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한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시작됐다는 게 이맘때 쓰게 되는 표현이지만, 올해는 '지리한 장마'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무더위가 시작된 듯하다. 밤마다 잠깐씩 짬을 내어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왕복으로 걸어다니는 '걷기 운동'을 지난주부터 시작했는데, 비 때문에 거른 기억이 없는 걸로 보아 장마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지는 좀 됐다고 봐야겠다. 장마 스스로가 지레 지리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장마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무엇으로 장마인가, 나는 이대로 장마여도 좋은가, 등등의 의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는지도.

일이 꼬이기 시작하는 건 그때부터이다(물론 그 전에 일이 꼬였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는 진단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일의 변주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왜, 나는 장남인가, 어쩌다 나는 가장이 됐는가, 에서부터 세상은 어째서 이 모양인가, 에 이르기까지. 대답없는 질문을 던지는 건 (하이데거 말대로) 현존재의 특권이다. 그리고 여름에 피서는커녕 책읽을 시간도 감지덕지하는 인간은 그런 특권을 좀 남용해도 좋겠다(그런 소리가 피서지에까지 들릴 리는 만무하니까). 이왕이면 이런 엄포도 놓아가면서. "책, 내가 너 아니면 읽을 게 없을 줄 알아?!"

 

 

 

 

그런 엄포 때문은 아니겠지만, 책들은 휴가를 반납한 듯이 계속 쏟아지고 있다. 그런 책들 가운데, 새로이 맘에 드는 얼굴, 그러니까 '뉴 페이스' 몇을 꼽아보기로 한다. 첫번째로 꼽는 건 빌헬름 라이히의 <오르가즘의 기능>(그린비). 얼마전에 나왔던 두툼한 전기 <빌헬름 라이히: 세상을 향한 분노>(양문)가 함께 읽어볼 만한 라이히 컬렉션이 되겠다(알라딘에는 6권의 책이 뜨는데, 이미지가 제공되는 건 위의 3권이다. 물론 거기에 적어도 두 권쯤은 더 추가되어야 한다.). 80년대에 출간됐었던 <파시즘의 대중심리>(현상과인식, 1986)도 조만간 재번역되어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고. 흔히 '프로이트 좌파'로 분류되는 라이히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할 만한 것은 <프로이트 급진주의 : 빌헬름 라이히, 게자 로하임, 허버트 마르쿠제(The Freudian left)>(종로서적, 1981)이다. 내가 '라이히'란 이름을 처음 접해본 책이고 나에게 그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켜준 책이다(덕분에 만화로 된 라이히 전기도 읽었다). 

프로이트 좌파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켜보고자 한 이론가들을 가리키며, 라이히와 함께 거명된 이름들 중(로하임의 저작이 번역돼 있는가?) 마르쿠제를 떠올려보면 이들의 구상이 어떤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각자의 진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성해방과 계급투쟁을 연관지어 사고하고자 했던 것이고, 이들은 주류 마르크스주의로부터는 모두 찬밥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물론 라이히의 경우가 가장 유별나지만(그는 말년에 '오르곤 에너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학계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미국 식품의약국에도 제소되어 복역하다가 감옥에서 죽었다). 그 유별난 사람의 유별난 생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라이히의 책 두어 권쯤 들고 피서지로 향하면 되겠다(물론 연인과 동행하면서 <오르가즘의 기능>을 들고갔다간 라이히 이상으로 따돌림 받을 수 있다. 그 점은 주의하시압).

 

 

 

 

두번째로 꼽고 싶은 건 신간 들뢰즈 연구서로서 키스 안셀 피어슨의 <싹트는 생명(Germinal life)>(산해)이다. 부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인데, 들뢰즈 연구서를 좀 뒤적여본 사람이라면 피어슨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니체와 베르그송 연구서를 갖고 있는 소장 학자인데, 언젠가 한번 그의 논문을 읽고 믿음직 하다 싶어서 그의 연구서라면 모두 복사해둔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책이 최초로 우리말 번역을 얻은 것(책의 원서는 내 책상 머리에 몇 년째 꽂혀 있는 중이다). 번역은 국내의 대표적인 들뢰지안의 한 사람인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공동대표가 맡았다. 같은 역자가 이전에 옮긴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이어지는 것일 텐데, 생명철학은 들뢰즈에 대한 나의 세 가지 관심사 중 하나이다. 다른 두 가지는 언어철학과 영화철학(국내에 소개가 좀 빈약한 건 언어철학쪽이다. 해서 르세르클의 <들뢰즈와 언어> 같은 책도 번역되어야 구색이 맞다고 본다).

역자는 후기에서 들뢰즈 철학의 요체로 "'잠재적인 것(the Virtual)'을 규명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그 '잠재적인 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나로선 '배아줄기세포'가 아닌가 한다(그건 '기관없는 신체'이기도 하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이 윤리학적 함축도 가질 수 있는 건 그런 때문일 것이다. 역자는 또다른 빼어난 들뢰즈 연구서로서 마누엘 데 란다의 저작을 거명하고 있는데, 이쯤에서 내가 기대하는 책은 지젝의 들뢰즈론 <신체 없는 기관>이다. 이에 대해서는 재작년 내한 강연의 한 주제로 지젝이 다루기도 했다(<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참조).

 

 

 

 

세번째 책은 엔디 매리필드의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Metromarxism)>(시울)로 '도시 맑스주의'란 새로운(?) 분야를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맑스가 살았던 18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시와 맑스주의의 관계를 맑스를 포함한 엥겔스, 벤야민, 레페브르, 드보르, 카스텔, 하비, 버먼 등과 같은 일련의 맑스주의자들의 견해를 도시문화학이라는 필터에 맞추어 전기적이면서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서술한 도시맑스주의 개괄서." 최근의 관심사 하나와 맞아떨어지기에 구미를 당기는 책이다. 이 '도시맑스주의'라는 건 적어도 나에겐 '사이버맑스주의'보다는 흥미로운 주제이다.  


      

 

 

 

네번째로 꼽을 책은 오규원 신간 두 권이다.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301번째 책으로 나온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가 그의 시집이고, <날 이미지와 시>가 그의 시론이다. 아마도 지난주에 신간 소개를 했더라면 이 책들을 제일 먼저 꼽고 좀 장황한 얘기들을 늘어놓았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고 그 사이에 바람이 좀 빠져버렸다. 시집과 시론집은 내가 아는 '오규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시집의 해설을 쓴 정과리에 따르면 그 '오규원'은 '절대 관념의 탐구자'로서의 오규원이었다(흔히 김춘수와 비교되는).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는 한국시의 현상학자이며, 후설이다(한국시의 하이데거는, 릴케와 횔덜린은 누구인가?).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려면 좀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정과리만큼은 아닌데, 그는 70쪽 분량의 시집에 60쪽이 넘는 해설을 붙여놓았다.

그가 '독자'라는 주어로 그런 '민폐'를 독자 일반에게 떠넘기려는 건 좀 볼썽사나운 수작이다. 그는 오규원 시에 대해서 '안에서 안을 부수는 공간'이라고 이름붙인바 있는데, "하지만 독자는 얼마 전 <르몽드>의 기자가 케르테스의 소설에 대해 똑같은 명칭을 쓰는 걸 읽고는 혼자 즐거워한다."에서 혼자 즐거워한 주체(주어)는 정과리이지 독자 일반이 아니다. 그가 독자라는 제유를 통해서(라도) 독자의 자리를 독점하는 건 주제에 넘는 일 아닌가? 그는 마치 자신만이 오규원 시에 대해서 샅샅히 해부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그는 시집의 첫 시편들을 차례대로 분석해나가는데, 그런 방식으로 분석이 다 갈무리될 리 없다. 해서 숙제가 남는바, "그러나 시집 전체, 즉 모든 시편들의 구성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차후로 미루기로 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 하지만, 더 바람직했던 건 이 해설 자체가 '다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지 않았을까? 오규원 시집에 걸맞는 해설은 투명하고 담백한 글이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처럼.).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고른 미술책이다. 할 포스터의 <욕망, 죽음 그리고 아름다움(Compulsive Beauty )>(아트북스). 부제는 "포스트모던 시각으로 본 초현실주의와 프로이트"이다. 저자는 프린스턴대 교수로서 저명한 미학지 <옥토버>의 편집자이고, 현대미술의 철학적 해명을 다룬 여러 저서를 갖고 있다. 그 중 <실재의 귀환(The Retun of the Real)>(경성대출판부, 2003 )가 번역돼 있고, 편저로 <반미학(Anti-Aesthetic)>(현대미학사, 2002), <시각과 시각성(Vision and Visuality)>(경성대출판부, 2004) 등이 소개돼 있다(이 중 <반미학>은 읽을 만한 번역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나머지 책에 대해서도 장담하진 못하겠다. 내용 자체가 쉽지 않은 면도 있고.) 

소개에 따르면 이 책에서 "저자는 '초현실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게 해줄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초현실주의 시대의 것'이어야 하고, 또 '그 분야 내부의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의 범주로는 초현실주의에 나타난 이질적인 작업들과 심리적 갈등, 사회적 모순 따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책은 프로이트의 '언캐니(the uncanny)' 개념을 불빛삼아 초현실주의 텍스트와 이미지의 동굴을 탐사한다." '언캐니'란 건 흔히 '기괴함' 섬뜩함'으로 번역되는 프로이트의 용어이다(국역본 프로이트 전집에서는 '기이한 낯설음'이라고 옮기고 있다). 문학작품 분석에서도 자주 사용되는데, 초현실주의 회화에 어떻게 적용되는가 한번 읽어봄 직하다.

 

 

 

 

한편, 저명한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이데아>(예경)도 출간됐다(곰브리치와 쌍벽을 이루던가?). "도상해석학의 창시자이자 '독일 태생의 유태인으로 나치 시절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철학자', 파노프스키의 초기 연구 성과를 집약하고 있는 책이다. 파노프스키는 책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조형 예술 이론에 끼친 결정적인 영향과 시대에 따른 변화상, 한 마디로 "미의 이데아란 개념의 역사적 운명"을 추적한다."고 소개돼 있다. 그의 책으론 이미 <도상해석학 연구>(시공사, 2002)가 소개돼 있다.

05. 07. 18.


 

 

 

 

P.S. 소개에서 빠진 책은 저래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사이언스북스). 이전에 동아사이언스 북스 시리즈로 나오던 책들이 이번에 재출간됐는데, 그때 빠졌던 책으로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게 이 책 <섹스의 진화>이다. 이미 저자의 책을 한두 권 읽어본 독자는 알겠지만, '다이아몬드의 모든 책'이다. 그 다이아몬드의 최신간은 <붕괴(Collapse)>이다(아직 번역되지 않았는데, 알라딘에서 원서 구입이 가능하군). 575쪽의 방대한 분량인데, 어떤 사회가 왜, 어떻게 망하고 안 망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한국이란 나라가 망조가 든 나라인지(그래서 얼른 이민가는 게 상책인지), 기대를 걸어볼 만한 나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한번 읽어봄 직하다. 물론 얼른 번역되었으면 더 좋겠다. 500쪽이 넘는 원서를 턱없이 읽어나가다간 사회생활 망가지기 십상이다...    

 

 

 

 

P.S.2. '들뢰즈 책'에 신간이 더 있다. 브라이언 마수미가 쓴 <천개의 고원 -사용자 가이드>(접힘펼침)이 그것이다. 말 그대로 매뉴얼인데, 별로 두껍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책이 331쪽으로 나왔다. '매뉴얼'을 자임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전위적인' 매뉴얼을 시도한 책이라 친절한 주석서와는 거리가 멀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 전에 같은 출판사, 같은 역자에 의해 나왔던 책은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로 유진 홀랜드가 쓴 <안티 오이디푸스> 가이드북이다. 보다 친절한 쪽은 이 책인데, 문제는 '전위적인' 책의 판형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Deleuze and Guattari's anti-Oedipus)>란 원제가 뜬금없이 <프로이트의 거짓말>로 옮겨진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아트북 같은 판형을 고집한 탓에 161쪽 짜리 책이 539쪽으로 둔갑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이미 나온 걸 어쩌랴만). 이런 '전위적인' 책이 많이 팔렸을 리 없는 건 당연하므로 출판사쪽의 '계산'을 짐작할 도리가 없다(나는 책 갖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좋은 번역만 가지고도 충분히 튄다. '예술'은 다른 데 가서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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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7-19 00:22   좋아요 0 | URL
소개해주신 지젝을 읽고 있답니다. 쉽지 않군요. 오선생의 시집을 들고 좀전에 여행을 다녀왔는데, 정과리 선생의 뒷글은 주례사비평을 넘어 지독히 정치적이라는(좀 치사하다 싶을 만큼 자신의 해석을 늘어놓는) 뉘앙스가 짙더군요.

릴케 현상 2005-07-18 22:17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지만 정과리가 저러는 건 소문이 날 만큼 난 것 같아요-_-

poptrash 2005-07-19 01:59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고 있어요. 제가 요즘 하는 일이 신간들 들여다보는 일이라서, 또 소개해주시는 분야가 제가 다루고 있는 책들이라서 관심 갖고 보고 있습니다. 아, 저는 뭐 학술적인 일이 아니라 그냥 '기계적인' 일을 하는 '알바생' 이랍니다. 책 좀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중. 나오는 책들 다 재미있게 보이는데, 막상 어느것 하나도 읽기가 쉽지 않네요 저로서는.

로쟈 2005-07-19 09:24   좋아요 0 | URL
저도 실질 소득면에서는 '알바생'입니다. 나오는 책들을 다 재미있게 보고 계시다니 부럽네요.^^ (저는 대개 구경만 합니다.)

palefire 2005-07-19 09:55   좋아요 0 | URL
언제나 충실한 책소개 해주시는 로자님. 안셀 피어슨의 책은 일부 Deleuzeguattarrian들에게 보이는 성급함과 경박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Germ/Milieu의 관계부터 들뢰즈-베르그송을 풀어가려는 노력도 깊이가 있고요. [매혹의 도시, 맑스주의를 만나다]는 바로 보관함에 등록해놔야겠네요. 올려주신 목록중 관심분야상 제일 반가운 건 역시 할 포스터의 [Compulsive Beauty]입니다. 조금 훑어본 바로는 번역이 나쁘지 않습니다. [실재의 귀환]은 역어와 문장이 난삽한 편. MIT/October라인의 치밀하고 꼼꼼한 미술/시각문화비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포스터의 책이 원서로만 방기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장 최근 저서인 [Prosthetic Gods]를 더 꼼꼼히 봐야겠다는 열망을 주는 책)

palefire 2005-07-19 09:56   좋아요 0 | URL
그리고, [몸체 없는 기관]은 역시 번역중입니다. 라캉 관련 전공자 들뢰즈 공부한 사람 하나가 공역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로쟈 2005-07-19 12:11   좋아요 0 | URL
포스터의 책이 괜찮은 번역이라니 다행이군요. <실재의 귀환>에서 별로 재미를 못본 터라... <신체 없는 기관>은 도서출판b에서 근간으로 예고돼 있습니다...

주니다 2005-07-19 15:04   좋아요 0 | URL
<오르가즘의 기능>은 집에 놀러온 사람들에게 괜한 오해를 살만한 제목이군요.^^ <실재의 귀환>도 아직 다 보지 못했는데, 신간이 나왔더군요. 저도 서점에서 잠깐 살펴 봤는데, 일단 한국말이 잘 안되는 <실재의 귀환> 보다는 훨씬 문장이 매끄러웠습니다.(내용의 오역 여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ps.2에서 소개하신 책 2권의 상태는 어떤지요? 일전에 서점에서 <프로이트의 거짓말>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들루즈와 과타리'(과메기가 떠올랐습니다.)라는 말에 이 무신 해괴한 책인고 했답니다. 역자가 미국에서 공부했던 것 같은데, 그 동네에서는 '들루즈, 과타리'라고 발음하나부죠? 그나저나 장마가 지지부진 끝나고 무척 덥네요. 방학이지만 아마도 학교에 매일 출근하실터,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늙으니 안나던 땀도 줄줄입니다) 언제 함께 시원한 생맥주라도 한잔 해야할텐데....

로쟈 2005-07-19 15:16   좋아요 0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시원한 생맥주는 모스크바에서 마셔본 기억이 마지막입니다.^^;) '과타리'는 좀 이상한 표음인데(u가 묵음이므로), '가따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의 '프라이드'인 걸 어쩌겠습니까? 마수미의 책은 번역본을 제가 직접 보지 못했고, <거짓말>은 폼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대출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식용 책이지 독서용 책이 아니더군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29   좋아요 0 | URL
이미 절판되었지만 아마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된 라이히의 책은 다음의 책일 것 같아요: "프로이트와의 대화:, 빌헬름 라이히 편저, 황재우 역, 종로서적, 1982.

그리고 이 역자 황재우씨는 바로 시인 황지우씨입니다...^^ 황재우가 바로 시인의 본명이지요. 지우는 본인 이름의 오식이던가 오타였는데, 시인은 이게 오히려 마음에 들어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을 어느 인터뷰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9 12:32   좋아요 0 | URL
그리고 위 책의 내용은 프로이트와의 대화가 전혀 아니라... 라이히가 한 대담자와 프로이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내용이지요... 아마도 당시 82년에 라이히가 너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 출판사에서 제안한 제목일 듯 싶네요...

로쟈 2006-12-09 15:5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책은 저도 완독하진 않았지만 들춰본 적이 있습니다. 요즘 분위기로는 다시 나와도 좋은 듯한데요. 황재우(^^) 역의 <변증법적 상상력>과 함께...

테렌티우스 2006-12-09 23:28   좋아요 0 | URL
<변증법적 상상력> 박사학위 논문으로 최상급이지요. 푸코나 벤야민 혹은 크리스테바의 것들보다는 한 급 아래라 할지라도 기존의 문제의식을 너무도 일목요연하게 자기만의 시각으로 - 혹은 논쟁적으로 - 잘 정리해 놓았지요. 더구나 호르크하이머가 서문을 써주었지요. 저도 흥미롭게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자가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를 진행하고 미출간 자료들을 섭렵하는 등 당시의 분위기를 파악하기엔 아주 그만인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할 만한 책이지요.
 

장마철 치고는 모처럼 개인 날이다. 두 주 전에 책정리(=노가다)를 좀 한 후유증으로 며칠 앓고 나서는 '회복기' 같은 한 주를 보냈다(그래봐야 여기저기 좀 쑤시고 배탈이 난 정도였지만). 15년 전 제대를 하고 나서 다시 서울로 올라와 단촐한 하숙집 독방에 둥지를 틀었을 때, 내가 싸들고 온 책들은 4단짜리 책장을 절반도 채우지 못했었다. 물론 그러고 2년이 못 되어 내 방은 다리를 뻗고 자기도 어려울 만큼 책들로 가득 차게 되었지만(책이 많은 게 아니라 방이 작았다고 해두자). 당시는 책이 지금처럼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책을 구할 수 있는 루트가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요즘은 소장하는 책 중 사는 책의 비율이 20% 정도밖에 안된다. 나머지는 다 복사/제본한 책들이다). 물론 요즘은 구하기 힘든 (원서)마스터본들을 당시에는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하여간에 그 증식 속도에 있어서 책들은 어느 박테리아 못지 않다. 한마디로 못말리는 책들인 것.

세월은 흘러, 6년전 지금 살고 있는 전세집에 이사를 올 때 아파트 경비 아저씨는 서점을 하다가 왔냐고 내게 물었다. 지금 그 책들은 2배가 넘게 불어나 있으며, 이번에 50-60권을 갖다 버렸다(그간에 이렇게 버리고 남주고 헌책방에 갖다 팔고 한 책들이 500권은 된다). 전체로 따지면 아마 1%도 안될 듯싶지만. 집사람이 몰래 갖다버린다고 하도 으름장을 놓길래 자진해서 읍참마속을 결행한 것. 장마철이지만 책은 다행히도 잠시 비가 멎은 날에 내다놓았다. 주로 잡지와 소설책(무슨무슨 수상작품집), 그리고 <복잡계 경제학> 같은 책들이었다(사다놓은 경제학 책만 해도 꽤 되는 내가 재테크의 기본도 모른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자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는 빌미이다). <어리숙한 척 남자 부려먹기> 같은 책도 누가 볼세라 이 참에 버렸다.

그렇게 갖다 버리고, 또 베란다에 마련한 새 박스들에다 잔뜩 구겨넣어서 생존공간을 얼마간 확보했다. 딸아이는 집이 아주 넓어졌다고 좋아했지만(남들이 보면 웃을 일이다), 읽을 책만 사서 읽으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그건 오늘 아침에도 반복됐다). 이젠 아이도 어느새 못말릴 나이가 돼 버렸다. 하지만, 아이도 언젠가는 알아줄지 모른다. 책이라는 환상이 아빠의 존재근거이며 아빠의 DNA는 (A-T-C-G 대신에) 어쩌면 B-O-O-K 라는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젠장, 이런 bookish한 책귀신 얘기 대신에 다시, 새로 나온 책들 얘기나 좀 하기로 한다.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러시아 문화사'란 부제를 단 올랜도 파이지스(O. Figes)의 <나타샤 댄스>(이카루스)이다. 소개에 따르면 "러시아의 근대화를 시작한 표트르 대제가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한 18세기 초에서부터 소비에트의 브레즈네프시대인 1970년대까지 300백년간의 러시아 문화사를 다루는 책"으로서 "도식적인 사상사 혹은 문화적 인물들의 전기를 넘어 역사와 미술, 음악, 발레, 영화 등을 복합적으로 아우르고 있다." 저자는 1959년생의 비교적 젊은 러시아사가로서 런던대학에 재직중이다. 원서의 이미지를 나란히 올려놓았지만(표지는 원서의 것이 더 마음에 든다), 사실 이 책은 2년쯤 전에 몇 권의 러시아사 책을 아마존에서 구입하면서 사들였던 책 중의 하나이다(같은 저자의 러시아 혁명사 와 함께). 저자는 생소했지만, 러시아사 관련서들 가운데 평이 아주 좋았고(에릭 홈스봄도 상찬한 책이다) 분량도 미더웠다(우리말 번역본이 1015쪽인데, 원서도 729쪽에 이른다). 내가 놀란 것은 이만한 부피의 러시아사 책이 아무런 소리소문없이 툭 번역돼 나온 것.

이 분야에서 그만한 부피에 버금하는 책들은 역시나 러시아 문화사의 전개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덕형의 <천년의 울림 -러시아문화예술>(성균관대출판부, 2001)와 존 톰슨의 <20세기 러시아 현대사>(사회평론, 2004)가 있다.  각각 528쪽과 776쪽. <나타샤 댄스>가 얼마나 방대한 분량인지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아문화사 분야에 모처럼 읽을 만한 책이 출간된 것이 반갑고 기쁘다. 최근에 출간되어 예상밖(?)의 판매실적을 거두고 있는 책,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현상'이 거품이나 유행이 아니라면 러시아사의 폭넓은 맥락을 보여주고 있는 책들 또한 많이 읽힐 것으로 기대해봄 직하다. 덧붙여, 러시아사쪽 또다른 신간 리처드 휴의 <전함 포템킨>(서해문집).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1925)로 더 잘 알려진 포템킨 호의 반란사건은 1905년 1차 혁명의 도화선이 됐었던 사건이자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담은 책으로 보이는데, 영화의 결말과는 다르게 실제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었고 주모자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유형에 처해진 걸로 안다(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은 장르상 '(역사) 판타지'이다). <전함 포템킨>과 관련한 책들은 나는 두 권 더 갖고 있는데, 이것들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는 신만이 아신다.

 

 

 

 

두번째 책은 지난 2003년 가을 방한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강연록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철학과현실사)이다. 지난 가을쯤에 나왔어야 할 책이 다소 연착했다. 이미 온라인상에 모든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공개돼 있는 만큼 책으로 묶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나 같은 지젝의 애독자에게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일단 너절하게 널려있는 프린트물들을 시원스레 갖다버릴 수 있게 된 것. 그 비용이 18,000원이니까 싼 건 아니다. 책에는 네 개의 강연문과 한 개의 특별강연문, 모두 5편의 강연원고와 번역문이 차례로 실려 있는데, 아쉬운 건 그해 가을호인가 겨울호 <철학과 현실>에 실련던 지젝과 김상환 교수의 대담 등이 빠진 것. 지젝의 서문을 달고는 있지만, 책에는 아무런 역자 해제도 붙어 있지 않다. 아무래도 성의가 부족하다 싶은데, '다산 기념 철학강좌' 시리즈의 일곱번째 책으로서 억지로 구색을 맞추기 위해 출간된 것이 아닌가 싶다. 번역이라도 좀 수정이 됐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법한데, 실상은 역시나 그다지 개선된 듯하지 않다(짐작에 책임 교정자가 없었다는 얘기다). 가령, 17쪽에서 '선의(善意)의 봉사'는 '재화의 공급servicing of the goods'의 오역이다. 이런 단순한 오역(실수)도 체크되지 않고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유감스럽다(이 강연문들은 시간이 되면 나중에라도 다시 한번 자세히 읽어볼 계획이다).

 

 

 

 

그런 유감을 좀 달래기 위해서 꼽아본 책은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이학사)이다. 이미 그의 <폭력의 고고학>(울력, 2002)이 출간돼 있으며('끌라스트르'로 검색해야 한다), 그에 대한 소개는 이미 그때 한번 이루어진바 있다. 다시 반복하자면, "삐에르 끌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과 당시를 풍미하던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을 극복하고 원시 사회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1970년대 프랑스 지식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출간되는 <폭력의 고고학>은 그가 죽고 난 후 1980년 그가 발표했던 에세이와 서평, 그리고 연구물을 모아 펴낸 유고집이다. 연구 논문들은 1976년에 나온 또 다른 논문집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을 보다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이번에 나온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그 '또 다른 논문집'이다. 그러니 두 책이 서로 보족적으로 읽혀질 만하다. 클라스트르에 대한 해설은  <오늘의 프랑스 사상가들>(문예출판사, 1998)이 자세하다. 거기에서 클라스트르는 르네 지라르와 비교/대비되고 있는바, 가령 <폭력과 성스러움>(민음사) 등과 같이 읽어보는 것도 독서의 한 가지 방법.

 

 

 

세번째 책은 고전 번역으로 윌리엄 제임스의 <심리학의 원리>(아카넷). 전 3권 2,500쪽이 넘는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이다. 존 듀이, 찰스 샌더스 퍼스와 함께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세 거두로 꼽히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저 중 하나인데(잘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하버드대학에 오래 봉직했는데, 1875년 미국대학 최초로 심리학 강의를 개설했다고 한다.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인 셈이다), 소개를 보니까 이건 그의 저술여정에서 첫번째 시기의 결과물이다.

"제임스의 저술 시기는 대략 세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스코틀랜드와 독일철학의 정신이해와 골상학의 관점에서 심리학을 연구했던 당시 미국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실험에 기초한 심리현상연구를 통해 독자적으로 기능주의 심리학을 수립한 시기이다. 이때 <심리학원론>을 출판했다. 두번째는 종교나 철학에 관련된 주제들을 연구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제임스는 여러 곳으로부터 초빙을 받아 강의를 하였는데, 그 결과물은 책으로 출판되어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기도 하였다. 이 무렵 에든버러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을 20개의 주제로 나누어 강연하였다. 세번째는 프래그머티즘, 진리론, 그리고 그의 인식론적인 급진적 경험론에 대한 강연을 통해 자기만의 독특한 사상을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적인 강연은 1908~1909년에 행한 옥스퍼드 대학의 히버트 강연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 저술로는 <프래그머티즘> <다원적 우주> <진리의 의미> 등이 있다." 

이 중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한길사, 2000)이 이미 소개돼 있다(번역에 대해서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역자의 지젝 번역으로 봐서는). 세번째 단계의 <프래그머티즘>은 비교적 얇은 책인데, 아직 소개되지 않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프래그머티즘의 길잡이>(철학과현실사)에 내용이 일부 발췌돼 있던가 정리돼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심리학의 원리> 같은 고전의 번역/소개는 반가운 일이지만, 이걸 언제, 누가 읽어(줘)야 하는지는 의문이다(심리학 전공자들은 읽는가?) 멜빌의 <모비딕>보다 두꺼운 책이 그것도 소설이 아니라 철학책인 것이니까!

하여간에 심리학 분야에서 내가 언제쯤 번역될지, 과연 번역이 가능은 한 건지 의문을 가졌던 두 권의 책 중 하나가 이번에 나왔다. 나머지 하나는 야스퍼스의 <일반 정신병리학>(1913)이다. 1997년에 나온 리프린트 영역본의 분량이 594쪽이니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방대하다. 러시아어로도 번역돼 있어서 가끔씩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 가서 눈길만 주던 책이었다(2만원쯤 했던 듯싶다). 제임스와 야스퍼스는 모두 의대 출신 철학자들이다. 보통 철학자들은 신학이나 수학 전공자들이 많으며, 러셀에 의하면 그들이 철학의 두 계보이다. 거기에 다른 두 계보를 덧붙이자면 나는 문학과 의학을 꼽겠다. 이 네 가지 계보를 정리하는 건 물론 돈벼락을 맞은 이후에 주제를 모르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네번째 책은 'e시대의 절대문학' 시리즈의 첫권으로 나온 권미선의 <돈키호테>(살림)이다. 부제는 '비극적 운명을 짊어진 희극적 영웅'으로 돼 있고, 분량은 204쪽이니까 기대보다는 얇다. 아마도 중고생들까지 과녁 안에 넣고 있는 모양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논술 입시용으로 고전들에 대한 급조된 요약정리들이 판치는 판국에 200쪽 정도라면 그래도 양호한 편이라고 해두어야겠다. <신곡>, <서유기>, <마담 보다리>, <모비딕>, <동물농장/1984> 등이 이번에 같은 시리즈로 나온 책들이다. 물론 이런 류의 해제를 읽고 나서 손에 들어야 하는 책은 원전이다. 돈키호테의 경우에는 출간 400주년을 기념하여 새 번역본 <돈키호테>(시공사, 2004)도 출간돼 있다(이게 최초의 스페인어 완역본이라면, 이전에 나온 책들은 어찌된 것인가? 범우사판은?). 시간이 부족하다면 책만 사두고 가끔씩 이 대목, 저 대목 뒤적거려보면 된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돈키호테의 영향권하에 있는 작가인데, 특히 <백치>가 그렇다. 그 작품에서 우리는 가장 독특한 돈키호테 해석을 만나볼 수 있는데, 이른바 그리스도-돈키호테 형상의 주인공 므이쉬킨. 동시에 므이쉬킨은 그리스도 형상에 대한 가장 독특한 해석이기도 하다. 돈키호테-그리스도.(참고로 파스테르나크는 그리스도를 햄릿 형상으로 이해한다.)

다섯번째 책은  처음 러시아사와 운을 맞추기 위한 미국사 책으로 레이 라파엘의 <미국의 탄생>(그린비). '미국 역사 교과서가 왜곡한 건국의 진실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작년에 나온 아주 따끈따근한 책이며, 저명한 역사가 하워드 진이 품질을 보증하고 있는 책이다. 소개에 따르면,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 민중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가로 평가받는 저자가 미국의 역사 왜곡을 고발하는 책이다. 아울러 미국 건국을 둘러싼 신화의 본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미국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성취할 수 있게 만든 미국 민중의 진정한 정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러니 나란히 읽을 책들도 자연스레 추려진다. 잘 모르는 분야에서는 믿을 만한 사람 한 사람만 물고 늘어지면 되는데, 미국사의 경우엔 <미국 민중저항사>(일월서각)의 저자 하워드 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의 <오만한 제국>(당대, 2001)이나 자전적 에세이 <달리는 기차 위의 중립은 없다>(이후, 2002) 정도를 일단 리스트에 올려놓기로 하자...

05. 07. 03.

P.S. 이밖에도 나온 책들은 많지만, 내가 굳이 군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좋은 책들이다. 보관함에 있는 책들을 차례로 다섯 권만 호명해보면 이렇다.

 

 

 

 

<나타샤 댄스> 대신에 박태균의 <한국전쟁>(책과함께),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대신에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심리학의 원리> 대신에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아카넷), <돈키호테> 대신에 <단테>(푸른숲), 그리고 <미국의 탄생> 대신에 <엘리건트 유니버스>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의 <우주의 구조>(승산)를 집어넣어도 다섯 권의 책으로 모자람이 없다. 이 또다른 선택도 충분히 옹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또 다른 한판의 바둑이다.

 

 

 

 

지난번에 <시네마2>(시각과언어)에 대해서 언급한다고 해놓고 지나쳤는데, 이제 비로소 들뢰즈의 '영화론' 전체를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된 건 반가운 일이다. 2차 문헌만을 읽는 건 어떤 음식을 '알기' 위해서 안내서를 읽는 것만큼이나 싱거운 일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먹어보는' 것이다. 직접 말이다.

그간에 여러 차례가 역자가 바뀌었다는 소문을 들은바 있는데, 이번에 나온 <시네마2>는 최상의 선택/결과이었기를 기대한다. 재미있는 건 이 책의 책날개. 여전히 <시네마2>가 근간으로 돼 있고 역자는 엉뚱한 사람의 이름으로 돼 있다. 출판사가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정신없었는가' 를 웅변하는 듯하다. 하지만, 마무리를 잘해서 욕먹을 일은 없는 법이니,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정/교열 등의 후반부 작업에 출판사들이 좀더 신경을 써야 할 때가 되었다...(그나저나 아마존에서 떠온 이미지들은 왜 안 뜨는 걸까?)  

 05. 07.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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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7-04 18:43   좋아요 0 | URL
음....미디어 리뷰에선 별로 땡기지 않던 '나타샤 댄스' 확실하게 땡스 투 해놓겠슴다.....미국의 탄생에 대해서도 갑자기 동하는군요..
무엇보다, 로쟈님, 앞 부분이 훨 재밌슴다.ㅋㅋㅋ 페이퍼질 좀 자주 해주시길.

로쟈 2005-07-04 18:59   좋아요 0 | URL
그게 말임다. 집에서 인터넷이 안되는 관계로... 아마 지금의 10배 정도는 글을 올릴 수 있을 텐데요(생계와 무관한?)... 어쩌면 다행인지도...

돌바람 2005-07-04 19:18   좋아요 0 | URL
후문으론 올해 안에 송병선 선생 번역의 <돈 키호테>도 나올 것 같다고 하네요. 박철 선생이 선배이거나 스승쯤 될 텐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뭔가 바로잡고 싶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래서 시공사판 가지고 있긴 한데 나중에 읽으려구요.

로쟈 2005-07-05 13:38   좋아요 0 | URL
저도 더 기다려봐야겠군요.^^

주니다 2005-07-05 15:30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이젠 성적도 다 넘기셨을테고 본격적인 방학이겠군요. 방학은 학생들에겐 좋겠지만 시간강사들에겐 실업자로 전락해야하는 서글픈 기간이죠^^ 지난달엔 골치아픈 일들 때문에 (어차피 책도 많이 보지 않았지만) 읽던 책들이 손을 떠난지 오래되버렸습니다. 제 손엔 대신 술잔만.... 책들이 쉼없이 쏟아지고 있지만 곧 이사를 해야되는 처지라 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보지도 않는 책 사모으는 것도 '쇼핑 중독'일까요? 방학 잘 보내세요....

로쟈 2005-07-05 16:34   좋아요 0 | URL
'골치아픈 일들'로 바쁘셨군요. 이사까지 하신다면, 이 여름에 이열치열이 될 거 같은데, 건강에 유의하시길... 방학이라 강사료도 안 나오는데, 일은 왜 줄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쁜 일들 때문에 다소 미뤄진 책 소개를 해치우기로 한다(사실은 어제 몇 자 적어내려갔지만, 난데없는/일시적인 정전으로 날려먹었다). 관심의 폭이 무작정 넓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이 '많이' 나온다고 느껴질 정도로 요즘은 정말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매일 같이 서점에 가서 체크를 해봐도 그 책이 그 책이었던 '먼옛날'(80년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더불어 느껴지는 건 역시나 '겁없는' 책값들이다. 도서관 인프라가 아직 풍족하지 못한 현실에서 고가의 신간서적들은 자신의 '경제적 계급'을 반추하도록 강요한다. 혹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는 않는가? "네가 그래도 책을 사보겠다는 것이냐?" 혹은 "네가 어디서 맞먹자는 것이냐?" 

 

 

 

 

제일 먼저 꼽을 책은 단연 마틴 에슬린의 <부조리극>(한길사)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에슬린은 오늘날에는 상식적인 문학용어가 된 '부조리극'이란 말을 발명해낸 양반이다. 원서의 초판은 1962년에 나왔고, 책은 1950년대 프랑스 연극무대를 주름잡았던 베케트, 이오네스코, 장 주네 등의 새로운 연극을 '부조리극'이란 말로 유형화하는 데 성공했다(거기에 아다모프와 해롤드 핀터를 포함하게 되면 부조리극의 5인방이 된다). 이후에 이 용어는 그 외연이 더욱 확장되어 고대 그리스의 희극(아리스토파네스)에까지 적용되기도 하는데, 사실 부조리극은 연극적 형식 못지 않게 그 세계관이 문제시되는 드라마이므로 그러한 소급적 적용이 아주 억지스러운 건 아니다. 세계관이 연극적 기교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 만큼. 어쨌든 부조리극 연구의 '고전'을 이제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나는 이전에 러시아 부조리극에 관한 리포트를 쓰기 위해서 이 책의 이론 파트를 읽어본 적이 있다).

베케트와 브레히드, 핀터 등의 극작가들에 대한 권위있는 해설자로 유명한 에슬린은 (내가 알기론) 한국에도 두어 차례 다녀간바 있고, 극단 '산울림'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에 대한 평을 남기기도 했다. 국내에는 <극마당: 기호로 본 극>(현대미학사, 1993), <드라마의 해부(학)>(청하, 한양대출판부) 등이 번역/소개돼 있다(<극마당>은 원로 연극학자가 '새내기' 연극기호학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지적하는 책이다). 부조리극에 대해서는 그밖에 신현숙, <20세기 프랑스 연극>(문학과지성사, 1997)의 한 장을 참조할 수 있고, 서울대출판부에서 나온 문학용어 시리즈의 <부조리문학>도 요긴하다.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임준서, <반연극의 계보와 미학: 부조리극을 중심으로>(살림, 2004)가 있는데, 베케트, 이오네스코, 장 주네의 3총사 외에 한국 극작가로서 오태석, 이현화, 장정일을 다루고 있어서 이채롭다.

부조리는 세계관이면서 또한 이 세계에 대한 '감수성'인데, 이 감수성을 가장 시적인 문체로 일깨워주는 책은 단연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책세상)이다. 거기서 카뮈는 어느날 갑자기 무대장치가 무너지는 경악스런 상황을 부조리한 상황의 예로 제시한다. 거기서 암시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부조리는 연극(무대)적 상황과 연극적 의식 속에서 가장 잘 표출된다. 해서, 부조리극은 부조리문학의 대표 종(種)이자, 그 자신이 유(類)이기도 하다. 참고로, 국내에 번역/소개돼 있는 5인방의 대표작들을 꼽아본다(해롤드 핀터의 경우는 8권짜리 전집이 나와 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민음사),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민음사), 장 주네의 <하녀들>(예니), 아다모프의 <타란느 교수>(연극과인간), 그리고 <해롤드 핀터 전집>(평민사).

 

 

 

 

 

아쉬운 건 러시아 부조리극이 아직 소개돼 있지 않은 것. 프랑스에서보다 앞선 1930년대 다닐 하름스와 알렌산드르 베젠스키 같은 작가들이 뛰어난 '부조리극' 작품을 남긴바 있으며 1960년대 아말릭 같은 작가의 작품도 매우 재미있다. '언어장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부조리극의 경우 극적 효과의 많은 부분을 언어 유희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왕이면 우리말로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두번째 책은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이제이북스). 책은 1965년에 저자가 워싱턴에서 행한 연속강의를 묶은 것인데, 이번에 믿을 만한 역자(강유원이 공역자로 참여했다)들에 의해 번역되었다. 역자 후기를 참고하여 이 책의 교훈을 요약하면 이렇다. "낭만주의는 결국 개인의 불굴의 의지, 개인의 신념과 이상을 강조하면서 원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타인의 의지를 인정하고 타협할 필요성을 불러일으켰다. 인류는 타인의 이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상도 인정받을 수 없음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된 것이다. 낭만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유산은 바로 이 관용과 이해의 정신이다." '낭만주의의 진정한 유산'으로서의 이 교훈은 낭만주의를 반면교사로 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일 테다.

영국의 저명한 자유주의 철학자 이사야 벌린(1909-1997)은 본래 라트비아 태생으로 여섯 살에 러시아로 이주했다가 혁명 후 1921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망명?). 당연히 러시아와 인연이 없을 수 없는데, <계몽시대의 철학>(서광사, 1992), <비코와 헤르더>(민음사, 1997) 등의 철학서 외에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았지만 <러시아의 사상가들(Russian thinkers)>이란 저서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들과 인텔리겐차들을 다룬 책인데, 특히 투르게네프론과 '여우와 두더지'란 제목의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비교론이 유명하다. 러시아에서는 작년인가 재작년에 두 권짜리로 벌린 선집이 번역돼 나왔는데, <자유의 철학>와 <자유의 역사>가 각 권의 제목이었다(확인해 보니 2001년에 나왔다. 내가 갖고 있는 <자유의 역사>는 러시아에 관한 글모음인데, <러시아의 사상가들> 전체가 포함돼 있다).

여러 학술적 업적으로 벌린은 1957년 기사 작위를 받았으므로 정확하게는 '벌린 경'이다. '칼 포퍼 경'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벌린과 포퍼는 영국식 교양과 자유주의 철학의 쌍두마차이다. 그런 벌린이 마르크스의 평전, <칼 마르크스>(미다스북스, 2001)까지 쓴 건 다 '교양'의 산물이겠다(한편으로 19세기의 대표적인 사상, 낭만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서로 교호적이다. 가령 바이런식 낭만주의는 19세기 전반기에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혁명에 대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국내에 바이런과 바이런이즘에 관한 좋은 책들이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다시 역자들의 말을 옮기면, "칸트나 헤르더, 피히테나 실러 같은 철학자와 사상가들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과 미술의 각 분야를 아우르며 예리한 분석과 풍부한 실례를 쏟아내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교양을 만날 수 있다." 그러니, 자신이 적당히 교양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이라면 필독할 만하다.

한편, 강유원도 어디선가 지적한 것인데, 교양은 언제나 우파의 것이다(배부르다고 과시하는 게 교양이다). 평등주의자로서 좌파는 삶의 퀄리티(품위와 교양)를 따질 겨를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아직도 세계 인구의 1/5이 절대 빈곤층이다). 우파의 '교양'을 대신하는 것은 좌파의 경우 '품성'이다(현실 사회주의에서도 '공산주의자의 품성론'은 어디서나 핵심적인 이슈였다. 배고파도 참는 게 품성이다). 즉 우파가 교양을 따진다면 좌파는 품성을 따진다.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우파는 좌파가 무식하다고 욕하고("저런 배운 것도 없는 천한 것들!"), 좌파는 우파가 돼먹지 않았다고 비난한다("저런 돼먹잖은/파렴치한 인간 말종들!"). 이 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교량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유식한 파렴치함'과 '순박한 단순무식함' 사이에 찢기게 될 것이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잘 보여준 것이지만, 많이 안다는 것은 '유죄'이다. 대개의 경우 (남보다 많이 아는) 지식인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적합하지 않다. 가령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한 러시아 망명시인 브로드스키의 경우. 젊은 시절 남들 노동할 때 일은 하지 않고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그는 재판정에 섰다. 너는 무엇을 했는가? 시를 썼습니다. 누가 너에게 시를 쓰라고 했는가? 너는 사회주의의 밥벌레이다! 요컨대, 브로드스키는 교양 있는 시인이었지만 동시에 파렴치한 밥벌레였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에 지식인 이론분자들의 노력과 투쟁도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그들은 혁명의 성공과 동시에 숙청/제거되어 마땅하다(계급 없는 세상은 지식인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요컨대, 그들은 '사라지는 매개자'이면서 '터미네이터'의 역할을 역사적 사명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 자본주의는 똑똑한 놈 한 명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이건희의 천재론), 사회주의의 구호는 좀 다르다. "가라, 똑똑한 놈들은 가라! 이제 바야흐로 평등한 어중이떠중이(=인민)들의 세상이 오리니."

 

 

 

 

세번째 책은 부르디외의 '하이데거의 정치적 존재론', <나는 철학자다>(이매진). 원제가 그렇게 변형된 건 물론 '장삿속'일 테지만, 이 경우는 최악이라 할 만하다. 역자 후기를 봐도 표제가 그렇듯 변경된 이유에 대해서 아무런 해명이 붙어 있지 않다. 책은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하이데거 읽기인바, 그는 기존의 독해를 모두 거부하면서 자신만의 (적합한)이중적 독해를 제안하고 실행한다. 즉 그는 하이데거에 대한 "(지지자들의) 철학적 독해 대 (비판자들의) 정치적 독해라는 대립구도를 포기하고, 이중적 독해, 곧 정치적이면서 철학적인 독해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서 하이데거 철학의 고유성이 나치즘과 어떻게 연루되어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 역자에 따르면, "하이데거에 대한 부르디외의 비판적 분석은 당대 철학에 의해 억압받아온 사회학의 복수이자, 인문학에 있어서 늘 사회학과 경쟁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한 사회학의 우위를 간접적으로 선언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다."

나치즘과 하이데거의 관계는 20세기 (서양)철학사 최고의 스캔들이다(한국 현대문학사에서라면 춘원 이광수나 미당 서정주의 친일 스캔들에 견줄 만하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적어도 그 중 한 명)가 과연 나치주의자였을까, 라는 문제. 이 스캔들이 다시금 주목받게 된 건 1987년 <하이데거와 나치즘>이란 책이 프랑스에서 출간되면서부터인데, 이후로 하이데거를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많은 논쟁적인 책들이 출간되었다. 시기적으론 1988년에 출간된 부르디외의 책 또한 그러한 논쟁에 한몫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에 대한 우리말 저작으로는 이미 박찬국 교수의 묵직한 연구서 <하이데거와 나치즘>(문예출판사, 2001)이 나와 있다. 그게 부담스럽다면, 제프 콜린스가 쓴 <하이데거와 나치>(이제이북스, 2004)를 훑어볼 수도 있겠다.

한편, 하이데거의 신간으로는 휠덜린의 송가 <이스터>에 대한 강의록이 번역돼 나왔다. <휠덜린의 송가(이스터)>(동문선)이 그것인데, 아쉽게도 내가 사온 러시아본 강의록에는 빠져 있다(러시아어본은 독러 대역본이다). 신간은 하이데거의 파워와 함정이 무엇인지 혹 말해줄지 모르겠다. 참고로, 앞에서 꼽은 부르디외의 책도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다.

 

 

 

 

네번째 책은 지난번에 출간을 기대한다고 언급한 게 무색할 정도로 '빨리' 나온 스피박의 주저,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갈무리)이다. 철학, 문학, 역사, 문화, 네 장으로 돼 있는데, 600쪽이 넘으니까 아주 묵직한 책이다. <다른 세상에서>(여이연)과 함께 스피박 총정리를 하면 되겠다. 한편, 스피박의 탈식민주의론에 대한 비판도 드물지는 않은데, 국내 논자의 경우를 예로 들면 가령 김재용은 <협력과 저항: 일제말 사회와 문학>(소명출판, 2004)에서 스피박의 논리는 '피장파장의 논리'라고 비판한다. 고명섭이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에서 간추린 바에 따르면, 스피박의 논리는 표면적으로는 식민주의를 비판하지만, 그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식민주의에 포섭된 논리로 이해함으로써 결국에는 저항의 가능성을 지워버린다(해서 "일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 역시 국민국가와 내셔널리즘의 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저항이 있을 수 없고, 친일이나 반일이나 다를 것 없다는 논리인 것"). 스피박을 읽을 때 그런 비판도 염두에 둔다면, 좀더 긴장감있는 읽기가 될 듯하다.

며칠 전 세계여성대회가 서울에서 개막되었는데(참석예정이었던 스피박은 막판에 사정으로 불참했다고) 거기에 발맞추듯 나온 책이 방대한 분량의 2권짜리 <여성주의 철학>(서광사)이다. 얼마전에 나온 <여성철학자>(푸른숲)와 앞서거니 뒤서거니이다. 문제의식은 비슷하지만, 접근방향은 좀 다른데 그 차이는 '여성' 대 '여성주의'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지. 어쨌거나 이 세(네) 권의 책 모두 출산드라 이상의 아주 풍만한 부피를 자랑한다. 여성들의 세상이 그렇게 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성학 이론서를 한 권 더 덧붙이자면, 스피박과 같이 인도 출신의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의 <경계없는 페미니즘>(여이연). 부제는 '이론의 탈식민화와 연대를 위한 실천'이며, 430쪽이어서 거명한 책들 중 가장 '날씬하다'.

 

 

 

 

끝으로 다섯 번째 책은 우리에게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창비, 2003), <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문화과학사, 2003), 그리고 임지현 교수와의 대담 <오만과 편견>(휴머니스트, 2003)으로 잘 알려진 사카이 나오키 교수의 <번역과 주체>(이산)이다. 그 자신이 어느 자리에선가  곧 소개될 거라고 했던(혹은 소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바로 그 책이다. 책소개를 옮겨오면, "저자는 일본인이나 일본어라는 균질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내부에서 일본사상이라는 역사적 연속성이 만들어져왔다는 것은 일종의 환상으로 간주한다. 그리하여 언어적 통일체와 그것에 기반한 국민공동체 해체를 옹호한다. 일본어나 일본인이라는 환상을 드러냄으로써 언어적.사회적 잡종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책은 그 자체로 언어적 잡종성을 체현한다.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글은 모두 영어에서 일본어로 혹은 일본어에서 영어로 호환적으로 쓰였거나 번역되었다. 또한 한국어를 모어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애초에 균질적인 언어에 의해 지탱되는 공동성을 신뢰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그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사카이 나오키의 독특성을 구성한다(적어도 그렇게 평가되어 그는 미국대학에서 연구를 받았고, 현재는 미국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어쨌든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주제 자체는 흥미로우며 나로서도 관심이 간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역시 신간인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돌베개)와 함께 강상중의 <내셔널리즘>(이산, 2004)과 더글러스 로빈슨의 <번역과 제국>(동문선, 2002) 등이다('내셔널리즘'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출간되고 있다). 키워드는 번역, 주체, 내셔널리즘, 제국(주의), 탈식민주의이다. 하지만, 이걸 읽는 데 필요한 '연구비'를 조달할 수 없는 지금의 나로선 그저 바라만 볼 따름이다...

05. 06. 23.

P.S. 들뢰즈의 <시네마2>에 관한 이야기 등의 '부록'은 나중에 보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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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6-23 22:47   좋아요 0 | URL
휴~~, 이제 다 읽었습니다. 읽을 수 있는 것 또는 읽고 싶은 것 메모:<부조리극>, <언어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 겹치지 않는 책: 게리 스나이더의 <지구, 우주의 한 마을>(창비)

로쟈 2005-06-24 09:42   좋아요 0 | URL
저만큼 책 욕심이 많으시군요.^^

돌바람 2005-06-24 13:52   좋아요 0 | URL
정성스런 글에 대한 예의라고 봐주십시오. 제가 언제 저걸 다 읽겠어요. 읽고 싶을 뿐이지... 시간은 없고 할일은 많습네다... 최소한 안 읽고 읽었다고 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딸기 2005-06-24 15:33   좋아요 0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아마도 읽지 않을 책들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권은 가져보고 싶네요. 이사야 벌린의 <낭만주의의 뿌리>하고 사카이 나오키 <사산되는 일본어, 일본인> 들춰보기라도 했으면. :)

비로그인 2005-06-24 21:56   좋아요 0 | URL
이번에도 로쟈님 글에서 여러 정보 얻어갑니다. 로쟈님, 멋쟁이..;;

릴케 현상 2005-06-25 00:44   좋아요 0 | URL
이렇게 많은 책을 언감생심 바랄 수는 없어서, 한권만 골랐습니다. 낭만주의의 뿌리
요거 하나라도 읽어내얄 텐데^^

로쟈 2005-06-27 16:19   좋아요 0 | URL
관심들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로선 제일 편하게 쓰는 글인데, 매번 추천수는 제일 많네요.^^
 

대학가는 학기말이고 어제는 한동안 (주로 마음만) 바쁘게 했던 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연구실 책상정리를 한참 하고 나서 몇 자 적는다. 세월은 바쁘게도 지나가지만, 일없이도 지나간다. 한 학기 동안 해놓은 일들을 떠올려보니까 게을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게으름에 대한 핑계는 적지 않으므로 법정에라도 선다면 나 자신을 충분히 변호할 수 있지만, 그래도 게으른 건 게으른 것이라는 의미에서 나는 게을렀고, 그 게으름은 '절대적 게으름'이다. 시간은 그 게으름을 통과해 가며, 그에 대한 우리의 후일담은 <벚꽃동산>의 마지막 대사처럼 "아, 산 것 같지 않구나..."이다. 최근에 개봉한 한 영화의 제목처럼 우리는 '태풍태양'처럼 살고 싶지만, 그저 편안하고 아무일없는 오후를 선택한다(<태풍태양>은 흥행에 참패했다고). 그리고는 말한다. "아, 좀 게으르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이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 게르돈, 게르델레스, 겐트, 게겔, 게체, 게르셀, 게르그송, 게코, 겔레즈, 게리다, 게젝...

 

 

 

 

첫번째 책은 게으른 자들의 철학사에서는 '게르트르'로 통하는 사르트르에 관한 책이다. 장 폴 사르트르(1905-1980). 올해는 이 20세기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최대 지식인의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이고, 곧 그의 생일(6월 21일)이다. 그러니, 그걸 기념해서라도 그의 책을 한두 권 읽어둘 만한데,  변광배의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살림)이 추천할 만하다. 일단 게으른 자들은 <존재와 무>(1943) 번역본(삼성출판사, 1991)의 방대한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울 뿐더러(사르트르는 원서 722쪽의 이 책을 2년만에 썼다) 30분 이상 집중해서 읽어내기도 힘들다. 하니, 다이제스트가 필요한 것이고, 'e시대의 절대사상' 시리즈의 신간으로 나온 <존재와 무>는 그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그냥 술술 읽힌다).

저자는 이미 작년에 <장 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살림, 2004)라는 책으로 한번 워밍업을 해본 지라 사르트르에 관한 이야기라면 나름대로 노하우를 터득한 듯싶다. 사르트르와 <존재와 무>에 관한 주변적인 얘기를 소개하고 <존재와 무>의 주요 개념들을 해설하고 있는 방식으로 책은 전개되는데, 입문서로서 깔끔하다. 이번 여름호 <문학과사회>에도 '우리에게 사르트르는 누구인가'란 특집이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에 부쳐'란 부제를 달고 실려 있는데, 윤정임, 변광배, 서동욱 제씨의 글이 실려 있다. 내가 받은 첫인상은 사르트르 전공자도 세대 교체가 됐구나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몇년 전에 나온 <사르트르와 20세기>(문학과지성사, 1999)에서는 내 기억에 이름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정명환, 박이문, 김현, 박정자 등의 책/글을 통해서 사르트르를 눈에 익힌 나로선 '격세지감'을 느낀다.

 

 

 

 

 

변광배 버전의 <존재와 무>에는 부록으로 관련서(참고문헌)들이 나열돼 있는데, 더 읽어야 할 한국어 책의 목록에 박이문의 책들이 빠져 있는 건 유감이다. 오래 전 책들이지만, <인식과 실존>(문학과지성사, 1982)나 <삶에의 태도>(문학과지성사, 1988) 등의 책에는 사르트르에 관한 중요한 글들이 수록돼 있으며 내 경험상 사르트르 입문격으로 아주 유용하다. 이미 제목에도 비치지만 사르트르에게서 중요한 것은 삶과 세계에 관한 '진리'가 아니라 '삶에의 태도'이다. 그 자신이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준 건 아니지만, 자서전 <사물의 언어>(민음사, 1989)에 서술돼 있는 박이문의 삶은 사르트르적 정신에 투철하다(그가 인생의 책으로 꼽고 있는 것이 사르트르의 <구토>이다). 연초에 나온 박이문의 <행복한 허무주의자의 열정>(미다스북스, 2005)는 그런 대로 그의 사르트르적인 삶의 태도를 잘 간추리고 있다. '지성의 궤적'을 다룬 1부의 첫머리에 오는 것이 '사르트르와의 만남'이 아닌가(작년 가을 데리다의 사망 이후 발표되었던 나의 스승 데리다'란 글도 실려 있다). 해서 한국에서의 사르트르를 말하면서, 박이문 선생을 빼놓은 것은 실례에 가깝다.

사르트르에 관한 전기로는 안니 코헨 솔랄의 3권짜리 <사르트르>(창, 1993)이 아직까지 가장 충실한 소개서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문학론에 대해서는 정명환 선생이 옮긴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 필독서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해서는 그의 팜플렛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문예출판사, 1999)를 참조하는 것이 필수적.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한마당, 1999)를 읽어야 한다. 조금 전문적인 차원에서 분석철학적 관점에서의 사르트르 읽기는 아서 단토의 <사르트르의 철학>(민음사, 1985)가 있으며, 그 책의 역자 신오현의 <자유와 비극: 사르트르의 인간 존재론>(문학과지성사, 1979)도 참조할 수 있다(학부 2학년생이었던 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존재와 무>의 영역본과 러시아어본(2004, 개정판), 그리고 두 개의 우리말 번역본을 갖고 있다. 언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좀 읽어주는 일이 남아 있는 셈. 

 

 

 

 

두번째 책은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권태>(열림원). 1960년작이니까 무려 45년만에 소개되는 책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그의 책이 <표범 같은 여자>(문학사상사, 1997)이니까 국내에서 모라비아는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우를 받고 있는 셈인데, 이번 작품도 최근 프랑스의 영화감독 세드릭 칸에 의해 영화화된 작품이 국내에 개봉되면서 원작이 겸사겸사 소개되는 감이 있다(책의 표지로 영화의 스틸사진이 사용됐다). 소개에 따르면, "모라비아는 성과 돈을 주제로, 파시즘 체제와 현대 산업사회에서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 특히 무관심, 야망, 경멸, 순응주의, 권태 등의 심리를 밀도있게 그려낸 바 있다." 이전에 세계문학 전집 등에 실려 있던 모라비아도 나는 읽지 않았었지만(나는 모라비아가 부르주아의 '나른한 권태'를 다루는 작가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나의 편견에 그런 소설들을 읽을 만큼 나는 한가하지 않았다) 이번엔 제대로 책이 나온 듯하므로 한번 읽어봄 직하겠다(더불어 부르주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요즘 나른하고 피로하다).

 

 

 

 

 

<권태>의 역자 이현경씨는 에코의 <바우돌리노>(열린책들, 2002)와 칼비노의 <나무 위의 남작>(민음사) 등의 칼비노 선집을 옮긴 전문가이다.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거장을 꼽으라고 한다면 모라비아와 칼비노는 빠지지 않을 터이므로, 번역 작가/작품의 비중으로만 판단하자면 이현경씨는 20세기 이탈리아 문학의 가장 중요한 번역자이다. 적어도 한국의 독자들에게 그(녀)는 '모라비아'이고 '칼비노'이다. 번역은 해볼 만한 일이다.

 

 

 

 

모라비아의 소설과 함께 지난주에 나온 신작소설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문학사상사)과 박민규의 <카스테라>(문학동네)도 있지만, 한권을 읽어야만 한다면, 모라비아를 읽는 수밖에. 한국일보의 서평을 보니까, 하루키는 최근의 인터뷰에서 "사회나 가족과 떨어지고자 하는 '디테치먼트(detachment)적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 '커미트먼트(commitment)'적 삶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중"이라고 답했다 한다. 선입견이긴 하지만, 그건 내가 그동안 단 한편의 하루키 소설도 읽지 않은 이유도 된다(그런 걸 이제서야 생각한단 말인가?). 나는 '디테치먼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혼자였다" 같은 시구에 나는 감동받지 않는다. 그건 그냥 기분이거나 '개인주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한번도 '디테치'되지 않는다. 삶으로부터, 그리고 이 세계로부터. 자기 방에 혼자 처박혀 있다고 혼자인 걸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신작의 줄거리는 이렇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기 싫은 19세 소녀 마리는 심야의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다, 언니의 고등학교 동창인 다카하시를 만나게 된다. 마리는 그의 소개로 러브호텔 '알파빌'에서 손님에게 맞아 쓰러진 중국인 매춘부의 말을 통역해 주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는 알파빌에서 일하는 왕년의 레슬러, 중국인 조직, 곡식.벌레 이름으로 불리는 종업원 등 기묘한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런 줄거리대로라면 그의 '커미트먼트'는 아직 공동체 범주에 머무르는 것이 된다. 국가(=폭력)과의 조우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니까. 경제학의 차원에서라면, '(화폐에 의한)교환'이 아닌 '증여'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가라타니 고진 같은 똑똑한 비평가를 둔 나라에서 아직도 '상상적인' 소설들이 나온다는 건 의외이다(하루키 애독자들의 반론을 기다려본다).

역시나 한국일보 서평에 인용된 바에 따르면, 첫 소설집 <카스테라>에는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다.", "이미,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 버린 걸" 등의 문장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한다. 세상과 불화한 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데(기자는 '불화하다'란 말을 거리낌없이 쓰는데, 그런 '한국어'의 이물감은 '조까라, 마이싱이다'란 비속어를 소설에서 만나는 이물감에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세상'과 '나'를 그렇게 이격시켜버린 세계관 자체이다. 아무리 쓰라리더라도, 그것은 낭만주의적 세계관이며, '아름다운 영혼'의 세계관이다(사실주의에서라면 '나'는 '세계'로부터 분리불가능하다). '국제사회'가 냉장고 속의 '카스테라'로 변신할 수 있는 건 그런 세계관이 전제되기에 가능하다. 그의 소설들이 아주 유쾌하다고 하지만, 그 유쾌함의 이면은 유치함이다. 아웃사이더들이라고 해서 유치함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덧붙임: 중앙일보 서평을 보니까, 작가는 6년째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열심히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그런 것이 소위 글쓰기의 '진정성'인바(그의 진정성은 글쓰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생산'에 있다), 그의 글쓰기가 그 자체로 이해되는 대목이다. 박민규에게 소설쓰기란 그 나름의 '지구를 지켜라', 혹은 '어머니를 지켜라'인 것이다. '무규칙 이종 작가'란 닉네임을 한때 달고 다니기도 했었는데, 그는 말 그대로 '이종 격투기' 작가이다. 기존의 모든 문학적 규칙에 도전하는 것은 단순히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다(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다). '생계'를 위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문학은 유쾌/유치하지만, 그건 이유 있는 유쾌/유치함이다. 그의 소설집이 많이 팔려나가길 바란다(관객 없는 이종 격투기만큼 슬픈 것도 드물 테니까)...  

 

 

 

 

세번째 책은 탈신민주의 이론가 스피박에 대한 소개서로 스티믄 모튼의 <스피박 넘기>(앨피). 루틀리지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의 세번째 권으로 나온 책이다(이미 나온 1, 2권은 지젝과 사이드). 원서는 지난 2003년에 나왔는데, 그때 교보에서 책을 처음 보고 나는 덥석 집어들었었다. 내게 스피박은 탈식민주의 이론가 이전에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영역자로 각인돼 있는데(내가 더 관심있는 쪽도 그쪽이다), 알고 보니 스피박은 데리다와 깊은 교우를 나누었던, '예일 마피아'의 거두 폴 드 만의 제자이다. 제3세계(인도) 출신으로서 그녀가 한 일은 데리다와 폴 드 만의 해체주의를 정치적/경제적 컨텍스트로 확장시킨 것(거기서 '서발턴'이란 주체/주제와 만나게 된다). 신간은 그러한 스피박의 프로젝트에 대한 요긴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스피박의 주저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3)는 이미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스피박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와 함께 더 소개되어야 할 책은 (우선적으론) <탈식민주의 이성 비판>과 대담집 정도가 아닐까 싶다. 스피박에 대한 또다른 입문서로서는 그녀를 사이드, 호미 바바 등 다른 탈식민주의 이론가들과 함께 다루고 있는 바트 무어-길버트의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한길사, 2001)이다. <스피박 넘기>의 참고문헌('스피박의 모든 것')에는 원서의 서지만이 들어가 있고 이 국역본은 누락돼 있다(그래도 '스피박의 모든 것'?).    

 

 

 

 

네번째 책은 중국사학자 레이 황(황런위)의 <중국의 출로>(책과함께). 레이 황의 책을 한번이라도 읽어본 독자라면 그의 독특한 역사관과 서술에 흥미를 느낄 법한데, 내 경우에도 그랬다. 그의 책으론 국내에 처음 소개된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 1997)를 나는 당시 신생출판사에서 얻어 읽었는데(그 출판사에서는 러시아 현대 소설의 번역출간도 검토했었다. 엎어졌지만), 직접 책을 번역한 출판사 사장의 말로는 미국 대학의 필독서 목록에 들어가 있으며 "역사서도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라고. 명불허전이라고 중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에게도 책은 아주 재미있게 읽혔다. '매크로 히스토리'(Macro History)라고 하는, 역자의  독특한 사관(史觀)도 매력적이었고. 이후엔 당연히 레이 황의 모든 책이다(중국사학자로 조나단 스펜스를 나는 레이 황과 같은 급으로 친다).

레이 황은 지난 2000년에 타계했다고 하므로, 이번에 나온 책은 그의 유작쯤 되는 듯싶다. '레이 황의 중국사 특강'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데, 말년의 그의 강연문과 기고문들을 모든 책인 듯싶다. 이왕 레이 황의 모든 책이라고 했으니까 번역된 책들을 나열해 본다. 가장 먼저 출간됐던 건 <거시중국사>(까치, 1997), 이 책을 다시 옮긴 것이 <중국, 그 거대한 행보>(경당, 2002)이다(나는 '거시중국사'란 타이틀이 더 마음에 든다). 그리고 <1587, 아무일도 없었던 해>(가지않은길)와 같은 책을 다시 옮긴 <1587 만력15년 아무일도 없었던 해>(새물결, 2004) - 이건 작년에 내가 없는 새 나온 책이다, 아무일도 없진 않았던 것!  -를 들 수 있겠다. 2001년에는 <자본주의 역사와 중국의 21세기>(이산)와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하다>(푸른역사)가 차례로 나왔다. 후자는 레이황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려나간 책이다. 해서, 원서로 치자면 5권 7종이 현재 나와 있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역시 역사서로 분류되는 존 리드(1887-1920)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책갈피).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전에 <세계를 뒤흔든 10일>(두레, 1986)로 번역되었던 책이다(참고로, 러시아사의 '레이황'과 '조너선 스펜스'는 아직 없다. 러시아어로 번역돼 있는 호스킹과 파이프스 정도가 근접하지만, 유려함과 유장함에서 그들을 따르지 못한다). 이전에도 이 책에 대해선 언급한바 있는데, 이번에 절판된 책의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되어 반갑다. 소개에 따르면, "미국의 진보적 언론인 존 리드가 20세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인 러시아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쓴 르포 문학. <카탈로니아 찬가>, <중국의 붉은 별>과 함께 르포문학의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존 리드에 대해서는 워렌 비티가 제작과 주연을 맡은 영화 <레즈>(1981, 194분)를 참조할 수 있다. 다이언 키튼이 리드의 유부녀-연인으로 등장하며 영화는 혁명보다는 이들간의 로맨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여간에 그는 여성운동가 루이스 브라이언(다언 키튼)과 함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러 떠나게 되며 돌아온 이후에도 공산주의 운동에 열성을 올리지만, 모스크바에서 티푸스에 걸려 이른 죽음을 맞는다. 그의 나이 불과 33세.  

"존 리드가 혁명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와 그 주변 도시들, 혁명의 두 번째 격전지던 모스크바까지 곳곳을 누비며 쓴 이 책에는 레닌.트로츠키 같은 볼셰비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참호의 병사들, 공장 노동자들, 비참한 처지의 농민들까지 러시아 혁명의 수많은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레닌이 직접 서문까지 써준 이 책은 말 그대로 러시아 혁명의 가장 생생한 현장기록이다. 러시아계 한국인 박노자의 증언: "외국인이 쓴 책을 통해 자신이 태어난 곳의 과거와 현재를 더 선명하고 진실하게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내가 태어난 러시아에 대해 그런 귀중한 깨달음의 시간을 선사해 준 책이 바로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다.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의 독재가 왜곡하고 정권 유지의 프로파간다 수단으로 전용한 1917년 혁명의 진실한 모습을 나는 바로 이 책에서 배웠다."(그러고 보면, 박노자는 신레닌주의자이다.) 

해서, 그런 걸 이 책에서 배울 수 있다. '태풍태양'의 삶에 대한 갈증을 이 책에서 조금쯤을 달래볼 수 있지 않을까?(그나저나 요즘 '태양태풍'의 삶은 혁명이 아닌 인라인 스케이팅에서나 가능한 걸까?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바뀌지 않는 레퍼토리 속에서 운동도 이론도 얼마나 게을러진 것인지.) 그리고 이왕이면, <세계를 뒤흔든 1968>(책갈피, 2004)도 <세계를 뒤흔든 열흘>과 함께 나란히 꽂아둘 일이다. 그러고서 숙고할 일이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두 혁명에 대해서. 혁명의 불가피성에 대해서. 혁명의 피냄새에 대해서. 그리고 도래할 (불)가능한 혁명에 대해서...

05. 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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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6-11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란여우 2005-06-11 20:43   좋아요 0 | URL
1등 놓쳤군요.
그래도 이렇게 공부를 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칸트와 오리 너구리 손에 넣었어요.
이번에도 좋은 책 정보 감사드려요. 요즘 이런 책 정보가 제 낙입니다.^^

로쟈 2005-06-11 20:49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저도 찔끔찔끔 읽고 있습니다. 독일어본 번역이면서 굳이 그걸 티내지 않으려고 애쓴 번역이더군요...

마냐 2005-06-12 00:24   좋아요 0 | URL
인라인 타는 젊은 것들을 훔쳐보지 않고도....갈증을 달래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새겨두죠.

killjoy 2005-06-12 03:15   좋아요 0 | URL
하루키에 대한 코멘트 와 닿았습니다. 근대문학의 종말이라는 제목이었던가요. 얼마 전 문학동네에 실린 고진의 글에도 하루키에 대한 언급이 있던데요. 내수용이자 무역용 상품이라는 취지의 짤막한 단언이었습니다. 저로서는, 하루키와 스노우캣이 바로 디테치먼트의 환상을 상품화한 경우라고 생각되는데, 로쟈님이 스노우캣을 아실런지. ^^;

로쟈 2005-06-13 08:52   좋아요 0 | URL
마냐님/ <태풍태양>은 특별히 끌리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망했다'고 하니까 안타깝더군요. <고양이를 부탁해>처럼 뒷북이나 쳐야겠습니다. killjoy님/ 스노우캣이라구요? 무슨 캐릭터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동네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killjoy 2005-06-13 17:24   좋아요 0 | URL
캐릭터 이름 맞아요!

rebis 2005-06-14 11:48   좋아요 0 | URL
음... 세상엔, 하루키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루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고 작가를 평가한다는 것은 전세계 하루키 팬들에 대한
실례가 될 것 같네요..
하루키는 단편을 먼저 읽으셔야 그 맛을 알 수 있습니다.

marxbook 2005-06-14 12:54   좋아요 0 | URL
<세계를 뒤흔든 열흘> 읽었는데요.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네요. 이런 생각은 레닌주의가 아니고 스탈린주의인 것 같습니다.
레닌은 전위조직 건설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노동자들의 해방은 오직 노동자 계급 자신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맑스의 주장을 옹호하며, 나로드니키의 대리주의에 반대했습니다. <열흘>에서도 레닌이 일반 노동자들에게 호소해 고참 볼셰비키들에 맞서 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릴케 현상 2005-06-14 14:54   좋아요 0 | URL
스탈린 얘기가 나와서 그러는데요 제 수준(이란?)에서 읽을 만한 스탈린에 관한 좋은 책이 있을까요?

로쟈 2005-06-15 11:24   좋아요 0 | URL
yujung52님/ 저는 하루키를 읽지 않았지만, 하루키를 많이 읽은 사람들의 의견은 참조하고 있습니다. 가령 고진 같은 비평가에 기대자면, 하루키는 훌륭한 '문화상품'입니다. 문학은 좀 다른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태훈님/ 글쎄요... 레닌에 대한 이해도 다양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제나 이를 수밖에 없는) 혁명의 타이밍에 대해서 판단하는 '주체'도 '민중'이고 '노동자 계급'인지 저로선 의문입니다. 스탈린주의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주체의 자리에 한번도 서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스탈린은 언제나 역사의 대행자를 자처했지, 주체를 자임하지 않았습니다. 자명한 산책님/ 저도 별반 읽은 게 없지만 스탈린에 대한 책 자체가 드물지 않나요?(아이작 도이처의 절판된 전기가 다시 나온다면 모를까.) 러시아 서점에 즐비하게 꽂혀 있던 스탈린과 그의 시대에 관한 역사서들이 생각나는데, 러시아에서 '스탈린 문제'는 우리의 '박정희 문제'와 아주 유사합니다. '독재'와 '근대화'가 키워드이죠(급수로 치자면, 2천만은 숙청한 스탈린이 그래도 한 수 위이지만).

2005-06-16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6-16 17:47   좋아요 0 | URL
<스탈린이즘>(문학예술사), <스탈린 혁명>(신서원) 등이 참고할 만한 책인데, 현재는 모두 절판된 책들입니다. 스탈린 문화와 관련해서는 보리스 그로이스의 <아방가르드와 현대성>(문예마당)이 가장 참신한 책입니다. 한데, 국역본은 좀 부실한 번역이어서 주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릴케 현상 2005-06-17 10:43   좋아요 0 | URL
^^감솨합니다

yoonta 2005-07-05 04:49   좋아요 0 | URL
"사실 혁명의 동력은 '민중'이 아니라, 전위조직이다. 그게 레닌주의의 교훈이다. 요즘의 민중주의자들은, 혹은 다중주의자들은 그런 교훈을 폐기하고 있는 듯하다".
이부분.....전 다중주의자도 민중주의자도 아닙니다만..레닌주의의 교훈자체를 문제삼는 반레닌주의자들에게 레닌주의의 교훈을 되새기라는 듯하는 대목이라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문구네요...

"'혁명의 주체'라는 민중은 (노동자/농민이라는) 선험적인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인 범주가 아닐까? 그렇다면 누구에 의해 구성되는지를 물어야 하지않을까?"
혁명의 주체는 선험적 범주가 아니라 구성적 범주?
혁명의 주체를 전위에 의해 구성될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벌써 레닌주의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고요..님의 전제에서라면 당연히 구성적 범주일수밖에 없는 혁명의 주체로는 누구에 의해 그것이 구성되어지는가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겠죠..-_-
그러나 혁명의 주체가 어떻게 (전위에 의해) 구성되어지는가라고 묻는 방식이 아니라 혁명의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자체가 구성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묻는 방식이라면 결론은 전혀 다를수 있겠죠.. 혁명의 주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의 구성을 이야기하는 것...혁명의 주체라는 것은 미리 주어진 것(선험적인 것)이 아니고..때문에 그것은 우리같은 전위가 어떻게 만들어나가는가하는 것(구성적인 것)이 문제야 하는 방식은.. 저처럼 레닌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이자 오만으로 밖에는 안보이는 군요...

로쟈 2005-07-05 12:10   좋아요 0 | URL
예상과 다르게 저는 레닌주의자가 아닙니다만(레닌주의자가 이런 '좀스런' 서재질이나 하고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그런 '입장'을 언급했을 뿐입니다), 궁금한 건 전형적인 레닌주의자들의 독선과 오만을 비판하는 반레닌주의자(?)의 포지션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이 비밀이 아니라면...

yoonta 2005-07-05 14:16   좋아요 0 | URL
로쟈님이 레닌주의자가 아닌데 많고 많은 "입장"들 중에서 하필이면 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듯한...글을 쓰신게 제가 님을 레닌주의자로 오독을 하게 만든 일차적 원인아닌가요? 그렇게(윗 댓글처럼) 말씀하신다면 저도 반레닌주의자들의 "입장"을 언급했을 뿐이므로 반레닌주의자들의 포지션에 대해서는 대답할수없음(혹은 알수없음)이라고 해야 공평하겠군요..그것이 비밀이아니라면...

로쟈 2005-07-05 14:40   좋아요 0 | URL
어떤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 '주의자'가 되어야 하는지요? '저같은 반레닌주의자?'란 yoonta님의 표현이 '언급'에 해당하는 거라면 저도 더 질문드리지 않겠습니다...

yoonta 2005-07-05 16:14   좋아요 0 | URL
물론 어떤 '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겠지요..하지만 로쟈님도 레닌주의자는 아닐지라도 레닌주의적인 입장을 언급하시는 '경향성'과 '선택성'은 있는 것 같은데..아니라면 할말 없구요..-_-
저도 '반레닌주의자'인지 아니면 어떤 '주의자'는 아닌 '반주의자주의'인지는 때로는 분명하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어떤 내용에 대해 입장과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무슨무슨주의자라고 불리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는 때로는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작동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런 점에서 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저의 시각에는 로쟈님이 어떤 주의자로 보였다는 점에 대해서 너무 기분나빠 하시지는 마시길바랍니다..^^

로쟈 2005-07-05 16:37   좋아요 0 | URL
또다른 오해의 소지가 있을까봐 말씀드리자면, 저는 레닌주의자이길 거부하는 게 아니라 레닌주의자에 미달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같은 질문을 감당할 만한 위인이 못 되기 때문에...
 

막간을 틈타 몇 자 적는다. 몇 권에 대하여. 흔히 전체주의 사회라고 지칭되는, 그래서 모든 인민이 철저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고 간주되는 스탈린 시대 소련사회에서도 '인민들'은 (직접적/공식적인 방식은 아니었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다 표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령, <1984년>(문예출판사/민음사)이나 <멋진 신세계>(문예출판사)에서와 같은 '거의 완벽한' 통제사회는 아마도 '이론'이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들 반유토피아 소설의 원조가 되는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이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긴급한 프로젝트에 발목이 잡혀서 학교에 나와 있으면서도 손가락은 이런 식으로 '탈주'하며 자신의 '향락'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변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엔 우리가 말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지난주에는 고맙게도 나에게 부담을 주는 책들이 한권도 나오지 않았다. 부담을 주는 책들이란 (1)급하게 읽어야 하는 책, (2)그런데, 읽기가 버거운 책(영어식 표현이 'great books'라고), (3)게다가 값비싼 책이다. 부담감의 난이도는 그런식으로 증가하는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는 고난도의 책이 없었다는 것(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무 없다 싶어서 네댓 종의 북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찾은 것이  엘스베트 볼프하임의 가벼운 평전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독일 사람이고 슬라브문학을 전공한 문학애호가이다(약력에는 강단에 몸담았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 러시아문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고 소개돼 있는데, 약간의 뒷조사를 해보니까, <안톤 체홉>(1996), <불가코프>(1996) 등의 저서를 갖고 있고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2000년 신작이다. 203쪽 분량이니까 원서로는 150-160쪽 정도의 분량일 것이고 나로선 특별히 기대할 만한 내용이 없어 보인다. 이미 마야코프스키의 전기와 관련해서는 <마야코프스키>(까치글방, 2001재판)이 나와 있고, 절판됐지만 후고 후퍼트의 <나의 혁명, 나의 혁명>(역사비평사, 1993)도 207쪽 분량이었다. 볼프하임의 책은 그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대신에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묶었다는 게 특장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론 번역서들이 이전에 많이 출간됐었지만(1990년 전후였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해져 가는데, 신간은 그에 관한 기억을 다시 되살려줄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도 몇 년 전부터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다시 편집돼 나오는바, 작년에 나는 두툼한 책 네 권을 구입했었다. 그의 회고록 2권은 별권이고. 영화사나 혁명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위한 책이 과연 쉽게 (번역돼)나올 수 있을는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회고록은 889쪽 짜리로 영역돼 있다. 영화론은 저명한 소련영화사가 제이 레이다가 엮은 책 2권이 있고, 최근엔 리처드 테일러가 엮은 선집도 나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연구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하버드대출판부, 1994)가 영어권의 가장 유용한, 에이젠슈테인 가이드북이다(그만한 연구서는 러시아에서도 나온바 없지 않을까 싶다. 모스크바의 대형서점들에 처음 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학' 책들이 없을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박물관'에서 에이젠테인 영화의 카메라나 소품 등을 구경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러시아쪽 책부터 소개하는 건 나로선 불가피하다. 두번째 책은 그걸 중탕시키기 위한 꼽은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맛>(강). 동아일보 리뷰에 굉장히 크게 소개가 되었길래 내겐 생소한 이름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까 <마틸다>(시공사)의 저자였다. <마틸다>는 내가 드물게 읽어본 어린이 책('주니어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인데, "천재이지만 어리석은 부모와 학교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틸다의 학교생활과 어리석은 어른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 이 요약에 빠져 있는 건 마틸다가 '천재적인 독서광'이라는 사실. 당연히 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인데,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그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생업을 위해서 학원강사로 뛸 때 초등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찾다가 고른 게 <마틸다>였다. 내가 두어 개의 에피소드들을 복사해서 나누어주고 줄거리를 말해봐라, 느낀 점을 써라 등등의 주문을 학생들에게 했다. 비록 기대와는 다르게 '나도 마틸다처럼 독서광이 되고 싶어요'란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나는 어쨌든 (어른을 괴롭히는 일에 있어서) 마틸다 못지 않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잊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알드 달이었던 것.

<마틸다>를 떠올려보니까 입심 하나로 유명 여배우와 결혼했다는 작가의 '영웅담'도 허황돼 보이진 않는다. 그가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는 것도 믿어줄 만하다(국내에도 이미 '로알드 달 베스트'가 3권 짜리로 나와 있다). 물론 이번에 나온 '선집'은 어른용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영목씨 왈 "재미없다는 쪽에 당신이 내기를 걸면 아마 남아날 손가락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소설가 성석제가 거들기를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이 정도면 거의 칼만 안든 수준 아닌가?


 

 

 

사실 달(Dahl)이란 이름에서 내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로알드가 아니라 로버트이며, 로버트 달은 저명한 정치학자이다. 출간순서를 역순으로 꼽으면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문학과지성사, 1999), <민주주의>(동명사, 1999) 등이 그의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민주주의'론의 권위자란 게 팍팍 드러난다. 한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란 테마로 책을 좀 읽어보려고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로버트 달 정도 읽어주면 절반은 카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요즘은 다시 전체주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어쨌든 같은 성씨를 쓰는 걸로 봐서 로알드와 로버트가 인척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지 뒷조사할 여력은 없지만(알라딘에는 세계 미스테리 어쩌구 하는 책들도 로버트 달의 책으로 뜨는데, 로알드와 로버트를 혼동한 착오이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개마고원)은 지나가는 김에 꼽아본 책이다. 아직 정치의 계절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현대의 '상시적인' 정치체제라는 걸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강준만과 떼놓을 수 없는 출판사에서 나왔으므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지점을 갖는지 모르겠고.  저자인 헤르만 셰어의 말을 다시 옮겨둔다. "민주주의는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을 위해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정치인, '정치계층', '정치계급'에 대한 일반화된 폄하와 개별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더욱 정열적이고 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참여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 민주주의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세번째 책은 <맛>의 역자인 정영목씨와 공역서 <세계를 뒤흔든 반항아 말론 브란도>(푸른숲, 2003)까지 낸바 있는 한겨레의 문화부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그린비)이다. 소개에 따르면, "출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가 예민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쓴 19권의 책에 대한 서평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은 모두 우리 학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바꿔보려 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자들이 쓴 책 19권에 대한 서평집이라는 것. 아직 실물을 보지 않아서, 그리고 목차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아서 19권의 목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가닥하는 식견과 의식을 갖춘 저자이기에 읽어봄 직하겠다(내게 고기자는 '벤야민'의 표기를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기자로 각인돼 있는데, 시집을 낸 경력도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생각건대, 그러한 고집은 기자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것이지 않을까?).

요즘은 이름이 잘 눈에 띄지 않아 퇴직하거나 휴직한 게 아닐까 생각되는 이로 역시 한겨레의 이상수 기자가 있다. 기자생활과 병행하여 그는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 부산물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길, 2001)이었고, 내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이 책의 일부는 고등학생들 논술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해서, 고기자의 <지식의 발견>은 내게 이기자의 <오랑캐의 즐거움>과 나란히 놓인다. 억지스럽지만, 둘을 섞어서 <오랑캐의 발견>이나 <지식의 즐거움>이란 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 놓도록 하겠다. 하긴 이런 조합도 가능하군. '지식(인)=오랑캐' '발견=즐거움'.

 

 

 

 

네번째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서평마다 미국의 잡지 <애틀랜틱 먼스리>의 헌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물론 대중에 대한 혐오와 독설로 가득 차 있는 책 자체는 세기의 책에 값하진 못하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것이기에 <대중의 반역>이 갖는 대표성을 얼마간 인정 못할 것도 없겠다. 나는 이전에 한마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번에 보다 좋은 번역본이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책이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는 건 다소간 의외인데, 우나무노와 함께 20세기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러시아에도 가세트의 책들은 문고본으로까지 나와 있다) 철학자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평가되는 가세트이기에(이런 점을 표나게 강조한 이가 문학비평가 이동하였다), 내가 알기로 '민중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내세우는 역사비평사와는 뭔가 안 맞지 않은가란 생각 때문.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한겨레와 동아일보의 서평은 각기 다른 입지점에서 씌어졌다. 먼저, 한겨례: "당시 가세트가 목격한 것이 주로 파시즘의 군중 대열에 선 대중의 신념에 찬 얼굴이며 '유럽의 몰락'과 동시에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과 미국의 대량산업 사회의 군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지금은 자연현상이 된 대중사회가 서투른 '원시성'을 지닌 채 막 등장하던 시대에 성찰한 대중사회 초입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유익하다. 그래서 '평균'과 '편의'의 안위에 길든 현대인이 바로 가세트의 대중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동아일보: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당하는 '왕따 현상'과,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우선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겨레는 현대인과 대중간의 간격을 도입하면서, '우리 가세트의 대중은 되지 말자!'라는 자기반성을 유도한다는 데에서 책의 현재적 의의를 찾고 있고, 동아일보는 참여민주주의라고 에둘러서 표현한 현 참여정부('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같은 책에서 발견한다. 이런 제각각의 읽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반역'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반역>은 '고전'에 근접한다.  

 

 

 

 

네번째 책은 그러한 가세트의 대중들을 '당나귀들'로 호명하는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이룸)이다. 1995년에 첫 소설집을 냈으니까 올해는 작가가 데뷔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고, 그간에 열댓권 이상의 책을 냈으니까 제법 부지런한 작가군에 속한다. 한국 소설 읽기에 둔감은 내가 제대로 읽은 작품은 한 권도 없지만, 이런저런 풍문을 통해서 그녀의 향방에 대해서는 얼마간 가늠하고 있다. 병무청을 그만두고 독일에 둥지를 튼 것까지도(고고학을 배우러 떠난 시인 허수경이 아마 그녀의 말벗이 돼 주는지).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냥 좀 특이한 여자애' 소설쓰기에서 점차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대중 비판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재작년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걸로 기억되는(그리하여 소위 문단의 '주류'로 인정받게 되는) 작품 <일요일 스키야기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이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고(아직 '독자'가 아닌 나로선 확증할 수 없지만).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소설이란 '미학적 형식'은 그녀에게 이전만큼의 제어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어야 할 바로 그 적절한 순간에 굶주림의 시대에서 천박의 시대로 바로 월반해 버린 윌반해 버린 우리의 역사"(25쪽) 같은 대목에 대해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는 '울림 깊은 문장'이라고 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소설의 문장으로서 천박하다. 그런 문장들로 재단되고 구획될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나는 작가가 세상에 대한 혐오감(혹은 '복수심'이라도 무방하다)을 그런 서툰 방식(최재봉 기자는 소설의 3요소가 빠진 '독후감 소설'이라고 평했다)이 아니라 보다 본때나는 방식으로 형상화해주기를 바란다. 혐오도 경우에 따라선 '위대한 혐오'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배수아의 신작과 나란히 나온 소설집은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이다. 배수아와 마찬가지로 내가 별로 읽은바 없는 젊은 작가이지만, 나는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베낀다는 불만은 한켠에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불만은 교정되지 않게 돼버렸다. 짐작에 소설은 배수아의 그것보다 재미있을 것이며 더 많이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쓴 소설'들의 최상급은 김영하의 소설 정도이다(돈벌게 해주는 '포스트잇'을 쓰는 게 작가이다. 역사도 팔고, 사랑도 팔고, 때론 운명도 팔면서). 해서, 나로선 매끈한 김경욱보다는 천박한 배수아를 지지하겠다. 그가 아닌 그녀에게 베팅하겠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경욱의 인물은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9쪽)고 말하지만, 배수아는 어차피 장국영도 없는 세상에서 당나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증언한다. 내가 편드는 건 소설의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05. 06. 04.

P.S. 그밖에 마크 롤랜즈의 (미디어2.0)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SF 영화로 본 철학의 모든 것"이란 부제 때문에 이미 좀 팔려나가고 있는 책인데, 원제 "The Philosopher at the End of the Universe"(2003)대로 했다면, 다소 무겁게 여겨졌을 법한 책이다. 이른바 SF영화라는 당의정 속에 철학적 주제를 담아놓은 것이 될 텐데, 그런 것에 얼마간 식상한 나로선 별로 새로운 게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는 <동물의 역습>(달팽이, 2004)을 전작으로 갖고 있는 철학자이다. 해서 신간보다 오히려 눈길이 가는 것은 그의 구간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좌파출판사로 유명한 영국의 Verso Books의 Practical Ethics Series(실천윤리학 시리즈) 중 한 권"이고,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핵심적 주장은 "동물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Peter Singer가 1973년 발표한 <동물해방>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Mark Rowlands가 2002년 발표한 이 책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설득적이며, 더욱 읽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아마도 <동물해방>에 못지 않은 새로운 걸작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철학자 데리다가 말년에 숙고한 주제 또한 이 '동물(성)'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가볍고 묵직한 책들이 여러 권 더 선보일 것이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로 나는 (죽음 대신에) '노인/노년'과 (타자 대신에) '동물'을 꼽고 싶다. 물론 이때의 동물은 우리 안의 '동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동물(짐승)과 신 사이의 존재로 인간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동물에서 신으로!"란 구호를 내건 형이상학이 상승의 철학이라면, 하강의 철학으로서 탈형이상학의 관심은 "신에서 동물로!" 향한다. 아마 이 대목에서 형이상학에 고질적으로 고정된 인간의 지능/두뇌는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겠다. 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철학(궁리질)을 담당할 동물들이 나서야 하는지도. 누구? 들뢰즈의 진드기? 데리다의 고양이? 카프카의 물벼룩?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를 대신할 호모 사피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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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6-04 18:41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신간소식은..로쟈님을 통해 처음 듣네요.*^^ 감사..
정치인을 위한 변명,과 지식의 발견,대중의 반역..등도 관심이 갑니다.여러책 소식들,늘 감사하게 잘 보고 있어요.*^^ 추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물론.

로쟈 2005-06-04 18:48   좋아요 0 | URL
감사까지야... 그런데, 이번엔 파란여우님보다도 먼저 다녀가셨군요.^^

Phantomlady 2005-06-05 02:36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팬으로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전환점은 그 이전에 쓴 '동물원 킨트'와 '이바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첫사랑'으로 절정에 이른 뒤 좀 삐딱하게 변해버렸죠 아마 이 작가 특유의 반골기질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자신의 전환을 문학적으로 검증받은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어제 주문한 '당나귀들'을 받고 앞 페이지 몇 장이지만 읽고나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갈 때 까지 가려는 거 같습니다. 불안한 길이지만 팬으로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겠죠.

배수아는 자신 안에 '길들이지 않은 짐승'이 산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날짐승이 길이 들고나니 우리(밖)를 박차고 나가는 위험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안)을 향한 흉폭함만 남은 거 같아요. 전 아직도 그녀의 최고작은 '심야통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배수아가 김경욱보다 영악한 것은 문화적인 아이콘을 빌려오더라도 상당히 쿨한 걸 가져온다는 겁니다. 일례로 상당히 오래 전에 2pac을 말한 적이 있죠.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의 질문은 시효가 지난 촌스러운 뒷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아무도 너바나를 듣지 않거든요.

에고, 너무 길어져서 민망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ㅡ_ㅡ;;;

로쟈 2005-06-05 14:22   좋아요 0 | URL
보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alefire 2005-06-09 13:47   좋아요 0 | URL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러시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나왔다니 반갑네요. 국내에 번역된 에이젠슈테인 관련 문헌들은 모두 영어 아니면 일어의 중역들(특히 일어중역)이었죠. 에이젠슈테인이나 지가 베르토프와 같은 감독들, 그리고 말레비치나 메이어홀드와 같은 사람들의 문헌도(사실 국내에 아직 나오지도 않은) 러시아어 원전을 통한 번역본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모 소식통을 통해 지가 베르토프의 [KINO Eye:The Writings of Dziga Vertov]가 번역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책([KINO-Eye])은 Annette Michelson이라는 탁월한 영화학자가 감수하긴 했지만 영역본을 중역하기 때문에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앞의 짧은 선언문도 걱정이지만 뒤의 그 수많은 일기는 어쩌려고;;) 이런 사례로 알고 있는 가장 최근 경우는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주어캄프에서 독어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본 중역)이 있겠군요. 참, 그리고 보드웰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보드웰 특유의 꼼꼼한 쇼트분석은 마음에 들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Jacques Aumont의 [Montage Eisenstein](불어원본/영역본도 있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적 변천과 영화적 실천을 조감하는데 더욱 충실해 보입니다.

palefire 2005-06-09 13:49   좋아요 0 | URL
그리고, [SF철학]은 '정말로 눈길만 주고 말' 정도로 허접스러운 책입니다. '철학으로 영화보기'란 말이 오도되는 가장 전형적이고도 천박한 사례라는 혹평을 던질 수 있어요.

로쟈 2005-06-09 14:21   좋아요 0 | URL
'창백한 불꽃'(에서 따오신 게 맞다면)님의 전공이 확실히 드러나는 댓글이네요.^^ 지가 베르토프에 관한 문헌은 저로서도 러시아에서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번듯한 책이 나온 적이 있을지 좀 의심스런 경우입니다. 언젠가 참조한 적이 있는 영어 연구서가 그래도 제가 본 가장 훌륭한 책이었구요. 보드웰의 책은 제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지금 잘 알지 못합니다(책들이 숨어 있길 좋아해서). 그리고, 오몽의 책에 대한 소개는 다른 분에게서도 들었고 현재 주문중입니다. 보충하자면, 에이젠슈테인 전집은 이전에 한번 나왔었고, 요즘 나오고 있는 것은 '영화박물관'에서 새롭게 편집한 것으로 현재 네 권이 나와 있습니다(그새 더 나오지 않았다면)...