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읽은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서 한 대목을 다시 뜯어 읽는다(지난번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1715228 에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도 좋겠다). 계기는 아렌트에 관한 서평기사를 찾아 읽다가 문득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의 상당부분은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을 읽었기에 상기된 면도 있을 것이다.

책의 2장은 지식인과 철학자의 (가상)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회과학은 재정이 튼튼한 국가가 공적으로 개입하지 않을 경우에는 소수가 다수를 더욱 교묘하고 덜 강압적으로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어 왔던 것입니다."라는 '지식인'의 비판에 "정말로 그러했다고 믿는다면, 왜 노골적으로 비난하지 않는지요?"라고 '철학자'가 반문하자 '지식인'은 다시 이렇게 답한다(모든 강조는 나의 것이다).

"글쎄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전문 지식인인 저는 기존의 모든 연구 방식에 대해 한결같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월급을 받는 철학자의 사치를 누릴 처지가 못됩니다. 학생들은 순수한 형태의 회의주의를 알기 위해 철학강좌를 들을 수도 있지만, 지식인이 줄 수 있는 교훈은 좀더 화해로운 입장에서 나온 해답을 통해 회의주의를 희석시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활용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에 이는 일부러 연출한 상황일 수 있는데, 사회과학자들은 동시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두 주인이란 그들에게 보수를 지불하는 특정한 고객과 그들의 작업을 전혀 뜻밖의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입니다."(114쪽)

간단히 말하면 용역을 받은 것보다 많은 지식이 생산되며 이는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고, 이러한 과잉/잉여를 통해서 사회과학자들은 '특정고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 모두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는 것. 지식인은 물론 이러한 '떡고물 지식'과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을 관심대상으로 한다. '지식인'은 이렇게 부연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20년 전에 시카고 대학교의 도서관학 학자 돈 스완슨이 발견한 현상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현상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undiscovered public knowledge)'이라고 불렀습니다. 스완슨은 단지 연구문헌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로도 의학 연구의 고질적인 문제를 의미있게 제시할 수 있었고 어쩌면 해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114-5쪽)

무슨 얘기냐면 새로 연구비를 투자하지 않고 기존의 연구문헌들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것만으르도 어떤 과제들의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과학연구가 지나치게 전문화된 나머지 '진짜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분리되고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즉, 연구결과들간의 소통과 연결이 잘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이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연구를 더 많이 의뢰하다고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해답의 대부분이, 어쩌면 해답의 전부가 다양한 과학 저널에 이미 나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 다양한 문헌들을 읽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지요."란 결론은 그래서 나온다(덧붙이자면, 지난번 페이퍼에서 역자가 오역했다고 한 'across'의 용법은 여기서도 나온다. '전문영역을 가로지르며across specialities').  

돈 스완슨의 경우엔 "젊은 여성의 손가락을 마비시키는 병인 레이노드 증후군의 사례에 대해서 이러한 작업을 수행"했고, 충격적인 연구결과를 얻어냈다고 한다. 의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조차도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많은 연구비를 요구하는 연구자들이 다른 연구자들의 성과를 참조해서 자신들의 통찰을 얻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스완슨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냐면 스완슨은 소위 '정보학자'이지 '생명과학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사례가 되겠지만 최근 BBK 이면계약서의 '진실'을 들춰낸 네티즌들의 경우에도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활용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티즌들이 한 일은 단지 몇 년전 신문기사들을 찾아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현재 보수언론들이나 유권자들이 모른 체하고 있는 'e-bank 사업자 이명박'의 진실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스티브 풀러에 따르면 바로 그러한 역할이 지식인의 역할이다(혹은 대중지성으로서의 네티즌의 역할이겠고). 그렇다면, 이러한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은 지식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두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첫째, 지식인들에게 학자들이 가끔 신문이나 서평에서 내세우는 극단적인 주장에 더욱 대담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그러니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참신한 발견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가 훌륭한 선구자를 잊었던 것에 불과한지를 묻게 합니다.(...) 두번째로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좀더 긍정적입니다. 즉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지식인의 잡식성 독서 습관을 정당화하는 새로운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물론 우리가 스스로를 독창적인 연구에 '기생'하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면, 지식인들이 너무 많이 양보하는 셈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연구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116쪽)

이러한 주장이 '대중지성'(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6181826481&code=210000)의 일원으로서 내게 갖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1)잡식성 독서 습관은 정당하다, (2)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해도 좋다. 이 두 가지는 사실 이제껏 해온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걸 격려삼아 '인터넷 서평꾼'으로서, 그리고 '대중지성'으로서 (내게 보수를 주는 '특정한 고객'은 아직 따로 없지만) '좀더 광범위한 독자층'과 대면하는 일을 앞으로도(적어도 당분간은) 계속해나갈 것이다(짝짝짝!).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한다면 혹 우리가 좀더 자유로워지고 세상이 약간 나아질지 모른다는 '실현되지 않은 기대'를 걸고서...

07.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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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1-2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짝짝짝.

로쟈 2007-11-26 09:28   좋아요 0 | URL
혼자 멋쩍어하던 차였습니다.^^;

GoNgo 2007-11-26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들르던 저도, 로쟈님의 일이 계속 되길 바라면서) 짝짝짝!

로쟈 2007-11-26 13:02   좋아요 0 | URL
감사. 좀 시끄럽게 들르셔도 됩니다.^^

qualia 2007-11-26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명박 같은 사기꾼/거짓말쟁이/위선자/졸장부/범죄자/무식꾼(으로 명백히 판명나기 직전에 있는 사람) 같은 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 후보가 되어 국민의 40~50 퍼센트에 이르는 지지를 받는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나라 국민들의 의식 수준이 얼마나 저열한 수준으로 떨어졌기에, 저 사람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나도 지지자의 60 퍼센트 이상이 계속 지지하겠다는 것인지, 썩어빠진 대한민국 국민의 양심과 정의에 대해 좌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다수 국민들이 정의와 양심과 진리와 윤리도덕 따위가 마비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이 나라 지식인들은 지금, 거짓말과 비양심이 역병처럼 국민들 사이에 횡행하고, 나라의 운명이 불의의 도당의 손아귀로 떨어지려는 찰라인데,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양심과 정의와 진리의 외침이 가장 절실한 지금 2007년 막판의 한국에서, 우리의 지식인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로쟈 2007-11-26 21:56   좋아요 0 | URL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이 기준이라는군요. 이탈리아의 선례를 미리 공부해야 할 거 같습니다...

섬나무 2007-11-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놀라운 '발견되지 않은 공적 지식'이군요. 그 능력이란 도덕불감증의 능력이겠지요?^^ 우리 국민들의 경제제일주의선호 능력에 맞는...그놈의 돈만 걸리면 사람들의 판단능력과 일처리는 왜 그리 단순해지는지 놀랍습니다. 게다가 평소 독서를 하지 않는 국민을 상대하는 우리 정치의 현주소는 정확히 제 위치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로쟈 2007-11-29 01:07   좋아요 0 | URL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론 정말 사람이 없구나, 란 생각도 듭니다...
 

스티브 풀러의 <지식인>(사이언스북스, 2007)에 대해서는 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학사, 2007)과 함께 읽어볼 작정이란 얘기를 지난주에 적었다. 일간지 서평을 근거로 '와인 감식가로서의 지식인'(http://blog.aladin.co.kr/mramor/1703093)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막상 읽어보니 '와인 감식' 같은 풍미와는 거리가 먼 책이다. 기자에 따르면 '색다른 지식인론'이고 역자에 따르면 '지식인을 위한 기묘한 변명'에 해당하는 책은 학계와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조롱도 포함하고 있어서 와인보다는 도수를 많이 높여야 할 듯싶다('꼬냑'이라고 할까?).

기자의 서평에 따르면 "문장이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구성 역시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하는데, 문장이야 더 까다로운 책들이 많기에 이 책만의 흠이랄 수는 없겠지만 다소 산만하다는 점은 이 책의 새로운 독자라면 고려해야 할 듯싶다. 군데군데 재치있는 비판과 번뜩이는 발상전환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면 계속 읽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2장인 '지식인과 철학자의 대화'에서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저자의 독설과 비아냥은 일리가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하다는 인상을 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은 결코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부피는 얇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담으려 한 야심적인 저작"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 점은 저자가 서문에서 주장하는 바와 다소 모순되기에 흥미롭다. "나는 생각할 가치가 있는 생각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어떤 청중에게든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결코 엘리트 지식인들의 게으름이나 조급성을 사상의 깊이와 혼동하지 마라."(11쪽) 적어도 저자 스스로는 학자연하는 현학과는 분명한 거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어려움은 내용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문체상의 어려움에서 비롯되는 듯하다. 그 문체의 낯설음은 저자가 '독자'가 아닌 '청중'을 고려하고 있기에 빚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군데군데 역자의 실수도 가독성 떨어뜨리기에 동참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대체적으론 무난한 번역이지만).  

가령 "어느 분야든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을 제공하는 것은 연구와 교육이다."(9쪽)은 내가 보기에 오역이다. 원문은 "Research and teaching across different disciplines provides ideal academic training for the intellectual."이고 'across different disciplines'은 '어느 분야든'이 아니라 '각기 다른 학문을 가로지르는', 즉 '학제적(interdisciplinary)'이란 뜻이어야 이어지는 내용과 호응이 된다. 단순히 '연구와 교육'이 지식인에게 이상적인 학문적 훈련이 된다고 하면 싱거운 노릇이다. 다방면에 걸친 '학제적 연구와 교육'이어야 한다. 그리고 저자가 개척의 공로자 중 하나인 '사회인식론(sociial epistemology)'은 바로 그런 학제적 연구와 교육을 근간으로 한 프로그램이 아닌가.

'사회인식론'이란 무엇인가? "사회인식론은 지금까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었는지를 인식하고 그런 인식에 비추어서 앞으로는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실제로 그것은 일종의 추상적인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이다."(9-10쪽) 나름대로는 사회인식론에 대한 정의이기도 하므로 원문을 따라 적으면 "Social epistemology is concerned with how knowledge should be produced, in light of what is known about how it has been produced. In effect, it is a kind of abstract science policy."

기이한 것은 원문의 'science policy(과학/학문 정책론)'이 번역문에서 '사회 정책론(social policy)'으로 엉뚱하게 탈바꿈한 것이다(아무래도 '사회인식론'에서의 '사회'란 말의 연상작용 때문에 빚어진 착오인 듯하다. 덕분에 이후에 잘 읽히지 않는 대목은 모두 원문을 확인하게 된다). 이 문장의 '추상적인(abstract)'을 나대로는 그냥 '이론적인'이란 뜻으로 이해하는데, 사회인식론은 지식이 어떻게 생산되어 왔는가(->지식의 고고학)를 검토해서 앞으로는 어떻게 생산되어야 하는가(->학문 정책론) 하는 그림을 제시하는 학제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왜 그냥 인식론이 아니라 사회인식론인가? 그것은 인식/지식이 그 사회적 발생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전제 때문이겠다. 저자가 마키아벨리의 '권력에의 진리(truth to power)'론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이다. '사회적 조건'을 '권력관계'와 나란히 놓는다면 그런 조건/관계와 무관하게 생산되는 지식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풀러는 이 책의 모델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라고 말한다. 

"마키아벨리는 대단히 성공한 지식인이며 그런 영예로운 칭호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는 모두가 알고 있지만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것을 공공연하게 말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시대에 '권력에의 진리'를 설파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이며 마키아벨리 같은 사람들에 관한 책이다."(6쪽)

책은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고 있지만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가장 유익한 대목은 지식인과 총제적 진리의 관계를 다룬 절이다(68-78쪽). 바쁘신 분들은 이 대목만 챙겨두어도 책값의 1/3은 건지는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마키아벨리스트'로서의 지식인을 표방하는 풀러이지만 그를 '포퍼리언'으로 이해할 때 사회인식론의 기본적인 관점과 입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국내에 소개된 그의 전작 <쿤/포퍼 논쟁>이 이미 시사해주는 것이지만). 내가 그렇게 읽은 경우이다. 그 '읽기'는 나중에 여건이 된다면 다루기로 한다...

07.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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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에 새로 나온 책 몇 권에 대한 '낚시질'을 하다가 첫 페이퍼부터 날려먹었다(임시저장도 되기 전에). 바쁜 일들도 많은지라 그냥 '후퇴'하기로 한다. 대신에 미친 척하고 사들고 온 아리스토렐레스의 <형이상학> 두 권에 대한 '신고식'은 해둔다. 왜 두 권이냐면, 최근에 나온 완역본 <형이상학>(이제이북스, 2007) 외에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왔던 발췌본 <형이상학>(문예출판사, 2004)을 한꺼번에 사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로스(Ross)의 영역본을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다(박스에 들어가 있나?). 모스크바에서 사들고 왔던 러시아어본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러시아어 아리스토텔레스로 나는 <형이상학>과 <윤리학>, <시학>을 갖고 있다. 아래 이미지가 러시아어 주석본 <형이상학>이다.

Аристотель Метафизика. Переводы. Комментарии. Толкования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책들의 경우 모두 온라인에서도 읽어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영역(http://ebooks.adelaide.edu.au/a/aristotle/metaphysics/)과 러시아어역(http://www.lib.ru/POEEAST/ARISTOTEL/metaphiz.txt)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즐겨찾기에 추가해놓으니 대략 책을 읽을 만한 준비는 다 된 듯싶다. 그러고 드는 생각. 영어나 러시아어 독자라면 누구라도 쉽게, 그리고 공짜로 읽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우리는 왜 거금을 주고 구입해야지만 읽을 수 있는가? 적어도 이런 고전 류는 국가가 번역판권을 인수해서(인문한국사업 같은 데 들어가는 비용의 일부를 이런 데 돌릴 수도 있지 않을까?) '서비스'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완역본 <형이상학>의 역자는 아직 학위를 마치지 않은 소장 고전연구자로 이미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 2005)을 우리말로 옮긴 바 있고, 현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을 번역중이라고 한다. 작품의 의의나 번역의 품을 고려할 때 거의 '올해의 번역상'의 유력한 후보가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으로 펼쳐든 '해설'에서 기본 용어들의 다소 파격적인 번역어들과 만난다. 'pathos(파토스)'를 '겪이'라고 옮기는 식인데, 고전연구자들끼리 '합의'가 된 번역어인지 모르겠지만 생소하다는 인상은 지우기 어렵다.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으로 옮기는 것도 그렇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오래 사용하다 보면 새 번역어들이 입에 익을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유보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그건 '있음론' 대신에 '존재론'이란 말을 우리가 계속 사용하는 한 '존재'를 '있음'이라고 옮기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있음'이나 '있는 것'이 '존재'나 '존재하는 것'보다 더 일상적이며 이해가 쉬운 용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우리의 일상에서 '있는 것'이란 말을 쓸 일이 있는가?).

고전의 일상어 번역에 대해서는 김남두 교수(역자는 그 제자로서 이 번역본을 스승에게 헌정하고 있다)의 견해가 잠시 소개된 적이 있는데(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243750.html), 그는 "일상어가 학술어 대접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일본어 조어가 일상어를 대신해 학술어가 되었"고 지적하고 이러한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서 "일상어와 학술어의 간극을 메워나가야 한다고 했으나 표기 원칙을 일률적으로 정하는 데는 찬성하지 않는다" 했다. 당분간 우리는 '형상과 질료'를 '꼴과 밑감'과 같이 쓰는 학문 '이중어' 시대를 살아가야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읽은 <형이상학>의 첫문장이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이다. 두 번역본에서 첫문단만을 대조해보겠다. 거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자들이 한결같이 덕을 보고 있"다는 로스의 영역도 같이 옮겨놓는다(물론 그 덕은 주로 주해와 관련된 것이겠지만).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 이 점은 인간이 감각을 즐긴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기는데, 다른 어떤 감각들보다도 특히 '두 눈을 통한 감각'(시각)을 즐긴다.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말하건대 다른 모든 감각보다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감각들 중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지각하며) (시각을 통해 사물들의) 여러 가지 차이성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이제이북스판, 29쪽)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 여러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 증거인데, 사람들은 필요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감각을 즐기고 다른 감관보다 특히 눈을 통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 행동 의도가 없을 때에도 - 사람들 말대로 -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감각 가운데 그것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수많은 차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문예출판사판, 50쪽)

ALL men by nature desire to know. An indication of this is the delight we take in our senses; for even apart from their usefulness they are loved for themselves; and above all others the sense of sight. For not only with a view to action, but even when we are not going to do anything, we prefer seeing (one might say) to everything else. The reason is that this, most of all the senses, makes us know and brings to light many differences between things.

다소 특이한 점은 "원문에 좀더 충실한 쪽으로 방향을 잡"은 완역본에서 보이는 일상어와 개념어 번역의 혼용이다. "모든 인간은 본래 앎을 욕구한다"나 "무엇을 실천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나 "우리는 행동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같은 구절보다 문어적이다. 대신에 "우리는 정말 쓸모를 떠나", "시각을 통해 우리는 가장 많이 '느끼어 알며'"라는 식으로 풀어주는 것은 "[시각은] 우리가 지식을 얻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보다 구어적인 쪽인 듯하지만 역시나 좀 낯설다. 이러한 의도적인 선택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읽히는 쪽은 발췌역쪽이다. 물론 발췌역본에서도 마지막 문장은 부자연스럽게 번역되었지만('그것은' 같은 대명사 때문에).

이 <형이상학>에 대한 두 종류의 우리말 번역을 맛보기로 읽어보면서 드는 생각은 두 번역서 모두 학술적 가치를 지닌 업적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일상어 번역'이란 말이 표방하는) 보다 대중적인 번역으로서는 난점이 있어 보인다는 것. 연구자나 고급독자가 아닌 이상 기본적으로 아무런 각주 없이도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때 '살아있는 번역'으로서 의의를 가질 테지만(가령 조안 스파르의 <플라톤 향연>(문학동네, 2006) 같은) 이번에 나온 완역본도 그렇고 국역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는 '전공자'나 '연구자'들이다(온라인의 영역본 <형이상학>에는 아무런 각주도 붙어 있지 않으며 영어 또한 평이하다). 그 점은 책머리에 실린 '해제'의 마지막 문단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옛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은 물론 본 역서와 더불어 원문을 읽어야 할 것이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 좋은 번역은 없기 때문이다. 번역문은 옛 그리스어로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하지만 옛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는 독자들도 그리스어-한글 찾아보기에 나와 있는 각 낱말의 어원 설명과 함께 해당 영어 번역어를 잘 활용하면 원어가 갖는 의미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25쪽)

역자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는 "엣 그리스어를 아는 독자들"에겐 사실 이 번역서가 절실하게 필요한 건 아니다. "원문을 대체할 만큼의 좋은 번역"은 없을 뿐더러 그리스어 독해력을 갖고 있는 경우엔 대개 영역이나 독역본을 읽을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터여서 그걸 참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경우이건 국역본보다 더 이해가 용이하다). 문제는 그렇게 읽은 '앎'을 일반 독자나 학생들에게 전달해야 할 경우이다(전공자들이야 이심전심으로, 혹은 그리스어 원문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딜레마다. 아무리 전달하고 싶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를 언어적인 특성과 더불어 그대로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전공자/번역자가 원문을 읽고 갖게 된 '앎'은 어떤 앎인가? '번역 이전의 앎'이다. 그리스어 원문 자체에서 얻는 어떤 '상'이기에(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이미지'이다). 그것은 한 가지 앎이지만 궁극의 앎은 아니다(전달 불가능한 앎, 곧 가르칠 수 없는 앎이니까).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번역 자체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이 또한 새삼스러운 것이 못된다(가령 김소월의 아무시나 다른 언어로 옮긴다고 생각해보라).

'그리스어 독해 능력'이 없기에 어원 설명과 영어 번역어를 세심하게 고려해가며 읽어야 원어의 의미에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는 조언은 번역 자체의 의의를 침식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 보다 나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번역본만으로도 <형이상학>의 내용과 가치를 식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정도가 역자의 변이 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충실한 번역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과 독자들에게 더 충실한 번역이 한번 더 출간되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인간이 본래 앎을 욕구한다면 말이다...

07. 11. 16.

P.S. <형이상학>의 인용문 번역들을 참고하여 나대로 약간 윤색해본다. 말하자면 나대로의 '앎'이다: "모든 인간은 본성상 앎을 원한다. 우리가 감각에서 얻는 즐거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슨 필요에서가 아니라 감각을 그 자체로 즐긴다. 무엇보다도 시각의 경우가 그렇다. 무얼 하려고 해서뿐만 아니라 딱히 무얼 하려고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보는 걸 좋아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여느 감각들보다 시각을 통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사물들간의 차이 또한 식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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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1-16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athos를 겪이라고 번역했다고요? 헐... 겪이라는 말은 일상어가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뜻인지...ㅡㅡ;;

로쟈 2007-11-16 14:47   좋아요 0 | URL
그리스의 '일상어'였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춘 탓이지 않나 싶어요...
 

읽어야 하는 책들이 널려 있지만 머리가 무겁다는 핑계로(마음이 무거운지도 모른다) '사는 법'에 대해서나 좀더 배워보도록 한다.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의 이어 읽기이다(지난번 읽기는 http://blog.aladin.co.kr/mramor/1627022). 실상은 이 책의 헌사와 관련하여 데리다와 크리스 하니에 관한 페이퍼를 지난주에 좀 쓰다가 중단한 적이 있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남아공의 공산당원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던 크리스 하니에게 바쳐진 책이다). 이런 페이퍼로 먹고 살지 않기에 간단히 요약해서 적는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주로 책의 내용을 풀어주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강사lector'란 '읽는 사람'이자 '읽어주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연구자로서 쓰는 논문과 강사로서 맡게 되는 강의의 수신자(독자)는 각기 다르며 둘 사이에는 아직은 제거될 수 없는 간극이 놓여 있다(즉 '연구'와 '강의' 사이의 먼 거리가 현재 대학 교육의 현실이다). 가령 이 헌사의 첫문단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는가?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제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어려운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이 문단이 뚯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수년 전 일이지만 신문의 만평을 해석해보라는 시험문제에 40%의 학생들만이 제대로 답안을 써냈다. 영상세대라고 하지만, 시사만화의 '독해'조차도 어려워하는 세대인 것이다!). 인문서의 독자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는 현실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내가 여전히 계몽의 필요성을 지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으로서 데리다의 독자가 300이 아닌 3000쯤 되면, 좁게 말해서 우리의 독서문화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로쟈'의 일거리가 떨어질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먼저 첫문장.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인종격리 정책)의 역사적 폭력을 하나의 환유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체를 위한 한 부분'이 '환유(metonymy)'의 정의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이 페이퍼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 남아공의 가혹했던 인종격리정책인 '아프르트헤이트'가 '역사적 폭력'인 것은 그것이 이미 종식된 과거의 폭력이기 때문이다.

국내외의 저항과 반발을 가져온 남아공 백인정부의 이 인종차별정책은 흔히 만델라의 정치적 역정과 병치되는데, 사전적 설명에 따르면 "1993년의 신헌법으로 흑인과 기타 인종집단에 참정권이 부여되고 1994년 다인종총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의장인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됨에 따라 남아프리카에서는 최초의 흑인정권이 탄생했으며 이로써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래서 '역사적 폭력'이다.

데리다는 이것이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곧 '다른 폭력을 지칭하기 위한 폭력', '전체를 위한 한 부분', 곧 '폭력 전체를 지칭하기 위한 한 폭력'으로, 다시 말해서 다른 폭력과 폭력 일반에 대한 환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제안한다. 그럼으로써 고유명사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차별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두번째 문장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에서도, 우리는 항상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을 통해,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을, 다양한 경로에 따라(응축, 전위, 표현이나 표상) 해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폭력들"은 아파르트헤이트의 응축으로서, 전위로서, 표현이나 표상으로서 해독될 수 있다는 것.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닌 폭력의 독특성"에서 '독특성'은 'singularity'의 번역이다. 들뢰즈 번역서들에서 '특이성'이라고 옮겨지고, 가라타니 고진은 '단독성'이라고 옮기는(애용하는!) 개념이다. 여기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소수 백인과 다수 유색인종의 관계를 지배했던 남아공의 특정한 정책'을 가리키기에 독특하다고 표현한 것이다. 즉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은 딴데는 없고 남아공에만 있었다는 점에서 유일하지만 유사한 사례들을 대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차별과 폭력은 세상 어디에나).

세번째 문장 "부분이자 원인, 결과, 증상, 사례로서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곳에서, 항상 이곳에서 -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어디서 바라보고 있든 - 집에서 좀더 가까운 아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번역해준다."는 두번째 문장을 한번 더 풀어준 것이다('번역해준다'는 '해독해준다'란 뜻으로 읽어도 된다). 요점은 "저쪽에서 일어나는 일은 곧 이곳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곧 아파르트헤이트는 남아공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란 얘기다. "남 얘기가 아니"라는 것(예컨대, 장애인과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외모와 학력에 대한 우리 가까이의 차별들).

이러한 인식의 자연스런 귀결이 마지막 문장이다. "무한한 책임, 곧 모든 형태의 떳떳한 양심에 대해 금지된 휴식." 조금 풀어서 말하면 "우리는 무한책임의 주체이며, 떳떳한 양심을 갖고 있다면 우리에게 휴식은 없다."("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열심히 일하라!"인 것.) 레비나스식으로 말하면 이 윤리적 주체는 '그까이꺼 대충'의 주체가 아니라 '불면의 주체'이다(누가 자빠져 자는가?). 잠들 수 없는 나날들...

이러한 도입부에 이어지는 건 이 헌사가 씌어지기 바로 며칠 전, 곧 1993년 4월 10일 "한 명의 폴란드 이민자와 공범들"에 의해 암살된 크리스 하니에 대한 추모이다. 데리다는 그를 '공산주의자 그 자체', '공산주의자로서의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 '탁월한 공산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 중의 공산주의자'라는 뜻이다(역자가 요즘 유행하는 '코뮤니스트'란 번역어로 비껴가지 않은 것은 다행스럽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단지 '한 남자'의 죽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상징도 아니다. 그의 삶도 마찬가지며, 그것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언제나 명명하는 바"의 어떤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은 이 명령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아파르트헤이트 반대투쟁의 대중적인 영웅이었던 이 사람은, 모순에 빠져 있던(*내분에 빠진) 소수파 공산당에 다시 한번 헌신하기로 결정한 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고위직 자리를 그만두었다.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자유롭게 된 나라에서 아마도 앞으로 그가 맡게 될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 심지어 정부 관료 역할 역시 포기한 바로 그 순간에 갑자기, 위험스러운, 참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크리스 하니를 추모하고 이 강연을 그에게 바칠 수 있게 허락해 주기 바란다."

역시나 '사는 법'을 배울 시간은 부족하다(어서 다른 일들을 해야 한다). 한 문단만 인용하겠다: "산다는 것은, 말뜻만으로 볼 때 배우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아니며, 삶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삶이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어떤 경우든 타자로부터 삶의 가장자리에서, 내적인 가장자리 또는 외적인 가장자리에서, 그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에 의한 교육인 것이다."(10쪽) 데리다가 크리스 하니에게서 배우고 우리가 데리다에게서 배우는...

07.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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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15 14: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14:26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 이런 거 눈에 잘 안 띄죠.^^;

2007-10-15 2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21:15   좋아요 0 | URL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타가 생각보다는 많지 않네요.^^

marr 2007-10-16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일 데리다의 말처럼 모든 폭력이, 폭력 일반이 차이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것이라면 폭력의 근원이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차이"라는 개념에 주목하는 현대 프랑스 철학이 아주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0%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로쟈님이 지적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를 "차이"에 근거하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사회에서, 서로 적대적인 계급으로 대립하고 있는 사회에서 폭력은 권력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거죠. 권력은 "차이"에 근거해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 사적 소유에서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오래된 영화이긴 하지만, 베리 레빈슨이 감독한 "폭로"에서 마이클 더글라스는 자신의 옛 연인이자 회사의 상관인 데미 무어에게 성희롱을 당합니다. 뭐 거의 성폭력 수준이죠.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게, 폭력의 문제에 대해서 (성)폭력이 단순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도 될까요? 마이클 더글라스의 변호를 맡은 여성 변호사의 한마디. "성폭력은 힘(power)의 과시다." 문제는 폭력이, 어떤 형태이건, 사회적 모순의 논리적 결과라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차이”의 문제가 지엽적이라거나 덜 중요하다는 건 아닙니다. 폭력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문제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이 글이 떠오르는군요. 맑스가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하는 글입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최초의 근본개념을 명확히 해명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통치수단들이 연원하는 원천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물을 그 근저에까지 파고들어갈 때, 우리는 모든 통치형태, 모든 사회적, 정치적 불공정은 현재의 지배적인 사회체제에서, 즉 현재 존재하고 있는 바의 소유제도에서 연원함을, 따라서 우리가 단 일격에 우리 시대의 불공정과 빈곤을 종말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사회의 현재 상태를 뿌리 째 전복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이제까지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상태와 같이 자연에 반하는 상태를, 그것들의 불평등의 원인은 그대로 존속하도록 내버려 두고도 현존하고 있는 불평등을 파괴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에 매달려왔다. 그러나 우리는 곧 통치란 결코 원인이 아니며 오히려 작용임을, 창조자가 아니라 피조물임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한마디로말해 그것은 소유의 불평등의 산물이며, 또 이 소유의 불평등은 현존의 사회제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글의 저자인 Bray는 맑스의 언급에 따르면 오웬의 추종자이자 ‘노동화폐’이론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사족이지만, 물론 Bray는 올바른 전제에서 출발하지만, 공상적인 방안으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하, 이거도 사족인데, 맑스는 누굴 칭찬하기 위해 그 사람의 글을 인용하는 데는 상당히 인색한 것 같습니다. 인용한 Bray의 글도 그가 양심을 가진 우직(愚直)한 사람이지만 그의 글은 부르주아의 환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로쟈 2007-10-16 00:30   좋아요 0 | URL
"만일 데리다의 말처럼 모든 폭력이, 폭력 일반이 차이에 근거하여 발생하는 것이라면 폭력의 근원이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에서 '데리다의 말'은 무엇을 가리키는 건지요? '차이'라는 말은 데리다도 그렇고, 저도 본문에서 쓴 적이 없는 듯한데요. 아파르트헤이트의 '폭력'은 공권력에 의한 폭력('법'에 의한 폭력)이었는데, '권력의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지적은 이해되지 않습니다...

marr 2007-10-16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제가 좀 일반화시킨 면이 있군요. 데리다의 "차이"개념을 로쟈님께서 쓰신 "고유명사로서의 '아파르트헤이트'는 모든 차별적인 폭력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된다."는 문장에 슬쩍 대입시켜봤습니다. 하지만, 데리다와 들뢰즈, 좀 더 나아가서 레비나스의 '차이'나 '타자'에 대한 관점이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의도적이든 아니든 비켜가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한 번 제기해봤습니다.

로쟈 2007-10-16 08:27   좋아요 0 | URL
'차이의 정치학'에 대한 비판은 데리다보다 들뢰즈를 타겟으로 하는 게 더 적합해보입니다(지젝의 비판이 있기도 하고).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비판을 기대하겠습니다...

람혼 2007-10-16 0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는 법을 배우기'의 한 방향은, 아마도 '읽는 법을 배우기' 혹은 '번역하는 법을 배우기'로부터 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항상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생들 이야기를 하셨는데 그 문제는 미국의 학생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게 해당될 것으로 보입니다만, 예를 들어 저는 최근에 <이론 이후 삶>을 읽다가 실소와 동시에 분노까지 자아내게 만든 부분을 발견하였는데, 청중과의 일문일답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레비나스의 수혜를 받은] 데리다의 개념 "무한 책임"을 제대로 '독해/이해'하지 못하는 실로 '바보 같은' 질문들이라는 인상을 받은 것이죠(뭐 그래서 또 '질문'이라는 것을 하고 '답변'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겠지만). 미국의 예를 들자면, 일반적으로 볼 때,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태어나 거의 모든 저명한 책들이 영어로 번역되는 상황에서 그들의 '언어'에 대한 이해의 한계가 그대로 '사상'에 대한 이해의 한계로 이어지는 것은 아닌가 몹시 염려될 때가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만났던 한 아랍인 청년이 제게 스치듯 던졌던 한 마디가 생각납니다. 저의 질문: "너는 참 영어를 잘 하는구나. 왜 영어를 배우니?" 그의 대답: "소통하고 싶어서." 실로 '우문현답'이라는 사자성어에 값하는 대화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제게 사는 법을 배우기란 곧 읽는 법을 배우기, 번역하는 법을 배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국어들에 대한 저의 많은 공부 욕심도 그러한 '증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부끄럽게도 아직 러시아어는 모릅니다만).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읽게 되는 페이퍼,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다섯 번째 문단에서 오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다른 이름을 위한 한 이름, 전제를 위한 한 부분'이 '환유(metonymy)'의 정의라는 걸 아는 독자라면 이 페이퍼는 더이상 읽지 않아도 된다"에서 '전체(le tout)'가 '전제(présupposition)'로 오식된 경우입니다.

로쟈 2007-10-16 08:25   좋아요 0 | URL
가슴으로 읽게 되는 댓글입니다.^^ 러시아어까지 아신다면 거의 에코 수준이 되는 거 아닌가요?! 마지막에 지적하신 오타는 윗줄의 같은 오타를 고치면서 깜빡 했네요.^^;

딸기 2007-10-16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석을 못하는 대학생들이 문제가 아니라...
저정도면 한글 모르는 사람 or 번역기가 쓴 것으로 읽히는데요, 제 눈에는 ^^;;

로쟈 2007-10-16 17:15   좋아요 0 | URL
이론서들을 직역해놓으면 대개 상형문자화되는 경향이 있기는 합니다.^^;
 

책장이 펼쳐진 책들만 열 권이 넘게 책상과 그 주변에 널려 있어서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만큼 벌여놓은 일들이 많기 때문이긴 한데, 현실적/물리적으로 다 마무리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어서 마음만 무겁다. 일단 하나라도 처리하고자 무릎에 올려놓은 책이 존 맥킨지의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문화디자인, 2006).

책은 작년 가을에 나왔지만 벌써 품절되어서 지난주에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국역본은 '예술과 역사'란 부제를 달고 있지만 역시 지난주에 구한 원서 <오리엔탈리즘>(1995)의 부제는 'History, theory and the arts(역사, 이론, 예술)'. 목차를 보면 부제가 그리 붙은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 논의'와 '동양, 문화, 제국주의'를 다룬 1, 2장에 이어지는 장들은 각각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연극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다루고 있다. 아울러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도 겸하고 있기에 여러 모로 유익한 책이다.

뒷표지에 실린 그 비판의 요점은 이렇다: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을 한다. 하나는, 사이드는 역사의식을 결여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사이드는 문학만을 다루었기 때문에 서구 예술의 오리엔탈리즘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책의 윤곽을 다룬 서평기사를 미리 읽어두고 몇 가지 코멘트를 적어두기로 한다.     

경향신문(06. 09. 23) '서양’의 잃어버린 이상향 

단숨에 사람의 머리를 베어내고도 눈하나 깜짝 않는 잔인함(르뇨의 ‘판결없는 처형’), 수많은 부인을 거느린 호색한(레폴의 ‘파샤와 그의 부인의 방’), 백인여성의 목욕시중을 들고 있는 노예(제롬의 ‘무어욕실’)….(*아래가 제롬의 <무어욕실>이다. 원서에는 직접 들어가 있지 않으며 국역본의 서두에 삽입된 그림들 중의 하나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비판한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은 이런 형태로 요약된다. 18~19세기 서양화가들이 묘사한 비도덕적이고 야만적인 동양인의 모습은 제국주의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도구로 쓰여졌다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오리엔탈리즘의 고전이 된 사이드의 이분법적 시각에 이견을 제기한다. 오리엔탈리즘 비평가들은 코란 학교에서 공부하는 이슬람 아이들의 느슨한 이미지를 놓고 동양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묘사한 것이라 비판하지만, 저자는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찬 학습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또 동양을 표현한 ‘야만적’이란 단어도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에도 불구,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면서 악인과 선인의 대립구도를 지니는 서양의 오페라에 동양인의 등장이 잦아졌지만, 도덕적 구분선이 민족적 구분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 중 하나로 든다.

저자는 오리엔탈리즘이 동양을 부패하고 뒤떨어진 문명으로 그렸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잃어버린 이상형을 동양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상시합에서 단독결투를 하는 아랍인들의 모습에는 서양 중세의 기사도 정신이 재창조돼 있고, 유럽의 승마열기는 고귀한 아랍족장이 기품있는 아랍말 위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이상화됐다. 그들에게 중동 사람들은 성경에서 막 걸어나온 사람들이었고, 이집트의 사막은 산업화된 문명의 썩은 악취에서 자유로운 거대한 정화의 힘을 지닌 곳이었다. 그래서 구달과 루이스, 칸딘스키와 클레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화가들은 틈 날 때마다 이집트와 사막으로 달려갔다.

저자는 서두를 통해 이질적인 세계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는 현재의 국제적 정세에서 자신의 책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이 세계주의와 이질적 존재에 대한 공포 사이에서의 충돌을 거쳐, 동서양의 상호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더욱 창조적인 예술로 진보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일깨우고 싶다는 바람으로 읽힌다.(정유진기자)

먼저 이 책의 의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자 해설'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겠다. 대표 역자로서 박홍규 교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이 출판된 이래 그것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어왔으나, 학문적으로 경청할 만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반면 이 책은 제국주의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제국주의의 실제 역사에 입각해 사이드와 그의 학파를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사이드의 주장이 역사학적으로 검증될 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검토한 데서 큰 의미를 갖는다."(407쪽)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위한 비판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오리엔탈리즘, 역사와 예술>은 그동안 내가 읽은 사이드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도 사이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의 취지에 뜨겁게 호응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런 애정에서 나온 비판이기에 그것은 다른 어떤 비판보다도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역자도 느꼈던 사이드에 대한 여러 의문을 풀어주면서도, 그의 사상에 누구보다도 더 깊은 애정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최적의 비판서라 할 만하다.

역자가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에서 인용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저자인 무어-길버트는 이 책에 대해서 "다른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연구 중에서 (적어도 분량 면에서는) 가장 비중 있는" 책으로 평가했다고. 거기에 역자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분량면에서가 아니라, 그 책이 검토하는 방대한 영역 면에서 가장 포괄적인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역사와 이론뿐만 아니라, 미술, 건축, 디자인, 음악, 대중예술 전반에 걸쳐 오리엔탈리즘 현상을 분석한 책으로서는 이 책이 유일하다."(409쪽)

곁들여 챙겨둘 만한 사실은 사이드에 대한 비판서로서 이 책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드의 <이론 속에서: 계급, 민족, 문화>(1992)라는 것. 역자가 귀뜀해주는 바에 따르면 아마드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인) 사이드에 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고.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론에 대한 저자 맥켄지의 사려 깊은 비판은 한국어판 서문과 원저 서문에서 읽어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를 갖는 부분은 음악(클래식)과 관련한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다양한 예술분야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을 두루 살펴보는 의도와 의의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책에서 이렇게 광범위한 예술 분야를 다루는 의도는 다음 두 가지이다. 즉 문학에만 얽매이는 데에서 탈피함으로써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스트 명제를 얼마나 더 긍정적이고도 건설적인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지 살피고, 서로 다른 문화 형태의 관련성을, 특히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양면에서 고찰하기 위함이다(사이드는 그 자신도 인정했듯이 대중문화를 잘 알지 못했다)."(32-3쪽)  

비판의 주된 논점은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저자는 사이드의 제국주의관이 그가 교육받은 미국식 제국주의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며 그것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양상이 좀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국주의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저자의 식견인지라 음미해볼 만하다(맥켄지는 <제국주의와 대중문화> 등의 저작을 갖고 있다).

"사이드와 그 추종자들은 제국주의라는 모체 안에 있는 특정 예술 분야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에 정통한 역사가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제국주의'는 애매한 감이 없지 않다. 즉 그들의 개념은 제국주의 시대의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은 하나의 일반화된 개념으로서 역사적 동태성이 부족하다. 또한 제국주의에 관한 이론, 다시 말해 제국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갖는 복잡성과 경제적, 정치적 관계의 다양성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역사학자들의 시대 구분을 통해 사이드가 주장한 오리엔탈리스트 개념들을 살펴보면 맞지 않는 구석들이 많다. 다음의 여러 장에서 볼 수 있듯이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는 매우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35-6쪽)

마지막 문장은 "Orientalism and imperialism, as the subsequent chapters will demonstrate, did not march in parallel."을 옮긴 것이다. '동양에 대한 제국주의적 사고와 문화=오리엔탈리즘'이란 등식은 곤란하다는 이야기겠다. 맥켄지는 이 점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 음악을 든다.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전성기에도 서양의 작곡가들은 동양에 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자신의 예술적 언어를 확장하기 위해 동양 음악의 여러 가능성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음악에 나타나는 동양적 요소를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일면적이라는 지적이겠다.



"사이드는 음악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자신의 이론을 서구 클래식 음악에 접목시키려 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는 그가 서구 음악의 미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6쪽)

사이드가 음악 애호가였다는 점은 잘 알려진 것인데(바렘보임과의 대담집 <평행과 역설>을 내기도 했다. 국역본은 조야하다는 평이 주류여서 유감이지만). 그런 점을 고려하면 마지막 문장은 이해되지 않아서 원문을 찾아봤다. 이렇게 돼 있다. "Curiously, despite his great interest in music, Said has made little attempt to apply his model to western classical forms, perhaps because he seems to be highly ambivalent about 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

역자는 음악의 미적 자율성에 대한 사이드의 'highly ambivalent'한 태도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간주했는데, 나로선 '양가적'이거나 '유동적인' 태도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경우 여러 양식들(western classical forms)이 있는데, 그들의 미적 자율성 수준(their degree of aesthetic autonomy)이 제각각이라고 본 거 아닐까?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는다는 말은 그것이 외부의 물적/이념적 조건과 상대적으로 무관하다는 뜻이 된다. 반대로 그 수준이 낮다는 말은 외부적 조건에 좌지우지되며 그것으로 환원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문맥으로 보아 사이드는 순수음악의 경우엔 높은 수준의 미적 자율성을 갖고 있고 오페라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자율성을 갖고 있다고 본 듯하다(이것이 음악에 대한 그의 양가적 태도이다). 그럴 경우 순수 클래식은 제국주의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연관시킬 건덕지가 별로 없고 다만 오페라의 경우는 그와 연관지어 이해해볼 수 있다. 이어지는 건 그와 관련된 것이다.    





 
 

"이와 관련된 그의 최근 저서인 <문화와 제국주의>(1993) 중에 이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그 글은 이른바 제국주의적 맥락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분석하고 있다. 원래 이 논문은 1988년 브라이턴에서 개최된 영국 예술사학자협회 회의의 기조 연설문이었다. 당시 그 내용에 의문을 가졌던 나는 몇 가지 유보를 제기했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사이드의 분석 결과가 책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더욱 확고해졌다."(37쪽)

이어지는, <아이다>에 대한 사이드와 맥켄지의 의견 차이다. 맥켄지가 보기에 사이드는 "오페라의 진정한 의미를 완전히 바꾸어놓았으며 결론을 오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유럽 내 갈등, 특히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했고,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베르디의 시각을 적절하게 설명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사실 베르디의 <아이다>는 국적의 상이를 초월하는 사랑의 힘만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베르디가 각색한 이집트 장군과 에티오피아 공주의 개인적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복에 의한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 사이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거기에 역자가 각주에서 보태는 지적: "사이드는 베르디의 오페라가 19세기 오페라 전체를 대표하고, 나아가 오페라는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유럽의 고급문화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페라를 이렇게 단정짓거나, 베르디의 오페라를 제국주의라고 보기는 힘들다. 베르디가 제국주의에 적대적이었다는 해석은 이미 음악계에서는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 자신 외세의 지배에 저항한 중요한 독립투사였음은 <비바 오페라>(박홍규 지음, 가산문화사, 2002, 132-175쪽)에서 이미 설명되었다."(37쪽)

 

 

 

 

결론은 무엇인가? "만약 '오리엔탈리스트'의 해석에서 서구의 동양 관련 작품과 동양적 형식의 각색에서 나타나는 복잡성과 이중성이 간과된다면 이는 역사적 관점을 무시한 처사다."(39쪽) "사이드의 방법론과 결론에 대한 나의 의구심, 특히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접근법과 기존의 역사적인 연구가 일치하지 않는 점 때문에 나는 사이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지만, 한편으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전혀 변함이 없다.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 학자로서의 바른 자세, 그리고 때로는 순진한 세계주의에 가깝기는 하지만 세계인의 이해를 구하려는 그의 노력은 칭찬할 만하다.(...) 전세계 학자들은 문학 및 역사 교육과 관련해 심각하게 왜곡된 접근방식을 밝혀내고 바꾸려는 사이드의 노력에 동참해야 한다."(41-2쪽) 

내가 동참하는 길은 현재로선 이런 페이퍼로 거드는 일 정도이다...

07.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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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실이 2007-10-15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걸로도 거들수 있겠죠?*^^*

로쟈 2007-10-15 08:22   좋아요 0 | URL
읽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추천도 하셔야죠!^^

Jade 2007-10-1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 막 읽고싶어지는데요~? ㅎㅎ 좋은책 소개 감사합니다~

로쟈 2007-10-15 11:39   좋아요 0 | URL
책은 품절이라니까 구하시는 데 약간 애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yoonta 2007-10-15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이 책 온라인에서 파는 곳 아는데..알려드리면 품절될것같으니 몰래 어서 구입해야겠네요..로쟈님한테만 혹시 궁금하시면 알려드릴께요.

로쟈 2007-10-15 12:47   좋아요 0 | URL
이게 나름 '고가'인 책이라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소장할 만한 책이란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읽는 건 도서관들을 이용할 수 있지만서도...

2007-10-15 1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15 13:52   좋아요 0 | URL
감사.^^

무소속 2008-03-22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리엔탈리즘 예술과 역사>는 알라딘 중고샵에서 새책을 구하실 수 있습니다

로쟈 2008-03-22 22:41   좋아요 0 | URL
페이퍼를 쓰고 곧 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