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연구로 유명한 문학자이자 철학자 미하일 엡슈테인 교수가 지난달 세계철학대회에 참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엡슈테인'은 가까이 있는 책장에도 그의 책들이 여러 권 꽂혀 있을 만큼 러시아문학도에게는 친숙한 이름이다(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문학자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보이는 몇 사람에 속한다. 홈피는 http://www.emory.edu/INTELNET/Index.html%20). 발표까지 들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교수신문에 인터뷰기사가 올라왔기에 스크랩해놓는다(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683).

교수신문(08. 08. 25) 테크네의 귀환

<교수신문>은 지난 7월 30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대에서 개최된 제22회 세계철학대회에 참관한 모하일(*미하일) 엡슈테인 교수와 조준래 성균관대 선임연구원(러시아문학)의 대담을 마련했다. 대담은 2008년 8월 7일 서울 서울역사박물관 내에서 이뤄졌다.

조준래: 얼마 전 폐막한 세계철학자대회의 의의와 성과에 대해 평가해달라.

엡슈테인: 첫 번째 의의라면, 통산 22회째 되는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철학자대회가 100년 이상의 명맥을 무사히 이었다는 데 있겠다(웃음). 둘째로, 형이상학적 측면에서 철학은 고독한 학문인 동시에, 본원적으로 소통과 대화를 요구하는 학문인데, 이런 철학의 특성이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비롯해 본 대회의 잘 조직된 운영방식과 조화를 이뤘단 점을 들 수 있다. 단점이라고 한다면, 프로그램과 달리 베르나르 앙리 레비, 주디스 버틀러, 장 뤼크 마리옹 등 소위 거물급 철학자들이 대거 불참한 점을 들 수 있다. 다양한 사정이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지 동료 철학자들의 큰 행사를 경시하는 것이 좋은 모습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준래: 이번 대회부터 유가, 도가, 불교 철학이 정식분과로 채택됐다. 한국 철학자의 발표에 대한 평을 해준다면. 또 세계철학에서 동양철학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당신의 견해는. 

엡슈테인: 20년 전부터 노장 사상 및 도가와 관련된 서적을 접한 뒤 꾸준히 연구하면서  현대 철학에서 서구 철학이 놓친 사상적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동양 철학이 계속 감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지금까지 서구 철학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실재와 비실재의 관계, 비실재의 생성적 힘에 대해 동양 철학은 직관적인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카오스이론, 복잡성이론, 시너제틱스 등 현대 과학에 의해 그 주장의 타당성이 꾸준히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향후 세계 철학계에서 동북아철학을 위시한 동양 철학의 목소리는 계속 커질 것이란 생각이다. 

조준래: 오늘날 세계 철학계의 주요 화두라면.

엡슈테인: 첫째는 2001년 9월 11일 사태를 계기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포스트모던 시대의 다음 단계인 새로운 문화적 지층이 태동했다는 점이다. 스티븐 호킹과 에드워드 윌슨처럼 오늘날을 ‘포스트(post-)’ 대신 ‘시작’을 뜻하는 ‘프로토(proto-)’의 시기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시뮬라크르의 권력에서 벗어난 미래와 현실은 예측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이고 새롭고 진지한 모습으로 다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식, 문화, 사회의 영역에서 새로이 대두하고 있는, 미궁과도 같은 ‘프로토’의 현상을 진단하는 데에 철학은 경주해야 한다. 둘째는 새 시대의 도래와 관련된 과학기술문명의 역할이다. 캐서린 헤일즈가 말한 ‘포스트휴먼(Posthuman)’은 사실 ‘프로토휴먼’을 의미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몸을 변형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의 제거가 아니라 인간성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철학 역시 과학에 대한 긍정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통해 이런 미래 문화의 발전을 논해야 된다.

조준래: 그렇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도덕성 역시 제고한다고 볼 수 있을까.

엡슈테인: 얼핏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과학과 기술, 통신수단의 발전은 인간의 도덕을 오히려 향상시킨다고 믿는다. 그것을 ‘테크노모랄’(techno-mor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기술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 간의 거리는 대폭 축소됐다. 이로 인해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와 일방적인 패배는 불가능해졌다. 핵무기만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제 군사적인 위협은 일방적이 아니라 상호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어느 일방이 상대방과 동일한 행동준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공멸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욕심에서 생겨난 테크놀로지가 타인의 입장을 보다 더 많이 고려하도록 우리를 인도했다는 데에 현대 문명의 역설이 있다.        

조준래: 이번 세계철학자 대회에서 발표한 주제도 앞서 말한 오늘날의 철학적 화두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엡슈테인: 윤리학 분과에서 ‘복합윤리학’을 뜻하는 ‘스테레오에틱스(stereoethics)’라는 주제를 발표했다. 인간의 행위를 이루는 선한 가치 역시 상황에 따라 서로 충돌하고 서로 모순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일하게 올바른 도덕적 선택을 단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시공간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도덕적 관점의 공존이 불가피함을 인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의 시력이 두 눈에 서로 다르게 비친 피사체의 결합을 통해 입체적인 형상을 얻듯이 윤리학 또한 복합적인 행동준칙에 의해 보강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즉, 나와 타자의 유사성과 공통적 인간성 뿐 아니라 서로 환원될 수 없는 나와 타자의 차이를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현대 윤리학의 과제다. 훌륭한 행위란, 나의 최상의 능력이 타인의 최고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는 경우의 행위, 나를 포함해 모두가 행하기를 원하고 또 그래야 하지만, 나 외에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행위를 가리킨다. 

조준래: 이런 ‘복합 윤리학’은 당신의 표현대로 ‘프로토-포스트모던’의 시대적 요청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새로운 문화 현상인 ‘트랜스컬쳐(trans-culture)’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한데.

엡슈테인: ‘트랜스-’(trans)라는 라틴어 접두사는 무엇을 넘어서거나 초월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트랜스컬쳐’란 말은 민족, 젠더, 직업 등에 의해 다양하게 구획된 문화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발전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말한다. 그것은 기존 문화에 대한 낯설게 하기와 외재성의 원칙, ‘자신의’ , ‘본래적인’ 문화에서 벗어나기 등을 전제로 구성된다. 트랜스컬쳐는 한 문화 내의 의미적, 기호적 틈새,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을 드러내며, 여러 문화의 교차점과 간극 속에서 새로운 상징적 환경을 창조한다. 트랜스컬쳐는 문화적 상대주의와 고립성을 전제하는 멀티컬쳐(multi-culture)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기를 초극해 자기 밖의 입장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타자와 소통하는 트랜스컬쳐의 관점만이 이념, 종교, 민족 다원화의 시대에 궁극적인 평화와 안정을 가져올 수 있다.

조준래: 오늘날 한국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일상화돼버린 지 오래다. 상투적인 질문이지만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을 들어본다면.

엡슈테인: 인문학, 특히 순수인문학의 위기가 초래된 일차적 원인은 현실과의 끈을 잃어버렸다는 데에 있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순수 인문학이든 모두 연구대상과 실용성의 두 측면을 갖고 있다. 여기서 실용성이란 학문이 연구대상과 접촉해 만들어내는 일종의 상부구조와 같은 것인데(예를 들면 자연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자연과 접촉하여 빚어낸 상부구조인 테크놀로지, 사회과학이 자신의 연구대상인 사회와 접촉해빚어낸 상부구조인 정책이 그렇다), 다만 순수인문학은 이들과 달리 어떤 상부구조, 어떤 실용적 측면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핸디캡으로 안고 있다. 이제 실질적인 대안으로 첫째, 인문학은 자신의 연구대상인 언어, 문학, 예술 등 문화 전반을 변형시켜야 한다. 이로써 생겨나는 새로운 학문을 저는 또 다시 ‘트랜스인문학’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가령 ‘트랜스언어학’은 인공언어를 생산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언어의 수준을 제고하는 학문이 될 것이며, ‘트랜스미학’은 시학과 미학을 통하여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면서 예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학문이 될 것이다. 둘째, 자연과학에서 전용돼 왔으나 본래 인문학의 용어였던 ‘테크네(techne, 예술, 기술)’를 인문학에로 되돌려 기존 인문학의 성과를 반성, 재가공하는 단계로 옮겨 가야한다. 인문학은 그 개념 자체에 내포돼 있듯이 과학과 예술의 종합적 형태로서 발전해 나갈 것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의 활로는 문화를 변형시키는 예술, 즉 ‘테크노-휴머니티’(techno-humanities)로서 인문학이 거듭날 때에 발견될 것이다.

미하일 나우모비치 엡슈테인(Mikhail Naumovich EpshteIn)

전공분야 러시아 출신의 철학자, 문예학자.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을 최초로 연구. 미국과 서유럽의 슬라브학을 비롯, 러시아학계 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을 최초 도입.

주요 저서  『잠재성의 철학』(2001), 『父性의 의미』(2003), 『여백의 기호: 인문학의 미래에 관하여』(2004), 『러시아 문학의 포스트모던』(2005), 『새로운 종파: 1970년~1980년대 러시아의 종교적, 철학적 지적 경향』(1993, 2005) 등.

주요 논문 「새로움의 역설: 19~20세기의 문학 발전에 대하여」(1988),「자연, 세계, 우주의 은신처: 러시아 운문에 나타난 풍경 이미지 체계」(1990),「전체주의 사유에서 상대주의적 모델: 소비에트 이데올로기 언어 연구」(1991), 「문화의 경계선: 러시아와 미국과 소련」(1995)외 다수.

08. 08. 27.

P.S. 엡슈테인의 책으로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되는 건 <새로운 황야에서의 외침>(2002)이 유일하다. 하지만 보다 유명한 책은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1999) 같은 연구서이며, 그의 이름을 알린 '출세작'은 <미래 이후(After the future)>(1995)이다(*<미래 이후의 미래>(한울, 2009)로 출간됐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설과 현대 러시아문화'가 책의 부제. 구글에서 찾은 아래 이미지는 뜻밖에도 국내 중고서점에 나와 있는 이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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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08-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디스 버틀러의 불참은 이미 대회 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잔뜩 기대감을 품은 채 장-뤽 마리옹의 육성을 듣고 그의 모습을 보러 갔다가 허탕만 치고 돌아온 저 같은 사람에게는, 엡슈타인이 말하는 저ㅡ슬쩍 냉소가 섞인ㅡ대회 의의에 대한 평가가 더욱 가슴에 다가옵니다. 대회에 참석한 동료 철학자들에게는 물론이고 저 같은 '일반 청중'에게도 실로 큰 결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개인적으로는 뷔넨베르제와 회슬레의 참가 정도가 그래도 철학자 대회의 '명맥'을 살려준 게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저로서는 '세계 철학'이 봉착한 어떤 '피곤함'과 '노회함'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음도 지나가는 길에 첨언하고 싶고요(그 피곤함과 노회함이 '포스트'를 '프로토'로 치환하는 개념적 작업을 통해 극복될 수 있을지도 살짝 의문입니다^^).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네, 약간 김이 빠진 편이죠. 그만큼 언론의 관심도 줄어든 듯하고...

푸른괭이 2008-08-27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덕, After the Future의 저자를 볼 기회를 놓치다니...! 지난 여름 최대의 실수..-_-;; 그 동안 로쟈님은 뭐하셨어요...? ㅠ.ㅠ

로쟈 2008-08-28 08:26   좋아요 0 | URL
알다시피 바빴습니다.^^;

2008-08-28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28 08: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털세곰 2008-08-29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악구를 떠나자마자 이런 빅이벤트가 벌어지고 거물이 오고갔을 줄이야...

로쟈 2008-08-30 21:25   좋아요 0 | URL
러시아 학자들이 200여명이나 들렀었다는군요...
 

<나쁜 사마리아인들>(부키, 2007)이 국방부 '불온서적'에 포함됨으로써 화제가 됐던 장하준 교수의 인터뷰기사를 한겨레에서 옮겨온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06688.html). 이번주 시사IN의 불온서적 리뷰에서는 책 제목이 '붉은 사마리아인들'로 불린 얘기도 나온다. 불온한 책이니 '나쁜' 책이면서 '붉은' 책이기도 한 것. 좌우 양편에서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장하준 경제학이 '상식'에 가까운 게 아닌가 한다. 아니, '상식'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 미국 따라하기가 아니라 그걸 경고하는 장하준 따라잡기가 우리에겐 일단 필요하다. '전망'이나 '대안'의 모색은 그 이후에 가능할지 모른다(장하준의 기본적 정향은 '자본주의 안에서의 변화와 개혁'이다). 

 

한겨레(08. 08. 26) "미국을 따라하지 말고 반면교사 삼아라”

“스위스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이란 게 관광객에게 ‘뻐꾸기 시계’나 ‘소 목에 매다는 종’ 팔아서 돈 벌고, 좋게 얘기하면 금융 관광업으로 먹고사는 나라인데,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방학을 맞아 한국에 온 장하준(45·[사진])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지난 20일 한겨레신문사 초정 강연과 뒤이은 인터뷰에서 잘못된 관념과 신화를 깨야 한다며, ‘스위스를 탈산업화 사회의 표본’으로 여기는 통념을 한 사례로 들었다.

“사실은 1인당 제조업 생산량이 제일 많은 나라가 스위스다. 서비스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다. 일본보다 24% 높고, 미국에 비해 2.2배 높다. 세계에서 제일 산업화가 된 나라인데, 우리는 그 나라가 서비스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잘못 갖고 있는 관념이 많다.” 잘못 알고 있는 상식의 흥미로운 사례는 줄줄이 이어졌다. 파나마모자는 에콰도르에서 만든 것이며, 뻐꾸기시계는 독일에서 발명했으며, 프렌치프라이는 벨기에에서 생겼고….

삶의 질 낮고 금융불안한 미국 ‘신자유주의 신화’ 본색 드러나

장 교수는 화두로 삼고 있는 신자유주의(시장만능주의)가 전세계를 휩쓰는 대세이며, 대안이 없다는 것도 신화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전세계 이데올로기를 통제하는 사람들이 자꾸 없다고 하니까, 찾아보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한다”며 “안 보려고 하니까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기업이면서 민간기업보다 훨씬 효율적인 데가 많으며 스웨덴처럼 (신자유주의 흐름과는 달리) 노사 대타협을 맺어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활력을 동시에 이루고 있는 예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흔히 미국이 제일 잘사는 나라라고 여기는 것도 잘못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생활수준이 높은 게 아니다. 미국은 노동시간이 유럽보다 10~30% 길다. 노동시간당 국내총생산(GDP)은 구매력 기준으로 해도 세계에서 7~8위다. 그만큼 저임금 노동이 많다는 이야기다. 독일은 (오후) 5시면 (가게) 문 닫고, 미국은 24시간 가게 열고 늦게까지 일한다. 범죄율, 유아사망률, 기대수명 같은 ‘삶의 질’에 관한 지표가 선진국 중 최하위권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모델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미국을 따라갈 이유가 없고, 그것은 또한 위험한 길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외환위기 이후 펴 온 한국의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외환위기 뒤 기업의 부채비율을 400% 수준에서 200%로 무리하게 낮추는 식의 정책이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고 일자리 감소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부채 비율 낮은 게 좋은 거라면 브라질이 세계 1위다. 브라질 기업들은 돈을 안 빌린다. 부채 비율이 50%다. 우리나라는 성질이 화끈해서 완전히 극단으로 간다. (외환위기 뒤 부채 비율을) 200%로 낮추라고 하니까, 100%까지 낮췄다. 미국이나 영국도 150% 정도인데….”

한국 사회에선 장 교수와 달리, 외환위기 뒤의 신자유의적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했다는 견해가 득세했다. 마땅한 대안이나 다른 방향을 채택할 수 없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장 교수는 정면으로 반박한다. 신자유주의적으로 하자면, (기업을 지원하는) 정부의 산업정책이라는 게 있을 수 없음에도 (신자유주의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산업정책을 펴고 있다는 점을 한 예로 들었다.

“미국처럼 (심하게) 산업정책을 시행하는 나라가 없다. 미국의 연구개발(R&D)비 지출이 대단히 많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국가 주도형이라지만, 총 연구개발비에서 정부가 대는 게 20%, 유럽이 30%인데, 미국은 50% 가까이 된다. 1990년대 중반에는 50~60% 사이, 해에 따라서는 70%까지 된다. 미국 기술 경쟁력의 기초는 정부의 지원을 통한 연구개발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산업정책을 구시대의 유물로 용도폐기하는 것은, ‘몰래 시험공부 미리 다 해놓은 친구 따라 영화 보고 미팅하러 돌아다니다가 시험을 망치는 바보’가 되는 길이라고 장 교수는 비유했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장 교수가 신자유주의자를 비유해 지칭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스스로 알아서 갑자기 착하게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걸 기대할 수도 없고, 그 반대에 서 있는 쪽에 사마리아인들의 마음을 착하게 고쳐먹도록 압박할 ‘힘’도 없는 게 현실 아닌가?

“두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하나는 소위 ‘나쁜 사마리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들 가운데도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은 쪽이 있다. 예컨대 핀란드·노르웨이는 후진국에 원조를 활발히 하는데, 그런 나라마저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후진국에 부과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 이야기(신자유주의적 정책)가 가장 맞는 정책 아니냐는 식의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 ‘나쁜 사마리아인’으로 지칭된 이들 가운데서도 ‘아! 이게 맞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다.” 그보다 조금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소탐대실이라고 느낄 것이라고 장 교수는 덧붙인다.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를 잘살게 해주는 게 (장기적으로는) 이익이라는 것을 안목 있는 사람들은 깨닫게 될 것이란 기대감이다.

신자유주의적 처방에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우고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대기업의 기능을 중시하는 장 교수의 견해는 종종 ‘박정희식 개발독재’와 통한다거나, 한국 사회 재벌의 문제를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장 교수와 두터운 교분을 쌓고 있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또한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장 교수의 신자유주의 비판에는 공감하지만, 재벌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것 아니냐”고 말한 바 있다.

한국사회 재벌문제 심각해도 대기업들 구실은 여전히 중요

장 교수는 이에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다 생각하니까 그것을 엮어서 (노사) ‘대타협’을 이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다닌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한국 경제 성장에서 재벌들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은 유종일 교수님도 동의할 것이다. 다만,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냐 아니냐는 부분에 있어서 판단이 다른 것이다.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업(재벌)들이 책임 있는 행동만 한다면 스웨덴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장 교수는 같은 맥락에서 지난해 10월에 불거져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삼성 사태’는 잘못 가닥을 잡았다고 진단한다.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미국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에서 비롯된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 고유가에 따른 물가 급등세 등으로 현재 한국 경제는 상당한 어려움에 빠져 있다. 영국 학계에 몸담으며 넓은 식견을 갖춘데다 한국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장 교수에게 한국 경제의 앞날은 어떻게 비칠까?

“과거 10여년 동안 주식시장과 부동산 붐에 힘입어 잘나가는 듯했던 미국·영국·스페인 같은 나라들보다는 상황이 낫다. 문제는 우리나라가 수출 의존도가 높다는 점이다. 주요 수출시장인 미국이 휘청거리고, 또 미국 때문에 먹고사는 중국이 휘청거리면 상당히 어려울 것이다. (한국이)흑자 낸 많은 부분이 중국에 기계와 중간재료 팔아서 번 것 아닌가. 무엇보다는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하다. 앞으로 최소 1년 이상은 세계경제가 어려울 것으로 본다.” 장 교수는 “(외환위기 뒤) 경제 체질이 약화돼 왔으니 정신을 차리고, 미국식 자본주의가 좋은 게 아니구나 하는 계기로 만들어가야 하는데, 오히려 미국식으로 더 나가려고 하니 걱정스러운 것이다”라고 말했다.(김영배 이정연 기자)

08. 08. 26.

P.S. 장하준 교수의 최신간은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부키, 2008)와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산책자, 2008)이다. 전자는 아일린 그레이블과의 공저로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고 한다. 후자는 '새로운 좌파의 길'로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식인들의 글모음인데(생각보다 자극적이고 유익한 글모음이다), <국가의 역할>,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를 우리말로 번역한 이종태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참고로 <국가의 역할>(부키, 2006)에 대한 자세한 리뷰도 옮겨놓는다. 필자인 홍기빈에 따르면 장하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적 현실주의'로 정리될 수 있다.  

프레시안(06.12. 07) '신자유주의 경제학', 설 땅을 잃다

장하준 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혜선 역, 부키 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원저인 <Globalization, Economic Development & the Role of the State>(London: Zed Books, 2003)는 이미 세계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명성을 얻은 책이다. 다행히도 500쪽에 달하는 이 역저가 이종태, 황혜선 두 분의 노고 덕분에 근래에 보기 힘든 훌륭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들이 없지 않았으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그 중요성과 의의에서,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 구조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비과학의 위험에서 정치경제학 구해내기
과학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demarcation)이다. 사이비 과학의 특징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명제를 도출한 뒤 이를 보편적인 법칙으로 승격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들은 '5행성의 성질'이니 '여러 금속의 서열'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예언과 주장을 내어놓은 뒤, 그것이 현실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서…"라는 갖은 특수설명(ad hoc)으로 둘러대 논증도 논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의 나아갈 바라는 추상적인 법칙으로까지 그것들을 승격시킨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면서 전 지구의 정치경제 체제를 소위 '전지구적 시장 체제'로 바꾸어놓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체계를 장 교수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정치경제학파의 '정략결혼'으로 파악한다. '경제적 최적화의 계산'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넘지 못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오스트리아 학파로부터 자유, 시장,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논리를 제공받는 대신, 그동안 주류 경제학에서 따돌림당하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이론의 '과학성'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결혼이 신랑 쪽이나 신부 쪽이나 모두 100살이 넘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축을 이루는 이론들은 모두 파레토, 왈라스, 클라크, 혹은 그 이전에 나온 19세기 경제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경제 사상이라는 것은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이 이미 193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하며 설파했던 '19세기식 시장사회', 즉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중심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법"이라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20세기 100년 간의 역사는 시장도 국가도 사회도 자유도 후생도, 어느 것 하나 19세기 식으로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대전,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대사건들 속에서 계속 변모해 온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를 과연 이 100년 묵은 이론 두 개를 합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증손자, 아니 고손자를 기다리면서 학설사의 한 페이지로 그냥 조용히 늙어가야 할 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론들이 과연 '회춘'하여 왕성한 생산력으로 새롭게 자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까. 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들로써 논박도 논증도 애매한 명제들을 마구 쏟아놓으면서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치경제가 나아갈 바는 이런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대담론으로 치닫는 '사이비과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기에 의혹이 더 짙어진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19세기식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패러다임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파산상태에 달하여 이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 현실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 나아가 지식대중 전부가 그렇게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가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로 치닫는 기막힌 현실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 사태에 부닥쳐 카아(E. H. Carr)와 같은 사람은 사회연구는 더 이상 '유토피아와 사이비 실증과학이 뒤섞인'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현실을 관찰하여 신중한 정책제안을 가능케 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가지라고 제창한 적이 있다. 이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카아의 '현실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장 교수는 자신의 방법을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정치경제학을 사이비과학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과학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의 폐해 사례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지 않다. 사상, 이론, 정책의 세 측면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정면으로 맞서 씨름하면서 (1) 그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이 주장하는 숱한 이론들이 얼마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하거나 현실적 사례에 의해 종종 논박되며 (3) 그 정책적 귀결이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함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 전체에 걸쳐서 장 교수는 한 순간도 글을 '날려서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문헌과 데이터의 양과 규모도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21세기 초에 새롭게 역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경제적 현실주의'의 선언으로 자리매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안으로서의 산업정책

이 책 1부의 1장과 2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둥이 되는 두 개의 핵심 개념, 즉 '시장'과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보통 자유, 효율성, 정보, 자발성 등에 의해 작동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시장'이며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왜곡, 비효율, 무지, 자유의 억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규정해, 전자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후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운영의 나아갈 바라는 단순명쾌한 주장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

장 교수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모호하게 정의된 '시장'과 '국가'의 개념이 실제 현실에서는 그 발생과 작동 및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결국 그러한 단순한 개념화에 기반을 둔 사상적 명제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현실의 희화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신 시장도 국가도 인간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숨을 쉬는 수많은 제도 중 하나로서 현실적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두 제도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나 신화를 넘어서서 현실의 여러 제도들과 가장 잘 결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와 방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 제안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주장과 정책적 제안 양자를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2부에서는 먼저 대외경제의 측면, 즉 최근의 경제적 지구화의 담론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초국적기업, 지적소유권, 산업정책의 문제가 그것이다. 4장에서는 초국적기업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초국적기업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경제를 개방하는 것만이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논리적으로 부수고 있다. 이를 통해 장 교수는 초국적기업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자대상국이 얼마나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내부적 경제 틀을 갖추고 있는가가 오히려 더 많은 외국투자를 불러들이는 데 관건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5장에서는 특히 '지식기반 경제'에서 초국적 지적소유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명제가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지적소유권 보장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대단히 의심쩍은 것이며,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손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된다.

6장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산업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지구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자국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특히 일본, 프랑스 등 산업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독특한 제도적, 사회적 환경이 그런 정책의 성공요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경우이며, 따라서 산업정책을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고 시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 교수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서구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산업정책이 더 보편적이었음을 들어 반박한다.

이러한 6장의 논지는 곧 국내경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를 다루는 3부의 논의로 이어진다. 2부에서 소위 '지구화로 인한 불가항력의 외적구조 변화'라는 담론을 비판하고 난 뒤 3부는 국내경제를 조직함에 있어서 바로 이 국가에 의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산업정책 부활만이 오히려 이 지구화 시대의 세계경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실로 논쟁이 많은 이 주제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 쪽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은 '시장경제' 대 '산업정책'이라는 논쟁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본 뒤, 20세기의 대규모 산업경제에서는 산업정책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시장의 비효율성'을 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제이론의 차원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실로 가장 첨예한 전투장이요 가장 많은 사상자, 피해자가 발생한 장인 '공기업'의 문제, 즉 '공기업은 반드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가'를 다루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난 몇십년 간 대학에서, 매체에서, 정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휘둘러 온 일사천리의 주장,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져 있거나 경제법칙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철없는 좌파"라고 하던 매도에 속절없이 말문이 막혔던 이라면 이 책의 출판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러한 지난 몇십 년 간의 '시장개방'이 과연 지구적 규모에서나 일국적 규모에서나 고도성장과 보편적 풍요와 효율성이라는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우리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하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등의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고 있는 "문제는 산업정책"이라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굳이 몇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첫째, 산업정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어떤 집권세력이든 자신들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제도주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나타나는 편향으로서, 국가를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과 이익대립과는 무관한,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제도로 본다는 문제점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든 1970년대 한국의 국가든, 그러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정치역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 효율성만을 모토로 하여' 산업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없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환경에 걸맞은 산업정책을 추진할 국가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면, '국가의 산업정책이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의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정책의 정의는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 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의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즉 '선별적 산업정책'과 유사한 것이다(265쪽). 하지만 이러한 산업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을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포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이 책에서 장 교수가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득세로 인한 이념공세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천착하여 그 실정을 좀 더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정의와 원칙을 제시하는 작업이 추가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새로운 축적전략'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처럼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라는 축적전략이 포기된 대신에 금융적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tialization)가 주된 축적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 기업의 행태, 정책의 선호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은 곧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성격의 국가, 대안적 성격의 경제주체를 형성하는 전략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21세기형 산업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주체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더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성격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시행될 산업정책의 내용도 단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예전의 산업정책과 같은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과정의 인간화, 생태환경의 보전, 나라의 정신적·문화적 고양 등 한 나라의 살림살이인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국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좀 더 포괄적인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틀로 산업정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세계화를 앞세운 21세기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에 국가가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과학'은 딛고 설 땅을 크게 잃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저서의 위력을 십분 증가시켜 준 두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문장이다. 시중의 번역서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준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의 노고가 값진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홍기빈/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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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울바람의 생각
    from rifflewind's me2DAY 2008-08-30 11:32 
    재벌 제도의 장점이라는 게 기획조정실을 중심으로 ‘계열사간 상호 연계’를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인데, 그 구조를 포기하는 대신 ‘가문의 승계 구도’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고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해선 오히려 거꾸로 됐어야 한다는 게 장 교수의 견해다.
 
 
마노아 2008-08-26 20:12   좋아요 0 | URL
책에서 받은 느낌과 장교수님 얼굴은 많이 다르네요. 좀 더 샤프해 보일 거라고 상상했어요^^;;
로쟈님 페이퍼의 책들은 큰책 링크라서 땡스투가 안 생기더라구요. 책 정보에서 페이퍼에도 안 뜨구요...

로쟈 2008-08-26 20:45   좋아요 0 | URL
옮겨온 글들은 상품 페이지에 노출하지 않습니다. 알라딘의 권고이기도 하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28   좋아요 0 | URL
뉴라이트 계열인 자유기업원에서 하이에크,미제스의 저서나 그 해설서를 많이 냅니다.아담 스미스의 경제사상도 그들은 신자유주의 식으로 해석하는 것 같더라구요.저는 신자유주의는 포장을 걷어내면 적자생존의 소샬 다위니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이기면 충신,지면 역적.

로쟈 2008-08-26 22:32   좋아요 0 | URL
장교수도 미국식 자유주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게 순전히 '편의적 자유주의'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만 정당화하는. 그러니 적자생존도 아닙니다. 자기들이 불리한 쪽은 또 철저히 보호하잖아요...

드팀전 2008-08-27 11:45   좋아요 0 | URL
흑색이 아나키스트들의 색이고,녹색이 환경/생태주의의 색, 붉은 색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들의 색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을 '붉은 사마리아인'으로 적어야 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협소한가를 보여주는듯 합니다. 저 정도의 케인즈주의적 접근이나 조합주의적 성향마저 불온으로 파악하는 저열성을 보면 말입니다.
<한국 사회와 좌파의 재정립>은 지난 번부터 보관함에 넣어놓고 있었습니다.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현실정치 내에서 가능성있는 움직임으로 사민주의를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모든 이념이 정당이 될 수는 없을테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예전에 사놓은 박호성의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와 전망>이 먼저 기다리고 있어서...(사민주의의 역사와 논쟁..그리고 현 시점의 사민주의가 다른 지평을 갖고 있음에도 먼저 사놓은 책이니까 ^^)

언젠가 사민주의 관련 페이퍼도 한번 꾸려주시지요...진보 패셔니스트들 중에는 사민주의로 전향이 쉬울 사람들도 많으니까. 글로만 접하는 알라딘의 진보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사민주의적 성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우파가 갈 수 있는 최대치의 끝인지...자유주의로의 개량인지...케케묵은 논쟁은 뒤로 하고 현실적으로 만들어갈 가능성이 높다면 해볼말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국보법이 살아있는 나라에서 그것도 요원해 보이긴 합니다만...

로쟈 2008-08-27 09:41   좋아요 0 | URL
'붉은 사마리아인' 얘기는 그냥 기자의 말실수입니다. 서평을 청탁하면서, "<붉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서평을 부탁한다고 했데요. '불온'하고 '붉은'이 연상작용을 한 것이죠. 장교수는 <붉은 사마리아인들>이라는 제목이 훨씬 좋다며 웃었다네요.^^;

따우리~* 2008-09-23 11:08   좋아요 0 | URL
이런 양질의 도서가 '불온 서적'이라니..
정말 이해가 가지않고요.
역시 군대에 있으면 숭미주의 정신교육에 돌아 버릴것 같았는데.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부턴 어찌나 욕하던지..
당연히 군대에 가야만하는 이 사회 제도가 '이념'이라는 단어에 아직도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인 원인인 것 같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강압적인 정신교육을 받으니까요.
그런 교육을 받았던 자들이 결국 이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이 되니까..
이런 악순환이 당분간 계속되겠죠?
저도 죽는 줄 알았습니다..^^;;

로쟈 2008-09-23 14:05   좋아요 0 | URL
아직 '생환'하신 지 얼마 안된 모양이네요.^^;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리뷰를 옮겨놓는다(문화면과는 별개이지만 이번주 시사인의 북섹션은 국방부 선정 '불온서적' 특집이다.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6 참조). 하워드 진의 신작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에 대한 것이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55). 리뷰의 제목은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 낱낱이 고발하다'라고 강하게 나갔지만 그런 고발이 절반이고, 나머지 절반은 그럼에도 권력의 억압과 악행에 맞서 싸운, 그리하여 때때로 승리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지난주에 다룬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http://blog.aladin.co.kr/mramor/2248671)에 가장 잘 부합하는 역사서술이 아닌가 싶다. 어쩌다 보니 지난달 홉스봄의 <폭력의 시대>에 연이어 미국 관련서를 다룬 셈인데(http://blog.aladin.co.kr/mramor/2212178), 미국이라면 이제 슬슬 진절머리가 난다...

  

시사인(08. 08. 30) 부도덕하고 참혹한 미국사 낱낱이 고발하다

“헌법이 소수의 부유하고 힘 있는 집단(노예소유주, 상인, 땅 투기꾼)에 의해 만들어졌던 건국 초기부터 정부는 거의 언제나 부유한 계급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왔고, 보통의 미국인들보다 대기업들에 우호적인 법들을 통과시켜왔습니다.” 이 정도의 ‘반미 성향’이면 대한민국 국방부의 불온도서 목록에 오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펴냄)에서 전해주는 미국사의 진실은 훨씬 더 참혹하며 부도덕하다. 물론 그의 대표작 <미국민중사>(1980)를 접해본 독자라면 그의 새로운 에세이를 ‘부록’이나 ‘에피소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 프렌들리’한 독자라면 책을 읽는 일이 적잖이 곤욕스러울 듯싶다.

사실 저자가 겨냥하고 있는 것도 미국과 미국사에 대해 순진한 인식, 혹은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는 독자층이다. 이것은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가령 미국이 역사적으로 세계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에 있어 온화하고 관대했다는 믿음이나 미국을 오직 좋은 일만 하고 있는 나라로 생각하는 오해를 저자는 교정하고자 한다. 하워드 진은 그런 일이 역사적 시각의 결여와 ‘국가적 기억상실증’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부시 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미국 국민이 이 부도덕한 전쟁을 지지한다거나 이라크가 미군에 의해 해방된 나라가 아니라 점령된 나라라는 사실을 푹신하게 망각하는 것이 비근한 사례이다.

그러니 역사를 좀 알 필요가 있다. 하워드 진에 따르면, 역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꿀 수 있도록 돕는 수단이기에 그렇다. 권력의 시각이 아닌 민중의 시각,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지향하는 그가 보기에 미국사는 노예소유주, 채권자, 인디언 학살자, 군국주의자, 땅 투기꾼, 거대기업 등 주로 부유한 백인을 위한 역사였다. 동시에 정부가 숱한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고 배신해온 역사였다. 정부의 입법은 언제나 계급적인 입법이어서 부자의 사회적 지배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했다. 관세는 제조업자를 위한 것이었으며, 보조금은 철도회사나 석유회사 따위 대기업을 위한 것이었고,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수시로 공권력이 동원되었다. 

미국사가 이러한 목록으로만 채워져 있다면 절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하워드 진은 역사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다. “민중이 저항하고 함께 모이고, 그래서 때로 승리했던 과거의 숨은 사건들”이 그가 품은 희망의 근거이다. 한편으로 이 책에서 복원하고 또 기리고자 하는 것도 정부의 거짓말과 역사의 거짓 영웅에 맞서 투쟁해온 미국 국민의 역사이고 숨은 영웅들이다. 책의 원제를 빌면, 그들이야말로 ‘어떤 정부도 억누르지 못하는 힘’이다. 저자는 미국을 건설한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라고 믿는다. 그에게 국민은, 혹은 미국사의 진정한 영웅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인물이 아니라 간호사, 의사, 교사, 사회사업가, 지역운동가, 병원 잡역부, 건설노동자 등이다. 이들이 정부의 잘못에 항의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조직을 꾸리고 총파업에 나섰다. 패배로 점철됐지만 승리의 순간도 있었다. 하워드 진은 그러한 역사적 운동을 돌이켜보면서 어두운 시대에 희망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커다란 칼을 보유한 육식성 정치인, 지식인, 언론인을 위해 제공된 먹기 좋은 고기가 된다”고 하워드 진은 말한다. 우리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가? 미국을 미국 정부와 동일시하고 미국 대통령이 오면 구청 직원까지 거리에 동원되어 성조기를 흔드는 나라에서 국민은 ‘먹기 좋은 고기’이다.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미국의 선물’이라고 우쭐거릴 때 국민은 ‘먹기 좋은 고기’이다. 촛불시위 참가자를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언론소비자주권운동에 공권력이 재갈을 물리려고 할 때 국민은 ‘먹기 좋은 고기’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시민이 서로 뭉쳐서 우리의 수가 충분히 커질 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힘은 정부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시켜주는 도리밖에 없겠다.

08. 08. 25.

P.S. 검색해보니 올 봄에 나온 하워드 진의 최신간(공저)은 <미제국의 민중사>(2008)이다. 추세로 보아 겨울쯤에는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하워드 진의 책 가운데 한권만 꼽으라면 원제가 '독립선언(Declarations of independence)'인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을 지목하고 싶다. <미국민중 저항사1,2>(일월서각, 1986) 이후 처음 소개된 책이면서 국내에 그의 '진가'를 알린 책인 듯싶은데, 역사가, 정치평론가, 반전주의자 등 그의 다양한 면모를 담고 있어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책이다. 자전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 2002)와 <미국민중사>를 같이 읽은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물론 <미국민중사1,2>(이후, 2006)를 읽거나 소장해두어야겠다(거실에 꽂아두는 것만으로도 폼이 날 텐데, 나는 아직 그런 호사를 부리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 방에는 <미국민중사>의 다이제스트판, <살아있는 미국역사>(추수밭, 2008)를 꽂아두고. 거기에 <권력을 이긴 사람들>(난장, 2008)은 에피타이저나 디저트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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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기 좋은 고기들은 이런 책 안 읽습니다.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알고 싶지 않은 자유도 있는 거 아니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복잡한 거요.아...귀찮아 저리 가!!! 누가 생각도 대신해 주는 로봇이나 만들어 줬으면 좋겠네.운운...

로쟈 2008-08-26 22:34   좋아요 0 | URL
갈취를 당해도 감사해하는 등신이나 다름 없는데...

노이에자이트 2008-08-27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남 부자나 재벌들이 한나라당 지지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이 그런 걸 보면 부모에게 그렇게 충성하면 효자도 그런 효자가 없겠더라구요.

로쟈 2008-08-28 08:57   좋아요 0 | URL
허위의식이거나 냉소주의거나 그렇죠...
 

지식과 지식인 관련서들을 몇 권 읽다가 손길이 피터 버크의 <지식>(현실문화연구, 2006)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최근에 나온 책들' 소개를 비롯해서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지식의 사회사'를 직접 읽을 기회는 없었다. 둘러보니 리뷰기사도 따로 옮겨놓은 적이 없기에 겸사겸사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6. 04. 22) 지식에도 뿌리가 있구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문화사 교수인 피터 버크(69)가 쓴 <지식: 그 탄생과 유통에 대한 모든 지식>은 원제 그대로 ‘지식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Knowledge)에 해당한다. 지은이가 근대 초 유럽을 전공한 역사가인 만큼, 원저의 부제에 밝혀져 있는 대로,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 그러니까 1450년 독일의 활판인쇄술 발명에서부터 1751년 <백과전서>의 출판까지를 대상으로 삼는다.

‘지식의 사회사’란 지식사회학의 하위 범주라 할 수 있다. 지은이는 지식사회학의 출현과 확산에 관한 논의에서부터 책을 시작한다. 일종의 뿌리 찾기 또는 위상 정립인 셈이다. 그에 따르면 지식사회학은 20세기 초 프랑스와 독일, 미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에서는 에밀 뒤르켕과 그의 제자들, 특히 마르셀 모스가, 미국에서는 <유한계급론>의 지은이로 잘 알려진 소스타인 베블런이 이 학문의 탄생을 이끌었다. 지은이는 막스 베버와 카를 만하임이 주도한 독일쪽의 움직임에 더 큰 비중을 할애하는데, ‘지식의 사회학’이라는 용어가 처음 출현한 것이 독일인 탓도 있다. 만하임은 지식인을 일러 “상대적으로 계급에서 자유로운 집단”이자 “자유롭게 떠다니는 인텔리겐치아”로 정의했다.

구텐베르크에서 디드로까지
지식사회학은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20세기 중후반에 ‘부활’한다. 그런데 사회학이 아닌 다른 분야 학자들의 자극에 힘입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인류학), 토마스 쿤(과학사), 미셸 푸코(철학) 등이 지식사회학의 부활에 기여한 이들이다. 좀 더 최근으로 오자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위르겐 하버마스, 피에르 부르디외 등이 지식사회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지은이가 보기에 부활한 지식사회학은 △지식의 획득과 전달에서 구축, 생산, 제조로 강조점 이동 △전보다 크고 다양한 집단이 지식 보유자로 강조됨 △미시사회학에 대한 관심 커짐 △사회계급보다는 성차(性差)와 지리에 더 주목함 등의 특징을 지닌다. 특히 <오리엔탈리즘>의 지은이인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식의 지리학에서 큰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한다.

“거대한 주제들을 짧게짧게 검토하는 것을 좋아”하며 “조그만 조각들을 맞추어 큰 그림을 완성시키는 방식이 좋다”는 고백대로 지은이는 다양한 출처와 형식의 자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논지를 전개한다. 지은이의 논지를 따라가다 보면, 비록 근대 초기 유럽이라는 시·공간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지리학·인류학·정치학·경제학·문헌학·철학 등을 두루 섭렵할 수 있게 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정보화 시대에 지식은 흔히 정보와 혼동되기도 한다. 지은이는 ‘날것’이며 특수하고 실용적인 것을 가리키는 ‘정보’와, ‘익힌 것’이며 사고과정을 거쳐 분석 또는 체계화된 것으로서의 ‘지식’을 구분한다. 그러나 근대 초기에는 주술이나 마법, 천사나 악마 같은 것들에 대한 앎 역시 지식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지은이의 논의에 포함된다. 또 요리, 천 짜기, 사냥, 경작, 산파술까지도 지식의 경계 안에 자리한다. 지식의 현장들로 수도원, 대학, 도서관, 서점, 연구실, 실험실만이 아니라 병원, 여인숙, 이발소, 화랑, 커피하우스까지 거론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식은 익힌 것·정보는 날 것
‘지식’ 하면 곧장 ‘지식인’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렇다면 지식인은 언제 탄생한 것일까. “학식을 쌓았으면서도 관료제도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던 ‘인텔리겐치아’라는 러시아어가 등장한 19세기 중반 설이 유력하다. 드레퓌스 대위를 옹호하는 ‘지식인 선언’이 등장한 19세기 후반 설까지 포함해 지식인=급진적 인텔리겐치아의 후예들이라는 ‘정설’의 근거를 이룬다. 그러나 프랑스의 아날학파 역사학자 자크 르 고프 같은 이는 최소한 대학 안에는 중세 때 이미 지식인들이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쇄술의 발달은 지식과 지식인들의 확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남성의 학식 공화국’은 금녀지대
한편 16~18세기에는 여성 지식인인이 없었을 것이라는 짐작과는 달리 이 무렵에도 소수의 여성들은 책을 쓰고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여자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으며, 남성들이 지배하는 ‘학식의 공화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대신 남성 지식인들끼리의 교류와 협력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법 활발했다. 지은이는 1654년 네덜란드 라이덴에서 이탈리아인 가톨릭교도 중국학 학자와 네덜란드 개신교도 아랍학 학자가 만나 서로의 공통 언어인 라틴어를 통해 지식을 나누고 비교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오늘날 정숙의 대명사로 통하는 도서관에서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며 토론을 했다는 사실도 새삼스럽다. 도서관을 비롯해 지식인들 사이의 다양한 형태의 사교는 지식의 확산과 생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형태의 ‘만남’도 있었다. 네덜란드의 한 렌즈 연마공과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나폴리의 자연철학자 잠바티스타 델라 포르타가 ‘지적 재산권’을 놓고 다투었던 망원경,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서로의 작업에 대해 모르는 가운데 따로 연구함으로써 표절 논란을 낳았던 미적분법의 사례 등은 지식 역시 엄연한 ‘재산’으로 취급되게 되는 사회 변화를 보여준다. 또 적은 수의 책을 꼼꼼히 정독했던 16세기 사람 몽테뉴, 그리고 많은 수의 책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찾아 읽었던 18세기 사람 몽테스키외 사이의 독법의 차이는 지식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방식의 변모를 일러준다.

인쇄술의 발명과 과학혁명,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지식의 폭발’을 경험했던 무렵을 대상으로 한 이 책 <지식>은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또 다른 ‘지식 폭발’을 목격하고 있는 오늘의 실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아 보인다.(최재봉 문학전문기자)

08. 08. 24.



 

 

 

P.S. 책은 번역이 깔끔해서 읽어나가기 편하다. 다만, 책의 성격상 다수의 인명과 저작명이 등장하는데, 원서의 표기방식과 참고문헌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어서 다소 아쉽다. 국내에 이미 소개된 책들을 병기해주었다면 좀더 요긴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가지 사례만 들자면 이런 것이다.

"미국의 피터 버거와 오스트리아의 토마스 루크만 두 학자가 공동 저술한 <실체의 사회적 구축>(1968)은 발표 뒤의 반응도 좋았고, 나름대로 영향력도 있었다."(20쪽)

지식사회학이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20세기 중후반에 ‘부활’되었다는 대목에 나오는 언급인데, <실체의 사회적 구축>은 <현실의 사회적 구성(The social construction of reality)>을 옮긴 것이다. 1968년에 나왔다는 건 오타이고 1966년에 출간됐으며, 부제는 '지식사회학 연구(a treatise in the sociology of knowledge)'이다. 한데 이 책은 1980년대에 <지식 형성의 사회학>(홍성사)으로 번역됐던 책이다.    

사실 피터 버거는 국내에 '피터 버크'보다 먼저, 그리고 훨씬 더 많이 소개됐던 사회학자이다. <종교와 사회>(종로서적, 1983) 등을 비롯해서 내가 읽은 것만 해도 몇 권 된다. 짐작엔 문학과지성사의 '현대의 지성' 총서 첫 권으로 나온 <이단의 시대>(문학과지성사, 1981)와 <사회학에의 초대>(현대사상사, 1977/1982)가 처음 소개된 책이 아닐까 싶다.

특히 <사회학에의 초대>는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 구입한 사회학 입문서였다. 지금은 새로 번역된 문예출판사판만 남아있는 듯싶은데, 당시엔 현대사상사판이 유일했다. 역자인 한완상 교수가 '사회학 개론'의 담당교수였으니 첫시간에 이 책을 소개받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요즘은 보통 앤서니 기든스의 <현대 사회학>을 교재로 쓰는지?). 책들도 그렇게 '역사' 속으로 편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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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06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사상사 책에 좋은 게 꽤 있는데...신학 책도 포함해서요.요즘은 거의 절판된 것 같아요.피터 버거 것은 삼성문화문고 <제 3세계>만 봤어요.스탈린 주의자 책 몇 권 읽다가 균형 좀 잡으려구요.

로쟈 2008-08-26 20:57   좋아요 0 | URL
네, 사라진 인문사회쪽 출판사들이 꽤 되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13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사상사는 출판사 자체는 있는 것 같아요.이 출판사가 기독교 서점에도 책을 보내는데 피터 버거 책이 올해에도 있더라구요.

로쟈 2008-08-26 22:37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는 2006년에 낸 책 한권만 달랑 뜨는데요...
 

어제 한일 야구전이 있었고, 오늘 일본이 3-4위전에서 미국에 패한 탓에 포털에는 일본야구 관련 기사들이 많이 떠 있다. 덕분에 생각난 건 이번주에 출간된 <아쿠자, 음지의 권력자들>(이다미디어, 2008)을 포함해서 최근 한달 동안 일본 관련서들이 다수 출간됐다는 사실. 짐작에는 광복절이 낀 '8월 특수'가 아닌가도 싶다(3월에도 그런가?). 일본의 왜곡된 근대화를 지적한 <일본의 재구성>(마티, 2008)도 주목할 만한 책의 하나이다. 여느 일본 관련서들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책이 아니어서 일단은 리뷰만을 챙겨놓는다. 한겨레21의 리뷰가 자세하다(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8/08/021015000200808140723008.html).

  

한겨레21(08. 08. 14) 왜 일본은 텅 비어버렸는가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혹은 근대성)에 도달했는가. 이 질문은 답이 너무 뻔해 보이기 때문에 다르게 반복되어야 한다.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도쿄 후지산 기슭에는 ‘관리자 양성학교’라는 곳이 있다. 기업들이 사원의 실적이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사원들을 보낸다. 실패한 ‘사무라이’들은 새벽 6시에 일어나 밤 9시 반에 일정을 마친다. 훈련생들은 이곳을 ‘지옥훈련소’라고 부른다. 1993년 일본 여성 오히와 사쓰키는 특이한 사업을 성공시켰다. ‘일본 효과성본부-재팬 석세스 프레지던트’라는 비범한 이름의 회사는 남들과 어울릴 줄 모르는 샐러리맨들을 교육함과 동시에, ‘가족 임대’ 사업을 했다. 노인 부부가 젊은 부부와 손자를 제공받거나 젊은 부부가 아이들과 조부모를 임대한다. 한 달에 두세 번, 다섯 시간에 12만엔. 이제 다시 처음의 질문을 반복해보자.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근대를 쟁취했는가, 일본에서 개인은 무엇인가.



껍데기만을 모방하기
<일본의 재구성>(패트릭 스미스 지음, 노시내 옮김, 마티 펴냄, 2만6천원)은 오랫동안 일본에서 특파원으로 일한 미국 언론인의 책이다. 일본의 ‘재구성’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단한 논지로 일본 사회를 중심까지 꿰뚫어버리는, 힘이 넘치는 탐구서다. 한 가지 의문. 일본은 늘 타자에 의해서만 제대로 조명되는 운명일까.

기업과 국가가 확장된 가족의 역할을 하고, 이웃나라에 쓰라린 원한의 감정을 품게 만들며, 자민당의 부패한 정치인들이 수십 년 동안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일본. 문제는 무엇일까? 지은이는 ‘국민성’에 대한 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일본의 국민성이 아니라 왜곡된 근대화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단정한다.

근대화와 동시에 군국주의로 달려가던 일본에도 패전이라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당과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러나 일본이 공산화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힌 미국은 계기를 빼앗아버린다. 이것이 ‘역코스’라고 부르는 정책 변화다. 덴노(천황)는 죽지 않았다. 미국은 냉전시대의 성배인 안정과 경제 발전에 우선 가치를 두었다. 국가주의자의 제거가 중단되고 전쟁 물자를 공급했던 재벌 세력은 복귀했고 구시대의 정치 엘리트 세력들이 다시 일본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일본의 역사·전통·이미지의 재구축이 일어난다. 국민을 억누르던 봉건적 관습이 전통이 되었고, 이 전통은 전쟁에 반대하는 ‘선량한 덴노’로 구현된다. 일본은 한순간에 전쟁의 책임에서 벗어나 열심히 일하고 말 잘 듣는 미국의 동맹국이 되었다. 일본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미국에 빼앗긴 것이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새롭게 창조된 환상이었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스스로를 지워가는 개인이 일본의 전통이었을까? 고대 일본은 가부장제와 거리가 먼 모계사회에 가까웠다. 7세기 쇼토쿠 태자가 유교를 수입해 일본에 규율과 위계적 신분질서를 정착시켰다. 12세기 말부터 쇼군을 중심으로 하는 사무라이 정권이 700년이나 이어졌다. ‘할복’이 보여주듯, 무사는 개인이 은밀한 사적 영역으로 완전히 퇴각하는 현상을 처음 경험한 일본인들이었다.

이러한 사무라이 전통과 일본 정신이 애창되면서 일본 역사는 부분적으로 삭제된다. 봉건시대에 일어난 수많은 농민봉기는 전통에서 탈락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계기를 맞이한다. 에도시대가 끝나가던 마지막 몇 달간은 새로운 기대로 가득했다. 성적인 에너지로 가득한 축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해방의 순간은 가고, 일본인들은 천황과 절대주의의 부활로 배신당한다. 일본은 민주주의를 비롯해 서구의 모든 것을 모방하지만, 그 ‘자기식의 변형’은 껍데기만을 발전시키고 속을 텅 비우는 것이다.

일본은 시민윤리가 들어설 자리에 기업적 가치관을 세워놓았다. 서류가방을 든 사무라이, 기업전사로 불리는 일본의 샐러리맨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생산체제부터 자율성은 부정된다. 재벌이 하청업체를 착취하는 구조가 완성된다. 노동자가 기업이라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규정되는 체제 때문에 과로사 문제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근대화는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신했고, 성장 이데올로기로 구체화됐다.

도시와 지방 사이의 구조에서도 자율성이 붕괴된다. 전후 모든 것이 중앙집권화하면서 근대 일본은 지역 정체성을 없애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1972년에 정계의 실력자이자 킹메이커였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직에 오르기 직전에 <일본열도 개조론>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다. 토건국가는 일본 전후 체제의 핵심이다. 모든 것은 공공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중앙정부에서 시작된다. 수주 가격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게 분명한데도 유권자는 이런 사업을 환영한다. 건설회사는 선거운동에 거금을 기부하고, 정치가들은 건설회사에서 한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진단 아래 지은이는 일본의 미래를 위한 독특한 제안을 한다. 현재 일본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극우 국가주의가 아니라 ‘방기’다. 일본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손을 놓아버렸으며 국제 문제는 미국에 의존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들은 천황이든 역사든 전후 헌법이든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로 묶어놓는다. 나카소네 전 총리 같은 극우만이 뒤틀린 방식으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빈자리를 이젠 일본의 신세대 국가주의자들이 채우고 있다.

지은이는 일본이 정체성까지 미국에 맡겨놓는 의존의 고리를 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헌 논의는 큰 계기가 될 수 있다. 헌법을 유지하든,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든, 재무장을 하든 안하든, 전 국민이 열린 토론을 거쳐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격론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좋다. 스스로 문제의 해답을 찾고 자기 결정에 책임지는 과정을 통해… 미래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우의 생각을 아예 활짝 터놓고 전국적인 논의에 불을 붙이면 헝겊을 벗겨낸 미라처럼 분해돼버릴 것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의문
지은이의 이런 논지는 때때로 한국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불편함은 지은이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서구의 근대화를 이상화하는 진화론적 관점에 서서 일본의 근대를 비판하며, 일본 사회에 ‘미성숙’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일본 특유의 경제발전 양식과 보호무역주의에도 이런 딱지를 붙이는 것은 때론 부당해 보인다.

무엇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한 제안은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한다. 지은이는 히로히토 천황의 죽음이나 국가주의의 재등장 등 몇 개의 빈약한 근거를 들어 지금 일본이 거대한 변화의 시점에 다다랐다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일본이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는 역동적인 과정을 겪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만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개헌 논의 등을 통해 미국에 대한 의존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일본과 동아시아 국가의 관계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몇 개의 의문에도, 지은이가 견지하고 있는 논지의 핵심은 여전히 울림이 크다. 일본은 지금 격론을 벌이며 자신을 성찰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일본은 거울처럼 한국의 모습을 비춰준다.(유현산기자) 

08. 0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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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23 22:52   좋아요 0 | URL
패트릭 스미스의 이런 논리는 근대 자체에 대해 성찰하는 왈러스틴과 같은 이의 사상에 비해 얼마나 수준이 낮습니까.일본의 근대화를 비판하면서도 평화헌법을 바꾸라니...그럼 무슨 근대화를 이상으로 삼겠다는 것인가요.경향신문에 칼럼을 내고 있는 거번 맥코맥은 우익의 집요한 공세에 맞서 일본의 시민운동 세력이 평화헌법 고수를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가상하다고 말하는데, 아예 개헌을 하라고요?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개헌파가 득실득실해야 좋다는 말인지.

로쟈 2008-08-23 23:25   좋아요 0 | URL
"헌법을 유지하든, 일본인의 손으로 다시 만들든, 재무장을 하든 안하든, 전 국민이 열린 토론을 거쳐 어떤 선택을 내린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게 실상은 허구죠. 민주주의의 허구. 다수는 결국 개헌을 지지할 테니까요. 영화 <다크 나이트>는 그런 점을 잘 짚어주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3 23:51   좋아요 0 | URL
아직은 평화헌법 고수파가 대세인 듯 싶어요.여하튼 일본의 사상지도는 아직은 아사히 같은 신문이 산케이 요미우리에 맞서는 발행부수를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니까요.우리나라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 발행부수를 조중동과 비교한다면...이거 얘기가 안되죠.

로쟈 2008-08-23 23:58   좋아요 0 | URL
정치권만 나대는 건가요?..

노이에자이트 2008-08-24 00:20   좋아요 0 | URL
2005년에 새역모라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일본사 교과서 만든다고 법석을 떨 때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 곧 만주국이라도 세울 것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실제 그 교과서 채택한 학교가 하도 적어서 새역모가 분열되어 버렸거든요.흔히들 일본의 진보세력이 약하다 뭐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나라가 일본을 걱정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우리도 내 코가 석자나 빠졌으니까요.우리나라는 아직도 국가보안법이 엄존하고 있을 만큼 제도적 민주주의가 미약한데 정치적 허무주의가 선거에 대한 무관심을 조장하고 있으니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거나 못 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 격이죠.비정규직의 확산은 이런 추세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구요.요즘 경향신문이 비정규직의 확산을 경제나 노동문제 뿐 아니라 정치적 의미에서도 분석하고 있는데 상당히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봅니다.

로쟈 2008-08-25 00:07   좋아요 0 | URL
평화헌법에 대한 논란이 자꾸 제기되기에 백중세인 줄 알았는데, 아직은 고수파가 대세라니 다행이네요. 가라타니 고진은 한 술 더 떠서 '평화헌법'을 일반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그러니까 그걸 '정상'으로 하자는 얘기죠...

노이에자이트 2008-08-26 17:08   좋아요 0 | URL
가라타니 상이 그런 이야기를...하긴 폭 넓은 사상을 가진 학자니까요.

로쟈 2008-08-26 20:57   좋아요 0 | URL
<세계공화국으로>의 취지가 그렇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26 22:31   좋아요 0 | URL
얼마 전 고인이 된 오다 마코토(하워드 진의 친구)상도 평화헌법 고수,미국과의 군사동맹 반대를 외쳤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죠.

로쟈 2008-08-26 22:38   좋아요 0 | URL
그걸 강대국에도 요구한다는 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인데요,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