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제3판) 읽기의 계속이다. 이 논문에 대한 체계적인 해제를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내키는 대로 몇 대목을 짚어보고 있다. 이 페이퍼에서 다룰 대목은 10절의 후반부로 내용 자체는 간명하며 어렵지 않다. 

 

 

 

 

일단 8절부터 벤야민은 영화라는 기술복제 매체가 배우의 연기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 분석한다.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배우에게서 인격의 아우라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아우라는 무엇보다도 '여기'와 '지금'에 결부되어 있는데, 관객이 현장에서 직접 배우의 연기를 관람하는 연극무대와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러한 현장성이 부재하는 것이니까 아우라의 결여는 당연하다. 벤야민은 이렇게 말한다.

"무대 위에서 맥베스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이 입장에서 보면 맥베스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러나 영화 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연출하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최성만, 12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를 둘러싸고 있는 아우라는,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맥베드 역을 해내는 배우의 주위를 감돌고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 행해지는 촬영의 특징은 관객의 자리에 카메라가 대신 들어선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자를 감싸고 있는 아우라는 사라지기 마련이고, 동시에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아우라 또한 사라지게 된다."(반성완, 214쪽)  

"무대 위에서 맥베드 주변에 있는 아우라는, 현장에 있는 관객에게는 맥베드를 연기하는 배우 주위에 있는 아우라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영화제작소에서의 촬영의 특이한 점은, 촬영이 관객의 자리에 기계장치를 설정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배우를 둘러싼 아우라는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고 그와 동시에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의 아우라도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강유원, 10쪽)

이 대목에서 최성만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가 '떼어놓을 수 없다'로, '그려내는'이 '연출하는'으로 바뀐 정도이다. 한데, 배우가 "연출하는 인물"이란 표현은 아무래도 좀 어색하다. 강유원본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그냥 '연기하는 인물' 혹은 '그려내는 인물'이 아닌가 한다. 강유원본에서는 '카메라' 대신에 '기계장치'가 들어섰는데, 이 또한 직역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무 '기계적'인 번역이다.   

아무튼 같은 연기라고는 하나 연극연기와 영화연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벤야민의 따르면, 그 차이란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배우는 자신을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동일시하지만 영화배우의 경우에는 대체로 그러한 동일시가 실패한다는 점이다."(최성만, 125-6쪽) 강유원본은 이 대목은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는 자신을 하나의 역할 속에 옮겨 넣는다. 영화배우에게는 그러한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로 옮겼는데, '거의'는 너무 강한 표현이다.

영어본은 '매우 자주', 러시아어본도 '자주' 정도로 옮겼는데, 영화연기의 경우는 여러 테이크로 나누어 찍으니까 연기의 몰입과 연속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정도의 뜻이고 사실 오늘날에는 거의 극복되는 게 아닌가 싶다(벤야민은 김태희의 연기를 떠올리는 듯하지만 전도연처럼 하는 연기도 가능하니까). 해서 요즘 현실에 맞게 수정하자면 "영화배우는 그가 연기하는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 종종 어려움을 겪는다" 정도겠다.  

물론 그러한 어려움의 이유로 벤야민이 제시하는 건 연기력 자체가 아니라 연기를 둘러싼 환경이다. 아무리 뛰어난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 하더라도 영화연기에서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동료 배우들의 사정, 무대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스드로 쪼개어놓을 수밖에 없는 기계장치의 기본적인 필연성들도 작용한다."(최성만, 126쪽)

"영화배우의 연기는 하나의 통일된 작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개별적 작업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거기에는 예컨대 촬영소의 임대료, 공연자(共演者)의 사정, 장치 등과 같은 것에 대한 부차적인 고려 말고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할 수 있는 에피소드로 쪼개어 놓는 기계의 기본적인 필요들도 작용한다."(반성완, 215쪽)

"그[영화배우]의 연기는 어디까지나 통일된 연기가 아니라 많은 개별적인 연기들이 합해진 것이다. 촬영소의 임대료, 상대 역의 변동, 무대장치들과 같은 것에 대한 부수적인 고려 외에도, 연기자의 연기를 일련의 조립가능한 에피소드로 나누는 기계도 기본적으로 필요하다."(강유원, 10쪽)

여기서도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은 대동소이하다. 몇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다. 영화연기의 결정적인 특징은 그것이 연극에서처럼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 나뉘어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의 연기 신(scene)이 보통 여러 쇼트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되겠다. 게다가 하나의 쇼트조차도 여러 차례, 곧 여러 테이크로 촬영되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게 분리해서 찍은 걸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이어붙이는 게 영화인 것이다. 부차적인/부수적인 고려가 아닌 '기본적인 필요'란 영화가 필름조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고 그에 따라서 연기의 분할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해서, 강유원본에서처럼 '기계'가 필요한 게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기계장치는 이미 주어졌다. 필요한 건 그 기계장치의 필요/요구에 연기를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영화연기의 사례로 벤야민이 들고 있는 건 도주 장면의 몽타주(편집)이다. 스튜디오(제작소)에서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을 찍은 다음에, 도주 장면은 나중에 옥외촬영을 해서 두 장면을 이어붙이면 되는 식이다. 이 경우 연극이나 실제에서라면 연속적인 행동이지만, 영화연기에서는 상당한 시간차를 둘 수도 있다. 또 한가지 드는 사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배우의 반응쇼트를 찍을 경우이다. 이때 원하는 연기가 나오지 않았을 경우(연극에서라면 낭패이겠지만) 감독은 며칠 뒤에 아무런 예고 없이 배우의 등뒤에서 총을 쏨으로써 그를 놀라게 하고 그 장면을 찍어서 영화에 끼워넣을 수도 있다는 것. "예술이 지금까지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으로 여겨져 온 '아름다운 가상'의 왕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최성만, 126쪽)

물론 최근에는 CG 때문에 실제 연기 장면이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수도 있다. 가상의 상대역을 고려하면서 연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아름다운 가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운 가상이라고 해야겠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영화에서 배우의 아우라는 상실되며, "영화는 아우라의 위축에 대항하기 위해 스튜디오 밖에서 '유명인물'이라는 인위적 스타를 만들어낸다."(최성만, 128쪽; 반성완, 216쪽) 인용문에서 '유명인물'은 짐작에 영어단어 'personality'를 옮긴 것이다. 강유원본에는 그냥 '퍼스낼리티'라고 옮겨진 것으로 보아 벤야민의 원문이 그렇게 돼 있는 듯하다. 영화 안에서는 이 퍼스낼리티가 구축될 수 없기 때문에 영화 '바깥'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얘기. 이 스타 숭배 현상에 대한 벤야민의 시각은 이렇다.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부패한 마력에 지나지 않았던 그런 개성의 마력을 보존하고 있다. 영화 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최성만, 128쪽)

"영화 자본에 의해 장려되고 있는 스타 숭배라는 이 마력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전부터 상품성의 타락한 마력 속에서 겨우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은 오늘날의 영화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고 있다는 점이다."(반성완, 216쪽)

"영화자본에 의해 촉진되는 스타숭배는 인격성이라는 마력을 간직하고 있는데, 이 마력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의 상품적 특성이라는 타락한 마력에서만 존립하는 것이다. 영화자본이 발언권을 쥐고 있는 한, 오늘날의 영화에게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관한 전래의 표상에 대해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혁명적 기여를 인정해줄 수가 없다."(강유원, 11쪽)

벤야민이 보기에 스타숭배 현상은 상품성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으며, 영화산업 자체를 소위 영화자본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이상은 영화에서 혁명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다만 벤야민이 기대하는 것은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 혹은 예술의 전통적인 표상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는 것이다.    

전통적 예술에서라면 예술작품의 대상은 한정돼 있었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누구나 영화화되어 화면에 나올 수 있는 권리를 제기할 수 있다."(최성만, 129쪽) 혹은 "모든 오늘날의 사람들은 영화화되려는 요구를 가질 수 있다."(강유원, 12쪽) 곧, "스크린에 내가 나온다면'이란 욕망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벤야민이 예로 드는 영화는 지가 베르토프의 <레닌에 관한 세 노래>(http://www.youtube.com/watch?v=eIdeEgY4LTo, http://www.vunet.org/videos/story-313.html)나 요리스 이벤스의<탄광광부> 등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일별해보기 위해서 벤야민은 글쓰기(문학)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비교한다.

수백년 동안 문학계/문필분야에는 소수의 글쓰는 사람이 있었을 뿐이지만 19세기말부터는 사정이 바뀌어 "오늘날에 와서는 직업을 가진 유럽인치고 직업 체험담이나 항의, 르포르타주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발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거의 없다".(인터넷이 보급된 20세기말은 또 한번의 분기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그 의미를 상싱하게 되었다. 필자와 독자의 차이는 이제 다만 기능상의 차이가 되었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되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게 되었다. 독자는 언제든지 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다."(최성만, 129쪽) 바로 이런 것이 변화된 상황이다. 이어지는 대목.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필자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노동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노동을 말로 서술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권한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종합기술교육에서 그 기반을 얻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재산의 성격을 띠게 된다."(최성만, 129-130쪽)

"고도록 전문화된 노동 과정에서 싫든 좋은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는 독자는 필자가 되는 기회를 갖기 마련이다. 소련에서는 일 자체가 곧장 말로 표현된다. 일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능력의 일부가 된다. 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은 이제 특별한 전문교육이 아니라 다방면에 걸친 기술교육을 통해서 배양되어지고, 그럼으로써 그러한 능력은 공동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반성완, 217-8쪽)

"독자는 좋든 싫든 고도로 전문화된 작업과정에서 전문가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전문가로서 저자로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노동 자체라야 발언권을 가진다[말발이 선다]. 그리고 노동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노동의 수행에 요구되는 능력의 일부를 이룬다. 글을 쓰는 권능은 이제 더이상 전문 교육이 아닌 다방면의 기술교육에 기초하며 그리하여 공동의 재산이 되는 것이다."(강유원, 11-12쪽)

세 가지 번역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지만 최성만본에서는 '소련에서는'이란 구절이 누락됐다. 그리고, 글을 쓰는 권한/글을 쓰는 문학적 능력/글을 쓰는 권능 등으로 옮겨진 대목은 영어본에 따르면 'literary competence'이고, 러시아어본에 따르면 (직역하자면) '저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아무려나 이젠 누구든지 저자/필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벤야민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은 영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글쓰기에는 수백 년이 걸렸던 변화가 영화에서는 단지 십 년 사이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으론 러시아 영화의 경우가 그렇다.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복제되기에 대한 현대인의 정당한 요구는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생각들과 애매한 투기로써 대중의 관심을 자극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을 따름이다."(최성만, 131쪽)

"러시아 영화에서 보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미의 배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이다. 서구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로 인하여 자기자신을 재현/연출해보려는 현대 인간의 정당한 요구는 외면 내지 무시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타클과 아리숭한 상상력을 통하여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만 관심을 쏟고 있을 따름이다."(반성완, 218쪽)

"러시아 영화에서 접하게 되는 배우의 일부는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배우가 아니라 스스로를 연출하는 사람들이다. 서유럽에서는 영화의 자본주의적 착취가, 현대인이 자신의 복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당한 요구를 고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영화산업은 환상적인 생각이나 모호한 사색을 통해서 대중의 참여를 자극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강유원, 12쪽)

세 가지 번역 모두 대동소이한데, 다만 마지막 대목에서는 차이가 있다. 강조 표시한 대목들이 영어본에서는 'illusory displays and ambiguous speculations'로 옮겨졌고, 러시아어본에서는 (영어로 직역하자면) 'illusory images and dubious speculations'로 번역됐다. 최성만본에서는 '영화산업'이 주어란 점을 고려해서 'speculations'를 '투기'로 옮긴 듯하다. 한데,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처럼 'speculations'가 'displays'/'images'와 댓구를 이룬다면 '투기'는 어색하다. 나는 의역으로 보이지만 맥락상 반성완본이 가장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다...

08. 0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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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도입한 가장 유명한 개념은 아마도 '아우라(Aura)'가 아닌가 싶다. 이 개념은 2절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원작으로서의 '진품성'과 관련하여 처음 제시되는데, 벤야민에 따르면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그러니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란 논제 자체가 이 아우라와 상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니 아우라는 이 논문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라란 개념이 보다 상세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3절에 가서인데, 여기서는 그 한 문단을 읽어보려고 한다(이 문제적 텍스트를 완독하는 일은 얼마나 많은 견적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 그건 이 대목이 오래 전에 이 텍스트를 읽으면서 궁금해하던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이 참에 그에 대한 이해를 좀더 분명하게 해두고 싶어서이다. 읽을 부분은 최성만 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108-110쪽이며 반성완 역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에서는 203-4쪽이다. 거기에 덧붙여 강유원 등이 옮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http://www.armarius.net/ 에서 참조할 수 있다)도 필요에 따라 인용할 것이다(서너 종의 국역본이 더 나와 있으나 모두를 참조하거나 인용하는 건 번거롭기에 이 세 종에 국한하기로 한다). 내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두번째 문단이다.

"(...) 이러한 아우라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 개념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는 자연적 대상의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 내릴 수가 있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108-9쪽)

여기서 벤야민은 아우라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반성완 역에서는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강유원 역에서는 "먼 것 - 그것이 아무리 가까이 가까이 있다 해도 - 의 일회적 현상"으로 옮겨졌다. 내겐 반성완 역의 정의가 더 친숙하지만 정의 자체는 대동소이하다. 영역본에서는 "the unique apparition of a distance, however near it may be'로 옮겨졌고, 독어 원문은 "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 so nah sie sein mag"이다. 우리말 '현상(나타남)'에 상응하는 영역본의 단어로 'apparition'이 쓰인 게 눈에 띄는데, '환영'이나 '(뜻밖의) 출현'을 뜻하는 단어다.

원래 '아우라'는 그리스어로 '공기(air)'나 '숨결(breath)'을 뜻한다고 하고 반성완은 이에 따라 처음에 원어를 병기한 이후에는 '분위기'라고 옮겼지만 '아우라'란 원어 자체가 이미 상용되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아우라'로 고쳐서 인용하겠다. 내가 궁금해 하던 것은 이어서 벤야민이 들고 있는 아우라의 예이다(처음 읽을 때부터 좀 뜻밖의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우라'에 대해서 나는 좀더 드라마틱한 예를 기대했던 것일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 이것은 우리가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최성만)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순간 이 산, 이 나뭇가지가 숨을 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반성완)

"어느 여름날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지평선 너머의 산의 능선 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 위로 그늘을 드리우는 어느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것 — 이것은 이 산의 아우라, 이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강유원)

비교해서 읽어보면 세 번역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먼저 반성완본은 직역이라기보다는 역자가 적극적으로 의역하면서 윤색한 경우이다. 일단 이 대목만 한정하면 가장 정확한 번역은 강유원본이다.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최성만본과 반성완본에서는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것이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 모두로 돼 있지만 일단 액면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문법적으로는 둘 다 가능한가?). 여름날 오후면 그림자도 길지 않을 때인데 먼 지평선의 산맥의 그림자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자에까지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본 모두 강유원본과 마찬가지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것은 나뭇가지로만 돼 있다.

그리고 최성만본에서는 '따라갈 때'라고만 돼 있는데, 의미상 모호한, 불충분한 번역이다. 똑같이 독어본을 번역한 반성완본과 강유원본이 보여주듯이 그런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바라보는 것'이라고 해야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시선'이 번역에 포함돼 있다(영역으로는 "To follow with the eye"로 돼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강유원본에서처럼 '바라보는 것=숨쉬는 것"이 등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영어본과 러시아어본 모두 그렇게 돼 있다). '따라갈 때'나 '바라볼 때'란 표현보다 직접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이러한 묘사의 예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날의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이 무엇인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라고 하여 화제를 다시 대중과 기술복제 문제로 전환하는데, 사실 나는 '이러한 묘사의 예'에서 무엇이 쉽게 이해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보다 정확하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로선 벤야민이 들고 있는 예가 어떤 경험적 '직접성'과 관련되는 것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벤야민은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두 가지를 들면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오늘날의 삶에서 날로 커가는 대중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강조하고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자신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오늘날 대중이 지닌 열렬한 관심사이며 모든 주어진 것의 일회성을 그것의 복제를 수용함으로써 극복하려고 하는 경향이 바로 그 관심을 나타낸다."(최성만)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오고자 하는 것은 현대의 대중이 바라 마지 않는 열렬한 욕구이다. 또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대중은 복제를 통하여 모든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반성완)

"즉 사물을 공간적으로나 인간적으로 '더 가까이 가져오는 것'이 현대 대중의 충분히 열정적인 갈망이고, 또한 그것의 복제의 수용을 통해 모든 소재의 일회성을 극복하려는 경향이 현대 대중의 갈망이다."(강유원)

이 대목의 번역은 세 종 모두 대동소이하다. 다만 문체상으로 최성만본과 강유원본이 보다 직역에 가깝고 반성완본이 우리말로는 가장 자연스럽다. 이어서 그러한 대중의 성향/갈망을 부연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다시금 번역본들간의 차이가 나타난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像) 속에, 아니 모사(模寫) 속에, 복제를 통하여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영화가 제공해주는 복제영상들은 상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최성만)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은 날로 켜져 가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뉴스 영화가 제공해 주고 있는 복제사진들은 그림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그림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밀접하게 서로 엉켜 있는 데 반하여 복제사진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반성완)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으로, 오히려 모사로, 복제로 소유하려는 욕구는 날마다 거부하기 어렵게 일어난다. 그리고 화보가 [많이] 실린 신문과 주간 뉴스[영화]가 마련해주는 복제는 분명 그림과는 다르다. 일시성과 반복성이 전자[복제]에 아주 긴밀하게 얽혀있듯이 후자[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이 아주 긴밀하게 얽혀 있다."(강유원)

가장 큰 차이는 '자기 옆에 가까이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최성만/반성완본에서는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모사나 복제를 통해 전유/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욕망이라고 옮기고 있는 반면에 강유원본은 대상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림" 등으로 소유하려는 것이 대중의 욕구라고 옮겼다. 어느 쪽이 맞는 번역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후자 아닌가. 그림/모사/복제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 '가까이에 있는 대상"뿐일 리는 없는 것이니까(바로 곁에 있다면 왜 아이돌 스타들의 브로마이드를 굳이 벽에다 붙여놓겠는가?!). 이 점은 영어본이나 러시아본을 대조해봐도 확인할 수 있다(비록 텍스트의 제2판까지 수록해놓고 있어서 유익하긴 하지만 가장 최근의 번역에서 이런 오류들이 나오는 것은 유감스럽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는 독어의 'Bild'를 어떻게 옮기느냐인데, 최성만본은 '상(像)'이라고 옮겼고, 반성완/강유원본은 '그림'이라고 옮겼다(참고로, 영역본은 'image'라고 옮기고 'Bild'를 병기했다). 'Bild'는 물론 사전적으로 '형상'이란 뜻을 갖기 때문에 '상'이라고 옮기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우리말 쓰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적합한 번역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상'은 독자적으로 사용되는 일이 아주 드물다). 여기서는 대중들의 소유 대상이기도 하므로('전유'라는 어려운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비록 'Bild'가 '그림'보다 광의의 뜻을 갖는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런 정도로 옮겨지지 않을까 싶다. 나머지는 대동소이하다. 이 절의 결론은 이렇게 된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찾아낼 정도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통계가 나날이 그 중요성을 더해가는 현상이 직관(Anschauung, 표상)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이 대중에 맞추고(정향하고) 대중이 현실에 맞추는 현상은 사고의 면에서는 물론이고 직관의 면에서도 무한한 중요성을 지니게 될 하나의 발전과정이다."(최성만, 109-10쪽)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 후반부는 반성완본과 일치한다. 둘다 'ein Vorgang'(영어로는 'process')을 '발전과정'이라고 옮긴 점이 특이한데 내가 참고한 다른 모든 번역본들에서는 그냥 '과정' 정도로만 번역하고 있다. 이 문단에 대한 검토는 몇 해 전에 자세하게 다룬 바 있으므로 참조하시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지각과 직관의 문제'(http://blog.aladin.co.kr/mramor/706805)라고 좀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페이퍼이다...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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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 2008-01-02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아이돌스타는 소피 마르소이군요 ^^ 그나저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아우라에 대해...." 이 문구로 시작하는 직접적인 3줄 남짓한 대목을 적어둔 노트가 보이지 않네요. ㅠㅠ 지금 찾아 보니 '산책자', 나 '인식론에 관해, 진보 이론' 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도 않고, 그 장들이 아닌가??ㅠㅠ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로쟈 2008-01-02 23:04   좋아요 0 | URL
브로마이드 스타의 원조이기도 하죠.^^ 덧붙이자면, 영화 <구름 저편에>에는 세잔의 생트-빅투아르산 그림에 대한 오마주 장면도 들어가 있습니다. 재현의 (불)가능성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해서 겸사겸사 엮어넣었습니다...

어부 2008-0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첫번째 인용문에 대한 질문인데요. '숨을 쉰다'의 주체가 번역문마다 조금씩 다른것 같습니다. 반성완본에선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의미인데 최성만본에선 우리가 숨을 쉬고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는데요. 제가 알기론 아우라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한 주체의 체험적 의미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부분에 있어 반성완본은 부적절한 번역인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유원본은 숨을 쉰다는 술어에 대한 주어가 생략되어서 오문까지는 아니지만 문장 자체가 모호하게 읽히구요. 아우라에 대한 첫번째 사례의 핵심적 분위기를 옮기는데는 최성만본이 오히려 더 정확히 보이기도 하는데 어떤가요?

로쟈 2008-01-03 23:20   좋아요 0 | URL
강유원본이나 영어본, 러시아어본을 보건대, "-바라본다는 것은 아우라를 호흡한다는 것이다, 정도입니다." 모호하진 않구요, 우리가 -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 아우아를 숨쉬는 것이다, 가 제가 이해하는 내용입니다...
 

수전 손택의 <우울한 열정>(이후, 2005)에서 벤야민에 관한 장을 다시 읽어보려고 찾았으나 눈에 띄지 않는다(참고로, 나는 이 책에 관해서 몇 차례 페이퍼를 쓴 바 있다). 원저인 <토성의 영향 아래>를 내가 안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책을 찾아보려는 열정 역시 이럴 땐 '우울한 열정'이다(손택은 벤야민이 우울증적 기질의 비평가였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곁다리로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 지적하자면, 처음에 '수잔 손탁'으로 소개돼던 'Susan Sontag'을 '수전 손택'으로 읽는 건 현지음을 고려한 탓인 듯하나 그런 식으로라면 우리가 표기만으로 읽을 수 있는 이름은 거의 없다(가령 영국식과 미국식 영어의 차이는 어떻게 반영할 것인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경우는 점입가경인데, '마셜 맥루언'으로 바뀌더니 최근엔 아예 '마셜 매클루언'이란 표기까지 등장했다. 이유는 역시나 '현지음'인가? 하지만 관행 파괴적인 '동인이명'이 이런 식으로 점차 늘어난다면 소통가능성은 그와 반비례하여 점점 줄어들게 될 것이다(하긴 유식의 과시는 애당초 소통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울하게도 말이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07. 12. 30.

P.S. 내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처음 읽은 건 20년쯤 전이다. 도서관에서 노트에 정리해가며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텍스트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당시에 가장 어려워한 텍스트는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고, 우연찮게도 내가 읽은 루카치와 벤야민의 번역자는 똑같이 반성완 교수였다. 하지만 20년이 지나서 세 가지 언어의 번역본들을 펼쳐놓고 읽는 벤야민은 어찌된 영문인지 예전보다 더디 읽힌다. 반성완본이나 최성만본이나 채플린의 영화 <황금광시대(The Gold Rush)>(1925)를 <골드러시>로 표기한 것도 이젠 불만스러워 하는 것이니 달라진 건 나의 지성이 아니라 감성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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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ine 2007-12-31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자하니 초현실주의는...정말 글이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하던데...그걸 읽으신 후의 감상이 기대되네요...^^;

로쟈 2007-12-31 01:11   좋아요 0 | URL
어느 책을 말씀하시는지요?..

caline 2007-12-31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히 벤야민이 쓴 '초현실주의' 글 말이죠....5권인가 수록 예정이니 아직 발간되지는 않았지만...믿을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번역이 장난 아니라는 소리가 있어서...^^;

로쟈 2007-12-31 01:25   좋아요 0 | URL
네, 설마 아직 안 나온 책을 말씀하시나 했습니다.^^;

2007-12-31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2-31 1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2-31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는 다음카페 비평고원에도 올려놓았는데, 어느 분이 역자의 답글을 댓글로 달아놓으셨다. 여기에도 옮겨놓는다.

* 다음은 로쟈 님의 글에 대한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의 역자 최성만 선생님의 답글입니다.파란색 글자가 역자의 답변입니다(*여기서는 색깔처리가 되지 않았지만 식별은 가능하다). 역자를 대신하여 글을 올립니다.

그런 우울 모드는 오전부터 간간이 붙들고 있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도 빚지고 있다. 야심차게 출간되기 시작한 이 선집이 적어도 한국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내가 읽기에 독어본이나 영어본 등 다른 판본의 도움 없이 국역본만으로 벤야민을 읽고 이해하기는 여전히 지난해 보인다. 비록 가독성을 경계해 마지 않았던 아도르노만큼은 아니더라도 벤야민 읽기 역시 팍팍한 여정이다.

-> 당연히 번역은 원본을 대체하지 않는다. 더구나 고도의 사유작업을 요하는 이론에서는 원본이 훨씬 더 잘 읽히는 게 상식이다. 그렇지만 번역은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에게 충분히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엉뚱한 길잡이(오역)는 잘못된 것이고 애매한 길잡이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은 끊임없는 개선 작업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명백한 오역 내지 이해가 전혀 되지 않는 비문과 매끄럽지 못하고 애매한 부분이 섞여 있는 번역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걸 한 통속으로 만들면 결국 오역이나 중역이나 다 정당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팍팍한 여정’은 원어민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난해한 이론의 번역본은 원문을 옆에 두고 참고로 읽는 데 그 본래의 기능이 있다고 생각한다.

걸음을 지체시키는 원인은 번역자들이 원칙으로 삼은 듯이 보이는 '직역주의'에 있다. 원저에 대한 '충실성'이 이유인 듯한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는 들러리에 머문다는 인상을 받는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건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부자연스럽거나 어색한 한국어까지 정당화하느냐는 것이다(벤야민 자신이 그런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독일어 문장을 구사한다면 물론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최고의 문학비평가를 자임했던 벤야민이 과연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한 것인지?).

아직 이번에 나온 국역본들을 전반적으로 훑어보진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사안을 침소봉대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의 가장 대표적인 '논문'의 경우는 사실 지난 1983년에 나온 반성완 교수의 번역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못하겠다(내가 읽을 수 있었던 대여섯 종의 우리말 번역본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물론 반성완본의 여러 오역들에 대해서는 여러 후학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우리말 문장력에서만큼은 반성완본이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쪽이다(그래서 차라리 반성완 교수가 개역판을 내는 게 최선이지 않을까라고도 생각한다). 예컨대, 벤야민의 에피그라프격으로 인용하고 발레리의 첫문장은 이렇다.

->직역이냐 의역이냐는 번역의 이론과 실제에서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두 대립적 원칙이다. 둘 다 수렴하는 게 최선일 것이지만 그것은 이상(理想)으로 남는다. 역자로서 해명을 하자면 이 번역에서 직역(주의?) 냄새가 난다면 그것은 최선은 아니지만 역자들이 선택한 원칙에 따른 것이다. 새 번역이 맘에 들지 않으면 반성완 교수의 번역본을 계속 고수하기를 권한다.

"제반 예술이 정초되고 그것들의 여러 유형이 생겨난 것은 우리의 시대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시대에서 시작되었고, 사물과 상황에 대한 그 권력이 우리 시대에 비하면 미미하기 짝이 없던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최성만, 99쪽)

"예술이라는 개념과 예술의 여러 상이한 형식은 오늘날의 시대와는 크게 다른 시대, 즉 사물과 상황을 제어하는 힘이 우리들의 힘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미미한 시대에 생겨났다."(반성완, 197쪽)

여기서 무엇이 맞는 번역이냐는 부수적이다. 다만 나의 관심은 문장이고 문체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 대목의 원문은 불어이기에 두 판본 모두 '중역'이다(벤야민이 불어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벤야민에 대한 충실성이 아니라 발레리에 대한 충실성이며 불문학쪽에서도 뛰어난 문장가로 꼽히는 발레리라면 보다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았을까. 인용문의 끝문장을 읽어본다.

->‘유려한’ 번역이 그리우면 원본을 읽으시거나 직접 번역해 보시기 권한다. 위에 인용한 문장의 프랑스어 원본을 가지고서. 문체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건 좀 유치한 투정 같이 보인다. 그것도 원 작자와 비교하다니. 참고로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원문에 나오기에 새 번역에서는 그 부분을 분명하게 번역했다. 위 인용문이 왜 이해가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엄청난 혁신들이 예술의 테크닉 전체를 변모시키고, 그로써 발명 자체에 영향을 끼치며, 결국에는 예술의 개념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를지 모른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된다."(최성만)

"따라서 우리는, 위대한 신발명들이 예술형식의 기술 전체를 변화시키고 또 이를 통해 예술적 발상에도 영향을 끼치며 나아가서는 예술개념 자체에까지도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리라는 것을 예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반성완)

발레리가 말하는 '엄청난 혁신들' 혹은 '위대한 신발명들'(영역으로는 'great innovations')이 벤야민의 문맥에서는 '기술복제'나 '영화'를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혁신/발명이 초래하게 된 '놀라운 변화'가 사실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한데, 인용문의 '발명 자체'는 무엇인가? 반성완본에서 '예술적 발상'이라고 하면 이해가 되지만 '발명 자체'만으로는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기 어렵다. 이걸 영역본에서는 'artistic invention'으로 옮겼고,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에서는 '창작 과정 자체'라고 옮겼다. 모두 '발명 자체'보다는 뜻이 통한다. 이어서 마르크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머리말.

->이 부분의 지적은 직역이 어색한 번역을 낳은 예로서 수용한다. 다음 기회에 좀 더 바로 잡을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즉 영역이나 러시아역에서처럼 (예술의) 창작(과정) 자체라고 의역했으면 의미가 더 분명하게 다가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 예술이나 창작이라는 말은 없다. 문맥상 그렇게 읽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창작’이라는 표현도 우리말식이다. 만일 굳이 창작이라고 한다면 그에 해당하는 또 다른 원어가 있다.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을 기도하려고 했을 때 자본주의는 아직 초기 단계에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연구를 착수할 때 그 결과가 진단적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자본주의 생산의 근본 상황으로 되돌아가서 그 상황을 그로부터 추후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대해 점점 더 심화되는 무산계급의 착취를 예상할 수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케 할 조건들이 만들어지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최성만)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분석하는 일에 착수했을 때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은 아직도 그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의 분석이 예언적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기본관계에까지 소급하면서, 이 기본관계로부터 자본주의의 미래적 양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서술하였다. 마르크스의 결론은, 자본주의하에서는 앞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가 점점 더 날카롭게 심화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의 폐지를 가능하게 할 제(諸)조건이 마련될 것이라는 것이었다."(반성완)

일단 "기도하려고 했을 때"보다는 "기도했을 때"가 우리말로 자연스럽다(벤야민이 그런 식의 독일어를 구사하는가?) 물론 반성완본의 '생산방식'보다는 '생산양식'(영역으로는 'mode of production')이 더 적합한 역어인 것으로 안다. 그러나 '진단적 가치'라는 건 문맥에 맞지 않는다(다음 쪽에 나오는 '진단적 요구'도 마찬가지다). 독어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말에서 '진단'은 보통 'diagnosis'에 상응하는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영어본이나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prognosis'이고 이건 의학용어로 '예후'라고 번역되는 용어다('pro'라는 접두사가 이미 암시해주듯이 '예측' '조짐' 등을 가리킨다). 마르크스가 한 일은 자본주의 초기단계를 분석하면서 향후 자본주의의 종말까지를 예측한 것이니 '진단'이라고만 하는 건 부족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서술하였다"라는 표현은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의 미래가 이미 초기의 맹아에 새겨져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자본주의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동일한 것인지? 영역본에 따르면 이 대목은 수동태 구문이다: "Going back to the basic conditions of capitalist production, he presented them in a way which showed what could be expected of capitalism in the future." 다른 번역들을 둘러봐도 '생겨나도록'의 출처는 찾기 어렵다. '그로써 생겨난 것은'이라고 이어지는 걸 보면 역자는 '생겨난 것'에 상당히 주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도..’ 부분의 지적은 너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뜻은 통하니까. 그 다음의 지적: diagnose와 prognose는 원어에서는 현재의 진단과 미래의 진단으로 차이가 있지만, prognose를 예측적, 예후적 가치라고 번역해도 어색해 보이고, 진단이라는 말에 미래의 진단이라는 의미, 즉 예측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 같아 그렇게 번역했다. 원어를 병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의 지적: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장차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나오도록(생겨나도록) 서술했다는 뜻인데,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면 유감이다.

머리말에 이어지는 1절의 첫문장도 부자연스럽기는 마찬가지다(정확하게 말하면 '오역'이다). "예술작품은 원칙적으로 항상 복제가 가능했었다."(100쪽) 왜 '가능했다'가 아니라 '가능했었다'인가? 우리말에서 '가능했었다'라고 하면 '현재는 가능하지 않지만'이란 뜻을 함축한다. 물론 벤야민이 뜻하는 바는 아니다. 2절에서도 첫문장은 좀 어색하다.

"가장 완벽한 복제에서도 한 가지만은 빠져 있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여기와 지금으로서, 곧 예술작품이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갖는 일회적인 현존재이다."(최성만, 103쪽)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 그 요소는 시간과 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반성완, 200쪽)

완벽한 복제에서도 빠져 있는 한가지는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현존재'라는 말을 고집하더라도 '현존재성'이라고 해야 타당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라기보다는 존재가 갖는 어떤 '속성'이기 때문이다.

->‘가능했(었)다..’는 지적은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가능했었다고 하면 지금은 가능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오버한 것 같다.

'현존재’냐 ‘현존성’이냐는 물음은 역자도 고민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원문에 Dasein이라고 되어 있고 그것에 충실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원작의 (지금 여기서의) 존재(=현존재) 자체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현존성’이라는 말은 Daseinshaftigkeit 정도가 될 텐데, 내가 알기로 철학 개념이 아니고 만든 말 같다. 역자가 보기에는 ‘현존성’이라는 말이 이미 번역으로 통용되어 우리 귀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나 추측해 본다.

물론 가장 완벽한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제와 마찬가지로 원저가 갖고 있는 현존성, 곧 아우라를 갖지는 못한다. 다만 근접해보고 싶을 따름이다. 번역에 대한 불만은 그런 근접에의 욕망이 불가피하게 빚어내는 '착시 효과'일 수도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무난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에 대해 괜한 투정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은 언제나처럼 끝간 데를 알지 못하는 법. 해서 "사람들이 번역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생겨나도록" "번역 자체를 가장 마법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키는 데" 이를 때까지 이런 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번역비평에서 투정을 하는 건 언제나 좋다. 역자들은 반성하고, 독자들은 차이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번역비평이 번역에서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사태가 되면 이 또한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한두 가지 디테일 상의 지적 때문에 독자들은 번역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게 되고 사상이나 이론 전반에 진력이 나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행여 이 말을 불충분한 번역에 대한 변명으로 읽지 않기를 바란다.) 좀 더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나 비문을 지적해 주면 좋겠다. (한 가지 역자로서 이 번역비평에 대한 메타비평을 하자면, 벤야민이라면, 발레리라면 그렇게 썼겠는가 라는 표현은 좀 오버한 것 같다.)

허리우스 2007-12-3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복 마니 받으십시요. 복을 받을 자격이 마니 있으십니다. 그리고 요번 한겨레에 쓰신 글 마지막에 아직도 우리에게는 타는 목마름과 치떠리는 노여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읽고 안구에 습기가 찼습니다. 안습입죠. 벤야민에 관심이 많지만 시간이 없어 읽지 못하고 있는데 찜해 둡니다. 감사....

로쟈 2007-12-31 17:07   좋아요 0 | URL
네, 허리우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공부는 무엇보다도 시간과의 싸움 같습니다.^^;

주니다 2007-12-3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한해가 벌써 후딱 지나갔네요. 여긴 눈이 엄청 많이 왔어요. 내년에도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내년에 뵈요~~

로쟈 2007-12-31 20:10   좋아요 0 | URL
서울은 눈구경 좀 했으면 싶습니다.^^; 한해한해 후딱 지나가는 건 이젠 일도 아닌 듯싶어요. 그러니 어여(아시죠?!).^^ 네, 내년에 한번 뵙지요...

lefebvre 2007-12-3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최성만 교수님의 답변은 상당히 징후적(!?)이군요...... 예의 인터뷰에서 느꼈던 그런 포스가...... ㅋㅋㅋ 그나저나 발레리 인용에 관하여 "굳이 해명을 하자면, 벤야민의 원본에 Invention selbst(발명, 구상 자체)라고 되어 있다"라는 말은 좀...... 본문에서는 그렇게 번역하시더라도 각주 같은 걸 달아 확인된 원문과의 차이를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지적해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 이거이거 이번에는 발레리 원문을 찾아봐야 하는 건가요? 아놔~ ㅋㅋㅋ

로쟈 2007-12-31 22:01   좋아요 0 | URL
발레리는 그래도 국내에서 찾으실 수 있지 않을까요?^^;

Octopus 2007-12-31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갑합니다. 에휴... 번역자를 붙들고 한국어 생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칠 수도 없고. 그야말로 '번역이론'만 있고 번역실행력'이 없는 경우네요. 게다가 왜 그렇게 잔뜩 몰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시를 세워서 글을 쓰시는지.

로쟈 2007-12-31 22:02   좋아요 0 | URL
'번역비평'이란 게 어디 가서도 좋은 소리 못 듣는 분야죠...

퍼그 2007-12-31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묵직하고 결정적인" 오역이 아니더라도, 뜻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쌓이게 되면 책을 계속 읽어나가기가 힘들다는 게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에휴.

새해가 한 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네요. 건강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로쟈 2007-12-31 23:14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아요.^^

tubbath 2022-10-31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의 번역은 자꾸 원문이 궁금해지더군요. 번역물로만 봐도 그렇기, 영문이라도 찾아보니 반의 역이 훨씬 좋아서 저도 그걸로 택했습니다. 역자가 표현한 사소하다는 것은 실은 엄청난 거죠. 나무가 모여 숲이 되지 서로 다른 게 아닌데... 역자의 해명? 변명!이 아쉽습니다. 실력보다는 변명으로 오점을 가리려해서ㅠㅠ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과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7)을 주섬주섬 읽었다(예전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두 권 모두 독립된 논문들의 묶음이어서 반드시 완독할 필요는 없고 흥미를 끄는 장들만을 읽어도 무방하다. 어차피 동일한 주제/주장이 계속 반복/변주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저자가 이미 밝혀놓은 것이기도 하다.

 

 

 

  

"이 글들은 다양한 청중을 이해시키려는 것이니만큼, 똑같은 관점들이지만 서로 다른 맥락에서 고려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상당량의 반복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반복을 원래대로 두기로 했다."(9쪽)

내가 주로 읽은 장들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에서 서문('경합적 다원주의를 위하여')과 1장('급진민주주의: 근대적인가 탈근대적인가?'), 7장('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접합에 대하여'), 그리고 <민주주의의 역설>에서 서론('민주주의의 역설')과 1장('민주주의, 권력, 그리고 '정치적인 것''), 5자장('경쟁자 없는 정치>'), 결론('민주주의의 윤리') 등이다. 역시나 전체적인 조감도를 그려보는 데 가장 유익한 건 서문/서론이며 이어지는 1장들이 핵심을 포괄하고 있다.

<귀환>의 머리말에 따르면 "이 책의 통일적인 핵심 주제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성찰과 권력 및 적대의 뿌리 깊은 특징에 관한 성찰이다. 나는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의 기획을 다시 정식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최근의 합리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고자 이런 성찰의 결론을 끌어내려 했다."에 적시돼 있듯이 무페의 기본 입장은 좌파의 정치적 입장을 '급진적 다원적 민주주의'로 재정식화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함리적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담론을 비판하는 것이다(지나가는 김에 말하자면, '뿌리 깊은 특징'은 'ineradicable character'를 옮긴 것인데 같은 뜻이지만 '근절할 수 없는'이라고 옮기는 게 더 적합하다. 무페가 보기에 권력과 적대는 근절할 수 없으며 해소 불가능하다).

제목에서 이미 강조되어 있지만 무페의 정치이론의 시발점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관심이다. 이것은 독일의 법(철)학자 칼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1992)에서 빌려온 것인데, 11쪽의 역주에 따르면, "경제, 문화, 종교, 사회 등과 구분되는 제도적 영역으로서의 정치(politics)와 다르게, '정치적인 것'은 모든 인간 사회에 본래부터 있으며 우리의 존재론적 조건을 규정하는 차원"을 가리킨다. 무페가 보기에 대부분의 자유주의 정치이론가들의 무능력은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유주의 사유의 무능력과 적대의 환원 불가능한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롤즈의 자유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정치적인 것'을 회피하거나 사고하지 못하는 주류적 정치관에 대한 무페의 비판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 정치관은 합리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나는 이 정치관의 주요 결함이, 갈등과 결정의 차원에 놓인 정치적인 것의 특정성에 관한 안목이 없고, 적대가 사회적 삶에서 구성적인 역할을 하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종언 이후 적대라는 통념 없이도 지낼 수 있다는 가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하지만 이 믿음에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12쪽) 

슈미트의 '통찰'이 필요한 것은 이 대목에서이다(역시나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specificity'를 '특정성'이라고 옮긴 것은 어색해보인다. '특성'이나 '특이성'으로 충분해보이는데, 굳이 사전에는 없는 단어로 옮길 만한 이유가 따로 있는지? 'notion'은 무조건 '통념으로, 또 자주 나오는 단어 중 'existence'는 '실존'으로만 옮긴 것도 기계적인 번역이다. 'illusion'을 '환상' 대신에 '가상'이라고 옮긴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소위 '칼 슈미트의 도전'인데, 그람시와 함께 슈미트는 무페의 이론적 프로젝트를 떠받치는 지주이다.

"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은 무시하지 못할 하나의 도전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자유주의의 결함을 이렇게 드러냄으로써, 슈미트는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제기되어(야) 할 쟁점들을 확인하게 해주어 우리가 현대 민주주의의 본성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다. 내 목표는 슈미트와 함께 생각하고 슈미트에 반대하여 생각하고 슈미트의 비판에 맞서 그의 통찰을 자유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슈미트의 기본 통찰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학의 중심에 '친구/적 관계(friend/enemy relation)를 갖다놓은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적의(hostility)를 정치적인 것의 차원과 연결시킨 것이다(이 점에서 슈미트/무페의 '적대의 정치학'은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과 대척점에 놓인다). 사실 이건 정체성 형성에서 기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기억에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주체 형성에 관한 라캉의 정신분석학도 적극적으로 참조한다). 왜 그런가?

"모든 정체성이 관계적이라는 것, 또 각각의 모든 정체성의 실존 조건이 어떤 차이의 긍정, 즉 '구성적 외부' 역할을 할 하나의 '타자'를 결정하는 것임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우리는 적대가 일어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경계를 설정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이 관건인 집단 정체성 형성의 영역에서는, 우리와 그들의 관계가 친구와 적 유형의 관계로 전환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달리 말해 슈미트의 용어 이해에 따르면 이런 관계는 항상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다."(13쪽)

여기서 '구성적 외부(constituitive outside)'는 데리다에게서 가져온 개념이다(<민주주의의 역설>에서는 '구성적 타자'라고 번역돼 있다): "그의 '구성적 타자(*외부)'의 개념이 모든 객관성에 내재하고 있는 적대감과 집합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우리와 타자라는 구별이 중심적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있어서 해체주의적 접근법의 유용성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역설>, 29쪽) 

우리의 정체성, 더 나아가 집단적 정체성 형성에 '구성적 타자'가 필연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은 본질주의적 입장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비본질주의'가 따라서 무페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객관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필연적으로 유도한다.

"<사회변혁과 헤게모니>에서 우리는 여하한 사회적 객관성도 권력행위를 통해서 만들어질 뿐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즉 모든 사회적 객관성은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것이며, 그것의 구성을 지배하는 배제행위의 흔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데리다의 표현을 빌면 그것은 '구성적 타자'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결정적인 것이다. 모든 실체는 그 자신의 존재에 자신 이외의 다른 것이 각인돼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모든 것은 차이로 주조되며, 그것의 순수한 '실현' 혹은 '객관성'으로 파악될 수 없다. 구성적 타자는 그것의 실제적 가능성으로서 언제나 그 내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정체성은 순수하게 우연적인 것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권력을 미리 만들어진 정체성들 사이에 벌어지는 외적인 관계로서 이해해서는 안되며, 차라리 권력은 정체성 그 자체를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함을 함축한다. 객관성과 권력 사이의 이러한 동시적인 영향력을 우리는 '헤게모니'라고 명명한 바 있다."(<역설>, 41-42쪽)

<사회변혁과 헤게모니>(터, 1990)는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의 국역본 제목인데, 지금은 절판됐다. 다행히 <귀환>의 책갈피를 보니 후마니타스의 근간 목록에 원제대로 올라와 있다(호미 바바의 <민족과 서사>, 에티엔 발리바르의 <반폭력의 정치>도 기대를 갖게 하는 근간 목록이다). 여기서 핵심은 모든 사회적 객관성(social objectivity)이 권력에 의해 구성되며, 따라서 정치적이라는 주장이다. 이것이 반본질주의의 귀결이며 이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무페의 기본 입장이 도출된다.

"이러한 반본질주의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정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민주주의가 존립하기 위해서 어떠한 사회적 행위자도 사회적 기초에 대한 장악을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사회적 행위자들이 그들의 주장이 갖는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는 한에서 그들은 보다 민주적이 됨을 의미한다.(...) 이제 더이상 민주적 사회는 사회관계에서 완벽한 조화에 대한 꿈을 실현하는 사회로 이해될 수는 없다. 그것의 민주적 속성은 여하한 제한적인 사회적 행위자가 자신이 전체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42쪽)

이러한 입장을 우리의 경우에 적용해보면, 자기 주장의 특수성과 한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주장, 곧 입에 발린 말로 '국민 승리'나 '국민 행복'을 말하는 여하한 정치적 주장도 반민주적인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의 승리', '모두의 행복'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약속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존재와 그것의 전환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고유한 것이다. 이러한 프로젝트는 근대의 다원적 민주주의는 그것이 잘 질서잡혀진 것조차도 지배와 폭력의 부재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제한되고 도전될 수 있는 일련의 제도를 만들는 데 있다는 점을 인식한다. 적대감의 제거될 수 없는 속성을 부정하고 보편적인 합리적 합의를 목표로 삼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42-43쪽)

첫문장은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역자라면 이렇게 옮겼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가상을 버리면서 권력관계의 실존과 그것의 변형에 대한 필요를 이해하는 것이 우리가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라고 명명하는 프로젝트에 특정한 것이다." 요는 다시 한번 적대의 제거 불가능성(ineradicable character of antagonism)이다. 제3의 길을 주장하는 기든스식의 '중도좌파' 혹은 '급진적 중도'에 대한 무페의 비판도 그러한 논리에 근거한다.  

"실로 그러한 관점은 필연적인 경계와 배제의 형태를 '중립성'이라는 가장 하에 감추는 자유주의적 사고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처럼 폭력이 '합리성'에 대한 호소 뒤에 숨어 인지되지 않고 감추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43쪽)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무페가 제시하는 전략이 '급진적 민주주의'이고 '경합적 다원주의'이다. 그의 핵심적인 주장은 "다원주의가 민주주의 혁명을 심화할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다원주의의 관념을 급진화하려면, 합리주의, 개인주의, 보편주의와 절연해야 한다는 것이다."(<귀환>, 20쪽)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에서, 갈등의 최종 해결이 궁극적으로 가능하리라는 확신은 민주주의의 기획에 필수적인 지평을 제공하기는커녕 그것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21쪽) 

이런 맥락에서 무페는 보편주의에 대한 주장(하버마스)과 그에 대한 거부(리오타르)를 모두 비판한다. "한스 블루멘버그가 <근대의 정당성>에서 구별한 계몽주의의 두 측면을 고려하자는 로티의 안내를 따라가보자. 그것은 (정치적 기획과 동일시될 수 있는) '자기주장'과 (인식론적 기획인) '자기정초'와의 구별이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23-24쪽)

<귀환>과 <역설>에서 모두 독일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Blumenberg)가 '한스 블루멘버그'로 옮겨졌는데, 관례에 따를 필요가 있다(블루멘베르크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025028 참조). 마지막 문장은 불분명하게 번역돼 있다.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특정 형식의 합리성에 기반을 둔 것이 분명한 그 통념을 포기하는 대신 정치적 기획을 지지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의 원문은 "Once we acknowledge that there is no necessary relation between these two aspects, we are in the positions of being able to defend the political project while abandoning the notion that it must be based on a specific form of rationality."(10쪽)이다. 마지막 절의 'it'이 받는 건 '통념(notion)'이 아니라 '정치적 기획(political project)'이다. 그리고 여기서 'must be'는 '-임에 틀림없다/분명하다'란 뜻이 아니다.

근대의 정치적 기획과 인식론적 기획이 분리될 수 있다면, 정치적 기획이 반드시 특정한/제한적인 합리성에 정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요지이다. 다시 옮기면, "일단 우리가 이 두 측면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없음을 인정하고 나면, 우리는 정치적 기획이 특정한 합리성에 정초해야만 하다는 통념을 포기하고서도 그 정치적 기획을 방어할 수 있는 입장을 견지할 수 있다."

무페는 두 가지 기획을 구별해야 한다는 블루멘베르크/로티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로티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근대성 개념의 핵심부에 있는 두 전통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별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맥퍼슨이 보여주었듯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단지 19세기에 접합된 것뿐이며 따라서 어떤 식으로든 필연적으로 연관된 것은 아니다."(24쪽) 

 

 

 

 

캐나다의 정치학자 C. B. 맥퍼슨은 무페가 중요하게 참조하고 있는 이론가이며 <귀환>의 7장에서 (이탈리아의 정치철학자 노(르)베르토 보비오와 함께) 자세하게 언급된다. 맥퍼슨의 중대한 기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분리시킨 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맥퍼슨의 책으론 <소유적 개인주의의 정치이론>(인간사랑, 1991)과 <홉스와 로크의 사회철학>(박영사, 2002)가 소개돼 있는데,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이지만 같은 원서를 번역한 것이다. 보비오의 책으론 <민주주의의 미래>(인간사랑, 1989),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문학과지성사, 1992), <제3의 길은 가능한가>(새물결, 1998)이 소개돼 있다. 맥퍼슨/무페가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우리가 근대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그것의 특징이 두 가지 상이한 전통 사이에서 표출된 것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근대사회의 정치적 형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으로는 법의 지배, 인권의 보장과 개인적 자유에 대한 존중 등의 가치로 구성되는 자유주의적 전통이 있고, 다른 한편으론 평등과 치자와 피치자의 동일시, 그리고 인민주권 등의 사상으로 구성되는 민주주의적 전통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표출만이 있을 뿐이다. C. B. 맥퍼슨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처럼 자유주의는 민주화되었고 민주주의는 자유화되었다."(<역설>, 15-16쪽)

'표출'이라고 내내 옮겨진 것은 'articulation'의 번역이며 <귀환>의 역자처럼 '접합'이라고 옮기는 게 적합하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이 두 가지 전통 사이에는 여하한 필연적 연관도 없으며, 단지 유연한 역사적 접합만이 있을 뿐이라는 게 핵심적인 내용이다. '민주주의 역설'이란 표제가 뜻하는 바는 이러한 우연한 접합이 낳은 효과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주장은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밑바탕에서는 상호 조화될 수 없고 결코 서로 완벽하게 화해될 수 없는 두 개의 논리가 표출된(*접합된) 결과물임을 이해하는 것이 민주주의적 정치에 필수적이라는 점이다."(<역설>, 18쪽)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슈미트의 비판이 제기되는 건 이 지점에서인데, 그는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를 부정하기 때문에 그것은 생존할 수 없는 체제"라고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무페는 그러한 '역설적 관계'가 오히려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보편주의적인 자유주의적 논리가 평등에 대한 민주주의적 이해와 '인민'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될 필요 사이의 대립을 강조하는 슈미트의 생각이 옳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두 전통 중 하나를 우리가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양자의 표출(*접합)이 역설인 지형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그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파괴시키는 모순적 관계로 보는 대신에 두 논리 사이의 긴장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로 나의 주장은 이러한 역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것이다."(<역설>, 25쪽)

첫문장은 비문이다. 원문은 "I state that, while Schmitt is right to highlight the different ways in which the universalistic liberal logic is in opposition to the democratic conception of equality and the need to politically constitute a 'demos', this dose not force us to relinquish one of the two traditions."(9쪽)이고, '- 사이의 대립'이란 표현은 없다. 다시 옮기면, "보편주의적 자유주의의 논리가, 민주주의적 평등 개념과 인민(demos)을 정치적으로 구성해야 할 필요와는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여러 모로 강조해서 보여준 슈미트의 주장은 옳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두 전통 가운데 하나를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여하튼 그런 식으로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다양한 이론적 주제에 관한 무페의 논의를 계속해서 따라가볼 수 있겠지만 시간상/분량상 이 정도에서 일단 끊어야겠다. 당초 '민주주의 혁면과 급진민주주의'란 타이틀을 달았지만 '민주주의 혁명'에 대한 얘기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에 제목은 그냥 '정치적인 것과 민주주의의 역설'이라고 해둔다...

07. 12. 16-17.

P.S. <정치적인 것의 귀환>과 <민주주의의 역설>은 오역서라곤 할 수 없어도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번역서들이다. 군데군데 오역이 있기도 하거니와 교열도 평균점 이하이기 때문이다. <역설>의 경우엔 고유명사 표기가 엉망이다. 클로드 르포(클로드 르포르), 디데로(디드로), 지라드(지라르), 에이펠(아펠), 커벨(카벨), 라지크만(라이크만), 앙드레 고르츠(앙드레 고르) 같은 인명 표기들은 역자가 최소한 국내에서 통용되는 표기들에 전혀 무지하다는 걸 보여준다(편집자는 무관심했다는 것이고). 나는 원저들도 읽어본 바 없을 거라는 데 내기를 걸겠지만.

<귀환>의 경우에도 '찾아보기'는 불만스럽다. 원저에 없는 항목들이 일부 추가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원저에 있는 항목을 누락시킬 이유가 있는가? 대표적으로 '맥퍼슨'이란 이름을 국역본의 색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비중이 적은 것도 아니어서 '맥퍼슨'은 여덟 페이지에 걸쳐 등장한다). 그리고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왜 'o'에 가 있는가? 39쪽에서 '실재에 대한 정의'는 'definition of reality'의 번역인데, '정의'의 한자어가 '定義' 대신에 '定議'라고 엉뚱하게 병기돼 있다.

이런 엉뚱한 병기는 영어의 경우에도 눈에 띈다. 35쪽에서 '선취들'은 '선입견들'이라고 옮겨야 할 'prejudices'를 잘못 옮긴 것인데, 엉뚱하게도 'preoccupations'란 단어가 병기돼 있다(이런 실수 혹은 창작이 역자의 '작품'인지 편집자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확인할 수 있는 건 무지와 무성의다. 적어도 역자가 가다머를 읽지 않았다는 걸 알려준다). 사소한 실수들이더라도 누적되면 책에 대한 신뢰를 좀먹는다. 더구나 공짜로 얻은 책들도 아니고 제값을 다 치르고 산 책들임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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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7-12-18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s두번째 단락, '실재에 대한 정의'에 대한 지적은 37p이 아니라 39p에 나옵니다.
<귀환>의 경우 두챕터정도 무난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꼼꼼히 봐야되겠군요.

로쟈 2007-12-18 18:33   좋아요 0 | URL
페이지를 잘못 봤군요.^^; 그럭저럭 무난하게 읽히지만 불만스런 대목들도(실수나 오역) 눈에 띕니다(그래서 완벽한 번역은 없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좋은 번역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격주간 북매거진 SKOOB 11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책은 아직 받아보지 못해서 어떻게 편집/교정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원고와 큰 차이는 없을 거 같고, 다만 목차를 보니 타이틀은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로 붙여졌다(보통 원고의 제목은 편집자들이 붙인다). 지난달에 출간된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 두 권에 대한 간략한 리뷰가 나의 몫이었는데, 후자는 관심을 갖고 있던 책이었기에 덥석 청탁에 응했다. 더불어 아주 짧은 분량이기도 했고. "주요 온라인 서점의 상위 5% VIP 고객 중 선착순 5만 명에게 격주로 배포되는 프레스티지 도서문화잡지"이기에 접하지 못할 분들이 많을 것이므로 공개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책이 와서 찾아보니 제목은 '세상은 아무 죄가 없나니'이고, '왜냐고 물으신다면...'이 부제이다).   

스쿱(11호) 왜냐고 물으신다면에 관한 합리성의 두 가지 잣대

리처드 로빈슨의 <왜 버스는 세대씩 몰려다닐까>(한겨레출판)와 마이클 셔머의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바다출판사)는 부피는 서로 달라도 유사한 제목으로 흥미를 끄는 책 두 권이다. 저명한 과학저술가인 두 저자는 각각 ‘머피의 법칙’과 ‘사이비 과학’에 과학적 설명이라는 합리성의 잣대를 갖다 댄다. 그리고 ‘세상’은 실상 아무 죄가 없으며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밝혀준다.

인간은 복잡하고, 변덕스럽고, 우연적인 세계에서 끊임없이 의미와 패턴을 찾으러 다니는 동물이다. 그러한 속성이 진화과정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기제로서 유전되었다. ‘얄미운 짓’을 하는 사물들에 대한 짜증과 이상한 것들에 대한 믿음은 그런 기제에 의해 양산된다. 하지만 이 기제는 완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수유를 하지 않는 남자에게도 젖꼭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명분보다는 진화론적 타산을 따른다. 물론 젖꼭지는 수유를 하는 여자들에게만 필요하지만 자연의 입장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유전적 구조가 다르게 재구성하기보다는 남자가 불필요한 젖꼭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비용’이 덜 든다.

자몽 즙이 튀면 왜 꼭 눈 속으로 들어가는가? 실제로 즙이 눈 속으로 들어갈 확률은 매우 희박하지만 한번이라도 그런 경험을 갖는다면 우리의 뇌는 언제나 그 기억을 환기시킨다. 불운이 언제나 세 가지씩 짝을 지어 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운은 조금씩 꾸준히 찾아오지만 기억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른 기억들과 연계되면서 ‘세 가지’ 불운을 부지런히 찾아낸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세대씩 몰려다니는 버스는 조금 다른 성격의 사례다. 이 경우는 잘못 계산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버스가 승객을 태우는 동안 두 번째 버스와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는 식이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세대씩 몰려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세 대의 버스’와 ‘세 가지 불운’에 대한 사고는 각각 인과적 사고와 마술적 사고로 대비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마술적 사고가 남자의 젖꼭지처럼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비판적 사고와 패턴 찾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마술적 사고와 미신을 가진다.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고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말한다. 우리 뇌의 ‘믿음 엔진’은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과학의 세기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미국인의 96퍼센트가 신의 존재를, 90퍼센트가 천국의 존재를, 그리고 79퍼센트가 기적을, 72퍼센트가 천사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목록을 좀 달리하면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듯싶다. 비록 중세 유럽에서보다는 훨씬 덜 미신적이지만 현대인들 또한 여전히 미신적인 것. 그런 미신의 폐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줄여나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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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과 2007-12-0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쉽게도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10호네요. 이번에 책을 사면 11호가 배달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칼 세이건부터 시작해서 미국의 과학 저술가들은 이런 류의 책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미국의 믿음이 강력하다는 반증일까요?

로쟈 2007-12-09 07:30   좋아요 0 | URL
저도 10호를 갖고 있는데요.^^; 미국이 종교성이 강한 국가이긴 하지만 회의주의가 발달이 그와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우리고 왼갖 것들을 많이 믿지만(성장신화를 비롯하여) 과학적 회의주의는 미진하지 않나 싶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