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김창진의 제국의 그늘' 마지막회를 스크랩해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5000/2008/07/021165000200807300721026.html). 미국 경제가 '뚜렷한 쇠퇴 경향'을 보인다는 기사들이 최근 자주 눈에 띄는데, 그런 경향의 '배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해준다(우리가 '쇠고기 선물'도 받은 만큼 어려움에 처한 미국을 돕기 위해 '금 모으기'라도 해야 할까?). 우리는 이 '뚜렷한 쇠퇴의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한겨레21(08. 07. 30) 두 번째 위협이 내부에서 터져나온다

인간의 역사에서 ‘제국’은 정치적 꿈의 최대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계급·성별·지역·종교 간 이해관계의 차이와 갈등으로 점철된 현실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우월한 권력을 통해 지배의 욕망을 거의 완벽히 구현하려는 정치체제다. 하지만 제국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순히 타자에 대한 정복과 억압을 넘어 그것이 불안정한 세계에서 질서와 안정, 곧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내세우기 때문이다. 팍스로마나, 팍스아메리카나 또는 대동아공영권 따위로 명명된, ‘제국의 힘에 의한 평화’는 그 추종자들에게 당대 문명이 이룬 최고의 업적으로 추앙된다.



제국, 한여름 밤의 꿈
그러나 제국은, 좀더 넓고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결국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하다. 그들이 이뤘다고 자부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보는 소극적인 관점을 인정하더라도, 제국의 총칼과 군함, 미사일 아래 모욕당한 사람들의 절망과 분노를 헤아리지 못하는 편협한 질서다. 제국은 한 번도 세계평화를 이룬 적이 없고, 심지어 제국의 경계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저항의 싹이 움트고 모반이 숲 속의 버섯처럼 소리 없이 자란다. 카를 마르크스의 비유를 모방하자면, 제국은 그 자신의 거대한 몸속에 파멸의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다.

2001년 9·11 동시테러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며 제국의 꿈에 취해 있던 미국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날벼락이었다. 그것은 ‘팍스아메리카나’라는 질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는 사실을, 대다수 세계인들이 백악관과 할리우드가 선전하는 미국의 꿈에 취해 있지 않다는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준 충격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 엘리트는 미국인들을 달콤한 제국의 꿈에서 깨어나게 하기를 거부했다. 대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동시에 두 개의 전쟁을 벌이고, 7개의 ‘불량국가’와 3개의 ‘악의 축’을 지목해, 그에 대한 강력한 저항을 야기함으로써 세계를 더욱더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이제 두 번째 도전이 바로 제국의 내부에서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지난 세기 미국인들이 누려왔던 ‘우월한 문명과 풍요로운 일상생활’에 중대한 위협이 되고 있는, 미국 경제의 뚜렷한 쇠퇴 경향이다. 최근 상황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워런 버핏이나 조지 소로스 같은 투기 자본가들이 거듭해 ‘생애 최대의 위기’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이 단지 미디어를 의식한 제스처일까? 혹자는 향후 몇 년간 미국 경제가 겪게 될 혹독한 경기 후퇴는 1930년대 대공황기 이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될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부터 곪아터지기 시작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올해 들어 경제 전반을 강타한 국제적인 고유가의 여파로 미국인들의 생활 방식은 중대한 조정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최근 〈CNN방송〉의 조사에 따르면, 폭등하고 있는 휘발유값 탓에 여름휴가 계획을 축소하는 등 생활 태도를 변경하겠다는 응답자가 10명 중 9명에 달했다. 그나마 휴가를 갈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지난 몇 년간 은행들이 선심 쓰듯 마구 내준 주택담보 대출 덕분에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고 좋아하던 수천만 명이 앞으로 몇 년간 그 집을 잃고 중산층의 꿈을 접어야 할 판이다. 부동산 전문 사이트 ‘리얼티트랙’이 7월10일 내놓은 자료를 보면, 지난 6월 중 미국 전역에서 대출 할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주택을 차압당한 비율은 지난해 같은 달에 비해 53% 급증했다. 전국적으로 500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했고, 캘리포니아의 일부 지역에선 72가구당 1가구꼴로 차압을 당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지난해 미 전역에서 150만 가구에 달했던 차압 사태가 올해에는 약 250만 가구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가구당 부채, 대공황기와 비슷
미국 경제를 덮고 있는 음울한 구름은 이것만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현재 미국인들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11만7962달러(약 1억1800만원)에 달한다. 이는 대공황기인 1930년대 수준과 비슷한 것이라고 한다. 빚이 없는 가구는 1957년 42%에서 2004년 24%로 줄어들었다. 대신 가구당 저축액은 단 392달러(약 40만원)에 불과하다. 그리고 빈곤선 이하에서 허덕이는 미국인들이 37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전국의 교회들이 빈민구제 사업을 중요한 사업 방향으로 설정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조지 부시 행정부는 지난 7년간 ‘테러와의 전쟁’에 약 7천억달러(약 700조원)를 쏟아부었다.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는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보다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데 취미가 있는 자본가 정부 탓에 미국이라는 국가는 지금 해외 각국에 진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매월 30억달러(약 3조원)를 빌려와야 한다. 미국 정부와 일반 가계가 완전히 빚더미에 올라 있는 셈이다. 채무도 자산이라는 회계장부의 마법이 과연 언제까지 통할 것인가?

지금은 미국의 군사력과 이데올로기가 그 자체로 세계시장을 통제할 수 있는 냉전 시기도 아니고, 19세기 세계제국이던 영국이 1차 대전으로 사실상 파산 상태에 몰려 있던 20세기 초반도 아니다. 유로화에 비해 달러가 계속 힘을 잃고 미국 경제가 더 이상 세계경제의 엔진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유라시아의 경쟁국들이 더욱더 부상하게 되면, 필경 미국이라는 이름의 ‘안전 자산’ 신화도 깨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제국의 역사에서 사태가 항상 일직선적으로 파국을 향해 가는 것만은 아니다. 일시적인 침체를 이겨내고 회복기에 들어서거나 심지어 과거보다 더 강해지는 경우도 가끔씩 관찰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따른다. 하강 국면에 접어든 제국의 한계를 냉정하게 인정하고 제국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인 문제를 바로잡으려는 지배 엘리트의 전략적·정책적 선택이 존재하며, 그 방향으로 대중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제국의 힘과 영향력은 언제나 외부 환경과의 관계에서 상대적이기 때문에 다른 경쟁자들에 비해 선도적인 혁신 능력과 기술적·경제적·정치적 우위를 확보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국의 이익을 누구보다 더 많이 누려온, 사회 곳곳에 포진한 기득권 집단의 완고한 저항을 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상 안팎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적절하게 위기를 극복한 제국들은 결코 흔하지 않다. 지금 미국은 기로에 서 있다. 설령 제도권 정치인 버락 오바마(민주당)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과연 미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제국의 생활양식을 조정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운 판에, 존 매케인(공화당)이 당선된다면 그것은 미국인들 스스로 파국을 재촉하는 선택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기만에서 벗어날 때
벌거벗은 군사력만으로 세계제국을 유지하기에는 21세기 지구는 너무 복합적이고 역동적이다. 그 군사력마저 유지할 경제력이 소진돼가는 마당에 더 말해 무엇하랴. 지금이야말로 미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이름으로 세계를 구원한다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제국적 자기 기만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08. 08. 03.

P.S. 페터 벤더의 <제국의 부활 - 비교역사학으로 보는 미국과 로마>(이끌리오, 2006)처럼 한때 미국을 로마 '제국'에 비유(하면서 비교)하는 책들이 유행한 적이 있다. 그 비유를 계속 이어받자면 이번에 새로 완역돼 나온(총 여섯 권 중 두 권이 먼저 나왔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민음사, 2008)는 단지 역사책으로만 읽히지 않을 듯하다. '미 제국주의 쇠망사'로도 읽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제국의 그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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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6월엔가 미국 현지 취재에서 봤는데 미국 디트로이트는 완전히 유령의 도시더군요.자동차 산업 완전 붕괴로요.그리고 플로리다는 비우량 담보대출 때문에 어떤 동네는 전체가 차압 딱지 가 붙어 있구요.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로쟈 2008-08-03 20:32   좋아요 0 | URL
말로만 듣던 '종말'이 오려나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2   좋아요 0 | URL
그런데 그런 낙오자를 양산해야 체제가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도 해봅니다.그렇다면 이건 종말보다 더 무섭죠.

로쟈 2008-08-03 21:23   좋아요 0 | URL
그렇긴 하지만 낙오자도 '임계치'가 있지 않을까요. 양질전화가 되는, 폭발하게 되는...
 

이번주에 가장 놀란 책 중의 하나는 조너선 글로버의 <휴머니티>(문예출판사, 2008)이다(알라딘에는 '조나단 글로버'로 표기되고 있다).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 우리말 부제이고, 원저의 부제는 'A Moral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이다. '20세기 도덕의 역사'쯤 될까. 일단 600쪽이 넘는 분량이 묵직하다. 저자는 생명윤리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저명 학자라고 소개돼 있는데, <유전자 혁명과 생명윤리>(아침이슬, 2004)의 공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드물게 눈에 띈 리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책은 다음 주중에나 읽을 수 있을 듯하다(예상할 수 있지만 '폭력의 세기'에 대한 윤리적 성찰인 만큼 편안한 책읽기는 기대할 수 없겠다).   

한국일보(08. 08. 02) 피의 축제는 지금도 춤추고 있다

국내에도 성공적으로 상륙한 캐나다의 공연단 ‘태양의 서커스‘가 지금 세계 유흥 도시의 고급 호텔에서 관객몰이를 하고 있는 공연물 중에 <주매니티>라는 성인물이 있다. 동물원(zoo)과 인간성(humanity)을 합쳐 만든 말로, 인간 속에 잠재한 갖가지 본능을 쇼의 형식을 빌어 시각화 한 무대다. 야수성, 색욕, 호전성 등을 라스베이거스 쇼처럼 풀어 보인다. 도덕과 윤리는 웃음거리가 된다.

‘20세기의 폭력과 새로운 도덕’이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은 지난 세기 서구 문명을 윤리의 잣대로 조명한다. 철학자 칸트가 말했던 바, “내 머리 위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마음속의 도덕률”이라 했던 명제의 안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세계 대전의 살육,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문화혁명,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유고슬라비아의 붕괴, 걸프전 등 대살육의 현장속으로 걸어가는 일이다. 보다 평화롭고 인도적인 세계에 대한 계몽주의적 희망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책은 하드 고어 영화의 상상력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문의 기록이다. “담벼락에 귀가 못질 당한 채 밤을 지샌 뒤 교수형을 당하고, 단검으로 자궁이 찢겨 태아가 끄집어내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세상을 만든 신에게 물어볼 질문들”(57쪽)을 던진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 14세를 단두대의 제물로 바쳤다. 일단 잔인성의 충동질을 받은 사람들은 “그 피에 손가락을 찍어 보기도, 맛을 보기도”(61쪽)했다는 것이다. 그마저도 현대의 잔인성에 비하면 약소하다. “잔인성의 축제는 오늘날 최고조에 달했다”고 책은 단언한다. 최근 중동의 예를 보자. 두바이의 정치범 감옥에 고문실을 만든 영국 회사는 그 방을 ‘즐거움의 집’이라 했고, 고문자들은 아무런 가책을 받지 않았다. 고문 받고 죽은 이들을 던져 넣는 황산 탱크는 ‘수영장’이다. 그들은 “라디오나 TV에 의해 생각이 끊임없이 분산돼 있었다”며 “섹스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유머가 없었다”는 것이다.

책은 그를 두고 “우리는 가볍게 즐기지만 너희는 지옥을 경험한다는 메시지의 표출”이라며 “권력의 전시”라고 규정한다. 현대의 대량 살상전을 치른 병사들은 “집단으로 하는 살상은 흥분되는 일이며 심지어 즐거운 일”이라며 “그것을 사랑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Cirque du Soleil - Zumanity

책은 이 시대에 던지는 심리학적ㆍ윤리학적 질문이다. 행위의 도덕성과 참혹한 결과 사이의 문제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사례를 통해 탐구된다. 책이 주목하는 것은 특히 원거리 대량 살상전의 경우, 책임이 파편화되면서 결국 소멸하기까지의 메커니즘이다. 동시에 후방에서는 민족ㆍ종족적 감정이 격앙되고 부정확한 뉴스탓에 증오의 메커니즘이 확대 재생산된다. 미소간 핵전쟁 발발 바로 앞에서 멈춘 1962년 쿠바 사태, 캄보디아 사태 등 현대의 예를 통해 정책과 커뮤니케이션의 명확함, 군대의 표류를 제어할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책은 서양 문명을 근저에서부터 뒤집은 나치즘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종족주의, 왜곡된 수치감, 니체 철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만든 국가사회주의를 본질로 하는 나치즘은 희생자들을 철저히 능멸하는 데 탁월한 자질을 발휘했다. 유대인에 대한 비인격화, 굴욕적 농담(처형을 ‘추수 축제’로 표현하는 등) 등 다양한 차원에서 나치즘을 분석한다. 동시에 ‘위대한 독일 철학의 시대’를 구현한 것으로 당대에 칭송 받은 하이데거를 정당한 평가의 도마에 올린다. “인간 하이데거를 버리고 철학자 하이데거만을 고려하는 것이 가능할까?”(581쪽)라는 질문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와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의 낙관주의가 과연 이 시대에도 용인될 수 있을까? 그러나 저자는 이 책을 자식들에게 바친다고 밝히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저지른 끔찍한 재앙에 맞선 인간애와 용기만이 온축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하다.(장병욱 기자)

08. 08. 02.

P.S. 리뷰를 읽다 보니까 떠오르는 책은 '계급.인종.젠더를 관통하는 증오의 문화'란 부제를 가진 데릭 젠슨의 <거짓된 진실>(아고라, 2008)이다(리뷰는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802/h2008020122142984210.htm 참조). 이 또한 대단히 '하드 고어'적인 책인데, "총21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지은이는 증오집단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하여 폭넓은 시야와 다양한 사례를 바탕으로 산업 사회 전체에 만연한 잔학 행위들의 뿌리를 추적하고 있다. 소수자 린치, 고문, 강간, 포르노 사이트, 아동학대, 노예화, 대상화, 계급착취, 생태파괴, 홀로코스트 등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를 이 책은 아우른다." 젠슨의 묵시적 비전을 보여주는 <문명의 엔드게임1,2>(당대, 2008)도 여차하면 손에 들어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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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5   좋아요 0 | URL
지엽적인 문제로 딴지를 건다는 생각도 들지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왕은 루이 16세인데요.

로쟈 2008-08-03 20:31   좋아요 0 | URL
ㅎㅎ 기자가 실수한 건지 저자가 실수한 건지 모르겠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3   좋아요 0 | URL
이런 오류가 계속 나오네요...책들은 좋은 것 같은데...
 

대학강사의 처우 문제가 어제오늘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개선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특히나 요즘처럼 강의 소득이 전혀 없는 방학 때면 우스개소리로 대리(운전) 알바를 뛰어야 한다는 얘기도 강사들끼리는 한다(그런데 우스개가 아니다!). '비정규직 800만' 시대라고 하니 '비정규적 강사'의 존재 자체가 스캔들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회적 지위/계층의 존재와 그에 대한 대우는 온전히 그 사회 시스템의 산물이다. 800만 비정규직과 6만 5천여 시간강사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이란 사회의 시스템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면, 그리고 다수가 그걸 자연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면 하는 수 없는 노릇이다. 총파업이라도 하든가, 아니면 굴종하든가. 다만, 그것이 부당하며 부도덕한 시스템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저임금 착취를 등에 업고 자기 배를 불리는 자들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그걸 지적하는 칼럼과 기사를 옮겨놓는다. 강명관 교수의 '고금변증설' 연재(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1994.html)와 경향신문의 '비정규직 800만 시대' 기획기사 중 시간강사에 관한 꼭지이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7281757155&code=210100). 이번주 신간 중 <여러분 참 답답하시죠?>(사회평론, 2008)의 저자 모모세 타다시는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없는 이유로 “겉모양은 선진국인데 속에는 아직도 후진적인 생각, 가치관, 질서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류 국가가 되기엔 품격이 모자란 사회”라는 것이다. 그것도 좀 많이 모자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하기야 현 정부에 와서는 아예 '품격'이란 말 자체가 사치스러워졌지만).

 

한겨레(08. 08. 02) 훈장 내쫓는 학부모, 강사 내모는 대학

박사과정을 마쳤으니 서둘러 학위논문을 제출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있다. 또 어렵사리 학위논문을 썼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논문을 써서 학문의 길로 일로매진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전자는 학위논문을 쓰지 않는다. 후자 역시 계속 논문을 써 내어 자기 학문의 밭을 일구지 않는다.

전자는 학위논문을 쓰기에는 너무 바쁘다. 학위과정을 밟은 대학에서 시간강의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만으로는 생계가 해결되지 않기에 다른 대학에서도 강의를 해야 한다. 어떤 경우는 과외도 한다. 후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간강의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거기에다 이 연구소 저 연구소, 이 프로젝트 저 프로젝트로 옮겨 다니며 연구비가 아닌 생계비를 벌어야 하기에 차분히 자기 연구를 할 시간이 나지 않는다. 곁에서 몇 해를 지켜보지만, 공부에 큰 진척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아 내심 답답하다. 문제는 공부하는 것을 평생의 일로 삼았지만, 그 일이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백범일지>는 구한말의 사회 사정을 아는 데 아주 요긴한 책이기에 자주 들추어본다. 백범이 공부를 소원하자 아버지는 문중과 동네 사람들과 의논해 상놈 아이들을 위해 서당을 열어준다. 수강료로 쌀과 보리를 모아 주기로 하고 이생원이란 선생을 초빙한 것이다. 백범은 이생원을 따르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는 반년이 되지 않아 해고된다. 멍청한 손자를 둔 신존위란 사람이 백범이 공부 잘하는 것을 시기해 이생원을 쫓아낸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백범이 실망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나는 <백범일지>의 이 부분에서 늘 짠하였다. 하지만 밥을 많이 먹는 것이 해고의 이유라는 것이 어딘가 우스꽝스럽기도 하였다. 한데 임형택 선생의 ‘이조말 지식인의 분화’(<전환기의 동아시아 문학>, 창작과비평사, 1985)란 논문을 읽고는 백범의 선생 이생원만 당한 일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논문은 ‘대구훈장 원정(原情)’이란 글을 소개하고 있다. 원정이란 요즘말로 진정서다. 곧 대구의 훈장이 관에 올리는 진정서다. 무슨 진정서인가. 논문을 따라가면서 읽어 보자.

충청도의 한 선비가 서울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10년 세월을 놀다 보니 주머니는 바닥이 나고, 과거에 합격할 길도 아득히 멀어진다. 어쩔 수 없이 타관 객지 시골 서당에서 훈장으로 나선다. 그야말로 쥐꼬리만 한 보수를 받고 <사략> 첫째 권을 꼬맹이들에게 가르치노라니, 정말이지 신세가 처량하다. 한데 훈장을 초빙한, 제자들의 아비들이 “타관 양반인데, 예조(禮稠) 한 섬, 의자(衣資) 반 냥을 주지 않은들 어찌하겠느냐”며 그 쥐꼬리조차 떼어먹으려 든다. 훈장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들이 눈에 어른거려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궁한 사정을 하소연하자, 그들은 냉소를 하면서 지껄인다. “이 양반이 세상 물정도 모르는군. ‘생원의 문자’는 값이 대체 얼마요? 그동안 먹은 밥값으로 치면 될 터이지. 의자고 예조고 말도 꺼내지 마시오.” 이 말에 훈장은 관청에 진정서를 올린 것이다.

<백범일지>의 이생원이 밥을 많이 먹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한마디 말도 못하고 해고되었듯, 대구 훈장 역시 보수를 주지 않는 학부형들에게 거세게 대거리를 하지 못하고 만다. 보수를 주는 쪽이 약자의 호소할 데 없는 처지를 십이분 이용하여 횡포를 부린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있는 분들을 훈장에 견주어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백범의 선생을 내쫓은 자와 훈장의 보수를 떼어먹은 자들이 한 짓거리가 지금의 대학이나 정부의 강사 대우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시간강사의 강의료라는 것은 말로 꺼내기에도 창피할 정도라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강의료를 올리고 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요청은, 나도 20년 전에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왜냐고? 대학과 정부가 강사들이 절대적인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적극 이용하기 때문이다. 전국강사노조가 있지만, 이들이 한 목소리를 내기란 참으로 힘들다. 강사는 학기 단위로 위촉되기 때문에 그 학기에 한해서 강사 신분을 갖는다. 또 자신을 가르친 선생들이거나 아니면 이런저런 연고로 다 익히 아는 분들이 강의를 의뢰한다. 그분들의 안면 때문에 힘 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런가 하면 곧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전임 자리를 얻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러니 강사노조에 힘이 모일 리 없다. 이런 약점을 대학은 십이분 이용하는 것이다.

먹고사는 일보다 절박한 일은 없다.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시절을 생계비 버는 데다 보낸다면, 그 뒤 무슨 정열과 힘이 남아 연구를 한단 말인가. 대학에서 쥐꼬리 같은 강사료를 받아서는 살 방도가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대학은 강사에게 정당하게 지급해야 할 강의료를 착취함으로써 자기 덩치를 유지하고 있다. 대학은 다른 어느 기관보다 도덕성이 요구되는 곳이다. 그런데 자신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자들의 노동력을 이토록 착취해서야 되겠는가?

대학마다 요사이 하는 말인즉 발전기금을 모은다, 세계적 대학을 만든다고 자랑이다.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말에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자기 대학에서 가르치는 강사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는 대학의 행태는 훈장의 예조와 의자를 떼어먹는 아비들의 짓거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이 언필칭 내세우는 발전과 개혁이란 구호가 위선이 되지 않으려면, 강사 처우 문제부터 해결하시기 바란다. 그게 학문 후속세대를 키우고, 대학을 발전시키는 지름길이다.(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경향신문(08. 07. 29) [비정규직 800만 시대]“대학 교육 절반 담당… 월급 60만원대”

28일로 326일째.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는 대학 시간강사들의 천막농성이 열리고 있다. 처음 스무 명으로 시작한 농성인원은 이제 다섯 명으로 줄었다. 1주일의 절반은 대구에서 올라오는 강사 3명이, 나머지 절반은 서울지역 강사 2명이 돌아가며 천막을 지키고 있다. 먹고 자는 일을 모두 천막 안에서 해결해왔지만 최근 폭우가 쏟아지면서 천막을 지키는 일조차 힘들어졌다. 이들이 폭우와 무더위 속에서도 천막을 지키는 것은 대학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확보를 위해서다.

대학 시간강사들. 이들은 현재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이다. 교육개발원에 따르면 2007년 전국 4년제 대학의 전임교원(정규직 교수)은 5만5612명으로 시간강사 6만5399명보다 적다. 하지만 교양강좌의 경우 전임교원 강의(5만636개)보다는 시간강사 강의(7만8204개)가 훨씬 많다. 계약기간이 정해진 비전임교원들의 강의(2만5381개)까지 합하면 전임 교원 강의 수의 두 배에 이른다. 그러나 노동자로서 이들의 처지는 일반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그보다 더 못한 경우도 흔하다. 시간강사들은 따로 고용계약서가 없고 시급을 적용받는다.

교수신문이 전국 30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2008년 평균 시급은 4만1000원. 보통 한 학기에 두 강좌씩 맡는 것을 기준으로 하면 한 달에 16시간을 강의(강좌당 1주일에 2시간 강의 기준)하고 받는 월급은 64만원 정도다. 학교에 따라 연이어 강의를 하면 한 학기를 쉬거나 학교별로 한 사람의 강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어 시간 강사들의 수입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는 교통비와 숙박료를 부담해가며 강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4대 보험 가입률도 낮다. 고용보험이나 산재보험에만 가입되고 이마저 허용하지 않는 대학도 14곳이나 된다.



서울 소재 사립대학 두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 김영곤씨(61)는 “대학만큼 악랄한 사용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A대학에서 시간당 5만300원씩 1강좌, B대학에서 3만원씩 2강좌를 하는 김씨의 한 달 급여는 88만2400원이다. 방학 때는 계절학기 강좌를 잡지 못하면 수입은 0원이 된다. 적은 월급보다 더 힘든 것은 다음 학기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김씨는 “어떤 설명도 없이 다음 학기 시간표에 이름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했다. 당장 다음 학기의 수입을 예상할 수 없으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도 어렵다.

1995년부터 시간강사로 일해 온 한수경씨(42·가명)는 “50대가 되어서도 이렇게 살아야 하나 생각하면 불안하다”고 말했다. 한씨는 “공부가 좋아 적게 벌어도 공부하며 늙자고 생각했는데 한 달에 50만~60만원 수입으로는 하루하루 버티기도 힘들다”고 말했다. 한씨는 “강사 자리는 알음알이로 채용되기 때문에 그나마 있는 강의라도 잘리지 않으려면 단체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 시간강사는 “다들 쉬쉬하지만 시간강사들의 이혼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1999년 이후 시간강사 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열악한 처우가 몇 차례 사회문제화됐지만 그때뿐이었다.

대법원은 지난해 “시간강사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판결했으나 현실은 그대로다. 학교 노동자라는 특성상 이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서는 근로기준법 외에 특별법을 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법과 노동법 사이에 끼어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강사의 교원으로서의 법적 지위 확보가 시급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2004년 국가인권위에서 차별개선에 대한 권고안을 교육부에 냈으나, 교육부는 뚜렷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지방의 한 국립대에서 10년 가까이 시간강사로 일해 온 하모씨(49)는 “대학은 해고도 편하고 임금도 적은 시간강사들을 쉽게 쓰고 버리고 있고, 정부는 모른 척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동애 교원법적지위쟁취특별위원장은 “시간강사는 일반 직장인보다 10년 늦게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며 “학문이나 직업의 특수성은 전혀 인정되지 않고 다른 길을 찾기도 힘든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반항할 겨를도 없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말했다.(장은교기자)

08. 08. 01.

P.S. 시간강사 문제에 대해서는 두 차례로 나뉘어 게재된 한겨레21의 르포기사가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대학의 작은 지옥'(http://h21.hani.co.kr/section-021046000/2008/08/021046000200808070722057.html)과 '정규직 교수가 비극을 끝내라'(http://h21.hani.co.kr/section-021046000/2008/08/021046000200808140723013.html)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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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정규 교수가 쏘아 올린 작은 공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4-25 21:21 
    이번주 신간 국내서 중에는 작년에 비정규 교수(시간강사) 문제를 다룬 프레시안의 연재 '벼랑 끝 31년, 희망 없는 강의실'을 묶은 책도 포함돼 있다. 해가 바뀌어서 제목은 <비정규 교수, 벼랑끝 32년>(이후, 2009)이 됐다. 따로 서평이 뜨지 않아서 프레시안의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9. 04. 25) 32년 동안 모두 알면서 말하지 않은 정답  때때로 묻
 
 
paviana 2008-08-01 23:47   좋아요 0 | URL
며칠전 시간강사인 친구를 만났는데 백수인 제가 술값을 계산했어요. 방학이잖아요.사정 뻔히 아는데 계산하게 둘 수가 없더라구요.에이참..

람혼 2008-08-02 01:23   좋아요 0 | URL
갑자기 눈물이 울컥... ㅜㅜ

로쟈 2008-08-02 17:52   좋아요 0 | URL
저도 어디 가서 계산하는 일은 드뭅니다. 강사들만 있을 때를 빼곤.^^;

porori 2008-08-02 01:24   좋아요 0 | URL
제생각엔요...강사료가 저렇게 저임금이라면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하는 사람은 드물것 같습니다. 특히 교양과목이라면 학생들이랑 농담하면서 딱 60만원어치의 정보와 지식을 주지 않을 까요?? 학생들은 또 지적 소득없이 학점만 따 갈테고요... 또, 좋은 학점을 위해 학생들은 교수/강사에게 약간의 굴종을 해야 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아요. 왠지 악순환 같은데요..
학생입장에선 학점 때문에 돈을 지불 하면서 '굴종'을 겪으니, 저로선 학생이 가장 약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털세곰 2008-08-02 16:34   좋아요 0 | URL
할 말은 아니지만 강사료 비싼 학교의 수업은 솔직히 신경 더 많이 씁니다. 강의평가도 있거든요. 강사로 싼 곳은 주는 만큼 한다는 생각으로 가끔 태업도 합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학생에 대해 약간의 "권한"을 갖고, 그것을 행사하기를 때로는 꺼리지 않는 제 자신을 발견하면서 상당히 놀라고 있습니다

로쟈 2008-08-02 17:55   좋아요 0 | URL
그게 요점입니다. 사실 학교와의 관계에서 강사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선뜻 나서질 못하는데요. 학생들이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업료를 내므로 교육 '소비자'입니다. 약자가 아니예요. 당연히 강사들 수업은 안 듣겠다고 당연히 보이콧해야죠! 대학에선 자질이 안되서 전임으로 못 뽑는다고 하니까...

anathema 2008-08-02 08:58   좋아요 0 | URL
작년에 시간강사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왕복 차비(저희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6시간)와 강사료가 같아서...

로쟈 2008-08-02 17:56   좋아요 0 | URL
그걸 대단찮게 생각하는 대학이 문제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06   좋아요 0 | URL
여기도 댓글들이 슬프네...제가 학교 다닐 때 29살 먹은 남자가 전임강사로 온 적이 있었는데 이젠 이런 일은 없겠죠?

로쟈 2008-08-02 17:57   좋아요 0 | URL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강사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대우는 반에 반 수준도 안되는 게 문제입니다. 그걸 감수하는 강사들의 '마인드'도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안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23   좋아요 0 | URL
더 슬퍼요...

로쟈 2008-08-03 00:31   좋아요 0 | URL
최석하의 '죽'이란 시가 생각나네요.ㅠㅠ

천재뮤지션 2008-08-03 11:26   좋아요 0 | URL
그 놈의 BK21. 휴...
전 그래서 이제는 민간차원의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직 구체적인 방안은 잘 모르겠지만...

(자선의 정치.)

로쟈 2008-08-03 20:29   좋아요 0 | URL
구체적인 방안이 떠오르면 알려주시길.^^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0   좋아요 0 | URL
그리고 우리나라 호칭문제인데 같은 나이라도 교수는 무슨 무슨 교수인데 시간강사는 무슨무슨 씨라고 해서 구별을 짓더라구요.우리나라 호칭에 직함이나 직업 붙이는 관행이 굉장히 잔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사실 저는 모두 씨를 붙이는 평등호칭을 찬성합니다.시사잡지 보면 80년대까지 그랬거든요.

로쟈 2008-08-03 20:28   좋아요 0 | URL
미시정치죠.^^ 퇴직하거나 사직해도 '전(前)교수'라고 붙이죠. 장관이나 의원처럼. 예전에 교수가 드물던 시절에는 사회적 예우였겠지만(검사들이 영감님 행세하던 시절) 요즘은 그저 '관행'으로 남은 듯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50   좋아요 0 | URL
예...그 전 장관이니 교수니 그런 것 좀 없앴으면 좋겠어요.특히 라디오 시사프로에서 진행자가 그렇게 부르면 진짜 이상해요.그런 관행 때문에 직함이나 이런 걸 강조하는 풍토가 안 없어지죠.인간 자체를 존경하는 호칭이 없어요. 저는 어린이에게 존대말 쓰자는 방정환 님의 뜻을 따르고 있죠.

로쟈 2008-08-04 13:13   좋아요 0 | URL
한국어 경어체계는 미덕과 악덕을 고루 갖춘 듯합니다...
 

며칠전 서점에 들렀을 때 프랑스의 '신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책이 깔려 있기에 의외다 싶었다. 더 의외인 건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프로네시스, 2008)란 타이틀. 같이 나온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프로네시스, 2008)은 여러 차례 출간됐던 책이므로 '오래된 새책'이고 작년에 썼다는 <그럼에도 나는 좌파다>와는 30년의 터울이 있으니 합해놓으면 '프랑스의 한 좌파 지식인'의 30년 궤적이 되겠다. 레비의 입장에 동의하진 않지만(최근에 읽은 수잔 벅모스나 지젝 같은 좌파에 나는 더 끌린다) 그의 포지션은 한국사회에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적으로, 그가 '반미주의에 반대하는 좌파'이기 때문이다. 가령 '친미 좌파'는 한국에서라면 좌우 모두가 불편해하는 포지션이다. 그런 '불편함'이 지난 프랑스 대선에서 사르코지의 친구이면서도 루아얄(사회당)에 투표했다는 레비의 의의가 아닐까 싶다(한국에서는 그게 가능할까?).

경향신문(08. 08. 02) “반자유주의·반미주의는 좌파가 뿌리쳐야할 ‘유혹’들이다”

저자 얘기부터 해야겠다. 그것이 이 현란하고도 신랄한 책을 읽어내는 출발점이기에.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저널리스트. 서른살이던 1977년 처녀작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을 통해 인간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신철학’을 주창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좌파와 우파, 서구 제국주의와 제3세계 군부독재, 부시와 후세인 등을 싸잡아 공격해온 성역 없는 비판자. 스스로를 반-반미주의자(anti-antiamericanist)라고 부르는 인물. ‘친미 지식인’ 또는 미디어 노출을 즐기는 ‘지식-언론인’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보스니아, 수단 등 세계의 분쟁지역에 직접 뛰어들어 적극적 관심을 호소하는 현실참여 지식인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 출간된, 매혹과 환멸이 뒤섞인 현기증 나는 나라 미국을 탐색한 ‘아메리칸 버티고’를 기억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그런데 그가 때늦은 ‘이념 고백’을 했다. “나는 거의 유전적으로 좌파이다. 좌파는 내 가족과 같다. 그러므로 자기 가족을 와이셔츠 갈아입듯 바꾸는 법이 아니다”라고. 책의 집필은 2007년 1월23일 시작됐다. 프랑스 차기 대통령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던 니콜라 사르코지와 통화를 한 직후다. 저자는 20년 넘게 우정을 쌓아온 사르코지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역시” 좌파 후보(세골렌 루아얄)에게 투표했다. 30년 동안 그와 투쟁을 같이 해온 앙드레 글뤽스만이 우파로 전향하는 등 지식인들의 ‘우파로의 이동’이 이뤄지던 때다.



책은 레비가 왜 좌파를 끝까지 고수했는지에 대한 변론서인 셈이다. 더 나아가 선거에서 패배한 좌파의 몰락을 냉정하게 직시하면서 좌파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좌파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성찰했다. 원제를 직역하면 ‘나자빠진 거대한 시체’. 사르트르가 1960년 알제리 전쟁이 끝난 후 암울했던 시기 좌파를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우선 자신을 비롯한 프랑스 좌파의 정체성을 관통하는 네 가지 정신적 유산을 거론한다. 드레퓌스 사건, 비시 정부, 알제리 전쟁, 68혁명. “좌파에 속한다”는 것은 이 각각의 사건에서 드러난 인권수호, 반파시즘, 반식민주의, 반권위주의·반전체주의라는 ‘반사작용’을 이용하는 방법을 되찾고 그것들을 ‘함께’ 작동시킬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것은 인권문제를 등한시하는 반식민주의나 반파시즘 정신이 결여된 68혁명 정신 등 균형을 잃은 반사작용이다.

책은 이어 오늘날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저자가 보기에 20세기 좌파의 몰락은 전체주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그 결과 붉은색의 전체주의인 공산주의와 갈색의 전체주의인 나치즘의 결합이 목도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전체주의적 유혹의 붕괴 이후 그것을 대신하는 두 번째 유혹이 횡행하고 있다. 이 두 번째 유혹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그 유혹이 좌파가 아닌 우파적 영감에서 얻어졌다는 것. 저자가 “우파적 좌파” “현기증을 일으키는 좌파”라고 비판하는 지점이다.

저자는 좌파가 뿌리쳐야 할 유혹들로 반자유주의,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파쇼이슬람주의, 보편성의 위기 등을 꼽는다. 우선 반자유주의. 혹 그것은 자유주의를 지구상 모든 악의 원천으로 돌림으로써 지역 국가들을 독차지하고 국민들을 약탈하는 엘리트들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는 것 아닌가. 그리고 ‘반자유주의적 수사’에 담긴 파시스트적이거나 나치적 수사학을 간과하지는 않는가. 저자는 이 부분에서 최근 조르주 아감벤이나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반자유주의가 결국 나치즘으로 향했던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가 재발견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다음은 반미주의. 할 말이 없을 때마다 “그것은 미국의 잘못”이라면서 미국을 인류의 모든 죄악과 과실의 동의어로 만드는 것은 좌파들을 같은 함정에 빠지게 하는 것 아닐까. 저자는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라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반미주의에는 반유대주의가 숨어있다. 저자는 반미·반제국주의가 ‘제국 대 반제국의 대립’ 구도 이외 모든 문제들의 발언권을 박탈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세계 각지의 억압받고 핍박받는 자들의 고통을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좌파가 반미·반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파쇼이슬람세력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흩어지고 나뉘어진 인류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차별주의’라는 낡은 독트린이 대거 회귀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인권·사람에 대한 존중 등 보편주의를 통해 차별주의의 유혹을 추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카뮈, 사르트르 등을 거론하면서 ‘감상적 좌파’에 맞서는 ‘우울한 좌파’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회의적이었지만 투쟁하고 염세적이었지만 검소하고 실천적이었으며 권력을 무거운 부담으로 여겼던 이들 말이다.

프랑스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출발하고 있어 따라잡기 쉽지 않은 책이다. 게다가 옮긴이의 말처럼 “거의 폭력에 가까운 다양하고도 많은 정보”가 수많은 인용과 비유, 화려하면서도 호흡이 긴 문체에 녹아들어 있다. 옮긴이가 세세하게 달아놓은 수많은 주석과 함께 읽어내는 끈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저자가 프랑스 좌파의 과제들로 제시한 화두들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에 다름 아니다. 특히 프랑스와 우리나라, 둘다 실용주의와 경제 우선 정책을 내세운 우파 후보가 나란히 승리한 공통점을 지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시사점도 적지 않다. 저자가 사르코지에게 표를 던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 “경제적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의 태도” “사르코지가 표방한 실용주의, 아니 기회주의” “어떤 사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기 때문”. 30년 전 출간된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도 새롭게 번역돼 나왔다.(김진우기자)

08. 08.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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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02 01:28   좋아요 0 | URL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귀환'에는 저 또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측면이 있지만, 그의 '위치' 자체가ㅡ오히려 현재에 더ㅡ'문제적'이라는 점은 저 역시 공감하게 됩니다.

로쟈 2008-08-02 18:02   좋아요 0 | URL
친미 보수주의자들이 이 정도 포지션으로만 이동해도 '대화'가 좀 되지 않을까 라는 게 제 '망상'입니다...

람혼 2008-08-03 03:44   좋아요 0 | URL
120% 동감합니다.

드팀전 2008-08-02 15:44   좋아요 0 | URL
반미주의는 바보들의 진보주의다..라는 말이 재미있군요.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무곳에나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붙이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요. 그렇게 말해버리면 이해하기는 쉽지만 그걸로 놓치는 것들이 또 얼마나 많을지..

로쟈 2008-08-02 18:01   좋아요 0 | URL
'반미=좌파'라는 프레임을 깨는 것이 좌파의 확장이 될는지, 투항이 될는지는 어조 잘 모르겠습니다. 한데, 사실 촘스키나 하워드 진을 '반미 좌파'라고 분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구요(미국 정부를 비판하지만 그들은 미국을 사랑하잖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4   좋아요 0 | URL
이 양반이 1990년대 초에 쓴 <자유의 모험>을 봤는데 어째 좀 삐딱하고 냉소적인 거 같아요.재주는 많은데 경박한 것 같기도 하고...<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은 주로 진보파들을 때렸기 때문인지 당시 황혼기의 사르트르가 격하게 욕했다고 하더군요.

로쟈 2008-08-02 17:59   좋아요 0 | URL
외모도 출중한 테레비-지식인이죠. 다만 '친미 좌파'라는 포지션이 우리에겐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1   좋아요 0 | URL
이제 세월의 심술이 그의 외모에 나타나더군요.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 우리나라에 막 주간 조선에 번역되던 때의 사진은 배우 같더군요.그때가 1978년인데...물론 저는 그 당시의 주간 조선을 10여년 전 헌책방에서 1년치를 구했어요.혹 제 나이에 대해 오해하실까봐 알려드려요.

로쟈 2008-08-02 23:46   좋아요 0 | URL
그래도 미니멈 40대 중반이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21   좋아요 0 | URL
40대라뇨! 제 몸매와 목소리가 20대인데...얼굴은 10대! 보약을 잘 못 먹은 10대처럼 생겼지만요.어우...사진을 공개하든지 해야지 안되겠어요.

로쟈 2008-08-03 20:29   좋아요 0 | URL
'미니멈'인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0:40   좋아요 0 | URL
헤헤헤...그냥 화끈하게 직설적으로 20대라고 해주시면 안되나요?미니멈하면서 애매하게 하는 것보단요.

로쟈 2008-08-03 22:47   좋아요 0 | URL
화끈하게는 50대 후반이신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03 23:21   좋아요 0 | URL
으....

2008-08-03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4 22:53   좋아요 0 | URL
헤헤헤...
 

교수신문에서 좀 지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중국 칭화대에서 공자철학을 강의하는 서양인 교수에 관한 것이다. '화제'거리여서 옮겨놓는 건 아니고(하지만 한국대학에서 퇴계철학을 강의하는 벽안의 교수를 상상해보는 것도 흥미롭긴 하다), 기사 중에 한국 기독교인을 가리켜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부른다는 대목이 눈에 띄어서이다(사실 한국 기독교인들도 제사를 거부하는 것 말고는 유교적 인간 아닌가?). 참고할 만한 관련서들을 잠시 생각해본다(찾아보니 '윤동주 시에 나타난 유교적 기독교'를 다룬 논문도 눈에 띈다).  

교수신문(08. 07. 07) 碧眼의 이방인은 ‘유교’를 어떻게 가르칠까

중국대학에서 서양인이 공자철학을 중국인에게 가르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다니엘 벨 (Daniel A. Bell) 중국 칭화대학 교수가 종종 듣는 말이다. 유교의 종주국에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유교를 강의한다는 것은 마치 뭍에 사는 토끼가 물에 사는 고기에게 어떻게 헤엄치는가를 가르치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벌써 4년째 하고 있다.

 

캐나다인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하던 벨 교수는 운명을 바꾸는 만남에 마주쳤다. 바로 중국인 부인을 만난 것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중국에 ‘올인’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을 순순히 받아들인 벨 교수는 그 후로 중국에 와서 중국인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고 있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려는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 복도 굴러왔다. 그는 방문교수 신분으로 왔지만, 현재 중국 명문 칭화대학 정교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교수직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박사학생 지도교수’ 자리에까지 빠르게 승진했다.

벨 교수는 칭화대학이 문화혁명(1966~1976)이후 처음으로 인문학부에 채용된 외국인 교수다. 그는 또한 중국지도층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공산당간부 양성의 산실인 공산당중앙학교에서 열린 비공개회의에 초대받기도 했다.

영국 가디언紙 블로그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그는 중국에 온 이후 발견한 서양인의 중국에 대한 ‘오해’를 지적한다. 예를 들면 “중국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전제주의 국가가 아니다. 대부분 서양국가의 중국에 대한 생각과 정책은 중국에 대한 편견에 기인하고 있다. 싱가포르에 비하면 중국은 학문자유의 천국이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의 이런 ‘중국옹호’의 발언과 그가 중국인 부인을 둔 사실, 그리고 중국에서 받는 특별한 대접 때문에 많은 서양 사람들은 그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가 공산당에게 세뇌당한 줄 알아요,” 그가 칭화대 부근 한 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사실 그는 중국에 대해 좋은 점만을 말하고 다니지는 않는다. 중국에 대한 직언도 서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정부가 1989년 ‘천안문사태’의 희생자들에게 사과를 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대부분의 중국인은 그 때 중국정부가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에게 그처럼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현재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정부가 좀 더 ‘안정적이고 합법적이게’(stable and legitimate) 되면 언젠가는 사과를 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하버드대 유교학자 뚜웨이밍(杜維明) 교수는 한 강의 시간에서 유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동양의 중국, 한국, 일본 중 한국의 유교전통이 종주국 중국보다 현재 가장 강하게 남아있다고 말했다. 유교학자로서 다니엘 벨 교수 역시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개화기때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지식인들은 다름 아닌 유교학자들이었다. 서양학자들은 이들을 ‘유교적 기독교인’(Confucian Christian)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머리에 갓을 쓰고 않아 성경책을 읽었고, 교회에 가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서 찬송가를 불렀다. 기독교인인지만 생활방식은 여전히 유교적인 모습을 유지한 것이다. 벨 교수는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여전히 ‘유교적 기독교인’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교사상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역할도 했다고 분석했다. “유교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는 대학교수의 사회적 권위가 큽니다. 그들의 말은 영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독재 시절에 이에 반대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성명은 당시 정부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문화혁명뒤 유교가 많이 천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마르크스 사상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와 지식인들도 새로운 눈으로 유교를 바라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벨 교수가 말했다.(써니 리 / 중국통신원·베이징대 저널리즘 박사과정)

08. 08. 01.

P.S. 나는 한국인을 이해하는 키워드, 혹은 '문화적 DNA'가 '유교' '기독교'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었는데(10가지 코드는 강준만의 <한국인 코드> 참조), '유교적 기독교인'이란 개념 덕분에, 둘로 줄일 수 있게 됐다. 그런 관심 때문에 언제부턴가 읽어보려고 하는 책은 '벽안'의 도이힐러 교수가 쓴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아카넷, 2003)과 정수복의 <한국인의 문화적 문법>(생각의나무, 2007)이다. 리뷰들이야 여럿 읽어뒀지만 아무래도 직접 통독해봐야 생각할 거리들을 더 얻을 수 있을 듯하다...

P.S.2. 말이 나온 김에 도이힐러 교수의 관련기사도 옮겨놓는다. 한국학 전공자인지라 방한이 이례적인 건 아니고 작년 가을에도 한국을 찾았었다('한국사회의 기독교적 변환'이란 책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곧 이명박 장로님이 대한민국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할 텐데 말이다).

경향신문(07. 10. 11) 도히힐러 교수 “한국인들 한국학을 몰라”…‘지원 인색’ 꼬집어

“한국에서는 아직 ‘한국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72)는 11일 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린 ‘도이힐러 교수와 함께 한국학 40년을 회고한다’ 토론회에서 한국학의 국제화 수준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는 “한국학이 개설된 외국 대학에도 담당교수 1명이 어학, 역사, 문학, 경제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며 한국학에 대한 지원이 부족하다고 질타했다.

도이힐러 교수는 특히 국내 한국 관련 학문 연구자의 의사소통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한국 학계에는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연구자가 거의 없어 외국연구자와 토론하는 데 애를 먹는 일이 많다”고 지적하고 “한국사를 연구하더라도 국제화를 추구한다면 의사소통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위스 출신인 도이힐러 교수는 40년 전인 하버드대 유학시절 한국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는 1967년 한국 관련 자료를 얻기 위해 서울대 규장각을 찾아왔다. 도이힐러 교수는 “하버드대에서 구한말 외교사를 공부하던 중 서울대에 개항과 관련된 사료가 풍부하게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67년에 무작정 한국을 찾아왔다”고 회고했다. 이때부터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학의 매력에 푹 빠져든 도이힐러 교수는 73년에 다시 한번 한국을 찾았고, 75년에 스위스 취리히대 한국학 교수로 임용됐다. 88년 한국학 연구센터가 있던 런던대 교수로 부임한 그는 한국학의 불모지인 유럽에 한국학의 뿌리를 내렸다.

그는 92년 자신의 한국학 연구를 결산한 ‘한국의 유교적 변환: 사회와 이데올로기연구(하버드대 출판부)’를 발간, 한국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런던대 퇴임 후에도 취리히로 돌아가 한국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내 젊음을 바친 한국학을 더 파고들겠다”면서 “조선시대 사회사를 대한 논문도 곧 집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강병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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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02 16:25   좋아요 0 | URL
도이힐러 여사는 2003년 경에도 우리나라에 왔죠.한국남자와 결혼했는데 사별했고 한국에 올땐 시댁을 방문한다고 합니다.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보면 조선유교에 대해 너무 호의적인 해석을 하는 것 같기도 해요.마치 계몽사상 이전 유럽 지식인들이 중국의 관료정치인들을 칭찬하는 것과 비슷한 태도 같았어요.예전에 김용옥 씨가 "서양인이 어떻게 한문문헌을 잘 해독할 수 있겠느냐고 의심하지 말라.우리나라 학자보다 한문해석 실력이 더 뛰어난 이도 많다."고 했죠.그리고 도서관에 가시면 이번에 개정판 나온 이인화<머나먼 제국>뒤에 서평으로 나온 도날드 베이커(캐나다 브리티시 콜롬비아 대학 교수)의 글을 읽어보세요.그는 천주교를 수용한 조선 후기 유학자를 연구한 학자입니다.티비에서 보기도 했는데 정말 한국어를 잘 합니다.

로쟈 2008-08-02 20:15   좋아요 0 | URL
한국인이 서양학문을 하는 것보다 두 배는 어려울 텐데(적어도 우리는 무얼 읽어야 하는지는 알고 시작하지요), 여하튼 배울 점이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02 20:53   좋아요 0 | URL
미국인 중 한국학하는 이들 중에선 평화봉사단 출신이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