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기일이라 한다. 1980년 4월 15일 몰. 언젠가 적어놓은 적이 있는데, 어린시절 내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죽음은 한 권력자와 한 철학자의 죽음이었다. 권력자는 1979년 10월 26일에 암살당했고 철학자는 그 이듬해 봄에 죽었다(곧이어 벌어진 5월의 학살은 언론 통제 탓에 당시로선 실상을 알 수 없었다). 기억에 모두 신문의 한면을 크게 장식한 죽음이었다. 아래 기사를 접하니 문득 그때 생각이 잠시 난다. 사진과 함께 부고 기사를 싣고 있던 신문지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연초에 새 번역본이 나왔다. 책에 대해서는 여러 장소에서 '강의'를 했던 기억도 떠오른다(지난주에도 강의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었다!). 다시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 봄밤인 탓이겠다...

한국일보(08. 04. 15) [오늘의 책<4월 15일>]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1980년 4월 15일 사르트르가 75세로 사망했다. 문학비평가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가 곧잘 인용하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있다. “비평가는 묘지기”라는 것이다. “… 묘지가 평화로운지 어떤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서재보다 더 기분 좋은 곳은 없다. 서재 속에는 죽은 사람들이 있다. 그 죽은 사람들은 밤낮 쓰기만 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납골당의 항아리 같이 벽을 따라 판자 위에 늘어놓은 조그만 관밖에는 없다.”(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평가는 묘지(서재)에서 죽은 사람(저자)들의 관(책)을 더듬으며(독서), 거기에 숨결을 불어넣는(비평) 시체지기에 다름아니라는 비유다. 얼마 전 김 교수를 만났을 때는,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20세기는 사르트르의 세기’가 아니라, ‘사르트르가 곧 20세기’였다는 거야.”

그 말대로 사르트르는 ‘그 자신 안에 20세기가 다 들어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묘지기이자, 거리에서 앙가주망을 실천한 행동가였으며,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 가장 떠들썩한 화제를 만든 지적인 스캔들 메이커였고, 노벨문학상을 부르주아의 상이라며 거절한 악동이기도 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지옥, 그것은 곧 타인”이라는 그의 명제들을 빼고 20세기 후반 인류의 정신사조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한국에서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1950년대 이후 문학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논증한 그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1980년대까지 대학가의 필독서였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29일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한 강연을 담은 책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강연문이라는 특성상 이 자그마한 책은 그의 여느 글보다 더 명료하게 실존주의를 집약하고 있다.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받았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은 그 어떤 뒷받침도, 그 어떤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발명하도록 선고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가 폭포수 같이 내뿜는 언어의 성찬이다.(하종오기자)

08. 04. 15.

P.S. 사르트르에 관해 예전에 쓴 페이퍼로는 '사르트르의 죽음과 철학'(http://blog.aladin.co.kr/mramor/77630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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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16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은 로쟈님의 서재를 열면서 새로운 페이퍼가 없다면 정체도 흔적도 없는 것같은 이 무기력을 추스릴 데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그래서 오늘 로쟈님의 페이퍼는 문자적인 정보와 앎을 넘어서 정말 실존적인 힘이 됩니다. 누군가의 봄밤 탓이 누군가에겐 힘이 되는 이런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들이 깃털처럼 가볍기 일쑤지만 묵묵한 한 걸음들의 가치들이 절감됩니다.

로쟈 2008-04-16 23:29   좋아요 0 | URL
봄에는 꽃들이 더 힘이 되어야 할 거 같은데요.^^;

수유 2008-04-16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묘지가 아름다워서... 저 군중들이 부러워서 가져갑니다.
봄밤엔 베토벤을 들으세요...책 읽으면서 ..
올 봄은 지 혼자서 피네요.ㅠㅠ

로쟈 2008-04-16 23:30   좋아요 0 | URL
단지 앞 목련은 벌써 다 졌습니다.^^;
 

엊저녁 읽은 아침신문 기사에서 눈길을 끈 것은 루시안 프로이드의 작품 경매 소식이다.  생존작가의 그림들 중 최고가를 경신할 거라는데, 내가 놀란 건 그림값이 아니라 프로이드가 아직 생존작가라는 사실. '루시안 프로이트의 리얼리즘'이란 페이퍼를 예전에 쓴 적이 있는데, 나는 그때 이미 "오랜만에 프로이트의 그림들을 찾아보면서 두번 놀랐다. 우선 1922년생인 그가 아직 '생존화가'라는 점. 그리고 국내에 그의 화집이 아직 한권도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라고 적어놓고 이번에 다시 놀란 것이니 그가 '생존화가'란 사실이 제대로 '입력'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하튼 그의 그림들은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4. 14) 프로이드의 누드화, 생존화가 작품 최고가 낙찰 '눈앞'

독일 태생의 영국 화가 루시안 프로이드(85)가 그린 누드화가 생존작가 작품 가운데 사상 최고 경매가로 팔릴 것으로 예상돼 전세계 미술계를 벌써부터 흥분시키고 있다. 화제의 그림은 내달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부쳐지는 프로이드의 실물크기 나부상 <베너피츠 슈퍼바이저 슬리핑: Benefits Supervisor Sleeping>으로 지난 1995년 완성됐다.

AFP통신은 13일 미술 전문가를 인용해 프로이드의 이번 작품이 2,500만달러에서 최대 3,500만달러(약 350억원)에 낙찰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는 지난해 제프 쿤의 조각 <행잉 하트: Hanging Heart>가 기록한 역대 경매 최고가 2,360만달러를 능가하는 액수이다. 현존하는 작가의 미술작품 중 경매와 개인거래를 포함해 역대 최고가는 재스퍼 존스의 그림이 기록한 8,000만달러이다.

나부상의 모델을 섰던 수 틸리라는 여성은 B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프로이드의 그림을 위해 옷을 벗은 채 포즈를 취하고 하루 20파운드(약 4만원)의 개런티를 받았다고 밝혔다. 틸리는 모델료는 적었으나 프로이드 같은 대가에게 '창조의 원천'이 됐다는 데 자부심과 희열을 느낀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빅 수(Big Sue)'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넉넉한 몸매를 가진 틸리를 화폭에 담은 누드화는 12일자 권위 있는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틸리는 이에 대해 자신이 파이낸셜 타임스의 머릿면을 장식한 최초의 '핀업 걸'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감격해 했다. 그는 신문에 게재되기 이틀 전에 통보를 받았다며 “생각지도 않은 상황에 내 자신도 놀라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이드는 지금은 런던 직업소개소 책임자인 틸리를 호주 출신 화가 리 바우러의 소개로 알게 됐으며 지난 90년대 초 4년 동안 서로 수시로 만나 점심식사를 같이한 뒤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작품은 완성된 뒤 개인 소장가에게 넘어갔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과의사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친손자인 프로이드는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치스가 대두한 33년 11살 때 부모와 함께 영국으로 이주해 6년 후 국적까지 취득했다. 그는 센트럴 미술학교 등에서 그림 수업을 하고 44년 처음 개인전을 열고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초기 작품은 초현실주의 색채를 띠었으나 50년부터는 가벼운 터치의 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누드화와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등장 모델은 주변의 가족과 친구, 동료화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2005년 세계적인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누드 초상화가 390만파운드(약 75억원)에 팔렸고 작년 6월에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친구 브루스 버나드를 그린 92년작 초상화가 786만파운드에 낙찰돼 주목을 샀다.(한성숙 기자)

08. 04. 15.

P.S. 예전에 'Lucian Freud'를 '루시안 프로이트'라고 적었는데, 우리말 표기는 '루시안 프로이드'인 모양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고 독일계이긴 하지만 영국인이기 때문에 'Freud'를 그냥 '프로이드'라고 읽는 것. 하여간에 외국어 표기 규칙이란 게 복잡하고도 오묘하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규칙도 허다하고. 그런데 이 '가장 비싼 화가'의 화집은 왜 한권도 나오지 않는 걸까? 이마저 너무 비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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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8-04-1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사람들이 필요 이상 '무난한' 그림들, 즉 교과서에서나 볼 법한 그림들을 편애하는 것도 이유가 될 듯합니다. 이 사람뿐 아니라 다른 '당대' 거장들의 화집도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니,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화집조차 전시회 도록 말고는 없네요.

로쟈 2008-04-15 21:41   좋아요 0 | URL
전문 출판사들이 있는데 화집이 나오지 않는 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소경 2008-04-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육중하네요. 예전에 본 한 여인의 사진이 연상되네요.그 여인도 한껏 흘러내리셨는데..

로쟈 2008-04-16 23:31   좋아요 0 | URL
네, 볼륨이 상당하죠? 그림도 꽤 무거울 거 같습니다...
 

<프라하의 소녀시대>(마음산책, 2006)의 저자 요네하라 마리의 소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2003)이 근간될 예정이다. 러시아어 고유명사의 교정 일 때문에 원고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가령 '올리가 몰리소브나'를 '올가 모리소브나'로 고치는 일이 그 '교정'이다), 부록으로 실린 대담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어서 미리 옮겨놓는다.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대담자인 이케자와 나츠키는 <이라크의 작은 다리를 건너서>(달궁, 2003)의 저자다.   

■ 사회주의는 인간을 상품화하지 않는다

이케자와 ‘사회주의’라는 말은 이제 시들해진 것 같습니다. 돌아보면 역시 저는 젊었을 때 사회주의를 믿었고 이상주의의 깃발로서 사회주의는 분명이 있었어요. 이 책에서는 그것을 단점도 포함해서 자세히 쓰고 있어요. 예를 들면, 알제리에서 온 아이가 자신의 나라가 해방되어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되어 돌아가잖아요. 식민지로부터의 탈피라든가, ‘자유’와 ‘해방’이라는 말이 이렇게 빛을 내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요네하라 최근 이라크의 전쟁 상황이 좋지 않고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이 많아진 미국의 백악관에서 그 옛날, 프랑스에서 상영금지가 되었던 <알제리 전투>가 상영되었다고 하는데, 그 <알제리 전투> 영화를 보면 언제나 알제리의 알렉스를 떠올립니다. 영화 마지막에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획득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때 프라하의 학교에서 기뻐했던 일이 떠올라요. 베네수엘라의 게릴라의 아들은 부모님과 귀국한 뒤 바로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소리 내어 울었어요. 소련이라는 나라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요. 하지만 지금과 같은 미국의 일원적 지배가 아니라 그것에 대항하는 존재가 있음으로써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국가나 지역, 운동체가 아주 활발하게 활동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국이 이상한 짓을 하면 소련이 뭐라고 하고, 소련이 이상한 짓을 하면 미국이 뭐라고 하는 냉전시대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주 좋은 면도 있던 것 같습니다.

이케자와 적어도 자본주의적인,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하는 것을 체크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구조라는 것은 기능하고 있던 거죠. 점점 무너졌지만요.

요네하라 그리고 예를 들면, 발레같은 예술이 서방으로 가면 상품이 되어버리죠. 상품이 되어 교태를 부리며 망가져 가요. 소련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그리고 재능에 대한 오해와 질투가 거의 없었어요. 세계 최고의 첼로 연주가라는 로스트로포비치의 통역을 한 적이 수차례 있는데, 그가 망명한지 16년이 되었을 때, 죽어도 좋으니까 러시아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고는 콘서트가 끝난 뒤 보드카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우는 겁니다. 러시아에 있는 동안은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모두가 좋아하고 지지해줬는데, 서방으로 온 순간, 엄청난 방해와 질투가 있고, 자신은 이러한 세상을 몰랐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재능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늘이 준 것이죠. 모스크바 국립음악원에 들어가서 자신은 별로 연습하지 않는데도 아주 잘 켜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데도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거라면 그것은 자신의 것이지만 이것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기에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런 생각인 거죠.

이케자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나요?

요네하라 모두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프라하의 학창시절을 떠올렸는데, 노래나 그림이 뛰어난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들이 당신들 일인 양 호들갑스럽게 기뻐하고 학생들도 그 아이와 똑같은 교실에서 똑같은 공기로 숨을 쉬는 것만으로 아주 행복해지거든요.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아주 기뻐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런 느낌이 일본으로 돌아온 순간 없어졌어요. 종이에 써진 시험지로 모두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잖아요. 객관식이나 ○×로, 누가 대답을 해도 똑같은 답이 되요. 자신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밖에 없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자각을 갖지 않도록, 절대 갖지 않도록 일본의 교육은 만들어져 있어요.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이 모두 다르니까 그것을 발견해주는 것은 선생님과 반 학생들의 역할이죠.

이케자와 하긴 그것이 이 나라의 답답한 점이죠. 경쟁사회가 지닌, 사람이 자로 측정된다는 전제의 답답함. 모두 숫자로 바뀌어 버리죠….

요네하라 사람을 상품으로 생각하지 않는 점이 사회주의의 좋은 점 같습니다.

갑자기 왜 이 대목이 생각이 났나 짚어보니 아침에 읽은 서경식 교수의 칼럼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눈'에 연재된 '인간의 ‘기계화’에 저항하기 위하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1276.html)에서 필자는 <교양, 모든 것의 시작>(노마드북스, 2007)의 서문을 한번 더 떠올리고 있는데, 아래의 대목이다.

“… ‘기계화’ ‘야만화’의 추진력은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적인 경쟁원리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에서는 학력이 살아남기와 사회적 상승의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 경향에 작금의 신자유주의적인 조류가 박차를 가하고 있다. 모든 업적을 수치화하고 단기간에 평가하며, 그것으로 불합격 낙인이 찍힌 사람은 무자비하게 낙오당한다.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원칙이다. 이것은 일본 사회만의 현상이 아니라 아마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한국의 독자에게 읽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인간을 ‘기계화’하고 ‘야만화’하는 추세에 대한 저항을 꾀하는 것이므로. … 한국 국민은 어떨까? 한국에서는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시민혁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일본과는 다르다고 나의 한국 지인들은 말한다. 그러기를 바라지만 과연 안심해도 괜찮을까? 한국에서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한 인간의 ‘기계화’ ‘야만화’로 발밑의 대지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는 게 아닐까.”

요네하라 여사의 발언에서 가장 인상깊은 대목은 "기계도 채점할 수 있는 시험을 보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알다시피 지난달에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전국단위 일제고사가 치러졌는데, 그 또한 기계로 채점하는 시험이었을 것이다. 이미 OMR 카드 등을 이용한 시험에 익숙해져 있어서 나부터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게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은 일이다! 편의상으로나 여러 가지 사정상 그게 불가피하다 치더라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마저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교양 없는' 일인가. 아이의 시험성적에 일희일비하는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무엇이 진짜 교육인가에 대해서...

08. 04. 13.

P.S. 책은 <올가의 반어법>(마음산책, 2008)이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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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13 22:20   좋아요 0 | URL
서경식 씨가 얼마 전 한국은 이제 민주화 경력이 창피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며 개탄하던데...참..착잡하더군요.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대단한 책'은 정말 대단하던데요.역시 동유럽이나 구 소련 권에 대한 책들에 대한 좋은 정보가 많아서 좋더라구요.로스트로포비치의 회고는 경청할 만하네요.대체로 망명한 공산권 예술가나 지식인... 하면 뭔가 공산권을 비난할 건수가 없나 하고 그런 식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데...로자 님이 요네하라 여사의 책의 교정을 보게 되었군요.그런데 이 분은 좀 일찍 저 세상에 가셨더군요.아직 한참 일할 나이인데...

로쟈 2008-04-13 22:27   좋아요 0 | URL
네, 그게 좀 애석한 일입니다...

사량 2008-04-15 12:59   좋아요 0 | URL
'집값'과 '자녀의 학벌'에 미쳐 있는 이 나라 "대다수 학부모들이 한번쯤 생각해볼"지 의심스럽습니다. -_-;

로쟈 2008-04-15 21:42   좋아요 0 | URL
자녀들을 정말 사랑한다면 생각해봐야 하는 문제죠...
 

'오래된 새책'이란 카테고리는 재출간된 책들을 위한 것인데, 요즘 부쩍 이에 해당하는 책이 많아졌다. 묻혀 있던 양서들이 다시 빛을 보거나 부실한 모양새로 출간되었던 책이 새롭게 개정되어 나오는 건 언제라도 환영이다. 다만 재출간이 무슨 '원죄'라도 되는 듯이 '몰래' 출간된다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독자에게 당연히 제시되어야 할 '정보'가 누락되는 것이기에 그렇다(보통 제목은 바뀐다. 그리고 별로 오래전 책이 아니어도 값은 뛴다). 그걸 꼬집는 기사를 옮겨놓는다(물론 기사에서 언급되고 있는 책들은 '재발견'의 긍정적인 사례들이다).

경향신문(08. 04. 12) [책동네 산책]재출간 떳떳이 밝히고 재평가 당당히 받아라

전화상의 그이는 자신있게 설명했다. 한 분야만을 파고든 저자의 열정을 얘기했고, 책이 다루는 주제의 참신함을 말했다.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내용의 흥미로움도 강조했다. 그런데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기자,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책 예전에 나왔던 거 아닌가요?” “아, 예, 사실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신간이 오면 책의 맨 앞장이나 뒷장, 심지어 책날개까지 유심히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보도자료를 훑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기도 한다. ‘재출간’되는 책들이 많아졌지만 그같은 사실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의도’가 느껴질 만큼 ‘교묘한 곳’에 슬며시 밝히거나 아예 밝히지 않는 경우도 많다.



재출간은 출판계의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일반적인 풍토로 자리잡은 느낌이다. “옛날 책을 잘 찾아라”는 말은 출판계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돼온 기획 원칙이다. 지난 달 경향신문을 통해서도 소개된 ‘승자독식사회’(웅진지식하우스)도 1997년 ‘이기는 자가 전부 가지는 사회’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책이다.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버트 프랭크가 ‘이코노믹 씽킹’ 등을 통해 유명세를 탄 데다, 책의 내용이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 더 맞는다는 생각에 재출간했다는 게 출판사 측의 설명이다. 이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1만부 가까이 팔리면서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처럼 절판된 책도 잘만 고르면 웬만한 신간보다 나은 경우가 심심찮다. 해서 소규모 출판사들이 ‘틈새 전략’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구간은 저작권료가 싸다. 눈만 밝으면 좋은 책을 싼 값에 낼 수 있다는 소리다. 지난해 황소자리에서 출간한 ‘욕망하는 식물’은 2002년 ‘욕망의 식물학’으로 소개됐던 것을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이 출판사의 첫 책인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도 다시 낸 책이다.

재출간은 여러 이유로 아깝게 묻혔던 책을 ‘재발견’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래서 ‘리메이크’니 ‘리바이벌’이니 하면서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겉만 화려하게 바꿔 내놓고 그같은 말을 쓰는 건 쑥스러운 일이다. “재출간이 콘텐츠에 공을 들이는 대신 이미 검증된 책을 시기에 맞게 적당히 포장하는 식으로만 가고 있다”는 한 출판인의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책만 좋으면 됐지 그게 대수냐고 할지 모르겠다. 앞서 말한 기자의 ‘버릇’으로 돌아가보자. 그것이 ‘재출간된 책은 소개하지 않는다’라는 대단한 원칙 때문에 생긴 건 아니다. 출판사에 ‘낚였다’는 느낌도 부차적인 문제다. 적어도 책에 대한 기본 정보는 독자들에게 정확히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단 한 명의 독자라도 이중으로 책을 살 수도 있으니까.

아니, 그런 노파심까지 필요없다. 출판사가 재출간 사실을 밝히는 건 독자에 대한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출판사가 어떤 부분에 공을 들여 ‘재출간’했는지를 당당히 밝히고 ‘품질’로 승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재출간된 책도 제대로 평가받는 풍토가 정착될 것이기에.(김진우기자)

08. 04. 12.

P.S. 독자가 '이중'으로 책을 살 우려는 '중복출판'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루소의 <에밀> 같은 고전이야 같은 출판사에서 <에밀>(한길사, 2003), <에밀 또는 교육론>(한길사, 2007)이라고 중복 출판되어도 역자가 다르고 또 '고전'이기 때문에 독자가 취향에 따라 읽을 수도 읽고 아예 비교해가면서 두 권을 같이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같은 책도 그러할까? "20세기 초엽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활약한 전설적인 투자분석가이자 저술가"인 조지 셀든의 이 책은 나름 '고전'이라고 하지만 '투자'를 위해서 두 번역본을 비교해가면 읽을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역본은 <주식투자의 심리학>(휴먼&북스, 2006), <주식시장의 심리학>(서울출판미디어, 2007)이라고 각기 다른 제목으로 출간된 데다가, (인터넷서점들에서) 저자가 '조지 C 셀든'과 'G. C. 셀든'이라고 돼 있어서(두 명의 저자로 처리된다!) 주의하지 않으면 두 명의 저자가 쓴 두 권의 책으로 착각하기 쉽다. 출판사들에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전략을 쓰더라도 서점에서는 해당 도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독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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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4-14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비셰프>는 참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는데 재출간인지는 잘 몰랐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기자의 마지막 결론에 동감을 표합니다. 그나저나 제 주요 관심 분야는 아니지만, <주식투자의 심리학> 번역과 <주식시장의 심리학> 번역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궁금해지는군요.

로쟈 2008-04-14 23:55   좋아요 0 | URL
저도 비교/검토해볼까란 생각을 잠시 가졌었지만, '2차'를 당할까봐(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그만두었습니다.^^;
 

이번주에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된다. 개인적으론 최소한 댓 권 정도에 눈길이 간다. 하지만 모두 구할 수도 없거니와 모두 읽는 건 (적어도 당장에는) 불가능하다. 리뷰들을 챙겨두는 건 그런 '불가능'과의 타협이다(나는 흔히 오해받는 것만큼 많이 읽지도, 빨리 읽지도 않는다. 책속에 파묻혀 지내긴 하지만 '책읽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다만 내가 어떤 책들을 더 읽어야 할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블리엣의 <사육과 육식>(알마, 2008)은 문화일보의 북리뷰에서 메인으로 다루어졌는데, 읽어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흥미로운 책이다.

저자 소개를 보니 "전문적인 연구분야는 이슬람 사회에서 동물의 역할에 대한 역사, 사회 및 제도의 역사 그리고 기술의 역사 등"이고, "특히 그의 저서 <낙타와 바퀴The Camel and the Wheel>(1975)는 동물 가축화의 역사, 기술의 역사 그리고 중동 문제 등에 대한 그의 관심 분야를 하나로 결합한 저서이다. 2005년에 출간한 <사육과 육식Hunters, Herders, and Hamburgers>은 그가 자신의 관심 분야 가운데 하나였던 동물 가축화의 역사로 회귀, 이를 심도있게 분석한 저서이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저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자극과 즐거움을 준다(경제적 고통과 함께!)...

문화일보(08. 04. 11) 인간은 왜 ‘육식의 낙원’에서 추방당했나

책의 원제목은 ‘사냥꾼, 목축업자, 그리고 햄버거-인간과 동물 관계의 과거와 미래’이다. 원래 중동문제 전문가며 역사학자인 저자(컬럼비아대 역사학과 교수)는 이슬람 사회에서 동물의 역할에 대한 역사 등을 연구해왔는데, 2005년에 출간한 이 책에서 동물 가축화의 역사와 그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인류학과 고고학, 동물학, 환경주의, 철학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그려낸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개념은 ‘사육시대’(domesticity)와 ‘후기사육시대’(postdomesticity)라는, 저자가 제안하는 시대구분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육시대는 (애완동물이 아닌) 가축과 대다수 가족 구성원이 날마다 접촉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경제적·지적 공동체를 특징”으로 한다. 이 시대는 그다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대다수 미국인들의 지나간 한 세대 터울 정도이고, 대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오늘날의 현실이기도 한 농경생활을 의미한다.



예컨대 우리의 경우도 40대 중반 이후 세대라면, 작은 도회에 살았더라도 동네에서 소나 돼지를 잡는 것을 본 경험들이 드물지 않다. 닭 정도는 집의 할머니나 어머니들도 눈 하나 깜짝 안하고 잡았으며, 그런 장면을 보며 특별히 ‘끔찍하다’는 느낌이 남아있기보다는 ‘도축’ 이후의 ‘고기맛’이 더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소나 돼지의 교미는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면 쫓아가서 보기도 했고, 동네 개들의 흘레야 심심찮게 등장했던 장면이었다. 즉 이같은 사육시대에는 가축의 도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축산물을 소비하는데 윤리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그런데 후기사육시대가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고 저자는 말한다. 거리에서 동물을 마주칠 일도 없고, 동물은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 시대는 두 가지 특징을 갖는데, 먼저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존하고 있는 식량(고기나 우유 등), 직물, 가죽을 제공하는 동물과 물리적·심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살아가므로 그런 동물의 출산, 교미, 도살 과정을 본 경험”이 없다. 동물의 시체는 부위별로 해체돼 원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슈퍼에서 포장돼 상품으로 팔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흔히 애완동물과는 가족과 같은 관계를 유지한다.

둘째로, 후기사육시대는 그 이전 시대보다 더 풍부하게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소비하면서도, “심리적으로는 사육된 동물이 제품으로 바뀌는 산업적인 과정과 이런 산물이 시장에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서 (좀처럼 생각하지는 않지만) 죄의식, 수치심, 역겨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히 육류소비가 많은 서구인들은 고기, 동물가죽, 실험동물을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예컨대 비육우로 키우기 위해 소나 돼지를 가두어 놓거나, 호르몬이나 항생제의 대량 주입, 무자비한 도살 등-과정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정서적인 모순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동물이 사라지자 역설적으로 동물해방을 논하고, 육식에 불편함을 느끼며, 윤리적 불안을 나타낸다. 애완동물을 아끼고, 환경론 차원에서 야생동물에 대해 긍정적인 정서를 가지면서도, 가축에 대해서는 윤리적으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그 정서적 모순이 현대인들에게 “‘섹스’와 ‘피’에의 경도”라는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색다른 주장을 편다. 저자는 특히 거대한 포르노와 영화산업을 예로들며, “섹스와 피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가 미국문화에서 ‘전통적’ 가치가 부활하고 있음에도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일까?”라고 묻는다. 습관적으로 포르노 웹사이트에 접속하는 미국인의 수는 대략 2500만명 이상이며, 전 세계적으로 포르노에 소비되는 비용은 570억달러에 육박한다. 할리우드뿐 아니라 대다수 국가의 영화는 갈수록 잔인한 묘사(피)의 경쟁을 벌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생산적인 사육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사라짐에 따라” 생겨난 현상으로 진단한다. 섹스와 피(사냥에의 욕망)는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였다. 사육시대에는 앞서 말한 대로 동물의 교미와 도살 과정 등을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나, 후기사육시대로 오면서, 곧 동물과의 접촉이 사라지거나 감춰지면서 섹스와 살육은 ‘실제’에서 ‘환상’의 차원, 무의식의 차원으로 넘어가버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행동하는 대신 환상으로 대체하는 이런 현상은 유혈과 성교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을 사춘기까지 억지로 지연시키다보니 필연적으로 초래된 부분이다.”

사육동물과의 직접적인 접촉의 사라짐은 다시 농장동물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동물들을 인간화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으로 이어졌으며, 채식주의와 동물인권보호운동 등도 이런 욕망에서 파생된 도덕적 책임감의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이 동물을 도구화하기 시작한 사육시대 이전, 곧 전기사육시대(predomesticity)에서 인간-동물관계의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 것 같다. 이 시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했던 시기, 동물에서 신성을, 신에게서 수성(獸性)을 발견한 시기다. 인간은 사냥을 했지만 동시에 토템으로 숭배하고 동물의 정령을 믿었다. 사육시대로 넘어오면서 인간은 동물을 철저히 대상화시켰다.

저자는 이같은 인간-동물관계의 회복을 물고기는 먹어도 육류섭취가 적은 일본의 전통적 ‘동물관’에서 찾는다. 그러면서 일본이 개고기를 먹는 한국과는 상당히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우리로선 다소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엄주엽기자)

08. 0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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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4-12 22:49   좋아요 0 | URL
일본의 어류섭취만큼 우리가 개고기를 섭취하는 상황인가요? 그걸 문화적 차이를 알게 해주는 하나의 요소라 생각하다니... 그럴듯하다 싶으며 따라와 읽었는데 마지막에서 화~악 깨네요

로쟈 2008-04-12 22:5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이슬람 전문가라서.^^;

노이에자이트 2008-04-12 23:48   좋아요 0 | URL
스너프 필름 사진...너무 섬뜩해요.임산부,노약자 관람금지..

로쟈 2008-04-13 00:39   좋아요 0 | URL
한데 '도살'이나 '도축'의 섬뜩함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스너프 필름을 즐긴다는 거니까 아이러니컬한 일이지요...

다락방 2008-04-18 10:20   좋아요 0 | URL
아, 저건 제가 본영화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네요. 거기서 엠마가 돼지 잡는 장면이 나오죠. 입을 맞추며 돼지를 잡고, 자신이 잡은 돼지를 먹는장면을 보고 깜짝놀랐었어요. 그래도 나름 돼지를 평안하게 죽이기는 하던데 말이지요.

그렇다가 제가 육식을 끊었다거나 하진 않습니다만. OTL

로쟈 2008-04-18 13:58   좋아요 0 | URL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돼지 잡는 장면에 대한 묘사는 읽었습니다. 그런 '도살'의 경험이 없어서 섹스와 피에 경도된다고 하니 흥미로운 주장이긴 합니다...

식신 2008-04-18 17:36   좋아요 0 | URL
"'책읽을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고. 다만 내가 어떤 책들을 더 읽어야 할지를 알고 있을 뿐이다." 멋진 말입니다. 종종 들러 좋은 글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