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기 전에 간식을 먹다가, 문득 며칠전 옮겨놓으려고 했던 기사가 생각났다. 올 하반기에 개통된다는 아시아횡단철도에 관한 것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제치고 세계최장의 노선이 된다고 한다. 겸사겸사 시베리아횡단철도와 관련된 최근기사도 찾아서 옮겨놓는다. 주한 러시아대사와의 인터뷰기사다(뒤늦게 안 것이지만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이달 7-10일에 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너무 늙기 전에 한번은 타보고 싶군...

세계일보(08. 04. 21) 런던∼다카 ‘鐵의 실크로드’ 열린다

영국의 런던과 방글라데시의 다카까지 약 1만1300㎞를 잇는 아시아횡단철도(TAR)가 올해 하반기에 개통된다. 20일 영국 일간 타임스에 따르면 아시아횡단철도는 런던에서 출발해 벨기에의 브뤼셀, 터키의 이스탄불, 이란의 테헤란, 인도의 라호르 및 델리를 거쳐 다카까지 23일 동안 달리게 된다. 이는 약 9300㎞에 달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보다 2000㎞가량 더 길다.

유엔의 후원 아래 진행되는 아시아횡단철도 연결 사업은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발발 이후 끊어졌던 인도 콜카타∼다카 구간이 이달 초 40여년 만에 재개통되면서 노선이 크게 연장됐다. 다음달에는 파키스탄과 이란이 처음으로 자국 철도 노선과 유럽 철도의 연결에 합의할 예정이어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장의 철도 노선을 구축하게 됐다. 유엔 관계자는 “아시아횡단철도는 남아시아·중동 지역 국가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국가들에까지 유럽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무역·여행 노선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횡단철도 사업이 최종 완성되면 런던에서 출발해 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남부 윈난성과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간을 철도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하지만, 이 구간도 해저터널을 이용해 통과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가르는 도버해협은 이미 해저터널로 연결돼 있다. 다카에서 최종 목적지인 윈난성이나 싱가포르까지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미얀마 횡단 구간이 마지막 장벽으로 남아 있다.(안석호 기자)

동아일보(08. 04. 04) [4강 대사에게 듣는다]이바센초프 주한 러 대사

《“우리는 육지와 바다에 이어 우주에서도 협력하게 됐다. 한국이 러시아를 파트너로 선택한 데 대해서도 만족한다.” 글레프 이바셴초프 주한 러시아대사는 며칠 후면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 될 이소연 씨가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은 데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이바셴초프 대사는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대사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양국이 같이할 수 있는 공동사업의 아주 긴 목록을 갖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 기업이 러시아에 적극 투자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데 이어 5월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신임 러시아 대통령이 취임한다. 한-러 관계는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현재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로까지 높아져 있는 양국 관계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러시아에서 이 대통령은 1990년 한―러 수교 이전부터 러시아를 방문해 양국 간 경제 관계를 처음 시작한 기업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의 동북아 정책에 대한 예상은….

러시아는 동북아 지역에서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 나갈 것이다. 대내외 관심사가 이 지역처럼 긴밀하게 연결된 곳도 없다. 방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극동과 동시베리아 지역의 성공적인 개발 여부에 러시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을 개발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생겼다. 지역 개발을 위해선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된 정세가 필수적이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지역의 대규모 자원개발 프로젝트에 이웃나라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국경지역에서 핵이나 미사일 실험, 군사 위협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침이고 메드베데프 정부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러시아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보고 있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남북한 모두를 이해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로 가는 것을 지지해 왔다. 남북한이 서로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칠지는 독자적으로 결정할 일이고, 우리는 그 과정에까지 ‘충고’할 의사가 없다. 다만 한국의 대북정책이 남북한 간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한 방향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러시아는 6자회담의 역할에 만족하는가.

“러시아는 앞으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러시아로서는 아주 중요하다. 6자회담은 공동 작업이고 과정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자기 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 6개국이 모두 한 팀이고, 결정은 참가국들의 컨센서스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

―러시아는 남북한과의 삼각 경제 협력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3자의 장기적인 공동협력 사업은 남북한의 상호 신뢰를 강화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논의 중인 세 가지 사업이 있다. 먼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이다. 이 사업이 실현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럽으로 가는 새로운 수송로가 생긴다. 두 번째는 동시베리아에서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한반도로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이 있다. 현재 러시아는 중국에 전기를 수출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과 러시아 간에 사람과 물자, 자본의 교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해마다 각각 6만여 명의 러시아인과 한국인이 상대국을 방문하고, 양국 간 교역 규모는 100억 달러에서 지난해 150억 달러로 늘어났다. 물론 인적 교류와 물류 분야에서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 앞으로 교류가 더 활성화되기를 원하지만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양국 간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양국 국민이 더 접촉해 언어와 문화, 생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는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양국 수교 후 지난 17년은 이런 단절에서 오는 긴장감과 감정을 극복하는 시기였다. 이런 ‘공백’을 1, 2년 만에 메우기는 힘들다.”

―이 대통령이 곧 미국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데 러시아 방문 시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취임 축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러시아로 초청했다. 올해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이뤄지길 기대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방문 일정을 얘기하기 어렵다. 러시아에서는 5월 7일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그 후에야 이 대통령의 구체적인 방러 일정이 확정될 것이다.”

―한-러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주요 의제는 무엇이 될 것으로 예상하나.

“우리는 양국이 같이할 수 있는 공동사업의 아주 긴 목록을 갖고 있다. 가스 석유 우라늄 석탄 등의 자원 개발에 대한 한국의 참여와 한국 기업의 투자를 기대한다. 또 우리는 자원뿐 아니라 첨단기술을 이용해 만든 완제품을 한국에 수출하기를 원한다. 물론 러시아는 지금도 한국에 천연자원만 수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운항 중인 민간 헬기의 40%가 러시아제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의 3분의 1 이상이 역시 러시아산이다. 우리는 우주기술과 핵의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협력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상호 신뢰 관계의 수준을 보여 줄 군사협력도 희망한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며칠 후 러시아의 도움으로 우주선에 탑승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제 육지와 바다뿐 아니라 우주에서도 한국과 협력하게 됐다. 러시아가 한국의 첫 우주인을 육성해 우주에 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이 이번 사업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한 것에도 만족한다. 이런 사업은 아주 민감한 문제인데, 협력을 하게 된 것은 양국 간의 높은 신뢰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올해에는 양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발사체(로켓)인 KSLV-1의 발사도 예정돼 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또 다른 협력사업을 기대한다.” (대담=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정리=김기현 기자)



▼틈만 나면 박물관 순례, 부인이 직접 김치 담가▼ 

글레프 이바셴초프 대사는 본국에서나 서울 외교가에서 ‘전형적인 외교관’ ‘모범생’으로 통한다. 한국의 각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도 매사에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부 내의 대표적 인도 전문가인 그는 1997∼2001년 미얀마 대사로 있을 때 한국 대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항공 엔지니어 출신인 부인 이리나 여사가 한국 대사 부인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와 집안에서 선보인 후 이바셴초프 대사는 열렬한 김치 애호가가 됐다.

대사로 내정된 후 한국 영화를 여러 편 구해 볼 정도로 문화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서울시내 구석구석과 박물관을 순례하며 한국 문화와 생활을 배우려고 애쓰고 있다. 아직은 서툴지만 한국어도 배우는 중.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시 등 러시아의 대형 박물관에 비해 한국의 박물관은 너무 작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기념관처럼 짜임새 있는 한국 박물관들은 곧 규모도 커질 것”이라며 웃었다.

취미는 수영과 테니스. 그래선지 스포츠 외교에도 적극적이다. 격투기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때문에 유명해진 러시아의 고유 격투기 삼보가 최근 한국에서 널리 보급되고 있는 데도 그의 역할이 컸다. 이바셴초프 대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및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과 동향(상트페테르부르크)인 데다 러시아 최대의 외교 인맥인 모스크바국제관계대 출신으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과도 가까워 ‘성골’이라는 말도 나온다.(김기현 기자)

08. 04. 24.

P.S. 시베리아횡단철도에 관한 책은 기행문 형식으로 여러 권이 출간돼 있지만, 가장 충실한 건 '러시아 전문가 8인의 횡단보고' <시베리아 기행>(동아일보사, 2001)으로 보인다. 이미 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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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2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도 될까요? 저도 철도를 좋아하는지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로쟈 2008-04-24 23:24   좋아요 0 | URL
오픈된 자료인데요 뭐...

노이에자이트 2008-04-2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시아 횡단철도라는 게 개통되는군요.아...그러고 보니 오리엔트 특급은 이스탄불에서 시작하니까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었군요.음...보스포러스 해협에 해저터널을...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뚫으면 일본에서 남북한 거쳐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이어지겠군요.

로쟈 2008-04-25 12:27   좋아요 0 | URL
현해탄 해저터널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철도가 개통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바로프스크는 변두리에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던데요.연해주에서 살고 싶어요.곰이랑 호랑이랑...

로쟈 2008-04-27 18:38   좋아요 0 | URL
^^
 

내일 아침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미리 읽어본다. 지난 총선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데,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언젠가 나도 적은 바 있는데,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대중의 보수화'를 말하기 전에 삶의 근본적 보수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보인다...

경향신문(08. 04. 24) 삶의 근본적 보수성

이번 총선의 선거 결과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명백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다산연구소의 인터넷 논단 ‘다산포럼’에 실린 김민환 교수의 논평이다. 그것은 여당의 압도적 승리 또는 야당의 참담한 패배 이외의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그 주변부의 당선자들을 포함하면, 여권의 의석수는 185 석에 이른다. 지난번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었던 민주당은 소수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을 이끌 만한 사람들이 대거 낙선하여, 당의 그 조직과 향방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 완전히 야당을 외면했고, 진보진영은 알아볼 만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김민환 교수는 지금까지 야당의 기반이 되었던 수도권에서 패배한 것을 이번 선거의 전형적인 사례로 든다. 이것이 여당 후보들의 뉴타운 공약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더 확실한 것은 그것을 넘어선 민심의 이반이 원인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뉴타운의 문제를 더 넓은 배경의 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지 그것이 요인의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의 정치 판도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야당의 수도권 참패는 민심

뉴타운은 적어도 그 정책의 방향에서는 여당의 공약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선거에서 약속되고 있는 것이 개발, 재건축, 부동산 투기 이익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 해온 것이 노무현 정부였다. 그런 점에서, 뉴타운을 포함한 개발 위주의 정책 방향에서는 여야에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 정책의 추진에 행정부와 서울시를 장악하고 있는 여당이 훨씬 능률적일 것임은 분명하다. 유권자들은 매우 논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토건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도 노무현 정부는 그 정책 전반의 향방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했다. 부동산 가격의 앙등을 억제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했고 또 그에 대한 조처가 있었다. 다만 그러한 조처들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현실과 수사(修辭)의 모순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의 토건정책이 표방한 것은 균형 발전이었다. 또 거기에 추가하여 직업 창출의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지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열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의도가 현실의 움직임을 떠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민환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좋은 정책포럼’이 내놓은 진보의 자구책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념을 줄이고 생활 현실을 존중하는 데로 돌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가상승과 부동산 투기가 없더라도 거대 토건 개발 계획은 그 자체로 국민 생활의 기반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것은 발붙이고 사는 땅에 계속적으로 지진이 이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나 토건이든 다른 것이든 거대 계획은 극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일들이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을 말하면서도 거대 계획들과 실생활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고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소비에트 시대의 여러 개발 계획과 자본주의 체제하의 부동산 사업을 다 같이 권력의 편의를 위하여 국민 생활의 재편성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정치학자가 있다. 정치는 대체로 이러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래도 삶의 크고 작은 현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은 정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미국의 진보주의자 폴 굿먼이 자신을 신석기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조건은 사회와 정치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 그런 다음에는 물론 더 나은 의식주와 여가를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게 된다.

삶의 최소 조건의 확보라는 문제에서-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그것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치 노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정당성을 모두 내세우는 정치 집단은,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최소한 삶의 조건의 보편적 확보를 외면하지 못한다. 생존의 근본적 필요는 당파를 초월하여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을 설복하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가는 다음 단계에서는 그러한 설득을 위한 압력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은 상호 이해와 협동 대신 물질적 자원과 사회적 인정을 선취하고자하는 경쟁이 되고, 치열한 투쟁이 된다.



인간주의 바탕 둔 정치 필요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 동기로서의 두 개의 자아의식을 말한 일이 있다. 하나는 단순한 자기 보존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우열 경쟁에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주장의 의식이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전자는 자연 상태의 인간의 심성이고 후자는 사회관계 속에 들어간 인간의 심성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의 자아의식의 두 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초적인 생존의 필요를 넘어간 다음에, 지배적인 것이 되는 것이 후자이다.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이 경쟁적 자기의식을 자유의 표현으로 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회 발전을 위하여 불가피하다.

바다에서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뜨는 것과 같이 경제의 전반적 향상이 삶의 조건을 고루 향상하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자유 경쟁 또는 상호 투쟁의 이념을 조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라고 하여, 거기에 따르는 희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여 더욱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해도, 경쟁과 투쟁과 질시(嫉視)를 원리로 하는 사회가 참으로 살 만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루소는 경쟁과 투쟁과 질시로 쏠리는 사회의식을 협동적인 것으로 바뀌도록 하는 것이 사회 교육의 기본 과제라고 생각했다.

물질적 진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수준의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진보주의자들은 거대 사회계획을 통하여 이것의 고른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의 사명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을 넘어 삶의 전반적인 향상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그 노력이 개체적인 필요와 사회적인 협동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넓고 자상한 인간주의의 바탕에 서 있지 않은 진보의 정치는 쉽게 정치권력의 계획으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협동과 균형의 도덕적 풍토를 길러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에는 여러 가지 투쟁의 외침은 있어도 인간주의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8. 04. 23.

P.S. 참고로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김민환 교수의 논평을 옮겨놓는다.

다산포럼(08. 04. 17)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

총선이 끝났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은데 비해 야당인 민주당은 81석,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같은 보수 여권 당선자를 합하면 여권은 185석에 이른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152석을 얻은 민주당 처지에서 보면 이번 총선 성적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  

의석의 절대 열세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야당의 대표급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한 일이다. 당 대표인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역부족으로 무릎을 꿇었고, 이명박 후보와 대선에서 겨룬 정동영 후보는 한나라당이 긴급 투입한 정몽준 후보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김근태 김덕규 이상수 유인태 등 여권 거물들도 맥없이 무너졌다. 이제 그 당을 누가 이끌어갈지 걱정할 형편이 되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민심은 야당을 떠났다 
수도권을 고스란히 여당에 넘겨준 것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역별로 극명하게 표심이 갈리는 상황에서 언제나 선거의 승패를 좌우해온 수도권 민심이 미련 없이 야당을 외면하였음을 야권 사람들은 통절한 마음으로 재확인했을 것이다. 뉴타운 공약 때문에 졌다고 느끼는 야당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수도권 민심이 야당을 떠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선거 결과가 이런 지경인데도 어느 신문은 총선 결과를 논평하면서 “절묘한 표심”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명박 정부가 다수당으로서 지배적인 지위는 누리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절묘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그런 표현이 그럴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야당의 시각에서 보자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견제는 원칙적으로 야당이 하는 것이지 여권 주변부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야당은 81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작심만 하면 구 여권 당선자를 끌어들여 2백석을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은 거대 여당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한다. 독재시절에 야당은 의석이 적어도 민심이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금 민심은 결코 야당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 어려운 상황을 야당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이런 지난한 물음에 ‘새로운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 그룹이 좋은 답을 제시했다. 
 
‘좋은 정책포럼’이라는 지식인 모임이 내놓은 계명(誡命)은 열 가지다; 이념이 아닌 실생활에서 출발하자, 이상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지지 말자, 국민의 평균적 정서와 동떨어진 정책을 제시하지 말자, 반시장경제 반기업 이미지를 탈각하자, 민주주의 단일차원만으로 사고하지 말자, 민족주의의 틀에 갇히지 말자, 국가안보를 중시하자, 북한 주민의 인권보장을 요구하자, 노동의 권리와 함께 윤리도 주장하자,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을 지향하자. 어느 한 가지도 놓쳐서는 안 될 덕목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변화에 게을렀다면 보수주의자들은 세상을 잃은 시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라는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변화를 지향했다. 공안세력 냄새를 털어 내고 산업세력의 면모를 갖추려 애썼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 보수주의자들이 그 과실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변할 차례다. 80년대 운동권의 낡은 사고는 미련 없이 내팽개쳐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해 지금의 끝을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보수주의자의 변화가 진보주의자의 변화를 부르고 진보주의자의 변화가 다시 보수주의자의 변화를 부른다면 그 사회는 희망을 보장할 것이다.(김민환_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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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그니의 생각
    from zagni's me2DAY 2008-05-05 13:41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드팀전 2008-04-24 09:24   좋아요 0 | URL
'유기체의 항상성'이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자연적 보수주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그것이 '정치적 보수주의'와의 친화성이 높을 것이기에 그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 고리에 어떤 홈을 팔 수 있는가..이것이 '진보'의 과제이자 또 '진보' 스스로도 성찰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 싶군요.
생물체의 입장에서 대중의 '호메오타시스'는 존재의 일반 조건이겠지요.그 존재 조건을 환원해서 정치적 보수주의를 순리인양 이야기하는 '실용주의자'(?) 많아서 깝깝하긴 합니다.

로쟈 2008-04-24 10:30   좋아요 0 | URL
그런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대운하 같은 거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유래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세계 책의 날'이라고 한다, 고 적고서 찾아보니 그 유래는 이렇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국제출판인협회(International Publishers Association: IPA)가 스페인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정부가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이 포함되어 제정된 기념일이며, 4월 23일은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던 세인트 호르디(St. Jordi)의 날이자, 1616년 세계적 문호인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와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맨날 책 얘기들만 늘어놓는 처지에 그냥 지나가기도 뭐해서 관련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책에 미친 인간'들, 곧 '점잖은 미치광이'들을 다룬 책,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를 '책의 날의 책'으로 다룬 기사다.

 

한국일보(08. 04. 23) [오늘의 책<4월 23일>] 젠틀 매드니스

책 읽기에만 정신을 쏟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아니하는 이를 옛사람들은 ‘서치(書癡)’라 불렀다. 책만 읽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며 <간서치전(看書癡傳)>이란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서음(書淫)’이란 말도 있다. 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겨 음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 그 음란은 결코 추하지 않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구에도 책 사랑을 가리키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젠틀 매드니스(geltle madness)’라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변호사ㆍ하원의원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인쇄업자ㆍ도서수집가였던 자신의 할아버지 아이제이어 토머스를 가리켜 한 말이라 한다. ‘점잖은 미치광이’인 셈인데, 점잖게 풀어 쓰면 ‘가장 고귀한 질병, 즉 애서광증(愛書狂症)에 푹 젖어버린 분’ 정도가 되겠다.

<젠틀 매드니스>는 그렇게 책에 미친 인간들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고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젠틀 매드니스의 사례들을 방대한 자료수집과 취재를 통해 펼쳐놓는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아내가 죽자 자신의 시 원고들을 같이 묻었다가 7년 후 무덤을 파헤쳐 <시집>이란 책으로 출간한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이 시집은 하버드대 도서관에 있다), 다빈치의 과학에 대한 원고ㆍ삽화가 든 72쪽짜리 필사본을 경매에서 3,080만달러에 낙찰받은 빌 게이츠,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2만3,600여권의 희귀본을 훔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컬렉션을 만든 책도둑 스티븐 블룸버그 등등.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번역본 분량이 자그마치 1,111쪽이다. 이런 책을 쓰고 번역하고 출판하고, 또 비싼 책값 주고 쇄를 거듭할 수 있도록 사서 읽으며 ‘문자의 독배를 들이켜는’ 독자들, 책사랑에 빠진 음란한 그들이 있기에 책은 저마다의 영혼을 갖게 된다. 오늘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하종오기자)

08. 04. 23.

P.S. 나 또한 '책에 미쳤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지만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건 이 책 <젠틀 매드니스>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일차적으론 그 부피와 무게와 책값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이지만 한편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책에 미친 당신에게'(http://h21.hani.co.kr/section-021152000/2008/04/021152000200804170706038.html)에서 언급되는 있는 '책에 관한 책들', 혹은 '비블리오 픽션'들에 대해 관심을 덜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예전에는 즐겨 읽었지만). 물론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점잖은 미치광이' 아니냐고 당신이 따져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약간 에누리해서 '점잖은 반미치광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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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4-23 22:24   좋아요 0 | URL
저는 출판사가 대견해서 '책장'에 '감금'시켜놨어요 ㅡ..ㅡ;;;
엄두가 안나요...

로쟈 2008-04-24 00:12   좋아요 0 | URL
쪼개서 읽으면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요? 아예 3권짜리로 간주해서.^^

섬나무 2008-04-24 11:32   좋아요 0 | URL
그냥 미치광이 혹은 반미치광이가 훨씬 매력있네요. 책에 미쳤다는 것도 곰팡내 나는데 꼭 그걸 강조해서 점잖은 이라고 수식하는군요.하여간 어디든 미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인생 이지요.

로쟈 2008-04-24 18:05   좋아요 0 | URL
'미쳐도 좀 점잖게 미쳐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하도 종류가 많아서...

노이에자이트 2008-04-24 23:54   좋아요 0 | URL
제가 구입한 헌책 책갈피 속에서 찾은 귀한 것-백원짜리 지폐,70년대 우표,동독우표,임종석씨가 임수경 씨 방북선전한 유인물,김자옥 씨 20대 사진 등등...이기붕 씨가 추천사를 쓴 이승만 전기도 있는데 4,19 1년 전에 나온 것이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더군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헌책 '전문' 수집가신가요?^^

파란여우 2008-04-25 10:44   좋아요 0 | URL
오, 로쟈님도 안읽은 저 책을 저는 신나게 쫙쫙 읽었습니다.
반미치광이든, 온미치광이든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는 핑계로는 아닌걸요^^
생각보다 술술 읽혀지는 재미난 책입니다.
실제로 8백여쪽만 미치광이 얘기고 나머지는 참조자료라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책은 안 읽었지만 여우님 리뷰는 읽었더랬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18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 때문에 헌책방이나 고물상을 가다가 요즘은 공짜 맛에 아파트 폐지 수집일에 나오는 책들을 고릅니다.그런데 비오는 아침 일찍 우산 받치며 종이더미에서 이리저리 서성대는 모습이 보기엔 자세가 잘 안나옵니다만...가끔 좋은 책이 나오죠.

로쟈 2008-04-27 18:37   좋아요 0 | URL
웃음은 나오는데요.^^
 

지난주에 나온 주목할 만한 전기 두 권은 쿠바의 혁명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의 (구술)자서전 <피델 카스트로 - 마이라이프>(현대문학, 2008)와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의 '60년대 좌파 실록' <60년대 자서전>(책과함께, 2008)이다. 두 권 모두 두툼해서 당장에 읽을 여유는 없고 리뷰만을 우선 챙겨놓도록 한다. 직장인이라면 5월 연휴 기간에 손에 들어볼 수도 있겠다.

한겨레(08. 04. 19) 반세기 혁명인생, 난 아직도 목마르다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100시간에 걸쳐 피델 카스트로(82) 전 쿠바 국가평의회장의 머릿속에 집약된 혁명의 기억을 함께 풀어낸 인터뷰어는 말한다. “그는 항상 생각하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한다. 그는 정신적으로 매우 과감하다. 그래서 거대하지 않은 생각들은 그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다.” 이렇게 그는 “언제나 혁명을 한다.”

<피델 카스트로-마이 라이프>는 프랑스의 권위 있는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이냐시오 라모네가 2003년 1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100시간 동안 피델 카스트로를 인터뷰한 기록이다. 인터뷰 질문은 그의 생애와 사상을 구석구석 훑어낸다. ‘말로 쓰인’ 자서전인 셈이다. 건강이 악화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지난 2월 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넘겨준 카스트로가 “자서전을 쓸 생각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는 점, 그가 지난 50년 동안 긴 인터뷰를 네 번밖에 안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책은 “국제정치의 마지막 ‘거룩한 괴물’”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듯싶다. 책은 15개국 언어로 번역됐다.

라모네가 가까이서 본 피델의 성품은 “매우 수줍고 교양이 있으며 신사적”이었지만 “본능적인 위반자”이며 “영원한 반항아”였다. 말의 영역에서는 “풍부한 논증을 바탕삼아 혀를 내두를 정도로 놀라운 수사적인 말솜씨”를 휘두르는 “무섭고 유식한 논객”이기도 했다.

700여 쪽에 이르는 이 두툼한 책은 1868년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의 무장봉기에서 시작된 쿠바 독립투쟁의 원류로부터, 카스트로 이후의 쿠바까지를 카스트로의 생애와 단단히 엮어낸다. 피델 카스트로는 1926년 8월13일 쿠바 동부 지방의 시골 농장에서 태어났다. 알려진 대로, 그는 스페인에서 건너와 자수성가해 제법 큰 땅을 소유한 농장주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부족한 것 없이 자랐을 그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대도시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부모의 신념에 따라 여섯 살 때 산티아고에 있는 어느 선생님 집에서 2년을 보내는데, 그곳에서 그는 뜻밖의 ‘착취’와 소극적 ‘학대’를 경험한다.

식구는 많고 돈 벌 길은 막막했던 선생님 집은 오직 카스트로의 부모가 보내오는 체제비로 살림을 꾸렸다. 선생님은 카스트로를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고, 음식도 제대로 먹이지 않았다. 그는 부모와 똑 떨어져 덧셈·뺄셈 따위가 적힌 공책 표지를 혼자 들여다보며 배를 곯았다. “나는 부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착취의 희생자가 됐다.” 이때부터 그는 “모든 종류의 학대에 반발”하는 반항아 기질을 길렀다고 회상한다. 부유한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착취를 경험했던 인생의 아이러니가 가난하고 모욕당하는 자의 괴로움, 반항 정신과 투쟁의 필요성을 깊이 각인시켰다.

청년기에 카스트로는 쿠바의 독립전쟁에 관한 책과 훗날 그의 혁명적 영감의 원천이 되는 쿠바의 혁명가이자 시인·철학자인 호세 마르티의 책들을 탐독한다. 쿠바의 명문 아바나대학 법대에 다니던 시절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들을 읽었다. 1953년의 몬카다 병영 습격, 망명지 멕시코에서 이뤄진 체 게바라와의 만남,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산악지대에 근거를 두고 벌인 게릴라 전투를 거쳐 1959년 혁명에 성공하기까지의 긴 여정에서, 호세 마르티는 혁명의 윤리가 됐고, 마르크스와 레닌은 혁명의 나침반이 됐다.

‘인류 해방의 염원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이 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라모네의 질문은 좀더 날카롭게 혁명 뒤의 쿠바를 해부한다. 그는 혁명 쿠바에서 이뤄진 공개재판과 처형이 “과했다”는 지적을 파고들고, 혁명 초기 동성애자들에게 억압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는 비난을 들춰낸다. 이어 쿠바가 남성우월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지, 국가 고위층에 아직도 흑인이 별로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종교를 박해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쉴 새 없이 질문한다.

 

 

 

 




 

 


여기에 카스트로는 “혁명이 승리했지만 인종차별 현상에 상당히 무지했다” “남성우월주의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등 일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혁명의 총체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방어한다. 그는 지난 반세기 동안 “가질 수 있었던 꿈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룩했다”고 말한다. “처음에 우리는 몽상가였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혁명과 함께한 80년 삶을 복기하고 난 그가 바라보는 쿠바의 미래는 근거 있는 낙관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 근거는 ‘총체적이고 완전한’ 문화를 지니고, 끊임없이 지식과 경험을 축적해온 쿠바의 인적 자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낙관이 쿠바의 현실을 얼마나 냉정하게 들여다본 결과인지 가늠해 앞날을 꾸리는 것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이 됐다. 다만, 그의 생을 바친 쿠바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와 들어맞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하는 시대에 그는 여전히 ‘혁명의 무상 수출’을 꿈꾼다.

“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배고픔으로 내모는 체제입니다. 속임수와 거짓말 속에서 사는 것이고, 이기주의의 씨를 뿌리는 것이며, 소비주의를 만드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대다수의 프로그램이 곱절로 증식될 수 있는 경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작권이나 특허권을 바라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겁니다.” (김일주 기자)

한겨레(08. 04. 18) '68혁명’의 시대에 누가 못질을 하랴

“1967년 10월12일, 상쾌하고 맑은 런던의 가을날이었다. 우리는 최초의 대규모 베트남 관련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두 번의 집회에서 발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가디언>은 볼리비아에서 체(게바라)가 죽었다는 뉴스를 리처드 고트 특파원의 기사 및 시신 사진과 함께 실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서 울었다. 상실감과 슬픔이 너무 커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든 대륙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끼고 반응했다.”

파키스탄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뒤 1960~70년대 ‘68혁명’의 주요 현장들을 누볐던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 타리크 알리(65)는 자신이 쓴 <1960년대 자서전>(Street-Fighting Years: An Autobiography of the Sixties. 책과함께 펴냄)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존 케네디 암살 당일과 비교하면서 체 게바라가 죽던 날을 그렇게 떠올렸다. 베트남을 방문한 적 있는 체는 죽기 전 “베트남을 구체적으로 돕기 위해 새로운 전선을 열어서 제국주의 관심을 인도차이나에서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몸소 실천하기 위해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에 가 있었다.

미국은 50만의 군대와 최신 군사기술을 동원했으나 전쟁에서 지고 있었다. 이로 인해 촉발된 미국내 반전운동이 세계를 휩쓸었다. 미국의 베트남 군대 파견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장기집권을 보장받은 군사정권이 ‘3선개헌’ 공작에 분주하던 한국 같은 나라는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모든 대륙이 변화의 욕망에 사로잡혔다. 희망이 넘쳐났다.” 타리크 알리가 말한 그 “전지구적 반란”에서 베트남 전쟁과 반전운동은 전세계를 분기시킨 핵심이슈였다.

1968년 2월 베트남연대 캠페인(VSC)이 주최한 반전집회 베트남 총회가 베를린에서 열렸다. 벨기에 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미국이 몇 년 내에 패배할 것이라며 그것은 “디엔비엔푸보다 더 큰 패배가 될 것”이라고 점쳤다.

3월 프랑스 빈민가의 낭테르대학에서 새로운 운동이 시작됐다. 사회학도 다니엘 콘-벤디트가 이끈 ‘3월22일운동’은 “우리는 자본의 감시견이 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한 리플렛 수십만장을 뿌렸다. 5월 메이데이 직후 학생들이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다. 베를린 등 전유럽으로 삽시에 퍼진 그 운동의 핵심 메시지를 사가들은 반권위주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문화혁명’으로 정리했다.

 

 

 

 



 

 

 

올해는 바로 68혁명 40돌이 되는 해다. 타리크는 지난 1월에 쓴 한국어판 서문에서 그때 실용주의를 주장하면서 전면적 변혁을 주장한 혁명가들을 비웃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로 비웃어 주었다고 말했다. “당신들은 낚싯줄은 보지 않고 미끼만 보는 물고기 같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들을 물질적인 소유가 아니라 타인-빈민과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며, 일부는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경제는 소수가 아니라 다수를 위해 규제되고 재조직될 필요가 있으며,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절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는 묻는다. 1968년의 꿈과 희망, 그 모든 것은 게으른 환상이었던가? 운동의 열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신자유주의적 디스토피아를 체현”한 시대가 됐다.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세계는 다시 한번 뒤집혔다. 자본의 지배에 대한 대안이 하나하나 무너지면서 자본과 자본의 숭배자들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이는 승리를 축하했다. 좌파에게 그것은 역사적 몫의 패배였다.” 그가 서문에서 지난해 프랑스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우파 사르코지가 ‘68년의 관에 마지막 못질을 한 것’이라고 자화자찬한 얘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 하지만 역설적으로 사르코지마저 자신의 승리를 68혁명에 빗대어 평가할 만큼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도 그만큼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역자 안효상씨는 이를 “모든 혁명은 실패로 끝나지만, 어떤 효과를 남긴다는 점에서 모든 혁명은 성공한다”는 말로 정리했다.

 

 

 

 

‘거리에서 싸우던 나날’이란 원제가 시사하듯 저자는 줄곧 68운동(1967~75년) 현장에서 학생과 언론인, 전문활동가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콩고의 선출된 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가 유엔과 미국의 공모 아래 권좌에서 쫓겨나 피살당한 데 항의하다 조국에서 사실상 쫓겨나 영국 옥스포드대학에 들어간 이후 유럽뿐만 아니라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와 남미, 모스크바 등 그를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당대의 리더들을 만나고 연설하고 조직했으며 썼다. 일관된 시각 아래 체험에 토대를 둔 유럽 변혁운동의 구체적 에피소드들을 풍성하게 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개인 자서전이 아니라 1960년대라는 한 시대의 자서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한승동 선임기자)

08.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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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4-20 22:32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민주화 투쟁가들이 여전히 권위주의를 못 벗어난 원인은 68혁명 같은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이 따지고 선후배 따지고...근데 알리가 트로츠키 주의자인가요?

로쟈 2008-04-21 10:13   좋아요 0 | URL
68혁명도 사실 '실패한' 혁명이죠. 그건 러시아혁명이나 쿠바혁명도 다 마찬가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보다 못하다면 문제죠...

노이에자이트 2008-04-21 23:40   좋아요 0 | URL
실패라도 좋으니 우리 사회의 수직 서열 충효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항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클린턴이 카스트로와 정상회담한 적이 있군요.
 

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페이퍼 거리들을 묵혀두었더니 어떤 것부터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밀린 일들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서재일'도 나름 일인지라 자꾸 신경을 쓰게 되는데, 여건이 되는 대로 하나둘씩 올려놓도록 한다(인문학과 정치철학에 관련된 몇 가지 아이템을 페이퍼로 적어놓으려고 하지만 조만간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그 중 하나는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에 대한 것이다. 이 하이데거론의 원제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지만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으로 소개되었고, 제목을 바꿔단 보람도 없이 거의 묻혀버린 책이다.

  

 

 

 

책을 손에 든 건 개인적인 필요 때문에 부르디외의 몇몇 책들, 가령 <실천이성>(동문선, 2005), <사회학의 문제들>(동문선, 2004), <파스칼적 명상>(동문선, 2001)을 들추게 되면서 덩달아 눈길이 갔기 때문인데(모두 영역본과 같이 읽는다), 최근에는 이 책에 대한 '촌평'을 비판하는 글도 접한 터라 예전에 무얼 어떻게 읽고 촌평을 단 것인지 확인해보려는 뜻도 있다. '하이데거와 함께 철학을!'(http://blog.aladin.co.kr/mramor/1039607)이란 페이퍼에서 나는 이렇게 적었다.

(...) 그리고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비판서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2005)도 (원제인)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비판으로 읽어봄 직하다.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이 페이퍼 자체는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이 출간된 걸 계기로 그의 책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들을 꼽아본 것이었고 '최근에 나온 책들'에 대한 소개와 마찬가지로 책에 대한 정보와 간단한 인상 정도를 나열하고 있다. 그런 '인상'이나 '판단'의 근거를 자세하게 밝혀놓지 않은 점이 불만스럽다는 의견도 가능은 하겠지만 전공자들도 하지 않는 유형의 '책소개'를 내가 이런 자리에서 떠안아야 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spec님의 비판은 이렇다(강조는 내가 해놓았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매혹적"이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차근차근 따라가도 팍팍하거나 멀미나지 않는다" 등등, 느낌들이 이어지지만 이런 느낌을 주게 한 이유, 즉 느낌을 뒷받침하는 알맹이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 심히 유감입니다. '의견'도 아닌, 그야말로 '인상'인 셈이지요. 더구나 이런 식의 느낌 전달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습니다.

가령, 부르디외의 <나는 철학자다>에 대한 촌평은 이런 제 생각을 뒷받침해주는군요. 이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 다행히 제가 이 책만은 불어판과 번역서를 다 읽어보았기 때문에, 과연 불어판을 조금이라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인지 정당하게 여쭐 수 있을 것 같군요. 일단 번역서만 보자면, 제가 보기엔 반대로 가독성이 상당히 높았고 더구나 지금까지 나온 부르디외 번역 중 가장 자연스러운 번역이었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팍팍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죠. 그러나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 '정신에 대하여'를 쓴 데리다와 더불어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고.

그러므로 로쟈님이 말씀하신 '팍팍함'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팍팍함'은 어떤 책을 평가하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이게 단지 번역에 해당되는 평가라면, 이 평가는 전혀 정당하지 않습니다. 확신컨데, 이 번역은 오히려 '유려합니다'! (다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이라는 좋은 제목 놔두고, "나는 철학자다"라는 이상한 한글 제목을 단 것만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도 이는 출판부수를 늘리려는 출판사의 농간일 것 같은데, 대중성이라는 미명하에 결국 좋은 책을 사장시키는 작태라 생각됩니다).

먼저, 책소개를 하면서 별다른 근거 없이 주관적인 느낌, 인상들만을 나열하는 것은 "독자들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만큼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이 될 때도 있"다는 것. <철학입문>의 경우 ""하이데거가 1928~29년 겨울 학기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수록한 강의록"으로서 지난 1996년 하이데거의 전집 제27권으로 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아직 영역본은 나오지 않은 듯하다).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기도 하지만, 게다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철학 입문' 아닌가?"라고 나는 적었다.

거기서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는 판단의 근거(?)로 내가 제시한 건 첫째, '하이데거의 모든 책'이라는 것, 즉 그의 모든 책이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하기에 <철학 입문>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것과 둘째, 게다가 '철학 입문서'라는 것, 그렇기에 하이데거 입문서도 겸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 이 두 가지이다. 이런 근거가 '알맹이'가 아니어서 유감스러울지는 모르겠지만, 과연 '더 위험하고 심지어 폭력'적이기까지 한 것인지? 기껏해야 하이데거의 책이 나왔다는 정보와 함께 읽어볼 만하겠다는 기대를 표시한 게 왜 위험하며 폭력적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독자에게 훨씬 직접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뒤흔들어놓는다'는 어떤가? 

라캉주의자가 되기 이전에 하이데거 전공자였던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 2005). 책의 1장은 '칸트 독자로서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다루고 있는데, 주로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한길사, 2001)에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풀어서 얘기하면 (1)지젝의 하이데거론은 <까다로운 주체>에서 읽을 수 있다. (2)거기서 지젝은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의 곤궁을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를 통해서 어떻게 극복/회피하려고 했는가를 다루고 있다. (3)이는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을 상당 부분 뒤흔들어놓는다, 정도가 되겠다. 내가 덧붙여 설명하지 않은 것은 '하이데거에 대한 상식'일 텐데,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의 대표작이면서 철학사의 한 걸작이라는 것 정도가 내가 염두에 둔 것이다(보통은 완벽한 작품을 걸작이라고 일컫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젝이 말하는 건 '<존재와 시간>의 곤궁'이기에 그러한 상식을 뒤흔든다고 적은 것이고. 물론 더 자세하게 적을 수도 있겠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닐 테다. 하지만 이만큼만 적으면 과연 위험하고도 폭력적인 촌평이 되는 것인지?

이제 부르디외로 돌아와서, "한데,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나는 적었다. 물론 오해의 소지를 줄이기 위해서 왜 팍팍한지를 적었으면 좋았겠다(이건 나중에 역자도 시간이 좀 지나서 내게 요구했던 사항이었지만 따로 시간을 내질 못했다. 그땐 책도 못 찾았었고). '팍팍하다'는 표현은 '진도가 더디 나간다' 혹은 '읽기가 힘들다'는 뜻으로 적었던 듯한데, spec님의 의견으로는 이 번역서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못된다. 왜냐하면 번역본은 부르디외 번역서들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유려한 번역이기 때문에. 게다가 "이걸 불어판과 대조해 보십시오. 첫 페이지부터 엄청난 만연체의 글이 시작되며, 이건 그냥 '팍팍한' 정도가 아닙니다."(번역본은 어떻게 하여 이 '팍팍한' 책을 유려하게 옮긴 것일까?) 

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부르디외의 이 글을 높이 평가하죠."라고 spec님은 적었다. 요컨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론은 무진장 팍팍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데리다의 <정신에 대하여>와 함께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라는 것. 여기엔 '팍팍하다'는 평가가, 즉 읽기 힘들다는 느낌이 책 자체의 가치와는 별개의 문제라는 판단이 전제돼 있다. spec님이 읽기에 부르디외의 불어본 하이데거론은 국역본보다 훨씬 더 팍팍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하이데거론이다, 라는 것이니까. 같은 맥락에서 말하자면 '팍팍하다'는 평 자체는 번역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폄하가 아니다. 좋은 책이지만 읽기는 힘들다는 평가도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불어본을 직접 대조해보지 않았기에 나로선 불어본에 비해서 더 팍팍하다거나 덜 팍팍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단지 "번역서는 읽기에 좀 팍팍하다"고 적었다. 이 또한 위험하며 폭력적일까? 불어본이 어떤 편제로 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국역본은 매 페이지마다 각주가 달려 있어서(어떤 경우엔 페이지의 3/4이 각주로 돼 있다) 책이라기보다는 '학술논문'이란 인상을 '팍팍' 준다. 거기에 부르디외가 독어로 인용한 단어들은 모두 우리말 번역 옆에 독어가 병기돼 있고, 불어와 한자어의 병기도 빈번하게 나온다. 어떤 텍스트가 잘 읽히느냐 마느냐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런 체제의 텍스트를 자연스럽고 유려하게 읽을 수 있다면 상대적으로 나보다 뛰어난 독해력을 갖고 계신 것. 어떤 이에게 수월하게 읽힌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수월하게 읽히는 건 아니다. 초반부의 한 대목만 다시 읽어본다.    

"장의 효과, 철학적 소우주의 특수한 강제가 철학적 담론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절대적 자율성이라는 가상에 객관적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 가상은 철학 - 즉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 - 의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이나, 슈펭글러나 융거 같은 문필가들의 저작과 비교하는 일을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는 데 활용될 수 있다 -- 흔히들 하이데거를 이 자들과 매우 가까이 놓고 언급하려 들곤 했겠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식의 추론이 불가능하지 않은 한에서이다."(12쪽, 강조는 원문)

보통은 이런 대목을 만나면 내용이 머릿속에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영어본도 같이 참조한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지만 아쉽게도 나는 구입해두지 않았다). 이 대목은 이렇게 영역돼 있다: "Paradoxically, the 'field' effect, that is the effect operated on the produc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by the specific constraints of the philosophical microcosm, is just what gives an objective basis to the illusion of absolute autonomy. This effect can be invoked to prohibit or reject a priori any comparison of the work of Heidegger, a conservative revolutionary in philosophy (that is, in the relatively autonomous field of philosophy), with the works of economists like Sombart and Spann or political essayists like Spengler or Junger, who would appear to be temptingly similar to Heidegger, if this were not precisely the kind of case where it is impossible to argue in terms of 'other things being equal'."(강조는 나의 것)  

'장(champ, field)'이란 건 부르디외 고유의 용어다. 상대적 자율성을 갖고 있는 영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철학 또한 하나의 '장'이다. 때문에 장의 효과, 장으로서의 효과를 갖는다. 그 효과란 철학은 외부(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는 환상, 곧 '절대적 자율성'이란 환상에 객관적 토대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그런 내용을 나대로 옮기면, "'장'의 효과, 즉 철학이란 소우주의 특수한 제약들이 철학 담론의 생산에 미치는 효과는 역설적으로, 철학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영역이라는 환상에 객관적인 토대를 마련해준다."

이어지는 문장의 주어를 국역본은 '이 가상'으로 봤는데, 영역본에 따르면 '이 효과(this effect)'이다(의미상 큰 차이가 벌어지는 건 아니지만). 두번째 문장을 옮기면, "이 효과는 철학, 곧 철학이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장에서 '보수혁명가'인 하이데거의 저작들을 좀바르트나 슈판 같은 경제학자들의 저작들과 비교하거나, 다른 조건들이 같다는 조건하에 슈펭글러나 윙어(융거)와 같은 정치 에세이스트들이 하이데거와 유사하다고 말하는 걸 선험적으로 금지하거나 거부하게끔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는 철학자의 저작을 경제학자나 에세이스트의 저작과 동급에 놓고 비교하는 걸 금지하거나 거부하는데, 그럴 경우에 철학이란 장이 갖는 '자율성'이 침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이건 '환상'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부르디외는 자신의 하이데거 읽기의 방법론을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한다(부르디외 사회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 위에 구축된다. 그것은 우선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가장 일반적인 상황으로 곧바로 환원해버리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철학적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 또 이 주장과 상관적으로 모든 외적인 참조를 거부하려는 방식 역시 거부한다."(12-13쪽)

"Any adequate analysis must accommodate a dual refusal, rejecting not only any claim of the philosophical text to absolute autonomy, with its concomitant rejection of all external reference, but also any direct reduction of the text to the most general conditions of its production." 

영역본으로 미루어 보아 원문은 한 문장으로 돼 있을 텐데, 역자는 두 문장으로 나누었다. 그건 독자의 가독성은 어느 정도는 고려했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로 덜 팍팍하게 읽힌다. 그런 고려를 조금 더 밀고나가면 이렇게 옮길 수도 있을 것이다(영역본의 중역인 만큼 다소간의 편차는 있을 것이다).

"모든 적합한 분석은 이중의 거부를 잘 조화시켜야만 한다. 즉 철학 텍스트를 그 생산의 일반적인 조건들로 막바로 환원시키는 시도를 거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철학 텍스트가 절대적 자율성을 갖기 때문에 그 외부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거부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독해 방법은 이렇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모호성에 따라 규정되는 글, 말하자면 두 정신적 공간에 대응하는 두 사회적 공간에 준거하여 규정되는 글에 대해서는, 철학적 독해와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적 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13쪽, 강조 원문)

이러한 '이중적 독해'를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나치와 가깝다는 이유로 하이데거 철학을 비난하는 비방자든, 나치참여와 하이데거 철학을 분리시키는 찬양자든 다음과 같은 점을 무시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곧 하이데거의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 말이다."(14-15쪽, 강조 원문)

여기에 부르디외 하이데거론의 요체가 정리돼 있다. 나치와의 연루를 이유로 그를 거부하는 하이데거 반대자들이나 그의 나치 동조와 철학을 분리키시는 하이데거 옹호자들이 모두 놓치고 있는 점을 자신이 이 책에서 입증해 보이겠다는 것. 그것은 "철학이란 철학적 생산장이 강요하는 특수한 검열 때문에, 하이데거를 나치즘에 밀착하게 했던 정치적 윤리적 원리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킨 것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과할 수도 있었다'? 영역은 이렇다: "Heidegger's philosophy might be only a sublimated philosophical version, imposed by the forms of censorship specific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production, of the political or ethical principles which determined the philosopher's support for Nazism."

부르디외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렇다. (1)하이데거의 정치적 혹은 윤리적 원칙은 그를 나치즘에 대한 지지로 이끌었다. 즉, 그의 나치 연루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2)하지만 그러한 입장을 철학 담론으로 전개할 수는 없었다. 철학 장의 검열 때문에(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의 작업'과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부르디외가 직접 프로이트의 용어를 쓰고 있기도 하고). (3)이러한 곤궁의 타개책으로 하이데거는 자신의 정치적 윤리적 원칙들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다. 그렇게 해서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정치적 존재론'으로 재해명된다. 그것이 부르디외가 의도하는 바이다. 다 따라 읽지는 못하더라도 이 정도는 '상식'으로 챙겨둘 만하다...

08. 04. 20.








P.S. 하이데거와 나치즘에 대한 상세한 분석/해명은 박찬국 교수의 연구서를 더불어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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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4-21 09:14   좋아요 0 | URL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최대한 읽겠다는 읽고 싶다는 읽어야 한다는 욕구나 희망 부담감 따위 전혀 없이 가끔은 심장이 가렵도록 읽고 싶은 책들을 봅니다.이를테면 에밀 시오랑처럼 말입니다. 몇 권의 책을 함께 주문했는데 이번에도 모두 흡족하진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제겐 로쟈님의 페이퍼 이상이 아닌 책들도 많습니다. 저는 가끔 로쟈님의 페이퍼를 옮겨적으며 봅니다. 치매 예방에 좋은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뀐 그림이 썩 좋네요. 그런데 사진이 아니라 그림인가요? 언제나 그림이 아주 잠깐 비치고 페이퍼로 덮여서 볼 수 없는데 바탕그림을 보는 방법은 없나요? 몹시 헝클어진 새둥우리 같은 남자의 뒷통수를 좀 오래 보고 싶어서요.ㅎㅎ

로쟈 2008-04-21 10:10   좋아요 0 | URL
독일 풍경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의 가장 유명한 그림입니다. 국내에 화집도 나와있고요.^^ 수즈달 풍경사진이 가을 것이어서 교체한 것인데, 사이즈들이 다들 안 맞아서 결국 이 그림으로 가게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