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과 따님이 '주몽'에 빠져 있는 동안 혼자 서재에서 내주부터의 독서 계획에 잠시 빠져본다. 하이데거의 <철학입문>(까치글방, 2006)을 구하러 구내서점에 들렀다가 하이데거(1889-1976)를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6)와 같이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생각의 가닥을 일단 적어놓기로 한다.

 

 

 

 

사실 가닥이랄 것도 없는 게 지난주에 <예술의 비인간화>(고려대출판부, 2004)를 다시 구한 다음에(이전에 갖고 있던 미진사판은 중역본이었다) 한번 '진지하게' 읽어볼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하이데거의 <철학입문>을 손에 들면서 오르테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2006)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이 오르테가의 책도 1929년에 마드리드대학교에서 행한 강의록이기에 시기적으로도 <철학입문>과는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알게 됐다(<철학입문>은 1928-9년 겨울학기에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행한 강의록이다). 그리고 이왕이면 <형이상학입문>(문예출판사, 1994)도 실로 오랜만에 다시 읽으면서 오르테가의 <형이상학 강의>(서광사, 2002)까지 같이 읽어볼 수 있는 거 아닌가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해서 묶여진 게 하이데거-오르테가 커플이다.

자주 인용되는 말이지만, 알베르 카뮈로부터 "니체 이후 유럽 최고의 철학자이자 문장가"라는 찬사를 받은 오르테가는 한편으로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정신적 스승'이란 평가도 받고 있다고 한다. 그게 아마도 스페인쪽에서 많이 하는 얘기일 듯한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중'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영향을 끼친 바가 얼마간은 인정이 되는 모양이다(특별히 실존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걸로 돼 있다).   

In the 1920s and 1930s under the spell of Ortega y Gasset, Bergson, Spengler, Keyserling and others, a reaction arose among intellectuals against the democratic and social enlightenment. The philosopher's attempt to make the "revolt of the masses" responsible for the alienation and degradation of modern culture, prepared indirectly way for fascism. Politically Ortega favored a form of aristocracy - culture is maintained by an intellectual aristocracy because the revolutions of the masses threaten to destroy culture. From the late 1920s Ortega's thought showed the influence of Martin Heidegger, whose major work, Sein und Zeit (1927, Being and Time), was not transparently political but was later interpreted against his Nazi sympathies.

 

6년의 나이차이니까 그냥 동료나 선후배 정도의 관계일 텐데(오르테가는 독일 유학시절 주로 베를린대학과 마부르크대학에서 공부했고 하이데거 또한 마부르크대학에 몸 담았었다), 여하튼 철학자로서의 절대적 크기를 떠나서 각각 20세기 독일과 스페인을 대표하는 두 철학자의 사유를 비교해가며 더듬어보는 일은 흥미로울 듯하다(단, '레져 클래스'에 속하지 않는 탓에 이런 독서계획을 여유 있게 실행할 만한 여건은 되지 않는다. 다만 준비하고 꿈꿀 따름이다).

철학에 대한 두 사람의 기본적인 입장을 맛보기로 읽어본다. 먼저 하이데거: "우리는 철학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철학하지' 않아도 철학하고 있다. 우리는 가끔 철학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 실존하는 한, 언제나 필연적으로 철학한다. 인간으로 거기 있다는 것은 철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은 철학할 수 없다. 그리고 신은 철학할 필요가 없다. 신이 철학을 했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철학의 본질은 한 유한한 존재자의 유한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철학입문>, 15쪽)

이이서 오르테가: "과거와 비교해볼 때 현재는 상대적으로 명백하게 철학적 기질을 지니고 있다. 즉 사람들은 철학하기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중적 분위기 속에서 철학적인 단어들이 날아오르면 곧바로 여기에 귀를 기울이고, 먼 길을 여행객이 돌아왔을 때 그의 여행담을 듣기 위해 그에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철학자들에게로 모이고 있다.(...)  이와 같은 대중들의 정신적 변화와 일치하는 놀라운 사실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철학자는 지난 시기 철학자들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정신 상태로 철학을 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에 어떻게 우리가 지난 시기 철학자들을 지배했던 정신과는 완전히 다른 정신으로 철학에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3쪽)

07. 01. 16.

P.S. 오르테가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와 <형이상학 강의>는 모두 같은 역자가 스페인어에서 옮긴 것이다. 한데 <형이상학 강의>의 서두에 실린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옥의 티가 눈에 띄어 적어보면, "오르테가는 생적 이성을 인간 삶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로 제시한다."(10쪽)나 "이러한 도구적 이성으로의 생적 이성을 발견한 오르테가는..."(11쪽)이라고 할 때 '써'는 모두 '서'로 바뀌어야 한다. 처음엔 오타이겠거니 했는데, 반복되는 걸로 보아 역자나 편집자가 한국어에 좀 무신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러한 도구적 이성으로서의 생적 이성을 발견한 오르테가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폐기하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Cogito quia vivo).'라는 명제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정열적인 삶은 철학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아닌가? 그 삶 자체가 바로 철학일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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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隣) 2007-01-19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는 독서 계획이시네요. 그래요, 나만의 독특한 의미 부여와 발견의 공부만이 긴 공부길을 지치지 않게 하겠지요. 오르테가는 철학하는 사람들에게도 미지의 철학이지요. 로쟈님에게 자극받아 저도 어제 받은 철학입문을 그런 식으로 독서해볼까요?^^ 더구나 전 지금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강독회를 하고 있는 처지니, 더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사실 들뢰즈 책 읽으면서 여러 철학자들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볼까 하다가 바빠서 게을러서 또 잊고 있었거든요. 그런 주제에 이런 말 하긴 체면(?)이 안 서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들뢰즈 만큼 철학하는 인간으로서의 깊은 통찰과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는 철학자가 있을까 하고 감탄합니다. 관심 있으시다면 꼭 한번 일독을 권합니다.

로쟈 2007-01-19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이란 무엇인가>가 그렇게 재미있으셨나요? 한 10년쯤 전에 읽을 때 진도가 엄청 안 나가던 책이었는데...
 

2006년의 책들을 꼽아보려던 생각을 접었다. 이미 여러 매체들에서 나름대로 선정한 책들과 부분적으론 중복되고 무엇보다도 내가 완독한 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이다(이유가 없지도 않은 게 대부분이 두툼한 책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으른 독서가'가 면책될 수는 없겠지만). 다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 한번 더 군소리를 덧붙인다는 건 별로 의미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과거를 돌이켜보기엔 아직 일이 너무 많다. 차라리 2007년으로 발빠르게 넘어가는 게 더 나은 성싶다.

그래 책장을 뒤져 책상에 올려놓은 책이 미셸 푸코의 <지식의 고고학>(민음사, 1992)이다. 나는 그해 여름에 나온 초판을 갖고 있는데, 기억에 내가 책을 완독한 건 96년 겨울이었다(정확하게는 97년 1월?). 그러니까 대략 10년전이다. 얼마전에 이 책을 2007년 1월에 (다시) 읽을 책으로 꼽아놓은 이유이다. 물론 이거 말고도 읽어야 할 책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이 얼추 20여 권은 된다. '책읽는 로쟈'를 여럿 빌려와야 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다!

  

 

 

 

<지식의 고고학>(1969) 국역본은 2000년에 새로운 판이 나왔지만 역자 서문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내용 자체에 수정이 가해진 것 같지는 않다. 해서, 아마도 몇 차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룰 페이퍼의 인용문 쪽수는 모두 1992년판에 근거한다. 잠시 서론을 읽어보다가 문득 캉길렘(캉기옘)의 중요성에 대해 상기해보게 됐는데, '푸코와 캉길렘에 관한 메모'라고 제목을 달고 우선은 몇 자 적어놓는다. 내가 참조한 것은 국역본 외에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그리고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문학과지성사, 1990)이다(아직 국내에서 이 책을 넘어설 만한 연구서가 나오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이다. 인문학이 죽었다는 이유가 외부에만 있을까?).

 

 

 

 

"역사가들의 관심이 특히 장기적인 기간에 돌려진 지도 이제 몇십 년이 지났다."(17쪽) <지식의 고고학>의 첫문장이다. 여기서의 '역사가들'은 역주에서 밝혀진 대로 페르낭 브로델 등의 아날학파를 말한다. 국내에서 아날학파에 정통한 학자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아르케, 2001), <페르낭 브로델>(살림, 2006) 등을 쓴 김응종 교수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특이하게도 브로델과 아날학파가 과대평가됐다는 언급으로 시작되는데, 아날학파에 대한 프랑스 내의 신랄한 비판은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푸른역사, 1998)에서 읽을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아날학파는 역사/시대를 지질학에서의 지층처럼 다루었는바(그래서 총체성의 결여로서의 '조각난 역사'다), 그럴 경우에 당연히 문제삼을 수 있는 것은 역사의 연속과 불연속에 대한 물음이다. 그들의 관심은 변화/불연속보다는 (장기)지속/연속에만 두어졌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당시 프랑스에서 역사학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는 지속이 아닌 단절에 더 관심이 두어졌다. 푸코에 따르면, "(일반적인 역사학과는) 반대로, 흔히 '시대'나 '세기'로 기술되는 방대한 단위들로부터 비약의 현상들로 관심이 옮겨졌던 것이다."(19쪽) 인용문에서 '비약의 현상'은 영역본의 경우 'phenomena of rupture, of discontinuity'로 풀어서 옮기고 있는데, '단절 현상' 혹은 '불연속 현상'이라고 하는 게 이해에 용이하다. '연속성'의 상대어로 쓰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학사/과학철학에서 이런 단절, 단면에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가 바로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바슐라르가 사용하는 개념으론 '인식론적 활동과 문턱들(epistemological acts and thresholds)'이 있고, 캉길렘의 모델에 따르면 '개념들의 변위와 변환(displacements and transformations of concepts)'이 있다.

이에 대한 역자의 주석은 이렇다: "캉길렘(깡길렘)은 과학사를 '개념'의 수준에서 다룬다. 캉길렘은 개념과 이론을 구분한다. 바슐라르가 이미 지적했듯이, 순수한 자료 또는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그러나 캉길렘은 자료와 해석을 그들을 이론에 의해 읽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자료를 최초로 해석하는 것은 개념이다. 그 뒤에 이론은 자료를 '설명'하는 것이다. 개념은 한 대상에 대한 '최초의 이해'를 담지하며, 그 대상을 이해하는 출발점을 이룬다. 이 개념은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한 이론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캉길렘에 따르면, 오히려 한 개념이 여러 이론들의 변환과정을 담지할 수 있다. 즉 개념은 '이론적으로 다가(多價)'이다. 캉길렘에 있어서 과학사는 바로 이러한 개념의 현성과 변환을 다루는 것이다."(20쪽)

이 대목에서 등장하는 캉길렘이 바로 미셸 푸코의 스승인 조르주 캉길렘(1904-1995)이다. 사르트르, 레이몽 아롱 등과 고등사범학교 동급생이었던 캉길렘의 주된 관심분야는 과학철학이었고(그는 소르본대학의 과학사연구소 소장직을 바슐라르로부터 이어받는다), 주저는 <정상과 병리>, <생명의 인식>. 전자는 <정상과 병리>(한길사, 1996),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인간사랑, 1996) 2종이나 국내에 번역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품절됐다.

 

 

 

 

이 책들과 함께 '바슐라르-캉길렘-푸코'로 이어지는 인식론의 계보를 다룬 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새길, 1996)이 필독서이지만 역시 품절됐다(영역본의 제목은 <맑스주의와 인식론>이다). 아쉬운 대로 참조할 수 있는 책이 개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의 제1장 '바슐라르와 캉길렘'이다. 이정우의 <담론의 공간>(산해, 개정판 2000)도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룬다.

새삼 <정상과 병리>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독서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지체된다!) 구입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끝내 사두지 못한 책이다. 국역본의 이미지가 없어서 영역본의 이미지를 대신 붙여놓았는데, 표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서문은 제자인 푸코가 썼다. 곁에 국역본이 없어서 영역본에서 인용하면, 아래의 문단은 캉길렘의 위치와 영향력을 단적으로 웅변해준다. 캉길렘을 제쳐놓으면, 알튀세르도 부르디외도, 라캉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

"Take away Canguilhem and you will no longer understand much about Althusser, Althusserism and a whole series of discussions which have taken place among French Marxists; you will no longer grasp what is specific to sociologists such as Bourdieu, Castel, Papperson and what marks them so strongly within sociology; you will miss an entire aspect of the theoretical work done by psychoanalysts, particularly by the followers of Lacan. Further, in the entire discussion of ideas which preceded or followed the movement of '68, it is easy to find the place of those who, from near or from afar, had been trained by Canguilhem." 

그 캉길렘은 제자인 푸코에 대해 뭐라고 적어놓았을까? 푸코에 관한 자세한 전기는 디디에 에리봉의 <미셸 푸코>(시각과언어, 1995)이지만(아직 절판은 아니라지만 이미지가 뜨지 않는다). 박스보관 도서인지라 참고할 수 없다. 대신에 <시칠리아의 암소>에서 캉길렘의 말을 인용한다. 자신이 지도한 푸코의 박사학위논문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1961)에 대해서.

 

 

 

 

"(*스웨덴의) 웁살라에 머무는 것을 이용하여 많은 일을 한 뒤에, 다시 말해 그것도 하나의 탄생 방법인 책읽기를 우선 한 뒤에, 그때는 함부르크의 프랑스문화원에 있던 푸코가 고등사범학교 교장이던 이폴리트에게 934면의 두툼한 원고를 제출했을 때, 그는 그것에 감탄한 그의 독자(*이폴리트)에게서 그 작업을 내게 넘기라는 충고를 받았다. 내가 그 전에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쓴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푸코를 열광적으로 읽고 나니 내 한계도 보였다. 1960년 4월에, 이 작업이 우선 인쇄되면, 소르본에 학위논문으로 그것을 제출할 것을 나는 제안했다. 아주 호의적인 보고서에서 나는 심리학의 '과학적'지위의 기원들을 다시 문제삼는 것은 이 연구가 촉발한 놀랄 만한 주제들 중의 하나를 이룰 것이라고 미리 예측했었다... 이것은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 1938년에 <역사철학 서설>이라는 레이몽 아롱의 학위논문이 불러일으킨 아연실색을 상기시킨다. 심리학에서의 과학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역사에서 객관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22쪽) 

그러니까 푸코의 학위논문 지도교수는 장 이폴리트였지만, 그는 본논문의 지도를 과학철학 전공자인 캉길렘에게 넘기도록 충고하며 푸코는 그에 따랐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광기의 역사>였다...

06. 12. 31.

P.S. 이제 30여 분 후면 제야의 종이 울리겠군. 여기에 새해 인사를 적어놓기로 하자. 여러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비록 서재를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 때문에 나의 게으름은 축나고 지적 허영은 남아돌게 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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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랑스 의학철학의 전통과 깡귀엠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5-12 18:52 
    국내에는 미셸 푸코의 스승으로 처음 알려진 프랑스의 과학철학자(혹은 의학철학자) 조르주 깡귀엠의 <생명과학의 역사에 나타난 이데올로기와 합리성>(아카넷, 2010)이 출간됐다. 타이틀은 책 제목이라기보다는 논문 제목에 더 어울릴 만한데('학술서'의 티를 팍팍낸다) 마침 교수신문에 책의 내용과 의의를 소개하는 역자의 글이 실렸기에 스크랩해놓는다. 필자의 동의하에 옮긴이의 글을 재수록했다고 하니까
 
 
끼사스 2007-01-01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이 페이퍼는 (약간의) 읽고 싶었던 책과 (대부분의) 읽고 싶어지는 책들로 가득한 '환상적 비블리오그래피'입니다…. 로쟈님이 선사하는 새해 선물로 알고 퍼갑니다. 즐거운 일로 가득한 정해년 되시길!

로쟈 2007-01-0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관심이 맞아떨어졌던 모양이네요. 비슷한 관심의 독자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알라딘의 매력입니다.^^

테렌티우스 2007-01-26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작긴 하지만 한길사 정상과 병리 표지가 아래에 있네요...^^

http://www.hangilsa.co.kr/bookimage/106normal1.jpg

로쟈 2007-01-26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옮겨놓았습니다.^^
 

오늘은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다. '프리랜서' 강사에게 그런 날이 따로 지정돼 있는 건 아니고, 집에서 기말시험과 페이퍼 등의 채점을 하기로 그냥 혼자 정해놓은 날이다(거기에 집안일도 겹쳐 있고). 하지만, 모든 '근무'가 그렇듯이 '열심히' 하면 왠지 '손해'라는 느낌 때문에 적당히 (양심의) 눈치를 보면서 빈둥거리게 된다. '이걸 다 언제 한단 말인가!' 속으로 푸념하면서. 점심도 먹은 김에 막간을 이용해서 잠시 잡담을 늘어놓기로 한다. 푸념보다는 잡담이 그래도 '생산적'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서.  

잡담의 주제는 사랑에 관한 잡담들을 늘어놓은 책, 플라톤의 <향연>에서 서두에 나오는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에 관한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관련 텍스트는 박희영 역의 <향연>(문학과지성사, 2003)과 이세진 역의 조안 스파르판 <향연>(문학동네, 2006), 그리고 옥스포드 문고본 클래식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 등이다. 조안 스파르의 '낙서본' <향연>이 출간된 김에 사놓기만 했던 책들을 뒤적이게 됐는데, 여러 텍스트들을 같이 읽다 보니까 대동소이한 줄거리 외에, 당연한 일이지만 미묘한 차이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은 그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먼저, 관련대목은 이렇다(인용문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여! 자네는 언제나 똑같네 그려. 왜냐하면 자네는 항상 자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쁘게 이야기하니 말일세. 자네는 소크라테스님 이외의 자네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두 무조건 비천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네 그려. 그런데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사실 자네는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언제나 소크라테스님을 제외한 자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적대적인 사람이 되어버리니까 말일세!

아폴로도로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 (박희병, 41쪽)

아폴로도로스의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 외에는 세상 사람 모두가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네가 어쩌다 '투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는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입만 열면 너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마구 화를 내는 버릇이 달라지진 않을 테니까. 소크라테스님에 대해서는 물론 예외지만.

아폴로도로스: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이세진, 15쪽)

박희영본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것이고 이세진본은 불역본을 옮긴 것이다. 해서 내용의 정확성을 따지자면 박희영본이 더 유리해야 정상이지만, 고전 그리스어라는 게 '악마의 언어'라 불릴 만큼 난해하고 또 중의적이어서 '정확하게' 옮긴다는 것이 과연 어느 만큼 가능한지 모르겠다. 내가 들춰본 (원전을 옮긴!)두어 가지 영역본들도 국역본들만큼이나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번역에서의 차이'라는 원론적인 문제를 따져보려는 건 전혀 아니고, 여기서는 다만 '나약한 자라는 별명'과 '투덜이라는 별명'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건지 궁금해할 따름이다. 참고로, 인터넷상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벤자민 조웻(Benjamin Jowett)의 영역은 아래와 같다.

Companion. I see, Apollodorus, that you are just the same-always speaking evil of yourself, and of others; and I do believe that you pity all mankind, with the exception of Socrates, yourself first of all, true in this to your old name, which, however deserved I know how you acquired, of Apollodorus the madman; for you are always raging against yourself and everybody but Socrates.

Apollodorus. Yes, friend, and the reason why I am said to be mad, and out of my wits, is just because I have these notions of myself and you; no other evidence is required.  

그러니까 조웻의 영역본에서는 '나약한 자'와 '투덜이' 대신에 '미치광이(madman)'가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으로 칭해진다.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도 조웻의 영역과 가장 유사하다('미치광이'란 표현의 러시아어 'becnovatyj'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뜨는 이미지는 히틀러이다!).그렇다면, 아폴로도로스는 나약한 자이면서, 투덜이면서 미치광이인 것인가?(여기서 먼저 지적해두자면 박희병본에서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란 표현은 '나약한 자'라는 친구의 말을 다시 받는 것이기에 수정될 필요가 있다.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를 우리말에서 '나약한 자'라고 부르지는 않으니까.)

사태를 수습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로빈 워터필드의(Robin Waterfield)의 옥스포드판 <향연>이다. 역자는 1952년생의 중견 학자인데(비록 원로급은 아니더라도), 옥스포드판의 <국가>를 영역하기도 했으므로 영어권에서는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전문가라고 해야겠다. 그는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Companion. You never change, Apollodorus: you put yourself and others down all the time. I get the impression that you regard literally everyone, from yourself onwards, as unhappy - except Socrates. I've no idea how on earth you came to get your nickname 'the softy', since your conversational tone is invariably the one your're displaying now, of impatience with yourself and everyone else - except Socrates.

Apollodorus. So if I think this way about myself  and about you, then I must be raving mad - is that it , my friednd?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역시나 'the softy'이다. 'softy'는 'soft person'을 가리키는 것으로, 우리말로는 '바보, 멍청이, 유약한 사람, 감상적인 사람' 등의 뜻으로 옮겨진다. 축어적으로 옮기자면, '물렁한 사람', '물렁이'가 되겠다. 워터필드가 붙인 주석을 보면, 원텍스트에서 이 단어는 원래 'the fanatic'(미치광이)란 뜻을 갖는데, 역자는 아폴로도로스에 관한 다른 기록을 염두에 두고 보다 자연스러운 그리스어 표현, 곧 영어로는 'the softy'라 옮겼다고 한다. 그 다른 기록이란  아폴로도로스가 당시에 악명높은 동성애자였으며 소크라테스가 죽었을 때 엄청나게 울었다는 증언 등을 말한다. 박희영본에서 '나약한 자' 또한 이 'the softy'와 맥이 닿아 있다.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여 이세진본의 구어투에다 워터필드의 영역을 살짝 입혀서 옮기면 이렇게 될 것이다.

친구: 아폴로도로스,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소크라테스님을 빼고는 너를 포함해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불쌍해죽겠다는 식이지 뭐냐. 난 네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물렁이'란 별명을 얻었는지 상상이 안된다. 넌 입만 열면 언제나 지금처럼 너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참지 못하겠다는 식이니 말이다. 소크라테스님만 빼고.  

아폴로도로스: 그래서, 내가 이런 식으로 나 자신과 네놈들을 대하면 그게 내가 미치광이라는 뜻이라도 되는 거냐,  그런 거냐, 친구야?

조웻과 워터필드의 두 영역본의 차이는 이것이다. (1)조웻: 네 별명이 왜 '미치광이'인지 알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2)워터필드: 네 별명이 왜 '물렁이'인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넌 항상 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잖아. <향연>의 이본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아폴로도로스의 별명을 어떻게 옮기느냐에 동사는 '알겠다'와 '모르겠다'를 왔다갔다한다. 문맥의 논리상 그렇다.

국역본의 경우, 박희영본은 워터필드 계열이다: "자네가 어디에서 '나약한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네." 반면에 이세진본은 조웻 계열이다. "네가 어째서 '투덜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알 만하다."(한데, 조안 스파르는 '알 만하다' 대신에 '그냥 넘어가자'라고 넘어간다). 

그리고 그런 구도라면, 박희영본에서 친구의 말을 이어받는 아폴로도로스의 대사는 어색해 보인다. "나의 가장 친한 벗이여! 나 자신뿐만 아니라 자네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력이 모자란 바보로 여겨지는 것은 분명한 것 같네!"라고 맞장구칠 때는 아니지 않은가? 그 다음 친구의 대사가 "아폴로도로스여, 그러한 문제를 놓고 우리가 지금 논쟁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이므로 이 장면에서 아폴로도로스는 친구의 말에 (동의가 아닌) 시비를 걸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세진본에서도 "야, 그게 바로 명백한 증거 아냐? 내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 아니냐고?" 할 때도 친구의 말에 대한 동의가 아닌 시비의 어조(뉘앙스)가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 그런 게 내가 정신 나간 투덜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냐?"라는 식. 즉, 워터필드처럼 반문으로 옮기거나, 조웻처럼 긍정문으로 옮길 경우에는 '반어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로쟈, 넌 여전하구나. 넌 말야, 항상 너 자신과 남들을 나쁘게 말해.")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져서 뭐하겠어, 아폴로도로스, 자꾸 딴소리 말고 내가 물어본 거나 대답해줘. 그래, 어떤 연설이었는데?" 우리는 <향연>의 문턱에서 어정댈 게 아니라 <향연> 속으로 빨리 걸음을 내딛어야겠다...

06.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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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은 굉장히 신경쓰며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래서 오늘도 긴장하며 읽었거든요.
'투덜이'에서 긴장이 확 풀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렵긴 하네요.

로쟈 2006-12-19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 읽기는 고전(苦戰)이기도 하지요...

열매 2006-12-20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향연>의 문학과지성사판 번역자는 '박희병'이 아니라 '박희영'입니다. 외대에서 그리스철학을 가르치는 원로학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로쟈 2006-12-20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옆에 책을 두고서도 다른 분과 헷갈렸네요.^^;

Poissondavril 2007-05-17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다가 이제야 이 페이퍼를 봤네요. 정말 좋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물렁'한 역자지만 기회가 되는 대로 꼭 반영해서 수정하겠습니다.

로쟈 2007-05-17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번역서가 또 나오는가 보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어제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2003)이다. 다른 판본인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를 갖고 있고 또 동문선의 책이 출간 당시 워낙에 '고가'여서 따로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영역본을 주대본으로 한 <들뢰즈의 푸코>가 부정확한 대목이 여럿 된다고 하여 불어본을 옮긴 <푸코>까지 주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이유는 얼마전에 <바보배>(안티쿠스, 2006)도 출간된 김에 모셔두기만 했던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를 읽어볼까 해서 러시아어판과 같이 꺼내두었다가 이왕이면 <지식의 고고학>을 한번 더 읽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푸코>의 첫장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루고 있다.

 

 

 

 

기억에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영역본과 같이 읽었더랬다. 마치 10년전 일기를 꺼내읽듯이(그맘때 나는 갓 서른이 된다는 묘한 설레임을 갖고 있었을까?) 다시 책을 손에 든다.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리뷰들을 잠시 찾아보니 역자인 이정우 원장의 글이 눈에 띈다. 책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이라는 강조밖에 하고 있지 않지만, 워밍업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경향신문(04. 10. 15) 담론의 논리적 기초 서술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후기 산업자본주의 시대, 정보화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 탈근대의 시대 등 무엇으로 부르든 이 시대는 군정(軍政)시대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준다.

시대의 이런 변환과 더불어 철학에서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곧 19세기적인 사유 양태들(현상학, 해석학, 변증법 등)에서 새로운 사유양식들로의 이행이다. 이 새로운 사유양식들은 매우 이질적이어서 일반화하기 힘들지만, 이 사유들이 군정시대와는 크게 다른 90년대를 사유하기 위해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미셸 푸코이다.

유신 이후 한국 사상을 이끌어간 것은 마르크시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데리다의 탈구축주의 등이 주도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푸코는 알튀세와 더불어 정확히 그 사이에 위치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는데, 이 시대는 타자들(=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이며, 담론계가 전반적으로 재편성되던 시대이며, 마르크시즘 이후의 새로운 실천 방식들이 모색되던 시대이다. 이것은 곧 두 적대세력의 시대, 과학성의 시대, 혁명의 시대로부터의 단절 또는 변환을 함축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무엇보다 권력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즉 푸코의 사유는 ‘지식-권력’의 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때로 이 생각은 사회학적 환원주의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곧 푸코에게서 ‘지식(savoir)’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것은 곧 한국에서 푸코는 보다 현실적인 정치문제와 관련해서만 다루어지고 그 과학사적 맥락이나 철학적 토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또한 푸코 사유에의 보다 지속적인 관심과 선용(善用)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지식의 고고학’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저작은 푸코 사유의 허리에 위치한다. 이전의 고고학적 저작들(‘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과 이후의 계보학적 저작들(‘감시와 처벌’ ‘지식에의 의지’) 및 윤리학적 저작들(‘쾌락/기쁨의 선용’ ‘자기 돌보기’) 사이에 위치하면서 푸코 사유의 전반적인 문제의식, 논리적 기초, 원리적인 개념들, 중요한 방법들 등을 전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담론’이다. 90년대에 새롭게 도래한 단어들 중 아마도 가장 넓게 퍼진 단어들 중 하나가 담론일 것이다. 이 개념은 곧 과학적 명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넓은 언어적 차원을 가리킨다. 즉 담론 개념은 90년대에 있었던 문화적 변화들을 단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이 새롭게 도래한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인 것은 이 때문이다.(이정우|철학아카데미 원장)

06. 12. 14.

P.S. <지식의 고고학>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은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인 <담론의 질서>(서강대출판부, 1998)이다. 이 또한 새길사(1993)에서 먼저 출간되었던 책이고 나는 그 판본으로 읽었었다(영역본에는 두 텍스트가 합본돼 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계간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도 있다. 게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도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유용한 안내를 포함하고 있다.

Археология знания

러시아에서 내가 구한 책들 가운데 아끼는 책의 하나는 바로 러시아어판 <지식의 고고학>(2004)이다. 마침 내가 체류 중에 책이 나왔고, 장정도 예쁘게 돼 있다. 416쪽 분량이니까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국역본보다 왜 더 두꺼운지는 아직 모르겠다. 비록 들뢰즈의 <지식의 고고학>론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긴 하지만), 가격은 저렴했다. 여하튼 읽을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2007년 1월에 읽을 책으로 <지식의 고고학>을 미리 예약해 두기로 한다. 10년쯤 시간을 되돌려 (비록 '고고학적 시간'은 아니더라도) '회고적 시간'을 잠시 살아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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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난해하던데요 ;;;

로쟈 2006-12-1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역자였나) '회색'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풍부한 사례들을 다룬 푸코의 다른 저작들에 비하면 난해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게 오히려 매력이기도 하구요...
 

오전에 생각난 김에 숀 호머의 <라캉> 원서를 잠시 찾아보다가 손에 집어든 책은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2000)이다. 작년인가 ''들뢰즈와 정치'를 읽기 위한 메모'까지 페이퍼로 써둔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읽은 거라고는 그때 읽은 서론이 전부이다. 그 서론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한데, 나의 관심사인 '들뢰즈와 경험론'이란 주제를 이전에 두어 차례 다루면서 이 서론의 마지막 대목은 빠뜨렸던 듯하다(확인해보니까 적어놓지 않았다). 그걸 보충해서 채워넣는다. 그러니까 이 글은 '들뢰즈와 경험론'에 대한 간단한 보유이기도 하다.

 

 

 

 

따라 읽어야 하는 대목은 번역본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서론 36-7쪽이다. 들뢰즈의 다양성(multiplicity; 요즘은 '다양체'라고 더 많이 번역되는 듯하다) 철학이 정치철학과 어떻게 접속되는지를 이야기하는 대목이다('들뢰즈와 경험론'이나 '들뢰즈와 경험론의 비밀' 같은 페이퍼를 참조).

"들뢰즈가 자신의 다양성의 철학에 논증을 제공하려고 시도하는 방식들 중 하나는 동사 '이다(to be)'보다 접속사 '그리고(and)'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는 부분적으로는 철학적 전통을 전복시키려고 하고, 관계성의 연결적 역능을 그것의 속성화(attribution)에로의 종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한다."

여기서 '역능'은 물론 'power'의 번역어이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유래인) 스피노자 전공자들이 새롭게 제안하는 건 '역량'이다. 다시 말하면, 들뢰즈는 '계사' 대신에 '접속사'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암묵적으로 '계사존재론'의 형식을 취해온 서구 형이상학에 딴지를 걸고 다른 한편으로 ('접속사'라는 언어적 표현형식에 의해 표시되는) 관계성의 역량을 속성/속사에 대한 종속에서 해방시키고자 한다(속성/속사는 'X is Y'라고 할 때 X를 기술하는 Y를 가리킨다. 이때 X와 Y를 연결시켜주는 것, 그럼으로써 X를 특정한 속성 Y에 귀속시켜주는 것이 계사 is이다. 들뢰즈는 이 사태에 대한 기술을 'X and Y'로 전환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내가 예전에 강조하면서 인용한 바 있는 <디알로그>의 문장이다. "'이다(IS)'를 사유하거나 '이다에 대해(for IS)' 사유하는 것 대신에 '그리고'와 함께(with 'AND') 사유하라. 경험론은 결코 또 다른 신비를 갖고 있지 않다."(*'신비'는 'secret'의 번역이다.)

이에 대한 패튼의 주석: "모든 관계들에 내재하는 비규정적인 접속사로서, '그리고'는 상호 관계하게 된 어떤 두 사물들 사이(in-between)에 있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새로운 '생성들', 사건들 또는 존재들이 항상 이런 '사이(in-between)'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가 된다. 그들의 견해에서 '그리고'는 항상 두 요소들 간의 경계선이고, 그 자체로서 사물들이 발생하고 변화들이 발생하게 되는 잠재적인 탈주노선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

'비규정적인 접속사(indeterminate conjunction)'란 '부정 접속사'란 뜻도 되겠는데, 이것은 부정 대명사와 마친가지로 무엇을 특징하거나 한정하지 않는다(들리즈가 좋아하는 것은 품사들은 이러한 부정대명사나 비인칭대명사이다). A and B라고 할 때 'and' 가 A나 B에 대해서 보태거나 한정해주는 게 없다는 얘기이다. 'and'는 그것들 '사이'를 대신할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새로운 사건들이란 항상 그 '사이'에서 출현한다는 것. 마치 사이먼 앤 가펑클의 화음처럼.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AND이다(http://www.youtube.com/watch?v=XGbnOmOzW-o).

반복하자면,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치철학의 공리이다. 거기엔 아무런 비밀도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책이 '들뢰즈와 정치'라고 불리는 것은 전적으로 온당한 것이다"라고 할 때 '들뢰즈와 정치(Deleuze and the political)'에서 and가 강조되지 않은 것은 온당하지 않다. 패튼의 책은 '들뢰즈와 정치', 혹은 '들뢰즈 그리고 정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0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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