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9일자 가디언지에 소개된 지젝의 인터뷰(Q&A)를 옮겨놓는다(http://www.guardian.co.uk/lifeandstyle/2008/aug/09/slavoj.zizek). 인터뷰어는 로잔나 그린스트리트(Rosanna Greenstreet)이며, 우리말 번역은 다음카페 비평고원(http://cafe.daum.net/9876/39Cq/879)에서 가져왔다.  

Slavoj Žižek 

Slavoj Zizek, 59, was born in Ljubljana, Slovenia.

He is a professor at the European Graduate School, international director of the  Birkbeck Institute for Humanities in London and a senior researcher at the University of Ljubljana's institute of sociology. He has written more than 30 books on subjects as diverse as Hitchcock, Lenin and 9/11, and also presented the TV series The Pervert's Guide To Cinema.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어떤 행복한 순간을 기대했던 혹은 기억했던 몇 번 - 그것이 발생하고 있었던 때는 결코 아니다.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에 깨어나는 것 - 그래서 나는 곧바로 화장되기를 원한다.

가장 어릴 적의 기억은?
어머니가 벌거벗고 있던 기억. 역겨웠다.



가장 존경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아이티의 두 번 파직된 대통령. 그는 절망적인 상황에서조차 인민을 위해 무엇이 행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다.

당신 자신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타인들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

타인들에게서 당신이 가장 개탄하는 특성은?
내가 필요로 하거나 원하지 않을 때 나에게 기꺼이 도움을 주겠다고 하는 그들의 얄팍한 심성.

가장 당혹스러웠던 순간은?
사랑을 나누기 전에 한 여자 앞에 벌거벗은 채 서 있었을 때.

자산을 별도로 하고, 당신이 구입했던 가장 값비싼 것은?
새로운 헤겔 선집 독일어판.

가장 소중한 소유물은?
앞의 답을 볼 것. 

당신을 침울하게 만드는 것은?
우둔한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일.

당신의 외모에서 가장 싫은 것은?
나를 나의 실제 모습으로 보이게 한다는 점.

가장 매력 없는 습관은?
말하는 동안 내 손의 우스꽝스럽게 과도한 틱.

가장무도회의 의상을 고른다면?
내 얼굴에 나 자신의 마스크를 써서, 사람들이 나를 나 자신이 아니라 나인 척하려는 누군가로 생각하게 하고 싶다. 



가장 죄책감이 드는 쾌락은?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당혹스럽도록 애처로운 영화를 보는 것.

부모에게 빚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를. 나는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 일 분도 소비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 가장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리고 이유는?
나의 아들들. 충분히 좋은 아버지가 되지 못해서.

사랑의 느낌은?
거대한 불운, 기괴한 기생물, 일체의 소소한 쾌락들을 망쳐놓는 항구적인 비상상태.

일생의 사랑은 무엇 혹은 누구인가?
철학. 비밀이지만, 나는 현실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냄새는?
썩은 나무 같이, 부패된 자연.

그런 뜻이 아니면서 "널 사랑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언제나. 정말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나는 단지 공격적이고도 고약한 언급들을 함으로써 그 사랑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가장 경멸하는 생존 인물은, 그리고 이유는?
고문을 돕는 의사들.

당신의 최악의 직업은?
가르치기. 나는 학생들을 증오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대개 우둔하고 따분하다.

가장 큰 실망은?
알랭 바디우가 20세기의 "모호한 재앙"이라고 부르는 것. 즉 공산주의의 파국적 실패.

당신의 과거를 편집할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는가?
나의 탄생. 나는 소포클레스에게 동의한다. 즉 가장 큰 행운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 농담에도 있듯이, 이에 성공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어디로 가겠는가?
19세기 초 독일로, 헤겔의 대학 강의를 들으러.

어떻게 쉬는가?
바그너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얼마나 자주 섹스를 하는가?
섹스의 의미에 달려있다. 살아 있는 파트너와의 통상적 자위라면, 나는 전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죽음에 가장 가까이 갔던 때는?
가벼운 심장 발작이 있었던 때. 나는 나의 신체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에게 맹목적으로 봉사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를 거부했다.

당신의 삶의 질을 향상해줄 단 하나가 있다면?
노인성 치매를 피하는 것.

당신의 최대 업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헤겔에 대한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전개하는 챕터들.

삶이 당신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삶은 당신에게 가르쳐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어리석고 무의미한 것이라는 것.

우리에게 비밀을 하나 말해달라.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아래는 인터뷰 원문이다.

When were you happiest?
A few times when I looked forward to a happy moment or remembered it - never when it was happening.

What is your greatest fear?
To awaken after death - that's why I want to be burned immediately.

What is your earliest memory?
My mother naked. Disgusting.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admire, and why?
Jean-Bertrand Aristide, the twice-deposed president of Haiti. He is a model of what can be done for the people even in a desperate situation.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yourself?
Indifference to the plights of others.

What is the trait you most deplore in others?
Their sleazy readiness to offer me help when I don't need or want it.

What was your most embarrassing moment?
Standing naked in front of a woman before making love.

Aside from a property, what's the most expensive thing you've bought?
The new German edition of the collected works of Hegel.

What is your most treasured possession?
See the previous answer.

What makes you depressed?
Seeing stupid people happy.

What do you most dislike about your appearance?
That it makes me appear the way I really am.

What is your most unappealing habit?
The ridiculously excessive tics of my hands while I talk.

What would be your fancy dress costume of choice?
A mask of myself on my face, so people would think I am not myself but someone pretending to be me.

What is your guiltiest pleasure?
Watching embarrassingly pathetic movies such as The Sound Of Music.

What do you owe your parents?
Nothing, I hope. I didn't spend a minute bemoaning their death.

To whom would you most like to say sorry, and why?
To my sons, for not being a good enough father.

What does love feel like?
Like a great misfortune, a monstrous parasite, a permanent state of emergency that ruins all small pleasures.

What or who is the love of your life?
Philosophy. I secretly think reality exists so we can speculate about it.

What is your favourite smell?
Nature in decay, like rotten trees.

Have you ever said 'I love you' and not meant it?
All the time. When I really love someone, I can only show it by making aggressive and bad-taste remarks.

Which living person do you most despise, and why?
Medical doctors who assist torturers.

What is the worst job you've done?
Teaching. I hate students, they are (as all people) mostly stupid and boring.

What has been your biggest disappointment?
What Alain Badiou calls the 'obscure disaster' of the 20th century: the catastrophic failure of communism.

If you could edit your past, what would you change?
My birth. I agree with Sophocles: the greatest luck is not to have been born - but, as the joke goes on, very few people succeed in it.

If you could go back in time, where would you go?
To Germany in the early 19th century, to follow a university course by Hegel.

How do you relax?
Listening again and again to Wagner.

How often do you have sex?
It depends what one means by sex. If it's the usual masturbation with a living partner, I try not to have it at all.

What is the closest you've come to death?
When I had a mild heart attack. I started to hate my body: it refused to do its duty to serve me blindly.

What single thing would improve the quality of your life?
To avoid senility.

What do you consider your greatest achievement?
The chapters where I develop what I think is a good interpretation of Hegel.

What is the most important lesson life has taught you?
That life is a stupid, meaningless thing that has nothing to teach you.

Tell us a secret.
Communism will win.

08.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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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문답이라기는 애매하지만... &lt;가디언지에 실린 지젝 인터뷰 따라하기&gt;
    from La luna vino a la fragua, con su polisón de nardo 2008-08-29 00:02 
    수쟁님 댁에서 보고 나도 덩달아 따라하기~. 8월 9일자 가디언지에 나온 인터뷰에서 지젝이 받은 질문들이라고. http://www.guardian.co.uk/lifeandstyle/2008/aug/09/slavoj.zizek 아, 원 출처는 요기 http://blog.aladdin.co.kr/mramor/2250312 로쟈님의 알라딘 서재. 가져가도 좋을지 허락을 받는 게 먼저인데... 회원 덧글만 허용이라 그, 그냥 퍼오는 무례를... When w..
  2. franny의 생각
    from frannyglass' me2DAY 2009-01-28 19:32 
    오랜만에 을 다시 들춰봤더니 또 웃음이 슬금슬금. 귀엽잖여.
 
 
가을산 2008-08-19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문답이네요.
더불어서.... 로쟈님의 답도 궁금해요. ^^

로쟈 2008-08-19 22:53   좋아요 0 | URL
지젝만큼 솔직하게 답하긴 어렵울 듯싶은데요.^^;

뽀르르 2008-08-19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분은 누구신지요? 굉장히 비관적이시네요
ㅋㅋㅋ


로쟈 2008-08-19 22:53   좋아요 0 | URL
인터뷰 서두의 소개를 참조하시길...

마늘빵 2008-08-19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저도 퍼갈게요. ^^

로쟈 2008-08-20 11:58   좋아요 0 | URL
^^

람혼 2008-08-20 0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의, 지젝에 의한, 지젝을 위한... 마치 그의 사상적 요점들을 또한 마치 그만의 저 예의 농담과 유머들처럼 풀어내고 있는 간결한 답변들이군요. 읽으면서 계속 쿡쿡 웃어댔더니 배가 좀 아픕니다.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네, 진심을 농담처럼 얘기하는 게 주특기죠...

드팀전 2008-08-20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즐겁군요.정말로...

농담같이 진담을 이야기하는 방식이 제가 좋아하는 거에요. 지젝이 아니더라도
제가 바보같은 배트맨보다 조커가 좋은 이유가 그것이기도 하네요.
why so serious? ha ha ha...

갑자기 저도 따라해보고 싶어지는데요...ㅋㅋㅋ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벌써 많이들 따라하시더군요.^^

허리우스 2008-08-20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 허허 공산주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비밀을 누구가 알고 있을까요. 이거 비밀인데 ^^

로쟈 2008-08-20 11:57   좋아요 0 | URL
네,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비밀입니다.^^;

nada 2008-08-20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한 질문도 진부하게 넘기지 않네요. 헛스윙이나 파울볼 없이 최소한 1루타, 2루타를 꾸준히 날려주시는 센스.^^ 본인은 센스고 나발이고, 그저 만사 귀찮다는 듯한 식이지만요. 마지막 항목이 홈런이네요.ㅋㅋ

로쟈 2008-08-20 11:56   좋아요 0 | URL
모처럼 저도 '홈런' 장면을 따왔군요.^^

뽀르르 2008-08-20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부끄런 리플을 달다니 땀이 다나네요.ㅋㅋㅋ
지젝이 로잔나 그린스트리트라는 분을 인터뷰한글인줄 알았습니다.
아는게 지젝 얼굴과 이름뿐이었던지라 이런 황당한 리플을 남겼네요
예전에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이걸로 지젝을 접해보려다 실패한 사람입니다.
무엇부터 읽을지 조사해보고 다시 시도해봐야겠다는 두리뭉실한 마음만 먹어봅니다.^^

로쟈 2008-08-20 22:03   좋아요 0 | URL
잘못 보신 거군요. 저도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낭만인생 2008-08-2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다만 부활할 뿐입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모든 세력의 종착역은 보수주의 폐쇄적 권력집단이며, 공산주의는 권력이란 존재의 태아기일 뿐입니다. 더 이상 북한도, 러시아도, 중국도 공산주의는 아니다.
권력집단일 뿐이다.
진정한 공산주의는 항상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채 막을 내린다.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다.

로쟈 2008-08-20 22:04   좋아요 0 | URL
'부활' 정도라면 놀랄 만한 '비밀'은 아닌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티드 관련한 번역에서 what can be done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영어 번역인데 수동태 번역으로 하니 좀 이상하군요.여하튼 아리스티드를 좋아한다니 저와 공통점입니다.18세기 말 아이티의 투쎙 류베르테르는 프랑스에 맞서 노예 해방 투쟁을 하다가 옥사했고 20세기 말엔 아리스티드가 미국에 맞서 해방신학의 정신으로 싸웠으니 아이티의 역사는 기구하기도 합니다.

로쟈 2008-08-20 23:16   좋아요 0 | URL
네, 영어 번역으론 본때가 좀 안 납니다.^^ 아리스티드에 관한 자료도 좀 소개돼 있나요? 아, <가난한 휴머니즘>이 소개돼 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투셍 류베르테르의 투쟁을 전세계에 알린 책이 제임스<블랙 자코방>입니다.그리고 지젝의 답변 중에서 또 맘에 드는 것이 효도 이념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

로쟈 2008-08-21 10:02   좋아요 0 | URL
네, <블랙 자코뱅>(필맥, 2007)도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무해한모리군 2008-08-21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인터뷰네요.. 기억해 놨다가 써먹어 볼까 싶기도 하네요 ^^

로쟈 2008-08-22 12:46   좋아요 0 | URL
이미 써먹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1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람진이 젊었을 땐 투셍 류베르테르를 존경했대요.그래 놓고 나이들어선 알렉산드르 1세와 친구가 되는 등 왕당파가 되다니...

로쟈 2008-08-22 12:45   좋아요 0 | URL
카람진은 귀족이었는데, 당연한 것 아닐까요? 당시에 다른 포지션은 가능하지도 않았는데요...

쥬베이 2008-08-22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자님 메인사진의 주인공인가요?
비슷하게 생겼네요ㅋㅋㅋ

로쟈 2008-08-22 12:46   좋아요 0 | URL
이제야 아시다니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젊어서 진보주의자였다가 나중에 보수파가 되는 인물은 흔하지만 까람진이 한때나마 유색인종을 존경했다는 것은 매우 드문 사례라서 굉장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는 왕당파가 된 뒤에도 류베르테르를 계속 존경했을까요? 궁금해지는군요.

로쟈 2008-08-23 21:06   좋아요 0 | URL
카람진 얘기는 어디에 나오는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스니아 내전 때 지젝은 뭘 했나요? 요네하라 마리의 <대단한 책>에는 '세르비아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슬로베니아'라는 이미지는 조작되었고 사실은 슬로베니아가 세르비아를 도발했다는 견해가 소개되어 있던데요.지젝 집안도 카톨릭인가요? 물론 지젝은 아니겠지만.

로쟈 2008-08-23 21:02   좋아요 0 | URL
유사한 질문은 받고 지젝이 답한 부분이 있는데, 어느 책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지젝의 집안사정은 저도 모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S.미르스끼<러시아 문학사>입니다.

로쟈 2008-08-23 23:22   좋아요 0 | URL
미르스키도 제가 학부때 읽은 것이니 기억이 안 날 만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 전 읽었어요.
서점에 나가 보니 까람진 소설선이 나왔더군요.정막래란 분이 번역했더라구요.이름이 특이해서...예전에 딸 많이 나오면 지었던 이름 같기도 하구요.그래서 까람진에 대해 한 번 알아볼까 해서 도서관에서 미르스키 책 찾아 19세기 전반기만 살짝 훑어봤죠.

로쟈 2008-08-25 00:09   좋아요 0 | URL
카람진은 사실 굉징히 큰 인물이고, 작가로서보다는 역사가로서 더 높이 평가받아야 합니다. 푸슈킨도 좋아하고 존경했지요. 일종의 롤 모델이었다고 할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람진이 역사 책 쓰다가 보수파가 되었다고 하더라구요.문장이 뛰어나서 그 러시아사가 꽤 잘 팔렸다고 하던데요.역시 대역사가는 대문장가! 푸슈킨은 진보적이라는 인상을 간직한 채 죽어서-게다가 결투라니! 얼마나 장렬한가요-어찌 보면 다행?이지요.

로쟈 2008-08-26 17:35   좋아요 0 | URL
푸슈킨은 생전에 이미 상당한 굴절을 겪었습니다. 20대 청년시절에나 제카브리스들의 우상이었고 봉기 이후엔 주변으로부터 의혹의 시선을 받았습니다. 황제와의 독대도 있었고, 모종의 타협이 이루어진 것이죠. 결과를 놓고 보자면 푸슈킨이 황제 니콜라이에게 배신당한 거지만. 푸슈킨은 '진보적'이라기보다는 '중용'과 '균형'을 지킨 작가라고 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지난주말 리뷰기사 중 <옛사람의 눈물>(글항아리, 2008)에 대한 것을 뒤늦게 읽었다. 제목만으로는 눈물 나지 않는데, 기사를 읽다 보니 마음이 무겁다. 죽은 이를 애도하는 조선시대 '만시(挽詩)' 모음집이다. 만시는 종류도 다양해서 "아내를 위해 지은 도망시悼亡詩, 친구를 위한 도붕시悼朋詩, 먼저 간 자식을 위한 곡자시哭子詩" 등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남을 대신해 지으면 ‘대만시’이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쓰는 건 ‘자만시’라고. '제망매가'가 만시의 '원조'쯤 되지 않을까 싶다. 삶과 죽음의 길이 멀리 있지 않다...

한겨레(08. 08. 16) 죽은 자를 애달파하는 남의 자의 토설

“통곡이 끝나도 또 눈물이 흐르고/ 그 눈물 거두니 또 울음이 터지네/ 울음이 터짐에 또 무슨 말을 하랴/ 그저 애간장만 마디마디 끊어질 뿐”

조선 영조 때 좌의정을 지낸 조태억이 둘째아들을 잃고서 남긴 오언절구 10수의 마지막 작품이다. 이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를 ‘만시’(挽詩)라 한다. 한문학자 전송열(연세대 강사)씨의 <옛사람들의 눈물>은 조선 시대 만시를 종류별로 모아 엮고 작품의 배경과 미학적 특징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책이다.


“우리 형의 얼굴은 누구를 닮았던가요/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형을 보곤 했지요/ 오늘 형이 그리운데 어디 가서 볼까 하다/ 옷매무새 바로 하고는 시냇물에 비춰봅니다”

연암 박지원의 시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워하며>다.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호가 난 연암이지만, 산문에 주력하느라 그가 쓴 시는 15수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아버지와 두 형제 사이의 닮은꼴 외모를 통해 아버지와 형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솜씨는 ‘역시 연암’이라는 찬탄을 자아낸다.

만시의 대상은 가족과 친구, 또는 스승이나 제자가 대부분이었지만, 남을 대신해 지은 ‘대만시’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쓴 ‘자만시’도 없지 않았다. 특히 부부유별의 엄격한 유교적 법도가 중시되던 조선 사회에서 만시는 점잖은 선비들이 사별한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거침없이 표현할 통로가 되기도 했다.

“뉘라서 월모에게 하소연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추사 김정희가 유배지 제주에서 아내의 죽음을 한 달여 만에 알고서 쓴 작품이다. 월모란 자식을 점지하는 삼신할미처럼 배우자의 인연을 맺게 해 준다는 전설 속의 노파를 가리킨다. 흥미로운 것은 죽은 아내에 대한 안쓰러움보다는 그렇게 아내를 떠나 보낸 지아비의 아픈 심사를 더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추사가 자기 중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살아서도 이별했는데 이제 죽어서 또 이별함을 참담히 여긴다”며 “저 푸른 바다 저 긴 하늘과 같이 나의 한은 끝이 없을 뿐”이라 탄식한 산문 ‘애서문’(哀逝文)을 추사의 알리바이 삼아 읽어 볼 만하다.

“문을 들어서려다 다시 나와서/ 고개 들어 바쁘게 두리번대네./ 남쪽 언덕엔 산 살구꽃이 피었고/ 서쪽 물가엔 해오라기 대여섯”

조선 후기의 빈한했던 선비 이양연이 처와 둘째아들을 연이어 잃고 쓴 <슬픔을 피하려고>라는 작품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몇 달 상관으로 떠나 보낸 가장의 아픔이 은근하면서도 둔중하게 다가온다. 제목에서 보듯, 슬픔을 표나게 내세우는 대신 ‘딴청’을 부리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슬픔과 아픔을 자극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너희 남매의 혼은/ 밤마다 정겹게 어울려 놀겠지/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어찌 그것이 자라기를 바랄까”

“해 떨어져 하늘은 칠흑과도 같고/ 산은 깊어 골짜기가 구름과 같네/ 천 년토록 지키자던 군신의 의는/ 슬프게도 외로운 무덤뿐이로구나”

앞의 것은 비운의 여성 예술가 허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차례로 잃고서 쓴 <죽은 자식을 통곡하며>라는 작품이고, 뒤엣것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죽임을 당한 기준이 사약을 받고서 자신의 죽음을 읊은 ‘자만시’다. 어느 죽음이 무겁고 어느 죽음이 가벼우며 어느 죽음이 억울하고 어느 죽음이 통쾌하다 하겠는가. 계절처럼 오고 가는 생과 사 앞에 다만 옷깃을 여밀 따름.(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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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8-19 20:45   좋아요 0 | URL
이덕무도 슬픈 사연이 깃든 시를 썼었죠. 그의 어머니는 가난 때문에 얻은 폐병과 영양실조로 죽었고, 누이도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가서 영양실조로 죽었잖습니까. 이덕무가 정조에게 발탁되어 녹봉을 받기 전까지 너무 가난해서 굶는 일을 밥 먹듯이 하며 책까지 팔아야 했다는. "어두운 흙구덩이에 차마 어찌 옥같은 너를 어찌 묻으랴"는 제문은 막막한 글이죠.

로쟈 2008-08-19 22:54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하면 막막한 죽음들입니다...

2008-08-20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0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침에 경향신문에서 '정부수립 60주년' 기획기사 꼭지들을 읽었다. 최근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내세우는 '건국신화 만들기'에 '지배 엘리트의 승리만 있고 민중의 피나는 투쟁은 없다'란 지적에서 바로 떠올리게 되는 것은 벤야민의 역사주의 비판이다. 그가 보기에 역사주의는 승자들의 역사만을 기록한다. 반면에 역사적 유물론은 패자들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며 그들을 상기하는 것이다(벤야민의 경고는 따라서 진보주의적 역사관으로는 파시즘에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벤야민의 유명한 경구이지만,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다(그러니까 일면 부듯하더라도 양식이 있다면 큰소리로 떠들 것까지는 없는 역사다). 저들의 이승만 건국신화나 북한의 김일성 건국신화나 그러고 보면 한 통속이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를 내세우지만 역사관에서만큼은 서로 식별되지 않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경향신문(08. 08. 19) 이승만 건국에서 성공 씨앗 찾는 뉴라이트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가 추진 중인 ‘건국신화 만들기’가 위험한 것은 현대사를 바라보는 몇 가지 인식틀 때문이다. 우선 이들은 한국 현대사가 예정된 성공을 위해 걸어온 과정으로 본다. ‘기적의 역사’ ‘승리의 역사’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는 이러한 ‘역사 결정론’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이승만의 건국에서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성공의 씨앗이 배태돼 있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이승만의 건국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적화된 공산국가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라는 우익의 인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최근 극우 논객 조갑제씨가 했던 “박태환의 올림픽 우승은 이승만, 박정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말이 잘 보여준다.

역사 결정론은 한국 현대사가 건국,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이제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단계론’으로 이어진다. 해방 직후 공산화와 북한의 침략을 이겨내고 건국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그렇게 해서 성장한 중산층이 물적 토대가 돼 민주화까지 성취했으니, 이제는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해 다시 제2의 산업화를 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러한 관점의 문제는 이 도식의 레이더 망에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은 역사에서 배제된다는 데 있다. 가령 1948년 제헌헌법의 균등 교육, 토지 균분 등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친일파 처벌이라는 민족주의적 의제는 좌우 갈등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정부 차원에서 사라져버렸다. 진짜 건국 정신은 여기에 있는데도 이 정부와 뉴라이트는 그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주류 무대에서는 사라진 듯 했지만 끊임없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의 의제로 남아 이후 87년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는 토대가 됐고, 한국사회를 더욱 건강하게 하는 데 기여해오고 있다.

산업화가 먼저 있었기에 민주화가 가능했다거나 둘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었다는 주장도 그런 점에서 사후 합리화의 성격이 짙다. 민주화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누군가가 ‘빨갱이’로 지목돼 우리 사회에서 영원히 배제될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문제 제기하며 실천하려 노력했던 가치이며 그 결과로 민주화도 가능했다. 산업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민주화를 한 것이 아니다. 산업화가 일어나기 전의 4·19가 그렇고, 이명박 대통령도 참여했다는 6·3 항쟁이 그렇다.

신주백 국민대 연구교수(한국현대사)는 “뉴라이트 역사관으로는 이승만이 4·19 혁명에 의해 쫓겨난 일을 정면에서 주목할 수 없으며, 만주국군의 중위였던 박정희 같은 엘리트 장교 가운데 민족의 운명보다 일본의 운명과 자신의 미래를 동일시했던 반민족적인 성실한 기회주의자가 여럿 있었다는 점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들 역사관의 가장 큰 문제는 지배 엘리트 중심의 역사관, 승리의 사관이라는 점이다. 이는 현대사 논쟁이라고 하면 늘 이승만, 박정희 등의 정치 지도자 얘기로만 이뤄지는 것과도 관계있다. 여공과 식모, 건설노동자, 농민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또 짓밟힌 민초들의 삶은 간단히 무시해버리거나 그저 구색 맞추기 식으로 끼워넣는 정도의 인식이다. 홍석률 성신여대 교수(한국현대사)는 “역사란 다양한 가능성의 갈등과 그 역관계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며 “여러 가능성들 중 현실화된 한 가지 가능성만 보고 희생된 다른 가능성들과 그로 인한 갈등을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식의 역사 인식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려는 태도”라고 말했다.(손제민기자)

08. 08. 19.

 

 


 

P.S. 오늘 읽은 기사의 나머지 두 꼭지는 '이명박 정부의 국가정체성과 건국신화 만들기'(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4035)와 '이명박 정부와 뉴라이트의 위험한 현대사 인식'(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mode=view&code=210000&artid=200808181839225) 이다. 기사에서도 참고자료가 밝혀져 있지만, 이 주제와 관련하여 네 권만 꼽자면, 박찬표의 <한국의 국가형성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7), 참여사회연구소가 기획한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한울, 2007), 그리고 서중석 교수의 <한국 현대사 60년>(역사비평사, 2007)과 뉴라이트 지식인들이 펴낸 <건국 60년의 재인식>(기파랑, 2008)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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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8-08-19 20:54   좋아요 0 | URL
이명박 정권은 수순을 원칙적으로 잘 밟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제가 부디 오해하거나 잘못 본 것으로 확인되길 바라지만
이 생생한 현실이 너무너무 무섭습니다.

로쟈 2008-08-19 22:56   좋아요 0 | URL
이번주 시사잡지들은 모두 인천공항 민영화 플랜을 다루고 있더군요. 그걸 읽으며 '무서운 놈들'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19   좋아요 0 | URL
이번 주에 뉴라이트 계열 지식인들의 최근 글을 읽으며 그들의 건국론을 파악해 보고 있습니다.특히 이승만 살리기와 관련해서 보고 있습니다.제 서재에 그 감상을 올릴까 생각중인데 상상 외로 읽을 분량이 많군요.

로쟈 2008-08-20 23:22   좋아요 0 | URL
돈 주고 사서 읽을 생각은 없는지라 노이에자이트님의 감상이나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이번주 한겨레21에 실린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미리 옮겨놓는다.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정리한 글이다(사실 벤야민의 글은 '역사철학테제'란 별칭이 더 잘 들어맞는 텍스트이다). 분량상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었으므로 '희미한 정리'라고 해야겠다. 물론 내 몫은 텍스트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어떤 흥미를 유도하는 것이기에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겠다. 한겨레가 고집하는 '베냐민'이란 표기가 이번 만큼은 '벤야민'에 양보한 것도 개인적으로 흥미롭다...

한겨레21(08. 08. 26) 어떤 희미한 메시아적 힘

흔히 벤야민의 ‘마지막 텍스트’로 불리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가 <발터 벤야민 선집5>(길 펴냄)에 포함되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예전에 반성완 편역의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에 ‘역사철학테제’라고 옮겨졌던 글이다. 18개의 단장(테제)과 2개의 부기로 이루어진 짧은 글이지만 그의 역사관 혹은 역사철학을 집약하고 있는 텍스트이다. 압축적인 만큼 편하게 읽히지는 않지만 ‘관련 노트들’도 이번에 번역되어 읽기에 도움을 준다.

먼저, 벤야민은 자신의 역사관을 한 전설적인 자동기계에 비유한다. 이것은 서양장기를 두는 기계장치인데, 터키복장의 인형이 장기판 앞에 앉아서 상대방의 수에 응수하며 매번 승리한다. 신기해 보이지만 실상은 장기의 명수인 꼽추 난쟁이가 장치 안에 들어앉아서 인형의 손을 조종했을 뿐이다. 흥미로운 것은 벤야민이 이 기계장치의 인형을 ‘역사적 유물론’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는 신학을 그 왜소하고 흉측한 꼽추 난쟁이에 비유한다. 즉 역사적 유물론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신학을 자기편으로 고용하여 거느려야 한다고 벤야민은 주장한다. 분명 그의 역사관은 ‘역사적 유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이다. 한데 그 역사적 유물론은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와 한패이다. 그런 점에서 통상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난다.

‘신학과 결합한 역사적 유물론’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구원의 관념을 등장시킬 때이다. 특이한 것은 이 구원이 미래가 아닌 과거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과거는 그것을 구원으로 지시하는 어떤 은밀한 지침을 지니고 있다.”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예전에 다른 사람들을 스치고 지나갔던 바람이다. 우리가 귀 기울여 듣는 목소리 속에는 이젠 침묵해버린 목소리가 메아리로 울려 퍼진다. 우리가 구애하는 여인들에게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자매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렇게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들 사이에는 ‘은밀한 약속’이 놓여 있으며 앞서간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겐 ‘희미한 메시아적 힘’이 함께 주어져 있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러한 약속과 메시아적 힘을 발견하는 자이다. 때문에 과거의 역사가 원래 어떠했는가를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식의 역사주의는 역사적 유물론과 거리가 멀다. 그와 달리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역사를 균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의 연속으로 간주하는 역사주의가 정점을 이루는 것은 보편적 세계사 서술 같은 대목에서다. 거기서 보편사의 방법론은 그저 가산(加算)적이다. 역사주의적 역사서술은 연속적인 시간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사실의 더미를 긁어모으는 일에 바쳐진다. 반면에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역사서술은 하나의 구성이다. 그 구성의 장소는 균질하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이다. 이 ‘지금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를 지칭하는 ‘현재’가 아니라 그러한 연속체를 무효화한 시간이다. 따라서 멈춰진 시간이며 정지해버린 시간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가 직선적인 시간을 따라서 진보한다는 진보주의적 관념과도 이별한다. 벤야민에게 ‘진보’란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1920)에서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과거의 잔해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시키려고 하는 천사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세찬 폭풍, 곧 훼방꾼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역사의 천사, 곧 역사적 유물론자는 특정한 사건 속에서 메시아적 정지의 표지를 발견하고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하려 애쓴다. 그럼으로써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과정을 폭파시키고자 한다. 벤야민의 비유에 따르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주의라는 유곽에서 ‘옛날 옛적에’ 하는 창녀에게 몸을 던지는 일은 다른 이에게 맡긴다. 그 자신은 역사의 연속체를 폭파하기에 충분한 정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정력은 어떻게 발휘되는가? 1830년 7혁 혁명 때 파리 곳곳에서는 시계탑의 시계를 향해 사람들이 총격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고 한다. 혁명이란 시간의 정지이며 새로운 시간의 도입이기에 그렇다. 우리에게도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다.

08. 08. 18.

 

 

 

 

P.S. 두 종의 우리말 번역본과 함께 내가 참고한 것은 영어본 <선집>(4권), 그리고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이다. 지젝은 20쪽(235-255)에 걸쳐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가 갖는 함의를 자세하면서도 흥미롭게 풀어준다. 참고로, 240쪽에 인용된 벤야민 텍스트에서 '사적(史的) 주체'는 'historical subject'의 번역인데, 원문 자체가 'historical object'의 오식으로 보인다. '(역)사적 대상'이라고 옮겨야 할 듯싶다. 그리고 245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공포>는 <휴머니즘과 테러>로 옮기는 게 낫겠고, 255쪽에서 '현실 민주주의(real democracy)'는 '진정한 민주주의' 내지는 '진짜 민주주의'로 옮기는 게 좋겠다. 변질과 부패 가능성을 제거한 '순수한 민주주의'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보기에 그러한 순수한, 리얼한 민주주의는 비민주주의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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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행복의 조건과 인민생활 문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2-02 00:26 
    내일자 경향신문에 실리는 칼럼을 옮겨놓는다.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윤곽을 잡고 2시 가까이에 보낸 원고이다. 말미에 나오는 호손의 말은 어제 잠깐 훑어본 다니엘(대니얼) 네틀의 <행복의 심리학>(와이즈북, 2006)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성격의 탄생>(와이즈북, 2009)도 그의 책이다.   경향신문(10. 02. 02) [문화와 세상]행복은 나비와 같다   “행복한
 
 
sommer 2008-08-19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의 이 테제를 읽고 나서 한참 뒤에 어렸을 때 보았던 '이상한 나라의 폴'을 그의 역사철학으로 해석하고 싶은 유혹이 들더군요. 특히나 그의 '정지의 변증법(Dialektik des Stillstandes)'은 폴이 현재의 위기의 순간 혹은 결정의 순간마다 현재시간을 정지시키고, 피폐하기 짝이 없는 현실의 그 곳을 빠져나와 마왕에게 잡혀있던 리나/과거의 상을 구하려 떠나고 실패하는 반복된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숄렘의 언급에 대한 기억이 맞다면, 역사의 천사는 짧은 순간 노래 부르기 위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과거의 깨진 상들로 통하는 출구 혹은 그것의 시각화 같은 게 아닐까 가늠해 봅니다.

로쟈 2008-08-19 15:07   좋아요 0 | URL
어렴풋이만 기억이 나는 만화인데, 재미있는 해석입니다.^^

yoonta 2008-08-20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로쟈님 이번 번역본은 반성완본과 비교해서 어떻던가요?

로쟈 2008-08-20 23:21   좋아요 0 | URL
원고 쓰는 데 주안점을 두고 읽은지라 자세히 대조해보진 않았습니다. 몇몇 어휘 선택에서의 차이를 빼면 큰 차이는 없는 듯싶은데요...
 

지난주말 한겨레에 실린 강명관 교수의 '고금변증설'을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04576.html). '어제의 노비와 오늘의 비정규직'이란 제목 자체가 이미 많은 걸 말해주고 있다. 안 그래도 오늘 시사IN의 사회면에서 기륭전자 두 노조원의 단식 농성이 60일이 넘었다는 기사를 읽고(그게 가능하다니!) '대단한 한국사회!'란 말을 속으로 되뇌어야 했다(필자인 김현진씨처럼 동조 단식은 못하고 점심 한끼만을 굶었다). "누가 굶으라고 했냐?"가 사측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보다 선명한 '계급의식'(일상어로는 '악'이라고 한다)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하지만 생각하면 슬프다. 단식밖에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인지?)...

한겨레(08. 08. 16) 어제의 노비와 오늘의 비정규직

흔히 옛날 문헌을 읽고 인용하지만 그 진위가 의심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예컨대 <조선왕조실록> 같은 관찬 문헌은 어떤 정파, 혹은 당파가 실록을 편찬하느냐에 따라 기록의 출입이 적지 않고, 사건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다르다. 문헌에 남은 것이라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옛 문헌 중에서 사실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고문서를 들 수 있다. 이것도 조작이 가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으나, 그래도 고문서는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친다.

예전에 고문서를 연구한 책이나, 고문서를 모은 책을 훑어보곤 했는데, 의외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그중 내 눈길을 가장 끈 문서는 ‘자매문기’(自賣文記)란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남에게 파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문서’라는 뜻이다. 한두 가지 실례를 보자. 1862년 1월 서른한 살 된 사내 심성옥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 복례,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자식들을 50냥을 받고 원진사 집에 팔고, 자매문기를 작성한다. 문서 끝에는 차후에 만약 자신의 친척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이 문서를 증거로 내세우라는 말도 붙어 있다.

이 문서는 최승희 교수의 <한국고문서연구>에 나오는 것이다. 같은 책에는 자매문서 몇 장이 더 실려 있다. 1869년에 작성된 문서를 보면, 이미봉이란 사내가 흉년에 먹고살 방도가 없어서 자신과 자신의 딸을 돈 15냥에 아산군수를 지낸 김씨 양반에게 팔고 있다. 인신매매는 어떤 사회나 중죄인데, 이 경우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내와 자식, 여기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까지 모두 노비로 팔아먹고 있으니, 중죄 중의 중죄라 할 것이다.

이런 중죄를 저지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빈곤 때문이었다. 이런 부류의 자매문기가 적잖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가난에 시달리다가 자신과 가족을 부유한 사람에게 노비로 파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더 들어보자. 1731년에 작성된 자매문기에, 한영이란 사람은 굶주리고 얼어 죽을 지경이 되자 자신의 11살 된 딸 분절이를 아무 대가 없이 김귀일이란 사람에게 노비로 넘겨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1832년의 정정옥은 어머니의 장례 비용을 마련한다며 자기 아내와 자식을 돈 8냥과 쌀 한 섬을 받고 팔아넘기고 있다.

자신과 가족을 노비로 파는 사람은 당연히 양민이다. 이들이 만약 경작할 토지가 있다면, 당연히 자신과 가족을 팔지 않을 것이다. 농민이 토지를 잃고 쫓겨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소수 양반지주의 토지 집적이었다. 박지원이 ‘한민명전의’에서 역설하고 있듯,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바닥나면, 나라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라의 기민(飢民) 구제라는 것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신이 경작하던 땅문서를 부잣집에 넘기고 곡식을 받아 연명한다. 이 기회에 부자들은 얼마 안 되는 곡식으로 안방에다 토지 문서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흉년이 들면 팔 것도 없고, 빚은 쌓이고 해서 땅을 떠나고, 마침내 자신과 가족을 파는 처참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것이 농민의 운명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이 문제를 사회개혁의 핵심으로 생각했다. 경작하는 농민이 토지를 보유하는 것, 농민이 토지를 떠나지 않음으로 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실학자들 최대의 관심이었다. 이익이나 박지원이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분배해 주고 강력한 법을 제정해 그 토지는 절대 매매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흡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이 될 리 만무했던 것이다.

토지를 헐값에 양반에게 건네준 양민은 마침내 자신의 신체와 영혼까지 양반 지주들에게 넘긴다. 그들은 자신의 몰락이 모순된 양반 지배체제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당장 자신과 가족을 사들인 양반지주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이들의 은혜가 아니라면, 굶주려 산골짜기나 들판에 뒹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사회에는 노비제도 같은 후진적 제도는 없다. 자신과 가족을 파는 사람도 없다. 대신 노동력 외에 다른 수단이 없어 오직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자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문제는 그 노동력을 구매하겠다는 쪽이다. 옛날 양반들이 굶주린 백성을 노비로 사들이거나 말거나 제 마음대로였듯, 이제 자본은 노동력을 사들이거나 말거나 자유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젊은이가 도서관마다 넘치고, 자기 노동력을 제값에 팔지 못하고 궁핍에 전전긍긍 살아가는 비정규직이 수백만 명이다. 그들의 모습에 살기 위해 스스로를 팔아야 했던 조선시대 농민의 모습이 겹친다.

정치가 소수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술책이 아니라면, 국민들이 비정규직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먼 산에 난 불을 바라보듯 왜 딴청으로 일관하시는가. 비정규직의 애절한 호소가 들리지 않는가.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없으니, 날마다 신문이며 방송에 이 문제의 해결에 골몰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보여야 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 무엇인지를 나는 알 길이 없다. 아는 분들은 모쪼록 답을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강명관/ 부산대 교수 한문학)

08.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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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8-08-18 20:25   좋아요 0 | URL
노조원의 건강(혹은 목숨) 같은 게 쓸 만한 협상 카드가 될 거 같지 않아요.
저들이 겁낼 만한 걸 내걸어야 하는데, 눈도 깜짝 안 하잖아요.
정말 다른 방도는 없는 걸까요..

로쟈 2008-08-18 23:25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궁금합니다...

마늘빵 2008-08-18 22:29   좋아요 0 | URL
-_- 투쟁하고 시위하는 우리가 손해볼 짓은 안하는게 좋을거 같아요. 이런거 안 먹힌지 오래됐죠. 우리는 저들이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있을거라 전제를 깔고 시작하지만, 그 전제가 잘못됐다는 걸 항상 뒤늦게 깨닫습니다. 너무 인간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거죠. 양심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건 아니란걸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처럼 말하지만 사이코패스는 주변에 깔렸어요.

로쟈 2008-08-18 23:25   좋아요 0 | URL
네, 양심을 기대할 일은 아닌 듯해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8 23:20   좋아요 0 | URL
그런데 영세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는 한나라당의 든든한 핵심지지층이기도 합니다.그러니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즐기는 거죠.

로쟈 2008-08-18 23:24   좋아요 0 | URL
자영업자들은 그렇다고 쳐도 비정규직 노동자도 그런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19 00:16   좋아요 0 | URL
예.그렇답니다.어제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집권 15년 언론의 위기라는 KBS스페셜을 보니 거기도 택시운전사가 경제를 살릴 거라면서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한다고 말하더군요.

로쟈 2008-08-19 15:09   좋아요 0 | URL
그건 그럴 수 있겠는데요, 비정규적 노동자가 한나라당의 '핵심지지층'이라는 통계를 보셨나 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0 23:48   좋아요 0 | URL
서울의 모 기업체에서 비정규직으로 근무하는 이가 알려준 겁니다.그리고 경향신문이 지금도 특집기획으로 내고 있습니다만 올 초에도 비정규직에 대해 계급배반 투표를 하는 대표적인 직업군이라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하지만 이런 현상은 거의 세계 보편이라고 봅니다.그래서 레이코프의 책이 우리나라 정계에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