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리포베츠키의 <제3의 여성>(아고라, 2007)을 잠시 펼쳐들었는데(이 책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570797 참조), 1장이 '사랑이란 이름의 수수께끼'이고,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의 감정과 인간관계, 그리고 행복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남녀의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으로 칭송받기 시작한 것은 12세기부터이다."(17쪽) 

물론 12세기 때 발명됐다는 사랑, 혹은 사랑의 모체는 '궁정식 사랑'이고 이에 관해서는 예전에 책들이 나온 게 있다, 고 적으려고 이러저리 검색해보지만 뜨지 않는다. 앙드레 카펠라누스의 <궁정식 사랑기법>(현음사, 1992)만이 생각난다. 문화사를 다룬 책들 중에 더러 이 '사랑의 발명'이란 테마를 다룬 책들이 분명 있을 터이다. 궁정식 사랑의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지젝의 설명(<향락의 전이>)이 가장 자세하며 깊이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에 대해서는 예전에 정리해둔 페이퍼들을 참조하시길.

-궁정식 사랑의 마조히즘적 연극(http://blog.aladin.co.kr/mramor/974481)

-궁정식의 '도착적인 새끼 악마'(http://blog.aladin.co.kr/mramor/978175)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http://blog.aladin.co.kr/mramor/986399)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http://blog.aladin.co.kr/mramor/986869)

리포베츠키의 이어지는 설명: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궁정의 유희일 뿐이었다. 사랑은 왕과 귀족들만 하는 특별한 행위였다. 당시 사랑과 결혼은 별개의 것으로 취급되었고, 성적 충동은 경시되었다. 중세 교회 시대의 사랑은 비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만의 것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 사랑은 비합리적이고 모순적인 열정이 되었고, 사랑이라는 스스로의 근거만으로 정당성을 갖게 되었다."

이 마지막 문장에는 첫번째 미주가 붙어 있는데, 바로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이다. 왜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는지 기이하게 생각되는 책 중의 하나(였지만 번역돼 나왔다.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 <웃음의 해석학, 행복의 정치학>(한나래, 1994)의 한 장인 '사랑의 사회학: 민족주의와 에로티즘의 융합을 위하여'에서 처음 소개받은 듯하니까 어느새 십수 년 전이다. 앤소니 기든스의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6)과 함께 필독서로 제시된 책이었다(기든스 책의 원제는 국역본의 부제인 '친밀성의 구조변동'이다).  

아무튼 이후에 "사랑은 중세의 '완전한 사랑'에서 고전주의의 '고귀한 사랑'으로, 그리고 낭만주의적 사랑을 거쳐 20세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이어져갔다."(18쪽) 

낭만적 사랑에 대한 정이현의 소설 표제가 되기도 한 재크린 살스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민음사, 1985)이다, 정도까지 생각하다가 떠올린 책이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쇠뿔은 단 김에 빼는 성격이어서(물론 책에 대해서만이다) 동네의 시립도서관에 가서 대출해왔다. 사랑에 대해서 이만한 두께의 문화사는 드문 경우가 아닌가 싶다. 필리프 아리에스 등이 엮은 <성과 사랑의 역사>(황금가지, 1996)도 두꺼운 책은 아니었다.  

주로 문학작품들에 나타난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탈리 에니크의 <여성의 상태>(동문선, 1999), 아니 골드만의 <잃어버린 사랑의 꿈>(한국문화사, 1996), 그리고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민음사, 1995)를 같이 읽어볼 수 있겠다(크리스테바의 책은 <사랑 이야기들>로도 번역될 수 있다. 불어에서 '이야기'는 '역사'란 뜻을 중의적으로 갖기에). 

다시 리포베츠키로 돌아가면, "그때부터[12세기부터] 이 '사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욕망을 부채질하고, 그들에게 위대한 사랑을 해야 한다는 꿈을 안겨주고,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1,0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남자와 여자의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 이야기'나 '사랑의 문화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이나 읽도록 하겠다(나는 책을 사랑하니까?)...

07. 10. 07.

P.S. 작년 봄에 출간된 <사랑의 문화사>에 관한 리뷰를 하나 참고로 읽어둔다.  

매일경제(06. 05. 26) 사랑도 진화해왔다 '사랑의 문화사'

첫키스는 남녀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다.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에서 좀더 친밀한 사이로 나아가는 과감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키스를 할 때는 두려움과 긴장을 느끼지만, 거기에도 역사가 있다. 키스 역사를 살피는 방법 중 하나는 문학작품에 묘사된 장면들을 비교해보는 것이다.

예컨대, 피츠 제럴드의 '천국의 이편'(1920)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1847)을 보면 두 시대, 즉 빅토리아 시대와 현대의 키스가 전혀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천국의 이편'의 연인 아모리와 로잘린드는 만난 지 단 5분 만에 키스에 대해 말하고, 실제로 키스를 한다. 하지만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는 4년이나 기다린 끝에 캐서린과 키스한다. 빅토리아시대에는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것이 남녀간 예의였다는 점도 재미있다. 히스클리프는 5분에 걸친 격렬한 키스 끝에 캐서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게 다시 입맞춤을 해주오. 그러나 그 눈은 보게 하지 말아 주오."

미국 문화사학자 스티븐 컨의 저서 '사랑의 문화사'는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사랑과 연애 역사다. 빅토리아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는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수많은 문학과 미술작품을 종횡무진 누비며 사랑의 의미와 변천사를 분석한다. TV 드라마와 통속소설, 실용적 연애 지침서에 이르기까지 흔히 접하는 '사랑'이 이 책에서는 치밀하고 철저한 성찰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는 추상적인 이론에 파묻힌 건조한 성찰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의 다양한 일차 자료를 곁들여서 생생한 실감을 전해주는 성찰이다.

책은 사랑의 성립과 소멸에 이르는 단계를 '기다림-만남-조우-육화(肉化)-욕망-언어-폭로-입맞춤-젠더-힘-타인들-질투-자아성-청혼-결혼식-섹스-결혼생활-종말' 등 18단계로 나눈다. 그리고 각 단계에 맞는 예술작품들을 예로 들며 시대별 모습을 살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하이데거의 '본래성-비본래성'과 같은 철학적 개념들이 수시로 등장하고, 700여 쪽에 달하는 분량도 부담스럽다.

미리 숙지해야 할 소설과 그림들도 많다.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주홍글씨' '레 미제라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아들과 연인' '전망 좋은 방' '위대한 개츠비' 등 저자가 분석한 소설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미술에 대해 말하자면 마네 드가 클림트 뭉크 칸딘스키 달리 피카소 뒤샹 등 근현대 대가들의 대표작 정도는 머리에 담아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저자가 보여주는 박학과 깊이가, 재미있고 발랄하되 누구나 아는 얘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했을 뿐인 시중 연애지침서와는 차원을 달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의미있는 '내공'을 쌓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노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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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10-22 04:41 
    독일의 거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새물결, 2009)이 번역되었기에 관련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작년에 나온 <낭만적이고 전략적인 사랑의 코드>(푸른숲, 2008)에 뒤늦게 주목하게 됐다. 미처 몰랐는데, 저자가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에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라고("비개인화된 사회에서 개인적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소통 코드로서 사랑을 규정한 니클라스 루만의
 
 
hemiola 2007-10-07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사랑의 문화사) 굉장히 재밌어요. ㅎㅎ^^ - 얼마전에 이 블로그를 발견했는데 와우, 대단합니다. 즐겨찾기 했습니다~

로쟈 2007-10-07 22:54   좋아요 0 | URL
<희생>의 한 장면을 이미지로 쓰시네요. 반갑습니다.^^

섬나무 2007-10-08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참으로 시의적절한 유익한 포스트입니다.^^ 하지만 존재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에 입 닥치고 책이나 읽는 일이 어떻게 유익한 지 이해되는 처지에선 굳이 기대지 않아도 좋겠습니다.ㅎㅎ
 

'성에 눈뜨다'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베를린의 어린시절>(새물결, 2007)의 한 꼭지이다. 예전 번역본인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 1998)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돼 있는데, 유대인들의 '설날'을 배경으로 한 짤막한 글이다. 각각 새물결판 195-196쪽과 솔판 58-59쪽의 글을 읽어본다(둘다 독어본을 옮긴 것으로 돼 있다). 곁다리로 참고한 책은 영어판 <베를린의 어린시절>(하버드대출판부, 2006)이다(판본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69383 참조). 영어본의 제목은 'Sexual  Awakening'이고 123-124쪽에 수록돼 있다.

시작은 이렇다: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중의 하나에서, 그럴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아주) 기묘한 상황에서 불시에 성충동에 눈뜨게 되었다."(새물결);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바로 그 거리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 처음으로 성적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솔)

이 첫대목은 두 번역본이 기묘하게 엇갈리는데,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시점과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이 언제인 것인지? 새물결판에 따르면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인 어린시절이고, "배회하게 되는" 건 그보다 나중이다(그러니까 싸돌아다니던 것과 배회하던 것 사이에 시차가 있다). 그리고 솔판에 따르면 '방랑'하던 시점과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은 동일하며 둘은 같은 의미연관의 행위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이 첫대목의 차이가 흥미를 끌어서 영어본과 대조해보았다: "On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 I was taken unawares by the awakening of the sex drive (whose time had come), and under rather strange circumstances."

벤야민이 회고하고 있는 어린시절이 1900년경(영어로는 'around 1900')이니까 그의 나이 8-9살 때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그는 낯선 거리에서 헤맨다) 그가 처음 '성적 충동'을 느낀 그 거리는 그가 나중에(머리가 커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게 될 거리이다. 해서 영역본에 따르면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이 문법적으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새물결)이란 표현을 지지할 수 있더라도 번역은 교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중에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며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라면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솔)은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게 되는"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고.

"그날은 유대력으로 새해 첫날로, 부모님은 내가 예배식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를 다 해놓으신 상태였다."(새물결); "그때는 유대인의 설날이었다. 부모님들이 어느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솔); "It was the Jewish New Year, and my parents had arranged for me to be present at a ceremony of public worship."

솔판의 번역은 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새물결판과 영역본을 고려하면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는 건 오버이다. 왜냐하면 '꼬마' 벤야민이 친척 한 사람을 데리고/모시고 와야 한다는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데, 교회에 이미 도착한 이후에 이 아이가 다시 친척을 데리러 나간다는 건 넌센스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꼬마 벤야민은 이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예정돼 있었고, 다만 중간에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을 따름이겠다. 그 '과제'란 무엇인가? 

"이 축제날 나를 돌보는 일은 다소 먼 친척 손에 맡겨졌는데, 내가 그를 중간에 모시러 가게 되어 있었다."(새물결); "사람들은 내가 이 예배식에 누군가 친척 한 명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권한 바 있었다."(솔); "For this holiday, I had been given into the custody of a distant relative, whom I was to fetch on the way."

두 국역본은 같은 독어본 문장을 옮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새물결판은 영역본과 일치한다). 유대 관습과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날 어린 벤야민은 자신의 후견인 노릇을 할 먼 친척을 교회에 가는 길에 모시러 가야 했다. 문제는 그가 길을 헤매개 됐다는 것.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주소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주변 길을 잘 몰랐는지 - 아무튼 시간은 점점 늦어지게 되었으며, 게다가 나는 계속해서 길을 헤매고 있을 뿐 제대로 도착할 기미는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새물결); "이 지역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주소를 잊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시간이 자꾸 흐를수록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솔); "But for whatever reason - whether because I had forgotten his address, or because I could not get my bearings in the neighborhood - the hour was growing later and later, and my wandering more hopeless."  

이 대목은 대동소이하다. 어린 벤야민은 교회(회당)에 혼자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데, 일단은 보호자(후견인)가 입장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종교 의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것이 글의 후반부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어떤 불안감("너무 늦었어. 결코 회당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어.")이 뜨거운 파도처럼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순간, 아니 아직 앞의 물결이 밀려가기도 전에 두번째 물결이, 전혀 정직하지 못한 생각이 밀려들었다("될 대로 되라지 뭐. 나하고는 상관없어.").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두 개의 물결이 억누르기 힘들게 처음으로 눈뜬 커다른 쾌감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는데, 그러한 쾌감 속에서 축제일에 대한 모독은 거리의 뚜쟁이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막 깨어난 충동을 위해 거리가 마련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새물결)

맨마지막 문장은 솔판과 영역본에서 이렇게 돼 있다: "이러한 내 마음속의 두 가지 물결이 처음으로 끓어오르는 성적인 거대한 욕망과 합쳐지고 있었다. 축제일에 대한 모독감은 거리의 뚜쟁이와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깨어난 성적인 충동에 대하여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And the two waves converged irresistibly in a dawning sensation of pleasure, wherein the profanation of the holy day combined with the pandering of the street, which here, for the first time, gave me an inkling of the services it was prepared to render to awakened instincts." 

솔판의 번역에서는 마지막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 불명료하다. 새물결판과 영역본에 따를 때 그것은 '거리'이다. 그 거리에서 종교 의식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하는 데 따른 어떤 불안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벤야민은 최초의 성적 충동, 혹은 커다란 쾌감과 결합돼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렴풋하게만 기술돼 있지만, 조금 더 확정적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그의 배회는 '위반'의 체험이고 이 위반은 종교의식과 성적 욕망에 밀접하게 기대고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바타이유적 체험' 아닌가? 사실 '성에 눈뜨다'란 주제 자체가 바타이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때문에 벤야민이 나중에 파리를 탈출하면서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였던 바타이유(1897-1962)에게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포함된 마지막 유고를 맡긴 것은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이 유고는 조르주 아감벤에 의해 1981년에서야 발견된다). 벤야민과 바타이유에 관한 글들을 찾아봐야겠다...

07. 0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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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0-05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타이유와 벤야민의 관계는 저 또한 오랜 시간 동안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주제인데, 이렇게 로쟈 님 글에서 만나니 또한 반갑군요.^^ 둘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표적인 문헌으로는 일단 Michel Surya가 쓴 바타이유 전기가 있고ㅡ이 전기는 정말 얼마 없는 바타이유 전기들 중에서 백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ㅡ또한 로쟈 님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Susan Buck-Morss의 책이 있지요. 특히나 저로서는 바타이유와 벤야민이 모두 멤버로 있었던 프랑스-독일 지식인들의 비밀 결사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얼마 전 김남시 님 서재에서 벤야민-바타이유-아감벤의 연결고리를 읽고 오호라~ 싶었는데, 어서 그와 관련된 이탈리아어 자료들을 읽고 싶은 마음뿐입니다(예전에 김남시 님께 서지사항을 문의드렸었는데, 아직 대답이 없으시네요^^;).

로쟈 2007-10-05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chel Surya의 전기는 처음 듣는다 싶었더니 불어로 된 책이군요.^^; 저로선 그냥 에로티즘의 문제와 관련해서(벤야민에게는 은닉 혹은 억압돼 있는 게 아닌가 싶고요) 두 사람의 커넥션을 건드려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고, 혹 좋은 참고문헌을 발견하시면 귀뜀해주시길(불어나 이태리어가 아니라면요^^)...

람혼 2007-10-07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ichel Surya의 바타이유 전기 "Georges Bataille, la mort à l'œuvre"는, Verso 출판사에서 "Georges Bataille: an Intellectual Biography"(ISBN 1-85984-822-2)라는 제목으로 영역되어 나온 바 있습니다.^^

로쟈 2007-10-07 1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도서관에 불역본만 있길래 아직 영역되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하긴 너무 방대한 분량이어서 읽을 만한 엄두는 잘 나지 않는군요...
 

어제 '들뢰즈 철학사'란 리스트를 만들게 된 빌미가 되기도 했지만 최근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이학사, 2007)란 책이 출간됐다. 철학사에 대한 들뢰즈의 생각들을 알려주는 글들의 선집인데, 책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것이 아니라 역자와 출판사가 기획하여 만든 것이다(이 책의 편제에 대해서는 '이 책에 대하여'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코멘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알라딘에 소개된 내용상으로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실제로 서점에서 책을 들여다보니 많은 글들이 내가 영역본 등의 버전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손에 들게 되었다. 특히 내가 관심을 갖는 글 꼭지는 '구조주의를 어떻게 식별할 것인가', '내재성: 생명...' 등인데, 국내에 이미 다른 버전의 번역이 나와 있기 때문에 비교해서 꼼꼼히 읽어봄 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두 텍스트 중 '내재성: 생명...'은 작년초에 온라인 자율평론에 '내재성: 하나의 삶'으로 번역되어 주석과 함께 게재된 바 있다(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874&p_no=1&key=%B5%E9%B7%DA%C1%EE). '들뢰즈와 '하나의 삶''이라는 기획특집의 일환이었다. 이 참에 번역텍스트를 옮겨놓는다(문단은 내가 원문보다 더 잘게 잘랐다). 이번에 새로 나온 번역까지 포함한 두 텍스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적어두겠다(개략적인 것은 이전에 쓴 같은 제목의 페이퍼 http://blog.aladin.co.kr/mramor/735467 참조).

자율평론 제15호(06. 01. 13) 내재성: 하나의 삶

■초역을 올린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양창렬 님이 불어본을 대조하여 나의 번역에서 누락된 부분과 잘못 번역된 부분을 수정한 메일을 보내왔다. 영어본과 차이가 나는 한 대목은 두 개의 번역을 병기했다. 더 나은 번역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준 양창렬 님께 감사드린다.-조정환



내재성: 삶1)

초험적(transcendental) 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에 관계하거나 주체(경험적 표상)에 속하지 않는 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비-주체적 의식의 순수한 흐름, 선-반성적인 비인격적 의식, 자기 없는 의식의 질적인 지속으로서 나타난다. 초험적인 것이 즉각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것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은 흥미롭게 보일 것이다.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모든 것에 반대되는 초험적 경험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이 초험적 경험주의에는 거칠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감각이라는 요소(단순한 경험주의)가 아니다. 감각은 단지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 안에서의 한 균열일 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생성으로서, 힘(가상실효적 양)의 증가 혹은 감소로서, 하나의 감각에서 다른 감각으로의 이행이다. 그 두 감각이 아무리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험적인 장을, 대상도 자기도 갖지 않은, 시작도 끝도 없는 운동으로서의 순수하게 직접적인 의식으로 정의해야 하는가? (이러한 이행이나 힘의 양에 관한 스피노자의 생각조차도 여전히 의식에 호소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초험적 장의 관계는 단지 개념적인 것일 뿐이다. 의식은 주체가, 그 장의 바깥에 있고 또 “초월적인 것들transcendents”로 나타나는, 자신의 대상으로 동시에 생산되었을 때에만 사실이 된다. 반대로, 의식이 무한한 속도로 어디에나 확산된 초험적인 장을 횡단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2) 사실, 의식은, 그것을 대상에 관련시키는 주체에 반사되었을 때에만 표현된다. 그것이 초험적 장이, 초험적 장과 공연장적(coextensive)인 의식에 의해 정의될 수없고, 어떠한 드러남으로부터도 제거되는 이유이다.

초월적인 것은 초험적인 것이 아니다. 의식이 없다면, 초험적 장은 순수한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험성에서 빠져나오기 때문이다.3) 절대적인 내재성은 그 자신의 안에 있다. 그것은 어떤 것 안에, 어떤 것에 대해 있지 않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도 어떤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스피노자에게서, 내재성은 실체substance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다. 오히려, 실체와 양태들이 내재성 안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 바깥으로 떨어진 주체와 객체가 내재성이 그것에 귀속되는 보편적 주체나 임의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면, 초험적인 것은 완전히 변성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칸트와 더불어) 단순히 경험적인 것을 되풀이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재성은 왜곡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내재성-역자)은 그 자신이 초월적인 것에 둘러싸여 있음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재성은 모든 사물보다 우월한 통합체로서의 어떤 것(Some Thing) 혹은 사물들의 종합을 낳는 어떤 행동으로서의 주체(Subject)에 관계하지 않는다. 내재성이 더 이상 그 자신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대한 내재성이 아닐 때에만,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초험적 장이 의식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 것은, 내재성의 평면이, 그것을 포함할 수 있는 주체 혹은 대상에 의해 규정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하나의 삶(A Life)인,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순수한 내재성에 대해 말할 것이다. 이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속에서는 삶이 아닌 내재적인 것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인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힘, 완전한 지복이다. 요한 피히테(Johann Fichte)는 자신의 최후의 철학에서 주체와 대상이라는 난제들(aporias)을 넘어서는 정도만큼, 더 이상 존재(Being)에 의존하거나 행동(Act)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의 삶(a life)으로서의 초험적 장을 제시한다. 그것은, 그것의 활동성이 더 이상 존재에 관련되지 않고서, 끊임없이 삶 속에서 제기되는, 절대적으로 직접적인 의식이다.4)

그러므로 초험적 장은 진정한 철학적 진행의 핵심에 스피노자주의를 재도입하는 내재성의 진정한 평면이 된다. 맨느 드 비랑(Maine de Biran)은 그는 (그가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그의 “최후의 철학”에서, 노력의 초험성(transcendence of effort) 아래에서 어떤 절대적으로 내재적인 삶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와 유사한 어떤 것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일까? 초험적 장은 내재성의 평면으로 정의되고, 다시 내재성의 평면은 삶으로 정의된다.

내재성이란 무엇인가? 삶… 만약 우리가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받아들인다면, 그 누구도 찰스 디킨즈(Charles Dickens)보다 하나의(a)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내재성이란 무엇인가? 하나의 삶 … 그 누구도, 부정관사를 초험적인 것의 지표로 삼은 찰스 디킨즈보다 하나의(une)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잘 기술하지 못했다"-불어본을 참조한 양창렬 님이 보내온 번역]. 모든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하던, 평판이 좋지 않은 한 남자 도둑이 누워서 죽어 가는 채로 발견되었다. 갑자기, 그의 삶의 기운이 너무 미약해서, 사람들이 커다란 열의, 존경, 심지어 사랑으로 그를 돌보아 준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구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이 가장 사악한 남자는 깊은 혼수상태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무엇인가가 그에게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가 소생하게 됨에 따라, 그의 구원자들은 점점 냉담해지고, 그는 다시 비열하고 거칠어진다. 그의 삶과 죽음 사이, 거기에 죽음과 놀이하고 있는 하나의 삶의 순간이 있을 뿐이다.5)

개체적인 것의 삶은, 내재적이고 외재적인 삶의 우연들로부터,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주체성과 대상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순수한 사건을 해방하는, 비인격적인, 그리고 특이한(singular) 삶에 길을 비켜준다. 모든 사람이 그와 더불어 감정이입을 하는, 그리고 일종의 지복에 도달한 “지고한 인간(Homo tantum)”.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의 각개성(haecceity)이 아니고 특이화의 각개성이다. 순수한 내재성의, 중립적인, 선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그것을 선하거나 악하게 만드는 사태들 속에서 그것을 육화하는 것은 주체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별성의 삶은,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에게 내재적인 특이한 삶을 위해 사라져간다. 그가, 그 누구도 아닌 것처럼 오해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그러나 우리는 삶을, 개별적 삶이 보편적 죽음에 직면하는 그 유일한 순간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삶은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어떤 주어진 살아있는 주체가 경험하는 그리고 어떤 살아진 대상들에 의해 측정되는 모든 순간들 속에 있다. 내재적인 삶은 오직 주체와 대상들에서만 현실화되는 사건들 혹은 특이성들을 실어 나른다. 이 부정관사의 삶[즉 하나의 삶 a life, une vie]은 그 자체로는 순간들을 갖지 않는다. 그 순간들이 서로 가깝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은 단지, 사이-시간, 사이-순간들을 가질 뿐이다. 그것은 발생하거나come about 후속될come after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직접적 의식이라는 절대적인 것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그리고 이미 일어난 사건들을 바라보는, 텅 빈 시간의 거대함을 제공한다.

그의 소설에서, 레르네 올레니아(Alexander Lernet-Holenia)는 무기들 전체를 삼켜버릴 수 있는 중간(in-between) 시간에 사건을 위치시킨다. 하나의 삶(a life)을 구성하는 특이성들과 사건들은 그것에 상응하는 그 삶(the life)의 우연들과 공존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서로 같은 방식으로 묶이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그들은 개별자들이 연결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특이한 삶은 어떤 개별성 없이도, 그것을 개별화하는 어떤 부수물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아주 어린 아이들은 모두가 서로 닮아 있고 거의 어떤 개별성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들은 특이성들을 지닌다. 미소, 제스처, 재미있는 얼굴 ― 이것들은 어떤 주체적인 질들이 아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들의 모든 수난과 연약함을 통해, 순수한 힘이며 심지어는 축복인 내재적인 삶이 불어넣어진다. 삶의 무한정한 측면들은 내재성의 평면을 부풀리는 정도에 따라 혹은, 마찬가지로, 초험적 장의 요소들을 구성하는 정도에 따라 모든 비결정을 잃는다. (다른 한편, 개별적 삶은 경험적 결정들로부터 분리불가능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것으로서 무한정은 경험적 비결정의 표시가 아니라 내재성 혹은 초험적 결정가능성에 의한 결정의 표시이다. 무한정한 분절[=부정관사]은, 단지 특이한 것의 결정일 뿐이기 때문에, 개인(the person)의 비결정이다. 일자(the One)는 내재성을 포함할 수 있는 초월적인 것(the transcendent)이 아니라 초험적 장 안에 포함된 내재적인 것(the immanent)이다. 하나라는 것은 언제나 다양체의 지표이다. 사건, 특이성, 삶…. 내재성의 평면의 바깥으로 떨어지는, 혹은 그 자체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어떤 초월적인 것(a transcendent)을 불러내는(invoke) 것이 항상 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초험성은, 이 평면에 속하는 내재적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구성된다.6) 초험성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삶은 오직 가상실효적인 것들(virtuals)만을 포함한다. 그것은 가상실효성, 사건,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가상실효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재성을 결여한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에 특수한 실재성을 부여하는 평면을 따라 하나의 현실화 과정 속에 참여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내재적 사건은 사물의 상태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발생시킨 살아진 것(the lived)의 상태 속에서 현실화된다. 내재성의 평면은, 그것이 그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주체와 대상 안에서 현실화된다. 그러나 대상과 주체가 아무리 분리불가능하다 할지라도, 내재성의 평면은, 거기에 사는 사건들이 가상실효성들인 한에서는, 그 자체로 가상실효적이다. 사건들과 특이성들은 그 평면에 그것들의 모든 가상실효성을 부여한다.

내재성의 평면이 가상실효적 사건들에 완전한 실재성을 부여하듯이. 현실화되지 않은 (무한정한) 것으로 고려된 사건은 그 어떤 것도 결여하지 않고 있다. 그 사건을, 그와 공존하는 것들, 즉 초험적 장, 내재성의 평면, 삶, 특이성들 등과 관련 속에 놓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상처는 사물들 혹은 삶의 어떤 상태에서 육화 혹은 현실화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삶으로 이끄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있는 순수한 가상실효성 그 자체이다. 나의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다. 더 높은 현실성으로서의 상처의 초험성이 아니라, 항상 어떤 환경(평면 혹은 장)7) 안의 가상실효성으로서의 그것의 내재성. 초험적 장의 내재성을 정의하는 가상실효적 것들과, 그것들을 현실화하여 초월적인 어떤 것으로 변형하는 가능한 형식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1) 2005년 3월 20일 조정환 옮김; 텍스트: G. Deleuze, 'Immanence: A Life'(in G. Deleuze, Pure Immanence: Essays on A Life, tran. by Anne Boyman, Zone Books, New York, 2001, pp. 25~33)[불어본: G. Deleuze, 'L'immanence: Une Vie', Philosophie 47, Editions de Minuit, 1995.]

2) “우리가 빛을 그것을 발산하는 표면에 다시 반사시키더라도, 저항 없이 지나친 빛은 결코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Henri Bergson, Matter and Memory, New York, Zone Books, 1988, p. 36)

3) 비인격적, 절대적 내재적인 의식에 관계하는 주체 없이 초험적 장을 정립하는 사르트르를 참조하라. 그에 비교할 때, 주체와 대상은 “초월적”인 것들이다. (La transcendance de l'Ego (Paris: Vrin, 1966), pp.74-87) 제임스에 관해서는, David Lapoujade의 분석, “Le Flux intensif de la conscience chez William James," Philosophi 46 (June 1995)"을 참조하라.

4) 이미 La Doctrine de la science 두 번째 서문에서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 진행이며, 존재가 아니라 삶인 순수 한 활동성의 직관”(Oeuvres choisies de la philosophie première (Paris: Vrin, 1964), p.274)이라 말하고 있다. 피히테에 따른 삶의 개념에 대해서는 Initiation à la vie bienheureuse (Paris: Aubier, 1944), 그리고 Martial Guéroult의 주석(p. 9)을 보라.

5) Dickens, Our mutual Frien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p. 443.

6) 심지어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조차도 이것을 인정한다. “세계의 존재는, 기원적인 증거 내부에서조차, 필연적으로 의식에 초월적이며, 또 필연적으로 초월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초험성이 의식의 삶 속에서, 그 삶에 분리불가능하게 연결되어있는 것으로서, 단독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Méditations cartésiennes (Paris: Vrin, 1947), p. 52) 이것이 사르트르 텍스트의 출발지점일 것이다.

7) Joë Bousquet, Les Capitales (Paris: Le Cercle du Livre, 1955) 참조.

07. 09. 21.

P.S. 이 번역의 대본은 각주1)에 밝혀져 있지만, 텍스트 자체는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의 한 가지 대본이기도 한 <광기의 두 체제: 텍스트와 인터뷰 1975-1995>(2003; 영역본2006)에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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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다. 내가 유익하게 읽은 책들은 모두 한 다스 이상의 이런 '읽기'를 허용하지만 모두 다룰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간혹 이런 식의 '견본'으로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없다(매번 그냥 지나치게 되면 또 우울증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제3장 '공포와 자유'의 한 대목인데, 당통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극 <당통의 죽음>에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수 X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 인육(人肉)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 흐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라고 당통의 입을 통해 묻고 있다. 이 섬뜩한 이미지 속에서 자코뱅주의자 및 국가 테러리스트들은 육신의 물질성을 경멸하는 사나운 추상성에 사로잡혀 자유, 정의, 진리, 민주주의 따위의 허상을 좇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진다."(134쪽)

물론 여기서 자유(Liberty), 정의(Justice), 진리(Truth), 민주(Democracy) 등은 모두 대문자이다. 이글턴이 1장에서 이미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많은 다른 현상들처럼 테러리즘 혹은 공포정치 역시 사실상 근대의 발명품이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테러리즘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처음 나타났는데, 그런 점에서 테러리즘과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한 배에서 태어난 일종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11쪽) 즉 "당통과로베스피에르 시대에 테러리즘은 국가 주도의 공포정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얼굴 없는 적이 국가주권에 가한 위협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적을 향해 행사하는 공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혁명의 대수학은 어떤 것이었나?

"세계의 물질성을 분할하고 나누어 다시 재배열함으로써 고상학 대수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그들은, 자신이 제시한 공식의 답이 신체 없는 추상의 형식이기를 기대한다.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그들은 언제든지 신체를 공격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유령적 이념들 손에 넣은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18세기 자코뱅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환상에 사로잡힌 몇몇 서구 국가들에서도 똑같은 기획을 발견한다. 그들은 축복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우선 그들을 공격해 죽인 후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시체의 배를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민주주의를 위한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비근한 사례 아닌가.

덧붙여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미국 몬태나 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 역시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135쪽)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다음에 '시장(marketplaces)'이 빠졌는데, 이 지역을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하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미시간)민병대이다. 이 두 경우에도 공통적인 것은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의 결합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In this sense, it is a monstrous parody of the form of life it opposes."(76쪽)를 옮긴 것인데, 주어 'it'을 어떤 점에서 '테러리스트들'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the form of life'를 '서구적 경향'으로 옮긴 것도 역자의 과도한 개입이 아닌가 싶다. 짐작에 단수 'it'으로 받을 수 있는 건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이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본시 반대하는 것이 바로 폭력(테러)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건 이와 유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회의주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회의주의라고 옮겨진 건 'cynicism'인데, 굳이 '냉소주의'를 '회의주의(skepticism)'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어 보이므로 이후의 인용에서는 모두 '냉소주의'라고 바꾸겠다. 그럼, 어째서 기인한 결합인가?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냉소주의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자신의 경쟁을 신성한 가치들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현상이 고상한 종교적 열정과 저급한 물질적 이익 모두의 성소인 미국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미국에서 종교적 광기는 흔한 현상'임을 지적한 바 있다."(135쪽)

마지막 문장에 이어서 이글턴이 달아놓은 토가 재미있는데 그는 종교에 대한 서구문명의 태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닌데, 서구 문명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개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과 비슷하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그들은 종교가 자신의 일상을 진지하게 구속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것을 받아들인다. 기업 경영자들이 윤리에 대해 취하는 입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역자와 다르기에 원문도 같이 옮겨놓겠다: "It is true, however, that Western civilization, not least the British, adheres by and large to what one might call the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 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This is also the view which corporate executives tend to adopt of morality."(76쪽)

물론 이런 정도의 대목이야 그냥 읽고 지나쳐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란 표현이 재미있어서 짚어보는 것이다. 역자는 이걸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이라고 풀어서 이해를 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what one might call'이란 표현을 간과한 탓인 듯하다. 내가 보기엔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라고 해야 맞다.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럼,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알콜 대신에 종교를 집어넣은 것이겠다. "종교생활, 좋습니다. 일생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기업가 도덕? "도덕, 아주 좋지요. 기업가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 기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요."

"냉소주의와 이상주의의 이런 결합은 테러리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탐닉하는 악마적 얼굴을 들이밀며, 보라,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채 불에 탄 신체들의 폐허, 절단된 팔다리들처럼 의미 없이 흩날리는 날것의 물질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귀중한 서구 문명이 다다른 귀결점이다, 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정의로운 이념을 내세우며 무너지는 건물을 서구의 눈앞에 들이밀기도 한다. 쓰레기라도 처리하듯 그들의 적대자를 화염으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거창한 이상들이다."(135-6쪽)

대체로 역자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재량권을 한껏 발휘하는 편인데, 원문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도 핵심은 두 번 반복되는 '보라'(Look.... Yet look also...)에 있다(번역문에는 '들이밀며... 들이밀기도 한다'로 옮겨져 있다). 즉, 이걸 봐라, 그리고 또 이것도 봐라, 구문이다. 무얼 보란 말인가? 하나는 너희 서구 문명이 꽤나 자랑하던 게(9.11의 경우엔 쌍둥이 빌딩)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를 보라(=냉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너희 앞에서 그렇게 건물을 무너뜨리게 만든 '고결한/천사적 이상들(the angelic ideals)'을 보라(=이상주의)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결합은 하지만, 테러리즘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적은 대로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그것의 천사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해결책을 통해 좀더 쉽게 공존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언어는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윤 창출 자체가 영적 소명이 될 수 있었다."(136쪽)  

이런 지적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사를 통해서 그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도록 해준 게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별종이 아니라 모범이고 정통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런 프로테스탄티즘 전통은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 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이글턴의 흥미로운 지적인데, 다만 원문이 'not only... but (also)'구문이므로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가 아니라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로 교정되어야겠다. 그렇다면, 생산기반 자본주의(=산업사회)에서 소비기반 자본주의(=탈산업사회)로의 이행이 무엇이길래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연계/결합이 약화되게 되는가?

"우리에게 근검절약과 신중함, 욕망의 통제와 권위에의 순종을 요구하는 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하도코어 포르노를 보고 개인용 비행기를 구입하며 어머어마한 양의 정크푸드를 먹어치우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간의 연결고리는 소비주의에 의해 결국 단절된다."

가령, 똑같이 '축적'이란 차원에서 'After Doritos'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기는 이제 어렵다는 얘기이다(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간주된다). “이 세상, 날씬한 것들은 가라.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는 알다시피 개그콘서트의 구호이지 현실의 구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절의 지점에서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건져 올렸다."라고 하여 이글턴은 '절대 자유'로서의 신 개념이 갖는 의미장을 계속해서 조망해나간다. 하지만 나의 '한 대목 읽기'는 여기까지다...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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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본주의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31 18:12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
 
 
심술 2007-09-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로쟈 2007-09-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어보시라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네요.^^;
 

화제가 되고 있는 책,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에서 제6장 '도덕의 뿌리: 우리는 왜 선한가?"를 읽었다. 주중에 피터 싱어의 <다윈의 대답1: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은 있는가?>(이음, 2007)를 읽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어진 독서였다.

 

 

 

6장은 네 개의 절로 나뉘어져 있지만 핵심적인 절은 '다윈주의와 도덕의 기원'일 것이다(일단 타이틀이 대표성을 띤다). 번역도 매끄럽고 여러모로 잘 만들어진 이 책에서 그래도 흠을 잡자면 참고문헌이 수록되지 않은 걸 들 수 있겠다. 미주까지는 붙어 있지만, 가령 6장의 미주3)에서 참고하라고 소개된 Hinde(2002)가 무슨 책을 말하는 것인지는 번역본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물론 손품을 좀 팔아서 검색해본다면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대다수 독자들이야 별로 불편함을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서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좀 아쉬운 일이다(참고문헌만 복사할까 했더니 도서관의 책은 대출중이다. 참고문헌 때문에 원서를 구입해야 할까?).

예컨대, Hinde(2002)라고 표기된 참고문헌은 본문에서 "로버트 힌데의 <선은 왜 선인가?>"(325쪽)로 옮겨진 'Why Good is Good: The Sources of Morality'란 책을 가리킨다. 다는 아니겠지만 참고문헌 읽기를 즐기는 독자들에겐 이런 정보가 본문만큼이나 요긴하고 흥미롭다. 문제는 그 흥미를 충족시키는 일이 좀 번거롭다는 것.

그나마 로버트 힌데의 책은 나은 편이고 "우리의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이 다윈주의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몇몇 책들, 곧 '다윈주의와 도덕의 기원'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들로 도킨스가 거명하고 있는 다른 책들은 번역된 제목만 가지고 서지를 추적해야 한다. "마이클 셔머의 <선과 악의 과학>, 로버트 버크먼의 <신이 없어도 우리는 선할 수 있는가?>, 마크 하우저의 <도덕적 마음: 자연은 옳고 그름에 대한 우리의 보편적인 감각을 어떻게 설계했는가?>" 같은 책들의 경우가 그렇다.

잠시 손품을 팔도록 한다. 먼저 셔머의 책이 그래도 쉬운 편인데, <선과 악의 과학>이니까 키워드 몇 개를 쳐넣으면 'The Science of Good and Evil:  Why People Cheat, Gossip, Care, Share, and Follow the Golden Rule'(2004) 같은 다소 긴 제목의 책이 뜬다(368쪽 분량이니까 우리말로 옮기면 450쪽은 되겠다). 저자 마이클 셔머는 'Michael Shermer'로 표기된다는 것도 알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곁가지로 같은 저자의 <과학의 변경지대>(사이언스북스, 2005)가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는 사실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 로버트 버크먼(Robert Buckman)의 책의 경우도 대충 영작을 해서 검색해보면 'Can We Be Good Without God?: Biology, Behavior, and the Need to Believe'(2002)란 책이 뜬다(278쪽 분량이다). 그리고 마크 하우저(Marc Hauser)의 책 'Moral Minds: How Nature Designed Our Universal Sense of Right and Wrong'(2006)도 쉽게 검색되는데(512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사실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을 구입한 독자들이 같이 산 책이라고 열거돼 있기도 하다.

 

 

 

 

도킨스는 이 장에서 서두에 열거한 저자들이 펼친 주장을 그 나름대로 다시 개진하겠다고 하는데, 여하튼 보다 심화된 독서를 위해서는 힌데, 버크먼, 하우저의 책들도 참고해볼 수 있겠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매트 매들리의 책을 들 수 있을 터인데, 도킨스 또한 잊지 않고 있다. "매트 리들리는 <덕의 기원>에서 다윈주의적 도덕이라는 분야 전체를 명쾌하게 설명할 뿐 아니라 평판에 대해서도 아주 탁월한 설명을 제시한다."(331쪽) 여기서 도킨스가 언급하고 있는 <덕의 기원(The Origins of Virtue)>이 우리에겐 <이타적 유전자>(사이언스북스, 2001)로 번역된 바로 그 책이다(오해의 소지가 있는 제목이긴 하다).

<이타적 유전자>를 펼쳐본 이라면 알겠지만 책의 프롤로그는 '어느 무정부주의자의 탈옥'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어느 무정부주의자'란 '상호부조론'의 제창자 표트르 크로포트킨(1842-1921)이다. 그는 1876년 동지들의 치밀한 계획과 헌신 덕분에 차르의 감옥으로부터 탈옥에 성공한다. 이후에 영국으로 망명한 크로포트킨은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저작에 몰두하기 시작하며 "저술을 통해 그는 무정부주의의 이상을 설파했다. 또 그와 동지들이 붕괴시키기 위해 투쟁해 온 중앙집권적-귀족주의적-관료적 국가를 재창출하려는 시도로 여겨지는 이념적 라이벌인 마르크시즘을 공격했다."(12-3쪽) 그렇게 해서 저술한 것이 대표작 <상호부조론>(<만물은 서로 돕는다>)이다. 그의 이론에 대한 리들리의 평가는 이렇다.

"크로포트킨의 이론은 찰스 다윈의 이론과 같은 기계적 진화론이 아니었다. 다윈은 사회성이 높은 종이나 집단이 사회성이 낮은 종이나 집단과의 경쟁에서 적자생존을 한다는 것 외에는 상호부조가 어떻게 사회 속에 뿌리내리게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나는 크로프트킨이 절반은 옳았음을 입증하는 한편, 인간 사회의 뿌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것이다. 사회가 제구실을 하고 굴러가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훌륭하게 고안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의 진화된 소양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우리의 본성에 내재한다."(15쪽)

어떤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진화적 본성, 혹은 협동(상호부조) 성향을 도킨스가 정리하고 있는 바는 이렇다: "현재 우리가는 개체들이 서로에게 이타적이고 관대하고 '도덕적'이 되려는 타당한 다윈주의적 이유를 네 가지 알고 있다. 첫째, 유전적 친족 관계라는 특수한 경우가 있다.둘째, 호혜성이 있다. 받은 호의에 보답을 하고, 보답을 '예견'하면서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 셋째, 관대하고 친절하다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이다. 넷째, 자하비가 옳다면 과시적 관대함은 속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332-3쪽) 

그렇다면 이러한 '이타적' 본성은 어떻게 진화될 수 있었을까? 도킨스의 생각으론 '실수'나 '부산물'로 진화돼 왔다: "인간이 비비처럼 작고 안정적인 무리로 살아가던 시대에 자연선택은 인간의 뇌에 성적 충동, 굶주림 충동, 이방인 혐오 충동 등과 함께 이타적 충동도 프로그램해놓았다.(...) 나는 친절함, 이타주의, 관대함, 감정이입, 측은지심 등의 충동도 마찬가지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성(불임이나 다른 어떤 이유로 자식을 낳을 수 없을지도 모를 상대)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울먹이는 불행한 사람(친척도 아니고 보답을 받을 수도 없을 누군가)을 볼 때 어쩔 수 없이 측은지심을 느낀다. 둘다 빗나간 사례이자 다윈주의적 실수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행스럽고 고귀한 실수이다."(334-5쪽)

마치 오목눈이 어미새의 뻐꾸기 사랑처럼...

07. 08.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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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05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용한 정보 감사합니다. 최근 이런쪽 - 조금 벗어나있긴 하지만 - 에 대해 책 읽고 있는지라, 다른 관점에서 도덕을 바라보게 되는군요.

로쟈 2007-08-05 11:36   좋아요 0 | URL
언급된 책들 가운데 하우저의 책은 도킨스도 풀이해주고 있는데 번역되면 좋겠습니다. 종교와 무관하게 우리의 진화적 본성(도덕감각)은 일정한 틀을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블루비니 2008-04-08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책 열거는 하나 책 내용에 대한 건 별로 없군. [대다수 독자들이야 별로 불편함을 못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처럼 서지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독자들에게는 좀 아쉬운 일이다] ㅋㅋㅋ 그렇게 튀고 싶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