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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부터 아침을 거르고 강의를 마치고 나면, 모처럼(?) 한가하다. 오전부터 당장에 (업무 같은) 공부를 하기엔 뭔가 밑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이럴 땐 이런 거'라는 식으로 책 얘기를 몇 자 적는다. 내가 휴식 혹은 여가를 사용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최근에 나온 책들'이라고 연재의 제목을 달기는 했지만, 내용은 '최근에 눈에 띈 책들'이라고 해야겠다. 이젠 제법 '당신이 없는 사이에' 나온 책들에 대해서 개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쑥불쑥 눈에 띄는 책들이 없지 않다. 미국철학자 A. 매킨타이어의 <윤리의 역사, 도덕의 이론>(2004) 같은 게 그렇다.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원제는 'A Short History of Ethics'이고, 1966년 1판에 이어서 1998년에 2판이 나왔다. 기억에 매킨타이어는 찰스 테일러, 마이클 왈쩌와 함께 존 롤즈의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공동체주의 3총사의 한 사람이다.

테일러와 왈쩌는 모두 국내 학술강연에 초빙된바 있지만(각각 <세속화와 현대문명>, <자유주의를 넘어서>라는 강연집을 남겼고, 왈쩌의 경우 작년에 <관용에 대하여>도 번역 출간됐다), 매킨타이어는 상대적으로 관심밖에 놓여 있었던 듯하다. 물론 그의 주저인 <덕 이후After Virtue>가 <미덕의 상실>(문예출판사, 1997)이란 제목으로 진작에 소개된바 있지만, (역시나 번역에 대해서는 불만들이 많고)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으로도 <마르쿠제>(지성의 샘, 1994)라는 짤막한 책을 통해서 매킨타이어와 처음 접해보았지만, 그다지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윤리학에 대한 그의 구도와 아이디어에는 흥미를 놓지 않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주저들을 제본해서 갖고 있다. 란 논문집을 포함해서) 이번에/작년에 나온 그의 또다른 '주저'는 그러한 흥미를 충족시켜줄 만하다.

전체 18장으로 이루어진 책에서 7장까지가 그리스의 윤리학에 할애된 걸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매킨타이어의 주된 관심(이면서 전공분야)은 그리스 고전학 쪽이다(학부시절 그의 전공이기도 하다). 즉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윤리학에 대해서 우리가 참조해볼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저자이다. 게다가 역자도 서문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 책은 서양윤리학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입문서의 하나이다(그러니 좀 읽어줄 필요가 있다). 한가지 흠이라면, 국역본이 98년의 2판이 아닌 66년의 1판을 번역한 책이라는 점. 물론 2판의 서문이 번역돼 있긴 하지만, 본문에서는 1판의 쪽수들이 기재돼 있는바, 2판의 수정/증보된 내용이 (혹 있다면) 반영된 것 같지 않다.

원저의 제목에 Short란 말이 들어가 있지만, 본래 책은 280쪽 정도의 컴팩트한 분량이다. 하지만, (부록이 좀 들어갔다고는 해도) 국역본의 분량은 480쪽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이 번역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번역서들의 경우 원서보다 보통 150% 정도로 분량이 불어나는 게 예사인데, 나는 이것이 좀 낭비적이라고 생각한다. 활자를 키우거나 행간 등에 여유를 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배려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책은 더 두툼해지고 책값은 더 비싸게 매겨진다. 나는 두툼한 책을 선호하긴 하지만, 큼직한 글씨들은 왠지 부담스럽다.

 

 

 

 

두번째로 눈에 띈 책은 <속도와 정치>로 우리에겐 잘 알려진 폴 비릴리오의 <소멸의 미학>(연대출판부, 2004)이다. 이 책 역시 작년 여름에 나온 걸로 돼 있다. 원저는 'The aesthetics of disappearance'(1991)이고, 내 기억엔 언젠가 복사해 두었던 책이다. 그의 책으론 (1994)과 <정보과학의 폭탄>(울력, 2002)의 러시아어본도 나는 갖고 있다. '지각의 병참학' 같은 용어를 화두로 들고 나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철학자'를 나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그와 자주 비교되는 보드리야르와 마찬가지로 뭔가 계발적인 면모를 그에게서 본다(보드리야르의 번역자가 비릴리오 또한 처음 소개한 건 우연이 아니다. 동시에 유감스럽기도 하지만. <유혹에 대하여> 같은 번역서를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 혹은 다른 용어/개념으로 사고한다는 것, 우리가 일단 배워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다. 비릴리오의 책으론 <전쟁과 영화>(한나래)도 작년에 출간됐지만, 그다지 미덥지 않은 번역이란 평이다.

 

 

 

 


세번째 책은 미국작가 도널드 바셀미의 <백설공주>(책세상, 2004). 이 책은 작년 12월에 나왔고, 내가 귀국해서 지젝의 <진짜 눈물의 공포>(울력, 2004), 그리고 마야코프스키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책세상, 2005)와 함께 가장 먼저 산 책이기도 하다. 바셀미란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절에 자주 들어보던 이름이지만, 그의 저작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안다. 알라딘의 소개를 빌자면, <백설공주>는 "'미국의 보르헤스'로 평가받는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 바셀미의 장편소설"로서 "제목 그대로 익숙한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 공주'를 패러디한 내용"이다.

작가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패러디 동화들처럼, 고전 동화 속의 남성중심주의를 찾아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고쳐 쓰는 작업을 시도하며, 동시에 소설의 배경을 20세기 미국 사회로 설정함으로써 소비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의 홍수에 떠밀려 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풍자하고 있다." 그러니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제안을 건네는 나는 아직 이 책을 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지만. 유독 바셀미에 눈길이 간 것은 모스크바에서도 이 책의 러시아어본을 구경했기 때문이다. 사두진 않았지만(영어권 작가들의 경우는 샐린저나 포크너 등의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러시아어 작품집을 사지 않았다).


 

 

 

네번째 책 역시 모스크바의 기억과 연관된다. '현대예술의 거장' 시리즈로 나온, 패션누드의 사진작가 핼무트 뉴튼의 자서전 <핼무트 뉴튼Helmut Newton>(을유문화사, 2004)이 그것이다. 작년 11월에 나온 걸로 돼 있는데, 역시나 러시아어본도 작년 가을에 나왔으며 나는 서점에서 구경한 한국어본보다 훨씬 근사한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다(가격은 60% 정도). 나는 사진작가들의 책을 별로 갖고 있지 않지만(가령 <듀안 마이클>(열화당, 1986) 같은 게 예외적이다), 또 사진찍기에도 별 취미가 없지만(나는 모스크바에서 단 한장의 사진도 찍지 않았다, 결과적이긴 하지만), 가끔은 이런 책을 쓰다듬는다. 하긴 누드사진도 꽤 여러장 들어 있긴 하다. 그러니 부실한 번역서들을 읽느라고 눈이 침침할 때쯤이면 한번씩 들여다봄 직하지 않은가?

 

 

 

 

다섯번째 책은 진짜 신간이다. 지난주에 나온 책으로, 헝가리의 200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완결편 <청산>(다른 우리)가 그것이다. 케르테스의 작품인 만큼 또 '아유슈비츠' 얘기이다. 나는 그의 책을 아직 읽은 바 없지만, 이 책을 꼽은 것은 '역시나' 모스크바에서의 기억 때문이다. 류뱐카 역 근처의 <오기>라는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띄어 산 책 중의 하나가 케르테스의 에세이집이었던 것(거기에는 그의 수상 기념연설문도 실려 있다). 샛노란책의 문고본이었는데, 주로 헝가리 비평가, 철학자들의 책 몇 권 중 하나였다... 그런 책들이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조만간 올 거라는 얘기는 듣고 있지만, 모스크바에서 서울로의 여정은 그리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P.S. '회사원/철학자' 강유원의 <책과 세계>(살림, 2004)를 읽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만큼 필명을 날리고 있는 저자에게는 고유한 문체가 있고, 그걸 곱씹게 만드는 질긴 사유가 있다(<책과 세계>는 최근에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시'에 근접한다. 오늘날 시는 시집이 아니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그런 문체와 사유를 길잡이 삼아,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종의 기원>에 이르는, '쓸쓸한 세계'에서 '쓰라린 세계'에 이르는 여정을 독자에게 안내한다. 그가 이전에 쓴 <서양문명의 기반>(미토, 2003)의 축약판이라고 하는데(그 책을 나는 샀는지 안 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만하면 어지간한 '문명론'이다(그런 길의 끝에 자크 아탈리 같은 이가 있는 건지, 아놀드 토인비 같은 이가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로크의 '자연권'이나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었다는 게 이 책을 읽은 성과이지만, 내가 음미하는 건 주로 그의 근육질 문체인바, 그의 문체는 마치 날씬하면서도 잘 단련된 근육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전해준다. 마치 김훈의 글을 읽을 때처럼. 한데, 다른 자리에서 강유원은 '자칭 보수' 김훈을 매우 신랄하게 조롱하고 비판한바 있다. 하지만,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 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3쪽)라는 글의 시작이나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91쪽)라는 마무리에서 나는 적어도 그 정조에 있어서 김훈과의 차별성을 찾지 못하겠다. 저자가 이 책에서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도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 아닌가?

그래서 내가 내린 잠정적인 결론은 '달뜬 낭만주의'를 경멸해마지 않는 이 '회사원/철학자'가 '배고픈 우파'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배부른 좌파'들이 종종 눈에 띄듯이, '배고픈 우파'도 드물지는 않다). 비록 객관세계를 잊은 철학과 물신숭배에 빠진 자연과학 사이에서 찢긴 채 둘의 화해를 모색하면서(회사원-철학자!)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뭐든지 해볼 작정"이라고 그가 말해놓고는 있지만 말이다. 또 그럴 작정인 만큼 그 또한 곧 배부른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러기를 바란다(그에게도 쓰라린 나날들이 아닌 행복한 나날들을 살 만한 권리는 있는 것이니까).

 

 

 



강유원과 함께 떠올려지는 이름은 <잔혹한 책읽기>(작은이야기, 2004)의 저자 강대진이다. 이 '두 강'은 책읽기의 두 강자이다. 관심분야도 문명사와 고전학 쪽이어서 겹쳐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두 사람을 읽는 일은 즐겁고 유쾌하다(유머에 있어서는 '쓰라림'을 줄곧 되뇌이는 강유원보다는 강대진이 한수 위이다). 그런 강자들이 주변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05. 03. 21.

 

 

 

 

P.S.2. 최근에 눈에 띈 책들에 대해서 주로 늘어놓았는데,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확실히' 눈에 띄는 책이 있어서 언급해둔다. <움베르토 에코의 문학강의>(열린책들) 같은 책을 단번에 눌러버린 책인데, 에코도 그다지 유감스러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마틴 가드너가 주석을 단 <앨리스>(북폴리오)이다. 이전에 이 주석본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그 결정판이라고 한다. 가드너는 1960년에 처음 <주석 달린 앨리스>를 출간하고, 이어 1990년에는 <좀더 많은 주석 달린 앨리스>를, 그리고 마침내 2000년에는 그 결정판을 낸 것.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정도는 다들 한권씩 갖고 있거나 한번씩 읽어보셨을 테지만, '앨리스 깊이 읽기'라면 사정이 또 다르지 않을까?

과학 저술가로 유명한 마틴 가드너가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앨리스 전문가라면, 불어권에서 이에 버금할 만한 사람은 장-자크-르세르클이다. 낭테르 대학에서 언어학/영어학 교수로 있다는 그는 루이스 캐럴과 무의미(넌센스) 문학의 전문가이며, 앨리스에 대한 그의 논문은 '피귀르 미틱' 시리즈의 <앨리스>(이룸, 2003)에서 읽어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관심을 갖고 있는 저자라서 그의 책 몇 권을 챙겨두고 있다(나는 문학에서의 무의미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다 알 만한 얘기지만,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한길사, 1999)는 <앨리스>에 대한 들뢰즈식의 '깊이 읽기'이다. <앨리스>를 읽지 않고 <의미의 논리>를 읽는 건(혹은 옮기는 건) 그래서 순서에 맞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작가이면서 미국작가 블라지미르 나보코프 또한 <앨리스> 애호가이며 러시아어 번역자라는 좀 드물게 알려져 있을 듯하다. 가드너만큼의 주석을 달고 있는 건 아닌데, 한편으론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다, 나보코프로선. 그의 소설들이 <앨리스>적인 의미-무의미의 유희를 이미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대, 롤리타를 읽으려는가, 앨리스도 챙겨가기를!..

05. 0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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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1 16:27   좋아요 0 | URL
헉, 찔린다...
"턱없이(=읽은 것도 없이) '강짜'를 쓰는 놈들 말고... "

로쟈 2005-03-21 16:37   좋아요 0 | URL
설마 바람구두님이?^^

바람구두 2005-03-22 09:29   좋아요 0 | URL
음, 솔직히 한동안은 스스로 천재가 아닐까 의심해본적이 있어요. 흐흐. 턱없이 높게 나온 IQ검사를 믿은 탓일지는 몰라도... 그러다 스스로 그런 류의 인간형이 아니란 것도 그야말로 처절하게 깨달은 뒤로는 공부만이 살 길이다 싶었는데, 독학의 길을 걷는 이들이 지니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잖아요. 스승도 없고, 어디 소속되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그러니까 학파니 학벌이니를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심도 버릴 수 없는 ... 가끔 그런 갈증에 시달리게 되죠. 그런데 지금 막상 체계 안에서 공부를 시작해보니 역시 원치 않는 공부를 덩달아 해야 하는 버거움이랄까, 그런 게 생기더군요. 아무래도 저는 학자라고는 할 수는 없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실천적인 입장(거창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장실무자)에 있다보니 이론과 현실 사이에서는 늘 고민이 되더이다.

바람구두 2005-03-22 09:32   좋아요 0 | URL
참,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는 저도 올해초에 구해서 읽었는데...번역은 둘째고, 일단 제게는 좀 어려운 이야기더군요. 종종 이런 소식 올려주시면 도움이 참 많이 됩니다. 흐흐, 고맙다는 말치곤 좀 엉성하죠?

로쟈 2005-03-22 09:48   좋아요 0 | URL
너무 엉성한 게 아니라 너무 '진한' 것 같습니다.^^ 독학자들이 모두 바람구두님이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면, 그 나름의 호젓한 오솔길이 생길 듯도 합니다. 턱없이 높은 IQ에다가 무한정의 바람기질(=열정)까지, 양수겹장이시군요. 헤헤(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그렇게들 웃습니다)...

바람구두 2005-03-22 14:30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나저나 예전에 이야기드렸던 것처럼 시간되실 때 한 번 연락주시길 ...

릴케 현상 2005-04-15 23:34   좋아요 0 | URL
우연히 강유원씨 홈에 누가 윗글을 올린 걸 봤어요. 강유원씨 코멘트
으음. 이 글을 읽어보니 제가 우파로군요. <<우정론>>에 대한 글 제목이 '행복한 시대의 징후'이고, <<국부론>>에 대한 제목이 '행복한 날들'이니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의 지극한 '실용주의' 혹은 '현실주의'"에 대해 "호의를 보이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기도 하겠습니다. 그 제목을 곧이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 마음이겠군요.

로쟈 2005-04-18 10:54   좋아요 0 | URL
네, 가보니까 누가 올려놓았더군요. 그리고 "곧이 곧대로 읽느냐, 경멸적인 의미로 읽느냐는 독자의 마음"이라고 코멘트되어 있군요. 저는 강유원씨의 '고전 읽기'를 높이 사지만, 그의 (자기 아이러니를 포함한) '위악적인' 포즈에는 동감하지 않습니다(그는 김훈의 위악적인 포즈는 곧이곧대로 읽더군요). 책이나 철학, 고전에 대한 비아냥을 통해서만 우리는 책과 철학과 고전을 존중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사실 '회사원/철학자'(결국 그는 그런 자기 PR로 유명해졌는데)란 포즈도 그렇지요(그가 아직도 회사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류의 포즈나 자기과시마저도 없다면, 삶이 퍽 쓸쓸하겠지만, 보기 좋은 건 아닙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정의에 근거하더라도 아주 래디컬한 보수주의자입니다. 그의 말마따나 좌파들은 먹고 사는 거 얘기나 하지 삶의 품위나 교양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거든요(이문열 같은 고전주의자도 한 사례입니다). 저의 기대는 그가 덜 떨어진 보수, 자격미달의 보수가 아닌, 제대로 된 보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저는 그런 보수가 소위 '강단 좌파'보다 우리에겐 더 필요하며 더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릴케 현상 2005-04-20 10:41   좋아요 0 | URL
저는 잘모르지만^^ 제대로 된 보수를 보고 싶은 맘이 더 커요. 전에 김규항씨가 보수는 저 하나만 잘 지켜도 건사한 거라고 했던가요?
 

귀국 이후 이런저런 알레르기성 질환에 시달리고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모스크바 후일담이 자꾸 늦춰졌다. 이젠 타이밍도 좀 놓친 감이 없지 않다. 그간에 읽은 이런 저런 글/책들에 대한 이야기 거리들도 분량으론 상당하지만, 그걸 늘어놓을 만한 이런저런 여건이 또한 안되기에 참아 두기로 한다. 아마도 '우편적 불안에 대하여'나 '문학철학에 대하여' 혹은 (여전히) 지젝과 데리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회를 봐서 씌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은 그 '기회'가 아니다(박자 타령만 늘어놓다가 음정마저 다 잊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신에 막간을 이용해서 (한동안) 이전에 해온 일을 이어서 해본다. 어차피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곧장 책을 읽을 수도 없고 해서... 

 

 

 

 

사실 최근에 나온 책들보다 최근에 '다시' 나온 책들이 더 눈길을 끌기도 한다. 가령, 다시 나온 <코스모스>, 다시 나온 <정신현상학>, 다시 나온 <창조적 진화>, 다시 나온 <유한계급론>, 다시 나온 <최초의 3분> 등은 (다시) 읽어볼 만한 고전들이지만, 현재로선 (다시) 책을 살 만한 형편도 아니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걔 중 가장 중요한 책은 물론 그간에 절판되었던 <정신현상학>이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같은 역자의 번역이어서 어떨까 싶긴 하다. 적어도 '한글세대'의 새로운 번역을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진화>와 관련하여 내가 고대하는 것은 박홍규 교수의 강의록인데, 이건 언제나 정리돼 나올는지. 참고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러시아에서도 작년에 최초의 번역본이 나왔었다(우리의 경우는 지난 81년에 처음 책이 나왔었고, 나는 84년에 이 책을 용돈을 주고 사서 읽었더랬다).  

 

 

 

 

그런 걸 제외하고 나온 책으로 제일 첫손에 꼽을 만한 건 말라르메의 <시집>(문학과지성사)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하나로 나온 이 책은 황현산 교수의 번역인데, 원문과 (216쪽에 달하는) 자세한 주석이 붙어 있다(이런 것이 내가 기대하는 번역 시집의 모양새이다). 해서 이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가를 이제는 우리말로 인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내가 이 책을 대하는 감회이다. 기존의 번역 시집들이 있긴 하지만, 랭보나 로트레아몽의 경우에도 이런 식의 주석 시집이 나오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물론 다른 언어권의 대표적 시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지만. 문학에서 또 손꼽을 만한 건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 <드리나강의 다리>(문학과지성사). 역시나 대산세계문학총서로 나왔다. 지난 1961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보 안드리치는 (언젠가 소개한바 있듯이) 같은 유고 출신의 영화감독 쿠스투리치가 가장 존경하며 좋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더불어, 나는 모스크바에서 (좀 무게가 나가는) 러시아어본을 샀었기 때문에, 이 책의 한국어본 출간이 더 반갑다.  

 

 

 

 

두번째로 꼽고 싶은 것은 하이데거. 그의 <이정표>(한길사)가 최근에 출간됐다.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65권, 66권으로 나왔는데, 이 시리즈가 이미 그만한 규모의 책들을 역간해 낸 것이 대견스럽다. 한 200권까지 가게 되면 제법 장관을 이룰 수 있으리라(물론 벌써부터 품절된 책들이 없지 않지만). 하이데거의 다른 책으론 작년에 나온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까치글방)도 눈길을 끈다. <이정표>의 경우 나는 오래전에 교보문고에서 구한 영어본을 갖고 있다. 러시아어본도 몇 권 구했지만, 하이데거만큼은 한국어본이 더 많이 나와 있으며 번역 또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아주 양호한 편이다.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책이 지난 94년에 나온 <형이상학 입문>(문예출판사)인데, 검색해보니 품절로 뜬다. 다시 나와도 좋을 만한 책인데.. 

 

 

 

 

교양과학쪽 신간으로는 에드워드 윌슨의 <우리는 지금도 야생을 산다>(바다출판사)가 눈에 띈다. 윌슨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소개가 필요하지 않으리라(그의 책으론 <사회생물학>, <생명의 다양성>,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그리고 자서전 <자연주의자> 등이 번역돼 있다). 책의 원제는 'In Search of Nature'(1996)이고, 윌슨의 제자이기도 한 최재천 교수가 번역에 참여했다. 비교적 짧은 분량(204쪽)이니까 단숨에 읽어볼 만한다. 도킨스의 책에 견주자면, <에덴 밖의 강>(동아출판사) 정도가 여기에 대응할 만하겠다. 각각 <인간본성에 대하여>와 <이기적 유전자>에 대해서.  

 

 

 

 

정신분석쪽 신간으로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가 출간됐다. '러시아문학과 정신분석'이라는 게 이번 학기의 관심주제이기도 해서, 성/성차에 대한 라캉주의 이론을 소개/해명하고 있는 논문모음집인 이 책이 나에겐 아주 요긴하다. 모두 6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내가 애초에 기대했던 것보다는 소략한 분량이다), 내가 읽은 대목들에서 번역도 나쁘지 않다. 아마도 그 일부가 이 책에 수록돼 있는, 브루스 핑크의 <라캉의 주체>도 곧 출간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게 되면 아쉬운 대로나마 '라캉 입문'의 길이 좀 트이게 될 것이다. 기간된 책들 가운데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라이트의 <라캉과 포스트페미니즘>(이제이북스)이 있다. 몇 년 전 작고한 라이트 여사의 책은 <정신분석비평>(문예출판사)과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신문화사)를 비롯해서 여러 권 된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블랙웰출판사에서 나온 <지젝 선집(The Zizek Reader)>을 편집하기도 했다.  

 

 

 

 

끝으로 역사분야의 책 가운데에서는 데이비드 하비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 나무)를 언급해두고 싶다(서점에서 이 책을 보자마자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떠올랐다).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의 저자로서 국내에도 여러 권의 책이 소개돼 있는 하비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이다. 나로선 이 분야에 문외한인바, 한 추천사를 옮겨오면 "데이비드 하비는 아마 영어권에서 활동하는 도시학자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일 것이며, 그러한 그의 역량이 이 책에서 최고도로 발휘되어 있다." 그러니 한번 읽어봄 직하지 않겠는가? 물론 543쪽의 분량이나 28,000원의 가격 모두 만만치는 않다.  

 

 

 

 

최근에 나온 인문서들 가운데는 기획출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살림출판사에서 낸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같은 출판사의 '살림클래식'에서도 최근에 프랑스의 저명한 중국학자 마르셀 그라네의 책을 냈다)나 그린비의 '세계를 뒤흔든 선언' 같은 게 그런 사례이다. 4권이 한꺼번에 나온 후자의 시리즈 중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같은 걸 가장 먼저 읽고 싶은데, 그건 <공산당선언>이나 <시민불복종>, <침묵의 봄>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데리다의 <법의 힘>(문학과지성사)에 실린, 데리다의 이 선언문 독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테러시대의 철학>, <환대에 대하여>,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등을 나는 두서없이 읽어보고 있는데, 조만간 독후감을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물론 요즘 같아서는 그저 희망으로 그칠 수도 있고, '희망에 대하여'로 땜질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러다가 망할... 

 

 

 

 

05. 03. 10 

P.S. 굳이 덧붙여 이야기할 만한 책이 출간됐다. 몽테뉴(1533-1592)의 <엣세>가 완역돼 나온 것. <몽테뉴 인생 에세이>(동서문화사)가 그 책이며, 역자는 손우성 교수이다. 프랑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모랄리스트인 몽테뉴의 책은 그간에 <수상록>이란 제목으로 번역돼 왔지만, 신간은 전 3권 107장의 원서를 최초로 완역한 책이다. 분량은 1294쪽(물론 상당한 분량이긴 하지만 놀라운 분량은 아니다. 내가 갖고 있는 2권 짜리 러시아어 완역본은 그 이상의 쪽수이기 때문이다. 해서 '정말' 완역인지는 실물을 보고 확인해봐야겠다). 올해 나온 고전 번역으로서는 가장 반가운 책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은 중3 때 한 라디오 방송에서 여성 작가가 소개하는 걸 듣고 구입해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 새삼 그 책을 떠올리고 재평가하게 된 건 내가 전공으로 하는 러시아 작가 푸슈킨이 인생관에 있어서 몽테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부터이다. 내가 푸슈킨의 '성숙성'이라고 생각해던 대목들이 몽테뉴의  영향, 혹은 몽테뉴로부터의 감화에 많은 걸 빚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것. 그래서 다시금 몽테뉴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는데, 마침 우리말 완역본이 출간된 것이다.  

더불어 파스칼 전문가인 이환 (전)교수의 <몽테뉴의 엣세>(서울대출판부)도 작년말에 출간됐다. 그 전 가을에는 박홍규 교수의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청어람미디어)가 출간됐었고. 신뢰할 만한 저자들이기에 두루 참조할 만하다. 그리고 몽테뉴와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홋타 요시에의 3권 짜리 전기 <위대한 교양인 몽테뉴>(한길사)를 참조할 수 있다. 이만하면 몽테뉴는 성찬으로서 모자람이 없다. 남은 건 그 성찬에 초대받는 것이다...  

05. 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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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5-03-10 23:34   좋아요 0 | URL
코스모스가 '사이언스 클래식' 시리즈로, 그야말로 고전으로 나온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출간된 지 20년도 더 됐기 때문에 내용중 상당 부분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맞지 않습니다. 천문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몰라도 물리학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는 책입니다. 그보다는 '엘러건트 유니버스(승산)'을 추천하고 싶네요.

가을산 2005-03-11 00:2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코스모스는 칼 세이건의 전공인 천문학이 중심이에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새 세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면에서 아직도 코스모스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비로그인 2005-03-11 09:05   좋아요 0 | URL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 재출간 저도 반갑군요. 옛 책을 가지고 있었는데 서울집을 좀 뒤져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분실한것 같아요...

로쟈 2005-03-11 11:53   좋아요 0 | URL
사놓고 읽진 못했지만, <엘러건트 유니버스>가 '새로운' 클래식이 될 거라는 건 예상해볼 만합니다(새로 나온 <코스모스>는 사진도판이 들어간 게 장점이라더군요). <드리나강의 다리>가 옛날 어느 전집에 들어 있었나요? 저도 본 것 같기도 한데, 갖고 있지 않은 책이라 긴가민가 합니다...

바람구두 2005-03-11 12:30   좋아요 0 | URL
오호... 추천합니다.

비로그인 2005-03-11 13:01   좋아요 0 | URL
전집에 들어있었던 건 아닙니다. 단행본이었죠.일테면 삼중당문고등의 전집류가 나오기도 훨씬전의 책입니다. 아무래도 잃버렸다고 단정을 지었지만 뒤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말에..그리고, 러시아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러시아본을 갖고계신것에 샘을 내봅니다^^

비연 2005-03-11 13:47   좋아요 0 | URL
추천합니다^^

udeis 2006-01-17 02:18   좋아요 0 | URL
<형이상학 입문>은... 기왕 절판된 마당에 새로운 번역이 나오길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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