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존 산본마쓰의 <탈근대 군주론>(갈무리, 2005)을 언급할 일이 있었는데, 내친김에 몇 페이지 읽어보았다. 책장을 들추니까 예전에 저자의 한국어 서문 정도를 읽었군. 나는 작년에 책이 출간되자 마자 서점에 가서 몇 페이지 읽어보고 막바로 도서관에 원서를 주문했었다. '옮긴이 후기'에서 "책을 번역해 내놓을 때마다 항상 변변치 못한 번역 실력을 절감하지만, 이번만큼 번역을 내어놓기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라고 겸양의 말을 적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의례적인 말이긴 하나 독자로선 한번쯤 주저하게 되지 않나?

여하튼 주문한 원서는 몇 달 후에 들어왔고, 나는 첫 대출자가 되었다. 그리고 복사한 책을 번역서와 나란히 책장에 꽂아두었다. 아마도 작년 겨울에 몇 권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어볼 생각을 했을 듯한데 대개의 다른 계획들처럼 실행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손에 든 것이다. 그리고 서문을 읽었다. 저자가 책의 윤곽에 대해서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어서 마치 조감도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덧붙이자면 번역은 역자의 엄살과는 달리 잘 읽히며 무난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서문을 정리해두려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견적을 필요로 한다. 저자가 다루고 있는 범위가 매우 넓고 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모든 종류의 전력작 정치사상을 폭넓게 비판한 이 포스트구조주의 비평가(=푸코)가 급진적 전통에 가장 큰 해악을 끼쳤다고 주장한다."(35쪽) 같은 핵심적인 전언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상단한 분량의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한 악역(푸코)을 물리칠 우리의 영웅으로 저자가 추켜세우는 인물은 그람시이다(그람시란 이름은 책의 헌사에도 들어 있다). 말하자면 책은 '좌파정치학'을 놓고 '탈근대 목장'에서 벌어진 푸코와 그람시의 '결투'를 다룬다. 

하지만 이 페이퍼는 그 결투를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역사를 많이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의 바벨탑 이야기를 다룬다. 저자가 보기에 오늘날의 '좌파'가 처해 있는 문제점은 분리되고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 이후'처럼. "전 지구적 '좌파'라는 걸 의미있는 범위에 국한해 말하자면, 게슈탈트로스 곧 '형태없는'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실체'가 없는 것으로 비치는 운동이라는 건,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이 땅을 떠돌 운명이다."(27쪽) 그렇다면, 이 '형태 없는' 좌파는 '형편 없는' 좌파이기도 할 것이다. 그걸 타개해보고자 하는 게 책이 기획이다.

"언제나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난 한 세기 이상, 사회주의는 세계의 좌파 상당수에게 형태 또는 형식을 제공해왔다. 사회주의 힘은 유토피아적 상상력에 있었다. 그건 바벨탑에서 잃어버린 인류의 단결을 되찾자는 고대 종교적 이상과 닿아있다."(강조는 나의 것) 그리고, 흥미롭게도 저자인 산본마쓰는 그러한 사회주의의 비전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한 대목에서 발견하고 인용한다. 사실 이것이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든 동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는 단지 노동 문제가 아니다."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화자는 말한다.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 오늘날 무신론이 취한 형식의 문제이고, 또 신 없이 건설한 바벨탑의 문제,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이 땅에 하늘을 건설하는 문제이다."(28쪽)

참고로, 산본마쓰가 인용하고 있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949년 Modern Library판의 영역본인데, 짐작엔 저명한 러시아문학 번역자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이다. 그 원문은 이렇다: "Socialism is not merely the labour question,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 the question of the form taken by atheism today, the question of the tower of Babel built without God, not to mount to Heaven from earth but to set up Heaven on earth."

이 대목은 제1부 1편의 5장 '장로들'에 나오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막내 알료샤의 성장사와 조시마 장로에 대한 소개로 돼 있다. 역자는 한국어판으로 이훈섭 역의 '정음사판(1959) 등 다수'라고 원주에다 병기해놓았지만, 실제로 정음사판을 참조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정음사판은 세계문학전집에 들어 있던 대중적인 판본이긴 하나 최초의 번역본도 아니며 한편으론 중역본이기 때문이다. 번역에 민감한 역자가 굳이 오래전에 절판된 중역본을 표나게 내세운 이유를 나로선 알기 어렵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it is above all things the atheistic question'을 "그건 무엇보다 미학 문제이고"라고 옮긴 건 착오이다.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무신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많이 읽히는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넷 여사 등의 번역은 원문을 100% 번역하지 않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가독성은 높지만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이그나트 압세이가 옮긴 1998년판 옥스포드대학 출판부 번역본에서 문제의 대목은 이렇게 번역됐다.

"[F]or socialism is not only a conditions of labor or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 but rather, for the most part, a question of atheism, a question of today's particular form of atheism; it is a Tower of Babel built specifically without God, not in order to ascend to heaven from earth but in order to bring Heaven down to earth."(33쪽)

단어 선택에 있어서의 차이가 작지 않은데,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역시나 가넷판에서 누락된 'of the so-called fourth estate'를 되살려놓고 있는 점이다. 김학수 선생의 국역본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라는 것은 단순한 노동 문제라든지, 이른바 제4계급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로 무신론의 문제이고, 무신론의 현대적인 구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지상에서 하늘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 하느님 없이 쌓고 있는 바벨 탑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제4계급이란 건 프롤레타리아, 곧 노동자계급을 말한다. 중세의 신분적 위계질서 속에서 제1계급은 왕이나 영주를 가리켰고 제2계급은 귀족, 그리고 제3계급은 평민(부르주아)을 뜻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한 제4계급이 노동자였던 것. 김학수 선생의 번역에서도 '제4계급'에 대해 주석을 달아주거나(옥스포드판에는 미주가 달려 있다) '노동자계급의 문제' 정도로 옮겨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는 사회주의란 '신 없이 건설하는 바벨탑', 곧 무신론의 현대판이다(도스토에프스키는 이 무신론을 '니힐리즘'이라고도 부른다). 물론 이 '새로운 무신론'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와 알료샤의 입장은 부정적이다. 산본마쓰의 인용은 본래 작품에서 괄호안에 들어가 있는데 그것이 부연하고 있는 원래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알료샤도 자기 진리의 조속한 성취를 갈망하는 점에서는 다른 청년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으나 다만 그는 모든 다른 사람들과 정반대 되는 길을 택했을 뿐이었다. 그는 진지하게 생각한 끝에 신과 영생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얻자마자 곧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영생을 위해 살고 싶다. 어중간한 타협 같은 건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그가 신과 영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 버렸다면 그는 곧 무신론자나 사회주의자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그러니까 알료샤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던 것. (1)신과 영생 (2)무신론 혹은 사회주의. 그걸 바벨탑(유토피아) 버전으로 말하자면, '신과의 영생(Immortality with God)' vs '신 없는 바벨탑(Babel without God)' 산본마쓰는 도스토에프스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두번째 입장을 사회주의의 잃어버린 비전으로 제시한다.

"바벨탑 이야기의 교훈은 이 땅에서 인간의 노력을 통한 단결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창조할 수 있다고 상상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할 수 있다고 꿈꾸면, 우리의 교만이 우리를 파괴할 것이다. 한마디로 전지구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지역적으로(또는 부족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는 거다."(28-9쪽) 하지만 그렇게 주저앉는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계속 반역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다. 이 땅에서 보편적인 화합을 이룬다는 유토피아적 표상을 후대가 계속 보존해왔다.(...) 기독교 그리고 후에 이슬람교가, 하나가 된 세상이라는 오랜 꿈을 보편적인 정의라는 자신들의 꿈의 밑바탕으로 삼았다. 한참 뒤 계몽사상은 바벨탑의 복원에대한 아브라함의 열망을 세속화했다. 근대 이성의 꿈속에서, 18세기 백과전서파와 자코뱅파로부터 19, 20세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바벨탑을 재건하고 전체를 복원하려 했다."(29-30, 강조는 나의 것)

이어서 등장한 맑스. "맑스의 생각은 흩어진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역사적 건설 또는 포에이시스라는 공통의 기획의 바탕을 창조할 수 있는 공통의 정치 언어를 향한 탐구를 대표했다." 원문에서 포에이시스(poeisis는 이탤릭체로 돼 있다. 보통은 포이에시스(poiesis)라고 더 많이 음역되는 그리스어인데, 제작/창조(making/creating)란 뜻이고 하이데거는 'bringing forth'란 뜻으로 새겼다. 여기서는 '새로운 역사의 건설과 창조'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러한 건설/창조에 바탕이 될 '공통의 정치언어'를 맑스는 찾으려고 했다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주의는, 옛날엔 표면상으로만 달랐지 본질적으론 그렇지 않던 노동게급의 많은 '나라들'을 단결시키는 공통의 언어, 일종의 에스페란토어였을 것이다."(31쪽) 곧,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켜줄 수 있는 공통어(에스페란토어), 그게 사회주의이다. 사진은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광장에 있는 맑스의 동상. 비대에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러시아어로 새겨져 있다.

산본마쓰의 불만은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러한 사회주의의 꿈(=바벨탑)이 거의 포기됐다는 것. 남은 건 '바벨탑 이후'의 분열적인 분파들이다. 평화운동, 동성애운동, 여성주의, 환경운동, 유색인종 운동 다 제각각의 진보를 주창하지만 이게 콩가루다. 게다가 이론과 실천의 새로운 종합에 대해서는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는 이론들만 대학가에서 득세한다. '연대'가 아니라 '차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저자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현상이며, 그에 대한 분석과 비판에 뒤이어 그람시적 제스처를 따르는 새로운 에스페란토어를 제시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그런 것이 내가 서문에서 읽은 밑그림이다. 책의 나머지 부분들도 흥미를 끌지만 언제 마저 읽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한편 산본마쓰가 서문에서 줄곧 참조하고 있는 책은 조지 스타이너의 <바벨 이후>(1977)이다(리쾨르의 <번역론>에서도 참조된 책이다). 나는 책의 2판인지를 갖고 있는데(젠장, 박스보관도서이다) 찾아보니 지난 1998년에 제3판이 출간됐다. 스타이너의 주저 중 하나인 이 책이 언제쯤 번역돼 나올 수 있을까, 기다리느니 원서를 읽는 게 더 빠를까? 아무튼 '바벨 이후'에 막바로 소통이 안되는 언어들 때문에, 차이들 때문에 고생 만땅이다...

06. 12. 07.

 

 

 

 

P.S. 하니, 영어 공용어론자들이야말로 좌파 사회주의자들 아닌가?(복거일은 가면을 쓴 사회주의자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망상'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자는 어떻게 자신의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는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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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shin 2006-12-08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글판 번역과 관련된 언급만이 제 몫일 겁니다. '미학'은 착오에 의한 오역이군요. 바로 뒤에 무신론이 나오는데, 꼼꼼히 챙기지 못했군요.

이훈섭 역을 언급한 이유는 엉뚱한 데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검색 결과를 참조했고, 저 책이 첫 번역일 거라고 그냥 짐작했기 때문이지만 더 큰 이유는 절판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많은 번역이 있고 어떤 번역이 신뢰할만한지 모르니 안전하게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을 거론한거죠. 독자들은 이상할지 모르지만 번역자로는 그냥 '다수의 번역'이라고 주석에 달 수는 없기에 쓴 겁니다.

sommer 2006-12-08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와 바벨탑, 현대한국 사회와 소비에트 시절...이미 엉뚱한 곳에서 바벨탑은 '재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6-12-08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arishin님/ '아무도 볼 수 없을 옛날 책', 이라도 왜 굳이 집어넣으신 건지는 이해되지 않지만, 정황은 짐작해볼 수 있겠네요. 아무도 볼 수 없을!..
suture님/ 표지의 뉘앙스를 알아보시니까 반갑습니다.^^ 곧 짓게 된다는 제2 롯데월드 같은 것도 바벨탑의 유력한 후보가 아닐까 싶네요...
 

김장하는 동생네에 오면서 내가 들고 온 책은 요즘 필요 때문에 들춰보는 책인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바다출판사, 2004)이다. 아예 도서관에서 원서까지 대출했는데, 펭귄북 사이즈의 허름한 포켓북이어서 좀 의외였다. 내가 주의해서 읽은 건 4장 '왜 살인자가 되었는가'와 6장 '범죄 유형의 두 얼굴'이다. 시간이 되는 만큼 읽은 내용에 대해서 정리해둘 작정이다.

 

 

 

 

먼저, '왜 살인자가 되었는가?', 라고 제목이 붙어있지만 원서의 장제목은 'Childhoods of Violence'이다. '폭력에 물든 어린시절'쯤 될까? 살인범들의 유년기가 대개 가정폭력으로 얼룩져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국역본은 이를 효과적으로 의역하고 있다(절제목들 또한 국역본에만 있는 것이다)

저자 로버트 레슬러가 던지는 질문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란 물음이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는지? 바로 고갱의 그림(1897) 제목이기도 하다(그림은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인간의 생로병사를 보여준다). "고갱의 유명한 작품에 나오는 이 세 가지 큰 질문은 내가 1970년 후반부터 살인범들을 만나보면서 면담 때마다 주제로 삼았던 질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들이 살인마가 된 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서 살인범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었다."(137쪽)

레슬러는 FBI의 '범죄인 성격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복역중인(번역본엔 '북역 중인'으로 돼 있다. 북역?) 살인범 36명과 만나서 면접조사를 하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작성된 결과보고서는 살인범에 관한 연구로는 유례가 없으면서도 가장 방대하고 치밀하며 완성도 높은 연구라고 한다. 그가 살인자들의 성장환경과 성격에 대해 지적하는 대목들은 이런 '데이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르게(이 상식은 이후에 물론 많이 교정됐지만) 대부분의 살인범들은 가난한 결손가정 출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능의 경우에도 "연구 대상이었던 36명중 IQ가 90미만인 사람이 7명 있기는 했지만 나머지는 정상 범주에 들었으며, 그중 11명은 120이 넘었다." 하지만 중요한 공통점. "겉보기에는 정상적일지 몰라도 이 가정들은 사실상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연구 대상 중 절반은 직계가족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었고, 부모가 범죄행위에 연루된 적이 있는 경우도 절반이 넘었다. 가족 중에 술이나 약물을 남용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는 거의 70퍼센트에 달했다. 게다가 모두 어린시절에 심각한 정서적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성인이 되어서는 이들 모두가 정신과 전문의들이 '성불능자'라고 부르는, 다른 성인과 교감하며 성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139쪽)

'다른 성인과 교감하며 성숙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성숙한 관계'란 물론 '성적인 관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다른 성인과 정상적인 성관계를 갖지 못하는 '성불능자(sexually dysfunctional adults)'는 살인자들이 성에 대한 극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는 점과 연관해서 주의를 요한다.

이어서 다루어지는 건 가정환경이다. 레슬러는 두 단계로 나누는데, 상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먼저 "여러 연구에 따르면 출생후 6-7세까지 아이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어른은 어머니이며, 이 시기에 아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연구한 살인범들의 경우 어머니와의 관계는 한결같이 차갑고 냉담하며 사랑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아이들에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 바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강조는 나의 것)

흔히 말하는 인격형성기의 '애정겹핍'이 되겠다. 유아기때의 애착관계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애정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에 아이의 사회적 인격 형성은 치명적인 장애를 수반하게 되며 그 대가는 단지 당사자와 가족에게만 지불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결국 남은 평생 동안 그 결핍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범죄가 무고한 생명을 여럿 앗아갔으며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영영 치유되지 않을 상처를 남겼으므로, 사회 역시 고통받게 된 셈이다."(139쪽)  

중요한 것은 정서적 학대가 신체적 학대 못지 않게 아이에게 치명적이며 폭력적인 성향을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는 때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는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아이를 방치하지 말라'가 아니겠는가? 표도르 카라마조프는 자신의 아들들 네 명을 모두 제 손으로 양육하지 않았으며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는 아예 하인으로 부려먹는다. 그가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그가 한번 죽은 것은 그의 목숨이 하나였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0-6세 아동의 최대 과제는 사회화다. 다시 말해 아이들에게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들과의 적절한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하지만 자라서 살인을 저지르는 아이들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로 어머니가 소홀한 탓이지만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140쪽) 

 

 

 

 

물론 부모가 무관심하더라도 다른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이 정성껏 돌봐준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카라마조프의 세 형제, 드미트리와 이반, 그리고 알료샤(알렉세이)가 부모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친인척의 도움으로 (비록 알료샤를 제외하곤 아버지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사회적인 인격으로 성장하지는 않은 것도 한 가지 예이다. 하지만, 그런 이차 보호망마저 부재하다면 아이는 자신의 존재의의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즉 "가족에 대한 아이의 애착은 훗날 아이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인정하는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살인범들이 자란 가정에서는 부모의 냉담함을 상쇄시켜줄 수도 있는 형제자매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과의 관계 또한 거의 전무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이 아이들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 대한 애착을 발전시킬 수도 없는 상태에서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져갔다."(142쪽)

어머니 다음으로 중요한 사람은 물론 아버지이다. "잠재적인 살인범들은 8-12세 사이의 시기에 외톨이로 굳어지며, 고립은 그들의 정신적 발달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을 외톨이로 만드는 여러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빈자리다... (물론) 아버지 없이 자란 소년이라고 해도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로 자라나는 이른 극히 드물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반사회적 이상성격자로 자란 사람들의 경우 8-12세 사이의 기간이 결정적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연구를 하다 보면 바로 이 시기, 다시 말해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아이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오게 될 때가 많다."(14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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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11-2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이어요 방가워서...

로쟈 2006-11-2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제가 좀 늦은 편이죠. 도서관 책이 항상 대출중인 걸 보면.^^
 

가끔씩 마이페이퍼의 뒷정리를 하는데(이미지들이 다운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리중'이라고 해놓고 방치해놓은 페이퍼들이 눈에 띄곤 한다. 널려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은 숫자도 아니다. 그 중에서 작년 12월말에 진행하다가 만 '토성의 영향 아래(3)'을 마저 끝내기로 한다. 12월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러다간 1년을 다 채우겠다 싶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했는데 반납기한도 있으므로 '쇠뿔도 단 김에' 빼야겠다. 처음 두 문단이 작년에 적은 것인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보태 쓰겠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한다. 힘 닿는 한에서.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시울, 2005) 중 표제가 된 벤야민 장에 관한 세번 째 정리이다. 67쪽, 아니 68쪽부터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두 권의 짧은 책, 1930년대에 씌어져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은 이 책에는 벤야민의 자화상이 가장 뚜렷하게 담겨 있다."(국역본은 '이 책'이라고 단수로 돼 있다.)  그 두 권의 책이란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과 <베를린 연대기>를 말한다. 참고로, 네권짜리 영역본 선집과는 별도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하버드대학출판부, 2006)은 단행본으로도 새로 출간됐다.

초기 우울증 질환자였던 벤야민은 "고독이 인간의 유일한 적합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때의 고독은 방안에서만의 고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거대 도시 내에서의 고독,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68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이다.

그러한 벤야민의 모델은 보들레르의 산책자(flaneur)였으며,  그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는 걸 좋아했다. "<베를린 연대기>의 다른 부분에서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삶을 지도로 그린다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도시의 미로는 그에게서 삶의 은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는 지도와 도식, 기억과 꿈, 미로와 아케이드, 원경과 전경 등의 은유을 이용해 "방향찾기의 일반적인 문제를 말하며 어려움과 복잡성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벤야민이 참조한 것은 브르통의 <나자>나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같은 초현실주의 소설들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벤야민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주의'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은 우울질의 사람들은 또한 '둔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는 것도 특징이다. 어머니와의 산책에서의 그의 이러한 고집불통의 구제불능성은 강화되는데(그는 커피 한 잔 끓일 줄 모른다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보다 더 느리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버릇은 이때의 산책에 그 근원이 있다. 이 버릇에는 또 내가 나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빠르고, 더 능수능란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위험이 있다."(71쪽) 그리고 이러한 '완고함(stubbornness)'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의 1/3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이 나온다. 나는 '완고함'에 '구제불능'이란 뜻을 포개서 읽고 싶다. 문맥상 이 산책에서 문제된 것은 항상 그가 엄마보다 뒤쳐져서 따라가곤 했다는 것. "얘, 발터야,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를 헌정하기도 한 아샤 라시스 얘기가 나오는데('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페이퍼를 참조) '아샤 라키스'라고 잘못 표기돼 있다. 그리고 음미해볼 만한 기술. "벤야민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했을 때, 즉 어린아이일 때에 대해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쓸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린시절을 보았을 때 벤야민은 자기 삶을 지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에 드러난 솔직함과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은 벤야민이 과거를 완전히 소화하여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친구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안에 괴물이 떠돌아다닌다는 환상에 빠진 이야기는 벤야민이 후에 자기 학급을 증오한 일을 예시(豫示)한다."(72쪽)는 문장에서 '자기 학급(his class)'은 아무래도 '자기 계급'의 오역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이어서 학교가기 싫어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라고 내가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실컷 자도록 내버려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의 교수자격취득청구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이 통과되지 않게 되자 "어떤 지위와 안정된 직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헛된 것임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충족될 것이었다("벤야민은 과거에서 떠올린 것 전부를 미래에 대한 전조로 간주한다.").

해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방식, '학자티를 내며' 언제나 어머니보다 한발 뒤에서 걷는 모습은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를 예시하는 것이다."라는 게 손택의 통찰력 있는 예리한 지적이다.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 of real social existence)'는 '실제적인 사회적 존재에 대한 거부' 정도의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는 제몫의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절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암묵적인 소망이 성취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열정.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 시간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은 시간, 순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구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공간, 순간,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던 벤야민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라고 불려도 좋을 파편적인 작품을 썼다... 벤야민은 과거를 되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과거를 공간적 형태로, 예언적 구조로 압축한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세상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73쪽)

공간에 대한 이러한 선호를 손택은 토성적 기질과 연관시킨다.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거리의)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로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쪽)

그렇다면 토성적 기질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토성적 기질의 특징은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가차없는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건'이 뜻하는 건 자아(self)이다. 곧 자기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토성적 기질이다. "따라서 이 기질은 지성인에게 적합한 기질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를 빌자면 "나는 내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것이 토성적 기질이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아는 어떤 과제이며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따라서, 이 기질은 예술가나 순교자에게 적합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말하듯,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의 기질이다)." 그리고 자아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늘 너무나 느리다. 이들은 항상 스로에 대해 뒤쳐져 있다(And the process of building a self and its works is always too slow. One is always in arrears to oneself)."  김현승의 시구를 비틀자면, "나는 내게 느리다"가 토성적 기질이다. 그들은 K처럼 마을에는 도착하지만 끝내 성(자아라는 성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페이퍼 또한 아직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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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이따가 집에서 퍼갈랍니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으니..안된다고 하면 안가지고 가고. 흠흠.

로쟈 2006-11-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될 리가 있나요? 기술적인 거라면 몰라도...

수유 2006-11-1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주 수월하게 옮겼네요..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나저나 서재는 리플을 달기위해 꼭 로긴해야 한다는게 넘 불편하군요.. 일부러 서재까지 만들어야 하고..

로쟈 2006-11-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덕분에 '악플'로부터 좀 자유로운 장점도 있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엔 모스크바에서 온 친구와 술을 마시고 토요일 아침 일찍 지방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하러 나갔다가 연속으로 늦게 귀가한 탓인지 정상적인 컨디션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주의 시작인 월요일 아침이지만 강의일정부터 조정해야 하게 생겼다. 평소에 운동을 안 하는 탓도 있지만 체력이 바닥이다. 생각없이 인터넷에 띄워져 있는 글들을 그냥 뒤적거려보다가 지난 2000년말에 출간된 쿤데라의 <향수>(민음사)에 대해 몇 마디 적어놓은 걸 발견했다. 아마도 2001년초쯤에 씌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겠다.

해마다 10월이면 노벨상 후보로 언론에 오르내리던 밀란 쿤데라(1929- )도 최근 몇년간은 수상권에서 멀어진 듯하다. 얼마전에 근황이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더니 <소설의 기술>과 <배반당한 유언>(국내엔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으로 출간)에 이은 세번째 에세이집 <커튼(Le rideau)>(2005)이 <향수> 이후에 출간돼 있어서 반가웠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것이 좀 의아한데 조만간 번역되기를 기대한다(영역본은 2007년 2월에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럼, 쿤데라에 대한 기억과 향수를 잠시 떠올리게 해준 토막글을 옮겨놓도록 하겠다. 어투에서 알 수 있지만 간단한 댓글로 씌어진 것이다.

 

 

 

 

버스나 전철에서만 읽다 보니, 아주 느릿하게 읽게 되었는데, 어제 드디어 <향수>를 한번 읽었습니다. 저는 책읽기란 언제나 다시-읽기(re-reading)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의 감상은 아주 소략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을 처음 읽는 것은 그것이 두번 읽을 많한 가치가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읽는 것이죠...  

**님의 자세한 감상을 읽어 보았습니다. 조세프와 이레나에게 보다 많은 비중이 두어져 있지 않은 것이 다소 의외였으나 여러 가지 핵심을 잘 짚어놓으셨더군요. 특히 맨마지막 결론은 별다른 유보 없이 동의합니다.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34장입니다. 삶의 유한성, 보다 정확히는 우리 수명의 한계 때문에 온갖 정념이 발생하는 거라는 주장이요. <향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장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그토록 일찍 죽어야 하는 우리로서는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우리가 뭔가를 알기에는 너무 일찍 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이것이 쿤데라의 핵심적인 전언이기도 하고, 그의 실존론의 집약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장르입니다. 삶이 복잡하고 애매한 이유는 우리가 모든 걸 분별있게 알고 이해하기 전에 죽기 때문이죠. 즉 충분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죠. 그 점에서 무지는 실존의 유한성(=일찍 죽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70세를 넘긴 쿤데라의 나이를 생각했습니다. 미소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것이 어떤 미소인지는 명확히 말하기 힘들군요...

그 다음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51장입니다. 조세프와 이레나가 정사를 나누고, 그의 무지에 대해 그녀가 히스테리를 부린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오랜 울음을 울다가 지쳐 잠이 듭니다. "이러한 뜻밖의 변화는 슬플 정도로 우스꽝스러웠다"고 쿤데라는 쓰고 있는데, 호메로스에게서도 읽을 수 있는 이런 대목을 '전면적 진실'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그녀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습니다. 그리하여 <향수>의 이 장은 그녀의 음부, 여성의 성기에 관한 관찰/성찰에 바쳐져 있습니다(*김훈적인 테마 아닌가?).  

조세프는 "오랫동안 마법이 풀린 이 불쌍한 곳을 쳐다보았으며 커다란, 커다란 슬픔에 사로잡혔다."라고 쿤데라는 적고 있는데, 그 커다란 슬픔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다음장의 밀라다의 얘기에서 암시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것은 "육체라는 공포, 육체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공포"가 빚어내는 슬픔이 아닐까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여성의 음부(자궁)이란 우리의 육체적 형태의 모태이자 근원이니까요.

향수/귀환을 주제로 한 이 소설에서 쿤데라는 자궁(모태)회귀 본능 또한 테마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향인 프라하에서(프라하는 유럽의 자궁인가?), 또 고향인 여성의 음부 앞에서 느끼는 슬픔. 삶의 유한성, 일찍 죽는다는 것과 우리가 육체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 <향수=무지>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그러한 앎을 되새기게 해주면서 마감되고 있습니다. 벌써 저녁이군요...

 06. 11.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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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전 마종기 시인의 신작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지성사, 2006)가 출간됐었다. 시집의 펴낸 날을 보니 '2006년 8월 31일'로 돼 있다('그 여름의 끝'에 나온 시집이다!). 시집을 손에 들기 전에 먼저 두 편의 시를 한 지인의 블로그에서 읽었는데, 타이핑된 시는 아래와 같다.

아주 작은 날벌레가 어디서 날아와 읽던 책장에 앉
았다. 나는 책을 잽싸게 닫아 날벌레를 죽였다. 읽기
를 계속하려고 다시 책을 여니 벌레는 죽어서 검은
점 한 개가 되어 있었다.뜯어낼 건더기도 없었다. 날
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
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

책장을 더 이상 넘기지 못하고 으스러진 벌레의 본
래 모습을 그려본다. 이 날벌레도 이름은 있었겠지.
하루살이보다 더 짧은 이름. 입김이 시신을 다칠까 봐
조심스레 한마디 했다. 미안하다. 나에게 이 날벌레는
너무 작고 나는 조팝나무 꽃보다 너무 작다. 작고 큰
것은 어차피 비교하기 나름이다. 미안하다. ......

세상에는 팔팔하던 몸이 죽어 겨우 검은 점 하나로
남는 생명이 많다. 나도 그럴까. 그러니 함부로 슬퍼
하지도 울지도 말 것. 눈물 한 방울에 시신이 완전히
씻길 수도 있다. 한 슬픈 감정이 남을 씻어 없애기도
한다. 저 함부로 내뱉는 슬픔의 잔인성, 저 함부로 내
뱉는 외로움의 음흉스러움, 저 함부로 내뱉는.......

 

 

 

 

내게 인상적이었던 시 '검은 점의 장례'의 전문인데, 처음에 이 시가 인상적이었던 건 물론 내용도 좋긴 하지만, 특유의 행갈이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가령, '앉았다'를 1행과 2행에 걸쳐서 '앉/ 았다'라고 행갈이를 하는 게 시인의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한(시인은 1939년생이다) '문학적 젊음'의 표식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행갈이가 이 시에서 그려지고 있는 삶과 죽음의 팽팽한 긴장을 더욱 고조시켜주는 것으로 읽었다. 뜯어낼 건더기도 없이 부서지고 뭉개진 날벌레 한마리의 모습을 '읽기/ 를' '날/ 벌레' '함/ 께'라는 식의 행갈이가 도상적으로 보여준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첫인상이었다.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건 며칠이 지난 다음이었다. 시인의 자의적인 행가름이 아니라 그냥 타이핑의 문제가 아닐까란 생각이 든 것이다. 그 즈음에 구한 시집에서 확인해보니까 역시나 원시는 따로 행가름이 돼 있지 않은, 다만 3개 연으로만 구획된 산문시였다. 아마도 타이핑된 시 또한 양쪽 맞춤을 했더라면 애초에 내가 가졌던 오해/오독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해프닝이었던 셈인데, 한편으론 그런 '전위적인' 행가름의 가능성이 무산된 듯해 다소 아쉬웠다. 산문과 달리 시에서 의미를 발생/증폭시킬 수 있는 유력한 방식이 바로 행가름/연가름인데(가령 통사적인 한 문장이 두 연에 걸쳐 이어지는 앙장브망 같은 시행을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최근의 시들에서는 너무 무시되는 듯하기도 하고.

칼리그람시(그림시)였다면, "날벌레의 날개도 부서지고 눈알도 다리도 심장도 다 함께 뭉개져서 작은 점 하나가 되어 있었다"란 내용을 크기도 제각각인 산개된 글자들이 널브러져 있으면서 하나의 점으로 응축되어 가는 과정을 표현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시각적 효과를 배제한다면 시는 시각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청각에 호소하게 된다. 낭송용 잠언들. 말 그대로, 그건 검은 점으로 수축된 '글자들의 장례'이기도 하다. 청각영상으로서의 시니피앙(기표)에 자신의 자리를 내준 말 그대로의 글자들(letters). 나는 그 글자들이 좀더 활개치는 시들이 보고 싶다...

06. 10.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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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던 거군요. 재미있네요.

맑음 2006-12-21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는 말 이럴 때 쓰는 거 맞죠? 로쟈님 이 글도 담아가겠습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