988년 9~10월호)이라는 글에서 비코가 ‘새로운 학문’ 제2권 제2부 ‘시적 형이상학’에서 아우토리타스(autoritas, 권위 또는 자기소유권)에 대해 설명한 문장을 예로 든다. 비코는 아우토리타스가 신에서 비롯되며 신은 거인들이 야수적 습관을 버리고 동굴 안에 몸을 숨겨 오랫동안 참고 견디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는데, 사이드는 이를 현대국가의 아이덴티티 형성과 테러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핵심을 보여준다고 독해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가 설정한 제한을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처벌을 받고 영원히 갇히는 존재가 되었으며 독수리에 의해 심장을 쪼인다. 그러나 대부분 길들여진 인간은 제우스가 제공한 장소를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최초의 인간들은 동굴에서 살다 나중에는 집을 짓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방랑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제우스의 테러는 인간의 테러를 중단시키고 그것을 사회적인, 나아가 국가적인 틀 속에 고정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비코가 제우스의 영웅적이고 일탈적인 테러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다. 비코에 따르면 권위를 휘두르고 처벌하는 제우스의 압도적인 재능이야말로 근대국가가 행사하는 강제력의 독점을 예상케 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한 여러 저서에서 근대국가가 강제력을 독점하고 그 권력을 제국주의에 의해 범세계적 식민지 침략으로 확대하면서 동양에 대한 침략과 동시에 학문과 예술의 차원에서도 침략을 합리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을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사이드는 인간의 비참과 억압에 대한 진실의 기준이 개별 지식인의 정당 친화성, 민족적 배경, 그리고 근원적인 충성에서도 지켜져야 한다고 말한다. 사이드가 말하는 인간의 비참과 억압에 대한 진실의 기준이란 여러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나 가령 국제적 인권 기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사이드가 말하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보편성이란 문화적 배경, 언어, 국적 등이 제공하는 안이한 확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위험을 감내하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그것은 대외정책이나 사회정책과 같은 문제에 직면하여 인간 행동의 단일한 표준을 찾고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인이여, 국가와 전통을 던져라
사이드는 나아가 지식인이 국가와 전통을 떠나서 활동하고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지식인은 국가와 전통에 대해 책임진다고 생각해온 것에 대한 비판이다. 즉 사이드는 이러한 집단적 사고가 지식인이 의문을 제기하고 회의를 품지 못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사이드에 따르면 지식인은 국가나 전통이 자연과 신에 의해 부여된 실체가 아니라, 구조화되고 만들어지며 어떤 경우에는 이면의 투쟁과 정복의 역사를 통한 창조물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바로 비코의 역사관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사이드는 그런 지식인으로서 촘스키와 비달, 울프를 예로 든다.

여기서 지식인이 선택해야 할 것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승리자나 지배자에게 편리한 안정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안정상태를 거부하고 잊혀진 여러 목소리나 잊혀진 인간의 기억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사이드가 말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후자이나 문제는 현실에서 다수의 지식인이 전자라는 점이다.

지식인은 언제나 충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특히 지식인은 자국민이 위협을 받으면 당연히 방어적인 민족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프란츠 파농의 경우에서 보듯 지배자를 교체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영혼의 창조가 문제된다. 타고르도 죽을 때까지 민족주의자였으나 민족주의 때문에 비판을 누그러뜨리지는 않았다.

사이드는 지식인이 자신이 속한 인민의 집단적 고난을 대변하고, 그 고난을 증언하며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시련의 상처를 끝없이 환기하고, 기억을 갱신하는 엄청나게 중요한 책무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에 더하여 피카소나 네루다의 작품에서처럼 지식인만이 충족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었다. 즉 사이드는 지식인이 위기를 보편적인 것으로 보고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이 겪는 고난을 인류 전체와 관련지으며, 그 고난을 다른 고난의 경험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했다.

사이드는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의 보상을 받는 전문가는 비판적이고 왕성한 독립정신으로 분석과 판단을 내려야 하는 지식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지식인이 독립성을 유지하려면 비전문가가 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도 했다. 그것은 지식인의 글이 불특정 다수의 수용자에게 읽히고 예측할 수 없는 반응에 노출되는 불확실성을 기꺼이 선택한다는 의미다. 사이드 스스로도 전문영역을 이유로 결코 공공정책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그는 또 지식인들이 흔히 자국문화 중심주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했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 토크빌은 미국의 인디언과 흑인노예 학대를 비판했지만 자국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정책에 대해서는 이슬람이 열등한 종교이므로 통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지식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신의 정체성, 문화와 사회 및 역사의 실재를 어떻게 다른 정체성과 문화 및 인민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의 영광이나 ‘우리’ 역사의 승리에 대한 과대선전은 지식인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이드는 최근 이슬람을 둘러싼 미국 지식인의 애국주의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비판했다.

나아가 사이드는 지식인이 극도로 편향된 권력에 아첨하여 타락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권력에 대해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원칙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식인은 최소한 국제사회가 용인하는 행동 기준과 규범을 따라야 한다. 그 중요한 보기가 1948년 세계인권선언을 비롯한 여러 국제인권규범들이다. 우리 사회와 같이 관리된 대중사회에서 진실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련의 도덕적 원칙들-평화, 화해, 고통의 경감-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상을 실현함에 있어 가장 비난받아야 할 것은 지식인의 회피다.(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08. 04.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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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4-01 22:44   좋아요 0 | URL
실로 오랜만에 비코의 이름을 읽게 되니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 '불끈'합니다.^^ 벌린의 <비코와 헤르더>는 개인적으로 참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오고 있는데, 예전에 출간되었던 대우학술총서 판본은 아마 이제는 절판이겠죠... 그러고 보니 중역본이긴 했어도 비코의 <새로운 학문> 번역본은 그 자체로 '희소가치'가 있었는데, 박홍규 선생의 말마따나 어서 새롭게 번역되었으면 하는 마음 저 역시나 품어봅니다.

로쟈 2008-04-01 23:10   좋아요 0 | URL
지난 학기에 <비코와 헤르더>를 대출했다가 읽는 시늉만 하고 반납한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땐 '헤르더' 때문이었는데, '비코'를 핑계로 언제 다시 대출해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06 23:48   좋아요 0 | URL
p.헤밀톤 저 사회구조와 사회의식 제 1장에서 비코를 다루었는데 지식사회학의 선구자로 보았네요.딜타이의 verstehen과의 유사성도 언급했구요.몽테스키외를 프랑스의 비코라고 했는데...재밌네요.
10여년전 오리엔탈리즘을 읽다가 이런 책을 법대교수가 번역하다니...수험법학에 몰두하는 학생들은 이런 교수 싫어하겠군...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그후로도 박홍규 씨는 실용법학과는 담을 쌓고 진짜?인문과학 서적을 직접 쓰기 시작하더군요.어쩐지 법대 교수라기보다는 성공회 대학이나 한신대의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

로쟈 2008-04-07 00:28   좋아요 0 | URL
강의도 인문교양쪽을 하시는 걸로 압니다. 전공은 노동법쪽이신 걸로 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