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다른 주저없이 손에 꼽을 수 있는 책 몇 권이 출간됐다. 이런 경우는 반가우면서도 속이 쓰리다. 속이 쓰린 건 당장에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이다. 혹은 보다 원초적으론 책을 구입할 만한 여력이 안된다는 것도 이유가 된다. 그러다가 품절/절판되는 책들도 드물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어떻게 해야지 출판사들이 책을 알아서들 보내줄까, 간혹 그런 공상을 하기도 하지만, 주로 칭찬보다는 험담을 늘어놓는 주제이기에 곧 그런 기대를 접어둔다. 물론 나는 거저 얻은 책에 대해서는 험담하지 않으며, 나의 험담은 주로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투자한 게 있으니!

해서 이것도 일종의 악순환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으니, 책에 대한 기대가 높을 수밖에 없고, 그러니 자연스레 이것저것 트집을 잡게 된다(물론 완벽한 책은 드물며, 대다수는 엉성한 책들이기에 꺼리들은 차고 넘친다). 또 그러니 이래저래 출판사로선 달갑잖은 독자일 테고 그런 독자에겐 책을 거저 보내줄 리 없다. 해서, 나는 여러 곤란 속에서도 책은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된다. 더더욱 눈을 부라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도 책이냐?!(혹 '출판평론가'라는 이들에겐 책을 거저 보내주는지? 영화평론가들에게 시사회 티켓을 보내주는 것처럼. 사실이 혹 그렇다면 조만간 '평론가'란 직함이라도 구해봐야겠다. 그것도 혹 사야 되는 건가?)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슬라보예 지젝의 책과 그에 관한 책이다. 올해도 두 권의 책이 근간예정으로 돼 있는 지젝은 인문학 출판계에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상이 있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에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번에 나온 건 그의 주저에 속하는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와 입문서인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이다.

'이론서'로서 <까다로운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간사랑)이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인간사랑)에 이어지는 책이다(그 사이에 <부정성과 함께 남아있기> 등이 놓여 있다). 지난 토요일 마이어스의 책에 대한 중앙일보의 소개 기사에는 국내에 지젝의 저서가 17종이 번역/소개돼 있다고 했는데(그는 개정판이 나온 <향락의 전이>를 두 권으로 카운트했다), 실제 단독 저작은 히치콕에 대한 책까지 포함해서 13권이다(<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은 지젝이 편집한 책이고, 그의 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 중 내가 '이론서'라고 분류한 책들이 그래도 번역이 양호한 책들에 속하며 부분적인 오역들을 빠져나가면서 꼼꼼하게 읽으면 읽을 수 있는 책들이다. 물론 아무리 지젝의 책들이라 하더라도 내용이 좀 무겁긴 하다.

 

 

 

 

지젝의 또다른 책들은 '영화책'이라 분류될 만한데, 실제로 영화들을 주된 분석대상으로 하고 있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새물결, 2001)을 필두로 해서 <삐딱하게 하기>(시각과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등이 그런 책들이다. 여기에 분류된 책들도 비교적 읽을 만한데, 나열된 순서를 거꾸로 하면 오역이 그래도 적은 순서가 된다. 지젝의 책 가운데 국내에 가장 먼저 소개된 <삐딱하게 하기>는 처음 소개한 공로는 인정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오역이 적지 않다(해서 이 책에 대한 만족도는 뒤로 갈수록 점점 떨어진다). 요즘도 절판되지 않고 계속 팔려나가는 책이므로 개정판이 나올 법하지만, 아주 명백한 오타나 오역들이(적지 않은데) 교정되지 않은 채 판을 찍고 있는 걸로 보아서 출판사로선 그럴 의향은 없는 듯하다(전향적인 방향으로 개정본 출간을 검토해주었으면 한다).

해서, 영화책들 가운데, 내가 보기에 그래도 가장 안전하게 참조할 수 있는 건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들을 주로 다루고 있는 <진짜 눈물의 공포>인데, 이건 의외로 판매실적이 저조한다. 알라딘을 기준으로 하면, 조잡한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보다도 세일즈 포인트가 낮게 나온다(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그 책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그리고 몇몇 오타나 오역이 없지 않지만, 나로선 지젝에 입문하려는 독자라면 가장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라고 추천하겠다.

그리고 물론 지젝의 나머지 책들이 있으며 대부분은 오역의 지뢰밭이다(오역 사례집으로의 활용가치는 있겠지만, 일반 독자라면 차라리 안 읽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하다). 그러니 지젝을 미워하고 말고 이전에, 지젝은 우리말로 읽는 것 자체가 드물고도 어려운 저자이다(사실, 정도의 문제일 뿐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그렇다. 해서 한국어로 똑똑해진다는 건 정말 힘들다!).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읽을 만한 입문서가 절실히 요구되는데, 이번에 출간된 마이어스의 책은 그러한 요구를 충족시키는 책이다. 요컨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

이미 루틀리지의 같은 시리즈('Critical Thinkers')의 책으로 클레어 콜브룩의 <들뢰즈>(태학사, 2004)가 출간된바 있고, 나는 그 책을 '가장 쉬운 들뢰즈 입문서'라고 부른바 있다. 그러니 마이어스의 책에 대해서도 같은 소개를 하는 것이 형평에 맞을 것이다(신생 출판사로 보이는 '앨피'는 이 루틀리지 시리즈의 에드워드 사이드 편도 출간했는데, 이 시리즈의 저작권을 상당수 인수한 모양이다. 좋은 시리즈인 만큼 양질의 번역서들이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거기엔 니콜라스 로일의 <데리다>도 포함돼 있는데, 나는 로일의 책을 모스크바에서 지난 가을에 읽었더랬다.)

마이어스의 책은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영어권에서도 그런 류의 지젝 입문서로서는 최초의 책이 아닌가 싶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해 나온 것이 사라 케이의 <지젝: 비판적 입문>(Polity, 2003)이고, 작년에는 이안 파커의 <슬라보예 지젝: 비판적 입문>(Pluto Press, 2004)이 출간됐다. 모두 컴팩트한 분량의 '입문서'들이다. 마이어스의 책도 원제는 국역본처럼 요란한 게 아니라 그냥 <슬라보예 지젝>이며, "왜 지젝인가?(Why Zizek?)"와 "핵심 사상(Key Ideas)", 그리고 "지젝 이후(After Zizek)"라는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책을 구하러 맘먹고 오늘 구내서적에 갔더니 아직 들어와 있지 않았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이 그러하듯이, 쉬운 문장으로 간결하게 서술돼 있고, 핵심적인 아이디어들은 따로 박스처리돼 있는 등 입문서로서의 요건은 깔끔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책이므로 일독할 만하다. 그런데, 국역본의 제목은 왜 그 모양인가? 그거야 책이 좀 쉽게 눈에 띄게 하기 위한 출판사측의 계산 때문일 것이다. 그 계산이 통할지는 두고볼 일이지만, 모쪼록 지젝에 대한 오해의 많은 부분이 걷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지젝은 그에 대한 숭배자들 못지 않게 많은 혐오자들도 거느리고 있는 사상가이다. 나로선 그가 내가 읽고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더불어 나는 '같잖은' 비판들을 제시하기에 앞서서 중요한 것은 '읽기'라고 생각한다. 데리다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읽기'는 모든 비판보다 멀리 간다('같잖은'이란 표현은 강유원의 것이다.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은 '같잖은' 철학이라고 말한다. 사후 50년이 되지 않은 데리다나 들뢰즈 철학은 아직 유아적인 철학에 불과하고. 나는 그의 표현을 '같지 않은'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으로 읽는다. 데리다의 철학은 헤겔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아울러 지젝의 철학은 알튀세르의 철학과 '같지 않다'. 그래서 '같잖은' 철학이다. 강유원의 프랑스 철학 비판은 그 자신의 시인대로 감정적인 것인바, 내가 읽고 싶은 건 그런 '같잖은' 감정이 아니라 비판의 실내용이다. 그건 지젝에 대한 갖가지 비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번째 책은 박노자의 <우승과 열패의 신화: 사회진화론과 한국 민족주의 담론의 역사>(한겨레신문사)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의 목적은 '힘 숭배' 수용의 몇몇 초기 단계들-1883년 부터 1910년까지 미국에 다녀온 초기의 조선 지식인들이나 량치차오와 같은 한국 개신 유림의 '큰 스승', 그리고 개신 유림 계통의 주요 논객 등을 중심으로-을 짚어서 오늘날의 '승자 독식사회', '승자를 위한, 승자에 의한 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개화기에 사회진화론 사상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는 이미 박노자의 이전 저작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동유럽의 기적' 혹은 '슬로베니아의 기적'이라면, 원래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란 러시아 이름을 가졌던 박노자는 '러시아의 기적'이라 할 만하다. 나는 그가 러시아의 '선진적인' 교육 시스템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으론 그런 시스템과 무관한 '별종'이지 않을까 싶다. 이미 여러 권의 저작을 통해서 한국인보다 더 예리하게 한국의 역사와 사회에 대해서 비판하고 분석해온 그의 작업은 동의하지 않는 부분에서조차도 더없이 값지고 소중하다. 해서 당분간은 '박노자의 모든 책'이다. 그런 책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아주 소략한데, 짐작에 메이저 언론이라는 조중동이 모두 북리뷰에서 이 책을 다루지 않았다. 책을 낸 한겨레에서만 장문의 서평을 실어주었다. '우승과 열패의 신화'(우수하면 승리하고 열등하면 패배한다는 신화)는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유효하다는 걸 그들의 불편한 '침묵'이 말해주는 것은 아닌지.

 

 

 

 

세번째 책은 진화생물학자 에른스트 마이어의 <생물학의 고유성은 어디에 있는가?>(철학과현실사)이다. 이 양반이 지난 2월에 작고했다는 걸 서평을 보면서 알았는데, 1904년생이니까 101세의 장수를 누린 셈이다. 책은 그가 100세 때에 쓴 마지막 저서라고 하는데, 이래저래 경탄스럽다(103세에 세상을 뜬 철학자 가다머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 진화생물학계의 태두로서 진작부터 '20세기의 다윈'으로 불린 마이어이지만, 국내에 출간된 그의 책은 빈약하다. <진화론 논쟁>(사이언스북스, 1998)으로 처음 소개됐고, <이것이 생물학이다>(몸과마음, 2002)로 거장의 면모를 살짝 보여주었을 뿐. 마이어의 모든 책이라고 하기엔 너무 빈약하게 소개됐지만, 나중에 나온 두 권 정도는 읽어둘 만하다(<진화론 논쟁>은 소략한 책이다). 같이 나온 과학책으론 개리 마커스의 <마음이 태어나는 곳>(해나무)이 있다(마이어의 책이 아니었더라면, 이 책이 지난주의 교양과학서이다). 저자는 미국 인지과학계의 새로운 기대주인 듯한데, 노암 촘스키나 스티븐 핀커 같은 대가들이 추천사를 쓴 걸로 봐서 집어들어 손해보지 않을 책이다.

 

 

 



네번째 책은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책과함께)이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OED라고 불리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의 곡절 많은 사전 편찬사이며, OED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 노력, 자부심, 좌절 등을 함께 담은 흥미로운 휴먼스토리이다. OED 제작에 깊이 관여한 머리 교수와 죄수 마이너의 이야기를 담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교수와 광인>의 저자 사이먼 윈체스터가 썼다." 내가 덧붙일 말은 없으며, '영어의 시대'를 살고 있는 만큼, 그 사전 편찬과 관련한 이야기도 한번쯤 귀담아 들어봄 직하다. <한국어의 탄생> 같은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끝으로, 이젠 '원로' 비평가가 된 김윤식 교수의 <김윤식 선집 7 - 문학사와 비평>(솔출판사)이다. 서점에 깔린 것만 보고 책을 들춰보지는 않았는데, 하여간에 아직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비평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집이 거의 다 추스려지고 있는 듯하여 한편으로 세월무상을 느끼게 된다. 학부시절 신간으로 나온 <낯선 신을 찾아서>(일지사, 1988)를 서점에서 사들고는 도서관에서 읽던 기억이 새로운데 말이다. 나는 이 독보적인 문학사가이자 비평가의 '자질'이 '낯선 신'에 대한 갈망과 열정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갈망/열정을 안은 이라면, 방황은 영원할 수밖에 없으며 책읽기 또한 종결될 수 없다(그때 비평은 운명의 표정을 갖게 되리라). 개인적으로 비평집들을 읽을 때 내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그러한 열정/수난의 함량이며, 그 기준은 김윤식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선집과 함께 나란히 나온 것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시나가와역>(솔출판사)인데(역시 예술기행), 책읽기의 어느 경지에 이르면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어떤 영토에 가닿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시방 내가 있는 곳은 아직도 바람 많이 불고 꽃이파리 나부끼는 땅, 생의 푸르름이 아직 이념의 회색빛보다 진한 곳, 진하다고 믿어지는 곳. 비도 눈도 내리지 않는 그 어느 저녁을 위해서 아직은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 갈길이 멀다..

05. 04. 25.

 

 

 


 

P.S. 좀 지난 책이지만, 지난 2월말 정현종 시인의 정년퇴임 기념으로 나온 책 <영원한 시작>(민음사)도 기록해 두고 싶다. 후배 교수인 정과리가 시인의 제자들의 글을 묶은 것으로 일종의 기념논총이다. 소개에 따르면, "필자들은 정현종 시학의 요체가 '상상력'이라고 보았고, 상상은 질료의 운동과 교감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은 1부 '질료'와 2부 '운동'으로 구성돼 있고, 3부에서는 '교감'이란 제하에 스승과 제자들이 나우었던 정담을 싣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틀지우고 있는 건 물론 바슐라르의 상상력론인바, 그것이 한 시인의 총체적인 시세계를 조명하는 데 바쳐지고 있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해서 정현종의 독자와 바슐라르의 독자가 모두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읽어서 남주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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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4-25 18:08   좋아요 0 | URL
출판평론가에겐 물론 책을 보냅니다^^

로쟈 2005-04-25 20:14   좋아요 0 | URL
그들이 듣기 좋은 소리들만 늘어놓는 이유가 있는 거겠죠...

비로그인 2005-04-25 20:47   좋아요 0 | URL
유혹하는 책들이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는데 그것에 손을 뻗을 수 없을때는 가슴이 쓰라립니다...;;; 자본의 압박...;;;

릴케 현상 2005-04-25 21:08   좋아요 0 | URL
ㅎㅎ 전번에 발마스님은 쓴소리했다가 잘렸잖아요^^출판인회의 이달의 책이었던가?

로쟈 2005-04-26 12:56   좋아요 0 | URL
잘릴 만했지요. 발마스님이 좀 직설적이잖아요. 아주 훌륭한 책이지만, 몇 가지 '옥의 티'가 있다고 하면 됐을 것을(물론 서평은 그 티잡기로 도배를 하더라도)...

2005-04-26 14: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26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5-04-26 1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주니다 2005-04-27 09:58   좋아요 0 | URL
메일 받으셨나요? 발송 실패했다는 메세지가 자꾸 뜨는군요. 내용을 저장하질 않아서 못받으셨으면....ㅠ.ㅠ
 

최근에 나온 책들, 그래서 대개 (사지는 못하고) 보관함에 넣어두거나 (일부) 도서관에 주문해놓는 책들을 또 몇 권 적어둔다. 눈에 띄는 신간이 그다지 없다 싶은 한 주였는데, 구내서점에서 '이거다!' 싶은 책을 발견했다(그래서 '감히' 책을 사들었다).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전기 제1권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필맥)가 그것이다. 도이처의 책이라면 이전에 한번 번역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이들도 있을 텐데, 사실이다. 이전에 두레출판사에서 <트로츠키: 한 혁명가의 생애와사상>(1985/1992)란 제목으로 나온 것이 그것. 하지만, 그 책의 역자는 신홍범이었는데, 이번에 나온 책의 역자는 언론인 김종철이다(<녹색평론>의 발행인 김종철과는 동명이인이다).

 

 



 

그렇다면, 새 번역이 나온 것인가? 그건 아니다. '옮긴이 후기'를 보면 그간의 사정이 기술돼 있다. 19년 전 초판이 나온 책의 경우 당시 해직 언론인으로서 재야단체 대변인을 맡고 있던 역자 대신에 출판사 사장의 이름으로 책이 나왔던 것. 이번에 다시 출간되면서, 비로소 본 역자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그런데, 역자의 기억대로 1985년에 초판이 나왔다면, 19년 전이 아니라 20년 전이다. 꼬박). 나는 두레에서 나온 두툼한 <트로츠키>를 기억하고는 있지만, 좀 낡고 완간이 아니어서 (안 읽은 것은 물론이고) 사두지 않았었는데, 이번엔 새로운 판형으로 원래의 역자까지도 복원한 것이 반가워서 그만 사들었다.

트로츠키에 대한 (내가 아는 한) 가장 방대한 전기를 쓴 아이작 도이처는 1907년 폴란드 태생이고, 젊은 시절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해서 트로츠키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반스탈린주의적 활동으로 인하여 1932년 당에서 제명당했다고 한다. 이후에 영국으로 망명하여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러시아 혁명가들에 대한 평전들을 집필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3권으로 이루어진 <트로츠키>이다(그의 <스탈린>(한림출판사, 1972)과 <레닌의 어린시절>(두레, 1982)도 오래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현재는 물론 절판됐지만). 이 3부작의 1권이 <무장한 예언자>(1879-1921)이고, 2권이 <비무장의 예언자>(1921-1928)이며, 3권이 <추방된 예언자>(1929-1940)이다. 1950년대에 저술된 책들이니까 이미 반세기 전의 책들이다.

 

 

 

 

비록 현실에서의 권력투쟁에서는 패배했지만,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사>(풀무질, 2001-04)에서는 물론 <스탈린>, <배반당한 혁명>(갈무리, 1995) 등을 통해서 스탈린이 자신에게 붙인 '혁명의 적'이란 타이틀을 자신의 적들에게 되돌려주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도이처의 기본적인 의도 또한 러시아 혁명의 '적통'으로서 트로츠키를 복원/복권시키고자 하는 것임은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소 편향적이라 할지라도 이 책은 그 나름의 강점을 갖고 있는데, (옮긴이에 따르면) 트로츠키 자신의 유언에 따라 1980년까지 공개가 금지돼 있던 (하버드대학의) 트로츠키 관련 자료를 이미 1950년대에 (트로츠키 부인의 특별한 배려로) 열람하고서 쓴 저작이라는 것.

레닌과 스탈린에 관해서라면, 아직도 러시아에서 많은 전기와 관련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으며, 이들 책들은 역시나 이념적으로 다소간 편향적이라 하더라도 러시아의 1차 자료에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1929년 추방되어 망명지 쿠바에서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트로츠키의 총체적인 면모를 재구성하는 일은 오히려(당연한 일이지만) 러시아 ‘바깥’에서야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러시아에서의 트로츠키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며, 주로 <러시아혁명사> 등의 저작 정도가 소개돼 있는 정도이다. 트로츠키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물론 그의 자서전 <나의 생애>(범우사, 2001)이 가장 요긴한 참고문헌이지만, 제3자의 시각에서 쓴 평전으로 가장 권위있는 저작이 바로 도이처의 <트로츠키>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번쯤 읽을 만하다.

 

 

 


'무장한/비문장의 예언자'란 제목을 도이처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가져왔는데, 책의 서두에 인용되고 있는 대목은 이렇다. "따라서 모든 무장한 예언자들은 승리했고 비무장의 예언자들은 파멸했다. 이런 점 외에도 민중의 본질은 변화무쌍함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민중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그들이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그들이 더 이상 밎지 않게 될 때는 무력에 의해 그들이 믿도록 조치를 위하는 것이 필요하다." 혁명가 트로츠키의 '부상'을 다루고 있는 <무장한 예언자 트로츠키>는 그 '승리'의 이야기이다.

참고로, 이제는 러시아에서조차도 잊혀지고 있는 1917년의 현장기록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존 리드가 쓴 <세계를 뒤흔든 10일>(두레, 1986)이다(이 책은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고, 최근까지도 책이 나오고 있다. 워렌 비티가 제작/주연한 <레즈>는 존 리드와 러시아 혁명에 관한 영화이다). 뒷이야기이지만, 스탈린은 자신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10월>(1927)은 혁명을 재구성하면서 존 리드의 책에 근거하고 있는바 원래는 트로츠키의 비중이 훨씬 높게 그려져 있었는데, 이미 20년대 후반 트로츠키 격하 분위기 때문에 그에 관한 내용이 축소되고 약간은 희화화되었다('지식인'이자 멘셰비키였던 트로츠키는 레닌의 볼셰비키 노선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몇 차례 등장한다).

그런 수정에도 불구하고 '형식적'이라는 비판을 받은 이 영화 이후에 영화감독으로서 에이젠슈테인의 운명 또한 꼬이게 되는데(그는 10년간 변변한 영화를 완성하지 못한다), 그가 다시 영화감독으로 '재기'하는 것은 스탈린 예찬이란 은밀한 메시지를 담은 애국주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1938)를 완성하면서부터이다(이 영화는 출시돼 있고, 소장품이기도 한 이 영화를 나는 작년에 모스크바에서 TV로도 한 번 더 보았다). 그가 스탈린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건 40년대에 3부작으로 계획했다가 완성 짓지 못한 <이반 대제>(1943-6)에서였다(<폭군 이반>으로 출시되었던가?). ‘전제주의 일시적 진보성’을 다룸으로써 스탈린상까지 받은 이 영화의 1부와는 다르게 그 폭력성을 건드린 2부는 스탈린 비판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에이젠슈테인의 명을 재촉했다. 자신의 영화를 공개할 수 없게 된 그는 1948년에 화병으로 사망한다.

소련 전문가로서 여러 매체에 글을 쓰기도 했던 도이처는 문학 평문들도 남기고 있는데, 가장 유명한 건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에 대한 혹평이다. 그런 평론가적 안목에 있어서 트로츠키 또한 빠지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 최고의 이론분자였던 트로츠키가 남긴 건 <문학과 혁명>인데, 이 책은 우리말로 두 종의 번역서가 있다. 물론 영역본을 옮긴 것인데(<문학과 혁명>이란 제목으로 묶인 러시아어본은 훨씬 두툼한 분량이다), 먼저 나온 <문학과 혁명>(한겨례, 1989)의 공역자 중 한 사람이 소설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내게 공지영은 트로츠키와 연관하여 떠오르는 이름의 하나이다.

 

 

 



소설가 공지영의 신간도 지난주에 나왔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봉순이 언니> 이후 7년만의 장편소설이라는데, 작년에 나온 단편집이 호평을 받았다는 것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사전지식이다. 소개된 글에 따르면, “이 소설은 강간, 살인죄로 사형수가 된 27세의 청년 정윤수와 냉소적인 30세의 대학교수 문유정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다.” 거기서 이미 내용이 짐작되는 소설이긴 하므로, 자세한 건 다른 이들의 서평을 참조해야겠다. <인간에 대한 예의>(창비사, 1994) 정도를 완독한 경험이 있는 나에게 공지영은 '감상적 계몽주의' 작가이자 ‘바른생활’ 소설을 쓰는 작가이다(그래서 마치 연기자 차인표를 보는 듯하다).

일종의 선입견일 테지만, 신간과 관련의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그녀가 작품을 쓰기 위해 여러 사람을 취재하던 중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하며, 다정한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대목에 이르면 그 선입견이 오해만은 아닌 듯하다(물론 우리는 ‘상식’도 가끔씩 깨닫곤 하지만). 해서 일단 나의 선택은 500원 더 싼 마르케스의 최신작이다. 원작이 작년 가을에 나왔다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민음사). 분량상으론 중편소설인데, 자전적이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고 한다. 솔직히 사형수보다는 창녀들의 이야기에 나는 더 끌린다.

 

 



 

 

세 번째 책은 다나 해러웨이의 대담집 <한 장의 잎사귀처럼>(갈무리)이다. 동물학자, 페미니즘 이론가, 문화비평가로서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2002)의 저자이기도 한 해러웨이는 흔히 ‘사이보그 페미니즘’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이전에 그녀의 책을 읽어본바 없지만, 좋은 입문서도 나온 김에(대담집의 역할은 그런 것이다) 한번 읽어볼 참이다. 해러웨이와 관련해서는 아이콘북스로 나온 <도나 해러웨이와 유전자 변형식품>(이제이북스, 2003)도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해러웨이의 책과 함께 꼽을 수 있는 건 <이탁오 평전>(돌베개).

 

 

 



돌발 퀴즈. <한 장의 잎사귀처럼>과 <이탁오 평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단적 사상가’? 내가 안 읽어본 책들에 대해서 넘겨짚어 말할 수는 없고, 두 책의 역자들이 이전에 한번쯤 해당 저자의 책들을 옮긴 적이 있다는 게 공통점이다. 해러웨의 책을 옮긴 민경숙 교수는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의 역자이며, <이탁오 평전>을 옮긴 홍승직 교수는 이지(이탁오)의 <분서>(홍익출판사, 1998)의 역자이다(<분서>의 다른 번역본은 한길사에서 2004년에 나왔다). 요컨대 전문 번역자의 번역 작품이라는 얘기다. 턱없는 전문가들도 없진 않지만, 하여간에 이 책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다. 남은 건 어디서 시간과 돈이 굴러 떨어지는 것이다.

 

 



 

네 번째 책은 원로비평가 유종호 교수의 <시 읽기의 방법>(삶과 꿈)이다. 잡지 <삶과 꿈>에 연재된 글들을 책으로 묶었다고 하는데, 내 기준으론 10년 전에 나온 <시란 무엇인가>(민음사, 1995)와 짝이 될 만하다. 같이 묶으면, “시란 무엇이며, 어떻게 읽는가” 정도가 될 것인바, 시를 좀 읽어보고 싶지만 자신이 없는 이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유종호의 시비평은 온건하고 상식적이지만 단단하고 단아하다(그는 정지용을 높이 평가하는 대신에 이상이나 김수영은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다). 내친 김에 말하자면, 시를 읽지 않거나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의 ‘말’들을 나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침묵하거나 행동하면 된다. 떠벌이지 말고.

 

 

 

마지막 다섯 번째 책은 내가 드물게 꼽아보는 산문집이다. 소설가 서재영의 산문집 <진다방 미스 신이 심은하보다 이쁘다>(부키). “세월을 견딘다는 것. 견뎌 내면 무엇이 있으리라는 것. 그 무엇도 알고 보면 허망하다는 것. 그러나 끝까지 가야하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답답한 마음을 털지 않고는 하루의 시작이 시원찮다는 것. 그래서 샘으로 가 찬물로 머리라도 감아야겠다는 생각의 꿈틀거림...” 같은 인용문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책의 핵심은 ‘지지부진’이고, ‘지지부진한 삶’이다.

 

 



 

문화일보의 서평에서 그 자신 시인이기도 한 배문성 기자는 이렇게 쓴다. “소설가 서재영씨의 산문집 <진다방 미스 신이...>는 전형적인 논다니 생활에세이다. 양아치 인생관이기도 하고 게으름뱅이 생활예찬이기도 하다. 에세이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인생은 어떻게 하면 읍내 은하수 다방에 새로 온 '레지'와 한 말씀 나눠보느냐와 삼성당구장에서 어떻게 하면 돈을 잃지 않고 시간을 때우느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이런 유의 에세이가 쉬 넘어가 버리는 '시골살이의 행복'을 다룬다거나 섣부른 사회성을 드러내 자학성 고지를 하지 않는다는 점도 상찬할 만하다. 저자의 내공은 자칫 제 삶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촌스러운지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돼 있다. 그 공력이 바탕이 된 속 깊은 문장을 읽는 맛도 남다르다.”

그런 촌스러움이라면 지방의 소도시에서 청춘을 보낸 나에게도 낯익은 것이다. 그건 ‘운동’과도 다르고(‘4.19’와 무관하며), ‘교양’과도 다른 어떤 것인바(‘시민정신’과도 무관하다), 그간에 나는 ‘공기’ 정도라고 이름붙이고 있었다(나는 이런 게 ‘노마디즘’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마디스트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냥 ‘논다니즘’이라고 해두겠다. 이 논다니스트들의 꿈은 가급적 일없이 어딘가에 죽치고 있으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다, 무슨 재밌는 일이 없나 쭈뼛쭈뼛 기웃거리기도 하면서), 아무튼 이 산문집의 공기는 좀 다르다. 그러니, 어찌 안 읽어볼 도리가 있겠는가?..

05.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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瑚璉 2005-04-19 14: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인사는 처음 드리는 것 같네요.
최근에 나온 책들 시리즈를 잘 보고 있습니다(물론 제가 보기에는 너무 어려운 책이 많긴 합니다만). 이탁오 평전은 저도 보관함에 넣었다 뺏다를 반복 중입니다. 이러다 언젠가 슬며시 장바구니로 가겠지요.

로쟈 2005-04-19 14:32   좋아요 0 | URL
보관함에 넣는 것 정도야.^^ 저는 보관함에 거의 500권이 묵혀 있습니다...

주니다 2005-04-19 16:26   좋아요 0 | URL
덕분에 또 보관함에 책이 늘었습니다. 대문 그림이 책 읽는 로쟈가 아니라 베이컨의 자화상인 듯 하군요. 영국 작가들의 그로테스크한 경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것 같아요. 그 동네의 자연환경 탓인지...몇년 전 EBS에서 우연히 베이컨의 작품세계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봤었는데, 대단했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베이컨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걸 분석해내는 시각도 역시.

로쟈 2005-04-19 18:19   좋아요 0 | URL
'자화상'이던가요? 제 기억에 그의 (동성애) 모델이었던 것 같은데(확인해 봐야겠군요). 저도 베이컨의 책들에 대해서는 서평을 쓴 적이 있고, 그의 그림들을 좋아합니다...

주니다 2005-04-19 23:39   좋아요 0 | URL

인상이 베이컨과 닮은 듯 해서 무심결에 '자화상'으로 짐작했었는데, 로쟈님의 말씀을 듣고 찾아보니 다행히(?)자화상이 맞는 듯 합니다. ^ ^ 3점의 연작 중 하나이군요. (이 자료가 정확하다면....ㅎㅎㅎ) 



STUDY FOR SELF-PORTRAIT - 1985

그나저나 '화가의 잔인한 손'을 들춰보다가 발견한 건데요, 책의 뒷편 날개에  '대담' 시리즈 근간으로 예고되었던 책 2권은 안나오고 말았나봐요?


로쟈 2005-04-20 10:42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베이컨의 화집을 본 지 오래돼서,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네요.^^ 이미지는 그냥 후배가 저장해놓은 게 눈에 띄길래 갖다 썼습니다. <대담> 2권은 누구에 관한 것인지 기억이 안 나는군요(그것도 베이컨?)...

바람구두 2005-04-20 14:4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드디어 다시 나오는군요. 아이작 도이처... 이왕이면 완간된다면 좋으련만...

로쟈 2005-04-20 15:13   좋아요 0 | URL
바람구두님이라면 이미 갖고 계실 듯한데.^^ 글쎄요, 완간은 당분간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

마냐 2005-04-20 17:58   좋아요 0 | URL
배부장의 뽐뿌질, 강력했죠....제목도 기이한 책.

로쟈 2005-04-20 18:06   좋아요 0 | URL
'뽐뿌질'이란 표현을 쓰는가 보군요.^^

바람구두 2005-04-21 09:31   좋아요 0 | URL
제 동생 녀석은 복사본으로 가지고 있는데... 제가 그러지말구 형 좀 주라 하면 동생은 저보고 원서를 읽고 번역하라고 놀렸었지요. 흐흐. 번역된 책이 있는데... 뭐...괜한 수고를 할 필요도, 능력도 없으므로... 기다렸답니다. 나머지도 번역된다면 좋겠네요.

2006-07-04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7-04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07-04 13:57   좋아요 0 | URL
**님/ 그건 더 큰 '생색'이 아니실는지요?^^
 

매주 연재할 의도는 아니었지만, 매주 쏟아지는 책들을 '무시'하기도 뭐해서 몇 자 적는다. 먼저, 우리 고전에 대한 얘기 몇 마디부터 하고. 양양에서 큰 산불이 났었던 지난주 식목일(화요일) 한겨레에는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기행>이 실렸는데(이 때문에 화요일에는 한겨레를 보기로 했다) 정 교수는 '조선인들의 눈에 비친 세계'를 다루면서, 이수광의 <지봉유설>, 최한기의 <지구전요>,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우리가 자랑할 만한 '책'으로 지목했다.


 

 

 

 

 

 

 

 

<지봉유설>이나 <서유견문> 정도는 한국인이라면 국사시간에 달달 그 이름을 외워둔 책들이지만, 정작 몇 명이나 읽어보았을까 의심이 가는 책들이기도 하다. 호기심에 알라딘을 검색해보았더니 <지봉유설 정선>(현대실학사, 1990)과 <서유견문>(서해문집, 2004) 등으로 번역돼 있었다. 물론 최한기의 <지구전요>는 아직 우리말 번역이 없는 듯하고, 대신에 그의 <기학>(통나무, 2004)이 작년에 (다시) 번역돼 나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이지만. 해서 우리 조상들이 쓴 ‘동서문물의 백과사전’(<지봉유설>)과 ‘개화사상의 교본’(<서유견문>)은 맘만 먹으면 읽어볼 수 있는 책들이다.


 

 

 

 

 

 

 

오늘(토요일)자 동아일보의 한 독서칼럼에서는 최한기의 <기학>이 ‘전근대’ 사회 속에서 과거와의 단절을 과감히 시도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의 문제적인 저작으로 역시 ‘탈근대’ 사회 속에서 근대화의 연속성을 읽어내고 있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현대미학사, 2004)과 같이 비교되고 있었다. 칼럼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것이지만,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란 원제를 가진 버먼의 책은 지난 1994년 엉터리 번역으로 출간됐다가 1998년에 개정본이 나오고, 작년에 다시 재개정본이 나왔다. 2004년판을 자세히 검토해보지는 않았지만, ‘페테르부르크’를 여전히 ‘페테스부르그’란 이상한 명칭으로 표기하고 있는 걸로 봐서 그다지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

 

 

 


 

버먼의 책의 한 장은 ‘저개발의 모더니즘’으로서의 19세기 페테르부르크에 할애되고 있다. 푸슈킨의 <청동기마상>과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단편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이 분석되고 있는데, 버먼은 번역과 2차 문헌만을 읽고서도 이 주제와 관련하여 최상급의 비평적 에세이를 써냈다. 하지만, 우리말 번역본에서 그 ‘최상급’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만 한다(이 경우는 상상력을 길러주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쥐어짜내게 한다). 나처럼 빈곤한 상상력의 게으른 독자로선 짜증스런 일이다.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그래도 <현대성의 경험>은 기본자세는 돼 있는 번역서이다. 독자를 만족시키지는 못하더라도 끊임없이 AS해보겠다는 자세 말이다(이전의 졸역본들을 다시 교환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하지만, ‘상상력’만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오역서들에는 그런 자세/성의가 결여돼 있다. 아마도 <현대성의 경험>만큼 ‘압박’을 덜 받아서 그런 모양이다. 가령, (정말로 믿지 못할) <믿음에 대하여>(동문선)나 (무너지기 쉬운 번역의)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인간사랑) 같은 지젝의 허다한 번역서들은 왜 개정본이 나오지 않는가? 데리다의 <불량배들>(휴머니스트)이나 부르디외의 <강의에 대한 강의>(동문선), <텔레비전에 대하여>(동문선),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 등은 무슨 생각으로 개정본을 내지 않는가? 이 문제 또한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게 빈곤한 나로서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애꿎게도 또 동문선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수아 도스가 쓴 <폴 리쾨르>. 번역서 분량으로는 890쪽이고 책값도 38,000원이나 되는 ‘숭고한’ 책이다. 거기에 견줄 만한 책은 역시 1004쪽이나 나가고 똑같이 38,000원인 <과학의 탄생>(동아시아)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 두 책이 일단 내가 손으로 꼽아두고 싶은 책이다. <구조주의의 역사>를 쓴 프랑수아 도스는 리쾨르의 제자이고, 언젠가 방한 강연시에 리쾨르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는 걸로 들은 것도 같다. 그 책이 지난 1997년에 나온 <폴 리쾨르, 삶의 의미>라는 책이고, 이번 번역서는 그걸 옮긴 것이다.


 

 

 

 

 

 

 

도스의 책들은 그간에 여러 권이 번역돼 나왔지만, 권할 만한 건 <구조주의의 역사1>이다(아날 학파를 다룬 <조각난 역사>는 내가 자세히 읽어보지 못했다). 내용이 권할 만하다는 게 아니라 번역이 그래도 제일 낫다는 의미에서. <구조주의의 역사>(2-4권)은 어느 정도 상상력을 갖춘 경우에 한에서 도전해볼 만하다. 역사가이지만 디디에 에리봉처럼 굉장히 저널리스틱하게 글을 쓰는 도스이건만 다른 번역본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읽히지 않는다. <역사 - 성찰된 시간>(동문선, 2001)은 무슨 암호문 같은 책이고, 작년에 나온 <역사철학>(동문선)은 내가 기피대상으로 꼽은 역자의 ‘작품’이어서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온 게 <폴 리쾨르>인지라 사실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역자들이 나름대로 최상의 진용이라는 것. <구조주의의 역사1>을 공역한 이봉지 교수 같은 이는 신뢰할 만한 번역자이다. 해서, 가격에 대한 부담만 떨쳐낼 수 있다면 읽어볼 만한 책이 될 것이다.

 


 

 

 

 

 

 

 

폴 리쾨르에 대한 책을 제일 처음 꼽은 것은 사실 그의 <시간과 이야기> 전3권이 완역돼 있고(<살아있는 은유>나 <프로이트와 철학> 등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책들이다) 연구서도 몇 권 나오는 등, 게오르그 가다머와 함께 현대 해석학을 양분하고 있는 그의 사상과 저작을 읽고 이해하기 위한 여건이 어느 정도 성숙돼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1913년생이지만, 아직도 ‘현역’인(2004년에도 영어와 러시아어로 그의 <기억, 역사, 망각>이 번역 출간되었다) 리쾨르는 현대사상가로서 한번 도전해볼 만한 봉우리이다.


개인적으론 <살아있는 은유>(영어본은 <은유의 규칙>)의 번역 스터디에 참여해본 적도 있어서 리쾨르가 낯설지 않고, 그에 대한 책들도 많이 갖고 있다. 지난주에는 <해석의 갈등>(아카넷, 2001)을 영어본, 러시아본(완역본은 아니고 3/4이 번역돼 있다)과 같이 펴놓고 읽어보기도 했다. <해석의 갈등>은 <악의 상징>과 마찬가지로 역자가 긴 문장들을 전부 토막을 쳐서 번역했기 때문에 읽기에는 편하지만 모호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대목들이 많다(리쾨르는 영어본도 가다머보다 읽기에 불편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용하기가 께름칙하다. <시간과 이야기>는 러시아아로도 아직 완간이 안돼 있는데(3권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우리말로는 읽어볼 만한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도스의 <폴 리쾨르>가 출간된 것. 그래서 의미가 있다(재정상 도서관에나 주문해놓았기 때문에 최소한 한달쯤 후에나 나는 책을 손에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꼽은 <과학의 탄생>은 여러 신문에서 크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다. 내용의 방대함 못지않게 저자인 야마모토 요시타카의 특이한 이력이 흥미로운데, (1)동경대 물리학과의 수재였다가 (2)1960년대 학생운동 당시 ‘전공투’(우리의 ‘전대협’쯤 되는 건가?) 의장이었고, (3)이후엔 입시학원 물리강사. 무려 20년간 준비해서 63살에 완성한 책이라고 한다. (연봉이 수십억에 이르는 입시학원 강사들도 여럿 된다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책을 써줄 만한 입시학원 강사가 없는 건지?(대학 교수들은 ‘문제의식’이 다른지라 이런 종류의 책을 쓸 리 만무하고.)


 

 

 

 

 

 

 

세 번째 책은 중국의 신좌파 지식인 왕후이의 <죽은 불 다시 살아나>(삼인). 이미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창비, 2003)로 소개된바 있는데,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아시아 지식인들이 어떤 문제틀을 갖고 사고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듯하다.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에는 저자의 자전적 (학문)편력과 대담이 수록돼 있으므로 아마도 그 책부터 읽어보는 것이 순서에 맞을 듯도 하다. 창비에서 나오는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는 단발로 끝나고 아직 후속타가 없는데, 좋은 기획인 만큼 계속 이어졌으면 싶다. 이와 보조를 맞출 만한 것이 민음사에서 나오는 ‘현대의 일본지성’ 시리즈인데, 그 외에는 더 많은 기획들이 선보여서 미래 ‘동아시아’ 연대를 위한 사상적 교류의 물꼬를 트고 동시에 공통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네 번째 책은 문학비평가 서영채의 신작 <문학의 윤리>(문학동네)이다. <소설의 운명>(문학동네, 1995) 이후에 10년 만에 낸 비평집인데, 4년 터울로 책을 냈던 김현이나 매년 책을 내고 있는 김윤식 등에 비하면 젊은 비평가들의 ‘게으름’이 (내용도 없는 가운데) 상당하지만, 황종연과 함께 ‘문학권력’ 문학동네의 대표적인 비평가로서 서영채는 주목할 만하다(1991년에 <비루한 것의 카니발>을 낸 황종연은 15년 주기로 책을 낼 모양이다(*착오이다. 황종연의 비평집은 2001년에 나왔으며, 내년쯤 책이 보태지면 5년 주기가 된다). 비평가들에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저마다의 주기가 있다). ‘권력’에 관해서가 아니라 ‘문학’에 관해서. 그리고 그의 단정한 문장에 관해서. 내가 특별히 그의 글을 많이 읽은 거 같지는 않지만,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 그는 문제를 깊이 다루되 ‘오버’하지 않았다. 그의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미덕은 그가 낸 책들의 제목에서도 확인된다. <소설의 운명>에서 (이광수, 염상섭, 이상 연구서인) <사랑의 문법>과 <문학의 윤리>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자수율과 단어결합 패턴을 자랑한다(비평서의 제목으로 가장 애호되는 ‘○○과 ○○’도 아니고). 조금 오버해서 말하자면, 그는 문학에서건 생활에서건 ‘바람’을 피울 만한 위인은 아닌 듯싶다.


지난주에 미국의 노벨상 수상 작가이자 포크너와 함께 ‘20세기의 두 작가’로도 꼽히는 솔 벨로가 세상을 뜬바, 그의 책들을 검색해 보았더니, 달랑 <클라라의 반지>(한국학술정보, 2004) 정도만 구할 수 있는 책으로 뜬다. 거기에 그에 관한 연구서만 서너 권(작품도 없는 연구서라는 건 얼마나 생뚱 맞는가!). 통계상 국내에서 출판되는 책들의 대략 30% 정도가 번역서라고 하는데(지난주 한국일보 기사처럼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한국의 지식생산능력이 전세계의 몇 %나 되기에 고작 30%의 출간률이 부끄럽다는 말인가? 문제는 번역의 양이 아니라 질이다. 번역될 만한 책들이 양질로 번역된다면 그 비율은 60%가 되어도 무방하다), 뒤져보면 없는 책들이 태반이다.


 

 

 

 

 

 

 

 

 

다섯 번째 책은 하는 수없이 안데르센의 <즉흥시인>(웅진닷컴)을 꼽는다. ‘하는 수없이’라는 건 이 작품이 고전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해서 내가 잘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은 건 그저 그의 동화들뿐이었기 때문에. 1835년작인 <즉흥시인>은 동화가 아니라 소설이다. 시대상황으로 봐서는 낭만주의 소설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올해가 안데르센(1805-1875) 탄생 20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한 만큼 한번 읽어보는 기회를 가질 만하다. 게다가 역자는 전문번역가인 김석희씨이다. 믿고 추천할 만하다. 580쪽에 18,000원. 물론 이 책을 손에 집어든다면, <안데르센 자서전>(휴먼&북스, 2003)도 함께 참조하는 게 좋겠다. 언젠가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다...


05. 04.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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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무 때문에 토요일 오전부터 학교에 나왔다. 귀국 이후엔 처음이다. 조용할 줄 알았는데, 점심을 먹고 나니까 여기저기서 북적거린다(대개 나와 같은 종류의 용무이다). 한 편의 프로그램성 글을 작성하는 것이 오늘의 할일인데, 아직 동료들의 글이 도착하지 않은 걸 핑계로 잠시 쉬고 있다. 이 잡는 기분으로 몇 자 적는다. 오는 길에 두 종의 토요일자 신문에서 북리뷰도 읽은 티를 낼 겸.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가 출간예정이라는 건 지난번 글에서 언급한바 있는데, 책은 지난주에 서점에 깔렸고 나는 어제 출판사측으로부터 책을 건네받았다. 옮긴이 서문에 내 이름이 언급돼 있는데, 러시아어 인명과 작품명을 교정한 인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연은 전적으로 우연에 기인한다. 모스크바에서 <발터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읽던 중 우연히 역자가 운영하는 벤야민 카페에 '모스크바 일기'가 번역/소개돼 있다는 내용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알게 되었던 것. 카페에 올라와 있던 초역에는 러시아어 인명/지명 등이 잘못 표기돼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통신문을 통해 지적한바 있는데, 눈 밝은 출판사측에서 연락을 취해 왔다. 귀국 준비 때문에 별로 경황이 없었지만, 나는 보내준 '일기' 원고파일의 절반 가량을 훑어보고 귀국했다.

 

교정은 흔쾌히 맡기로 했지만, 귀국 이후에 이런저런 잡일과 병치레로 맡은 일을 만족할 만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이 없지 않았지만, 책이 현재의 깔끔한 모양새로 나온 것은 출판사측의 '전문가적' 편집/교정 덕분이다. (아마도 문교부의 '외래어 표기안'대로) 러시아어의 무성음화를 우리말 표기에 반영한 것 정도가 나로선 약간 낯설게 느껴지는데('메이에르홀드(Meyerhold)'를 '메이에르홀트'로 표기하는 식), 그러한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헷갈릴 건 없다고 본다. 61쪽에서 펠트로 만든 장화 '발란키스'도 내가 갖고 있는 영어본(1986년)과 러시아어본(1997년)에는 '발렌키'로 돼 있는데, 이게 선택적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책 표지에도 사진으로 들어가 있는 '바실리' 성당을 '바실리우스' 성당이라고 (라틴식으로) 표기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경우는 러시아쪽 표기를 살려주는 게 낫지 않나 싶다(물론 우리말 표기가 러시아쪽 표기를 전적으로 존중하는 건 아니다. 예컨대, 러시아어 '시비리'는 우리말로 '시베리아'라고 표기된다. 이미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고치지 않는 것).

 

잘 읽히는 책이지만, 가끔 미심쩍다고 생각되는 대목들이 없지는 않은바, 내가 읽은 범위내에서 두어 가지를 지적한다(나는 오는 길에 63쪽까지 읽었다). 37쪽에서, 독일과 러시아 신문 기사의 차이를 지적하고 있는 대목인데, "500-600줄 사이의 기사들은 예외없이 그렇다"는 "여기서는(=러시아에서는) 500-600줄 짜리 기사가 드물지 않다"란 내용이다. 독일 신문들은 짤막하게 '결론'을 제시하지만, 러시아 신문들은 자료를 폭넓게 제시한다는 것(이건 요즘도 그런 편이다). 60쪽에서, 구걸을 다루고 있는 대목인데, "거리 구석구석, 특히 외국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있는 구역"은 "거리 곳곳에, 특히 외국인들의 비즈니스 구역" 정도의 뜻이지 않을까 싶다. 외국인(사업가들)이 적선에 더 관대하기 때문에 걸인들이 더 모인다는 내용일 테니까. 좌판을 벌인다는 건, (비유적 의미에서가 아니라면) 우리의 경우 노점상을 뜻하는데, 1926년에 외국인들이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노점상을 할 일은 없어 보인다.

 

61쪽의 '어린 노숙자' 사진은 영어본에 따르면, 지가 베르토프의 뉴스필름에서 따온 것이다(주석의 경우 영어본이 더 자세한 경우가 많았다). 이 사진은 물론(!) 러시아어본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62쪽,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비실제적 환상"에서 '환상'은 영어나 러시아어본에서모두 복수형이고 fantasies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판타지'이다('환상'은 단수형으로만 쓴다). 문맥상 '환상'과는 약간 다른 의미여야 할 듯하다. 그리고 63쪽, 불가코프의 <투르빈가의 나날들> 공연을 보러완 청중(=관객)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대목인데, "여기엔 코뮤니스트들은 거의 하나도 없었고 검정 혹은 푸른 색 블라우스도 눈에 띄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흔히 여성용 옷을 지칭하는 '블라우스'는 남성용 잠바나 제복 정도로 바뀌어야 할 듯싶다. 영어본은 tunic이라고 옮기고 있고, 러시아어로는 '블루즈'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블루즈'는 여성용 블라우스와 함께 남성용 잠바도 뜻한다. 내 생각에 검정 잠바, 파란 잠바는 밀리찌야(경찰) 등을 가리키는 환유가 아닌가 싶다...

 

 

 

 

 

 

 

 

 

 

그건 그렇고, 책 얘기나 (시간관계상) 얼른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소설 <바람의 그림자>(문학과지성사)이다. 북리뷰란들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 작품이므로 별다른 얘기를 덧붙이지 않겠다. 우리에게 처음 소개되는 작가 사폰은 스페인 출신으로 그의 이 작품은 20개국의 언어로 번역된 대형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도대체 스페인 사람들은 무슨 소설을 읽는가라는 주변적인 관심만 가지고도 읽어볼 만하다고 본다. 대중적 평가뿐만 아니라 문학성에 있어서도 여러 사람이 보증을 서고 있는 작품. 문학과지성사가 파스칼 키냐르에 이어서 새롭게 내세우는 '간판'이 아닌가 싶은데, 한국 작가들의 소설만 가지고는 더이상 '영업'이 안된다는 인식이 이런 소설들의 번역출판에는 전제돼 있다. 그래서 '추리소설 결정판'(문화일보)라는 평에도 불구하고 뒷맛이 달지만은 않다.

 

 

 

 

 

 

 

 

 

두번째는 역사서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사계절). 이 또한 한겨레에서 크게 다루고 있으므로 군말을 덧붙이지 않겠다. 이 책의 원제는 <칭키스 칸과 근대 세계의 형성>인데, 제목이 말해주는 바대로, 칭기스 칸의 '보편적' 제국건설이 '근대 세계'를 만들어냈다는 것. 그러니까 '그리스=세계'나 '중국=세계'의 레벨이 아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세계'라는 건 세계사의 이 유일무이한 주역이 이루어놓은 결과이다. 더불어, 그의 몽고 제국은 '러시아'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몽고(타타르)에 대한 항전과 대타의식에서 루시(러시아의 고어명)의 정체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방면의 역사서가 드문 상황이기에 특별히 이 자리에 이 책을 올려놓는다. 저자인 잭 웨더포드는 인류학자로서 <돈의 역사와 비밀 그 은밀한 유혹>(원제는 '화폐의 역사', 청양, 2001)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인류학도 상당히 박식한 학문, 박식을 요구하는 학문이다.

 

 

 

 

 

 

 

 

 

 

세번째 책은 역사학에 관한 책으로 <굿바이 E. H. 카>(푸른역사)이다. 책은 1961년에 나온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40주년(2001년) 기념심포지엄의 발표논문들을 모은 것이다(한겨레의 고명섭 기자는 이 책이 1982년에 죽은 카의 20주기를 맞이하여 개최된 심포의 산물이라고 적는데, 착오인 듯싶다. 땡겨서 하지 않는 한, 20주기는 2002년이어야 하므로.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1962년에 나온 걸로 적고 있다). 대학가의 필독서였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란 정의로 잘 알려져 있는 책이고, 국내에 그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준비하던(카는 서문만을 써넣고 죽었다) 2판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1997)도 번역돼 있다.

 

 

 

 

 

 

 

 

 

 

40년, 강산도 여러 번 바뀔 만한 세월인 만큼 당연히 역사학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을 법하다. 책은 그러한 지형의 변화를 일람해 보는 데 요긴할 듯하다. 그간에 특히 강세를 보이고 있는 건 문화사, 미시사인데, 이번 주 한겨레의 '아깝다! 이 책'란에는대표적인 미시사학자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길, 2004)가 다시 소개되고 있다. 출판사로선 열과 성을 다해서 만든 책인데, 생각만큼 안 나가고 있다는 것. 지난주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의 경우도 그렇지만, 이렇게 나온 책들은 독자들이 좀 사줘야 한다. 독자가 좋은 책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책들도 좋은 독자들을 외면하고 돈맛이나 챙기기 마련이기에. 언젠가 모스크바 통신에서 언급한 듯한데, 작년에 러시아에서 나온 긴즈부르그 선집은 역사분야 베스트(2권)의 하나였다. 참고로,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타의식에서 씌어진 책이 케이스 젠킨스의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혜안, 1999)이다. 원제는 'Rethinking history'.

 

 

 

 

 

 

 

 

 

네번째 책은 김용준 고대 명예교수의 <과학과 종교 사이>(돌베게). 화학 전공의 과학자로서 그리고 모태신앙을 가진 종교인으로서 자신의 40년 학문적 삶 혹은 여정을 총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과학인 김용준의 연구노트'라는 부제를 갖고 있으며, 계간 <과학사상>에 10년간 연재한 것을 모은 것이다. 나는 부분적으로 읽어본 기억이 있는데, 그의 종교 정향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는 있지만,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여정에는 배울 만한 대목이 많다. 일독해볼 만한 책.

 

 

 

 

 

 

 

 

 

이 책은 한겨레와 동아일보 서평에서 모두 크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동아일보의 시작은 이렇다: "1900년 태생으로 말년까지도 논문을 발표하다 2002년 별세한 가다머를 생각하면 나는 저절로 숙연해진다. 그를 한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환갑노인이 되도록 무명의 학자로 칩거해 있다가 나이 60에 '진리와 방법'이라는 불후의 명저를 내놓음으로써 일약 세계적인 학자로 군림한 그 신실함은 내게 너무나도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해서 불현듯 가다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는데, 사실 어제는 러시아에서 온 책들 가운데 <진리와 방법>을 찾아내기도 했다. 500루블(2만원) 주고 산 책. 영어본 <진리와 방법>의 경우 개역본까지 몇 년전에 나왔건만 한국어본은 1/3 정도만 나온 채 소식이 없다. 이런 게 한국의 학문과 교양의 평균적 수준이 난장이 수준에서 계속 머물러 있는 그럴 듯한 이유이다.

 

딱히 더 꼽고 싶은 책이 없어서 다섯번째 책은 근간으로 나올 책을 기록해둔다. 도서관에 책을 주문하기 위해서 아마존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건데, 지젝 선집 과 그의 또다른 책 이 올해 안에 나오는 것으로 예고돼 있다. 출판사는 Verso가 아니라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이며, 두 권 모두 350쪽 안팎의 두툼한 분량이다. 짐작컨대, 아무도 그보다 더 많이 쓸 수는 없다! 지젝-오타쿠들의 걸음이 더 빨라져야겠다...

 

05. 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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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다 2005-04-06 15:27   좋아요 0 | URL
옮긴이 서문에 언급된 이름은....'로쟈'더군요.
로쟈가 박노자의 다른 필명이라....ㅎㅎㅎ, 귀여운 상상력
올해 안에 로쟈님의 전공관련 연구서적이 출간될건가요?

로쟈 2005-04-06 16:32   좋아요 0 | URL
어떻게 아셨나요?! 아마도 학위논문이 출간될 듯한데, 워낙에 소량을 찍는 거라 구경하시기는 힘들 듯합니다.^^

주니다 2005-04-07 17:23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페이퍼에 힌트가 있었던거죠 뭐.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나저나 그 책이 시중에 깔리는게 아닌가봐요? 섭섭하네요.
어디가면 구경이라도 할 수 있을까요? 하핫
 

지난 토요일자 한겨레 '책과사람'란에서 가장 크게 다루어진 것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가 100권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부터 구춘권의 <메가테러리즘과 미국의 세계질서전쟁>까지이고 만 5년만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1년에 대략 20권씩의 책을 낸 셈인데, 그간에 국내 출판계를 대표하는 문고본으로 성장했고, 뒤이은 문고본들의 모델이 돼 주었으니 치하할 만한 일이다(물론 문학과지성의 스펙트럼문고가 있었지만, 국내 필자들만의 '인문서'로 채워진 것은 책세상문고만의 덕목이다). 100권 통틀어 65만부가 나갔다고 하니까 권당 평균으로 치자면 6,500부가 나간 셈이고 이건 다른 출판사들이 부러워할 만한 성적이다. 대개 2쇄까지는 찍었다는 얘기니까(본전은 뽑았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시리즈의 책을 10권쯤 읽은 거 같은데,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정치와 진리> 등이 기억에 남는 책들이다.

 

 

 

 

 

2003년도부터 나오기 시작한 책세상문고 '세계문학'은 '우리시대'의 기획이 성공한 덕분에 꾸려지게 된 것인데, 이 시리즈의 최신간은 러시아 작가 불가코프의 희곡 <조야의 아파트/질주>이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작가로 잘 알려진 불가코프는 비록 작가로서 불운한 생애를 보내긴 했지만, 러시아 20세기의 최대 작가 중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최대 극작가이다. 20세기 작가들 중에서 그는 아마도 가장 자주 공연되는 작가일 것이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백위군>(<투르빈가의 나날들>이 각색본인데, <백위군>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더 자주 오른다)과 이번에 번역된 두 작품 등이며, <질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국내에도 출시돼 있다). 

 

 

 

 

불가코프의 다른 드라마로는 몰리에르의 생애를 다룬 <위선자들의 밀교>(연극과인간, 2001)가 같은 역자에 이해 번역/소개된바 있으며, 장편 <백위군>(열린책들, 1996), 중편집 <개의 심장>(열린책들, 1998), <비운의 달걀>(1999, 대구효성카톨린대출판부) 등이 번역돼 있다. 그의 중편들은 대부분 풍자소설에 속하며, <백위군>은 내전기를 다룬 작품. 그리고 그의 걸작 <거장과 마르가리타>은 한길사에서 출간된바 있지만, 절판되었고 현재 다른 역자에 의해서 번역이 준비되고 있는 걸로 안다(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현재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대략 이 정도 규모이면 20세기 러시아에서 수위를 다툴 만한 작가의 전모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을 듯싶다.

불가코프의 <조야의 아파트>를 제일 먼저 꼽은 것은 책세상문고를 기념하고 작가의 지명도를 고려해서이지만, 한편으론 안면이 있는 역자에게서 책을 선사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나름대로 홍보도 해줄 필요가 있는 것. 하지만, 이런 경우는 지극히 드물어서 나는 대부분의 책들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한다.  그건 '악마적인' 차이이다. 증정받은 책들에 대해선 오타나 오역 등에 구애받지 않지만, 내 돈 주고 산 책들에 대해서 나는 엄격하다. 그 책들에는 나의 땀과 수난과 눈물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강 얼버무리면서 넘어갈 일은 아닌 것이다.

 

 

 

 

두번째로 꼽을 책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숲)이고, 천병희 교수의 번역이다. 1만 1995행이라는 데 우리말 최초의 완역본이다. <변신이야기>는 이전에 솔출판사(김명복 역, 1993)와 민음사(이윤기 역, 1994/1998) 본이 나와 있지만, 모두 중역본이며 고대 라틴어에서 옮긴 것으로는 이 책이 처음이다. <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라고 장황한 제목이 붙은 것은 그러한 사정을 드러내주기 위함일 것이다. 물론 중역이더라도 내용이 정확하고 문체가 유려하다면 굳이 원전 번역이 강조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않아서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민음 세계문학전집의 간판으로 나온 이윤기본만 하더라도 상당히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강대진의 지적인데, 어느 잡지에 실린 비평문이 그의 서평집 <잔혹한 책읽기>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원전 번역이 강조되는 건 그 때문이다.

천 교수는 그리스와 라틴 고전문학 번역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데, 조만간 키케로의 책이 후속작으로 출간될 거라고 한다. 한편 천교수가 번역한 그리스 고전들은 단국대출판부에서 나오고 있는데, 그 책들의 북디자인은 좀 수준 이하다(덕분에 나는 한권의 책도 안 사고 있다). 공들여 번역한 작품들이 허름한 모양새로 나오는 건 좀 무성의하게 보인다. 겉멋만 든 책들보다야 양반이긴 하지만, 좀 때깔이 있는 책들로 다시 나왔으면 싶다.

 

 

 

 

때깔로만 치자면 동문선의 책들도 빠지진 않을 것이다. 내가 비교적 혐오하는 출판사이지만, 전공과 관심 때문에 자주 신간들을 둘러보게 되는 것도 이 출판사의 책들이다. 동문선의 최신간은 주디스 버틀러의 <안티고네의 주장>이다. 버틀러는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y Matters)>(인간사랑, 2003)가 소개된바 있는데, 페미니즘 이론과 퀴어이론의 새로운 강자로서 주목받고 있는 여성 이론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은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이란 부제를 단 <젠더 트러불>이고, <권력의 심리적 삶>, <흥분하기 쉬운 발화> 등의 저서들을 연이어 냈다. 나는 버틀러의 책(복사본)을 여러 권 갖고 있는데, 그건 영문학과 페미니즘쪽에서 주목받는 이론가로 부상함에 따라 그녀의 책 대부분이 저렴한 마스터본으로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안티고네의 주장>(2000)은 그 시절에 따로 복사해두었던 책인데, 원서는 103쪽 분량의 얇은 책이다(번역서는 138쪽).

 

 

 

 

아무리 중요한 이론가라 하더라도 (대개의 동문선의 책들이 그런 것처럼) 번역을 신뢰할 수 없으면 나오나 마다한 책들인데(귀국 이후에 내가 읽은 최악은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동문선)였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책. <문학생산이론을 위하여>(백의)와 쌍벽을 이룬다) 다행히도 신간의 경우에는 버틀러 전공자가 번역을 맡았고 (드문 일이지만) 38쪽의 역자 해설까지 덧붙였다. 그러니 다소간 비싼 책이더라도 엉터리는 아닐 것이다.

 

 

 

 

버틀러와 관련해서 읽어볼 만한 논문은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에 실린 콥젝의 "성과 이성의 안락사"이다. 콥젝은 <젠더 트러블>에서 개진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버틀러식의 해체에 동의하면서도 성의 문제가 순전히 가변적/수행적인 것이라는 버틀러의 주장에 대해서는 칸트와 라캉을 경유하여 반박한다. 그리고 이러한 기조는 지젝에게서도 이어지는데, 곧 출간예정인 <까다로운 주체>(도서출판b)의 한 장을 지젝은 버틀러에 대한 비판에 할애하고 있기도 하다. 콥젝의 논문은 <나의 욕망을 읽어봐>에 실려 있는데, 그녀의 또 다른 책 <여자가 없다고 상상해봐>는 근간 예정이다.

 

 

 

 

세번째 책은 페루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리고베르토씨의 비밀노트>(새물결, 2004)이다.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내가 서점에서 책을 본 게 최근이다. 요사의 책으론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문학동네, 2002)와 <세상종말전쟁>(새물결, 2003) 등이 최근에 나온 작품들이다. 나는 전자를 좀 읽어보았을 뿐이지만, 요사는 남미 3대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는 '이야기꾼'이다. '요사의 모든 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 나오는 족족 읽어볼 일. 약간 유감스러운 건 책이 두 권을 분권돼 나왔다는 점. 출판사로선 그게 여러 모로 편하고 이익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꺼운 책을 선호하는 나로선 불만스럽다. 분량으로 봐선 한권으로 묶여도 됐을 만한 책이다.  

                             

 

 

 

 

네번째 책은 <E=mc2>(생각의나무)이란 베스트셀러를 썼던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신간 <일렉트릭 유니버스>(생각의나무)이다. 제목 그대로 전기에 관한 것인데, "전화, 라디오, 레이더, 컴퓨터, 심지어 비아그라까지, 전기력의 힘을 빌어 탄생한 물건과 그들의 역사를 담았다"고. 이런 교양과학서를 읽은 지가 이젠 꽤 되는 것 같다. 휴식 같은 시간들이 내겐 없었던 셈. 에드 레지스의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지호)도 읽어볼 만한 책인데, 나는 이전에 <아인슈타인 방의 사람들>(웅진닷컴, 1993)이란 제목의 번역본으로 읽었다. 프린스턴고등학술연구원 사람들의 '프렌즈' 같은 이야기들. 옛날엔 이런 책들을 읽을 시간이 있었는데...

 

 

 

 

끝으로 벤야민 관련 신간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수잔 벅 모스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유사하게 파사주 프로젝트에 대한 해설서인 듯. 382쪽으로 돼 있지만, 번역서의 여백이 상당히 헐렁해서 원서는 300쪽이 안될 것 같다. 이런 식의 두툼한 책은 낭비적이며 책값도 비싸게 매겨진다는 점에서 전혀 반갑지 않다. 얄팍하게 책장사를 하려는 궁리들은 자제해주었으면 좋겠다. 벤야민의 또다른 책으로 <모스크바 일기>(그린비)가 이번주에 출간된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참견하기도 한 책이어서 기대가 된다...

05. 03. 28.

P.S. 다음에는 그간에 나온 영화관련 책들에서 읽고 싶은 것들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P.S.2. 한권만 더. 레비스트로스의 예술론이라고 할 <보다 듣다 읽다>(이매진)이 출간됐다. 원저는 1993년에 나왔고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푸생, 뒤샹, 모네, 들라크루아, 보티첼리를 보고, 라모, 바그너, 베토벤, 로시니를 듣고, 디드로, 랭보, 보들레르를 새롭게 읽어낸다."고 소개되고 있다(레비스트로스는 서양 고전음악의 애호가로서 그에 대한 자부심도 피력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지난 1994년에 <레비스트로스의 미학에세이>(동아출판사)로 나왔던 책이다. 역자는 물론 다르다. 나는 이전에 나온 걸 갖고는 있지만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서 그다지 좋은 번역도 아니었던 듯싶다. '헌 책'이지만 '새 푸대'에 담으면 좀 나아지는 게 있을지도...

05. 0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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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8 16:42   좋아요 0 | URL
앗, 오늘 한겨레에서 다뤄주었군요. 책세상 문고... 기특한 시리즈지요?

로쟈 2005-03-29 13:14   좋아요 0 | URL
'오늘'이 아니라 '지난 토요일'입니다.^^ 바람구두님도 애독하시는 것 같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