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윤리와 만민법'은 한가지 주제도 되지만 두 권의 책을 가리킨다. 피터 싱어의 <세계화의 윤리>(아카넷, 2003)와 존 롤스(롤즈)의 <만민법>(이끌리오, 2000)이 그 두 권의 책이다(<세계화의 윤리>의 원제는 그냥 <하나의 세계>이다). 알라딘에는 모두 품절/절판으로 나온다. 필요 때문에 며칠전 <세계화의 윤리>는 구입했고 <만민법>은 오래전에 구입해둔 책이지만 짐작엔 롤스의 다른 책들과 함께 박스보관도서여서 당장 손에 들지 못한다(말 그대로 '박스의 책'이다). 해서 관련자료를 검색해보다가 참고할 만한 기사들이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순서는 역순이다.

한겨레(00. 11. 20) '현실적 유토피아' 가능한가

IMF사태 뒤 우리는 한 나라의 주권마저 뒤흔드는 세계화의 영향력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다. 서구중심 신자유주의 사조에 대한 최근의 거센 비판또한 따져보면 경제논리로 간섭과 배제를 일삼는 국제관계의 타산적 변화가 주된 요인이다. 바꿔말해 그것은 곧 나라사이의 정의로운 관계가 과연 실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론>으로 세계지성의 반열에 오른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만민법>(이끌리오·장동진 외 2인 옮김)은 정의를 갈구하는 보편적 이성에 기대어 정글화된 국제관계에 `죽비'를 때리는 연구서다. 명저 <정의론>(71년)과 <정치적 자유주의>(93년)에서 합당성과 공적 이성(Public Reason)을 토대로 한 사회의 분배정의를 역설했던 그의 도덕주의는 책에서 나라 사이의 공존과 평화를 좇는 만민법 개념으로 재생되고 있다.

저작을 구성하는 만민법과 공적 이성에 대한 두 논문들은 겉보기에 도덕군자의 규범론에 가깝다. 세계평화를 도덕적 명령으로 본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사색의 지렛대 삼았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만민법'은 롤스가 재정립시킨 윤리적 정의가 세계 시민의 유토피아를 이룩하기 위한 외교적 원칙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입증한다는 점에서 통찰의 깊이가 엿보인다. 일반적 사회계약론을 여러 나라간의 관계짓기로 확장시킨 셈이다. 그에 따르면 만민의 사회는 자유민주적인 만민의 사회와,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지만 여러 다원적 논의가 가능한 `적정수준의 만민의 사회', 무법적 사회로 나뉘어지는 데, 도덕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인간이성의 특징 때문에 앞의 두 사회는 만민법에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유토피아'가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국제정치 현실에서 가능하기나 할까. 롤스는 확답을 피하고 관용에 바탕한 만민법 이상이 실천과정에서 국제관계의 정의실현을 위한 가능성을 꾸준히 높인다는 전망을 내놓는다. 반전론보다 인권을 위해 무법적 나라에 대한 무력개입을 옹호하는 그의 견해는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공적이성의 재조명'또한 같은 맥락에서 종교와 인종 등의 가치관 차이를 넘어선 만민법의 합당한 고갱이로서 공적 이성을 다루고 있다. 관용에 뿌리를 둔 공적 이성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종교교리, 이해관계의 갈등을 완화하는 정의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실천하는 이성의 권능을 믿는다는 점에서 롤스는 마치 21세기의 칸트처럼 비친다. “정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이 지구상에 살 가치가 없다”는 칸트의 명제는 그래서 담론의 중요한 전제이며 “정치적 개념이 본질적, 도덕적 가치로서의 정의를 포함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은 이성적 의지를 채찍질하는 중용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서구적 사고방식이 지고의 문화적 가치로 뿌리내린 현실에서 이 강단학자의 견해가 시국한담이나 서구우월주의의 근거로 잘못 읽힐 수 있는 점은 분명 경계할 대목이다.(노형석 기자)

 

주간동아(04. 01. 15) 국가 초월한 지구촌 웰빙 지침서

2003년 지구는 어느 때보다 다양한 세계화 현상들을 겪었다. 그 가운데서도 절망적인 상황이주를 이루었다. 유례없는 반전열풍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테러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는 개발도상국들이 강대국의 일방적인 경제 세계화에 반발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은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교토의정서를 미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거부하면서 파행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희망도 샘솟았다. 최근 이란에 엄청난 지진 피해가 발생하자 세계 각국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의 수많은 선량한 손길이 지구 저편의 곤궁한 이웃을 돕고 있다.

자국의 사소한 일 하나도 그 나라만의 문제일 수 없는 지구촌 시대다. 이제 문제는 세계화의 수용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세계화를 진행시킬 것인가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실천윤리학의 거장인 피터 싱어는 근저 ‘세계화의 윤리’(원제 One World: The Ethics of Globalization)에서 “우리가 어떻게 전 지구화의 시기를 잘 겪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결국 윤리적 문제다”라고 지적한다. 윤리적 문제라는 것은 예컨대 우리 개인적으로는 가난하고 약한 나라를 돕는 윤리의식이, 세계 전체로는 합법적인 노동기준과 환경기준을 ‘잘 관리할’ 지구적인 단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전 지구적 공동체 윤리를 가지려면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제까지 전가의 보도처럼 중시된 ‘민족국가(nation-state) 중심 시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 이제까지 우리들의 행동윤리는 국가라는 공동체 범위 안에서의 일이었다. 그러나 국가간의 통합 문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를 만큼 세계화가 진척된 상황에서 민족국가 중심 개념은 세계를 힘의 논리에 따라 비윤리적으로 재편할 방편이 될 수 있다.

피터 싱어는 미국을 그 예로 든다. 미국이 강제하는 전 지구적 평화주의인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가 아무리 건전한 원칙과 고매한 이상을 가졌어도 전 세계 60억 인구의 지구를 3억 인구의 나라가 지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독재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을 막을 견제와 균형의 장치도 없는 상황은 우려할 만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미국이 보인 그간의 행동을 보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싱어는 꼬집는다. 예컨대 미국이 교토의정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것은 대표적인 이기주의의 사례라는 것. 또한 집단살해죄와 인도에 반하는 죄로 기소된 자들을 재판하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에 미국이 반대하는 행동도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라크 침공을 감행한 논리였던 대량살상무기는 이라크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필요한 실천 가능한 방법들은 무엇일까. 싱어는 크게 네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 그 방법들을 제시한다. 첫째, 지구온난화 문제. 이산화탄소 배출권 거래를 현실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보여주고, 미국의 교토의정서 탈퇴와 같은 강대국의 전횡을 막기 위해 국제기구의 강화를 제안한다.

둘째, 환경과 인권 등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를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며 국가 주권에까지 개입해온 WTO를 개혁하기 위해 노동자의 권리 옹호, 환경 보호, 동물권리 보호 등에 대한 전 지구적 기준과 이를 시행하는 기구를 마련하자는 것.

셋째, 집단살해 등 개별 국가의 특정 사안에 대한 국제적인 개입은 어떤 경우에 가능한지를 제시한다. 그 결정은 반드시 한 국가가 아니라 합당한 절차에 따라 유엔을 통해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것.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왜 비윤리적인지를 짚어내는 대목이다.

넷째, 지구상의 극빈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각국이 GNP의 1%를 해외원조로 내놓아야 한다는 것. 그 방식은 정치적 목적이 아닌 저소득국가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적인 ‘하나의 세계’를 위한 싱어의 생각은 구체적이면서도 이상적이다. 그래서 어려운 수치와 논리가 전개되면서도 호소력이 있다. 마치 존 레논이 ‘이매진(Imagine)’에서 ‘나라가 없다고 상상해본다 … 온 세계를 함께 나누는/ 모든 사람을 상상해본다’고 노래했듯, 그도 이 책을 통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노래 부르고 있다.(정현상 기자)

08. 08. 31

 

 

 

 

P.S. 피터의 싱어의 책에는 롤스의 두 저서인 <정의론>과 <만민법>에 대한 논평이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먼저 <정의론>에 대해서: "윤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변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자우주의적이 미국이 성립되는 과정에서의 정의에 대한 20세기 후반의 사고를 대표하는 롤스의 <정의론>을 살펴보아야 한다. 1971년 출판된 직후에 읽었을 때, 나는 거의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이 서로 다른 사회들 사이에 존재하는 극단의 빈부 간의 부정의(injustice)를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놀랐다."(32쪽) 말하자면 롤스의 '정의'는 사회'간' 정의가 아니라 사회'내' 정의에 국한되고 있다는 것.

"원초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롤스는 선택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일한 사회에 속해 있으며 그 사회 내에서 정의를 이룩하는 원칙을 선택하고 있다는 것으로 단순하게 가정한다.(...) 만약 정의롭게 선택하려면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인지도 몰라야 한다는 것까지 롤스가 받아들인다면, 그의 이론은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향상시킬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미국에서 씌어진, 정의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서인 <정의론>에서 이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32-33쪽)

롤스가 이 문제를 비로소 제기하는 것은 <만민법>에 와서인데, 여기서도 문제는 없지 않다. 싱어에 따르면, "그의 접근방식은 무엇이 정의로운지를 결정하는 단위가 오늘날의 민족국가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 확고하게 뿌리 박고 있다. 롤스의 모델은 국제적인 질서의 모델인지, 전 지구적인 차원의 그것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가정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33쪽, 이에 대한 부연설명을 싱어는 226-231쪽에서 제시한다). 두 철학자간의 쟁점이 무엇인지는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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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9-02 23:05   좋아요 0 | URL
싱어의 롤스 비판! 궁금하네요.강정인 씨도 한국의 롤스 열기가 문제있다는 글을 쓴 적이 있죠.존슨 행정부의 복지정책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책이 정의론인데 국내학자들이 이런 맥락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지적했죠.롤스가 고교윤리의 사상과 철학 편에 소개된지도 20년 가까이 된 것 같아요.

로쟈 2008-09-03 08:29   좋아요 0 | URL
'롤스 열기'도 옛날 얘기 같은데요. 그것도 한때 주저들이 번역되고 학위논문들이 많이 나온다는 정도 같습니다. 그의 자유주의적 정의론조차 국내에선 '좌파', 혹은 빨갱이 이론으로 낙인이 찍히겠죠...

딸기 2008-09-03 17:49   좋아요 0 | URL
세계화의 윤리, 전 너무 재미있게 읽었어요 >.<

로쟈 2008-09-04 23:39   좋아요 0 | URL
네, 리뷰를 봤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3 21:15   좋아요 0 | URL
롤즈가 쓴 논문 중에 시민불복종운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게 있었는데 문득 이 논문 보면서 분노하는 사람들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우리나라 사람중에는 히틀러도 좌익으로 구속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이들도 있겠죠.

로쟈 2008-09-04 23:39   좋아요 0 | URL
남아도는 게 그런 실력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09-05 15:56   좋아요 0 | URL
그런 실력을 필요로 하는 나리들이 계시니까요.

로쟈 2008-09-06 08:51   좋아요 0 | URL
임기제 대통령이 아니라 총통을 모시는 듯싶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09-06 16:38   좋아요 0 | URL
반대자들 다루는 모양이 구사대 동원하여 진압하는 식이죠.이 정도인줄은 몰랐어요.
 

<고교 독서평설>(9월호)에 게재한 '갑론을박' 꼭지를 옮겨놓는다. 타이틀은 '국가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고 돼 있다. 주로 가라타니 고진의 <세계공화국으로>(도서출판b, 2007)의 내용을 간추리고 있다. 사실 가라타니의 책 자체가 고등학생 정도를 겨냥하여 씌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본문에 병기된 해설문구나 각주 등은 생략했다.

국가, 그 이후 - 무정부 상태? 세계 공화국?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Imagine there’s no Heaven.).”라고 시작하는 존 레넌의 노래 〈이매진〉의 2절은 이렇다.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어렵지 않아/죽이지도 않고, 죽을 일도 없고/종교도 없고 말이야/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걸 상상해 봐(Imagine there’s no countries/It isn’t hard to do/Nothing to kill or die for/And no religion too/Imagine all the people/Living life in peace.).” (*노래는 http://kr.youtube.com/watch?v=BPROGyJ2FNA 에서 들어볼 수 있다.)

영국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천국도 없고’ ‘종교도 없고’란 구절 때문에 이 노래를 금지시켰다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의 초점은 ‘종교’가 아니라 ‘국가’에 두어진다. 국가가 없고 국경이 없는 세상은 과연 가능할까? 만약에 가능하다면 국가 이후의 세상은 무정부 상태일까, 세계 공화국일까? 한번 생각해 보자. “어렵지 않아!”

국가의 정의 - 국가와 공동체의 차이점
먼저, 국가에 대해 물어야겠다. 국가란 무엇인가? 교과서적 정의에 따르면 “일정한 영토와 거기에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주권에 의한 하나의 통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사회 집단”을 가리킨다. 그래서 흔히 국민, 영토, 주권이 국가의 3요소라고 지칭된다. 그렇다면 일정한 지역에서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사는, 곧 “생활이나 행동 또는 목적 따위를 같이하는 집단”으로서의 공동체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국가로 발전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문제는 좀 복잡하다. 이제 우리는 길잡이로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의 생각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그에 의하면 국가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환 양식’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의 ‘교환’ 말이다.

가라타니는 교환 양식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증여와 답례로서의 호수(互酬, 상호 교환). 이는 공동체 내부에서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가리킨다. 다양한 종류의 호수적 교환이 이루어지는데, 가령 부모가 아이를 보살펴 주는 것도 증여로서의 호수다. 나중에 보답하지 못하더라도 아이가 부모의 은혜를 느낀다면, 그것도 일종의 ‘교환’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탈취·약탈과 재분배. 인류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외부와의 접촉이 전혀 없었던 아마존 오지의 야노마모족은 아주 호전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야노마모족은 자연 상태의 ‘미개 사회’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짐작하게 해 주는데, 이들에게 전쟁은 교환의 실패에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선행하는 것이었다.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약탈을 자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러한 약탈이 지속적이기 위해서는 ‘재분배’가 요구된다. 이 약탈-재분배도 일종의 교환 양식이다. 그리고 셋째는 가장 일반적인 교환이라 할 상품 교환. 현실적으로는 화폐와 상품의 교환이다. 끝으로 넷째는 현실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념으로 가정할 수 있는 X. 요약하면, 호수, 재분배, 상품 교환 그리고 X라는 네 가지 교환 양식이 있다(이 X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밝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환 양식과 국가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국가가 공동체 내부에서는 발생할 수 없으며 항상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만 발생한다는 점이다.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들을 지배하는 형태다. 그러므로 국가의 기반은 기본적으로 폭력적 수탈에 있지만, 그러한 수탈을 영속화하기 위해서는 피지배자를 보호하고 육성할 필요가 있다. 가령 다른 국가로부터의 약탈에 대비하거나 대규모 관개 사업 같은 공공사업을 일으킨다거나 하는 것이다. 이때 피지배자는 지배자의 작업을 증여로 간주하고 그 ‘은혜’를 부역이나 납세를 통해서 갚는다. 여기서 ‘유사 호수’ 관계가 성립하게 된다. 실상은 약탈-재분배인데 마치 호수적 교환인 것처럼 보이게 해야만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지속될 수 있으며 통치 권력도 유지될 수 있다.

만약 공동체 안에서 국가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이는 사실상 그 바깥에 국가가 존재하는 경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항하여 주변의 공동체가 스스로를 방위하거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과정에서 국가가 형성된다. 결국 국가는 다른 나라, 곧 적국(敵國)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성립되지도 않는다. 국가의 자기 정체성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때가 바로 전쟁이라는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점이 국가를 공동체나 사회로 환원할 수 없도록 한다. 곧 국가는 공동체나 사회와는 다른 차원에 속한다.



국가의 탄생 - 근대 국가, 목표는 팽창
국가의 발생사를 역사적으로 보면 중앙 집권적 제국이 서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먼저 성립하고(이집트, 인도, 중국), 그 바깥에서 고대 도시 국가(그리스, 로마)와 제국(동로마 제국), 봉건제 국가(일본) 등이 형성되었다. 근대 이전의 국가란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가 사회적 재생산의 근간을 이루고 그것에 기초하여 국가 권력이 자리를 잡은 형태인데, 그 사회 구성체의 정점이 제국(empire)이었다. ‘세계 제국’이라고도 불리지만 실제로는 세계의 한 지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 제국이 서로 연결된 시기가 15·16세기다.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는 유럽과 아메리카, 아시아를 연결하면서 그때까지 떨어져 있던 다수의 세계 제국(곧 경제권)을 통합시켰다. 그 뒤 세계 상업과 세계 시장이 16세기 상업 자본주의의 발달을 이끌게 되면서 비로소 ‘세계 경제’가 출현하게 된다. 이 ‘세계 경제’가 뜻하는 바는 이제 근대 국가나 자본주의를 일국(一國) 단위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월드 시스템(World System)’을 일컬어 ‘세계 체계’, 또는 ‘세계 체제’라고 한다.

근대적 ‘네이션-스테이트(Nation-State)’, 곧 ‘국민 국가(또는 민족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 아래 세계 제국이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서유럽의 경우 서로마 제국을 계승했던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절대주의 국가의 성립으로 이어졌다.01 이 절대주의 국가(주권자)는 왕이 도시(부르주아)와 결탁하여 봉건 제후를 제압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들면서 이루어졌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화기(근대식 무기)와 화폐 경제인데, 물론 화폐 경제는 세계 시장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근대 주권 국가는 다른 국가와의 관계없이 성립할 수 없으며, 주권이란 것 자체가 다른 국가의 승인에 의해서만 존재한다(주권의 관할 범위를 놓고 벌어지는 ‘영토 분쟁’을 떠올려 보라). 이런 이유로 국민 국가는 본성상 팽창 지향적이다. 국민 국가의 팽창을 가로막는 것은 다른 국민 국가뿐이다. 따라서 국민 국가는 필연적으로 다른 국민 국가를 생성시킨다(식민지 지배 아래 놓여 있다가 ‘민족의식’이 각성되어 독립한 국가들을 보라). 이 국민 국가는 때로 과거 제국의 규모로까지 확장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민 국가가 팽창하여 형성하는 제국은 근대 이전의 세계 제국과 어떻게 다른가? 역사상 존재했던 여러 제국은 각각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모두 하나같이 다원적이고 관용적이었다는 점이 그것이다. 곧 세계 제국은 다양한 부족 국가나 공동체 위에 군림했지만, 그 지배 관계를 해치지 않는 이상 그 안의 국가나 부족의 관습에는 무관심했다. 제국의 지배자들은 인종·종교·민족을 뛰어넘어 피지배자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최초의 패권 국가 페르시아는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면 해당 지역의 법률과 전통을 그대로 포용하고 용인했다. 또 인종이나 종교 등에 개의치 않고 실력을 가진 장인·사상가·노동자·전사 들을 제국의 관리와 통치에 동원했다.

이러한 면모는 국민 국가가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민 국가의 전신(前身)인 절대주의 국가는 그 내부의 모든 것을 ‘신하(subject)’로서 동질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에게 맞서는 권력이나 공동체를 인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민 국가의 작동 원리는 제국의 원리와 다르며, 그런 의미에서 국민 국가의 연장으로서의 제국은 종래의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냉전이 종식되면서 미국은 세계 유일의 패권 국가가 되었다. 걸프 전쟁(1991)의 승리와 함께 절대적인 군사적 헤게모니를 과시하면서 과거 로마 제국이 누렸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처럼 보였다. ‘팍스 로마나’에 빗댄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세계 평화)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을 가리켜 세계를 평정한 ‘제국’이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국’과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구분을 염두에 두고 따져 보면 된다. 국민 국가이면서 동시에 ‘제국’이고자 한다면 어떤 국민 국가라도 ‘제국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유엔(UN)의 지지를 얻었던 걸프 전쟁과는 달리 유엔의 결의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감행한 이라크 전쟁(2003)에서 확인된다. ‘제국’으로서 위상을 갖게 됐지만 미국은 여전히 ‘국민 국가’로서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그저 제국주의 국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주권 국가를 지양한, 곧 국민 국가를 넘어선 미래상이 아니다.

국가, 그 이후 - 세계 공화국을 향해! 
그렇다면 유럽 연합(EU)은 어떨까?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 공동체를 만들고, 아직 정치적 통합을 남겨 놓긴 했지만 경제적·군사적 통합을 구축했다. 이것이 세계 공화국의 전(前) 단계가 될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회의적이다. 유럽 연합을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 때문에 일부 국가들이 결합하여 ‘광역 국가’를 형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광역 국가는 다른 지역에서도 촉진되고 있다. 중국, 인도, 러시아, 이슬람권 등 과거의 ‘세계 제국’이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모두가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흔히 말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반응인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아무리 광역화되고 세계화된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소멸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교환 양식과 관련하여 살펴본 것처럼, 국가가 상품 교환과는 다른 원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민 국가가 실질적으로 소멸할 것이라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적 주장도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오히려 다중(곧 다수의 개인)의 반란과 저항은 국가의 지양보다는 국가의 강화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란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서로 관계하는 국가들에 있어 오직 전쟁만 있는 무법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성에 의한 다음과 같은 방책밖에 없다. 즉 국가도 개개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 미개한(무법한) 자유를 버리고 공적인 강제법에 순응하고, 그리고 하나의 민족 합일 국가를 형성하여 이 국가가 마침내 지상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도록 하는 방책밖에 없다.

이것이 칸트가 구상한 국제 연합(United Nations)이다. 그의 이념은 궁극적으로는 각국이 주권을 내놓음으로써 형성되는 ‘세계 공화국’에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만 국가 간의 자연 상태(곧 적대 상태)가 해소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일국(一國) 내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글로벌한 비(非)국가 조직(NGO)이나 네트워크가 많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자본주의의 전횡에 반대하는 운동은 국가에 의해 가로막히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가에 대항할 수 있을까? 가라타니는 각국에서 군사적 주권을 국제 연합에 양도하고, 그것을 통해서 국제 연합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국이 평화 헌법을 제정하고 전쟁을 시도할 수 있는 군사적 주권을 국제 연합에 양도하는 것이 국가를 지양하는 최선의 방도라는 의미다(전쟁이 없다고 상상해 봐!).

이제 가라타니가 말하는 네 번째 교환 양식 X의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 그것은 자발적이고 자립적인 상호 교환의 네트워크다. 이는 개개인이 공동체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기에 시장 사회와 닮았고, 동시에 호수적 교환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동체와 닮았다. 요컨대 시장 경제 아래에서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것인데, 이는 이념형이기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보편 종교와 보편 윤리의 차원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가령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타자(他者)를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목적으로서 대하라.”

이러한 종교·윤리의 구현이 바로 네 번째 교환 양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 공화국을 ‘아래로부터’ 떠받치는 힘이다. 위로부터는 국가를 지양하고 아래로부터는 새로운 교환 양식에 의한 글로벌 커뮤니티를 구축하는 것,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세계 공화국을 상상해 볼 수는 있다. 그리고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면 된다.

08. 08. 30.

 

 

 

 

P.S. <세계공화국으로>는 가라타니 고진이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의 '청소년판'으로 쓴 것이다. 때문에 여유가 있다면 <트랜스크리틱>을 정독해도 좋겠다. 그밖에 실뱅 알르망의 <세계화>(웅진지식하우스, 2007), 에이미 추아의 <제국의 미래>(비아북, 2008) 등도 참고할 만한 책이다(<제국의 미래>는 학생들이 읽기에 좀 부담스런 분량이긴 하다). 김창호 외, <세상 청바지: 정의로운 사회는 가능할까?>는 편집부에서 추천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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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08-08-30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놀드 토인비 박사 역시 세계연합의 국가가 탄생되는 것을 기대했었는데 그 발상은 결국 하나의 폭력적 전쟁을 통해 일단 세계독재국가가 탄생되어 그 국가가 착오와 착오를 거쳐 하나의 거대 연합주의 국가로 탄생된다고 상당히 비관적으로 지구의 앞날을 예측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발생되는 여러 국가들의 연합체 속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에 초점을 놓고 그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란 것에 관심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어야 할 지 혼자서 생각을 하는데...왠지 너무 크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고민은 안 해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흠 뭔가 나사 풀린 댓글이네요...^^;;;

로쟈 2008-08-31 11:59   좋아요 0 | URL
토인비 버전의 묵시록이군요.^^

2008-08-31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8-31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0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녹색평론에 나온 이명원 씨의 가라타니 고진론을 읽었는데 <근대문학의 종언>의 속편 격이 <세계 공화국으로>라고 하더군요.김윤식 씨가 <근대문학의 종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 방! 뼈대만 핥았는데 며칠 후 시간내어 정독하려고 합니다.근데 이명원 씨가 마흔이 안된 학자네요.이명원 씨의 평론집도 읽어보려고 합니다.내친 김에 가라타니 고진의 책도 읽어야죠.<근대문학의 종언>은 박유하 씨 번역이네요.

로쟈 2008-09-03 08:31   좋아요 0 | URL
뒤에 나왔으니 '속편'이라 부를 수도 있겠네요. 가라타니는 읽기 쉽습니다. <탐구1, 2>나 <윤리21> 같은 책부터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9-03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된 책이 많더군요.참고하겠습니다.
 

이번주에 주목한 신간 중의 하나는 유럽 중심주의 역사학자 여덟 명을 호명하여 비판한 제임스 블로트의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푸른숲, 2008)이다. <리오리엔트>의 저자 안드레 군더 프랭크에 따르면, "블로트는 마치 사격장에라도 온 듯, 막스 베버의 고전적인 주장에서부터 재레드 다이아몬드와 데이비드 랜디스가 쓴 그것의 최신 베스트셀러 버전에 이르기까지 유럽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옹호자 여덟 명의 ‘이론으로 가장한 이데올로기’를 정확히 쏘아 맞출 뿐 아니라 철저하게 해부하여 완전히 무너뜨린다." 거기에 한국어판 서문을 쓴 서양사학자 최갑수 교수에 따르면, "유럽중심주의의 세계이해를 비판하고 있는 이 책은 그것의 극복을 바라는 이들에게 소중한 입문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적어도 문제의 과녁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도록 해줄 듯싶다...

한국일보(08. 08. 30) 유럽문명만이 우월?… '반쪽 사관' 일뿐!

"왜 그 많은 문명중 유럽문명만이 자본주의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이 질문은 역사의 승자인 서구의 역사가들은 물론, 식민지배를 청산하고 20세기 들어서야 근대국가를 세운 제3세계 역사가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많은 서구 역사가들이 제시한 해답은 유럽 사회의 '특수성'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타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과학은 오직 서구에서만 발전단계에 있으며, 체계적인 신학을 끝까지 발전시킨 종교는 기독교 뿐"이라고 저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서문을 장식한 막스 베버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클릭하시면 원본 이미지를 보실수 있습니다

유럽문명의 '합리성'을 근거로 서구 근대화의 필연성을 주장한 베버 이후 다양한 유럽중심주의 이론들이 등장했다. 삼포식 돌려짓기와 무거운 쟁기사용 등 농업혁명은 오직 유럽에서 성취됐으며 이것이 자본주의화의 길로 이어졌다고 보거나, 야만적이고 약탈적인 정치체제를 가진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평등주의적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은 유럽에서만 경제발달을 가능하게 한 민주주의가 발달했다는 이론 등이 그것이다.

남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의 연구를 토대로 유럽 식민주의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데 평생을 바친 역사가이자 베트남전 반대운동, 푸에르토리코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던 제임스 블로트(1927~2000). 그는 베버로부터 시작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로버트 브레너, 보수주의 역사가 데이비드 랜디스에 이르는 8명의 대표적인 유럽중심주의 역사가들을 호출한다.

그는 유럽인들은 비길데 없이 창의적이거나, 홀로 독창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할 수 있다거나, 홀로 민주적이고 윤리적이라는 이 지식인들의 역사서술 인식 태도를 협애하기 짝이 없는 '터널사관'이라고 비판한다. 가령 베버는 지중해의 도시들 같은 교역도시가 유럽을 특별하게 만들었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블로트는 인도양이나 남ㆍ동중국해에도 큰 교역도시가 있었고, 비유럽의 문명에 대해 무지한 베버는 지적으로 불성실한 논리를 전개했을 따름이라고 공격한다.

저자는 유럽의 환경이 다른 지역보다 더 뛰어나지도 않았으며, 문화적으로도 우월한 특성이 없다고 단언한다. 유럽발흥의 원인은 오직 다른 지역의 해운 중심지보다 유럽의 그것이 아메리카로 향한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영향력을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우리 독자들은 명쾌하고 다양한 논거를 사용해 세계적 석학들의 이론적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그의 반론에 일종의 통쾌함까지 느껴질 정도다.

이 책은 저자가 탈식민화된 세계사 서술을 위해 기획했던 3부작'식민주의자들의 세계이해'의 두번째 책. 다음 작업으로 저자는 유럽중심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유럽의 대두와 세계화를 설명하는 저술을 계획하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완결짓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미국지리학자협회는 2000년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임스 M 블로트 혁신적 저작상'을 제정했다.원제 'Eight Eurocentric Historians'(2000)(이왕구기자)

08. 08. 30.

P.S. 비판대상이 된 여덟 명의 역사학자 중에는 '유로 환경결정론자'로 지목된 생물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주로 타겟이 된 책은 국내에서도 호평을 받은 <총, 균, 쇠>이다.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의 역자 박광식씨는 줄곧 <총기, 병균, 강철>이라고 옮겼는데, 따로 이유가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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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4   좋아요 0 | URL
저는 로버트 브렌너를 어떻게 비판했을까 궁금하네요.

로쟈 2008-08-31 12:04   좋아요 0 | URL
목차에도 있지만, '유로 마크스주의'로 지칭하네요. 내용은 '유럽 확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보이니까 대동소이할 듯...

노이에자이트 2008-09-01 21:44   좋아요 0 | URL
제2차 자본주의 이행논쟁 때 브레너의 논문이 경제사 쪽에서 꽤 유명해서 번역본을 봤는데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번역자들 중 지금은 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전제 자체-서구의 근대화 및 합리성-를 의심하는 학자로 바뀐 이가 있더라구요.

로쟈 2008-09-02 08:29   좋아요 0 | URL
'학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변호들도 있었지요...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대부분의 계간지들이 촛불집회의 성과와 한계를 짚어보는 다양한 특집을 싣고 있다. 좌담에서 칼럼과 평론까지 스펙트럼도 넓다. 어쩌면 다시 '전면전'을 준비해야 할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흥분시키고 또 실망하게도 했던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는 것도 필요하겠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국일보(08. 08. 27) "이제 우리 의식에도 촛불을 밝힐 차례입니다"

졸속적인 쇠고기 수입협상 타결에 대한 반대로 시작된 촛불집회. 두 달 이상 진행된 촛불집회는 촛불을 켠 시민 뿐 아니라 촛불에 반대하는 진영들, 시민단체들에게도 하나의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창작과 비평> <황해문화>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 등 계간지들은 가을호에서 특집, 대담, 칼럼 등의 형태로 촛불집회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 촛불은 자발적인 축제다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에게 '온수, 온수'를 외치는, 폭력을 농담으로 받아넘기는 시위대, "그렇다고 대통령을 바꾸겠습니까" 라는 여당의원의 발언에 "아니, 그럼 국민을 바꿔요?"라고 답한 시민들의 반응 등 촛불집회 참가자들이 보여준 신선한 상상력, 직관력, 표현력, 자발성에 주목해 촛불집회를 주목한 글들이 많았다.

전효관 전남대 교수는 "웃으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10대 여학생들은 이번 집회의 가장 상징적인 특이점"이라며 "새로운 감수성이 가벼움을 키워드로 채택하는 것은 진지함에 대한 대안적 성격을 갖는다고도 말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촛불집회를 정당의 영향력이 전무하고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영향력이 급격히 쇠퇴한 '자발적인 저항'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촛불집회는 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을 이끌어온 민주화운동세력, 시민운동세력에게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과제를 제기했다고 부연했다. 한 교수는 "발랄한 대중에게 운동권은 따분하고 재미없고 판에 박힌 말만 하고 게다가 권위주의적이기까지 했다"며 "자발적 평화시위로서 촛불집회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세계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 촛불은 민주주의의 학습의 장이다
촛불집회를 민주주의 학습의 장으로, 거대담론의 정치 대신 생활정치가 꽃필 수 있는 계기로 해석하는 분석도 나왔다. 이현우 서울대 강사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규정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 중ㆍ고등학생들, 일반시민들이 한번쯤 생각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며 "직접적인 성과 없이 끝날 가능성도 많지만 이 경험 자체는 한국사회가 조금 더 민주화되고 발전해 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이문재 문학동네 편집위원도 "다양한 계층의 시민들이 긍정적 의미에서 정치의식을 갖게 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긍정했다. 오은 시인은 "먹고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현장을 피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현장으로 나왔고, 과거에 정부의 정책에 군말 없이 복종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지 처음으로 찾게 되었다"며 촛불집회의 정치적 계몽효과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했다.

■ 촛불집회도 한계있다.
쇠고기 협상의 실패에 대해 정권교체까지 요구하는 촛불시위대의 주장은 참정권에 대한 부정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남재일 세명대 교수는 "정부가 민의를 거스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시민의 힘으로 재협상을 하는 것이 절차적 민주화를 성취한다는 시각은 난센스"라며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수개월 만에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전면적으로 대의권력을 부정하는 것은 스스로 참정권을 폄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장집 전 고려대 교수는 6월 정년퇴임 강연에서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대의적 민주주의 체제이며 운동이 항시적으로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라며 촛불집회의 한계를 주장한 바 있다. 한편 먹거리 안전확보라는 개인의 '권리 지키기' 문제에 집중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의 중산층적 문제의식이 비정규직 문제, 사회적소수자의 문제 등 다른 사회ㆍ경제적 문제들에 대한 연대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도 제기됐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이 운동에서 인터넷에 들어가볼 시간조차 없이 노동에 시달리고 해고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촛불항쟁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했다"며 "촛불항쟁은 비정규직문제, 한미 FTA같은 의제들을 에둘러갔다"고 한계를 지적했다.(이왕구 기자)

08. 08. 29.

P.S. 개인적으로 현장에 직접 다녀오지 못했으면서도 얼떨결에 좌담에 참여하게 됐는데, 최종 정리된 글은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사실 '정리'는 좌담이 끝나고도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야 가능했지만). 참고로, 계간지 가운데서는 <문화과학>이 촛불집회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08273.html 참조). 이 특집에는 촛불집회의 '스타' 진중권의 글 '개인방송의 현상학'도 포함돼 있어서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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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장집 씨의 지적은 경청해야 합니다.광장의 민주주의에 감격해서 일상적인 정당정치를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했죠.그는 정당정치를 직업적인 정치꾼이나 하는 짓이라는 주장을 진보진영에서조차 하고 있다면서 그런 자세는 국민에게 정치적 허무주의를 조장한다고 경계했어요.교육감 선거에서 한 표의 위력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 낮은 투표율을 보고는 그의 경고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더군요.

로쟈 2008-08-30 17:48   좋아요 0 | URL
규칙상 게임은 링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니까요...

에링 2008-08-31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촛불집회에 여러번 참가해봤고 집회의 한계나 시위대에 대한 실망도 여러번 느꼈습니다. 하지만 '촛불항쟁은 비정규직문제, 한미 FTA같은 의제들을 에둘러갔다'고 주장하는 김종엽 교수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어요. 촛불은 분명 기륭문제와 같은 비정규직 문제나 한미 FTA를 비판하고 참여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왔습니다. 온라인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요.

로쟈 2008-08-31 12:03   좋아요 0 | URL
흔히 '촛불'도 몇 단계를 거쳐서 '진화'해갔다고 얘기하는 부분인데, 비정규직 문제는 박노자 교수도 지적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강준만 교수는 '서울광장'이라는 공간적 특수성을 지적했구요. 계층적, 지역적 '특수성'도 고려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정치한 분석은 나중에 나오겠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을 언급하고 있는 시평이 눈에 띄어 옮겨놓는다.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가 왜 이리 가깝게 느껴지는 요즘인지...

경향신문(08. 08. 29) 망령

도스토예프스키가 숨 쉬었던 19세기 중반 제정 러시아의 공기는 이랬다. 1849년 4월23일 새벽 그는 당국에 의해 체포된다.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다. 당시 서유럽의 신 사조에 고취된 젊은이들이 모임을 만들어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전제정치를 비판한 걸 누군가 밀고한 것이다. 모임에서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것이 28세 신진 작가에게 씌워진 죄목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총살 직전 감형돼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난다.

끌려가던 날의 상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잠결에 샤벨(군경이 차던 칼)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 옷을 입는 동안 그들은 방안을 온통 들쑤시며 원고와 책을 끈으로 묶었다. 난로 속으로 들어가 담뱃대로 꺼진 재를 휘젓기도 했다. 탁자 위의 낡은 동전을 경찰관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사전(私錢·위조지폐)이라고 생각합니까” “조사해 봐야지” 그는 동전을 중대한 증거인 양 집어 넣었다.’

주동자 페트라셰프스키는 심문관 앞에서도 당당했다. “심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고한 한 사람을 벌하기보다 열 사람의 죄인을 방면하는 게 낫다는 예카테리나 여제(女帝)의 말대로다. 다른 하나는 ‘열 마디 말만 내놓으라. 그걸로도 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담뱃재를 놓고 서류를 불태운 증거라며 논죄하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옥중 진술서는 펜으로 피를 찍어 쓴 듯 절절하다. ‘어쩌다 엿들은 말을 종이쪽지에 적은 밀고를 바탕으로 가두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 전후 관계를 생각지 않고, 어떤 의도인지 개의치 않고, 조각조각의 말을 임의대로 엮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검열에 대해서도 그는 목소리를 높인다. ‘나는 어두운 색채로 정경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작품 발표를 금지당한 경험이 있다. 검열관들은 무해(無害)한 문장에서도 악의를 찾아내려고 한다. 있지도 않은 위험 사상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고선 작품을 매장해 버린다. 밝은 빛깔만으로 된 그림이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가 마셨던 차르 제정의 공기는 100여년 후 솔제니친이 마신 구소련의 공기와 별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그 공기는 21세기에도 망령처럼 지구를 떠돌며 어느 하늘을 암울하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망령에게 시공(時空)은 따로 없다.(김태관 논설위원)

08. 08. 29.

P.S. 필자가 암시하고자 한 내용은 너무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대놓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망령에게 시공은 따로 없다"고만 적었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징후적 현실이다(올해가 국가보안법 제정 60돌이라 한다. 관련기사는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08/08/29/0906000000AKR20080828091200917.HTML 참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분위기를 (웃음까지 섞어가며)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것이 '어느 하늘'을 쥐어흔들고 있는 정권의 최대 치적이다. 러시아문학도가 보기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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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8-08-29 18:42   좋아요 0 | URL
로쟈님, 24일 수요일 뵈어요. :)

2008-08-29 22: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8-30 17:28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쓴다면 도스토예프스키와 한나라당 차명진 대변인을 공통점을 지적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겠습니다.두 사람 다 보수파로 전향했으니까요.차명진 씨는 예전 민중당 출신인데 한때의 동료였던 오세철 씨에 대하여 "국보법을 위반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더군요.

로쟈 2008-08-30 17:47   좋아요 0 | URL
'보수'란 말 때문에 도매급이 되네요. 차씨의 인간이해는 절망스럽던데요...

노이에자이트 2008-08-30 20:53   좋아요 0 | URL
로자 님이 소개한 기사를 보니 국가보안법의 초창기 희생자인 백범이 생각납니다.옛 동지인 이범석의 막말...정치의 비정함을 분명히 느꼈을 겁니다.심지어 해방정국의 '반공주먹'김두한도 반공법에 걸려서 졸지에 빨갱이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